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 “싫습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섯 쌍의 눈, 열개의 눈동자가 어떤 의미의 빛도 뿜어내기도 전에 대답을 던진 을지호(乙支虎)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사타구니를 벅벅 긁어댔다. “이놈이! 어디서 그런 태도를 보이느냐!!” “아아, 그만두어라. 저런 모습이 어디 하루 이틀이더냐.” 도끼눈을 치켜뜨며 발작적으로 소리를 치려하는 을지휘소(乙支煇笑) 를 제지한 을지소문(乙支蘇文)이 물었다. “어쨌든 말이나 들어보자꾸나. 싫다는 이유가 무엇이냐?” 을지호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가족들의 시선을 힐끗거리며 대꾸했다. “저도 귀가 있는 놈입니다. 할아버님이나 아버님께서 어떤 연유로 중원에 다녀오셨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설마 제가 그런 거짓 말에 속아 넘어갈 것이란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거짓이 아니라면?” 을지소문이 치미는 노화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조용히 되물었다.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비록 본의 아니게 몇 번 사고를 쳤다지만 제가 누굽니까? 그래도 장차 을지가를 이끌 장손(長孫)입니다. 장손을 이리 박대하는 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한식경이 지났습니다. 그렇게도 못마땅하십니까? 거짓말까지 하시면 서 쫓아내려고 하시다니요!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전 안갑니다. 사서 고생하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이놈!” 을지호가 자신의 엄지손톱을 들이밀며 시큰둥하게 대꾸하려는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한 을지휘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구나. 본의 아닌 사고?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네놈이 저지른 사고치고 본의 아닌 게 뭐란 말이더냐? 의원 행세를 한답시고 환자들을 초죽음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멀쩡한 사람들까지 병신으로 만들 뻔 하지 않았더냐!” “아범이랑 뒷일을 수습하느라 고생깨나 했지.” 을지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혀를 찼다. “개똥만도 못한 잡풀을 가지고 천하제일 약초인 냥 팔아먹어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사냥꾼이 된답시고 장백산의 산짐승의 씨를 말릴 뻔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라더냐. 장사를 해본답시고 집에 있는 돈을 몽땅 사기 꾼 입에 처넣어 집안의 대들보를 휘청이게 한 것이 바로 두해 전이다.”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의적(義賊)질을 한다고 부산을 떤 것이 작년 이었지 아마?” “또한…….” 을지휘소와 을지소문 두 부자가 주고받으며 지적한 을지호의 과실은 두 손으로도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을지호는 남의 이야기라도 듣는 듯 연신 하품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바로 어젯밤, 네 고모에게서 전갈이 왔다. 군인이 된다기에 이제사 정신을 차렸는가 했더니만 마음에 안 든다고 상관을 두들겨 패고 도망을 와? 그리고 뭐가 어째? 국경이 편안해져 더 이상 군대가 필요 없어서 돌아와? 에라이 이놈아! 어디서 감히 그따위 뻔뻔한 거짓말을 한단 말이더냐!!”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보고 놀라는 가족들에게 둘러댄 거짓 말이 들통이 났음에도 을지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되려 당당 하게 대꾸했다. “맞을 짓을 했기에 조금 두들겨 줬을 뿐입니다.” “이……!” 을지휘소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바로 그때 방 한 켠에 얌전히 앉아 있던 육금연(陸錦姸)이 벌떡 몸 을 일으키려던 을지휘소의 소매를 슬며시 붙잡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쨌든 고모부가 그 일을 무마하시느라 땀 깨나 흘리신 모양이더라. 나중에 찾아뵙고 사죄드리도록 해라.” 뭐라 대꾸를 하려던 을지호는 차분히 바라보는 육금연의 시선에 입 을 다물고 말았다. “사죄드린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머니의 당부마저 한귀로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을지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 었다. “예. 그렇게 까지 말씀하신다면… 까짓 그러지요.” “사죄를 하면 하는 것이지 까짓은 왜 들어가는 것이냐?” 을지호의 대답에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을지휘소는 다소 누그러진 음 성으로 말을 이었다. “흠, 네 녀석이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바람에 말이 빗나갔구나. 어쨌 든 너는 나나 할아버님께서 너를 단순히 고생시키려 중원으로 보내 려고 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데…….”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지요.” 재빨리 끼어든 을지호가 또다시 말을 끊었다. “이놈이 그래도! 그래, 좋다. 어디 또 한번 주둥이를 놀려 보거라.” 어찌 될 것이라는 것은 뒤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 이 상 말대답을 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을지호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을지휘소는 그런 을지호를 지그시 노려보며 끊겼던 말을 이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할아버님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에는 조금의 거짓 도 없다. 물론 네 말대로 고생스런 일일 것이다. 많이 힘들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하나 어쩌겠느냐? 할아버님의 처가(妻家)요 아비인 나의 외가(外家)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할머님의 가문이라는 것이 다. 가문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님의 심정이 어떠시겠느냐? 벌써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시고 근심걱정에 잠을 주 무시지 못하셨다. 그뿐이더냐…….” 하나 을지호는 엄숙한 음성으로 설명을 하는 을지휘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슬며시 고개를 숙인 을지호는 가장 만만한 동생 을지룡(乙支龍)에게 전음을 날리고 있었다. [정말이냐?] 동생이라 하지만 나이차이가 제법 나서인지 아니면 을지호의 강압에 의해서인지 을지룡은 을지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니, 믿도록 세뇌되어 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을지룡의 고개가 돌려졌다. 을지호의 팔꿈 치가 을지룡의 옆구리를 슬그머니 찔러왔다. [너는 이 형님이 경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냐? 입으로 나불대지 말고 전음으로 얘기해.] 을지룡이 알아들었다는 듯 살짝 고개를 까딱거렸다. [좋아. 아버지 말씀이 참말이냐?] 을지호가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물었다. [예.] ‘우라질.’ 을지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자세하게 읊어봐라.] [할아버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조금의 가감도 없습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수십 년이 지나도록 찾지 않으시다가 난데 없이 가문은 뭐고 또 존폐는 뭐냐고!] [나이가 드신계지요. 근자에 작은 할머님께서 고향생각을 많이 하셨 습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헛소리는 하지 말고! 흠, 그랬구나. 어쨌든 그래서?] [해서 아버님이 중원을 오가는 상단에 남궁세가의 근황이 어떤지 알 아봐 달라는 부탁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에 붙어있는 날이 가뭄에 콩 나듯 했으니 그런 사정을 알리 없었 다. 하지만 을지룡의 말이 이어질수록 을지호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열흘 전에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져왔습니다. 남궁세가가 이 미 오래전에 몰락한 것은 물론이고 최근엔 그 존립마저 위태로운 지 경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젠장, 그만해라. 충분히 알아들었다.] 을지호는 신경질 적으로 을지룡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설명을 듣 지 않아도 일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났군.’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린 을지호는 숙였던 고개를 살짝 치켜들어 아 랫목에 단정히 앉아 있는 노부인을 쳐다보았다. 남궁혜(南宮慧). 패천궁과의 싸움에서 잿더미로 변해버린 가문을 뒤로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쫓아 장백산으로 온지 벌써 오십년이 다 되어갔다. 월궁항아(月宮姮娥)마저 울고 갈 정도로 뛰어났던 미색(美色)은 시간 의 힘을 이기지 못했지만 단정히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선 온화하고도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월은 단 지 그녀의 젊음만을 거둬들인 것이 아니라 완숙한 기품이라는 또 다 른 아름다음을 준 듯 했다. 하지만 지금, 수심에 잠긴 남궁혜의 얼굴에 자리 잡은 것은 슬픔과 회한(悔恨)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많이 수척해 지셨군.’ 을지호의 입에서 나지막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는 사이 진중하게 이어지던 을지휘소의 설명이 끝이 났다. “…하여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니 잔말 말고 따르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 을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가족의 눈치를 살폈다. 을지소문과 을지휘소는 두 눈을 부라리며 을지호의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고 남궁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젠장.’ 을지호는 창백한 낯빛의 할머니 모습에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구원의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육금연은 아들의 애원스런 눈길을 피했다. 아니 피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외면을 해버렸다. ‘어머니 마저…….’ 육금연이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을지호의 안색이 참담하게 변색되었다. 되도 않을 배신감을 느끼는 을지호의 시선이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 보는 을지룡에게 머물렀다. ‘흠,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내편이 되어줄 사람은 이 녀석 밖에 없다는 소린데… 큭! 기댈 곳이 없어서…….’ 을지호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바로 그때, 닫혔던 방문이 활짝 열리며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이구! 사고뭉치 우리 장손 왔구나.”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족이 모 두 모인 자리에서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박살 낼 정도로 세차게 밀치는 사람은 오직 큰 할머니뿐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디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꾸나.” 나이에 걸맞지 않는 동작으로 을지호의 곁으로 다가온 환야(幻倻)는 을지호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볼을 잡아 쭉 늘어뜨렸다. “기특한 녀석. 그렇지 않아도 아범이 사람을 보낸다고 하더니만 찾 지 않아도 알아서 제 발로 나타났구나.” “아으. 아으.” 을지호는 하염없이 늘어나는 양 볼과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을 놀리고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환야는 고통스럽게 쳐다보는 을지호의 반응에 잡았던 손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귀여워 죽겠다는 듯 이리저리 흔들기까지 했다. “이뿐 내 새끼. 표정을 보아하니 도살장에 끌려온, 무슨 수를 쓰더라 도 빠져나가려고 눈알을 굴리는 돼지 같구나. 호호,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우거지상은 하지 말아야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면서… 에그 , 귀여운 녀석.” 한참 만에 손을 거두고 알밤을 먹이는 것으로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손자를 환대한 환야가 남궁혜의 곁으로 움직였다. “꼭 제가 가야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을지호는 빨갛게 부풀어 오른 볼을 비비며 불만 섞인 음성으로 되물 었다. 손자의 투정에 환야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따져보자꾸나. 연로(年老)한 네 할아버지나 할 머니들이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한 아범은 가장(家長)이 아니더냐. 가장이 집을 비워서야 말이 안 되지.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누굴까? 욘석아, 잔머리 굴려봐야 소용없어.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용 을 써도 이미 결정 난 일이야.” ‘연로요? 누가요? 할아버지가요, 아니면 할머니가요!!!’ 가능만 하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듣도록 외치고 싶은 말이었지 만 뒷감당을 자신할 수 없었기에 을지호의 외침은 그만이 들을 수 있는 공허한 절규일 뿐이었다. ‘꼼짝 없이 따르게 생겼구나.’ 자신은 혼자고 상대는 가족 전체였다. 아무리 돌이켜 보려고 해도 대세는 기울어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을지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당연하지요. 할아버님이나 두 분 할머니께서야 어디 연.로.하셔서 움직이실 수나 있겠습니까? 아버지 또한 가.장.이시군요. 그렇다 면…….” 을지호는 눈 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신을 주목하는 가족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 을지룡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 녀석은 어떻습니까? 저보다 생각도 깊고 차분하고 무공도 그만 하면 쓸만하지 않습니까?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데다가 허구한 날 말 썽만 피워대는 저보다야 인석이 백번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을지호는 깜짝 놀라 몸을 빼내려는 을지룡을 억지로 옭아매며 빠르 게 말을 이어갔다. “또한 이참에 돈 주고도 얻지 못할 소중한 경험도 시키는 겁니다. 험한 세상을 겪어봐야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 지요. 어차피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저야…….” “이~놈!!” “어이쿠!” 말을 하면서도 가족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던 을지호는 자신을 향 해 섬전처럼 쏘아오는 곰방대에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간발의 차 이로 머리를 스쳐 지나간 곰방대는 단숨에 벽을 뚫고 깊숙이 박혀 버렸다. 을지호는 두 번째 공격을 대비하였지만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제 잘난 맛에 마구 날뛰는 네놈보다야 룡아가 백배 천배는 믿음이 간다. 마음 같아선 너보다는 당연히 네 아우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 만 이제 겨우 열여섯이다. 열여섯! 어린 나이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 냐? 물론 네 녀석이야 돌아가시기 전에 노망이 드신 두 분 때문에 열다섯의 나이에 그 많은 오랑캐를 쓸어버렸는지는 몰라도… 윽.”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호성(怒號聲)을 뱉어내던 을지소문은 허벅지에 서 전신으로 퍼지는 고통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환야가 나이 값도 못하냐는 듯 노려보자 찌푸려진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것은 허벅지를 꼬집힌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씁쓸하게 웃 는 을지호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을지소문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절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했다 는 것을 자책했다. 그것이 비록 을지호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 의한 것일지라도. 잠깐의 어색함이 흘러갔다. “쯧쯧, 어째 예나 지금이나 하는 행동이 똑 같누. 도대체 언제나 철 이 들런지…어쨌든 호아야.” 가늘게 실눈을 뜨고 연신 헛기침을 하고 있는 을지소문에게 다시 한 번 핀잔을 던진 환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을지호를 불렀다. “예.” 어느새 안색을 회복한 을지호가 대답했다. “내키지 않겠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가야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네 가 더 잘 알지 않느냐? 그냥 편한 마음으로 따르도록 하여라.” 사실이었다. 한참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피 하고 싶었지만 동생으로부터 할아버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심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휴우우~~.” 을지호는 대답대신 구들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각오는 했어 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 “급하게 적어 보았다.” 을지호가 무언의 침묵과 한숨으로 중원행을 허락한 직후 남궁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에게 두 권의 책자를 내어놓았다. “하나는 세가의 근간(根幹)이 되는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이 고 다른 하나는 너의 외고조부 되시는 분의 심득(心得)이 담긴 것 이다.” 을지호가 힐끗 시선을 던져 쳐다보니 거무튀튀한 책의 겉 표면에는 ‘제왕검법(帝王劍法)’ 이라 적혀 있었다. “두 개 뿐입니까? 할머님이 직접 만드신 무공도 있잖아요?” 퉁명스런 을지호의 물음에 남궁혜는 엷은 미소로써 답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그것은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구결(口訣)만 알고 있으면 뭐합니까. 익히지도 않았는데…….” 슬그머니 책자를 집어 드는 을지호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후~ 그나저나 제가 어찌 하면 됩니까?” 건성으로 책장을 넘겨보던 을지호가 책을 덮고 물었다. 앞 뒤 말을 자른 뜬금없는 질문에 을지소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뭘 말이냐?” “어디까지 해야 하느냔 말입니다. 그저 무공만 전해주면 되는 것입 니까, 아니면 무공을 익히는 것까지 봐야 합니까? 설마 다 무너진 세 가를 과거와 같이 만들라는 말씀은…….” 을지호의 말은 단박에 끊기고 말았다. “이런 고연 놈을 보았나! 그럼 딸랑 무공비급 하나 던져주고 올 생 각이었느냐? 그럴 생각이었으면 뭣 하러 너를 보내겠느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한 너를! 그냥 오고가는 상단이나 인편을 통해 비급 만 전해주면 되는 것이지.” 을지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 만 쩌억 벌리고 말았다. 나오느니 그저 한숨뿐이었다. 하지만 남궁혜는 을지소문과 생각이 조금 다른 듯 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네게 준 무공비급을 전하고… 그래, 어느 정 도 힘을 기를 때까지만 보살펴주면 되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부인!” “가문이라는 것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일으켜 야 하지요. 그래도 안 된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고요.” 을지소문의 말을 자르는 남궁혜의 어조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진지했다. “후우.” 을지소문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야와는 달리 언제나 한발 뒤로 물러나 따르던 남궁혜였지만 저렇듯 눈을 반짝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을 때엔 천지가 뒤집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럼 모든 것을 이 녀석의 판단에 맡기도록 합시다.” 을지소문은 남궁혜가 미처 반박을 하기 전에 단호한 어조로 명을 내 렸다. “단순히 무공만을 전해주고 올 것인지 아니면 세가를 일으킬 안정적 인 기반까지 닦아 줄지는 네가 알아서 판단하거라. 어찌 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너의 결심에 달린 것이다. 나는 관연하지 않겠다.” “예.” 을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되었다. 네게 모든 것을 맡겼고 또 알아서 판단한다고 했으니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겠다. 어쨌든 잘 판단하리라 믿는다.” 말을 마친 을지소문이 비스듬히 몸을 누였다. 을지호는 굳게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단순히 무공만을 전하 지는 말라는, 그리고 그럴 생각이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찌 합니까?” 을지소문의 의지를 보다 확실히 인식한 을지호의 힘없는 질문이 이 어졌다. 다만 이번 질문의 대상은 을지소문이 아니라 환야였다. “뭐가 말이냐?” 환야는 풀이 죽은 을지호가 귀엽기만 한지 음성엔 웃음이 절로 묻어 났다. “할아버지께서 장강 이남이 패천궁(覇天宮)의 영역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가를 일으켜 세우자면 자연히 패천궁하고 부딪치겠고…….” 잠시 말을 멈춘 을지호가 환야의 눈치를 살폈다. “부숴도 되는 겁니까?” 환야가 기도 안 찬다 듯 이마를 짚었다. “부순다라… 호호호! 인석아, 너는 그곳이 마치 산적나부랭이들 몇몇 이 모여 만든 것인지 아는구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거라.” “까짓, 못할 것도 없지요. 하나 할머님을 봐서 가능하면 피해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물론 귀찮게 한다면야…….” “귀찮게 하면?” 환야가 재빨리 되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후~ 피는 보고 싶지 않은데… 어찌 변할지는 저 도 장담을 못해서…….” 을지호의 탄식에 환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호랑이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호랑이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지. 어차피 그래봤자 먹이감에 불 과하니까.” 환야의 시선이 잠깐 동안 남궁혜에게 머물렀다. “어차피 큰 충돌은 없을 게야. 내가 알고 있는 패천궁은 그렇게 옹 졸한 곳이 아니고 힘만 앞세워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그런 곳도 아 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요.” “욘석아, 까불지 말고 이거나 받거라.” 핀잔과 더불어 환야가 검 한 자루를 던졌다. 환야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날아오른 검은 고작 반장 정도의 짧은 비행을 마치고 을지호의 눈앞에서 급제동을 하더니 깃털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천천히 하강을 했다. “언니!” “부인!” 남궁혜와 을지소문이 을지호의 손에 안착하는 검과 검을 던진 환야 를 번갈아 쳐다보며 소리쳤다. “쯧쯧, 뭘 그리들 놀래누. 어차피 내겐 쓸모도 없는 물건인데.”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환야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웃었다. 하지만 둘의 표정엔 놀람과 경악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환야의 말과는 달리 그 검은 절대로 쓸모없는, 그저 그런 물건이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성정 괄괄한 노파로 변하여 가족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 지만 과거 환야의 신분이 어떠했던가. 패천궁의 궁주이자 불패(不敗)의 신화를 자랑했던 소림사(少林寺)의 전설을 깨뜨리고 백도를 굴복시킨 절대자(絶對者)요, 비록 사흘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무림(武林)의 진정한 패자(覇者)였다. 그리고 애병 (愛兵) 풍혼(風魂)은 다름 아닌 그녀의 상징이었다. 그런 검을 을지호 에게 건넨 것이었으니 을지소문과 남궁혜가 그토록 경악을 하는 것 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나 진정 그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일 은 따로 있었다. “이런 건 필요 없습니다. 들고 다니는데 귀찮기나 하지.” 건성으로 검을 빼본 을지호가 도로 검을 내어놓는 것이 아닌가! 아무런 장식도 무늬도 없이 색이 바랜 검집과는 달리 살짝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방안의 공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검의 예리함과 검배(劍背)에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는 ‘風魂’ 이라는 글자도 을지호에 겐 조금의 흥미를 주지 못한 듯 했다. “이… 이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검을 물리는 을지호의 행동에 벌떡 몸을 일으킨 을지소문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남궁혜 마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잔말 말고 들고 가거라. 이건 할미의 명이니라.” 환야가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을지호에 말했다.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가…….” “어서.” 과거 위세를 떨쳤던 남궁세가 몰락하여 가문의 존폐마저 위태로운 상황까지 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패천궁과의 싸움 때문 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세가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을 남궁진(南宮 眞)을 단순히 질투심 때문에 병신을 만들어 버린 과오도 있었다. 물론 그 당시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는 것이었지 만 사감(私憾)이 들어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을지소문 은 물론이고 남궁혜 또한 지금껏 애써 피하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환야는 남궁혜를 볼 때마다 늘상 그때의 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런 죄책감,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지우고픈 마음 때문에 환야는 패천궁은 물론이고 어쩌면 무림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풍 혼을 내어줬다. 헌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길 없는 을지호가 그것을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을지호의 모든 행동을 용인하던 환야도 이때만은 안색을 굳히고 있 었다. “할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환야의 변화를 재빨리 감지한 을지호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검을 끌 어왔다. 그제야 환야의 굳은 표정이 풀렸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인석아, 행여나 귀찮다거나 혹은 돈이 떨어졌다 고 노자로 바꾸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보기와는 달리 꽤 귀한 검 이야. 너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을지호 역시 풍혼이 얼마나 귀한 검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검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또한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바램대로 남궁세가를 재 건하는데 무척이나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간도 훨 씬 단축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검의 힘에, 아니 단순히 검 이 아니라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명성과 힘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 않으면 모를까 기왕 할 것이면 스스로 해야 했다 . 물론 중원행이 결정된 지금도 가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는 것이 문제였지만. “기왕 들고 가는 것, 그런 짓은 안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겐 어떤지 몰라도 제게 그저 한 자루 검일 뿐입니다.” 을지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풍혼을 툭툭 건드렸다. “호호호, 아무렴 네가 누구의 손자인데.” 을지호의 대답에 환야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녀에겐 다른 것은 몰라도 을지호가 풍혼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남궁세가와 남궁혜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쩌면 그로 인해 패천궁이 을지호에게 시 달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언제 떠날 것이냐?” 을지휘소가 남궁세가의 후손에게 전해질 무공과 풍혼이 을지호에게 건네지자마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마음이 내킬 때 떠날 겁니다.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닷새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뭐, 당장 오늘 밤에 사라질 수도 있고 말이지요.” “무슨 소리를!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에미가 해주는 음식은 먹고 가 야지.” 환야가 다소 근심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는 육금연을 바라보며 말했 다. 육금연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사흘은 넘기지 말거라. 행여나… 아니다. 곧 먼 길을 떠나야 할 터 가서 쉬도록 하여라.” 을지호의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말꼬리를 돌린 을 지소문의 말을 끝으로 물경 한시진에 걸친 가족회의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부릅뜬 눈으로 목표를 확인한 을지룡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무려 석 달 동안 자신을 괴롭힌 과제를 정복하기 까지 이제 겨우 일장이 남았을 뿐이었다. 을지룡이 무공을 수련하는 곳은 집 앞을 흐르는 냇가의 상류였다. 원래는 구룡천(九龍川)이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십여 년 전, 이곳에서 무공 수련을 하던 을지호가 이 를 갈면서 붙인 인내천(忍耐川)이란 이름이 이제는 더욱 친숙하게 변 해 버린 곳. 을지룡은 그곳에서 벌써 석 달째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을 지호가 어째서 인내천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지를 몸으로 느끼면서. ‘앞으로 반 시진, 반 시진만 지나면 끝이다.’ 머리와 양쪽 어깨, 좌우로 벌린 손에 올려진 돌멩이가 시간이 지날 수록 짓누르는 힘을 더하고 때마침 불어난 냇물이 매서운 힘으로 다 리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이미 충분히 단련된 을지룡은 비교적 여유 있 게 버텨내었다. “어허,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래서야 성공한다 해도 얻는 것이 없지 않느냐. 잡생각 따위를 하느라 기력을 허비해서야 되겠느냐? 힘을 내거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느니.” 냇가 한 켠에 자리를 깔고 술을 홀짝이던 을지소문이 미세하게 변하 는 을지룡의 감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을지룡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부끄러워 하며 얼른 대 답을 하였다. 그 바람에 몸이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덩달아 몸에 놓인 돌멩이가 흔들렸다. 자칫 잘못하여 돌멩이를 떨어뜨린다면 불호령은 물론이거니와 그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었다. 을지룡은 필사적으로 몸의 중심을 잡고자 하였다. 하나 한번 흔들린 중심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 위에 놓인 돌인 세차게 요동 쳤다. ‘이런!’ 정수리에 놓여야할 돌이 스르륵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을지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지금 서있는 곳까지 도착하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릴 것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지난 며칠간의 고생은 물론이고 석 달의 시간마저 저 멀리 날아갈 것을 생각하니 참담함하기만 했다. 바로 그 순간 을지룡에게 구원의 손길이 전해져 왔다. “쯧쯧, 정신을 차려야지.” “혀…형님.” 떨어지려는 돌을 제 위치에 돌려주고 흔들리는 몸까지 바로 잡아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을지호였다. “뭘 그리 놀라냐?”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상투를 트는 대신 흰 천으로 아무렇게나 질끈 동여매고 등에는 제법 두툼한 봇짐을 매고 있던 을지호는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을지룡의 이마를 살짝 튕기며 웃었다. 육금연 이 장도(壯途)에 오르는 그를 위해 이틀 밤을 꼬박 세워가며 정성스 럽게 손질한 백삼(白衫)자락과 가죽신이 흠뻑 젖었지만 별로 상관없 다는 태도였다. “떠나려는 것이냐?” 이미 한참 전부터 을지호가 나타난 것을 알고 있던 을지소문이 담담 하게 물었다. “예.” 물에 젖어 다소 불편한지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뭍으로 나온 을 지호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기왕 가기로 한 것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것이 좋을 듯 하여…….” “잘 생각했다. 그래, 두 분 어르신들께 인사는 드렸고?” “지금 막 다녀오는 길입니다.” “할머님들은 보았느냐?” “예.” “애비와 에미도?” “예.” “흠, 그런데 어째서 배웅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을지소문이 을지호의 뒤를 살피며 물었다. “제가 싫다고 했습니다.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요.” “잘했구나.” 이해가 갈만 했다. 모르긴 몰라도 마음 약한 며느리는 눈물깨나 쏟 고 있을 것이다. “소손 다녀오겠습니다. 강녕(康寧)하십시오.” 을지호가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했다. 바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을지소문이 자세를 바로 하고 절을 받았다. 그리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을지호의 어깨와 등을 두드렸다. “오냐,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잘 다녀오너라. 그 옛날 이 할애비도 다 녀왔고 네 애비도 다녀온 길이니라. 고생이야 조금 하겠지만 네가 지닌 능력이라면 모든 것을 잘 해내리라 믿는다.”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을지호가 몸을 돌렸다. 뭔가가 생각 난 듯 을지소문이 을지호를 불러 세웠다. “외가에 먼저 들른다고 하였더냐?” “예. 외조부님을 뵌 지도 오래되었고 육로(陸路)로 가는 것 보다는 그곳에서 해로(海路)와 수로(水路)로 움직이는 것이 더 편할 듯 하여…….” “잘 생각했다. 초행길에 여러 모로 도움도 될 터, 또한 지난번에 다 녀가신 네 외조부께서 너를 만나지 못해 몹시 서운해 하시더구나.”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가거든 잊지 말고 안부 여쭈어라.” “알겠습니다.” “되었다. 이제 떠나거라.” 지그시 눈을 감은 을지소문은 손을 두어 번 내젓는 것으로 작별인사 를 대신했다. 을지호가 그런 을지소문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하더니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에겐 인사를 나눌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을지호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여전히 힘들게 발걸음을 떼고 있는 을지룡에게 다가갔다. “출행랑(出行狼)… 힘들어 보인다.” “아, 아닙니다.” 을지룡이 재빨리 대답했다. “하긴, 힘들어도 어쩔 수 없지.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무공이 아니더 냐. 나는 너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뼈를 깎았다.” “알고 있습니다.” 을지룡은 혹여나 돌멩이가 떨어질까 조심조심 대답했다. “내가 없는 동안 집안의 장손은 너다. 부탁한다.” “예. 형님.” 을지룡은 최대한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그리곤 재차 말을 이었다. “형님처럼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 겠습니다.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을지룡의 음성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눈물까지 흘렸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데 그런 을지룡을 보는 을지호의 입가엔 장난 스로런 미소만이 맴돌았다. “하하, 임마. 입에 발린 말은 그만둬. 내가 집에 붙어 있던 적이 얼 마나 있다고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해.” “그, 그게 아니라…….” “관둬라. 어쨌든 걱정해 주니 고맙구나. 그런 의미로 내게 선물하나 를 주고 가지.” 당황하는 을지룡을 모른 체 하며 을지호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더니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낮은, 그러나 장백산 끝자락까지 울려 퍼질 정도로 긴 여운을 남긴 휘파람이 끝나자 산 정상에서 하나의 점 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모래알처럼 작기만 하던 점은 순식간에 커지더니 하나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물체를 확인한 을지룡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그리곤 어 떻게든 자신에게 닥치는 위기를 면해보고자 했다. 하나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방법이 있다 해도 도저히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무서운 속도로 날아와 머리 위의 돌멩이를 채버리는 그 움직임을 막 을 자신은 없었다. “후~.” 어차피 을지호에 의해 위기를 벗어났을 때부터 예상했던 바가 아니 었던가. 체념은 빨랐다. 을지룡의 손이며 어깨에 있던 돌멩이가 떨어져 내렸다. 돌멩이들이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머리에 올려져 있던 돌멩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풍덩. 돌멩이들이 물속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는 을지룡의 입가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며칠간의 고생이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었다. “하하, 너무 서운해 하지 말거라. 그것이 출행랑의 전부가 아니지 않 더냐. 앞으로 더욱더 끔찍하고 힘든 수련이 기다리고 있는 터, 이 형 님은 사랑스런 아우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늦추고자 한 것이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을지룡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하하, 인상 좀 펴라. 그래, 아무튼 다녀오마. 그 동안 잘 지내라.” 심통 난 얼굴의 을지룡을 보며 기분 좋게 웃은 을지호의 손가락이 다시 입으로 향했다. 예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을지룡의 머리 위의 돌멩이를 채간 물체가 허공에 나타났다. “인석아. 늦장 부리지 말고 빨리 따라 와.” 어느새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을지호가 그의 뒤로 따라붙는 매, 철 왕(鐵王)에게 외쳤다. 주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더욱 속도를 낸 철왕은 순식간에 을지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안착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 허공에서 울리는 을지호의 음성은 이미 그 끝이 들리지 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을지호의 뒷모습을 살피던 을지룡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지금은 자신에게 닥친 일의 해결이 급했다. 을지룡의 시선을 느끼며 눈을 뜬 을지소문은 을지룡의 표정에서 억 울함을 호소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하나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 그 역시 언젠가 조부로부터 들었던 말뿐이었다. “도로아미타불.”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 배를 움직이기엔 최상의 날씨였다. 하늘엔 구름한점 없었고 적당히 불어주는 순풍에 돛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지난 사흘간 미친 듯이 요동치던 물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하기만 했다. 이리저리 갑판을 오고가며 부산을 떠는 선장과 선원들의 움직임엔 활기가 넘쳤다. 며칠 동안의 기상악화로 마음을 졸이며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시간은 금(金)과 같다.’ 라는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는 상 인(商人)들, ‘약속한 기일은 목숨을 걸고 지킨다.’ 라는 신념을 국훈( 局訓) 삼아 지금껏 단 한번의 기한도 어긴 적이 없는 것을 늘 자랑으 로 여기는 산동표국(山東標局)의 식솔들 또한 적지 안이 안도하는 모습들이었다. 수심에 잠겼던 그들의 표정이 바뀐 데에는 가슴 깊은 속에 쌓여있는 찌꺼기까지 단박에 날려버릴 만큼 상쾌한 날씨 탓도 있지만 시간을 맞추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정도는 더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장 의 한마디가 실로 컸다. 그러나 단 한사람, 길이만 이십 여장에 이르고 폭도 칠장이 넘는, 산 동지방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상선( 商船) 풍운(風雲)의 갑판 후미에 걸터앉아 난간을 부여잡고 멍청히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을지호만은 예외였다. “쯧쯧, 젊은 사람이 저토록 몸이 허해서야…….” 바다에서 태어난 나이 육십이 되도록 뱃일로 잔뼈가 굵은 노(老) 선 원(船員)이 을지호의 모습을 연신 흘낏거리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닌게 아니라 혼이 빠져 있는 듯 홀로 떨어져 있는 을지호의 모습 이 어딘가 이상했다. 지나가다가도 다시 쳐다보게 만드는 육중한 덩 치는 장백산을 떠나올 때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흐릿하고 퀭하게 파인 두 눈, 푸석푸석 변해 버린 피부, 가죽만 남은 얼굴 등 예전의 건강 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족히 몇 년 동안 중병을 앓고 있는 사 람처럼 볼품없이 변한 것이었다. “하하, 형님도 참. 뭍에 살던 사람들이야 어디 우리 같겠소? 다 그런 것이지.” 혀를 찼던 노 선원과 거의 같은 연배의 선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유별나도 너무 유별나니 그렇지 않은가.” “하긴, 그렇긴 하외다. 심하기 심하지요. 하하하.” 두 노 선원은 서로를 마주보며 한참이나 웃음을 지었다. ‘저 영감탱이들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소리를 죽여 웃는다고 노력은 하였지만 수 십 장 밖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감별해 내는 을지호였다. 더구나 자신을 비웃는 소리가 아닌가. 그들의 낮음 웃음소리는 을지호의 귀 엔 천둥치는 소리보다 더욱 요란하게 들렸다. 을지호의 고개가 천천히 그들에게 향했다. 황급히 웃음기를 지운 선 원들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을지호에게 주었던 시선을 거두고 자신들의 일에 몰두했다. ‘후~ 미치겠네. 정말!!’ 적당히 나이만 먹었어도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을지호는 노인들을 상 대로 드잡이 할 마음은 없었다. 하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뭐라 할 말이 있겠는가. 을지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멍한 눈으로 꼬리를 물고 길게 퍼져 나가는 물보라만을 쳐다봤다. 그리곤 몇 년이 지난 것처럼 멀게만 느 껴지는 지난 며칠의 일들을 떠올렸다. 장백산을 떠난 을지호의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남궁세가가 되겠지만 우선적으로 들려야 할 곳은 어머니 육금연의 고향이자 그의 외가가 있는 해남도(海南島)였다. 한데 광활한 대륙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까지 가기 위해선 배 이외에 다른 수단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집을 나서기 무섭게 곧바로 국경을 넘은 을지호는 요동반도(遼東半 島)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멀어도 너무 멀었다. 여객선(旅 客船)은 물론이고 상선조차 해남도로 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 도 세 네 번은 갈아타야 했다. 외가고 뭐고 당장 방향을 바꿔 육로로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에 을 지호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렇지만 외가에 들리라고 신신당부하던 어 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을지호는 결국 반도의 끝 금주(金州)에서 배에 올랐다. 수난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을지호는 배를 타본 적이 없었다. 아니, 강을 오르내리는 조그마한 배들은 타본 경험이 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배를 타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강을 오르내리는 배와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천지 차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규모나 모양은 둘째 치고 우선 배에 전해 오는 흔들림이 달랐다. 급 격히 흔들린다거나 목숨을 걱정할 정도의 위험이 도사리는 것은 아 니었지만 은근히 신경을 긁으며 몸의 균형을 빼앗고 속을 뒤집는 무 언가가 있었다. 항해를 한지 고작 한 시진 만에 을지호는 그날 먹은 음식을 모조리 바닷물에 쏟아내었다. 그가 간신히 몸을 추슬렀을 땐 정확히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고 배는 이미 산동의 등주(登州)에 도착한 이후였다. 그러나 등주에서도 해남 도로 바로 가는 배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도 맞아본 사람이 맞는다고 했던가. 한번의 경험으로 배 멀미에 웬만큼 자신이 붙은 을지호는 잠깐의 휴식을 취하곤 곧바로 두 번째 배편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등주에서 항주(杭州)까지 운행하는 배를 찾을 수 있었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배에 오르던 을지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산동 제일의 상선이라기에 어느 정도 기대를 했었지만 포구(浦口)에 정박해 있는 배의 규모는 상상을 불허했다.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하나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더구나 출항을 했을 때의 그 조용한 움직임은 이전의 배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 정도의 배라면 아 무리 장시간을 여행한다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의 만족감이 깨진 것은 출항 후 이틀이 지난 후였다.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가 커지면서 을지호는 자신이 배의 규모를 너 무 과신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끝도 없이 드넓은 바다에 비하며 상선은 백사장의 모래알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힘겹게 전진하는 배 위에서 을지호는 또다시 뱃 속의 모든 음식물을 물고기들에게 적선했다. 그나마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을지호의 필사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선실을 벗어나기도 전에 갑판을 더럽혔을 것이다. 인간만큼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 동물이 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사 흘 밤낮을 꼬박 허비하면서 마침내 을지호의 몸은 또다시 주변의 환 경에 서서히 적응 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는데……. 끔찍할 만큼 지독했던 배 멀미를 극복한 을지호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음식이었다. 금주에서부터 배를 타고 배 멀미에 시달린 이후 제대로 된 음식은 등주의 객점(客店), 먼 옛날 신라인이 세우고 그 후손이 지금껏 운영 하여 조선에서 온 상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신라관(新羅館)에서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준비한 간단한 음식으로 평탄했던 처음 이틀 동안 허 기를 때운 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엔 제대로 된 음식은커녕 먹었던 음식마저 모조리 게워내고 말았다. 나중엔 위액도 말라버려 구토를 해도 나오는 것이 없을 지경 이었다. 그러니 뱃속이 오그라드는 고통을 참아내면서 멀미를 이겨낸 을지호가 가장 먼저 음식을 찾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할 일이었다. 그동안 을지호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배의 선원들은 환한 미 소를 지으며 최고의 음식을 준비해 주었다. 허기에 쫓겼던 을지호는 미처 감사의 사례를 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음식을 입에 쏟아 넣었다. 그러나 두어 번이나 씹었을까? 뭔가가 이 상했는지 을지호가 음식을 씹던 턱의 움직임이 딱 멈추고 고개를 갸 웃거렸다. 딱 한번의 호흡을 했다. 숨을 내쉬고 들여 마시는 순간 을지호의 얼 굴이 똥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을지호가 괴성을 지르며 배의 후미로 뛰어 갔다. 갑판의 난간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구역질을 시작했다. 배 멀미를 할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눈이 뒤집히고 뱃속으로 들어간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음식에 닿은 장기(臟器)마저 모조리 끄 집어 낼 정도로 격렬한 구토였다. 구토는 한시진이나 이어졌다. 그 이후 을지호는 선원들이 준비하는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걱 정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을지호가 지닌 음식이라고 해봐야 고작 먹다 남 은 육포(肉脯) 한 조각뿐이었다. “후~ 앞으로 이틀이라고 했던가.” 잠시 상념에 빠졌던 을지호의 입에서 힘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항 주까지는 앞으로 이틀. 이틀이란 시간이 이처럼 길게 느껴질 줄은 꿈에 몰랐다. “우라질!! 분명 아셨어. 그때의 눈빛, 그리고 어머니의 말문을 막고 웃었던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니까.” 예상외로 지독하긴 했지만 을지호는 배 멀미에 대해선 충분히 각오 하고 있었다. 과거 그의 할아버지인 을지소문이 그랬고 을지휘소 역시 해남도를 찾아가며 거의 죽다 살아났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하지만 길을 떠나던 날 보여준 을지휘소의 행동은 영 수상한 것이었다. 육금연이 길을 떠나는 을지호를 염려하여 이런저런 당부의 말을 전 할 때였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을지휘소는 향채(香菜)라는 단어가 튀어 나오자마자 재빨리 입을 막고 눈치를 주었다. 의구심이 일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 문제였다. 을지호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을지휘소와 한숨을 내쉬며 물러나던 육금연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그를 빈사(瀕死)상태로 만들었던 음식을 장식했던 조그만 야채, 그것이 바로 향채였다는 것을 설명 받고 힘없이 갑판에 주저앉은 직후였다. “어찌 그런 것을 먹는지…….” 향채의 맛을 기억해낸 을지호가 또다시 몸서리를 쳤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무리 생각하고 백번을 양보해도 향채는 아니 었다. 향기는 그런대로 맡을 만 했다. 하지만 그 조그만 잎을 씹었을 때의 느낌이란… 세상 그 어떤 종류의 음식, 양념도 그 오묘한 맛을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맛은커녕 흉내조차 내지 못하리라. 입에서부터 시작해 식도(食道)를 타고 내려가 뱃속을 뒤집고 전신의 감각을 마비시키며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눈꺼풀을 그저 두어 번 깜빡거릴 정도의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시간 이 지나가면 당장 입에 들어간 음식과 위(胃)에 남아 있는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장(腸)속에서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 만을 기다리는 찌꺼 기까지 역으로 거슬러 올라오게 되는 것이었다. 향채는 음식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음식위에 장식을 하기도 하고 양념으로도 쓰였다. 문제는 거의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지나칠 정도로 향채를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그에 부응하여 향채가 빠진 음식 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는데 있었다. 앞으로 얼마를 중원에서 보내 야 할지 모르는 을지호에겐 실로 감당하지 못할 눈앞이 캄캄할 일이었 다. 아니, 당장 항주까지 갈 때까지 버티는 것도 문제였다. 선실(船室) 한켠에 주방까지 갖춘 대형상선에 음식을 가지고 타는 사람이 있을 리 없을 터, 다른 음식을 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했다. 혹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을지호로선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었다 . 모든 음식에 향채를 첨가하는 사람들이고 보니 어떤 음식에서 향 채 맛이 날지 몰랐다. 한번 씹기만 하면 최소한 하루 정도는 입가에 그 끔찍한 맛이 맴돌게 된다. 차라리 똥물을 퍼먹으면 먹었지 그 맛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어찌 되겠지. 뭍에 오르면 무슨 수가 나겠지. 우선 버텨야겠지.”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픈지 을지호는 난간에 기댄 몸을 축 늘어뜨리 고 눈을 감았다. 지닌 육포는 바닥난 지금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편한 자세로 힘을 비축해야 했다. 그러나 편안한 휴식도 얼마가지 못했다. 두려움에 떨린 외침이 배 안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드넓은 배 를 뒤흔들 정도로 크면서도 모든 이를 일대 공황에 빠뜨리기에도 충분한 뜻을 내포한 외침이었다. “해적(海賊)이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 “해적(海賊)이다!!” 그 한마디로 평온했던 갑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겁에 질린 여행객들과 상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두려움에 떨고 표 물(標物)을 운반 중이던 산동표국의 표사들 역시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선원들마저 우왕좌왕했다면 혼란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하나 일엽 편주(一葉片舟)로 시작해 지금의 위치에 오른 선장 마충(馬忠)은 산 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사람이었다. 해적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는 즉 시 모든 선원들을 단속하고는 재빨리 손님들을 한데 모았다. “젠장, 이거야 원 시끄러워서.” 아무리 무신경한 성격의 을지호라도 아수라장이 된 갑판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적이란 외침에 슬그머니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 을지호는 상선을 향해 서서히 접근하는 두 척의 해적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법 거 리가 있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육중한 상선에 비하면 몹시 날렵해 보인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또한 배 안에는 무수히 많은 해적 들이 약탈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었다. “호오~ 해적이라…….” 을지호가 해적선을 보고 눈빛을 빛내고 있을 때 한쪽에선 대책마련 에 분주했다. “뿌리칠 수 있겠소?” 이번 산동표국의 표행을 이끌고 있는 표두(標頭) 이기(李騎)가 물었 다. “불가능 하외다.” 마충이 고개를 흔들었다. “해적선의 빠르기는 군선(軍船)도 감히 미치지 못하는 게요. 아무리 용을 써도 곧 따라잡히고 마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하던 사람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렇다면 어찌 하실 생각이오? 싸울 생각이시오?” “필요하다면.” 사뭇 떨리는 목소리의 이기와는 달리 마충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 다. “어, 어찌 싸운다는 말이오? 저들은 해적들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싸움이라곤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이오. 장사치란 말이외다. 선원들의 수가 제법 된다고는 하지만 어찌 저들을 감당할 수 있겠소?” 화려한 의복에 염소수염을 나름대로 멋있게 기른 중년인이 자꾸만 아래로 처지는 배를 부둥켜안고 물었다. 힐끔거리는 시선으로 질문자를 쳐다본 마충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대답을 했다. “싸우게 되면 싸우는 것이오. 하나 아직은 모르니 너무 걱정하지 마 시구려. 싸움은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를 가정한 것이니. 그냥 앉아서 죽기 억울할 때 최후의 발악으로 해 보자는 것이외다. 물론 결과는 신통치 않겠지만.” “허면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이오?” 이기가 차분해 보이는 마충의 표정에 일말 희망을 걸고 물었다. “방법은 없소. 그냥 운에 맡길 뿐이오.” 담담히 내뱉는 마충의 말에 이기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람들의 반응 역시 이기와 다르지 않았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마충이 말을 이었다. “뱃길을 다닌 지 수십 년이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해적들도 만나보았고 위기도 많이 겪어보았소. 거기서 얻은 경험으로 말하건데 해적이라고 무차별하게 살생만 하는 인간들은 아니외다. 충분히 대화 가 가능한 이들이오. 억수로 운이 좋기도 하였지만 말이오.” “대화가 가능 하겠소이까?” 고개를 돌려 질문자를 찾던 마충은 곧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은 하지 못하겠지만 가능성은 높소. 물론 그만한 대가를 치러 야겠지만.” 마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치루겠소. 대가는 얼마든지 치루겠소이다.”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야…….” 그 어떤 것이 목숨에 비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희생을 치루 는 한이 있어도 목숨만큼은 보존하고 싶어 했다. 싸움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기다려 보시오. 해적이라는 것을 제외하곤 아직 저들의 정체를 확 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소. 어떤 대가를 치를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될 것이오. 모두들 진정해 주시고… 특히 쓸데없는 행동을 하여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소이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산동표국의 표사(標士)들과 이기를 넌지시 바 라보며 말을 마친 마충은 갑판 이곳저곳을 몹시 분주한 걸음으로 옮겨 다녔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에 떨고는 있지만 애써 내색하 지 않고 있는 선원들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처음 해적선이 모습을 드러낸 후 반각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해적선 은 어느덧 상선의 좌현으로 삼십여 장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꽝! 갑자기 뇌성(雷聲)과 비견될 정도의 폭음이 들리고 배에서 고작 오 륙 장 떨어지는 곳에서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해적선이 화포(火砲)를 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어째서 해적들이 군이 지니고 있어야 할 화포를 지니고 있단 말이오!” 그것이 마충의 잘못도 아니련만 갑판에 배를 깔고 고개를 숙인 한 장사꾼이 소리쳤다. “그러니까 해적 아니오.” 마충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입가에 걸린 것은 분 명 안도의 미소였다. 제아무리 철썩 간담을 지닌 사람이라도 제 목숨이 걸린 일에는 태연 하기 어려웠다. 마충이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척하며 끝까지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한낱 사람, 속마음 까지 평정을 유지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었다. 직접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아는 한 뱃머리에 용두(龍頭)의 조각상을 내걸고 저렇듯 화포를 쏘아대는 해적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그들은 그 어떤 해적들 보다 숫자도 많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 다만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여 살육을 즐기 는 몇몇 해적들과는 달리 비교적 대화가 잘 된다는 것이었다. “거룡단(巨龍團)… 천만다행이군.”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마충이 겁에 질 린 선원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백기를 올려라. 어서!!” 선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마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돛 대 위에 커다란 백기가 걸리고 갑판 이곳저곳에서 백기를 흔들었다. 꽝! 꽈꽝!! 사격은 선원들이 백기를 흔들고 나서도 대여섯 차례나 이어진 다음 에야 중지되었다. 두 척의 해적선중 하나는 배의 좌측으로 다른 한척은 후미로 돌아 우측으로 다가왔다. 배는 이미 멈추어 움직임을 멎고 스르르 미끄러져 다가오는 해적선을 마중하듯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접근했을까? 해적선에서 무수히 많은 갈고리들이 배를 향 해 날아왔다. 갑판위에 떨어진 갈고리들이 괴기한 소리를 내며 갑판을 긁더니 난간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상선과 해적선의 간격도 더불어 급격히 줄어들었다. “다리를 놓아라.”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고 순식간에 이십여 개의 다리가 상선과 해적 선 사이를 가로질렀다. 다리라야 그저 탄력이 좋은 나무판자에 불과 했지만 그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다. “와아!!!” 나무판자가 걸쳐지기도 전에 몸을 날린 해적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 고 특유의 괴성과 지르며 날뛰었다. 그리고 처음 몸을 날려 뛰어든 해적의 몇 배에 달하는 인원이 다리를 통해 밀려들었다.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아무렇게나 풀 어 헤쳤다. 들고 있는 무기들 또한 다양했다. 도검(刀劍)을 들고 있는 자들을 비롯하여 낫, 도끼, 철퇴 등 저마다 각양각색이었다. 다만 특징이 있다면 그들 모두 팔뚝에 당장에라도 승천(昇天)할 것만 같은 용의 문신(文身)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충돌은 없었다. 상인들과 선원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뿐이었고 산동 표국의 식솔들만이 이기를 중심으로 한데 모여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역시 마충이 당부한대로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 다만 상황이 돌변하면 언제라도 무기를 꺼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 비를 갖추고 있었다. 배에 오른 해적들은 갑판에 나와 있던 인원들은 물론이고 숨죽이며 선실에 숨어 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갑판위로 끌어내었다. 그리곤 을지호가 앉아 있는 배의 후미로 모든 사람을 몰아세웠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상선 풍운은 거룡단의 해적들에 의 해 완벽하게 점령되었다. “대표자는 나서라.” 수하들에게 배를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보고를 받으며 한 사내가 소 리쳤다. 쳐다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의 거대한 도끼를 한손으로 짚고 좌중을 노려보는 사내의 이름은 용부(龍斧)였다. 들고 있는 도끼를 제외하고도 몸 이곳저곳에 늘 네 다섯 개의 작은 도끼가 숨기고 다닌 다는 용부는 거룡단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대표자는 나서라 했다.” 용부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내가 이배의 선장이오.” 마충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난 선장이 아니라 이 배의 대표를 원한다.” 용부는 앞으로 나선 마충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재차 소리쳤다. 그가 말하는 대표란 단순히 선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배에 탄 모든 이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자를 말함이었다. “그가 대표자요.” 이기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과 표사들을 응시하는 용부의 눈빛 을 피하지 않고 대꾸했다. 용부가 의외라는 듯 이기와 마충을 번갈아 보았다. “흠, 어쨌든 좋아. 백기를 든 것은 항복의 의미로 알겠다. 선장이라 면 어찌 처리할지, 우리의 법칙은 알고 있겠지? 아, 물론 지금이라도 대항을 해도 상관은 없다.” 용부는 대항이란 말을 언급하며 좌중을 둘러보며 싸늘한 시선을 던 졌다. 그와 눈이 부딪친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용부의 눈빛을 견디는 사람은 역시 선장 마충과 표두 이기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몇몇 인물들뿐이었다. “대항할 생각은 전혀 없소. 법칙도 알고 있소.” “좋아. 알고 있다니 피차 얼굴 붉히지 않아도 되겠군. 통행세만 적당 히 낸다면 우리도 가진 것은 몽땅 뺏을 생각은 없어. 목숨도 절대적 으로 보장하지.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모든 재물을 빼앗고 목숨을 앗아봐야 당장은 어쩔지 몰라도 장기적 으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문이라도 나면 당장 운행하는 배의 수가 줄어들 것이고 그것은 곧 수입의 감소로 돌아온다. 어쩌면 백 성들의 등쌀에 못 이겨서 군에서 나설지도 몰랐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 지만 껄끄럽고 귀찮은 것만은 틀림없었다. “어느 정도면 되겠소?” 마충이 조심스레 물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용부에게 향했다. 용부의 입가에 정복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기다리기 지칠 정도 로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세 개의 손가락을 보였다. “삼할.” 이곳저곳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숨을 보장받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삼할이라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대다수의 얼굴에서 곤란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막상 목숨을 보장받고 나니 상인들 특유의 기질이 나타난 것이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배를 습격했던 용부가 그것을 눈치 못 챌 리 가 없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엔 미소마저 감돌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니면 관두고.” 용부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적들의 얼굴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소란 스러웠던 갑판에 급작스런 침묵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처한 상황, 잠시 동안 망각했던 위기감을 을 인식했다. 사람들의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마충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삼할을 바치겠소. 대신…….” “대신?” 용부가 감히 조건 따위를 다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후의 안전은 확실히 보장해 줘야 할 것이오.” 용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당연한 것을. 이후의 뱃길은… 목적지가 어디냐?” “항주요.” “좋아. 더 이상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식솔들은 물론이고 다 른 친구들 역시 너희들을 건드리지 않을 것임을 장담하지.” “믿겠소.” 다시 한번 다짐을 받은 마충이 눈짓을 했다. 마충의 눈짓에 따라 상 인들이 저마다의 목숨 값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여행객은 통보(通寶)와 지폐(紙幣)를 대부분의 상인들은 금과 은을 준비했다. 때로는 장사를 하기 위해 준비한 물건에서 일부를 떼는 사 람들도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가난한 상인들이었다. 수하들을 시켜 갑판위에 큰 자루를 펼쳐놓은 용부는 느긋한 시선으 로 돈을 내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일일이 확인을 하지도 않았다. 맨 처음 거짓으로 몸값을 지불하다 들킨 상인의 잘린 팔과 흘린 피가 아직 식지도 않은 상황에서 감히 거짓말을 할 담력을 지닌 자는 없 을 테니까. 하지만 용부와는 달리 그 밑의 해적들은 도끼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더러는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위협을 가하며 빨리 돈을 내어놓으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그런 종용을 당한 사람 중에 을지호도 끼어 있었다. “뭐~어?” 을지호는 자신에게 시퍼렇게 날이 선 손도끼를 흔들며 위협을 가하 는 해적에게 살짝 고개를 치켜 올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배를 점령한 해적들이 사람들을 배의 후미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을지호는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 자세에서 변함이 없었다. “귓구멍에다 말뚝을 쳐 박았느냐!! 지금껏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는 말이냐? 네놈은 돈을 바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모 양이구나!!” “그래서?” 속이 쓰린지 배를 살살 문지르던 을지호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어이없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도 잠시, 사내의 눈 가에 살기가 스치며 손도끼가 더할 나위 없이 빠른 움직임으로 을지 호의 이마를 찍어왔다. 물론 그것은 사내의 생각이자 그리 하려는 부질없는 의지였을 뿐이 다. 을지호가 사내의 눈가에 살기가 감돌고 흔들거리던 손도끼가 다음 동작을 위해 잠시 멈추는 사이 이미 손을 쓴 것이었다. “너 몇 살이냐?” 을지호가 짐짓 엄숙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지만 이미 혈도(穴道)를 제압당하여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혈(啞穴)마저 점혈된 상 황에서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을지호의 표정이 돌변했다. “싸가지 없는 놈. 어따 대고 반말이야.” 을지호의 손가락이 사내의 이마를 튕겼다. 점혈은 당했어도 그 감촉 은 남아 있는지 사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보아하니 이제 겨우 스물 남짓 되어 보이는데 할 짓이 없어서 해적 질이냐? 안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데 네놈들까지 나서서 설칠 건 뭐 냐고? 그래 니들 참 잘 만났다. 이놈들을 그냥… 응?” 배 멀미로 인한 고통과 짜증을 풀 곳을 드디어 만났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을지호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상 황에 멈칫거렸다. 그리곤 그 분위기를 이끌어낸 사람들을 보며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그냥 끝날 일은 아니었어.”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5 나름대로 화기애애했던 갑판의 공기는 싸늘히 식어 있었다. 최대한 충돌을 자제했던 산동표국의 모든 표사들이 분분히 검을 빼 어들고 해적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물론이고 선장 마충마저 난처한 표정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이미 사태는 그가 제어할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표사들의 인원이라야 고작 열명 남짓이었다. 그에 반해 해적들의 수 는 그 몇 배였다. 더구나 아직 이쪽으로 건너오지 않은 인원까지 포 함한다면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전력이었다. 그런데도 표사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뭔가를 믿는 듯한 모습, 그 중심에 표두 이기가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 서 있었다 . 낡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적삼을 입은 사내는 주변의 상황에 그다 지 위축감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해보겠다는 것이냐?” 용부가 싸늘히 그러나 약간은 어이없다는 음성으로 물었다. 사내가 주변을 훑어보며 대꾸했다. “꼭 싸울 생각은 없소.” “그렇다면 무엇이냐? 어째서 내라는 돈은 내지 않고 무기를 꺼내 대 항하는 것이냐!!” 노기가 담긴 용부의 물음에 사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담 담히 그러나 힘이 실린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악균(岳筠)이라 하오. 악가(岳家)에 적을 두고 있소.” “악…가라면 산동의 그… 악가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흠칫 놀라는 것과 동시에 던지는 용부의 음성에 미미한 떨림이 있었 다. 말투 또한 비교할 수도 없이 정중해졌다. “산동에 본가를 제외하고 악가라 불리는 다른 곳이 있다면 모를까 없다면 생각하는 곳이 맞을 것이오.” “음.” 용부의 입에서 짧은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산동악가(山東岳家). 과거 무림을 호령하며 이름을 떨치다가 몰락의 길을 걸었었지만 절 치부심(切齒腐心), 삼십여 년 전 악극(岳戟)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 출하며 다시금 과거의 위명을 되찾는 전통의 명문무가(名門武家)였다. 사람들은 몰락해버린 남궁세가대신 산동악가를 강호 오대세가(五大 世家)로 명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필 악가라니…….’ 거룡단의 세력이 아무리 막강하고 바다를 지배하고는 있다지만 그것 은 말 그대로 해적들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몇몇 요직을 차 지하고 있는 두령(頭領)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들도 없거니와 또 익혔다고 하더라도 그 실력이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 가 나는 것이었다. 막말로 악가와 같은 무가에서 작심하고 고수들을 파견한다면 살아남 을 길은 그저 바다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젠장,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자니 영 그렇고.’ 용부의 눈에 당장에라도 공격할 듯이 살기를 내뿜으며 무기를 치켜 세우고 있는 수하들이 들어왔다. 더러는 직접적으로 공격명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멍청한 놈들. 아무리 무식하고 겁을 상실한 해적이라지만 악가의 이 름쯤은 들어보았을 것 아냐!’ 상대가 악균과 몇몇 표사뿐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아니,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그냥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들 뒤에 악가라는 무시무시한 세력이 있다는데 있었다. 체면과 명분에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서우리만큼 잔인하고 집요 하게 달려드는 자들이 소위 말하는 명문정파들이었다. 그 끝이 어떠하 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어쩔 수 없이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땐 절대로 증거를 남겨선 안됐다. 그러자면 산동표국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들의 목숨 또한 빼앗아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존재할 수 가 없었다. 언젠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악가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어쩐다. 이대로 물러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닌데…….’ “한 가지 의견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소?” 용부의 고심을 알기라도 하듯 엷은 미소를 지은 악균이 입을 열었 다. 용부가 숨통이 트였다는 듯 반기며 재빨리 반문했다. “말씀해 보시오.” “한 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법도가 있소. 본가가 비록 산동에서 조금 의 이름을 얻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산동에서이고. 이곳에서는 바다를 지배하는 그대들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오.” “계속 해 보시오.” 반갑기 보다는 불안감이 더해왔다. 악균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용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오해는 하지 마시오. 우리는 그대들이 요구하는 돈, 목숨 값이 라 해둡시다. 어쨌든 목숨 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소. 해서 일부러 나 서지 않고 있었소.”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실 산동표국은 본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소. 국주(局主)가 본가 출신임을 말할 것도 없고 표사의 대 부분이 본가에서 무공을 익힌 제자들이라 보면 맞을 것이오. 또한 이 번 표행의 물건은 본가에서 직접 의뢰한 물건이고… 내가 그 책임을 맡고 있소이다.” 잠시 말을 끊은 악균이 용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부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삼할은 너무 많다고 생각하오만.” “그 이하는 어림도 없소.” 악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꾸한 용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 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삼할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통행세를 지불할 생각이 있다는 악균 의 말은 악가나 거룡단 양쪽의 체면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런 것을 자신도 모르게 거부하고 만 것이다. ‘우라질!!’ 용부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요구조건을 거부해 버린 자신의 무지몽 매함과 급한 성격을 자책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악균은 악균 나 름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역시 용부가 자신의 요구를 거부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어색한 긴장감이 선상을 휩쓸었다. 충돌을 의식했는지 양쪽의 진영 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거세어졌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악균에게 쏠렸다. 특히 상인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그들은 산동표국과 해적들 간에 싸움이 일어날 경우 자신들의 목숨이 어찌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악균도 그들의 시선에 몹시 부담을 느꼈다. 자신들만이라면야 모를 까 애꿎은 상인들의 목숨까지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흠, 참으로 곤란하구려. 하나 좋소. 그것이 불가하다면 한 가지 제 의를 더 하겠소.” “뭐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소.” 용부가 치고 나가려는 수하들을 제어하며 황급히 대꾸했다. “우리는 이할 정도라면 그냥 지불할 의향이 있었소. 하나 그쪽에서 요구하는 것은 삼할,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구려. 해서 해결책으 로…….” 답답함에 침을 삼키는 것인지 용부의 목덜미가 꿈틀거렸다. “모든 것을 비무(比武)로 해결했으면 좋겠소.” 악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용부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비…무란 말이오?” 아닌 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난데없이 무슨 비무란 말 인가! “그렇소. 비무를 하여 이긴 쪽의 조건을 들어주는 것으로 합시다. 그 쪽에서 승리를 할 경우 우리는 군말 없이 목숨 값으로 물건값의 삼 할을 지불할 것이고 다행히 우리가 득을 본다면 이할의 값을 지불할 것이오.” “흠.” 괜찮은 생각이었다. 악균의 조건을 처음부터 받아들였으면 모를까 거부한 상황에서 어쩌면 이 이상의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비무에서 이기면 더할 수 없이 좋고, 물론 벼락을 맞고 죽을 만큼의 확률만큼 도 되지 않았지만, 진다고 해도 상대는 명문가의 고수였다. 잃을 것 은 없었다. 더구나 이겼을 때도 이할에 달하는 세금을 지불한다고 낸 다고 하니 절대 손해나는 일은 아니었다. 용부는 악균의 말을 듣는 순간 이미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수하들의 이목도 있고 하여 잠시 뜸을 들이고 있었는데 그사이 악균이 재차 입을 열었다. “구태여 피를 볼 필요는 없다고 보오. 목숨을 거는 비무가 아니라 어느 한쪽의 우위만을 결정하는 것으로 합시다.” 결정적인 한마디였다. 께름칙한 마음 한구석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악균의 제의에 용부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용부가 입을 열기도 전 악균의 제의를 수락하는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재밌을 것 같소. 그렇게 합시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한 사내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판자 로 만든 다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휘청거렸다. 사내가 갑판에 발을 내려놓자 해적들이 일시에 무기를 치켜세우며 환호성을 질렀다. 용부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공경의 표시였다. “소단주.” 용부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사내는 용부를 쳐다보 지도 않고 악균에게 포권(抱拳)을 했다. “해웅(海熊)이라 하오.” “아…악균이외다.” 악균 또한 황급히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 기는 했지만 악균은 자신을 해웅이라 소개한 사내를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중한 어조와 묵직한 음성에 어울리지 않게 해웅의 나이는 많아봐 야 약관(弱冠)이 지났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덩치가 실로 장난이 아니었다. 어찌나 키가 큰지 악균의 머리는 고작 해웅의 가 슴께에 이를 뿐이고 천년 거목(巨木)과 같은 허벅지는 어지간한 장정 의 허리만 했다. 벗어젖힌 상체는 강철 같은 근육으로 꿈틀거렸는데 보고 있노라면 마치 웅장한 산세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게다가 들고 있는 무기는 난생 처음 보는 거부(巨斧)였다. 아니 무기 라 하기에 부르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분명 도끼의 모습을 하고는 있 었지만 손잡이의 길이만 반장이요, 날만 해도 두자가 넘는 도끼가 존 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도대체 이런 덩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십 평생, 짧지 않은 생을 살아왔지만 해웅만 큼 어마어마한 덩치를 본 적이 없었다. 비단 악균만이 아니었다. 상인들은 물론이고 해웅의 모습을 늘 보아 와 이제는 만성이 되었을 법도 하련만 해적들도 여전히 놀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야! 끝내주는구나. 뭐 저렇게 생겨먹은 놈이 다 있지. 나도 덩치 크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이거야 원…….’ 을지호는 주제도 모르고 덤비려던 해적의 손에서 빼앗은 손도끼를 이리저리 놀리며 해웅의 덩치에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렇듯 사람들이 해웅의 모습에 놀라고 있을 때 정작 해웅은 태연스 레 용부에게 고개를 돌려 청을 했다. “용두령, 이번 비무는 나에게 맡겨두는 게 좋겠소.” 부탁조로 말했지만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애당초 해웅은 해적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단주인 해 곤(海鯤)의 닥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배에 오르기는 했지만 지금껏 단 한번도 노략질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런 해웅이 관심을 기울이 는 것은 오직 하나, 무공과 무공을 익힌 무인과의 승부였다. “알겠소이다.” 자신이 비록 거룡단에선 강자로 통한다지만 체계적으로 무공을 배운 고수들에겐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어차피 나서봐야 얼마 못가 패배를 인정해야 함을 알고 있던 용부는 기꺼이 자리를 양보했다 . 해웅의 강함은 익히 알고 있는 터, 어쩌면 승리를 거둘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용부에게 양해를 구한 해웅이 돌연 몸을 돌리며 도끼를 세우며 예를 차렸다. “거룡단의 소단주 해웅이오.” 그것이 비무의 시작임을 알리는 신호였기에 악균 또한 검을 곧추 세 우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산동악가의 악균이라 하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6 서로간의 통성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웅의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해웅은 믿기지 않는 거력으로 드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도끼를 젓가락 놀리듯 휘둘렀다. 도끼가 바람을 가르며 내는 파공성이 순식간 에 갑판을 뒤덮었다. 해웅은 악균이 미처 반격할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었고 악균은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하 고 피하기에 급급해 보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해웅이 열심히 공격을 하는 것 같고 나름 대로 승기를 잡은 듯 보였지만 사실상 그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 었다. 해웅이 공격을 할 때마다 악균은 그저 침착하게 피하기만 했다. 악균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한 도끼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갑판을 찍으며 이곳저곳에 흉한 상처를 남길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충의 이마에 주름살만 늘어갔다. “뭐야 저 녀석. 고작 힘만 앞세우는 곰탱이잖아!” 도대체가 통하지도 않을 공격을 하면서 끝까지 우격다짐 식으로 힘 으로써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이 영락없는 미련한 곰의 행태였다. 어 떻게 싸움이 진행될 것인가에 적잖이 기대를 하고 있던 을지호의 입에 서 대뜸 욕이 튀어나왔다. 다행히 혼자 말이라 그런지 그의 말에 신 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아!!” 산동표국의 식솔들이 갑자기 함성을 내질렀다. 허허로운 걸음걸이로 해웅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악균의 공세가 마침내 시작되었기 때 문이었다. 해웅의 도끼가 어깨너머로 흘러가는 것을 놓치지 않은 악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적당히 상처만 입히고 비무를 끝낼 요량인지 검이 노린 곳은 도끼를 들고 있는 오른쪽 어깨였다. 일체의 헛된 동작을 배제 한 깨끗한 솜씨에 보는 이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용부 와 해적들의 입가에 걸린 것은 분명 조소(嘲笑)였다. 까깡. 날카로운 금속성과 동시에 해웅의 어깨에 적중했던 검이 크게 휘었 다. “이런!”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리고 당황하여 자세가 흐트러진 악균의 전면으로 육중한 도끼가 날아들었다. 미처 몸을 빼지 못한 악균이 검을 들어 도끼를 막았다. 깡! 거대한 도끼와 그에 비해 초라해 보이기만 하는 검이 부딪쳤다. 도 끼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힘을 견디지 못한 악균의 신형이 무려 오장이나 밀려났다.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으로 더 이상 몸이 밀려나는 것을 막은 악균 이 황당한 눈으로 해웅을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힘도 힘이지만 그는 조금 전에 일어났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공격은 성공이었다. 악균은 그 한번의 공격으로 승리를 확신했 었다. 한데 어깨를 파고들었어야할 검이 조그만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것이었다. ‘괴사(怪事)로군. 아니면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던가. 곧 알게 되겠 지. 그나저나 엄청난 힘이로구나. 명검(名劍)은 아니더라도 보검(寶劍 )축에는 끼는 것인데. 어쨌든 주의해야겠어.’ 악균은 한쪽이 형편없이 떨어져나간 검의 날을 보며 가슴 한구석에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단 한번의 충돌로 검의 상당부분이 손 상된 것을 보면 도끼에 실린 힘을 능히 알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여 검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였다.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듯 거친 숨을 내뱉은 해웅이 악균을 향해 재 차 돌진했다. 오장의 거리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해웅은 순 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악균을 압박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움직임에 이곳저곳에서 또다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별 다른 무공을 지니지 못한 상인들이나 해적들의 관점에서 본 것이었 고 악균의 눈에는 별다른 위협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초도 닦이지 않았구나. 그 따위 움직임엔 잡힐 내가 아니다.’’ 특별히 보법(步法)을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여 뭔가가 있을 까 주의를 기울였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저 양다리를 힘껏 내뻗어 번갈아 가며 갑판을 차는 것이 움직임의 전부였다. 악균은 그제야 해웅이 제대로 무공도 익히지 않은 초보자라 단정 지 을 수 있었다. 그런 초보자에게 오장이나 밀려나고 검에 손상을 입었 다는 것을 떠올리자 저 발치에서부터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타핫!” 악균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좌우로 두어 번 몸을 흔들어 눈 을 현혹하고 해웅이 내려친 도끼가 갑판을 찍는 사이 재빨리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좌측 어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과 는 달리 상당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깡. 검이 튕겨 나오며 또다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른쪽 어깨에 이어 왼쪽 공격까지 실패한 악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머 뭇거릴 틈은 없었다. 그사이 중심을 잡은 해웅의 도끼가 매서운 속도 로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악균이 상체를 살짝 뒤로 누이고 한발 물러섰다. 도끼가 간발의 차 이로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해적들의 입에서 아쉬워하는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내는 악균의 실력이라 는 것을 알지도 못한 체. “타핫!” 공격을 피한 악균이 누일 때의 배나 되는 속도로 몸을 일으켜 해웅 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검이 해웅의 배를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 역시 들려온 것이라곤 철판을 긁는 듯한 괴이 한 마찰음뿐이었고 잘려나간 것은 입고 있던 옷이 전부였다. “외공(外功)을 익혔구려.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잠시 몸을 뒤로 뺀 악균이 진정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과찬이오.” “사부님의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소?” “딱히 사부는 없소. 다만 어릴 때 얻은 책자에 나오는 대로 연마했 을 뿐.” “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해웅의 태도로 보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악가의 여러 고수들에 비하며 손색이 있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고수라 자부하던 악균은 사부도 없이 지금의 성취를 이뤄냈다는 해웅의 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스스로 익힌 무공이 이정도란 말인가. 실로 부끄럽구나!’ 이쯤 되면 사정을 봐줄 수가 없었다. 세금을 더 내고 덜 내고를 떠 나 작게는 악균 자신과 크게는 악가의 체면과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악균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악균의 변화를 제일먼저 감지한 사람은 당연히 해웅이었다. 검을 살 짝 치켜세운 기세부터가 달랐다. 별다른 공격이 없었음에도 전해오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하나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내세 울 수 있는 무기란 천성적으로 타고난 강한 힘과 단단한 몸뚱이 그 리고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투지(鬪志)뿐이었다. 한껏 내공을 끌어올린 악균은 해웅의 공격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 다. 빠른 발과 몸놀림으로 거의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검풍(劍風)이 일어 해웅의 전신을 타격했다. 머 리에서 발끝까지 검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악균의 거센 공격에도 해웅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도 없이 몸을 휘청거리고 연 신 뒷걸음질치면서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 비해 자신할 수 없었던 얼굴 부위는 어떤 수를 쓰던지 보호하며 틈틈이 역공까지 펼 쳤다. 비록 악균에 비해 한없이 느려터진 움직임이었지만 때때로 악균이 깜짝 놀랄 만큼 위협적인 것도 있었다. ‘정녕 괴물 같은 자다.’ 한참을 공격했고 수도 없이 몸에 적중을 시켰지만 막상 얻은 것이라 곤 해웅의 옷을 누더기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상대가 쓰 러지기 전에 자신이 기운을 잃고 쓰러질 지도 몰랐다. 은근하 불안감 이 악균의 머리 속을 혼란케 만들었다. ‘그럴 순 없지. 절대로! 이번 공격으로 끝낸다.’ 이를 악문 악균이 최후까지 아껴두었던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검에 주입했다. 검봉(劍鋒)에서 한자 정도의 희뿌연 기운이 치솟아 올랐다. “거, 검기(劍氣)!! 검기다.” 상선이나 털러 다닌 해적들이 검기를 쓰는 고수를 만났을 리 만무했 다. 말로만 들었던 검기가 직접 눈앞에 나타나자 경악을 금치 못한 용부가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호오~ 제법이네. 하나 어설퍼… 저것도 검기라 불러야 하나? 어쨌 든 기세만큼은 대단한데 그래.’ 흥미진진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을지호가 용부를 비롯하여 깜짝 놀라 고 있는 해적들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조심하길.” 상대를 염려한 것인지 아니면 무공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는 모르 나 해웅에게 경고를 보낸 악균이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광풍제월(曠風霽月)이라는 절초로 그가 아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온다.’ 악균이 휘두른 검에서 묘한 소성이 발하며 한자 정도 치솟았던 희뿌 연 기운이 그대로 자신에게 쏘아져 오는 것을 느낀 해웅은 바싹 긴 장을 하며 양손을 교차해 얼굴을 보호했다. 그리곤 전신을 갈가리 찢 을 기세로 밀려오는 검기에 대항해 몸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진을 했다. 양 손목으로 얼굴을 막으며 전진하는 모습이 마치 상처 입은 곰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을 연상케 하였는데……. 꽈꽝. 악균의 검기와 해웅의 몸뚱이가 부딪치자 상당한 충돌움이 선상을 뒤 흔들었다. 몇몇 상인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누구 한사람도 넘어진 사람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 어 엉덩방아를 찧거나 한쪽 구석으로 굴러간 사람들도 몸을 일으키 려 애쓰기 보다는 해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와아아아아!!” 해적들의 입에서 기세 좋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반면 산동표국의 식솔들은 너무도 어이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무참히 쓰러져야 할 해웅이, 목숨을 잃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심각한 부상을 입고 갑판을 굴러야할 그가 악균의 검기를 정면으로 받아낸 것이었다. 더구나 몸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었다 . 온 몸으로 검기를 막아내며 도리어 역공을 펼치고 있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검기의 힘이 미친 팔뚝은 깊이 패여 많은 피가 흘렀지만 해웅에게 있어 그것은 상처라 불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위기 다음엔 기회라 했던가. 악균에게 있어선 회심의 일격이었던 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해웅에게 곧바로 기회가 왔다. 해웅이 망연자실 놀라고 있는 악균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이를 악문 악균이 재빨리 몸을 틀었다. 빠지직. 해웅의 도끼가 악균의 몸을 살짝 스치며 갑판을 찍어 눌렀다. 형편 없이 부서진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악균은 이미 체력적으로 이미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무수한 공격을 퍼붓느라 상당한 힘을 사용했고 거기에 무리를 해가며 감행 했던 최후의 공격마저 통하지 않았다는데 오는 상실감이 그를 더욱 지치게 했다. 이전과 같은 움직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해웅은 달랐다. 지친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힘이 넘치는 듯 했다. 악균이 도끼를 피해 간신히 발걸음을 움직이는 사이 그는 전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으로 악균을 몰아쳤다. 악균은 변변히 대응을 하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바로 그 순간, 악균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쳐왔다. 뒤로 물리던 발이 하필 해웅의 도끼에 의해 박살된 갑판에 끼어 버린 것이었다. “이런.” 악균은 급작스레 무너진 중심을 바로 세우고 갑판 사이에 낀 다리를 빼려했다. 하나 해웅의 도끼가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끝인가? 결국…….’ 악균이 어깨로 떨어지는 도끼를 뻔히 바라보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 다는 것에 허탈해 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곧 엄청난 고통이 몰 아치리라. 그렇지만 어깨 따위는 상관없었다. 자신의 패배 또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실력이 없으면 패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나 강호의 고수가 아니 해적 따위에게 패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어쩌면 뭇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악가 전체가 조 롱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이 악균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하는 비무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는지 해웅은 처음 머리 를 향하던 도끼의 방향을 좌측어깨로 움직였다. 해적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해웅의 승리를 당연히 하고 있었고 반대로 산동표국의 식솔들 은 마치 초상(初喪)이라도 당한 듯 죽을상이었다. 쉬잇. 은밀한 바람 소리와 함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도끼의 날이 악균의 어깨를 막 짓이기려 할 때였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7 캉! 강한 쇳소리와 함께 방향을 튼 도끼가 악균이 팔이 아닌 갑판에 박 혔다. 해웅의 발밑에 그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어 버린 자그마한 손도끼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줄 몰라 어리둥절하였지만 몇몇 눈썰 미 좋은 사람들은 손도끼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해웅 또한 자 신의 손을 얼얼하게 만든 주인이 누군가 알고 싶어 했다. 그들의 눈에 갑판의 난간에 느긋하게 기대고 앉아 다리를 꼬고는 몸 이 굳은 듯 꼼짝도 못하고 있는 해적의 정수리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 을 치고 있는 을지호가 들어왔다. “미안하게 됐다. 하나 이미 끝난 싸움이다. 팔까지 자를 건 없잖아. 그래도 성이 안찬다면… 내가 상대해 주지.” 자신을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는 해웅에게 을지호는 공격을 방 해해서 미안하다며 손을 흔들었다. “마음대로.” 해웅이 갑판에 박힌 도끼를 천천히 꺼내어 들며 대꾸했다. 을지호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 켰다. 그사이 이기의 명을 받은 산동표국의 식솔들이 악균을 안전한 곳으 로 옮겼다. 사실 누구의 부축을 받을 만큼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 다. 하지만 악균은 승부에 패하고 악가의 명예를 훼손 했다는 자책감에 이미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을지호, 어깨를 건들거리며 걷는 모양이 거리를 누비는 불량배들과 영락없이 닮았는 데……. “으… 이건!!” 일고여덟 걸음이나 걸었을까? 흠칫 걸음을 멈춘 을지호가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며 서둘러 코와 입 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보무도 당당히 걸음을 옮기던 을지호를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갑 판과 선실을 연결하는 통로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향채 냄새였다. 해적들 이 침입하기 전까지 요리를 하고 있었는지 향기가 제법 짙었는데 그것 이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을지호의 코를 자극한 것이었다. 배의 후미에 있을 땐 순풍으로 인해 맡지 못했던 향기가 코로 엄습 하자마자 간신히 진정되었던 을지호의 뱃속은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허겁지겁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 을지호는 상체를 바다를 향해 구부리 며 연신 구역질을 해댔다. “우웩! 우웩!” 그 누구도 을지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 황 앞에선 살긴 띤 눈의 해적들, 잠시나마 기대와 염려에 찬 눈빛을 했 던 상인들과 여행객, 심지어 해웅까지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제길! 미치겠네, 정말.” 한참 만에 구역질을 멈춘 을지호가 입을 쓱쓱 문지르며 상체를 세웠 다. 구역질을 하느라 많은 기운을 쏟았는지 얼굴에 핏기라고 하나도 없 었다. “어이, 거기 외눈깔. 그래, 너 말이야.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긴 낫을 들고 있는 해적을 지목한 을지호 가 소리쳤다. 을지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다 말고 분기탱천한 사내가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호통을 쳤다. “쳐다보긴 누굴 쳐다보는 거냐? 눈깔 없는 놈은 너밖에 없잖아. 어 쨌든 거기 문 좀 닫아라.” “미친놈이 감히 뭐라 씨부리는 것이냐!!” “씨부리긴… 내가 뭐랬냐? 그냥 문이나 닫으라고.” “이……!!” 독목(獨目)의 사내는 당장에라도 덤빌 듯 을지호를 노려보았다. 하나 소단주인 해웅의 앞이었다. 감히 경거망동했다간 훗날을 장담하기 어려 웠다. 그저 연신 씩씩거리며 화를 삭일뿐이었다. 을지호는 그런 사내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또 다시 염장을 지르는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망아지처럼 콧김이나 뿜어대지 말고 빨리 닫기나 해.” “네놈이 정녕 죽기를 청하는구나. 오냐, 그렇게 채근하지 않아도 곧 죽여줄 테니 아가리나 닥쳐라!!” 독목의 사내가 낫으로 갑판을 꽝 찍으며 소리쳤다. 을지호의 말에 동료 해적들까지 키득거리며 웃자 사내는 미칠 지경이었다. 치미는 분 노를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는지 턱으로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짜식, 싫으면 관둘 것이지. 꼭 그렇게 자해를 해야겠냐? 누가 해적 아니랄까봐. 철왕아!” 해적이 들이닥쳤는지, 싸움이 일어났는지 알바 없다는 듯 돛대 위에 앉아 한가로이 깃털을 고르고 있던 철왕이 주인의 음성에 우아한 호선 을 그리며 어깨로 내려앉았다. “가서 문 좀 닫고 오너라.” 을지호가 살짝 어깨를 튕기며 말했다. 철왕이 어깨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속도가 돛대에서 내려올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런데 목표가 달랐다. 단 두 번의 날개 짓으로 독목의 사내에게 접근한 철왕이 대뜸 다리를 치켜들었다. 그리곤 양 다리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어깨를 찍어 누르고 부리로는 정 수리를 쪼아댔다. “크아악!!” 안다 해도 피하지 못할 빠름이었다. 어찌 해볼 도리도 없이 공격을 당한 사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발톱이 박혔던 어깨는 한 움큼도 넘는 살점이 뜯겨 나가고 정수리에선 피가 솟구쳤다. “이놈아. 문 닫고 오랬지, 누가 피보고 오랬냐?” 을지호는 어느새 공격을 마치고 돌아와 앉아 있는 철왕의 머리를 살 짝 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쯧쯧, 그러게 말 좀 듣지 그랬어? 어이, 거기 문 좀 닫으쇼.” 을지호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황급히 지혈을 하는 사내의 모습 에 혀를 차며 문 가까이에 있던 한 상인에게 소리쳤다. 방금 전 을지호 의 부탁을 거부했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목격한 상 인은 철왕이 날아오를까 겁을 내며 부리나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도 잠시, 살짝 인상을 구긴 을지호는 혹여 냄새가 남아 있을까 두려워하며 조심스레 코를 벌름거렸다. 미약하게 냄새가 남아 있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안하게 됐다. 이놈의 코가 조금 까다로워서 말이야.” 을지호가 다소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해웅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하나 자신의 공격을 방해했다는 분노보 다는 새로운 상대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묻어있는 음성이었다. 해웅의 감정을 느낀 을지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뭐, 이름은 차차 알게 되겠고. 그나저나 그렇게 싸우고도 아직도 기 력이 남은 모양이로군. 재밌어, 정말 재밌어.” 해웅은 온갖 풍상(風霜)을 견뎌낸 천년 거목의 모습처럼 당당히 서 있었다. 그런 해웅을 지그시 쳐다보던 을지호의 눈빛에 묘한 기운이 감 돌고 있었다. “해웅이라고 했냐?” “그렇다.” “바다 곰이라… 하하하! 이름 한번 멋지게 지었는데 그래.” 좋게 보면 여유로운 것이었지만 좋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없이 건방지게만 보이는 을지호의 태도에 가장 먼저 노화를 터뜨린 것 은 용부였다. “저, 저, 저런 쳐죽일 놈을 보았나! 감히 어디서!” 분노의 불똥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의 주둥아리를 찢어버려라! 아니면 네놈들의 모가지를 따 버릴 것이다.” 그렇잖아도 자신의 소단주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태도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하여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더구나 동료는 새 따위에게 부상까지 당하는 망신을 당했다. 거기에 용부의 엄한 질책까지 받자 해 적들의 살기는 정점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거룡단의 해적들은 용부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기를 풀풀 풍기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그들은 ‘쿵’ 하 고 갑판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몇 걸음 내딛어 보지도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해웅이 도끼로 갑판을 내리찍으며 나섰기 때문이었다. 일순 행동을 멈춘 해적들이 해웅의 눈치를 살폈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나직하지만 거스르기 힘든 위엄이 담긴 명령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해웅은 을지호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 악균과의 싸움을 보았음에도 자신 있게 나선 것이며 수십 명에게 둘러싸여도 여유 있는 모습은 분명 범인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이 아니었다. 더구나 구역질을 해대는 우스꽝스러움에 그 누구도 깨닫 지 못하고, 심지어 그 자신 또한 한참이 지난 후 비로소 의식하게 된 것이었지만, 을지호가 걸음을 옮기다 갑자기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 가며 보여주었던 움직임은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할 정도였다. 악균도 빨랐지 만 그에 비하면 기는 것만도 못했다. “하지만 소단주. 저놈은…….” 용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결코 만만히 상대할 자가 아닙니다.” 단박에 말을 자른 해웅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 반박을 하려던 용부 는 해웅의 단호한 태도에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닫았다. “하하, 그렇게 막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지.” 을지호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는 용부에게 살짝 미소 를 보이며 웃음 지었다. “아무튼 싸우기 전에 나도 조건이나 걸어볼까?” “…….” 해웅의 침묵이 허락의 의미라 생각한 을지호가 말을 이었다. “시시하게 돈 따위가 아니야. 그래도 남자 대 남자의 싸움인데.” “말해라.” 을지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복종.” “복종?” 해웅이 이마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렇지. 복종. 난 승리의 대가로 네가 나의 종복… 아니 수하라고 하는 게 났겠군. 네가 나의 수하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다고 그렇게 겁 먹을 것은 없다. 평생을 수하로 보내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이긴다면?” “하하, 대단한 자신감인데. 좋아, 내가 패하면 네가 좋을 대로 해라. 수하로 부리고 싶으면 수하로 부리고 목숨을 취하고 싶으면 취해라. 모 든 결정을 너에게 맡기겠다. 응하겠느냐? 까짓 지금이라도 두려우면 물 러서라. 강요하지는 않겠다.” 해웅을 처음 본 순간부터 중원행의 동반자로 삼고 싶었던 을지호는 그가 혹여 거절이라도 할까봐 은근히 심기를 건드리는 말까지 늘어놓 았다. 하나 그런 격장지계(激將之計)는 펼칠 필요도 없었다. 을지호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해웅이 이미 자세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무기를 꺼내라.” 자세를 잡던 해웅이 을지호가 빈손인 것을 의식하곤 외쳤다. 을지호 는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상대의 여유엔 그 이유가 분명 있을 터, 더구나 전신을 부르르 떨게 만큼 긴장감을 주는 고수였다. 보다 확실한 것은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 지만 이정도의 고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압!” 해웅은 두말하지 않았다. 대신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선공(先功)을 취했다. 해웅이 휘두른 도끼가 을지호의 정수리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기세 에 놀라 제법 움츠려 들만도 하였지만 을지호에게선 그런 기색을 조금 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해웅의 도끼가 무서운 기세로 내리 꽂혔지만 을지호는 미동도 없었 다. 다만 도끼의 날이 정수리에 거의 도착했을 때 상체를 살짝 비트는 것이 방어의 전부였다. 목표를 잃은 도끼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바로 그 순간 또다시 갑판을 찍는가 싶던 도끼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을지호의 허리를 노리 며 들이닥쳤다. 해웅의 재빠른 연결에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 다. 그러나 이미 예상했다는 듯 을지호는 믿기지 않는 동작으로 허리를 뒤로 누였다. 도끼의 날이 을지호의 안면과 불과 한 치의 틈을 두고 빗 나갔다. 도끼가 일으킨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지만 을지호는 한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무릎을 접은 상황에서 뒤통수가 거의 갑판에 닿을 정도로 상체를 누였던 을지호는 해웅의 도끼가 허공을 가르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쯧쯧, 이리 느려서야 원. 좀더 날카로운 공격을 해보지 그래.” 을지호의 조롱에 해웅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이를 악물고 그가 지닌 모든 힘을 동원하며 보다 신중히 공격할 뿐이 었다. 거대한 도끼가 춤을 추고 도끼가 일으킨 바람에 때 아닌 폭풍이 갑 판을 휩쓸었다.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해웅 의 공격에도 을지호는 여유 있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해웅의 공격이 해일처럼 들이닥쳤지만 을지호는 처음의 자리에서 고 작 두어 걸음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것도 해웅의 도끼질로 인해 갑판이 패이지 않았으면 있지도 않았을 움직임이었고. 그렇게 일각이란 시간이 흘렀다. 끊길 줄 몰랐던 해웅의 공격이 점차 무뎌지고 악균과의 싸움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호흡도 몹시 거칠어졌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과 시퍼런 불길이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나 그것은 을지호 에 대한 적의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해웅 그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였다. 해웅의 공격이 주춤하는 사이 을지호가 휙휙 팔을 내저었다. “충분히 기회도 주었으니 이제 내 공격을 막아봐야겠지?” 뿌리를 박은 듯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을지호의 다리가 서서히 움직 이기 시작했다. 아니,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허공을 날아 해 웅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턱. “음.”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해웅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호오, 역시 단단하군. 제법 힘이 실렸는데 말이야. 어디 다시 한번.” 을지호의 신형이 좌측으로 움직였다. 해웅이 두 번의 공격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도끼로 몸을 보호하며 재빨리 좌측으로 몸을 틀었다. 하나 그의 시선이 을지호의 몸을 쫓는 사이 을지호는 이미 반대로 돌아가 있었다. 꽝. “크윽!” 이전보다 조금 더 강한 격타음이 들리고 해웅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성 역시 조금 더 커진 듯 했다. “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음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을지호 는 그저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저 양반 고생깨나 하는 것 같더니 이해가 가는구나. 꽤나 단단한 몸뚱인걸.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의 얘기지 나한텐 아니야. 이런, 그렇 게 서둘 것 없잖아. 잠시 숨 좀 돌리지 그래.” 을지호가 번쩍 도끼를 쳐드는 해웅에게 손가락을 흔들곤 몸을 뒤로 뺐다.해웅은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멀쩡히 쳐다만 봤다.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을지호가 철왕을 불러 어깨에 앉혔다. “옛날에 말이야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를 가르치셨던 두 분 할아버 님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겉이 아주 단단한 적을 만나면 어찌 상대해 야 하느냐고 말이야.” 을지호가 철왕의 목덜미를 잡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녀석 때문이었지. 새끼 때부터 하도 비실비실 하기에 집에 있는 약이란 약은 몽땅 먹였는데 이후 몸뚱이가 금강석(金剛石)보다 단 단해지지 뭐냐. 말도 죽어라 안 듣고. 하하, 아무리 두들겨 패도, 심지 어 검기로 공격을 해도 끄덕 없는 너처럼 말이다. 해서 무슨 방법이 없 을까 방법을 강구하다 여쭤본 건데… 뭐라 대답하셨을까? 크크크, 간단 했어. 단단하면 더욱 단단한 힘으로 부수면 된다. 어때? 정말 간단한 이치잖아.” 을지호가 철왕을 날려 보내며 악균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는데 내가 중수법(內家中手法)이라고 하던가. 단단한 겉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속 을 상하게 하는 공격 방법. 조금 전 내가중수법이 사용되었다면 패하는 것은 아마 너였을 것이다.” 검기를 발출 할 수 있는 고수라면 당연히 내가중수법 정도는 알고 있을 것, 어째서 무모한 공격만을 고집하다 패배를 자초했느냐는 질책 이 교묘하게 담긴 말이었다. 안 그래도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는 악균에게 을지호의 말은 가슴을 마구 휘젓는 비수나 마찬가지였다. 악균은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8 “그럼 싸움을 끝내볼까?” 손가락의 뼈마디를 우두둑거리며 나름대로 부드러운 얼굴과 음성으 로 말했지만 해적들의 눈에 보이는 을지호는 한없이 사악하기만 했다. “막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막아봐.” 을지호와 해웅은 정확히 오장의 거리를 격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을지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말을 마쳤을 때 그는 이미 해웅의 코앞에 서서 살짝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을지호의 신형이 해웅의 곁에 나타났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오직 마주하고 있는 해웅만이 뭔가가 어렴풋이 다가온다 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느꼈을 땐 이미 접근을 허용한 다음이었다. 급히 숨을 머금은 해웅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몸을 빼 며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도끼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을지호는 축 이 되는 오른쪽 발을 빙글 돌려 좌측으로 움직이는 해웅의 신형을 쫓 고 하늘로 치켜 올린 왼쪽 발로 어깨를 강타했다. 단순한 공격으로 보였지만 위에서부터 내려찍는 을지호의 발엔 천근 의 힘이 실려 있었다. 제 아무리 강한 몸뚱이를 지닌 해웅이라 하더라 도 온전히 서서 그 힘을 받아낼 순 없었다. 우지직! 무릎을 꿇는 것도 모자라 해웅의 몸은 갑판을 뚫고 들어가 가슴까지 묻혀 버렸다. 하나 해웅은 그 정도로 쓰러질 만큼 약하지 않았다. 어깨 에서부터 밀려오는 고통이 상당했음에도 단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 으로 참아낸 해웅이 갑판을 빠져 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역시 대단하다니까.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감탄인지 아니면 조롱인지 분간하기 힘든 음성으로 입을 연 을지호 가 씨익 웃으며 해웅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위로 힘껏 치켜 올 렸다. 족히 이백 근은 넘게 나갈 해웅의 거구가 너무나 간단히 갑판을 빠져 나왔다. 몸이 갑판을 빠져나오는 순간 때를 놓치지 않고 해웅이 팔을 휘둘렀 다. 솥뚜껑만한 주먹이 을지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런데 을지호는 날아오는 주먹을 뻔히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퍽. 을지호의 고개가 크게 흔들렸다. 입술 한쪽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맵군. 하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수하될 자격이 있지.” 을지호는 흐르는 피를 혀끝으로 살짝 핥으며 말했다. 그리고 잡았던 멱살을 놓으며 손을 활짝 펴 해웅의 뺨을 갈겼다. 짝~! 경쾌한 격타음과 함께 해웅의 몸이 휘청거렸다.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을지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해웅을 응시했다. “끄…….” 괴이한 신음성을 흘린 해웅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하, 괴롭지? 쪼끔 괴로울 거다.” 해웅의 곁으로 다가와 쪼그리고 앉은 을지호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 했다. 아래로 처박혔던 해웅의 고개가 을지호를 향했다. “으으으.” 뭔가를 말하려 하는 듯 했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이라곤 알아듣지 못 할 신음성뿐이었다. 활화산 같이 빛나던 눈빛은 간데없고 마치 꿈속에 서 헤매는 듯 두 눈은 몽롱하게 풀려있었다. 반쯤 벌어진 입에선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지러워 미치겠고 머리가 터질 것 같지? 내가 왜 이럴까 혼란스럽 기도 하고? 하하, 귓속에는 몸의 중심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는데 그곳 에 타격을 입으면 천하의 어떤 고수라도 너처럼 헤매기 마련이다. 머리 가 텅 빈 것 같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데 당해낼 재간이 있나. 뭐, 금 방 회복되기는 하지만. 다소 과하게 손을 쓴 것 같아 미안하긴 한데 너 도 곧 괜찮아 질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마라. 어쨌든 몸이라는 것은 참으 로 신기해. 별것 아닌 것 같은 데도 때로는 이렇게 치명적인 위력을 발 휘하니까 말이야. 하하하.” 더 이상 신음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충격이 조금 완화됐는지 머 리를 감싸고 있던 손도 내려졌다. 하지만 해웅의 눈은 여전히 초점을 잃고 몽롱한 상태였다. 을지호가 입가에 웃음을 지우고 제법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금강불괴(金剛不壞)라고 들어봤겠지? 도검(刀劍)이 불침(不侵)하고 수화(水火)도 어쩌지 못한다는 경지. 아직 본 적은 없지만 말만 들어도 대단할 것 같은 데 말이야. 한데 말이지 겉만 단단하다고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야. 아무런 소용도 없어. 허울만 좋은, 그저 반쪽일 뿐 이다. 진정 금강불괴를 이루고 싶다면 겉만이 아니라 뇌(腦)는 물론이 고 몸 안의 장기까지 능히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천지가 뒤집 히는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不動)의 심기가 합쳐져야 만이 진정한 경지를 이룰 수 있지. 그때 비로소 말 그대로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금강불괴를 이루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을지호가 잠시 말을 끊고 해웅을 살폈다. “네가 익힌 것이 외문무공임을 감안했을 때 그 최후의 경지는 금강 불괴의 이르는 것이다. 오늘 이후론 금강불괴의 경지를 이루는 것을 목 표로 끝없이 정진하도록. 도와 달라면… 까짓 귀찮기는 하지만 도와줄 용의도 있다. 이상 충고 끝.” 해웅은 말이 없었다. 그저 을지호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 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신은 패했다. 그것도 두말 할 것도 없이 완벽 한 패배였다. ‘졌군. 확실하게.’ 패배의 결과는 참으로 쓰디쓴 것이었다. 한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스스로 자책도 해보고 화도 내고 싶었다. 뭐라 변명의 말도 하 고 싶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그것이 뭔지 알 수가 없었 다. 해웅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정작 화를 낸 사람은 전 혀 엉뚱한 사람들이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의 목을 베어 소단주님을 구하지 않고!!” 해웅의 패배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던 용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절대로 살려줘선 안 된다. 몸뚱이는 갈기갈기 찢어 고기밥으로 던 져 주고 나머지 놈들도 모조리 수장(水葬)시켜 버려!” 패한 사람은 승리자의 수하가 된다. 그것이 싸움에 걸린 조건이었다. 약속대로라면 해웅은 꼼짝없이 을지호의 수하가 될 터, 무슨 일이 있어 도 막아야 했다. 만약 이대로 돌아간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추궁이 따 를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거룡단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부가 앞장섰다. 그 뒤로 흉험한 살기를 풀풀 풍기는 몇몇 고참 해 적들이 따르고 나머지 해적들은 겁에 질린 여행객이며 상인들을 을지 호 쪽으로 몰며 주변을 에워쌌다. 산동표국의 표사들이 무기를 꺼내 대 항을 하려했지만 이미 기세에 눌렸는지라 연신 뒷걸음 질 치기에 바빴 다. 자신은 물론이고 애꿎은 사람들까지 수장시켜 버리라는 용부의 말에 지금껏 여유롭기만 했던 을지호의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얼굴에 처음 으로 그늘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경고하는데 함부로 설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을지호가 용부를 향해 싸늘히 말했다. “경고? 건방진 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로구나. 뭣들 하느냐! 놈을 당장 염왕부(閻王府)로 안내하지 않고!” 용부가 코웃음을 치며 호통을 쳤다. 이미 그의 머릿속엔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며 패한 해웅의 모습은 지워진지 오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승부의 결과를 수긍하지 못하고 뒤집으려는 용부의 행동에 노한 해 웅이 입을 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아직도 충격이 남아 있는 것인지 반쯤 몸을 일으키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해웅의 기척에 고개 를 돌렸던 을지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 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해적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들 가까이에 있던 상인 한 사람이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흠칫 놀란 을지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갑자기 계절이라도 변할 것일까? 갑판에 때 아닌 찬바람이 불기 시 작했다. 그리고 을지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것은 곧 엄청난 한기, 살 기로 변해 버렸다. “경고했을 텐데. 함부로 설치지 말라고!” 높낮이가 없는 나직한 음성이었다. 을지호의 살기에 짓눌린 해적들 이 멈칫하며 용부의 눈치를 살폈다. “뭣들 하느냐! 당… 큭!” 눈치를 보는 수하들을 다그치던 용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 었다. 그의 목이 어느새 다가온 을지호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기 때문이 었다. “아나? 배에 올랐을 때 다짜고짜 살상부터 했다면 너희들은 죽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었을 거다. 그러지 않았기에 두고만 봤다.” “커…컥!”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지 용부가 눈을 뒤집으며 발버둥을 쳤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족속들이 바로 너희 같은 놈들이다. 힘없고 가 난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재산도 빼앗고 끝내는 목숨까지 해치는 놈들.” 을지호의 눈이 점점 충혈 되기 시작했다. “으악!” 을지호가 크게 팔을 휘두르자 사오 장의 거리를 날아간 용부는 갑판 한 구석에 처박히며 비명을 질러댔다. 형편없이 처박힌 용부의 몸은 몇 번인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곧 잠잠해 졌다. 단숨에 우두머리인 용부를 잠재운 을지호가 어정쩡하게 서있는 해적 들을 노려보았다. “덤벼.” 갑판을 휘감았던 살기가 폭풍이 되어 해적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거 친 바다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노략질을 했다지만 이런 종류의 살기를 경험해 보지 못한 해적들로선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을지호가 등에 매고 있던 철궁을 손으로 옮겼다. 을지호가 궁을 들 자마자 철왕 또한 공중에서 서서히 선회(旋回)를 하며 해적들을 위협하 기 시작했다. “다시는 노략질을 못하게 될 것이다.” 을지호가 화살도 없는 활시위를 당겼다. 바로 그때였다. “자, 잠깐…….” 중심을 잡지 못하여 비틀거리는 해왕이 을지호에게 다가왔다. 그 음 성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던 을지호는 당겼던 시위를 슬쩍 풀며 고 개를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을지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 해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짓이냐! 나를 승부에서 지고도 인정 못하는 얼간이로 만 들 셈이냐!!” 반박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무기를 거둬들여라! 비록 해적들이 모여 만든 곳이긴 하나 거 룡단은 한번 내뱉은 약속은 어겨본 적이 없다. 당장!!” 그렇지 않아도 을지호의 기세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해적들은 해웅의 추상같은 질책에 치켜세웠던 무기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더러 는 불만어린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이미 패배의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는지 해웅은 몸가짐 부터 어투까지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용서해 주시길…….” 해웅이 허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수하들로 인해 얼굴을 붉히기 는 했지만 용서를 구하는 해웅의 태도는 조금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 기만 했다. 들고 있던 궁을 다시 등 뒤로 옮긴 을지호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너…….” 해웅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마음에 든다.” “아……!!” 해웅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활짝 펴졌다. 거룡단의 소단주로 지금껏 많은 공경을 받았던 해웅이었다. 수도 없 이 많은 칭찬도 들어봤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무공을 익히고 처음으로 상대를 맞이했을 때의 긴장감과 떨림, 또 그 비무에서 승리했을 때 가슴에 밀려들었던 만족감과 환희도 지금의 두근거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든다.’라는 말.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이 툭 던진 한마디 일수도 있었다. 하나 그 한마디에 해웅의 심장은 그 자신조차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었다. “뭐, 뭐야! 감격할 일이 그렇게도 없었냐? 사내자식이 그 정도에 감 격해 하긴… 나 이거야 원.” 을지호는 해웅의 격정적인 반응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내가 이겼다는 것에 불만은 없겠지?” “없습니다.” “그럼 패했을 때 어찌 된다는 것도?” “저는 이미 주군의 수하입니다.” 해웅이 한쪽 무릎을 꿇으면 대답했다. 을지호가 만족한 듯 박장대소 를 했다. “하하, 좋아. 너는 나와 중원으로 간다.” 을지호가 해웅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당장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힘차게 대답하며 몸을 돌린 해웅이 망연자실한 눈으로 둘의 대화에 기를 기울이던 해적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든 물건을 당장 돌려주고 즉시 배에서 떠나라. 나는 새로 모신 주군을 모시고 갈 것이다.” “소… 소단주 그럴 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수하들의 부축을 받고 있던 용부가 고개를 흔 들었다. “용두령, 이미 결정 난 일이오. 아버님께 그리 전해 주시구려.” “하, 하지만…….” “끝난 일이라고 하지 않았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마시오.” 해웅은 냉정할 만큼 차갑게 용부의 말을 끊어버렸다. 용부는 뭐라 말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조금은 안 된 생각이 들었는지 을지호가 나섰다.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랴. 평생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일이 끝나는 대로 돌려보내겠소. 이무기가 아니라 진짜 용을 만들어서 말이오. 하하하!” 용부의 시선이 을지호에게 향했다. 모든 원인이 을지호 때문이라 생 각하는 그이기에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해웅의 마음이 이미 굳어져 있고 조금 전 을지호가 보여주었던 끔찍한 경험을 떠올리며 애 써 내색하지 않았다. ‘후~ 일났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본 채로 돌아가 엄히 추궁당할 일만 남은 것이었다. “돌아간다.” 한참을 망설이던 용부가 몸을 돌리며 힘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9 단단히 결심을 굳힌 해웅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한 용부와 거룡단의 해적들은 통행세 명목으로 받았던 돈과 물건의 대부분을 토해내고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선장 마충과 그의 충고를 들 은 상인들이 이를 극구 반대했다. 어차피 이번 한번만 장사를 하고 끝낼 것도 아닌지라 아무래도 눈치 가 보였는지 해웅이 모조리 돌려주라 명을 했고 용부 또한 그리 하려 했음에도 그들은 되려 최초 지불했던 것에서 절반 정도는 통행세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하들의 노고(?)도 있고 상인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 기에 한참 동안을 고민 하던 해웅은 결국 을지호에게 무언의 허락을 얻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작별인사를 할 때까지 죽을상을 하고 있던 용부와 수하들을 실 은 해적선이 떠나자 곧 멈추었던 상선도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시작 했다. 거룡단의 소단주에서 일개 수하로 변한 해웅과 남궁세가를 재건하기 위해 중원으로 향하는 을지호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 거룡단의 해적들이 들이닥치고 해웅이 을지호를 수행하기 시작한지 도 이틀이 지났다. 여행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어느덧 항주를 코앞에 둔 상선의 갑판은 생각보다는 달리 몹시 한가 했다. 물론 그것은 을지호가 자리 잡고 있는 갑판의 후미에 국한된 것이었다. “허, 무식해. 정말 무식한 방법이로다.” 자리를 깔고 한가로이 갑판에 누워 있던 을지호가 낡다 못해 이제는 글씨조차 판독하기 힘들 정도로 해어진 책자 하나를 넘기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한데 막 요기를 했는지 포만감에 배를 슬슬 문지르 고 있던 을지호의 모습은 심한 배 멀미와 음식에 적응을 못해 아사( 餓死)직전의 위기까지 몰렸던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제 겨우 이 틀이 지났지만 이미 예전의 신색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수하가 된 해웅이 나름대로 극진히 모셨기 때문이 기도 했지만 을지호로 인해 위기에서 벗어난 산동표국과 선장 마충, 그리고 여러 상인들이 을지호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 과였다. “세상에 우리 가문만큼 무식하게 무공을 가르치는 곳이 또 있을까 했 더니 이것을 남긴 사람도 못지않아. 아니지 어쩌면 능가할지도 모르 겠군.” 책장을 넘기며 넘길수록 을지호의 표정은 황당함 그 자체로 변하고 있었다. “내공심법(內攻心法)은 훌륭하군. 이만하면 뭐라 흠잡을 곧이 없어. 그러나 이건 도대체가…….” 내공심법을 지나 이후 적혀있는 무공을 상기하자 그나마 살짝 빛나 던 을지호의 눈동자엔 결국 황담한 그 자체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 좋아. 까짓 이런 말도 안 되는 무공을 만든 사람은 뭐, 그렇다 고 치자. 그런데 저놈은 뭐야? 그것을 죽어라 익히는 저놈은 또 뭐 냐고!!” 을지호는 질린 표정으로 책을 던지고 무공수련에 한참인 해웅을 바 라보았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무공수련에 한참인 해웅, 사람들에게 괜한 공포심 을 주지 말라는 핀잔 때문에 갑판 한 구석으로 내몰린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기마(騎馬)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빡! 을지호가 시선을 돌린 것과 때를 같이해 둔탁한 격타음이 선상에 울 려 퍼졌다. “내가 미치지.” 너무나 규칙적으로 귓속을 파고들며 머릿속마저 울려버리는 타격음 에 인상을 찌푸리며 벌떡 몸을 일으킨 을지호가 주먹으로 머리를 두 들겼다. 벌써 한 시진 째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맞는 해웅이나 때리 는 두 수하들의 모습에선 그 어떤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몽 둥이를 휘두르는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고 신중한 것이 마치 종 교의식이라도 치루는 듯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겹지도 않냐?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래?” “한 시진을 채우려면 아직도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주군.” 막 몽둥이를 휘두르고 호흡을 가다듬던 사내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 며 대답했다. “남긴 뭐가 남아 정확히 한 시진 지났어. 이제 그만해.” 을지호의 짜증 섞인 음성에 두 사내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멈칫거 렸다. 그러자 지금껏 단 한번도 자세를 풀지 않던 해웅이 굽혔던 무 릎을 폈다. “알겠습니다. 그만 하도록 하지요. 너희들도 이제 그만 쉬어라.” 해웅이 옆에 놓아둔 옷가지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예. 소단주님.” 두 사내가 동시에 대답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해웅과 어렸을 적부터 형제처럼 자라온 초번(草蕃)과 뇌전(雷電)은 떼어놓으려면 차라리 죽이고 가라며 막무가내로 우기며 따라온 불청 객들이었다. 태어난 곳이 풀이 무성한 풀밭이라 하여 초번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 는 사내는 적당한 키에 해적에겐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벼락이 치던 날 바닷가로 떠밀려 왔다는 뇌전은 이름대로 강렬한 인상을 자랑했다. 그리고 을지호는 그 둘의 이름을 한번에 아울 러서 번뇌라 부르고 있었다. 물론 초번과 뇌전은 질색을 하며 싫어했지만. “어이, 번뇌!!” “예, 주군.” 을지호의 음성에서 노기 어린 기운을 감지한 초번과 뇌전이 다소 불 안한 기색으로 대답을 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을지호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번뇌, 너희들이 나를 진정 번뇌(煩惱)케 하는구나.” 을지호가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초번보다는 조금 강단이 있던 뇌전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내가 조금 전 명령을 내렸다. 그만 두라고.” 을지호의 시선이 해웅에게 향했다. 을지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 치를 챈 해웅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 기회에 확실해 해 두자. 너희들이 모시는 해웅이 나에겐 어떤 위 치냐?” “수…하입니다.” 뇌전이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면 내 수하의 수하들인 너희들에게 나는 무엇이냐?” “하늘입니다.” 초번이 발딱 고개를 들고 재빨리 대답했다. “뺀질거리긴. 공연한 아부 따위는 하지 말고 똑 바로 대답해.” “당연히 수하입니다.” 아무렇게나 옷을 걸친 해웅이 다가오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의 명령이 먼저냐, 해웅의 명령이 먼저냐?” “당연히 주군의 명이…….” “네게 물은 것이 아니다. 해웅.” 을지호가 정색을 하며 노려보자 해웅은 황급히 입을 닫고 말았다. “대답해라.” “주군의 명이 먼저입니다. 죄송합니다.” 뇌전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해웅은 그들이 평생 을 모셔왔던 친구이자 형제요, 주군이었고 을지호는 고작 이틀 전에 새로 모시게 된 주군이었다.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을지호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을 지낼 것도 아 니고 처음부터 짚고 넘어갈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해야 했다. 을지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을 지켰다. 질책도 하지 않고 그냥 쳐다만 보았다. 질책을 당하는 것보다 그 시선에 더욱 부담을 느꼈는지 초번과 뇌전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자꾸만 위축되는 모습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을지호가 입을 열었다. “흠, 좋아, 지금이라도 알면 됐다. 지난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 다. 차후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입니다. 주군.” 초번과 뇌전이 질식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리고…….” 굳었던 얼굴을 피고 어느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을지호가 은근 히 목소리를 깔았다. “그… 주군이라는 말, 어떻게 다른 말로 바꾸면 안…….” 을지호의 음성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안됩니다.” 을지호의 말을 단번에 끊은 해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초번과 뇌전이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을지호는 어이가 없 는 듯 연신 헛웃음을 흘려댔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해웅이 슬그머니 음성을 낮추며 말을 이었다. “험험, 어쨌든 그것은 불가합니다. 수하된 입장에서 주군을 주군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수하라고 꼭 주군이라 불러야 하냐? 공자(公子)도 있고, 두목… 아 니지 이건 아니군. 어쨌든 이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영 불편해서 그래. 그러니 이제 그만 고집 좀 꺾어라.” 주군이란 호칭 때문에 그들은 벌써 이틀 동안 지루한 언쟁을 벌였다. 을지호의 말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따르면서도 해웅은 주군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조금의 고집도 꺾지 않았다. 또다시 지리한 논쟁이 시작될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주군이라는 소리가 왠지 듣기 거북했던 을지호는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존칭을 바꾸고 싶어 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조 금 전 주군께서 번뇌… 험, 초번과 뇌전에게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입 니까? 제겐 ‘수하면 수하답게 처신하라.’ 는 말로 들렸습니다만.” “너희들이 나를 따라 온 순간부터 이미 생사(生死)를 함께 하는 사이, 꼭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하나 아무리 허물없이 지 내고 생사를 함께 한다 해도 주군은 주군이고 수하는 수하일 뿐입니다.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군은 주군이고 수하는 수하라… 좋아, 그렇다면 주군 된 입장에서 내린 명령이라면?” “죽으라면 죽겠지만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불복(不服)합니다.” 을지호가 징그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뒤가 막혀도 이렇게 막힐 수는 없었다. “그럼… 형님이라 부르는 것은 어떨까?” “뒷골목에서나 그리 부릅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라는 듯 해웅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한 가지 뿐이군. 수하로 하기론 한 것을 물리고 이 참에 아예 형제의 예를 맺자.” 을지호의 음성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나 해웅은 요지부동(搖之不 動)이었다. “차라리 저보고 죽으라고 하십시오. 그게 훨씬 빠를 겁니다.” “허!” 최후의 조건을 내걸었고 당연히 허락할 것이라 여겼던 을지호는 찰 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 나오는 해웅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을지 호의 신색을 살피며 조바심을 내는 초번과 뇌전과는 달리 해웅은 의당 할말을 했다는 듯 당당하기만 했다. “나 원…….” 더 이상 말도 잇지 못하고 기도 안찬다는 표정으로 한참동안이나 해 웅을 쳐다보던 을지호의 얼굴에 결국 쓴 웃음이 배어 나왔다. “후~ 졌다, 졌어. 관두자. 주군이 되었든 두목이 되었든 네 마음대로 불러라.” 나름대로 고집 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을지호였지만 결국 해웅 의 우직함에 두 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정말 융통성이라곤 벼룩의 간(肝)만큼도 없구나. 좋아, 어쨌든 그것 은 그렇다 치고…….” 을지호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해웅의 몸을 살피곤 다소 걱정 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맞고도 괜찮은 거냐?” 해웅이 쑥스럽다는 듯 살짝 몸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매일 같이 하는 일인데요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 다.” 보통의 사람이 그 시간 동안, 또 해웅이 맞았던 강도로 몽둥이세례를 받았다면 적어도 열댓 번은 더 염라대왕을 알현하고 왔을 것이다. 하나 한시진에 걸친 몽둥이찜질이 해웅에게 남긴 것은 고작 다소 붉게 변 한 피부뿐이었다. “하긴, 검도 통하지 않는 몸이니 이상할 리가 것도 없겠지. 물어보는 내가 바보다. 아무튼 그 단단한 몸이 해웅, 너의 최대이자 최고의 무 기다.” “감사합니다.” 칭찬엔 장사가 없다던가. 해웅이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 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지금의 수준에 안주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강해지기까지는 보다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도?” “예.” “좋아. 그렇다면 나도 오늘부터 너의 수련을 도와주마.” “가, 감사합니다. 주군.” 감격한 해웅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는 무슨, 당연한 것을. 아울러 번뇌 너희들의 수련도 오늘부터 시작하자. 해웅과는 조금 궤를 달리 하겠지만 어차피 기본적인 것은 함께 익히면 된다.” “무…무공을?” 초번과 뇌전이라고 무공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거룡단 내에서도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무공을 익힌 고수가 있었고, 물론 극히 드물뿐 더러 강호의 고수들에 비하면 무공도 아니었지만, 약간의 가르침도 받았다. 하나 역시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와는 비교할 수 도 없는 고수가 무공을 사사(師事)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을지호의 무공이 어떠한지는 지난 해웅과의 싸움에서 직접 보았다. 게다가 잠깐 동안 보여주었던 신위(神威)는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단지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에 그들 자신은 물론이고 그 많은 해 적들이 꼼짝도 못하지 않았던가. “가…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재빨리 무릎을 꿇은 초번과 뇌전 역시 해웅과 마찬가지로 크게 감격 해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하, 그렇게 고마워 할 것까지야 없지. 니들이 강해지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 또 우리가 어디 남남이더냐. 하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아. 시간도 그리 많지 않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지만 꽤나 힘들 거다.”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힘을 다해 익히겠습니다.” 해웅과 초번, 뇌전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다. 을지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그런 각오라면 충분하다. 우선 한 가지만 물어보자.” “하명하십시오.” “언뜻 보니 내공을 익히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익히고 있는 것이 저 책자에 있는 내공심법(內攻心法)이냐?” 을지호가 해웅이 지닌 무공의 연원(淵源)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읽다 가 질린 표정으로 옆으로 던져 논 책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예. 제가 먼저 익히기 시작하고 아버님께 청을 해 이후 초번과 뇌전 도 함께 익혔습니다.” 해웅의 대답에 을지호가 즉시 되물었다. “얼마나 되었지?” “어릴 적부터 익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음, 가르침을 주던 양(楊)두령이 죽은 다음부터니까 한… 오륙년 된 것 같습니다.” 해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초번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육년입니다.” “흠, 좋아. 마음에 들어.” 뭐가 좋고 마음에 드는지 궁금했지만 해웅은 함부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런 해웅의 마음을 알았는지 을지호는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일엔 때가 있듯 무공에도 그것을 익혀야 하는 시기가 있다. 익 힐 때를 놓쳐선 절대로 안 되지. 나이가 들어 뼈와 근력이 굳은 다음엔 아무래도 성취도 늦고 효과가 반감되거든. 그나마 해웅 네가 익힌 외공은 그런 틀에서 조금 벗어나 있지만 내공만큼은 다르다. 물론 사 물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어려도 안 되겠지만 가급적이면 몸 에 탁기(濁氣)가 스며들기 전에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 면에서 때를 놓치지 않은 너희들은 운이 좋은 것 같다.” 초번이 공손히 말했다. “그 당시 양두령이 애를 많이 썼습니다.” “흥, 익히기만 하면 뭐해! 시키는 대로 하고 게으름도 피지 않고 꾸 준히 익혔지만 그래봤자 별로 위력도 없잖아. 남들보다 그냥 조금 건 강하게 만들어 준 것만은 사실이지만.” 퉁명스레 핀잔을 준 뇌전이 실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뇌전을 보며 을지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잘 모르는 모양이군. 자신들 몸에 꽤나 많은 기운이 잠재해 있는 것 을. 내공이 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희들을 가리킨 양두령인가 하는 자의 안목과 실력이 일천해서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어긋나지 않고 지금에 이르다니… 기초가 정말 제대로 잡혔 어. 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사부를 만났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 조금은 아쉽기도 하군. 훗, 어쨌든 재수가 좋은 건지 아니면 무공이 좋은 건지…….’ 어쩌면 내공심법이 지닌 현묘함이 그들을 이끌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에 까지 생각을 하며 을지호는 또 한번 책자에 시선을 주었다. 겉표지는 손때가 묻어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제목마저 보이지 않는 책자는 바닷바람의 힘을 빌려 스스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책이 담고 있는 무공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해웅 등이 익힌 현원기공(玄元氣功)이라는 내공심법이었고 다 른 하나는 말도 안 되는 수련법으로 해웅의 아버지이자 거룡단의 단 주인 해청(海靑)을 어이없게 만든, 그저 외자로 극(極)이라 표현한 외 문무공이었다. 처음 노략질한 수확물에서 우연찮게 한권의 책을 발견한 해청은 그 내용을 살피다 쓸모없는 무공이라 생각하고 버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책의 전반부에 나와 있는 현원기공이 그의 뇌리를 맴돌 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막 일곱 번째 생일을 지난 아들 해웅에게 전 해 익히게 하였다. 그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괜시리 쓸데없는 생각이나 걱정은 하지 말고 수련에 힘써. 절세의 신공(神功)이라 부르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현원기공은 네가 생각 하는 그저 그런 내공심법이 아니니까.” “정말입니까?” 뇌전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거짓말처럼 들려? 거짓말은 해서 뭐하게?” “아,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는 뇌전의 얼굴이 환해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해웅과 초 번의 표정 또한 뇌전과 다르지 않았다. “쯧쯧, 그렇게도 좋을까.” 을지호는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해웅 등을 보며 혀를 찼다. “그건 그렇고… 무공을 가르치려면 우선은 실력을 좀 알아봐야겠지? 뭐, 대충 감은 잡았지만 말이야. 철왕아.”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0 철왕이 우아한 자태로 날아와 을지호가 내민 팔뚝에 와 앉았다. 두어 번 깃털을 쓰다듬어 준 을지호가 철왕을 다시 날리며 뇌전을 불렀다. “뇌전, 실력발휘 한번 해봐.” “예? 그럼 실력을 본다는 것이…….” 철왕이 보통 매가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이틀 전 동료를 공격하여 꽤나 큰 부상을 입히는 것도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엔 철왕의 움직임이 빠르기도 했거니와 동료가 방심한 탓이 더욱 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모든 것을 떠 나 매하고 비무라니……. 뇌전의 얼굴이 떫은 감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매하고 비무를…….” 함부로 화도 내지 못하고 울상을 짓는 뇌전에게 을지호가 싱긋 미소 를 지으며 턱을 치켜 올렸다. “하하, 여유만만인데 그래. 그런데 불만을 털어 놓을 시간이 있을까? 나 같으면 당장 몸조심부터 하겠는데 말이지.” 을지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뇌전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그의 시야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진해오는 철왕의 모습이 잡혔다. 활짝 폈던 날개를 어느샌가 접고 부리를 앞세우며 날아드는 철왕은 마치 시위를 떠난 한 자루 화살과도 같았다. “뭐, 뭐야!”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눈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뇌전은 철왕의 가공할 움직임에 기겁을 하며 들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다. 급히 휘 둘렀음에도 몽둥이는 철왕이 날아오는 방향을 정확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평소 다른 것은 몰라도 몽둥이질이라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치던 뇌전의 말대로 그저 놀라 바라만보다 요절이 났던 동료 해적과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었다. ‘호오~.’ 뇌전이 그토록 빠르게 대항할 줄 몰랐다는 듯 을지호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극히 잠시였지만. 을지호의 반응을 설명이라도 하듯 회심의 미소를 짓던 뇌전의 입에 서 다급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이후 뇌전이 겪어야 할 고 달픈 시련의 전조를 알리는 소리였다. 접었던 날개를 활짝 펴서 급작스럽게 속도를 줄이고 간단히 몽둥이 를 피해낸 철왕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뇌전의 가슴을 할퀴었다. 발톱이 스쳐 지나간 곳의 옷이 찢어지고 피부에선 피가 배어 나왔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뇌전이 재차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철왕은 이미 몸에서 떨 어져 나간 뒤였다. 한낱 미물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뇌전이 발을 구르며 분해했다. 무엇보다 을지호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어허, 이놈아. 누가 피 를 보라고 했느냐! 살살하지 못해.’ 라고 철왕을 나무라는 말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첫 번째 공격을 성공시킨 철왕은 서두르지 않았다. 뇌전의 머리 위에 서 유유히 선회를 하며 기회를 노렸다. 같은 망신을 또다시 당하기 싫었던 뇌전은 바싹 긴장된 눈으로 철왕의 움직임을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서 틈을 발견한 것일까. 철왕은 너무나도 유유히 뇌전 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와 공격을 성공시켰다. 다만 을지호의 호통이 효력이 있었는지 큰 상처를 내지는 않고 그저 살짝 건드리고 물러날 뿐이었다. 그것이 더욱 수치스러웠던 뇌전은 공격이 있을 때마다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의 동작으론 철왕의 움직임을 쫓아가기에 무리가 있었다. 특히 철왕은 뇌전이 들고 있는 몽둥이의 사정권을 정확하게 파악하 고 있다는 듯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는 영특함마저 보여주고 있었다. 접근하는 척 날개 짓을 하여 몽둥이를 유인하고 몽둥이가 헛되이 허공 을 가를 때 재빨리 날아들어 머리, 어깨, 가슴을 할퀴고 쪼아댔다. 심지어는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사타구니까지 툭 건드리며 자존 심을 긁어댔다. “그만했으면 된 것 같다. 이리와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뇌전에 대한 철왕의 일방적인 공격은 더욱 거세 어지고 뇌전이 거의 전의를 상실할 쯤 을지호가 살짝 휘파람을 불어 철왕을 불러들였다. 털썩. 철왕이 물러가고 공격이 끝나자 뇌전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 다. 그리고 멍하니 고개를 돌려 을지호와 을지호의 어깨에 올라 태연히 깃털을 고르는 철왕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떤 일이 일 어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허탈하고 참담한 표정이었다. 비단 뇌전만이 아니었다. 낭패를 당하는 뇌전의 모습을 보며 처음엔 웃고 떠들던 초번과 해웅 의 얼굴에도 굳을 대로 굳어져 있었다. 웃음은 이미 천리 밖으로 사 라지고 없었다. 뇌전과 철왕의 싸움을 곁눈질로 흥미롭게 지켜보던 선원과 상인들은 역시 연신 탄성을 토해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질 못했다. “쯧쯧, 그러게 내 조심하라고 했지?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지만 이놈 이 얼마나 음흉한 놈인데…….” 그 순간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깃털을 고르고 있던 철왕이 움직임을 딱 멈추고 을지호를 노려봤다. “고개 돌려 이놈아.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아는데. 어쨌든 수고 는 했다.” 눈을 부라리다 마지막엔 미소로써 철왕을 보듬어준 을지호가 철왕을 날려 보냈다. 철왕은 할일을 다했다는 듯 돛대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 았다. 잠시 철왕의 모습을 지켜보던 을지호는 갑판에 주저앉아 고개를 처 박고 일어날 줄 모르는 뇌전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별다른 말도 없이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주변을 거닐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뇌전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해웅과 초번은 한참 전부터 눈을 말똥말똥 빛내며 을지호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똑 같은 보폭과 일정한 방향으로 걷기를 몇 차례, 을지호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하게나마 발자국이 남았다. “좋아,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도록.”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을지호가 말했다. 해웅을 중심으로 좌측에 초 번 그리고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뇌전이 우측에 섰다.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는데……. “내가 너희들에게 처음 가르쳐줄 무공은 보법이다. 그 이유는 알고 있겠지?” “…….” “으이구!! 알았으니까 서로 눈치는 보지 마라. 이제부터는 가급적 질 문은 자제하도록 하겠다. 내가 처음으로 보법을 선택한 이유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너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보법이라 여겼을 뿐이지.” 잠시 말을 끊은 을지호가 뇌전에게 시선을 주었다. “조금 전 싸움을 상기해 보자. 네가 패한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뭐라고 생각 하냐?” “느렸습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뇌전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제대로 알고 있군. 그래, 느렸다. 형편없이 느렸지. 철왕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그것은 오직 공중에서 하강할 때로 국한된다. 만약 네가 보법에 대해 조금의 조예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 은 않았을 거다. 조금 더 거슬러 가볼까?” 을지호의 눈이 해웅에게 향했다. “이틀 전, 악가의 무인과 싸움을 했을 때 비록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단한 몸뚱이와 운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 기 억으론 너는 상대의 움직임을 단 한번도 따라잡지 못했다. 한번 있었던가 . 그의 발이 부서진 갑판 사이로 빠졌을 때.”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는 해웅도 뇌전처럼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그리 부끄러워 할 건 없다. 이기긴 이겼으니. 하지만 항상 그런 요행이 있을 것이라 바란다면 안 되겠지? 자만하지 마라.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오게 될 것이고 후회를 하는 순간엔 이미 돌이킬 수 없 는 법이니까.” 부끄러워하는 해웅의 모습에서 자만심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혹시 모를 노파심에 단단히 경고를 한 을지호가 담담한 어조로 본격 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요인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무공 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내공도 필요하고, 적당한 무기도 필요하다. 감당하지 못할 강한 상대를 만나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도리어 투기(鬪技)로 바꿀 수 있는 정신 력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 그리고 뇌전과 철왕의 싸움에서 보았듯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는 부동심(不動心)도 빠 질 수는 없겠지. 또 싸움을 벌이는 지형지물이 승패를 좌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날의 날씨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해웅 등은 혹여 한마디라도 놓칠까 정신을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그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을지호의 음성에 보다 힘이 실렸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상대의 움직임을 압도 할 수 있는 아니, 압도 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에게 뒤지지 않는 움직임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고 훌륭한 무기로 공격을 한 다 해도 적중시키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 가장 효과적인 공 격은 최소한의 힘과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보법이다. 물론 따로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몸이 날랜 사람이 있으나 반드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을지호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가리켰다. “그런 이유로 나는 우선 간운보월(看雲步月)이라는 보법을 가르치려 한다. 대충 눈치는 챘겠지만 갑판에 만들어 놓은 발자국은 보법을 익 히기 위한 보로(步路)다. 원래 보법이라는 것도 내공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너희들은 아직 몸에 쌓인 기운을 다스리지 못하니 우선은 보로만 익혀라. 기의 운용법은 조만간 따로 가르쳐 주겠다. 배가 언 제 도착한다고 했지?” “내일 아침 경에는 도착한다고 들었습니다.” 초번이 재빨리 대답했다. “흠, 그렇다면 채 하루가 남지 않은 셈인가. 충분하군. 그때까지 외울 수 있겠지?” “불가능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어찌 익히란 말입니까?” 해웅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가 익히라고 했냐? 저게 단순해 보여도 걸음걸음마다 얼마나 많 은 변화들과 그때마다 필요한 기의 운용법이 숨겨져 있는데. 더구나 한 문파의 저력이 담겨 있는 보법을 하루만에? 어림 반 푼도 없는 소리지 . 내가 말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보로만을 외우라는 것이다. 그 안 에 깃들어 있는 변화와 의미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그냥 방향만.”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을지호의 말을 이해한 해웅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보법 하나만 익히고 있으면 공수에 있어 탁월한 힘을 발 휘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을 마치려던 을지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손에 깍지를 채우며 나 직하게 말을 했다. “배가 도착할 때까지 못 외우는 인간은 철왕과 싸울 각오를 해.” “크…….” “처, 철왕…….” 을지호가 마지막으로 던진 한마디는 해웅의 입가에 걸린 미소, 드디 어 무공다운 무공을 익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몸을 떨고 있는 초번과 뇌전의 들뜬 마음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셋의 시선이 일제히 돛대위의 철왕에게 향했다. 철왕은 화답이라도 하듯 날개를 활짝 펴 주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1 배는 예정대로 항주의 여러 포구(浦口)중 하나에 안착했다. 을지호는 곧 해웅에게 명을 내려 배편을 구했다. 최소한 며칠은 기다 려야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행히 해남도로 향하는 배가 있었다. 배 시간이 촉박해 여독을 풀 시간도 없다는 것이 다소 불만이었지만 마 냥 기다리는 것 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배를 구하고 항주에서 해남도로 출발하기 직전, 을지호는 해 웅 등에게 자신이 어째서 중원에 왔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도산(刀山)이 길을 막고 검림(劍林)의 흉험한 기운만이 자신들을 기 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지닌 무공으론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최후의 선택을 하게 했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저희들에게 신의를 저버리는 소인(小人)이 되라는 것입니까!’ 라는 해웅의 거센 질타만 들었을 뿐이었다. 을지호는 그저 씨익 웃는 것으로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을지호가 그들을 수하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을지호를 진심으로 따르 기를 결정한 순간부터 그들의 신분은 바다를 주름잡던 거룡단의 해적 에서 남궁세가의 무인으로 바뀌었다. 그러자면 의당 그만한 자격과 실력을 갖추어야 했고 자격과 실력을 갖추게 해 주는 무공은 오직 남 궁세가의 무공뿐이었다. 배에 승선하자마자 갑판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을지호 일행은 잠을 잘 때와 요기를 위한 잠깐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무공을 가 르치고 익히느라 온 힘을 다했다. 특히 을지호가 중원행의 목표를 사 실대로 얘기해 준 이후부터 해웅 등이 보여준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남궁세가가 어떤 곳이던가. 지금은 비록 몰락했다지만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세인들의 추앙을 받던 곳이었다. 그런 가문을 재건하기 위함이라 했다. 아무리 잘나야 일개 해적뿐이었던 그들이 어쩌면 그 대역사(大役事)의 주역이 될 수 도 있는 것이었다. 해웅 등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위해 을지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갑판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었다. 해웅과 초번, 뇌전은 항주에 도착하기 전 하루 만에 간운보월의 보로 를 익히라는 을지호의 명령을 지켜내지 못했다. 다만 예상보다 배가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철왕과의 비무를 요행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이번 엔 달랐다. 피할 길은 없었다. 방법이 있다면 오직 을지호가 제시한 시간 내에 익히는 것뿐이었다. 일전의 비무를 통해 철왕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던 뇌전은 물론이 고 뇌전과 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해웅과 초번도 죽을힘을 다해 수련에 임했다. 하나 태어나 난생처음 제대로 된 무공, 그것도 시중 잡배들이 익히는 그저 그런 무공이 아니라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오 랜 세월 동안 익히고 발전시켜온 보법 중 하나를 익힌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을지호와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제시간에 해내지 못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철왕과의 비무였다. 철왕은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그들을 철저하게 농락했다. 특히 옷 이 찢어지고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고 울상인 초번과 뇌전과는 달리 자신의 몸을 믿고 대항하던 해웅은 철왕이 정수리를 집중적으로 쪼아대 는 통에 하마터면 머리에 구멍이 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철왕과의 비무를 통해 상처 입은 자존심은 그들의 분발을 더욱 촉진 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을지호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간운보월의 보로를 완전히 숙지할 수 있었다. 배에 오른 지 꼭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간운보월의 보로를 어느 정도 숙지한 그들에게 주어진 다음 무공은 검법이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남궁세가 무공의 시작이요, 끝이라 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구결(口訣)과 기수식(起手式)만을 가르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닷새 였다. 이후, 가장 기초적인 검로(劍路)를 가르쳤고 어느 정도 진전이 보이 자 검로에서 서서히 벗어나 변초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을지호는 검법을 펼칠 때의 몸놀림을 상당히 중시하여 가르쳤는데 아무리 단순 한 동작을 행할 때라도 반드시 간운보월의 보법을 이용해 몸을 놀리 게 만들었다. 처음엔 어색하기도 하여 발이 꼬이고 자세 또한 영 이상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피나는 수련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결코 짧다고만 말할 수 없는 한달이란 기간은 그러나 간운보월과 창 구무애검법 단 두 가지의 무공을 배우는 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 었다. 순간의 낭비도 없이 일각을 아끼고 또 아껴 수련에 힘썼지만 시간은 무심히 흘러 항주를 떠난 배는 어느덧 해남도를 지척에 두고 있었다. “자, 마지막이다. 힘을 내라.” 이마에 난 땀을 훔치며 을지호는 손에 들고 있던 쇠몽둥이를 크게 휘 둘렀다. 바람을 가르고 해웅의 복부를 향하여 쇄도하는 쇠몽둥이는 마지막이라는 상징적 의미 때문인지 다른 어느 때보다 강하고 빨랐다. 퍽. “크윽.” 둔탁한 격타음과 함께 신음성이 터지고 해웅의 몸뚱이가 이장도 넘 게 주루룩 밀려 쓰러졌다. “자, 빨리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돌봐라. 그렇게 어물쩍거리지 말고.” 을지호의 질책에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해웅이 눈을 감고 기마자세 를 취했다. “늘 말했지만 억지로 기운을 다스리려 해서는 안 된다. 물 흐르듯 기 의 흐름에 맡기도록 해라.” 쇠몽둥이를 저만치 집어던진 을지호가 안쓰러운 표정과는 달리 냉정 한 음성으로 말했다. 힘들어하는 해웅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이 해웅이 무공을 익히는 과정이었고 을지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해웅을 보다 혹독하게 몰아치는 것이었다. 기마자세를 취하며 운공을 하는 해웅을 잠시 살피던 을지호가 또 다 른 곳에서 수련에 열심인 초번과 뇌전에게 걸어갔다. 그들은 을지호에게 배운 창구무애검법의 오의를 깨닫기 위해 구슬땀 을 흘리고 있었다. “그만. 지금 뭐 한거냐, 뇌전!!” 막 창궁무애검법의 세 번째 초식 창궁조화(蒼穹調和)를 펼치고 호흡 을 가다듬고 있던 뇌전은 을지호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황급히 허 리를 숙였다. “뭘 했냐니까!” 인사를 받지도 않고 호통치는 을지호의 인상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예? 그게…….” 조금 전만 해도 칭찬을 하며 많이 늘었다는 을지호의 말에 한참 기분 이 좋았던 뇌전은 갑작스런 호통에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창궁조화, 맞나?” “예.” “어딜 봐서?” 을지호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되물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1초식인 창궁약연(蒼穹躍鳶)은 빠르며 경쾌하다. 2초식인 창궁무한 (蒼穹無限)은 담대하면서도 부드럽다. 그리고 3초식인 창궁조화는 말 그대로 1초식과 2초식을 조화시킨 것이다. 빠르면서도 부드럽고 경쾌 한 듯 하면서도 장중한 기운이 솟구친다. 한데 뭐냐? 지금 네가 펼친 것은 빠르지도 않고 경쾌하지도 않다. 부드러우면서 장중한 기운 또한 전혀 느낄 수 없다.” 뇌전을 질책하는 을지호의 기세는 가히 추상(秋霜)과 같았다. “춤이냐?” “아, 아닙니다.” “아니면? 내 눈엔 춤으로 밖에 안 보인다. 창궁조화가 지닌 기운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면 그저 겉멋뿐. 이제 겨우 검로를 깨우친 주 제에 화려한 멋을 부리려 하질 않나, 또 누누이 강조했던 발놀림은 어 디 간 것이지?” 화끈하게 얼굴이 달아오른 뇌전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세상 그 누구도 그런 한심한 공격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 려 비웃음만 사겠지. 조금 늘었기에 칭찬을 해 주었더니 더욱 분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죄, 죄송합니다.” 뇌전이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구했다. 을지호는 뇌전에게 뭐라 말을 하지 않고 대신 초번을 불렀다. “초번.” “예, 주군.” 옆에서 뇌전이 혼나는 것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초번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너도 마찬가지다. 검법을 익힐 때 네 모습은 뇌전과는 달리 기본에 충실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이는 너의 검법이 뇌전의 수준까지 오르지 못했기에 애당초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니 논할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뇌전보다 우위에 있는 보법에선 뇌전의 검법과 같은 모 습이 보인다.” “송구합니다.” 초번도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구했다. 나란히 무릎을 꿇고 부 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초번과 뇌전, 이를 무심히 바라보던 을 지호가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화려한 것이 아주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수발(受發)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것이지 한참 기초를 닦아야할 너희들이 흉 내 낼 것이 아니다. 검법이든 아니면 보법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밖 으로 내보이는 겉모습이 아니라 최소한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 또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라. “예.” 초번과 뇌전은 동시에 대답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 다. ‘내가 너무 심했나? 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한번 정도는 제동을 걸 어줄 필요가 있는 법이니.’ 비록 시작은 어설프고 느렸지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나면서 초번과 뇌전의 몸속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던 잠재력이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초번과 뇌전의 실력은 을지호마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는 상태였다. 특히 초번과 뇌전은 정 반대의 성격처럼 저마다 얻는 성취가 달랐는데 같은 무공을 배우면서도 뇌전 은 검법에 탁월한 조예를 보였고 초번은 보법과 경공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지만 좋은 일에 언제나 마(魔)가 끼기 마련이었다. 최근 들어 슬슬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번과 뇌전이 처음 무공을 배우던 초심을 잃고 점점 자만심에 빠져 쓸데없는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물론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실력이 늘었다는 것은 반대로 엉뚱한 길로 빠질 위험 또한 크다는 것과 상통했다. 그것만큼은 경계해야 했다. 을지호는 기가 죽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후~ 그래도 정말 잘 해주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까지 해낼 줄 은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하지만 해웅…….’ 을지호의 시선이 여전히 기마자세의 해웅에게 향했다. 처음 해웅의 수련법을 연구했을 때 을지호는 어처구니없는 웃음만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무려 육년 동안이나 수련을 지속 해왔다는 해웅의 말을 들었을 때 을지호의 어처구니없는 웃음은 해웅 의 집념에 대한 감탄으로 변했었다. 을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곤 바로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초번과 뇌전도 듣지 못할 작은 음성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네가 최고다.” 을지호의 말은 진심이었다. 간운보월은 함께 배웠지만 창궁무애검법을 익히는 초번, 뇌전과는 달 리 을지호는 해웅에게 여타의 다른 무공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으련만 해웅은 묻지 않았다. 을지호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준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 을지호의 매 질을 견디지 못한 해웅이 갑판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였다. ‘유감스럽게도 남궁세가에는 네가 사용하는 도끼에 적당한 무공이 없 다. 그것이 네게 초번과 뇌전이 배우는 검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이유는 아니지. 진정한 이유는 바로 너에게 있다 . 네가 지닌 몸은 그 자체가 가장 큰 무공이자 무기다. 하지만 아쉽 게도 아직 미완성(未完成)이다. 네가 조금만 더 뛰어난 사부를 만났다 면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하긴, 완성이란 있을 수 없는 무공이기도 하지.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외공을 완성하는 것이다. 금강불괴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도검이 불침하는 경지까지는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할 수 있다. 지금 껏 해왔던 노력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내가 도와주겠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아, 그리고 네게 필요한 무공은 따로 생각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근사한 무공을 선물해 줄 테니.’ 이후, 해웅은 어떤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갑판구석에 처박혔지만 그때마다 꿋꿋이 몸을 세웠다. 그리고 한달이 지난 지금 을지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선 그의 몸에 어떠한 상처도 입힐 수 없다고. ‘후후, 아무리 봐도 미련한 놈이야. 하지만 그것이 너를 가장 빛내주 는 무기겠지.’ 해웅을 바라보는 을지호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 을지호 일행의 기세에 눌려 지금껏 함부로 떠들지도 못하던 배에 일대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이 선상에 울 려 퍼졌다. “해남도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쁨과 동시에 숨을 조이는 긴장감에서 벗어났 다는 안도감이 함께 뒤섞인 음성이었다. 그의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 남쪽 하늘 아래 조금씩 육지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뭐해? 다 왔는데.” 어느새 분위기가 바뀐 을지호의 손짓에 초번과 뇌전이 슬그머니 몸 을 일으켰다. 간단히 운기를 마친 해웅도 묵직한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정신들 바싹 차려.” “예. 주군.” 해웅 등이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을지호는 이미 몸을 돌 린 상태였다. 몸을 돌린 그의 눈에 점점 확대되어 비치는 해남도의 전경이 들어왔다. 크게 심호흡을 한 을지호는 잔잔히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머리를 쓸 어 넘기며 조그맣게 읊조렸다. “해남도라… 드디어 왔군.”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2 을지호의 외가가 되는 해남파(海南派)는 그들이 도착한 포구에서 남 쪽으로 약 삼 백리 정도 떨어진 정안현(定安縣) 소지산(小指山)의 한 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남도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오지산(五指山) 을 꼭 닮았다 하여 작은 오지산이라고도 불리는 소지산은 오지산처럼 산세가 웅장하고 험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특징과 수려함을 자랑했 다. 을지호 일행은 오랜 여행의 여독도 풀 겸 포구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길을 재촉했다면 한 나절이면 도착했을 거리였지만 그간 지긋지긋한 배 멀미에 시달리다 오 랜만에 뭍에 오른 것이 반가웠는지 을지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이 해남파가 위치한 정안현에 도착한 때는 하루가 지나고 햇볕 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였다. “아~ 덥다, 더워. 무슨 놈의 날씨가 이리도 덥다냐?” 잔뜩 인상을 구긴 을지호는 윗옷을 흔들어대며 연신 부채질에 여념 이 없었다. “차라리 저희들처럼 옷을 벗으시지요.” 벗어들은 옷가지를 부채삼아 흔들던 뇌전이 말했다. 뇌전과 마찬가지 로 상의를 벗어젖히고 구리 빛 피부를 자랑하는 해웅과 초번도 고개를 끄덕이며 뇌전의 말해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됐다. 아무리 덥기로서니 내가 너희들처럼 아무렇게나 옷을 훌렁훌 렁 벗을 것 같냐?” “어떻습니까? 더워서 죽을 지경인데 시원한 게 최고지요. 이곳에선 다들 그렇게 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하다는 듯 옷가지를 흔드는 뇌전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시끄럽다. 아무리 그래도 남들 눈이 있지. 헛소리 말고 길이나 잘 살펴. 제대로 가고는 있는 거냐?” 말은 그리하면서도 을지호의 손길은 슬며시 옷깃을 풀어 헤치고 있 었다. “예. 저 산이 소지산이라했고 산을 바라보며 큰길로 쭈욱 따라가다 보면 나온다고 했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초번이 맨 끝의 봉우리가 다소 처져 완전한 손가락 모양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손의 모양을 갖춘 산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래? 얼마나 걸리는지 가보면 알겠지. 어이구, 덥기도 덥다. 그나저 나 날도 더운데 냄새나는 파리 떼는 왜 이리 꼬이는지.” “예? 파리 떼라니요?” 난데없는 말을 괴이 여긴 해웅이 물었지만 을지호는 대답대신 능청 스런 웃음만 보였다. 해웅은 재차 묻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파리는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구경할 수 없었다. “대관절 파리가 어디에…….” 해웅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하하, 그런 게 있다. 냄새는 흘리지만 제법 귀한 파린 것 같은데 말 이야. 뭐, 별 뜻 없이 한 말이니 신경쓰지 마라.” 을지호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괴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해웅 등에 게 실없는 웃음을 보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발겨한 어린아이의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다섯이군.’ 을지호는 주변의 숲 등에 기척을 숨기고 은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 를 헤아려 보았다. 처음보다 그 수가 늘어 있었다. ‘세 명이 더 늘었네.’ 정안현의 번화가를 지나면서부터 따라붙은 괴인들은 꽤나 은밀히 몸 을 숨기고 있어 해웅 등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을지호의 이목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해남파의 제자들인가? 뭐, 곧 모습을 드러내겠지.’ 을지호의 예상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들어맞았다. 일행의 눈앞에 해남파의 웅장한 모습이 들어올 무렵 지금껏 몸을 숨 기고 있던 이들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길을 막고 나선 것이 었다. 인원은 을지호가 눈치 챈 대로 다섯이었고 맨 뒤에 뒷짐을 지고 있는 사내를 제외하곤 전부다 이십대를 갓 넘은 청년들이었다. “누구냐!!” 난데없이 나타난 자들에 놀랐는지 뇌전이 을지호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훗, 제법인데.’ 을지호는 뇌전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보호하고자 나서는 것 이 우습기도 하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자그마한 감동을 느끼고 있 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어째서 길을 막는 것이냐?” 해웅이 어깨에 걸쳤던 도끼를 땅에 내려놓으며 위협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멀리서 볼 때도 그랬지만 가까이서 본 해웅의 거대한 몸짓은 더욱 위압적이었다. 사내들은 꽤나 주눅이 드는지 나타날 때의 기 세와는 달리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가장 뒤에 있던 사내 가 나섰다. “꼴 하고는!!” 나이는 서른 초반 정도였는데 나이도 그렇고 그가 입을 열자마자 주 춤거리던 청년들의 동작이 딱 멈추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던 청년들을 꾸짖은 사내가 을지호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해웅이 아니라 을지호에게 묻는 것이 그가 무 리의 수장임을 정확하게 눈치 챈 것 같았다. “길은 외길, 뻔한 것을 물어보시는구려. 해남파로 가고 있소.” “무슨 일로 왔느냐?” 사내가 경계의 눈빛을 하며 고압적으로 되물었다. “하하, 이것 참. 볼일이 있었으니 왔을 것이 아니오.” 상대의 태도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을지호의 음성도 점점 싸늘 해졌다. “그러니까 그 볼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상대가 반말을 하는데 순순히 존대를 써줄 을지호가 아니었다. 을지 호는 마치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알아서 뭣 하시게? 바람난 마누라를 찾는 것도 아닐 테고.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나?” 사내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창!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움직이고 사내의 손엔 어느새 날 카로운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사내를 따라온 청년들도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검을 꺼낸 사내가 검봉을 을지호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건방진 놈! 우리 해남파는 너희 같은 해적 따위가 드나들 곳이 아니 다. 당장 꺼져라.” “해적이라니!!” “멈춰.” 뇌전이 발끈하여 나서려고 했지만 을지호의 손짓을 받고 이내 잠잠 해졌다. 상대는 예상대로 해남파의 제자들이었다. 그 말인즉, 외조부의 제자 또는 사손(師孫)들이란 말이었다. 비록 다짜고짜 길을 막고 던지는 질 문마다 건방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태어나 처음으로 외가에 방문하는 터,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오해를 한 것 같소. 우리는 해적이 아니오.” 당장에라도 치고 나갈 것 같은 해웅 등의 기세를 누르며 을지호는 최 대한 정중하게 말을 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해적이 아니면 산적이란 말이냐?” 사내가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해적도 산적도 아니오. 그저 외가의 어른들께 인사를 온 것뿐이오.” 을지호는 화를 내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외가?” “어머니께서 해남파의 출신이오. 내 이름은 을지호, 동방(東方)에서 왔소. 다시 말하거니와 외가의 어른들께 인사차 온 것이오.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니 오해를 풀고 길이나 안내해 주시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지금껏 이만큼 양보를 해 본적이 없는 것 같 았다. 이쯤 예의를 차렸으면 상대도 어느 정도는 예의를 차릴 줄 알 았다. 허나 그것은 을지호의 순진한 생각일 뿐이었다. “크크, 크하하하!!” 사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자신 에 대한 비웃음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내를 쳐다 보는 을지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크크, 제법 그럴듯하게 말을 하기에 조금 더 두고 보려 했지만 끝이 없구나. 외가라 했느냐? 해남파가 어떤 곳인데 감히 해적 따위와 혼 인을 시킨단 말이냐!! 흥, 이곳까지 몰래 숨어들어온 것을 보면 왜구 (倭寇)들이 판을 친다고 네놈들까지 덩달아 날뛰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렇지만 우리가 버티고 있는 한 어림도 없다.” “해적이 아니라 했소.” “쯧쯧, 아직도 거짓말을.” 사내가 검으로 해웅의 팔뚝을 가리켰다. “버러지 같은 놈들. 연극을 하려면 좀더 그럴 듯 하게 하여라. 저놈 들의 팔뚝에 그려진 지렁이는 무엇이냐? 그것이 토룡단(土龍團)이라는 해적 나부랭이들의 표식임을 내 모를 줄 알았느냐? 머리에 똥만 찬 놈들 같으니… 헛!” 입술을 씰룩거리며 한껏 이죽이던 사내는 갑작스레 날아오는 해웅의 도끼에 헛바람을 내뱉으며 몸을 뺐다. 하지만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여유 있게 공격을 피한 사내는 힘을 달려오는 힘을 이기지 못 해 기우뚱거리는 해웅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재빨리 반격을 했다. 검은 정확히 해웅의 가슴을 찔러갔다. “미련한 놈.”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했던가. 허점투성인 해웅의 모습에 사내는 한 껏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아름드리 통나무는 물론이고 단단한 바위까지 단숨에 잘라내 는 검이 해웅의 살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오자 사내의 입에선 웃음 대신 괴성에 가까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이놈!!” 해웅은 몸으로 검을 막아내고 새롭게 익힌 보법의 힘을 이용하여 당 황하여 뒤로 물러나는 사내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그리곤 달려 드는 탄력 그대로의 힘이 실린 어깨로 사내의 면상을 들이박았다. 사내 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려 삼장이나 날아가 땅에 곤두박질 쳤다. 너무나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청년들은 사내가 땅에 처박혀 몸도 제 대로 가누지 못하고 허리가 끊어진 개미처럼 꿈틀대며 신음성을 지르 는 것을 듣고서야 그의 곁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사부(師父)님!!” “정신 차리세요. 사부님.” “으으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사내의 얼굴은 피투성 이었다. 코와 입에선 시뻘건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충격으로 인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비겁하게 기습을 하다니!!” 청년 중 한명이 해웅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해웅을 대신하여 뇌전이 침을 뱉으며 대꾸했다. “병신, 그것도 기습이냐? 당한 놈이 바보지.” “닥쳐라!!” 극도로 분노한 청년이 검을 치켜세우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싸 움보다는 부상당한 사부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동료들의 제지로 두어 걸음을 내딛지도 못했다. 네 명의 청년들은 사부라 칭하는 사내를 등에 업고 해남파를 향해 내 달렸다.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조금 전 동료들의 제지로 몸을 돌렸던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 다. “지금 봐라. 나중에 말고.” 뇌전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청년은 이를 갈며 원독에 찬 눈으로 뇌 전과 을지호 일행을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다. “자~알 한다.” 단 한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빈사지경까지 몰고 간 해웅과 치열한 말 싸움을 펼친 뇌전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을지호의 시선에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주, 주군.” 해웅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을지호가 어째서 사내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화를 내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외가가 되는 해남파의 사람들과 괜히 얼굴 붉히기 싫어서 그랬으리라. 그런데 그런 을지호 의 노력을 단 한순간의 실수로 수포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물론 해웅도 해웅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거룡단이 비록 다른 사람들 눈에는 한낱 해적의 무리들로 밖에 보이 지 않을지 몰라도 그에겐 집이요 고향이었고 지금의 거룡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목숨을 잃었는지 소단주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사내는 부친과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거룡단을 비웃고 짓밟았다. 가뜩이나 을지호를 대하는 사내의 태도 가 마음에 들지 않던 해웅이었다. 그런데다가 사내가 거룡단을 일컬어 토룡 운운하며 비웃자 그 즉시 이성을 잃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을지호의 명도 듣지 않고 단독으로 움직인 것 은 분명한 잘못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해남파의 제자, 당장 을지호의 처지가 곤란 할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함부로 날뛰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벌을 받겠 습니다.” 해웅은 연신 머리를 땅에 처박으며 용서를 구했다. “쯧쯧, 관둬라. 그리고 땅은 왜 들이받아? 표시도 나지 않는데.” 을지호는 들이받힐 때마다 움푹 파이는 땅과는 달리 멀쩡한 해웅의 이마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용서를…….” “뭘 용서해? 네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을지호는 해웅이 눈가에 의문이 일자 슬며시 다가가 그의 등을 토닥 였다. “잘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려고 했는데. 하하, 내 마음을 용케 읽었어.” “주, 주군.” 해웅의 감격스런 눈으로 을지호를 응시했다. “그런데 첫 번째 공격은 그게 뭐야? 허점투성이에 중심도 잡지 못하 고.” “죄, 죄송합니다.” “하하, 그래도 두 번째 공격은 훌륭했다. 아주 적절했어.” “어찌 하다보니.” 잘못을 하고도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 어색했는지 해웅이 또 다시 고 개를 숙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냐? 일어나.” 살았다는 표정으로 숨죽이고 있던 뇌전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 떡 일어났다. 하나 해웅은 그러지 못했다. 해웅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손을 뻗은 을지호가 해웅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툭하면 무릎 꿇고 그러는데 그러지 마라. 남자라면 함부로 무릎을 꿇지 않는 법이다.” “예.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괜찮다니까. 말했잖아. 네가 아니었으면 그놈은 나한테 당했어.” 을지호가 해웅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애써 웃음 지었다. 하지만 해 웅을 달래는 을지호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일 났군, 일났어.’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해웅이 그토록 전격적으로 움직일 줄 몰랐고 또 단숨에 사내를 제압할 줄도 몰랐다. 해웅의 무공이 그만큼 무공이 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해남파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마냥 칭찬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웅을 벌할 일은 더욱더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앞 뒤 사정 잘 얘기하면 되겠지. 그것도 안 되면 싹 싹 빌면 되고.’ 그러나 을지호의 생각과는 달리 일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꼬이고 있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3 * * * * * 동서로 길게 펼쳐진 돗자리에 남북으로 교배상(交拜床)이 놓여 있고 화려한 예복(禮服)으로 치장한 신랑과 신부는 각기 동쪽과 서쪽에 마 주서 서로에게 절을 하고 있었다. “허허, 신랑의 입이 아주 찢어졌구만.” “하하하, 그러게 말일세. 절을 하면서도 연신 싱글벙글 일세.” 혼례를 지켜보던 하객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말대로 신랑인 강운교(姜雲橋)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 질줄 몰 랐다. 철이 들기 전부터 남몰래 사랑을 키워왔고 마침내 그 결실을 맺는 자 리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얻는 순간, 까짓 어리숙해 보이면 어떻고 멍청해 보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오늘 만큼은 누가 뭐라 해 도 상관치 않을 것이다. 욕을 해도 웃을 것이고 침을 뱉어도 기꺼이 맞아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단순 히 자신을 놀리거나 비웃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과 육금정(陸錦晶)의 혼인을 밝게 꾸며주며 축복하는 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웃음소리에 답례라도 하듯 강운교의 입에 큼지막한 미소가 걸렸다. “허허, 이것 참. 또 웃네 그려. 신부가 웃으면 딸을 난다지만 신랑이 웃으면 뭐가 태어날라나.” “글쎄, 모르긴 몰라도 둘 중 하나는 태어나겠지.” “예끼, 이 사람아. 하하하.”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웃음과 축복 속에 혼례식은 일사천리로 진행 되고 있었다. 서로에게 절을 하는 교배례(交拜禮)가 끝나고 백년해로(百年偕老)를 다짐하며 술을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合?禮)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여러 절차가 남았지만 합근례가 끝나게 되면 사실상 혼례는 끝이 나는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한잔이었다. 표주박에 담긴 술을 비우고 나면 세상 그 누구와 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됨을 만천하에 선언하게 되는 것. 강운교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긴장으로 떨 고 있는 육금정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비단에 비상하는 봉황(鳳凰)이 수놓아진 화려한 옷을 입고 강 운교가 선물한 용무늬 팔찌, 귀걸이를 하고 있는 육금정은 양귀비(楊 貴妃)가 울고 갈 정도로 절색이었다. ‘고맙소. 나 같은 놈을 선택해 줘서. 평생 행복하게 해 주리다.’ 강운교의 절실한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육금정도 촉촉이 젖은 눈으로 강운교를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하하하, 기쁜 날이외다. 자자, 오늘만큼은 번거로운 예는 차리지 마 시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겨봅시다.” 해남파의 장문인 육천천(陸泉泉)이 잔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육천천 의 제안에 하객들은 너도나도 잔을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부친과 자신에 이어 장차 해남파를 이끌고 갈 수제자(首弟子)와 장중 보옥(掌中寶玉)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딸의 혼인이 끝났음을 정식으로 선언하는 부친의 말에 육건(陸乾)은 술잔을 드는 대신 만감이 교차하 는 표정을 지으며 강운교와 육금정의 곁으로 다가갔다. “네 어머니가 살아 오늘의 기쁨을 함께 했어야 했는데… 잘 살아야 한다. 알았느냐?” “예. 아버지.”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는 육건의 말에 육금정이 눈물을 글썽이며 대 답했다. 강운교가 육금정의 손을 힘껏 잡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부님.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주겠습 니다.” “그래, 암, 그래야지. 내 너를 믿겠다.” 강운교의 당당함에 애써 아쉬움을 지우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육건 이 새로이 연을 맺어 부부로 태어난 둘의 어깨를 토닥였다. 바로 그때였다. “크아아악!” 난데없이 연무장 한쪽에서 웅성거림이 있는 것 같더니 혼례식을 축 하하러 온 하객들의 왁자지껄함과는 조금 이질적인 비명성이 울려 퍼 졌다. 육건과 강운교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비명이 들려온 곳에서 해남파의 제자인 듯싶었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 는 신형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육금정의 앞을 재빨리 가로막은 강운교가 발버둥을 치며 날아오는 자의 소매를 낚아채고 휘두르며 무사히 받아냈다. “장(張)사제!!” 자신이 받아낸 사람이 막내 사제인 장염(張廉)임을 알아본 강운교가 경악성을 질렀다. 곁에 있던 육건이 재빨리 장염의 완맥을 잡아 혹여 제자의 몸에 큰 이상이 없나 살폈다. 다행히도 큰 부상은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쉬며 침착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모,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장염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다니?” 육건이 이마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장문인께서 혼례식이 끝났음을 알리시는 순간 갑자기 들이닥친 괴 인이…….” “으아악!” 장염이 대답을 하는 사이에도 비명성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육건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혼례식 날 이토록 소란을 피운다는 것은 해남파를 무시한다는 것,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첫 비명성이 터지면서 혼례식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기분 좋게 술을 들이키던 무인들은 술잔대신 분분히 무기를 꺼내 들었고 연무장을 채운 대다수의 하객들은 이리저리 몸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뭣들 하느냐? 감히 어느 놈이 이런 소란을 피우는지 당장 알아 보거 라.” 분노로 인해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을 부들부들 떠는 육천천이 누구에게 라고도 할 것 없이 소리쳤다. 명을 내릴 것도 없었다. 비명이 터지는 순간 대부분의 해남파 제자들은 이미 그곳을 향해 내달렸고 육건과 강운교 역시 육천천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검을 잡고 있었다. 일찍 상처(喪妻)하고 지금껏 애지중지 키워온 딸의 짝을 찾아주는 날, 한편으론 서운함과 아쉬움도 있었지만 한없이 기쁜 날에 난데없이 벼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딸의 혼례식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생각에 육건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너는 여기 있거라.” 육건이 검을 잡는 강운교를 만류하곤 몸을 날렸다. 하지만 강운교는 육건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강운교의 분노 또한 육건에 못지않았다. 무가의 딸임에도 육금정은 무공을 몰랐다. 건강을 위해 간단한 호흡 법을 익히기는 하였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없이 여린 마음과 고운 심성을 지닌 그녀가 떨고 있었다. 눈물도 흘리고 있었다 .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두려움도 느꼈겠지만 무엇보다 생애 한번 뿐인 혼례식이 망쳐졌다는 데에서 오는 서러움이 더욱 크리라. ‘용서하지 않는다.’ 예복을 벗고 무복으로 갈아입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움직이기 편하 게 옷을 찢어 고정을 시켰다. 강운교는 깜짝 놀라 옷소매를 잡는 육 금정에게 살짝 웃음을 짓더니 서둘러 몸을 돌렸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 거친 피부, 퀭하니 들어간 두 눈, 마구 헝클어진 머리, 십년은 굶었는지 뼈 밖에 남지 않은 몰골 등 이리저리 마음껏 날뛰다 결국 육건과 해남파의 노 고수들에 의해 제지를 받은 괴인은 마 치 뒷골목 한구석에 처박혀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있을 거렁뱅이의 모 습과 다름이 없었다. 한데 일신에 지닌 무공만큼은 천지를 경동시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강운교는 난생처음 접하는 괴인의 무공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만간 해남파의 장문인에 오를 육건과 장로들의 무공이면 가히 천하를 진동시킬만했다. 다소 손색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무위 또한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데 괴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모습도 없었다. 오히려 투기가 이는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매섭게 날뛰었다. ‘강하다. 정말 강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은 둘째 치고 상대의 공격을 제대로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화살을 날리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았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궁은 검보다 무서웠다. 괴인의 무공이라면 분명 혁혁한 명성을 날리는 사람일터, 허나 아무 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강운교는 무림에 이런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 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왜!!’ 무엇보다 강운교를 혼란케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혼례식을 엉 망으로 만드느냐였다. 괴인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말에 대답의 단서가 있을 것이었지만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뿐이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한 인간들! 혼례라 함은 인륜지대사거늘 어찌 이리도 경박하게 처리한단 말이냐!!” 수십 여 명의 합공을 받으면서도 괴인은 한시도 쉬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틀이었다. 고작 이틀!!! 약조를 지키기 위해 수만 리 물길을 헤치고 달려왔건만 고작 이틀이 늦었다고… 오호라, 이놈! 네놈이 바로 그 인면수심 (人面獸心)한 신랑놈인가 보구나.” 강운교의 화려한 복장이 혼례를 치르기 위한 예복임을 알아본 괴인 의 눈가에 불똥이 튀었다. 뒤로 훌쩍 물러난 괴인이 화살도 없는 활의 시위를 한껏 잡아당겼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강운교 를 향해 날아왔다. “피해랏!” 깜짝 놀란 육건이 소리를 지르고 뒤에서 지켜보던 육천천이 대경실 색하여 검을 날려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활에서 날아오는 기의 덩어리에 압도당한 강운교는 멍하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육건이 얼굴이 절망적인 탄성과 함께 일그러지고 멀리서 이를 바라 보던 육금정의 입에선 비명이 흘러나왔다. 기의 화살은 어떤 방해도 없이 강운교의 코앞에 이르렀다. 그제야 정 신을 차릴 강운교가 화살을 피해 보려했지만 이미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빌어먹을. 금정…….’ 죽음을 생각한 강운교는 혼례식을 치르자마자 홀로 되야 하는 금정 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말았다. “여보, 여보!” “으악!” 강운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본다는 아내의 얼굴이 들어 왔다. 강운교는 자신도 모르게 육금정의 볼을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괜찮으세요?” 육금정은 놀란 눈으로 강운교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운교는 멍한 눈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낮잠을 주무시다말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셔서 깜짝 놀랐어요.” “후~ 미안하오. 부인. 걱정을 했나 보구려.” 강운교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어휴, 이 땀 좀 봐.” 육금정은 다소 근심 섞인 음성으로 강운교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송 글송글 맺혀있던 땀방울이 육금정의 손길에 물이 되어 볼을 타고 흘 러내렸다. “악몽(惡夢)을 꾸셨나요?” “악몽이라… 글쎄. 악몽은 악몽이지만 꼭 악몽이라 단정도 할 수는 없는데…….” 도리질을 하는 강운교의 입가에는 쓴 웃음이 배어 있었다. “혹시 기억하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리고…….” 강운교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육금정의 웃음이 침상에 퍼졌다. “호호, 또 그때의 꿈을 꾸셨군요.” “어떻게 알았소?” 강운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모르겠어요. 매년 이맘때면 꼭 그 꿈을 꾸셨고 그러실 때마다 항 상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는걸.” “하하하, 내가 그랬소? 그래, 기억은 하시오?” “호호호, 왜 기억 못하겠어요. 지금도 눈에 선한데. 맨 마지막에 한 말이 ‘따, 따님이 두 분이셨습니까?’였잖아요.” “하하, 그건 아니오. 맨 마지막 말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였다오.” 세월이 흘러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 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강운교와 육금정은 옛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함께 웃으며 즐거워했다. 평온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강운교가 잠에서 깨어 난지 얼마 되지 않 아 거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 었다. “사부님! 사부님!!” “누구냐?” 오랜만에 추억에 잠겨있던 강운교의 얼굴에 짐짓 노기가 스쳐지나갔 다. 그것을 눈치 챈 육금정이 고개를 흔들었다. 제자들에게 괜한 일로 짜증을 부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육금정의 행동에 강운교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청년 한명이 뛰어 들어왔다. 경박한 행동에 또다시 눈살 이 찌푸려졌지만 육금정이 옆에 있기에 참고 넘어갔다. 방으로 들어선 사내는 침상에 앉아 있는 강운교를 향해 무릎을 꿇었 다. “초구(初拘)로구나.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한 것이냐?” “크, 큰일 났습니다. 사부님.” “큰일이라니?” “그, 그것이. 그러니까… 어찌…….” “어허, 그렇게 더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보아라.” 답답했는지 강운교의 음성이 절로 높아졌다. “적이…….” “적이라니? 적이 쳐들어 왔다는 말이냐?” 강운교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그러니까… 해, 해적이…….” “되었다.” 더 듣고 있어봐야 제대로 된 말을 듣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강운교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초구가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무복을 챙긴 육 금정이 옷을 건네자 재빨리 옷을 걸치며 검을 들었다. “내 다녀오리다.” “조심 하세요.” 육금정의 말 속에 은연중 두려움이 있음을 간파한 강운교는 염려하 지 말라는 듯 침착한 눈빛을 보내 안심을 시켰다. 그리고 서둘러 방 문을 나섰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4 강운교가 초구의 보고를 받자마자 허겁지겁 밖으로 나오던 그 시각, 연무장 한켠에선 을지호 일행과 해남파들이 한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뇌전과 초번은 각각 두 명과 세 명의 해남파 제자들의 협공을 받고 있었다. “어림없다. 받아랏!!” 뇌전이 목을 노리며 들이닥치는 검을 간단하게 피해내며 역습을 펼 쳤다. “흥.” 사내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직한 냉소와 함께 몸을 틀어 검을 피하더니 그 탄력으로 발길질을 했다. 그와 같은 반 격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뇌전이 화들짝 놀라 손을 뺐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사내의 왼발이 뇌전의 손을 강타했다. “크, 우라질 놈!” 다행히 검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고통이 뼈 속까지 울렸다. “죽엇!!” 이를 악문 뇌전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발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고 통에 대한 되갚음을 하고 싶은 강한 의지가 담긴 공격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뒤쪽에서도 그의 허리를 노리며 검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썩을!!” 뇌전은 인상을 구기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돌려 밀려오는 공격을 막았다. 까깡.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검을 타고 충격이 밀려들자 뇌전 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쑤시는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 았다. 뇌전을 상대하는 해남파의 제자들은 뇌전이 움츠리는 것은 놓치 지 않았다. 한번 잡은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겠다는 듯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치사한 놈들. 일대일로 붙자!!” 뇌전은 연신 욕을 해대면서 뒷걸음질 쳤다. 사실 출발은 좋았다. 일대일의 싸움에서 뇌전은 자신을 얕보고 덤벼 드는 상대를 단 삼초 만에 무릎 꿇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따 지자면 뇌전은 그들 개개인의 실력을 크게 뛰어넘지는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함께 연마한 해남파 제자들의 합공이 시작되자 뇌 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을지호의 지도로 많은 진전이 있었고 위기에서도 물러서기는커녕 도 리어 앞으로 나아가는 기세로 지금껏 버텨왔지만 처음의 용맹으로 얻은 승기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검의 흐름도 끊 긴데다 극도로 흥분하여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공격은 물론이고 방어를 하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그나마 착실히 익힌 간운 보월의 힘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초번은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었다. 뇌전보다 검법의 조예가 얕은 그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했다. 을 지호가 인정할 정도로 경지에 오른 간운보월의 보법으로 매섭게 전개 되는 공격을 용케도 피해내고 뇌전보다 한명이 많은 세 명의 합공을 당하면서도 그다지 큰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성공시킨 공격도 하나도 없었지만 때때로 반격도 시도했다. “흠,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해남파의 정문위에 홀로 걸터앉아 연무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 보고 있던 을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을지호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대를 단숨에 제압한 후 뒤로 몸을 빼 정문위로 올라가 있었다. “제법 실력이 늘었어. 아직도 멀었긴 하지만.” 을지호는 초번과 뇌전이 예상외로 선전을 하자 그동안 수련이 헛되 지 않았다는 생각에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혀 싸울 필요가 없는 상대끼리 어째서 저렇듯 용을 쓰며 싸워야 하는지를 의식하곤 지붕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해남파를 코앞에 두고 오해로 인한 사소한 충돌이 있었음에도 을지 호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까짓 오해는 풀면 그만이었고 또 당 연히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해남파로 향했건 만 일이란 것이 늘 생각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해남파에 도착한 을지호는 자신의 생각이 얼 마나 치기어린 것이었는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정문은 열려있었다. 아니, 벌써 열 명이 넘는 해남파의 제자들이 나 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며 해웅 등이 잔뜩 긴장을 했지만 을지호는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보내곤 최대한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다.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일의 경과 를 설명하면 모든 오해가 풀리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러나 한 단어를 내뱉기도 전에 돌아온 것은 거친 욕설과 함께 같잖 지도 않은 검날이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어처구니도 없던 을지호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을지호를 공격했던 청년, 조금 전 뇌전과 말싸움을 벌이며 끝까지 호 전적인 모습을 보였던 사내는 을지호가 아무렇게나 뻗은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동시에 그와 함께 을지호를 공 격했던 두 명의 청년들도 허공으로 몸을 띄운 을지호의 발길질에 나가 떨어졌다. 더 이상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싸움은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을지호가 공격당한 것을 보자마자 해웅 등이 무기를 빼들었고 해남 파의 제자들도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 벌써 이각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후~ 어쩌나… 일이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닌데.”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린 을지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자신이 조금만 참았더라면, 그저 간단히 제압하고 대화로써 해 결을 했다면 일이 이렇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과는 달리 먼저 반응한 주먹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는데.” 싸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나 오해든 뭐든 기왕 벌어진 싸움, 을 지호는 이참에 초번과 뇌전에게 해적들과의 싸움이 아닌 무인들과의 싸움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 또 실전경험도 쌓게 하고 자신들이 지닌 실력의 현주소를 알게 해주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랬 기에 싸움을 중단시키는 대신 슬그머니 몸을 빼버린 것이었다. 다행이 치열한 싸움이 펼쳐졌음에도 처음 뇌전에게 부상을 당한 해 남파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양측에서 별다른 사상자가 없었다. 물론 그럴 낌새만 보이면 은밀히 끼어들어 최악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지만 어쨌든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끝낼 때였다. 해웅 등에게 경험을 쌓게 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도 어느 정도 충족된 지 금 더 이상의 싸움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쪽인데.” 을지호의 시선이 해웅에게 향했다. 초번과 뇌전이 나름대로 치열하게 싸움을 했다면 해웅은 정말로 처 절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해웅의 상대는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가 될까 말까한 청년이었다.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초번과 뇌전에겐 각각 몇 명씩 달려들었지만 해남파의 제자 중 해웅을 상대하고자 나선 사람은 뒤늦게 나타난 어린 청년 오직 한명이었다. 해웅의 가슴어귀에 간신히 다다르는 키, 얇은 손목, 한없이 가냘픈 몸매, 더구나 잡티 하나 없이 뽀얀 얼굴 등은 아무리 보아도 부잣집 도련님의 행색이었지 무인의 몸은 아니었다. 다만 남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누구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고 매서운 눈 빛이었다. 해웅은 한주먹감도 되어 보이지 않는 상대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 다. 그런 자신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아무리 도끼를 휘둘러도 몸은커녕 상대의 무기에도 닿지 못하고 최 대한 빨리 걸음을 놀려도 상대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았을 때야 비로소 해웅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상대의 눈빛을 이해하게 되었다. 해웅을 상대하는 청년의 이름은 강유(姜柔), 해남파 장문인의 둘째 아들로 올해 나이 열아홉이었다. “하아. 하아.” 해웅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고작 이각 여를 싸웠을 뿐인데도 숨이 턱에 차고 가슴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해적질을 하며 제법 많은 싸움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숨이 차긴 처음이었다. 지난날 악가의 고수와 싸웠을 때도 힘은 들었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더 구나 상대의 공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지금껏 간신히 버텨내기는 하 였지만 당장 쓰러져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지쳐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 사내라면 그렇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면으로 덤 벼라.” 해웅은 자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기회를 엿보는 강유에게 욕을 해댔다. 그리곤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몸은 강유를 향해 일 직선으로 달려갔고 도끼는 머리 위로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 어떤 기교도 없었다. 상대를 혼란시키는 현란한 발놀림도 없었고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도끼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몸뚱이 하나만을 믿는 정직한 공격이었다. “쯧쯧, 아무리 몸뚱이가 단단하다지만 저리 무식하게.” 해웅과 강유의 싸움을 지켜보던 을지호는 무작정 덤벼드는 해웅의 모습에 혀를 차고 말았다. 강유는 해웅과 근접전으로 싸울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몸을 훌쩍 뒤 로 날리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허연 이를 드러내고 괴성을 지르며 끝까지 쫓아오는 해웅을 향해 연속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봉에서 뿌연 기운이 솟구쳐 해웅에게 향했다. 파파팍. 항주로 오던 배 위에서 악균이 잠시 선 보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날카롭고 강맹한 검기가 해웅의 전신을 두들겼다. 무차별적으로 검기에 노출된 해웅의 몸이 잠시 기우뚱 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과연. 저런 공격은 하수한테나 통하는 것이지 웬만한 고수에게라면 통할 리가 없지.” 을지호는 혼신의 힘을 다한 해웅의 공격을 너무나 간단히 피해내며 반격을 하는 강유의 모습에 감탄을 했다. 특히 어린나이에도 상당히 위력적인 검기를 사용한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하지만 쓰러진 해웅을 바라보는 강유의 표정은 좀처럼 밝지 않았다. 처음 싸움이 시작되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써 십수 번, 그때마다 해웅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몸을 일으켜 투지를 불태웠다. 쓰러뜨 리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해웅과 싸움을 하는 동안 강유는 세 번을 놀랐다. 처음 그의 어마어마한 덩치에 놀랐고 정확히 가슴을 가르고 지나간 검이 쇳소리를 내며 튕겨날 때 놀랐다. 마지막으로 싸움을 끝내고자 회심의 일격으로 날린 검기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망연자실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해웅은 수 없이 많은 공격으로 인해 옷인지 아니 면 걸레조각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찢어지고 해진 옷가지를 아무렇 게나 잡아채 던져버리고 강유를 향해 전의를 불태웠다. ‘정말 인간 같지 않은 놈이다. 어찌 이리도 단단하단 말이냐.’ 강유는 거의 벌거벗다 시피하고 도끼를 잡은 손에 연신 침을 뱉어가 며 접근하는 해웅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하고 백번 양보한다 해도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싸움의 주도권은 분명 자신에게 있었다. 해웅도 나름대로 공격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발악일 뿐 이고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해웅의 공격을 완벽히 회피하며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데 있었다. 몸에 닿은 칼은 금성철벽(金城鐵壁)을 때린 듯 튕겨 나왔고 막대한 내공의 소모를 필요로 하는 검기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저 몸에 자그마한 생채기를 내는 정도였다. 그나마 내가중수법의 일종 인 침중수(浸重手)로 약간의 이득을 얻기는 하였지만 그다지 조예가 깊지 못해 많은 이득을 보진 못했다. 오히려 해웅의 접근을 허락하여 위험에 빠질 뻔 한 이후로 사용할 생각을 못했다. “괴물 같은 놈!” 싸움이 시작된 이래 강유의 입에서 나온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여유 있는 듯 했지만 강유의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었다. 펼 치는 공격은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고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게다가 더 이상 무리하게 내공을 운용하다간 크게 내상을 입 을 정도로 내공의 소모가 심한 상태였다. ‘방법이 없단 말인가, 방법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발밑에 걸린 돌멩이를 냅다 차서 강유의 시선을 유도한 해웅이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빠른 몸놀림으로 접근했다. “제법이다!” 을지호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화들짝 놀란 강유가 몸을 뒤로 뺐지만 몸을 막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뿔싸.’ 잠깐의 방심이 부른 위기였다. 강유는 자신의 몸을 막은 것이 무엇인 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숙이고 땅을 굴렀다. 꽝. 강유를 노리던 해웅의 도끼는 전혀 엉뚱한 목표를 박살내고 말았다. “젠장맞을.” 더없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렸다는 생각에 도끼를 회수하는 해 웅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아쉬움에 버럭 소리를 지른 해웅은 연이은 공격을 위해 땅을 구른 강유를 찾았다. 하지만 애써 찾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물러나도 한참을 물 러나 있을 강유가 고작 서너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참담하게 일그러진 얼굴, 덜덜 떨리는 입술, 망연자실한 눈빛. 그런데 강유가 바라보는 것은 해웅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 신을 대신해 해웅의 도끼를 맞은, 맞는 즉시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 버 린 석상(石像)이었다. “해… 해룡(海龍)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퇴로(退路)를 차단한 것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승천하는 해룡의 석상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까마득한 선조, 해남파의 개파조사(開派祖師)가 자신을 도와 바다를 평정한 해룡을 기리기 위해 직접 돌을 다듬어 만들었다 는 해룡상. 해남파의 수호지물(守護之物)인 해룡상은 해남파의 제자 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보호해야 하는 것이었다. 과거 불의의 사고로 두개의 상중 하나가 파괴되고 지금껏 홀로 남아 해남파를 지켜온 나머지 하나마저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해웅의 도끼에 의해 박살난 것이었다. “네… 네놈이…….” 강유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해룡상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치 욕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의당 죽음으로써 그 죄를 씻어야겠지만 그 것은 차후의 일이었다. 우선은 눈앞의 악적에게 죄를 물어야 했다. 그러 기 위해선 검기도 통하지 않는 단단한 몸뚱이를 박살내야 했고 방법 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죽인다!!” 이빨에 짓이겨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기운이 강유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검이 묘한 자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친놈. 할 테면 해봐라.” 해웅은 갑자기 돌변한 강유의 자세에 떨떠름한 생각을 지우지 못하 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놀란 것은 오히려 멀리서 지켜보던 을지호였다. “흠, 예사롭지 않은데. 뭐, 뭐야!! 저건!” 심상치 않은 강유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을지호는 강유의 몸에 서 너무나도 친숙한 기운이 흘러나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무공이 강유에게서 시전 되려 하기 때문이었다. “무, 무심지검(無心之劍)!!!”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절대삼검(絶代三劍)이라면 해웅의 몸뚱이 정 도는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강유의 기수식이 절대삼검 중 무심지검을 시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본 을지호는 어째서 가문의 비기(秘技)가 강유에게서 펼쳐지는 것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시위를 당겼다. 을지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실어 무영시(無影矢)를 날 렸다. 50년이란 시공을 뛰어넘어 또다시 재현된 무영시는 나직한 파 공성을 내며 강유에게 향했다. 파팍. 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 무영시는 해웅의 목을 향해 접근하는 검에 적중했다. 고작 한 치,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검을 밀어낸 것이었다. “크윽.” 해웅과 강유의 입에서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강유는 무리하게 기를 운용하여 내상을 입었는지 입에서 피를 물고 쓰러졌고 해웅은 무영시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은 받지 않았지만 검에 앞서 미리 접근한 기운에 검과 무영시의 충돌로 인한 충격파가 합쳐지는 바람에 목덜미에 깊 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끝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강유 의 공격을 견뎌낸 것으로 착각한 해웅이 피가 흐르는 목을 부여잡고 도끼를 치켜세웠다. 절대삼검, 위력이 강한 만큼 부작용도 강했다. 단 한번의 시전으로 이미 기력을 잃은 강유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날아오는 도끼를 망연히 쳐다만 보았다. 하지만 해웅의 도끼 역시 강유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을지호가 날린 무영시에 의해 박살이 나버렸다. 무엇이 자신의 도끼 를 박살냈는지 알지 못한 해웅은 바싹 긴장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모두 멈춰.” 두발의 무영시로 강유의 공격을 막고 해웅의 도끼를 박살낸 을지호 가 정문에서 뛰어 내리며 소리를 질렀다. 싸움은 일시에 멎었다. 을지호의 외침도 외침이지만 그가 출행랑을 시전하며 내뿜은 살기를 감당할만한 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살기에 해남파의 제자들이 두려움에 젖어들었다. 하나 이 미 그런 기운을 경험해본 초번과 뇌전은 드디어 을지호가 나섰다는 생 각에 찡그린 얼굴에서도 웃음이 피어났다. 일시에 싸움을 중지시킨 을지호가 해웅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만해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주군.” 해웅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시끄러. 끝내긴 뭘 끝내. 이곳이 어딘지, 내가 누군지 잊었냐?”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을지호와 해남파와의 관계를 상기한 해웅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너도 그만해라.” “시, 시끄럽다.” 을지호의 말에 강유는 독기를 내뿜으며 검을 찾았다. “그놈의 고집은 여전하구나. 꼬맹아.”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5 “그놈의 고집은 여전하구나. 꼬맹아.” “헛소리 하지 마라.” 강유는 꼬맹이라는 말에 담긴 친근감을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을 지호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해적 따위에게 모욕을 당할 나 강유가 아니다. 죽여라.” 두 눈을 부라리며 외친 강유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을지호는 강유 의 단호한 태도가 귀엽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더러운 자식.” 을지호의 태도에 크나큰 굴욕감을 느낀 강유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손을 들어 천령개(天靈蓋)를 내려쳤다. “안돼.” 을지호는 느닷없이 자결을 하려는 강유의 행동에 기겁을 하고 재빨 리 팔을 낚아챘다. “놔라!” 을지호에 의해 자결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 강유는 온 몸을 비 틀며 발버둥을 쳤다. ‘으이구. 성질 머리 하고는. 예나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어.’ 을지호는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강유의 행동을 보며 고집불통에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 꼬마아이를 떠올렸다. 비록 금방 알아보지 못 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다 찬찬히 살 펴보니 그때의 모습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성격은 전혀 변한 것 같지 않았다. “그만하고 내 말 좀 들어봐라.” 을지호는 이성을 잃은 강유가 더 이상 발버둥치지 못하게 간단히 조 치를 취하고 일이 어찌된 것인지 자세히 설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 전에 싸늘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 아이를 내려놓아라.” 말과 함께 을지호를 압박해 들어오는 것은 강맹한 기운의 검기였다. 강유가 잡혀 있는 것을 보았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정확히 목을 향해 들이닥치는 검기, 을지호는 그것만으로도 검기를 발출한 사람이 상당 한 고수라 여겼다. 막고자 한다면 막을 수 있었지만 을지호는 그러지 않았다. 혹시 몰라 한쪽으로 강유를 떠밀고는 훌쩍 뒤로 몸을 날렸다. 을지호가 몸을 움 직이자마자 검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대단한데.’ 공격을 중도에 멈춘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인지 알고 있 던 을지호는 거듭 감탄을 하며 과연 그만한 고수가 누구인지 궁금해 고개를 돌렸다. 을지호를 공격한 중년인은 어느새 강유의 곁으로 다가가 강유의 혈 도를 풀고 몸을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강유가 내상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부상을 입은 것이 아 니라는 것을 확인한 중년인이 몸을 돌렸다. “나는 해남파의 외전(外殿) 전주(殿主) 장염이다. 네놈들은 누구냐? 누구 길래 감히 해남파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예, 저는 을지호라고 합니다.” 오해를 푸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 을지호는 또 다른 오해가 생길까 걱정하며 재빨리 허리를 굽히고 예를 표했다. “네놈의 별 볼일 없는 이름 따위를 알자고 한 것이 아니다. 무엇 때 문에 본파를 공격한 것이냐?” 장염은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 검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을지호 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노호성을 지르는 장염의 어깨를 슬며시 잡는 손이 있 었다. “그만하게 장 사제. 을지호라는 이름은 자네의 생각처럼 별 볼일 없는 이 름 따위가 아니라네.” “아, 장문 사형.” 장염은 고개를 돌려 음성의 주인을 확인하고 한발 뒤로 물러서며 예 를 표했다. 어느새 그의 주변엔 장문인 강운교를 비롯해 몇몇 장로( 長老)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이름이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쯧쯧, 을지라는 성을 쓰는 것을 보며 모르겠나? 자넨 잠시 물러나게.” 의혹어린 시선에서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의 장염을 뒤로한 강운교 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을지호를 응시했다. “휴우~ 외가에 왔으면 냉큼 와서 어른들께 인사나 드릴 것이지 이 무슨 난리더냐. 아무튼 오랜만이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이모부님?” “휴~ 그래,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안녕했다만 앞으로 그럴지는 실로 의문이다 인석아.” 강운교는 싸움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제자들과 부상자들, 그 리고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는 강유를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을지호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 구… 헌데 저, 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던 강운교의 두 눈이 연무장에 흩어진 돌 조각을 바라보며 화등잔(宖盞)만 해졌다. “내,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것은 분명 해… 해룡상?” “그,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그제야 조각난 해룡상을 살핀 장염은 물론이고 강운교와 함께 나선 장로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한 장로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일났군, 일났어.’ 그들의 반응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을지호는 해룡상을 부순 해웅에게 괜시리 질책어린 눈빛을 보냈다. “네가… 그랬느냐?”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돌려 묻는 강운교의 음 성엔 노기가 섞여 있었다. “꼬맹… 아니, 제 수하와 유아가 대결을 펼치다 그리 된 것 같습니다. 하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잘못은 제게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음.” 강운교는 짧은 침음성과 함께 눈을 감고 말았다. “서, 설마 호형?”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온 강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음성 으로 물었다. 을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가 아니라 사실이다. 나도 너를 알아보는데 한참 걸렸는데 제대 로 기억이나 하고 부르는 거냐? 네가 장백산에 왔을 때가 고작 다섯 살이었다.” “아, 아니 뭐, 꼭 기억을 한다기보다는…….” 강유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둘의 대화를 잠시 지켜보던 강운교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 그게 그러니까…….” 강유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곧바로 호통이 터 져 나왔다. “꾸물거리지 말고 똑 바로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어찌된 연유로 싸 움을 하게 되었느냐 말이다.” “이모부님.” “네게는 잠시 후에 물을 테니 가만있도록 하고. 어서 말해 보거라.” 강운교의 거듭된 물음에 강유는 자신이 무슨 이유로 싸움을 하게 되 었는지 떠듬떠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던 강운교가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본파를 염탐하러 거룡단의 해적들이 숨어들었고 그것을 막다 창운관(蒼雲館)의 무사부(武師父)로 있는 정견(丁鵑)이 다쳤다? 그리고 그 녀석에게 부상을 입힌 해적들이 본파를 침입했기에 싸우게 되었고?” “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강운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 하지만 그때 상황이…….” “좋아, 일단 그렇다고 해 두고. 이번엔 네가 얘기해 보거라. 어째서 이런 오해가 벌어지게 되었는지.” 강운교의 시선이 을지호에게 향했다. 난처한 빛을 띠고 있던 을지호 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는 태산같이 많았지만 을지호는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자 신들을 오해한 정견이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고 수하들의 출신을 들어 모욕을 주고 싸움을 걸었다는 것과 이후에도 오해를 풀기 위해 대화 를 하려 했지만 다짜고짜 공격을 받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싸움이 벌 어졌음을 설명하였다. 을지호의 말이 계속될수록 강운교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수차례나 변화하였다. 강유도 얼굴을 들지 못했고 을지호의 손속에 기절했던, 처음 을지호를 공격하여 싸움의 발단을 만든 청년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인식하고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견은 어디 있느냐?” “치료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허, 이 무슨 한심한 일이란 말이더냐? 언제부터 우리 해남파가 함 부로 손님을 의심하여 그런 무례를 저질렀단 말이더냐.” 강운교의 탄식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오해를 풀도록 보다 노력했어야 하는 것인데.” 을지호의 말에 강운교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멀쩡히 두 눈을 달고 있음에도 오는 사람이 손님인지 적인 지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녀석들이 문제지. 네게 무슨 잘못이 있 겠느냐? 그만한 모욕을 받고도 참는 사람이 바보지.” 강운교의 서늘한 눈이 풀이 죽어있는 강유 등을 쓸어갔다. 강운교의 눈빛을 접한 그들은 감히 시선을 맞추지 못하겠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후~ 그렇지만 해룡상이 저리 되었으니 큰일이구나. 조상님들께 큰 죄를 지었어. 아, 이 죄를 어찌할까.” 겉으로 보기엔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석상이건만 강유는 물 론이고 어째서 강운교까지 저리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 연유가 궁금했던 을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귀한 것이었습니까?” 강운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귀하냐고? 암, 귀 하지, 귀하고말고. 얼마나 귀한… 아니다. 관두자. 이미 되돌이킬 수 없는 일. 더 말해서 무엇 하리.” 강윤교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악연이다. 악연이야. 이십 팔년에서 꼭 열흘이 부족한 시기에 부자가 나란히 석상을 파괴하다니. 허, 이것 참, 어째 꿈자리가 뒤숭 숭하더니만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려주려고 그랬나 보다.” “죄송합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을지호는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할 뿐이었다. “되었다. 서로 간에 과실이 있거늘 더 거론해서 무엇 하겠느냐? 이 일은 그냥 덮기로 하자. 아무튼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외조부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가자꾸나.” “하지만 장문 사형.” 인상을 구기며 듣고 있던 장염이 강운교를 막고 나섰다. “아무리 오해로 빚어진 일이고 또한 저 청년이 해남파와는 남남이 아 닌 귀한 손님이라지만 해룡상을 저리 만든 잘못은 받아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그 말 진정인가?” 강운교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예.” “장로님들도 같은 생각이시오?” 강운교의 물음에 장로들은 멀뚱히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볼 뿐 별다 른 말은 하지 않았다. 강운교의 입가에 고소(苦笑)가 지어졌다. “이보게 장 사제.” “예, 장문사형.” “장로님들께서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못하시는 줄 아는가? 참담한 심정이야 자네보다 백배 천배는 더할 분들이.” “모,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괴이한 눈빛으로 장로들을 살피던 장염이 떨떠름한 표정 으로 대꾸했다. “그럼 묻겠네. 자네, 해남파의 전대 장문인이시자 여러 장로님들의 사형이시고 또 자네와 나의 사부이시며 사사로이는 나의 장인어른이 되시는 창천해룡(蒼天海龍) 육건 어르신의 노기를 감당할 자신이 있나?” “그, 그게. 그러니까…….” 장염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그것이네. 이 녀석이 그분께서 친손자보다 더욱 아끼시는 놈이 란 말일세. 이 덩치만 커다랗고 말썽만 피우는 놈에 비하면 명(明)이나 유아는 찬밥이야, 찬밥. 해남파의 대를 이을 적자들이 말이네. 이제 알겠나? 어째서 장로님들께서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지?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으셔서 그러는 것이네. 뒷감당을.” 강운교의 말에 장로들은 연신 헛기침을 해대며 딴청을 피웠다. “어때? 이래도 잘잘못을 따져 책임을 물어야겠는가? 굳이 하려면 자 네가 하게. 난 도통 자신이 없다네.” 강운교의 짓궂은 질문에 장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 하니 몸을 돌려 걷는 강운교와 을지호 일행을 바라볼 뿐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6 * * * * * 연무장에서 북동쪽으로 백여 장 떨어진 자죽림(紫竹林). 해남파의 전대 문주 육건의 거처에선 연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허허, 그랬구나. 조상님들께야 죄송하지만 실수로 그런 것을 어찌 하겠느냐?” 가족들 간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육건은 해룡상이 깨졌다는 소리에도 잠시 얼굴을 찡그렸을 뿐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 았다. “그렇지 않아도 홀로 남은 것이 보기 안 좋았어. 장문인은 일간 조상 님들께 제(祭)를 지내 용서를 구하고 솜씨 좋은 석공(石工)을 불러 해 룡상을 다시 제작토록 하여라.” 아마 다른 문파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문파의 명운을 걸고 싸웠 을 것이고 해남파의 제자들이 실수를 했다 해도 치도곤을 면하기 어 려웠을 것이었다. 하나 을지호만은 예외였다. 강운교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만들지. 어차피 할 일도 없이 밥맛 축내는 몸. 이참에 본파를 위해 정성이나 기울여야겠어.”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운교가 걱정을 하며 되물었다. “아직은 괜찮아. 조사께서 만드신 것만큼 훌륭한 해룡상을 만들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노력은 해 봐야지.” 육건이 걱정하지 말라면 손사래를 쳤다.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 만 육건도 해룡상이 자신의 대에 이르러 완전히 박살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이 할애비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죄송할 것 없다.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외손자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해적으로 오인 받았다는 수하들이 저들이냐?” 육건이 배꼽 아래까지 내려온 수염을 쓰다듬으며 방 한켠에 어정쩡 하게 앉아 있는 해웅 등을 쳐다보았다. 육금정이 내어온 차를 홀짝거리며 귀를 기울이던 해웅과 초번, 뇌전 은 을지호가 뭐라 언질을 주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허리를 꺾었다. 찰나였지만 육건의 눈에서 흘러나온 날카로운 기운에 찔끔하여 감히 앉 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웅입니다. 그리고 함께 주군을 모시는 초번과 뇌전입니다.” 해웅이 허리를 펴며 공손히 입을 열었다. “허허, 그것 참.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덩치하나는 천하제일이로구나. 몸도 제법 단단한 것 같고.” “검은 물론이고 검기의 공격을 받고도 무사했습니다.” 해웅이 얼마나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강 유가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육건을 대 신한 강운교의 핀잔뿐이었다. “그건 저 친구가 강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네가 약해서 그런 것이 다. 자신이 약하니 상대의 강함만이 보이는 것이야.” “그래도 호 형님이 나서지 않았다면 승리하는 것은 저였습니다.” 강유가 풀이 죽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시끄럽다. 그 무공이 어떤 것인데 어줍지 않은 실력으로 함부로 시 전하려 한단 말이냐. 행여나 그것이 네게 화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 다고 몇 번을 말했건만.” 강운교는 강유가 절대삼검을 사용한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강 운교의 호통에 강유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절대삼검을 익히고 있더군요. 어째서 그 런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을지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절대삼검은 을지가문에 내려오는 비기중의 비기로 오직 을지가문의 사람만이 익힐 수 있는 것. 심지어 출가(出家)하면 남이라 하여 여아에게는 전하지도 않던 것이 절대 삼검이었다. 그런 것을 강유가 익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듯 강운교가 채 식지도 않은 차를 단번에 마시곤 입을 열었다. “그것이 다 네 아버지 탓이다.” “아버지 탓이라뇨?” “오년 전이었지 아마. 아버님의 고희연(古稀宴-칠순잔치) 때 다녀간 네 아버지가 인석에게 며칠간 시달림을 받고는 할 수 없이 가르쳐 주 었다.” 강운교의 말에 을지호가 곧바로 반문을 했다. “이 녀석이 어떻게 절대삼검을 알고 있지요? 아니,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하더라도 함부로 전수하는 것이 아닌데…….”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깨를 으쓱이는 강유에게 알밤 한대를 때 린 을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후~ 녀석에게 물어봐라.” 을지호의 시선이 강유에게 향했다. “히히, 사실은 그게 절대삼검인지도 몰랐어요. 그저 그때 한참 ‘쾌 (快)’라는 것에 몰두하다가 우연히 여쭈어 알게 된 것이지요.” “다 큰 놈이 웃음이 ‘히히’가 뭐냐 ‘히히’가. 아무튼 그래서?” “이모부는 ‘빠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제 물음에 대답대신 직 접 그것을 보여주셨지요. 그 이후의 일이야 뻔한 것 아니겠어요?” 강유가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사흘 밤낮을 쫓아 다녔다. 밥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측간까지 쫓아 다니며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지. 아무리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였어. 녀석의 집요함에 결국 네 아버지가 두 손을 들고 만 것이지.”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해남파와 을지가문은 엄연히 다른 가문이었다. 그리고 가문에 내려오는 무공은 함부로 공유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었다. 그것을 알려달라고 강유가 쫓아다녔으니 강운교의 입장이 어떠 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때의 난처한 기억이 생각나는 듯 강유를 노려보는 강운교의 눈빛 은 살벌했다. “혹시 다른 것도 가르쳐 주셨냐? 반야심경도해(般若心經圖解)라든가, 아니면 무위공(無爲功) 같은 것들.” “아니요. 제게 일러주신 것은 그것 하나뿐이에요. 구결하고 기수식, 그리고 검을 뽑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 말이지요.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었어요. 뭐, 약속을 그리 하긴 했지만.” 을지호의 얼굴은 이미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반야심경도해나 무위공도 가르쳐 주지 않고 그것을 익히게 하셨단 말이야? 미치셨군, 미치셨어.” “어허,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말버릇이 그게 뭐야?” 강운교가 육건의 눈치를 살피며 호통을 냈다. 그래도 을지호는 아랑 곳하지 않았다. “절대삼검은 실로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합니다. 내공도 없이 함부로 사용했다간 몸이 어찌 될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큰일난다구요.” “안다. 하지만 네 아버지가 말하더구나. 다른 초식과는 달리 무심지 검은 그다지 많은 내공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남파의 내공심법이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 나도 그 말엔 동의한다. 네 가 말한 반야심경도해나 무위공엔 미치지 못하더라도 본파의 현양신 공(玄陽神功) 역시 뛰어난 내공심법임엔 틀림없다. 충분하진 않더라 도 부족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외조부님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계시고.” “허허, 그렇지.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현양신공이면 충분할 것이야.” 육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러나 을지호의 얼굴은 좀처 럼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지요. 두 분께선 ‘그다지 많은 내공이 필요치 않다.’라는 말을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그것이 다름 아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반박의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을지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강운교는 물론이고 육건의 말속에서 해남파의 무공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얼마나 머물다 갈 생각이니?” 분위기가 조금 묘해진다고 생각한 육금정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 다. “가급적 빨리요. 며칠 쉬다 떠날 생각입니다.” “이런, 그렇다면 명이는 보지 못하겠구나.” 육금정이 아쉽다는 듯 말을 했다. 육금정의 말에 생각났다는 듯 좌우 로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거린 을지호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강명(姜明) 아.우.가 보이지 않네요. 형님이 먼 길을 지 나 왔건만 나와 보지도 않고. 어디 갔습니까?” “호호호,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네가 석 달 먼저 태어난 것을 모르 는 사람은 없어. 꼭 그렇게 티를 내야 되겠니? 호호호, 그리고 명이는 이곳에 없단다.” 육금정이 살짝 입을 가리며 웃었다. “흐흐, 문제는 녀석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지요. 어쨌든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고 지가 아무리 뭐라 해도 내가 형님인 것은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뒤집히지 않을 일이니 신경 쓸 것은 아니고… 어 디 멀리 갔습니까? 혹시 오지산에…….” 을지가문에 천지비부(天地秘府)가 있다면 해남파에도 천지비부와 비 슷한 금지(禁地)가 있었다. 해남도의 정중앙에 우뚝 솟은 오지산 어딘 가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금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을지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다. 그곳이라면 이미 다녀왔지. 명이는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 육금정을 대신해 강운교가 입을 열었다. “예? 왜구요?” “그래, 남쪽 지방에 왜구들의 출몰이 빈번하다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꽤나 대규모인 듯한데 관에서도 막기 버거운지 도움을 청해왔다.” “흠, 그래서 명이 그곳으로 갔군요. 해남파의 무인들을 이끌고.” 을지호가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를 대신해 갔다. 경험도 쌓을 겸해서 말이야. 뿐만 아니라 여러 장로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내제자(內弟子)들도 이에 동참하여 왜구를 토벌하러 갔지. 해서 지금 문파 내에 남은 인원은 몇 되지 않는다.” 잠시 말을 끊은 강운교가 해웅 등을 찬찬히 살피며 다소 강경한 어투 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상대한 녀석들은 내제자가 아니라 외제자(外弟子)다. 실력 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하하, 그랬습니까? 어쩐지…….” 강운교의 말에 을지호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강운교가 하고 싶은 말 이 무엇인지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해남파는 제자들을 가리지 않았다.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겐 언제나 문호(門戶)를 개방했다. 하지만 진정한 해남파의 절 기를 배우는 사람은 실력을 인정받은 몇몇 소수에 한정되었다. 사람들은 문파내에 거주하며 해남파의 절기를 익히는 이들을 일컬어 내제자라 칭하며 존경했고 일정한 시간이 되어 문파를 떠나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단순히 무공만을 배우러 문파에 드는 이들 을 외제자라 부르며 내제자와 구분하였다. 강운교의 말인즉 해웅 등은 내제자가 아닌 외제자들과 싸운 것이고 진정한 해남파 제자, 해남파의 무공을 접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험험,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살짝 안색을 붉힌 강운교는 무안함을 달래 기 위해 헛기침을 해댔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 이다. 너희들을 해적으로 오인한 것도 그런 이유라 할 수 있겠지.” 을지호와 해웅 등은 그제야 처음 만났던 해남파의 제자들이 자신들 에게 과민하다 싶을 정도로 적의를 내보였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쉽군요. 명이를 보고 싶었는데.” “인석아. 그러게 집에 좀 붙어 있으면 얼마나 좋으냐? 두 분 어르신 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여기 유아와 명을 데리고 여러 번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집에 없더라니. 내가 늙어 죽으면 찾아볼 생각이었느냐!” 육건이 짐짓 노한 표정을 지으며 야단을 쳤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주를 물경 10년 만에 본 것이었다. 을지호가 어째서 그렇게 방황을 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지 않았습니까? 이 머나먼 곳까 지요. 멀긴 정말 징그럽게 멀더군요.” 환하게 웃으며 말을 하던 을지호의 문득 오는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배 멀미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생각하며 진절머리를 쳤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오냐 오냐. 이제라도 왔으니 되었다. 마음 같아선 일년이고 십년이 고 잡아놓고 싶다만 일이 바쁘게 돌아가니 그리는 못하겠고… 있는 동안이라도 푹 쉬다 가려무나. 맛난 음식도 먹고 경치도 구경하고.”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어느새 노한 표정을 풀고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보이는 육건 의 모습을 보며 고생스럽기만 을지호의 지난 기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련히 다가오는 외조부의 사랑 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7 “또, 또. 그래선 소용없다고 얘기 한 것이 일각도 지나지 않았다. 정신 차리지 못 해!” “죄, 죄송합니다.” 을지호의 호통에 한창 보법수련에 열중이던 해웅은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붉혔 다. 해웅은 을지호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걸음이 꼬이고 좀처럼 진전이 없는 자신이 못마땅한지 연신 머리를 쥐어박았다. “흠,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해웅의 행동에 을지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자, 다시 한번 해보자. 너무 그렇게 의식적으로 발을 놀리니 걸음이 꼬이는 것이야. 처음 보로를 읽힐 때야 그런다고 쳐도 지금은 아니잖아. 복잡하게 생각 하지 말고 몸에 밴대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따라가면 된다니까. 기운 내고 다시 한번 . 뭘 보고 있어? 너희들도 똑같아. 멍청히 있지 말고 빨리 수련해.” 긴 막대기를 이리저리 흔들며 해웅 등을 독려하는 을지호는 비록 호통을 치기는 했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그들의 무공에 몹시 흡족해 하는 모습이었다. 을지호 일행이 해남도에 도착한지도 벌써 보름, 육건의 배려로 이런저런 구경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풍족하게 먹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사흘이 지난 다음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무공을 익히는 것이었다. “자, 이제 그만하고 호흡을 가다듬어. 올 때가 다 되었어.” 반시진의 시간이 더 흐르자 을지호가 두어 번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을지호의 말에 해웅 등은 거의 동시에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을지호가 고양이 눈을 하며 핀잔을 주었다. “흥,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지? 자업자득이야. 오늘도 지면 알아서들 해. 특히 뇌 전!” “예.” “쉽게 흥분하는 성격 고치지 못하면 평생해도 못 이겨.” “아, 알겠습니다.” 을지호의 따가운 시선을 받은 뇌전은 마치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고개를 빼고는 돌 사이를 비집고 힘겹게 자란 잡초를 지그시 뭉개는 것으로 무안함을 대신했다. 그 모양이 우스웠는지 해웅과 초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것을 그냥 지나 칠 을지호가 아니었다. “웃어? 지금이 웃을 때야? 일곱 번을 붙어서 일곱 번을 깨졌어. 첫날 이긴 것은 생각하지도 마. 창피하니까! 그리고 그게 뇌전 한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강유의 제의로 장난처럼 시작된 해남파 제자와의 비무가 오늘로써 벌써 여덟 번 째였다. 처음엔 그저 실전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라 생각해서 선선히 응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편을 갈라 대결을 하게 되자 그놈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실력의 차이는 분명히 인정하나 해웅 등은 을지호가 처음 거둔 수하였다. 그런 그들이 싸우는 족족 나가떨어지고 패하게 되니 아무리 승패에 연연하지 않던 을 지호로서도 은근히 화가 치밀고 있었다. 더구나 외제자를 상대한 첫날은 어찌어찌 힘겹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왜구들을 토벌하러 떠나고 그나마 몇 남지 않은 내제 자를 상대해선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오늘이 마지막인거 알지? 각오들 단단히 해.” 예정대로라면 내일 해남도를 떠난다. 오늘마저 진다면 다시는 설욕의 기회가 없 었다. “오늘 만큼은 정말 뭔가를 보여주겠습니다.” 번쩍 고개를 쳐든 뇌전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그러나 을지호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후~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 나도 그 뭔가를 봤으면 좋겠다.” 격려를 하긴 하지만 음성에도 힘이 없었다. 을지호가 수하들에게 선전을 다짐받는 동안에 연무장 한쪽에서 해남파의 제자들 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서 오던 청년이 을지호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정확히 왔네. 그런데 이놈은 어디 갔나?” 을지호가 고개를 홰홰 돌리며 강유를 찾았다. “장문인께서 부르신 것으로 압니다.” 청년이 주저 없이 대답을 했다. “그런가? 알았네. 그럼 바로 시작하지.” “규칙은……?” “동일하네. 먼저 옷을 잘라내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지. 결정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던가.”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예를 표한 청년이 뒤로 물러나더니 누군가를 지명했다. 그러자 자색무 복에 청색 띠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청년이 나섰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동작 하 나하나에 절도가 있는 것이 제법 만만치 않은 실력을 쌓은 것 같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청년이 나서자마자 뇌전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을지호가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청년 앞에 선 뇌전은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쏘아 보았다. “오늘은 쉽게 안 될 것이오.” 전의에 불타는 뇌전, 그러나 상대는 별다른 동요도 없이 살짝 검을 세우며 허리 를 굽혔다. “부탁드립니다.” “물론.” 뇌전이 검을 치켜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눈앞의 상대와는 다섯 번을 싸워서 모조리 패했다. 별다른 실력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간발의 차이였다. 물론 뇌전만의 생각이었지만. 운이 나빴다라고 극구 주장했지만 어이없다는 듯 한참을 쳐다보던 을지호는 운 도 실력이라는 한마디를 던졌었다. 그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실력이 아니라 진정 운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내야 할 시간이었다. “조심하길.” 번쩍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연무장이 떠나가라 기합을 지르며 선공을 취하는 뇌전은 언제보아도 기운찼다. 두 걸음의 도약으로 청년의 면전에 단박에 도착한 뇌전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다가들자 청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뇌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나직한 기합 성을 내뱉으며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청년의 동작은 힘이 넘치면서도 한점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채챙. 검과 검이 부딪혔다. “타핫.” 정면으로 맞부딪쳤던 뇌전과 청년이 동시에 한발 물러나더니 물러나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부딪쳤다. 뇌전이 창궁약연의 초식으로 청년의 옆구리를 노리며 검을 날렸다. 비록 오성에 불과한 성취였지만 청년을 긴장시키기엔 충분했다. 황급히 아래로 검을 내려 공 격을 막은 청년은 연이어 들어오는 공격을 대비하며 몸을 뺐다. “하아앗.” 뇌전의 검이 기묘하게 흔들리며 몸을 빼는 청년을 노렸다. 창궁약연에 이은 창궁 무한의 초식이었다. 청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무공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난 며칠과는 달리 뇌전 의 연환 공격이 상당히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밀렸다가는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패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청년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밀려드는 검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모두 정신 차리고 지켜봐.” 기선을 제압당했다고 생각한 청년의 검이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자 을지 호가 조금은 정색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온 정신을 집중해 싸움을 관전하고 있는 해웅과 초번의 귀에 을지호의 음성은 들어오지 않았다. ‘구산팔해(九山八海)라고 했던가.’ 자신의 공격을 단숨에 무위로 만들어 버리고 눈을 현란케 하는 청년의 공격, 첫 패배 이후 뇌전은 그것이 해남파의 삼대 검법 중 하나인 구산팔해라는 것을 전해 들었다. 아홉 개의 산과 여덟의 바다라는 이름 그대로 전 구식은 날카롭고 빨랐으며 도 도하게 이어지는 후 팔식은 부드러움과 더불어 강맹함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은 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창궁무애검법을 완숙하게 익히지 못했듯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을 움직일 때마다 힘에 부치는지 일그러지는 얼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상대가 구산팔해를 시전하기 시작하자 뇌전의 전신에선 긴장감과 더불어 강한 투기가 피어올랐다. 검을 쥔 손에 부쩍 힘이 들어갔다. 뇌전과 청년이 내뱉는 함성이 해남파를 뒤흔들었다. 검이 부딪치며 내는 쇳소리 와 주변으로 흩날리는 불꽃이 둘의 주변을 에워싸고 내뿜는 기세는 이내 폭풍이 되어 연무장에 휘몰아쳤다. “멋지다.” 해웅과 초번의 입에서 동시에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해남파의 제자들 역시 뇌전 의 선전에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하나 을지호만은 이들과는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부터다. 정신 차려라 뇌전. 성급해선 안돼. 절대로.’ 비슷한 것 같지만 분명히 실력의 차이는 있었다. 뇌전이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 을 하는 반면 상대는 어느 정도 힘을 비축하며 싸우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 인지 흥분해 날뛰는 해웅과 초번과는 달리 해남파의 제자들은 조금 놀라기도 하 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청년의 태도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못마땅해 하고 있었 지만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직은 어리군.’ 청년에겐 뇌전 정도의 상대는 모든 힘을 쏟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지 몰랐지만 을지호가 보기에 그것은 자만에 불과했다. ‘흥분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 최선을 다하는 뇌전과 자만하고 있는 청년, 기회는 있었다. 다만 뇌전이 얼마나 침착하게 상대의 자만을 파고 들어가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지 못했기에 지난 몇 번의 비무에서 패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치려 해도 쉽게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성격이었다. 여러 차례 호 통을 듣고 충고도 의식해 나름대로 신경을 쓸 때라면 모를까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무아지경에 빠진 상황에선 원래의 성격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을지호가 뇌전이 흥분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순간, 청년을 점점 몰아쳐가 던 뇌전의 뇌리엔 이미 승리라는 단어가 각인되고 있었다. ‘흐흐흐흐.’ 마음먹은 대로 검이 움직이고 걱정했던 발놀림도 지금처럼 자연스러운 적이 없 었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할 뿐 변변한 반격도 하지 못했다. 뇌전은 스스로가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최후의 일격으로 승부를 끝 낼 때였다. 물론 마지막을 장식할 멋진 초식도 떠올리고 있었다. 승리를 확신한 뇌전은 배우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초식, 창궁무애 검법의 마지막 초식인 창궁조화를 시전했다.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인 뇌전의 검이 청년을 쓸어갔다. ‘흐흐흐, 드디어…….’ 은근히 걱정을 했건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상대는 피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 니 서 있었다. ‘이겼다!!’ 마지막 공격 역시 자신의 의도대로 정확하게 펼쳐졌다는 생각에 뇌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승리를 확신한 사람은 뇌전만이 아니었다. 해웅과 초번 역시 번쩍 손을 들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겼다!!” “시끄러!!” 그들은 함성이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을지호가 휘두른 작대기에 머리를 맞아야 했 다. “멍청한.” 뇌전의 공격을 지켜보던 을지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어,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검을 내려뜨린 뇌전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신의 목에 청년의 검이, 우두커니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청년의 검이 정확히 한 치의 간격을 두고 겨누고 있는지, 또 앞섶의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휘날리게 되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조금 빨랐군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검을 거둔 청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검을 양손에 끼워 아래로 향하게 한 뒤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잘 배웠습니다.” “예? 아예.” 얼떨결에 마주 인사를 했지만 뇌전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그런 뇌전을 향해 을지호의 성난 작대기가 달려들었다. 딱~! 경쾌한 격타음이 들리고 주저앉은 뇌전의 곁으로 을지호가 다가왔다. “이길 줄 알았지?” “아, 아닙니다.” 뇌전은 머리를 움켜쥐던 손을 재빨리 감추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흥, 아니긴. 조금 전만 해도 다 이긴 줄 알고 있었으면서. 그것이 상대가 네 방 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펼친, 정말 눈에 훤히 보이는 수법이었음에도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주군.” 뇌전은 죽을상을 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찌 당한건지 알고나 있는 거냐?” “…….” 멍청히 쳐다보는 뇌전의 시선에 을지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승리를 확신하며 날린 회심의 일격은… 후~ 어떻게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무공을 쓸 생각을 했냐? 도대체 어찌 생겨먹은 머리인지. 아무튼 네가 보기엔 최 고의 초식이었겠지만 그다지 빠르지도 또 별다른 변화도 없는 그저 그런 공격이었다 . 그렇게 착각을 한 것은 너뿐이고. 아니지, 이쪽에도 두 명이나 더 있었군.” 을지호가 스산한 눈빛으로 해웅과 초번을 노려보았다. 해웅과 초번은 을지호의 눈을 피해 재빨리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상대는 네가 최대한 방심하는 순간까지 참고 기다리다 역습을 펼친 것이다. 상 당히 빨랐어.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공격을 피해 내며 접근할 때 썼던 움직임이 급어성화(急於星火)던가… 아마 그럴걸.” 을지호가 자신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청년을 쳐다봤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몸짓을 보였다. 뇌전이 급어성화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을지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말했지? 절대로 흥분하면 안 된다고.” “예.” 뇌전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슷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 땐 얼마나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상대를 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진다. 하물며 실력의 차이가 났을 땐 어떨까? 뇌전 네게도 분명 기회가 있었다.” 을지호의 시선이 청년에게 향했다. “상대 역시 너를 얕보고 있었다. 물론 마지막에 가서는 제 실력을 보여준 것 같 다만 그 전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때 네가 조금만 더 냉정하게 공격을 했더 라면 어쩌면 이겼을지도 모른다.” 뇌전의 고개가 슬그머니 청년에게 향했다. ‘감히 봐주면서 했단 말이냐!’라는 눈 빛을 띠고 있었지만 청년은 이미 그의 사형에게서 한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슴은 흥분으로 인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더라도 머리.” 을지호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렸다. “이 머리는 차갑게 식히란 말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을지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게 말을 자르곤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초번 너다.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겠다.” “예.” 초번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해웅의 등 뒤로 걸어가는 뇌전을 보며 전의를 다졌다. 초번이 나서자 해남파에서도 초번의 상대가 나섰다. 처음 나섰던 청년의 사형 정 도 되는지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다. ‘꼭 이겨야 한다.’ 자신이 진다면 더 이상 뒤는 없었다. 해웅이 이긴다하더라도 승패엔 영향을 미치 지 못한다. 무조건 이겨야만 했다. 부담감 때문인지 초번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움직임도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그 모양을 보던 을지호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으이구. 한 인간은 앞뒤 재지 않고 흥분하여 날뛰는 것이 문제고 한 인간은 차 분함이 철철 넘치니. 초번!” “옛!” 초번이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너무 차분한거 아냐? 그렇게 몸이 굳는 것은 흥분하는 것만도 못하다. 승패에 연연하지 말고 재밌게 놀아봐. 어차피 실력을 늘리려는 것이 목적이지 꼭 이기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얼굴을 핀 초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팔도 이리저리 돌려가며 몸을 풀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몸이 많이 굳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초번을 보는 해웅과 뇌전의 얼굴은 핏기를 잃고 핼쑥해져있었다. 초번은 몸을 돌리느라 미처 듣지 못했지만 해웅과 뇌전은 을지호가 마지막에 조 용히 뇌까렸던, ‘그래도 사내라면 이길 것은 이겨야지. 무슨 수를 쓰던지,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라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만 약 초번마저 패한다면 비무 중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을지호의 손에 그렇게 될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8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8 “멋진 움직임이었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수도 없이 구르느라 옷이 해지고 머리가 깨지고 마치 목욕이라도 한 듯 온 몸이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기진맥진했던 초번은 어깨를 두드리며 던진 을지호의 한 마디에 지금까지의 피로가 말끔히 가신 듯 가슴을 펴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운도 실력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잘 해주었다.” 을지호는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한껏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힐끗거리 며 자신을 쳐다보는 뇌전의 속을 긁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구처럼 성급하게 달려들지도 않았고. 판단도 적절했다.” 하지만 아무리 잘 했더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을 해야 했다. 그래야 발 전이 있는 법이었다. 을지호는 방금 전 대결에서 나타난 초번의 약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힘든 한판이었어.” “제가 부족해서 그랬습니다.” 을지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냥 들어봐. 정확히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사십 여 초를 교환한 이후던가? 위급한 상황에 닥친 네가 땅을 구르며 검을 피했을 때 상대는 그런 네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이겼다고 생각했겠지. 바로 그때 몸 을 굴려 뒤로 물러만 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에게 접근을 시도했다면 틀림 없이 좋은 공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저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을 뿐이었다. 더구나 허겁 지겁 땅을 구르는 자세로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초번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을 했다. 을지호는 당연했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이며 말을 이었다. “쉽지는 않았겠지. 어쨌든 아쉬운 기회였다. 또 한번의 기회는…….” 을지호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해남파의 제자들 또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 을 의식했는지 을지호의 음성도 처음보다는 다소 높아졌다. “시작과 동시였다. 기습을 펼쳤을 때 절호의 기회를 맞았었지. 막기는 했으되 네 가 그렇게 전격적으로 공격을 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상대는 상당히 당 황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가정에 불과하나 그때 조금만 더 집중력을 보여주었다면 쉽게 이겼을지도 몰랐다.” “당황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처음 공격이 막히는 바람에 역습을 걱 정하여…….” 을지호의 지적이 틀릴 리가 없었다. 초번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를 기울이다 을 지호의 설명에 얼굴을 붉히고 있는 상대를 쳐다보며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경험의 차이다. 조금만 더 실전경험이 있었다면 네게 찾아온 두 번의 기회를 놓 치지 않았을 것이다.” 을지호가 고개를 돌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이지 않는 한 대등한 싸움에선 적어도 한두 번은 자신 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을 놓치느냐 놓치지 않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 정되고 심지어 목숨마저 좌우되겠지. 능력이 있다 해도 경험이 없으면 당황하여 놓치기 쉽고 경험이 많다 해도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함부로 결행하기 힘들다 . 문제는 그런 기회가 계속해서 찾아오지 않는다는데 있다. 하니 찾아온 기회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부지런히 수련을 하고 많은 경험을 쌓는 것 외 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해웅 등이 크게 허리를 꺾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좋아. 아무튼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다음은 해웅, 너다.” “맡겨주십시오.” 을지호의 지목을 받은 해웅이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도끼를 바닥에 찍으며 앞으 로 나섰다. 해웅이 나서자 해남파 측에서도 기다렸다는 듯 한명의 청년이 앞으로 나왔다. 강유를 대신하여 해남파 제자들을 이끌던 청년이었다. ‘이런, 저 친구가 나오는군.’ 해웅의 상대가 누구지 알아본 을지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법 괜찮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해웅이 초번이나 뇌전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단단한 몸뚱이와 무지막지한 힘뿐 이었다. 최근 들어 보법에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나름대로 성과를 보았다지만 아직 많이 부족했다. 지금껏 해웅은 세 번을 이기고 네 번을 졌다. 사실 세 번의 승리도 그가 휘두르 는 도끼의 기세가 워낙 대단해 지레 겁을 먹은 해남파 제자들의 실수로 인한 것 이지 순수한 실력은 아니었다. 물론 비무가 아니라 싸움이었다면 해웅이 패배할 이유가 없었지만 규칙을 정해놓고 하는, 옷자락 하나만 잘려도 패배하고 마는 비무였다. 문제는 이번 상대가 해웅의 기세에 주눅이 들어 실수를 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데 있었다. 지난번 비무에서 초번을 제압하던 움직임은 결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느려터진 해웅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했다. ‘젠장, 힘들겠군.’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직접 말을 해 왔지만 그래도 승부는 승부였다. 결 국 마지막 대결에서도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을지호는 스물스물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인상을 구겼다.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다 패배한 뇌전은 그런 을지호의 심리를 일찌감치 알아챘는 지 어느새 한참이나 벗어난 곳에서 불안한 눈으로 을지호를 살피고 있었다. ‘저놈이.’ 사내라면 까짓 몇 번의 패배에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 패배를 밟고 일어서 극복 하는 것이 진정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수하라면 더더욱 그래야 했다. 한데 기가 죽어 눈치만을 살피는 행태는 뭐란 말인가! 도저히 참고 넘어갈 것이 아 니었다. 당장에 물고를 내려도 시원치 않겠지만 어차피 비무가 끝난 다음에 행하여도 늦 지 않았다. 더구나 막 비무가 시작되려 하고 있는 터, 호통을 쳐봐야 해웅에게 괜한 심적 부담감만 더해줄지 몰랐다. ‘그래, 잠시 후에 보자꾸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던 을지호는 호통을 치 는 대신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비무는 시작되지 못했다. 연무장 한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강유가 약간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중단시켰기 때문이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팽팽하게 당겨졌던 끈이 풀리듯 상대방에게 향했던 기운을 힘없이 거둔 해웅과 청년이 맥이 빠진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뭐야? 늦게 나타나는 것도 모자라 하필 중요한 순간에?” 해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끄러. 어차피 싸웠으면 졌을 것 아냐?” “지긴 누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해웅이 도끼를 흔들며 소리쳤다. 강유는 기도 막히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 다. “그 느릿느릿한 거북이걸음으로? 아, 그리고 이참에 제대로 짚고 넘어가자.” “또 뭘?” “솔직히 네가 주군으로 모시는 사람이 나하고 어떻게 되냐?” “비밀이라도 되냐? 솔직은 무슨 솔직, 사촌 형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주군의 형제면 최소한 그에 합당하는 대우를 해 줘야 하는 것 아냐?” 강유는 말을 하면서 슬쩍 을지호의 눈치를 보았다. “또냐? 난 끼워 넣지 말고 니들끼리 해결해.” 오늘로써 벌써 네 번째의 다툼이었다. 을지호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들었지? 지겹지도 않냐? 내가 주군으로 모시는 사람은 네 형님이지 네가 아니 야. 그리고 네 나이 열아홉, 내 나이 또한 열아홉. 그거면 된 거 아냐?” “최소한 반말은 하지…….” “사실 태어난 시기는 내가 훨씬 빠르다. 따지고 보면 나를 형님으로 모셔야 되는 것 아냐? 덩치를 봐도 그렇고. 주군을 봐서 양보하는 건줄 알아야지. 뭐 정 반말 하는 것이 싫으면 네가 먼저 존대를 하든지. 물론 나까지 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고려는 해보지.” 일고의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을 자른 해웅은 씩씩거리는 강유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의뭉스런 미소를 지었다. 무조건 자신을 위하는 수하들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강유를 만나고 인연을 만든 것이 은근히 마음에 드는지 해웅의 행동은 다소 묵직했던 평소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우라질 놈! 치워라!! 덩치는 커다란 놈이 말하는 것이 어째 그리도 얍삽한지! 에 이, 빌어먹을 놈!” “하핫, 그러게 이미 끝난 일을 누가 또 들먹이라더냐?” 해웅과 마찬가지로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강유를 살피던 을지호가 한마디 던지자 강유의 눈이 옆으로 째졌다. “흥, 처음부터 형님이 제대로 서열을 정해줬으면 편했을 것 아닙니까?” “서열은 무슨 서열? 비슷한 연배끼리 친구처럼 지내면 되는 것이지. 그리고… 해 웅은 그렇다 쳐도 초번과 뇌전의 나이는 너보다 위인 것으로 아는데 아마?” “둘 다 스물 한 살 입니다.” 해웅이 재빨리 대꾸했다. “호, 나이가 많다는 말이지…….” 을지호와 해웅이 서로를 바라보며 능청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은근한 협박의 뜻 도 포함한 웃음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자신을 둘째 공자라 칭하며 존대를 하는 초번과 뇌전까지 친구로 지낼 판이었다. 웃음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 챈 강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알았다고요. 이제 그만 합시다.” “흐흐, 그러니까 끝난 일을 가지고 되도 않는 억지를 쓰지 말라니까.” “알았다니까요. 그만합시다, 그만 해요.” “나참, 제 놈이 먼저 시작하고는 신경질은. 알았으니까 그렇게 악쓰지 마라. 그 건 그렇고 품안에 그건 또 뭐냐?” 을지호가 얼굴을 붉히고 화를 삭이는 강유의 품에 죽은 듯이 안겨 있는 물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강유의 시선이 을지호의 시선을 따라 품안의 물체로 향했다. 얼굴이 또다시 일그 러졌다. 강유는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을 인식하 고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뭐냐고요? 보면 모르십니까? 제가 키우던 매잖아요, 매.” “그래, 매라는 건 알겠는데 그러니까 왜 그러냐고?” 강하게 나오는 강유의 태도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을지호가 한발 뒤로 빼 며 물었다. “왜 그러냐고요? 흥, 그것은 저 잘난 놈이게 물어보시지요? 누구처럼 무식하게 힘만 세가지고는!!” 강유가 가리킨 것은 사냥을 했는지 정문위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뜯고 있는 철왕 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도 없었다. 철왕을 가리키는 한마디에 을지호는 모든 정황 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철왕이 사고를 친 것이었다. “흠.”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을지호가 짧은 신음성을 내뱉자 강유가 두 눈에 불 을 켜고 달려들었다. “흠이라니요? 이게 어떤 매인 줄이나 아십니까? 무려 닷 냥이나 주고 구입한 것 입니다. 그것도 간신히.” “사내놈이 고작 닷 냥 가지고 그 난리냐? 옜다, 닷 냥.” 강유가 펄펄 뛰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코웃음을 친 해웅이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냈다. 그런 해웅의 태도가 강유를 더욱더 분노케 했다. “내가 지금 장난 하는 것으로 보이냐?” “서, 설마 은화냐?” “은화? 금화다 이놈아! 그리고 누가 돈 때문에 그런 줄 아느냐? 내가 이 녀석을 얼마나 아끼고 귀하게 보살펴 왔는데…….” 강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품안에 안겨 힘없이 퍼덕이는 매의 머리를 안쓰 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한쪽 날개의 깃털이 보기가 흉할 정도로 뜯겨 나가고 곳곳에 상처를 입었는지 붉은 얼룩이 진 매는 주인의 손길에 기묘한 소리를 내며 반응하고 있었다. “금화면 꽤, 꽤나 비싸군.” 괜한 말을 했다가 본전도 뽑지 못한 해웅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꺼냈던 동전도 재빨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쯧쯧, 여기까지 와서… 하긴, 제 버릇이 어딜 갈까?’ 지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미치를 뚝 떼고 먹이를 먹느라 바쁜 철왕을 쳐다보는 을지호의 입에선 그저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었다. “미안하다. 너도 알다시피 저놈 성질이 워낙 개판이라.” 기르던 동물이 잘못을 저지르면 주인이 책임을 지는 법. 을지호는 화를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강유에게 미안하다는 표정과 함께 사과를 했다. 하나 사과 한번 으로 화가 사그라질 만큼 매에 대한 강유의 애정이 약하지 않았다. “이게 사과한다고 끝날 일로 보입니까? 세상에 얼마나 못살게 굴었으면 이렇게 많은 상처가 난단 말입니까?” 강유는 이리 뜯기고 저리 뜯겨 엉망인 매를 들이밀며 악을 썼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을지호는 거듭 사과를 했다. “한번만 이해해라. 나도 저놈의 성질에 두 손 든 지 오래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하마.” “이해요? 이해할 것이 따로 있지 절대로 이해 못합니다. 지가 아무리 힘이 세다 고 해도 그렇지…….” 철왕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을지호에게 하소연 비슷한 책망을 늘어놓기를 한참, 그럼에도 강유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하지만 세상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약이라도 입에는 쓰고 칭찬도 자꾸만 들으면 더 이상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법이었다. 하물며 쓴 소리였다. 아무리 성질이 더럽고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미우나 고우나 철왕은 어릴 적 부터 함께 해온 친구였다. 거기에 싸잡아 주인이 어쩌구 하며 계속해서 쓴 소리를 해대자 을지호도 배알이 뒤틀렸다. “웬만하면 그만해라.” 나직이 내뱉는 을지호의 말엔 어느새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그러나 강유는 아랑 곳하지 않았다. “그만하기 뭘 그만합니까? 아직…….” 강유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을지호가 허리를 잘랐다. “시끄럽다. 품안의 매가 죽은 것도 아니고 내가 사과까지 하지 않더냐. 사내놈이 한 두 마디 했으면 됐지 계집애처럼 징징대기는. 그리고 네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저놈이 꿈쩍이나 할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지. 오히려 조심해야 할 거다. 모르는 척 하고 있지만 저놈이 저래 뵈도 사람의 말귀를 제법 잘 알아듣는단 말이 야. 네가 욕하는 것 다 새겨듣고 있을걸.” “흥, 그래봤자 지요. 제깐 놈이 감히 어디서!” 을지호의 호통에 찔끔한 강유가 다소 누그러진 기세로 대답을 하더니 고개를 쳐 들고 철왕을 향해 주먹을 휘휘 내저었다. 강유의 행동에 안타깝다는 듯 을지호가 혀를 찼다. “쯧쯧, 몰라도 한참을 몰라.” “뭐를요?” “내가 옛날 얘기 하나 해줄까?” “그다지 듣고 싶지는 않은데요.” 강유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들어봐. 내가 짧지만 군에 있을 때였는데 지금과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토끼나 몇 마리 잡아오라고 날려 보냈더니 웬걸, 토끼는 제쳐두고 엉뚱하게도 상 관이 사냥용으로 기르는 수리를 초죽음 내버린 거야. 네 마리가 있었는데 그중 가 장 큰 놈이었다.” 힐끗 시선을 던져 강유의 반응을 살핀 을지호가 말을 이었다. “사실 장백산에 있을 때부터 놈은 알아주는 폭군이었어. 저놈이 하늘을 날고 있 을 땐 모든 날짐승들이 날개를 접었다. 어디서 파닥거리는 소리만 나도 가만히 두질 않았거든.” “…….” “아무튼 그 수리를 제법 아꼈는지 상관이 펄펄 뛰더군. 너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온갖 욕을 해대며 철왕을 잡으려 기를 쓰고 뛰어다녔지. 결국 잡 지는 못했고.” “그래서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질문을 하는 강유의 콧잔등엔 땀방울이 맺히고 있 었다. “그래서는 무슨, 그걸 차곡차곡 마음속에 담아두었는지 상관이 기르던 수리를 모 조리 잡아 족치고 심지어는 상관에게까지 달려들었지. 간신히 말렸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머리에 구멍이 날 뻔 했어. 뭐, 편하긴 하더라.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까 겁을 먹었는지 길길이 날뛰던 상관도 더 이상 귀찮게 굴지는 않더고만.” “젠장,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뭡니까?” 강유가 품안에 매를 깊숙이 안으며 소리쳤다. “뭐긴, 그렇게 욕을 해대다간 내일 아침이 가기 전에 날개가 뜯기고 목이 부러져 죽은 매 한 마리가 발견될 거라는 것이지. 잘하면 네 머리에 구멍이 생길수도 있고.” 을지호는 철왕이 들으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고 강유 의 옆구리를 툭하고 쳤다. “미리 말해두지만 저놈 제법 세다. 그리고 꽤나 독종(毒種)이야.” “정말…입니까?” 강유가 믿기 어렵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지금껏 억지로 웃음을 참아낸 해웅이 곁으로 다가와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거들었다. “저놈 무시했다가 내 수하 한명이 거의 병신이 되었다지 아마. 어깨가 박살나고 머리에 구멍이 나고.” 강유의 시선이 초번과 뇌전에게 향했다. 초번과 뇌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저 같으면 후회할 짓 하지 않습니다.” 뇌전의 한마디가 불안한 강유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하나 진정한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툭. 뇌전의 말을 듣던 강유의 발아래에 조그마한 물체가 떨어졌다. “으악!” 물체의 정체를 확인한 강유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강유를 놀랜 것은 다 름 아닌 쥐의 머리, 어떻게 끊어냈는지 몸에서 정확하게 머리만 분리된 모습이 었다. “빌어먹을 놈!” 자신을 놀라게 한 것이 철왕임을 확인한 강유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잠시 날아 올라 강유에게 쥐의 머리를 선사한 철왕은 이미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음, 경고군.” 을지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경고요?” 강유가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지금까지의 설명했잖아. 놈이 사람 말귀를 기막히게 알아듣는다고.” “그럼……?” “그래, 더 이상 욕을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를 보낸 거다. 원래는 경고 따 위는 보내지도 않고 행동하는 놈인데 그래도 안면이 있다고 한번 참아주는구나. 하지만 저놈 성격에 두 번은 참지 않을걸.”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강유를 향해 을지호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웬만하면 이번 일은 이쯤에서 묻는 것이 좋겠다.” “…….”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강유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을지호가 기르는 매만 아니 라면 당장에라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저 황당한 눈으로 한껏 염려하는 목소리의, 그러나 그런 모습 뒤에 은근히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을지호와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제 할일만 하 는 철왕을 번갈아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매나 그 주인이나. 후~.’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더 이상 거론해봤자 득 될 것 없다고 판 단한 강유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었다. 강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는 을지호가 요란스럽게 박수를 치 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자자,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지 말고 이리와라. 아직 비무가 끝나지 않았어. 승 부는 보아야지.” 그러나 강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형님은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맞다. 저 친구가 네가 이모부님이 부르셔서 갔다고 말하더구나.” “형님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흠, 그래? 알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해웅.” “예. 주군.” 해웅이 을지호의 부름에 재빨리 대답했다. “너도 들었지? 나는 이 자리를 떠야겠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마지막 비무인데 끝 은 봐야지. 옆에서 지켜보지는 못하겠지만 응원은 해주마.” “염려 마십시오.” 해웅이 맡겨달라는 듯 가슴을 치며 대꾸했다. “좋아. 기대해 보지.” 을지호는 그다지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해웅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만족해하 며 몸을 돌렸다. 상처 입은 매를 꼭 안은 강유가 총총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타핫!!” 을지호와 강유가 연무장을 벗어나기도 전에 해웅의 기합성이 주변에 울려 퍼졌 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19 연무장을 떠난 을지호와 강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죽림을 향했다. 연무장을 벗어나고 장문인의 거처와 몇 개의 전각을 더 지나자 자죽림의 모습이 보였다. 시야에 자죽림이 들어오자 걸음을 멈춘 을지호가 강유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강유가 고개를 돌려 을지호를 쳐다봤다. “어떠냐?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냐?” 난데없이 결정이라니. 강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뭐를 말입니까?” “뭐긴, 지난번 얘기한 것 있잖아. 어차피 여기 있어봤자 재밌는 일도 없고 또 하 루하루가 무료한 일상 아니냐?” “아, 그 얘기요.”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강유,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틀린 것 같아요.” “아니, 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가 호된 꾸지람만 들었습니다. 그런 것 고민할 시간 있으면 무공이나 더 익히라고요. 관둘랍니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미련이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쯧쯧,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포기해서야 쓰나.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 어야지. 처음부터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모를까 너도 관심 있어 했잖아.” “하지만 아버지가…….” “나 원, 네 나이가 몇이냐? 도대체 언제까지 부모님 품에서 안주할 생각이야. 한 번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 설사 그것이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 사내라면 그만한 오기와 배짱은 있어야지. 안 그래?” “…….” 강유는 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몹시 갈등하는 듯 얼굴에 여러 가지 표정이 떠 올랐다. 조금만 더 설득을 하면 넘어올 것이라 생각했는지 한껏 목소리를 키운 을지호가 양 어깨를 힘주어 잡고 말을 이었다. “생각을 해 봐라. 남자라면 놀아도 보다 큰물에서 놀아야 할 것 아냐. 해남도? 그래, 결코 작지는 않다. 그러나 장부가 꿈을 펼치기엔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아. 더구나 너는 장차 해남파를 이어받을 장자도 아니잖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하지만 나를 따라 중원으로 간다고 생 각해봐라. 남궁세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다. 수없이 많은 일 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네 이름이 무림사(武林史)의 한 장을 장식할 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이냐. 남자로 태어나 최소한 그만한 포부 는 지녀야 하지 않겠냐?” 을지호의 열변에도 강유는 묵묵부답(??不答)이었다. “아직도 시간이 남았으니 지금 당장 결정하라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이것 한 가 지만 명심해라. 한곳에 안주해서는 결코 발전이 있을 수 없어. 인간은 고난과 역 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경험을 쌓고 힘든 일 을 극복해 나가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을 때 비로소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들으면 들을수록 구구절절(句句節節) 옳은 소리처럼 여겨졌다. 말 한마디 한마디 가 여인내의 유혹처럼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우~~.” 선뜻 허락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한심 할 수가 없었다. 강유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자, 생각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어른들께서 기다리신다. 가자.” 을지호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적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더 말을 해봐야 역 효과만 일으킨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하나 마지막 여운을 두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꽤 재밌을 텐데 말이야. 흥분되는 일도 많을 것이고…….” * * * * * “이것이 무엇입니까?” 을지호가 육건이 내민 두 권의 책자를 집어 들며 물었다. 펴보지 않았음에도 먹 물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것이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냥 네게 필요한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손자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는지 살펴보라는 듯 고개 짓을 하는 육건의 표정은 몹시 밝아 보였다. “꽤나 무겁군요.” 일반 서책들과 비교해 그다지 차이가 없고, 특히 한권은 몹시 얄팍하게 보였음에 도 어찌된 일인지 제법 무게가 있었다. “펴 보거라.” 육건의 권유에 을지호는 두꺼운 책을 우선적으로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용사비등(龍蛇飛騰)한 글씨체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뛰어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소림사(少林寺). ‘소림사?’ 난데없이 소림사라니. 을지호는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숭산(嵩山)에 위치. 현 장문인은……. “이, 이건!!” 첫 장부터 상상을 뛰어넘는 내용이었다. 깜짝 놀란 눈으로 육건을 바라보던 을지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책장을 넘겼다. 소림사의 뒤를 이은 것은 무당파(武當派)였다. “도대체가…….”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을지호의 눈은 커져만 갔다. 처음 소림사부터 시작하여 각 문파에 대한 설명이 너무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건과 함께 흐뭇한 미소를 짓던 강운교가 입을 열었다. “강호엔 수도 없이 많은 문파들이 존재하지만 현재 무림은 크게 구파일방(九派 一幇)과 여러 세가(世家)들을 중심으로 한 백도(白道), 패천궁을 중심으로 한 흑 도(黑道), 그리고 양쪽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中道) 문파들로 나뉜다고 보 면 맞을 것이다. 우선 백도의 명망 있는 구파일방과 세가들부터 정리를 했고 그 이후는 각 지역에 위치한 문파들에 대한 설명을 적었다. 나름대로 최대한 자세 하게 설명하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특히 패천궁을 중심 으로 한 흑도의 문파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더 빈약해. 아무래도 정보를 얻기가 쉽 지 않아서 말이야.” “아, 아닙니다.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칩니다.” 넘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책의 두께를 보건데 모르긴 몰라도 중원에 산재한 대다 수의 문파들에 대해서 설명이 되어 있는 듯 했다. 특히 남궁세가가 위치한 곳의 여러 문파들에 대한 것들은 을지호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정 보였다. “허허, 천하의 을지호가 그 정도에 놀라서야 쓰나. 세력편(勢力篇)을 보았으니 인물편(人物篇)도 보아야지. 어서 다음 책도 마저 보려무나.” 을지호의 반응이 마냥 즐겁기만 한 육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 지었다. 그렇 지 않아도 다음 책을 향해 손을 뻗고 있던 을지호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책을 집었다. 그리고 흥분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차분히 책장을 넘겼다. 일승(一僧), 수호신승(守護神僧). 세력편의 첫 장을 장식한 것이 소림사였듯 인물편의 첫 장도 역시 소림사의 인 물이었다. 일패(一覇). 흑도지존(黑道至尊) 안휘명(鮟麾命). 수호신승에 이어 거론된 인물은 현 패천궁의 궁주이자 흑도의 사실상의 지존인 안휘명이었다. 그 뒤로 오왕(五王)이니 삼괴(三怪)니 하며 몇몇 인물들에 대한 설 명이 이어졌다. 더 이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한 을지호가 책을 덮고 강운교를 응시했다.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강운교가 입을 열었다. “세력편에서도 각 문파에 속한 무인들에 대해 언급을 하긴 하였지만 인물편에 설명된 사람들은 보다 특별한 사람들이다. 개인 개인의 능력이 하늘을 울리고 땅을 뒤집을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이지. 특히 백도와 흑도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 는 일승과 일패를 제외한 십인들, 첫머리에 언급한 십 인의 무인들을 일컬어 사람 들은 보통 강호 십대고수(十大高手)라 부른다.” ‘십대고수라…….’ 을지호는 강운교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책을 펴 십 인에 대한 설명을 찬찬히 살 펴보았다.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군요. 특히 오왕에 대한 설명이.” “할아버님께 들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 당시 오왕과 지금의 오왕은 다르지. 세 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을지호는 조용히 기다리는 것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그들이 최강은 아니라는 것이지.” 강운교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을지호를 응시했다. “사람들의 뇌리엔 아직도 한 자루 궁으로 무림을 휩쓴 궁귀(弓鬼)와 수호신승을 물리치고 무림을 일통(一統)을 했던 혈검(血劍)에 대한 전설이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두려움과 공포, 다른 한편으로는 존경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다만 인물편에 그분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오십여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다.” 육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울러 감히 논하지 못하겠다는 경외심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강운교와 육건의 말에 을지호는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을 떠올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말씀 하십니다. 이 책을 쓰신 분이 할아버님이나 이모부님이 아니시란 말씀입니까?” 을지호의 물음에 육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인석아. 바다 한쪽 구석에 처박힌 우리가 각 문파와 인물들에 대해 어찌 이리 속속들이 알겠느냐?” “그러면 어디서 이런 책을? 더구나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요.” “허허허, 그건 다 이유가 있지.” 육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강운교를 바라보았다. 쓴 웃음을 지은 강운교가 입을 열었다. “하오문(下午門)이라고 알고 있느냐?” “하오문이라 하시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머리를 굴리던 을지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개방(?幇)은 알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지금의 거대 방파로 발전한 개방은 그 옛날 힘없는 거지들이 모여 만든 것이고 하오문은 거지들과는 다르지만 최하층의 사람들, 기 루(妓樓)에서 웃음이나 몸을 파는 기녀(妓女), 주루(酒樓)에서 일하는 점소이, 도둑 , 소매치기 등 실로 잡다한 군상들이 모여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정보들은 바로 그 하오문에서 얻은 것이다.” “흠, 이정도의 정보를 만들 정도면 상당한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을지호의 물음에 강운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이 없었기에 만든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힘이 없기에 살아남고자 정보를 모았다고 생각하면 된 다. 하오문의 역사는 개방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개방과는 달리 그 힘은 미약하기만 하다. 간간히 성세를 구가한 적도 있었지만 일시적일 뿐이고 늘 당하기만 하는 약자의 위치였지. 힘이 약한 자가 살아남는 방법엔 어 떤 것이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처세(處世)를 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처세를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는 정보라 할 수 있다. 해서 역대 하오문의 문주들은 다른 부분은 제쳐두고서라도 정보력만큼은 그 어떤 세력, 문파보다도 뛰어나게 만들고자 노력했 다. 중원에 산재한 수많은 문파들과 대해 가능한 모든 것을 수집했고 분석했다. 심지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무인들의 무공이나 성격, 특징까지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후 하오문은 특별히 힘을 기르지 않아도 그 명맥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정보력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오히려 위험하지 않을까요? 힘을 키우고자 하는 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을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강운교는 물을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시도가 몇 번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성공은 하지 못 했다고 하더구나. 어느 한 세력에 하오문이 굴복한다면 이후 벌어질 상황이야 뻔한 것.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견제를 했다고 보면 맞겠지.” “그렇군요.” “아무튼 다행한 것은 하오문의 총타가 해남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광동(廣東) 성에 있다는 것이었고 보다 중요한 것은 하오문의 문주가 아버님과 안면이 있으 시다는 것이지.” “아, 그래서?” “그래, 네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하오문에 사람을 보냈다. 부족한 것은 대가를 지불하고 개방을 통해 얻기도 했다. 비용은 비용대로 들고 많은 사람들이 고생 했어.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필요 없는 것들도 너무 많아서 정리를 따로 해야 했 으니까. 어쨌든 그거 만드느라 꽤나 고생했다.” 지난 며칠 동안 책을 만드느라 꽤나 공을 들였는지 슬며시 책을 들쳐보는 강운 교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어떠한 노력이 있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방대 한 양을 정리해서 적으려면 며칠 밤은 꼬박 세워도 부족했을 것이다. 벌떡 자리 에서 일어난 을지호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육건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녀석, 감사는 무슨. 공연한 소린 하지 말고 자리에 앉거라.” 을지호는 강운교에도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공연히 저 때문에 이런 수고를… 감사합니다. 이모부님.” “하하하, 뭐,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정 보들이었어.” 사실이 그랬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해남파도 어엿한 무림의 문파였 다. 더구나 세인들이 뇌리엔 해남파는 정사 중간의 문파이면서 상당히 자부심이 강하고 개인 개인이 뛰어난 검수(劍手)들로 구성된 문파로 알려져 있었다. 비록 지금은 왜구들을 소탕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무림에 어떤 문파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지, 돌아가는 상황은 어떤지, 또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는지 알아둘 필요 가 있었다. “자, 그리고 이것도 받거라.” 을지호가 자리에 앉아 육건이 조그마한 상자를 내어 놓았다.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열어보면 알 것 아니더냐.” 을지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의 뚜껑이 살짝 들리는 순간, 상자 안에서 눈이 부신 광채가 흘러나왔다. 상자에는 수십 여알의 진주(珍珠)가 들어 있었다. 특히 유난히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수 없다 는 야광주(夜光珠)가 틀림없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0 “세, 세상에…….” 야광주라는 것이 있다는 말만 들어보았지 직접 본 적은 없었던 을지호는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야광주를 집어 들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을지호의 놀라는 모습을 보며 술잔을 비운 육건이 입을 열었다. “한 문파를 일으키는데 문파를 일으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와 문파의 초석 이 될 수 있는 적당한 무공만큼 필요한 것은 없을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재력이다. 어쩌면 다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돈일지도 모르겠다. 해서 준비했다. 얼마 안 되지만 이 할애비의 정성이라 생각하 고 받아두거라. 도움이 될 게다.” “얼마 안 되다니요? 넘치도록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허허, 혼자 생색내려 하니 미안하구나. 다 늙어 은퇴한 내가 무슨 돈이 있겠느 냐? 그저 장문인에게 손을 벌린 것뿐이지. 감사를 하려면 큰 결단을 내려준 네 이모부에게 하거라.” 육건의 시선이 묵묵히 술잔을 비우던 강운교에게 향했다. “문파의 재정이 넉넉지 못하면서도 많이도 준비했군 그래. 야광주라… 나는 생각 도 못했어.” 육건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인 강운교가 변명하듯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버님. 저는 다만 남궁세가가 중원에서 크게 일어나면 우리 해 남파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을 해서 돕는 것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남남도 아니고 해서…….” 전자의 말은 그저 형식을 차린 것에 불과했다. 강운교가 육건의 뜻을 존중해 무 리를 해가면서까지 을지호를 돕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남궁세가와 해남파가 남남이 아니라는 바로 그 말에 있었다. “근래 왜구 때문에 이곳저곳 들어가는 곳이 많아서 더 준비하지 못했다. 다소 부 족하게 느껴지겠지만 아버님 말씀대로 정성이라 생각하여라.” “아, 아닙니다. 이모부님. 이렇게 신경써주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을지호는 연신 사례를 하면서 재빨리 손을 뻗어 상자를 품속에 갈무리 했다. 그 모양을 보던 육건이 짐짓 노한 표정을 지었다. “인석아. 그렇게 서둘러 챙기지 않아도 여기서 그거 빼앗을 사람 없고 다시 돌려 달랄 사람도 없다. 사내놈이…….” “헤헤, 죄송합니다. 여태껏 이만한 보물을 본적이 없어서.” 약간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변명하는 을지호, 하나 그리 말하면서도 을지호 의 얼굴엔 부끄러움이나 무안한 빛이 전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떠날 준비는 끝마쳤느냐?” “뭐,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 조금 더 붙잡고 싶지만 기왕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 결정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예로부터 창업(創業)보다는 수성(守成)이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하지만 재건(再建) 또한 창업이나 수성에 못지않게 힘든 일이다. 특히 남궁세가와 같이 명망이 있었던 문파를 과거 와 같이 일으켜 세우는 데엔 수많은 난관이 버티고 있을 게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각오만으론 부족할지 모른다. 더구나 작금의 무림을 살펴볼 때 남궁세가는 패천 궁의 영향 하에 있는 장강이남, 패천궁은 둘째 치고 흑도의 많은 문파들이 남궁 세가의 부활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어.” 단순한 우려가 아니었다. 사실상 백도와 흑도는 장강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을 나뉘어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수십 년 동안 큰 충돌은 없었다지만 자신들의 안방에서 남궁세가와 같은 명문정파가 또다시 용틀임을 하는 것을 그냥 놔줄 흑 도 문파는 없었다. 을지호가 고향을 떠나기 전 환야가 장담한 말대로 패천궁이 나서지는 않더라도 충돌은 불가피했다. 육건이 염려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의 남궁세가의 힘으로는 조그마한 문파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물론 을지호의 능력을 믿고는 있지만 한손으로 여러 손을 상대할 수 없듯 언제까지 홀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육건은 말에 을지호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제 이름이 을지호입니다.”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믿음이 가는 음성이었다. 육건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허허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거늘 내가 공연한 소리를 하였구나. 그래, 네가 누구인지 내 잠시 잊고 있었다. 네가 누구더냐? 을지호, 을지세가의 장자 을지호가 아니더냐!!” “더불어 창천해룡이라는 별호를 쓰시는 분의 외손이기도 하지요.”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육건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자죽림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에 놀라 한가로이 놀고 있던 새들이 대나무를 박차고 비상을 시작했다. * * * * * 걱정 반 아쉬운 반으로 한숨을 내쉬는 육건을 뒤로 하고 해남파를 떠난 지 하루, 제자들로 하여금 길 안내 및 배웅을 시키겠다는 강운교의 배려를 마다한 을지호 일행은 늦음 밤에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은 맑았다. 새벽녘에 잠시 시야를 어둡게 했던 안개도 말끔히 걷힌 상태였고 하늘엔 구름한 점 없었다. 객점에서 하루를 묵은 을지호 일행이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항구로 나왔을 때는 사시(巳時)가 막 지났을 때였다. 상선도 있었고 어선, 그리고 왜구 때문에 최근 빈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군 선이 한데 어우러져 항구는 꽤나 북적이고 있었다. “알아보았느냐?” 자꾸만 부대껴오는 사람들을 피해 한쪽 바닷가에서 주변 경관을 살피던 을지호 가 종종 걸음으로 걸어오는 초번에게 물었다. “예, 지금 떠나려고 한답니다. 배에 오르려면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때마침 잘됐군.” 항구의 규모도 크고 육지와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아서 그런지 뭍으로 향하는 배편은 제법 많았다. 을지호는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출발한다는 초번의 말을 무척이나 반기는 모습이었다. 을지호 일행이 승선한 배는 육지의 끝 해안(海安)과 해남파를 오고가는 정기 여 객선이었다. 먼 거리를 오고가는 배가 아니라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선체가 날씬한 것이 꽤나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는 배 같았다. 왜구들 때문인지 관졸들이 나와 승선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했지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을지호 일행이 배에 오르고 얼마 후, 정신없이 움직이는 상선의 선원들과는 달리 인원도 몇 되지 않고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던 선원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 했다. 닻을 올리고 육지와 연결되었던 다리를 끌어 올려졌다. 선원들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선장의 음성이 들리면서 배가 크게 요동을 쳤다. 여객선이 느리지만 천 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을지호 일행은 어느새 배의 후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오르기 전부터 그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해웅의 덩치와 뇌전의 살 벌한 인상을 보고 모조리 자리를 피해버려 을지호 일행이 있는 배의 후미는 많은 사람들로 밀집된 곳과는 달리 다소 한산한 상태였다. “오지 않을 모양입니다.” 부두로 향하는 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해웅이 다소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지도.” 을지호는 별다른 감정 없이 대꾸했다. 하나 짧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실망한 눈치였다. “실망입니다. 당연히 올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겠지. 이모부님은 녀석이 나를 따라 올까봐 일부러 배웅도 못하게 하 지 않으셨잖아. 아마 방에 묶여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을걸.” 을지호는 떠나기 전 강운교에게 넌지시 했던 말, 강유를 데리고 가고 싶다는 말 을 했을 때 펄펄 뛰며 고개를 흔들던 강운교의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녀석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도움 도 많이 되었을 테고. 아깝군.’ 강유와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조금만 더 설득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감이 뒤늦게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주, 주군.” 해웅이 떨리는 음성으로 상념에 잠긴 을지호를 불렀다. “응? 왜?” “저, 저기를…….” 해웅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부두를 가리켰다. 배가 떠난 부두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인영, 강유였다. “왔군.” 을지호는 강유를 보며 당연히 올 사람이 왔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 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있었다. “형님!!” 저 멀리서 달려오던 강유가 떠나는 배를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부두를 벗어난 배는 이미 이십여 장이 넘는 거리를 움직인 상태였다. 강유의 어 깨에 날개가 달리지 않는 한 배에 오르기는 불가능 했다. “배를 멈추라 할까요?” 뇌전이 황급히 물었다. “그렇게 해. 어서!” 해웅이 을지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뇌전은 을지호의 대답을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한데 을지호의 대답은 실로 뜻밖이었다. “놔둬. 그럴 필요 없다.” “주군!!” 해웅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기다리시지 않았습니까? 놈도 큰 결심을 했을 텐데 이렇게 떠나버리면…….” 을지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부두를 향해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형님!!” 부두에 도착한 강유가 필사적으로 을지호를 불렀다. “멈추지 마. 그냥 뛰어.” 을지호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조용히 말을 했다. 강유가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자그마한 음성, 하나 을지호의 입을 벗어난 음성은 마치 천둥이라도 치는 듯 울려 퍼졌다. 거리가 무려 이십 여장이었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경공술을 지녔어도 극복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해웅 등은 뜨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을지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당 사자인 강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했던 감시망을 뚫고 죽어라 밤을 새워 달려왔건만 들려오 는 소리는 ‘그냥 뛰어’ 였다. ‘뛰어? 뛰라니!!’ 어이가 없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십여 장이라면 어찌하든 한번 해 보겠 지만 지금의 거리는 자신의 능력으론 어림도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배를 멈추라고요!!” 달리는 속도를 조금 줄인 강유가 힘껏 소리쳤다. 절박함이 묻어 있는 음성이었 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한결 같았다. “그냥 뛰라니까. 나만 믿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강유에게 향했다. 상처 입은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강유의 기세에 놀라기도 했지만 태연하게 바다를 향해 뛰라는 을지호의 음성에 더욱 놀라는 눈치였다. 더구나 까마득히 먼 곳에 있으면서도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는가. 좀처럼 보기 힘든 괴사에 사람들은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강유의 행동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새 강유는 부두에 접어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바로 바다였다. ‘미치겠네. 정말.’ 그냥 멈추자니 지금까지의 고생은 물론이고 더구나 이곳까지 달려오게 만들었던 부푼 꿈이 물거품이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을지호의 말만 듣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 들자니 영 켕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까지는 이제 고작 칠장 정도,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젠장,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부두의 모서리에 발끝이 걸리는 순간 질끈 두 눈을 감은 강유는 달려오던 탄력 에 몸을 실어 허공으로 도약했다. “좋았어!!” 뒤늦게 따라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유의 결심을 확인하고 자 했던 을지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바다를 향해 몸을 날리는 강유를 보며 주 먹을 불끈 쥐었다. 그 사에 배는 더욱 멀어져 부두와의 거리가 거의 삼십 여장에 이르고 있었다. 하 지만 을지호에게도 생각이 있는 듯 했다. 을지호는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으로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철왕을 낚아 챘다. 깜짝 놀란 철왕이 날개짓을 하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철왕의 두 다리를 잡은 을지호는 마치 돌을 던지듯 강유를 향해 철왕을 집어 던졌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고 빠른지 바닷물을 스치듯 낮게 날아가는 철왕은 날개를 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눈감지 말고 정신 똑 바로 차렷!” 을지호가 강유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는 철왕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 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을지호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강유는 자신을 향해 접 근하는 철왕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고 철왕이 도착하는 순간 철왕의 몸통을 디딤 돌 삼아 재차 도약을 하는데 성공했다. 이곳저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좀처럼 무인들의 실력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 은 거의 까무러치듯 놀랐고 해웅 등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을지호와 강유를 번 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강유가 철왕을 디딤돌 삼아 재차 뛰어 올랐지만 아직도 배와의 거리가 상당했다. 더구나 본의 아니게 온 몸을 던져 강유를 도왔던 철왕은 바다 속으로 빠진 상태였고 강유를 도와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저, 저기 이거라도.” 그나마 상황판단이 빠른 초번이 재빨리 갑판을 부숴 판자 몇 개를 준비했다. 초 번의 기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은 을지호는 초번이 건넨 판자대신 길게 잘라진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거면 돼.” 고개를 가로저은 을지호의 손엔 어느새 철궁이 들려 있었다. 손으로 던지는 것보 다는 아무래도 궁이 편했는지 을지호는 판자조각을 화살삼아 시위를 재었다. 핑. 시위가 튕기는 소리가 들리고 궁을 떠난 판자조각이 강유를 향해 날아갔다. 판자 조각은 강유가 디디기에 편하게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날아갔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강유가 조심스럽게 판자조각을 디디며 재차 뛰어 올랐다. 한번, 두 번, 세 번. 강유는 을지호가 날린 판자조각을 마치 구름을 밟듯 사뿐사뿐 디디며 접근했다. “녀석, 경공 하나는 제대로 익혔군.” 쉽게 보였지만 강유가 보여주는 동작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비록 을지호가 날려 보낸 판자조각이 강유의 발 아래로 너무나도 정확하게 날아들었지만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하거나 정확성이 떨어지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추락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을 여유롭게 해내는 강유의 실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을지호와 강유가 보여주는 기상천외한 행동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던 해웅 등 이나 부두의 사람들, 그리고 배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강유의 몸이 허 공으로 한번씩 치고 올라갈 때마다 함성을 지르며 응원을 했다. “자, 이제 마지막.” 을지호의 외침과 함께 판자조각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강유의 몸은 어느새 배 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도착해 있었다. 강유는 강유대로 신이 나 있었다. 비록 도움이 있었다지만 불가능하게만 보여 지 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는 자신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이곳저곳 에서 들려오는 함성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 없었다. “하하핫, 갑니다!!” 이제 배와의 거리는 고작 오장 정도, 마지막 도약이면 충분히 배에 오를 수 있었 다. 이제는 배에 오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강유는 보다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발끝에 힘을 모았다. 그리고 힘껏 도약을 했다. 한데 뭔가가 이상했다. 마지막 판자조각을 디디며 막 배에 오르려던 순간 지금껏 그토록 단단하게 자신을 받쳐주던 판자조각이 먼지처럼 부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으악!!” 한껏 들떠있던 강유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입에서 당황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비처럼 날래기만 했던 그의 몸이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아!!” “저, 저런!!” 이곳저곳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어때, 시원하냐?” 을지호는 수면위로 고개를 쳐든 강유를 보며 크게 웃었다. “젠장, 그렇다고 꼭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물을 먹여야겠습니까?” 강유가 볼멘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은 알아채지 못했는지 몰라도 당사자인 그가 을지호의 장난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게 누가 늦으래? 늦게 온 벌이야.” “아무리 그래도…….” “얼른 이거나 붙잡고 올라와. 육지까지 헤엄쳐서 따라오기 싫으면.” 을지호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초번이 가져온 밧줄을 던졌다. 마지못해 밧줄을 잡은 강유는 을지호가 잡아당기는 힘에 편승에 손쉽게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에 오른 강유가 대뜸 불만을 토로했다. “목숨을 내걸고 온 사람한테 너무 한 것 아닙니까?” “목숨은 무슨? 그냥 조금 혼나면 되는 것이지. 그래, 몰래 빠져나온 것이냐?” “몰래는 아니고… 서찰은 남겨놓았습니다.” 강유가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그거나 저거나.” 곁으로 다가온 해웅이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도 강유가 따라온 것이 은근히 기쁜 모양이었다. “시끄러. 곰. 나는 봤어.” “뭘?” “내가 물에 빠졌을 때 가장 크게 웃음 사람이 누구라는 걸. 목소리가 아주 쩌렁 쩌렁 울렸어.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내가… 뭐, 뭐야!” 해웅을 노려보던 강유가 난데없이 밀려드는 물세례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음.” 강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원인은 철왕이었다. 강유 덕에 바닷물에 빠졌던 철왕은 몸을 흠뻑 적신 채 강유 를 지나 을지호게에 날아가고 있었다. “미안하다.” 을지호는 억지스런 미소를 지으며 철왕을 반겼다. 철왕은 별다른 행동 없이 을지 호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날개를 퍼덕거리며 사방으로 물을 튀겼다. “웬만하면 피하지 않는 게 좋을걸. 이게 녀석이 나름대로 하는 복수니까. 괜시리 피했다가 나중에 피 본다.” 철왕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물에 젖은 철왕이 어깨위로 올라오는 것을 받아들였던 을지호는 몸을 피하는 강유에게 넌지시 경고를 했다. 몸을 돌리던 강 유는 낭패한 눈으로 철왕을 쳐다보다 고개를 흔들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성격 한번 정말 더럽다니까.” “어허. 말조심!! 말조심하라니까.” 을지호가 짐짓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표정은 이내 풀렸다. “어쨌든 환영한다. 잘 왔어.” “이런 환영인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그리 고 젠장, 이제 그만 좀 튀겨라!!” 강유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철왕을 노려보았다. 철왕은 강유의 말이 끝 나기가 무섭게 더욱 세차게 날개 짓을 해댔다. “하하하!!” “크크크!!”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해웅 등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웃 어젖혔다. 일행의 입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배는 점점 육지를 향해 나아갔 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1 달빛은 물론 희미한 별빛마저도 보이지 않는 칠흑과도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모든 사물이 잠들어 있는 시간, 오직 노인만이 횃불을 들고 폐허로 변한 건물 사 이를 오가며 어둠을 밝히는 중이었다. 꾸부정한 허리, 움직일 때마다 절뚝거리는 다리와 얼굴을 덮은 주름이 노인의 나 이를 말해주고 있었고, 얼굴이며 손, 또 옷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상처들이 노인이 지나온 세월이 결코 녹녹하지는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후~ 어느새 시간이 이리…….” 잠시 걸음을 멈춘 노인이 탄식을 하며 응시한 곳은 이제는 주춧돌과 마구 자란 풀만이 남아 지나온 세월을 보여주는 한 건물의 터였다. 특히 노인이 신경을 쓰며 살핀 곳은 풀이 유난히도 무성하게 자라있는 곳이었다. “오늘도 나오지 않으시려는가.” 노인의 입에서 재차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곤 힘없이 자리를 뜨려 했다. 대여섯 걸음이나 갔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린 노인의 눈에 어린애의 키만큼이나 자란 풀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과는 어 딘지 이질적인 흔들림.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괴이한 마찰음이 노인의 정신을 번 쩍 들게 했다. 노인은 몸을 지탱해 주는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면서 풀 섶을 해치고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크르릉. 거친 마찰음이 들리고 땅거죽이 들썩이자 흙들이 밀려났다. 흙 사이로 드러난 것 은 거무튀튀한 색의 돌 판자였다. 돌 판자와 지면 사이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가씨!” 불빛을 확인한 노인이 황급히 소리치며 돌 판자를 잡았다. 아래에서 밀고 위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지면과 지하의 공간을 막고 있던 돌 판자는 손쉽게 치워 졌다. 돌 판자를 치워낸 노인이 횃불을 들이대자 돌 판자에 가려졌던 좁은 입구가 드 러나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보였다. 계단에는 한 아가씨가 조그만 유 등(油燈)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역시, 곽(郭) 할아범이었구나. 고마워.” 남궁민(南宮珉)이 긴장을 풀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이 칠일 째였습니다.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곽 노인이 남궁민의 손을 잡아끌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칠일? 그렇게 오래 됐단 말이야?” 남궁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자정이 지났으니 팔일 째로군요. 이 늙은이는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심장이 다 오그라들었습니다.” 곽 노인이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쥐어짜는 시늉을 했다. “팔일이나 지났단 말이야? 난 그저 한나절 잠을 잔 줄 알았는데.” 남궁민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대꾸를 하다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괴이한 표정 을 지었다. “설마, 그것 때문인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곽 노인이 잔뜩 걱정을 하며 물었다. 남궁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단환(丹丸) 하나를 먹고 잠든 것 같은데.” “단환이라니요? 대관절 무슨 단환이기에.” “나도 몰라. 그냥 취하라는 말이 있어서.” 남궁민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를 괴이 여긴 곽 노인이 재차 물었다. “단환은 뭐고 취하라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그곳에 다른 사람이라도 있었단 말 인가요?” “아니, 금지(禁地)에는 오직 조사님의 석상뿐이었어. 그리고 세 가지의 물건과 함께.” 남궁민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시조(始祖)인 남궁치세(南宮治世) 이후 수백 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곳, 최후의 희망을 안고 금지로 들어섰던 남궁민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수백 년 동안 금지가 되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 는데 필요한 무엇인가가 있을 줄 알았다. 막대한 재물이나 혹은 경천동지할 위력의 무공, 수많은 영약들. 그 모든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중 하나 는 존재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최후의 보루라 생각하고 들어선 금지는 텅 비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제법 긴 통로를 지나 들어선 자그마한 석실엔 오직 검을 들고 있는 시조 남궁치 세의 석상과 그 앞에 한 자루의 검과 단환이 들어 있는 옥합, 그리고 간단한 글귀 를 적은 동판(銅版)이 전부였다. “옥합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취하라고 했어. 그리고 검에 대해서도 뭐라고 적은 것 같던데 동판이 부식 되어 글씨를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옥합 안에 들어 있던 단환을 드셨단 말입니까? 그게 어떤 것인지도 모 르고?” “취하라고 했으니까. 단환을 취하라는 뜻은 먹으라는 것 아니겠어. 그리고 그때 는 꼭 먹어야만 할 것 같아서…….” 남궁민은 곽 노인이 단환을 집던 순간의 그 묘한 느낌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 도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말끝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무튼 그 단환을 먹은 이후로 기억이 없어. 그때 잠든 것 같은데.” 잠들었다는 말에 곽 노인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어쩌면 그것이 시조께서 안배하신 영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영약을 취하면 아 가씨처럼 며칠 동안 잠이 든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별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겠는데. 밖 으로 나오기 전에 운기조식(運氣造息)을 했을 때도 예전과 다르지 않았어.” 남궁민의 말에 곽 노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모르긴 몰라도 남궁민의 취했다는 단환은 분명 내력(內力)을 증진시킬 수 있는 영약일 것이었다. 하지만 영약을 취한 이후에는 반드시 적절한 연공(練功)을 통해 그 기운을 흡수해야 한다. 말을 들어보니 남궁민은 그 과정을 그냥 지나친 것 같았다. ‘아쉽구나! 제대로만 되었다면 아가씨께 큰 힘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 영 약의 기운이 몸 어딘가에 모여 있을 것. 운이 좋다면 언젠가는 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 때를 보아 말씀드려야겠구나.’ 곽 노인은 남궁민에게 지금 당장 모든 사실에 대해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 했다. 이미 끝난 일 들춰봐야 남궁민의 마음만 아프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굳힌 곽 노인이 화제를 돌렸다. “그 검이?” 곽 노인이 남궁민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가리켰다.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 을 빼 들었다. 스르릉.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다른 장식도 없고 크기 또한 여타의 검과 다르지 않는 실로 평범한 검이었다. 다만 특이한 것이 있다면 검신(劍身)에서 은근히 혈광(血光)이 비친다는 것이었다. “꽤나 좋은 검 같아. 들고 있어도 그다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게다가 동판이 부식될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손상된 곳이 한 곳도 없어. 검 집에도 이 렇게 곰팡이가 슬었는데 말이야.” 남궁민이 이리저리 검을 놀리며 말했다. 비록 지금은 볼품없이 늙어 버렸고 변변치 않던 무공마저 잃었지만 곽 노인 또 한 젊어선 남궁세가의 무인이라 자랑스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검을 보는 눈은 남 궁민보다 낫다면 났지 결코 부족하진 않았다. 그런 곽 노인의 눈에도 남궁민의 손 에 들린 검은 결코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늙은이의 눈에도 그리 보입니다. 은근히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어쩌면 시조께서 쓰시던 검일지도.” “할아범 생각도 그렇지? 나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기쁜 얼굴로 말을 하던 남궁민의 얼굴에 급격히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후~ 그래봤자 검일 뿐이야. 내가 기대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고. 아버지의 만 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린 결과가 이름도 모를 단환과 고작 검 한 자루라니. 아무리 좋은 검이 있으면 뭘 해? 지금의 나에겐 있으나마나한 물건인데.” 남궁민이 거친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꼭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예사 검이 아닌 것으로 보아 반드 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럴까? 그렇다면 다행이지. 아무튼 실망이야. 그건 그렇고 아버지는 좀 어때?” 가슴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던 남궁민이 입을 연 것은 더 이 상 흐를 눈물이 말라버린 이후였다. “언제였지?” “아가씨께서 금지로 들어가신 날 밤이었습니다.” “부르지 그랬어.” “가주께서 엄명을 하셔서. 죄송합니다.” “할아범이 죄송할 것은 없어. 고집을 피운 내가 나쁜 년이지.” 남궁민은 힘없이 자책하며 앞에 놓인 관(棺)을 응시했다. 적갈색 오동나무로 만 든 관에는 남궁민의 아버지이자 남궁세가의 십사 대 가주인 남궁혼(南宮魂)이 잠 들어 있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소한 체구며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살이며 웃을 때마다 살포시 만들어 지던 보조개의 자국까지. 하지만 그녀가 왔음에도 남궁혼을 눈을 뜨지 않았다. ‘죄송해요, 아버지. 아버지 말씀이 옳았어요. 금지에는 제가 기대한 것들이 없었 어요. 괜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마지막 모습도 뵙지 못했군요.’ 남궁민은 그녀가 금지를 깨뜨린다고 했을 때 몇 번의 반대를 하다가 결국 처량 한 눈으로 허락을 한 남궁혼의 눈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만약 고집을 부리지 않고 포기를 했다면, 아니, 며칠만 더 미루었다면 임종(臨終)을 볼 수 있었을 것이 란 생각에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그래도 편안히 가신 모양이네.” 한참동안이나 관을 응시하던 남궁민이 눈가와 볼에 난 눈물자국을 살짝 닦아 내 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고 있는 남궁혼의 안색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어깨에 드리워진 짐을 벗어던지셨으니까요.” 곽 노인이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남궁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은 하실 만큼 하셨어. 그만 쉬실 때도 되었지.” 그렇게 다짐을 하며 남궁민은 지난날 힘들고 괴로워하던 남궁혼을 떠올리며 처 연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날 패천궁과의 싸움에서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맞은 남궁세가가 결정적으 로 몰락하게 된 계기는 남궁혜가 소문을 따라 장백산으로 향하고 얼마 후, 장자 였던 남궁진(南宮瞋)이 부상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뜨면서부터였다. 거기에 마지막 버팀목이라 할 수 있었던 남궁우(南宮羽)마저 심화를 끓이다 세상 을 뜨게 되자 남궁세가의 직계는 오직 병약한, 해서 미리 세가를 떠나 있던 남 궁석(南宮石)뿐이었다. 나이가 어린데다가 어려서부터 유약해 제대로 된 무공도 익 히지 못했지만 그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있었다. 남궁석은 과거 가문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가문들과 사람들을 찾아가며 도움을 요청했고 곳곳에 흩어져 있던 방계의 친지들을 불러 모았다. 남궁석을 도와 살아 남은 세가의 여인들까지 필사적인 노력을 하며 세가를 일으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눈물겨운 그의 노력에도 한번 기운 가세는 회 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가깝게 지냈던 이들과의 관계도 점점 소원하게 변해버렸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문파와 사람들의 대부분이 장강이북에 존재했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남궁세가는 장강이남, 패천궁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들은 가급적이면 패천궁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힘을 필요로 하는 남궁세가를 은연중 외면하게 되었다. 냉혹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남궁석은 절망했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 하며 괴로워하다가 사십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남궁석의 그렇게 명을 달리하자 그에게 주어졌던 짊이 그를 대신해 어린 남궁혼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남궁혼도 피하지 않았다. 남궁석을 닮아 유약하고 병치레가 잦았지만 그는 자신 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바쳐 세가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남궁석이 그랬듯 그에게도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기 만 했다. 특히 주변 흑도문파들의 보이지 않는 견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혹 한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가를 지키고 있던 여인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남궁세 가를 돕기 위해 모였던 친지들, 남궁석과 남궁혼이 받아들였던 제자들도 하나둘씩 세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남지 않은 하인들마저 야반도주를 하면서 결 국 세가에 남은 사람이라곤 남궁혼과 남궁민 그리고 평생을 남궁세가와 함께 한 곽 노인뿐이었다. 남궁혼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워했는지, 또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 유약한 몸을 어떻게 혹사시켰는지, 그래서 병을 얻고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곁에서 지켜본 남궁민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슬픔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다행 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 하셨어요. 그렇게 애쓰셨으면 짊어진 짐을 놓으실 때도 되었지요. 하지만 걱 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제는 제가 짊어질께요.’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2 “가주께서 남기신 것입니다.” 곽 노인이 곱게 접은 서찰을 내밀었다. 남궁민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다지 길지 않은 유언장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비 먼저 떠나게 되어 면목이 없구나. 나를 짓누르던 짐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하긴 하지만 가문을 지키지 못한 죄인으로서 선조님들을 뵐 것을 생각하니 죄송스런 마음에 고개를 쳐들 수가 없구나.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 은 내가 떠남으로써 나를 짓누르던 모든 짐들이 네게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했으면 한다. 남궁세가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나 보다. 내가 그랬고 네 할아버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애를 썼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 나는 네게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다시금 겪는 것을 바라지 않는단다. 너무나 힘든, 그리고 결과가 뻔히 보이는 길이야. 수많은 적들이 너를 모욕하고, 수치를 줄 것이며, 짓밟고, 억누를 것이다. 아비로서 당부하나니 나는 네가 여자의 길, 좋은 남자와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 귀여운 자식들을 보는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 . 네가 이글을 읽으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구나.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펄쩍 뛰고 있겠지. 하나 그것이 아비의 진정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알아요. 알고말고요. 하지만 제가 어찌하시리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저 는 포기할 수 없어요.” 남궁민은 남궁혼의 애틋한 마음을 느끼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말라버렸다고 생 각한 눈물이 어느새 그의 볼을 적시고 있었다. 눈물이 떨어져 서찰을 적시자 남 궁민은 황급히 고개를 쳐들어 눈물을 지웠다. …그래도 해야겠다면, 네가 정녕 그 형극의 길을 간다면 아비로서도 끝까지 말릴 수는 없구나. 너 또한 자랑스런 남궁세가의 후손임을 부정할 수는 없음이니. 하 지만 힘들다면 언제든지 포기해도 상관없다. 힘들구나. 이제는 가야할 때가 되었 나 보다. 아비로서 네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어 미안하기만 하구나. 부디 금지에 네가 원하는 것들이, 세가를 일으켜 세울만한 무엇인가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번만 더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사랑하는 내 딸아.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임종이 가까워져서 그런 것인지 서찰의 뒷 부분은 제대로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민은 자신을 위하고 사랑하는 남궁혼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까지였습니다. 가주께서 워낙 힘들어 하셔서.” 유언은 받아 적은 곽 노인이 한마디 한마디를 떼어 놓을 때마다 힘들어하던 남 궁혼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고마워. 할아범이 없었으면 어찌했을까?” 서찰을 고이접어 품에 넣은 남궁민이 슬픔 음성으로 말했다. “고맙긴요,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끝이 아니라니?” “상황이 급박해 미처 적지는 못했지만 몇 마디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어떤?” 황급히 되묻는 남궁민은 남궁혼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더 느껴보려고 애쓰는 모 습이 역력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장백산에 남궁세가의 어른이 한분 계실지도 모른다고 하 셨습니다. 혹, 기회가 되면 찾아뵙고 도움을 받으라고.”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말씀하신 그대로 가능성이 희박한 일 이야. 그게 전부야?” 남궁민이 약간은 실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어서 말해줘.” 잠시 망설이던 곽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용서하시라고…….” “못해!!” 남궁민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슬픔으로 가득 찼던 얼굴엔 슬픔대신 격 노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 아가씨.” “할아범은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어? 나보고 용서를 하라고?” “…….” “어림없는 소리!! 하늘이 천지가 뒤집어 지는 한이 있어도 안돼.” “그래도 가주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의 언성이 높았다는 것을 의식한 남궁민이 조용히 무릎을 꿇고 관 속에 누 워 있는 남궁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아버지. 이래저래 저는 아버지 말씀만 어기는 어쩔 수 없는 나쁜 아 이인가 봐요.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야단을 치셔도 소용없어요. 누가 뭐래도 그녀는 용서할 수 없어요. 아버지는 용서하셨는지는 몰라도 저는 아니에요. 죄송해요.” “후~.” 지금껏 남궁세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곽 노인이 어찌 남궁민의 마음을 모를까.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 * * * * 밤이 깊다 못해 점점 새벽으로 달려갈 즈음이었다. 일단의 무리들이 남궁세가의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이십 여명이 넘는 인원이었는데 그들의 존 재를 그다지 감추고 싶지 않아서인지 거리낌 없이 떠들고 소리치고 고함을 질러댔다 . 무리 중앙에는 여덟 명이 밧줄에 묶여 끌려오고 있었다. 찢어진 옷이며 헝클 어진 머리, 그리고 전신에 피칠갑을 한 상태에서 그들은 잔인할 정도로 철저히 농락을 당했다. 지친 걸음으로 발을 놀리다 쓰러지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발 길질과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침을 뱉고 오줌을 휘갈기며 모욕을 주는 이도 있었다. “아서라. 그러다 뒈질라. 벌써부터 뒈지면 흥이 없지 않겠느냐?” 무리의 우두머리 인 듯 한 자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수하들을 말렸다. 반쯤 벗 겨진 머리와 뱀의 눈을 가진 사내의 이름은 갈천(喝川)으로 유가촌(柳家村) 인근을 중심으로 패악(悖惡)을 일삼는 용두파(龍頭派)의 우두머리였다. 갈천의 한마디에 모든 행동이 멈추어졌다. 그것만으로도 갈천이 평소 이들을 어 찌 다루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또 한 무리의 인원이 그들을 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형님!!” 가장 앞서 오던 자가 갈천을 불렀다. 그의 뒤로는 수레를 끌고 있는 한 남자와 대여섯 명의 여인이 뒤따르고 있었다. 갈천은 자신을 부른 사내는 본체만체 하며 뒤따라오는 여인을 살폈다. 그리곤 마 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여자로 보이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밤이 늦고 반반한 계집들은 이미 저마다 다른 손님들이 꿰차고 있어서…….” “병신 같은 놈. 내가 언제 고이 모셔오라 했느냐? 반반한 것들이 없으면 끌어오 기라도 했어야 할 것 아냐!!” “그게 아니라…….” “시끄러!!” 갈천은 자신의 명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데다가 변명까지 늘어놓는 사내가 마 음에 들지 않는지 냅다 발길질을 했다. 하필 맞은 곳이 사타구니 깊숙한 곳, 사 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으이구! 병신 같이 그것도 못 피하냐?” 갈천은 때려놓고는 약간 미안했던지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혀를 찼다. 그러더니 전혀 엉뚱한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어이 네년들.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는데? 불만 있어?”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갈천은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다. “얼씨구! 그것도 얼굴이라고 단장들을 하긴 했고만. 단체로 쥐를 잡아 처먹었느 냐? 꼴들 하고는!!” 여인들의 용모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한참동안 욕설을 퍼붓던 갈천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술은?” “대, 대, 대령했습니다. 최고급 여아홍(女兒紅)입니다.” 괜시리 잘못하다간 개 거품을 물고 쓰러진 동료 꼴이 날까봐 서둘러 대답을 한 사내는 수레에 실린 술동이를 가리켰다. 수레에는 혼자선 들지 못할 정도로 큰 술독이 세내와 막 잡았는지 핏물이 줄줄 흐르는 돼지 한마리가 실려 있었다. “병신, 이따위 촌구석에 그만한 양의 여하홍이 있을 리가 있냐? 어디서 비슷하게 흉내를 낸 것을 가지고 와서는.” 그래도 술은 술이었다. 벌써부터 갈증이 나는지 입맛을 다신 갈천이 또다시 소리 를 질렀다. “뭣들 하고 있어? 어서 움직여.” 소란스러웠던 상황은 갈천의 한마디로 종료되었다. 쓰러진 동료를 업고 수레를 움직여 이미 그 기능을 잃고 있는 정문을 지나 풀이 무성하게 나 있는 연무장에 들어선 용두파의 무리들은 남궁세가가 마치 자신들의 집이라도 되는 듯, 아니면 종종 이용했던 장소에서 얻는 편안함 때문인지 조금 도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불을 지펴라.” 그렇게 트집을 잡았으면서도 막상 술판이 벌어지려 하자 갈천은 양쪽으로 기녀 를 끼고 앉아 자리를 잡았다. 제각기 흩어진 용두파의 무리들은 바삐 움직였다. 몇몇은 불을 지피기 위해 나무를 구하러 뛰어다녔고 몇몇은 술독에서 술을 퍼 담 고 있었다. 또 다른 몇몇은 늦은 저녁부터 무려 두시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포로로 잡은 흑수파(黑手派)의 인원들을 한쪽으로 몰아 감시하고 있었다. 불이 지펴지고 돼지가 통째로 올려졌다. 하지만 안주로 준비한 돼지가 익을 때까 지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수고들 했다. 오늘로써 우리 용두파에 대항할 놈들은 사라졌다. 이제는 우 리가 왕이다!!” 한껏 기분이 좋은지 갈천이 술잔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너나할 것 없이 소리를 지르고 잔을 들며 승리를 자축했다. 갈천을 비롯하여 용두파에서 제법 힘깨나 쓴다는 이들과 기녀들이 어울리며 웃 음소리와 교성이 하늘을 찌르고 수하들은 저마다의 무용담(武勇談)을 늘어놓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남궁세가의 드넓은 연무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마셔라. 마시고 마음껏 취해라. 크하하하하!!!” 단숨에 넉 잔의 술을 비운 갈천의 손이 좌측에 앉아 술을 따르는 기녀의 옷을 풀어헤칠 때였다. 흥이 오른 술판에 찬물을 끼얹는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서넛은 벌써부터 몸을 일으켜 적의를 드러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남궁세가의 어여쁜 아가씨가 아니시오?” 갈천이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어요.” 어느새 소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남궁민이 싸늘히 외쳤다. 곽 노인 또한 분개한 표정으로 남궁민을 따르고 있었다. “짓은 무슨, 하도 기쁜 일이 있어 이렇게 술을 먹고 있지 않소.” 그리 말을 하면서 갈천은 자신의 곁에 앉아 있던 기녀의 몸을 발로 차버렸다. “꺼져 이년아! 최소한 얼굴은 저 정도는 되어야 들고 다니는 거야. 알겠냐? 자자,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지 말고 이리 와서 함께 술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소?” 갈천은 기녀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의 얼굴에 실실 미소까지 지어가며 손짓을 했 다. 하지만 남궁민이 초대에 응할 리가 없었다.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 경멸의 시선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나가주세요.” “어허, 가긴 어딜 간단 말이오? 애써 이 먼 곳까지 찾아 왔건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구려. 내 재밌는 구경을 시켜 줄 테니까.” 남궁민의 태도에는 아랑곳없이 혼자 떠들어댄 갈천이 턱을 까딱 움직이며 신호 를 보냈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돼지를 대신해 술안주 감으로 희롱을 당하던 흑수파의 무리들이 끌려나왔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3 그사이에 더 얻어맞았는지 사지가 결박당한 채 끌려오는 사내들은 가히 목불인 견(目不忍見),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정도였다. “하하, 이놈들이 누군지 알겠소? 그 악명 높은 흑수파의 악도들이라오. 그동안 이놈들의 꼴을 그냥 두고만 있었는데 악행을 보다 못해 오늘 드디어 놈들을 일 망타진 했소이다. 하하하!!” 늘 검은 장갑을 끼고 다닌다는 흑수파는 비록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마 다 악과 오기로 똘똘 뭉쳐 인근 무뢰배들 사이에선 감히 상종 못할 독종들로 소 문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갈천의 말과는 달리 흑수파는 악행을 일삼는 악도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곽 노인의 말에 따르면 개개인은 미천하나마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다만 천애고아로 태어난 서로 의지하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흑 수파라는 조직을 만들었으며 오히려 갈천과 같은 인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고 전해들은 터였다. “몇 놈은 그 자리에서 뒈졌고 이놈들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바동거리기에 잡아 왔소. 백성들이야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지만 그렇잖아도 마음약한 이들에게 험한 꼴을 보여야 쓰나, 조용히 처리해야지. 해서 예까지 오게 되었소. 아울러 승리의 축배도 들이킬 겸 말이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조용히 처리하기에 이만한 장소 가 어디 있겠소. 아니 그렇소이까? 크하하하하!!”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벌려 웃어젖히는 갈천의 입에 당장에라도 주먹을 처박 아서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놀리는 혀며, 웃을 때마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목 젖이며, 가리지 않고 짓이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궁민은 그럴 수 없었다. 장례식은커녕 이제 겨우 집에 돌아와 소복으로 갈아입은 터, 남궁혼의 영혼이 아 직도 세가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떠나시는 길에까지 험한 꼴을 보여드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아울러 혼자의 힘으론 이 많은 인원을 절대 로 감당할 수 없다는 냉정한 이성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는 결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었다. “흑수파건 뭐건 간에 우리와는 상관없어요. 돌아가세요.” 남궁민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말을 했다. 하나 돌아오는 것은 갈천의 빈정거림뿐이었다. “어허, 이거 왜 이러실까? 좋은 일 좀 하겠다는데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해서 야 어디 쓰겠소? 대 남궁세가에서 말이요.” “돌아가라 했어요.” “나~원,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본 사이요?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오늘 따라 왜 이리 빡빡하게 구는지 모르겠네.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말이야.” “크하하하!!” “하하하하!!” 갈천이 말을 하며 무서워죽겠다는 듯 몸을 떨자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놈들!! 예가 감히 어디라고 함부로 아가씨께 무례를 범한단 말이냐!!” 남궁민의 제지로 지금껏 참고 있던 곽 노인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좌중을 둘러보 았다. 그 기세가 짐짓 대단해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어이, 영감. 이 몸이 아가씨와 오랜만에 밀어(密語)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서 감 히 구린 내나는 입으로 끼어들고 있어. 웬만하면 나서지마.” 벌떡 몸을 일으킨 갈천이 흉험한 눈빛을 빛내며 살기를 뿜어댔다. “닥쳐랏!!” 곽 노인도 지지 않고 소리치며 지팡이를 치켜 올렸다. “오호~ 잘하면 치겠어.” 갈천도 무기를 잡았다. “물러서 할아범.” 남궁민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렸다. “거봐. 비키라잖아, 영감. 괜히 나서서 황천길 재촉하지 말고 저리 꺼져 있어.” 곽 노인은 갈천의 비아냥에 당장에라도 덤벼들 듯 성을 냈지만 남궁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렸다. “돌아가 주세요. 아직 아버님의 장례(葬禮)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남궁민이 한껏 정중한 어투로 부탁을 했다. “장례? 오, 이런 가주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셨단 말이오?” “정문에 걸린 조등(弔燈)을 보지 못하셨나 보군요?” “아, 그게… 그런 게 있었냐?” 갈천이 고개를 돌려 수하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있기는 했습니다만…….” 대답은 하는 사내는 자신이 멋진 돌려차기로 조등을 박살냈다는 사실까지는 말 하지 않고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이제 아셨으면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상가(喪家)에 와서 피를 보고 이렇듯 소란을 피우는 것은 예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허참,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얘들아!!” 갈천이 미안한 기색을 띠며 몸을 일으키자 수하들 또한 일제히 일어났다. “장소를 잘못 잡은 것 같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는 것이…….” 슬그머니 말 꼬리를 흘린 갈천이 남궁민에게 고개를 돌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 다. “‘좋겠다.’ 라고 말할 줄 알았소? 하하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가주가 죽었다고 우리의 행동까지 막으면 도리가 아니지. 애들아, 내 말이 틀리냐?” “옳습니다요. 하하하!” “옳고말고요.” 평소와는 다른 갈천의 행동에 의아해 하던 수하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 을 지으며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죽은 사람이 있다고는 하니까 한잔 술을 바치는 것도 좋겠다. 자자, 술 잔을 들어라. 황천길로 떠난 사람을 위하여!!” “위하여!!” 신이라도 난 듯 축배를 드는 갈천과 용두파의 사내들, 그들의 모습에선 죽은 자 에 대한 애틋한 애도는커녕 조롱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갈천의 행동은 모욕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궁민, 관속에 누워있는 남궁혼은 물론이고 남궁세가 전체를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죽은 남궁혼이 되살 아나 말려도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러운 놈들!!” 남궁민의 신형이 하늘을 날았다. 거리는 삼장 여, 깜짝 놀란 사내 하나가 사이게 끼어들며 막았지만 그녀는 그의 허벅지와 어깨를 짓이기며 갈천을 향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땅에 착지 하는 것과 동시에 발을 놀렸다. “하핫, 내가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할 것이지. 이렇게 다짜고짜 다리를 벌려서야 원, 남세스럽지 않소?” 이미 그녀의 도발을 예상하고 있던 갈천은 서둘러 몸을 피하며 음흉한 웃음을 흘려댔다. “죽일 놈!!” 언제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남궁민은 발과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갈천 을 쫒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와 갈천 사이엔 용두파의 무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다루진 말아라. 의식은 있어야 뭘 해도 재밌지? 목석(木石)같아서 야 원. 하긴, 아가씨 같은 미모라면 목석이라도 상관은 없소만. 하하하하.” 갈천의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수배, 수천의 뱀이 온 몸을 집어삼킬 듯한 느낌에 진저리를 친 남궁민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점점 조여 들어오는 용두파의 무리들을 상대했다. “형님.” 남궁민이 수하들과의 싸움을 하는 동안 용두파의 이인자 격인 철두(鐵頭)가 슬며 시 다가왔다. “괜찮을까요?” “뭐가?” 철두의 시선이 남궁민에게 향했다. “저년 말입니다. 계집이 잘못이라도 되면 괜시리…….” “상관없다. 어차피 가주 놈도 뒈졌고 꺼릴 길 것 없어.” 갈천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은근히 꺼리는 것이 있는지 넌지시 명을 내렸다. “되도록이면 큰 상처 없이 잡으라고 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철두도 싸움에 참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철 두가 물러나자 갈천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술을 들이켰다. 사실 철두가 그에게 건넨 말엔 중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남궁세가가 비록 몰락의 길을 걷고는 있다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 자칫 잘 못하여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을 빌미로 하여 서로 경계는 하지 만 그래도 지금껏 평화롭게 지내오던 백도와 흑도가 또다시 싸움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주변의 흑도문파들은 남궁세가가 다시 일어나는 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로 인해 사단이 벌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해서 그들은 수하들과 주변의 무뢰배 들로 하여금 남궁세가를 드나들며 마음껏 농락하되 절대로 큰 문제는 만들지 말라 는 엄명을 내려놓았다. 그랬으니 아무리 간담이 큰 갈천이라도 함부로 어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젠장, 망해도 한참 전에 망한 집안의 년 놈들인데.’ 수하들 앞에서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큰소리는 쳤지만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 다는 사실이 기분이 나빴다. ‘맞아, 가주가 뒈진 이상 남궁세가는 끝장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이제 남은 사 람이라곤 계집뿐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저년의 얼굴이 너무 아깝단 말이야. 암, 아깝고말고.’ 평소의 갈천이라면, 약한 자에겐 한없이 강하지만 강한 자에게 한없이 약한 소인 배(小人輩)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그였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 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적당히 오른 취기(醉氣)와 흑수파를 쓸 어버렸다는 기쁨이 그의 이성을 살짝 마비시키고 본능만이 남게 만들었다. “뭣들 하느냐! 잡아라. 반드시 산채로 잡아야 한다. 내 오늘 그년에게 남자가 무 엇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리라. 크하하하하!!” 갈천의 광소가 연무장을 쩌렁쩌렁 하게 울렸다. 흥분한 갈천의 명을 어겼다간 어 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용두파의 무리들은 죽을힘을 다해 남궁민을 공 격했다. ‘씹어 먹어도 성치 않을 놈 같으니!!’ 남궁민은 갈천이 내지른 소리를 들으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그 럴 방법이 없었다. 씹어 먹기는커녕 봉변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궁세가가 아무리 몰락했기로서니 남아 있는 무공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더구 나 어려서부터 꾸준히 내공을 연마한 남궁민은 일류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적지 않은 내공도 보유하고 있었다. 일신상에 지닌 무공이 뒷골목에서 싸움이나 했던 자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적수공권(赤手空拳)이었다.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기에 급히 나오 느라 미처 검을 챙기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불리함으로 작용했다. 그에 반해 상 대는 검, 도, 도끼 등으로 잔뜩 무장한 상태인데다가 숫자가 너무 많았다. 더구나 무공 같은 것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없다지만 평생을 싸움판 속에서 거칠게 자 란 자들, 상대를 어찌 몰아붙여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몇몇은 어찌 상대를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남궁민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몸 곳곳에 상처도 생겼다. 그나마 유일하게 도움을 줄 곽 노인은 예전에 쓰러져 한쪽 구석에 처박힌 신세로 만약 사로잡으라는 갈천의 말 이 없었다면 그녀는 절단이 나도 한참 전에 절단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담벼락에 앉아 느긋하게 앉아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일 단의 사람들의 있었다. 사내 중 한명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했다. “무엇보다 말이야, 경험이 없어서야. 아무리 상대가 많다고 해도 그녀가 지닌 무 공이면 저 정도 까지는 몰리지 않아. 경험부족에서 오는 차이, 그것이 힘든 싸움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4 사내 중 한명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했다. “무엇보다 말이야, 경험이 없어서야. 아무리 상대가 많다고 해도 그녀가 지닌 무 공이면 저 정도 까지는 몰리지 않아. 경험부족에서 오는 차이, 그것이 힘든 싸움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 “꽤나 악착같이 덤벼드는군요.” “어디든 똑 같아. 그럴듯한 무공을 익힌 무인이든 뒷골목에서 싸움을 하는 무뢰 배든 싸움을 시작하면 저렇듯 지독하게 덤빌 수 있는 악바리 근성이 필요하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악바리 근성이든 뭐든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겁니까? 아무리 앞뒤 분간 못하는 놈들이라지만 상가 집에 와서 저 난리라니. 내 이놈들을 그냥!!” 가장 왼쪽에 앉은, 앳된 얼굴이며 유약해 보이는 몸매를 지닌 사내는 겉으로 드 러나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다혈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자신들의 집도 아니면서 제 안방인 듯 거칠 것 없이 하는 행동이며 연약한 여자 를 상대로 한꺼번에 덤벼드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지 그는 수그렸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날뛰지 좀 마라. 나도 어차피 이쯤 할 생각이었으니까.” 사내를 말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사내는 해남파를 떠나 또다시 기나긴 여정 끝에 마침내 남궁세가에 도착한 을지호였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달려나갈 것 같이 흥분해 있는 사내는 몰래 문파를 빠져나와 합류한 강유였고 그 옆으로 해웅 등 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놈의 성질 머리 하고는…….” 을지호는 강유를 향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앞뒤 잴 것도 없 이 무조건 나서고 보는 성격인지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 켰다. 그의 행동에 발맞추어 당장에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담장에 불안스럽게 웅크리고 있던 해웅과 초번, 뇌전도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 사이에 남궁민의 몸엔 점점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계집 하나 어쩌지 못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갈천의 말이 먹히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불리한 상황에서도 지금껏 잘 버티던 남궁민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포기를 한 것인지 돌연 움직임이 느려지며 허벅지에 일검을 허용하고 만 것이었다. “아악!!” 남궁민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혹여 또다시 반항을 할까 저어한 사내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재빨리 달 라붙어 남궁민의 사지를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자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땟국이 줄줄 흐르는 옷가지를 찢어 입을 틀어막았다. 급작스레 돌아가는 상황에 급해진 것은 을지호 일행이었다. “저놈들이!!”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킨 강유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지 만 그는 미처 두세 걸음 떼어놓기도 전에 옆을 스치며 지나가는 을지호의 빠름에 탄성을 내질러야 했다. ‘뭐가 저리 빨라.’ 강유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을지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이, 어이. 그래서야 쓰나?” 을지호가 강유의 옆을 지나가며 소리쳤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남궁민을 포박하던 사내들과 남궁민을 어찌 품을까 흥분하여 들떠 있던 갈천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을지호는 이미 남궁민의 지척에 서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누, 누구냐!!” 갑자기 등장한 을지호의 모습에 깜짝 놀란 사내들이 허겁지겁 일어나며 무기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들은 을지호가 조금 전만 해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담장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고작 숨을 한번 내쉴 정도로 짧은 시간 에 그 거리를 이동해 왔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아아, 그렇게 흥분할 것은 없고.” 을지호는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사이 강유와 해웅 등이 달려와 그를 호위하듯 좌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누, 누구냐고 물었다.” 을지호는 웃고 있었지만 상대는 그런 여유가 있지 못했다. 용두파의 무뢰배들은 실로 안하무인(眼下無人), 거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 고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고 집요한 인간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자신들보다 형편 없이 적은 인원에 잔뜩 겁을 먹었는지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만약 이 자리에 이들 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하나 그들 역시 을지호 일행을 보았다면 연신 뒷걸음질치기에 바쁜 이들의 심정 을 이해 할 수도 있었으리라. 난데없이 나타난 을지호, 아니, 덩치는 컸어도 웃음 띤 얼굴의 을지호와 인상을 구기고는 있었지만 한 주먹거리도 되어 보이지 않는 강유나 초번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만 도저히 인간으론 보이지 않는 덩치의 해웅과 인상이라면 그 누구 에게도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들을 단박에 기죽게 만든 뇌전이 살벌한 눈 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쯧쯧, 그나저나 장난이 아니네.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던데. 하긴, 꽤 오래 되긴 했지만…….” 용두파의 무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던 을지호가 기도 차지 않 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도대체 남아 있는 게 뭐야?” 을지호의 말대로였다. 벽의 둘레만 십오 리, 사방 백장에 이르는 거대한 연무장, 수십여 개에 달했던 전각들, 그 옛날 성세를 이루었던 남궁세가의 규모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 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면에 보이는 전각과 좌우의 건물들만이 그런대로 제 모양 을 하고 있을 뿐 아무리 둘러봐도 성한 것이 없었다. 주변의 장벽들은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그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고 관리되지 않 은 연무장의 곳곳은 수풀과 쓰레기에 뒤덮여 있었다. 또한 패천궁과의 싸움에서 소실된 전각들의 잔해를 미처 치우지 못했는지 그 흔적들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후~ 돌겠군.” 을지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 “흐음.” 강유와 해웅의 입에서도 동시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들의 한숨 소리는 을지호가 내쉰 것과는 분명 어딘가 모르게 차이가 있었다. 한숨이라기보다는 탄성에 가까운 신음소리였다. 인상을 구기고 형편없이 황폐해진 남궁세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한숨짓는 을지 호와는 달리 강유와 해웅의 시선은 오직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궁민.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엔 미처 알지 못했던 남궁민의 얼굴을 자세하게 보는 순간 강유와 해웅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사고가 마비되었다. 갸름한 얼굴, 초생 달을 그려 놓은 것 같은 은은한 눈썹,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 이는 눈동자, 오뚝하게 솟은 콧날하며 촉촉이 젖은 입술에 연약하게만 보이는 몸 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미려하게 뻗은 허리와 다리, 게다가 오랜 싸움으로 인해 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며 양 볼에 몇 가닥씩 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세, 세상에 이런 미인이!!’ ‘아, 아름답다. 이건 도저히 인간의 미모가 아니야.’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남궁민의 모습은 단번에 두 영혼을 사로잡아 버렸다. 둘은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넋을 잃고 남궁민을 바라보았다. “얼씨구! 놀고들 있다. 정신 차려!! 여기가 무슨 음식점이냐? 침을 흘리게.” 을지호는 넋을 잃고 있는 강유와 해웅의 모습이 우습지도 않은지 대뜸 소리쳐 주의를 주었다. “무, 무슨… 누가 침을 흘렸다고…….” 황급히 고개를 돌린 강유가 무안했는지 딴청을 피워댔고 해웅 역시 입술 사이로 흐르는 침을 닦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이구 내 앓느니 죽지.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는.” 혀를 차고 둘을 매섭게 쏘아보며 핀잔을 준 을지호가 천천히 몸을 돌려 물었다. “몇 살이냐?” 남궁민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스물 하나… 흡.” 멍하니 대답을 하던 남궁민은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다 큰 처녀가 나이를 말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런 일, 남궁민은 자신이 어째서 그렇게 순순히 나이를 말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아랑곳없이 을지호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너 혼자냐?” “…….” 남궁민은 대답대신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를 되묻는 시선을 보냈다. “혼자냐고?” “무슨…….” 남궁민이 여전히 이해를 못하자 을지호가 다소 짜증나는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남궁세가의 마지막 후손이냐고? 설마… 아니겠지?” 거의 확실시 되어 보였지만 을지호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물었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입술을 비집고 들려오는 대답은 그의 기대를 산 산이 박살내버렸다. “맞아요.” 남궁민은 별 뜻 없이 대답한 것이었지만 을지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장백산에서 그 고생을 해가며 수만리 떨어진 이곳까지 온 이유는 오직 하 나 무너진 남궁세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과거와 같은 명성을 얻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최소 한 그 기틀만큼은 확실하게 마련해 주겠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일행은 언젠가는 고향을 돌아갈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떠난 후 세가 를 이어나가고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 사람은 당연히 남궁성을 쓰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것을 당연시 여겼건만 마지막 남은 후손이 여자라니… 남궁민의 말이 맞 는다면 남궁세가는 사실상 대가 끊긴 것이었다.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 잠시 동안 충격에 말문이 막혔던 을지호는 의아한 눈 으로 쳐다보는 남궁민과 폐허로 변해버린 주변을 둘러보며 긴 한숨을 흘렸다. “후우~. 그래도 할 수 없지. 약속은 약속이고 또 양자(養子)라는 것도 있으니까.” 남궁민으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 을지호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용 두파의 무리들에게 손짓을 했다. “지금 내 기분이 몹시 더럽거든. 좋은 말로 할 때 웬만하면 그냥 가라.” 해웅과 뇌전에게서 풍겨나오는 기운에 이미 기가 죽은 용두파의 무리들은 마치 동냥 온 거지에게 밥 한술 떠주고 달래 보내려는 을지호의 말투에 토를 달지 못 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갈천의 눈치만 살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그들이야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갈천의 명도 없이 행동을 했다가 뒤에 어떤 치도곤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놀고들 있네. 어디 기죽을 놈들이 없어서 저런 놈들에게.” 수하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다가온 갈천이 욕을 해 댔다. “다 뒈질 줄 알아. 병신 같은 새끼들!!” 찍소리 못하는 수하들에게 한참동안 욕을 퍼붓던 갈천이 그런 행동이 재밌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을지호에게 말문을 돌렸다. “이 병신들은 그렇다 치고 네놈들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뼉다귀냐?” 그것은 분명 실수였다. 그토록 약삭빠르던 갈천은 오늘따라 유난히 실수를 많이 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분명 알았을 것이다. 해웅의 덩치, 뇌전의 인상 때문이 아니라 강유의 몸에서 풍겨나는 살기와 그들을 수하로 부리는 을지호의 여유에서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들을 상대하고 있다 는 것을 느꼈을 것이었다. 하나 지금의 갈천은, 흑수파를 제압하고 인근 뒷골목을 통일 했다는 기쁨에 들떠 있고 그 기분에 취할 대로 취해 지금껏 감히 어쩌지 못했던 남궁민을 품어보겠 다는 대망을 가졌기에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다가와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마 치 저승사자에게 ‘내가 염라대왕이다.’ 라며 소리치는 꼴이었다. 당장에 달려들어 목을 치려하는 뇌전을 말린 을지호가 입가에 지어졌던 웃음을 엷게 하고 약간은 겁을 먹은 것처럼 움츠리며 되물었다. “개뼉다귀의 정체는 알 것 없고, 그러는 댁은 뉘시오? 대충 보니 알기는 하겠지 만 어디 말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을지호 일행이 남궁세가에 도착한 것은 갈천이 흑수파 운운하며 소리를 칠 때로 대충 조그만 동네에서 어깨에 힘을 주는 짐작은 하였지만 갈천과 용두파의 무리 들이 정확히 어떤 인물이며 무리인지를 알지는 못했다.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물어본 것이었다. 자신의 기백에 상대가 겁을 먹었다고 착각한 갈천이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귓구멍을 후비고 새겨들어라. 내 이름은 용두파의 우두머리 갈천, 이 유가촌의 어둠을 지배하는 절대자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어서 용서를 구하고 목숨을 구걸 해라. 잘만하면 기분도 좋고 하니 수하로 거둬 주겠다.” “허!!” 을지호는 짐짓 놀랐다는 듯 탄성을 지르며 한발 물러나 몸을 돌렸다. 갈천은 한 껏 여유를 부리며 을지호와 그 일행에게 약간의 말미를 주는 아량을 보였다. 용 두파의 무리들은 갈천의 위력을 새삼 깨달으며 그의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들었지? 저렇단다.” 고개를 돌린 을지호의 입에선 호기롭게 소리치며 자랑스러워 한 갈천을 무색케 하는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쟤네들 뭐하는 놈들이냐? 용두파? 갈천?”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뇌전이 허겁지겁 하나의 책자를 꺼내더니 넘기기 시작 했다. 반면에 초번은 책을 펴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용형문(龍形門)이라면 모를까 용두파라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거 니와 갈천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어디를 봐도 갈천의 이름은…….” 뇌전이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을지호 가 눈을 부라렸다. “시끄러. 내가 다 외우라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뇌전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초번은 세력편뿐만 아니라 인물편까지 다 외운 것 같은데 너는 뭐했냐? 세력편 에 비해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을 가지고.” “그, 그것이… 그러니까…….” “에그, 관둬라, 관둬. 나만 답답하지.” 매몰차게 돌아서는 을지호의 태도에 뇌전만 죽을상이었다. 말이 좋아 얼마 되지 않는 양이지 책에 적힌 인원만 근 이백여명에 달했다. 더구 나 그들의 성격이며 문파, 무공까지 자세하게 나열되어 있어 그 양이 엄청났다. 물론 초번이 책임진 세력편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지만 책과는 도통 인연이 없던 뇌전에겐 실로 벅찬 일이었다. ‘젠장, 그냥 들고 다니며 참고하면 되는 것이지 꼭 외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닌 가!!’ 억울한 마음에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을지호에게 당하기도 전에 솥뚜껑만한 해웅의 주먹에 뼈와 살이 분리될 터, 그런 두려움에 뇌전은 자 신의 생각을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저 혼자 되 뇌이며 삭힐 뿐이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는 것이고, 그런 별 볼 일 없는 놈이 상갓 집에 와서 난리 피는 것도 모자라 우리보고 개뼉따귀 운운하는 것이란 말이지. 다들 어찌 생각 하냐?” “볼 것 있습니까? 그냥 박살내면 그만이지요.” 강유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해웅이 이에 동조했다. “강유 말이 맞습니다. 노닥… 아니,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해웅이 좌우로 째지는 을지호의 눈을 보며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흠, 좋아. 그럼 누가 할래?” 해웅이 먼저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강유라고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내가 쓸어버릴 겁니다.” “저런 놈들 버릇을 고치기엔 제가 적격입니다.” “무슨 소릴. 여긴 상갓집이야. 최대한 조용히 그러면서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 다고.” “내가 못한다는 소리냐?” “그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나보다는 느리지 않겠어?” “느리기 누가 느려? 그리고 설마 싸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강유와 해웅은 서로 나서겠다며 말싸움을 벌였다. 싸움이라면 뇌전도 마다하지 않는 사내였다.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뇌전이 앞 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은근히 만류하는 초번의 손길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 “괜히 나섰다가 바보 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바보라니?”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으려면 가만있어.” 다혈질인 뇌전과는 다르게 초번은 늘 생각이 깊었다. 그런 초번이 만류하는 것을 보니 뇌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힘을 뺐다. 그 사이에도 강유와 해웅의 말싸움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만.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내가 정해준다.” 강유와 해웅이 기대에 찬 눈으로 을지호를 응시했다. “강유가 한다. 시간은 반각, 네 말대로 조용하면서 신속히 처리해.” “반각도 너무 길어요.” 대답하는 강유는 희희낙락(喜喜樂樂)이었다. “단, 큰 부상은 입히지는 마라.” “예?” “그게 싫으면 네가 이곳을 다 치우던지.” 을지호가 힐끗 시선을 던지는 곳, 수풀이 우거지고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연무장 이었다. “아!” 그 즉시 말의 의미를 깨달은 강유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세요.” “그리고, 해웅.” “예, 주군.” 해웅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래도 본보기는 있어야 되니까 네가 저 쥐새끼를 맡아라.” 쥐새끼라 지칭하는 사람은 당연히 갈천이었다. 해웅의 낯빛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도 죽이지는 마.” “흐흐흐, 알겠습니다. 적당히 주물러 주도록 하지요.” 강유와 해웅에게 명을 내린 을지호가 몸을 돌렸다. 이들의 대화를 거만하게 쳐다 보던 갈천이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흐, 내 넓은 아량으로 기다려 주었다. 꽤나 긴 시간이었어.” “길긴, 얼마 되지도 않았고만.” 을지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을지호의 대답에 노한 갈천의 이마에 주름이 잡 혔다.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로구나. 왜? 한번 덤벼보려고? 무슨 짓을 하건 그것은 네 놈들 마음이지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돌아가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야.”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조심해야 할 거야. 병신 되기 싫으면.” 그 말을 끝으로 을지호는 어느새 쓰러진 곽 노인을 안고 한쪽 구석으로 피신한 남궁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강유와 해웅이 나선 이상 자신들의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 초번과 번뇌가 을지 호의 뒤를 따랐다. “어리석은 놈들.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택하다니. 오냐, 내 오늘 네놈들의 머리를 안주삼아 거나하게 취해 보련다. 얘들아!!” “예, 형님.” “보았고, 들었을 것이다. 더 이상 살기가 싫다는 놈들이다. 원하는 대로 해 주어 라.”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5 갈천이 한발 뒤로 물러나자 흉흉한 살기를 드러낸 용두파의 무리들이 일제히 무 기를 치켜들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가슴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로 무시 무시한 광경이었지만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강유의 얼굴은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이 즐겁기만 했다. “얼마나 빨리 처리하는지 내 지켜본다.” 앞으로 나가는 강유와는 달리 슬그머니 뒤로 우회해 갈천에게 향하던 해웅이 한 마디 했다. 강유는 대답대신 검을 살짝 흔들어 주었다. 그 순간 강유를 포위한 용두파의 공 격이 시작되었다. “뒈져라!!” 가장 앞선 사내의 함성과 함께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적으로 시작된 공격, 저마다 무기도 달랐고 빠르기도 달랐으며 외치는 기합소리 또한 달랐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공격을 꽤나 많이 해 보았는지 달려드는 시기나 옆 사람과의 간격 , 치고 빠지는 순간이 제법 훌륭했다. “어이, 겁나잖아. 살살 하자고.” 강유는 숨쉴 틈도 없이 공격을 싱겁게 막아내며 엄살을 부렸다. 그 음성에 조롱 이 담겨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사내들의 공격이 더욱 치열하고 악랄하게 변해갔다. “어이구, 이거 원 무서워서.” 말은 그리 하면서도 강유의 눈은 웃고 있었다. 펄펄 뛰는 신선한 생선을 앞에 둔 요리사처럼, 살포시 눈을 깔고 앉아 있는 새색 시에게 천천히 손을 뻗는 새신랑처럼 강유는 지금의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병신들, 똑바로 하지 못해!! 고작 한 놈을 상대하면서 무슨 꼬라지냐!!!” 싸움이 생각과는 달리 요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참지 못한 갈천이 거친 욕설과 함께 위협과도 같은 독려를 했다. 그리고 싸움에 직접 참여하려는 듯 검을 빼들 었다. 그런 갈천을 해웅이 막아섰다. “갈 필요 없어. 네 상대는 나니까.” “뭐가 어째?” 정면으로 보아선 가슴어귀까지 밖에 보이지 않는, 고개를 쳐들고서야 눈을 마주 칠 수 있는 거대한 덩치를 보면서도 갈천은 기가 죽지 않았다. “네 놈 혼자서 나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충분하지 않을까?” “흐흐, 정녕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좋아, 웅담(熊膽)이 좋다고 하더니 내 오 늘은 미련한 곰, 네놈의 쓸개로 몸보신이나 해야겠다. 안 그래도 요즘 몸이 허하던 참이었는데 잘됐구나.” 갈천의 말에 때마침 이들에게 시선을 주던 을지호가 웃겨 죽겠다는 듯 박장대소 (拍掌大笑)했다. “하하하,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구나. 해웅이 바다에 살던 곰인 걸 어찌 알 았을까?” 을지호가 고개를 돌리며 동의를 구했지만 초번과 뇌전은 스산하게 변한 눈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해웅의 기세에 찔끔하며 치미는 웃음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자, 그럼 어디 그럼 몸 보신… 죽어랏!!” 느긋하게 말을 하던 갈천이 돌연 기습을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여유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해웅의 덩치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해웅은 피하지 않 았다. ‘덩치만 큰, 별 것 없는 놈이었군.’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갈천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당하는 해웅을 보며 쓰잘머 리가 없는 덩치에 쓸데없이 겁을 먹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곤 힘없이 무릎 꿇고 쓰러질 해웅의 모습을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그런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깡! “뭐, 뭐야!!” 해웅의 비명과 살을 베고 지나가는 검의 느낌을 기대하고 있던 갈천은 기대했던 느낌 대신 난데없이 들려오는 쇳소리와 맨손으로 돌멩이를 후려친 듯 손아귀에 전해오는 고통, 찌릿찌릿한 저림에 기겁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해웅의 옆구리를 노렸던 검은 그의 팔꿈치에 잡혀 있었고 치는커녕 생채기 하나 난 것 같지 않았다. “괴, 괴물.” “이런, 괴물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갈천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검을 빼기 위해 악을 썼다. 하나 해웅의 팔꿈치에 끼인 검은 요지부동(搖之不動)으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쯧쯧, 이따위 약한 칼질로 어디 쓸개를 얻어 갈 수 있겠냐?” 까무러치듯 놀라는 갈천에게 담담하면서도 어딘지 소름이 끼치는 웃음을 지어보 인 해웅, 갈천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잠시 힘을 주는가 싶더니만 팔꿈치에 잡혀 있던 검이 그대로 두 동강 나버렸다. “어이구, 어쩌나 안 그래도 무딘 칼이 그렇게 동강이 났으니.” 그리 말을 하면서 팔꿈치에 끼인 검날을 잡은 해웅은 반쪽으로 변해버린 검을 들고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갈천에게 마치 조약들 던지듯 던져버렸다. “이것도 마저 가져가야지.” “으악!” 힘없이 툭 던진 것 같은 검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하자 기겁을 한 갈천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땅을 굴렀다. 그런데 하필 굴러간 곳이 해웅의 면전이었다. 해웅은 통나무와 같은 발을 들어 그에 비하면 한없이 여리기만 한 갈천의 왼쪽 발목을 밟아버렸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처절한 비명이 뒤따랐다. “크악!!” 머리에서 발끝까지 울리는 고통에 못이긴 갈천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해웅에게 밟힌 다리를 뺄 수는 없었다. “어이구, 이런. 왜 하필 걸음을 옮기는 곳으로 와서 그래.” 짐짓 미안한 기색을 발을 떼는 해웅, 때마침 몸부림치던 갈천의 성한 발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해웅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발을 뻗었다. “으아아악!!” 또다시 연무장을 울리는 갈천의 비명과 함께 미안해하는 해웅의 음성이 들려왔 다. “쯧쯧, 그러게 피하라니까. 왜 자꾸 앞에서 얼쩡거리느냐고? 그러니까 이렇게 다 치는 것 아냐?” 그렇게 지껄이며 해웅은 양 다리를 부여잡고 죽어라 고함을 질러대는 갈천의 머 리맡에 쭈그려 앉았다. “많이 아픈 모양이네. 내가 좀 어루만져 줄까?” 저승사자의 말이 이토록 끔찍할까? 아니면 목을 베겠다며 달려드는 원수의 외침 이 이럴까? 갈천은 친근하게 웃고 있는 해웅의 눈을 보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거나하게 올랐던 취기는 온데간데없고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는 예전의 영활함을 되찾은 듯 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깨닫자마자 바로 행동에 옮겼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갈천이 해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고, 고인(高人)을 몰라 뵙고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 시오.” 이쯤 되자 오히려 김이 파진 해웅은 난처한 얼굴로 을지호를 쳐다봤다. “쳐다보긴 뭘 쳐다봐. 네게 일임했으니까 알아서 처리해.” 을지호는 간단하게 한마디를 하더니 혼자 신나 설치는 강유에게 시선을 던졌다. 해웅도 궁금했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전황을 살폈다. 예상대로였다. 어느새 강유의 주변엔 반수가 넘는 인원이 신음성을 내며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 인원 또한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치기에 바빴다. “크하하하! 뭣들 하는 거야? 그렇게 움직여서야 그림자라도 밟을 수 있겠어? 정 신들 똑 바로 차리고 다시 한번 덤벼봐.” 하지만 강유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와? 그럼 내가 간다.” 피식 웃음을 던진 강유는 호쾌한 음성과 함께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무뢰배를 상대를 검을 꺼낸 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 한 모욕이라 생각했는지 강유는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꺼내었던 검을 도로 검 집에 집어넣은 상태였다. 사실 딱히 검을 휘두를 것도 없었다. 그저 걸리는 대로 손이며 발을 휘두르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제길, 신났군.” 대단한 활약이라도 하는 양 혼자 신나 날뛰는 강유의 모습을 부러움 반, 질투심 반으로 쳐다보던 해웅이 투정 섞인 말을 내뱉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긴 띤 눈으로 갈천을 노려봤다. “이걸 죽여? 살려?” 양 다리에서 밀려드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질만도 하건만 그보다는 까딱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갈천은 죽을힘을 다해 해웅에게 매달렸다. “제발, 제,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시는 일은 무슨 일 이라도 하겠습니다.” “너, 우두머리 맞냐?” 그런 갈천의 행동에 동정보다는 화가 치민 듯 해웅이 또다시 발을 치켜 올렸다. “으아아아악!!”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6 싸움은 싱겁게 종결되었다. 갈천이 해웅에 의해 반신불수가 되는 순간, 강유 역시 ‘시간 다 되어간다.’ 라고 중얼거리는 을지호의 한마디에 부랴부랴 싸움을 끝냈다. 스물세 명의 인원 중 해웅에게 당한 갈천과 남궁민을 상대하다 중상을 입은 네 명을 제외한 열여덟 명의 인원이 일렬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을 감시 하는 사람은 초번과 뇌전이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웅이 지키도록 명을 내렸는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초번과는 달리 뇌전의 심기는 그다지 편해 보이지 않았다. “꼼지락대지 말라고 했지?” 몸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한심한 일을 떠맡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화를 풀 기 회만 노리고 있던 뇌전은 살짝 고개를 든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찍소리도 못하고 앞으로 쓰러진 사내는 허겁지겁 일어나 얼른 자세를 바로 잡았다 . 그러나 이미 작심한 뇌전은 그것마저 봐주지 않았다. “얼씨구. 동작 봐라.” 뇌전의 발길질에 사내는 또다시 뒤로 넘어졌다. 그렇게 뇌전이 엉뚱한 상대로 화풀이를 하는 사이 을지호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곽 노인을 치료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노인의 전신을 매만지는 을지호를 초조히 지켜보던 남궁민은 그가 크게 숨을 내 쉬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괜찮을까요?” “아마도.”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나 무심하게 대답하는 을지호에게 질린 표 정을 짓던 남궁민은 그래도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자는 누굴까? 생면부지인데 어째서 우리를 돕는 것이지?’ 곽 노인에 대한 염려가 어느 정도 가시자 남궁민은 새로운 의문이 솟아났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의혹어린 시선으로 을지호를 쳐다보던 남궁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 다. 그리곤 대답을 기다리며 슬그머니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지금까지의 상황 으로 보아 별다른 적의를 발견할 수 없었고, 아니, 오히려 가문을 농락한 용두파 의 무리들을 쓸어버린 것을 보면 분명 호의가 느껴졌지만 확실한 정체를 모르는 한 안심을 할 수는 없다는 태도였다. 질문을 받은 을지호는 대답을 하는 대신 힘겹게 눈을 뜬 곽 노인을 살피는데 주 력했다. “아, 아가씨는?” 정신을 차린 곽 노인이 가장 먼저 물은 것은 남궁민의 안위였다. “무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흠, 그나저나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큰 부상은 아닌 것 같고 한 사나흘 정양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고, 고맙소이다.” 사의를 표하던 곽 노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이 기억을 하는 것은 용두 파의 무뢰배에게 당하여 정신을 잃기 일보직전까지,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 보는 누군가가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누구신지……?” 곽 노인이 의혹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남궁민이 안전하다는 소리에 안심이 되었 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곽 노인의 눈빛 또한 남궁민과 다르지 않았다. “뭐, 이상한 놈은 아니…….” “할아범 괜찮아?” 을지호가 미처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달려온 남궁민이 곽 노인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나야 괜찮지. 할아범은 어때? 정말 괜찮은 거야? 정말?” “예, 다 늙어 폐물이나 다름없지만 아직은 끄떡없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곽 노인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미소 띤 얼굴은 곧 의혹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그제야 을지호의 존재를 상기한 남궁민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질문?” 곽 노인을 돌보느라 미처 그녀의 질문을 듣지 못했던 을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 며 되물었다. “이렇게 도움을 주신 건 고맙게 생각해요. 놈들을 물리치고 할아범까지 구해주신 것에 대해선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누구시죠? 어인 이유로 저희를 도와 주셨는지요?” 살짝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질문을 던지는 남궁민의 태도는 당돌하리만큼 당 당했다. 그런 남궁민이 마음에 들었지만 을지호는 표시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빈정거리듯 말을 던졌다. “흠, 고마운 것을 알기는 하는 것일까?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렇게 뻣뻣해서야 원.” “거듭 말씀드리지만 도움을 주신 것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지금껏 가면(假免)을 쓰고 본가를 찾은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요.” ‘가면’ 운운하는 남궁민의 음성엔 약자만이 겪을 수 있는 회한 섞인 슬픔이 잠겨 있었다. ‘흠, 그동안 고생이 심했나 보군. 하긴, 그럴 만도 했겠지.’ 애당초 힘이 없던 사람과 힘이 있다가 그것을 잃은 사람의 차이는 말을 할 수 없이 큰 법, 더구나 남궁세가와 같이 적이 많을 경우에 겪어야 되는 시련은 상상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을지호는 다른 말이 필요가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네게 오라비가 된다.” 난데없이 나타나 오라비라니!! 잠깐 동안 당황한 모습을 하던 남궁민은 을지호가 자신을 놀린다는 생각을 했는 지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무슨 뜻인가요?” 곧바로 쏘아붙이는 음성 또한 차갑기 그지없었다. “무슨 뜻이긴, 말 그대로지.” “남궁세가에 남은 사람은 저뿐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누가 남궁 성을 쓴다고 하더냐. 촌수를 따지자면 그리 된다는 것이다.” “촌수라니요?” “그런게 있다. 따지자면 골치가 조금 아픈. 중요한 것은 내가 너의 오라비가 된 다는 것이지.” 태연스레 대꾸하는 을지호의 태도에 남궁민도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당신도 어차피 그런 사람이었군요. 가세요. 더 이상의 희롱은 사양하겠어요.” 남궁민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경멸스런 표정을 지으며 곽 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데 그녀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곽 노인의 표정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쯧쯧, 급하기는.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게 성격이 급하냐? 할머님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당장 나가주세요.” 고개를 홱 돌려 을지호를 쏘아본 남궁민은 용두파에게 그랬던 것처럼 적의를 드 러냈다. “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겠지만 지금은 그렇게는 못하겠다. 이제 곧 날이 밝겠지 만 조금 쉬어야겠어. 내가 꽤나 먼 길을 왔거든.” 남궁민의 말을 간단히 일축한 을지호가 초번을 향해 손짓을 했다. 초번은 재빠른 동작으로 등에 메고 있던 을지호의 봇짐을 벗어 가지고 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죠?” “네 기세를 보니 공짜로 묵겠다면 죽이려 들것 같아서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려 고 한다.” “필요 없어요. 당장 떠나세요.” 자신도 어쩌지 못한 용두파를 간단히 제압한 을지호 일행을 상대하면서도 남궁 민은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을지호를 향해 호통을 치는 기세가 여느 문파의 우두머리 못지않게 단호하고 서슬이 퍼랬다. “좋아, 좋아. 이제는 네가 남궁세가를 이끌어가야 될 터, 그 정도의 강단과 힘은 있어야지.” 연약하게만 보였던 남궁민의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한 을지호는 만족스런 미 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녀를 향해 두 권의 책자를 내밀었다. “받을 이유도, 필요도 없어요. 어서 나가세요.” 남궁민이 단호하게 소리치며 팔을 휘둘렀다. “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나 같으면 당장 줍겠다.” 손을 떠났으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듯 을지호는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책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힐끗 쳐다보며 혀를 차는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곁 에서 지켜보던, 그 책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던 해웅과 초번, 뇌전만이 기겁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그 책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아, 아가씨!!” 곽 노인이 남궁민을 불렀다. 음성이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깜짝 놀란 남궁민은 곽 노인이 혹시나 상처가 악화되어 그러는 것인지 살피며 물었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픈데 있어?” “그,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혀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다급히 묻는 남궁민의 말에 곽 노인은 그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땅에 떨어진 책 자를 가리킬 뿐이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남궁민이 시선을 돌렸다. 두 권의 책자, 한 권은 활짝 펴져 제목을 알 수 없었지만 곱게 떨어진 다른 하나 의 제목은 여명(黎明)의 빛을 받으며 너무나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죽음을 예감한 남궁우가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기록을 하여 남기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조부였던 남궁석이 기억을 더듬어 간신히 완성시킨 무공. 하지만 그 역시 제대로 배운 것은 아니었기에 이제는 사실상 실전된 남궁세가의 근간이 되는 무공이었다. “이, 이것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뭔가에 홀린 듯 달려간 남궁민은 나머지 책자의 제목을 살폈 다. 제왕검법(帝王劍法). 그런 검법이 있었다고만 전해진 남궁세가 최고의 검법, 남궁석은 물론이고 남궁 우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오직 남궁진만이 배운 적이 있다는 바로 그 무공이 었다. 남궁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책의 진위여부를 떠나 제목만으로도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남궁민은 두 권의 책자를 가슴에 꼭 품은 체 한동안 일어날 줄 몰랐다. 그 모습 이 어찌나 진지한지 모두들 숙연해져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호, 혹시 장백산에서 오셨습니까?” 남궁민과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던 곽 노인이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조금 전 촌수 운운할 때부터 뭔가 마음에 걸려했던 곽 노인은 두 권의 책자를 보고는 자 신의 짐작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곽 노인이 태도가 이상했는지 남궁민도 애써 눈물을 감추며 고개를 들었다. “예.” 을지호가 공손히 대답했다. “성함이……?” 곽 노인의 음성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을지호라고 합니다.” 이제는 막연한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 되어버렸다. “아…가씨께서, 혜… 아가씨께서 보내신 분이군요?” 멈추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습니다. 할머님을 아시는군요.” “알지요, 알다마다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지팡이를 내팽개친 곽 노인이 절뚝거리며 다가와 을 지호의 손을 움켜잡았다. “또한 귀인(貴人)의 조부님도 익히 알고 있지요. 이 늙은이는 그 옛날 패천궁을 상대로 싸우시던 그분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어찌 잊겠습니까? 궁 하나로 패천궁의 악도들을 물리치신 그분을 말입니다.” 곽 노인은 격동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옛날,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들던 패천궁에 대항해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내 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있었다. 거기엔 갓 약관이 지난 곽 노인이 있었고 그의 사부가 있었으며 사형제들, 남궁세가를 돕기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달려온 친 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궁귀 을지소문이 있었다. “할아범, 무슨 소리야? 장백산은 뭐고 아가씨는 누구야?” 남궁민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 역시 장백산으로 떠난 남궁혜의 얘기를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더구나 부 친의 유언까지 있지 않았던가. 하나 갑작스레 밀어닥친 놀라운 일들로 인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남궁민은 그것들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옛 생각에 잠겼던 곽 노인이 눈을 떴다. “아가씨…….” “응, 할아범.” 곽 노인이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을지호를 응시했다. “신(神)은… 남궁세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권 시작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7 금지에서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용두파의 일로 인해 아직 장례조차 제 대로 치루지 못한 남궁민은 집안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해서 모든 일을 장례식 뒤로 미루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을지호는 그녀의 의견을 당연하다 는 듯 받아들였다. 비록 얼굴도 보지 못했고 친분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남궁 혼은 을지호에게 친척 어른, 남궁세가를 재건하기 위해선 촌각의 시간도 아까웠 지만 예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은 과거 무림을 좌지우지 하던 명문세가의 가주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간소하면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손님들이라야 고작 을지호와 그 일행이 전부일 뿐이고 상갓집의 그 흔한 곡성(哭聲)과 손님들을 위해 준비하는 풍성한 음식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남궁혼의 장례가 끝난 이튿날, 형편없이 무너져 내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던 북쪽 전각들의 잔해들이 치워지면서 늦은 겨울 남쪽에서부터 서서히 봄이 찾아오듯 남궁세가에도 미약하나마 따뜻한 기운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너지고 허물어진 전각과 담벼락의 잔해물이 서서히 사라지고 세가 곳곳에 무 성하게 자라있던 잡초들이 하나둘씩 뽑혀 나갔다. 그렇게 하기를 보름, 마치 흉가(凶家)처럼 변했던 남궁세가는 비록 남아 있는 전 각이 얼마 되지 않고(그나마도 엉망이었지만) 세가를 둘러싸고 있던 담벼락 중 칠팔 할은 유실되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상태였으나 나름대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을 위해 을지호 일행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딱히 사람을 부른 것도 아 니고 그렇다고 스스로가 직접 나서서 땀을 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찌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용두파의 무리들 중 한 명을 붙잡은 뇌전이 살벌한 인상 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누런 이를 깨끗하게 훑어내 버린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엔 일사천리였다. 뭐라 지시할 것도 없이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 깨끗해지 는 세가의 모습을 감상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보지 말라 하면 더 보고 싶고, 먹지 못하게 하면 더 먹고 싶고, 가둬 놓 으면 어떻게든 도망을 치려는 것이 인간의 심리였다. 용두파의 무뢰배들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유와 해웅의 무시무시한 괴력과 무공, 마치 지옥의 야차(夜叉)와도 같은 뇌전 의 인상에 겁을 잔뜩 집어먹기는 하였지만 고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에 지쳐 개중에는 야음을 틈타 도주를 시도한 자들도 있었다. 하나 얼마 못가 잡혀온 그들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휘두르는 뇌전의 주먹에 반죽음이 된 이후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그 누구도 감히 도주란 말을 입에 담지 못했고 시도는 더더욱 하지 못했다. 그저 ‘일이 마무리 되는 대로 무사히 돌려 보내주겠다.’ 라는 을지호의 말을 마지막 희망삼아 죽어라 일할 뿐이었다. 근 이십여 일이 지나고 남궁세가에 쌓여 있던 건물들의 잔해와 곳곳에 자라나 있던 수풀들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자 을지호는 약속대로 그들을 풀어 주었다. 대신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함구하겠다는 다짐과 만약 발설할 경우 응분의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와 함께였다. 물론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위협을 한 것은 남궁세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을 누군가에게 열이 전해질 것을 다만 여덟이나 아홉으로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어쨌든 악몽과도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용두파의 무리들은 양 다리가 짓뭉 개져 불구가 되고 제대로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며 시름시름 앓고 있는 갈천을 비롯한 뇌전에게 당한 몇몇 동료들, 그리고 얼떨결에 붙잡혀 그들의 식사와 빨래 를 담당하게 되었던 기녀들과 함께 행여나 또다시 붙잡힐까 걱정하며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용두파를 동원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변 정리를 끝낸 을지호는 그들을 돌 려보내고 곽 노인에게 물어 인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는 대목(大木) 풍악(豊岳 )과 그와 함께 일하는 목수 십수 명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과거와 같이 웅장하거 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아 울러 망가진 연무장이며 무너진 담벼락 또한 수리케 하였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남궁세가는 눈부실 정도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나 그에 따라 들어가는 비용 또한 실로 막대했다. 동원된 목수만 열아홉에 목수 한명에 딸린 일꾼만 대여섯 명이나 되니 하루에 들어가는 일당이 만만치 않았고 건물을 짓기 위해 끊임없이 들어가는 목재(木材 )며, 석재(石材) 등 자재(資材)의 값 또한 상당했다. 공사의 시일을 당기기 위해 그들 모두 남궁세가에서 합숙을 하는 바, 거의 백 오십에 달하는 그들의 식사와 빨래를 담당할 하녀들에게 들어가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인심이 후해야 조금의 정성이라도 더 들어가는 법이라며 곽 노인을 통해 대부분의 진주를 현금화한 을지호는 돈을 쓰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는 밤이면 매일 같이 거나하게 술상을 차려 목수들과 일꾼들을 위로했고 새 로 맞아들인 하인 하녀들의 처우에도 상당한 신경을 썼다. 그 모든 것들이 막대한 비용을 요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해남도를 떠나기 전 을 지호가 외조부로부터 받은 진주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 었다. 석 달 간에 걸친 공사가 끝났다. 기존의 있던 세 개의 전각이 보수되고, 새로이 아홉 개의 전각이 들어섰다. 그러 나 전각을 채울 사람들이 없었다. 목수들과 일꾼들이 떠난 이후 남궁세가에 거주 하는 사람들은 남궁민과 곽 노인, 그리고 을지호 일행과 스무 명 남짓의 하인 하 녀들뿐이었다. 무릇 한 가문을 일으키려면 많은 인재를 거느리고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하나 이미 몰락한 남궁세가에 인재가 남아 있을 리 없는 터,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부터 을지호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궁세가의 주변엔 인접해 있는 흑도문파에 서 보낸 첩자들로 붐비기 시작하자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을지호는 격렬하게 반 대하는 남궁민을 설득하여 전격적으로 봉문(封門)을 결행했다. 봉문이란 말 그대로 한 문파의 공식적인 모든 일은 접는 다는 것으로 문파 내에 큰 일이 닥쳐 스스로 봉문을 하는 경우와 세력간의 다툼에 패했을 때 봉문을 강 요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봉문을 하는 동안에는 문파와 문인(門人)의 공식적인 대외활동이 모두 금지되고 강호 출입 또한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원인이야 어떻든 봉문이란 그 문파에 있어선 더할 수 없는 치욕, 봉문을 선언한 문파에 대해선 여타 다른 문파에서도 그 사안을 존중하여 일체의 분쟁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설사 당장 원수를 갚아야 할 처지에 놓였을 때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궁세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이 의심되기는 하였지만 봉문을 한 문파에 대해 딱히 시비를 걸 수 없었던 이들은 그저 주변을 맴돌며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을 뿐 본격적으로 나서 딴죽을 걸 수는 없었다. 봉문이라는 파격적인 방법으로 남궁세가에 쏠리는 이목을 어느 정도 차단한 을 지호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용두파의 무뢰배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다 간신히 구원을 받은 흑수파의 사내들을 세가의 사람으로 거두었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방계집안에서 인재를 구했고 때로는 ‘남궁’ 성을 쓰기는 하지만 방계조차 되지 못하는 이들조차 재질이 우수하면 받아들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장강 이남이 패천궁의 영향아래 흑도의 세력으로 굳어져 버렸지만 과거 엔 남궁세가를 위시하여 많은 정도문파가 존재했다. 그들 대부분이 멸문을 당하 거나 몰락하여 뿌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으나 명맥만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곳도 꽤 되었다. 을지호는 바로 그들에게 눈독을 들였다. 참담한 현실을 이기지 못해 자포자기 했던 자들, 명문의 후예로써 흑도문파에 대 해 뿌리부터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 과거 남궁세가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멸시와 핍박을 받았던 이들 중 나이가 이십을 넘지 않은 이들을 모으기를 한 달 여 , 남궁세가엔 을지호가 직접 고르고 고른, 이십 육 명의 인재들이 남들의 이목 을 피해 은밀히 모여들었다. 물론 모든 일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두 눈에 불을 켜고 세가 주변을 감시하는 이들의 눈을 피해 인재들을 데리고 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가주의 직위를 정식으로 계승하는 요식행위를 거치지는 않았으나 사실 상 남궁세가의 가주라 할 수 있는 남궁민과 을지호가 고른 인재들과의 첫 대면 에서부터 문제가 터져 나왔다. “지금 이들을 세가의 식솔로 맞아들이란 말씀이신가요?” 남궁민이 차갑게 일갈했다. 남궁민은 처음부터 을지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가문에 더할 수 없이 중요 한 무공비급을 전해준 것은 뭐라 말을 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었고, 또한 고강한 무공을 지닌 수하들을 부리며 세가를 찾은 그가 먼 친척뻘 된다는 것 또한 다행 한 일이었지만 왠지 싫었다. 가문을 떠나 수십 년 동안 모른 체 했던 남궁혜에 대한 거부감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가문의 재건을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곽 노인의 설득과 눈앞에 닥친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을 전적으로 을지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막상 인재라고 데려온 자들을 보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남궁민의 반응과는 달리 을지호의 대답은 태연하기만 했다. “고르고 골랐다.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다들 대단한 인재야.” 무려 두 달 동안이나 발품을 팔아 직접 고른 인재들이었기에 을지호가 이들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하지만 남궁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라버니는 남궁세가를 너무 무시하는군요?” “무시하다니?” 을지호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비록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남궁세가는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어엿 한 명문정파예요.” “그래서?” 묻는 을지호의 안색도 남궁민 만큼이나 차가워져 있었다.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런 사람이나 식솔로 맞아들이는 남 세가가 아니란 말이지요. 물론 저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요.” 남궁민이 가리킨 곳은 조금 전 같은 성을 쓰는 방계의 후손들과 그녀도 들어 알 고 있는 문파의 후예들이었다. 직계의 인물이 없으니 방계에서 사람을 찾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몰락은 했지만 과거 정파의 후손들을 데려온 것도 동병상련(同 病相憐)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안돼요.” 흑도의 악도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흑수파의 무뢰배들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도 모자라 이제는 연고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렁뱅이와 다를 바 없는 인물들까 지라니!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남궁민은 단호하게 소리치며 허락할 수 없음을 거듭 천명했지만 을지호의 입에 선 냉소만이 흘러 나왔다. “놀고 있군.” “뭐예욧!” “남궁세가가 언제부터 명문이었나?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듣 기론 태조(太祖) 또한 비천한 출신이라 했다. 개국공신(開國功臣)이라 말하는 자들 역시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 출신은 비천할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은 나라 를 일으켰고 칭송받고 있다.” “그건 궤변에 불과해요.” “궤변이라…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배가 불렀어.” “저, 고, 공자님…….” “나서지 마세요.” 보다 못한 곽 노인이 중재를 하려 하였지만 을지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렸 다. “그 누구도 그들의 과거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너는 이들이 남궁세가의 식솔로 맞아들이기엔 그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그 자격이 무엇이냐? 가문이 변변치 못해서? 이름을 날리지 못해서? 그럼 말해봐라. 네가 이들에게 소리칠 무엇인가가 있는지를. 이들과 네가 다른 것이 무엇이냐? 남궁세가가 언제 의 남궁세가더냐? 지금은 한낱 뒷골목의 왈패들에게 희롱을 당하는 처지로 전락 하지 않았더냐? 그런 세가를 위해 네가 한 것은 무엇이냐? 그저 쥐꼬리만큼의 가치도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큰소리만 치지 않느냐?” “이…!!” 남궁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을지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 을 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별 볼일 없는 놈이다. 그래, 소위 말하는 오랑캐 쯤 되겠 군 그래. 그리고 내가 데리고 온 수하들은 해적이니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겠고. 허니 차라리 돌아갈까?” 당장 대꾸를 하려 했지만 남궁민은 그러지 못했다. 곽 노인이 은연중 그녀의 팔 을 꽉 쥐었기 때문이었다. “…….” 남궁민은 뭐라 말을 하는 대신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화를 삭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네 머릿속에 박힌, 굴러다니는 개똥만도 못한 자존심과 우월감 은 당장 내다버려. 그래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진정 중요한 것을 볼 수가 없어. 이들이 빌어먹는 거지면 어떻고 사기꾼이면 어떠냐?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중요한 것은 과연 이들이 얼마만큼 힘을 기를 것인지, 진정 남궁세가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 출신 성분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싫다면 네가 구해와라. 한줌도 되지 않는 인간들 중에서 남궁세가를 일으킬 인재를 말이 야. 난 도저히 자신이 없다.” 뭐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말에 틀린 곳은 없었다. 선뜩 받아들이기에도 뭐했지 만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하자니 을지호의 말마따나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을지호의 의견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남궁민은 그저 찬 바람이 연무장을 휩쓸 정도로 냉랭한 얼굴로 을지호를 비롯한 그가 데려온 인재 들을 쏘아보며 몸을 돌리는 것으로 무언의 허락을 했다. “형님,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남궁세가의 가주인데.”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남궁민을 우두커니 응시하던 강유가 다소 볼멘 음성으 로 말했다. “흥, 심하긴 뭐가 심해. 아직도 멀었어.” “이 정도가 심하지 않다니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요?” 강유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을지호가 점점 멀어지는 남궁민에게 시선 을 던지며 말했다. “무너진 남궁세가를 일으키는 일이다. 그리고 저 아이는 그 정점에 설 아이야. 물론 우리들이 돕기는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일이지. 한데 저런 마 음가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독기와 오기는 가지고 있으되 저토록 편협한 생각은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아. 앞으로 얼마나 힘들고 무시무시한 일들이 우리 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마다 명문이네 뭐네 하는 자존심을 내 세우며 부딪칠 수는 없어. 구부릴 땐 구부릴 줄도 알아야 하고 기어야 할 땐 길 줄도 알아야 한다. 발을 핥으라면 핥을 각오를 해야 하지.” “에이, 아무리요.” “아닐 것 같아? 문파를 일으켜 세운다는 것, 또 그 문파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 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야. 물론 힘을 갖추게 되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말 이야.” 을지호의 말은 비단 강유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해웅과 초번, 뇌전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고, 그가 데려온 모든 인재들에게도 미리 말해두는 것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8 * * * * * * 장차 남궁세가를 일으켜 세울 인재들을 담금질하는 일은 새로 만들어진 지하 연 무장에서 시작되었다. 전쟁터로 보자면 남궁세가는 적진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 떤 위험이 들이닥칠지도 몰랐고 끊임없이 감시의 눈길이 따라왔다. 그리고 조금 이라도 변화의 모습이 보이거나 힘을 키우는 기색이 보이며 어김없이 방해가 들 어왔다. 두렵지는 않았지만 번거로울 것은 틀림없었다. 때마침 곽 노인으로부터 금지의 존재를 알게 된 터, 을지호는 공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대목인 풍악을 불러 은밀히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과거 남궁세가의 금 지였던 자그마한 밀실을 확대 개조해 줄 것을. 물론 절대적인 침묵을 약속받은 것 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공사가 끝나고도 두 달이란 시간이 흐른 뒤 을지호가 원했던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쓸만한 지하 연무장이 만들어졌다. 중심에서 사방 직경이 십장이 채 안되는 지하 연무장의 북쪽, 시조인 남궁치세의 상이 자리 잡고 그 좌우로 촘촘히 놓여 있는 횃불이 어둠을 밝혔다. 을지호는 바로 그 아래에 서 있었고 그의 앞에 부상을 이기지 못해 한명이 죽어 이제는 일곱으로 줄어든 흑수파의 사내들과 을지호가 직접 데려온 이십육 명의 인재들, 도합 삼십삼 명이 도열해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며 그들을 응시한 을지호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앞으로 배우게 될 무공은 과거 남궁세가의 식솔들과 제자들 중 최고 의 정예들만 익혔다는 창궁무애검법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검을 쥐어준다고 검사(劍士)가 아니듯 지금 너희들이 지닌 내공으론 익히기도 벅찰뿐더러 익힌다 하더라도 제대로 시전 할 수 없다.” “허면 어찌 해야 합니까?” 어디에 가든 성질이 급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을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상기된 얼굴에 동료들보다 한발이나 앞서 나온 한 청년이 물어왔다. 그의 이름은 천도문(天悼門), 과거 제법 명성을 날렸던 승정문(承正門)의 마지막 후예라는 것 을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말이 끊긴 것이 다소 기분 나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을지호의 안색에선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는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내력을 키워야겠지.” 뭔가 특별한 대답을 기대했는지 천도문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어렸다. 그러자 을지호가 빙긋이 웃음 지었다. “너무 당연한 말인지라 실망한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야.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 천도문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며 들어가자 을지호가 옆에 서 있던 초번에게 손 짓을 했다. 살짝 허리를 숙여 대답한 초번이 사내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손톱 만한 크기의 단환을 각각 세 개씩 나누어 주었다. 천도문과 마찬가지로 다소 실망한 기색을 보였던 청년들의 얼굴에 잠시 의혹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이내 화색이 돌았다. 그들의 변 화를 감지한 을지호가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들 좋아하지 마라.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이나 무당파(武當派)의 태청단 (太淸丹) 같은 영단은 아니니까. 비약적으로 내공을 증진시켜주거나 무궁무진한 효력을 있는 것도 아니지. 다만…….” 을지호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것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서 약간의 내력 증진도 얻을 수 있고.” 말은 쉽게 했지만 지금 그들이 받은 단환은 결코 함부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비록 을지호가 앞서 거론한 대환단이나 태청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조부 을지소문이 가문에 내려오는 의술을 기초로 하여 수십 년 동안 무려 아흔 아홉 가지의 약초(藥草)와 독초(毒草), 영초(靈草)를 혼합해 간신히 완성한 영단이었다. 그런 귀한 영단을 장백산을 떠나던 날 아침 을지호가 몰래 챙겨온 것이었다. 을지소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단은 한번에 내력을 증진시키지는 효력은 지 니지 못했지만 몸에 쌓인 탁기를 제거해주고 내공을 익히기에 적당한 몸 상태를 만들어주는 데에는 감히 최고라 단언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영단을 받은 청년들이나 을지호 본인도 몰랐지만 을지호가 떠난 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을지소문이 무려 한달이나 심화를 끓이며 끙끙 앓아 누었으니 그것만 으로도 을지호가 몰래 훔쳐온 영단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야, 저거 좋은 거냐?” 강유가 을지호의 시선을 피해 넌지시 물었다. “아무렴, 우리도 복용한 적이 있는데 최고였다.” 해웅이 엄지손가락을 살짝 치켜세우며 대꾸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해웅의 말을 듣고 희색이 만연해져 초번의 손에서 움직이는 영단을 탐욕스런 눈 으로 쳐다보던 강유는 날카롭게 쏟아지는 을지호의 시선을 느끼며 재빨리 헛기 침을 했다. “너한테까지 갈게 있다고 보냐?” 을지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 “어려서 좋은 것만 배터지게 먹은 너에겐 소용없는 물건이다.” “누가 뭐랍니까? 괜히 그러…….” 강유의 말을 이어지지 못했다. 을지호가 슬며시 주먹을 쥐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 다. 단 한번의 동작으로 강유를 잠재운 을지호는 초번이 모든 영단을 나누어주고 뒤 로 물러나자 재빨리 주위를 환기시켰다. “지금부터 내가 말해주는 내공심법(內攻心法)의 구결(口訣)을 외워라. 지금껏 익 혀온 내공심법이 있을 것이나 남궁세가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무공을 익혀야겠지. 모든 내공심법은 그 궤를 같이 하는 법, 처음엔 다소 무리가 따르겠지 만 크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럼 시작하자.” 모든 이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을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자연의 기를 몸에 받아들이려면 몸의 기운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닌 이를 허기평심(虛氣平心)이라 한다. 비록 그 형체는 보이지 않고 컴컴한 어 둠과 같으나 몸에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니 이를 허령불매( 虛靈不昧)라 하고…….” 창궁무애검법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남궁세가가 있게 만들어준 대연신공(大衍神 功)의 구결이 을지호의 입을 통해 자세한 해석과 함께 이어지자 이를 조용히 듣고 있던 남궁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것은 절전되었지만 대연신공만큼은 그녀에게까지 전해졌다. 그것이 남궁세 가에 있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었으니 입맛이 쓸 수밖에 없 었다. 남궁민은 비록 세가를 위한 것이라지만 아직 확실히 믿기도 어려운 이들에 게 대연신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수하는 을지호가 너무나 못마땅했다. 하나 이 미 엎질러진 물, 막을 길은 없었다. 남궁민이 어찌 생각하든 을지호는 모여 있는 모든 인재들이 확실히 외웠다는 것 을 일일이 확인할 때까지 구결 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 다음은 간운보월(看雲步月)이라는 보법이다. 무공을 익히는 이들에게 보법 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을지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한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불이 뿜어져 나올 듯 타오르는 눈동자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 중에는 간운보월을 알지 못했던 남궁민의 눈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법에 이어진 것은 무우귀영(舞雩歸詠)이라는 경공법(輕功法)이었다. 이 역시 남궁세가의 무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무공으로 간운보월과 마찬가지로 현 남궁세가엔 절전된 무공이었다. 내공심법과 보법 그리고 경공법의 구결만 가르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두 시진 이었다. 하지만 을지호는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지금부터는 창궁무애검법의 구결이다. 율천(栗阡).” “예, 주군.” 을지호의 부름을 받은 청년이 재빨리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허리까지 내려오 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질끈 동여맨, 과거 어린 나이에 흑수파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인상을 자랑하는 사내였다. 을지호에게 구원을 받은 이후 그는 을지호를 주군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을 들은 을지호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누가 너의 주군이냐?” “예?” 난데없는 호통에 율천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부터 너는, 아니, 너와 흑수파, 그리고 이곳에 모인 모든 사 람들의 주군은 여기 있는 아가씨다. 아직 정식으로 가주의 지위에 오른 것은 아 니지만 그녀가 남궁세가의 가주임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또한 너희들이 목숨을 걸고 모셔야 하는 주군이기도 하지. 오늘 이후, 지금과 같은 망발은 용서 하지 않는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율천이 거만한 표정으로 오연히 서 있는 남궁민을 힐끗 쳐다보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모두들 알았나?” 재차 다짐을 받으려는 듯 을지호가 모든 이들에게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좋아, 함께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할 사이, 허물없이 지내되 반드시 예는 차려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모두들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인사라고 여겼는지 남궁 민도 살짝 목례를 하여 답례를 했다. “흠, 그나저나 호칭 문제도 있었군. 그것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어쨌든 율천 과 너희들은 검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 을지호가 가리키는 사람들은 과거 흑수파의 사내들이었다. 갑작스런 을지호의 선언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애써 표시는 하지 않았지만 남궁민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고 강유와 해웅 등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반해 율 천은 을지호의 눈에 시선을 맞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와 네 수하, 아니 동생들은 내공을 익히고 검법을 익히기엔 너무 늦은 나이 다. 익힐 수야 있겠지만 그 성취는 기대만큼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 역시 그다지 이른 나이는 아니나 대부분이 무공을 접했던 사람들이고 너희들에 비해 나이 또한 어리다. 함께 배운다면 너무 처져. 해서 너희들에겐 따로 가르칠 것 이 있다.” “무엇입니까?” “궁(弓)이다.” 을지호의 말에 장내가 또 한번 술렁거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이라는 이름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을지호가 궁을 가르친다는 말이 지닌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안 어른들을 통해 과거 궁귀의 명성을 알고 있던 강유나 을지호를 따라 중원행을 택한 해웅 등도 다소 놀랐을 뿐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 오직 그 옛날 을지소문과 함께 패천궁과 싸웠던, 어째서 그가 궁귀라는 명성을 날리게 되었는지 똑똑히 목도했던 곽 노인만이 입을 쩍 벌리며 격동할 뿐이었다. “배우면 처지지 않습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율천이 물었다. 순간 을지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대신 죽을 각오로 덤벼야 할 것이다.” “저희들 모두 죽었던 목숨입니다.” “좋아, 그런 각오라면 충분하지.” 을지호의 말을 끝으로 뒤로 물러난 율천은 그의 동생들을 데리고 한쪽으로 물러 나더니 지금껏 배운 구결을 함께 복습하기 시작했다. “기대해도 좋아. 충분히 괴롭혀 주지.” 만족한 미소로 그들을 지켜보던 을지호가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였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29 * * * * * * 햇볕이 따갑게 내려쬐는 오후, 을지호와 천뢰대(穿雷隊)의 대원들은 연무장에 모 여 있었다. 무공수련은 크게 오전과 오후, 그리고 저녁 수련으로 나뉘었다. 오전엔 주로 보 법과 경공술을 익혔고 오후엔 검법과 궁술을, 저녁엔 내공을 증진시키기 위한 연 공을 했다. 오전엔 모두 지하 연무장에 모여 수련했지만 오후엔 남궁민을 비롯하여 검법을 익히는 이들과 율천 이하 궁술을 익히는 천뢰대의 수련장소가 엇갈렸는데 궁이 라는 무기의 특성상 지하 연무장이 아니라 지상 연무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흑수파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제는 새롭게 태어난 그들에게 을지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마저 관통해 버리라는 격려로 천뢰대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곽 노인에게 부탁해 인근에서 가장 솜씨가 좋은 대장장이가 만든 철궁 을 구입해 지급하였다. 철궁(鐵弓)을 손에든 대원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손에 쥔 철궁이 주는 차가운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체가 주는 묵직한 무게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두의 몸이 뻣뻣이 굳어 있었다. 을지호가 그중 한 대원의 철궁을 건네받아 잠시 살피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철궁입니다.” “그래, 어려서부터 많이 보았을 것이고 또한 많이 봤을 것이다. 묻겠다. 궁은 어 디에 쓰는 것이냐?” 대답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사냥할 때 씁니다.” “전쟁에서 병사들이 씁니다.”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평이한 대답이었다. “그래, 사냥할 때도 쓰고 전쟁에서도 쓰인다. 다른 어떤 무기보다 많이 애용되는 무기다. 그런데 수많은 무인들 중 본격적으로 궁술을 익혔다는 사람은 그다지 들 어보지 못했다. 그 이유가 뭘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가 접근했을 때 별반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무 기에 대항하기도 힘들고.” 율천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대답을 예상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을지 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다. 무림인들이 궁술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비겁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멀리서 공격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그럴듯했는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을지호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 었다. “한심한 놈들이다!!” 난데없는 호통에 깜짝 놀라는 사이 들고 있던 철궁을 원 주인에게 건넨 을지호 가 말을 이었다. “비겁? 도대체 뭐가 비겁하다는 것이냐? 가까이 붙어 치고받지 않으면 모두 다 비겁한 것인가?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을 쌓기 위함이 아닌 이상 어차피 무공이란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상대를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검이나 도를 이용하 는 것은 정당한 것이고 궁을 쓰는 것은 비겁하다는 말인가? 웃기는 소리지. 그런 놈들은 무공이라는 것을 단지 겉멋에, 그저 남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익힌 놈들이다.” 마치 천뢰대원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듯 몰아붙이던 을지호는 주눅이 들어 난처 한 표정을 짓는 천뢰대의 대원들을 보며 자신이 조금 흥분했음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험, 험. 내가 조금 흥분했군. 어쨌든 궁술을 일컬어 비겁이니 어쩌니 하는 놈들 은 궁이 지닌 진전한 위력과 효용성을 모르는 놈들이니 신경 쓸 것 없다는 것이다. 험, 어쨌든 그럼 또 하나 묻겠다. 궁은 어떤 효용성이 있느냐?” “적에게 거리를 주지 않고 싸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율천의 곁에 서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율천에 이어 천뢰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흑수파의 이인자, 나이는 이십대 중 반 정도, 키는 상당히 작은 편에 속했지만 당당한 체구를 지닌 사내의 이름은 왕 욱(王旭)이었다. “정확하다. 그게 궁술을 익히는 가장 큰 이유이자 목적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대규모의 접전이 벌어졌을 때 아군을 보호할 수도 있고 지원할 수도 있다. 특히 우리와 같이 소규모의 인원이 다수와 싸울 때는 절대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물 론 그러기 위해선 정확하고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도록 실력을 키 워야한다. 괜시리 잘 싸우고 있는 아군을 맞추면 안 되니까.” 농담 섞인 말에 진지했던 좌중에 잠시 웃음이 맴돌았다. 웃음이 잦아들 쯤 을지호가 자신의 궁을 들었다. “자, 어차피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 더 이상 시끄럽게 떠들 필요 없겠지. 우선 내가 하는 것을 봐라.” 을지호가 한 개의 화살을 시위에 재었다. 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이 삼십 보(步) 정도 떨어진 표적에 정확하 게 명중하였다. “이것이 가장 쉽고도 평이하다 하여 평사(平射)라 한다.” 을지호가 또 하나의 화살을 재었다. 조금 전과 같이 경쾌한 소리가 들리자 천뢰대의 대원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 려 표적을 살폈다. 그리고 시위를 떠난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표적에 명중 했다. 그런데 이번은 한 발이 아니었다. 을지호에 대한 예우인지는 몰라도 저마다 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연이어 네 대의 화살이 찰나의 차이를 두 고 표적에 명중했다. “세, 세상에!!” 다섯 발의 화살이 미세한 틈도 없이 나란히 박힌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고작 고개를 돌려 표적을 확인하며 놀라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사이 을 지호는 네발의 화살을 더 날린 것이고 하나같이 명중을 했다. 도저히 인간의 솜 씨라고 보기엔 어려운 신기(神技)였다. “이것이 속사(速射)다. 속사가 무슨 의미인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말 그대로 한발이라도 빨리 화살을 날려 아군을 살리고 자기도 살자는 것이다. 단, 빠르기만 하다고 능사가 아니다. 정확성을 겸비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술이지.” 경악을 하는 천뢰대의 반응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한 을 지호가 다시 궁을 들었다. 천뢰대원들은 저마다 눈을 크게 뜨고 을지호와 그의 손에 들린 철궁을 응시했다. “연환사(連環射)라 한다. 한번에 다수의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다 수가 아니라도 여러 발의 화살로 공격을 하는 것이니 더욱 위력적일 것이다. 다만 아무래도 세발의 화살을, 참, 나중에라도 괜히 어줍지 않은 솜씨로 한번에 많은 화살을 쏘려는 미친 짓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감히 단언하건데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날릴 수 있는 화살의 수는 한번에 세 발뿐이니까.” 천뢰대의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거나 을지호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동시에 하나의 목표를 노릴 수도 있고 여러 개의 목표를 노릴 수도 있다. 보아라.” 퉁. 시위를 떠난 세발의 화살이 목표를 향해 쇄도했다. 어느 하나가 빠르다고 할 수 없이 거의 동시에 목표에 도착한 화살은 한 뼘의 차이를 두고 나란히 박혔다. “하나의 목표를 공격했음에도 화살이 노리는 부위가 갈렸다. 어떤 효과가 있느 냐?” “아, 아무래도 여러 곳으로 오니까… 머리도 노리고, 가, 가슴도 노리는 것이니 까 막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을지호의 시선을 받은 한 대원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을지호가 대뜸 핀잔을 주 었다. “그냥 막기 힘들다고 하면 되는 것을 참 힘들게도 말한다. 자, 다음은 다수의 목 표를 노리는 것이다.” 을지호는 어느새 당겼던 시위를 놓고 있었다.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간 화살은 각각 일장 여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는 표적의 중앙에 정확히 박혔다. “하나를 노리든 셋을 노리든 연환사도 속사와 마찬가지로 정확성이 생명임을 명 심해라.” “알겠습니다.” “자, 백문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이고 불여일행(不如一行)이라 했다. 아무리 듣 고 보아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직접 몸으로 부딪쳐 봐야겠지. 궁을 들어라.” 을지호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란히 선 천뢰대원들이 일제히 궁과 화살을 들었다. 을지호와 마찬가지로 거리는 삼십 보, 어린아이의 상반신만한 표적이 그들 앞에 서 있었고 그 정중앙에 또다시 자그마한 표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표적 뒤에는 뒤로 날아가는 화살을 막기 위해 볏단이 둘러쳐 있었다. “시위를 당겨라.” 천뢰대원들이 을지호의 명에 따라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그마저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시위가 어찌나 팽팽한지 팔뚝에 핏줄이 툭툭 튀어나오고 이마에서 땀이 흐를 정도의 힘이 아니고서는 당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작정 힘으로 당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편한대로 다리를 벌려라. 머리를 곧 추 세우고 가슴을 펴라. 상반신 전체를 이용하여 시위를 당겨야 한다. 그리고 목 표를 정확하게 응시해라. 오직 목표에만 집중해라. 옆에서 뭐라 하건 신경 쓰지 마라 . 설사 칼이 날아온다 하더라도 목표에서 시선을 떼선 안 된다.” 을지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쏴라.” 을지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곱 발의 화살이 예리한 바람소리와 함께 시위 를 박차고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정작 목표를 맞춘 사람은 율천과 왕욱 뿐이었다. 그나마도 명중이 아니라 끝에 살짝 걸린 정도였다. 나머지의 화살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결과를 확인한 천뢰대원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쯧쯧, 이리 가까운 거리에서 어떻게 제대로 맞춘 사람이 한명도 없을 수가 있 냐?” “죄, 죄송합니다.” 율천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뭐,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죄송할 건 없고, 자, 다시 시위를 재어 라.”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던 천뢰대원들이 이를 악물고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끔 찍할 정도로 빡빡한 철궁이 그들의 의지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목표를 제대로 겨 냥하는 것은 고사하고 시위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손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마음이다. 화살 한발에 혼을 걸어라. 맞추지 못하면 자신이 죽고 보호해야 하는 동료들이 죽는다는 각오로 임해라. 팔을 고정 시켜라. 궁을 잡고 있는 왼손은 태산이 내리쳐도 움직이지 않는 돌이 되어야 한다 . 그렇게 떨려서야 목표를 겨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호흡도 안정시켜라.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멈춰라. 화살을 쏠 때는 절대로 숨을 내쉬어선 안 된다.” 을지호는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호통도 치고 격려도 했다. 자세가 나쁜 대원이 있으면 자세를 교정해주고 힘에 벅차하는 대원이 있으면 살짝 곁으로 다가가 도 와주기도 했다. “쏴라.” 시위를 당긴지 일각 여, 어느 정도 자세가 잡혔다고 생각했는지 을지호가 발사 명령을 내렸다. 예의 파공음을 내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화살은 이번에도 목표를 한참이나 빗 나가 뒤에 마련된 볏단에 박혀 버렸다. 오직 율천만이 목표에 근접하여 화살을 맞췄을 뿐이었다. 천뢰대원들은 아까보다 못한 결과에 부끄러워하며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표적 을 맞추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작 두 번, 단 두발의 화살을 날린 것 뿐인데도 벌써부터 팔이 저려오고 다리에 힘이 빠져 후들거린다는 것이 그들을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결과와 반응을 당연히 예상했던 을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자, 어떠냐? 보기엔 쉬워 보여도 궁술이라는 것은 결코 간단히 배울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해야만 비로소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화살 하나에 혼을 담을 수 있는 마음가짐, 그 한발로 자신을 살리고 동료도 살릴 수 있다는 각오, 그리고 반드시 맞추겠다는 필생의 집념이 어우러져야 제대로 된 궁 술을 익힐 수 있다. 건성건성 해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천뢰대원들은 을지호의 말이 자신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각오를 새롭게 다 지게 하기 위한 충고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시작해 보도록. 나는 잠시 지하연무장에 다 녀오겠다.” 바로 그때였다. 몸을 돌리려는 을지호에게 율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연환사… 이상의 것도 있습니까?” “궁금하냐?” “그렇습니다.” 살짝 미소를 지은 을지호가 궁을 들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세우더니 화살을 날렸 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지면 까마득한 하늘로 날아올 랐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고 율천의 고개 또한 위로 향하려는 하자, 을지 호가 율천의 어깨를 잡았다. “가만, 그대로 움직이지 마라.” 율천이 당황하여 을지호를 응시하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던 화살이 머리 위에 나타나며 그와 을지호 사이의 좁은 공간을 가로질러 땅에 박혔다. “이, 이것이…….” 율천을 비롯한 천뢰대원 들의 눈에는 놀람 그 이상의 표정이 떠올랐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화살은 분명 뒤쪽 전각의 하늘로 사라졌 다. 아니,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화살이 그 좁디좁은 공 간으로 수직으로 꿰뚫으며 떨어진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을지호의 표정이었다. 이미 그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다는 담담 하다 못해 태연하기까지 했다.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무, 무엇입니까?” 율천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기어시(以氣馭矢)라는 것이다.” “이…기…어…시.” 율천이 꿈을 꾸듯 몽롱이 되뇌었다. 그러나 그 바람에 을지호의 마지막 말을 듣 지 못했다. “이기어시 정도에 놀라면 곤란한데…….”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0 을지호로 인해 남궁세가의 무공은 전해졌지만 그것을 가르칠만한 사람은 그를 제외하곤 전무했다. 첫 수련이 시작되었을 때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히고 있던 뇌전이 스스로 무공교 두(武功敎頭)를 자처하며 설쳐댔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무공이 뛰어난 강유가 틈틈이 돕기는 했어도 그는 어엿한 해남파의 제자,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히지 않 은 그에겐 분명 한계가 있었다. 또한 그 역시 누구를 가르치기 보다는 아직 수련 에 매진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모든 짊은 을지호가 질 수밖에 없었다. 수련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잠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발걸음도 제대로 떼어놓지 못할 정도까지 수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단 한사람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한(恨 )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약자가 어떤 설움을 당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다들 필사적이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고 했던가. 짧은 시간 내에 상당한 성과를 보았음에도 을지호는 만족하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수련의 강도는 더욱 세졌다. 부 족한 잠은 운기조식(運氣調息)으로 대신하게 했고 때때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할 정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무작정 몰아붙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운기조식을 하고 섭생을 제대로 한다 해도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매일 같이 이어지는 고된 수련을 이 겨내기 위해선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을지호가 선택한 것은 곽 노인을 통해 인근 마을에 존재하는 모두 약재상을 털 어 영약이란 영약은 모조리 사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거나 혹은 인근 의원에게 부탁해 필요한 탕약과 환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력을 증진시켜주기도 하고 더러는 몸에 맞지 않아 부작용도 있기는 하였지만 어 쨌든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마련한 약은 남궁민 이하 세가의 식솔들은 물론이고 강유와 해웅 등에게도 거의 주식과 같이 제공되었다. 수많은 영약들, 다시는 약자의 설움을 겪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수련에 임 하는 세가의 식솔들, 지상과 지하 연무장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며 힘으로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을지호, 그리고 이를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애쓰는 곽 노인의 정성이 깃들어지면서 남궁세가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만 갔다. 우렁찬 기합성과 끈적한 땀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연무장 한쪽 구석. 잔뜩 얼굴을 찌푸린 남궁민이 이리저리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찌 르고 베며 우아하게 검을 휘두르던 남궁민은 어느 순간 동작을 딱 멈추었다. “후~ 이게 아닌데.” 검을 멈춘 남궁민이 뭔가가 잘 안되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가 주의 위치에 있었지만 아직 그만한 실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남궁민은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노력했고 동시에 그만큼 초조함도 느끼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남궁민을 잠시 지켜보던 곽 노인이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을지호에게 지적받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참동안이나 골머리를 썩이던 남궁 민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다 곽 노인을 확인하곤 반가워했다. “어, 할아범!!” “잘 풀리지 않습니까?” 곽 노인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냥 그렇지 뭐.” 남궁민은 별일 아니라는 듯 함빡 웃음을 지었다. 순간, 곽 노인의 곁에 있던 강 유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감고 말았다. 사실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비단 같던 머릿결은 언제 감았는지 의심될 정도로 푸석푸석하게 변해버렸고 입고 있는 의복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 었다. 백옥 같던 피부 또한 안쓰러울 정도로 망가져있었다. 그럼에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남궁민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었다. 숨이 가빠지고 전신의 피가 들끓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 했다. ‘후~.’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두려워하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강유가 짧은 한 숨을 내쉬는 사이,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눈인사로 아는 체를 한 남 궁민이 고개를 돌려 곽 노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호법(護法)께서 찾으십니다.” “오라버니가?” 남궁민은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을지호와 남궁민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더구나 아무래도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을지호는 다른 누구보다 남궁민의 수련에 신경을 썼다. 그렇 지만 따로 불러 얘기를 나눈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특히 이렇게 수련 중에 부르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난 거야?” 뭔가 큰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했는지 묻는 남궁민의 음성에 걱정이 묻어 났다. “별일 아닙니다, 누님. 그저 몇 가지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하시던데요.” 곽 노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유가 재빨리 나서서 대답을 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무슨 일일까?” 분분히 검을 챙긴 남궁민은 한껏 의혹어린 표정으로 곽 노인의 뒤를 따랐다. 을지호와 곽 노인, 강유, 해웅, 초번, 뇌전이 모였고 비록 무공수련에만 정진해야 했지만 남궁세가의 대표 격인 남궁민도 가주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의논할 것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돈 문제였다. 해남파에서 가지고 온 재물은 정확하게 다섯 달 만에 바닥이 났다.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린 세가를 정비하면서도 꽤 많은 돈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닥치는 대로 구입한 약재 값이 결정적이었다. 집을 정비하고 남은 돈 가지고도 부족해 야광주까지 팔아 썼으니 그 비용을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무공 수련에 열심인 이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곽 노인이 이리저리 돈을 융통하며 끝까지 버텨보려 했지만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을지호라고 곽 노인의 고충을 모를 리 없었다. 결국 비용이 떨어졌다는 곽 노인의 말에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겠군.’ 이라는 말과 함께 즉시 회의를 소집한 것이었다. 눈앞에 직면에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지만 딱히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의견이라 해봐야 뇌전이 술과 여자를 이용해 장사를 하자고 말했다가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았을 뿐 변변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주군, 아버님께 도움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더 이상 의견이 나오지 않자 답답해하던 해웅이 넌지시 물었다. “무슨 뜻이냐?” “비록 정당한 돈은 아닐지라도 꽤 많은 재물이 쌓여 있습니다.” 해웅이 남궁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을지호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 었다. “사내대장부가 큰 뜻을 품고 집을 나섰다. 스스로 독립을 하겠다고 애써 부모의 품을 떠났건만 힘들다고 손을 벌려서야 되겠느냐? 말은 고맙지만 그럴 수는 없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초번.” 해웅의 제안을 거절한 을지호가 지금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초번을 불렀다. “예, 주군.” “끝까지 침묵을 지킬 생각은 아니겠지? 뭔가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은 해 보았습니다만…….” “들어보고 싶다. 어서 말해봐.” 을지호는 뭔가 생각이 있다는 초번의 말을 반기며 대답을 재촉했다.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이었지만 초번은 해적으로 썩기엔 실로 너무나 아까운 인재 였다. 초번은 탁월한 무재(武才)는 아니었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심기가 깊었다. 가끔 한마디씩 하는 말에 을지호 조차 놀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초번의 능 력을 눈치 챈 을지호는 그를 장차 남궁세가의 지낭(智囊)으로 점찍고 그가 지닌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노력이라 봐야 잡다한 지 식을 익힐 수 있는 서책들과 병법서(兵法書) 등을 조달해 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표국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실로 의외의 제안이었다. “표국?” “표국이라면…….” 초번이 재차 입을 열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 것 같습니다.” “흠, 글쎄.” 을지호와 강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심을 보일 때 곽 노인은 단정적으로 고 개를 흔들었다. “불가능 합니다.” 을지호의 시선이 곽 노인에게 향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호남성에는 수 없이 많은 표국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흑도 쪽과 연 결이 되어서…….” “제가 대신 설명을 드리지요.” 곽 노인이 말끝을 흐리자 초번이 재빨리 말을 자르고 나섰다. “호남성에는 말씀대로 많은 표국들이 있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표국을 따 지면 일곱 안팎입니다. 그리고 가장 규모가 큰, 소위 호남성의 이대표국이라 불 리는 두개의 표국이 모든 표물의 약 칠할 정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허, 어마어마한 수치로군.” 쉽게 상상이 안 가는지 강유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두 표국엔 당연히 뒷배가 있습니다.” “어디냐?” 을지호가 진지하게 물었다. “우선, 장사부를 중심으로 하는 장사표국(長沙?局)은 노호문(怒狐門)을 배경으 로 하고 있고…….” “흥, 여우새끼들이 노해봤자 그게 그거지.” 뇌전이 말꼬리를 잡아채고 재빨리 소리쳤다. 당장 을지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시끄러. 말 끊지 말고 조용히 하고 있어. 계속해라, 초번.” “소양(邵陽)을 중심으로 하는 대양표국(大陽?局)은 흑우도문(黑雨刀門)이 뒤를 봐주고 있습니다. 그 밖의 표국들도 예외 없이 흑도의 문파들이 뒤를 봐주고 있 습니다. 아주 소규모의 몇몇 표국을 제외하곤 말입니다.” “자세히도 알고 있구나.” “세력편에는 비단 무공을 익힌 문파뿐만 아니라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 는 상단(商團)과 표국에 대해서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을지호는 그러리라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데도 표국을 하자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을지호가 핵심을 찌르며 물었다. 초번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표국만큼 안정적이고 확실한 자금줄이 없습니 다. 특히, 은하상회(銀河商會)와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장사표국의 거래만 저희 것으로 만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은하상회?” “호남성은 물론이고 인근 성에서도 알아주는,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큰 규모의 상회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곽 노인이 대신 대답을 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초 번이 말을 이었다. “지금 현재론 딱히 표국을 세울 여건이 되지 않으니 기존의 표국 중 하나를 접 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원도 그쪽에서 충당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여러분들께서 염려하시는 것처럼 장사표국이 반발할 것이고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노호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점입니다. 가급적 별다른 잡음 없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잡음? 자금만 해결된다면야 까짓 잡음이야 없애면 그만이지.” 단박에 말을 자른 을지호는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주인 말을 잘 듣는 짐승도 밥그릇에 손을 대면 사나워 지는 법이었다. 미 물이 그러할 진데 하물며 사람, 그것도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노호문이 아니던가. 충돌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 * * * * * “형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집채만한 바위 위에 납작 엎드려 서서히 어둠에 잠기는 숲을 살피던 강유가 벌 떡 상체를 일으키며 짜증을 냈다. “시끄러. 누군 하고 싶어서 하냐?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방법이.” 그와 마찬가지로 바위 위에 올라와 있지만 태평히 누워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보름달을 감상하던 을지호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천하의 강유가 도적질이라니요? 아버님이 아시면 입에 거품을 무시고 쓰러지실 일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말을 끊고 손가락을 구부리던 강유가 을지호의 면전으로 구부려진 손가락을 내 밀며 말했다. “접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구부렸던 손가락을 펴야 될 정도라고요.” “으이구. 시끄러워서 정말.” 강유의 투정이 계속이어지자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을지호가 크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런데 이 길이 맞기는 맞는 거냐? 어째 안와? 살피러간 초번은 또 뭐하고?” 질문을 하는 것은 분명한데 대상이 강유는 아닌 듯 했다. “틀림없습니다. 주군. 초번의 말로는 거금 닷 냥을 들여서 알아낸 정보랍니다. 모르긴 몰라도 곧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바위에 오르지 못하고 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위에 은신하고 있던 뇌전이 재 빨리 대꾸했다.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되느냐고요!” 을지호가 자신의 말에 대꾸는커녕 딴청을 피워대자 부아가 나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강유의 안색은 심통 난 어린아이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그러니까 그게…….” “백 번, 천 번이라도!!” 강유의 말을 끊으며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던 을지호가 움찔하는 강유에게 무거 운 시선을 던졌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 되어야겠지. 무엇보다…….” 어느샌가 표정을 바꾼 을지호가 벌렁 뒤로 누우며 몇 마디를 더했다. “돈이 부족하잖아. 어디 한두 푼 들어갔어야지. 앞으로 얼마가 더 들어가야 할지 도 모르는데 바닥을 친지는 오래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괜한 불평하지 말고 잘 살펴.” 그 한마디에 강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돈이 부족하다는데 뭐라 할 말이 있겠 는가. 지난 여섯 달 동안 남궁세가를 재건하기 위해 들어간 돈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 리고 어째서 자신이 남궁세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악록산(岳麓山)의 한 골짜기에 숨어서 원치도 않는 일을 해야 하는지 강유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적질은 정말 체질에 맞지 않았다. “젠장, 그래도 짜증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니까요.” 끝내 한마디를 더한 강유도 을지호와 마찬가지로 바위 위에 사지를 벌리고 대자 로 누워 버렸다. 그리곤 지난 여섯 달 동안 무섭게 달라졌고 지금 이 시간에도 변모하고 있는 남궁세가를 떠올리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하긴, 그렇게 써댔으니 부족하기도 하겠지.’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1 바로 그때였다.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숨겼던 뇌전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옵니다.” 뇌전의 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을지호는 벌써부 터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강유도 뇌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세를 바로 잡 았다. “놀랠 것 없다. 초번이야.” 과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멀리 정찰을 나갔던 초번이었다. 강유가 헐떡이는 초번에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주머니를 던져주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한 초번이 재빠른 동작으로 몇 모금의 물을 마셨다. “어때?” 목을 축인 초번이 숨을 고르기를 기다리던 을지호가 물었다. “산모퉁이를 돌았으니 얼마 후면 이곳을 지날 것입니다.” “인원은?” “상단 자체의 무인들이 약 열 명 정도이고 물건을 나르는 일꾼은 대략 삼십 명 정도 됩니다.” “장사표국에서 동원한 호위무사(護衛武士)는 얼마다 되지?” “표사 급이 이십에 표두로 보이는 이들도 다섯이나 끼어 있습니다.” “이여, 제법 많군.” 을지호가 짐짓 놀랐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어둠을 뚫고 반짝거리는 눈 동자에서 피어나는 것은 분명 웃음이었다. “제법 많은 정도가 아닌데요. 놈들도 단단히 준비를 한 모양입니다.” 강유가 그렇게 웃을 것만은 아니라는 듯 말했다. 강유의 걱정스런 말에 을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충분히 예상한 일이잖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당하고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지. 그래, 그들뿐이야?” “아닙니다. 그들 이외에도 한 무리의 무인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노호문에서 나온 놈들이겠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아서 대충 인원만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초번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기는, 괜찮아. 노호문에서 나설 것도 다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수 고했어. 잠깐 동안이겠지만 휴식을 취하도록 해. 무척이나 바쁜 밤이 될 것 같으 니까 말이야.” 그리 말을 하면서 다시 눕는 을지호의 눈은 어느새 감겨 있었다. 초번의 말대로 은하상회에 소속된 상단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장사표국 의 표사들, 노호문에서 파견된 무인들은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물건을 나르는 열 두엇 정도 되는 말과 일꾼들을 중간에 놓고 앞뒤로 상단에서 고용한 무인들과 장사표국의 표사들이 이들을 보호했다. 노호문의 고수들로 보 이는 무인들은 일행의 맨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오고 있었는데 불안에 떨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들에게선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이제 다 왔습니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끝입니다.” 국주인 형을 대신해 장사표국의 표사들을 이끌고 있는 대표두 우건생(于建生)이 상단의 책임을 맡고 있는 허운창(許雲蒼)에게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띠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내내 불편한 기색을 하고 있던 허운창의 얼굴에서 근심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 된다면야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왠지 불안하군요.” 허운창이 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조금도 불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비록 준비가 부족해 몇 차례 좋지 않은 꼴을 당하기는 했지만 오늘만큼은 어림없습니다. 이렇듯 야간에 은밀히 움직이는데다가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특별히 많은 인원을 동원했고 노호문에서도 고수들이 저희들을 보호하기위해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 악도(惡徒) 들이 또다시 표물을 노리고 덤빈다면 명년(明年) 오늘이 놈들의 제삿날이 될 것입니다.” 우건생은 자신만만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노호문에서 파견한 고수들,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개개인이 모두 고수소리를 듣는 대단한 무인들이었다. 특히 가장 뒤에서 따라오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그의 사부이자 노호문의 다섯 장로 (長老) 중 한명으로 무공으로 따지자면 세손가락 안에 드는 대단한 인물이 아니던가. “후~ 그래도 걱정이 됩니다. 원체 대담하고 교활한 놈들이라…….” 고개를 돌려 노호문의 무인들에게 잠시 시선을 던진 허운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건생이 아무리 장담을 해도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래도요. 사부님께서 형님, 아니, 국주님의 요청을 받으시 고 직접 움직이셨습니다. 그분이 계시는 이상 우리에게 위험은 없습니다.” 우건생은 더 이상 논할 것이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습을 드러낸 을지호가 그의 말을 받아쳤다. “어이구야, 이거 원 무서워서.”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은 듯 을지호나 함께 모습을 드러낸 강유, 초번, 뇌전 등 은 하나같이 검은색 두건을 목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두 눈과 코, 입뿐이었다. “웬 놈이냐!!” 가장 앞서 가던 무인들이 을지호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말하는 싸가지들 하고는. 놈이라니!” 짐짓 노한 듯한 을지호의 음성이 들리고 동시에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 로운 비명이 깊은 잠에 잠들어 있던 악록산을 일깨웠다. “적이다.”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좌우를 경계하랏!!” 을지호의 출현으로 모든 행렬이 일시에 멈추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던 듯 일꾼들 은 깜짝 놀라 투레질을 하는 말을 진정시키며 재빨리 한곳으로 모여들고 뒤따라 오던 장사표국의 표사들은 혹시 있을 공격에 대비해 그들을 에워쌌다. 재빨리 혼란을 수습한 우건생이 앞으로 나서자 팔짱을 끼고 그들의 행동을 태연 히 지켜보고 있던 을지호가 팔을 치켜세우며 아는 체를 했다. “여~ 이게 누구시오? 장사표국의 대표두 우건생 나리가 아니시오?” 을지호의 음성엔 이미 여러 번 안면이 있다는 듯 절로 반가움이 넘쳐났다. 하나 을지호 등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는 우건생의 안면은 노여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무 그렇게 무서운 표정은 짓지 마시구랴. 우리도 다 먹고 살자는 것인데. 그 나저나 평소의 길과는 다르지 않소? 하마터면 엉뚱한 길에서 기다릴 뻔 했소이다. 그래, 오늘은 어떤 물건을 운반하시기에 이토록 야심한 밤에 쥐새끼 담 넘듯 은밀히 행차하시었소? 괜찮은 물건이라면 적선하는 셈 치고 조금 나누어 주시지 그러시오. 요즘 영 배가 고파서리.”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절로 짜증이 치밀고 울화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만드는 말을 을지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었다. 상대의 기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아니 오히려 부들부들 떠는 상대의 반응을 즐기려하는지 을지호의 걸죽한 입담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을지호가 반응도 없는 상대를 두고 혼자 떠들기 민망했는지 잠시 말을 멈추자 우건생이 한마디 했다. “다 지껄였느냐?” “어이구, 이제야 말문이 트였구랴. 난 그사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신 줄 알고 걱 정했소이다.” “난…….” 얄팍한 우건생의 입술이 옆으로 째지며 더욱 얇아지고 동시에 한줄기 조소가 피 어올랐다. “무척이나 바랬다. 사실 네놈들을 피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한편으론 꼭 나타 나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랬다.” “하하, 이것 참. 그동안 제법 정이 들긴 했지만 그렇게 보고 싶어 할 줄은 미처 몰랐는걸. 이런 줄 알았으면 진즉에 찾아뵐 걸 그랬소이다.” 을지호가 빈정거리며 딴죽을 걸었지만 우건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나 고맙구나. 엎드려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만큼이나. 네놈들에게 당한 기억이 악몽이 되어 밤마다 괴롭혔는데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수모를 갚을 수 있도록 해 주어서.” 을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당신이? 아니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보다 못한 저들이?” “네놈에게 염라지옥(閻羅地獄)을 보여주실 분은 따로 계시다.” 우건생의 고개가 뒤로 돌려졌다. 주변의 인원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한 무리의 무인들이 걸어왔다. 맨 뒤 에서 따라오던 노호문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적이 눈앞에 있음에도 한껏 여유 로운 걸음걸이로 우건생의 곁에 다가왔다. “저놈들입니다. 사부님.” 우건생이 가장 늦게 나타난 노인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을지호를 쳐다보았다. “고작 도적놈들을 당하지 못해 도움을 청한다 여기고 일이 끝나는 대로 혼구멍 을 내주려고 하였는데 너희들에겐 무리였겠구나. 나를 부르기를 잘했다.” “송구합니다. 사부님.” 어쩔 수 없었다지만 사부의 힘을 빌리게 된 것이 못내 죄스러운지 우건생은 고 개를 들지 못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노인이 물었다. “누구긴, 보면서도 모르시오? 도적놈들이지.” 을지호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내게 말장난 따위가 통할 것이라 보느냐? 어찌 일개 도적놈 따위가 네놈 같은 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이냐? 보아하니 나머지 놈들의 기운도 제법이로구나. 단 순한 도적질을 하려는 것은 아닐 터, 도대체 누가 너희들을 보낸 것이고 목적은 무엇이냐?” “밝히면 어쩌시려오?” 노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 “사실대로 밝힌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마. 하나 거절한다면 인세에 더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나~참. 어차피 죽이려고 하면서 별 생색은. 그 제안은 거절하겠소.” “내 이름이 무적수(無敵手) 좌극(左極)이다.” 갑자기 이름을 밝히는 노인의 말에 을지호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조소 를 보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이름을 밝히는 건 뭐요. 이름을 밝히면 겁을 먹 을 줄 알았나본데 어디 뒷골목에서나 써먹으면 딱 좋을 대사 같구려.” “저, 저, 죽일 놈이 감히!!” 노인의 뒤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우건생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황당해도 이 런 황당한 일이 없었다. 무적수 좌극이 누구던가. 노호문의 장로라는 직함을 떠나 호남성에선 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고수였다. 별다른 무기도 없이 오직 두 팔을 도검(刀劍) 삼아 수 없이 많은 적과 자신에게 도전해 오는 강력한 고수들을 물리치고 지금의 위치에 오른, 청년기에 몇 번의 비무에서 패한 이후 다시는 패배를 모르는 불패(不敗)의 승부사(勝負士)가 바로 그였 다. 짐을 짊어지고 따라온 일꾼들까지 좌극의 명성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좌극을 마치 뒷골목 시정잡배와 동일시 취급하는 것이었으니 이토록 기막 힌 일이 어디 있겠는가. 대부분이 노호문 출신인 장사표국의 표사들은 물론이고 좌극을 따라온 노호문의 무인들은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을 느끼고 당장에라도 공격을 퍼부을 듯 살기를 뿜어댔다. 하나 지금껏 받아본 적이 없는 모욕을 당했으면서도 좌극은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누가 보낸 것이냐?” “제안은 이미 거절한다고 말했소만.” “…….” 두 번의 제안이 끝내 거절당하자 좌극의 눈빛이 싸늘히 식어갔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상대를 눈앞에 두고 지금처럼 많은 말을 해 본적이 없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그랬다. 목숨만 붙어 있으면 듣고자 하는 것은 언제라도 들을 수 있었다. 가장 편하고 손쉬운 방법을 두고 괜시리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런 수고를 하게한 상대에게 대가를 받아낼 때였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2 슬쩍 뒤로 고개를 돌린 좌극이 입술을 모으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바로 그 순간 을지호의 귓가에 초번의 조그마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혈랑(血狼)으로 주군을 시험할 것입니다.” 좌극은 무적수라는 별호 외에 혈랑이라는 별호 또한 지니고 있었다. 늘 두 마리의 늑대를 데리고 다닌다 하여 그리 불리게 된 것인데 그는 자신이 손쓸 가치도 없다고 판단되거나 혹은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직접 훈련시킨 혈랑 으로 상대의 무공을 시험해 보곤 했다. 육건이 을지호를 위해 준비한 두 권의 책자엔 그런 좌극의 특징이 간략하게 기 록되어 있었다. 책의 내용을 암기한 초번은 본격적인 행동에 앞서 그 내용들을 을지호에게 일러두었만 혹시 몰라 또다시 언급 한 것이다. “염려하지 마라. 기억하고 있으니까.” 을지호는 초번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초번의 말대로였다. 좌극의 신호가 있기가 무섭게 무리의 후미에서 두 마리의 혈랑의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그리곤 좌극의 곁에 멈춰서더니 을지호를 향해 이빨을 세우고 으르렁 거렸다. 유난히 붉은 빛이 감도는 털에선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고, 살짝 벌린 입으로 보이는 이빨은 송곳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거기에 무성한 다리의 털로 인해 거의 드러나 있지는 않았지만 예리한 강철이라도 단숨에 찢어발길 정도의 발톱은 또 한 혈랑이 자랑하는 무기였다. “우선 네놈의 실력을 보겠다.” 혈랑이 네 다리를 앞뒤로 교차시켜 가볍게 구부리고 살짝 자세를 낮추는 것으로 공격의 준비를 갖추자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의를 북돋던 좌극이 혈랑의 목덜미를 살짝 치며 소리쳤다. “가라. 놈을 마음껏 요리해 보거라.” 혈랑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해.” 좌극이 다시 한번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좌극의 공격명령이 떨어진 이후에도 혈랑은 처음의 자세에서 조금의 미 동도 없었다. 그저 털을 한껏 곤두세우고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대며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공격을 하라…….” 짜증나는 음성으로 혈랑을 다그치려던 좌극이 짧은 침음성과 함께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껏 살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받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털을 세우고 이빨을 보 이는 것도 약세를 감춰보려고 하는 발악일 뿐, 아래로 처진 꼬리는 지금 혈랑이 겁 을 집어먹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겁을 먹었단 말인가! 혈랑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좌극은 지금껏 그 어떤 상대와 대적을 하더라도 혈랑이 겁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웬만한 고수 정도는 가볍게 제압하고 심지어 백수의 제왕이라는 호랑이를 상대할 때에도 마치 강아지를 데리고 놀 듯 농락하지 않았던가. 그런 혈랑이 공격명령을 내렸음에도 거부할 정도로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좌극이 혈랑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리곤 목뼈가 부러질 정 도로 세게 움켜잡았다. 숨이 막히는 것인지 아니면 목뼈를 움켜쥔 손을 통해 전 해오는 주인의 분노를 느꼈는지 아래로 축 처졌던 혈랑의 꼬리가 수직으로 세워졌다. 좌극이 혈랑의 목에 가했던 힘을 풀고 재차 명령을 내렸다. “가라.” 좌극의 손에서 풀려난 혈랑은 한껏 움츠렸던 몸을 활짝 피며 마치 용수철이 튕 겨나가듯 재빠른 동작으로 도약을 했다. 좌극과 을지호와의 거리는 약 오장 정도였다. 단 한번의 도약으로 그 거리를 좁 혀버린 혈랑은 을지호를 향해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들이댔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강유 등이 을지호의 앞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을지호의 코앞까지 이르렀던 혈랑이 갑자기 급정거를 하여 땅에 내려서더니 뜀 뛰기를 하듯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땅에 바짝 엎드려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저것들이 약을 처먹었나? 왜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어.” 도리어 무안해 진 것은 을지호를 보호한답시고 수선을 핀 강유와 뇌전이었다. 황 당해 하며 저마다 한소리를 한 그들은 혈랑이 어째서 공격을 멈추었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적으로 물러났다. 사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그들뿐만 이 아니라 공격명령을 내린 좌극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를 안다면 오직 한사 람, 을지호 뿐이었다. “크르르릉.” 혈랑이 마치 거대한 적을 만났다는 듯 거칠게 울부짖었다. 바로 그 순간 뭔가가 을지호의 어깨를 살짝 스치며 혈랑을 향해 날아갔다. 을지호는 그 물체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처, 철왕?” 을지호의 바로 옆을 지키다 뒤에서 급작스레 들이닥치는 기척에 기겁을 하며 몸 을 틀던 강유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을지호의 곁을 스쳐간 철왕은 혈랑의 이빨과 견주어도 조금의 손색도 없는, 아니 위력으로 따지자면 상대가 되지 않을 발톱을 앞세우며 혈랑을 노렸다. 혈랑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랜 훈련으로 숙련이 된 듯 좌우로 재 빨리 산개를 하여 철왕의 공격을 피하더니 동시에 몸을 틀어 철왕의 뒤를 노렸다. 그러나 혈랑의 움직임은 철왕의 빠름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공격이 실패하자마 자 공중으로 부상하여 역으로 회전을 한 철왕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크헝!!” 최초 좌측으로 피했던 혈랑이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며 달리던 힘을 이 기지 못하고 그대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육중한 몸이 쓰러지며 내는 소리에 주변의 나무가 흔들릴 정도였다. 단 한번의 공격으로 자신의 몸에 몇 배나 되는 혈랑을 절명시킨 철왕이 혈랑의 머리에 깊숙이 밖아 넣은 발톱을 뺄 생각도 하지 않고 날개를 활짝 핀 자세로 또 다른 혈랑을 노려보았다. 가히 제왕의 풍모였다. 늑대의 특성상 피를 보면 더욱 미쳐 날뛰게 마련이었지만 살아남은 혈랑은 감히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즉시 꼬리를 말더니 좌극에게 도망을 치고 말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혈랑이 애당초 좌극의 공격명령을 어기고 머뭇거린 이유는 을지호 때문이 아니라 한참 떨어진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철왕의 존재 때 문이었다. 혈랑은 본능적으로 철왕의 존재를 눈치챘고 또 그 강함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 겁을 집어먹고 감히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주인의 분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싸 우게 되었지만 단 한번의 충돌이 혈랑으로 하여금 생존의 본능을 일깨우게 한 것이었다. 괴사(怪事)였다. 혈랑은 좌극 못지않게 널리 알려진 영물이었다. 그런 혈랑이 오분지 일도 되지 않는 덩치의 철왕에게 철저하게 당한 것이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든 사 람들이 저마다 입을 벌리고 눈앞에 벌어진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누구보 다 충격이 큰 사람은 혈랑은 훈련시키고 자랑스러워했던 좌극 본인이었다. “멍청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좌극은 다리를 들어 꼬리를 말고 도망쳐온 혈랑의 머리를 그대로 밟아버렸다. 혈랑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박살나 목숨을 잃고 말 았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혈랑을 좌극이 죽인 것이 못마땅했는지 신경질 적으로 발톱 을 뺀 철왕이 좌극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를 때였다. “까불지 말고 돌아와.” 을지호가 철왕을 불러 세웠다. 철왕은 그 즉시 방향을 틀더니 을지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미, 믿어야 합니까?” 초번이 부드러운 손길로 철왕을 쓰다듬는 을지호에게 물었다. “뭘?” “철왕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 “강한 것도 강한 것이지만 저놈들이 너무 약한 것 아냐?” 뇌전이 재빨리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자 초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혈랑은 웬만한 고수도 간단히 상대한다고 소문난 무서운 짐승이야. 무적수라는 별호를 놔두고 혈랑이라는 별호로 더 잘 알려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 흠, 내가 보기엔 그저 미친 강아지처럼 보였는데.” 뇌전이 덩치에 비해 너무도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혈랑을 한심해 하며 말했다. “쯧쯧, 철왕에게 그렇게 당한 주제에 무슨 말이 그리 많아? 내 누누이 말했잖아. 이놈 꽤나 강하다고. 호랑이 중의 호랑이라는 장백산 대호(大虎)도 철왕에겐 꼬 리를 말고 도망간다. 하물며 저깟 늑대 두 마리야 문제도 아니지. 괜시리 쓸데없 는 소리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마. 그래도 제 딴에는 뭔가를 보여줬다고 기분 좋아 하는데 그런 식으로 딴죽을 걸면 뒤에 너만 괴롭다.” 을지호의 말마따나 슬그머니 뇌전을 노려보는 철왕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 제야 자신이 누구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 뇌전이 황급히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자, 어쨌든 성난 주인이 혈랑의 앙갚음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 같으니 철왕의 주 인 된 입장에서 나도 상대를 해 주어야겠지.” 어깨를 움찔하는 것으로 철왕을 날려보낸 을지호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 는 좌극을 상대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3 “하하, 아무리 화가 나기로 죄 없는… 헛!”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던 을지호는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좌극의 신형 에 깜짝 놀라며 재빨리 몸을 틀었다. 좌극의 우수(右手)가 을지호의 머리카락을 쓸며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빗나간 공격이 아쉬울 만도 하건만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몸을 돌리는 좌극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적의를 가진 상대와의 싸움이라지만 여러 인원이 함께 어울려 싸우는 혼 전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예를 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나이, 연배가 높거나 스스로 생각해 강자라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선수(先手)를 양보하는 여유도 보였다. 그러나 철왕이 그랬든 아니면 분을 삭이지 못해 스스로 그랬든 너무도 어이없게 혈랑을 잃고만 좌극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한없이 건방지고 오만하기만 을지호를 단숨에 해치워 끓어오르는 노화를 조금이나마 잠재우겠다는 열망만이 자 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후~.” 좌극이 체면도 차리지 않고 그토록 전격적으로 공격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감 탄 아닌 감탄을 한 을지호가 풍혼을 꺼내들며 자세를 잡았다. 받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는 것이 도리였고 을지호는 누구보다 그런 원칙을 철저 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제법 빠른 공격이었소이다. 그럼 이번엔 내 공격을 받아보시구려.” 짧은 기합성과 함께 몸을 띄운 을지호는 조금 전 좌극이 보여주었던 빠름과 견 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는 몸놀림으로 좌극에게 짓쳐들었다. 빠른 몸놀림과는 대 조적으로 우아하게 반원을 그린 풍혼이 탐색이라도 하듯 느릿느릿하게 좌극을 노렸다. 하지만 검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이미 검에서 발출된 한줄기 기운이 좌극 의 요혈을 위협했다. 을지호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던 좌극도 한껏 기 운을 끌어올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좌극이 양팔을 크게 휘저었다. 파파팡. 허공에서 을지호의 검기와 그것을 막기 위해 좌극이 발출한 기운이 충돌하면 상 당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그 굉음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좌극의 우측 옆구리를 노리던 풍혼과 좌극의 손이 부딪쳤다. 엄밀히 말하자면 손이 아니라 넉넉한 팔 소매였는데 당연히 잘려나가리라는 모든 이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철같이 단단해진 팔소매는 풍혼을 너무나 쉽게 막아냈다. “훗, 대단하구려.” 무기도 없이, 단지 팔소매에 기를 불어넣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좌극의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한 을지호가 한걸음 물러나며 탄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감탄할 여 유도 없었다. 수세에 있던 좌극이 곧바로 공세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단 두 걸음으로 을지호를 따라붙은 좌극의 주먹을 내뻗었다. 그러자 그와 을지호 의 사이에 순식간에 수십, 수백의 권형(拳形)이 만들어졌다. “헛, 벌써 유성권(流星拳)을 쓰시는가!” 초조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우건생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유성권, 무적수라는 지금의 명성을 누리도록 만들어준 좌극의 독문무공(獨門武 功)이었다. 주먹질 한번에 모든 생명체를 말살한다는 필살의 무공으로 그 살상력이 너무나 뛰어나 좌극조차도 일생의 호적수를 만나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쓰지 않 는 다는 무공이 바로 유성권이었다. “저놈이 그토록 강하단 말인가. 사부께서 유성권을 쓰실 정도로?” 싸움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성권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 가? 좌극이 을지호를 일생일대의 적수로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단지 제법 실력이 있는 도적으로만 여겼던 우건생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대단한데.’ 을지호가 침을 꿀꺽 삼키며 풍혼을 끌어 올렸다. 초번으로부터 다른 것은 몰라도 유성권에 대해서만큼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저 귓등으로만 지나쳤었다. 헌데 직접 보니 ‘과연’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지닌 것이 아닌가. 허(虛)와 실(實)이 교묘하게 교차되어 도저히 무엇이 허고 실인지 알아보기 힘든 데다가 허공을 수놓은 수백의 주먹 중 분명 실체는 오직 하나일 것이건만 저마 다에 힘이 실려 있는지 타격을 입히기는 매한가지였다. ‘좋지 않아.’ 직접 부딪치지 않고 연신 뒷걸음질치면서 주먹의 사정권을 벗어나려 하였지만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쫓아오는 주먹을 보며 을지호는 더 이상 피하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알았다. “모르겠으면 구별하지 않으면 될 것 아냐!!” 걸음을 멈춘 을지호가 냅다 소리를 지르며 풍혼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허와 실을 구별할 수 없다면 그 모든 것을 실체라 여기고 막아내면 그만이었다. 물론 수백의 주먹을 단숨에 막아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지만 을지호게 그다지 문제될 것은 아니었다. 꽈꽈꽈꽝. 두 기운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며 일으키는 충격파는 상당히 요란스러웠다. 충돌 의 힘을 이기지 못해 둘 사이의 땅거죽이 갈라지고 지면에 있던 흙과 자갈들이 일제히 비산을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들 하나하나가 매서운 암기가 될 수 있었지 만 다행히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으음.” 채 가라앉지 않은 먼지 사이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단 한번의 공격으 로 끝내겠다고 혼신의 힘을 쏟았던 좌극이 비틀거리며 내뱉은 신음성이었다. 어 느새 그의 입가엔 한줄기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좌극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 사람들의 눈이 상대인 을지호에게 향해졌 다. 좌극이 내상을 입고 비틀거릴 정도라면 상대는 그 이상의 대가를 치렀을 것,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먼지 사이로 드러난 을지호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충격 을 이기지 못했는지 입고 있던 옷이 흉하게 찢어져 버렸고 고개를 푹 수그리며 한 자루 검에 의해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신형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했다. “와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결과를 지켜보던 장사표국과 은하상회의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한껏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들이었다. 이 와는 반대로 강유 등은 기절할 듯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흠칫하더니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귓가에 을지호의 전음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쉿, 요란 떨지 말고 가만히 있어. 헛고생 하게 만들지 말고.] 행여 일이 망칠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강유 등을 안심시킨 을지호는 연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좌극을 노려보았다. ‘흥,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그런 암수(暗手)를 숨겨놓고 있었다니.’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유성권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공격이 숨 어 있었다. 강맹하고도 현란한 공격으로 눈을 속이고 치명적인 독을 은밀히 풀면서 상대를 중독 시켜 무력화시는 것이었다. 을지호도 직접 부딪치고 나서야 알아차 릴 정도였으니 좌극이 얼마나 신중히 하독(下毒)을 하는지 짐작할만했는데 특히 그 독의 신랄함은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에 이른 을지호도 치를 떨 정도였다. ‘이 따위 비겁한 잔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했을까.’ 무적수 좌극이라는 명성을 얻기까지 정당하지도 않은 암수에 희생된 사람이 얼 마일까를 생각하자 당장에라도 물고를 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으으으.” 간신히 고개를 쳐든 을지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했지만 주변의 사람들에 게 들리는 소리란 그저 고통의 신음소리뿐이었다. 물론 좌극에게만은 예외였다. [고작 한다는 짓이 그런 비겁한 짓이오?] 갑자기 들려온 전음에 깜짝 놀란 좌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을지호를 쳐 다보았다. [왜? 멀쩡해서 이상한 모양이외다. 그럼 내가 그따위 독에 당할 줄 알았소이까?] 비틀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모습과는 달리 좌극에 들려온 을지호의 말은 힘에 찬 그러면서도 한껏 조롱이 담긴 음성이었다. “헛소리 늘어놓지 말고 지옥으로 꺼져라.”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좌극이 입에 거품을 물며 손을 휘저었다. 차 라척결(爬羅剔決)이라는 초식으로 맹수가 먹이를 낚아채는 모습처럼 손가락과 손톱을 세워 갈고리의 형상을 만든 좌극은 을지호의 몸을 단숨에 찢어버리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을지호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서 있었다. 최소한 사람들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을지호의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을지호는 그의 머리와 목을 노리며 날아오는 좌극의 손이 거의 닿을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행동을 보며 좌극은 지금껏 을지호가 보여주었던 말과 행 동이 모두 다 허풍이었다고 느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만히 서 있던, 모두의 눈에 꼼짝 못하고 당할 것이라 여겼던 을지호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동시에 힘없이 늘어뜨렸던 풍혼에서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그리고 좌극이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사람들이 처참하게 쓰러질 을지호의 모습을 떠 올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풍혼은 좌극의 단전을 뚫고 등을 꿰뚫어버렸다. “커, 커, 컥.” 찢어질 듯 부릅뜬 눈, 고통에 절로 벌어진 입, 힘없이 늘어진 두 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을지호에게 안겨 천천히 무너지고 있던 좌극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턱을 떨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소. 후~ 당신이 독을 사용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싸웠다 면 그만한 대우를 해 주었을 것이오. 물론 결과는 변하지 않겠지만 말이오.] 좌극의 신형과 함께 무너지던 을지호가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절명 을 한 좌극은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뇌리에 떠올린 것은 좌 극이 더할 나위 없이 매서운 공격으로 을지호를 끝장내려 했다는 것과 이미 한 번의 충돌로 모든 힘을 잃은 을지호가 우두커니 서서 그 공격을 맞이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을지호의 죽음으로 귀결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한 결과는 철저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한데 엉켜 쓰러진 좌극과 을지호,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좌극의 등을 뚫 고 튀어나온 한 자루의 검이었다. “저, 저…….” “사, 사부님…….” 악몽과 같은 일이었다. 믿을 수 없었기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에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빠르게 식어가는 좌극의 몸을 옆으로 누이며 을지호가 일어나자 믿기지 않았던 악몽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사위를 휘감았다. 잠깐의 침묵은 곧 이어 닥칠 폭풍의 전주곡(前奏曲)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네놈이 감히 사부님을!” “죽여랏!!” 우건생을 필두로 분노에 휩싸인 노호문의 무인들과 장사표국의 표사들이 을지호 에게 달려들었다. 초번과 뇌전이 검을 휘두르며 을지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강유만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천천히 검을 회수하고 있는 을지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 무심지검(無心之劍)이었어.’ 배우기는 했어도 지금껏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을지호의 충고로 결국 포기하고 만 무공, 확실치는 않아도 분명 무심지검이었다. ‘저 정도 일 줄이야.’ 좌극의 공격이 을지호의 몸에 적중하려는 순간, 강유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을지호의 실력을 믿고 있었지만 좌극의 공격은 그런 믿음을 의심 하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고 빨랐다. 그런데 그런 공격을 단숨에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무공이라니……. “한줄기 빛과 같았어. 내가 본 것이 틀리지 않다면.” 꽉 쥔 주먹에 땀이 흥건히 고인 것을 의식도 하지 못하고 중얼거린 강유는 초목 을 울리는 초번과 뇌전의 함성소리에 겨우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후, 아무튼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좌우로 머리를 흔든 강유는 언젠가 무심지검을 능가하는 쾌 검을 익히겠다는 열망을 가슴 깊숙한 곳에 잠시 숨겨두었다. 그리곤 그 역시 싸 움에 끼어들기 위해 검을 치켜세웠다. “간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4 초번과 뇌전에 이어 강유마저 싸움에 끼어들자 장내는 극도의 혼란에 사로잡혔 다. 싸움은 서로의 우열을 조금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치열했다. 좌극을 잃은 노호문의 무인들과 장사표국의 표사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도외시하며 집요 하게 을지호를 노렸고 은하상단에서 고용한 무인들 역시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포위공격을 했다. 하지만 초번과 뇌전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을지호의 지도 속에서 나날이 무공이 늘어가던 그들은 자신들의 수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하면서도 조금도 밀 리지 않았다. 그들은 산길이라는 지형적 특수성, 싸움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그리 넓지 않기에 많은 수를 상대하기가 몹시 용이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적절히 방어를 했다. 특히 강유가 전면에 뛰어들고 상대적으로 개개인의 무공이 고강했던 노호문의 무인들 을 상대하자 한결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싸움은 별다른 변화 없이 그렇게 일각이란 시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싸움의 양상과는 달리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치는 사람은 그 다지 많지 않았다. 이는 가급적 살상을 하지 말라는 을지호의 당부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노호문의 무인들과 장사표국의 표사들이 제법 효과적인 합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싸움에 있어 결정적인 우위를 차지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시간이 가고 기력이 떨어질수록 사정을 봐주면서 싸우기가 힘들어진 강 유와 초번 등의 손속이 사나워지자 노호문이나 장사표국의 표사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부상자들이 생겨났다. 하나 둘 목숨을 잃는 자도 생기기 시작했다. 을지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군.” 싸움과는 상관없이 마치 몸을 회복시키는 척 지그시 눈을 감고 전황을 살피던 을지호는 자꾸만 쓰러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두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더 이상 쓸데없이 인명이 살상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좌우로 크 게 돌리고 한쪽 어깨를 주무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을지호가 우선적으로 노린 사람들은 노호문의 무인들이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 았지만 상대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기에 그들을 제압 하는 것이 최대한 빨리 싸 움을 끝내는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큭!”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던 사내 한명이 입을 쩍 벌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언 제 접근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자신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드는 을지호를 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조, 조심해라.” 그렇지 않아도 강유 한명을 어쩌지 못해 고심하던 노호문의 무인들은 을지호의 등장에 움찔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형님.” 처음과는 달리 계속되는 합공에 힘에 부쳐하던 강유가 반기며 소리쳤다. “애썼다. 이제 이들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너는 저쪽이나 가서 도와줘라.” 을지호가 가리킨 곳은 표사들을 상대로 비교적 편한 싸움을 하는 곳, 강유는 토 를 달지 않고 몸을 날렸다. 강유가 뒤로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을지호가 풍혼을 비스듬히 세우며 턱을 치켜 들었다.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노호문의 무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는 수밖에.” 이미 끝내기로 한 싸움이었다. 결심을 굳힌 을지호는 상대의 반응이 어떻든 상관 하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호문의 무인들에게 육박한 을지호가 풍혼을 휘두르며 공격을 시작했다. “커흑!” 가장 앞서 있다 얼떨결에 검을 휘두른 사내는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 끼며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아랫배를 파고드는 묵직한 기운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사내의 배 깊숙이 발을 쑤셔 넣었던 을지호는 쓰러지는 사내의 어깨를 디딤돌 삼아 재차 도약을 하고 다음 상대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주, 죽여랏!” “장로님의 원수를 갚자!!” 이를 악문 노호문의 무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하려했다. 강유를 상대할 때 와 마찬가지로 을지호를 포위하여 공격하고자 좌우로 크게 벌리며 하나의 원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단지 그들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애당초 을지호는 강유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왼쪽에 있는가 싶으면 어느새 오른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미 그들의 배후에 있 었다. 포위공격을 하려 했던 노호문의 무인들이 오히려 을지호 한사람에 포위를 당 한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을지호가 한번 지나간 곳에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검이란 검은 모조리 두 동강이 나거나 힘없이 튕겨져 나갔고 저마다 어깨며, 가슴이며, 배 등을 붙잡고 나뒹굴었다. 가히 추풍낙엽(秋風落葉)이라는 말이 적절할 만큼 일방적인 싸움 이었다. “끝났군.” 마지막 사내의 정강이를 걷어차 온 산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게 만든 을지호가 신형을 멈추고 사위를 훑어보았다. 그의 앞에 대략 십여 명의 노호문의 무인들이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반각, 그다지 힘들 것도 없었는지 을지호의 이마엔 땀 한 방울 흘 러내리지 않았다. “흠…….” 무심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을지호가 고개를 돌리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치열하게 다투는 함성 소리, 비명, 병장기가 부딪치며 내는 충돌음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파공음이 어둠만이 존재하는 숲에서 쏟아져 나오 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휘리리릭. 파공음이 끝나는 곳에선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컥!” 비명을 지르는 그들의 몸에 박힌 것은 화살이었다. “아, 암습이다.” “화살이다. 화살을 조심해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겹게 싸움을 하고 있던 장사표국의 표사들과 은하상단의 호위무사들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시작됐군.” 어느새 검을 물린 강유 등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교환했 다. 쉬이이익. 화살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수십 명의 궁수가 날리는 화살인 듯 장내엔 쏟아지 는 화살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찌나 많은 화살이 날아오는지 그 소리가 온 산을 뒤덮었다. 화살을 피하기 위해 악을 쓰고 화살에 맞으며 내뱉는 비명도 모두 묻혀버리고 말았다. “으으으.” 우건생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믿고 있던 사부는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고 노호 문의 무인들 또한 크게 당해 제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 난데없이 날아오는 화살, 어디서 날아오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화살을 날리는지 끊 임없이 쏟아지는 화살에 성한 표사들이 없었다. “윽.”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우건생의 허벅지에 화살 하나가 날아와 박혔다. 뼈를 깎는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몰살’ 이라는 단어가 떠올 랐다. ‘아, 안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훗날을 기약하는 것도 목숨이 붙어 있는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퇴, 퇴각하라.” 하지만 화살 소리에 묻혀 그의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퇴각하라. 도망치란 말이다!!” 목에 핏줄이 세워가며 소리치자 그때야 몇몇 표사들이 우건생의 음성을 알아듣 고 함께 소리쳤다. “후퇴다.” “모두 도망쳐.” 그렇지 않아도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표사들과 은하상단의 호위무 사들은 퇴각이란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빼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위급한 와중에도 움직일 수 있는 동료들을 버리는 비정함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화살에 맞은 사람들 또한 대체적으로 급소를 비껴 맞았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도망을 칠 수 있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자 당황한 사람은 은하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허운창이었다. “우 표두!” 허운창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허겁지겁 움직이고 있는 우건생의 팔목을 붙잡 았다. “이렇게 도망을 치면 어쩌란 말이오?” 정신없이 퇴각하는 표사들을 둘러보는 허운창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으니…….” “그렇다고 이리 물러나면 나나 우리 상단의 사람들, 그리고 이 많은 물건은 어쩌 란 말이오?” “포기하십시오. 이대로 있다간 몰살을 당합니다.” “포기라니요? 어찌 포기를 하란 말이오.” 허운창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깟 물건 때문에 몰살을 당할 순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저들도 어서 대피를 시켜야 합니다.” 우건생이 다급히 말하며 가리키는 이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일꾼들이었다. “그깟 물건이라니!! 지금껏 뭐라 장담했소? 실패란 없을 것이라 하지 않았소. 염 려하지 말라고, 모든 것을 맡겨 달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우건생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면목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을 노호 문에서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 치욕은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지금은 목숨을 보 존할 때입니다.” “그럴 수 없소. 물건을 포기 할 순 없소이다.” “허면 정녕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겠단 말씀입니까?” 답답했는지 우건생의 목청이 커졌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나는 우리 식구들의 목숨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 다. 그리고 저들 또한.” 허운창이 뭐라 하기도 전에 몸을 돌린 우건생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일꾼들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짐을 풀은 일꾼들이 일제히 뛰기 시작했고 우건생 역시 그 들과 한데 뒤섞여 서둘러 퇴각을 했다. “…….” 힘겹게 도망치는 표사들, 호위무사, 일꾼들을 지켜보는 허운창은 아무런 말도 하 지 못했다. 그저 멍한 눈으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으로 싸움은 끝이 났다. 하늘을 뒤덮었던 화살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고 산에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감 이 다시 찾아들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쓰러진 부상자들의 입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널브러진 병장기들, 고슴도치의 가시마냥 박혀 있는 화살이 아니라면 조금 전 그 토록 험악한 싸움이 벌어진 곳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부상자들을 한데 모아라. 가능하면 치료도 해주고.] 간단히 명령을 내린 을지호가 악몽이라면 이쯤에서 제발 깨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허운창에게 다가갔다. “배짱이 좋구려. 다들 제 목숨 살리기 위해 도망을 쳤는데 어째서 그러지 않았 소? 저들도 그렇고.” 두려운 듯 몸을 움츠린 허운창이 을지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그곳엔 모조리 도망친 일꾼들을 대신해 몇몇 나이든 상인들이 힘겹게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렇지. 상인에게 물건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지…….” 조용히 읊조리는 허청운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한 목 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홀로 남겨진 줄 알았건만 일행이, 자신과 같은 생각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데에서 오는 감격 때문이었다. “나는 은하상회의 허운창이라 하오.” 허탈함에 빠져있던 허운창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굽혀졌 던 몸도 어느새 당당히 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흥정에 흥하고 망하는 장사 꾼의 기질이 살아나고 있었다. “묻지 않았소.” 을지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허운창은 물러서지 않았다. “흥정을 하고 싶소.” “흥정?” “나와 저 사람들의 목숨을 보장해 주시오.” “그리고?” “이 물건들 또한 돌려주시오. 우리에겐 몹시 귀한 것이오.” “호~.” 을지호가 회가 동한다는 듯 탐욕스런 눈길로 물건들을 쓸어보았다. “물건이 지닌 가치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넘기기로 약속된 물건이 라 중한 것이오. 사실상 그 값은 크게 나가지 않소.” “그래서?” “나와 저들, 물건을 무사히 돌려보내 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소. 우리가 얻는 이윤보다 최소한 열배는 더 쳐서 드리리다.” “열배라…….” 을지호는 그다지 탐탁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여 협상이 결렬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허운창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천 냥이면 되겠소?” “천 냥? 고작 은자 천 냥 벌자고 이 고생을…….” “금화(金貨)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깜짝 놀라 쳐다보는 을지호를 향해 허운창이 회심의 미 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금화 천 냥을 지불하겠소. 물론 뒤탈이 없다는 것도 보장하겠소.” 금화 천 냥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돈이었다. 하지만 허운창에게 아니, 은 하상회에 있어 지금 그들이 운반하는 물건은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은하상회가 지금껏 호남성 최고의 상회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장사 를 잘 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관부와 거의 독점적인 거래를 하고 있다는데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관과 연계되어 있으니 그들의 부를 노리며 달려드는 무리들 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었고 여타 다른 상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은연중 우위 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은하상회가 관과 독점적으로 거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장사표국과 독점적 거래 관계에 있었다. 드물기는 하였지만 은하상회의 상단이 직접 물건을 운반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거의 모든 물건의 이동을 맡기고 있었다. 물론 상단이 직접 운반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도 호위를 맡는 일 또한 장사표국의 몫이었다. 그런데 최근 몹시 난처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그렇게 믿고 있었던 장사표국의 표물이 최근 번번이 털려버린 것이었다. 털린 물건에 대해선 책임을 통감한 장사 표국이 모조리 배상을 했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 관에 들어가야 할 물건들이 한 참이나 뒤로 밀리거나 급히 다른 물건으로 대체를 하느라 그 질이 떨어져 신용에 문제가 생겼다는데 있었다.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천 냥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한번 무너진 신용을 회복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허 운창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물건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물건을 지켜야만 했다. 만약 지금 운반하고 있는, 너무나도 큰 약점을 잡힐 것 같아 자세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모레 중으로 관으로 들어갈 물건마저 빼앗겨 날짜가 늦춰지거나 또다시 질 낮은 물건으로 대체된다면 은하상회로서는 돌이킬 수 없 는 치명타를 맞게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껏 누려왔던 독점적 지위마저 위태 롭게 될 것이다. 그랬기에 허운창이 천 냥이라는 거금을 서슴없이 내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천 냥이라… 꽤 큰 돈이로군.” “부족하다면 약간은 더 준비할 수도 있소. 그러나 천 냥이 내가 내걸 수 있는 최 대한이오. 그 이상은 나도 어쩔 수 없소. 설사 목숨을 빼앗긴다 해도.” 급하다고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 었다. 을지호의 태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자 마음속으론 다급해 하면서도 허운 창은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허운창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을지호는 전혀 엉뚱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해웅이 놈은 언제 오는 거냐?] [이미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럼 뭐를 망설여. 빨리 나타나라고 해. 이 짓도 이제 지겹다.] [알겠습니다.] 슬그머니 사라지는 초번에게 곁눈질을 주던 을지호의 표정에 급격한 변화가 나 타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뒤탈이 없다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 “조, 조금의 거짓도 없소. 나는 신용을 먹고 사는 장사치요.” 서서히 붉은 빛으로 바뀌는 을지호의 눈 동자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허운창의 목 소리가 다시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믿을 수 없다는 거요.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 장사꾼 말을 믿을까? 안 그러냐?” “맡습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놈이 바로 장사꾼들이지요. 장사꾼의 말을 믿 느니 처녀가 혼자 애를 뱄다는 말이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더 이상 지껄이는 말을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에 목을 쳐버리고 물건을 챙기지요.” 뇌전이 험악한 인상을 들이대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 어떻소? 나나 수하들의 생각은 당신하 고 다른데.” “미, 믿어주시오. 반드시 지킬 것이오.” “안 지켜도 되오. 그냥 조용히 입만 다물어 주면 되는 것이라오.” 을지호는 직접 손을 쓰기도 귀찮다는 듯 뇌전을 향해 턱짓을 했다. “흐흐흐.” 뇌전이 괴소를 터뜨리며 허운창에게 다가왔다. “저, 정말 미, 믿… 컥!” 뭐라 말을 하려던 허운창은 뇌전의 발길질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나뒹굴 었다. “시끄럽게 쫑알대지 말고 그냥 곱게 뒈지라고!” 허운창의 목에 지그시 칼을 들이댔다가 뗀 뇌전은 사형수들의 목을 치는 망나니 처럼 허공에서 칼을 휘휘 돌리더니 산이 떠나가라 기합을 내질렀다. “타핫!!”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5 절망스런 눈초리로 뇌전과 을지호를 번갈아 쳐다보던 허운창은 달빛에 번쩍이는 칼날이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보곤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크크, 놀래기는.’ 처음부터 허운창을 어찌 할 생각이 없었던 뇌전은 그의 목에서 불과 몇 치의 공 간을 남기고 칼을 멈추었다. 그리곤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해웅을 향해 소리쳤다. “웬 놈이냐!!” ‘어이구! 하는 짓들 하고는. 차라리 시간을 좀더 끌던지.’ 뇌전을 보는 을지호의 인상이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다행히 복면을 쓰고 있어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제때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늦장을 부린 해웅과 미리부터 설치다가 어설프게 칼을 멈춘 뇌전의 서투른 행동에 절로 복장 이 터졌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허운창은 갑작스레 들려온 뇌전의 호통에 슬며시 눈을 뜨 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에 곰이, 아니 곰이라 말해도 누구나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거구의 괴인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몸에 비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접근한 괴인이 자신을 위협 하던 악도를 단 일수에 몰아붙이고 자신의 앞을 재빨리 막아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눈앞에 적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건만 괴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등을 보 이며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그렇소만…….” 허운창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헌데… 뉘, 뉘신지?” 해웅의 손에 이끌려 몸을 일으킨 허운창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해웅이라 합니다.” 해웅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허운창 또한 얼떨결에 마주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허운창이라고 하오만…….”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된 것입니까? 저 정도의 물건이면 표사들이나 아니면 호위 무사들이 꽤나 동원됐을 것 같은데 모두 당한 것입니까? 쓰러진 사람은 몇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모두… 도망치고 말았소이다.” 허운창이 쓴 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아니, 싸우지도 않고 도망을 쳤단 말입니까?” 해웅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저들이 너무 강해서…….”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한낱 도적놈들입니다. 고작 몇 놈을 당해내지 못하고 도 망을 쳤단 말입니까? 또한 적이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물건을 운반하는 표사라면 목숨을 내걸고 표물을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어찌 그만한 각오도 없는 자들 이 표사라 자처한단 말입니까!!” 해웅이 당치도 않다는 듯 화를 내며 소리쳤다. ‘옳지. 제법 그럴듯한 말을 해대는구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해웅과 허운창의 대화를 지켜보던 을지호가 쾌재를 불렀다.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그런 걱정이 괜한 기우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해웅은 너무도 자연스런 연기를 하고 있었다. “허니 어쩌겠습니까?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우리의 불찰이지요.” 운반중인 물건을 버리고 도주한 장사표국의 표사들과 거액의 돈을 들여 고용한 호위무사들의 행동에 누구보다 실망한 사람은 허운창 본인이었다. 더구나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었다지만 자신을 헌신짝 버리고 도주를 한 우건생에겐 실망을 넘 어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후~ 다 내 잘못입니다. 사람을 잘못 본 내 잘못.” 허운창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록 미욱하기는 하나 힘을 내보겠습니다.” 해웅이 당당히 어깨를 피고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듬 직한지 허운창의 가슴에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다. “놀고들 있다.” 간신히 되살아나고 있던 불씨를 단숨에 짓밟아 버리는 살기 띤 음성, 허운창이 찔끔하여 몸을 사리고 해웅의 고개가 무서운 속도로 돌려졌다. “어이, 해웅인지 지랄인지 하는 놈. 그래, 네놈 말이다.” 뇌전이 고개를 돌리는 해웅을 향해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고개 를 꺾어 돌을 피한 해웅의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뇌전을 노려봤다. “입이 상당히 걸군.” “대체 뭐하는 놈인데 감히 이 어르신의 행차를 방해하는 것이냐?” “나는 운한표국(雲漢?局)의 해웅이라 한다.” “운.한.표.국? 그딴 표국도 있었냐? 어쨌든 표국 운운하는 것을 보니 네놈도 표 사 나부랭이쯤 되는 모양인데 오냐 어디 한번 뜨거운 맛 좀 보거라.” 뇌전이 해웅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초번 또한 무기를 세우고 조용히 접 근을 시작했다. “잠시 피하시지요.” “괘, 괜찮겠습니까?” 황급히 뒷걸음을 치는 허운창이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러자 뇌전 등에게 눈을 떼 지 않고 있던 해웅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적놈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 음성이었다. 허운창은 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곰 사냥을 해보겠구나. 어이구, 덩치도 커다란 것이 웅담(熊膽)한번 실하겠다. 이 어르신께서 즐거운 마음으로 접수토록 해주지.” 초번과 시선을 교환하던 뇌전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야.” 해웅은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덩치에 손에 침을 퉤퉤 뱉으며 도끼를 꽉 움켜잡 았다. 남궁세가에 머무는 동안 새롭게 마련한 도끼로 그의 키만큼이나 길고 길이의 반 이 도끼날로 되어 있는, 슬쩍 보기만 해도 얼른 고개를 돌려버릴 만큼 무시무시한 거부(巨斧)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로구나.” “그런 하룻강아지를 네놈이 본적이 없는 게지.” “닥쳐랏!” 충분히 분위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힘찬 기합과 함께 뛰어오른 뇌전이 해웅 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해웅이 도끼를 옆으로 들고 침착하게 공격을 막 아냈다. 하지만 뇌전의 공격은 해웅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것이고 진짜 공격은 어느새 뒤로 돌아간 초번에 의해 전개되었다. “흡.” 다급히 숨을 들이킨 해웅이 황급히 도끼를 내려 정강이를 노리며 밀려오는 검을 쳐냈다. 챙. 해웅의 도끼에 맞부딪친 초번의 검은 마치 망치로 거대한 범종(梵鐘)을 친 듯 요 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날아갔다.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었음에도 해웅의 어마어 마한 힘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뒈져랏!”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뇌전이 황당해 하며 급하게 도끼를 움직이느라 중심이 다소 흐트러진 해웅의 틈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도끼를 들어 검을 막을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해웅은 그대로 팔을 돌리며 팔꿈 치를 검에 들이댔다. “아!” 초보한 마음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허운창의 입에서 안타까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연이은 공격을 잘 막아내는 듯 보였지만 옆구리로 빠르게 파고드는 검을 막지 못해 결국 팔이 잘리고 말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당연히 잘렸어야 할 팔이 멀쩡한 것이었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었다. 팔이 잘리기는커녕 도리어 팔에 부딪친 검이 두 동강이 난 것이 아닌가.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어!” 졸지에 검을 잃은 초번과 뇌전이 황당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괜, 괜찮습니까?” 그래도 걱정이 됐는지 허운창이 근심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해웅은 입을 여는 대신 팔을 한번 돌리는 것으로 물음에 답했다. 짝짝짝. 난데없는 박수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을지호가 친 박수소리였다. 박수소리를 따라 해웅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러자 박수를 멈춘 을지호가 해웅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덩치가 예사롭지 않더니 제법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어.” 을지호가 검집에 넣었던 풍혼을 다시 꺼내 들었다. “아쉽군. 너 같은 실력자를 베어야 한다는 것이.” “누가 베어질 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고.” 해웅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런 자심감도 맘에 드는구나. 그런데 어쩌지? 우리에겐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 아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풍혼이 허공을 갈랐다. 검이 도착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기운이 해웅의 전신을 압박했다. 해웅도 을지호의 공격에 맞서 육중한 도끼를 휘 둘렀다. “하앗!” 을지호는 해웅의 도끼가 검에 부딪쳐 오는 순간 재빨리 자세를 바꾸고 검을 틀 더니 해웅의 약점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 빠르기가 초번이나 뇌전의 공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해웅의 가슴이 을지호의 검에 완벽하게 노 출되었다. “끝이다.” 그러나 그런 을지호의 장담과는 달리 풍혼은 해웅의 가슴을 베지 못했다. 베고 지난 것은 그저 몸에 걸치고 있는 옷뿐 그 안의 피부엔 조금의 상처도 나지 않 았다. “허~ 과연 단단하구나.” 짐짓 감탄을 한 을지호가 힐끗 시선을 던져 허운창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전만 해도 죽을상이었던 허운창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좋아, 제대로 되고 있군.’ 이쯤에서 해웅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을지호는 해웅에게 은 밀히 전음을 보냈다. [검기를 쓰겠다. 조심해라.] 전음을 들은 해웅이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알아들었다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을지호가 풍혼을 치켜들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쏟아져 나 왔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이는 검을 따라 희뿌연 무엇인가가 생성되더니 해웅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폭사되었다. “저, 저것은!!” 허운창의 경악성이 장내에 울렸다. 아무리 식견이 짧고 무공에 문외한인 그도 지 금 을지호의 공격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강호를 횡행(橫行 )하는 무림의 고수들만이 쓴다는 바로 그 무공, 검기였다. 그리고 그에게 검기에 대해 말해준 사람은 그것을 절대로 막지 못할 최강의 무공이라 하지 않았던가. 생명 줄이 끊어지는 것을 느낀 허운창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검기를 대하는 해웅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이를 악물고 그물처럼 좁혀오는 검기에 대항에 도끼를 휘두를 뿐이었다. 꽈꽈광. 요란한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렸다. 그 울림이 어느 정도 가라앉 을 때쯤 두 눈을 감았던 허운창이 산산이 바스러졌을 해웅의 최후를 떠올리며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또 한번의 기적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쓰러졌어야 할, 사지가 잘리고 형체도 없이 뭉개졌어야 할 해웅이 너무도 멀쩡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비록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넝마가 되어 버렸고 온 몸을 실낱같은 상처들이 뒤덮어 조금씩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해웅은 너무도 당당 히 맞서고 있었다. “실로 괴물 같은 놈이로다. 좋다. 어디 네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을지호의 얼굴에 이내 싸늘한 살기가 뒤덮였다. [조금 더 강하게 가겠다.] 재빨리 전음을 보낸 을지호가 풍혼에 일성의 힘을 더 보탰다. 비록 일성이었지만 검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젠장, 이러다 잘못 되는 것 아닌가 몰라.’ 해웅은 벌써부터 전신을 압박해 오는 기운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비단 해웅만 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유 등도 을지호가 그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다들 걱정스런 눈으로 해웅을 지켜보았다. 을지호의 공격은 해웅이 감히 막고 자시고 할 성질이 아니었다. 그저 온 몸으로 검기를 환영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풍혼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해웅의 전신을 강타했다. 꽈꽈꽈꽈꽝!! 또다시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크억!!” 비명을 내지른 해웅의 거구가 허공으로 붕 떠서 삼장이나 뒤로 날아갔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허운창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색되었다. 그러나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처박힌 해웅은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한 걸음씩 을지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지, 지독한 놈. 혼신의 힘을 다했건만… 컥!!” 질린 눈으로 해웅을 응시하던 을지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입에서 핏물이 쏟아지는 것으로 보아 크게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두목님!!” 깜짝 놀란 강유가 을지호를 부축하기 위해 달려왔다. 초번과 뇌전은 혹시 모를 해웅의 공격에 대비해 단단히 경계를 섰다. 하지만 이미 엉덩이를 뒤로 잔뜩 빼고 연신 뒤를 돌아보는 것이 겁을 단단히 집어먹은 것 같았다. 최소한 허운창이 보기엔 그랬다. ‘으, 뭐가 이리도 쓴 거야. 냄새도 지독하고. 젠장, 그냥 혀라도 깨물 것을 그랬 나.’ 초번이 미리 준비한 물감 주머니를 깨물어 터뜨린 을지호는 생각지도 못한 독한 맛과 냄새에 일부러 하려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어쨌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선…….’ 강유의 손을 애써 뿌리친 을지호가 온 산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당장 벌집으로 만들어 버려라.” 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십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해웅에게 집중적 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기로도 어쩌지 못한 해웅을 한낱 화살이 어쩔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수십 발의 화살이 해웅의 몸에 적중했으나 그 어느 것도 살갗을 파고들 수는 없었다. “이제 다 한 것이냐?” 날아오는 화살을 모조리 튕겨낸 해웅이 도끼를 붕붕 돌리며 소리쳤다. 버텨내기 는 했지만 온 몸을 휩쓸고 간 검기의 상처로 인해 전신을 붉은 피로 적신 해웅이 살짝 웃으며 말하는 것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같은 편이라 할 수 있는 허운창 마저 겁을 집어먹고 움츠릴 정도다. “조, 좋다. 오늘은 우리가 패했음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오늘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잊든 말든 상관없다. 천으로 얼굴을 감추는 네 놈들의 위협에 두려워할 내가 아 니니까. 그리고 경고하겠다. 다시는 눈에 띄지 마라. 내 장담하건데 그때는 절대로 몸 성히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퉷. 괴물 같은 놈.” 을지호는 당당하기만 해웅의 태도에 진저리를 치며 침을 내뱉더니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강유와 초번, 뇌전이 을지호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 저으며 어둠 속으 로 사라져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후, 끝까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해웅이 짧은 신음을 내며 몸을 휘청거렸다.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허운창이 황급히 달려오며 해웅을 부축했다. 해웅은 담담한 미소를 지 으며 염려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괜찮습니다. 조금 무리를 했더니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렇습니다. 잠시 쉬면 괜 찮아 질 것입니다.” “허~ 정말 대단합니다. 내 평생 오늘과 같은 놀란 광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또 한 은공께서 저와 우리 식솔들을 살리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은혜랄 것도 없습니다. 의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지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이 허운창, 비록 일개 장사꾼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도리 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은혜는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그런 칭찬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허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그리 고 어차피 이 길을 지나던 차에…….” 무엇을 본 것인지 해웅이 말을 끊고 손을 번쩍 들었다. “이곳이다.” 조심스레 접근하던 일단의 무리들이 해웅의 손짓에 허겁지겁 달려왔다. 허운창 이 또 다른 도적이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자 해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운한표국의 식솔들입니다.” “아, 그렇군요.” 허운창이 부끄러움에 슬쩍 고개를 돌리는 사이 열명이 채 안되는 인원이 해웅에 게 다가왔다. 모두들 등에 커다란 짐을 들고 있는 것이 대다수가 일꾼들인 모양 이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혼자 달려가시면 어찌합니까?” 가장 앞서 오던 사내가 주변에서 신음하는 부상자들과 전신을 피로 물들인 해웅 을 보며 급히 물었다. “아까 자네도 듣지 않았는가. 도적놈들 몇 놈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고.” “물론 들었지요.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표두님께서 저희들을 팽개치시고 달려 가신 것도 알고 있지요.” 사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하하하, 미안하네. 일이 급한 것 같아서 그랬어. 그리고 어차피 우리도 이 길을 가야 하지 않나? 위험은 미리 제거해야지. 그만 화를 풀게.” “화가 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걱정이 되서 드린 말씀이지요. 그나저나 괜찮으신 겁니까? 무슨 놈의 상처가 이리도 많습니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네. 빨리 부상자들을 살펴보 게나. 목숨을 잃은 사람도 몇 있으니 그들의 주검도 수습하고.” 그러나 사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침나절까지 물건을 운반하기로 했습니다. 서둘러도 때를 맞추기가 힘 듭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이대로 방치하고 가란 말인가?”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오랜만에 들어온 일입니다. 자칫 시기를 맞추지 못하 면 받아야할 돈은커녕 도리어 배상을 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랬다간…….” 사내가 허운창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운한표국은 문을 닫아야 합니다.” 목숨을 구원받은 것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을까?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자신들로 인해 운한표국이 문을 닫는다면 그보다 더 면목 없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저들은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보살피겠습니다. 걱정 말고 떠나시지요.” 허운창이 사내의 말에 동조하며 말했다. 하지만 해웅은 요지부동이었다. “물러가는 했지만 놈들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해웅이 다소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쳐다봤다. “우리 운한표국이 언제부터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외면했는가? 까짓 이익을 내 지 못하면 어떻고 손해를 좀 보면 어떻단 말인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보다 급한 것은 없네.” “그러나…….” “국주님이 이 자리에 계셔도 나와 같은 행동을 하셨을 것이네. 또한 하늘이 무너 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설마 표국의 문을 닫는 일이야 생기겠는가? 틀림없이 방법이 있을 것이네. 그러니 잔말 말고 내 말대로 따르게나.” “후~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지 요. 자, 모두들 해 표두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네. 그 자리에 짐을 부리고 부상 자들을 돌보도록 하세나.” 이미 결정된 사항에 또 다른 토를 달 정도로 사내는 속이 좁은 남자가 아니었다. 일꾼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한 사내는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주변을 누비며 부 상자들을 보살폈다. 해웅 또한 계속 만류하며 말리는 허운창을 뒤로 하고 사체를 한 곳으로 모으고 부상자들을 돌보는데 힘을 쏟았다. 그런 해웅과 사내의 모습이 허운창에겐 더없이 고맙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나 허운창, 오늘 일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외다. 절대로!!” 조용히 읊조리는 허운창의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은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6 * * * * * * “흐흐흐, 잘 되겠지?” 복면을 벗어던진 을지호가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주군.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넘어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해웅이 잘해주었어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어찌나 능청을 잘 떠는지 웃음을 참 느라 혼났습니다.” 강유는 뇌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저 멀리 사라지는 은하상단의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나는 해웅, 운한표국의 사람들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무척이나 놀랬다. 어쩌면 오늘의 공은 모두 해웅에게 돌려 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도적놈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동안 쌓인 것이 많은지 강유가 손에 움켜쥔 복면을 종잇장 찢듯 찢으며 물었 다. “그래, 이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지겨웠어.” “그래요? 이상하네. 지금껏 쭉 지켜본 결과 형님은 이 일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 았는데 말이지요.” “시끄러. 누가 즐겼다고 그래.” 두 눈을 부라리며 강유를 위협하는 듯 하더니 을지호는 이내 안색을 풀었다. “하하, 아무튼 그동안 다들 수고했다. 그리고 너희들도.” 을지호의 말에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상대의 혼을 빼놓는 데 성공한 천뢰대의 대원들이 살며시 허리를 굽혀 이에 답했다. “오늘 보여준 속사 능력은 상당히 훌륭했다. 그리고 별다른 말도 없었는데 화살 촉에 구멍을 뚫은 효시(嚆矢)를 사용한 것 또한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다. 누가 그런 지시를 내렸지?” “제가 그랬습니다.” 율천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을지호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처럼 어두운 밤에는 소리 또한 상당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천지를 울리며 사 방에서 들려오는 화살 소리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두려움을 주는 것이거든. 상대의 눈에는 아마 수십 명의 궁수가 숨어서 화살을 날린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많았어.” 율천 이하 천뢰대의 대원들이 다소 가라앉은 을지호의 음성에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빠른 손놀림에 비해 정확도가 많이 떨어졌다. 누누이 강조했지만 궁술의 생명은 정확도다. 정확도가 없이는 아무리 빨리, 많은 화살을 날려도 소용없는 것이라고 말을 했을 것이다. 내 분명 급소가 아닌 곳을 노리라고 했건만 화살을 맞고 목숨 을 잃은 자가 세 명이 나왔다. 또한 그에 버금가는 중상을 당한 자가 두 명이 더 있었고.” “죄, 죄송합니다.” 안색을 붉힌 율천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할 것 까지는 없다. 짧았던 수련기간을 감안하면 사실 기대 이상으로 잘 해 주었으니까. 다만 보다 수련에 힘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어쨌든 정말 다들 잘 해주었다. 이제는 돌아가자.” 바로 그때였다. 뭔가 정체모를 기운이 밝은 표정으로 몸을 돌리던 을지호의 전신 세포를 자극했 다. ‘누군가 있다.’ 그 기운은 동물들의 기척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기운이었다. ‘누군가? 도대체 누가? 나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했단 말인가.’ 말을 멈춘 을지호는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그리곤 그 기운의 주인을 찾았 다는 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누구시오?” 을지호가 칠 장 정도 거리의 커다란 나무를 응시하며 물었다. “누구라니요?” 강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을지호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여 겼는지 슬그머니 무기를 꺼내 들었다. “누구냐고 물었소.” 을지호가 재차 소리쳤다. 그러자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대단하구나. 그 짧은 사이에 나의 존재를 눈치 채다니.”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모습을 드러낸 인영, 오직 외길만을 파는 장인처럼 고집 스런 눈매와 얄팍한 입술, 빼빼 마른 몸매에 키는 훌쩍 크고 군데군데 기운 흔적이 역력한 낡은 흑삼(黑衫)을 입은 노인이었다. 아니, 딱히 노인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비록 볼에까지 늘어진 눈썹과 머리카락은 새하얀 백발(白髮)이었지만 드러난 얼굴에선 세월의 흔적을 찾아보 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과 존재감을 의심 케 하는 허허로운 자세에서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오랜 연륜도 느껴지는, 실 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이었다. ‘중원에도 이런 사람이…….’ 충격이었다. 을지호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놀라고 있었다. 그는 지금 괴 노인에 서 느껴지는 기운을 언젠가 경험한 적이 있었다. ‘똑 같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분 고조부님께서도 이런 기 운을 지니셨었지.’ 전신을 타고 울리는 기운은 단순히 무공의 고하(高下)로 따질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공으로 따지자면 두 분 고조부를 앞서는 조부와 비록 장난처럼 말씀하 셨지만 고조부들께서 합공을 해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 하시던 부친 을지휘소 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기운, 세월의 힘을 간직한 기운이었다. “감히 존함을 여쭙겠습니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절대로 경거망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을지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괴 노인은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허리춤에 비스듬히 차 고 있는 풍혼에 시선을 집중할 뿐이었다. “당신 누구야? 주군께서 묻고 계시잖아.” 뇌전이 짜증나는 어투로 물었다. 그러나 괴인은 뇌전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여전 히 을지호만을 응시했다. “아이야.” 시선을 거둔 노인이 마치 동네 꼬마를 부르듯 을지호를 불렀다. 그런데 괴인한 것은 어쩌면 조롱으로 들릴 말이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미친 영감탱이가 감히 누구보고!!” 그렇지 않아도 신선놀음을 하다가 온 꼴 같지도 않은 모습에 질문을 해도 들은 체 만 체 하며 거만을 떠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뇌전이 다짜고짜 고함을 치며 검을 치켜세웠다. 뭔지 모르지만 괴 노인을 적으로 간주한 강유와 초번도 함께 공격을 하기 위해 분분히 움직였다. 율천이 이끄는 천뢰대 또한 일제히 활을 재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것은 을지호였다. “멈춰!!” 황급히 나서 공격을 막은 을지호가 기도 막히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제발! 제발, 똥오줌 좀 구별해라.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좀 구별하란 말이야!! 너희들도 활을 내려놔.” 을지호가 그렇게 화를 낼지는 몰랐다는 듯 일시에 동작을 멈춘 세 사람이 오히 려 황당한 눈빛으로 을지호를 쳐다봤다. “형님, 저자가 대관절 누구 길래…….” 강유가 노인을 향해 의혹어린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알고 있지.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너희 들은 지금 이렇게 내 말을 듣지도 못할 것이다.” 한숨을 내쉬는 을지호,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강유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힐 때 뇌전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설마요. 저따위 요망한 늙은이야…….” “조용히 해봐.” 황급히 뇌전의 입을 틀어막은 강유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정도로 고수입니까?” 을지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에선 지금껏 보지 못했던 고수야.” “…….” 을지호의 말에 강유는 입을 쩍 벌리고 다시금 노인을 쳐다봤다. 중원에서 보지 못했다는 을지호의 말은 무엇을 말함인가? 비록 많은 인물들을 만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인물들 속에는 해남파의 전대 장문인과 현 장문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눈앞의 괴 노인이 그들을 능가하 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흠, 중원에서 보지 못했다라… 그럼 다른 곳에선 본 모양이구나.” 묻는 노인의 음성은 냉막한 표정과는 다르게 부드러웠다. 그 또한 듣기에 약간 거북했지만. “몇 분 뵙기는 했지요.” “…….” 노인은 잠시 입을 다물고 을지호를 응시했다. “너는 어떠냐?” 노인의 물음에 강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뇌전과 초번도 긴장된 모습으로 을지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요, 저는 이곳에서 노인과 같은 고수를 보지는 못했지만 저들은 보았을 겁 니다.” 씨익 웃은 을지호가 강유 등에게 슬쩍 시선을 던디며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 을지호의 말을 깨달은 강유가 안색을 활짝 피며 탄성을 내질렀다. 뇌전이 강유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재빨리 물었다. “뭔 뜻입니까?” “뭐긴, 우리 주군도 강하시다는 말씀이지.” 아예 외면을 해버리는 강유를 대신해 초번이 대답해주었다. “허허, 대단한 자신감이로구나. 그래, 지금 나와 겨룬다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이렷다?” 을지호의 당돌함이 귀여운지 괴 노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이긴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지만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않는다? 허허, 노부의 귀엔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소 리로 들리는구나.” “무례했다면 용서하시지요.” 살짝 허리를 굽히며 용서를 구하는 을지호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을지호의 모습에 괴 노인이 또다시 감탄을 했다. “허허, 과연, 과연!! 그 오만함은 네 할애비와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그 녀석 하 고 꼭 닮았어.” 을지호의 할아버지라면 당연히 을지소문, 괴 노인은 지금 을지소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을지소문을 언급하는 노인의 어투는 을지호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예? 조부님을 아시는지요?”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조부조차 어린아이 취급하는 이 노인은 누구란 말인가? 을지호는 더할 수 없는 궁금증을 가지고 노인을 응시했다. 하지만 노인은 옛 추 억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을지호는 궁금했지만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노인의 입이 열리긴 조용히 기다렸 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노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지나가는, 그러나 확신 을 가진 어투로 물었다. “을지 성을 쓰지 않느냐?”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7 * * * * 남궁세가로 향한지 벌써 두 시진, 어느새 날은 밝아 주변이 환해진지 오래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남궁세가에 도착하련만 상대적으로 무공이 뒤쳐지는 천뢰 대원들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고 강유 등도 힘에 부치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더 이상 길을 재촉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걸음을 멈춘 을지호가 소리쳤 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자.” “푸하.” 을지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쁜 숨을 내뱉은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쯧쯧, 얼마나 왔다고…….” 을지호가 한심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형님.” 그나마 버틸 만 했는지 슬그머니 다가온 강유가 을지호를 불렀다. “왜? 힘든 것 같은데 쉬지 않고.” “지금 쉬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조금만 더 가면 세가에 도착한다구요.” “그래서?” 자신의 염려와는 달리 너무나 태연한 을지호의 반응에 강유의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그래서라니요? 저 노인은 어쩌실 작정입니까?” 강유가 일행의 맨 뒤에서 따라오는 노인을 힐끗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막 산보(散步)를 마친 사람처럼 한가로이 뒷짐을 진채 아침 햇살을 음미하는 노 인은 조그맣게 읊조린 강유의 말을 다 듣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시선을 돌려 강 유를 응시했다. 당황한 강유가 얼른 고개를 돌리는 사이 을지호는 태연스레 대꾸했다. “적이 아니라고 하셨잖아.” “젠장,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믿기 싫으면 할 수 없고. 어쨌든 신경 쓸 일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무리…….” “그게 싫으면 네가 막아보던가. 난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을지호가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강유를 쳐다봤다. “관둬요. 차라리 무덤을 파라고 하지.” 강유는 더 이상 대화를 해봤자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몸을 돌리더니 다 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휴식을 취했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또다시 강행군을 한지 한 시진, 을지호 일행은 아침 햇살 을 받으며 남궁세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정문에 나와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리던 곽 노인이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가셨던 일은 잘 되었습니까?” “예. 걱정해 주신 덕분으로 무난히 끝냈습니다.” 을지호가 곽 노인의 옷 위로 내려앉은 아침 이슬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잘 되었습니다. 혹여 일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서…….” 남궁세가에게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던 곽 노인은 잘 마무리 되 었다는 을지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힘든 기색이 역력한 강유 등을 보며 말했다. “자자, 다들 고생들 했네. 내 미리 일러 따뜻한 목욕물과 음식을 준비하라 했으 니 어여 들어가서 피곤함을 씻도록 하게나.” “어이구, 정말 이십니까? 하하, 역시 곽 영감님뿐입니다.” 땅 바닥에 주저앉았던 뇌전이 기쁜 웃음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정도야 고생하는 자네들을 위해 당연한 것이지. 그런데… 저분은 누구…신 가?” 곽 노인이 일행 중 못 보던 노인을 발견하곤 조용히 물었다. 계속된 강행군으로 세가에 도착하자마자 녹초가 된 천뢰대원들이 탈진해서 쓰러 지고 강유 등도 체면불구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건만 맨 뒤에서 따라온 노인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이들에게야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체력이 한계에 부딪칠 때까지 이어진 강행군이었지만 노인의 이마엔 땀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저와 인연이 있으신 분입니다.” 을지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의 어투에서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는 기색을 눈 치챈 곽 노인은 의아한 마음이 들긴 하였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어디에 있습니까?” “지하 연무장에 있습니다.” 을지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발걸음을 지하연무장으로 향했다. 다들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들 역시 을지호를 따라 지하연무장으로 향했다. 지하연무장에선 아침 연공이 한참이었다. 서로의 무공을 비교해가며 장단점에 대해 논의하는 이도 몇 있었지만 대다수는 남궁민처럼 홀로 떨어져 자신에게 주 어진 무공을 숙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들 쓰는군.” 을지호의 한 마디에 모든 이들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리고 분분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오셨군요.” 이마에서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걸어온 남궁민이 을지호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일행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래. 다행이 일도 무사히 끝났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릴 것이다.” “그래요? 잘 됐군요.” 하지만 담담한 어투로 대답을 하는 남궁민은 곽 노인과는 달리 그다지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하기는 했지만 남궁민은 초번이 계획을 세우고 을지호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일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 지 않고 있었다. 처음 은밀히 운한표국을 접수하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었다. 비록 과거의 일이었 지만 운한표국은 남궁세가의 속가제자가 세운 것으로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남궁 세가와는 한식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의 행보는 도저히 용납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운한표국을 접수한 을지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장사표국의 표물을 공격하는 일 이었다. 그것도 한두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에 걸쳐 계속적으로 이어 졌다. 비록 그 모든 일련의 행동들이 세가의 자금줄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뚜렷 한 목표를 가지고 하는 일이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적질 이라니!! 아무리 가세가 기울어 힘든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남궁세가는 명문정파,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늘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남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정도(正道)를 가야한다고 여기는 그녀였다. 곽 노인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덮어두기는 했지 만 지금도 그녀는 불편한 심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분은 누구신가요?” 곽 노인과 마찬가지로 일행의 후미에서 따라오는 낯선 노인을 발견한 남궁민이 물었다. “그냥 나와 인연이 있는 분이라고만 해두자. 어르신.” 을지호의 부름에 노인은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주변을 살피며 태연히 걸어오더니 남궁민의 앞에 섰다. “네가 남궁세가의 가주냐?” “…….”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한 가문의 수장이었다. 처음 보는 자리에서 다짜고짜 반말 을 해대는 노인의 태도에 남궁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 묻는 노인은 누구신가요?” 쌀쌀맞기 그지없는 태도에 당황도 하련만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단지 조금 무미 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제법 성깔이 있구나. 그래, 한 문파의 수장이라면 그 정도 기개는 가지고 있어 야지.” 남궁민이 재차 물었다. “성함을 여쭙겠습니다.” “이름이라… 글쎄, 이름을 버린 지가 너무 오래 되서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구 나.” 남궁민의 시선이 을지호에게 향했다. 뭔가 설명을 요구하는 그녀의 눈빛에 을지 호가 쓴 웃음을 지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찮게 뵙게 되었다. 나와는 인연이 꽤나 깊으신 분이지. 그리 고…….” 잠시 노인에게 시선을 둔 을지호가 모두에게 선언하듯 말을 이었다. “무사부(武師父)로써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실 분이기도 하지.” 좌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정작 당황한 사람은 그들보다 노인 이었다. “허허, 이놈아. 네가 나를 엉뚱한 곳에 취직시키려 하느냐?” “흐흐흐,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이곳에서 지내시는 동안 완벽한 숙식(宿 食)이 제공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보고 밥값을 하라는 말이더냐?” 노인이 짐짓 냉랭한 어투로 물었다. “설마요,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해 본 소리고… 다만 기왕 저를 따 라 이곳까지 오셨으니 도움이나 조금 주십사 드리는 말씀입니다.” “흥, 뺀질거리는 것 또한 닮았어.” 느물느물 거리며 웃는 을지호에게 화도 내지 못한 노인은 툭 쏘아 붙이는 한 마 디로 은연중 그의 요청을 허락했다. 그러나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남궁민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럴 수는 없어요.” 화들짝 놀란 을지호가 남궁민을 쳐다보았다. 이유를 묻는 을지호의 눈빛에 그녀 는 당당히 말을 했다. “저는 더 이상 남궁세가의 무공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무사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 그대로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의미였다. 아니, 직접 무공을 전수하지는 않더라도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노인이 무사부가 된다면, 그래서 그 녀 자신과 세가의 식솔들을 지도한다면 그들이 익히는 남궁세가의 무공이 노출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가의 무공이 자꾸만 외부로 알려지는 것에 대해 내심 불만이 있었던 터, 아무리 을지호와 인연이 있다고는 해도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노인을 무사부로 맞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꼭 필요한 분이다. 일신에 지니신 무공도 상상을 불허하시고.”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신 분이라도 저는 원하지 않아요. 또한 세가의 무공도 제대로 모르신 분에게 단지 무공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지도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군요.” 남궁민은 을지호의 말을 일축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무공이 그 정도로 대단하단 말이냐?”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노인 또한 기분이 상한 듯 했다. “무슨 말씀이시죠?” 되묻는 남궁민의 말엔 가시가 돋아 있었다. “남궁세가… 그렇지, 꽤나 뛰어난 무공을 자랑하는 곳이지. 하지만 내가 무시를 당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는 말이다.” “무시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어요. 무시를 하는 것은 오히려 어르신이군요. 저는 단지 세가의 무공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이 싫을 뿐이에요.” “외부로 유출된다? 허면 내가 남궁세가의 무공을 빼돌린 다는 말이냐?” 노인의 음성이 점점 싸늘해졌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허면 네 말뜻은 무엇이냐?”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 싸늘하게 변했던 노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 침착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좋지 않다.’ 노인의 표정에서 엄청난 위기감을 느낀 을지호가 재빨리 남궁민의 앞을 가로막 았다. “어르신!!” “비켜라.” “어르신.” “비키라고 했다. 내 오늘 남궁세가의 무공이 어떤지 똑똑히 견식을 해 보아야겠 다.” 노인은 표정의 변화 없이 남궁민을 응시했다. “흥, 남궁세가는 그런 위협에…….” 짝! 남궁민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것은 시원한 격타음이었다. 을지호의 손에 뺨을 맞은 남궁민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얻어맞은 그녀의 볼 이 순식간에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닥치고 있어.” 볼을 감싸 쥐고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는 남궁민에게 노기 띤 음성으로 호통을 친 을지호는 곧 몸을 돌려 노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계집입니다. 용서해 주시지요.” “음…….” 노인은 을지호가 그렇듯 전격적으로 나설지는 몰랐다는 듯 무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불어 까마득히 나이어린 후배와 드잡이 질을 할 뻔 했다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듯 했다. “후~ 추태를 보였구나.” “아닙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는 무슨, 허허, 이만큼 나이가 들었는데도 성격은 고쳐지지 않는구나. 멀었 어, 아직 멀었어.”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기는 노인의 입가에 쓴 웃음이 피어올랐다. “어르신.” 을지호가 서둘러 노인의 뒤를 따라 갔다. “후~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 버렸는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보던 뇌전이 노인과 을지호가 지하연무장 을 떠나자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놔.” 남궁민의 곁으로 다가간 곽 노인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신경질적으로 팔을 뿌리친 남궁민이 강유게에 물었다. “누구지? 저 영감은?”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함께 온 사람이 모르면 누가 알아?” “두 분이 분명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 내용을 우리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것은?” 남궁민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강유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두 분 사이엔 우리가 모르는 무슨 비밀 같은 인연이 있고 형님이 말리지 않으 셨다면 누님께선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어쩌면 이곳의 모든 사람들까지도 함께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무, 무슨 소리야?” 순간, 남궁민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보아하니 아무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군요. 하지만 저 노인이 누님께 다가가려는 순간 저는 숨이 다 멎는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말 리고는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지요. 형님이 나서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 말을 잃은 것이 남궁민은 제법 충격을 받은 듯했다. 강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 던 좌중의 사람들도 남궁민과 마찬가지의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모르긴 몰라도… 죄송합니다만 남궁세가의 무공으론 저 노인의 무공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뇌전이 물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노인의 정체에 대해 계속해서 물어봤지만 별다른 말을 해 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한 가지, 누님의 말씀대로 세가의 무공이 유출되면 어쩌 냐는 물음에는 형님도 확실한 대답을 해 주셨다.” 뇌전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 지만 남궁민도 귀를 쫑긋 세우고 강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질문에 형님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말했지. 남궁세가의 그 어떤 무공도 노인의 무공을 감당할 수 없다고. 아니, 전 중원을 뒤져도 그분의 무공을 감당할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설마 하는 놀라움에 모두들 침묵을 하는 사이 지하연무장에는 깊은 정적이 찾아 왔다. 모두들 믿기 어렵다는 듯 을지호와 노인이 사라진 입구를 향해 돌린 고개를 움직일 줄 몰랐다. “형님께서 저분을 이곳으로 모신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남궁 세가에 이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로 해가 되지는 않을 그 무엇인가가 말이 지요.” “…….”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 세가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 강유의 말에 뭔가 깊은 생각을 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은 남궁민은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8 * * * * * 소양의 흑우도문, 형주(衡州) 마영문(魔影門)과 함께 호남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 는 노호문은 장사부 도림현(道林縣)에 위치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서서히 어둠이 깔릴 무렵, 노호문의 의사청(議事廳)에 문주인 용철상 (龍哲像)을 비롯하여 소 문주인 용후(龍喉), 네 명의 장로, 세 명의 호법, 일곱 명의 전주(展主)가 한자리에 모였다. 용철상과 용후를 중심으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십사 인은 노호문이 비록 흑우도 문이나 마영문에 비해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두 문파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세력을 가질 수 있게끔 만든 그야말로 노호문을 이끌어 가고 지탱하는 핵 심 중의 핵심인 인물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의 안색 은 그리 밝지 못했다. 특히 육순(六旬)을 넘긴 문주 용철상의 얼굴은 구겨질 대 로 구겨져 있었다. “기밀전(機密展) 전주.” “예, 문주.” 용철상의 부름에 노호문의 모든 정보를 관장하는 기밀전 전주 가경(家勁)이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나이는 사십 후반,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지만 간간히 드러나는 눈빛이 꽤 나 날카로운 사내였다. “조사가 끝났다고?” “그렇습니다.” “말해보게.” 지금부터 자신이 말해야 할 사안의 중요성을 떠올려서인지 잠시 심호흡을 가다 듬는 가경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우선 도적을 물리치고 은한상회의 상단을 구했다는 운한표국의 표두 해웅이란 자는 남궁세가의 인물로 밝혀졌습니다.” “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또한, 몇 차례에 걸쳐 장사표국의 표물을 털고 좌 장로를 해한 도적들 역시 남 궁세가의 인물로 밝혀졌습니다.” 탕. “죽일 놈들 같으니!!” 가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노호성을 터뜨리는 사람은 노호문의 장로 중 가장 연장자로 불같은 성격을 자랑하는 황유화(黃流花)였다. 유난히 좌극과 친분이 깊었던 그는 반드시 좌극의 복수를 하겠다며 칼을 갈고 있었다. “확실한가?” 손을 들어 황유화를 진정시킨 용철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난 한 달간 은밀히 조사를 한 결과 표두 해웅은 물론이고 악록산 에 나타난 도적들이 지난 몇 달 전에 남궁세가에 모습을 보인자들임이 밝혀졌습 니다.” “흠, 남궁세가에서 이상한 조짐이 보인 것도 그들이 나타난 이후인 것으로 기억 하오만.” 용후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나타난 이후로 남궁세가에 전에 없던 변화가 있었지요. 전 격적인 봉문부터 시작해서.” “증거가 있는가? 놈들은 하나같이 복면을 했다고 들었는데.” 흥분했던 마음을 다소 가라앉혔는지 안색을 회복한 황유화가 물었다. “하지만 복면을 하지 않은 놈도 있었지요.” “누군가?” 황유화가 그럴 리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매입니다.” “매?” “그렇습니다.” 황유화는 물론이고 모든 이들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가경은 자신만만했다. “그날의 싸움을 직접 목도한 제자들에 따르며 좌 장로님의 혈랑을 공격한 것은 잘 훈련받은 매였다고 합니다.” “그건 들어 알고 있네.” “중요한 것은 남궁세가에 나타난 놈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 역시 훈련된 매 를 한 마리 키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답을 하는 가경은 자신의 발아래에 고혼이 된 사내, 과거 용두파의 부 두목이 었던 철두를 떠올리고 있었다. 좌 장로가 목숨을 잃고 그동안 이어졌던 은하상회와의 모든 거래가 운한표국으 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한 가경은 용철상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즉시 조 사에 착수했다. 그는 운한표국의 표두로 있는 해웅이 남궁세가의 인물이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수하들로 하여금 남궁세가의 주변을 철저하게 감시토록 명했고 더불어 인근에서 패악질을 일삼던 용두파가 남궁세가의 인물들에게 철저하게 당했다는 것을 알 아내어 이미 병신이 된 갈천을 제외한 과거 용두파에 속했던 모든 이들을 잡아들 여 철저하게 심문했다. 어찌나 독하게 다루었는지 대다수가 병신이 되거나 목숨 을 잃었는데 철두는 그 후자에 속했다. “매라니… 아무래도 믿음이 안 가는데. 확신 할 수 있는가?” 용철상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전히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혈랑을 상대할 정도로 훈련을 받은 매는 찾아보기 힘들 정 도입니다. 또한 복면을 하고는 있었다지만 그들의 체격이나 말투 등을 감안했을 때 그들이 남궁세가의 인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음.” 용철상이 짧은 신음성을 내뱉으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혹 놈들이 위에서 내려온 놈들은 아니오?” 용후가 조심스레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용후와 가경에게 향했다. 그 위라는 것 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후의 염려와는 달리 가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 또한 그 점을 가장 중점적으로 조사를 해 보았지만 그놈들과 백도 의 그 어떤 문파와의 상관성을 찾지 못했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그 외에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바로도 이번 일은 남궁세가 단독으로 획책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모든 보고를 마친 가경이 자리에 앉자 황유화가 용철상에게 물 었다. “모든 것이 명백해 졌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글쎄요, 후~ 하필이면…….” 뭐라 대답하기가 곤란한지 용철상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당장 남궁세가로 달려가 놈들의 죄를 추궁해야 합니다.” 흡사 한 마리 원숭이를 보는 듯 괴이하고 어깨가 굽어 우스꽝스러운 용모를 지 니고 있었지만 그 외모에 숨겨져 있는 잔인한 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황유화와 더불어 유난히 호전적(好戰的)인 장로 만종의(萬宗宜)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들 또한 만 장로의 생각과 같습니다. 상대를 모른다면 모를까 놈들의 방자 한 행동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의당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장로들 또한 황유화나 만종의와 같은 생각을 내비치며 당장 남궁세가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네 명의 호법과 각 전각의 각주들 또한 공격을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용철상은 확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 럴 것이 상대가 다른 곳도 아닌 남궁세가였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언제 적 남궁세가입니까? 이미 몰락한 가문입니다. 까짓 몇 놈 나타나 설쳐대고 있지만 문주님의 명만 떨어지면 당장 짓밟아 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명을 내려달라는 듯 호기롭게 외친 만종의는 당장에라도 달려갈 준비 가 되었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쯧쯧, 누가 그것을 모르는가? 흥분을 가라앉히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핀잔을 준 용철상이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황유 화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명분이 없어. 봉문을 하고 있단 말일세. 봉문을.” “봉문의 규약을 깨뜨린 것은 놈들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지. 심증만으로 무작정 공격을 할 수는 없다네. 또한 그들이 남궁세가의 식솔이 아니라 단순히 손님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 꼴만 우습게 돼. 그리고 사실 남궁세가를 칠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남궁세가가 어떠한 곳인지를. 자칫 잘못하여 일이 확대되면 우리만 곤란에 빠질 수 있어. 어쩌면 또다시 피의 회오리가 몰아칠 수도 있고. 그것을 염려했기에 패천궁에서도 남궁세가만은 건드리지 말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나.” “음.” 용철상이 패천궁을 거론하며 반박을 하자 황유화를 비롯한 장로들 또한 입을 다 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지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문주님.” 입을 연자는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노호문의 재정을 총괄하고 있는 조영산(曺怜 算)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본문의 최대의 수입원이었던 장사표국은 곧 무너지고 맙니다. 만 약 장사표국이 무너진다면 정확히 석 달 후 그 여파가 우리에게도 미치게 됩니다.”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기에?” 누군가의 입에서 질문이 나왔다. “은하상회가 등을 돌렸고 그에 발맞추어 대다수의 상인들이 장사표국이 아닌 운 한표국과 거래를 트기 시작했습니다. 들어오는 의뢰라야 고작 몇 푼 꺼리도 되지 않는 소규모라 합니다.” “아무리!!” 만종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조영산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초한 일입니다. 멍청한!!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지켜야할 표물을 버리고, 보호해야 할 사람을 버리고 도주를 하다니요. 그 일이 알려진 후 장사표국의 신 용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긴, 저라도 그런 곳과는 거래를 하지 않겠습니다만.” “은하상회에 압력을 가하면…….” 만종의의 말에 조영산을 대신해 용철상이 고개를 흔들었다. “관부와 연결되어 있네. 압력은 통하지 않아. 오히려 우리의 입지만 어렵게 할 뿐이지.” “꼭 압력이 아니라 그들에게 이번 일의 전모를 알리고 남궁세가 놈들의 비열함 을 일깨워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땅에 떨어진 신용이네. 믿어줄 리가 없지.” “그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왈가왈부 떠들어도 결정은 문주인 용철상의 몫, 황유화가 그의 의중을 물었다. “후~ 글쎄,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겠네. 쉽지 않은 문제야. 좌 장로가 진 빚을 갚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무시하고 덮어두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하지만 아버님.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셔야 할 듯싶습니다.” 용후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용철상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가 전주의 말에 따르면 마영문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뭣이! 심상치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깜짝 놀란 용철상이 되물었다. 용후의 시선을 받은 가경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마영문뿐만 아니라 흑우도문에서도 불손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쪽 에선 최대한 입을 막았지만 아무래도 상인들의 입을 통해 이번 일이 놈들의 귀 에도 들어간 모양인지라…….” “불손한 움직임?” “예. 흑우도문은 그나마 관망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마영문에선 보다 적극적 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영문에서 꽤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과 은하상회의 상인들의 만남이 최근 빈번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그들이 밀고 있는 비영 표국(飛影?局)도 점차 세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장사표국과 거래하던 곳이 그들에게 넘어간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않은 터에 경쟁적인 위치에 있는 마영문까지 끼어들었다 는 소식을 접하자 용철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놈들이!!” 꽝! 용철상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주먹에 그의 앞에 놓인 탁자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하나 누구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인 것 같습니다.” 용후가 자신의 자리까지 날아온 파편 조각을 슬며시 치우며 말했다. “…….” 용철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침묵으로써 계속 말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대로 가다간 장사표국이 무너질 것이고 그것은 곧 노호문의 재정압박으로 이 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관부와 연결된 은하상회에 압력을 가할 수도 없는 상태,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요.” “말해 보거라.” “아무리 마차가 단단하고 위용이 있어도 말의 목을 베어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 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결국 남궁세가를 치잔 말이냐?” “그렇습니다. 남궁세가를 치면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운한표국은 무너질 수밖 에 없습니다. 은하상회 역시 겉으로야 태연한 척 하고 아무리 관부와 연을 맺고 있다고 하더라도 은연중 불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겠지요. 또한 당하고 가만있으면 파리가 꼬이는 법입니 다. 마영문이 감히 우리의 세력권을 넘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이 기회에 그놈들에게도 우리가 지닌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바가 아니다. 다만…….” “패천궁도 어차피 흑도 문파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일이 확대되면 우리 편 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강호의 관행을 깨뜨린 것은 남궁세가 놈들이 먼저 입니다. 그들이 봉문을 선언하고 뒤에서 엉뚱한 계교를 부린 것에 대한 물증을 잡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용후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 다. “어떤가? 모두들 그리 생각하는가?” “소 문주의 말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확실한 물증만 잡는다면 문제될 리가 있겠 습니까?” 황유화의 말에 이어 만종의도 몇 마디 덧붙였다. “남궁세가를 침으로써 상인 놈들과 도둑고양이 같은 마영문에게 다시는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합니다.”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모여졌다고 판단한 용철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명을 내리겠네.” 용철상의 말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아야.” “예, 아버님.” 용후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을 했다. “이번 일은 네가 맡아라.”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조용히 준비를 하도록 하고. 인원은 삼십이면 충분하겠지? 많이 몰 고 가봐야 은밀함만 떨어진다.” “충분합니다.” 대답을 하는 용후의 얼굴에선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처리해라. 기왕 하는 것 노호문이 어떤 문파인지, 우리를 건드렸을 경우 어떤 대가를 받게 되는지도 확실하게 일러주도록 하여라.” “맡겨 주십시오.” 용철상이 상기된 얼굴로 서 있는 장로들과 호법들을 쳐다봤다. “자네들이 뒤를 받쳐 주게나.” “염려 놓으십시오. 저와 만 장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황유화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들 하고. 관에 누워 있는 좌 장로를 보면 흘린 눈물을 다시는 흘리고 싶지 않다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믿지, 믿겠네. 자, 다들 나가보게나. 딱히 준비할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각오는 해야 하지 않겠나. 오랜만에 무기들도 손을 보고.” 결정할 때까지는 최대한 신중했지만 한번 결정을 하고 나면 그 누구보다 신속하 과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용철상의 특징이었다. 그런 신중함과 결단성이 있 기에 지금의 노호문이 있는 것이었지만. 말을 마친 용철상이 빙글 의자를 돌렸다. 그만 나가보라는 의미, 반시진에 걸쳐 열렸던 노호문의 수뇌회의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9 * * * * * “좋아, 많이 좋아졌군. 빠르기도 그렇지만 한결 정확해 졌어.” 을지호는 좁디좁은 과녁에 빼곡히 박혀 있는 화살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본격적으로 궁술을 가르치기 시작한지도 어느새 팔 개월, 하루가 갈수록 달라지는 천뢰대 대원들의 실력을 보고 있노라면 뿌듯한 마음이 절로 샘솟았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율천 이하 모든 천뢰대원들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천뢰대원 각자가 하루에 소화하는 화살 수가 보통 오백 발 정도였다. 처음 활을 배울 때만해도 오십 발을 넘기기 힘들었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그만큼 훈련량을 늘린 것이었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무리하리만큼 화살을 쏘아대는 통에 손가락이 성할 날이 없었다. 더구나 유난히 팽팽한 활시위가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수십 번, 단단한 굳은살이 박일 만도 한데 하루가 다르게 훈련의 강도 가 강해지는 통에 굳은살마저 예사로 터지는 것이었다. 해서 그 누구 하나 손가 락에 붕대를 감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떤 대원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피가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율천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속사까지는 거의 마무리가 된 것 같다. 연환사 또한 부단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였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을지호는 알고 있었다. 한곳으로 화살을 모으는 것과 여러 곳의 목표를 타 격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과거 직접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 어쨌든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달린 일이고, 오늘부터는 조금 색다른 것을 익혀 보도록 하자.” 인간은 늘 새롭고 신기한 것을 찾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을 받아 들이기 싫어하는 사람도 다수 존재 했지만 최소한 천뢰대의 대원들 중 그런 사 람은 없었다. 을지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곁으로 모여든 천뢰대원들 의 눈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현재 너희들 개개인의 활 솜씨는 상당히 뛰어나다.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미안한 말이지만 너희들이 한꺼번에 덤빈다 하더라도 강유 한사람을 상대하기 힘들다. 이유가 무엇일까?” “내공, 즉 화살에 실릴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율천이 말했다. “움직임을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지도 못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왕욱이 거들었다. 을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다. “둘 다 이유가 될 수 있다. 직접 경험해 보면 알겠지.” 그리 말을 하면서 을지호가 화살 하나를 집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오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놓여진 과녁을 지나 백보의 거리에 도착하자 몸을 돌 렸다. 모두들 괴이 여기며 쳐다볼 때 을지호가 실로 예상키 어려웠던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나를 향해 한꺼번에 공격을 해 봐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 도로. 연환사를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 다만 나를 적으로 알고, 반드시 죽여야 한 다는 필살(必殺)의 일념이 담긴 화살을 날려야 한다.” 아무리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하라지만 하늘과도 같은 상전을 향해 화살을 날리라 니!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이었다. 천뢰대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볼 때 한걸음 앞으로 나선 율천 이 소리쳤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자신이 없느냐?”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냐? 설마 나를 염려하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믿고는 있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혹…….” 조심스런 율천의 말에 을지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걱정하지 마라. 그 정도의 공격에 당할 내가 아니니까. 애당초 위협을 느 낄 정도면 이런 짓도 하지 않아. 보기와는 달리 내가 얼마나 겁이 많은 놈인데.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붙들어 매고 공격을 해. 내가 너희들에게 다가갈 테니까 저지해 보라고. 이건 명령이야. 실패했을 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하는 명령.” 농인지 진담인지 도저히 구분이 안가는 말을 신나게 떠들어 댄 을지호는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들고 있던 화살을 흔들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율천은 명령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겨우겨우 활을 세우고 화살을 재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천뢰대원들 역시 서둘러 화살을 재었다. “잘 살펴야 할 거야. 난 조금 빠르니까. 간다!!” ‘간다.’ 라는 말이 끝나는 순간 을지호는 이미 십여 보를 전진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율천의 활에서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쉬이익. 율천의 뒤를 이어 천뢰대원들이 날린 화살이 을지호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살이 손을 떠남과 동시에 또 하나의 화살이 시위에 걸렸고 곧바로 을지호를 향했다. 다소 실력이 떨어지는 대원들은 그들이 가장 자신 있는 속사로 화살을 날렸고 율천과 왕욱은 이참에 실력을 보이겠다는 듯 연환사로 을지호의 요혈을 노렸다. 을지호와 첫 번째 화살 군(群)이 만난 것은 칠십 보의 거리에서였다. “제법들인데.” 예상은 했지만 화살에 담긴 힘과 날카로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감탄사 를 내뱉은 을지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천뢰 대가 날린 화살은 을지호의 걸음을 조금도 지체시키지 못했다. 을지호는 들고 있던 화살로 날아오는 화살을 순식간에 쳐내며 오십 보 정도 떨 어진 거리까지 도달했다. 그러자 두 번째 화살 군이 그를 반겼다. 물론 그 전에도 보다 손이 빠른 대원이 날린 화살이 을지호에게 접근했지만 모두 막힌 상태였다. “어이구야! 빠른데.”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감탄사를 내뱉은 을지호, 하지만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이번에는 아예 화살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듯 날아오는 화살을 일일이 손으로 잡거나 슬쩍 건드려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그런 식으로 공격을 막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경악을 하면서도 천뢰대원들은 조금도 쉬 사이 없이 화살은 날려댔다. 쉬이익. 슈슈슉. 기합성도 없이 오직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만이 연무장에 울려 퍼지는 사 이 모든 공격을 간단히 피해내고 단숨에 이십 보 거리에까지 도착한 을지호는 낚아채어 들고 있던 몇 개의 화살을 천뢰대원들을 향해 내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화살은 그 어떤 화살보다도 빠르고 날카로웠으면 강맹했다. 목표 가 된 율천, 왕욱 등이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접근한 화살은 그들의 팔소매를 꿰뚫어 버렸다. 망연자실, 누구 한사람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 호흡도 되지 않을 그 짧은 순간이었다. 개인당 적게는 두발 많게는 네다섯 발의 화살을 날렸으니 을지호에게 날아간 화 살이 어림잡아 삼십 여발, 그러나 어느 하나 적중하지 못했다. 접근도 하기 전에 을지호의 화살에 막히고 손에 잡혀 버렸다. 심지어 반격을 당해 무참하게 당하 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보았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직접 당한 사람의 심정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뭘 그리 놀라? 설마 내가 당할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 즐겁게 여흥을 즐긴 사람처럼 손을 탁탁 털며 접근한 을지호는 벌어진 입을 다 물지 못하는 천뢰대원들을 보며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율천이 석상처럼 굳은 몸을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물었다. “어찌 그러긴, 실력이지.” 을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개를 흔드는 율천은 여전히 지금의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자, 이제 알겠지. 너희들 말대로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간단히 쳐냈다. 화살에 한껏 힘이 실려 있었다면 그리 쉽지는 않았을 테지. 또한 미처 몇 발의 화살을 쏘기도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어. 그나마 일직선으로 왔으니까 그랬지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면 어땠을까?” “화…살이… 접근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율천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고. 어쨌든 최소한 강유 정도의 고수를 만난다면 지금의 실력으론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어. 그렇다면 강유 정도, 아니, 그 이상의 고수를 만나게 되면 어찌해야 할까?”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율천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고수를 만나 목숨을 잃으면서 실력 타령을 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내가 괜히 힘써가며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란 말이지. 자, 내가 가진 힘이 약 하다. 나의 동료들의 힘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상대의 힘은 강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뭔가를 눈치챘는지 왕욱이 대답했다. “합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합공을 해야지.” 을지호는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치며 동의를 했다. “그러나 이미 실패를 했습니다.” 이미 수십 발의 화살로 실패를 맛본 상황, 율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합공이 아니야.” “예?” 을지호가 손짓으로 천뢰대원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 “잘 들어봐. 합공이란 말이지, 여럿이서 그렇게 무작정 공격을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야.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그렇게 정교해야 한다.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는 합공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났지. 오히려 동료의 방해만 줄 뿐이니까.” “하지만 궁은…….” 뭔가 반박을 하려했지만 율천의 말을 곧바로 이어진 을지호의 말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궁 또한 다르지 않다. 조금 전을 상기해 볼까? 너희들이 나에게 날린 화살은 오 직 나의 상체만을 노리고 있었다. 특히 가슴으로 집중되더군. 아무리 수가 많더 라도 한곳으로 집중되는 공격은 막히기 쉽다. 알기 쉽게 이렇게 흔들기만 해도 막 을 수 있었다.” 을지호가 화살 하나를 들어 자신의 가슴 어귀에서 마구 흔들었다. 부끄러웠는지 그 모습을 본 천뢰대원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또한 첫 번째 공격은 거의 동시에 도착해서 화살로 막아냈지만 두 번째 공격은 시간차가 있어 일일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이것을 합공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율천 또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만약 두어 개의 화살이라도 가슴이 아닌 다리를 노렸으면 어땠을까?” “아!” 천뢰대원들이 숙였던 고개를 들며 눈을 반짝였다. “동시에 머리, 목, 가슴, 배, 다리를 노린 화살이 도착했으면 어땠을까?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내가 피할 것이란 가정 하에 화살을 날렸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쉽게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을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의 표정에서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을 하는 듯 했다. “하하, 뭐, 나야 상관하지 않았을걸. 그 정도로 나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장난기 어렸던 을지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강유는 절대로 쉽게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너희들에게 당할 수도 있었겠 지.” 그제야 을지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파악한 천뢰대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실력이란 한 순간에 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약한 화살이라도 여려 개가 모 이면 동강내기가 쉽지 않듯 너희들이 마치 하나의 기계처럼 맞물려 적을 노린다면 그의 목숨을 쉽게 거두진 못한다하더라도 그 역시 너희들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말을 마친 을지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귀담아 듣는 천뢰대원들의 반응을 살피며 내심 흡족해 했다. “이것으로 너희들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어찌하면 상대를 접근시 키지 않을까? 누가 상대의 이목을 끄는 공격을 하고 누가 주공이 되어 상대의 목숨을 노릴 것인가? 만약 적이 피한다면 그 이후의 공격은 어찌 할 것인가? 적절 한 공격의 순간은 언제인가? 함께 연습하고 실행해 볼 것이 너무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에만 매달리라는 말은 아니야. 그래도 아직은 개인적인 수련이 많이 필요하니까. 다만 수련 중 틈틈이 궁으로써 합공을 하는 것을 연구해 보라는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천뢰대원들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극도의 공경이 담긴 인사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몸을 돌리려던 을지호가 잊어먹은 것이 있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아까 화살을 날렸을 때의 거리가 얼마 정도인줄 알아?” “글쎄요, 한 이십 여보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 정확히 이십 보였지. 묻겠다. 만약 합공을 했는데도 적이 그 정도의 거리 까지 접근했다면 어찌해야 할까?” 을지호가 도대체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지 못했기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간 을지호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도망쳐.” “예?” 혹여 잘못들은 것은 아닌지 크게 눈을 뜬 율천이 되물었다. “도망치라고. 만약 적이 그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했다면 죽었다 깨도 막지 못해. 그러니 무조건 도망치라고. 괜히 어줍지 않게 까불다 비명횡사를 하는 수가 있으 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란 말이야. 자, 오늘은 여기까지. 난 강유에게 좀 가봐야겠으니 다시 수련들 하라고.” 을지호는 율천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돌리고 손을 흔들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냐?” 율천이 멍한 눈으로 을지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분명 도망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 나도 그리 들었어. 분명 도망…치라고…….” 을지호의 등에 고정된 율천의 눈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떠날 줄을 몰랐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39 * * * * * “좋아, 많이 좋아졌군. 빠르기도 그렇지만 한결 정확해 졌어.” 을지호는 좁디좁은 과녁에 빼곡히 박혀 있는 화살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본격적으로 궁술을 가르치기 시작한지도 어느새 팔 개월, 하루가 갈수록 달라지는 천뢰대 대원들의 실력을 보고 있노라면 뿌듯한 마음이 절로 샘솟았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율천 이하 모든 천뢰대원들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천뢰대원 각자가 하루에 소화하는 화살 수가 보통 오백 발 정도였다. 처음 활을 배울 때만해도 오십 발을 넘기기 힘들었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그만큼 훈련량을 늘린 것이었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무리하리만큼 화살을 쏘아대는 통에 손가락이 성할 날이 없었다. 더구나 유난히 팽팽한 활시위가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수십 번, 단단한 굳은살이 박일 만도 한데 하루가 다르게 훈련의 강도 가 강해지는 통에 굳은살마저 예사로 터지는 것이었다. 해서 그 누구 하나 손가 락에 붕대를 감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떤 대원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피가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율천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속사까지는 거의 마무리가 된 것 같다. 연환사 또한 부단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였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을지호는 알고 있었다. 한곳으로 화살을 모으는 것과 여러 곳의 목표를 타 격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과거 직접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 어쨌든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달린 일이고, 오늘부터는 조금 색다른 것을 익혀 보도록 하자.” 인간은 늘 새롭고 신기한 것을 찾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을 받아 들이기 싫어하는 사람도 다수 존재 했지만 최소한 천뢰대의 대원들 중 그런 사 람은 없었다. 을지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곁으로 모여든 천뢰대원들 의 눈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현재 너희들 개개인의 활 솜씨는 상당히 뛰어나다.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미안한 말이지만 너희들이 한꺼번에 덤빈다 하더라도 강유 한사람을 상대하기 힘들다. 이유가 무엇일까?” “내공, 즉 화살에 실릴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율천이 말했다. “움직임을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지도 못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왕욱이 거들었다. 을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다. “둘 다 이유가 될 수 있다. 직접 경험해 보면 알겠지.” 그리 말을 하면서 을지호가 화살 하나를 집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오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놓여진 과녁을 지나 백보의 거리에 도착하자 몸을 돌 렸다. 모두들 괴이 여기며 쳐다볼 때 을지호가 실로 예상키 어려웠던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나를 향해 한꺼번에 공격을 해 봐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 도로. 연환사를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 다만 나를 적으로 알고, 반드시 죽여야 한 다는 필살(必殺)의 일념이 담긴 화살을 날려야 한다.” 아무리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하라지만 하늘과도 같은 상전을 향해 화살을 날리라 니!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이었다. 천뢰대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볼 때 한걸음 앞으로 나선 율천 이 소리쳤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자신이 없느냐?”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냐? 설마 나를 염려하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믿고는 있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혹…….” 조심스런 율천의 말에 을지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걱정하지 마라. 그 정도의 공격에 당할 내가 아니니까. 애당초 위협을 느 낄 정도면 이런 짓도 하지 않아. 보기와는 달리 내가 얼마나 겁이 많은 놈인데.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붙들어 매고 공격을 해. 내가 너희들에게 다가갈 테니까 저지해 보라고. 이건 명령이야. 실패했을 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하는 명령.” 농인지 진담인지 도저히 구분이 안가는 말을 신나게 떠들어 댄 을지호는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들고 있던 화살을 흔들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율천은 명령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겨우겨우 활을 세우고 화살을 재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천뢰대원들 역시 서둘러 화살을 재었다. “잘 살펴야 할 거야. 난 조금 빠르니까. 간다!!” ‘간다.’ 라는 말이 끝나는 순간 을지호는 이미 십여 보를 전진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율천의 활에서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쉬이익. 율천의 뒤를 이어 천뢰대원들이 날린 화살이 을지호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살이 손을 떠남과 동시에 또 하나의 화살이 시위에 걸렸고 곧바로 을지호를 향했다. 다소 실력이 떨어지는 대원들은 그들이 가장 자신 있는 속사로 화살을 날렸고 율천과 왕욱은 이참에 실력을 보이겠다는 듯 연환사로 을지호의 요혈을 노렸다. 을지호와 첫 번째 화살 군(群)이 만난 것은 칠십 보의 거리에서였다. “제법들인데.” 예상은 했지만 화살에 담긴 힘과 날카로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감탄사 를 내뱉은 을지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천뢰 대가 날린 화살은 을지호의 걸음을 조금도 지체시키지 못했다. 을지호는 들고 있던 화살로 날아오는 화살을 순식간에 쳐내며 오십 보 정도 떨 어진 거리까지 도달했다. 그러자 두 번째 화살 군이 그를 반겼다. 물론 그 전에도 보다 손이 빠른 대원이 날린 화살이 을지호에게 접근했지만 모두 막힌 상태였다. “어이구야! 빠른데.”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감탄사를 내뱉은 을지호, 하지만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이번에는 아예 화살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듯 날아오는 화살을 일일이 손으로 잡거나 슬쩍 건드려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그런 식으로 공격을 막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경악을 하면서도 천뢰대원들은 조금도 쉬 사이 없이 화살은 날려댔다. 쉬이익. 슈슈슉. 기합성도 없이 오직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만이 연무장에 울려 퍼지는 사 이 모든 공격을 간단히 피해내고 단숨에 이십 보 거리에까지 도착한 을지호는 낚아채어 들고 있던 몇 개의 화살을 천뢰대원들을 향해 내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화살은 그 어떤 화살보다도 빠르고 날카로웠으면 강맹했다. 목표 가 된 율천, 왕욱 등이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접근한 화살은 그들의 팔소매를 꿰뚫어 버렸다. 망연자실, 누구 한사람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 호흡도 되지 않을 그 짧은 순간이었다. 개인당 적게는 두발 많게는 네다섯 발의 화살을 날렸으니 을지호에게 날아간 화 살이 어림잡아 삼십 여발, 그러나 어느 하나 적중하지 못했다. 접근도 하기 전에 을지호의 화살에 막히고 손에 잡혀 버렸다. 심지어 반격을 당해 무참하게 당하 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보았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직접 당한 사람의 심정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뭘 그리 놀라? 설마 내가 당할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 즐겁게 여흥을 즐긴 사람처럼 손을 탁탁 털며 접근한 을지호는 벌어진 입을 다 물지 못하는 천뢰대원들을 보며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율천이 석상처럼 굳은 몸을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물었다. “어찌 그러긴, 실력이지.” 을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개를 흔드는 율천은 여전히 지금의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자, 이제 알겠지. 너희들 말대로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간단히 쳐냈다. 화살에 한껏 힘이 실려 있었다면 그리 쉽지는 않았을 테지. 또한 미처 몇 발의 화살을 쏘기도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어. 그나마 일직선으로 왔으니까 그랬지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면 어땠을까?” “화…살이… 접근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율천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고. 어쨌든 최소한 강유 정도의 고수를 만난다면 지금의 실력으론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어. 그렇다면 강유 정도, 아니, 그 이상의 고수를 만나게 되면 어찌해야 할까?”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율천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고수를 만나 목숨을 잃으면서 실력 타령을 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내가 괜히 힘써가며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란 말이지. 자, 내가 가진 힘이 약 하다. 나의 동료들의 힘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상대의 힘은 강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뭔가를 눈치챘는지 왕욱이 대답했다. “합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합공을 해야지.” 을지호는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치며 동의를 했다. “그러나 이미 실패를 했습니다.” 이미 수십 발의 화살로 실패를 맛본 상황, 율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합공이 아니야.” “예?” 을지호가 손짓으로 천뢰대원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 “잘 들어봐. 합공이란 말이지, 여럿이서 그렇게 무작정 공격을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야.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그렇게 정교해야 한다.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는 합공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났지. 오히려 동료의 방해만 줄 뿐이니까.” “하지만 궁은…….” 뭔가 반박을 하려했지만 율천의 말을 곧바로 이어진 을지호의 말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궁 또한 다르지 않다. 조금 전을 상기해 볼까? 너희들이 나에게 날린 화살은 오 직 나의 상체만을 노리고 있었다. 특히 가슴으로 집중되더군. 아무리 수가 많더 라도 한곳으로 집중되는 공격은 막히기 쉽다. 알기 쉽게 이렇게 흔들기만 해도 막 을 수 있었다.” 을지호가 화살 하나를 들어 자신의 가슴 어귀에서 마구 흔들었다. 부끄러웠는지 그 모습을 본 천뢰대원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또한 첫 번째 공격은 거의 동시에 도착해서 화살로 막아냈지만 두 번째 공격은 시간차가 있어 일일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이것을 합공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율천 또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만약 두어 개의 화살이라도 가슴이 아닌 다리를 노렸으면 어땠을까?” “아!” 천뢰대원들이 숙였던 고개를 들며 눈을 반짝였다. “동시에 머리, 목, 가슴, 배, 다리를 노린 화살이 도착했으면 어땠을까?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내가 피할 것이란 가정 하에 화살을 날렸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쉽게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을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의 표정에서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을 하는 듯 했다. “하하, 뭐, 나야 상관하지 않았을걸. 그 정도로 나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장난기 어렸던 을지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강유는 절대로 쉽게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너희들에게 당할 수도 있었겠 지.” 그제야 을지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파악한 천뢰대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실력이란 한 순간에 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약한 화살이라도 여려 개가 모 이면 동강내기가 쉽지 않듯 너희들이 마치 하나의 기계처럼 맞물려 적을 노린다면 그의 목숨을 쉽게 거두진 못한다하더라도 그 역시 너희들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말을 마친 을지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귀담아 듣는 천뢰대원들의 반응을 살피며 내심 흡족해 했다. “이것으로 너희들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어찌하면 상대를 접근시 키지 않을까? 누가 상대의 이목을 끄는 공격을 하고 누가 주공이 되어 상대의 목숨을 노릴 것인가? 만약 적이 피한다면 그 이후의 공격은 어찌 할 것인가? 적절 한 공격의 순간은 언제인가? 함께 연습하고 실행해 볼 것이 너무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에만 매달리라는 말은 아니야. 그래도 아직은 개인적인 수련이 많이 필요하니까. 다만 수련 중 틈틈이 궁으로써 합공을 하는 것을 연구해 보라는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천뢰대원들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극도의 공경이 담긴 인사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몸을 돌리려던 을지호가 잊어먹은 것이 있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아까 화살을 날렸을 때의 거리가 얼마 정도인줄 알아?” “글쎄요, 한 이십 여보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 정확히 이십 보였지. 묻겠다. 만약 합공을 했는데도 적이 그 정도의 거리 까지 접근했다면 어찌해야 할까?” 을지호가 도대체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지 못했기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간 을지호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도망쳐.” “예?” 혹여 잘못들은 것은 아닌지 크게 눈을 뜬 율천이 되물었다. “도망치라고. 만약 적이 그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했다면 죽었다 깨도 막지 못해. 그러니 무조건 도망치라고. 괜히 어줍지 않게 까불다 비명횡사를 하는 수가 있으 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란 말이야. 자, 오늘은 여기까지. 난 강유에게 좀 가봐야겠으니 다시 수련들 하라고.” 을지호는 율천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돌리고 손을 흔들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냐?” 율천이 멍한 눈으로 을지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분명 도망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 나도 그리 들었어. 분명 도망…치라고…….” 을지호의 등에 고정된 율천의 눈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떠날 줄을 몰랐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0 “흐흠, 강유 녀석, 잘 하고 있나 모르겠군.” 어이없어 하는 천뢰대를 뒤로하고 연무장과 세심각(洗心閣)을 지나 홀로 떨어져 무공을 익히고 있는 강유에게 향하는 을지호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는 세가의 식솔들과 천뢰대원들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최근 들어 하고자 하는 일이 너무나 잘 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일은 을지호가 남궁민과 서로 얼굴을 붉힌 후 그대로 떠나려하는 노인 을 붙잡고 끈질기게 따라붙어 설득에 성공하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반대할줄 알았던 남궁민이 노인에게 오히려 사과를 하고 태상호법(太上護法)에 추대하는 파격을 감행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남궁민을 바라보며 그저 외마디 탄식을 내뱉은 태상호 법은 바로 그날부터 남궁세가의 무사부로서 역할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 며칠은 그저 수련과정을 둘러보는 것으로 그치더니 마침내 오일 째가 되는 날부터 한사람씩 불러 그에게 필요한 조언과 충고, 질책을 하기 시작했다. 장황할 것도 없이 그저 짧고 간결하게 지적하는 수준, 그런데 을지호가 간과하고 놓치기 쉬웠던 부분에 대해서도 태상호법은 정확한 지적을 했고 충고를 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연륜이라는 것은 무서웠다. 말 한마디 한마디 가 금과옥조(金科玉條)와 다름없었다. 어찌나 정확하게 속속들이 파고드는지 그가 남궁세가의 전대 어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정도였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동료들에 비해 한발 앞서나갔지만 스스로의 한계에 막혀 고심하고 있던 천도문, 태무룡(邰武龍), 연능천(燕凌天) 등이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이후 무서운 속도로 실력을 쌓아 나갔다. 을지호의 체면 때문에 태상호법으로 추대하기는 하였지만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남궁민 또한 자신이 시전하는 무공을 간단 히 살핀 후, 너무나도 쉽게 잘못된 곳을 지적하는 태상호법의 말에 내심 경악하며 그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자 남궁세가의 모든 식솔들은 태상호법을 더 이상 낯설어 하 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진정한 무사부로 여기면 을지호를 대하는 것 이상의 존경심과 공경을 보였다. “흐흐흐, 무사부로 모시길 정말 잘했어.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대단하 신 분이야. 후~ 솔직히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아무튼 한시름 덜었다 니까. 이제는 앞으로 나갈 일만 남았군. 확실한 자금줄도 확보가 되었으니.” 그랬다. 사실 을지호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한 것은 노인을 무사부로 초빙하여 성과를 거둔 것도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까지 압박을 해왔던 자금난이 상당부분 해소가 된 데에 있었다. 그들이 악록산의 일을 마치고 세가에 돌아온 지 정확히 열흘째 되던 날, 을지호 는 해웅에게서 온 한통의 서신을 받았다. 서신에는 과거 장사표국에 집중되었던 은한상회의 모든 거래가 운한표국으로 돌 려졌다는 것과 아울러 소문을 접한 다른 상단에서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일을 맡겨온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일손이 모자라 매일같이 표사를 고용하고 쟁자수 를 구한다는 말과 너무 바빠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지난 한달 동안 운한표국이 얻은 수익의 절반이 도착했는데 예상보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 돈을 보며 을지호과 곽 노인은 물론이고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남궁민마저 은연중 미소를 지을 정도였다. 그렇듯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니 을지호의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 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흐뭇해하며 수련장소에 도착한 을지호는 한쪽 발을 비스듬히 앞으로 내밀고 검의 손잡이에 살짝 손을 얹고 있는 강유를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강유가 맹렬한 속도로 검을 빼어 한번 휘둘렀다. 목표가 어떤 것인 지 확인도 하기 전에 검을 거두더니 재차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검 역시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어둠만이 존재하는 검집으로 되돌려졌다. 그러기를 서너 번, 잠시 자세를 바꾼 강유는 조금 전과 같은 동작을 계속해서 반 복했다. “쯧쯧, 여전하고만.” 벌써 보름째였다. 다른 식솔들과 함께 무공을 익히는 뇌전, 초번과는 달리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히 지 않을뿐더러 가급적 보지도 않으려 외따로이 수련을 하는 강유는 태상호법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특유의 왕성한 호기심으로 가르침을 받기 위 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강유가 추구하는 것의 쾌였다. 어려서부터 해남파의 무공을 익히기는 하였지만 형인 강명과는 달리 해남파의 무공에 그다지 심취하지 않았던 그는 빠르다는 것, 찰나에 승부를 보는 쾌검에 대해서만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특히 을지휘소로부터 무심지검을 보고 배우게 되면서 그의 열망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비록 너무 위험하다는 을지호의 충고 대로 무심지검을 익히는 것은 포기하고 말았지만 이후에도 그의 관심사는 오로 지 쾌검뿐이었다. 그런 강유의 말을 듣고 한참이나 심사숙고한 태상호법이 진지하게 건넨 한마디 는, ‘떨어지는 나뭇잎을 베도록 하여라.’ 라는 너무나 쉽고 간단했으며 힘이 빠지는 수련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까다로우며 뼈를 깎는 노력을 요하는 것인지 알게 된 것은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강유가 수련하는 곳에는 남궁세가와 함께 세월의 부침(浮沈)을 묵묵히 견뎌낸 수 령이 제법 된 괴목(槐木:느티나무)이 자라고 있었다. 태상호법은 그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단 하나도 놓치지 말고 벨 것을 명 했다. 단, 검은 늘 검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많은 의아심이 들었지만 강유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나뭇잎을 베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계절적인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나뭇 잎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떨어진다 해도 그 범위가 너무 넓어 놓치기 쉬웠다. 또한 안다고 해도 웬만한 집중력이 아니면 나뭇잎을 벨 수가 없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 실로 가녀린 몸을 가지고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나 뭇잎은 날카로운 검에도 잘 베어지지 않았다. 빠르고 날카롭지 않으면 검의 주인을 비웃기라도 하듯 검날을 타고 올라가 춤을 추었다. 물론 어려서부터 이런 수련 에 이골이 난 강유의 검에는 한 치의 허점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처음 몇 개는 완벽하게 반으로 갈라져 땅에 떨어졌으나 그의 집중력은 한나 절을 가지 못했다. 서너 시진이 지나도록 떨어지는 나뭇잎은 고작 대여섯 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나뭇잎을 기다리는 시간은 끔찍이도 지겹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긴장을 풀었다가 나뭇잎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런 망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뭇잎이 떨어지기만을 마냥 기다리던 강유는 어느날 태상호법으로부터 불호령 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교를 들었다. ‘쾌검의 생명은 바로 집중력이다. 늘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가 단 한번에 모든 힘 을 폭발시킬 수 있는 집중력, 그 한수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발검(拔劍)이 느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적의 검이 뻔히 날아오는 것을 간파하고서도 나의 검이 늦는다면 하겠느냐? 물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발검이 빨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 니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자는 결코 쾌검을 익혔다고 할 수 없을 것 이다. 내가 네게 나뭇잎을 베라는 것은 그러한 집중력과 발검의 능력을 키워주고자 함이다. 언제 어디서 떨어질지 모르고 또 떨어진다 해도 극도로 긴장하지 않으 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나뭇잎의 움직임을 간파하기 위해선 극도의 집 중력이 필요할 것이며 그 즉시 대응하여 검을 뽑을 수 있으려면 발검의 능력을 키워 야 할 것이다. 그렇게 멍청히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 검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똑 같은 자세에서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과 당당하게 마주서서 뽑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길을 걷다가 뽑게 될 수도 있다.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 심지어 측간에서도 검을 뽑아야 할 위 급한 상황이 닥칠 때가 있다. 적은 그렇게 찾아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움직임 으로 떨어지는 나뭇잎과 같이 말이다. 그때는 어찌 하겠느냐? 검을 뽑아 막아낼 수 있겠느냐? 적의 공격보다 빨리 말이다.’ 그 이후 강유는 괴목의 주위를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네다섯 번씩 검을 꺼냈다 넣었다 하였고 그때마다 자세를 바 꾸었다. 또한 모든 일상이 발검을 위한 연습과정이 되었다. 밥을 먹는 중에 갑자 기 검을 휘둘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검을 뽑았다. 휴식을 취하면서도 발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오랜만에 술을 들이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강유는 그렇게 점점 검에 미쳐가고 있었다. “쯧쯧, 그렇게 성의 없이 검을 뽑아서야 실력이 늘겠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땀으로 범벅이 된 강유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냥 농을 걸고 싶었는지 을지호의 음성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힘들어 죽겠으니까.” 힐끗 고개를 돌린 강유가 자세를 풀고 고개를 한바퀴 돌리더니 어깨를 주무르며 걸어왔다. “왜? 그만 하려고?” “예, 그렇잖아도 쉴 때가 됐습니다. 어르신이 너무 무리하는 것은 도리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지요.” 어르신이 태상호법을 가리키는 것은 주지의 사실, 고개를 끄덕인 을지호가 괴목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래, 성과는 좀 있고?” “글쎄요,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잘 모르겠…….” 말끝을 흐린 강유가 난데없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대더니 을지호를 향해 검을 뽑으려 하였다. 물론 시도일 뿐이었다. “아서라, 아서.” 그 짧은 시간에 어디서 구했는지 강유의 목에는 자그마한 작대기 하나가 닿아 있었다. “으…….” 검을 겨누기는커녕 반도 뽑지 못한 강유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놈아, 어디 시험할 상대가 없어서 내게 장난질이야? 호랑이 앞에서 발톱 자랑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떻게 알긴, 뻔히 보이는데.” 을지호가 나뭇가지를 던지며 대꾸했다. “거참, 이상하네…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꺼내다 만 검을 제자리에 집어넣은 강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을지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가 바위에 앉자마자 그의 등 뒤에서 준엄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공에 있어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 오셨습니까?” 보지 않아도 음성의 주인 태상호법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화들짝 놀란 강 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을 돌려 예를 표했다. “제대로 하고 있나 보러 왔건만 하라는 수련은 하지 않고 분수도 모르고 장난이 나 치고 있으니…….” “죄, 죄송합니다.” 강유가 고개를 들지 못하자 을지호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시지요. 그래도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모양인데요. 뭐, 수련 의 성과도 알고 싶기도 했겠지요.” “며칠이나 했다고 수련의 성과가 나와? 잠을 잊고 수련을 해도 될까 말까한 것 을. 그렇게 단시간 내에? 어림도 없는 소리지.” 을지호의 변명에 약간 안색을 풀기는 해지만 노기 띤 음성은 여전했다. “그리고…….” 강유를 질책하던 태상호법이 허리를 숙이더니 네 조각으로 잘린 나뭇가지를 집 어 들었다. 마치 일일이 크기를 비교하여 자른 것처럼 같이 조각마다 크기가 일 정한 나뭇잎이었다. “네가 한 것이냐?” “예.” “멍청한.” “예?” 당연히 칭찬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여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던 강유는 예상치 못한 호통에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하라고 했지?” “아, 아니 그게…….” 당황한 강유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다가 을지호에게 도움을 요청이라도 하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껏 웃음을 머금은 을지호는 도와주기는커녕 고개를 흔 들며 약을 올렸다. 태상호법이 어째서 호통을 치는지 알고 있다는 태도였는데……. “쾌검은 기교(技巧)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검을 꺼내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검을 이끌어 적을 베는 것이다. 온 몸의 힘을 한곳에 집중하여 폭발시키면서 말 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이냐? 이렇게 쓸데없는 곳에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고 보느냐?” 태상호법이 네 조각으로 난 나뭇잎을 허공에 흩뿌렸다. “이렇게 네 조각으로 낼 여유가 있으면 한번이라도 더 검을 뽑는 연습을 하거 라.” “아, 알겠습니다.” 강유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풀이 죽은 강유가 안 되어 보였는지 을 지호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또 있다. 아까 내가 너의 공격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이상 했지? 이유는 알고 보면 간단한 거야.” 강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는 있었지만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다음 말을 기다 리고 있는 듯 했다. 그의 그런 행동에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을지호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모든 행동에는 예비 동작이 있다. 짐승이든 사물이든 어떤 동작을 하기 위해선 그 전에 반드시 어떤 조짐이 있지. 그 조짐을 알아낸다면 다음의 동작을 예측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제게 어떤 조짐이…….” 강유가 태상호법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태상호법은 모른 척 몸을 돌리고 있었 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말을 끊고 검에 대해 되도 않는 지식으로 함부로 입을 놀렸 다면 목숨이 달아나기 쉬웠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을지호였다. 태상호법 그 자신도 무공만큼은 을지호에게 자신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대로 용인한 것 이었다. “검을 뽑기 전, 아주 미약하나마 숨결이 흐트러졌다. 어깨도 경직되는 것 같았 고.” “그, 그것이 보였습니까?” “보였으니까 준비를 했겠지? 뭐, 미리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 였겠지만.” “그럼, 그 조짐은 어찌 알아낼 수 있습니까?” 쉽게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는지 을지호도 잠시 뜸을 들였다. “글쎄, 우선 경험이 있을 수 있겠고, 적절한 긴장감도 있고, 주변을 살필 수 있는 빠른 눈도 필요하고… 하지만 무엇보다 감(感)이라고나 할까? 어떤 느낌말이야.” “그것을 흔히들 무인의 본능(本能)이라 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태상호법이 말했다. “그리고 부단히 노력한다면 그 본능조차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검을 가질 수 있으니 쓸데없이 한눈팔지 말고 네가 할 일만 충실히 하여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명심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도록 해라.” 태상호법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고 느끼는 순간 강유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런 강유를 보는 태상호법의 눈가에 언뜻 주름이 잡혔다가 사라졌다. “꽤 괜찮은 녀석이야. 재질도 그만하면 손색이 없고 특히 고집이 있어.” “고집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지요.” 을지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강유의 수 련을 지켜보았다. “그렇잖아도 부르려고 하였다.” 강유가 수련에 몰두하는 것을 응시하던 태상호법이 을지호에게 말했다. 을지호 도 시선을 거두었다. “예? 무슨 일로…….” “듣자니 어제 운… 뭐라는 표국에서 돈이 왔다고?” “예, 운한표국에서 그동안 얻은 수익금 중 일부를 보내왔습니다.” 을지호는 돈을 보내며 빨리 세가로 불러달라고 신신당부하던 해웅의 투정어린 전갈을 생각하며 웃음을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태상호법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렇게 웃고 있을 때더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산중을 호령하는 호랑이가 자신의 먹이를 빼앗겼다. 그것도 아무리 보아도 이빨 하나 제대로 나지 않은 어린 호랑이게 말이다. 너라면 어찌 하겠느냐?” “…….” 태상호법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을지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꽤 많은 액수가 온 것으로 아는데 이쪽에서 얻은 만큼 상대는 빼앗겼을 것이다. 가만있으리라고 보느냐?” “그럴 리야 없겠지요.” 곧바로 안색을 회복한 을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그런데도 너무 태평한 것 같구나.” “그렇게 보였습니까? 저 또한 어느 정도 위기감은 느끼고 있습니다. 무공에만 완 벽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 모든 일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저희가 한 일도 곧 놈들에게 드러나겠지요. 하지만 그 렇다고 딱히 대책을 세우기도 뭐한 것이 지금은 무공을 가르치고 또 익히는 모두 가 벅찰 정도로 열심히 입니다. 그 이상 부담을 줄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다가 무방비로 당하는 수가 있다. 만약 기습을 당해 다른 네가 어찌 손쓸 틈도 없이 당한다면 어찌 하려느냐? 결과야 보지 않아도 뻔하다만 녀석들이 다칠 수가 있어.”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엷게 미소 짓는 을지호는 너무도 자신만만했다. 을지호의 말에 태상호법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미리 대책을 세운 것이 아니더냐?” “하하, 대책이라기보다는 조금 믿는 구석이 있지요.” “흐흠.” 영문을 알 수 없는 을지호의 말에 태상호법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 만 그 순간 을지호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정문위에서 졸고 있을 철왕을 떠올 리고 있었다. ‘녀석이라면…….’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1 * * * * * 칠흑 같은 어둠이 지나가고 먼 동쪽에서 여명이 밝아올 무렵, 일단의 무리들이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각기 적색과 흑색 무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다름 아닌 노호문의 무인들, 용철상 의 명으로 남궁세가를 치기 위해 이틀 밤을 달려온 노호문의 정예였다. 대략 삼십 여명의 인원이 움직이는데도 희미한 발소리만이 들릴 뿐 그 어떤 잡음도 들리 지 않았다. “저 언덕만 넘으면 바로 남궁세가 입니다.” 앞장서서 무리를 인도하는 흑우전(黑雨展)의 부 전주 사청오(司靑烏)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째서 멈추는가?” 용후가 물었다. “이대로 가는 것입니까?” “가지 않으면?” 심드렁히 대꾸하는 용후와 그의 좌측에 서 있는 황유화의 눈치를 본 사청오가 약간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은밀히 일을 처리하려면 이쯤에서 복면 정도는…….” “글쎄… 은밀히 처리를 하러 가는 것이긴 하지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어차피 놈들의 치부가 드러날 터, 우리의 정체가 알려진 듯 뭔 상관이 있겠는가?” “그건 소 문주님의 말이 맞다. 우리가 이렇듯 야음을 틈타 이동을 하기는 해도 그것은 단지 일이 끝나기 전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함이지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괜한 걱정하지 말고 어서 앞장 서거라.” “아, 알겠습니다.” 더 이상 입을 열어봐야 노여움만 살 뿐이라 여겼는지 서둘러 대답을 한 사청오 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수하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하기를 이각 여, 언덕을 오른 그들은 과거의 웅장한 자태는 아니지만 새로운 건물도 세우고 이곳저곳 수리를 하여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규 모를 갖춘 남궁세가를 볼 수 있었다. 남궁세가를 앞에 둔 용후는 오랜 이동에 쌓였을 피로를 잠시나마 풀라는 의미로 휴식을 명하고 몸이 날랜 수하 두 명을 뽑아 남궁세가의 정세가 어떤지 정탐을 하고 오라 일렀다. 그리곤 자신을 따라온 두 장로와 세 명의 호법, 그리고 이번 싸움의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적혈전(赤血展)의 전주 매염교(梅炎皎)와 흑우전의 부 전주 사청오를 불러 모았다. “기왕 시작한 것 시간 끌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휴식이 끝나는 대로 공격을 감 행할 생각입니다. 두 분 어르신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머뭇거릴 것이 뭐 있겠는가? 그냥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야.” 만종의가 발끝에 걸린 풀을 잡아 뜯으며 용후의 의견에 동조했다. “좌 장로께서 당한 것을 보면 한가락 하는 놈이 있을 것이니 조심하는 것도 좋 을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건물을 세웠을 때 지금과 같은 일을 염려해 어떤 장치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 예기치 못한 함정에 걸려 일에 차질이 올 수도 있습니다.” 적혈전의 전주 매염교가 침착히 말하였다. 젊어서부터 문주인 용철상과 함께 생사(生死)를 함께 한 매염교는 비록 위치는 전주에 불과하지만 장로들도 그를 존중 할 만큼 능력과 충성심을 인정받고 있는 사람으로 상문연(尙文延)을 대신해 흑우전을 이끌고 온 사청오와는 격이 달랐다. 신중함을 기하자는 그러면서도 두려운 기색은 조금도 없는 그의 말에 용후는 물 론 황유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 전주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조심은 해야겠지. 하나 남궁세가에 우리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매염교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좌극의 죽음이 언급되자 슬며시 입술을 깨물며 각오를 다진 황유화는 냉기가 깔린 시선으로 남궁세가를 노려보았다. “공격은 세 곳으로 나누어서 하겠습니다. 좌측은 흑우전이…….” “맡겨주십시오.” 용후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자 사청오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우측은 매 전주께서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요.” 다소 들뜬 사청오와는 달리 살짝 허리를 숙여 명을 받은 매염교는 무척이나 진 중했다. “어르신들은 저와 함께 중앙을 치도록 하시지요.” “그리 나누어서 기습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냥 쓸어버리면 되는 것이지.” 만종의가 여러 갈래로 공격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물었다. “하하하,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혹여 도망치는 놈들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흠, 그런가? 난 또…….” 만종의가 멋쩍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는 사이 정찰을 보냈던 수하 두 명이 돌 아왔다. 그들의 보고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정문은 굳게 닫혀있고 벽을 타고 돌아보아도 딱히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애써 담을 넘을 것도 없었군요. 우선 정문을 통과해 각자 맡은 곳을 책임지기로 하지요. 아, 그리고…….” 몸을 일으키던 용후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수하들에게 일러두십시오. 투항하는 자들은 살려두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자 들은 모조리 베버리라고. 또한 절대로 빠져나가는 놈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도 명심하라고 말이지요.” 사청오와 매염교가 조용히 명을 받았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자 사청오를 대신해 이번엔 매염교와 그가 이끄는 적혈전의 무인들이 앞장을 섰다. 매염교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없이 느린 것도 아니었지만 최대한 신중 을 기해 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지형을 자세히 살피고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의 늦은 행보에 다소 불만이 있었지만 용후는 물론이고 황유화도 아무런 제지 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만큼 매염교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있었다. 기척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산길을 걸을 때보다 더욱 은밀해진 노호문의 이동은 남궁세가의 정문에 도착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열어라.” 매염교가 잠깐 동안 정문을 살펴보는 사이 마음이 급했는지 황유화가 기다릴 큼 도 없다는 듯 말했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의를 입은 사내가 달려 나오더니 멋진 도약으로 담 장을 넘어 들어갔다. 끼이익. 특유의 마찰음과 함께 정문이 활짝 열렸다. “가자.” 용후가 다소 흥분된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용후를 필두로 두 명의 장로, 세 명의 호법, 매염교 이하 적혈전에 속한 열두 명, 사청오 이하 열 한 명 등 도합 서른 한명의 무인이 정문을 통해 물밀 듯이 밀려 들었다. 정문에 들어선 노호문의 무인들은 용후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전의 계획대 로 좌우로 흩어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은밀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용후를 수행하고 있는 세 명의 호법은 물론이고 이들 중 최고 의 무공을 자랑하는 황유화와 만종의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그들의 움 직임은 큰 원을 그리며 허공에서 선회하고 있는 철왕은 의해 완벽하게 파악되었다. 태상호법의 우려대로 곧 노호문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을지호는 밤이 되 면 철왕에게 남궁세가의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라 일러두었고 철왕은 주인의 명을 성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막 동이 트는 새벽에 은밀히 움직이는 적의 움직임을 잡아낸 것이었다. 그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모든 행동을 지켜보던 철왕은 정문을 들어 선 노호문의 무인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전각으로 접근하자 그 즉시 날개를 접고 하강을 시작했다. 철왕의 목표는 좌측으로 이동하고 있는 흑우전의 무인이었다. 가장 후미에 처져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내는 자신에게 닥칠 엄청난 재앙을 미 처 깨닫지 못하고 앞으로 있을 싸움만을 상기하며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쉬이이익. 갑자기 요란한 파공음이 연무장에 울려 퍼지고 뒤이어 무엇인가 날카로운 괴음 (怪音)이 남궁세가에 깔렸던 고요함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전자는 하강을 하는 철왕의 속도에 의해 공기가 견디지 못해 내는 소리였고 후자는 철왕이 을지호에 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라 할 수 있었다. “조심해랏!” 다소 뒤에 처져 있던 황유화 등이 뭔가가 접근하는 것을 알아채고 다급히 경고 를 했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철왕의 속도는 그런 경고에 막힐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황유화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목표에 접근한 철왕이 예의 날카로운 발톱을 치 켜세우며 몸을 비스듬히 누였다.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철왕의 발톱이 때마침 고개를 돌린 한 사내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어 목이 완전히 절단되는 것은 막았지만 삼분지 일이 나 되는 살과 심줄이 잘려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크악!!”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2 을지호의 눈이 순간적으로 떠졌다. 유난히 아침잠이 많아 눈을 뜨고도 한참 동안이나 이부자리와 씨름을 해야 겨우 몸을 추스르는 그의 몸이 튕기듯 일어났다. 만약을 대비해 늘 옷을 입고 잤기에 옷을 챙기는 번거로움은 없었다.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침상 곁에 놓아둔 철궁을 집어든 을지호는 처음부터 방에 그가 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의 속도로 사라졌다. 태상호법 또한 을지호와 거의 동시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을지 호처럼 서두르지는 않았다. 천천히 옷을 걸치고 탁자 위에 준비된 물을 들이키며 느긋하게 방을 나섰다. 을지호와 태상호법이 철왕이 내는 신호음에 눈을 떴다면 강유를 비롯하여 나머 지 식솔들은 바로 이어 들려온 비명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곤 허겁지겁 옷을 챙 기고 무기를 챙겼다. 을지호가 방을 나서고 강유 등이 몸을 추스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연무장에선 철왕과 노호문과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철왕의 공격으로 이미 기습은 틀렸다고 생각한 용후의 분노는 자신들의 행사를 너무나 간단히 박살낸 철왕에게 쏟아졌다. “뭣들 하느냐! 고작 새 한 마리를 두고!!” 용후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십 명이 훨씬 넘는 수하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이리저리 날뛰 는 새 한 마리를 막지 못해 우왕자왕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한낱 미물에 불과한 놈이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겁도 없이 달려드는 게 아닌가. 남궁세가를 치기 위해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대자 용 후의 짜증은 극에 이르렀다. 비단 용후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뒤에 물러나 있던 두 장로도 세 명의 호법도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철왕을 상대하고 있는 사청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철왕의 발톱에 제일 먼저 당한 것도 그의 수하였고 두 번째 부상자 역시 흑우전 에서 나왔다. 또한 철왕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하는 이들 역시 흑우전의 무인들이 었다. “만만하게 보지 마라.” 어딘지 이상한 말, 마치 상당한 고수를 상대하는 듯 노호성을 터뜨린 사청오가 직접 검을 빼들고 철왕을 상대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강자를 알아본 철왕은 직접 맞부딪치는 것보다는 살살 약을 올리며 그의 공격권을 벗어났다. “병신 같은!” 사청오마저 그렇듯 헤맬 줄은 몰랐다는 듯 용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 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사청오를 농락하며 하늘로 부상하는 철왕의 곁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 짝 놀란 철왕이 날개 짓을 하며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두어 번의 도 약으로 철왕을 따라잡은 매염교의 검이 철왕의 몸을 강타했다. 천근의 힘이 실린 매염교의 검에 의해 끊어진 연처럼 날아간 철왕은 오장 여를 날아가다가 땅에 처박혔다. 순간 노호문의 무인들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함성 지를 때가 없어서 고작 새 한 마리 해치웠다고 저렇듯 좋아 날뛴단 말인가!! 터져 나오는 함성에 용후는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것은 매염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들 닥쳐!” 인상을 찡그린 매염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함성은 곧바로 잦아들었다. 그러나 매염교의 눈은 이미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매염교의 눈은 막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발 아래로 힘없이 떨어져 내린 철왕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는 을지호에게 박혀 있었다. ‘누군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특별한 살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수에게서 풍기는 그런 기운도 없었 다. 보통 사람에 비해 덩치는 컸지만 딱히 외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딱히 꼬집어 뭐라 말은 할 수 없지만 전신의 세포를 자극하는 묘한 뭔가가 있었다. ‘좋지 않다.’ 오랜 경험을 통해 그런 몸의 반응이 맹렬한 경고의 표시임을 익히 알고 있던 매 염교는 최대한 신중히 자세를 잡으며 물었다. “바로 네놈이로구나. 좌 장로님을 그리 만든 놈이.” 하나 을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철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참이나 철왕을 살피던 을지호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철왕의 몸을 발 로 툭 건드렸다. “엄살 피지 말고 일어나.” 을지호의 발에 잠시 흔들렸을 뿐 철왕은 미동도 없었다. 을지호가 재차 발을 움 직였다. “까불지 말고 일어나라니까.” “뭣하는 것이냐?” 매염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겁을 상실해도 그렇지, 아니, 어쩌면 그것이 절대적인 우위에서 오는 자 신감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앞에 두고 하는 을지호의 행동에 매염교는 어떤 모욕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 놈은 뒈지지… 헛!” 뭐라 말을 하려던 매염교가 다급히 숨을 들이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은 줄 알았던, 당연히 죽었어야 하는 철왕이 꿈틀대더니 다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미물 따위에게 검을 꺼내는 것조차 수치라 생각하여 검집 채로 내려치기는 하였 지만 최소한 칠성 이상의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죽기는커녕 상처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매염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쯧쯧, 그리 까불더니 꼴좋다.” 힘없이 날아오른 철왕이 어깨에 앉자 혀를 차며 장난스레 웃는 을지호, 그러나 철왕이 부리로 볼을 비벼대자 그의 얼굴에선 서서히 웃음이 사리지고 있었다. “그래, 알아… 고생했다.” 처음 철왕이 매염교의 공격에 당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언뜻 보기에도 매염교는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최소한 강유 이상이었다. 철왕이 제아무리 영물 이고 웬만한 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몸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조그만 몸으로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공격까지 견딜 수는 없었다. 천 만다행이도 잠시 기절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아차 했으면 철왕을 잃을 뻔 했다 는 생각이 들자 절로 소름이 돋았다. “쉬고 있어.” 철왕의 날개를 몇 번 쓰다듬은 을지호가 철왕을 날려 보냈다. 활짝 날개를 피며 날아오르는 철왕은 다소 기운을 되찾은 듯 했다. “명줄이 긴 놈이군.” 매염교가 별 탈 없이 날아오르는 철왕을 보며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한소리 했 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불러들일지도 모른 체. 을지호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이 한쪽으로 몰렸다. “최소한 당신보다 길 것 같소만.” 매염교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러나 잠시 화를 억누른 매염교가 물 었다. “네 놈이 좌 장로님을 해한 놈이냐?”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시치미 떼지 마라. 우리는 노호문에서 왔다. 네놈이 좌 장로님을 해한 것도 다 알고 있거늘.” “좌 장로? 아, 몰래 독이나 쓴다던 그 비겁한 늙은이를 말하는 것이오? 소문으로 듣자하니 고작 산 도둑에게 뒈졌다고 들었는데…….”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네놈 따위에게 그 따위 망발을 들으실 분이 아니다.” 매염교가 스산한 살기를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 정도에 입을 다물 을지호가 아니었다. “망발? 웃기고 있군. 허명을 얻은 늙은이에게 그 정도면 감지덕지지. 고작 도적 놈들을 감당하지 못해 몰래 독을 썼다가 망신을 당하고 죽었다는 것은 세상천지가 다 아는 사실이거늘. 지나가는 개를 붙잡고 물어보시오. 자세하게 설명해 줄 것이오. 그건 그렇고…….” 조롱의 빛을 담고 있던 을지호의 눈에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 친구에게 황천 구경을 시켜줄 뻔 한 것에 대한 감사를 하고 싶소만.” “오냐, 얼마든지 오너라. 네놈은 꼭 황천으로 보내주마.” 피식 웃음을 터뜨린 을지호가 철궁을 들었다. 그리곤 어느새 몰려나온 남궁세가 의 식솔들, 특히 천뢰대의 대원들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화살을…….” 왕욱이 황급히 달려와 십여 발이 들어 있는 화살통을 넘겼다. 화살 하나를 빼어 들은 을지호가 그것으로 매염교를 가리키며 선언했다. “내 장담하건데 당신은 나에게 단 한걸음도 다가오지 못할 것이오.” “뭣이!!” 을지호는 발끈하려는 매염교를 무시하고 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잘 보도록.” 고개를 돌린 을지호가 천뢰대원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궁술이다.” 퉁.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화살 하나가 시위를 떠났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3 매염교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은 생각만큼 빠르지 않았다. 느리다 못 해 아예 멈춘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것이 과연 화살인가 의구심을 가질 정 도로 천천히 날아갔다. 한없이 느리기만 한 화살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마저 힘들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 은 단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무공이 깊지 못해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고 믿는 자들이 느끼는 감정일 뿐이었고 심각한 표정으로 둘의 대결을 응시하 는 황유화나 만종의 같은 고수들은 화살에 어떤 힘이 깃들어 있는지, 또 그것을 막아야 하는 매염교가 얼마나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미간을 노리며 천천히 날아드는 화살을 응시하는 매염교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 어 있었다. ‘피, 피할 곳이…….’ 생각 같아선 당장에라도 몸을 틀어 화살을 피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을 튼다 해도, 아무리 빨리 발을 놀린다 해도 느리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낼 것 같지가 않았다. 무엇인가가 몸을 꽉 조이는 듯한 느낌, 그것이 진정 한 고수에게서만 뿜어져 나오는 기세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제야 처음 을지호를 보았을 때 느꼈던 괴이한 감정이 이해가 갔다. “저, 저…….” 그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만종의가 나서려고 하였다. 하지만 황유화는 고개를 흔들며 만종의를 만류했다. “믿어 보세나.” “하지만…….” “그는 무인일세.” 황유화의 한 마디에 만종의는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랬다. 매염교는 무인이었다. 한 자루 검을 들고 강호를 종횡하기를 삼십 년, 많 은 승리를 거두었고 패배도 경험하며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지금의 위치에 오른 진정한 무인이었다. 그냥 이대로 넋을 잃고 패배할 정도로 그는 나약하지 않았다. 매염교는 그런 만종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꼼짝없이 당하리라 여겼던 매염교의 몸이 움직인 것은 화살이 그의 코앞에 이르 렀을 때였다. 피가 흐를 정도로 거칠게 입술을 깨문 그는 아래에 처져 있는 검을 치켜 올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화살을 쳐냈다. “으윽!” 간신히 화살의 진로를 막아낸 매염교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경 악에 찬 표정으로 또 다른 화살을 재고 있는 을지호와 피가 배어 나오는 자신의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약하게만 보이는 화살에 어떤 미증유의 힘이 담겨 있어 매염교 같은 고 수의 검에도 부러지지 않고 손아귀를 찢어버린단 말인가. 게다가 검을 붙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다니… 모르긴 몰라도 매염교의 양팔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진 것 같았다. “잘 막았구려.” 마치 어린아이에게 상을 주는 듯, 그러나 너무나 차갑게 속삭인 을지호가 두 번 째의 화살을 날렸다. 두 번째 화살은 느리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빨 랐다. 누구라고도 할 것 없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들은 곧 허무하게 쓰러질 매염교의 주검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단 한번의 격돌로 상당한 충격을 당하고 심적으로도 매우 놀란 매염교였 지만 그의 정신은 다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두 번째의 공격은 분명 처음과 다를 것이라 예상한 그는 날아오는 화살의 궤적 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틀어 피해냈다. 그리곤 여전히 피가 흐르는 손으로 움켜쥔 검을 치켜세우며 을지호를 향해 내달렸다. 을지호는 그런 매염교를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접근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놀란 황유화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피햇!!” 황유화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매염교가 재빨리 몸을 굴렸다. 순간 뒤로 날아갔다가 되돌아온 화살이 그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 쳐지나가 땅에 박혔다. “이기어시!!” 율천과 왕욱이 동시에 소리쳤다. 을지호가 언젠가 한번 보여준 적이 있던 바로 그 이기어시였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땅바닥을 굴러 화살을 피해낸 매염교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화살이 날아 들었다. 피할 방법은 오직 하나, 매염교는 주저 없이 몸을 굴렸다. “내 친구를 땅에 처박은 대가요.” 스산한 미소를 지은 을지호는 매염교가 미처 자세를 잡을 틈도 주지 않고 연속 적으로 화살을 날렸다. 한 발, 두 발, 세 발……. 숨쉴 틈도 없이 날아드는 화살과 미친 듯이 몸을 굴리며 피해내는 매염교. 둘의 공방을 보며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천뢰대원들은 거의 기절하다시피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날아가는 화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매염교가 그것을 어찌 피하는지도 관심 밖이었다. 그들의 시 선은 오직 을지호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살을 날리고, 다시 시위를 재고 상대를 향해 날리는 일련의 동작들.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싶으면 다른 화살이 그 위치를 대신하고 있었고 그 화살 또한 어느새 다른 화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마치 물이 흐르듯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동작은 감히 그들이 흉내 낼 수 없을 정도 로 빠르고 정확했다. “부, 부끄럽구나.” 율천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빠르기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건만 이건 아예 차원을 달리 하는 경지가 아닌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어찌 생겨났는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 었던 그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큰 자만심에 빠져있었는지를 새삼 느끼며 자책 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을지호의 공격은 계속 되었고 연신 땅바닥을 구르느라 매염교 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눈을 가리고 있었고 이곳저곳 이 찢겨진 옷은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넝마가 되어 버렸다. “제법 잘 피하는구려. 자, 마지막 화살이니 이것도 마저 잘 피해보시구려.” 어느새 왕욱이 준비한 화살도 한 개뿐이었다. 매염교로 하여금 수도 없이 땅을 구르게 만드는 것으로 철왕이 진 빚을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한 을지호는 이제 끝을 볼 때라 여기며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그 틈을 이용하여 간신히 몸을 일으킨 매염교는 양손으로 검을 짚고 흔들거리는 몸 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막 마지막 화살을 날리려는 을지호의 귀로 태상호법의 노한 호통 이 들려왔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깜짝 놀란 을지호가 얼른 활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남궁민의 곁 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태상호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네 놈 하는 꼴이 너무 우습지 않느냐?” 갑작스런 호통에 을지호는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식솔들이 당황하는 빛이 역력 했다. “생사를 걸고 다투는 적에게도 차려야할 예의라는 것이 있다. 더구나 무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네 실력이라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났을 싸움이었다. 한데 너는 그러지 않았다. 상대에게 온갖 모욕을 주고 조롱을 했다. 도대체 이 따위 한심한 짓을 누구에게 배웠단 말이더냐? 삼류 건달조차도 부끄러워 삼가는 일을 말이다 . 소문에게 배웠느냐?”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에 그제야 아차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인 을지호는 황급 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면, 환야에게 배웠느냐?” “아닙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지금의 네 꼴을 보니 네 아비의 모습이 보이는 구나. 또한 소문과 환야게 네 아비나 너를 어찌 가르쳤는지도!! 못난 것들 같 으니!!” 가히 추상과 같은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하지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조금도 틀 린 곳이 없기에 을지호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추, 추태를…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을지호가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의 잘못으로 부모는 물론이고 조부모까지 싸잡아 욕을 먹게 되자 천하의 죄 인이 된 것 같았다. 고개를 숙여 잘못을 비는 을지호는 더불어 자신이 왜 그리 흥분을 했는지, 상대 에게 그토록 심한 모욕을 주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철왕…….’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어려서부터 형제와 같이 자란 철왕이 죽임을 당할 뻔했다 는 충격이 그를 그토록 모질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변명꺼리가 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수양(修養)도 얕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태상호법 역시 을지호가 왜 그렇게 흥분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도 변명하지 않고 잘못을 시인하는 태도에 화가 조금은 누그러진 듯 했다. “철왕이 네게 소중한 친구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네가 한 행동을 정당화시킬 순 없다.” “알고 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을지호가 또 다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태상호법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게 죄송할 것 없다. 네가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할 상대는 내가 아니라 따로 있지 않느냐?” 태상호법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을지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이 오직 마지막 한 수를 위해 몸을 추스르고 있는 매염교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무인으로서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짓을 했소.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을지호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 잠시 입을 열지 못하던 매염교가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크크, 실력이 없어 그런 것이니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자, 쓸데없는 소 리는 그만두고 이제 끝을 보자꾸나.” 이미 끝난 싸움이라는 것은 매염교 역시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를 그대로 버리지 않기 위해 전신의 힘을 한곳으로 끌어 모았다. ‘내 어쩌자고 저런 인물에게 모욕을 주었단 말인가.’ 을지호는 매염교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투기에 감탄하며 자신의 짧았던 행동을 후회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이유에서라도 매염교에게 후회 없는 일전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마지막 공격이 될 것이오. 최선을 다하는 공격이 될 터인즉 진정 조심해야 할 거요. 그러나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소. 그것은 결코 당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을 빌고 당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리하는 것이니 오해는 마시구려.” 말을 마침과 하나 남은 화살을 시위에 재는 을지호는 더없이 진지했다. “타핫!!” 조금 전만 하더라도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던 매염교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 지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을지호를 향해 무섭게 질주했다. “안돼!!” 매염교의 자세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적을 공격하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 는 것을 알아차린 황유화가 소리를 치며 만류를 하려 하였지만 이미 말리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공격의 음험함에 태상호법마저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건만 을지호는 조금도 개의 치 않았다. 퉁.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그리고 곧바로 터져 나오는 경악에 찬 탄성들. “아!” “저, 저럴 수가!!” 시위를 떠난 화살은 을지호의 손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묘한 흔들림을 보이더 니 순식간에 수없이 많은 잔상(殘像)을 만들어냈다. 하나의 화살이 두 개로, 두 개에서 네 개로, 네 개에서 다시 여덟으로… 끝내는 그와 매염교와의 모든 공간이 수십, 수백이 넘는 화살의 그림자로 덮어 버렸다. ‘이, 이런… 무공이…….’ 매염교는 시야에 들어오는 무수히 많은 화살을 보며 넋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 다. 분명 실체는 하나이건만 보이는 것은 수십 수백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실체가 아닌 환영(幻影)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끝이로구나.’ 미처 시전 되기도 전에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을 느낀 매염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검을 내려뜨렸다. 다만 단 한발, 진실한 화살을 찾고자 두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자그마한 바람도 어깨에서 시작 된 고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크윽!” 뼈를 깎는 고통이 이보다 더 괴로울까? 어깨에 박힌 화살을 잡으며 휘청거린 매 염교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 이게 무슨 무…고…….” 그러나 그는 대답도 듣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환영시(幻影矢)… 실로 오랜만에 보는군.”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음성의 주인에게 쏠렸다. 그런 시선에 상관없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태상호법의 얼굴엔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있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4 “네, 네놈이 감히.” 쓰러진 매염교에게 다가왔던 적혈전의 한 무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을지호를 향해 돌진했다. “흐흐흐, 어디를…….” 가당치도 않다는 듯 괴소를 터뜨리며 나선 뇌전이 그를 막아섰다. “죽어랏!!” 상대가 누구라도 가리지 않겠다는 듯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얼굴엔 오직 매염교 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만이 떠올라있었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전주를 잃은 적혈전의 무인들이 달려들고 용후의 명을 받은 흑우전의 무인들까지 싸움에 가담했다. “와아!” “죽여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그 들은 ‘악도들을 몰아내라.’ 는 남궁민의 명에 일제히 검을 치켜들었다. 오십 여명도 넘는 인원이 뒤섞인 연무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을 변했다. 누가 아 군이고 누가 적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는 신음소리, 혼신의 힘을 다한 기합성만이 연무장을 가득 메울 뿐이었다. 그래도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던 노호문의 무인들 이었다. 쌍방간에 직접 검을 맞대는 인원은 비슷했지만 노호문의 무인들은 고르고 고른 정예들, 움직임 자체가 남달랐다. 엄밀히 말해 무공 하나만을 놓고 따지자면 오히려 수많은 영약으로 내공을 키우 고 을지호와 태상호법에게 집중적으로 조련을 받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더 뛰 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흑우전과 적혈전의 무인들은 노호문의 모든 행사에 앞장서 해결하는 이들,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백전노장(百戰老將) 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반해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변변한 실전 경험이 없는 그저 비무에만 익숙한 이들이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노호문의 무인들이 남궁세가의 무인들보다 보다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상 황판다도 빠르고 또한 냉정하게 상대를 바라볼 줄 알았다. 바로 그것이 비록 개 개인의 무공에서 다소 모자란 감이 있지만 오히려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원동력 이 되었다. “크악!” 남궁세가의 무인 중 한명이 일 검을 허용하며 땅에 쓰러졌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미 대항할 힘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구해내기는 하였지만 그를 구하느라 박빙의 싸움을 하고 있던 동료들까지 심하게 밀리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천만다행이도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 상자와 그 외의 부상자가 속출하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을지호가 싸움에 끼어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묵묵히 싸움을 지켜보던 태상호법은 그가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피해가 너무 큽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지 않느냐?” “목숨을 잃기 전에 막아야지요.” 너무나 무심히 대꾸하는 태상호법의 반응에 을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생겨 목소리가 높아졌다. 태상호법이 물끄러미 을지호를 바라보았다. “고작 몇 명이지만 우리 쪽의 아이들이 숫자가 더 많다. 또한 무공도 대체적으로 높은 것 같다. 그런데도 밀리는 중이다.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그야…….” 뻔히 알고 있었지만 을지호는 대답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혼자 백번을 수련하는 것보다 한번의 비무가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아무리 많은 비무를 한다 해도 그것 역시 고작 간접경험일 뿐,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실전과는 또 다르다.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는 한번의 실전경험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너 역시 알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큰 부상도 당하겠지.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 쳐야만 제대로 된 무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언제까지 온실의 화초처럼 네 품안 에서 키울 생각이냐? 저 녀석들도 이제는 스스로 변화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바 로 저 녀석처럼.” 태상호법이 가리킨 사람은 어깨에 입은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기세를 올 리고 있는 천도문이었다. “저 녀석도.” 천도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서 좌충우돌 움직이고 있는 연능천 또한 천도문 못 지않게 잘 싸우고 있었다. “진정 저 아이들을 위한다면 지금은 그냥 지켜봐 줄때다. 너와 내가 가르친 아이 들이다. 힘도 들고 많은 피해도 입겠지만 이겨낼 수 있다. 그러니 그렇게 몸 달아 하지 말고 지켜만 보거라. 네가 나설 때는 저들이 움직였을 때뿐이니까.” 태상호법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을지호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으로 전황을 살피고 있는 용후와 그 주변의 장로, 호법들이 있는 곳이었다. 태상호법이 지적하는 것에 딱히 반박을 할 말이 없기에 참고는 있었지만 을지호 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못했다. ‘후~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좋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 해도 전세를 단숨에 돌려놓을 방법이 있었다. 싸움이 시작 됨과 동시에 재빨리 뒤로 물러난, 을지호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천뢰대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율천.] 을지호의 전음에 율천이 곧바로 대답했다. [예, 호법님.] [준비는 끝났겠지?] [예.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자신감도 좋지만 과신은 하지 마라. 또한 화살 한 발 한 발에 신중을 기해. 늘 말했듯이 저렇듯 뒤엉켜 있는 상황에선 도움은커녕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 으니까.]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율천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을지호도 만족스러운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단의 화살이 전장으로 날아들었다. 쉬이이익! 가장 먼저 도착한 화살은 힘들게 천도문의 공격을 막아내던 적혈전 무인의 허 벅지에 가서 박혀버렸다. “크윽.” 뭔가가 날아온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있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천도문의 공 격 때문에 달리 대처를 할 수 없었던 그는 화살이 주는 고통,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짧은 틈 때문에 천도문의 검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과 함 께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천도문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나는 필요 없으니까 끼어들지 말라고!!” 그리곤 다른 상대를 찾아 분주히 몸을 놀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을지호의 말대로 신중을 기하느라 한꺼번에 많은 화살이 날아들은 것은 아니었 지만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드는 화살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소리로, 반대로 노호문의 무인들에겐 듣는 것조차 끔찍한 공포로 전해왔다. 위기에 처했을 땐 적의 공세를 차단하는 구원병의 역할을 하고 공격을 할 땐 든 든한 원군이 되어 그 효과를 배가 시키며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너무나도 정확히 화살을 날리는 천뢰대원들의 궁술 솜씨는 혹시나 하는 을지호의 염려가 기우라 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훌륭했다. “조, 조심해랏!!” “으… 비겁한 놈들.”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다소 우위에 있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일 푼도 안 되는 것, 그렇잖아도 버거운 싸움을 하고 있던 노호문의 무인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들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거리가 먼데다가 코앞에 상대가 있기에 어찌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몇몇이 천뢰대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기도 했지만 접근하기도 전에 집중사격을 당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듯 눈앞의 적과 보이지도 않는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노호문의 무인들 은 참으로 힘든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쯧쯧,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갑작스레 날아든 화살을 보며 고개를 돌린 태상호법이 혀를 찼다. 하지만 을지호 는 태연히 대꾸했다. “실전경험은 저 녀석들에게도 필요하니까요.” “말이나 못…….”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하던 태상호법이 입을 닫고 다소 얼굴을 굳혔다. 을지호 의 눈이 그의 시선을 따라 재빨리 이동했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많은 없었던 모양이구나.” 태상호법이 용후를 비롯한 그 주변에 있던 고수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변하 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으니.” “다들 만만찮은 실력을 지닌 것 같았다. 저들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상황은 또 달 라질게다.” “그렇게 못하도록 만들어야지요. 그런데… 도와주시겠습니까?” 태상호법의 지위가 아무래도 걸렸는지 을지호가 다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해 보이긴 하지만 내가 도와줘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퉁명스런 어투에 을지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입니다. 더구나 저들 모두가 제게 덤빈다면 모를까 한 명이라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낭패일 수도 있으니까요.” “…….” 태상호법은 대답대신 전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알았다. 다른 곳에 끼어들지는 못하게 해주마.” “감사합니다.” 밝게 웃은 을지호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지만 태상호법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5 “어르신들께서 나서주셔야겠습니다.” 급변하는 전세를 심각하게 지켜보던 용후가 황유화에게 정중하게 청했다. 그가 비록 문주의 지위에 다음가는 소 문주라는 위치에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 면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 일행의 실질적인 수장은 황유화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상황이 좋지 않아.”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용후가 가리킨 사람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을지호였다. 그러나 을 지호에게 힐끗 시선을 던진 황유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위험해. 매 전주 정도 되는 인물을 가지고 논 녀석이야.” “매 전주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제 아래입니다.” “물론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문주를 뵐 면목이…….” 황유화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지 말끝을 흐렸다. “제가 부족해서 그리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요. 하나 그럴 일은 없습니다. 놈 의 궁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목표를 맞히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니까요.” “흠, 그럴 수도…….” “소 문주의 무공은 우리도 익히 알지 않습니까? 특히 그 신출귀몰(神出鬼沒)한 경공술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 그렇게 걱정하실 일만은 아니라 봅니다.” 만종의까지 거들고 나서자 황유화로서도 더 이상 만류할 수는 없었다. “알겠네. 그럼 놈은 자네가 맡도록 하게나. 대신, 절대로 놈을 얕보아서는 안 되 네. 마지막에 보여준 무공은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대단한 것이었어.” “놈의 강함은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염려놓으십시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린 용후는 을지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안심이 안돼. 수고스럽겠지만 자네들이 만일을 대비해 준비를 해두게 나.” 걱정스런 눈길로 용후를 보던 황유화가 세 명의 호법에게 넌지시 일렀다. 어쩌면 자존심이 상할 부탁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 승리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 문주의 안위였다. 그들은 조금의 부만도 드러내지 않고 순순히 허락했다. “그러지요.” “고맙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바로 저 노인뿐인데…….” 눈을 돌려 태상호법을 쳐다보는 황유화의 안색은 을지호를 바라볼 때보다 더욱 어둡게 변했다. “도대체가 알 수가 없으니…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제법 만만치 않을 것 같군요.” 만종의도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태상호법을 응시했다. “만만한 정도가 아닌 것 같네. 강한 듯 하면서도 약한 것 같고. 약한 것 같으면 서도 은연중 절대자의 기도가 보이니 저런 인물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없어.” “흠, 그런가요? 뭐, 일단 부딪쳐 보면 알겠지요.” “그래야겠지. 우선 내가 저 자를 상대할 테니 그 사이에 자네는 아이들을 돕게 나.”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종의가 다소 장난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 냐는 뜻이었는데……. “나도 그리 약하지만은 않다네.” 만종의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제가 실언(失言)을 했습니다.” 황유화의 입가에 고소(苦笑)가 지어졌다. “아니네. 사실 나 역시 불안한 것은 사실이니까. 가급적 빨리 끝을 맺고 나를 도 와주어야 할 것 같네.” 황유화가 누구던가! 노호문의 대장로이자 문주인 용철상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지닌, 한번 화가 나 무공을 펼치면 천자(天子)가 와도 말릴 수 없다하여 폭멸도(爆滅刀)라 불리는 노 호문 최고의 고수가 아니던가. 그런 황유화가 합공을 언급한 것이었다. ‘말, 말도 안 되는!’ 노인의 기세가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황유화가 조금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녔던 그는 순간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강타하는 충 격에 몸을 떨었다. “그, 그 정도입니까?” “그 이상!!” 황유화가 자르듯 대꾸했다. 그런데 그의 음성이 어딘가 모르게 경색되어 있었다. 만종의는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느 샌가 그들의 정면으로 정체모를 그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을지호가 용후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자 태상호법도 황유화 등을 상대하 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둘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듯 연무장을 가 로지르는 그의 걸음은 느긋하기만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피아를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로 얽혀 있는 연무장을 통과하면서도 태상호법은 조금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어떤 힘에 이끌렸는지 그 누구도 그의 곁으로 접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치열하게 싸움을 하던 이들이 그들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피 할 정도였다. ‘진짜다. 저잔 진짜야.’ 지금껏 이런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해 보아도 단연코 없었다. 꿀꺽. 만종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었다. 조금씩 접근하는 상대를 노려보는 만종 의는 자신의 손에 땀이 고여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검을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에게 삼장 가까이 접근한 태상호법이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엄청난 살기 가 황유화와 만종의의 전신을 압박했다. 예기치 못한, 전격적인 기습 공격에 황유화와 만종의는 당황했다. 살기는 예리한 검이 되어 그들의 몸을 난도질 하려는 듯 미쳐 날뛰었다. “크으으.” 만종의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라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하지만 황유화는 달랐다. 애병(愛兵) 한혈도(寒血刀)를 힘껏 움켜쥐고 전신으로 전해지는 압박감과 싸우고 있던 그는 어느 정도 몸을 수습하자 큰 기합성을 내지르며 한혈도를 휘둘렀다. 도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들이 그와 만종의의 몸을 옭아매고 있던 무형(無形)의 기운을 가닥가닥 끊어버리자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제법 실력이 있구나.” 비록 전력을 다한 것도 물리적인 공격도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공격이면 웬만한 고수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 그럼에도 황유화는 비교적 쉽게 막 아냈다. 태상호법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황유화의 실력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과찬이외다.” 황유화가 잔뜩 경계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다. 그 정도면 훌륭하다.” “선배의 존대성명을 여쭤도 되겠소이까?” 황유화의 나이가 올해로 일흔 하나, 보통 때라며 대뜸 하대를 해내는 상대의 태 도에 화를 내도 수십 번을 냈을 것이다. 아니, 화를 낼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나 상대의 이름을 묻는 그의 태도는 그 자신도 이 해하지 못할 정도로 더없이 정중했다. 태상호법은 물끄러미 황유화를 응시했다. 그리곤 간단히 말했다. “네겐 자격이 없다.” “음.” 황유화의 입에서 짧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모욕도 이만한 모욕이 없었다. 그러 나 그는 참았다. 도저히 상대의 역량을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나선 사람은 곁에 있던 만종의였다.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감히 어디서!!” 그렇잖아도 조금 전 기습 공격에 망신을 당했던 것이 죽도록 수치스러웠던 그였 다. 거기에 황유화를 무시한 말까지 듣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놈의 간을 확인하리라!” 버럭 소리를 지른 만종의가 검을 치켜들었다. “…….”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태상호법이 땅에 떨어진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허공으로 떠오른 검은 순식간에 태상호법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실로 절정의 섭물신공(攝物神功). 황유화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만종의에게 그 조차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악문 만종의는 황유화가 말릴 사이도 없이 태상호법에게 달려들었다. 삼 장 정도의 거리는 만종의 정도의 고수에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작은 키 에 땅딸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빠르기로 접근한 만종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뻗었다. 흥분은 했지만 상대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 일말의 방심이 있을 수 없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푸르스름한 검기가 태상호법 을 압박했다. “좋군.” 무엇이 좋은 것인지 뜻 모를 소리를 내뱉은 태상호법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만종의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 그러나 그 한 수로 만종 의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다지 큰 충돌을 일으킬 것도 없이 압도적 인 힘으로 공격을 제압한 태상호법의 검이 만종의의 목을 노리며 느리게 날아들었다. “멈추시오!” 가만히 두었다가는 만종의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여긴 황유화가 태상호법의 좌측 을 공격했다. 그에게 폭멸도라는 명성을 얻게 해준 도법, 뇌령도법(雷聆刀法)이었다. 막강한 내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뇌령도법은 몸의 기운을 검봉(劍鋒)으로 모아 폭 발시키듯 힘을 발출하는 것으로 천둥치는 같은 소리가 들린다는 특징이 있었다. “뇌령도법?” 황유화의 손에서 뇌령도법이 펼쳐질 줄은 생각 못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태상 호법은 만종의에게 향하던 검을 돌려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황유화의 도를 막았다. 꽈꽈꽝!! 뇌령도법을 펼치면서 들려온 천둥소리에 이어 지축을 흔드는 충격음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런 굉음과는 어딘지 이질적인 신음소리와 함께. 결과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만종의를 구하기 위해 태상호법을 공격했던 황유화는 일곱 걸음이나 뒤로 밀려 나서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으으… 컥!” 황유화가 한 사발이나 되는 피를 토해냈다. 단 한번의 충돌로 심각한 내상을 입 은 것이었다. 만종의라고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황유화를 막아낸 태상호법의 검에 옆구리가 흉하게 갈라지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반면에 두 명의 고수를 물리친 태상호법은 소매에 묻은 먼지를 털 정도로 여유 가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옆구리를 부둥켜안은 만종의는 자신들에게 일어난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비록 흑도 전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절대 고수는 아니라지만 세상에 누가 있어 한 지역의 패주를 자처하는 노호문의 두 장로를 무참히 쓰러뜨릴 수 가 있을까. 아무리 이해를 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그들에게 닥친 작금의상황은 엄연한 현실, 말을 잃은 황유화와 만종의는 그 저 멍한 눈으로 태상호법을 쳐다볼 뿐이었다. 황유화와 만종의를 무너뜨린 태상호법은 들고 있는 것도 귀찮다는 듯 손에 쥔 검을 내던졌다. 그리곤 몸을 돌려 여전히 싸움에 한창인 연무장을 응시했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은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지.” “그, 그럴 수는 없소이다.” 입에 묻은 피를 닦아낸 황유화가 힘겹게 입을 놀렸다. “너희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난 이번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 그 결과가 어찌 나오든. 하지만 내 말을 무시하고 굳이 나서려고 한다면 또다시 손을 쓸 수밖에 없다. 미리 일러두거니와 검을 뽑은 이상 나는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다. 살아남 으려면 나를 이기거나 내가 인정할 정도의 무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 평생 동 안 그런 인물은 몇 없었다. 경고하는데 절대로 두 번의 요행은 없다.” 자신이 인정하는 고수가 몇 없다니!! 실로 광오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지만 황유화의 눈엔 그것이 사실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속속 쓰러지는 자신들의 수하들과 장차 노 호문을 이끌어 가야할 소 문주, 그리고 무엇보다 문파의 명예는 목숨을 버려서라 도 지켜야할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결심이 눈빛을 통해 태상호법에게 전달되었다. 태상호법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의 요행은 없다고 말했다.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애써 벌주(罰酒)를 마시 려 하지 말거라. 네 아비의 얼굴을 보아 참는 것은 조금 전 한번으로 족하니.” “그, 그게 무슨 말이오?” 태상호법에게 달려들기 위해 막 몸을 움직이려던 황유화가 기겁을 하며 물었다. “아비 이름이 황곡(黃鵠)이 아니더냐?” 황유화로선 기절할 일이었다. 적의 입에서 이십 년 전 돌아가신 부친의 이름이 나오지 않나, 게다가 말투를 보 아하니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어, 어찌, 아버지를…….” “그 녀석이 아주 애송이였을 때 인연이 조금 있다. 그때는 뇌령도법이 미완성이 었는데 지금은 제법 그럴듯한 무공으로 변했구나. 하긴, 어린 나이였지만 대단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지.” 갈수록 가관이었다. 부친의 이름에 부친이 말년에 완성한 뇌령도법까지 정확하 게 알고 있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부친이 살아있다면 세수 구십이 넘는 나이였다. 그런데 애송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나이를 먹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 단 말인가. “마, 말도 안 되는… 도대체 연세가…….” “나이라…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네 아비와의 정리는 한번으로 족 하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두 번은 없다.” 선언하듯 말을 마친 태상호법이 몸을 돌렸다. 황유화와 만종의는 움직이지 못했다. 어찌 보면 허점투성이의 자세, 하지만 그들 에겐 더 높은 벽과 다름이 없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6 한편 을지호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던 용후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용후의 최대 장기는 빠른 발이었다. 현란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묶고 그 틈을 헤집고 들어가 승리를 이끌어 내는 방식, 그리고 강호의 일절로 꼽히는 어 기선풍(御氣旋風)은 그것을 충분히 가능하게 할 만큼 뛰어난 신법이었다. 처음 을지호를 상대하기 위해 나설때만해도 용후는 승리를 자신했다. 상대가 제 아무리 뛰어난 궁술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몸에 접근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더구나 궁술의 약점인 접근전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의 착각이었음은 금방 밝혀졌다. 어기선풍은 분명 뛰어난 신법이었다. 황유화와 만종의가 인정할만큼 빠르고 현 란했으면 상대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현란하게 움직이는 용후의 움직 임에 가소로운 미소를 지으며 시위를 재는 을지호에겐 어기선풍은 한낱 잔재주에 불과할 뿐이었다. 을지호가 화살을 날리는 속도는 용후의 상상을 초월했고 또한 정확했으며 날카 로왔다. 목표를 빗나간 화살이 마치 생명이 깃든 것처럼 집요하게 물고늘어질때는 용후의 등에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특히 한번에 세 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고 그것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며 다가올 때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야 했다. “상당히 몸이 날래구려.” 들고 있던 궁을 내리는 것으로 폭풍처럼 이어졌던 공격이 끝남을 알린 을지호가 말했다. 상당히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을지호는 용후에게 변변한 상처하나 입히지 못했다. 그의 신법을 다소 과소평가했던 그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다, 닥쳐랏!” 을지호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모욕한다고 여긴 용후는 거친 숨을 몰 아쉬며 소리를 질렀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맞서라.” 순간 용후의 신법이 뛰어남에 감탄했던 을지호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비겁? 지금… 비겁이라 했소?” “그렇다. 네놈이 사내라며 화살 따위나 쏘아댈 것이 아니라…….” 약이 잔뜩 오른 용후는 자신의 말이 말도 안되는 억지임을 따질 겨를도 없이 을 지호를 자극하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내렸던 궁을 다시 끌어 올리는 을지호, 그는 화살도 없이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당겼던 시위를 제 자리로 돌리고 궁을 내렸다. 그리곤 차갑게 미소지었다. “신법에 꽤나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훗, 좋소. 내 시험해 보리다.” 말을 마친 을지호가 발을 들어 땅을 굴렀다. 그러자 발 아래에 떨어져 있던 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자, 오시구려.” 검을 잡고 두어번 휘두른 을지호가 검을 까딱이며 도발을 했다. “바라던 바다. 타핫!!” 드디어 제되로된 실력을 보여 줄수 있다고 여겼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용후가 몸을 날렸다. 최단거리로 둘의 거리를 좁혀오는 용후, 그런데 마치 분신술이라도 쓴는지 몸이 서넛은 더 되어 보였다. 발놀림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현란했으 면 좌우로 흔들리는 몸 또한 어느것이 진영(眞影)이고 잔영(殘影)인지 구분이 가 지 않을 정도였다. ‘흠, 자부심을 가질만 한데.’ 어느새 코 앞까지 육박하는 용후의 움직임은 멀리서 볼 때와는 그 위력에서 천 지차이가 났다. “죽어랏!!” 분명 정면에서 음성이 들려왔건만 휘두르는 검은 좌측에서 날아왔다. 음성이 따 라오질 못할 정도로 순간 이동을 한 용후의 능력이 새삼 돋보이는 공격이었다. 그와 같은 공격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을지호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말았다. ‘베었다.’ 자신은 했지만 뭔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용후는 검을 통해 전해지는 감촉 에 짜릿한 희열을 느끼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런 도취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목덜미에 와 닿는 섬찟한 느낌, 그리고 들려오는 음성. “좋아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소만.” “으… 도, 도대체…….” 손에 전해온 감촉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거만 들려오는 음성은 무엇이고 또 목을 자극하는 차가운 느낌은 뭐란 말인가. ‘자, 잔상을 벤것이란 말이가.’ 용후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을지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 동작으론 나를 잡지 못하오. 한번 더 기회를 주겠소.” “다, 닥쳐랏!” 검날이 목에서 치워지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린 용후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곳에 을지호는 없었다. 검은 그저 애꿎은 허공만을 가를 뿐 이었다. “고작 이따위 실력으로 정면 대결 운운했단 말인오?” 어느새 뒤로 돌아간 을지호가 용후의 목에 검을 들이대며 말했다. 무인이 상대에게 등을 보였다는 것 이상의 수치는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신 법에 자신이 있던 용후의 충격은 상단한 것이었다. “으아아!!” 당장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성을 잃은 용후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이후 단 한번도 을지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예측 불가능한 동작으로 혼란을 주려 해도 마치 그림자인 등 뒤로 따라붙는 을지호의 신형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으…….” 을지호와 자신의 수준차이를 안 용후는 결국 힘없이 검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떨 어뜨렸다. “죽…여라…….” 패배를 자인한 용후는 떨리는 음성과 함께 검을 놓았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랏!!” 황유화의 당부로 용후를 지켜보던 세 명의 호법들이 앞세우며 용후를 보호하기 위해 을지호에게 달려들었다. “네… 이, 이름이 무엇이냐?” 사청오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강…유.” 사청오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들썩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강유가 묘하게 입술 을 비틀며 대답했다.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맞부딫친 그들의 무공은 가히 백중세. 둘의 싸움은 누가 우세하다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상대에게 일검을 허용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상으로 되갚아 주었고,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둘의 상처는 점 점 깊어갔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사청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분명 남궁세가의 사람이 아니다.” “무슨 소리요?” “흐흐, 소위 정파라는 놈들의 무공은 너처럼 독랄하지 않아. 남궁세가의 무공이 라면 더욱이 그렇지.” 사실이 그랬다. 엄밀히 따져 해남파는 정사 중간의 위치로 정파에 보다 치우친 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무공은 정파의 무인들조차 경원시 할 정도로 날카롭고 살기가 짙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늘상 해적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왜구의 침입을 받는 해남도를 지키다보니 자연적으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실 전을 통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적을 쓰러뜨리기 유용한 무공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누구의 검이 독랄한지 모르겠소.” 강유가 피식 웃음며 대꾸했다. “흐흐흐, 하긴, 내 검 역시 만만치는 않지. 자, 이제 끝을 낼 때가 된 것 같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소.” 그 말을 끝으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한 대화는 끝이 났다. 겉으론 태연한 척 해도 둘 다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강유는 왼쪽 허벅지 와 옆구리, 목덜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사청오는 가슴과 어깨에 각각 큰 부상을 입었다. 흘린 피만 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치사량(致死量)에 이를 정 도였다. 당장 치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며칠은 꼼짝도 않고 치료에 전념해야 할 부상이었지만 둘 다 조금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대신 최후의 한 수를 위해 힘을 끌어모았다. “간닷!!” 먼저 움직인 것은 사청오였다. 그는 현재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또한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인 광한마검(廣寒魔劍)의 절초를 위해 몸을 던졌다. 쾌검의 생명은 바로 집중력이다. 늘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가 단 한번에 모든 힘 을 폭발시킬 수 있는 집중력, 그 한수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온 몸의 힘을 한곳에 집중하여 폭발시키면서…….’ 강유는 태상호법의 말을 뇌리에 떠올리며 검을 움직였다. 사청오에게 향하는 검의 움직임엔 그 어떤 기교도 없었고 조금의 군더더기도 보 이지 않았다. 나뭇잎을 벨 때의 바로 그 자세, 모습이었다. 그 자신과 사청오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 버린 강유의 검은 사청오의 공격이 채 다 펼쳐지기도 전에 한낱 신기루로 만들어버리더니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의 가슴마저 반으로 가르고 지났다. “크윽.” 불로 가슴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을 하자 입에선 고통의 신음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터져나오고 부릅뜬 눈에선 경악의 빛이 흘러나왔다. “이, 이런 검을 가지고 있으면서…….” 강유의 검이 그토록 빠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듯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지은 사청오는 힘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곤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운이… 운이 좋았을 뿐이오.” 힘없이 고개를 흔드는 강유, 그 역시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믿지 못하 는 표정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7 두 명의 장로가 태상호법에게 묶인데다가 사청오마저 강유에게 쓰러지면서 싸움 은 천뢰대의 효과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노호문을 몰아붙이는 남궁세가의 압도 적인 우세속에서 서서히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새로운 상대를 맞이하게 된 을지호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악양삼웅(岳陽三雄)이라 한다.” 무수한 암기를 앞세워 을지호를 막고 용후를 구해낸 세 명의 호법 중 가장 맏형 인 듯한 자가 입을 열었다. 막고자 했다면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 손을 쓰지 않았던 을지호는 상대의 말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묻지 않았소.” 을지호는 다 끝난 싸움에 무엇하러 끼어들었냐는 뜻으로 말을 한 것이지만 중년 인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 입을 열었던 사내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상대는 매염 교를 쓰러뜨리고 용후에게 패배의 쓴 잔을 마시게 만든 실력자. 혼자 경거망동 해서는 결코 상대할 수 없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동생들에게 신호를 하는 중년인의 태도는 신중하기만 했다. 그 의 신호를 받은 나머지 두 명이 을지호를 포위하기 위해 좌우로 움직였다. 그런데 을지호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흠, 다 끝나가고 있군.” 아무리 천뢰대가 지원을 했다지만 예상외로 압승을 거둔 것을 기뻐하며 미소를 짓던 을지호는 자신에게 서서히 접근하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끝내야겠군.’ 이미 끝난 싸움, 더 이상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검을 버리고 궁을 들었다. 그리고 화살도 없는 시위를 한껏 잡아당겼다. 그러한 을지호의 행동에 의아심을 느꼈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그의 능력에 은근 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악양삼웅은 한껏 긴장하며 조심을 했다. 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위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위를 떠난 무엇인 가가 악양삼웅의 막내 맹연(孟沇)에게 은밀히 다가갔다. 아무런 형체도 소리도 없는, 그러면서도 치명적인 위력을 지닌. 무영시(無影矢)였다. “뭐, 뭐야… 크윽!” 무엇인가가 다가온다고 느낀 맹연이 기겁을 하며 피하려했지만 그는 미처 몸을 틀기도 전에 허벅지를 관통하는 고통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놈!!”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맹연이 당했다는 것은 분명 을지호의 공격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포위망을 갖추며 서서히 접근하던 나머지 형제들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퉁. 퉁. 그들을 피해 훌쩍 뒤로 몸을 날린 을지호가 연속적으로 시위를 당겼다. 거의 동 시에 궁을 떠난 두 발의 무영시가 각각의 목표를 향해 은밀히 접근했다. “크헉!” 둘째인 맹윤(孟崙)의 입에서도 맹연과 마찬가지의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분명 화살은 없었다. 그런데 어깨를 관통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 도대체 무엇이…….”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맹윤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악양삼웅의 맏형이자 무공이 만종의에 못지 않았던 맹덕(孟德)만은 무영시 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 이것이 무엇이냐?” 검을 들어 가까스로 막기는 하였지만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다섯 걸음이나 물러 난 그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무영시라 하오. 이번 것은 경고요. 어차피 싸움은 끝이 났소.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물러나시오.” “무, 무영시… 멋진 이름이다.” 맹덕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탄성을 내뱉더니 감히 덤빌 생각을 하 지 못하고 부상에 신음하는 동생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놀라 두 눈을 부릅뜬 용후에게 시선을 두었다. 자신은 어찌해야 할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으니 명을 내려달라는 의미의 눈빛. “…….” 매염교가 당했고 노호문의 그 누구보다 빠른 신법을 자랑했던 자신이 다른 것도 아닌 신법으로 농락을 당했다. 거기에 장로들 못지않은 무공을 지닌 세 명의 호 법들이 접근하기도 전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장로들 조차 어찌된 일인지 정체모를 노인에게 잡혀 힘을 쓰지 못하는 듯 했다. ‘정녕 이대로…….’ 한참 동안이나 을지호를 노려보던 용후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로 물러 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도저히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 물러서십시오.” 안도의 숨인지 아니면 자괴감으로 인해 나오는 한숨인지 뜻모를 숨을 짧게 내뱉 은 맹덕은 그 즉시 검을 거두었다. “퇴…각…을…….” 이를 악물고 죽기보다 하기가 싫었던지 퇴각이란 단어를 던지듯 내뱉는 용후의 얼굴은 붉다못해 검게 변해 있었다.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멍하니 전황을 살피던 맹덕이 큰 소리로 외쳤다. “퇴각하라.” 맹덕의 외침이 연무장에 울려퍼지고 동시에 싸움을 멈추라는 을지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궁세가와 노호문의 무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끝난 것 같군.” 태상호법이 황유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 황유화와 만종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돌아가거라.”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몸을 돌린 태상호법이 승리를 자축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세나.”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당한 참담한 패배,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 아들이기 쉽지 않았는지 용후에게 걸어가는 황유화의 어깨는 아래로 축 처져 있 었다. 퇴각이란 명령이 떨어졌지만 노호문의 무인 중 명령에 제대로 따른 이는 몇 되 지 않았다.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고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중상을 입은 자가 대여섯, 나머지 인원들도 크고 작은 부상에 제 몸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용후는 물론이고 장로들까지 나서서 부상자들을 수습한 이후에야 노호문의 무인들은 남궁세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실 그것도 그들마저 응징해야한다는 말들이 비등했음에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명한 을지호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새벽녘 노호문의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작된 싸움은 치열한 공방 속에서 남궁세가가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끝이 났다. “중상자가 여섯에 경상자는… 대부분입니다.” 초번이 조금은 들뜬 어조로 말을 했다. “대승입니다. 형님.” 붕대로 전신을 감다시피한 강유가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렇지만 유한(柚翰)의 죽음은 예상밖의 일이었어.” 담담히 대꾸하는 을지호의 안색은 대승을 거둔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이상할 정 도로 밝지않았다. 이번 싸움에서 유일하게 목숨을 잃은 유한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치열했던 싸움을 생각하면 피해가 그정도로 그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요.” 밝게 웃던 강유도 다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후, 그래. 모두다 무사했으면 다행이겠지만 그건 내 욕심이겠지.” 좋지 않은 기억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든 을지호가 아직도 흥분을 가 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곽 노인에게 말했다. “유한의 식솔들에게 오늘의 일을 잘 설명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편의 를 제공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부족하겠지만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부상당한 녀석들의 치료는 잘 되고 있습니까?” “예. 마을에서 의원을 불렀습니다. 중상자들을 제외하곤 다들 며칠 푹 쉬면서 정 양하면 괜찮아 질 것이라 합니다. 원체 건강한 몸들이라.” 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침을 튀겨가며 아침에 있었던 싸움, 그리고 자신의 활약상 을 동료들에게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곽 노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행이군요. 그리고 저들이 두고간 시신들은 어찌 하셨습니까?” “말씀하신대로 모두 관에 안치시켰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시켜 노호문으로 보내도록 하지요. 그건 그렇고…….” 을지호의 시선이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궁민에게 향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싸움 내내 그녀가 보여준 활약상은 대단한 것이었 다. 무공도 무공이었지만 혼전 중에도 식솔들을 독려하며 사기를 끌어올리는 등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천뢰대의 도움도 큰 몫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 역시 이 번 승리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누구보다 이번 승리를 기뻐해야 할 그녀는 정작 승 리를 자축해야할 때가 되자 입을 다물고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을지호가 넌지시 물었다. “어때? 가주로서 첫 번째 맞은 싸움, 또 싸움에서 승리를 한 소감이?” 모두의 시선이 남궁민에게 향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궁민의 입에선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 “하하하하, 너무 기뻐 말문이 막히신 모양…….”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뇌전이 호탕하게 웃다 강유의 눈치를 받고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거냐?” “…….”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드는 남궁민, 그녀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고 입술이 미 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해봐. 무슨 일이야?” 평소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묻는 을지호도 조금은 긴장한 듯 했 다. “떨림이… 멈추질 않아요.” “떨림이라니?” 되묻는 을지호의 말에 남궁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싸울 때는 몰랐는데… 싸움이 그치고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전신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말끝을 흐린 남궁민이 손을 가슴에 대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 토할 것만 같아요. 자꾸만 생각나서…….” 점점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을지호의 표정도 점점 굳어갔다. “생각? 뭐가 생각나는데?” 을지호의 질문에 불현듯 고개를 흔든 남궁민의 표정이 내랭하게 변해버렸다. “관둬요. 이해도 하지 못한 텐데…….” 남궁민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남궁민의 냉정한 태도에 움찔한 을지호가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무심히 앉아 있던 태상호법이 입을 열었다. “놀랄 것 없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태상호법을 향했다. “아무도 네게 강요하지 않았다. 네 스스로가 한 일이다. 또한 네가 걸어가야 할 길을 감안하면 오늘 일은 아무것도 아닐 터, 누구도 네 아픔을 대신 해주지 않 는다.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어딘가 이상한 남궁민의 태도와 이해할 수 없는 태상호법의 말에 다들 의구심을 가졌지만 을지호는 그 말듯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이었구나.” “…….” 남궁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후~ 그래, 자의든 타의든 사람을 벤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 남궁민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 조용히 한숨을 내쉰 을지호가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보듬었다. 하지만 남궁민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틀었다. “아, 그래서…….”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강유 등이 짧은 침음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무난한 삶을 살면 더없이 좋으련만 사람의 일이란 언제나 마음먹은대로 되 는 법이 없었다. 특히나 무공을 익힌 사람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분쟁에 휩 쓸리게 되고 또 상처를 주고 목숨마저 빼앗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무인의 숙명이라 할 수 있었다. “잊어 버리세요. 괴로워하면 할수록 누님만 힘들어집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 누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비록 노략질에 열을 올리던 왜구였지만 강유 역시 첫 번째 살인을 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또한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동안 힘들했던 적이 있었다. 그 아픔을 알기에 강유는 남궁민이 지금 겪는 감정의 괴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방안에는 그런 감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나원, 또 무슨일 이라고. 그까짓 도둑놈들 목숨을 빼앗기로서니 뭐가 그리 큰일 이랍니까? 죽이지 않았으면 죽었을 겁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뇌전이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 말을 했다. 그러나 남궁민을 위로한답시고 별 뜻 없이 내뱉은 말로 인해 그는 을지호에게 호된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대신 바닥에 착 가라앉은 음성. 을지호의 싸늘한 음성에 화들짝 놀란 뇌전과 초번이 벌떡 일어나며 자세를 가다듬고 남궁민마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을지호를 응시했다. “뭐가 큰일이냐고? 지금 그렇게 말을 했느냐? 뇌전!!” 조금씩 커지는 을지호의 음성엔 노기를 넘어 진한 살기까지 담겨 있었다. “주, 주군.” 지금껏 그와 같은 모습을 보지 못했던 뇌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길을 가다 죽은 짐승을 보아도 찜찜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벌레 한 마리라도 생명을 가진 것을 죽일 때는 마음이 편치 않아야 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이다. 하 물며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며 잠을 자고 사랑도 할줄 아는 사람이다. 아무리 적 이라지만 인명을 빼앗는 일을 그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다니!!” “죄, 죄송합니다.” 어려서부터 해적의 소굴에서 생활을 했고 당연히 해적으로 자라난 그에게 상대 의 생명은 고려해야할 가치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자리를 잡았다지만 초창기의 거룡단은 그야말로 죽고 죽이는 삶의 연속으로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선(善)이 아니었던가. 그에게 있어 싸움이란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라는 실로 간단명료한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 뿐이었는데……. 을지호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눌린 뇌전은 그저 자신의 잘못만을 빌 뿐이었다. “후~ 관두자. 너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을.” 연신 잘못을 비는 뇌전의 모습에서 그가 과거 어떤 생활을 했었는지를 상기한 을지호는 그렇게 화를 낼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노기를 누그러뜨렸다. 무거운 적막감이 방안을 휩쓸고 잠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 을지호가 남궁민 에게 말을 했다. “힘들 것이다. 많이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태상호법님 말씀대로 네가 이겨내는 수밖에 없구나.” 그런데 한껏 염려가 담긴 을지호의 충고에 보인 남궁민이 반응은 실로 의외였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말하지 마세요.” “무슨 뜻이냐?”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고요? 오라버니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군요.” 평소의 그녀라면 을지호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그런식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생 처음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충격은 그녀로 하여금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해야 할 말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 아가씨.” 깜짝 놀란 곽 노인이 남궁민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난 사람을 죽였어요. 그것도 두 명이나. 그래요, 몸이 떨려요. 가슴이 답답하기 도 하군요. 그런데 한편으론 통쾌해요. 지금껏 우리를 무시했던 놈들을 그렇게 도륙내고 보니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 뭐가 잘못이죠? 그의 말대로 죽이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인데 그게 잘못인가요?”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남궁민의 눈동자엔 전에 볼 수 없는 광기(狂氣)가 나타 나고 있었다. “…….”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거지요? 호호, 다른 사람도 아닌 오라버니 입에서 생 명 운운하는 말이 나오니 너무 우…….” 남궁민의 말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강유가 그녀의 수혈을 집었 기 때문이었다. “아, 아무래도 충격이 큰 것 같습니다.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형님.” 강유가 쓰러지는 남궁민을 안으며 말했다. “글쎄…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후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생명 운운하다니…….” 그리 말을하는 을지호의 표정은 더없이 쓸쓸했다. “혀, 형님.” 강유가 난감한 표정으로 을지호를 불렀지만 을지호는 대답대신 죽은 듯 정신을 잃고 있는 남궁민을 쳐다보았다.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휴식이 필요할 거다. 잘 보살펴 줘.”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을지호가 방을 나섰다. 그 누구도 그의 발길을 붙잡지 못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다들 어쩔 줄을 몰라하며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이 전부였다. 다만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태상 호법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을지호를 따라나섰을 뿐이었다. 을지호를 따라간 태상호법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안주 도 없고 오직 술만 있는 술자리. 별다른 대화도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만 마시는 그들은 병으로도 모자라 두 동이의 술독을 단숨에 비워냈다. “너답지 않구나.” 상당히 취한 을지호에 비해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듯 을지호가 따라준 술을 단 숨에 들이킨 태상호법이 잔을 건네며 말했다. “흐~ 이게 제 진짜 모습입니다.” 잔을 받고 고개를 네다섯 번이나 흔든 을지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쓸데없는 소리, 철 모르는 어린아이가 한 말이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쓸데없는 말이요? 아닙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던데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생명 운운할 자격이 없는 놈입니다. 암요, 자격이 없고 말고요.” 연거푸 석잔의 술을 들이키는 을지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어둡고 슬펐다. “…….”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라 직감한 태상호법이 물끄러미 을지호의 얼굴을 응시했 다. “크크, 들어보시겠습니까?” 제 딴에는 태상호법을 응시한다고 노력은 했지만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 때문에 자꾸 고개를 흔든 을지호는 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제 몸에는 괴물이 살고 있습니다. 피만 보면 미쳐 날뛰는, 도저히 억제하기가 힘든 놈이 말이지요.” 태상호법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언제더라… 그렇군. 열 다섯 살 때였군. 늙어 돌아가실 때가 되서 그러신 것인 지 아니면 할아버지 말씀대로 노망이 난 것인지 두분 고조부님, 참, 어르신도 잘 아시지요? 아무튼 그분들이 제게 내공을 몽땅 전수해 주셨습니다. 뭐, 아직까지 온전히 제것으로 만들지 못했지만 말이지요. 흐흐흐, 내공만을 따지면 천하에 적 수가 없을 겁니다. 아, 아니다. 아버지가 있었지. 돌아가신 할머니 뱃속에서부터 내공을 키웠다고 하더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내공입니다.” 을지호가 두 잔의 술을 더 마셨다. “제가 어디까지 했지요? 흠, 아,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구름 한점 없는 정말 맑은 날이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출행랑의 수련을 마치고 출동(出洞)하는 저를 반겨주었지요. 사실, 하도 고생을 해서, 모든 내공을 폐하고 동굴에 집어넣었다니까요. 나원, 치사해서. 그래서 동굴만 나가면 집안을 확 뒤 집어 놓으려고 했었는데… 흐흐, 그놈의 바람이, 폐부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바람이 그런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렸지요.” 실실거리며 웃던 을지호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지어졌다.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친구… 아니지. 제가 좋아했던 아이입니다. 나보다 한 살 어렸는데 사냥을 하다 우연히 알게되었지요. 집에서 꽤나 먼 거리에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왜 집으로 가지 않았냐고요? 흐흐, 그건 나도 잘 모 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땐 그랬어요. 그냥 보고 싶어서…….” 을지호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지고 슬픔만이 남아버렸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활을 만들어 달라고 따라다니던 꼬마들도, 너털 웃음을 지으며 또 말썽을 피웠냐고? 기왕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라며 반기던 박(朴)씨 아저씨도 없었고, 저만 보면 장기(將棋)를 두자고 판을 꺼내는 먹쇠 아 저씨도 없었고 아저씨를 꽉 움켜쥐고 억척스럽게 삶을 꾸려나가던 아주머니도 없었지요.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슬며시 손을 잡아주던 그 아이도 없었습니다 . 마을엔… 그저 불에 타다 만 집과 사지가 무참히 잘린 시신…들만이 널려 있었습니다.” 을지호의 전신에서 태상호법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미친 듯이 찾아 해맸지요. 그리고 그 시체 더미 속에 발가벗겨 숨져 있는 그 아이를 찾아내었습니다. 제가 선물한, 늑대이 빨로 만든 팔찌를 꽉 움켜쥔 그 아이를 말이지요. 그 뒤론… 그 뒤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태상호법을 압박했던 살기는 언제그랬냐는 듯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 다.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처럼 이제는 동이째 들어 술을 들이 붇던 을지호는 술독에 남은 마지막 한방울의 술까지 마시더니 의자에 몸을 한꺼 뉘였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묵묵히 술을 들이키던 태상호법이 물었다. 살짝 감겼던 눈이 떠지고 닫혔던 을지 호의 입이 또다시 열렸다. “후~ 그 날 이후로 며칠 흘렀는지 모릅니다.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요. 다만… 어린아이의 울음에 눈을 떴을 때, 저를 찾아나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외침을 듣고 정신을 차렸을 때 벌어진 일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눈가에 잡힌 주름이 을지호의 말을 듣는 태상호법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는데……. “제 손에 어린…아이가 잡혀 있더군요. 그 아이도 곧 죽고 말았지만, 그리고 끔 찍하게 살해된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크크크,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제가 죽인 사람이 삼백 명도 넘는답니다. 삼백 명…….” 이때만큼은 태상호법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음.” 어찌된 상황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을지호는 분명 마을 사람들을 해친 자들을 찾아 나섰을 것이었고 닥치는대로 살상을 했을 것이다. 그 안에는 패악질을 일삼던 놈들고 있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사람들도 있었 을 터, 그가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하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 식구들도 볼 수가 없었지요. 죽 음까지도 생각했지만 못난 놈이라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더할 수 없이 비겁한 놈 이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대신 몸에 깃든 괴물을 없애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지요. 보다 강해지면 놈을 제거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집을 떠나 죽어라 수련을 했습니 다. 십 년이란 세월을 보낸 지금, 흐흐흐 이제는 놈과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 받 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뇌리를 떠나지 않 는군요. 아직도…….” “…….” “이 빌어먹을 기억을 생각할 때마다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할머니께서 할아버지 를 막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때도 있습니다. 흐흐흐, 뭐, 가끔이지만요.” “…….” “이런… 제가 생명… 운운하다니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큭큭큭,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럼…요,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 을지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만취할 대로 만취한 그는 술기운 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것도 네 스스로 이겨내야 할 일이로구나. 힘은 들겠지만…….”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을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술을 들이키던 태상호법이 천천 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며칠 걸릴 것이다. 그리 알고 있거라.” 태상호법이 자리를 떠나자 을지호가 걱정되어 따라왔던 초번, 그리고 뇌전의 등 에 업힌 강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을지호의 말을 들으며 무척이나 놀랐는지 그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방황을 한 이유가 이것이었습니까?” 나직히 한숨을 내쉰 강유가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을지호를 안쓰 럽게 바라보았다. 그제야 십여 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던 그의 기행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취했던 을지호는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의 입에서 어떤 말들 이 흘러나갔는지 또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태상호법과 둘의 대화를 몰래 들었던 강유, 뇌전과 초번, 그리고 강유를 통해 을지호의 과거 를 알게 되고 곧바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용서를 빈 남궁민만이 마음속 비밀로 간직한 체 가슴 속 깊이 묻어둘 뿐이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8 * * * * * 탕!! “그러니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아니지, 성과를 거두기는커녕 차마 입으 로 꺼내기도 힘든 수모를 당하고 돌아왔다는 말이냐?” 표정의 변화 없이 용후의 보고를 듣던 용철상은 결국 쫓기듯 퇴각을 했다는 대 목에 이르로 노호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용철상의 호통에 용후는 고개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남궁세가를 치기 위해 삼십이 넘는 인원이 문파를 떠났건만 돌아온 사람은 절반 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게다가 돌아온 사람들 중 멀쩡한 사람은 극 소수에 불과 했으니……. “말을 들어보니 그… 궁을 쓰는 놈인가, 어쨌든 그놈에게 모조리 당했다는 것이 아니냐? 매 전주도 당하고 네가 당하고 호법들 까지 당하다니… 놈의 무공이 그리 강했더란 말이냐?” 을지호에게 당한 동생들을 제외하고 혼자 참석한 맹덕은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 를 들지 못했다. “자네들은 뭘 했단 말인가?” “면…목이 없습니다.” 용철상의 시선을 받은 황유화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말은 듣고 싶지 않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내가 알아듣도록 설명을 해 보게나.” 용철상의 질책어린 질문에 황유화와 마찬가지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의 만종의가 입을 열었다. “괴… 노인 때문에…….” “괴 노인? 누구를 말함인가?” 용철상이 주저없이 물었다. “그, 그것이…….” “답답하네. 어서 말을 해보게. 남궁세가에 자네들이 감당하지 못할 실력자가 남 아있더란 말인가?” “남궁세가의 인물은 아닌 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힘들게 말문을 열은 황유화가 용철상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껏 그만한 실력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나와 만 장로는 그의 공격을 감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단, 일초식도.” “그, 그게…….” 황유화의 말은 용철상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황유화의 실력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 들 정도로 박빙의 실력이었지만 분명 자신보다는 우위에 있는 실력. 그런 실력자가 단 일초식도 견디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말을 들어보니 혼자 싸운 것 이 아니라 만종의도 함께였던 모양이 아닌가. “하, 합공을 했는데도 패했단 말인가?” 묻는 용철상의 음성엔 경악을 넘어 불신의 빛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들려온 대 답은 더욱 가관이었으니……. “패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싸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허!” 도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이기에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단 말인가!! 입을 쩍 벌린 용철상이 뭐라 말을 하지 못할 때에도 황유화의 말은 계속 이어졌 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마음먹었다면 이 자리에 살아돌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궁을 쓰는 젊은 녀석의 실력도 노인에 못지 않았습니다. 특히 형체도 보이지 않는 화살은… 과거 천하제일이었던 궁귀(弓鬼)가 썼던 무 공과 아주 흡사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 갈수록 가관이었다. 황유화마저 가볍게 농락할 만한 고수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존해한다는 것은 지금의 노호문으로선 감히 넘볼 꿈도 꾸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질식할것만 같은 무거운 기운이 주변을 억눌렀지만 누구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반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용철상이 더없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방법이 없단 말인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딱히 누구에게라고도 할 수 없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일 수도 있었다. “노호문의 모든 전력을 쏟아붇는다면 어찌 될 것 같은가?” 용철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황유화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힘든 모양이군…….” “두 명의 고수를 묶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그들만한 고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 한 명이라면 혹 모를까. 두 명이라면…….” 황유화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힘들다고 봅니다.” “그래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 아닙니까?” 싸움에 참가하지 않은 장로 감천홍(甘泉紅)이 목소리를 높이자 네 명의 장로중 가장 막내 격인 양구(楊具)가 맞장구를 쳤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남궁세가의 제자라 해봤자 고작 서른명 안팎입니다. 흑 우전이나 적혈전 전의 인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실력을 알 수 없다는 두 명의 고수인데 그것은 우리들이 해결하면 됩니다. 무엇이 두 려우십니까? 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한 손으로 여러 손을 감당할 수는 없다 고 봅니다. 괴 노인은 우리 장로들이 목숨으로 책임지고 궁을 쓴다는 녀석은 문 주님과 소 문주님, 그리고 여기 있는 맹호법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까짓 그것도 부족하면 각 전의 전주들까지 동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면? 자네의 말대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운다고 치 세. 그래도 막지 못한다면 어찌 하겠는가?” “막을 수 있습니다.” 황유화를 대신해 짧게 한숨을 내쉰 만종의가 고개를 흔들었다. “후~ 그건 자네가 그 노인을 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네.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이야.”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입니다.” 양구는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긴다고 하더라도, 장담하건데 우리들 중 대분분은 살아남지 못할 걸세.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막지 못한다면 노호문은 그야말로 끝장이 날 수도 있어.” “우리가 막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오십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남궁세가를 끝장낸다고 치세.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황유화가 조용히 되물었다. 평소의 그라면 가장 먼저 싸움을 주장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태상 호법이 그에게 준 충격이 너무나 컸다. “무너진 자존심이지.” 양구를 대신해 용철상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포기한다면 지금껏 쌓아올린 우리 노호문의 자존심은 한낱 모래성이 되 어 흩어질 것이네. 그리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리겠네.” “상처입은 호랑이의 뒤에는 늑대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염두해야 합니다.” 늑대란 다름아닌 묵영도문과 호시탐탐 그들의 세력권을 넘보고 있는 마영문을 의미하는 것. 황유화의 말은 힘이 약해졌을 때 치고 들어올 그들의 야욕을 경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지난 싸움에서 이미 제왕의 지위는 잃어버렸네. 명예라도 찾아와야겠지. 때로는 포효만으로 늑대들을 쫓아버릴 수도 있음이니.” 담담하게 대꾸하는 용철상의 음성에서 황유화는 그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주가 결정을 하고 명령을 내린다면 수하된 입장에선 의당 죽음으로 명을 쫓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니…….’ 체념 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황유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기엔 을지호와 태상호법이 그에게 남긴 그늘이 너무나 컸다. “누, 누구시오?” 괴이한 느낌에 눈을 뜬 용철상은 자신의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있는 노인을 보며 기절할 듯 놀랐다. “네가 노호문의 문주냐?” 벌떡 일어나 경계의 자세를 취하는 용철상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찻잔을 내려 놓는 노인은 실로 태연했다. “그, 그렇소만. 대체 누구…길래?” 아무리 깊은 잠에 빠졌다하더라도 용철상 정도 되는 고수가 침입자의 기척을 눈 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의 처소는 노호문에서도 가장 엄중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 곳, 특히 출 정을 하루 앞둔 문내의 분위기는 질식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에 쌓여 있었건만… 주변이 조용한 것을 보면 노인이 방안으로 들어온 것을 아무도 모르는 듯 했다. 그것은 곧 노인이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할 수 있는, 자신보다도 훨씬 뛰어난 능력 을 지닌 고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건 알 것 없고…….” 노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용철상을 노려보았다. “내 말을 들어줘야겠다.” “무, 무엇이오?” 이미 노인의 기세에 압도당한 용철상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네가 계획하고 있는 일을 없던 것으로 하여라.” 순간, 지금껏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용철상이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제야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상에서 일어난 용철상이 노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온기가 가셔 이 제는 미지근해진 차를 한 잔 따라 마셨다. “남궁세가에서 오셨구려.” 찻잔을 내려놓으며 묻는 용철상의 음성은 한 문파의 문주답게 진중하며 침착했 다. “알고 있다니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랬다. 노호문의 삼엄한 경계를 간단히 뚫고 용철상에게 접근한 노인은 다름아 닌 태상호법, 노호문이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 예견하고는 또다른 도발을 막기 위해 노호문을 찾을 태상호법이었다. “이미 떨어진 명령. 번복할 수는 없소. 미안하오만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소이 다.” “난, 청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럼 명령을 내리는 것이오? 미안하오만 당신은 내게 명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소. 더 이상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태상호법의 눈가가 서늘해졌다. “있다면?” “무슨 헛소…….”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용철상은 한 문파의 문주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 떡 몸을 일으키며 호통을 치려는 순간, 태상호법이 그의 면전으로 황금패 하나를 던졌다. 중앙에 패(覇)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양각이 된 손바닥 보다 조금 작 은 크기였다. “그것이면 되겠느냐?” “장난하는 것이오. 이 따위 것이 무엇이라고!!” 그 패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용철상이 황금패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자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태상호법이 손을 하늘로 향했다. “너는 모르지만 이녀석은 알 것 같구나.” 순간, 방안의 천장이 갈라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묵의(墨衣)로 감싸고 있는 사 내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짧은 시간에 점혈까지 당했는지 간신히 몸을 일 으키는 사내의 움직임이 어딘가 이상했다. 용철상이 놀랄 사이도 없이 태상호법이 물었다. “네 녀석이 남궁세가에서부터 나를 쫓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 용서를…….” “비혈대(秘血隊)냐?” “그, 그렇습니다.” “비, 비혈대!!” 사내의 대답이 끝나기게 무섭게 용철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용철상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태상호법이 어느새 무릅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너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묵의 사내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시나무 떨 듯 전신을 떠 는 것이 그 패가 지닌 힘을 알고 있는 듯 했는데……. “내가 하는 말을 들었겠지?” “드, 들었습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태상호법은 믿도 끝도 없이 그냥 돌아가겠다라고 선언하듯 말을 하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가 말한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태상호법은 사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방안에서 사라 지고 난후에도 묵의 사내는 일각이란 시간이 더 흐른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떠나려는 태상호법을 제지하기는커녕 눈앞에 닥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 고 있는 용철상을 상대로 그가 보여주었던 패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 * “흠, 예상치 못한 수확을 거두었는걸.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나?” 흥미롭다는 듯 묻는 중년인의 말에 멀리 떨어져 부복하고 있던 사내가 즉시 대 답을 했다. “남궁세가를 공격하려 했던 노호문은 그 즉시 행동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암, 그래야지. 잘했군 그래. 당연하다는 듯 중년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참, 어르신께선 다시 남궁세가로 돌아가셨다던가?” “그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확인해보도록.” “알겠습니다.” “하하, 아무튼 반가운 일이야. 돌아가신줄만 알고 있었건만.” 술잔을 드는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분께서 살아계신 것을 아버님께서 아시면 무척이나 좋아하시겠구나. 이보게 대주(隊主)." “예, 궁주(宮主)님.”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이후, 모든 문파에게 명해 남궁세가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게나. 아니,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해. 특별한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취하라 하고. 그리고 노호문이 입은 피해는 적당한 선에서 보상을 해 주게나. 그들 덕 에 어르신의 생존을 알게 되었으니 고마움은 표시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 하겠습니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중년인의 말에 대주라는 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남궁세가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주변 문파들의 동요가 있을 듯 합니다만.” “무시해.” “하지만…….” 중년인의 얼굴에 짐짓 노기가 피어 올랐다. “자네는 정녕 내가 물고를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해 보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신 분이 남궁세가에 계시네. 남궁세가가 백도 건 나발이건 그건 상관없어. 다만 그분이 그곳에 계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만약 그분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음, 그럴 일은 없게군. 어쨌든 귀찮아 하시 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그날로 아버님께 죽음을 면치 못해. 자네도 알지 않는 가? 전대 성주님의 괴팍한 성정을 말일세.”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말이야. 어르신이 그곳에 계시고… 또, 정체를 알수 없다는 사내 말일세, 궁을 쓴다는…….” “남궁세가의 호법이라 들었습니다.” 이미 조사가 끝난는지 대답은 조금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렇지, 그 사내. 아무래도 나와 인연이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궁이라… 많이 들 어본 것 같지 않아? 아무튼 난 몹시 궁금하다네. 웬지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단 말이야. 이 따분하고 지겹기만 한 무림을 단숨에 뒤집어 버릴 것만 같은 재밌는 일이. 참, 내가 말했던가? 내가 지금껏 자네에게 한 말이 명령이라는 것을. 따르게.” “존명.” “난 정말 기대가 크다네. 하하하하!!”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49 산동성(山東省) 태안(泰安), 오대세가(五大世家) 중 한 가문인 황보세가는(皇甫世 家)동서로 길게 뻗은 태산(泰山)의 남쪽 줄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높이가 오 장에 이르는 정문과 사방 삼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연무장을 지나면 세가의 수뇌들이 모여 집안의 대소사를 논하는 집의전(集議殿)이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집의전을 중심으로 가주의 거처인 웅혼각(雄魂閣), 세가의 규율을 담당하는 수법 각(守法閣)을 비롯하여 서른 두 개의 전각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니 황보세가는 주변을 아우르고 있는 담장의 길이만 팔 리요, 직계, 방계 가릴 것 없이 상주하 는 인원만 육백을 자랑하는 거대한 성과 다름이 없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어쩌면 가주의 거처인 웅혼각보다 더 엄중히 경계되고 또한 존경을 받는 곳이 있었으니……. 권왕(拳王)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지니고 있는 황보장(皇甫掌)의 거처 안심거 (安心居)가 바로 그곳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 온갖 신공(神功)과 신병이기(神兵利器)들이 판을 치 고, 하늘을 비웃고 땅을 뒤집을 만한 능력을 지닌 기인(奇人)들이 모래알보다 많은 무림에서도 유난히 빛을 발하는 고수들이 있었다. 각 방면에서 감히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절대자들. 검의 최고봉이었던 검왕(劍王) 비사걸(飛赦傑), 신기에 가까운 궁술로 뭇 고수들 을 쓰러뜨린 궁왕(弓王) 사마후(司馬侯), 주먹으로 부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권왕 응천수(鷹天手), 암기를 다루는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암왕(暗王) 당천호 (唐天虎), 숨결만으로도 상대를 중독 시킨다는 독왕(毒王) 광무(光武) 등 비록 모 습을 드러낸 시기도 다르고 나이 또한 차이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강호오왕(江湖五王)이라 부르며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강의 뒷 물결이 앞에 흐르는 물결을 밀어내듯 일세를 풍미하며 그들이 남겼던 업적과 활약상은 어느덧 전설이 되어 몇몇 호사가들의 입에서만 오르내릴 뿐, 사람들의 관심은 그들을 대신해서 새롭게 오왕의 칭호를 받은 인물들에게 쏠려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비전(秘傳) 중의 비전인 십팔로낙영검법(十八路落英劍法)을 대성한 전대 화산파 의 장문인 곽화월(郭花月)이 새롭게 검왕의 칭호를 얻었고, 암왕의 지위는 혜성 처럼 나타나 홀로 패천궁의 궁주에게 도전을 하였다가 패한 낙운기(樂澐寄)에게 돌아갔다. 암기에 관해선 독보적인 능력을 보였던 사천당가(四川唐家)는 낙운기에게 암왕 이란 칭호는 빼앗겼지만 대신 독왕이라 불리며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켰다. 황보세가의 전대 가주였던 황보장이 권왕에, 그리고 궁왕을 대신하여 새롭게 오 왕에 추가된 도왕(刀王)은 패천궁의 호법 동방성(東方星)에게 돌아갔다. 이는 혜성처럼 등장한 을지소문에게 패한 궁왕 사마후가 스스로 그 지위를 버리 면서 강호엔 궁으로써 더 이상 궁왕이란 칭호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왕이라는 칭송을 뒤로 하고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황보장의 거처에 세가의 수뇌들이 모여든 것은 따사로운 햇살이 막 중천( 中天)에 오를 때였다. “다들 바쁠 텐데 어인 일들이냐?” 석 달 전, 친우에게서 선물로 받은 호접란(胡蝶蘭)을 정성스레 손질하고 있던 황 보장이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예, 아버님. 다름이 아니라 집안 일로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황보윤(皇甫尹)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을 하자 손에 묻은 물기를 닦는 황 보장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 집안일이라면 너희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다 늙은 나에게 보고라니.” “오대세가의 회합(會合)으로 인해서…….” “흠.” 살짝 고개를 끄덕인 황보장이 의자에 앉자 황보윤을 비롯하여 황보연(皇甫燕), 황보숭(皇甫崧) 등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의자가 부족해 가주를 따라나선 세 가의 다른 수뇌들 대부분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황보장이 혀를 차며 핀잔을 주었다. “쯧쯧, 차분히 준비만 하면 될 것을. 또 할 말이 있으면 가주 혼자 오면 될 것을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그렇게 몰려다니는 것이냐.” 황보윤인 담담한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 할 때 안심거가 떠나가라 울리는 목소리 가 있었다. “하하하, 형님도 참. 그것만큼 큰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순가, 자리에 앉았던 황보윤 형제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인사를 받으며 나타는 노인, 어딘지 모르게 황보장과 닮은 듯한 그는 황보세가의 태상장로(太上長老)이자 황보장의 아우인 벽력권(霹靂拳) 황보권(皇甫拳)이었다. “귀가 먹을 정도로 그렇게 늙지는 않았다. 그놈의 목소리 좀 제발 낮추거라.” “크하하, 제 목소리가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사내의 음성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요. 그렇지 않은가?” 칠순을 넘긴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황보권 이 황보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예, 숙부님. 호탕한 것이 듣기에 좋습니다.” 황보윤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것 보십시오. 가주도 듣기 좋다지 않습니까?” “으이구, 언제나 철이 들런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황보장, 그러나 얼굴엔 피어오르는 것은 흐뭇한 미소였다. “그래, 날짜는 정해졌느냐?” “예, 돌아오는 중양절(重陽節)로 정하였습니다.” “중양절이라…….” 황보권이 재빨리 덧붙였다. “늘 그 때 하지 않았습니까? 지난 제갈세가(諸葛世家)에서도 그랬고요.” “그랬던가? 그런 것도 같군. 한데 중양절이라면 시간이 촉박하지 않겠느냐? 이것 저것 준비도 해야 할 것이고 사람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네. 중양절이라면 이제 한달 남짓 남지 않았는가? 뭐, 어 련히 알아서 잘 하겠는가마는 조금 걱정이 되는군.” 황보권의 물음에 황보윤이 공손히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미 떠난 모양이구나.” 황보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예의를 잃지 말아야 할 터인데… 그래, 누구를 보냈느냐?” “제갈세가엔 군(君)아가 갔습니다.” “녀석이?” 장손(長孫)인 황보군(皇甫君)이 움직였다는 것이 조금은 의외라는 듯 황보장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순간, 황보윤의 얼굴에 고소가 지어졌다. “본인이 원했습니다. 그리고 팽가(彭家)엔 현무(玄武) 전주, 당가엔 막내 숙부께 서…….” “흥, 어쩐지. 요즘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만 산천유람을 떠났군 그래.” 무엇이 못마땅한지 퉁명스레 말하는 황보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친우가 보고 싶다고 부탁을 하셔서.” “친우는 무슨 얼어 죽을 친우!! 따분하니까 오랜만에 유람이나 하러 떠난 것이 지.” “하하,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더없이 사이가 좋으면서도 늘 티격태격하는 숙부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짓 던 황보윤이 슬그머니 웃음을 지우고 황보장을 응시했다. 그의 모습에서 뭔가 할 말이 있다고 여긴 황보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로구나.” “예, 아버님.” 하지만 황보윤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엇이냐?” 황보장의 재차 묻자 황보윤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헌데 그의 태도가 전에 없 이 조심스러웠다. “이번 회합에…….”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그것이 아니오라…….” “어허, 답답하구나. 어서 말을 하여라.” “산동에 있는… 악가를…….” 황보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탕!! 탁자위에 놓여 있던 집기들이 허공으로 튀어 오를 만큼 거칠게 탁자를 내려친 황보장이 노기 띤 눈으로 황보장을 응시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와 같은 반응은 이미 각오한 일, 입술을 질끈 깨문 황보윤이 다시 말을 꺼냈 다. “악가도 초청을 했습니다.” “어째서냐?” 차갑게 묻는 황보장의 얼굴에 냉기가 깔렸다. 동시에 안심거의 분위기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보윤을 따라왔던 수뇌들은 감히 숨을 내쉬지 못했고 황보권도 굳을 대로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대세입니다.” “대세라니? 대체 무엇이 대세란 말이냐?” 나이가 들었어도 권왕이란 명성까지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보윤을 똑바 로 응시하며 질문을 던지는 황보장의 전신에선 피어오르는 기운은 가히 압도적 이었다. 하지만 황보세가라는 커다란 배를 움직이는 황보윤 또한 결코 만만한 인물 은 아니었다. 부친을 존경하고 어려워하면서도 가주로서 할 말을 못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지금의 오대세가는 과거의 오대세가와는 다릅니다.” “다를 것 없다. 과거의 오대세가가 지금의 오대세가다.”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 잠시 말끝을 흐리던 황보윤은 작심한 듯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남궁세가는 과거의 남궁세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사람들은 우리 황보세가를 비롯하여 제갈세가, 하북의 팽가, 사천의 당가, 그리 고… 악가를 오대세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억에서 남궁세가는 사라 졌습니다.” “…….” 단정 짓듯 말하는 황보윤의 말에 말문이 막힌 황보장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할 때였다. 꽝. 그렇지 않아도 수난을 당하던 탁자가 황보권의 주먹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렸다. “닥쳐라!!” 조카지만 가주라 하여 어느 정도 존대를 해주던 말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참고 들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구나. 어디서 함부로 말을 놀리는 것이더 냐!! 가주가 되었다고 나나 형님을 무시하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한번 화가 나면 권왕이라는 칭호의 부친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무서운 것이 벽력권 황보권이었다. 젊어서부터 어디 한두 번 당했던가.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불같은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주먹이 날아올지 몰랐다. 최소한 그가 아는 숙부는 그런 인물이었다. 황보장에겐 당당했던 황보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이 미 폭발한 황보권의 노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너희들……!!” 황보권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모두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오대세가의 회합은 단순히 세가의 힘을 자랑하려는, 남들에게 우리들의 지위를 보여주려고 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오대세가가 언 제부터 오대세가라 불리게 되었는지 알고는 있느냐?” “과거 무림을 피로 씻었던 사천혈맹(四天血盟)을 상대하면서 그리 불리게 되었습 니다.” 황보윤의 곁에 있던 황보숭이 재빨리 대답했다. “터진 입이라고 대답은 잘도 하는구나. 어쨌든, 그 당시 사천혈맹의 위세는 지금 의 패천궁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누구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온 무림이 전전긍긍하며 그들의 눈치를 볼 때 전통의 명문이었던 제갈세가와, 사천의 당가, 그리고 그때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우리 황보세가와 막 태동을 시작한 남궁세가가 힘을 모아 놈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지루한 싸움은 삼십 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대세가에 이어 하북의 팽가가 힘을 보태 고 지금 너희들이 몰락했다고 무시하고 있는 남궁세가에서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 나오면서 불리했던 전세는 단번에 역전이 되었다. 그분이 누구더냐?” “무… 무성(武聖)이십니다.” “그래, 남궁세가의 사실상의 시조(始祖)이시자 지금도 무성으로 추앙받으시는 남 궁치세님이다. 그분의 출현과 팽가의 도움으로 싸움은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피로 얼룩졌던 삼십 년의 전쟁이 말이다.” 호흡이 가뿐지 잠시 말을 끊은 황보권이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싸움은 끝이 났지만 사천혈맹과 싸웠던 다섯 가문은 가진 힘을 모두 소진해 만 신창이가 되었다. 특히 팽가는 거의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지. 사람들은 이런 우리들을 ‘오대세가’ 라 칭하며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고 패천궁의 등장으로 과거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도맹(正道盟)이 있었지만 이번 에도 선두에 서서 싸운 것은 우리 오대세가였다. 그중 가장 치열한 싸움을 한 곳 은 그들과 인접해 있던 남궁세가였다. 그 당시 이십대였던 나와 형님도 직접 그 싸움에 참여하였고. 싸움은 끝났지만 남궁세가는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입었다. 그리고 지금도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지. 어떠냐? 이런 남궁세가가 사람들이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하여, 그들과 함께 피를 흘린 우리들마저 무시하고 조롱해야 한단 말이냐? 패천궁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도 부끄러운 일이건만!! 정녕 그런 것이냐?”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니면?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셈이냐? 당장 남궁세가에도 이번 회합을 알리는 배첩을 보내도록 하여라. 지난 회합엔 참석하지 못했다만 들리는 말에 따르면 봉 문을 하고 힘을 키우는 모양, 회합이 있는 것을 알면 봉문을 풀고 달려올게야.” 황보권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을 하였다. 그런데 황보윤은 당연하다는 듯 고 개를 끄덕였다. “이미 보냈습니다.” “그래, 이미 보…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황보권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황보장 또한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 다. 짧게 한숨을 내쉰 황보윤이 대답했다. “남궁세가에도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 하지만 조금 전의 네 말과는 다르지 않느냐?” “두 분께서 오해하신 겁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고 했지 저희들마저 지 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악가는 어찌된 것이냐?” 황보장이 물었다. “비록 우리 오대세가에 비하면 악가의 역사가 다소 짧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전 통이 있는 가문입니다. 또한 근래 들어 많은 일들을 하였고 무림 동도들에게 큰 신망을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대세가, 아니, 이제는 육대세가(六大世家)의 일원으로 회합에 참석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혼자만의 생각이냐?” “아닙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벌써부터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다른 세 가에서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음.” 짧은 침음성을 내뱉은 황보장이 두 눈을 감았다. 사실 그도 알고는 있었다. 최근 욱일승천하는 악가의 힘을, 그리고 세인들에 의 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도. 하지만 쉽게 인정할 수 없었기에 화를 냈던 것뿐 이었다. “내가 반대를 해도 사람을 보냈다면 이미 늦었겠지. 또한 다른 세가에서도 찬성 한 일을. 후~ 할 수 없는 일. 알겠다. 내 그리 알고 있겠다.” 마침내 황보장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초청을 했다고는 말을 했지만 아직 배 첩을 보내지 않았던 황보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그리되자 곤란해진 사람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화를 냈던 황보권이 었다. “험, 험, 일이 그렇게 된 것이었군. 미, 미안하네.” 말투도 이미 예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닙니다. 숙부님. 소질, 주먹이 날아들 것을 각오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허흠, 아무리! 내가 설마 가주에게 주먹질이야 하겠는가. 험험.” ‘충분히 그러시고 남지요.’ 하지만 황보윤은 속에 있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 * * * * 을지호 일행이 남궁세가에 온 지도 벌써 삼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너무나도 길 수 있는 세월. 그 세월 동안 남궁세가에는 실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을지호가 찾아낸, 비록 예기치 못한 일로 한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십오 명의 기재들은 태상장로와 을지호의 지도 아래 지옥과도 같은 수련을 했고 운한표국 에서 들어오는 돈의 대부분을 들인 영약을 주식으로 복용하며 내공을 키웠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그리고 그들을 정성으로 뒷받침 하는 사람들의 노 력에 힘입어 그들의 실력은 하루가 늘어갔고 삼 년이 지난 지금, 비록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태상호법은 그들 개개인의 실력이 패천궁의 최정예인 패천수호대(覇 天守護隊)를 능가할 정도라고 은연중 인정할 정도로 무섭게 성장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남궁세가 최강의 힘은 율천을 필두로 하는 천뢰대였고 그것에 대해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궁민의 무공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고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을지호는 태상호법과 상의해 정식으로 가주 취임식을 열어주었다. 봉문을 한 상태라 손님을 초대하지도 않았고 딱히 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식솔 들끼리 간결하게 치룬 즉위식이었지만 가주라는 지위가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그날 이후로 남궁민은 즉흥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던 것에서 벗어나 모든 말과 행동 , 의사결정을 내릴 때 한 번 더 차분히 따지고 숙고하는 등 상당히 성장한 모 습을 보여주었다. 남궁민이 가주의 지위에 오르면서 세가에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가주인 남궁민을 정점으로 앞으로 그녀와 함께 남궁세가를 이끌어 나갈 두 개의 무력단체가 만들어졌는데 각각 천양대(天陽隊)와 천음대(天陰隊)라 이름 붙 였다. 천양대에는 주로 방계의 인물이나 몰락한 명문가의 후손들로 대주인 천도문을 포함 십삼 명이었고 천음대는 처음 남궁민이 받아들이기를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이들로 인원은 십이 명, 대주는 연능천이었다. 딱히 지위를 논할 수 없었던 강유와 운한표국에서 돌아온 해웅은 을지호와 같은 호법으로 뇌전과 초번은 가주의 수신호위(守身護衛)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변화가 있다고 해도 눈을 뜸과 동시에 수련을 시작해서 수련 으로 끝나는 남궁세가의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남궁세가의 일상에 조그만 변화가 온 것은 이틀 전, 석양(夕 陽)과 함께 낯선 손님이 찾아들면서부터였다. 그는 정확히 하룻밤을 세가에서 머무르다 떠났고 그가 떠난 직후, 남궁민의 거처 인 세심각엔 태상호법과 을지호를 비롯해 주요 인물이 모여들었다. 수련을 위해 산속으로 들어갔던 천뢰대의 대주 율천이 부름을 받고 허겁지겁 달 려오는 끝으로 모든 사람이 모였다는 것을 확인한 남궁민이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황보세가에서 온 사람이었어요.” “음.” 이미 알고 있었던 을지호와 태상호법, 곽 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저곳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장강 이북의 정도 문파들이 남궁세가를 비롯하여 여러 정도문파들을 외면했다고 생각하는 천도문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다가 무슨 일이랍니까?” 마치 황보세가의 사람이 눈앞에라도 있는 듯 천도문의 음성은 거칠기만 했다. 하 지만 그는 을지호의 서늘한 눈빛을 받고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금방 깨 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천 대주의 심정을 모르지는 않아요.” 남궁민이 천도문을 향해 웃음을 보였다. 처음 황보세가에서 온 손님을 보았을 때 그녀 또한 천도문과 같은 심정이었음을 상기하면서. “대주는 무슨…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서야…….” “죄송합니다.” 을지호의 질책어린 핀잔에 천도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끄러웠는지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어이구, 계집애처럼 그렇게 얼굴을 붉혀서야 어디 위대한 남궁세가 천양대(天陽 隊) 대주의 체면이 서겠어?” 천도문의 모습에 강유가 장난기가 동안 강유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약을 올렸다. “그러게 말이야. 대주가 이러니 대원들은 또 얼마나 수줍음을 탈까나.” 해웅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도문은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남궁민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그만들 하세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남궁민의 말에 세심각을 울려 퍼지던 웃음은 그쳤지 만 을지호는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가 책임져야 하는 인원이 열 명이 넘는다. 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그들의 생사가 달려있다. 말을 내뱉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에는 열 번을 생각해라.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아.” “알, 알겠습니다.” “이는 도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을지호의 시선을 받은 연능천이 꺾이지 않을 듯 당당하게 세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을지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남궁민이 배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우리 남궁세가를 오룡지회(五龍之會) 초대하기 위해 보낸 초대장입니 다.” “오룡지회가 뭡니까?” 해웅이 곱게 접힌 배첩을 응시하며 물었다. “오대세가의 회합을 그리 부르지요. 예로부터 우리 남궁세가를 비롯하여 사대세 가는 십오 년에 한 번씩 회합을 합니다. 단순히 가주들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세가의 주요 어른들과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이 함께 하지요. 회합은 오일 동안 열립니다. 그 기간 동안 선배들은 피로 맺은 혈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후배들은 서 로의 안면을 익힐 기회로 삼는 것이지요.” “흠, 그런 것이군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해웅, 남궁민은 그의 거대한 몸을 버텨내는 의자 를 안쓰럽게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오룡지회에는 오대세가를 제외하고도 실로 많은 이들이 참석을 합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강유가 물었다. “그래요, 오룡지회는 각 세가 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모이는 목적도 있지만 서 로의 무공을 비교하는 경연장이기도 하지요.” “비무대회(比武大會)가 열리는군요.” 망신을 당하고 한 쪽에서 기가 죽어 있던 천도문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곧바로 을지호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만 하세요. 오라버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그래요, 이튿날부터 열리는 비무 대회는 최고의 볼거리랍니다. 가문의 자존심을 걸고 임하기 때문에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하지요. 하지만…….” 천도문을 두둔하고 빠르게 말을 이은 남궁민은 무슨 일인지 한숨을 내쉬고 말았 다. “후～ 실은 이렇게 말을 해도 나도 가보지는 못했어요. 그저 그런 식으로 열린다 는 것을 들은 것뿐이에요.” 살짝 한숨을 내쉰 남궁민은 입을 다물고 배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실 남궁세가 오룡지회에 참여한 것은 삼십 년 전, 그녀의 조부 때가 마지막이 었다. 그나마도 규모가 너무 작아 참여했다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지만. “십오 년 마다 열린다면 비록 어릴 때긴 해도…….” 강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던 남궁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당시엔 이미 세가에 그 어떤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참여도 하지 못했 지요.” “아, 그렇군요.” 남궁민의 음성에 담긴 아픔을 느낀 강유는 공연한 말을 꺼냈다 여기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을지호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을지호에게 향했다. “우리도 참석한다. 오룡지회인지 토룡지회(土龍之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정말이십니까?” 재빨리 반문하는 천도문, 그런 천도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을지호가 고개를 흔 들었다. “그 놈의 성격이 어디 갈까!!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래, 준비가 되는대로 황보세 가로 떠나기로 결정을 했다.” 궁귀검신(弓鬼劍神) 2부-50 을지호의 말이 끝나자 방안에는 묘한 흥분감이 감돌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저마다 기대가 되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런데 누가 가는 겁니까?” 초번의 질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누가 가다니?” 을지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황보세가면 꽤난 먼 곳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세가를 비워야 하고요. 모두 다 떠난다면 이곳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지키고 있겠네.” 곽 노인의 말에 초번은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그런 일은 없을 게야.”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태상호법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평소에도 과히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태상호법의 말에는 이상한 설득력이 있 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한마디에 은근히 우려를 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문 제를 꺼냈던 초번마저 ‘그럼 다행 이지요’ 라는 말과 함께 걱정을 접을 정도였다. 태상호법의 말이 끝나자 을지호가 입을 열었다. “놀러 가는 것이 아니다. 이번 여행 또한 수련의 일종이라 생각해라. 가는 동안 에도 수련은 계속될 것이고 종종 실전도 치르게 될 것이다.” “예? 실전이라니요?” 깜짝 놀란 천도문이 반문했다. “그런 게 있다. 태상호법님과 상의해 나름대로 계획한 것이 있지만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다. 어쨌든 각오들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 기회에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남궁세가가 새로운 비상(飛上)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천광, 천음대의 대주는 대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 이르고.” “알겠습니다.” 천도문과 양능천이 동시에 대답했다. “천뢰대는… 참, 수련은 잘 되고 있느냐?” “예,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율천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산속에서 고생들 많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대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하산하라 일러라.”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을지호는 산발한 머리에 얼굴의 반을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은 율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꼴로 갔다간 세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것 알지? 다들 단정하게 정리하 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을지호가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율천이 무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 다. “하하하, 열심히 수련하느라 그런 것이니 그렇게까지 부끄러워 할 필요까지는 없 고.” 둘의 대화에 다들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 다들 돌아가서 준비들 해. 초번의 말마따나 꽤나 먼 길이야. 이것저것 준비 할 것이 있을 거다. 그렇다고 쓸데없이 날뛰며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모였던 이들이 저마다 예를 표하고 돌아가자 세심각에는 남궁민과 곽 노인, 태상 호법과 을지호만이 남게 되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예, 오라버니.” 을지호의 착 가라앉은 음성에 남궁민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엔 네 의견대로 회합에 참석하기로 했다만 솔직히 아직도 부족한 것이 너 무 많아. 해서 가급적 움직이지 않으려 한 것인데 어쩔 수 없게 되었구나.” “죄송해요. 고집을 부려서.” “아니다. 어차피 세가를 이끌어 가는 가주는 너야. 결정도 네가 해야 하는 것이 고.” “…….” 을지호가 남궁민을 향해 상체를 약간 수그렸다. “지금까지는 세가의 모든 일을 내가 독단적으로 처리해 왔다. 형식상 네게 상의 는 했다만 대부분이 내 의지대로 되었다는 것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세가를 벗어난 이후부터는 모든 것 을 네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오, 오라버니.” “물론 옆에서 도움은 주겠지만 나 역시 네 결정을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다. 네 의지가 우리의 의지요, 네 결정이 곧 우리의 결정이다. 하니 너의 말 한마디에 수십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아, 알겠어요.” 마치 모든 권력을 넘기고 물러나는 절대자처럼 을지호는 남궁민이 가주로서 지 녀야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했다. “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천금보다 더 무겁고 중하다. 그것은 곧 남궁세가의 법 이고 우리가 따라야 하는 명령이다. 늘 신중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예.” “또한 내가 처음 이곳에 와서 말 했듯이 세가를 떠나면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 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신나고 즐거운 일도 있겠지만 예상하건데 그 대부분이 뼈를 깎는 인내를 요하는 일일 것이다. 과거 중원을 호령하던 때와는 다르다. 오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인들의 뇌리엔 과거보다는 현재의 남궁세가가, 몰락 한 우리들만을 기억하려 할 것이다. 모욕도 당할 것이고 온갖 수모를 주는 사람 들도 있을 것이다. 폄하되고 조롱도 당하겠지. 하지만 그것 모두가 약자의,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야 하는 사명을 지닌 네가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최소한의 자존심 을 지키는 선에서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야 한다. 할 수 있겠지? 아니, 해야 한다.” “예.” 약자라는 말에 입술을 깨물었던 남궁민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네가 남궁세가의 가주라는 것만은 절대로 잊지 마라. 그리 고 네 뒤에는 너를 따르고 지켜줄 최고의 수하들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고.” “태상호법도 계시고 오라버니도 계시지요.” 언제 심각한 표정이었냐는 듯 남궁민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래도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르신?” 을지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태상호법을 쳐다보자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태상호 법도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룡지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한 이후. 남궁세가에서 가장 바삐 움직이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곽 노인이었다. 남궁세가와 황보세가와의 거리는 어림잡아 사천 리 정도, 하지만 그 사이 수 없 이 많은 산과 강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소 만 리길이었다. 상당히 긴 시간의 여정이 될 것은 뻔했고 더구나 사십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움 직이자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곽 노인은 우선적으로 각자에게 맞는 의복과 신발을 넉넉하게 준비하였고 노숙 (露宿)할 것을 대비해 급한 대로 천막을 칠 수 있는 천과 덮을 수 있는 담요를 챙겼다. 현지에서 직접 사 먹을 것이라는 을지호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람일은 알 수 없 는 것이라 주장하며 간단히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취사도구는 물론이고 상처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는 금창약(金瘡藥), 배탈에 좋다는 환약, 등을 비롯하여 온갖 약들을 모아 한데 묶은 주머니를 개인마다 한 개씩 준비하는 정성을 보였다. 이에 반해 정작 세가를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태평했다. 산에서 내려온 천뢰대원들은 각각 삼십 발의 화살과 여분의 활시위를 준비하는 것이 전부였고 천양대와 천음대의 대원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손질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간혹 가족들에게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무튼 사흘간의 짧은 준비기간이 끝나고 오룡지회에 초대한다는 배첩이 남궁세 가에 도착한지 꼭 닷새가 되는 날 아침, 연무장에 태상호법과 을지호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모든 식솔들이 한데 모였다. “준비는 제대로 했겠지?” 좌우로 늘어선 식솔들을 살피던 을지호가 물었다. “뭐, 준비랄 게 있겠습니까? 이 튼튼한 다리로 그냥 떠나면 되는 것이지요.” 뇌전이 허벅지를 툭툭 치며 대꾸했다. “말 하는 것 하고는. 네게 물은 것이 아니니까 나서지 좀 마라.” 뇌전이 샐쭉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자 천도문이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곽 노인께서 워낙 철저하게 준비를 해 주시는 바람에 저희는 딱히 준비할 것도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물건을 챙기는 바람에 짊어지기 조차 버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내보이 는 천도문은 그래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너희들이 세가에 들어오고 처음 나서는 길이 아니더냐. 더구나 삼십 년 만에 참 여하는 오룡지회다. 걱정이 많으셨겠지.” “어이구,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했습니다. 비상약은 그렇다 쳐도 저건 또 뭐랍니 까?” 아직 짊어지진 않았지만 연무장 한곳에 모아둔 것은 큰 솥이며 식기 등 음식 하 는데 필요한 도구들이었다. 강유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흠, 어디 가서 굶어죽을까 걱정하신 모양이지요.” 뇌전이 맞장구를 치며 황당해했다. “다들 입들 다물고 있어. 이 모든 것이 곽 노인께서 너희들을 생각하셔서 준비한 것이니 괜한 불평들 하지 말고 감사히 받도록 해.” 을지호가 매서운 눈초리로 호통을 치자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잠시 진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곳저곳에서 금새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흥 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그의 호통도 역부족인 듯싶었다. “으이구!!” 또다시 호통을 치려던 을지호는 고개를 가로젓는 태상호법의 모습에 입을 다물 고 말았다. 이들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떠나는 길, 조사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오 겠다고 조사당(祖祠堂)에 간 남궁민은 실로 비장한 표정이었다. 사당엔 시조 남궁치세부터 그녀의 아버지인 남궁혼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었 다. 입을 굳게 다물고 위패마다 일일이 예를 올린 남궁민은 남궁혼의 위패가 있는 곳에서 멈추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가씨, 다들 기다립니다.” 보다 못한 곽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알았어, 할아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한 남궁민이 남궁혼의 위패를 쓰다듬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지금… 떠나요. 비록 미약한 힘이나 세가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 이에요. 아니, 기왕 나서는 길, 본가가 몰락했다고 비웃으며 멸시했던 이들에게 본가의 힘을 보여 줄 거랍니다. 보란 듯이 보여주고 말겠어요. 이후, 다시는 쓰러지 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어요. 제가 그리 만들겠어요. 하지만 두렵 기도 해요. 부끄럽지만 많이 두려워요. 그렇다고 피할 생각은 없어요. 세가를 지 킬 사람은 이제 저뿐이니까요. 그런데… 하필 그녀가 있는 곳이군요. 이런 것을 보고 운명이라 그러는가 봐요. 죄송해요. 용서하라고 하셨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 요. 부디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제게 힘을 주세요.” 흐르는 눈물로 위패를 살짝 적신 남궁민이 제단 위에 놓여있던, 금지에서 가지고 나온 이후 지금껏 사당에 두었던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그를 기다리는 세가의 식솔들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움직였다. 남궁민이 연무장에 도착하고 간단히 준비사항을 묻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잠시 후, 정식으로 봉문을 파(破)한다는 남궁민의 선언과 함께 굳게 닫혔던 남궁 세가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마침내 수십 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남궁세가가 비상의 날개를 펼치는 순간이었 다. * * * * 호북성 경산현에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청화반점의 이층. 아침부터 밀려온손님을 보며 때 아닌 장사를 하게 되었다고 가뻐하던 바점의 주인과 숙수 등방 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등방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물었다. 을지호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곁에 있던 뇌전만을 노려보았다. 얘기 안 했지? 예? 무엇을 말입니까? 주변의 분위기가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허기진 매를 채우느라 헐레벌떡 음식을 해치우던 뇌전이 입가에 묻은 양념을 쓰윽 문지르며 대꾸했다. .... 오만상을 찌푸리던 을지호가 묵묵히 찻잔을 들더니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그래도 부족했는지 반주로 놓인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제야 뭔가를 느낀 뇌전이 초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 혹시... 얘, 얘기 안 했냐? 어느새 한발 물러난 초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잡다한 일을 처리하느라 이제야 막 도착한 사람에게 할 질문은 아니라고 보는데. 뇌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목을 타고 넘어가던 음식이 걸렸는지 캑캑거렷다. 죄 죄송합니다. 주군. 간신히 음식을 넘긴 뇌전이 시뻘건 얼굴로 말을 했다. 뭐가 죄송한데? 그, 그게.... 혼자 뱃속에 처넣으니 좋은 모양이지. 아 아닙니다. 흥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뇌전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을지호가 몸을 일으켰다. 움찔한 뇌전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제대로 준비해 놔. 다시 한 번 이했다간 국물도 없을 줄 알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걸을을 옮기던 을지호가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나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들 먹도록 해. 물론 누구는 그래선 안 되겠지? 그 누구라는 것이 뇌전을 일컬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뱃가죽이 등에 붙었느니 어쨌느니 하며 호들갑을 떨던 뇌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크크, 그러게 신경 좀 제대로 쓰지 그랬어? 다른 것은 몰라도 향채라면 치를 떠는 형님인데 강유가 키득거리며 약을 올리자 해웅도 거들었다. 그런 음식을 드리고도 살아남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 난 오늘 초상 치르는 눌 알았느니까. 뭐 해? 빨리 움직이지 않고. 하지만 그들의 웃음도 곧 이어 들려온 음성에 의해 통곡으로 바뀌었다. 초번은 다른 볼일이 있었으니까 제외한다고 해도 해웅이나 강유 네놈들도 마찬가지야. 주군 아니, 그런 법이...! 뭔가 강하게 반발을 허려 했던 강유와 해웅은 쓰윽 고개를 돌리는 을지호의 시선에 의해 박살이 나고 말았다. 대신 그들의 불만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은 뇌전이었다. 둘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힘없이 몸을 일으킨 뇌전은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는 숙수 등방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따라오슈, 뭘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지 알려줄 테니까. 젠장할! 맛있게도 먹는군. 입에 감도는 역겨운 냄새 때문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층으로 내려온 을지호가 한쪽에서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는 한 사내의 앞자리에 허락도 없이 앉으며 말했다. 예? 맛있게 먹는다고. 아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지라.... 살짝 긴장된 모습을 보였던 사내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지.오랫동안 우리를 쫓아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사내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살짝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쯧쯧, 거짓말은 통할 사람에세나 하는 것이야. 그러고 보니 재주가 다양하더군. 사냥꾼에 약초꾼, 그리고 엊그제에는 점소이로 도 변장을 했었지 아마? 이제는 장사치라... 그래, 다음엔 어떤 사람으로 변장할셈이었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동안 사내가 변장했던 모습들을 거론하는 을지호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리는 반면 사내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요동첬다. 왜? 도망가려고? 나 같으면 그런짓 하지 않겠다. 저 문을 나가기 전 반드시 땅바닥을 구르게 될 테니까. 뭐, 못 믿겠다면 시험을 해도 무방하고. ..... 정확하게 파악은 하지 못했어도 을지호의 실력을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던 사내는 어찌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망치지 못하면 죽음으로써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적어도 비혈대의 대원이라면 그래야 했다. 결정을 내렸는지 사내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저 조소 띤 눈빛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표정이 굳는가 싶더니 곧 표정을 고치고 정중히 입을 열었다. 잠시 따라오시지요. 따라오라... 어디를? 주군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을지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더니만 그대가 모시는 주군이었군. 좋아, 못만날 이유가 없지.안내해. 사내는 음식 값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반점을 빠져나갔다.을지호는 그를 따라나서기에 앞서 이층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 한 사람 아애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사람으이 없었다. 그저 풍성하게 차려져 있는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흥든 그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안내한 곳은 청화반점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한적한 야산의 공터였다. 그곳에서 을지호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중년인과 그를 수행하는 듯한 삼십 대 초반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중년인을 발견한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가더니 무릎을 꿇고 지극한 예를 표했다. 그러나 그는 사내의 인사에 신경도 쓰지 않고 을지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곳이네. 을지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중년인을 향해 움직였다. 걸을을 내디딜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예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와 그의 몸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적어도 스무 명은 넘는 인원이 숲에 은신해 있는 듯했다. 꽤나 살벌한 곳이군요. 을지호와의 거리는 칠 장여.그러나 그런 거리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될 것 없다는 듯 술잔은 마치 물에 떠다니는 배처럼 유유히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피식 웃을을 터뜨린 을지호가 중년인이 내민 술잔을 간단히 받아내더니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중년인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적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주는 술잔을 조금도 망설임없이 마시는 자신감에 우선 감탄했다. 또한 나름대로 환영도 하고 실력도 알아볼 겸해서 술잔에 내력을 실어 보냈건만 을지호에게선 조금의 동요도 느낄 수 없었다.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었다. 느릿하게 내딛는 걸음걸이엔 일말의 흔들림을 느끼지 못했다. 제 잔도 받으시지요. 주향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코를 벌름거리던 을지호가 중년인을 향해 술잔을 던졌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한 술잔이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술잔에 담긴 기운이 범상치 않다고 느낀 그는 급히 내력을 끌어올리더니 신중한 자세로 술잔을 낚아챘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예상과는 달리 술잔엔 아무런 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먼 거리를 비행할 수 닜을 정도의 약간의 기운만이 실려 있을 뿐이었다. 순간 중년인의 입가에 민망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허허, 이거야 원. 내가 한 방 먹었군. 술잔을 돌려준 을지호가 담담한 얼굴로 손짓을 하자 중년인의 곁에 놓여있던 술병이 허공으로 떠올라 기울어지며 빈잔을 채웠다. 단 한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고 잔을 채운 을지호가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을지호라 합니다. 엷은 미소를 지은 중년인이 잔을 비우며 대답했다. 나는 안휘명이라고 한다네. 익숙한 이름이었다. 분명 들은 적이 닜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을지호가 기억하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그를 향해 은연중 쏟아지던 예기가 살기로 변했다. 동시에 은신해 있던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묵색의 무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오색 수실이 장식되어 있는 검을 든 그들, 저마다 태양혈이 불끈 솟은 데다가 안광에서 뿜어지는 형형한 눈빛이 보통 날카로운 것이 아나었다. 무슨 뜻입니까? 을지호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한데 너털웃음을 터뜨린 중년인은 전혀 엉뚱한 대꾸를 했다. 너무 거칠게 다루지는 말아라. 을지호에게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수하들에게 하는 소리인지 딱히 규정짓기 어려운 말을 던진 중년인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회가 동하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옆에 놓아둔 술병을 들었다. 그러나 을지호는 그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고 싶지 않았다. 훗,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애써 기운 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이런 도깨비 놀이도 싫고, 그리고. 너 다리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는 따라오지 마라. 을지호는 그의 시선을 받은 비혈대원과 중년인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럴 수야 있나. 그래선 내가 섭하지!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중년인이 입에 머금고 있던 술을 목으로 넘길 사이도 없이 뱉어내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몸을 날린 묵의사내들이 을지호의 퇴로를 막아섰다. 을지호는 그들에게 어떤 핻동을 하는 대신 중년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회할 것입니다. 음성은 이미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져 있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고. 싱긋 웃으며 대꾸를 하는 중년인. 그의 손짓에 을지로의 퇴로를 막았던 사내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왔다. 승부가 어찌 될 것이라 보느냐? 중년인이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사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쉽지는 않을 것 같군요. 어째 지신이 없다는 말투구나. 그러자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듯한 자세로 우뚝서서 은은한 묵광이 피어나는 검 한자루를 품에 안은 채 을지호를 노려보고 있던 사내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패천수호대입니다. 결과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내는 분명 패천수호대라 했다. 그 말의 의미는 결코 가벼이 흥려 버릴 것이 아니었다. 패천수호대는 패천궁주의 친위대였다.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최고의 무공과 영약에 의해 키워진, 다른 누구의 명도 받지 않고 오직 성주를 위해, 성주의 명만을 받아 움직이는 최강의 무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결국 한가로이 술잔을 비우는 중년인이 무림을 양분하고 있는 패천궁의 궁주하는 말이었는데 흠, 과연 그럴까? 과거 최강이라 자부하던 패천수호대의 전설이 깨진 적이 있었지. 그것도 고작 한 명에게. 패천궁의 궁주 안휘명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는 천하제일인이었습니다. 패천대의 대주 화천명이 다소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후후, 그렇지. 하나 천명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저 녀석이 과거 천하제일인이었던 사람과 그분의 후예라는 것을. 안휘명은 그만이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일촉즉발의 기운이 팽배해져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화천명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것이 공격 명령을 내리는 신호인 양 전후좌후에서 을지호를 향해 무수한 공격이 쏟아져 들었다. 힘없이 떠도는 고깃배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키고자 넘나드는 매서운 파도처럼 파상적으로 다가오는 공격에도 을지호는 무표정했다. 볼품없는 화살임에도 천천히 당겨지는 활시위에 내포된 힘은 좌중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휘이익! 시위를 떠난 나뭇가지가 맹렬한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갈랐다. 제대로 만든 화살도 아닌 나뭇가지가 그렇게 빠르고 날카롭게 쏘아져 올 줄은 몰랐는지 목표가 된 사내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사내는 다급히 몸을 틀며 나뭇가지를 쳐냈다. 그러나 아무리 평범한 나뭇가지라도 을지호의 손에 들리며 천하의 그 무엇보다도 강맹하고 위협적인 화살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크윽! 화살을 쳐내던 사내가 검신을 타고 밀려드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을지호가 재차 시위를 당겼다. 그런데 조금 전과는 달리 시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도 달랐다. 그다지 크지도 날카롭지도 않았고 단지 당겨졌던 시위가 제자리를 찾으며 내는 소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은밀히 날아가는 세 발의 무영시는 아직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뭔가가 다가온다고 느끼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핳 수 없었던 세 명의 패천수호대 대원에게는 죽음의 사자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였다. (손속에 인정을 두어라) 을지호의 귓가에 태상호법의 다급한 전음성이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을지호가 미간을 향해 날아가는 무영시의 방향을 바꾸고 화살은 목표가 됐던 사내들의 허벅지를 적중했다. 크헉! 윽! 무영시에 적중당한 세명의 무인은 난데없이 밀려드는 고통에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을지호와 흉측하게 뭉게진 허벅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직접 당하고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충격과 경악이 순식간에 그들을 휘감았다. 저, 저것은!! 화천명이 가슴에 품었던 검을 내려뜨리며 경악성을 내뱉었다. 저것이... 무영시. 명불허전이라더니... 과연!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에 화천명처럼 놀라지는 않았어도 탄성을 내뱉으며 술잔을 들이키는 안휘명의 얼굴도 상당히 굳어 있었다. 어느새 검을 빼 든 화천명의 뇌리에 패천수호대의 명성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던 과거의 사건이 떠오르고 있었다. 궁...귀입니까? 궁귀 을지소문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후예나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안휘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안휘명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를 악문 화천명은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사이 당황하고 있는 패천수호대의 대원들을 몇 명 더 쓰러뜨리고 여유있게 몸을 뺀 을지호가 태상호법과 전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패천수호대라고요?) (그렇다.) (패천궁... 그럼, 저사람이 궁주입니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럴 게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짓을.....) (글쎄다. 그건 저 녀석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아무튼 네 무공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 같구나.그냥 적당히 해두거라.따지고 보면 남남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말은 그리했지만 패천수호대는 태상호법이나 그의 말대로 적당히 상대할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처음부터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을지호가 안휘명에게 물었다. 난 저들을 말릴 힘이 없다네. 사실 말리고 싶지도 않지만. 안휘명이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반응에 쓴 웃음을 지은 을지호가 무슨 생각인지 궁을 거두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이게 뭔지는 아시겠지요? 서, 설마.... 을지호의 태연스런 질문에 느긋이 술잔을 들이키던 안휘명은 자신도 모르게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특히 검신에 새겨져 있는 풍혼이란 글자는 안력을 키우지 않았는데도 유난히 크게 들어왔다.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그는 기묘하게 움직이는 풍혼을 보며 또 한번 기겁을 했다. 처, 천.... 천검만파? 설마!! 도리질을 치는 안휘명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터엔 때 아닌 한풍이 몰아쳤다. 서서히 움직이는 을지호, 그의 전신에서 괴이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그것은 비스듬히 세운 풍혼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크아악! 을지호의 검이 모든 움직임을 마치기도 전데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위세에 눌린 패천수호대의 대원들은 감히 대응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기에 정신이 없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이곳에서 뼈를 묻고 싶지 않으면 정신들 똑바로 차려!! 전신으로 밀려오는 기세를 간신히 해소한 화천명이 넋이 나간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과거 궁귀는 궁뿐만 아니라 검에도 대단한 솜씨를 보여주었다.그를 천하제일인으로 만든 것은 궁이 아니라 검이라 단정해도 무방할 정도로 독보적인 실력을 자랑했다. 후예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은 조금 전의 단 한 수로 입증되었다. 화천명의 외침에 패천수호대의 대원들은 일제히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초대 패천수호대의 대주이자 불운한 영웅사령 독고적의 독문무공이자 이후 패천수호대의 대원이라면 누구나 익히고 있는 혈우검법을 일제히 펼치기 시작했다.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은 일곱을 제외하고 도합 열네 명의 고수가 하나가 되어 펼치는 합공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을지호는 그런 공격에 정면으로 부딪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물론 전력을 다한다면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손속에 인정을 두라는 태상호법의 말도 있고 구태여 힘을 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정면으로 치는 대신 가장 기세가 약한 측면을 파고 들어갔다. 그의 목표가 된 사내가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의 검은 그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닌 무공을 채 펼쳐 보기도 전에 을지호의 발길질에 아랫배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포위망을 벗어난 을지호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재차 검을 휘둘럿다. 처, 천검무영! 여, 역시 파검삼식이란 말인가! 바로 그때, 난데없는 전음성이 안휘명의 귓가를 때려왔다. (멍청한 놈! 모두 죽일 셈이냐!) 을지호가 사용하는 무공이 진정 파검삼식이라면 패천수호대의 전원이 찰려든다 해도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터. 고작 열뎃 명의 인원은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보다도 못했다. 멈춰랏~! 안휘명은 전음의 주인이 주구인지 알아볼 여유도 없이 크게 고함을 치며 몸을 날렸다. 왔군. 을지호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상대는 누가 뭐라 해도 천하를 양분하고 있고 인물편 첫 머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최고의 고수였다. 지금처럼 소홀리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더불어 약간의 호승심이 그를 자극했다. 을지호는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기운을 느끼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곤 터질 듯이 모인 기운이 정확히 중간 지점에서 격돌했다. 꽈꽈꽝!! 거대한 두 개의 기운이 부딪치며 내는 괭음이 공터를 넘어 천지사방에 울려 퍼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거죽이 뒤집혔다. 흙과 자갈들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마음껏 비산했다 가까이에 있던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내며 무참히 쓰러지고 숲에 은신해 있던 새들이 놀라 날개를 푸덕거리며 날아올랐다. 그것도 잠시, 지축을 흔들던 소란이 가라앉고 숨이 막힐 듯한 적막감이 공터를 휘감았다. 아무런 말도 움직임도 없었다. 그것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먼지가 땅에 조용히 안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서, 성주님! 먼지가 잦아들고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당당히 서 있는 안휘면의 모습이 드러나자 화천명이 서둘러 곁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난 괜찮으니 그리 소란 떨 것 없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는 것이 부상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재차 물엇다. 진정 괜찮으십니까?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괜찮을 수밖에.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기겁한 화천명이 몸을 돌렸다. 그들의 뒤에 기척도 없이 다가온 태상호법이 냉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누구냐!! 화천명이 검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태상호법은 그런 화천명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며 눈빛을 빛내고 있는 안휘명을 바라보았다. 쯧쯧, 한심하기는 ... 명색이 패천궁의 궁주라는 녀석이.... 아! 어, 어르신! 그제야 태상호법을 알아본 안휘명이 허겁지겁 몸을 추스르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강녕은 무슨... 못난 놈 같으니라고! 이게 무슨 날리더냐! 태상호법이 대뜸 호통을 쳤다. 멋쩍은 미소를 지은 안휘명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오랜만이긴 하구나. 그래, 한 십여 년 되었느냐? 안휘명의 입가에 고소가 지어졌다. 삼십 년은 족히 되었습니다. 허, 벌써... 하긴 꽤 오래되기는 하였구나. 한데 저아이는 누구냐? 눈에 힘니 들어간 것이 제법 실력있어 보이는데.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태상호법이 화천면을 을시하며 물었다. 패천수호대의 대주입니다. 천명아, 인사드리거라. 화천명입니다. 화천명이 태상호법을 향해 인사했다. 한데 그 인사라는 것이 가관이었다. 살짝 고개를 꺾는 것이 전부였다. 허리조차 숙이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는 패천궁의 궁주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태상호법에 대한 반감때문이었으나 안휘명으로선 기겁할 일이었다. 하하, 용서해 주십시요. 원래 성격이 이런 녀석이라..... 안휘명은 향여나 태상호법이 노여워할까 걱정하며 서둘러 변명을 하고 나섰다.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패천수호대의 수장이라면 그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겠지. 그러나 아무래도 불안했던지 안휘명은 화천명에게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현재 패천궁에서 태상호법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오직 궁주인 안휘명과 전대 궁주인 안당, 군사인 예당하, 그리고 비형대의 대주인 장소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화천명은 태상호법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화천명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리고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요,요, 용서를.... 쯧쯧, 또 쓸데없이 입을 나불대었구나. 태상호법이 못마땅해하며 혀를 차자 안휘명이 재빨리 화재를 바꾸었다. 한데 어찌 아셨습니까? 어르신은 따로 찾아뵈려 하였는데.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자리더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언제 흙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몸이기는 하나 미행 따위를 눈치 채지 못할 내가 아니다. 다만 저 녀석이 너와 관계가 있을 듯하여 그냥 지켜만 본 것이지. 태상호법이 한쪽으로 물러나 시립하고 있는 비혈대원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하하,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비혈대가 아무리 은밀히 움직인다 해도 어르신의 이목을 속일 수야 없겠지요. 그리 말을 하면서도 안휘명은 비혈대의 훈련을 조금 강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곳까지 어쩐일이더냐. 네가 장강을 넘었다는 것을 알며 저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하하, 상관없습니다. 그냥 어르신도 뵙고 싶고... 그냥 유람차 나온 것인데요. 뭐, 시비를 건다 해도 상관은 없지만요. 태연히 대꾸하는 안휘명은 실로 자신만만했다. 과연 무림을 양분하고 있는 세력의 우두머리다운 여유로움이 자연스레 풍겨져 나왔다. 그렇다면 나를 찾아올 것이지 왜 이 녀석을 먼저 불렀느냐? 조금만 늦었더도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느냐? 어르신을 뵈러 떠난 길이기도 했지만, 참, 어르신께서 건강히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고 전대 궁주께서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그래, 네 아비도 잘 있느냐? 예, 여전히 괴팍한 성정으로 저를 괴롭히고 있지요. 태상호법의 생존 사실을 알고는 당장 찾아 나서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안당의 모습을 상기하며 살짝 인상을 쓴 안휘명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을지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태연히 서 있는 을지호 역시 그화 마찬가지로 별 타격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저 친구를 꼭 보고 싶었습니다. 을지 성을 쓰고... 또 과거 궁귀가 쓰던 무공과 똑같은 무공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뭐, 이것저것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그나저나 저 친구가 그분의 후예가 맞지 않습니까? 이미 을지호가 지나온 길을 역으로 더듬어 완벽에 가깝도록 조사를 한 안휘명이 최후로 확인하려는 듯 은근히 물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다 알면서 뭘 묻는 것이냐? 그래도 모르는 것이라... 자네, 처음 사용한 무공이... 무영시입니다. 그렇지. 무영시. 듣던 대로 대단한 무공이야. 황당하기도 하고. 그리고 뒤에 사용한 검법은... 을지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검삼식입니다. 역시... 그 무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고 생각했네. 그 분께서 떠나시기 전 비급을 남겼거든. 한데 자네가 그 무공을 사용할 줄이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건만. 그래, 그분께 배웠나? 을지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안휘명의 눈가에 의혹이 맴돌자 을지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고조부님게 배웠습니다. 고조부라면.... 구양풍. 네게는 사조가 된다. 태상호법이 을지호를 대신해 대답했다. 안휘명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그분께서도 살아 계시는 건가? 고조부님은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후~ 그렇군.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꼭 한 번 만나뵙고 싶었건만... 후~~ 하무튼 결국 괜한 짓 하다가 애꿎은 수하들을 다치게 하고 망신만 톡톡히 당한 셈이로군. 이거야 원, 창피해서. 안휘명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십여 명이 엄는 패천수호애의 대원 중 멀쩡한 사람은 거의없었다. 그나마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으나 그것 역시 그들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을지호가 손속에 인정을 두었기에 그 정도에 그친 것이었다. 그만 돌아가도록 하자.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야지. 너도 그만 궁으로 돌아가거라,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태상호법이 말에 을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르신께서도 가시는 겁니까? 안휘명이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이다. 네가 유람차 이곳에 온 것처럼 나 또한 녹기 전에 여흥을 즐기기 위함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내가 아니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남궁세가의 태상호법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으니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게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긴, 어르신을 알아볼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어르신이 저 친구와 동행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저 또한 알아보지 못했을 뻔했으니까요. 너무 젊어지셔서.... 안휘명이 의뭉스런 웃음을 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허, 네가 나를 상대로 농을 하다니. 궁주라는 자리가 좋기 좋구나.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저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당황한 안휘명이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볼일 다 보았으면 이만 돌아가거라. 우리는 갈 길이 바쁘다. 하하, 저 또한 나름대로 바쁜 몸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여흥이 끝나시면 궁에 한번 들러주십시오. 그때는 자네도 함께 오게나. 예, 그리하지요. 그리고 그동안 신경 써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니? 안휘명이 능청스럽게 되물었으나 을지호는 대답 대신 재차 고개를 속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남궁세가에 별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글쎄, 전에야 태상호법께서 계셔서 그랬다지만 앞으로야... 좋아, 자네의 말대로 해주지. 그렇지만 맨입으로는 힘든데.... 어찌하겠냐는 표정으로 을지호를 쳐다보는 안휘명, 입가에는 짓궃은 미소가 감돌았는데... 이 검이 어떤 검인 줄은 아시지요? 을지호가 풍혼을 내보니며 물었다. 알다마다. 손을 뻗는 안휘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릐 손을 피해 풍혼을 거두어들인 을지호가 담담히 말했다. 만약 남궁세가에 문제가 생긴다면.... 생긴다면? 안휘명이 다급히 물었다. 화산파나 무당파 장문인의 손에 이 검이 들려 있을 겁니다. 뭐, 패악질을 일삼는 삼류건달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고요, 어찌 될는진 저도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었다. 입을 쩍 벌린 안휘명은 할 말을 잃었고 태상호법 또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실로 무서운 협박이군. 협박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남궁세가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땐 풍혼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흐흐흐. 마지막 말은 마음에 드는군. 좋아, 거래가 성립된 것으로 하세나. 대신 나중에 딴소리를 하면 안 되네. 물론입니다. 을지호는 미소로써 대답해 주었다. 안휘명 또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장차 무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투랑 연락은 왔는가? 예. 아직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일단 우리 쪽 의견을 따르겠다고 전해왔습니다. 북해와 곤명에서 은밀히 이동을 시작했고 철혈마단은 단주 이하 모든 인원이 이미 사천의 경계에 집결했다는 전갈입니다. 허, 벌써? 탑리목에서 사천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과연 철혈마단이야. 중년인의 감탄에 설명을 하던 사내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걱정입니다. 저렇게 드러내 놓고 움직이면 일에 차질이 올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뭐, 그 정도 생각이야 하고 있겠지.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거야. 저들 이목의 대부분이 패천궁 쪽으로 향해 있고 때마침 오룡지회도 열리고 있으니. 그나저나 준비는 제대로 되고 있는가? 예. 남릉, 청양,상주를 비롯하여 공격의 대상이 되는 열두 곳의 분타에 모든 인원의 배치를 마쳤습니다. 모두들 주군의 명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상이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동하기가 용이치 않아서... 하나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상대는 패천궁이야. 자신감은 좋지만 자만해서는 안돼. 중년인은 사내의 사신만만한 태도가 걸리는지 주의를 주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규모가 큰 분타는 가급적 피하고 규모가 작거나 그저 형식적으로 세워놓은 분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잘했네. 어차피 큰 싸움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불씨를 만드는 것이니만큼 큰 무리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시작은 언제 할 생각인가? 아무래도 오룡지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가 좋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내 생각도 그래. 아무튼 이후 모든 계획은 자네가 맡도록 하게. 난 자네만 믿고 마음 편히 다녀오도록 하지. 맡겨주십시오, 주군. 목숨을 걸고 완벽하게 성사시키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사천... 아니, 우리 중천의 태동을 아리는 첫 번째 행사인데 제대로 되어야겠지 살짝 깍지를 끼는 중년인의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 남궁세가를 떠나 황보세가로의 먼 여행길에 나선 지도 어느새 사십여일. 장강을 넘어 곧바로 북상을 시작한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호북과 하남을 지나 어느덧 황보세가가 위치한 태안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오랜 여행으로 지친 그들은 태안과 인접한 동평현의 염화객점에서 이틀째 머물면서 여독을 풀고 있었다. 우와~ 날씨 한번 기가 막히는군 비가 온 다음날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살은 유난히 화창했다. 입을 쩍 벌리고 한껏 기지개를 켜던 해웅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새벽까지만 해도 금방 그칠 비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야. 졸린 눈을 비비며 찻잔을 홀짝이던 강유가 맞장구를 쳤다. 그나저나 살아 있으려나 몰라. 누가 누구긴...뻔하잖아. 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살아 있기야 하갰지. 고생깨나 하겠지만. 주군도 참, 적당히 좀 하시지. 아무리 수련도 좋지만 어제 같은 날씨는 정말 아니었어. 비도 그렇지만 천둥 번개가 좀 심했냐? 모르는 소리 형님도 그렇게 수련을 했다고 하시잖아. 그리고 이건 나도 들은 말인데 열두 살 때던가... 출행랑인가 뭔가 하는 무공을 익힐땐 조그만 동굴에서 백 마리도 넘는 늑대를 혼자 상대했다고 하더라. 에이~ 설마... 그런 거짓말을. 해웅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 야유를 보냈다. 강유가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형님이 아니라 할아버지께 들은 얘기야. 처음엔 나도 믿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이더라. 지금의 모습만 봐도 그렇잖아. 세상에 이런 날씨에 수련을 시킨다고 산속으로 끌고 가는 것을 봐라. 하긴, 평소에 천뢰대의 수련 모습을 보면 그럴 것도 같다. 괴상가기도 하고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해웅은 을지호가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수련법으로 가르친 이후로 매일같이 죽을상을 하던 천뢰대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괴상한 것을 따지자면 네놈 수련법도 만만치는 않잖아. 강유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해웅의 가슴을 툭 쳤다. 하하, 그런가? 뭐, 그럴 수도.... 해웅이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내려가자. 조금 전 음식 준비가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해웅이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며 대꾸했다. 음식이라.... 좋지. 주로 술과 음식을 내어놓는 염화객점의 일층은 비교적 이른 시간임엗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오룡지회를 구경하기 위해서 각지에서 몰려온 무인들이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며-밤을 새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상쾌했던 기분을 확 날려 버린 강유가 인상을 썼다. 젠장, 뭔 놈이 인간들이 이리도 많아. 왜 또 그래. 그러지 말고 인상 좀 펴. 아침부터..... 핀잔 섞인 말을 던지 해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행에게 큰 걸음으로 다가갔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덩치를 보고 행여나 시비라도 붙을까 두려워하며 몸을 피했다.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세 개의 커다란 탁자에 분산되어 앉아 있었다. 어서 와요. 남궁민이 환한 미소로 그들을 반겼다. 늦었습니다.그런데 꼭 여기서 먹어야 하는 겁니까? 객식에다 음식을 차리라면 될 텐데요. 너무 시끄러워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것 같네요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강유가 잔뜩 인상을 구기며 알했다. 오룡지회 때문에 사람들이 워낙 많이 들이닥쳐서 일손이 모자란답니다. 객실도 모자라 그냥 돌아간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하고. 근처의 모든 객점들이 그렇담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객실을 구한 것이 천행이었습니다. 천도문이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천행은 무슨... 마음에 안 들어. 불평 좀 그만해라. 시끌벅적한 것도 나름대로 괜찮구만. 쯧쯧, 누가 해적 출신아니랄까 봐.... 좋기도 하겠다. 흐흐, 암, 좋지, 좋다마다. 강유의 힐난을 가볍게 넘긴 해운이 잘 구워진 오리 한 마리를 통째로 집어들었다. 그런데... 어이, 뇌전. 뭘그리 쳐다보느라 그리 정신을 놓고 있어? 해웅이 뜯어낸 닭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저 꼬마 놈이 아까부터 자꾸 이곳을 쳐다보고 있어서요. 무슨 소리야? 뇌전이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저놈 말입니다. 조금 전부터 자꾸만 이쪽을 보고 있잖아요. 그것도 실실 웃으면서요. 기분 더럽게스리. 뇌전이 인상을 찡그리자 그러잖아도 평범하지 않은 얼굴이 더욱 살벌해졌다. 어디 한두 번 겪은 일인가. 여기까지 오면서 수도 없이 겪었잖아. 그냥 모른체해. 그래, 초번의 말이 맞다.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은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잖아. 몰락한 줄만 알았던 남궁세가가 이렇게 떡하니 등장했으니 신기할 만도 하지. 강유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몇 마디를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뇌전 또한 짧게 콧바람을 내뿜더니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혔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뇌전이 시선을 거두자마자 몸을 일으킨 사내가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당신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지? 남궁민의 전면에서 걸음을 멈춘 사내. 아니. 딱히 사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작달만한 키에 계집아이처럼 가녀린 몸매. 얼굴 또한 상당히 앳됐고 나이 또한 많아봐야 열일곱이나 열여덟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다만 목덜미와 왼쪽 볼의 작지 않은 흉터,포권을 하는 손이 상처로 뒤덮인 것이 그가 단지 어린아이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요, 누구신가요? 남궁민이 흥분하여 벌떡 몸을 일으키는 식솔들을 제지하며 정중히 물었다. 하하핫,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 아무튼 반가워. 나는 투랑이라고 해. 투랑이라면...혹, 신걸? 초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투랑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어, 나를 아는 모양이네? 투랑의 놀람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종을 가지고 초번을 응시했다. 그러자 초번의 입에서 그가 외웠던 인물편의 기억이 자동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투랑// 본명은 신걸. 어려서 부모를 잃은 천애고아로 신예원이라는 누이가 한 명 있음. 나이 일곱에 무광 곽검명의 눈에 들어 그의 손자가 되고 과거 호천단의 단주였던 투귀 이성진과도 인연을 맺음. 어릴 적부터 싸움을 밥 먹듯이 좋아해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일찌감치 투랑이라는 별호를 얻었고, 무공실력은 나이를 감안하면 뛰어나나 고수라 불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음. 초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추랑의 탄성이 이어졌다. 이야~ 이거야 원, 정말 놀랍군, 놀라워. 나에 대해나보다 더 자세히 아는 사람이 있다니. 닥쳐! 네놈이 뭐 하는 놈인지 그 딴 것은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뭣 때문에 아까부터 쳐다본 것이.... 윽! 시비조로 묻던 뇌전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곧바로 강유의 전음성이 전해졌다. (소란 피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 가주님도 계시고... 네가 나설 데가 아니잖아.) 그제야 강유는 물론이고 애웅이 스산한 표정으로 쏘아보는 것을 느낀 뇌전은 슬그머니 남궁민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슨 볼일 이라도 있는 건가요? 소란이 가라앉자 남궁민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투랑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딱히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야. 평소 남궁세가의 이름을 흠모했던터라 그냥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 거짓말이야, 거짓말. 딱 보면 알잖아. 뇌전이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남궁민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남궁민이 조용히 되물었다.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군요. 꼭 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말끝을 흐리던 투랑은 담담히 쳐다보는 남궁민의 시선을 의식하곤 정색하며 말했다. 나랑 한번 붙어보지요. 한마디로 비무 신청이었다. 한데 그 대상이 남궁민이 아니었다. 어느새 몸을 돌린 투랑이 전혀 예의를 갖추지 않고-딴에는 정중한 것인지도 모르지만-마치 삼류건달이 뒷골목에서 싸움을 걸듯 비무를 청한 상대는 놀랍게도 태상호법이었다. 모두들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이 투랑이 우렁찬 목소리로 재차 청했다. 빼지 말고 상대해 주시지요, 영감님! 묵묵히 차를 들이키던 태상호법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비무를 청하는 것이더냐? 그런 셈이지요. 비무라... 재밌겠구나. 흐흐흐 태상호법의 말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투랑이 환히 웃으며 기꺼워했다. 하나 그것을 용인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성질 급한 뇌전의 행동이 가장 빨랐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보았나! 감히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네놈따위가 망발을 내뱉을 분이 아니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 그런다고 물러선 투랑이 아니었다. 뇌전을 응시하는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웃어? 어린놈의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투랑의 미소에 이성을 잃은 뇌전이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투랑의 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뇌전이 접근하는 만큼 그가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잉? 지금 피했냐? 피한 것이 아니라 상대하기 싫어서 물러난 거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무서워서 피하는게 하니거든. 나는 약한 상대와는 싸우지 않아. 이 건방진 애송이가!! 모욕도 보통 모욕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그렇다 쳐도 가주에게까지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은 도저히 용인할 수가 없었다. 창! 뇌전이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그는 투랑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어느새 강유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공자님! 뇌전이 분기탱천한 음성으로 강유를 불렀다. 강유가 호법이란 지위에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강유를 이공자라 부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저 녀석 말이 맞는 것 같다. 네 상대가 아니야. 강유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뇌전이 강하게 부정했다. 강유의 말이 옳다. 태상호법님! 물러서거라. 으...... 말도 되지 않을 소리였으나 태상호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한참이나 투랑을 노려본 뇌전이 치미는 분을 간신히 억누르며 몸을 돌렸다. 태상호법은 그런 뇌전의 반응에는 상관없다는 듯 태연스레 질문을 던졌다. 하나만 묻도록 하마. 그러시지요. 왜 하필 나더냐? 강해 보여서요. 지금껏 많은 고수들을 만났고 비무를 해왔지만 영감님처럼 강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늘 나를 괴롭히던 영감탱이들도 강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님만큼은 아닌 것 같아서요. 투랑이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대답했다. 호오~ 흥미로운 대답이구나. 하나 지금 이곳에는 나를 제외하고도 너를 상대할 만한 녀석이 꽤 있다. 투랑의 시선이 잠시 동안 강유와 남궁민에게 향했다. 강해 보이기는 해도 내 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네 생각이겠지. 재빨리 말을 받은 강유가 투랑에게 다가갔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다. 네가 태상호법님과 비무를 하고자 한다면 우선 나부터 꺽고 나서 청을 올려라. 투랑은 대답하지 않고 태상호법을 쳐다봤다. 태상호법이 느긋하게 찻잔을 들며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취했다. 중앙의 탁자는 대부분이 치워진 상태였고 그곳에서 술과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이미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럼 그러던지. 어차피 몸도 풀어야 하니까. 헌데 어무 좁지 않을까? 투랑이 물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오래 끌 생각은 없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투랑의 대꾸를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빈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리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바로 그때, 일단의 무리들이 객점의 문을 열고 요란스럽게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향했다. 객점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밤새 우면산을 헤집고 다닌 을지호와 천뢰대원들이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변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을지호가 물었다. 그것이.... 아니, 설명은 차차 듣기로 하고 우선 이 녀석들이나 좀 챙겨라. 어찌나 죽는소리를 해대는지... 고작 하룻밤을 가지고 말이야. 고개를 흔든 을지호가 천뢰대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곤 태상호법이 있는 탁자로 다가가 연거푸 찻잔을 들이켰다. 모양새를 보니 말은 그리해도 그 역시 꽤나 지친 모양이었다. 악천후를 뚫고 행해졌던 수련이 꽤나 힘들었는지 비틀거리며 객점에 들어선 천뢰대원들은 거의 초주검이 된 상태였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젖었던 옷은 이미 말랐지만 옷에 묻었던 흙들이 엉겨 붙고 이곳저곳이 보기 흉하게 찢어져 잇어 거지꼴도 그런 거지꼴이 없었다 그들은 장내의 상황이 어떤지, 또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있었다. 제법 힘들었던 모양이군. 괜찮아? 율천에게 다가간 해웅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럭저럭요. 간신히 고개를 쳐든 율천이 대답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말은 그래해도 천혀 괜찮은 표정이 아니었다. 눈동자도 다들 풀려있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한 일. 해웅은 을지호가 얼마나 심하게 닦달했을까 생각하곤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다. 뭐 해? 빨리 객실로 옮겨주고 우선 목욕부터 시켜. 그의 고갯짓에 주변에 있던 식솔들이 일제히 그들을 부축해 사라졌다. 그사이 남궁민에게 간단히 사정 얘기를 들은 을지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투랑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어르신께 도전장을 내밀었단 말입니까? 그런 셈이다. 재밌는 녀석이네요. 한데 왜 강유가 설치는 겁니까? 어르신께서 한 수 가르쳐 주시지 않고요. 하하하! 뭐가 그리 유쾌한지 을지호가 객점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그런데 그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투랑이 다가왔다. 을지호는 그를 막으려는 강유의 행동을 제지하며 물었다. 나에게도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 주저없는 대답이 나왔다. 나하고 한번 붙자. 남궁민이 대충 설명하긴 했어도 투랑의 말투까지는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에게 존대를 받은 사람은 태상호법이 유일했다. ...... 다짜고짜 다가와 반말로 내던지는 도전장에 을지호는 뭐라 대꾸를 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태상호법과 남궁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호호, 영광으로 생각하세요. 자기보다 강해 보이지 않으면 청하지도 않는다니까. 남궁민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이놈 뭐냐? 을지호의 질문에 초번은 조금 전 모두에게 했던 얘기를 재차 반복해 들려주었다. 오호라, 이놈이 바로 할아버지의 의형 되시는 분의 손자호군. 초번을 통해 투랑이 곽검명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을지호가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살폈다. 그러잖아도 의형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라는 할아버지의 말씀도 있었던 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분늬 후예라 할 수 있는 투랑을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웠다. 물론 아직 내색 할 때는 아니었지만. 흠, 다른 것은 몰라도 맨 마지막 말은 틀린 것 같다. 꽤나 강해 보이거든. 삼년 전이 기록이니 많이 틀리겠지. 어이, 꼬마야. 을지호가 애써 반가움을 감추며 투랑을 불렀다. 꼬마는 누가 꼬마냐? 투랑이다. 성질하고는. 투랑이든 가랑이든 내 눈엔 꼬마로밖에 안 보이니까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어쨌든 네 말인즉 지금 나하고 싸우자는 것이지? 그렇다. 좋아, 까짓 것 못할 것도 없지. 그런데 어쩐다.... 네가 저 어르신과 싸우기 위해서 단계를 밟아야 하듯이 내게 도전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말끝을 흐린 을지호의 시선이 해웅을 향했다. 투랑의 말투며 행동이 버릇없긴 해도 화가 치솟기보다는 이상하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던 해웅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제가 합니까? ----------------------------------------2권 책 대여일을 맞추려다 보니 오타가 많을 겁니다. 에구~ 어깨야 주광 단견 그럼 내가 할까? 흐흐,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해웅이 좋은 상대를 놓쳤다는 표정으로 뾰로통해 있는 강유를 살피며 대꾸를 했다. 그렇게 신나 할 일만은 아닐걸, 녀석 제법 강해. 잘못하면 진다. 넌지시 말을 건네는 을지호늬 어투가 사뭇 진지했으나 그느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에이, 설마요. 그러 리야 있겠습니까? 하하! 자, 어서 덤벼... 헛!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던 해웅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으 시선에 어느새 허공으로 떠올라 발길질을 해대는 투랑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해웅이 깜짝 놀라 재빨리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투랑의 발은 이미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하고 그 탄력으로 재차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퍽퍽퍽! 해웅의 몸에서 연속적으로 격타음이 울렸다. 뭐야, 이거. 몸뚱이가 장난이 아닌데! 땅에 발을 딛기 전 멋진 회전 발차기로 옆구리를 가격하며 마지막을 장식하고는 슬쩍 몸을 뺀 투랑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허공으로 떠올라 다섯 번의 발길질을 했다. 하나같이 중요한 급소였다. 애당초 겨루고자 한 상대는 그가 아니기에 빨리 끝내려고 다소 위험한 공격을 했건만 쓰러뜨리기는 커녕 도리어 발목만 시큰거리는 것이 아닌가. 비겁하게 기습을 하다니!! 양손을 교차하여 얼굴을 가렸던 해웅이 천천히 손을 풀었다. 사람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인지 조금 전의 미소는 천 리 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비겁은 무슨, 상대를 눈앞에 두고 딴 짓을 하는 놈이 바보지. 하무튼 제법 단단한 몸뚱이를 지녔는데, 재밌겠어. 어디 다시 한 번 시험을 해볼까나. 투랑은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상대의 반응엔 신경도 쓰지 않고 마치 새로 장만한 장난감을 가지고 신나 하는 아린아이처럼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건방진 꼬마 놈! 해웅이 정면으로 쇄도해 오는 투랑을 향해 무지막지한 주먹을 휘둘렀다. 걸리는 것은 무었이라도 박살 낼 듯한 기세. 그러나 그의 공격은 투랑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투랑은 한없이 느리게 다가오는- 물론 해웅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빠른 것이겠지만-주먹을 간단히 피하고 도리어 허공을 가르며 빗나가는 팔을 휘감아 훌쩍 몸을 띄웠다. 천령. 낭랑한 외침이 객점에 울려 퍼지고, 멋지게 호선을 그린 그의 왼쪽 발꿈치가 해웅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고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 할지라도 맞는 즉시 즉사할 사혈이 었으나 불행 중 다행인지 해웅은 보통 사람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젠장! 해웅은 고통을 느끼는 대신 무방비로 당했다는 수치심에 이를 부득 갈았다. 천주! 아직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던 투랑의 입에서 재차 함성이 터져 나오며 무시무시한 힘을 실은 발길질이 목덜미에 이어졌다. 천령혈이 그렇듯 천주혈 역시 치명적인 사혈이었다. 연속적으로 견뎌내기는 했어도 충격이 없을 수 없었다. 크으 휘청거리는 해웅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오고 머리가 울리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상대를 가만히 두고 볼 투랑이 아니었다. 아직 멀었다니까. 조소 섞인 웃음과 함께 해웅에게 접근하는 그의 손이 기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춤을 추는 손에 기이한 힘이라도 있는지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동시에 해웅을 향해 서서히 접근하는 수십의 수영이 그의 요혈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공격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해웅은 바싹 긴장하며 마구 주먹을 뻗었다. 하나 수를 놓듯 허공을 누비며 접근하는 투랑의 손길은 해웅의 주먹을 슬그머니 피해 전신의 각 요혈에 적중하기 시작했다. 최초 장문혈에서 시작하여 기문혈과 화개혈 등 가슴과 배꼽 주변의 요혈을 가격한 투랑은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자신을 쫓는 해웅의 반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등 뒤로 돌아가 풍문, 기해, 혼문혈, 등을 애무하듯 어루만졌다. 정면으로 쇄도해 열두 곳의 요혈을 공격한 일련의 움직임. 비록 설명은 장황해도 모든 공격은 찰라지간에 이루어졌다. 매, 매화산수다! 누군가의 입에서 탄서이 터져 나왔다. 투랑이 사용한 무공이 화산파가 자랑하는 매화산수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랬다. 투랑이 그 짧은 시간에 무수히 많은 혈도를 점한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손놀림, 이른 봄날 흩날리는 매화를 보며 창안했다는, 일수에 서른 두개의 변화가 숨어 있는 데다가 눈으로는 도저히 그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는 기쾌한 무공 매화산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단 한번에 스무 곳이 넘는 혈을 점하다니.....! 굳은 얼굴로 전황을 살피던 강유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겉으러 보기엔 그렇지만 최소한 배는 더 되는 곳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해웅의 약점을 찾기라도 하듯 샅샅이. 역시 꽤나 힘든 싸움이 되겠는걸. 하지만 웬만한 검기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 해웅입니다. 저 정도에 당할 리가 없지요! 강유가 해웅을 대변하듯 소리쳤다. 그럴까? 그럴 수도..... 하나 매... 뭐라는 무공도 그렇지만 저 발놀림이 마음에 걸려. 평범한 듯 보여도 꽤나 심상치 않단 말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도 투랑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해웅을 향해 접근할 때와 그의 공격을 피해 뒤로 돌아갈 때 보여주었던 발놀림은 신기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취팔선보라는 것이다. 의문점은 태상호법이 해결해 주었다. 취.. 팔선보요? 개방의 비전보법이다. 최소한 장로급이 되어야 익힌다는.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분명 취팔선보가 맞을 것이다. 태상호법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개방에도 의제 분이 있다고 하셨으니 녀석도 그분과 인연을 맺었을 것이고, 당연히 취팔선보를 배울 기회도 있었겠지요. 이거 점점 흥미롭게 되는데요. 을지호와 태상호법의 대화가 잠시 이어지는 동안에도 치열한 박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해웅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양상이었다. 쥐새끼 같으니!! 그렇게 피하지만 말고 당당하게 덤벼라! 아무리 공격을 해도 요리조리 피하고, 악을 쓰며 쫓아도 투랑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자 해웅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다.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투랑의 몸과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거부를 마구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도끼가 허공을 가르며 내는 소리가 소름이 끼칠 만도 하련만 투랑은 전혀 굴하지 않고 오피려 못마땅한 듯 쳐를 찼다. 쯧쯧, 무식한기는...... 이런 좁은 곳에서 그 따위 무식한 도끼를 휘둘러 대다니. 하긴, 곰같이 미련하고 가진 건 힘밖에 없는 놈이니 어쩔 수 없겠지. 좋아, 네가 무기를 꺼낸다면 나도 무리를 꺼내주지.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는 벼룩의 간만큼도 없이 한껏 조소를 보낸 투랑의 손이 허리춤에 머물렀다. 그리고 곧 너무나 미세하여 안력을 집중하여 보지 않으면 제대로 감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가늘고 투명한 실을 흔들어댔다. 지금부터 미련한 곰을 어찌 잡는지 확실히 보여주마. 이 정도 모욕을 당했으면 부처가 아니라 부처 할아비가 와도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으아아아!!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흥분한 해웅이 괴성을 지르며 투항을 쫓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발걸음은 투랑에 비해 너무 느렸고 단조로웠으며, 을지호가 애써 가르친 남궁세가의 보법 역시 취팔선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상대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몸뚱이에 너무 자신만만한 것 아니야? 단단한 것은 인정하지만 못 부술것은 아니라고. 방어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공격 일변도의 해웅을 보며 이죽거리는 투랑에게선 수없이 많은 싸움을 하념서 터득한 여유가 우러나오고 있었다. 네놈 따위가 어쩔 수 있는 몸이 아니다! 검기에도 견딘 몸이었다. 을지호와 같은 절정고수라면 모를까 웬만한 공격엔 자신이 있었다. 이미 전신의 요혈을 수십 번 격타당했음에도 견뎌낸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나 투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을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견한 모양입니다. 을지호가 안색을 다소 굳히며 말했다. 그렇겠지. 저 아이의 능력이라면 능히. 태상호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투랑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사람의 몸은 아무리 수련을 해도 단련할 수 없는 곳이 몇 곳 있더라고. 우선 눈. 투랑이 손을 내밀자 손에 쥐고 있던 실이 해웅의 눈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해웅이 고개를 틀며 실을 낚아채려 했다. 그런데 눈을 향해 날아오던 실이 갑자기 방향을 틀거니 귀를 향하는 것이 아닌가. 좁기는 하지만 귓구멍도 약점이 될 수 있을걸. 비웃음에 신경 쓸겨를 이 없었다. 투랑에 의해 조종되는 실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귓속을 향해 파고들었다. 해웅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손을 들어 귀를 보호했다. 그리고 말이야.... 이곳은 잘 모르겠어. 반반의 확률이거든. 어느새 접근한 투랑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곤 냅다 발을 휘둘렀다. 지면에서 사라진 발은 해웅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의 사타구니에서 발견되었다. 아닌가? 흠, 아닌가 보군. 해웅의 반응을 살피던 투랑이 정확히 한가운데를 파고들어 간 발을 빼내며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억지로 고통을 참고는 있어도 부들부들 떨리는 몸, 일그러지는 얼굴,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해웅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보여주었다. 휴~ 제대로 맞았군요. 꽤나 아프겠습니다. 마치 자신이 가격당한 것처러 잔뜩 인상을 찌푸린 을지호가 사타구니 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으며 말했다. 가장 단련하기 힘든 부분이 아니더냐. 훌류한 사부 밑에서 차근차근 회공을 익힌 이들도 곤란을 겪는 곳이다. 해웅이 홀로 단련하기엔 무리가 있지. 차분히 말하는 태상호법의 말에 을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그것을 걱정했습니다. 나름대로 극복 방법도 연구해 봤지만 아무래도 외공인지라 제게는 무리였습니다. 오늘 일도 있고 하니 제가 알아서 찾을게다. 어쨌든 꽤나 날카롭고 강력했어. 아무리 약점이라도 보통의 힘으로 그다지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을 텐데. 태상호법은 조그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제법이란 생각을 하면서 또다시 괴니한 행동을 하고 있는 투랑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 몸도 제대로 풀었으니 유희는 이쯤에서 끝내볼까나. 해웅의 표정에서 공격이 제대로 먹혔음을 간파한 그는 투명하게 빛나는 실을 꼬나 들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한참 전부터 살심을 품은 해웅이 기다렸다는 듯 도끼를 휘둘렀다. 그 스스로가 위명천하라는 상당히 낯간지러운 이름을 붙인 수법으로 기존의 부법에 태상호법과 을지호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여 적당히 변형시킨 것이가. 천고의 절학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필효한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꽝!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간 도끼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바닥을 파고들었다. 해웅의 입에서 짧은 기합성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깊게 패인 바다을 뒤로하고 허공으로 치켜올려진 도끼가 물러나는 투랑을 집요하게 추격했다. 투랑은 반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해웅이 따라오지 못하는 속도로 그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그런데 공격권을 피해 멀찌감치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간발의 차이를 두며 슬쩍슬쩍 흘려보내는 것이 영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너번의 공격을 실패한 해웅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제기랄! 뭔가가 자신의 다리를 결박하고 있음을 느끼고는 그것이 투랑의 손에 들려 있던 가느다란 실이라는 것을 파악한 해웅이 기겁하며 몸을 빼내려는 찰나였다. 늦었어! 투랑이 낭랑한 외침과 함께 뭔가를 잡아채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느슨하게 엮여 있던 실이 팽팽히 당겨지며 해웅의 몸을 옥죄어왔다. 다리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실은 어느새 양쪽 허벅지며 배, 가슴을 감고 왼쪽 팔을 결박했다. 다급한 신음성을 내뱉은 해응이 아직까지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을 이용해 실을 끊고자 했으나, 양발이 완전히 묶인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남은 팔마저 결박하는 투랑의 움직임을 제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목에까지 실을 감아 돌린 투랑은 뒤로 한 발 물러나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하하하, 이것으로 곰 사냥은 끝났군. 마치 누에고치처럼 온몸이 감긴 실로 인해 옴짝달싹 못하게 된 해웅은 힘르로라도 그것을 끊기 위해 안간힘을 줬다. 그러나 연약하게만 보이는 실은 끊아질 색각을 않고 더욱 팽팽히 당겨지며 슬금슬금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쯧쯧, 관두지 그래 뭐, 가진 게 힘밖에 없는 것은 알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히 끊어질 것이 아니니까. 인면지주라고 들어봤지? 거미 주제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아무튼 네 몸을 묶은 것은 만년 묵은 인면지주의 몸에서 나온 실을 몇 겹으로 꼬아 만든 망웅사라는 건데, 도검으로 내려쳐도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기니까 내당초 포기하는 것이 몸에 이로울 거야. 망웅사. 말 그대로 곰을 잡는 그물이란 말이다. 물론 그런 이름을 가졌을 리가 없었다. 그저 해웅을 조롱하기 위해 투랑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름일 뿐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완벽하게 패배한 해웅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 어때? 이만하면 시험에 통과한 것이겠지? 귀찮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재밌었어. 이제는 약속대로 네가 상대해 줘. 처음의 신나 하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마치 썩은 과일이라도 베어 문 표정으로 서 있는 해웅을 뒤로한 투랑이 을지호에게 시선을 던지며 재차 도전장을 던졌다. 물론, 약속을 했으니 당연하지. 일단 묶은 거이나 풀어줘라. 그러지 뭐. 간단히 대꾸한 투랑은 무시무시한 눈길로 쏘아보는 해웅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망웅사를 풀었다 음. 몸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해웅은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남자라면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인정을 하고 싶어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애당초 이번 싸움은 정정당당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상대를 얕본 자신의 책임이 크다곤 해도 결국 암수에 패한 것이 아니던가. 당장에라도 서슬 퍼런 도끼날을 정수리에 처박고 싶었다. 아니, 도끼를 사용할 것도 없이 주먹질 한 번이면 염라대왕 앞으로 눈길로 그를 쳐다보던 투랑이 지나가는 강아지 쳐다보듯 힐끔거리며 말했다. 방해되니까 얼른 사라져. 마음이 바뀌어서 웅담 구경하자고 덤빌지도 모르니까 순간, 꽉 다문 해웅의 입술이 터져 나가며 피가 흘렀다. 솥뚜껑만한 주먹이 더할 나위 없이 단단히 뭉쳐져 주인의 결단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앞에 놓인 찻잔을 비우고 천천히 걸음은 옮기는 을지호의 미간이 한데 모여지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후~~ 해웅의 입에서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곤 힘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그의 뒤로 투랑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망웅사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다고, 하하하! 한데 그의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난데없이 손때가 잔뜩 묻은 작대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깜짝 놀란 투랑은 작대기의 주인을 확인할 여유도 갖지 못하고 황급히 몸을 틀었다. 한데 작대기는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방향을 틀어 그를 쫓았다. 퍽! 살가죽을 후려치는 경쾌한 격타음이 터짐과 동시에 비명성이 울려퍼졌다. 아이고야! 해웅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능숙하게 피해낸 투랑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서너 걸음을 도망치지 못하고 등짝을 얻어맞고 만 것이다. 좌중의 시선이 작대기의 주인을 찾기 위해 한곳으로 쏠렸다. 모두 취팔선보를 익히고 있는, 아니,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날래기가 범과 같은 투랑을 간단히 제압하는 신묘함을 보여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투랑에게 망신을 준 사람은 놀랍게도 늙은 거지였다. 일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나이, 다리 하나를 잃었는지 의족을 달고 한쪽 손에는 거무튀튀한 흙으로 마무렇게나 빚어 만든 호리병을 다른 손에는 작대기를 들었다. 호리병에 입을 대고 연신 술을 들이키는 노개얼굴은 술 때문인지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는데 특히 코끝은 벌겋다 목해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모두 노개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을 때였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을 감내하며 간신히 작대기의 사정권에서 피한 투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떤 후레자식이냐!! 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음성. 그러나 그 속에는 더할 수 없는 황당함이 깃드러 있었다. 분노의 불꽃이 일던 투랑의 두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어, 거지 할아버지 아닙니까? 그럼 후레자식일 줄 알았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쯧쯧, 그 사부에 그 제자라더니....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투랑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헤헤, 보셨습니까? 처음부터 자알 보고 있었다. 네놈 꼴이 하도 가관이라 한번 두고 봤을 뿐이다. 그리고 뭐? 인면지주? 망웅사? 이놈아! 그것이 언제부터 그런 이름으로 바뀌었더란 말이냐! 취팔선보로도 모자라 내가 고생고생하여 구한 것을 슬쩍해 놓고서. 헤헤, 어쨌든 거미의 몸에서 뽑은 것이니까 그게 그거잖아요. 그리고 세상에 이 좋은 걸 매듭으로 엮어서 고작 신분이나 확인시켜주는 용도로 쓴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몸 바쳐서 실을 얻게 해준 거미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이런 빌어처럭을 놈을 보았나! 거미에 대한 예의? 나 없는 사이에 낼름 구워 먹은 놈이 누구더냐!! 지금 네놈이 그 따위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노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작대기를 치켜세웠다. 위기를 느낀 투랑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허, 개방의 제일 큰 어르신께서 이런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셔서야 되나요?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체통을 생각하셔야..... 투랑의 말은 그 즉시 효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노개가 어떤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웅성거림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주, 주광이다! 상취개!! 시, 십대고수!! 제각기 부르는 이름도 달랏다. 하나 그것들 모두가 한사람을 치칭하는 것이었다. 나이는 어렸어도 항렬이 높고 그 재주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개방 소방주의 위치에 있었던, 비록 패천궁과의 싸움에서 다리를 잃은 덕에 방주 직을 고사하기는 하였지만 방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가히 절대적인 인물. 술기운을 빌어 구사하는 강룡십팔장은 천하일절로 이름이 드높았고 한쪽 다리가 의족임에도 보법은 신묘하기가 하늘에 이를 지경이라는, 투랑의 단 한 마디에 모든 이들의 탄성과 경악, 경외를 한 몸에 받게 된 노개는 다름 아니 무광 곽검명과 더불어 양광으로 불리며 십대고수의 반열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린 상취개 주광 단견이었다. 네, 네놈이...... 일순 당황항 단견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자신이 너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화를 삭여야 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된 것도 아이었으나 항렬을 따지다 보니 개방의 제일 위쪽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던가. 체통이니 명성이니 하는 것과는 인연이 먹다 해도 자리가 죄였다. 명색이 개방의 제일 큰 어른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와 드잡이질을 하는 모습을-물론 충분히 그럴 만한 관계이기는 하였지만-보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휴~ 뚫린 입이라고 말은 청산유수로구나. 좋다, 이놈. 내 오늘은 그냥 참고 넘어가마. 그건 그렇고..... 말끝을 흐린 노개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을지호와 다소 놀란 표정의 남궁민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원체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인지라 예의가 뭔지, 갖추어야 할 격식이 뭔지를 도통 알지 못해. 내 대신 사과하지. 자네들이 이해하게나. 하하 아닙니다,어르신. 어린 마음에 그럴 수 있지요. 조금 과한면이 없지는 않지만.... 자신만만함이 보기 좋습니다. 반가움을 애써 감춘 을지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그래, 아무튼 오룡지회에서 남궁세가를 다시 보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네.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못내 마음이 아팠거늘, 정말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이렇듯 명망이 자자한 고인을 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궁민이 몸가짐을 바로 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영광은 무슨, 늙어 힘도 없고 꼬부라져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거지에 불과한데. 도리질을 하며 대꾸하는 단견, 그래도 남궁민의 예의 바른 모습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맴돌았다. 하니만 그의 미소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투랑이 단견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을지호에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호통이 터졌다. 이놈! 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이냐! 냉큼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어요. 어허, 이놈이 그래도! 그만큼 소란을 피웠으면 자중을 해야지. 그리고 네 녀석은 아직까지도 상대의 역량을 살필 줄 아는 안목도 키우지 못했더란 말이냐? 저 친구가 강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고요. 뭐, 질 수도 있겠지요. 하나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요. 투랑이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단견이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호통을 쳤다. 친구? 쯧쯧, 그놈의 말버릇 하고는! 인석아, 알량한 안목을 어따 들이대는 것이냐! 네 눈엔 어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저 친... 음, 자네 이름이 뭔가? 을지호라 합니다.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을지호가 아직까지 자신의 소개도 하지 않은 것을 상기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을지소협이었군. 어쨌든 네 녀석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응?..을..지? 투랑에게 호통을 치던 단견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을지 성을 쓴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을지 성이라..... 을지 라는 성.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단견은 결코 가볍게 흘려 버릴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얼마나 그립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추억이 담겨 있는 성이던가. 혹,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만감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살피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심 짐작하고 있던 을지호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아, 아니네. 내 잠시 착각을 한 것 같네. 아무리 살펴봐도 눈앞의 청년이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과 연관되는 것은 없었다. 단지 성이 같고 얼굴이 조금 닮은 듯하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겉은 평범해 보여도 결코 예사롭지 않은 실력이 몸 안에 갈무리되어 있다는 것이 처음 을지소문을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뭐라 단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무었보다 그는 을지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궁을 들고 있지 않았다. 역시 그럴리가 없지. 기이한 눈빛으로 을지호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단견이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해웅의 몸에 가려져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을지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철궁에 비스듬히 세워겨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었보다 을지호가 처음 객점으로 들어설 때엔 분명 궁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흘려보낸 것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상이 어쨌거나. 방해하지 마시고 비켜주세요. 전 이자와 승부를 가리고 싶다고요. 단견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퉁명스레 말을 던진 투랑이 잔뜩 몸을 웅크리며 을지호에게로 향했다. 물론 두어 걸음 내딛기 전에 단견이 휘두른 작대기를 피해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나야 했지만. 너 같은 녀석은 열댓 명이 덤벼도 상대가 안 돼. 공연히 까불다 망신당하지 말고 썩 물러서거라! 흥, 해보지 않고는 모르지요. 투랑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안 해봐도 알아. 그러니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말고 따라와. 나와 갈곳이 있다. 엥? 이른 아침부터 갈 곳이라니요? 뭔 말이 그리 많누. 가보면 알 것 아니냐. 하지만.... 어허! 그만하래두! 단견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젠장, 알았다구요. 이쯤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억울했지만, 꼭 붙어보고 싶은 상대가 눈앞에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상을 구기며 물러나는 투랑의 얼굴에 아수움이 물씬 배어 나왔다. 하하,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모늘만 날이 아니잖아. 원하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주지. 정말이냐? 되묻는 투랑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어려서부터 거친 삶을 살았고 무림에 발을 드여놓으면서 끝임없이 싸움을 했다지만 간간이 드러나는 모습에서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을지호는 자신의 한마디에 환하게 웃는 투랑을 보며 그제야 그가 약관의나이에도 미치지 못햇다는 것을 상기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약속한다. 좋아, 그 약속 지키리라 믿겠어. 물론. 대신 각오는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게다. 난 말이야, 어리다고 봐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흐흐, 그건 두고 모면 알 일이지, 마무튼 그날을 기대하고 있겠다. 그 말을 끝으로 투랑은 몸을 돌렸다. 훗날을 기약한 이상 미련을 보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런 투랑을 보며 단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놈 성격이 워낙 지랄 같으니 자네가 이해하게. 그나저나 아쉬운걸. 자네들과 좀 더 많은 얘기를 했으면 좋겠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뵙지 않겠습니까? 남궁민이 공손히 물었다. 그렇지, 어차피 오룡지회에서 보게 되겠군. 그래, 그곳에서 보다 많은 말들을 나누어보세나. 사실 남궁세가와 나의 인연도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허허, 그런가? 아무튼 천천히 오게나. 이 늙은이는 먼저 가겠네. 살펴가시지요. 남궁민과 을지호가 동시에 허리를 굽렸다. 히죽 웃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단견은 단 서너 걸음으로 한참을 앞서 걷는 투랑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객점과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을지호가 조훃히 읊조렸다.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 황보세가 제대로 안내는 해드렸느냐? 그렇습니다. 한 치릐 소홀함도 없이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알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수하를 물린 황보공은 다소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오룡지회호 인해 더할 나위 없이 분주해진 황보세가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은 단연 총관 황보공이었다. 세가의 모든 잡다한 일들을 책임지고 있는 그에게 오룡지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영광스러우면서도 무척이나 골치 아픈 일이었다. 날짜가 결정되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준비하며 사용한 비용은 이미 머리로 셈을 할 수 없는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러나 비용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룡지회가 열리는 동안 찾아오는 손님은 직,간접적으로 대략 수백 명. 그들이 불편함없이 얼마나 편히 지내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후~ 악가도 도착했고, 남궁세가도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 모든 준비는 끝난 것인가? 조금 전 도착한 악가의 무인들을 떠올리며 살작 눈을 뜬 황보공은 잠깐의 여유를 잘기며 찻잔을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닫힌 문이 벌컥 역리며 한 사내가 뛰어들었다. 초, 총관님! 무슨 일이기에 그리 호들갑이냐? 뛰어든 사내가 정문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어야 할 진청임을 알아본 황보공이 다소 짜증나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나,남궁세가.... 급히 뛰어오느라 숨이 찼는지 진청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나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어디쯤 왔다더냐? 이,이미 정문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뭣? 벌써?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직 도착할 때가 아니라고, 여유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을 치는 황보공의 얼굴은 난처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걸음을 재촉한 듯합니다. 진청 역시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알았다. 이거 잘못하면 큰 결례를 하게 생겼구나. 어서 따라오너라.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몸을 날린 황보공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황보세가는 남궁세가에게 세가의 동북쪽에 있는 잠룡각을 숙소로 지정해 주었다. 인원을 감안해서인지 그다지 크지 않고 아담했으나 해서로 멋들어지게 쓰인 편액만큼이나 뭔지 모를 힘이 느껴지는 잠룡각의 삼층엔 남궁민과 을지호, 태상호법이 기거하기로 하였고, 이층엔 강유와 해웅 등이, 그 외의 인원들은 모두 일층에 마련된 방에 분산하여 묵게 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남궁민은 세가의 주요 인물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정리가 끝났나요? 남궁민이 방문을 열고 나란히 들어오는 천도문과 연능천에게 물었다. 예. 그리고 따로 명이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잘했어요. 지내기에 불편할 것 같지는 않던가요? 괜찮습니다. 여타 집기들도 충분하고 특히 널찍한 것이 편히 지낼 수 있을 듯싶습니다. 연능천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자 뇌전이 퉁명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적하기도 합니다. 아~ 주 말이지요. 왜 또 그래? 강유가 입이 네댓 발이나 튀어나온 뇌전에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이거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뭐가? 뇌전이 무엇 때문에 저리 화가 났는지 짐작이 갔고 그 또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을지호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먼 길을 고생해서 왔는데 아무래도 찬밥 신세인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쯧쯧, 너무 앞서 가지 좀 마라. 다 생각하기 나름이야.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문에서 기다리 시간이 한 시진은 되었을 겁니다. 이각 조금 넘었다. 초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시끄러!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럴 수는 없는 거다. 그것도 보통 손님이냐? 너나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손님이라면, 그래, 까짓 문전박대를 당해도 뭐라 할 수 없겠지. 하지만 한 가문의 수장께서 식솔들을 이끌고 방문했다. 성대한 환영식은 둘째 치고 제대로 된 환영은 해줘야 할 것 아냐. 한참을 기다리게 만들더니 영접이라고 나온 인간은 어디 피죽도 얻어먹지 못한 듯 비실비실한 것이 꼭 사기꾼처럼 생겼잖아. 뇌전은 헐래벌떡 뛰어와 고개를 숙이던 황보공을 새악하며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본 가만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에요.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많은 무림인들이 초대를 받아 이곳으로 찾아들었습니다. 그렇게 세세히 신경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민이 달래듯 말했다. 하나 음성에 묻어 나오는 씁쓸함은 역시 감출 수 없었다. 흥,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뇌전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조금 전 숙소를 안내하던 자들 중 한 명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대답을 자꾸 꺼리는 것이 뭔가 이상해서 계속 물어보았더니 꽤나 곤란해하면서 대꾸를 하더군요. 원래는 세가의 가주들이 도착했을 땐 황보세가의 가주가 직접마중을 나왔다고 하더군요. 흠, 우리가 도착했을 땐 그러지 않았잖아. 아무튼 그래서? 해웅이 황급히 되물었다. 뭔가 느끼는 것이 있는지 호흡도 다소 거칠어졌다. 우리가 오착하기 바로 직전에 악가가 도착을 했다고 합나다.아주 거창하게 말이지요. 정말 너무한 처사 아닙니까? 말꼬리를 치켜세운 뇌전이 을지호를 쳐다봤다. 뭔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 그런데 을지호는 뜻 모를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너, 뇌전 맞냐? 예? 뜨금없는 소리였다. 뇌전의 눈동자가 눈동자가 의문으로 물들었다. 하하하, 평소의 네 모습하고 도저히 이어지질 않아서 말이다. 무턱대고 흥분하고 사고만 치는 줄 알았는데 제법이야. 나름대로 설득력도 있는걸.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저도 그렇게 무대포는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저런 상황을 따져 볼때 저들은 우리 남궁세가를 무시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저마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제야 뇌전이 어째서 찬밥 운운했는지 이해한 것이다. 당장 항의라도 하자는 표정들이었다. 특히 뇌전과 더불어 급하고 불 같은 성격의 천도문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수하들이 동요한다고 해서 수장까지 함께 흥분하여 날뛸 수는 없었다. 남궁민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러나 그들만을 탓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음식점에서도 먼저 온 손님에게 먼저 음식을 주문받지 않던가요? 그들을 영접할 때 때마침 우리가 오착한 것이고 보면 일부러 그런 대접을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요. 남궁민은 그 모든 일을 애써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 했으나 한번 시작된 불만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사정이 그렇게 됐다면 이후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록 시간이 어정쩡하긴 했지만 뇌전 호위님의 말대로 우리를 무시하지 않고는 이러지 못합니다. 가장 구석에 앉아 있던 연능천이 한마디 거들었다. 모두 의외라는 듯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남궁세가엔 유난히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많이 모야 있었다. 뇌전과 천도문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강유와 해웅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흥분을 잘했고 급했다. 그나마 초번과 율천 등이 이들과는 달리 과묵하고 침착했지만 천음대 대주 연능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부러 말을 걸지 않으면 하루에 한마디도 듣기 힘든 사람이 바로 연능천이었다. 오죽했으면 천음대의 대원들이 그에게 묵언대주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을까. 그런 연능천이 스스로 말물을 열고, 그것도 강력한 항의가 담긴 말을 했으니 이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 그건.... 남궁민이 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맞네. 이건 동네 아이의 눈으로 봐도 분명히 잘못한 처사지. 암, 잘못하고말고. 약간으 경계가 섞인 시선을 받으며 들어서는 사람은 꽤나 거구의 노인이었다. 그는 황보공으로부터 남궁세가가 도착했다는 말과 그간의 사정을 듣고 추상같은 호통과 더불어 그를 큰대 자로 뻗게 만들고는 서둘러 달려온 벽력권 황보권이었다. 누구신지요? 남궁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물었다. 이 늙은이는 황보권이라 한다네. 비록 안면은 없었으나 초번을 통해 황보세가의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던 을지호 등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벽력권 노선배님이셨군요. 남궁세가를 맡고 있는 남궁민입니다. 허허허, 그런가? 남궁세가의 가주가 젊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미인이라는 것은 몰랐군. 그것은 둘째 치고 우선 이 늙은이의 사과부터 받게나. 예? 어인 말씀이신지? 저 친구의 말대로 오늘 일은 분명 우리 잘못이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무례를 저질렀어. 용서해 주게나. 말과 함께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황보권의 허리가 꺾였다. 이, 이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앞뒤 사정을 들어보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시간이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용서해 주게나. 아, 알겠습니다. 하니 어서 일어나세요. ㅇ르신께서 이러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흠, 그런가? 사과를 하러 왔는데 그래선 안 되겠지. 허허, 아무튼 이 늙은이의 사과를 받아줘서 고맙네. 남궁민의 입가에 고소가 지어졌다. 사과까지 하러 일부러 찾아오실 정도의 일은 아니었지요. 순간 황보권의 입가에 흐믓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과야 나중에라도 할 수 있었지만, 실은 자네들이 보고 싶어서 온 것이라네. 잡시 말문을 닫고 남궁민과 을지호 등을 살피던 황보권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남궁세가와 꽤나 깊은 인연이 있음을 가주깨선 알고 있는가? 그 옛날 권왕 어르신과 함께 본 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셨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허허허, 은혜는 무슨. 난 지금도 그때 함께했던 동료들을 생각하곤 한다네. 남궁형님을 지롯하여 지금 명성을 날리고 있는 무광,주광도 다 함께였지. 다들 혈기왕성했는데. 맞아, 궁귀... 그도 함께였지. 추억을 회상하듯 노용히 읊조리는 말엔 시간의 흐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남궁형님만 멀쩡히 살아 계셨어도 남궁세가가 그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것을.... 남궁민으 황보권이 말하는 사람이 큰할아버지인 남궁진이라는 것을 알고, 또 그의 죽음이 남궁세가의 몰락에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절로 침울해졌다 남궁민의 기분을 눈치 챘는지 황보권이 황급히 음성을 높였다. 하나 이제 누가 있어 남궁세가가 몰락했다고 말하겠는가? 이리 뛰어난 인재들이 많은 것을. 암, 혹독한 부침을 겪을지라도 거목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 법. 누가 뭐래도 천하의 남궁세가인 것을! 과찬이세요. 아직 많이 부족한걸요. 아니네. 내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가우임을 알겠어. 허허허! 정말 다행한 일이야. 아, 그건 그렇고 세가의 입장에선 자네들이 손님이나 이 방에선 내가 손님 아닌가? 차라도 한잔 대접해주게나. 기왕이면 소개도 좀 해주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황보권은 누구의 자인인지 묻지도 않고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황보권이라면 황보장과 더불어 황보세가의 가장 큰 어른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무림에서 보더라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노고수가 직접 찾아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 더구나 한마디 한마디마다 남구세가에 대한 걱정과 염려, 기대가 물씬 묻어 나왔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던 불만은 당현히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차를 따르는 뇌전의 표정에서 단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뇌전이라 합니다. 가장 성질이 급한 친구지요. 을지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황보권에 대해 언급했던 조부의 말이 한치도 틀림이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짓는 미소였다. 뇌전이라... 이름 한번 멋지구만, 그런데 자네는? 을지호라고 합니다. 과분하게도 남궁세가의 호법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호법치고는 꽤나 젋어 보이나 전혀 과분해 보이지 않는군. 황보권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차를 들이키며 대꾸했다. 을지호의 몸에서 은연중 풍기는 기운을 감지한 듯했다. 다만 그는 단견과 다르게 그의 성을 듣고도 별다른 생각은 하지 모했다 을지호는 뭔가를 찾으려 하는 황보권의 눈빛을 담담히 받으며 강유를 비롯하여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였다. 그때마다 황보권은 격려와 칭찬으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소개가 거의 끝나갈 즈음 을지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태상호법을 소개할 차례가 된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당연히 태상호법을 먼저 소개했어야 하지만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의 고민을 다는지 모르는지 황보권이 먼저 물어왔다. 저분은 누구신다? 예, 그러니까.... 힐끔 고개를 돌려 태상호법을 쳐다보던 을지호는 작심한 듯 입술을 깨물고 말문을 열었다. 저희 세가의 큰어른 되시지요. 태상호법이십니다. 존대성명이 어찌 되시는가? 자리에 앉아 있던 황보권이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으며 되물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에서 감춘 듯 보이지 않는 예기가 결코 예사롭지 않은 데다가 왠지 연배 또한 상당한 인물 같았기 때문이다. 태상호법께서는 남궁 성을 쓰지 않으십니다. 그저 예부터 인연이 있으셔서 세가에 몸담고 계신 분이지요. 아, 그런가? 한데 그런 분이시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아무튼 반갑소이다.황보권이외다 의혹이 담긴 눈으로 태상호법을 살피며 인사를 하는 황보권. 하나 태상호법은 별 반응이 없었다. 마음이 급한 을지호가 재빨리 덧붙었다. 수십 년 동안 산속에서 홀로 수련을 하신 데다가 참혹했던 전쟁이 끝난 이후에 하산을 하셔서 본 가의 식솔들을 제외하고는 아는 분이 거의 없을 겁니다.그리고.... 을지호가 슬그머니 태상호법의 눈치를 살폈다. 말씀을 하지 못하십니다. 물론 듣지도 못하시지요. 또한 홀로 오래지내서 그러신지 낯가림이 심하십니다. 그러니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어르신께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모든 이에게서 서로 상반된 반응이 표출되었다. 그럴 수도 있지. 저런 불편한 몸을 가지고 상당한 수련을 쌓았군. 하며 약간은 연민 섞인 표정을 짓는 사람은 오직 황보권뿐이었다. 남궁민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고 강유와 해웅, 초번 등은 입을 쩍 벌린채 황당해했다. 얼굴을 돌린 뇌전과 천도문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순간, 태상호법의 전음성이 을지호의 귓가를 강타했다. 내가 언제 귀가 멀고 말을 못하게 됐더냐! 을지호가 황보권의 눈을 피해 재빨리 전음을 날렸다. 이해 좀 해주십시오,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사실이 그랬다. 태상호법이 누구던가?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패천궁의 성주마저 어린애 취급하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다지만 성정 또한 까다롭가 그지없었다. 더구나 태상호법이 한창 명성을 날리며 무림을 종횡할 때엔 황보권은 옹알이를 하고 있을 때. 배분을 따지자면 그야 말로 까마득했다. 황보권이야 상대가 남궁세가이 어른이라 하니 당연히 예의를 차리겠지만 태상호법이 그에 말을 맞춰줄 까닭이 없었다. 다짜고짜 하대는 물론이고 어쩌면 다 늙은 노인을 어린애 취급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르신이 누구인 중 알면 아마 황보세가가 발칵 뒤집어질 것입니다. 하니 그냥 모른 체해 주세요. 흠, 네놈을 따라다니다 보니 아주 못 볼 꼴을 당하는구나. 말은 그리해도 태사호법이라고 흥지호의 고충을 이해 못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손자뻘 되는 황보권과 낯간지러운 말을 섞느니 그 편이 훻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가도 들었다 핀잔 어린 말속에 허락의 뜻을 감지한 을지호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태상호법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반반의 확률을 생각했건만 순수히 따라주니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흠, 사람은 누구나 두어 가지의 사연은 가지고 잇는 법이지. 황보권 정도 되는 인물이 태상호법과 을지호 사이에 묘한 기운이 흐른다는 것을 감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나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듯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을지호로선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자자, 이럴 것이 아니라 자네들 이야기나 들어보세. 듣자하니 이곳으로 오면서 도적들의 씨를 말렸다지? 황보세가를 향하는 남궁세가는 여러모로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비록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오룡지회에 참여하는 악가만큼은 아니라도 몰락했던 세가가 꺾여졌던 날개를 다시 폈다는 것은 호사가들이 충분히 좋아할 만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결코 평범한 여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가를 떠나기 전 을지호가 호언장담한 것처럼 실전 연습과 무공 증진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여행길 내내 도적 소탕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그것은 잊혀졌던 남궁세가를 세인들의 뇌리에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니... 황보권은 바로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하하,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자세히 말을 해보게나. 하도 소문이 자자해 무척이나 궁금했다네.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시작된 대회는 한참이 지나도 끝날 줄을 몰랐다. 찻잔을 주고받던 자리에서는 자연스레 술판이 벌어졌고 너나 할 것 없이 기분 좋게 취했다. 술자리는 해가 떨어져 어둠이 찾아오고 깊은 밤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룡지회 첫날 공식적인 회합은 두 곳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세가의 가주들이 모여 그간의 안부를 묻고 오대세가의 대소사 및 무림의 일에 대해 논하는 자리였고, 다른 하나는 각 세가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들이 서로 안면을 익히고 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 남궁세가는 그중 가주들만의 회합에만 참여했다. 후기지수들의 회합엔 참여할 사람이 없었다. 그곳엔 오직 직계 가족만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는데 남궁세가의 직계라 해봤자 남궁민 혼자 였기 때문이다. 보통 황보세가의 공식적인 대소사는 집의전에서 논의되었으나 황보윤은 여타세가의 가주들을 집의전이 아닌 웅혼각은 사적인 자리를 대표한다면 가주의 거처인 웅혼각으로 초청했다. 집의전이 공적인 자리를 대표한다면 가주의 거처인 웅혼강은 사적인 자리를 대표했다. 그것은 곧 격식을 떠나 서로 간에 허물없이 대화를 나눠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회합에 참여한 사람은 남궁민가지 도합 여섯 명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젊디젊은 몸, 더구나 가냘픈 몸으로-물론 그것은 다른 가주들의 주관적 견해였지만-오십 년 전만 해도 오대세가의 수장격이었으나 이제는 거의 몰락해 존재조차 유명무실했던 나궁세가를 이끌고 오룡지회에 참석한 남궁민과 기존의 오대세가를 뛰어넘는 가세를 자랑하며 이번에 오룡지회에 새로이 초대받은 악가의 가주 악위군에게 쏠려 있었다. 그런데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는 사뭇 달랐다. 처음 남궁민이 웅혼각에 도착했을 때 모든 가주들은 그녀가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환대했다. 과거 남궁세가의 업적을 찬양하며 힘든 시기를 버텨내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동정했다. 또한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세가를 이끌어야 함에 우려도 표시했다. 하나 그 모든 말과 행동들이 그녀를 한 세가의 가주로서가 아닌 그저 무너져 가는, 아니, 이미 무너져 버린 가문을 일으켜 보고자 발버둥치는 이에게 보내는 안쓰러움일 뿐이라는 것을 남궁민 스스로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에 반해 악위군을 대하는 가주들의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예의가 있었다. 최근 들어 급성장하는 악가에 대한 존경과 약간의 부러움, 시기심도 깃들어 있었다. 그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남궁민은 자신과 악위군, 그리고 남궁세가와 욱일승천하는 산동악가가 무림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딱히 입을 열지 않아도 이들의 대화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는 데 있었다. 자신의 존재는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허허, 좌우지간 오상 장문인의 고집은 정말 알아줘야 합니다 남궁민의 바로 곁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단하한 선비풍의 용모에 부드러운 미소, 특히 여인과 같이 아름다운 손을 지니고 있었는데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결코 안된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암기와 독을 거론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세가의가주 이름보다는 독왕이란 별호로 더욱 유명한 당가의 가주 당욱이 바로 그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종남파가 탈맹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들려오는 말에 의햐면 오상 장문인께서 무당파의 한 장로와 크게 말싸움을 했다고 하더군요. 당욱과 마주 앉아 있던 중년인이 맞장구를 쳤다. 비교적 작은 키데 왜소한 체구를 지닌 그의 이름은 팽무쌍이었다. 거칠기로 유명한 팽가 무인들의 생사 여탈권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그는, 강호오왕을 장차 육왕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탁월한 도법을 자랑했다. 이거야 원,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을 하시다니. 안 그래도 어수선한 정도맹이 더욱 혼란스럽게 생겼습니다. 꼭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라고 보네. 문사건을 단정히 쓰고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제갈경이 입을 열자 모두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소림과 화산이 떠난 지금 정도맹은 사실상 무당파의 손에 놀아나고 있지 않던가. 맹주는 물론이고 주요 요직 또한 무당파의 장로들이 장악하고 있네. 곪을대로 곪아 있던 것이 터진 게야. 하하, 숙부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며 늦은 감이 있지요. 황보윤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그리고 오상 장무인께서 무당파의 장로와 다툼이 있었다지만, 그것은 단순한 구실에 불과했을 겁니다. 제가 알기론 이번 탈맹을 주도한 분은 종남일학 선배님이라 알고 있습니다. 종남일학이라면... 봉학경선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욱의 물음에 황보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종남파에서 오상 장문인을 제어할 사람은 오직 그분뿐이지요. 그러니 걱정이네. 누가 뭐라 해도 정도맹은 백도의 정신적 지주가 아니던가. 그런 곳이 저리 변질이 되었는데 호시탐탐 무림의 패권을 노리는 패천궁의 힘은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으니.... 근래 들어 가벼우나마 끊임없이 충돌이 있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조만간 큰일이 터질 듯하네. 또 알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될런지... 후~ 제갈경의 탄식 속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무림의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좌중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황보윤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희들이 있지 안습니까? 저들이 아무리 강한들 오대.... 아니, 육대세가 의 힘이라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또한 정도맹에도 개방과 같이 여전히 정도를 걷는 문파가 있습니다. 무광 곽검명 선배가 이끄는 삼광문도 주목을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인원은 많지 않아도 저마다 특출난 능력을 지닌 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이 지닌 힘은 결코 무시 할 수 없지요. 팽무쌍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욱이 입을 열었다. 곧바로 반박이 이어졌다. 하나 솔직히 그들을 백도로 분류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개중엔 흑도출신의 무인들도 있고.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무광 노선배가 화산파이 출신입니다. 개방의 대장로인 주광 선배와도 의형제지간이고, 언제든지 도움을 줄 우방이라 여겨도 무방할 것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팽무쌍이 간단히 입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수호신승과 검왕께서 굳건하신 소림과 화산이 버티고 있습니다. 정도맹이 아무리 혼란에 빠졌다고는 하나 우리 육대세가와 정도맹, 소림과 화산, 삼광문을 비롯하여 여러 정도문파들이 힘을 합한다면 아무리 강한 패천궁이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놈들이 비록 무림을 도모하고자 하는 망상을 꿈꿀 수는 있다 하나 어찌 감히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장문인? 팽무쌍의 질문을 받은 악위군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이런, 그것은 천하에 위명을 떨치고 있는 악가의 가주께서 하시는 말씀치고는 너무 엄살 같습니다.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팽무쌍의 웃음이 웅혼각을 쩌렁쩌렁 우렸다. 당욱과 황보윤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제갈경의 안색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만약 패천궁이 무림을 도모한다면 그들의 장담처럼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히 청천벽력과도 간은 말이 조심스레 입수되고 있지 않던가. 사실로 밝혀졌을 땐 천하를 뒤흔들 엄청난 사실이. 수호신승께서.... 예? 수호신승이라니요? 제갈경의 읊조림을 들은 황보윤이 넌지시 물었다. 제갈경이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그나저나 이제 딱딱한 얘기는 그만 하세나. 오랜만에 모여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한것 같네. 참 자네 이번에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제갈경의 질문을 받은 당욱의 얼굴이 빨개졌다. 큰 녀석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그리되었습니다. 아들 탓을 할 것 없네. 자네 또한 무척이나 서두르지 않았는가? 내 기억으론 약관을 넘지 않았을 땐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집안 내력인 모양이네그려. 어,어르신! 농이 섞인 말에 당욱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행동이 재밌던지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만 남궁민만이 슬쩍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지겨워. 현재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고작 술 한잔 먹자고 이리 멀리 나올 건 없잖아. 적당한 주점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해웅이 결국 역정을 내고 말았다. 그러자 강유가 도끼눈을 치켜떴다. 시끄러! 술이란 자고로 시끌벅적한 곳에서 마셔야 한다고 꼬드긴 사람이 누군데 그래. 흠,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는걸. 내가 그랬던가? 능청스런 표정으로 시치미를 뗀 해웅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느라 여념이 없는 천도문에게 물었다. 바로 옆에 있었고 또 그러자고 맞장구를 쳤던 천도문이 못 들었을리 없었다. 하나 들었다고 대답하기엔 슬그머니 쥔 주먹이 너무도 거대하게 느껴졌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기억이... 에라이! 관둬라, 관둬! 내가 누구를 붙잡고 얘기를 하겠냐? 그저 내 입만 하프지. 젠장, 뭔 놈의 사람이 이리도 많아! 난리 통도 아닌데. 자꾸만 몸에 부대껴 오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운지 요리조리 몸을 피하던 강유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오룡지회가 열리잖습니까 오대세가 사람은 물론이고 이름께나 있다는 무인들은 죄다 몰려들었습니다. 구경꾼이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리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장사꾼도 꼬이게 된 것이지요. 저도 들은 얘기지만 사실 두어 달 새에 새로 생긴 객점이나 주점이 수십여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황보세가가 적극 지원을 했다는 소리도 있고요. 하긴 그럴 만도 하다. 황보세가가 아무리 넓어도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가 없겠지. 젠장. 아러다가 술은 구경도 못하겠다. 그냥 마무곳이나 들어가자. 나야 좋지. 해웅이 동의를 하자 강유는 가장 먼저 눈에 뛴,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주점을 향해 성큼성큼 움직였다. 자리가 없어 보이는데요. 천도문이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빼며 말했다. 까짓 없으면 만들면 되지 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짓눌러 살짝 들었던 뒤꿈치를 땅에 내리게 만든 해웅이 거대한 몸을 흔들며 강유를 따라붙었었다. 강유와 해웅을 따라온 인원만 스물이 넘었다. 최소한 네다섯 개의 탁자를 연결해야 했다. 문제는 그들이 찾은 주점이 오룡지회 때문에 급조된 곳이 아니라 인근에선 제법 명소여서 평소에도 사람이 북적거렸다는 데 있었다. 천도문의 말대로 자리는 없었다. 젠장, 쫓아낼 수도 없고. 해웅이 입맛을 다시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때마침 한 무더기의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빈자리가 나자 천도문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어, 자리가 생겼는데요! 그럼 뭐 하고 있어? 얼른 자리 잡고 앉아야지. 마치 겨울잠을 자기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비축할 때의 날랜 곰처럼 달려간 해웅은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이며 안주거리가 치워지기도 전에 의자에 앉았다. 그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으로 맞은편 의자에 앉은 강유는 벌써 점소이를 닦달하고 있었다. 나머지 인원은 어찌합니까? 슬그머니 자리에 앉은 천도문이 물었다. 그들의 인원은 정확히 스물한 명. 그에 반해 주어진 것은 두 개의 탁자와 열두 개의 의자뿐이었다. 어떻게 하긴? 배고픈데 찬밥 더운밥 가리게 생겼냐? 아무렇게나 대충 껴서 앉아. 의자나 몇 개 더 부탁하고. 그렇지만 사실상 천도문의 질문은 쓸데없는 것이었고 해웅의 대꾸 또한 필요없는 것이다. 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안 나머지 인원들이 어느새 이 자리 저 자리를 전진하며 여분의 의자를 끌어 모르고 있었다. 주점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꺼번에 스무 명도 넘는 인원이 나타나서 나름대로 화기애애했던 주점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더니만-물론 해웅의 덩치라 한몫을 한 것이었지만 자리를 잡는답시고 왁지지껄 떠들어대는 것이 아닌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없어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강유가 아니었다. 강유는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을 느끼며 자신들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즐거운 분위기를 잠시나마 흐트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고 그냥 무시해도 될일이었다. 어차피 술자리라는 게 다 그런 것이니까. 흠, 안 되겠군.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남궁세가와 직결이 되는 지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최대한 조심을 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이라 것은 좋은 기분, 분위기에 마셔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강유가 표권을 하며 소리쳤다. 소생은 강유라 합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온 동료들 모두 남궁세가에 적을 두고 있지요. 목이나 축일까 들렀다가 본의 아니게 소란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사죄하는 의미에서 변변치는 않으나 술 한 잔씩 돌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강유는 주문을 받느라 대기하고 있던 점소이에게 탁자마다 술 한 병씩 저 내오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곤 재차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선 이곳의 술을 몽땅 내오라 하고 싶지만 주머니 상정이 넉넉치 않아 그러지는 못하겠습니다. 소생의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강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사내의 손에는 술병과 술잔이 들려 있었다. 하하하! 사람이 나가고 들어오는 자리야 당연히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는법. 그것이 어찌 허물이 될 수 있겠소? 그런데도 사과를 하고 술까지 산다니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넉넉하외다. 자자, 어려워하지 마시고 즐겁게 마시도록 합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잔을 받으시구려. 나는 노지흥이라 하외다. 강유는 그가 내민 술로써 인사를 대신했다. 노지흥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마다 강유는 정중하게 예를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질감을 보였던 주점의 분위기는 강유의 재치로 인해 처음으로 되돌아갔고, 남궁세가도 자연스레 주점의 한 무리로 스며들게되었다. 이야~ 제법인걸 뭐가? 감탄인지 야유인지 모를 해웅의 반을을 되물으며 자리에 앉는 가유의 얼굴은 거푸마신 술로 인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떻게 술을 대접할 생각을 했냐? 난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쯧쯧,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우리의 행동 하나가 까딱하면 세가에 누가 될 수도 있는 거다. 젠장, 술 먹으려고 자리잡는 것도 잘못이냐? 해웅이 천도문에게 빈 잔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혼자 술을 들이키던 천도문이 깜짝 놀라 체웠다. 좋은게 좋은 거다. 술 몇 잔으로 좋은 면모를 보였잖아. 들이 되면 되었지 나쁠 것은 없을 거다. 하긴,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우리를 보는 눈이 한결 부드러워졌어, 자, 아무튼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우리도 마시자. 술 마시려고 왔지 잡담이나 하러 왔냐? 술이나 따라주고 그런 말을 해라. 어, 비었냐? 말을 하지 그랬어. 강유의 핀잔에 해웅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술을 채웠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한참을 이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 유향 주점 다들 어디 가고 이 시간까지 자빠져서 혼자 빈둥거리고 있느냐? 퉁명스런 말투였다. 분명 어제 일에 대한 앙금이 조금은 남아 있는 듯했다. 오전 내내 침상에서 뒹굴던 을지호가 밝은 미소를 띠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노기가 풀리지 핞으셨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하, 어째 그리 보여서 말이지요. 아무튼 다들 놀러 간 것 같습니다. 별다르게 할 일도 없고 해서 편하게 지내도록 놔두었지요. 강유와 해웅은 술을 마시러 간 것 같고 나머지도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겁니다. 뇌전과 초번은... 흐흐, 꽤나 고생하고 있을 테고요. 그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감돌았다. 녀석들이 왜? 가주가 지금 각 세가 가주들의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가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다른 녀석들이야 상관없지만 둘은 명색이 가주의 수신호위입니다. 사주의 곁을 떠날 수야 없지요. 그렇다고 회의에 참석할 자격도 되지 못하니 모르긴 몰라도 회합이 열리는 곳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겁니다.초번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뇌전이 얼마나 툴툴거리고 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잖습니까? 다른 사람이 술 마시러 갔다는 것을 알면 아마도 속이 뒤집어질 겁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회합을 기다리며 고개를 빼고 있을 뇌전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태상호법은 혼자 재밌어하며 웃고 있는 을지호를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쯧쯧, 호법이라는 놈이 중요한 일은 젖혀두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하하하, 쓸데없는 생각이라니요. 재밌습니까? 재미도 있겠다. 한참 동안이나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던 태상호법이 안색을 바꾸며 물었다 그래,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어찌하다니요? 무엇을 말입니까? 물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모른 체 물었다. 시치미 뗄 것 없다. 나는 네가 남궁세가가 작금에 처한 상황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어젯밤에 찾아왔던 벽력권인가 뭔가 하는 녀석처럼 나이도 제법 들고 옛날부터 남궁세가와 돈독한 인연이 있는 사람즐이야 그렇다 쳐도, 아랫사람들의 생각은 다르지 않더냐? 겉으로는 존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에게 남궁세가는 안중에도 없다. 그런 조짐은 이미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글쎄요. 을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한 가지만 예로 드마. 너도 알다시피 황보세가는 어제 남궁세가에 큰 결례를 범했다. 사과를 받지 않았습니까? 아랫사람을 보내 몇 마디 말을 전하는 것이 사과더냐? 그건 사과가 아니라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일엔 격이 있는 법. 가주가 올 수 없었다면 최소한 그의 위치에 버금가는 인물이 왔어야 했다. 벽력권 어르신께서 오지 않으셔셨습니까? 순간, 태상호법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녀석이 비록 황보세가에선 어른 대접을 받고 있으나 가주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또한 남궁세가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온 것이지 가주의 부탁을 받고 온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예의없다고 머리를 들이받고 따질 수도 없는 것이고. 하하 그저 힘없는 것이 죄지요. 그래서? 이렇게 멍하니 있을 작장이란 말이냐? 그럴 수야 없지요, 저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과거의 남궁세가는 아니지만 최소한 새롭게 날개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생각입니다 방법이 있느냐? 조용히 되묻는 태상호법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표정이었다. 어차피 무림은 힘의 세계입니다. 방번이라면 우리를 무시하고 있는 저들에게 우리가 지닌 힘을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는 비무대회가 그 수단이 되겠지요. 흠,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만 쉽게 될지 모르겠다. 생명을 도외시할 정도로 살벌하지는 않더라도 저마다 자존심을 내걸고 싸울텐데 말이야. 천도문이나 연능천 정도면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는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둘로 될까? 다들 만만치 않은 녀석들을 내보낼 것인데. 해웅은 좀 그렇고, 여차하면 강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유라면 최소한 그 또래의 무인 중 수위를 다툴 테니 충분히 연승을 달릴 수 있을 겁니다. 흠...... 태상호법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을지호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지금의 강유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뭔가가 약했다. 사람들을 놀래키는 것도 좋고 연승도 좋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버티는 남궁세가의 처지를 생각했을 땐 시선이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겁을 하게 만들 정도의 충격, 경외감이 필요했다. 물론 방법은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태상호법의 눈길이 영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질문을 던지는 을지호의 음성이 떨떠름했다. 강유 정도로는 약하지, 네가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하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이 아니라면? 을지호가 기가 막힌다는 듯 뛰었다. 세상에! 설마 저보고 애들 장난하는 곳에 나가서 어울리라는 말씀이십니까? 필요하다면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같이 놀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기겁을 하는 을지호와는 다르게 태상호법은 더없이 진지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환장할 일이었다. 하하, 어림도 없지요,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을지호가 전에 없이 단호하고 강경한 어조로 선언하듯 말했다. 하나 만사가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엉뚱한 곳에서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향주점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과 특별한 연고가 없거나 그다지 크지 않은 문파의 무인들, 그리고 이름만 대면 다 알아들을 정도의 이름난 문파의 무인들도 있었다. 하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사람들은 강유 일행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자리를 잡고 술잔을 기울이던 팽가와 무인들과 악가의 무인들이었다. 인원은 몇 되지 않았음에도 팽가와 악가가 오룡지회의 주인공들이라는 이유로 은연중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악가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장차 을지호를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는 바로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듣기만 하실 겁니까? 천도문이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강유를 쳐다보며 물었다. 꽤나 만은 양의 술을 마셨는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어도 날카로운 눈빛만은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이 그다지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참아, 취한 놈 붙잡고 무슨 예기를 하겠냐? 지껄이는 게 다 헌소린데. 소란 피워서 좋을 거 없어. 하지만 가만히 있으려 해도 구역질이 너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습니다. 제놈들은 뭐가 그리 잘났기에 우리를 이토록 무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천도문은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강유가 말리지 않았다면 벌써 수십 번도 넘게 사고를 쳤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천도문뿐만은 아니었다. 함께 술을 마시던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그들의 눈동자엔 분노를 뛰어넘어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내뿜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는지 언제부터인가 화기애애했던 주점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남궁세가와 두 새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팽가에게 쏠이기 시작했다. 특히 한 사내가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었는데 열혈도 팽한의 아들이며, 가주인 팽무쌍을 백부로 둔 팽동악이었다. 오대세가의 일원이라는 데 누구보다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또 은연중 존중받기를 원하던 팽동악은 처음 주점에 들어설 때까지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스스로 자리를 양보하여 편히 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바쁜 와중에도 주점의 주인까지 나와 특별히 인사를 했다. 또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심 가득한 눈빛까지 받지 않았던가 (물론 그만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건방지기 짝이 없는 강유 일행이 나타나 술까지 대접하며 환심을 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쏠렸던 관심이 그들에게 옮겨간다는 느낌에 절로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라할 수도 없고 하여 참고 지나갔으나 그놈의 술이 원수였다. 주거니 받거니 허며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결국 남궁세가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원래 후기지수들의 모임에 참여해야 할 그가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강유 일행을 만났고 또 취기를 이기지 못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댔다는 데 있었다. 남궁세가의 몰락부너 시작된 그의 독설은 함깨 온 동료들과 대작을 하던 악가의 무인들조차 말릴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어찌 알았는지 일면식도 없는 해웅과 뇌전 등의 출신을 거론하며 비웃었고, 현재 남궁세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무인들에 대해서도 뿌리를 알 수 없는 자들이라며 힐난했다. 분노한 해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으나 강유의 만류로 인해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팽동악은 더욱더 교묘하게 그들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과거 남궁세가가 최고의 검기였음을 찬양하면서 한참 동안이나 칭찬을 하는가 싶더니 곧 천뢰대를 언급하며 남궁세가가 더 이상 명문정파임을 부인하는 것이라 욕을 하였다. 그들의 출신 역시 팽동악에겐 더없이 좋은 안주거리였다. 천도문이 검을 잡은 것이 바로 이때였다. 구역질이 나도 참아. 저런 놈과말을 섞으면 우리도 같은 놈이 되는 거야. 속도 참 좋다. 잔을 내려놓은 해웅은 울화통이 치미는지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강유라고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고만 있으려니 복장이 터졌다. 빌어먹을!! 당장에라도 달려가 목을 벨 듯하던 천도뭉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해웅과 마찬가지로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바로 그때였다. 강유와 천도문 등의 행동을 느긋하게 주시하던 팽동악이 결정타를 날렸다. 아무튼 악가로 인해 오룡지회가 진정한 오룡지회가 되었소이다. 하마터면 토룡이 낀 오룡이 될 뻔하지 않았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깜짝 놀란 유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사형! 취하셨습니다!이제 그만 하시지요 팽동악은 말리는 유손의 손을 뿌리치고 술병을 들었다. 취히긴 누가 취해. 얼마나 마셨다고.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잖아? 하하하, 아니 그렇소이까? 자, 한잔 받으시구려. 예? 아, 예. 어쨌든 이러쿵너러쿵해도 남궁세가가 저리된 것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지 않겠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팽동악과 함깨 술을 마신다는 이유만으로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해하는 악상이 남궁세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미친 듯이 술을 들이키던 해웅과 천도문,강유 등은 이미 고개를 돌려 팽동악을 노려보았고 주점에 모인 모든 이들은 과연 팽동악의 입에서 어떤 말이 쏟아져 나올지, 또 그 말에 대해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어떤 반을을 보일지 예의 주목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치 그런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뜸을 드인 팽동악이 거드름을 떨며 일을 열었다.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소, 꼭 그렇기야 하겠소만은 일면 타당한 구석이 있으니 그런 말이 있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내가 보기엔 남궁세가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는 가주가 여자라는 것이외다.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유손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아예 흑색으로 변했다. 그러나 팽동악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연륜도 없고, 연배도 낮은 데다가 무공 시력은... 흠,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뭐, 얼굴은 제법 반반하게 생겼다고 하는 것을 보면... 흐흐흐, 수하들이 잘 따르기는 하겠구만. 사형!!! 말을 끊고자 서둘러 소리쳤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요, 무너진 모래성이었다. 팽동악의 말은 너무나 명료하여 특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주점에 있다면 어느 자리에서나 잘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의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꽝!! 의자 하나가 팽동악이 앉아 있는 자리로 날아와 산산이 부서졌다. 너!! 천도문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팽동악에게 걸어갔다. 그와 팽동악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탁자며 의자들은 팽동악의 말이 끝나고 천도문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사리지고 없었다. 폭발할 듯한 분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쪽으로 치웠기 때문이다.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그러다가 뒈지는 수가 있다. 어느새 빼 든 검을 들어 팽동악을 가리키는 천도문. 흥분할 대로 흥분한 그의 입에서 정중한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안 말려? 해웅이 강유에게 물었다. 미친놈! 말리 것이 따로 있지. 지금 이게 말릴 상황이냐? 천대주가 나서니 않았다면 내가 저기에 있을 거다. 천도문! 강유가 큰 소리로 천도문을 불러 세웠다. 언뜻 짐작하기에도 강유가 천도문의 윗사람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과연 어떤 명령이 떨어질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명심해라. 미친개한테는 매가 약이다. 큭큭큭! 암, 약도 그만한 약이 없지! 해웅이 맞장구를 치며 소리쳤다. 팽동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묘하게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이거야 원, 어디서 이렇게 썩은 내가 풍기는가 했더니 이제야 알겠구나. 다들 입에 걸레를 처물었나 보구나, 내뱉은 말이 하나같이 지저분한 것을 보니. 왜? 내 말이 너무 정확하여 찔리는 모양이지? 걸레? 좋아, 곧 네놈 입속에다 처박아주마. 더 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천도문으 주저없이 검을 움직였다. 애당초 전격적인 기습을 한 것이 아니고 무기를 꺼내 들라는 의미의 공격이었기에 그다지 빠르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재빨리 검을 빼 든 팽동악은 그런 천도문을 마음껏 비웃었다. 역시, 배운 것이라고 해야 기습 따위겠지. 기습? 좋아, 기습이라 해두지. 팽동악으로선 천도문이 더욱 흥분하도록 격장지계를 노린 것인지 몰라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천도문의 가슴은 더없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붉게 물들었던 낯빛도 어느세 창백해지고 활활 타오르던 눈에서 불꽃이 사라졌다.대신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팽동악의 전신을 강타했다. 아뿔싸 천도문의 차가운 살기를 맞으며 팽동악은 취기가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어쩌자고 이런 실수를! 뼈저린 후회감이 밀려왔다. 하나 이미 때는 늦었다. 상대의 분노는 단지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을 갈가리 찢어버릴 정도로 컷고, 사과를 하기엔 힘에 굴복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만한 모욕을 당했으니 받아들일 리도 없겠지만.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그리고 승리한 후에 정식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 최전이자 모양새가 좋았다. 그 또한 싸움에 이겼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팽동악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믿었고, 아버지를 믿었고, 아버지로부터 배운 가문의 무공을 믿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 잠시 주춤거렸던 팽동악이 결정을 내렸는지 칼을 꺼내 들었다. 열두살이 되던 해 전대 가주인 팽만호에게 받은 웅비라는 애도였다. 상대가 무기를 꺼낸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천도문은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팽동악의 좌측 허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쨍! 도검이 부딫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한 발 물러선 천도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단 한번의 충돌로 상대의 실략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경박한 행동거지며 말투로 보아 가문의 배경만을 믿고 날뛰는 파락호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상당한 실력을 갖춘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지금의 분노는 상대를 철저히 짓밟아야만 풀릴 것이다. 빙글 몸을 돌린 천도문이 물러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밀려들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팽동악의 허리를 노리는 검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이 창궁무애검법 중 창궁약연이란 초식임을 아는 사람은 남궁세가의 무인들뿐이었다. 팽동악도 가만있지 않았다. 천도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상대의 실력이 자신의 밑이 아님을 느끼고 오호단문도를 펼치기 시작했다. 팽가의 무공 중 외부에 가장 많이 알려진 만큼 위력도 상당했다. 타핫! 거센 기합성이 들려오고 그의 애도가 묵직하게 움직여 검을 맞아들였다. 굶주린 새벽 호랑이의 모습을 닮은 듯한 그의 모습에, 두 주먹을 꽉 쥐고 싸움을 지켜보던 유손의 입이 절로 열렸다. 신호지세! 째쨍! 귀청을 자극하는 병기음이 또다시 허공을 수놓았다. 본격적인 절초들이 충동하면서 싸움은 점점 치열하고 험악한 양상을 띠었다. 천도문의 공격은 빠르고 경쾌했으며 날카로운 반면 이를 차분히 막아내며 적절하게 반격을 가하는 팽동악의 도는 장중하면서도 그 안에 번뜩이는 예기를 숨기고 있었다. 말 그대로 용호상박. 삽시간에 삼십여 합을 겨룰 때까지도 어느 하나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천 재주의 실력이 저 정도였나? 장난 아닌데. 그건 그렇고 주정뱅이치고는 저놈 역시 제법이야 공격이 제대로 먹히는 것이 없어.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막강한 천도문의 실력에 감탄하고 또 그 활화산 같은 공격을 무리없이 막아내는 팽동악의 실력을 보며 해웅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굳은 얼굴로 싸움을 지켜보던 강유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이 싸움은 이미 끝났어. 무슨 소리야 여태까지 이렇게 팽팽한 싸움을 본 적이 없는데? 해웅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강유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저놈이 사용하는 무공은 팽가의 오호단문도야. 결코 얕볼 수 없는 무공이지. 아니, 제대로만 익히면 무림을 종횡할 정도의 강력한 무공이야. 그런데?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했어. 오호단무도는 열다섯 개의초식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들었는데 모든 초식을 완벽하게 소화하지는 못한 것 같다. 아니, 알고는 있어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반면에 천 대주는 삼 초식과 스물일곱 개의 변초를 제대로 익혔어. 그렇다고 해도 천 대주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잖아. 한 초식을 익혔든 열다섯 개의 초식을 전부 익혔든, 중요한 건 녀석이 막아내고 있다는 것 아냐? 해웅은 인정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내 말을 들어봐. 무공은 보통 전반부의 초식보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것과 초식마다 큰 위력의 차이는 없지만 그것이 서로 연계되면서 폭발적인 파괴력을 갖추는 무공이 있어, 오호단문도가 바로 그 후자에 속한 무공이야 반면에 천 대주가 익힌 창궁무애검법은... 검법은? 전자와 후자를 합쳤다고 보면 되지. 나도 형님께 들은 얘기지만 창궁무애검법은 뒤로 갈수록 그 위력이 천양지차라고 했어, 거기에 스물일곱 개의 변초가 유기적으로 묶여 돌아갈 때는 상상할 수 없는 파괴력을 보인다나. 물론 그에게 그 정도의 위력을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지만 강유는 잠시 말을 끊고 여전히 승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박빙으로 싸우고는 있으나 조금씩 뒤로 밀리는 팽동악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말에 확신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깊은 수련을 바탕으로 펼치고 있기에 약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초식이 연결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균열을 보이고 있어. 특히 후반부 초식에선 눈에 뛸 정도로 흔들려. 천 대주도 지금쯤 눈치를 챘을거다. 흠, 대충 드럴듯하게 들리긴 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런 얘기는 어디서 주워들은 거냐? 다 형님과 태상호법님과 함께 있다 보면 알고 싶지않아도 저절로 알게 된다. 저절로! 강유가 쓴 웃으을 지며 도리질을 했다. 매일같이 이어지던 호된 꾸지람을 떠올리자 몸에 한기가 들었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떠렸다.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 몰라. 그 사이에도 싸움은 계속되엇다. 그러나 초반과 같은 박빙은 아니었다. 강유의 지적대로 싸움은 점점 천도문에게 기울고 있었다. 창궁약연에서 창궁무한 창궁조화로 이어지는 흐름에 전혀 무리가 없었고, 사이사이 번뜩이는 변초들은 팽동아으로 하여금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다. 큭! 팽동악의 입에서 처음으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결국 오십여 합을 다투는 와중에서 처음으로 상처를 입은 것이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 상처를 누르고 거친 숨을 가다듬는 팽동악의 얼굴이 고통으로 이그러졌다. 젠장할!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패배했다는 것에 더 화가 났다. 술이 취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다. 허나 어차피 그것은 패자의 변명에 불과한 것. 비웃음만 살뿐이었다. 하아하아. 한번 흐트러진 숨결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더구나 천도문의 검은 가슴을 가르는 것도 모자라 폐에까지 미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가슴을 누르는 그의 손을 타고 무서울 정도로 흘러내리는 시뻘건 피가 부상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천도문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미 자신의 승리가 명확해졌음에도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아예 끝장을 내겠다는 듯 상처를 입힐 때보다 더욱더 빠른 몸놀림, 위력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공세를 취해왔다. 그래로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문 팽동악 역시 최후의 한 수를 준비하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움직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멈춰랏! 천도문의 공격은 미처 팽동악에 이르기 전에 그의 주변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유손과 팽가의 무인들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팽도악의 앞을 재빨리 막아선 유손의 함성이 터짐과 동시에 그의 좌우에서 천도문을 노리는 공격이 밀려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궁세가의 무인들도 저마다 검을 꺼내 들었다. 몇몇은 벌써부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가만히 있어! 강유의 외침에 모든 신형이 멈췄다.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리냐는 듯한 의혹의 눈길과 함께 너희들까지 나서지 않아도 돼. 천 대주에게 맡겨. 강유는 꼼짝하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의 행동에는 천도문에 대한 확고한 믿은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천도문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세 무인을 간단히 제압하곤 팽동악에게 다가갔다. 쨍! 너무나도 경쾌한 울림이었다. 사람들은 귀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시선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도문의 검에 의해 두 동강이가 난 도를 쫓았다. 툭. 부러진 도의 조각이 기둥에 박혀 버리고 천도문의 검이 팽동악의 목을 겨누는 것으로 싸움은 끝이 났다. 주점은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에 빠져 버렸다. 오직 팽동악의 거친 호흡과 그를 보호하다 쓰러진 무인들이 흘리는 신음 소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팽동악의 도를 날려 버리고 최후의 일력을 가하려는 순간 들려온 전음성이 아니었다면 목과 몸이 분리된 시신을 보게 되었을 터, 천도문의 시선이 자신의 검을 멈추게 만든 강유에게 돌려졌다. 그를 따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강유에게 향했다. 해웅을 우두머리라 생각했는지 그들은 조금은 앳된 강유에게 결정권이 넘어가자 다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강유는 조금도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자는 우리 남궁세가에 참기 힘든 모욕을 주었고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았소이다. 하나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 저자가 본 세가의 가주님을 언급하며 한 욕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것이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소. 강유가 살짝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팽동악의 목을 겨누고 있던 천도문이 검의 방향을 살짝 비틀어 아래로 내려쳤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주인을 잃은 팔 하나가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팽동악과 함께 동석한 악가의 무인들도 인상만 찌푸릴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네가 팽가의 식솔이라는 것을 감사해라. 마음 같아선 백 번을 죽여 마땅하겠지만 그 옛날 팽가와의 인연을 생각해 이쯤에서 그치는 것이니. 강유는 이미 기절해 있는 패동악을 향해 듣기만해도 절로 소름이 끼치는 차가운 음성을 내뱉더니 몸을 돌렸다. 해웅과 남궁세가의 무인들, 그리고 어찌나 빠르게 베었던지 피 한방울 묻어 있지 않은 검을 느긋하게 거두고 좌중을 휘둘러 본 천도문이 그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감탄 섞인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후~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주점에서 나오자마자 강유가 탄식하듯 말했다.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한 해웅이 위로하듯 말했다. 형님이라면 어찌했을까? 글쎄, 둘 중 하나였겠지. 강유가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충고만 하고 보내거나 아니면.... 아니면? 해웅이 이를 내보이며 씨익 웃었다. 아예 흔적도 없이 가루로 만들어 버렸거나. 음,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한 짓은 어정쩡한 것이 돼버리려나? 이러다가 엉뚱한 놈 대신 우리가 죽는 것 아냐? 엷은 한숨과 함께 힘없이 내뱉는 소리. 그 소리에 움찔한 것은 비단 천도문뿐만은 아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호사가들로 하여금 유향주점의 혈투라 명명된 천도문과 팽동악의 싸움이 벌어진 지 얼마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오룡지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치고 싸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넛만 모여도 무공이 어쨌느니, 사건의 발단이 어쨌느니 하며 말들이많았다. 어떤 이는 팽가의 오만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 했고 어떤 이는 남궁세가가 세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싸움을 걸었다고 했다. 일 대 일의 대결이 아닌 집단적인 싸움이 벌어져 수적으로 열세인 팽가의 무인들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말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말 중 공통적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팽가의 무인이 남궁세가의 무인에게 패했다느 것, 그리고 그 대가로 팔이 잘렸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천도문과 팽동악의 싸움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확대 해석되었고 오룡지회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다. 온갖 소문과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는 그 시각, 남궁세가가 거처하고 있는 잠룡각 뒤편의 아담한 뜰에선 난데없는 고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했다고 벌써부터 헤매고 있어! 똑바로 하지 못해!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좌우로 걸을을 옮기는 을지호는 화가 날 대로 난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 마치 학처럼 한쪽다리를 들고 팔은 좌우로 넓게 편 강유와 천도문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그들은 조그만 동전이 올려진 작대기를 입에 물고 주먹만한 돌덩이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특히 중심이 앞으로 쏠려 동전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꼴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얼씨구! 아예 춤을 추는구나, 춤을 춰! 어디 떨어뜨리기만 해봐. 나는 뒷일은 책임 못 지니까! 천도문의 이마를 몽둥이로 툭툭 건드리는 을지로는 죄수의 목을 베기 위해 춤을 추는 도수와 다름이 없었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있던 그가 허겁지겁 달려온 황보세가의 무인으로부터 술을 마시러 간 강유 일행과 팽가의 무인들이 충돌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싸움을 끝마친 강유 일행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황보세가의 정문을 막 통과할 때였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터졌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다른 세가의 무인에게 동요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술을 마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런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도착한 강유에게 무슨 이유로 싸움이 시작되고 진행되었는지, 천도문이 사용한 무공이 무엇이고 그럴 때 상대는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수를 교환했고 결과는 어찌 되엇는지 등 전후 사정을 들은 그는 명령권이 없다는 이유로 함께 술을 마신 이들을 제외하고 강유와 해웅. 천도문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싸움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소식을 전한 황보세가의 무인에게 말했듯이 술자리에선 사소한 다툼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그만한 모욕을 당하고서도 참앗다면 더욱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세사람에게 벌을 내린 데에는 제각각이면서 매우 간단한 이유가 있었다. 천도문에겐 훨씬 빨리 싸움을 끝낼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을 내렸고, 천하에 싸가지없는 놈의 목을 단번에 치지 못하고 고작 팔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는 이유로 강유에게도 똑같은 벌이 내려 졌다. 강유가 예상한 대로 어정쩡했기에 화를 내는 것이었다. 물론 가장 황당하고 억울한 것은 해웅이었는데 그가 해웅에게 던지 말은 너는 뭐 했냐?였다. 그렇게 시작한 벌이 벌써 한 시진째였다. 힘들지? 그냥 내려오지 그래? 잠깐이면 해웅이처럼 편할 수 있잖아. 을지호가 은근한 어조로 땀이 눈으로 흘러 들어가 고통스러워하는 천도문을 꼬드겼다. 그러나 천도문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경공법이 약한 해웅은 반 시진을 채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러자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다가선 을지호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겼다. 내지르는 주먹마다 교묘하게 급소를 파고들고 거기에 내공까지 실리니 아무리 몸이 단단한 해웅이라도 견딜 재간이 없었다. 해웅은 정확히 열일곱 대를 맞고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가 조금 전 깨어났다. 그런 해웅을 보았으니 어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바로 그때였다. 을지호와 술잔을 기울이다 낮잠을 자던 태상호법이 다소 찌푸린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놈들이.... 잠결에 대충 무슨 얘긴지 들었다. 싸움이 있었다지? 예. 주점에 가서 마시라는 술은 처먹지 않고 싸움질이나 했다고 합니다. 을지호의 몽둥이가 춤을 추고 거의 동시에 강유와 천도문의 이마에서 불꽃이 튀었다. 싸움이냐 할 수도 잇는 것이고.... 음, 나도 한 가지만 물어보마. 한데 질문의 대상은 을지화 아니었다. 태상호법의 시선을 받은 강유는 바싹 긴장을 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겼느냐? 예? 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다했다. 그 순간 입에 물고 있던 작대기가 떨어졌다. 뒤에 있던 동전 또한 낭항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굴렀다. 굴러가는 동전을 살피는 을지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흐르고, 하얗게 질린 강유는 크게 원을 돌다 결국 그의 발 밑에서 멈춘 동전과 태상호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하고 들어오너라. 가주가 와 있다. 태상호법은 이겼다는 말을 들은 후, 강유를 향해 걷는 을지호를 제지하고는 조용히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위태하게 버티던 천도문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꽤나 힘이 들었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는 해웅이 다가와 어께를 짚을 때까지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젠장, 고생했다. 정말 잘 버티더라. 흐흐흐, 죽기 살기로 버텼지요. 천도문이 고개를 절래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그나저나 너는 무슨 배짱으로 입을 열었냐? 작대기가 뻔히 떨어질 것을 알았으면서도. 시끄러, 그럼 어쩌라고? 너는 질문을 던진 사람이 누군지 생각도 안 하냐? 강유는 분명히 보고 있었다, 질문을 던지는 태상호법의 눈을, 만약 졌다고 했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으리라. 물론 늦게 대답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하긴, 그도 그렇구나. 해웅은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 일이 그렇게 된 것이군요, 아무튼 깜짝 놀랐어요. 회홥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갑작스런 소리를 듣게 돼서. 을지호의 설명으로 전후 사정을 자세하게 들은 남궁민으 다소 굳은 얼굴이었다. 팽가의 가주도 그곳에 있었지? 예. 함께 나왔으니까요. 반응이 어때? 무슨 말이라도..... 아니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쪽에선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어요. 저보고도 걱정하지 말라며 미소를 보이던데요. 뭐.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심각한지는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남궁민의 음성은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팔을 잘랐다고 했던가요? 깨끗하게 잘랐지. 그것도 하필이면 검을 쥐는 오른팔을, 졸지에 멀쩡한 놈 병신 만들어 버렸다. 골치께나 아프게 생겼어. 사실이 그랬다. 강유 등을 닦달할 때야 목숨을 취하느니 마느니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조금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았다. 무공을 익힌 무인의 팔을, 그것도 팽가의 직계 가족을 그리 만들었으니 생각보다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었다. 그래도 저쪽에서 잘못을 했으니 뭐라 말은 못하겠지요. 과연 그럴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보통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식구는 감싸는 법이다. 오히려 그런 면에선 소위 명문정파라 자부하는 것들이 지독하고 편협한 데가 있지. 세간의 이목도 있고 하니 노골적으로야 반감을 드러내겠냐마는 절대로 그냥 넘어지니는 않을 게야. 태상호법은 빚을 갚기 위해 팽가가 분명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취할 것이라 단정 짓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남궁민이 공손히 되물었다. 글쎄다. 이 녀석과 잠시 얘기를 나누어보았지만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이더구나. 하나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들의 식솔에게 크게 상처를 입혔으니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요? 남궁민의 질문에 태상호법을 대신하여 을지호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이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지. 충돌은 유감스런 일이나 잘못은 너희가 했다. 우리는 그 잘못에 대한 벌을 내린 것뿐이다. 하고 말이야, 물론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우리가 감당해야겠지만. 어르신 말씀대로 드러내 놓고 하지는 않아도 꽤나 성가시게 굴걸. 참기 힘들 정도로. 당장 내일 있을 비무대회부너 시작될 테지. 그럼 어찌해야 하나요? 그 문제로 어르신이나 나도 꽤나 고민을 했다. 그런데 두 방법 모두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어느 하나가 낫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숙이고 들어가느냐? 버티느냐? 결정은 가주인 네가 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네 의견을 존중하고, 그 상황에 맞추어 최선을 다할 뿐이지. 후~ 난처한 상황이네요. 남궁민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일의 상황만큼 걱정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번 일이 우리에게 닥친 첫 번째 어려움이 될 것 같구나. 어찌할 생각이냐? 빨리 결정해야지. 이 밤이 가면 사과하기도 힘들어. 사과는 안 해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히 말하는 남궁민. 지금까지의 태도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을지호가 물었다. 어째서? 사과를 기다릴지도 모르고 또 이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텐데? 사과를 할 생각도, 이유도 없어요. 사과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죄를 비는 것이지만 강 호법이나 천 대주가 잘못한 것이 없잖아요.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지요. 본 가가 그만큼 모욕을 당하는데 참고 있었다면 오히려 벌을 줬을거예요. 칭찬을 해주지 못할망정 잘못한 상대에게 사과를 해서 강호법니아 천 대주에게 모욕을 주기는 싫어요. 명문정파라 이름을 앞세우는 놈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 본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가문의 명운을 걸고 싸울 수도 있어. 신중히 생각하여라. 태상호법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걱정스런 말투로 남궁민의 의중을 떠보았다. 하나 남궁민의 의지는 확고했다. 저들이 뭐라 하든 명분은 우리에게 있어요. 그리고 저는 어르신과 오라버니. 우리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믿어요. 비록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던가. 옛날의 영광만을 떠올리며 한 중도 되지 않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오기로 똘똘 뭉쳐 있던 남궁민,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만의 뚜렸한 주관을 세우고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결심을 들으며 태상호법과 을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애당초 그들은 사과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비무대회부터 문제가 터질 것이라 했던가요? 을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일러두세요, 뭐, 준비랄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경계는 하고 있어야겠지요. 알았다. 명령을 내리는 남궁민에게서 제법 위엄이 풍겨져 나오자 을지호는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웃었다. ----------------------- 비무대회 1 황보세가에서 얼바 떨러지지 않은 용추객점.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이 사용하는 장원처럼 고풍스런 자태의 용추객점은 특이하게도 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앙의 빈 공간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인공연못이 있었고, 각 층에서 그곳으로 연결하는 다리가 그림처럼 놓여 있었다.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잘 훈련된 종업원, 그리고 뛰어난 음식 솜씨를 바탕으로 평소에도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데다가 오룡지회가지 열리게 되니 도합 사층에 방의 개수만 백여 개에 달하는 용추객점이지만 빈방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 용추객점에서도 가장 위층의 전망 좋은 방. 태상호법과 을지호에게 비무 신청을 하고 해웅에게 톡톡히 망신을 준 투랑과 그를 끌고 간 단견, 그리고 정식으로 오룡지회에 초청을 받았음에도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저녁 무렵 황보세가에서 마련한 거처가 아니라 의제인 단견과 손자 투랑이 기다리고 있는 용추객점에 여장을 푼 무광 곽검명이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뜬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다니. 어느덧 칠십을 훌쩍 넘긴 곽검명이 나지막한 침음성을 내뱉으며 술잔을 잡았다. 마주 앉은 단견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기절할 뻔했습니다. 수호신승이 어떤 분이오? 백도무림의 가장 큰 어른이자 고수신데 그런 분이 패했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사실로 확인된 지금도 믿을 수가 없는지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는 단견은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에이, 양패구상이라 했으니 패한 건 아니잖아요. 상대도 수호신승만큼이나 부상을 당했다면서요, 또 수호신승이라고 언제나 이기라는 법은 없지요.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것인데 뭘 그리 놀라세요. 곽검명을 앞에 두고 대놓고 술을 마시기 뭐했던지 대신 날래게 젓가락을 놀리던 투랑이 입에 넣은 음식을 삼키지도 않고 말했다. 당장 호통이 날아왔다. 수호신승께서 네놈 친구라도 된단 말이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거라, 사안의 중요성도 모르는 놈이! 도끼눈을 치켜뜨며 단숨에 주랑을 잠재운 단견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걱정입니다.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만 뭔가 일이 터질것 같은 것이 영. 무슨 특별한 조짐이라도 있는가? 단견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신승께서 부상을 입으신 것은 둘째 치고라도 요즘 들어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가? 패천궁이야 늘 그랬는걸. 그사이 술 한 병을 비운 단견이 길게 트림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패천궁 놈들이 그런다면 걱정을 하지 않지요, 그러려니 할 테니까. 문제는 변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겁니다. 변방이? 곽검명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요. 뭔가 일어나고 있는데 확실치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걸보고 보통 기우라고 하지요. 단견으로부터 핀잔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투랑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나 그는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듯한 단견의 눈초리에 찔끔하여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그렇게 보고 있다면 그런 것이겠지. 사실 나도 요즘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네. 무슨 말씀이라도 들었습니까? 나와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는 특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아. 무공도 무공이지만 기관진식이라든가 점성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도 있지. 때로는 천기를 읽는 사람들도 있어. 한 가지 재주만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대하고 동료로 받아들이는 삼광문의 특징을 떠올린 단견이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분다고 그랬어. 역겨운 피 냄새를 동반한 바람이.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구체적으로 누가. 어디서..... 곽검명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 천기를 누설하면 안 된다나. 보통 뜬구름 잡는 식으로 말을 하지. 뭐, 나도 더 이상 묻지는 않지만. 후~ 아무튼 문제입니다. 뭔가 터져도 크게 터진다는데 철저하게 방비를 해도 모자랄 판데 닙안싸움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어쩌겠나? 무당이 저처럼 변해 버린 것을. 참, 이번에 종남파도 정도맹에서 탈맹했다고 하던데 어디 종남뿐입니까? 기회만 되면 종도맹을 나오려는 문파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한데도 정소, 이 멍청한 놈이 끝까지 문고리를 붙잡고 버티고 있느니. 허허허, 천하이 모든 정보를 움켜쥐고 있는 개방의 방주를 멍청한 놈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네뿐이야. 흥, 정보를 움켜쥐고 있으면 뭐합니까? 이용만 당하는 바본 것을. 너무 그러지 마라. 정 방주가 탈맹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 개인의 욕심 때문에 그런가? 아직까지는 누가 뭐라 해도 백도의 중심은 정도맹이야. 그런데 개방마저 떠난다고 생각해 보게, 가뜩이나 분란이 많은 정도맹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고, 곧 강북을 노리는 패천궁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것이야.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요. 단견은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기가 싫은지 손을 홰홰 내젓고는 연신 술을 들이켰다. 참, 오늘 낮에 재밌는 일이 있었다지? 곽검명의 말에 투랑이 씹고 있던 음식을 재빨리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흐흐흐, 할어버지도 알고 계셨군요, 재밌는 일이 있었지요. 퍽도 재밌겠다. 쯧쯧, 좌우지간 이놈은 그저 싸움 얘기만 나오면.... 그것만큼 재밌는 게 어디 있다고요. 단견의 핀잔의 섞인 말에 맞네. 무인에게 싸움만큼 흥미가 있고 피를 끓게하는게 또 무엇이 있겠나? 그래, 뭐가 어찌된 것이냐? 자세하게 설명해 보거라. 그 손자에 그 할아버지였다. 지금껏 무림을 걱정하던 노고수의 풍모는 온데간데 없었다. 다만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조손이 있을 뿐이었다. 으리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단견은 아예 등을 돌리고 돌아앉았다. 오죽하면 무광에 투랑일까. 이미 싸움에 대해 말이 나온 이상 그 어떤 말로도 그들의 대화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아예 보지 않는 것이 속편했다. 그런 단견의 반응을 아예 무시한 투랑은 낮에 있던 싸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복격적인 다툼을 할 때는 자신이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손짓 발짓을 해대면 열심이었다. 투랑으 설명이 끝나자 머리 속으로 모든 장면을 그려낸 곽검명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호~ 젊은 녀석이 제법이구나. 창궁무애검법을 그 정도까지 수련하려면 꽤나 힘들었을 터인데. 상대가 약했겠지요. 저라면 그렇게 오래 끌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인즉슨 둘 다 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혼자 떠돌며 실전을 치른다 하기에 정신 좀 차리는가 싶더니만. 쯧쯧, 저놈의 자만심을 누군가 한번은 꺾어놓아야 하는데. 조만간 박살이 날 겁니다. 단견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곽검명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의 입가에 의뭉스런 미소가 흘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저놈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상대한테 싸움을 걸어놨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주 박살이 날걸요. 허허, 그런가? 도대체 누구에게 싸움을 걸었기에 그러는 것이냐? 을지호라고, 남궁세가의 사람입니다. 투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단견이 재빨리 덧붙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궁세가이 호법이지요. 남궁세가의 호법? 어쩌다가? 무척이나 의회라는 표정이었다. 말도 마십시오, 이 또한 말하자면 사연이 기니까요. 아무튼 이번에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니까요. 허허, 자네가 이렇게 자신하는 것을 보니 상당한 인물인가 보구만. 비록 나이는 어리나 대단한 무공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투랑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도 강하지만 나도 강하다고요. 솔직히 승리를 장담하지는 못해도 충분히 싸워볼 만합니다. 암,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도전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지. 실력도 부쩍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고, 과거 이 할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열심히 해보거라. 엄밀히 말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건만 어쩌면 그렇게 자신의 성격을 빼닮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웠다. 투랑을 격려하는 곽검명의 말에는 조금 전 자만심 운운하던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형님도 참, 뭘 알고나 그렇게 말씀을 하시구려, 지금 용기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하룻강아지는 커녕 고양이도 되지 못하는 것이 호랑이에게 덤빈다는 겁니다. 그, 그 정도인가? 그 즉시 단견의 말은 이해한 곽검명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녀석이 보기에는 자신보다 조금 강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아우가 보기에 최소한 한 문파의 장로급, 아니, 그 이상입니다. 허! 설마 하니? 단견이 부연 설명을 하려 할때 투랑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요. 뒷전에 앉아 있던, 태상호법인가 뭔가 하는 영감한테는 그런 기운을 느꼈지만 그자는 그 정도의 느낌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네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 아니더냐. 남궁세가의 태상호법도 무서운 고수지만 그 친구 역시 무시 못할 고수였다. 물론 그 무시라는 것도 네 관점이 아니라 나의 관점이지만. 가만, 그런데 을지호라면 혹? 곽검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단견이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펴보았는데 소문 형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곽검명의 눈가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흠, 아무튼 좋아. 천하십대고수라 불리는 아우가 인정할 정도의 고수가 남궁세가에 존재한단 말이지? 그것도 두 명씩이나? 아주 흥미로운 일이야. 무인이라면 늘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꺾고 싶기 마련이고 정상에선 사람은 자신을 꺽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법이다. 곽검명이 그랬다.젊어서는 자신보다 강해 보이면 그가 누구든, 나이나 연배, 백도든 흑도든 가리지 않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광이란 별호가 어느 날인가 십대고수 중 한 명을 지칭하는 말이 되고부터는 그런 도전을 할 상대가 없었다. 물론 도전해오는 상대가 없었다. 물론 도전해 오는 상대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한수 가르침을 줄 정도에 불과했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무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고수가 출현한 것이다. 자신과 함께 십대고수에 거혼되는 단견이 극찬할 정도의 고수가. 곽검명의 눈동자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허! 그놈의 병이 또 도졌구려. 단견이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평생 치료하지 못할 병이지. 어쨌든 내일 벌어질 비무대회가 기대가 되는군. 이대로 물러설 팽가가 아니야. 뭔가 사단이 나도 날 텐데 말이야..... 슬쩍 손바닥을 비비며 말하는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그러나 사단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안휘성에 위치한 패천궁의 남릉 분타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자그마한 문파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그 규모가 작았다. 애당초 강북을 도모하고자 만든 전진 기지도 아니었고 또 지리적 요충지도 아니었다. 그저 영역 표시를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상주하는 일원이라 봐야 고작 열댓 명, 그나마 분타주인 우자현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무공을 지닌 자도 없었다. 휴~ 덥다. 더워. 무슨 놈의 날씨가 이리 더운지. 하루 종일 흐린 날씨 때문인지 밤이 되었음에도 더위가 가실 줄을 몰랐다. 가슴팍을 풀어헤치고연신 부채질을 하는 우자현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내릴 비가 안 내리고 날만 흐려서 그런것 같습니다. 비가 온 후에는 조금 시원해지지 않겠습니까 우자현의 충복인 야대경이 지하수에 담가놓았음에도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은 술을 따르며 말했다 비? 흥 언제 올 줄 알고, 어제도 그랬고 그저깨도 그랬어, 올 듯 말듯 약만 올리는 놈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빠르겠다. 우자현은 비가 오지 않는 것이 마치 야대경의 잘못리아는 듯 신경질적이었다. 후~~ 천하의 우자현이 이런 촌구석에 처막혀 있어야 하다니. 분타주라고 해서 지원했다가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럴 줄 았았으면 그냥 남아 있는 것인데. 곧 복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야 싶지. 하지만 한번 부임하면 최소한 일 년은 있어야 한다고 했어. 아직도 반년이란 시간이 남았단 말이다. 매일 밤마다 이어지는 투정을 받아주는 것이 귀찮기도 하련만 야대경은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반년이란 시간은 생각만큼 길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고 견디시면 분타주께서 원하는 본성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젠장, 말이야 쉽지. 과연 그날이 오려나? 우자현이 체념하듯 말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들려온 차가운 음성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말을 받았다. 아니, 오지 않아. 왠 놈이냐! 본능적으로 몸으 틀고 검을 뽑은 우자현이 소리쳤다. 일련의 동작들이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재빠르게 이어지는 것을 보면 조금 속물적인 면이 있긴 해도 실력만큼은 상당한 듯했다. 우자현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통풍이나 되라고 활짝 열어놓은 문에서 검은 두건을 눌러쓴 사내들이 모습을 보였다. 좋은 의도가 있어 방문한 사람이 복면을 쓰고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등잔불에 의해 번쩍거리는 것은 분명 피 묻은 검. 우자현은 유난히도 조용한 주변의 분위기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도적놈들이라면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줄 터이니 썩 꺼지거라. 그냥 돌려보낸다?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열세를 인정한다는 것이었고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도둑? 하하. 서운한걸. 우리가 고작 그런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니. 가장 앞선 사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럼 누구냐? 누가 보내서 온 것이냐? 그거야 그대가 알아맞힐 일이지. 능청스럽게 대답한 사내는 방 안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맛을 음미하는 여유를 보이더니 갑자기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 젖혔다. 그런 사내의 행동에 우자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두건을 벗었다는 건 곧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것이고 현 상황을 감안해 보면 그것을 피할 방법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지금껏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야대경이 괴성을 지르며 사내에게 덤펴들었다. 때마침 술잔을 들고 있던 사내는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듯했다. 하나 그는 피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피할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그 차이는 컸다. 슈슉. 출처를 알 수없는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기세 좋게 달려들던 야대경의 몸이 급격히 멈추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사내의 뒤에서 날아온 두 개의 표창에 묵과 이마를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의도는 좋았지만 그것을 받혀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쯧쯧, 가만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보내줄까, 서두르기는. 야대경의 시신에서 고개를 돌린 사내가 사악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대뿐인 것 같군, 이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은. 네놈들이!! 피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흥분시키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하루하루 무료한 일상을 보내며 따분해하다 갑자기 나타난 적의 기세에 눌려 잠시 두려움에 떨었지만 반년 전만 해도 우자현은 패천궁의 자랑인 혈참마대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핏발 선 눈으로 검을 움켜쥐는 그의 전신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업는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름나 결려 있고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분타에 그만한 인물이 있을 것이라 생각지 못한 사내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그의 턱이 살짝 치켜 올라감과 동시에 전후좌우에서 우자현의 공격이 쏟아져 들었다. 네놈들 따위에게 당할 나 우자현이 아니다!! 버럭 소리를 지른 우자현의 검이 크게 반원을 그렸다. 좌우에서 다가오던 공격이 그의 검에 가로막혀 주춤했다. 상대의 공격을 단숨에 무뤼로 만든 우자현이 허공으로 몸을 끠우며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보다 약해 보이는 적을 향해 무지막지한 힘을 실어 내리쳤다. 쨍! 검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기세가 남달랐던 것인지 우자현의 검은 상대의 검을 두 동강이 내고도 멈출 줄을 몰랐다. 그의 검은 깜짝 놀라 바닥을 구르는 상대의 어깨에 깊숙한 상처를 내고서야 다시 회수되었다. 그런데 공격을 막아내고 완벽한 반격을 성공시킨 듯하던 우자현의 신형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입에선 한줄기 선혈이 비치고 옷 이곳저곳에서 붉은 빛깔이 퍼지고 있었다. 그가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상대의 어깨에 상처를 내는 순간 무수히 많은 암기가 그의 전신을 뒤덮은 것이었다. 암기라야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들고 있던 잔을 산산조각 내서 던진 것에 불과했지만 파편 하나하나에 상당한 공력이 실려 있었다. 파편은 살갗을 파고든 것은 물론이고 심줄과 뼈, 그리고 몸 안의 장기까지 손상시켰다. 흐흐흐, 어림없다. 이놈들! 내가 이대로 죽을 줄 아느냐! 비틀거리는 몸을 검에 의지해 힘겹게 바로 세운 우자현이 광소를 터뜨리며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마처 두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양쪽 허벅지에 표창이 작렬하고 그의 무릎이 꺾였다. 동시에 날아든 검이 그의 목을 몸과 분리시켰다. 미처 어떤 대응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제법 강단이 있는 몽이었어. 역시 패천궁이라는 건가. 사내가 감기지 않은 우자현의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것으로 이곳의 일은 끝났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다른 조는 곧바로 귀환하겠지만 우리에겐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은밀히 움직여 묵표물로 향한다. 연성, 너는 지금 즉시 귀환해라. 그만한 부상으로 따라올 수 없어. 죄, 죄송합니다. 우자현의 검에 상어를 입은 사내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죄송할 것 없다. 일이 틀어진 것은 아니니까. 자, 서둘러라. 사내가 앞서 분타주의 집무실을 빠져나가고 상처를 입은 연성이 일행 중 가장 늦게 그곳을 벗어나면서 우자현 이하 이십사명의 무인과 식솔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는 끝이 났다. 그리고 인근에 위치한 열 두곳의 다른 분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거나 종료된 상황 이었다. 오룡지회 첫째 날 밤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룡지회 둘째 날 아침. 이른 아침부너 황보세가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모두가 정확히 정오부터 열리는 비무대회를 구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남들보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편히 관람하기 위해 그토록 서두른 것이었다. 비무대회가 시작되는 정오가 되려면 제법 맣은 시간이 남았으에도 연무장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어 정문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담벼락으로 기어올라 가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정문 담벼락, 연무장을 에웠고 있는 전각의 지붕 등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면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광경이었음에도 황보세가에선 아무런 말도,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황보공만이 사람들의 발길에 미끄러져 깨지는 기와와 망가지는 담벼락을 보며 울상 지을 뿐이었다. 가로세로의 길이가 각 십여장에 이르는 거대한 비무대는 연무장의 중심에 세워졌다. 그 위쪽 집의전으로 통하는 계단에 황보세가에서 특별히 초청한 참관인들의 자리가 따로 마련되었고, 비무대를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는 육대세가와 초청을 받은 명문정파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자리의 주인들이 속속 도착하고, 무당파를 대표해 참여한 천엽진인이 제자들을 이끌고 그들을 위해 비워둔 자리에 위치하면서 비무대회의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이야, 인간들 정말 많네. 뇌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와 함께 이러저리 고개를 돌리던 천도문이 혀를 내두르며 대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많다고 하더니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삼, 사천명은 죄겠는데요. 그나저나 이놈들은 어디에 있나? 오라, 저쪽에 있구만. 뭐가? 팽가 놈들 말입니다. 저쪽에서 노려보고 있습니다. 해웅의 눈이 천도문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비무대의 맞은편 쪽에 황색바탕에 청색과 적색의 그림과 글씨가 수놓아진 옷을 입은 팽가의 무인들이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눈이 빠져라 쳐다보든 말든 신경 꺼, 우리가 왜 이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자고. 강유는 대응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흔들며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천도문 등으 다독거렸다. 남궁세가는 당가, 제갈세가 등과 함께 비무대의 우측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는 좌측에 악가를 포함한 육대세가의 자리가, 우측엔 소림사와 무당파 등 이름 높은 문파들이 자리하기로 하였으나 전날 있었던 남궁세가와 팽가의 충동을 염려한 황보윤이 급히 자리 배치를 변경하여 혹여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코자 한 것이었다. 와아!!! 갑자기 천지가 떠나가라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 오룡지회의 주최자라 할 수있는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윤이 비무대에 올랐기 때무이다. 함성이 잦아들자 황보윤은 이런 저런 공치사를 늘어놓으며 오룡지회를 보기 위해 세가를 찾아온 모든 손님에게 감가의 말을 전했고 그의 말이 끝날 때마다 박수 소리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늘 그랬듯 비무는 한사람이 패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다만 비무대회가 생명을 걸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각 세가의 우의를 다지고 서로의 무공을 비교하여 단점은 고치고 장점은 키우자는 뜻으로 여는 것이니만큼 머무 과열되어 상대를 심하게 상하게 하거나 피를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오. 잠시 말을 끊고 다짐이라도 받듯 엄숙한 표정으로 각 세가의 무인들을 살핀 황보윤이 몸을 돌려 참관인석을 바라보았다. 집의전 바로 앞을 살핀 황보윤이 몸을 돌려 참관인석을 바라보았다. 집의전 바로 앞계단에 마련된 참관인석엔 육대세가의 가주와 초청을 받고 황보세가를 찾은 무림명숙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 비무대회를 위해 특별히 청하여 세가를 찾아주신 분이 계시외다. 가장 좌측에 계신 분이.... 참관인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림잡아도 삼십여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황보윤은 좌측부터 차례대로 소개했다. 어찌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지루한 시간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비무대가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그중에서 특히 많은 박수와 환호성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무림십대고수로 손꼽히는 권왕 황보장과 무광 곽검명, 취광 단견이 그 주인공이었다. 창룡검객 운중학을 끝으로 모든 인사가 끝나자 황보윤이 부친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비무대회의 시작을 선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다는 듯 담담한 미소를 보인 황보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와 비무대 가장 자리에 걸려 있는 석종에 집중되었다. 비무대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석종을 울리는 것은 꽤나 오래된 전통으로 사람들은 과연 권왕이 어떤 신기로 석종을 울릴 것이가에 대해 잔뜩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허허, 이것 참, 가주가 해도 될 것을. 그런 기대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는지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황보장이 석종을 향해 활짝 편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살짝 편 손을 뻗었다.그리고 살짝 주먹을 쥐었다. 뎅~ 조용했던 비무대 위로 한없이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사람들은 그들의 눈과 귀를 의심해야 했다. 이, 이건 도대체가!!! 신, 신기다!! 권왕이 있는 곳과 석종까지의 거리는 근 십여 장. 힘을 모으는 기색도 없었고 기를 뿜어내기 위해 주먹을 휘두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폈던 주먹을 살짝 쥔 것이 전부였다. 한데도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저 청명한 소리는 뭐란 말인가. 장내는 순식간에 놀람을 넘어 깊은 충격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엄청난 함성으로 바뀌어 버렸다. 와아!! 최고다!! 그렇게 비무대회는 시작되었다. ---------------------------------- 패천궁 궁내의 가장 은밀하고 중요한 건물 중 하나이자 군사인 신안 온설화의 집무실이기도 한 밀은각. 곤히 잠을 자다 급보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온설화와 비혈대의 대주 사중명은 새벽녘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고 부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진 것 같습니다. 사중명이 막 도착한 밀서를 내보이며 말했다. 비혈대 대원에게 도착한 것인가요? 온설화는 사중명이 건넨 밀서를 펼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청양 분타를 살필 이십칠호에게서 온 것입니다. 흠,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무림을 뒤흔들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로군요. 분타가 초토화되면서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사중명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러나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는 온설화는 그와는 다르게 더없이 차분했다. 다들 모이셨나요? 예. 궁주님의 명령에 따라 아침 일찍부터 궁내에 있는 호법님들과 여러 대주, 전주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독패청이겠지요? 온설하는 그만한 인원이 모일 곳은 그곳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확인차 물었다. 저희가 처음 그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새벽에 상주 분타에서 기르고 있던 한 마리의 전서구가 도착하면서입니다. 그 주인이 참변을 당했을 것이라 예상되듯 전서구 역시 도착하자마자 숨이 끊어졌습니다. 아무튼 전해진 소식은 상주 분타가 괴인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전멸당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독패청에 흐르고 있었다. 안휘명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온설화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즉시 상주 분타와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모든 분타에 전서구를 날렸고 현재까지 돌아온 전서구는 세 마리입니다. 세 마리라니? 비록 허술하기는 하나 그쪽에 흩어져 있는 분타가 몇개인데! 설마 그 많은 분타들이 전멸을 당했다는 말인가? 날카로운 눈빛, 얼굴의 반이나 차지할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매부리코, 새하얀 수염이 얼굴을 노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타상호법을 제외하고 호법전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비부 뇌학동이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청양, 남경, 상주 들을 열두곳의 분타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음. 죽일 놈들 같으니! 온설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곳저고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한 안휘명이 계속하라는 듯 시선을 주었다. 각 분타에 전서구를 날림과 동시에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혈대의 대원들에게도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청양분타를 살핀 비혈대원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그래서 뭐라던가? 전해진 소식이 진정 사실이던가?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온설화는 대답 대신 안휘명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간단하면서도 핵심이 되는 질문이었다. 이미 당한 이상 어째서 그런일이 벌어진 것인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고 생존자는 없는지 등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 라는 말도 필요없었다. 그저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일체의 건물과 시신이 소각되어 무슨 목적을 가지고, 또 얼마나 많은 적이 침입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이 말해야 하는 사안의 중요성 때문인지 지금껏 담담하기만 했던 온설화도 조금은 긴장하는 듯했다. 안휘명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타다 남은 시신을 발견했는데 그의 몸에서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공이겠군. 안휘명과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노인이 단정하듯 말했다. 싸움터도 아니건만 회의를 하는 자리까지 도를 품고 있었고 모두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노인, 다름 아닌 도왕 동방성이었다. 예, 어르신. 다만 무공이 아니라 무기예요. 비도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비선이라는 글씨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비도에 글자를 새기는 문파나 무인들은 많았다. 그러나 비선 이라는 글을 새기는 곳은 오직 한 곳 뿐이었다. 비선문! 정도맹! 이놈들이 감히!! 많은 문파들이 도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데 반해 비선문은 특이하게도 비도를 무기로 사용하여 명성을 얻고 있었다. 특히 열여덟 자루의 비도로 펼치는 전일회천은 무림의 일절로 손꼽히는 무공으로 지금의 비선문이 있기까지 절대적인 공헌을 한 무공이었다. 하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비선문이 정도맹을 이루고 있는 많은 문파들 중 하나이고 무너진 청양분타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비도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하나의 증거로 모든 사건은 명확해졌다. 대충 어찌 돌아가는 것이지 알겠군. 결론을 말하자면 정도맹인가? 현 상화에서 가장 가능서이 큽니다. 흠. 안휘명이 짧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쥐 죽은 듯이 침묵을 지키는 좌중의 시선이 오직 그의 입술로 향했다. 어찌할 생각이신지요? 온설화가 조용히 물었다. ..... 당장 받은 대로 되갚아줘야 합니다! 더 이상의 침묵을 참지 못한 반혼귀 나후성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여러 호법들 중 두 번째로 나이가 어린 그는 유난히 다혈질이었다. 놈들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한번 감긴 안휘면의 눈은 떠질 줄을 몰랐다. 궁주! 답답했는지 뇌학동의 음성이 다소 커졌다.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안휘명이 동방성에게 물었다. 태상호법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받은 동방성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곧 입을 열렀다. 글쎄, 이미 중론은 모아진 것 같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오직 궁주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궁주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를 뿐일세. 어쩌면 이것은 자네가 품은 웅지를 펼쳐 보라는 하늘의 배려일 수도 있겠군. 하늘의 배려라.... 희미한 미소를 보인 안휘명이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감겼던 눈은 금방 떠졌다.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뀐 날카롭고 힘있는 눈빛을 빛내며. 명을 내리겠소. 나직하면서도 거역하기 힘든 음성이 독패청을 우리자 좌중의 모든 이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법들 중 그에게 유일하게 하대를 할 수 있는 동방성 역시 이때만큼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무릇 기르던 동물이 해를 입더라도 가만히 있어선 아니 되는 법. 하물며 우리를 믿고 따르는 수하들이 목숨을 잃었소. 이들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게 둔다면 어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것이며 다른 수하들을 본단 말이오? 안휘명의 음성이 점점 커졌다. 평화를 원했으나 그것은 어느 한쪽만이 지킨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오. 열두 곳의 분타가 무너지면서 지금껏 이어졌던 평화는 깨졌소.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 대가를 받아낼 때요. 양단풍! 예, 궁주님. 혈참마대의 대주 양단풍이 직각으로 허리를 꺾으며 대답했다. 지금 즉시 혈참마대를 이끌고 악양으로 떠나라. 공격입니까? 도착하기 전에 연락을 주겠다. 우선은 최대한 빠른 시간에 도착을 해야 할 것이다. 가라. 존명!! 다시 한번 허리를 꺾은 양단풍이 빠른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가 미처 독패청을 벗어나기도 전에 계속 명이 떨어졌다. 뇌 호법. 예, 궁주. 궁내에 모든 수하들을 점검하고 싸움에 대비해 주시오. 삼당의 지휘권을 일임하겠소. 알겠소이다. 뇌학동이 살짝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흑기당과 적기당 그리고 백기당의 당주가 그의 뒤를 따랐다. 냉혈. 이름이자 별호인 혈영대의 대주 냉혈이 앞으로 나섰다. 그대에겐 따로 명을 내리지 않겠다. 싸움이 시작되면, 아니,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 즉시 움직여라. 따로 명을 내리지 않겠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을 알아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핏빛 살수 혈영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명령이었다. 냉혈의 존재감이 사라지자 안휘명이 동방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태상호법께서는 장로전에 지금 벌어지는 일들과 저의 결심을 설명하여 주시지요. 원로원은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그리하겠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역시 모두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해주시오. 존명! 무엇을 준비하라는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설레는 듯한 표정으로 독패청에는 안휘명과 온설화만이 남게 되었다. 궁주님. 하하, 우리 둘밖에 없을 땐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 따로 남은 것을 보니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온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이라니? 조심해야 할 정도로 정도맹이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방실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도맹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은 숙부님도 아시잖아요? 허, 아니라니? 비도가 나왔다고 보고를 올린 것은 네가 아니냐? 살짝 미소를 띤 안휘명이 되물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결정적인 증표를 남길 리가 없지요. 문면 정도맹과 패천궁을 이간질시켜 충돌케 하려는 제삼의 세력이 개입되어 있어요. 상관없다. 예? 애당초 이 일에 정도맹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랬고 태상호법이 그랬으며, 당장 공격하자고 방방 뛰는 사람들 역시 십중팔구는 알고 있을 게다. 하나 군사인 너는 물론이고 그들 모두 모른체하고 넘어갔다. 왜 그랬을까? 풀어줄 때도 되었으니까요.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 본 궁의 힘은 커질 대로 커져 있다. 네 말대로 커진 힘을 한 번쯤은 외부로 폭발시킬 때도 된 것이야. 그것뿐일까요? 온설화가 조용히 되물었다. 인석아, 남자라면 천하를 호령하고 싶은 야망을 꿈꾸는 법이다. 충분한 힘도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더냐? 잘못이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정도맹과 상관이 있다고 못을 박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다만 엉뚱한 자들에게 어부지리를 줄 수 있음을 경계하자는 것이지요. 놈들을 찾아내고 경계하는 일은 네가 할 일이지 않느냐?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만. 그러잖아도 근래 들어 무림의 공기가 심상치 않아 면밀히 관찰하고 있던 중이에요. 수상한 움직임도 있고. 비혈대를 총동원했으니 조만간 소득이 있을 거예요. 그럼 된 것이고, 우선은 정도맹이다. 그래, 정도맹을 어찌 공략해야 할지는 생각하고 있느냐? 온설화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만큼 확실한 대답이 없는 듯 안휘명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네가 있으니 내가 아무런 걱정도 없이 북벌을 단행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하하하! 한번 시작된 안휘명의 웃음은 독패청이 떠나가라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 비무대회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매우 순조로웠다. 가장 먼저 비무대에 오른 사람은 약관이나 지났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린 황보균이었다. 날렵한 솜씨로 비무대에 오른 그는 좌중을 향해 정중히 인사하고 상대를 구했다. 그의 상대는 당가에서 나왔다. 당가에서 출전한 사내 역시 황보균과 비슷한 나이였는데, 그는 정확히 여덟 개의 암기를 던졌고 그것을 황보균이 막아내자 스스로 패배를 자인한 뒤 비무대를 내려갔다. 사람들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당가의 무인에 이어 비무대를 내려갔다. 사람들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당가의 무인에 이어 비무대에 오른 사람은 섬전도 팽두연의 제자 송령이었다. 오색 수실로 장식된 도를 들고 출전한 그는 치열한 격전을 펼친 끝에 간발의 차이로 상대를 제압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도전자가 나섰다. 그런 식이었다. 한 사람의 승자가 나오면 다른 세가에서 계속 도전을 하였다. 연속해서 승리를 거둔 사람은 없었다. 이는 각 세가에서 승리를 거둔 자의 무공 실력을 가늠하여 보고 그보다 조금 더 강한 제자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시진이 흐르고 각 세가마다 한두 명, 많게는 세 명까지 출전을 시켰지만 남궁세가에서는 단 한 명도 출전하지 않았다. 이를 괴이 여긴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도토리 키 재기식의 장난을 보고 있어야 합니까? 제가 나가서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끓어오르는 승부욕을 감추지 못한 뇌전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했다. 하나 돌아오는 것은 핀잔뿐이었다. 시끄러. 네 말대로 애들 장난하는 데 훼방을 놔서야 쓰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대로 비무대회가 끝나면 어찌합니까? 금방 날도 어두워질 것 같은데. 그만두라니까. 비무대회는 내일까지 이어져. 오늘은 말 그대로 어린애들을 출전시켜서 흥을 돋우는 수준이다. 을지호가 다소 불만 섞인 표정으로 서 있는 식솔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진짜 실력자들은 모두 내일 출전한다. 우리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은 내일이다.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잖습니까? 출전을 허락해 주십시오. 시끄럽다니까! 뇌전은 끈질겼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출전시켜 달라고 졸라댔다. 물론 그는 출전하지 못했고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첫날의 비무대회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오룡지회 셋째 날. 두 번째 비무대회가 열리는 날의 아침은 무척이나 화창했다. 비무대회가 열리는 황보세가의 연무장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새벽부터 몰려든 인파에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황보윤의 간단한 인사와 함께 비무대회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비무대회에 오른 이는 역시 황보세가의 무인이었다. 그런데 풍기는 분위기가 어제의 황보균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비로소 각 세가의 실력있는 후기지수들이 출전을 시작한 것이다. 와아!! 갑자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제갈세가가 있는 곳에서 깨끗한 청삼을 입은 문사풍의 청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흠, 제법인데. 그가 비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을지호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이런, 자네가 내 첫 상대가 될 줄은 몰랐는걸. 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미 후기지수들의 모임에서 안면을 익힌 황보진성과 제갈염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무튼 잘 부탁하네. 술로는 제가 졌지만 이번만은 제가 이길 겁니다. 그건 해봐야 알지. 황보진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말을 끝으로 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황보진성은 상체를 세우고 양다리를 교차시킨 뒤 무릎을 살짝 굽혔다. 커다란 바위라도 단번에 부숴 버릴 것만 같이 단단히 움켜쥔 주먹은 가슴어귀에서 제갈염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오시지요. 들고 있던 섭선을 활짝 펴 입을 가리고 한쪽 손은 뒷짐을 진 제갈염이 황보진성을 청했다. 어찌 보면 상대를 굉장히 무시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제갈염의 자세는 구초팔식으로 이루어진 영환선법을 펼치기 위한 기수식이었다. 황보진성을 한가로이 산책이나 하는 것처럼 여유있는 제갈염의 모습에서 약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하는데 가지 않을 만큼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타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황보진성의 왼쪽다리가 앞으로 쭉 뻗어 나가더니 오 장여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동시에 천 근의 힘이 실린 주먹이 상대의 가슴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빠르다! 뇌정추혼!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오고, 그의 초식이 무엇인지 알아본 황보세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황보진성이 선공부터 다짜고짜 뇌우산권을 쓸 줄 몰랐다는 듯 놀란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놀라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제갈염은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한쪽 발을 좌측으로 옮기며 폈던 섭선을 접어 번개같이 치고 들어오는 황보진성의 팔을 향해 내려쳤다. 섭선에 의해 살짝 방향이 틀어진 주먹이 제갈염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고 압력에 의해 옷자락이 흔들렸다. 순간, 뭄을 빙글 돌린 황보진성이 왼팔을 쭉 펴며 휘돌렸다. 뒤쪽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나타난 팔이 제갈염의 얼굴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 정도의 빠른 반응을 생각하지 못한 제갈염이 다급히 숨을 들이키며 섭선의 끝을 세워 주먹을 막았다. 딱. 바위라도 단숨에 부술 만큼 강맹한 주먹과 섭선의 끝이 허공에서 만나며 둘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그런데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는 둘의 표정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한 황보진성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어깨를 살피고 있어고, 제갈염은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 언제? 분명 공격은 자신이 시도했다. 상대의 적절한 방어로 인해 성공은 하지 못했어도 승기는 잡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충돌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밀려오는 이 고통은 뭐란 말인가. 제갈염이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제가 조금 빨랐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승리의 선언이었다. 제갈세가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은 곧 비무대 주변을 휘감았다. 이야, 그놈 참 제법인데. 글이나 읽을 듯한 여린 몸을 보고 싸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큰소리쳤던 천도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막는 데 급급한 척하는가 싶더니만 혈을 완벽하게 제압했네. 척택혈하고 협백혈, 두 곳인가? 그가 자신의 팔꿈치 쪽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천양대의 부대주 염복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곳 말고도 어깨까지 제압했어. 그래? 어깨 쪽으로 손이 올라가는 것은 못 봤는데. 그러자 염복이 자신의 소나락을 펼쳐 보였다. 지공이지. 지공이라면? 깜짝 놀란 천도문이 되물었다. 지위의 상하가 없고 단지 무공의 고하만 있는 천양대에서 천도문의 무공이 발군이기는 했으나 잡다한 지식은 염복을 따라가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기를 쏘아 보내는 거야. 익히기도 번거롭고 절정에 이르지 못하면 그다지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익힌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수련한 것 같다.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설명은 막힘이 없었다. 천도문은 물론이고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럴듯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대충 주워들은 지식으로 다는 체 좀 하지 마라. 지공은 무슨 얼어빠질 지공! 가만히 듣고 있던 강유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지,지공 아니었습니까? 분명히 그런 것 같았는데. 지공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섭선에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깨가 빠져 버린 것이다. 아, 그런 것이었군요. 염복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끍적였다. 곧바로 천도문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런 것이었군요? 에라이! 쥐뿔도 모르면서! 시끄러! 거기에 혹해서 고개를 끄덕인 주제에 말이 많아. 보다 못한 을지호가 한소리 하고 나섰다. 천도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나저나 제갈세가가 엄청나게 변모했다더니만 과연 명불허전인걸. 초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난번 비무대회의 우승자도 제갈세가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음. 짧은 감탄성을 내뱉은 을지호가 자신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갈세가의 인물들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제갈세가는 예로부터 무공보다는 천재적인 두뇌를 이용하여 기문진법, 토목기관, 오행과 역리등에서 가히 독보적인 실력을 쌓아온 가문이었다. 하나 신의 섭리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두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등한시한 것인지는 몰라도 전해져 오는 가전무공은 다른 세가들에 비해 상당한 손색이 있었다. 그리고 오십여 년 전 패천궁에 의해 크나큰 좌절을 맛본 제갈세가는 가히 획기적인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 싸움이 끝난 후, 무림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제갈세가는 아직 싸움을 끝내지 않아싿. 당시 가주였던 제갈공은 조사당에서 백일 동안 죄를 청한 후 세가 내의 모은 두뇌들을 한자리에 집합시켰다. 그리곤 은밀히 무림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무공을 분석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들 대부분은 하루 종일 경서를 읽으며 학문 도야에 힘쓰는 문사들로 무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갈세가가 처한 입장을 알았고 제갈공의 고뇌도 충문히 이해했다. 이후 그들의 손에는 경서 대신 무공비급이 들려졌다. 방대한 무공들이 수집되고 분석되었다. 구하지 못하는 것은 직접 눈으로 보고 관찰하여 머리 속에 기억하였다. 그런 식으로 무려 십 년이란 세월 동안 온갖 무공들을 연구하고 분석한 제갈세가는 본격적으로 그들을 위한 무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듣는 것과 보는 것이 다르고 또 행하는 것이 달랐다. 무공이란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발전되고 가다듬어져 온 것으로 아무리 하찮은 무공이라 할지라도 그 않에는 반드시 세월의 힘이 녹아있었다. 단순히 지식만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저 머리를 맑게 하고 잔병을 없애주는 줄로만 알았던,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름 모를 호흡볍이 그 어떤 세가의 내공심법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는 데 있었다. 아무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들은 귀원신공이라 명명한 호흡법을 바탕으로 많은 무공을 만들어냈다. 장법과 검법이 있었으며 곤법, 도법도 있었다. 심지어 창술과 궁술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채택된 것은 오직 군자칠검이라는 칠초사십구식의 검법과 몽환포영이라는 경공법 뿐으로 제갈공 사후 칠 년, 처음 명이 떨어진 지 이십일 년만에 비로소 영환선법과 더불어 뭇 세인들에게 당당히 내보일 수 있는 제갈세가의 독문무공이 완성된 것이다. 그들이 만든 무공은 십오년 전, 기라성 같은 상대들을 모조리 꺾고 비무대회에서 우승한 화풍검 제갈능에 의해 증명이 되었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제갈능은 군자검법을 완벽히 익히지도 못한 상태에서 비무대회에 출전하였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당당히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당시 그의 무공을 감당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대개가 십 합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고, 삼십 합을 넘겨 그나마 박빙의 승부를 보여 준 사람은 현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윤뿐이었다. 그때 황보윤의 나이는 삼십 중반, 자손심 때문에 참가는 하였으나 후기지수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나이였다. 황보윤마저 꺾은 제갈능의 이름과 실력은 나날이 명성을 떨쳤다. 삼십을 넘겼을 땐 이미 적수가 없었다. 호사가들은 곽화월이라는 거대한 인물이 없었다면 검왕이란 칭호는 그에게 갔을 것이라 단언했고, 그 누구도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제갈세가는 단순히 지략뿐만이 아니라 강맹한 무공으로도 최고의 위치에 서거 되었다. 무공을 익혔다고 그동안 축적된 지식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닐 테고, 무공에 지략이라... 어쩌면 제갈세가야말로 최고의 가문이라 할 수 있겠군. 제갈세가에 두었던 시선을 거둔 을지호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인물이 비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 비무대회 2 설마 전면전입니까? 만종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네. 대대적인 소집령이 떨어진 것으로 보아. 용철상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전면전! 이런 일이! 이곳저곳에서 무거운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연락을 받고 다급히 모인 노호문의 수뇌들은 정도맹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패천궁에서 그급으로 날아온 소식에 따르면 동북쪽의 분타대부분이 초토화되었고 그것은 정도맹의 소행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기습을 당한 패천궁이 참고 있을 리 없습니다. 기밀전 전주 가경이 말했다. 음, 그랬던가? 여기엔 그런 사연이 적혀 있지 않은데. 황유화가 용철상으로부터 건네받은 밀지를 살피며 물었다. 그건 공식적인 것이고 제가 받은 연락은 그 말지가 도착하기 전 그곳에 상주하고 있는 기밀전 수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황유화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용철상에게 질문했다. 문주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응해야겠지. 용철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상 흑도문파를 지배하고 있는 절대자의 명령이었다. 노호문이 비록 인근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다지만 패천궁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응한다면 어느 정도의 인원을 보내실 생각입니까? 최대한 많이 보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용후의 말에 황유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째서? 많은 희생이 있을 걸세. 모르지는 않습니다.하나 패천궁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우리가 할 후 있는 최대의 성의를 보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저들이 알아주기는 하겠는가? 또 알아준다고 해서 우리에게 얼마나 득이 되겠는가? 다소 흥분을 했는지 황유화의 얼굴이 불게 달아올랐다. 아시다시피 현재 패천궁의 힘은 사실상 최강이라 해도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백도에 정도맹과 오대세가가 있다고는 하나 전력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정도맹을 장악한 무당파의 독주로 인해 문파들 간에 많은 분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시지요. 패천궁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와 분열되어 흩어져 있는 저들과의 싸움을, 해보지 않아도 결과가 보입니다. 싸움이라는 것은 막상 해보지 않고는 그 결과를 모르는 법. 너무 과신하는 것은 좋지 않네. 백도의 저력을 익히 알고 있는 황유화가 용후의 지나친 자신감을 경계했다. 그렇게 판단할 만큼 전력의 차이가 크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싸움은 패천궁의 승리에 대해 논공행상이 있을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노호문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합니다. 맞는 말이었다.용후의 말대로 패천궁의 승리는 기정사실처럼 모였다. 그리고 그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의를 보여야 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황유화는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황유화는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장기칸의 졸로 전락할, 분명 최일선에서 온갖 위험한 일에 나서야 할 수하들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영문과 묵영도문은 벌써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늘 그들을 의식하고 있는 노호문으로선 그들의 움직임에 유난히 예민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용철상이 가경을 향해 황급히 물어싿. 예, 문주. 선발대로 보이는 인원이 출발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곧 대규모의 인원이 뒤따를 것으로 보입니다. 음. 용철상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황유화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하나 용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어쩌면 이번이 노호문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없는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마영문과 묵영도문이 벌써부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그들 말고도 얼마나 많은 문파들이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그는 용후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매 전주와 상 전주는 본 문을 호위할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 모든 인원을 대기시키게. 예. 문주! 벌떡 일어난 매염교와 상문연이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는 선발대 없이 곧바로 본진이 이동할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들 하게나. 특히 조 전주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게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노호문의 보급을 책임져야 할 조영산이 허리 숙여 대답했다. 아, 그러면 저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무슨 소린가, 저들이라니? 용철상의 반문에 양구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전면전입니다. 패천궁과 정도맹의 싸움이지만 사실상 오십여 년 만에 흑백대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서설이 기네.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가? 만종의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남궁세가 말입니다. 흑백대전이 벌어진 마당에 턱 밑에 저들을 방치해 두고 싸우러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지난번 빚도 갚을 겸.... 쑥밭을 만들어 버리자?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룡지회에 참여한다고 대다수가 집을 비웠네. 남아 있는 이들이라 해봐야 무공도 모르는 하인에 불과하고, 그런 곳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한들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 쓸데없는 짓이야.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만종의의 만류에도 양구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만 장로의 말이 옳은 것 같군, 없던 것으로 하세나. 하지만 궁주님! 그만 하게. 용철상이 전에 없이 강경한 음성으로 말을 잘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그는 남궁세가에 어떤 인물이 관련되어 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비위를 거슬렀을 경우 어떤 결과가 벌어지리라는 것까지도. 그에겐 문파의 존립을 걸고 껍데기만 남은 남궁세가를 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 황보진성을 꺾은 제갈염은 이어 등장한 당가의 무이놔 팽가의 무인마저 가볍게 제압하더니 연승을 달렸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맞이한 상대는 오료지회에 처음으로 초청받아 등장한 악가의 무인이었다. 악가의 무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창과 검이었는데 자신을 악부라 소개한 상대는 길이가 일 장은 넘어보이는 창을 사용했다. 대결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악부가 창을 찌르면 제갈염이 이를 피하는 형식이었다. 모든 이들이 제갈염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당가의 예리한 암기를 뚫고, 팽가의 무인마저 제압한 그의 솜씨라면 시작과 동시에 싸움을 끝내리라 여겼다.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상황은 그들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돌아갔다. 연속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제갈염은 단 한 번의 반격도 하지 못했다. 아니, 방어를 하는 것만으로 힘에 부치는지 고통스런 모습이 역력했다. 막강한 내공을 지녔다거나 휘황찬란한 초식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갈염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몸놀림을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전후좌우로 놀리는 발 동작은 제갈염에 비해 오히려 손색이 있었다. 그런데도 제갈염은 반격으리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갈염을 향해 찔러 들어가는 악부의 창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는 데 있었다. 찌르는 것만이 빠른 것은 아니었다. 회수하는 동작 또한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찔렀는가 싶으면 어느새 회수되어 있고 회수되었는가 싶으면 다시금 쏘아져 갔다. 더구나 창날과 창간에 묘한 회전이 걸려 있는지 스치기만 해도 옷가지가 찢어져 나갔다. 들고 있던 섭선은 뼈대만 앙상히 남아 제갈염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아,하아. 연신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뱉는 제갈염은 몹시도 지친 모습이었다. 이엿! 특유의 기합성과 함께 창날이 그의 목을 노리며 다가왔다. 이를 악문 제갈염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섭선을 들어 공격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창을 막을 힘이 그에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갈염의 눈에 아득함이 떠올랐다. 그만! 승부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황보장의 음성이 비무대를 울리자 제갈염의 목을 단숨에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았던 창날이 딱 멈추었다. 그의 목에서 고작 한 치의 거리였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빨리 창을 거둬들인 악부가 정중히 예를 표했다. 악가의 창이 얼마나 무서운지 오늘 새삼 느꼈습니다. 소생의 완패입니다. 비록 패했지만 제갈염은 당당했다. 와아! 최고다! 제갈염의 패배 선언에 사람들은 비무대가 떠나갈 정도로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흥분했다. 흠, 악가창법이 무림의 일절이라더니 헛된 말이 아닌걸, 세상에. 접근조차 못하고 끝나다니... 무기의 길이가 한 치라도 길면 유리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섭선과 창이라. 차이가 나도 너무 났습니다. 뇌전의 탄성 섞인 말에 천도문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도검과는 달리 창리라는 놈은 제대로 쓰지 못하면 도리어 허점만 노출하는 무기야. 단순하면서도 꽤나 익히기 어려워. 강유가 악부의 창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그랬기에 백일도, 천일검, 만일창이라는 말이 생겼겠지. 해웅이 지그시 눈을 감고 맞장구를 쳤다.어울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은 강유가 재빠른 반격을 날렸다. 천일검과 만일창이 바뀐 것 아냐? 천일창, 만일검으로 아는데? 그거나 저거나. 너답지 않게 무게를 잡더라니.제대로 알고나 말해야지.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겠다. 강유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무안해하는 해웅을 놀리자 을지호의 주먹이 그의 머리로 날아왔다. 자~~ 알들 논다! 강유에 이어 해웅의 머리까지 원정을 떠났던 주먹이 돌아오자 을지호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해싿. 천일창, 만일검이라고? 누가 그래? 아니, 옛말에..... 웃기지 말라고 그래! 잘 들어. 무기는 말이야.... 잠시 말을 끊은 그는 힘끔 고개를 돌려 태상호법을 쳐다보더니 다소 엄숙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백일도, 백일검, 백일창, 만일궁이야! 에? 그, 그런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잔뜩 긴장하며 듣던 강유 등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을지호는 천연덕스럽게 되받았다. 시끄러! 쓸데없는 소리들을 하니까 그렇지. 그것은 딱 이렇다 하고 규정할 수 없다는 거야. 도를 익히는 사람한테는 도만큼 힘든 무기가 없는 것이고, 검이면 검, 창이면 창 다 힘들다는 말이지. 율 대주. 아니, 저 고지식한 친구 말고 왕욱에게 한번 물어봐라. 뭐라 답하나. 모두의 시선이 왕욱에게 향했다. 왕욱은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대답했다. 다시 무공을 배우라면 때려죽여도 궁은 피할 겁니다. 사뭇 진지한 그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사제의 연을 맺은 것은 아니나 사부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자,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쯤 되면 우리도 뭔가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을지호가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비무대에 다시 오른 악부를 보며 말했다. 전 준비가 되었습니다.놈이 대단해 보여도 문제없습니다! 간단히 끝내고 오지요! 말뜻을 이해한 천도문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런데 을지호가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연능천. 예, 호법님. 실력 한번 보여주고 와. 아무런 대답 없이 일어선 그는 살짝 허리를 숙여 태상호법과 을지호를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천도문에게 보일듯 말 듯한 미소를 보이며 천천히 비무대로 향했다. 남궁세가다! 드디어! 연능천이 비무대로 향하자 일대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허허, 남궁세가에선 첫 출전인 듯하네. 남궁세가와의 인연으로 자신의 바로 옆에 남궁민의 자리를 배려한 황보장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예, 어르신. 남궁민이 공손히 대답했다. 기대 반 걱정 반인 그녀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역시 소문이란 것은 믿을 것이 못 돼. 그래도 혹시나 하여 조금은 걱정을 했는데 저 친구를 보니 그런 생각은 접어야겠어. 남궁세가가 첫째 날 비무에 참가하지 않자 그 진위를 둘러싸고 말들이 상당히 많았다. 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둥 아니면 전날 팽가와의 충돌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 대회를 포기했다는 둥 온갖 추측이 난무했었다. 황보장이 걱정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각했는지 능히 짐작이 갔다. 어르신을 실망시키진 않을 겁니다. 허허허, 가주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이 늙은이도 알고 있다네. 제법 단단한 몸을 지녔는걸.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황보장이 그의 좌측에 앉은 곽검명에게 물었다. 연능천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곽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악가의 애송이도 강해 보이긴 하나 저 녀석을 따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남다른 예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꽤나 강해 보입니다. 허허허, 내 생각도 그러네. 아무튼 결과는 보면 알겠지. 뭐가 그리 좋은지 황보장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한껏 긴장한 남궁민은 땀이 손아귀를 적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연능천이라 하오, 한 수 배우겠소. 별말씀을, 악부외다. 상대에 대한 인사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연능천이 검을 꺼내자 한 걸음 물러난 악부도 창을 치겨 올리며 자세를 취했다. 창을 움켜쥔 악부는 서서히 접근하는 상대를 보며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이자는 강하다. 상대의 강함은 그와 직접 마주친 사람만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법이고 무공이 강하면 강할수록 보다 정확하면서도 빠르게 전달된다. 그런 의미에서 연능천의 강함을 알아본 악부도 절대 얕볼 수 없는 고수였다. 칼날 같은 자다. 연능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은 한 자루 칼과 같은 날카로움이었다.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난도질당하는 듯했다. 이런 상태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패배를 자인할 것만 같았다. 위기감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대로는 당한다! 악부가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악무는지 얼굴 전체에 힘이 들어갔다.그리곤 혼신의 힘을 다해 창을 찍었다. 창은 눈으로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며 연능천의 허벅지를 노렸다. 저런! 사람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연능천이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여긴 것이다. 하나 연능천은 악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물이 흐르듯 유연한 자타로 창날을 피해냈다. 이엿! 악부는 제갈염도 쩔쩔맨 공격을 상대가 너무도 쉽게 피패내자 오히려 오기가 발동했다.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듯이 맹렬한 기세로 창을 찍어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 허리를, 옆구리를, 가슴을, 심지어는 머리까지 노리는 창날은 가히 숨 쉴 틈도 없이 밀어닥쳤다. 그럴 때마다 연능천은 몸을 틀기도 하고 때로는 걸음을 바꾸며 모든 공격을 능숙하게 피해냈다. 다급함이나 위급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허! 대단하군, 대단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도 연능천이 보여주는 무위가 상상을 뛰어넘자 황보장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 위험천만한 악부의 공격을 그다지 힘도 들이지 않은 채 피해내는 몸의 움직임은 분명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 곽검명이 말했다. 간운보월입니다. 황보장이 무릎을 쳤다. 그렇군! 저토록 미려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는 보법이 세상천지에 얼마나 될까. 틀림없이 간운보월이네, 간운보월이야! 이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그 옛날 검성께서 보여주신 이후로 기억에 없습니다. 곽검명의 음성도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아! 남궁민은 전신에 밀어닥치는 묘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천하십대고수에게서 남궁세가의 무공이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꽝. 꽝. 꽝. 연능천이 피한 자리에 창날이 적중하며 바닥이 흉할 정도로 크게 패었다. 패인 바닥만큼이나 악부의 얼굴도 일그러져 있었다. 근 이각 동안 일방적인 공격을 펼친 것은 악부였다. 연능천은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안목이 짧은 사람이 보면 악부의 압도적인 우세라 할 것이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악부의 창은 가공하다 할 만큼 빨랐다. 하나 그토록 빠른 창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부가 소모한 내공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임에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에 반해 연능천은 몸의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하여 악부의 파상공세를 피해냈다. 때때로 검으로써 공격을 막아내 그가 들고 있는 검이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내공의 소모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끝났군. 비록 단 한 번의 반격도 없었으나 연능천의 우세가 확실해지자 을지호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쯤 되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격을 가하던 악부가 창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패배를 자인했다. 대단하구려. 소생은 도저히 연 형의 움직임을 잡지 못하겠소이다. 고생하셨소. 연능천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보통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면 양보가 어쨌느니 좋은 승부였다느니하며 예를 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연능천은 그러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면 상당히 거만하고 오만한 행동이었으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승을 달리던 제갈염을 격파한 고수를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보법하나로 패배시킨 인물이었다. 그들에게 연능천의 행동은 오만함이 아니라 당당함, 자신감으로 비쳐졌다. 새로운 고수의 탄생이군. 과연 남궁세가! 사람들은 승자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젠장, 뭐가 그리 대단했다고 저럴까? 나라면 단칼에 끝낼 수도 있었는데. 빨리 끝낼 수 있었으면서도 저렇게 시간을 끌 건 뭐야. 천도문은 사람들의 환호성을 한 몸에 받는 연능천의 모습이 부럽기만 한지 볼멘소리로 불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지금 상대야 그냥 가벼운 몸 풀기지, 바로 다음 상대를 위한, 저기 나오는군. 연능천의 다음 상대를 살피던 을지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시작인가.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을지호와는 다르게 강유 등은 제법 긴장이 되는지 굳은 얼굴로 비무대를 응시했다. 비로소 팽가와의 다툼이 시작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흠, 저 아니가 벌써 나오다니. 팽가가 아주 작심을 한 모양이구만. 연능천을 상대하기 위해 비무대로 올라오는 사람을 살피던 황보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시는 아입니까? 괜찮아 보이기는 합니다만. 곽검명이 물었다. 태연히 비무대를 응시하고 있던 남궁민도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네도 알지 않나, 팽과해라고. 광풍도 말입니까? 황보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지요, 홀로 일가를 이루어도 될 만큼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의 아들이라네. 이름이... 팽마군이었던가? 아마 그럴걸세. 흠, 그랬군요, 그 친구의 아들이라면 녀석이 강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모르긴 몰라도 팽가의 아이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게야. 놀라운 말이었다. 한 지역의 패자라면 뛰어난 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법이었다. 더구나 팽가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은 여타 문타들의 젊은 무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말은 곧 팽마군이 일신에 지닌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팽동악이 약간 위라고는 해도 둘의 무공은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연능천은 천도문보다 강했다. 무려 두 시진을 싸운 끝에 가까스로 얻은 승리였고 지금까지도 천도문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승리였지만 승리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채챙! 검과 도가 허공에서 얽이며 날카로운 충돌음을 발산했다. 첫 충돌에서 이득을 얻지 못한 연능천이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상대의 반격에 대비했다. 그의 예상대로 팽마군의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는 연능천의 발걸음을 잡지 못하면 승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집요하리만큼 다리를 노렸다. 타핫! 비무대의 끝이었다.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다고 생각한 연능천이 커다란 기합성과 함께 신형을 허공으로 띄웠다. 팽마군의 도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하나 이미 준비하고 있던 연능천이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도를 내려치고 그 반탄력을 이용하여 한 바퀴 몸을 돌리더니 비무대의 중앙까지 날아갔다. 급박한 상황에서 보여준 연능천의 날랜 모습에 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몸을 돌려 다가오는 팽마군의 얼굴엔 동요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미소가 입가에 그려지는 것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는 반가움과 그런 상대를 꺾었을 때 전해져 올 승리감을 미리부터 기대하는 것 같았다. 아니, 왜 저렇게 헤매? 나하고 싸울때는 저렇지 않았는데. 아직 본신의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야. 기다려봐.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강유가 호들감을 떠는 천도문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가슴높이로 세워져 있던 연능천의 검이 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변화를 눈치 챘는지 팽마군도 다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창궁무애 검법만을 가르치던 을지호는 이후 그가 남궁혜로부터 전해 들은 몇 가지 검법들을 각 개인의 특징에 맞게 전수해 주었다. 그러나 연능천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떤 검법을 원하느냐는 을지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천도문의 천풍영이라는 검법을 익히곤 좋아 날뛸 때도,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절망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검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것을 기뻐하며 오직 창궁무애검법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지금, 다른 검법은 몰라도 창궁무애검법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것은 태상호법과 을지호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애쓴 남궁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것이 진짜 창궁무애검법이다. 을지호는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주며 팽마군을 몰아붙이는 연능천을 보며 말했다. 간운보월과 조화를 이루며 펼쳐지는 연능천의 검은 빠르면서도 느렸고 가벼워 보리면서도 휘두름에 만 근의 무게가 느껴졌다. 창궁약연의 빠른 공격으로 상대의 정신을 흔들어놓고, 상대의 반격은 부드러운 창궁무한의 초식으로 상대했다. 그리고 두 개의 초식이 적절히 연계하여 펼쳐지는 창궁조화는 상대로 하여금 아득함에 빠지게 만들었다. 팽마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좌측을 막으면 우측에서 검이 날아왔고 우측에서 막으면 어느새 뒤로 돌아가 배후를 노리고 들어왔다. 때로는 한개의 검이. 어떤때는 두게,세개의 검이 동시에 전신의 요혈들을 노리고 들어왔다. 어느것이 실초고 허초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실초인 듯하여 막으면 순식간에 흩어지고, 허초인 줄 알고 방관하면 그것이 실초로 변하고, 허초가 순식간에 실초로 변하니 판단력이 흐려져 제대로 된 반응을 쏟아져 나오니 그 위력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팽마군 입장에서의 생각일 뿐이었고 정작 공세를 취하고 있는 연능천도 상대의 강함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금씩 이득을 보고 승기를 잡고는 있어도 상대의 날카로운 반격은 족처럼 수그러드러들 줄을 몰랐다. 간운보월이라는 뛰어난 보법이 없었다면 그의 도에 온몸이 산산이 바스러졌으니라. 또한 무엇보다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서로의 무기가 허공에서 부딪 칠 때마다 검을 타고 흘러노는 막강한 기운이었다. 팽마군의 막강한 내공은 그의 팔과 어깨를 저리게 함은 물론이고 내부로까지 침투하여 오장육부를 뒤흔들었다. 을지호가 아무리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온갖 약재로 내공을 키우려 하였어도 연능천의 내공은 정순함에서 팽마군을 따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배우고 키운 내공, 게다가 팽가의 재력은 남궁세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끝난것 같습니다. 상체를 앞으로 수그리며 무척이나 흥미롭게 싸움을 지켜보던 곽검명이 의자에 몸을 누이며 오랜만에 그럴듯한 대결을 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것 같네. 박진감 넘치는 대결이었어. 황보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남궁민은 둘이 주고받는 말을 이해할수가 없었다. 비록 연능천이 최후의 기력을 짜낸 듯 거샌 반격을 하던 팽마군을 다시금 몰아붙이고는 있었으나 승부가 결정난 것은 아니었다. 한데 마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허, 가주는 이 늙은이들의 말이 이해 안 가는 모양이네그려. 승기를 잡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끝났다고 하기엔.... 생각을 들킨 남궁민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렸다. 무리도 아니겠지.하나 잘 보게나. 잘 싸우기는 했어도 저 아니는 니제 견딜힘이 없어. 곧 끝날 게야. 바로 저 공격으로. 황보장이 재빨리 손을 들어 연능천을 가리켰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남궁민의 고개가 손을 따라 돌아갔다. 그녀의 눈에 중심이 흐트러진 팽무군과 그런 허점을 놓치지 않고 뒤로 돌아가는 연능천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이었다. 아! 남궁민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그녀의 탄성은 황보세가가 떠나가라 울리는 환호성에 곧 묻혀 버리고 말았다. ------------------- 하남성의 정주에서 남서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봉수현에 위치한 정도맹. 최초 구파일방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고 이후 수많은 문파들이 합세하여 패천궁만큼이나 커진 단체로 오십여 년 전 정도맹은 패천궁과의 싸움이 끝나면 곧 해체한다고 하였으나 처음의 약속과는 다르게 싸움이 끝난 이후에도 패천궁의 위협이 존재한다는 이유를 들어 해체되지 않고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었다. 정도맹은 세월이 변해가면서 그 규모와 체계가 바뀌었는데 크게 일궁,이전,삼각,사당으로 나뉘었다. 일궁인 명심궁은 궁주의 거처이자 정도맹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곳이었고, 이전은 각 문파들의 어른들과 백도의 명숙들이 속한 장로전과 호법전을 의미했다. 정보를 총괄하는 첨밀각, 신병이기를 연구하고 무인들에게 필요한 무기를 만들어내는 기병각, 맹 내 규율을 관장하는 계도각을 삼각이라 했다. 사당은 정도맹의 실질적인 무력 부대로 청운, 풍백, 명도, 월훈이라 했는데 보통 줄여서 청풍명월이라 하였다. 중앙의 거대하 연무장과 수백 채의 건물, 그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성벽의 둘레만 이십 리요, 상주하는 인원은 적게 잡아도 삼천에 이르렀다. 한시적으로 참여했던 오대세가가 떠난고 거기에 뜻이 맞지 않는다 하여 소림사와 화산파, 최근의 종남파에 이르기까지 몇몇 문파들이 탈맹하였으나 누가 뭐라 해도 정도맹은 패천궁에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 맹 내에서 가장 은밀하고 엄중한 보호를 받는 곳 중 하나인 첨밀각. 일의 특성상 평소에도 바쁘기 그지없지만 갑자기 날아든 전서구와 폭주하기 시작한 정보속에서 첨밀각주 왕호연과 그의 수하들은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특히 새롭게 날아든 정보들이 모두 무림을 뒤흔들 만한 것들인지라 긴장감은 극에 이르렀다. 단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인과관계를 따져보고 또 따져 보아라! 곳곳을 누비며 독려하는 왕호연의 음성이 전에 없이 드높았다. 그만큼 중한 일이리라. 그때였다. 첨밀각이 떠나가라 고함을 치는 사람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바쁜 사람을 오라가라야?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해 팔자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 삼십 중반이란 나이로 개방 역사상 최연소로 방주 위에 오른, 백 년에 한 명이나 나올까 의심스럽다고 극찬을 받는 개방 방주 정소였다. 또 처먹었냐? 멀리서부터 풍기는 술 냄새에 오만사을 찌푸린 왕호연이 코를 막으며 소리쳤다. 말버릇하고는! 내가 그래도 명색이 개방의 방준데 처먹었냐가 뭐냐? 드셨습니까? 해야지. 그렇게 해주랴? 와호연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흐흐.농담한 걸 가지고 삐치지 마라, 우리 사이에. 개방의 방도가 되기 전부터 함께 고아 생활을 해온 그와 왕호연은 목숨을 바꿀 정도로 서로를 아끼는 사이였다. 그것은 그가 방주자는 지위에 오른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는데, 다만 방 내의 원로들이 있거나 대외적인 자리에선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서로에게 예의를 차렸다. 그러나 그런 시선을 조금만 벗어나면 예전 그대로 서로를 대했다. 지금처럼 수가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예외될 것은 아니었는데 그들의 우의를 아는 수하들은 으레 그러려니 했다. 제발 그놈의 술 좀 줄여라. 나야 줄이고 싶지, 그런데 맹에 오랜만에 들러서 그런지 이곳저곳에서 불러대서 말이다.하하하!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은 하지도 마! 네가 나를 알고 내가 너를 아는데. 후~ 이 독한 냄새! 술로 목욕을 했는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향이 장난이 아니었다. 맴새를 감당하지 못한 왕호연이 고개를 절래절레 흔들며 뒷걸음질쳤다. 사내란 자고로 밤을 새워 말술을 먹을 줄 알아야 하는 게야. 쯧쯧, 냄새만 맡고도 취하는 꼴이라니. 시끄러!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네놈과 무슨 말을 하겠냐. 그렇게 태상장로님을 추종하더니만 하필 술 먹는 것을 닮아서는. 흐흐흐, 그게 어때서? 인새의 희로애락이 모두 한 잔 술에 담겨 있느니. 꽤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왕호연을 만나서 그러는지 정소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듯했다. 하나 그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이 터졌다. 왕호연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중했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정소가 건성으로 되물었다. 일? 무슨 일? 피바람이 불게 생겼어. 멀뚱한 표정의 정소, 왕호연의 말은 계속됐다. 아래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삼상치 않다니? 패천궁 놈들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는 거야? 왕호연은 대답 대신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정소는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하하하, 알았어. 이제 그만 마실 테니까 장난하지 말자고. 내가 그런 일을 가지고 장난칠 사람이 아니잖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이 전달됐는지 정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부터? 아직 자세한 것은 몰라. 그렇지만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벌써 산발적인 전투도 있다 하고. 사소한 다툼이야 늘 있던 것이니까 그렇다 치고... 설마 놈들이 직접 움직인 것은 아니겠지? 그가 말한 놈들이란 바로 패천궁을 의미했다. 흑도의 문파들이 규모가 큰 분타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야. 그것도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어. 그렇.... 다면? 그들 모구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오직 패천궁뿐이잖아. 음. 정소의 얼굴에선 이미 취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낯빛이 붉은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것은 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긴장감으로 인해 상기된 것이었다. 지난 오십여 년 동안 늘 평화롭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때로는 심각한 충돌도 있었다. 그러나 패천궁의 본대는 단 한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의미였다. 전면전? 아마도. 왕호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에겐 알렸어? 아직, 이제 알려야지. 뭐,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 알고는 있을 거야. 첨밀각에도 맹주의 눈이 있을 테니까. 맹주의 눈이 아니라 재수없는 말코도사의 눈이겠지. 그거나 저거나. 마무튼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맹주와 말을 섞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린다. 으이구! 말 좀 가려서 해라.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도 눈이 있는데. 어쨋든 빨리 알려야지. 멍청한 것을 떠나서 맹주는 맹주니까. 놈들이 작심하고 시작을 했다면 막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정도맹뿐이잖아.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지. 참. 태상장로께서 황보세가에 가 계신 것은 알지? 오룡지회를 참관하신다고 들었다. 최대한 빨리 소식을 전해. 오대세가 쪽에서도 알아야지. 오대세가의 힘 없인 절대로 못 이겨. 이미 보냈다. 그리고 저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놈들이 특히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는 악양은 제갈새가의 지척이야. 모를 리가 없지. 정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다른 곳도 아닌 제갈세가인데. ----------------- 확실한가? 예. 형님. 곳곳에서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제갈융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네의 말이 틀림없다면 그래야겠지, 저들의 첫 번째 목표는 본 가가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본 가가 어떤 곳입니까? 제갈세가입니다. 놈들도 감히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갈극은 자신만만해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의 제갈세가는 과거 지략에만 뛰어났던 제갈세가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필 아버님깨서 자리를 비우신 때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아무튼 방비는 철저히 해야겠지. 아우는 지금 즉시 진을 발동시키고 식솔들로 하여금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게나. 장기전에 대비해 충분한 식량과 식수를 확보하고 아울러 아버님께서 계신 황보세가로 전서구를 띄워 작금의 상황을 알리도록 하게. 예. 형님. 숙부님들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자네는 식속들을 챙기게나. 아 그리고.... 대답과 함께 몸을 돌리려던 제갈극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넷째와 막내는 돌아왔는가? 사람을 보냈으니 곧 산을 내려올 겁니다. 후~ 그나마 다행이야. 그들이 세가에 남아 있어서. 문의 제갈은과 무의 제갈능.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문무쌍성이라 부르며 존경해 마지않았다. 제갈세가가 나은 두 천재를 떠올리는 제갈융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비무대회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열기가 뜨거웠다. 첫째날을 그냥 보내고 둘째 날부터 대회에 참여한 남궁세가는 계속해서 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악부와 팽동악, 그리고 이어 나온 팽일보까지 격파하자 주변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주점에서 시작되어 비무대회까지 이어진, 바야흐로 남궁세가와 팽가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팽일보와의 대결에서 힘겹게 승리를 거둔 연능천은 결국 팽요선에게 패하고 말았다. 여인의 몸임에도 팽가는 물론이고 오대세가에서도 손꼽히는 후기지수인 그녀에게 지칠 대로 지친 연능천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연능천이 패하자 을지호는 자신이 나서겠다고 방방 뛰는 천도문과 뇌전을 옆에 놓인 술병으로 후려치며 만류하고 태상호법과 얘기를 나눈 대로 곧바로 강유를 내보냈다. 강유는 그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았다. 해남도를 떠나 남궁세가에 오기 전부터도 그는 상당한 실력을 지닌고 있었다. 거기에다 지난 삼 년 동안 태상호법에게서 지독하리만큼 수련을 쌓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쾌검은 물론이고 그동안 깨우치지 못했던 검법 또한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팽요선이 제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에 이어 비무대에 오른 팽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차례난 땅바닥을 기는 망신을 당하고서야 패배를 자인했다. 하나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승천비룡 팽연의마저 패하고 말았다는 데 있었다. 그가 누구던가, 팽가의 자랑이자 하북무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팽가의 장자로 같은 후기지수라 하나 지금껏 출전한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그와 강유의 싸움은 그야말로 숨 막히는 접전이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싸움이 백여 합이나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섬전과도 같은 강유의 검이 그의 허점을 파고들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만한 승리를 얻기 위해 강유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쾌검이란 말 그대로 순간덕으로 전신의 힘을 모아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만큼 막대한 내공이 소모되기 마련이다. 힘겹게 팽연의를 제압한 이후 그에겐 고작 한 줌의 내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팽연의가 꺾이면서 팽가에서 더 이상 나올 상대는 없었다. 사람들의 시전이 그들에게서 떠나 다른 세가로 향했다. 무인으로서 그만한 대결을 보게 되면 자연 피가 들끓게 되는 법, 상대는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와 팽가 쪽에서 비무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비무대에 올랐을때 그토록 뜨거운 열기와 함성으로 뒤덮였던 비무대엔 침묵만이 찾아왔다. 모두 너무나 놀랍고 경악스러워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다. 여, 열혈도! 팽한!! 겨우 정신을 차린 몇몇이 그의 모습을 보며 두려운 듯 부르짖었다. 올해 나이 마흔아홉, 서른네살에 얻은 별호만큼이나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아온 팽한이 무너진 팽가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허, 저 친구가 나설 줄이야.... 이거야 원.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여 한참 동안이나 비무대를 살피던 황보장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흠, 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조금 심한 것 같네. 제갈경도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저곳에서 심기가 편치 않은 말들이 솓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조롱의 뜻이 담긴 말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과 나란히 앉아 있는 팽무쌍이 그런 야유를 못 들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들 그러지 마시지요, 때때로 강한 녀석을 보면 한 수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법입니다. 곽검명만이 그를 두둔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심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말했다. 어차피 비무대회입니다. 뭐, 전통적으로 후기지수들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는 있으나 딱히 규정된 것은 아니라고.... 그렇기는 하네, 지난 대회 때만 해도 삼십이 훌쩍 넘은 현 가주가 참여하기도 했지. 결국 패하기는 했어도. 황보장의 말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황보윤이 얼굴을 붉혔다. 또한 자네 말마따나 세가의 어른들이 참여를 한 적도 있지. 하나 그것은 말 그대로 한 수 가르쳐 주려는 것이었네. 안계를 넓혀주고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려느 의도를 가지고 말이야. 결단코 지금처럼 감정에 치우쳐 나서는 경우는 없었네. 감정에 충실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뭘 그리 걱정을 하십니까? 그저 즐겁게 관전하면 되는 것을. 곽검명의 눈은 벌써부터 흥미로운 빛을 띠며 비무대를 향하고 있었다. -------------------------------- 비무대회 3 몇 번을 더 사용할 수 있겠는가? 비무대에 오른 팽한이 물어싿. 쾌검을 말함이었다. 강유는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함없이 대답했다. 한 번 정도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팽한이 강유에게 다가왔다. 선공을 양보하겠네. 최선을 다해보게. 사람들과 강유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강유와의 거리라야 고작 반 장 정도, 검을 뻗으며 그대로 몸을 관통할 만한 거리였다. 더구나 강유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쾌검을 자랑했다. 그런데도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였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한 불리함을 안고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또 그만큼 강해 보엿기에 강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조심하십시오. 강유가 손을 움직였다. 그의 검은 아직 뽑히지 않은 상태였다. 손의 움직임은 더없이 느렸다. 하나 손이 검의 손잡이에 닿는 순간 그 빠름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침착해야 한다. 쾌검을 구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냉정하고 침착해야 했다. 그래야만이 군더더기없는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강유는 팽한의 눈을 바라보았다. 고요했다. 그는 상대의 눈에서 조금의 감정도, 동요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느끼고 있었다. 팽한의 눈이 자산의 일거수일투족을, 근육의 떨림은 물론이고 세포의 움직임까지도 세세히 관찰하고 있음을.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정신 차리자!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 자체가 패배를 자인하는 꼴이었다. 강유는 마을을 다잡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사이에도 손은 검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눈을 뜬 순간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목표물을 쫓고, 손은 검의 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닿았다는 생각이 들 찰나 검은 검집을 떠났다. 공기를 가르며 나아간 검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순식간에 상대의 가슴팍을 파고 들었다. 불과 한두 치이 거리. 그러나 거기가지였다. 모두 끝났다고, 팽한이 무리한 행동을 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강유 여기 짧았던 승부가 끝났음을 느꼈다. 졌습니다. 강유가 뱉은 짧은 한마디에 팽한의 패배를 직감한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했다. 그러나 곧 합장하듯 손을 모은 팽한의 모습을 볼 수있었다.그 짧은 순간 그는 강유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날린 검을 가슴에 닿기 전 손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신기도 이런 신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팽한을 향해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든다고 투덜거린 사람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팽개친다고 조롱하던 사람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팽한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강유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팽가의 존재감을 조금니나마 회복시키기는 했어도 애당초 그의 목적은 강유와 싸우는 것이 아니었고, 팽가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한가지 이유가 될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시작을 누가 했든,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팽동악은 그에게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그런데 자식의 팔을 잘랐다. 더구나 그 팔은 무기를 잡아야 하는 오른팔. 하루아침에 폐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치미는 분노를 참기 위해 그는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자신이 하지 않아도 조카들이 비무대회에서 남궁세가를 철저하게 짓밟을 것이라 자위하며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반대였다. 결국 욕을 먹더라도, 비웃음을 사더라도 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적은 오직하나, 빚을 갚는 것이었다. 강유 정도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기왕 시작한 것, 이자까지 단단히 쳐서 갚아야 했다. 강유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팽한이 돌연 몸을 돌렸다. 의당 비무대를 떠날 것이가 여기던 사람들이 괴이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고 그들은 또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가주께 도전하겠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비무대회를 주관하는 황보윤, 도전을 받은 남궁민은 물론이고 여러 참관인들과 비무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사상 유례가 없는 상황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삼백 년 가까이 되는 오룡지회, 그리고 비무대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세가의 가주에게 직접 도전을 한 사람은 전무했다. 아니, 도전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무대에 오른 자가 도리어 도전한 경우도 단 한 번이지만 있기는 하였다. 비무대회의 마지막 날 최후의 승자는 때때로 오대세가의 사람이 아닌 외부 문파의 무인들에게도 도전을 허락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의 잔칫집에 와서 재를 뿌릴 수는 없는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오대세가의 미움을 받기 십상인지라 진정한 강자들은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확히 사십오 년 전, 패천궁과의 싸움이 끝나고 몇 년 후에 벌어진 비무대회에서 그해의 승자였던 팽도정이 도전자에게 꺾이는 초유의 불상사가 있어났다.그것만으로 난리가 났는데, 그는 참관인 중 한명이었던 암왕 당천호에게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례를 질타하고 나섰으나 당천호는 그의 도전을 선배에 대한 무례가 아닌 무인으로서의 기질로 인정하며, 도전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들을 일축하고 기꺼이 비무에 응해주었다. 결과는 당연히 암왕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이후 그는 오대세가와 한동안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런 전례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때의 도전자는 오대세가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팽한의 도전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팽가와 남궁세가가 자존심 싸움이 아닌 다시는 회복하기 힘든 감정의 골에 빠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팽 가주! 예, 외숙 어르신. 자신을 부르는 황보장의 음성에 노기가 느껴지자 긴장한 팽무쌍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비록 그가 팽가의 가주하지만 황보장은 그의 부친인 팽만호와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고 또한 모친인 황보영의 오라비였다. 몸가짐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꼭 이렇게 해야 하겠는가? 그, 그게.... 팽무쌍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네의 조카가 비록 팔이 잘렸다고는 하나 따지고 보면 자초한 면도 있지 않았는가? 게다가 서로의 무공을 비교해 가며 패자에겐 격려를, 승자에겐 수련의 결과를 축하해 주는 축제가 되어야 하는 비무대회의 분위기가 이게 뭐란 말인가. 마치 사생결단을 하려는 듯 덤비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마땅치 않았거늘, 이제는 세가의 어른이라는 사람이.... 뒤의 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팽한이 비무대에 오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팽무쌍은 황보장의 준엄한 꾸짖음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당장 그만두라고 하게나. 그것이 좋겠네. 가히 보기가 좋지 않아. 제갈경도 한마디 거들었다. 백도무림의 큰 어른들인 황보장과 제갈경이 거듭 질책하고 전체적인 시선이 곱지 못하자 팽무쌍으로선 가문의 체면이고 뭐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알겠습니다.당장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그가 서둘러 명을 내리기도 전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민이 그를 만류했다. 되었습니다. 기왕 이리된 것, 제가 한수 가르침을 받지요. 그, 그것이... 그녀가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황망한 표정의 팽무쌍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황보장이 한껏 염려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 이보게 남궁가주.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닐세. 남궁세가는 지금껏 그 어떤 도전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알지, 알다마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과 다르지 않은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지금 가주께서 도전을 그만두게 한다면 팽선배가 얼마나 무안해 하겠습니까? 또한 세인들의 눈에는 남궁세가가 도전을 회피했다고 보여 말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싫습니다. 또박또박 대꾸를 하는 남궁민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하지만 황보장이나 다른 참관자들의 눈에는 그것은 단지 그녀의 오기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내 가주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군. 황보장이 다시 한 번 만류했다. 남궁민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저와 남궁세가를 생각해 주시는 어르신의 고마운 마음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비록 실력은 부족하나 승패를 떠나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더 이상 만류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을 마침과 동시에 훌쩍 몸을 던진 남궁민은 가벼운 걸음으로 비무대를 향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연륜이 적어도 남궁민은 남궁세가의 가주였다. 한 세가의 가주가 결정한 것을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이후 벌어질 불상사에 자네의 책임이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게야. 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이라 단정 지으며 노려보는 황보장의 시선에 가뜩이나 죄스런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팽무쌍이 더욱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사정을 봐주라 하겠습니다. 그로선 황보장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고자 던진 말이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황보장의 역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싸늘한 곽검명의 음성이었다. 자네, 지금 장난하나?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한 말뜻이 무슨 의미인가? 마치 사부가 제자를 혼내듯 하는 말투라 몹시 거북했으나 곽검명 또한 부친과 친분이 돈독한 어른이었다. 감히 경거 망동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우의 감정이 격한 상태인지라 혹여 잘못하다간... 그래서? 곽검명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남궁가주가 크게 상할 수도 있으니 손속에 사정을 봐줘서 적당히 싸움을 끝내는 것이 좋겠다 지금 이 말을 하고 싶은 겐가? 그나마 최선 아니겠습니까? 팽무쌍의 음성에도 다소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자넨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군 그래. 자네의 눈에 남궁가주가 어리고 연약한 여인네로 보이겠지. 그것도 맞네. 자네뿐만 아니라 나도, 황보형님도, 또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 테니까. 하나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남궁세가의 가주이네. 뻔히 상대가 안 될 줄 알면서도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가진 가주란 말이네. 지금 사정을 봐주라 말하겠다고 했나? 설마 그것이 그녀를 배려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좋아, 자네의 입장에서야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 있겠지. 그렇지만 말이야, 그것은 자네의 큰 착각이야. 승부를 가리는 비무에서 사정을 봐줘가며 싸운다는 것이야말로 그녀와 남궁세가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또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무시한하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도대체 팽가의 무공이 어느 정도기에 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숨기고 적당히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실로 궁금하군. ......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할 뻔한 것이다. 소생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팽무쌍이 잘못을 시인하고 고개를 숙이자 곽검명도 더 이상 질책하지 않았다. 한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는 말게. 기왕 벌어진 싸움이네. 말릴 수 없다면 즐겨야지. 어쩌면 지금까지의 일을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고 말이야. 물론 후자의 말은 백분지 일의 가능성도 없는 것이었다. 쯧쯧, 아무튼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군. 하지만 자네도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잖은가. 뭐가 말입니까? 틀린 말이 아니잖습니까? 황보잗의 혀 차는 소리에 곽검명이 퉁명스레 되물었다. 애당초 비무대에 오른 사람이 도전하는 일은 없었네. 최소한 자네가 그런 전례를 만들기 전까지는. 흠흠. 기세 좋게 일장 훈계를 늘어놨던 곽검명이 과거의 일을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 무안해하자 곧바로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암왕 어르신께 도전했던 그때의 일을 말이야? 당시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 슬그머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흠! 허허, 언제 적 일을 가지고.... 자자, 과거 얘기는 그만 하고 싸움 구경이나 하시지요. 곽검명의 그런 행동에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약간은 회복되는 듯했다. 하지만 당황과 경악스러움에 착 가라앉아 있다가 남둥민이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끓어오르는 비무대의 분위기와는 비교될 것이 아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요, 재밌는 싸움은 다 끝나고 시시한 승부만 남았잖아요. 이놈아! 그게 어디 내 잘못이더냐? 네놈이 제때에 깨우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제때에 깨우지 않다니요? 세상에나!!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을 잇지 못한다고 했던가. 투랑이 그 꼴이었다. 분명 말하지 않았더냐? 비무대회가 있으니 아침일찍 깨우라고. 적반하작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아침 일찍이라고요? 제가 얼마나 싸움을 좋아하는 놈인지 아시지요? 암, 쨍쨍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놈이지. 제가 얼마나 비무대회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아시지요? 암, 쥐뿔도 없는 실력으로 우승자와 한번 싸워보겠다고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 놈이지. 밤세워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는지 히죽거리며 받는 말의 어감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제가 한 시진이 넘도록 할아버지를 깨웠다는 것도 아시겠네요? 흠, 그랬냐? 혹시나 남아 있을까 하여 주둥이까지 혀로 핥던 단견이 술병이 완전히 빈 것을 확인하고 냅다 던지며 말했다. 그런데도 제가 깨우지 않았다고요? 시끄럽다, 이놈아! 사내놈이 그깐 일로 삐치면 아래 물건이 떨어지는 법이니라. 그리고 중요한 일전도 보았지 않느냐? 중요하긴 개뿔, 뭐가 중요해요, 고작 다 쓰러져 가는 놈하고 체면도 업이 자기 복수에 눈 뒤집힌 인간하고 싸우는 것을 본 것뿐인데. 개, 개뿔? 헐, 이놈이 이제는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몰라요! 눈이 뒤집혔나 보지요. 젠장 꼭 봤어야 하는 건데. 단견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지만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투랑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놈아, 너무 그렇게 날뛰지 말거라. 재밌는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인 거이니라. 시작은 무슨 시작이요, 종 친거지. 쯧쯧, 돌아가는 머리 하고는 숙취로 인해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지그시 짚은 단견이 토라져 고개를 돌리고 있는 투랑의 귀를 붙잡았다. 아, 아파요! 엄살 피우지 말고 무든 말에 대답해 보거라, 저자가 누구냐? 단견이 비무대에 올라 남궁민을 기다리는 팽한을 가리켰다. 누구긴요, 열혈도라고 과분한 칭호를 받은 옹졸한 인간이잖아요. 어허, 그래도! 네가 큰 분란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냐?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거라. 알게 뭐랍니까? 그쯤 해두고 계속 대답해 보거라. 걸어 내려오는 상대는 누구냐? 남궁세가의 가주잖아요. 단견이 장난치는 것이라고 여긴 투랑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느끼지 못하겠느냐? 느끼긴 뭘 느껴요, 둘 다 그냥 개망신당하는 거지. 옹졸한 인간은 옹졸하다고 망신당할 것이고 남궁세가로서도 가주가 패했으니 망신중의 대망신이지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어린애들이 싸우는 데 다 큰 어른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싸움에 끼어드는 것도 모자라 상대편 아이의 엄마, 음, 이건 아니군. 그냥 큰누나라고 하자꾸나. 어쨌든, 가만히 있는 큰누나까지 두들겨 팼다고 하자. 너라면 어쩌겠느냐? 어쩌긴 뭘 어째요? 당장 가서 박살을 내야지. 투랑이 양손을 모아 닭 목을 비트는 시늉을 했다. 자, 어째서 내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는지 이제는 알겠지? ... 투랑이 멍한 눈빛으로 눈동자를 굴리자 당장 호통이 터졌다. 쯧쯧, 성질만 더러웠지. 이놈아, 네가 터진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가주가 패한 남궁세가는 개망신을 당한 것이라고! 그것도 애들 싸움에 갑자기 끼어든 어른 때문에. 그렇다면 남궁세가에서도 의당 어른이 나와서 상대를 하지 않겠느냐!! 아! 그제야 뭔가 감을 잡았는지 투랑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음에 나올 상대는 뻔하지. 말을 끝나기도 전에 투랑의 시선은 을지호를 향해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승부에 있지 않았다. 남궁민이 비록 남궁세가의 가주라는 위치에 있었으나 나이도 어린데다가 지금껏 무림에서 활약한 바도 전혀 없었다. 물론 감추어진 실력이 상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상대는 다름 아닌 팽한이었다. 열혈도라는 별호가 말해 주듯 그는 이미 충분히 검증받은 고수였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뭇 후기지수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린 강유를 간단하게 제압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긴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만 그들은 남궁민이 얼마나 버틸 것이고, 작심하고 달려든 팽한이 어느 정도까지 몰아붙일까 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두 사람은 의외로 태연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태상호법과 을지호였다. 힘들겠지요? 비무대에 오르는 남궁민과 이미 전음을 주고받으며 대충 얘기를 끝낸 을지호가 태상호법에게 물었다. 그럴 게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경험이라는 것은 단시일 내에 극복 할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니.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게다. 어쩌면 지금 저 아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깨고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태상호법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아무렴, 명색이 남궁세가의 가주가 아니더냐. 그들의 단언대로였다. 모든 이들이 남궁민의 절대적인 열세를 예상하고 안쓰러워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황보장이 놀라고 제갈경이 놀랐다. 싸움에 유난히 관심을 기울이던 곽검명과 뒤늦게 비무장에 모습을 드러낸 뒤 팽무쌍을 몰아붙이던 황보권의 입에서도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은연중 남궁민의 선전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그녀의 진실된 실력을 모르고 있던 강유 등은 입을 쩍 벌리고 침착히 상대의 공격에 맞서는 남궁민과 의뭉스런 미소를 짓고 있는 을지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 놀라고 있는 사람은 단연 팽한이었다. 욕먹을 각오까지 하고 나서기는 했어도 막상 남궁민이 도전을 받아들이자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각오까지 하고 나서기는 했어도 막상 남궁민이 도전을 받아들이자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인들의 시선도 가히 좋지 않았고 참관인석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가주인 팽무쌍이 여러 선배 고인들에게 쩔쩔매는 것을 보게 되자 보통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그냥 적당히 예우를 해주다 적당한 선에서 비무를 끝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한없이 가볍게만 보았던 남궁민의 실력은 적당한 선에서 비무를 끝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그는 남궁민의 실력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녀는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크게 낭패 볼 수도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와! 저게 무슨 검법입니까? 자신으로 인해 가주가 망신당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자책에 얼굴을 들지 못하던 천도문이 싸움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자 안색을 활짝 펴며 물었다. 말은 안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민이 사용하는 것은 창궁무애검법도 아니었고 을지호가 선별해서 알려준 몇몇 검법과도 전혀 다른 검법이었기 때문이다. 글쎄, 딱히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닌데. 예? 그럴 리가요. 적수성연이라. 천지의 물도 자그마한 아침 이슬로부터 시작되었음이니. 천도문을 힐끔 쳐다본 을지호가 남궁민의 공격과 발맞추어 그럴듯하게 입을 열었다. 사방 천지가 꽃으로 뒤덮였으니 백화난만이로다. 지금 남궁민이 쓰고 있는 검법은 남궁혜가 늦은 봄, 장백산의 천지를 둘러보다 주위에 피어 있는 기화요초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영감을 얻어 창안한 검법으로 그녀조차 이름을 짖지 못한 검법이었다. 뭐, 꼭 붙이자면 답청검법정도가 적당할라나? 답청이 무엇인가? 봄에 풀잎을 밟으며 산책한다는 뜻. 한마디로 남궁혜가 산책을 하다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과연! 이름까지 멋지군요! 화려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고 유려한 남궁민의 몸놀림에 감탄을 거듭하던 천도문이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아무런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인 을지호는 민망하기가 그지없었다. 험험,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싸움에나 집중해. 잘 지켜보면 배울 게 많을 거다. 전후좌우로 몸을 틀면서 경쾌하게 발을 내디디며 팽한의 허점을 너리는 남궁민의 모습은 한마리 물 찬 제비요, 우아한 백학을 연상시켰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검에서 뿜어져 나가는 기운은 한없이 느린 것 같으면서도 빠르고,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꽤나 힘든 싸움이 되겠구나. 예상치 못한 기세에 연신 뒤로 밀리던 팽한은 상대를 얕보고 너무 안일하게 상대하려 했던 자신의 만용을 자책했다. 그러면서 자세를 가다듬고 반격의 실마리를 찾기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바로 그때였다. 왼쪽 허벅지를 노리며 다가오던 남궁민의 검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위로 솟구쳤다. 깜짝 놀란 팽한이 몸을 틀며 사정거리를 벗어났으나 그 순간 검끝에서 희뿌연 기운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상의를 완전히 반으로 가르며 지나갔다. 만약 반응이 조금만 늦어 뒤로 몸을 누이는 것이 늦었다면 큰 부상을 당했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공격이었다. 음. 아쉬워하는 남궁민을 뒤로하고 멀찌감치 물러난 팽한이 잘려 나풀거리는 상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부욱. 그의 거친 손길에 의해 잘린 상의가 완전히 벗겨져 나갔다. 그러자 단단한 그의 상체가 모습을 그러냈다. 구릿빛에 근육으로 잘 다져진, 그가 중년의 나이라는 것을 잊게 하는 멋진 몸매였다 사람들은 남궁민의 재빠른 공격과 팽한의 멋들어진 근육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팽한의 전신에서 점점 피어오르는 기운과 그로 인해 싸움이 더없이 치열해질 것임을. --------------------------------- 결심이 선 것이냐? 그렇습니다. 황보류는 조금도 주저함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두 주먹을 움켜쥐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결심을 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녕 그렇게 해야만 하겠느냐?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되묻는 음성은 안타까운 마음에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할 수만 있다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천륜입니다. 천륜이라..... 황보격의 입에서 짧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몰랐다면 모를까 안 이상 핏줄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아니,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저 먼벌치에서 한 번 스쳐 지켜봤을 뿐인데도 결코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함깨 알아온 사람처럼, 또한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홀로 남아 무너진 세가를 일으키고자 동분서주했을 모습으 생각하니 미칠 듯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피가 스며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다문 황보류의 두 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이 또 한 번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래, 어찌하겠느냐. 그것이 핏줄의 힘, 천륜인 것을. 그래도 이것 하나는 명심하여라. 황보격이 황보류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때로는 인륜이 천륜보다 단단하고 질길 수 있는 법이다. 네가 황보라는 성을 버리고 핏줄을 따라 남궁이라는 성을 쓴다고 해도 말이다. 어깨에 올려진 손에 힘이 들어가자 황보류는 황보격의 품에 안겼다. 네가 세가를 떠나든, 무슨 일을 하든 간에, 훗날 일가를 이루고 자식을 본다 해도 너는 내 아들이며 그 아이들은 나의 손자다. 네가 부인을 해도,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그것만은 변할 수 없는 것. 누가 뭐라 해도 너는 내 아들이다. .... 한 방울 눈물이 목덜미를 적셨다. 목덜미가 불에 댄 듯 뜨거웠다. 하지만 황보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몸을 통해 전해오는 뜨거운 부정에 몸을 떨 뿐이었다. 어머니는 뭐라 시더냐? 한참 만에 마음을 진정시킨 황보격이 물었다. 많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못난 아들의 건강을 비셨습니다. 그랬더냐? 황보격이 쓴웃음을 보였다. 그녀의 아내인 당여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로 세가 내에서 상당히 신망받고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황보류에겐 더없이 냉랭하고 엄한 어머니였다. 차가워도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수도 없이 충고하고 때로는 화를 내면서까지 그런 태도를 고쳐 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태도가 그녀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그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곳도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랑스런 아내였기에 그냥 덮어두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황보류는 어머니를 두둔하기 위해 말했으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랬다면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한 비밀을 일부러 말했을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더 이상 거론해 봤자 서로의 마음만 다칠 뿐이었다. 언제 찾아갈 생각이냐? 오늘 밤에 갈 생각입니다. 오늘 밤이라... 그래, 알았다. 할아버님께는 내 미리 말씀드리마. 누이에게 가기 전 찾아뵈어라. 명심하겠습니다. 특별히 준비할 것이 있겠냐마는 마음의 준비라도 해야 할 터, 잠시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구나.나도 잠시 쉬어야겠다. 황보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는 황보격은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어버린 모습이었다. 함성과 감탄성에 빠져 있는 비무대회장과는 달리 황보세가의 수많은 전각 중 하나에서 일어난 부자의 침울하다 못해 슬픈 모습이었다. ---------------------------- 마음속으로 꺼림칙한 것을 모두 버리고 본격적인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팽한은 그가 어째서 열혈도라는 별호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용양호시라는 절초를 이용해 끊임없이 이어오던 남궁민의 공세를 가까스로 차단한 그는 이후 태상처럼 장중하고 뇌전처럼 빠른 공격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전신의 내공이 실린 그의 공격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일으키는 기운에 비무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오장여나 뒤로 물러났을까.하지만 남궁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순간적인 깨달음을 통해 만들어진 답청검법은 남궁혜가 평생동안 익힌 무공의 정수가 담긴 것으로 천하에 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변화무쌍한 검법이었다. 막강한 내공을 바탕으로 한 팽한의 공격이 불과 같다면 이를 막는 남궁민은 물과 같았다. 싸움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팽팽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 치의 기울어짐 없이 치열했던 싸움의 승부처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팽한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태상호법의 우려대로 실력은 엇비슷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경험에서 나오는 차이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자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고 여긴 남궁민이 답청검법 대신 검성이 남긴 제왕검법으로 바꿔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팽한에게 조금씩 기울던 승부의 추는 바로 이때부터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부드러움을 위주로 하는 답청검법과는 달리 제왕검법은 극강의 힘을 자랑했다. 남궁민으로선 답청검법보다 한결 위력이 강한 제왕검법으로써 위기를 만회하고 승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시도였으나 완벽하지 못한 검법은 오히려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유능제강이라, 부드러움은 강함을 제압할 수 있고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흘려보내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방지할 수 있었다. 하나 강함과 강함이 부딪치면 어느 한쪽이 부러지거나 꺾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공의 완숙도와 내공에 의해 좌우되었다. 과거금지에서 자신도 모르게 영약을 복용한 남궁민은 그 약효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룡지회에 참여하기 위해 남궁세가를 떠나기 바로 며칠 전, 세가를 대표하는 가주의 무위가 걱정된 태상호법과 을지호는 그냥 묻혀버릴 뻔했던 영약의 기운을 살리기로 마음을 먹었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상당히 위험한 과정이었고 또 약효의 절반도 흡수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나이를 감안했을 때 그만한 내공을 가진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간 정순한 내공을 익힌 팽한에 비하면 약간의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꽈꽝! 남궁만이 일으킨 검기와 팽한의 도기가 호공에서 부딪쳤다. 그러잖아도 초토화되다시피 한 비무대의 한쪽 면이 무너져 내릴 정도로 강력한 두 힘의 둥돌이 주변을 휩쓸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며 몸을 피하기도 전 남궁민의 음성으로 추정되는 기합성이 들리고 한줄기 검기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올랐다. 꽈과광!! 자욱한 먼지가 하늘마저 가릴 기세로 피어올랐다. 잠시 후, 자욱했던 먼지가 걷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비무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궁민과 팽한은 정확히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신형, 연신 흘러내리는 피가 그들이 입은 피해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의 비무대회라면 이쯤에서 멈췄어야 했다. 당사자들이 멈추지 못해도 참관인석에 앉은 노고수들이 제지를 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작게는 개인과크게는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지금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승부의 끝을 보고 싶은 무인들의 어쩔 수 없는 기질 때문인지도 몰랐다. 기회는 한 번뿐! 자신의 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잘 아는 법이었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남궁민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내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한계였지만 상대는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만 익혔어도..... 힘겹게 중심을 잡으며 팽한을 응시하는 남궁민의 눈가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그러나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제왕검법은 막강한 위력만큼이나 익히기가 까다롭고 힘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오성의 성취를 얻었을 뿐이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최후의 힘을 끌어 모았다. 하앗!! 목소리마저 탁하게 변한 그녀의 기합성이 비무대에 울려 퍼지고 전신의 힘이 검봉을 통해 발출되었다. 목표는 당현히 팽한이었다. 대단하다! 진실로 상대의 힘을 인정한 탄성이 터졌다. 동시에 힘껏 치켜 올린 그의 도에서도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누구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둘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나마 멀리 떨어진 사람은 상관이 없었지만 비무대와 인접한 이들은 충돌하기도 전부터 무섭게 날아드는 충격파에 몸을 보호하고자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아악! 크윽! 시차를 두지 않고 터져나오는 비명성! 하지만 처한 상황은 달랐다. 한 명은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아무렇게나 처박혔고 다른 한 사람은 몸을 짓이기는 압력을 버티며 뒷걸음질쳤다. 깨뜨리면 큰일날 것만 같은 적막감이 비무대를 휘감았다. 와아!! 갑자기 팽가의 무인들이 미친 듯이 함성을 질러댔다. 바닥에 처박힌 신형이 아니라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는 사람이 팽한임을 알아본 것이다. 결국 남궁민이 세가의 자존심을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한 최후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져,졌습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압력에 의해 쳐다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찢겨진 옷을 애써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남궁민이 떨리는 음성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가주깨서 양보를 해주신 것 같소. 자식으로 인해 이성을 잃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은 팽한의 목소리는 더없이 허탈했다. 겨, 겸양의 마...말씀...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한 줌의 힘도 남지 않은 남궁민이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것이다. 가주님! 그녀가 쓰러지기 바로 직전 을지호의 신호로 황급히 몸을 날린 강유가 그녀의 신형을 부축했다. 그리곤 천천히 비무대를 내려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강유를 따라 남궁세가로 향했다. 정당한 비무였다지만 가문의 수장이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과연 남궁세가가 어찌 대응할 것인지 모두 궁금해하는 눈치였다.그리고 그들은 곧 남궁세가의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궁귀의 후예 어쩌라고? 자꾸만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을지호는 눈을 부라렸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말도 없었다. 그저 뭔가 간절히 바라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미치겠네. 어찌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를까. 을지호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짰다. 네가 말한 대로 좋은 기회가 아니더냐, 남궁세가를 알릴 아주 좋은 기회. 남궁민의 상세를 살피던 태상호법이 약을 올리듯 미소를 지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괜찮다. 잠시 기절한 것뿐이야. 휴식을 취하면 곧 괜찮아질 게다. 후우~~ 을지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피곤에 젖어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남궁민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녀가 흘린 피로 입가는 얼룩져 있었고 전신에도 크고 작은 부상의 흔적이 보였다. 가녀린 어깨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들썩였다. 젠장! 어차피 이런 결과를 예상한 싸움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하여 말리지 않았건만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남궁민의 어깨를 살짝 두들긴 을지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수없이 많은 눈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줘봐. 예? 난데없는 말에 강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 말이다. 이건 잠시 가지고 있고. 을지호가 풍혼을 건네주며 강유의 검을 가리켰다. 아,예. 검을 달라는 말의 의미는 오직 하나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색이 만면한 강유가 황급히 검을 풀어 건넸다. 기왕 하려면 확실히 하고 오너라. 태상호법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가 그의 귓가에 와 닿았다. 을지호는 대답 대신 발길을 가로막는 의자를 냅다 걷어차며 비무대에 올랐다. 으흐흐흐,나왔구나,나왔어!!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벌떡 몸을 일으킨 투랑의 얼굴은 벌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거봐라, 내 말하지 않았느냐. 당연한 수순이야.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또 하나의 술병을 들고 연신 술을 들이키던 단견도 이때만큼은 흥미가 이는지 을지호의 행보를 예의 주시했다. 흠, 저 친구가 바로 그자로군. 을지호에 대해 미리 언질을 받았던 곽검명의 눈도 그 어느때보다 반짝거렸다. 아는 친구인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데. 황보장이 물었다. 단견아우가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데 아우도 그 실력을 주측할 수 없을 정도라더군요. 허! 그 정도란 말인가? 황보장은 물론이고 흥미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던 황보권, 제갈경 등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단견이라면 천하십대고수 중의 일인아었다. 그런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위를 지녔단 말인가. 비무대에 오르는 사내는 이제 겨우 이십 대 중,후반 정도밖에 안보이는 나이건만. 휘이익! 을지호의 출전을 축하라도 하듯 날아오른 철왕이 비무대를 크게 선회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을지호요.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순간 팿한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하나 가주가 그런 모습으로 당했다면 그 누구라도 감정이 격해질 것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자초한 일이 아니던가. 팽한이네. 일 초식만 막으면 패배를 인정하겠소. 말도 안 되는 선언에 이곳저곳에서 술렁임이 오갔다. 팽한의 부상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으나 누가 보더라도 일 초식을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건방진!! 팽한은 불같이 노했다. 남궁가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해도 미안한 마음은 미안한 마음이고, 단지 그런 이유고 후배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참을 수는 없었다. 막아보시구려. 상대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을지호의 검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헉! 팽한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을지호가 검을 들어 그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한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의 단순한 동작에 팽한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전신을 난도질당하는 느낌. 그저 느낌일 뿐이건만 실제인 것처럼 너무나 생생했다. 크으윽! 팽한의 입에서 고통의 비명성이 터져 나온다. 온몸을 강타하는 기운에 연신 뒷걸음질쳤다. 고통을 참기 위해 악문 이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당장에라도 텨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전신을 짓누르는 기운에 대항하기 위해 최후의 힘까지 끌어 모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몸이 정상이라면 모를까 심각한 내상을 당한 지금 을지호의 막가안 기운을 감당해 낼 여력이 없었다. 대응하면 할수록 고통이 해소되기는 커녕 더욱더 큰 압박에 시달렸다. 무, 무형상인의 경지!! 곽검명이 경악성을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비단 그뿐만 아니라 참관인들 중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 세상에! 어찌 저 나이에 그만한 경지를!! 무형상인이 무엇이던가! 단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상대를 해칠 수 있다는 극고의 경지가 아니던가. 최소한 사 갑자 이상의 내공과 그에 병행하는 깨달음을 지니지 못한 자는 꿈도 꿔보지 못한다는 절대의 경지였다. 현 무림에서도 그만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참관인들 중에서도 황보장이나 곽검명을 비롯하여 고작 제댓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커흑~! 결국 버티지 못한 팽한이 입에서 한 사발도 넘는 피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그리곤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거야 원,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을지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작 기수식이었다. 제왕검법이 어떤 것이지 확실히 보여주려고 했건만 팽한은 제왕검법이 미처 시전되기도 정 기수식을 감당하지도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저, 저것이 진정한 제왕검법? 간신이 정신을 차리고 싸움을 응시하던 남궁민은 자신이 펼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력에 입술을 떨며 물었다. 그렇다, 과거 나를 꽤나 곤란하게 만들었던 검법이었지. 대단한 무공이야. 태상호법은 을지호의 모습에서 과거의 인물을 연상하고 있었다. 자신과 멋들어지게 검을 어울렸던 한 사내를. 사람들은 팽한이 어째서 기절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한 느낌으로 을지호가 뭔가를 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다음 행보를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눈으로 주시했다. 그들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듯 참관인석을 향해 몸을 돌린 을지호가 가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했다. 가주께 도전하겠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평소 을지호의 성격이었다. 그는 팽한이 남궁민에게 했던 그대로를 팽부쌍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팽무쌍에게 향했다. 비록 패하기는 했어도 남궁민은 팽한의 도전에 당당히 응했다. 그러니 당연히 응해야 한다는 의미의 눈빛들이었다. 눈을 감은 팽무쌍은 쉽게 대답을 못했다. 무형상인의 경지라.... 팽무쌍은 잠시 자신과 을지호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패배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으나 그래도 승부라는 것은 모르는 것이었다. 혹여실수라도 해서 패한다면 팽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궁민이 받아들인 도전을 그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젊은 친구가 대담하군, 좋아. 도전을 받아들겠네. 와아!! 팽무쌍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답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남궁민과 팽한의 싸움도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비무였다. 그러나 팽한을 간단히 제압한 을지호와 장차 도왕으로 추대될 가능성이 높은 팽가의 가주 팽무쌍의 대결이야말로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광경이 되리라. 사람들은 팽무쌍이 천천히 비무대에 오르기까지 가히 미친 듯 함성을 질렀다. 대단한 기세였네. 과연 자네만한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 누가 또 있을까? 과찬이외다, 아직 많이 부족한 몸, 가주께서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그것으로 간다한 인사치레는 끝이났다. 이제는 자신들이 속한 세가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일만 남았다. 휴유유융~ 비무대에 난데없는 바람이 불었다. 도를 치켜들며 자세를 가다듬는 팽무쌍을 중심으로 이는 바람 소리였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어째서 사람들이 그를 다음 대 도왕으로 치켜세우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호~ 대단한데, 과연 소문이 헛된 것은 아니었군. 솔직히 상대가 그 정도의 기세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한 을지호는 다소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갑자기 검을 집어 던졌다. 팽무쌍은 물론이고 난데없이 날아온 검을 잡아든 강유, 한껏 기대를 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 눈앞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그저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휘이익! 을지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무려 육십 근이 넘는, 보통 사람이라며 제대로 들지도 못할 철둥을 집어 든 철와이 을지호를 향해 날아왔다. 그리곤 손에 철궁을 떨어뜨리더니 힘차게 비상했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철궁을 잡아 든 을지호가 괴이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곽검명을 보며 웃음 지었다. 무슨 짓인가? 을지호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팽무쌍의 안색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검보다는 아무래도 이놈이 익숙해서 말이지요. 좋을대로 하게. 하지만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을 수도 있음이니. 그는 을지호가 잔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검에 자신이 없는 나머지 거리를 두고 자신을 제압하려 한다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을지호가 조금 전 보여준 무위가 무형상인의 경지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진실된 힘으로 자신을 상대하려 한다는 것을. 선공을 양보하겠네. 팽무쌍은 실력을 떠나 팽가의 가주 된 입장에서 후배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처사라 생각했다. 그러지요. 을지호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순간, 비무대에 일진광풍이 몰아닥쳤다. 조금 전 팽무쌍이 기를 끌어 모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바람이었다. 마치 대지의 모든 기운이 을지호에게 흡수되려는 듯 요동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드드드!! 그렇지 않아도 초토화된 비무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한쪽 귀퉁이는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을지호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이건 도대체가! 팽무쌍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한 것이라곤 그저 시위를 당긴 것뿐이었다. 화살도 없는 빈 시위를. 한데 마치 수백 수천의 화살이 날아와 몸을 관통할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기세에서 밀리면 끝장이다! 상대의 공세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직감한 팽무쌍이 전신의 기운을 끌어 모았다.그 기운은 비스듬히 세운 도를 통해 뿜어져 나가 마치 거대한 막을 형성하듯 몸 주변을 에워쌌다. 그를 향해서 쏘아가던 바람이 감히 접근도하지 못하고 좌우로 흩어졌다. 도, 도막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막이 있을진대 어찌 도막이 없을쏜가. 팽무쌍의 전신을 그물처럼 보호하고 있는 기의 장막은 틀림없는 최고의 고수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도막이었다. 차핫! 기운을 일으켜 몸을 보호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열세였다. 충분히 선공을 양보했다고 생각한 팽무쌍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미처 한 걸음 떼어놓기도 전에 기겁하며 몸을 틀어야 했다. 막 발을 움직이는 순간, 팽팽히 당겨졌던 철궁의 시위가 놓아지고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존재는 느낄 수 있었다. 화살을 대신하고 있는 막강한 기의 힘을. 꽝! 그가 물어난 곳에서 묵직한 충돌음이 들리고 무방비로 노출된 바닥이 흉측하게 파였다. 파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저, 저것은!! 곽검명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만이 아니었다. 정문 위에서 사뭇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던 단견은 물론이고 황보장을 비롯하여 나이 든 노고수들 중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서,설마 이, 이것이.......!! 황당한 눈으로 패인 바닥과 다시금 시위를 당기고 있는 을지호를 번갈아 살피는 팽무쌍의 뇌리에 그의 부친 팽만호가 해주었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과거 천하제일이었던 한 사내와 함께 싸웠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해주었던 말들. 그는 참으로 얼렁뚱땅하게 무림에 출현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이유였어. 그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고, 하나 그의 출현은 무림에 크나큰 홍복이었다. 수호신승이 꺾이며 결론적으로 패천궁에 패한 격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싸우지도 못했을 게다. 화살도 없는 시위를 당기며 뭇 고수들을 쓰러뜨리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어. 언제 어느 순간에 형제도 없는 기의 화살이 날아들지 몰랐으니까. 이름이...... 무영시라고 하셨지. 언제고 거무튀튀한 철궁을 든 상대를 만나면 일단 정중하게 대하여라. 그가 적이든 아군이든. 비록 그가 천하제일인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내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일지니. 궁귀란 말인가? 나이를 보면 그럴 리는 없었다.그러나 최소한 관계가 있을 듯싶었다. 그의 생각은 거기서 끝이 났다. 핑.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발출된 무영시가 또다시 팽무쌍을 노렸다. 명색이 한 세가의 가주였다. 과거의 명성에 짓눌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피하지 않았다. 또 왠지 모를 호승심이 무영시의 힘을 시험하도록 종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찰나의 순간에 지척에 이른 기의 화살을 침착히 막아갔다. 그런데 기의 화살은 마치 생며이라도 있는 것처럼 도를 피해 그의 좌측 허벅지를 노렸다. 기겁을 한 팽무쌍이 다급히 막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보았으리라. 이기어시! 더 이상의 확인은 불필요했다. 무영시를 보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곽검명은 이기어시를 보고 확신했다. 세상천지에 궁귀의 후예가 아니라면 누가 이기어시를, 그것도 무영시로 이기어시를 시전 할 수 있단 말인가. 혀, 형님, 보셨소? 어느새 몸을 날려 참관인석에 올라온 단견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보았네. 틀림없이 소문 형님의 후예인 것 같소. 말해 뭣 하겠나? 저 철궁, 그리고 무영시. 허허, 그러고 보니 비무대를 날던 새는 철면피의 자손인가 보네. 하하, 그러게 말이외다.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그때 철궁만 확인했다면 금방 알았을 텐데. 이미 그들의 뇌리엔 연신 무영시를 날리는 을지호의 모습도, 처음 접할 때와는 달리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엇는지 꽤나 훌륭한 방어를 하는 팽무쌍의 모습도 온데간데 없었다. 그저 을지소문의 후예를 만나게 되었다는 감격에 젖어 어쩔 줄을 몰라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자... 아니, 저 형님이 그분의 후예란 말씀입니까? 얼떨결에 참관인석까지 따라온 투랑이 비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아무렴, 천하에 누가 있어 팽가의 가주를 저리 난처하게 만들겠느냐? 오직 궁귀의 후손만이 그리할 수 있지. 곽검명과 단견 못지않게 감격하고 있는 황보권이 입을 열었다. 무영시... 이 얼마 만에 보는 무공이란 말인가! 그런데 을지호의 무공을 알아본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비무를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는 그 옛날 을지소문의 신위를 직접 본 노고수들도 있었고 또 보지는 못했어도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라면 그들의 부모, 조부모, 선배들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반응은 참관인석에 못지 않았다. 구, 궁귀의 무공이다! 천하제일인의 후손이로구나!! 이곳저곳에서 경악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참관인석이 과거 을지소문에 대한 추억이 담긴 놀라움이라면 다른 이들의 반응은, 이제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궁귀 을지소문의 무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경이로움과 감격이었다. ------------------- 심상치 않다니? 뭐가 말인가? 한가로운 오후, 막 우려낸 차향을 즐기던 천장 진인은 다소 불쾌한 눈으로 왕호연을 응시했다.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를 방해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하나 왕호연은 그의 기분을 생각해 중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패천궁이 움직였습니다. 간단명료한 말이었다. 문제는 천장진인이 그 말의 의미를 금방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패... 천궁? 그들이 움직여? 무슨 이유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왕호연도 일순 말문이 막혔다. 미치겠구나! 명색이 무당파의 장로이자 백도의 구심전인 정도맹 맹주라는 자가 어찌 저리도 멍청할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고 패대기쳤으면 딱 좋겠는데, 그랬다간 제명에 죽지 못할 테고. 젠장!! 묻지 않는가? 패천궁이 움직이다니? 잠깐 동안 수십 가지의 상상을 한 왕호연은 짜증 섞인 음성으로 재차 묻는 천장진인의 말에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지요. 정.도.맹을 무너뜨리고 무림을 접수하겠다는 겁니다. 쨍그렁! 깜짝 놀란 천장진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리자 화자가 춤을 추고 있던 찻잔은 그 형제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박살이 나버렸다. 처, 첨밀각주!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그, 그렇다면 그들이 쳐들어 오기라도 한단 말인다? 그들만이 아니라 전 흑도문파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순간에 싸움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버, 벌써? 허, 이를 어쩌나? 첨밀각주, 이를 어찌하면 좋겠나? 천장진인은 당장에라도 패천궁의 악도들이 들이닥칠까 두려움에 떨었다. 돌겠군.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라는 말이야! 욕설을 퍼붓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은 왕호연이 입을 열었다. 일단... 그러나 그의 말은 뒤에서 들여온 말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일단 회의를 소집하셔야 합니다. 왔군, 재수없는 말코도사.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누구의 것아라는 걸 고개를 돌이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었다. 무당파의 장로이자 맹주인 천장진인의 사제. 그리고 정도맹에서도 장로하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천강진인만이 그토록 재수없는 음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아, 어서 오게나, 사제, 얘기는 들었는가? 패천궁이 쳐들어온다고 하네! 예, 조금 전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천강진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듣긴, 개뿔이! 내 어떤 쥐새낀지 걸리기만 하면 그날로 패대기를 쳐버리고 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첨밀각의 정보가 외부로 나간다고 생각히니 절로 짜증이 밀려들었다. 하나 겉르로야 감정을 그대로 표출할 수 없는 일. 황급히 몸을 돌린 왕호연은 천강진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예를 표했다. 천강진인은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에 앉았다. 우선 맹 내의 주요 인물들과 장로, 호법들을 모시고 대책을 강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겠지, 그리고? 맹주령을 발동하셔서 각 문파에 패천궁의 야욕을 알리고 무인들을 끌어 모아야 합니다. 아, 알았네. 한데 소림에는...... 천장 진인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지 못하자 왕호연이 재빨리 거들었다. 물론 알리셔야 합니다. 소림뿐만 아니라 화산과 종남파에도 알려야 합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천강 진인의 시선을 무시한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또한 오대세가와도 연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로님? 갑작스런 물음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천강진인이 황급히 표정을 고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험험, 그래야겠지. 비록 본 맹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작금의 상황을 이겨내려면 다 함께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니. 아무튼 첨밀각주인 자네가 많이 애를 써야겠네. 이언 상황에 정보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법. 인원이 부족하다면 충분히 보충해 주겠네. 뭘요, 인원은 충분하다 못해 넘침니다. 쥐세끼들까지 난리를 쳐대는 마당이지요. 천강진인의 은밀한 당부에 왕호연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일그러지는 천강진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맹주에게 예를 표하곤 몸을 돌렸다. ------------------------------ 궁을 사용하기로 작정한 을지호가 사용하는 보법은 당연히 출행랑이었고, 출행랑은 팽무쌍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다. 그 보법도 천하제일인의 무공인가? 팽무쌍이 도저히 예측하기 힘든 을지호의 움직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나름대로 빠른 움직임을 자랑하고 있었건만 이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빠름이 아닌가. 가문의 무공이외다. 을지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묘한 반발심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과연 대단한 무공!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 과찬의 말씀이외다. 하나 이제는 끝내야 될 것 같소이다. 빠르게 움직이던 을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느릿느릿 시위를 당겼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무영시라면 말 그대로 형체가 없는 것이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에 화살 하나가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붉다 못해 푸르스름한 불꽃을 뿜어내는, 마치 염화지옥에서나 볼 법한 불의 화살이었다. 불꽃은 점점 번져 철궁과 양손을 뒤덮었고 곧 이어 그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잠시 후, 사람들은 을지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단지 활활타오르는 불꽃만이 눈을 부시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의 중심에 보다 특별한 광채를 뿜어내는 화살하나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괴사도 이런 괴사가 없었다. 팽무쌍의 무공이 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도저히 막아낼 것 같지가 않았다. 궁귀의 무공이 출현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광분했던 사람들은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무공에 두려워하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워험한데. 곽검명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소문 형님도 저런 무공은 쓰지 않았잖아요? 처음 보는 무공 같은데요. 단견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대꾸했다. 아니, 처음 보고 안 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느껴지지 않는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기의 힘을, 이런 힘느 소문이 검을 들었을 때만 보였던 기운이야. 아마도 절대삼검을 시전할 때를 말함이리라. 그의 말인즉슨 지금 들지호의 기운은 소문이 절대삼검을 사용할 때와 비견될 정도로 압도적이란 말이었다. 막아야 되네. 예? 팽 가주의 무공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공격은 백 번을 죽었다 깨나도 막지 못해. 아니, 여기 있는 누구도 막지 못해. 설마, 그 정도인가? 깜짝 놀란 제갈경이 되물었다. 아무래도 무공이라야 겨우 몸을 호신하는 정도뿐인 그는 을지호의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 이상입니다. 어르신. 자칫하다간 끔찍한 참사를 보개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갈경의 시선이 황보장에게 향했다. 직접 상대를 해보지 않는 한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솔직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소이다. 황보장이 더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한마디로 아무리 궁귀의 후예라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몇몇 이들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광 곽검명, 주광 단견이 누구던가? 또 어두운 표정으로 비무대를 응시하는 권왕 황보장이 누구던가? 천하십대고수의 일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감당 못할 무공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을 가장 잘 느끼고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도막을 펼쳐 필사적으로 전신을 보호하며 곧 들이닥칠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팽무쌍이었다. 뜨, 뜨겁다! 을지호에게서 밀려드는 열기는 인간으로서 감당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도막을 펼쳐 침범하는 기운을 완벽히 차단하려 했건만 열기는 그가 펼친 기의 막을 서서히 녹이며 다가들었다. 특히 도저히 눈을 떼게 만들지 못하는 하나의 점. 불의 화살은 지금이라도 단번에 전신을 관통할 것만 같이 느껴졌다. 흠, 과연 팽가의 가주란 말인가? 대단하군. 익히기는 했어도 지금것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무공으로 팽무쌍을 압박하고 있던 을지호는 생각보다 굳건히 버티고 있는 상대를 보며 감탄했다. 비록 화살을 날린 것은 아니었으나 왠만한 사람이라며 지금쯤 무릎을 꿇어야 정상이었다. 그만 끝내야겠군. 위력이 강한 만큼 내공의 소모도 상당했다. 지금 시전하는 무공은 절대삼검을 쓰는 것 못지않게 막강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귓가에 다급한 전음성이 날아들었다. 이녀석! 당장 거두지 못하겠느냐!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누어보지는 못했지만 을지호는 음성의 주인공이 누군지 금방 알수 있었다 왔으면 당장 찾아와 인사를 할 것이지, 쓸데없는 불란이나 일으키고 있으니! 하하하,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리 되었습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전음을 통해 싸움을 중지시키려 한 곽검명은 을지호의 전음성이 들려오자 거의 기절할 지경이엇다. 물론 달리면서도 말은 할 수가 있는 것이니 그가 전음을 보낸다고 해도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을지호가 처한 상황이 어디 보통의 상황이던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세를 펴고 있었다. 그런데 여유있게 전음까지 사용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누가 이겨도 좋을 것 없다. 팽가와 남궁세가와의 사이만 벌어질 뿐이야. 그만 해도 남궁세가의 체면은 충분히 세웠을 게다. 더 이상 놀라 힘이 남아 있지 않은지 곽검명의 음성은 더없이 차분했다. 어차피 끝낼 생각이었습니다. 간단히 대꾸한 을지호는 팽무쌍에게 향하는 공세를 더욱 강화해 곽검명의 당부를 무색케 했다. 그리고 울리는 한줄기 소성. 피잉! 안 돼! 곽검명의 입에서 안타까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 끝장이라 생각했다. 눈을 감는 사람도 있었다. 참관인들의 얼굴도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걱정하는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무대를 휘감고 돌던 열기도 사라졌고 을지호의 전신에서 타올랐던 불꽃도 수그러들었다. 물론 팽무쌍도 멀쩔했다. 비무대를 울린, 모든 이들을 움찔하게 만들었던 날카로운 소리는 바로 철궁의 시위가 끊어지는 소리였다. 이거야 원. 시위가 끊어진 철궁을 휘휘 내저은 을지호가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팽무쌍에게 허리를 숙였다. 철궁이 이리되었으니... 승부는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그러세나.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무슨 생각을 할 겨를 도 없이 팽무쌍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예를 표한 을지호는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비무대를 내려왔다. 곽검명의 말대로 남궁세가의 자존심은 충분히 세웠다는 판단에서였다. 와아!!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록 승부는 나지 않았으나 잠깐 동안 보여주었던 무위에 압도당한 이들이 쏟아내는 찬사였다. 한심하군. 팽무쌍의 입가에 자조의 미소가 떠올랐다. 멀쩡했던 시위가 갑자기 끊어질 까닭이 없었다. 그것이 상대의 배려라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그토록 막강한 무공을 지닌 상대에 대한 알 수 없는 질투심과 체면을 구겼다는 자괴감이 그의 얼굴을 어둡게 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다. 후~~ 자리로 돌아가는 을지호의 뒷모습을 보는 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두 번째 비무대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 큰애야, 정말 이애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용천방의 방주 여강은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연신 앓는 소리를 해댔다. 아버님, 패천령을 받은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가장 앞장서 무리를 이끌고 있던 여회가 간곡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무게가 느껴지는 어조로 대꾸했다. 공격을 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지 않느냐? 단지 정도맹과의 싸움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병력을 집결시키라는 명이엇다. 그게 그겁니다. 어차피 싸움은 벌어진 것이고 힘없는 우리야 단순한 소모품처럼 쓰일 게 뻔하잖습니까? 그러니 기왕이면 선수 쳐서 공을 세우자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대우가 달라지겠지요. 둘째 형님 말이 바로 제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잡수시면 됩니다. 조용히 말이에요. 여강의 두아들, 여몽과 여전은 심약하기만 한 부친이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자꾸만 이상한 소리로 수하들의 사기를 꺾자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냈다. 그러자 곧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놈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아, 아니, 저희는 그냥. 닥쳐랏! 아버님께 당장 용서를 구하지 못하겠느냐! 내가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두 동생을 노려보는 여회의 눈자위가 급격히 붉어졌다. 이럴 때 다른 소리를 했다간 어찌 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그 즉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여강이 여화를 불렀다. 큰애야. 예, 아버님. 안색을 푼 여회가 공손히 대답했다. 두 아우를 용서해 주거라. 다 이 아비가 못나서 그런 것을. 아, 아닙니다. 제가 이 녀석들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습니다. 아니다. 네 아우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래, 어쩌면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옳은 결정일지도 모르는 터. 지금 이 순간부터 네게 모든 것을 일임할 테니 수하들을 잘 이끌도록 해라. 한마디로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곤 방주의 상징인 승천검을 건넸다. 아,아버님! 여회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여강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능력도 없는데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방을 세우신 조부님을 생각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방주를 잘못 만나 욱일승천하던 용천방이 오늘날 이런 모습이지 않느냐? 아닙니다. 아버님. 소자, 아직은 자격이 없습니다. 더구나 아버님이 이토록 정정하신데. 아니다. 물러날 때가 되었어. 원래는 조만간 날을 잡아 정식으로 방주에 앉히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싸움이 금방 끝날 것도 같지 않고 또 그럴듯하게 포장된 것보다는 이렇게 전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부디 이 검으로 본 방의 이름을 사해에 떨쳐주거라. 여회는 거듭해서 사양했으나 여강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여몽과 여전이 허락하기를 청했고 방의 주요 인사들마저 그렇게 하기를 청하자, 그는 결국 승천검을 받아들임으로써 정식으로 용천방의 방주 직을 계승했다.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정도맹 석부 분타를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 천하 만물이 완전히 어둠에 잠긴 밤이었다. 하나 낮에 있었던 비무대회의 뜨거운 열기를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온갖 주점, 객점, 그리고 황보세가 내에서도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남궁세가와 팽가의 치열하면서도 처절한 비무에 대해 얘기꽃을 피웠다. 특히 궁귀의 후예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얘깃거리였다. 노고수들과 각 세가의 가주들이 모인 황보장의 거처 안심거에도 단연 화제가 된 것은 을지호였다. 허허허, 일이 그렇게 된 것이로구나. 그래, 남궁세가에 온 지가 사년째라고? 예, 큰할아버님. 아무튼 잘된 일이야. 남궁세가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허허, 남궁혜 소저가 결국 소문을 따라갔다니.... 그런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설마 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오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무심한 사람 같으니. 한 번쯤 안부라도 전해줄 것이지. 곽검명의 말투엔 을지소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기다렸다는 듯 단견이 호통을 쳤다. 이 녀석아! 그건 그렇고 지난번엔 어째서 모른 척했느냐?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비무대회가 끝난 다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흥, 핑계없는 무덤이 어디 있을까?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시지요. 벌주석 잔을 받으면 고려해 보마. 짐짓 노기 띤 모습을 한 단견이 술병을 기울였다. 흐흐흐, 석 잔이 아니라 백 잔이라도 받지요. 냉큼 잔을 들어 술을 받은 을지호가 단번에 들이키며 대꾸했다. 시끄럽다, 이놈아! 어이구, 느글느글한 태도 하며 그 징글맞은 웃음소리가 어찌 그리 소문 형님과 똑같은지. 고개를 흔드는 단견, 하나 그의 표정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술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황보장이 잔을 채웠다. 핏줄이 어디 가겠는가? 닮은 것은 당연하겠지. 자, 내 잔도 받게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무튼 정말 반갑네. 자네를 보니 그 친구를 다시 보는 것 같아. 예, 어르신. 할아버님께서도 권왕 어르신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허허, 그랬는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말은 그리했어도 황보장은 을지호가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에 몹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러자 황보권이 대뜸 끼어들었다. 혹시 내 얘기는 없었는가? 왠걸요, 벽력권 어르신의 말씀도 많이 하셨지요. 흠흠, 그랬는가? 자자, 어서 잔을 비우게나, 내 잔도 받아야지. 황보권이 반색하며 술병을 들었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그의 행동에 술자리는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옛날 을지소문과 악연이 있었던 당가의 가주 당욱, 그로 인해 누이인 제갈영영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제갈경은 다 같이 웃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노력은 하는 듯했으나 다소 불편한 기색이었다. 웃음이 잦아들쯤 팽무쌍이 남궁민에게 조용히 말했다. 몸은 좀 괜찮으시오? 휴식을 취하고 나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만 하길 천만다행이오. 가주께서 쓰러지실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오.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남궁민이 공손히 사의를 표했다. 아무튼 지금 이 시간부로 팽가와 남궁세가 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모두 불문에 붙이기로 합시다. 따지고 보면 잘못은 그쪽에서 먼저 하지 않았는가? 주점에서 먼저 소란을 피운 것은 팽가의 식솔이라고 들었네만. 을지호와 술잔을 주고받다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황보권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만 하게나. 황보장이 재빨리 말을 막고 나섰으나 황보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비무대회에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신을 한 것은 보기 안 좋았네. 아무리 자식이 귀하다고는 해도 열혈도 그 친구가 나선 것 또한 분명 잘못된 것이야.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안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팽무쌍은 그저 잘못을 인정하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어허, 그만 하라니까. 이미 모두 지난 일이고 팽가와 남궁세가가 화해를 한 마당에 자네가 나서서 또 분란을 일으키려 하는가? 그냥 그렇다는 게지요. 황보장이 역성을 내자 황보권도 더 이상 책망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아무리 잘못된 점이 있기로서니 한 세가의 가주를 그리 몰아붙인다는 것은 가주인 팽무쌍이나 팽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함인지 곽검명이 화제를 바꾸었다. 아참! 그건 그렇고, 아까 그게 무엇이었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무에서 말이다. 무영시나 이기어시는 수도 없이 봐서 알고는 있었으나 불꽃이 이는 수법은 처음 보았다. 예사롭지가 않던데. 곽검명의 눈이 가장 맑게 빛나는 순간은 비무를 할 때나 무공에 대해 논할 때였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그런 곽검명의 성격을 익히 들어 알기에 을지호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화염시라는 겁니다. 화염시? 아버지가 만든 무공입니다. 몸에 쌓인 극양의 힘을 유형화시켜 발출하는 것이지요. 흠, 그럴듯하구나. 그런데 뭔가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기억하기론 소문의 내공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으되 극양의 기운을 띠고 있지는 않았는데? 예, 무위공은 음양의 조화가 완벽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공부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다만 몇 가지 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극양의 힘을 얻게 되었지요. 화염시는 그것을 응용한 겁니다. 몇 가지 무공이라....아, 그렇구나! 이제야 알겠다. 그분의 무공까지 얻은 게로구나. 그는 과거 패천궁의 궁주였던 구양풍과 환야가 소문을 따라 갔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곤 을지호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천하제일이었던 궁귀 을지소문과 그 이전의 천하제일이었던 구양풍의 무공마저 익혔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곽검명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을지호가 은밀히 전음을 날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익혔지요. 허허,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 그렇게 은밀히 말을 전하는가? 이 늙은이는 알면 안 되는 것인가? 권왕이 어떤 고수인데 을지호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할까? 짐짓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던지는 말에 을지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 나도 한번 들어보자꾸나! 단견이 맞장구를 치며 소리쳤다. 말하지 않으면 혼을 내주겠다는 듯 주먹까지 치켜세운 채였다. 그런 단견의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술자리에 난데없이 두 명의 불청객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찰나의 차이를 두고 먼저 들어선 사람은 제갈세가의 장자인 제갈청이었다. 할아버님! 아니, 청아가 아니냐? 왜 그러느냐? 세인들은 제갈은과 제갈능을 일컬어 문무쌍성이라 하며 제갈세가가 나은 천재들이라 칭히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들마저도 제갈청의 능력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니 제갈청의 그 능력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는 잠룡중의 잠룡이었다. 이미 무공 실력만큼은 제갈세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한데 제갈청이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에 허둥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손자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제갈경은 일이 나도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 본가가 위험하다는 전갈입니다! 꽝! 엄청난 충격이 제갈경의 뒷머리를 때렸다. 아니,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와 같은 충격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위험하다니, 어째서? 그러니까.... 제갈청의 음서은 뒤이어 나타난 사내에 의해 가로막혔다. 태상장로님! 예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하게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선 사내는 삼십 중반 정도로 보이는 개방의 제자여싿. 아니, 너는 태안 분타의 낭선이 아니더냐? 그,그렇습니다! 어찌나 다급히 달려왔는지 그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한 모습인게냐? 제갈청도 그렇고 낭선도 그렇고 연이어 달려온 것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크, 큰일났습니다! 네 모습을 보니 말 안 해도 알겠다. 그래, 무슨 일이냐? 그리 헐떡거리지만 말고 어서 말을 하여라 단견의 음성이 절로 높아졌다. 패, 패천궁이 움직였습니다. 전 흑도문파에 패천령이 떨어졌다는 급보입니다! 패, 패천궁이?! 패천령!! 또 한 번의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패천령이 무엇인던가! 패천궁의 궁주가 흑도의 전 문파와 무인들에게 내리는 절대적인 명령, 말하자면 총동원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저것이더냐? 제갈경이 다급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벌써 상당수의 새력들이 집결하고 있고, 특히 악양 분타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소식입니다.! 음. 제갈경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터져나왔다. 패천궁이 움직였다면 그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정도맹의 몇몇 분타와 제갈세가가 일차 목표가 될 것은 자면한 일. 어쩌면 비중으로 보아 제갈세가에 힘을 집중시며 우선적으로 점령하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것은? 다른 말을 없었더냐? 단견의 물음에 가쁜 숨을 다소 진전시킨 낭소가 왕호연으로부터 전해져 온 소식을 찬찬히 전하기 시작했다. 흥에 겨웠던 술자리는 이미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졌다. 왕호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이곳저곳에서 탄식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소림에서 온 공선대사는 얼마나 많은 피를 봐야 하는가 라며 읊조리며 연신 불호를 되뇌였다. 할아버님, 당장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렇게 서두러서 될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전력으 반이 이곳에 와 있습니다. 놈들이 작심하고 본 가를 노린다면 그 인원으로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제갈경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제갈세가는 제가 생각히는 것처럼 그렇게 약하지는 않아. 과거 제갈세가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패천궁에 점령당하며 씻지 못할 수모를 당했다. 이후,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세가 주변에 가히 상상도 못할 많은 절진과 기관매복을 깔아놓았고 치밀한 계획 아래 많은 고수들을 키워냈다. 무엇보다 그는 차기 가주인 제갈융과 문무쌍성 제갈은, 제갈능을 믿고 있었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한 제갈세가는 결코 쉽사리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네 아비와 숙부들을 믿어보거라. 대책을 의논하고 내일 아침에 떠난다 해도 늦지는 않다. 당장에라도 본 가로 달려갈 것만 같은 제갈청을 달랜 제갈경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 같소. 요즘 들어 동태가 심상치 않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소이다. 어찌하면 좋겠소? 맹주께서도 맹주령을 발동하셨을 겁니다. 하니 정도맹을 중심으로 놈들의 야욕을 분쇄해야 할 것입니다. 무당파의 대표로 온 천엽진인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또한 오, 아니 육대세가는 물론이고 곽 문주께서도 삼광문의 힘을 보태주시리라 믿습니다. 그의 말에 곽검명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도맹의 밑으로 들어가란 말이오? 아니, 꼭 그런 것은.... 정곡을 찔린 천엽진인이 할 말을 찾지 못하자 제갈경 또한 다소 냉랭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물론 함깨 싸울 것이오, 과거에도 힘을 합쳐 함께 싸운 적도 있고. 하나 그때도 연합이었지 예속은 아니었소이다. 육대세가를 정동맹 밑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선언이었다. 얼굴을 붉힌 천엽진인은 더 이상 말문을 열지 못했다. 황보윤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우선 이 사실을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만의 싸움은 아니니까요. 그렇습니다. 또한 즉시 각 본가에도 연락을 취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가급적 한곳으로 힘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흩어져 있다가는 각개격파당하기가 십상입니다. 당욱으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갈경이 악위군에게 물었다. 악 장문인은 어찌 생각하시는가? 함께 힘을 모아 싸운다면 저들의 야욕을 헛된 망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허허, 자네의 말을 들으니 당연히 그리될 것으로 느껴지는군. 가히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네. 과찬입니다. 그때였다. 단견이 남궁민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나저나 남궁가주는 어찌할 생각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민에게 모아졌다. 제갈세가의 사정도 급하다지만 무엇보다 위험에 빠진 곳은 패천궁 세력권에 자리하고 있는 남궁세가였다. 어쩌면 벌써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글쎄요, 아직 잘.... 홀로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 질문을 받은 남궁민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낯빛은 이미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일은 가주가 독단으로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곳에 남아 함께 싸워야 할지, 아니면 세가로 돌아가야 할지 식솔들과 우선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궁민을 대신해 대답한 을지호가 그녀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자리를 뜨자는 신호였다. 패천궁이 움직였다면 이미... 단견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남궁민의 시선 때문이었다.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누가 말릴 사이고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을지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엉거주춤 일어난 남궁민 또한 변변한 예를 치리지 못하고 물러났다. 바로 그때 황보장이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 이보게, 남궁가주. 잠시 걸음을 멈춘 남궁민이 뒤를 돌아봤다. 혼란스럽겠지만 잘 부탁하겠네. 예? 아,예. 남궁민은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곤 서둘러 을지호의 뒤를 좇았다. 황보장이 한 말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체. 후~ 내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닌데. 하긴, 정신이 없딕도 하겠지. 그나저나 하필 저들이 떠난 시기에 사건이.... 제아무리 패천궁이라 해도 을지호가 남궁세가에 버티고 있었다면 뭔가 대책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남궁민을 비롯하여 남궁세가의 전 전력이 떠나온 마당에 남궁세가는 미풍에도 흔들리는 촛불과도 같은 신세에 불과했다. 그들 누구도 황급히 자리를 뜨는 을지호와 남궁민을 탓하지 못했다. ---------------------------- 참화 잠룡각의 이층. 남궁민과 을지호가 초대를 받고 안심거로 간 이후 강유와 해웅 등은 새로 인연을 맺은 투랑과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선대의 인연은 후대에까지 미치는 법이다. 곽검명과 을지소문이 의형제를 맺었듯, 투랑도 을지호와 형제의 예를 맺었고 자연적으로 강유등과도 형님 동생하며 지내게 되었다. 아~ 그런 셈이지...요, 또 실력을 키우기 위함이기도 하고... 요. 투랑은 며칠 전만 해도 반말을 해대던 강유에게 갑자기 존대를 쓰는 것이 조금은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하, 넌 참 재밌는 녀석이야. 또한 대단하기도 하고. 투랑이 부끄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 뭘요, 대단해지려면 아직 멀었지요. 저는 말이지요, 두 분 할아버지를 뛰어넘는 고수가 될 겁니다. 명성도 얻고요. 그래서 잃어버린 누이도 찾고 그럴듯한 뭍파도 하나 세울 겁니다. 늘그막에는 제자들도 왕창 받아들일 거고요. 목표가 있는 사람의 눈에선 광채가 난다고 했던가. 강유는 담담히 말하는 투랑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귀찮게 문파는 뭣 하러 따로 세워? 가만히 있더도 삼광문인가 뭔가 하는 문파가 굴러들어 오잖아. 그리고 제자를 받아들이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라고 들었는데, 다 늙어서 제자는 무슨 제자? 노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피식 웃은 투랑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삼광문은 말이지요, 한마디로 미친 문파예요. .... 투랑은 자신의 조부가 문주로 있으며 또한 그가 속해 있는 문파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미친 문파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황당함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행웅은 막 털어 넣던 술도 도로 쏟아냈고, 강유는 의자째 뒤로 넘어질 뻔했다. 천하의 뇌전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투랑은 그들이 반응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삼광문은 말 그대로 어느 한 가지에 미치지 않으면 들어올 수가 없는 문파입니다. 술에, 검에, 도에, 음에... 거기서 며칠 지내다 보면 나까지 돌 것 같다니까요. 너도 무공에 미쳐 있잖아? 뇌전이 대뜸 물었다. 그건 그거구요. 아무튼 나하곤 적성에 맞지 않아요, 난 그저 강한 상대를 찾아다니며 마음껏 겨뤄보고 싶을 뿐입니다. 늙어서 제자를 받는다는 것도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돌아다니면서 상대를 찾는 것이 귀찮고 힘들 것 같아서.... 그러니까 그때는 제자를 키워 싸우겠다? 하하, 이거야 원. 정말 할말이 없다. 강유가 어이없어할 때였다. 어쩌면 네 말대로 원없이 싸울 수도 있겠다. 벌써 오십니까? 해웅이 생각 외로 빨리 돌아온 을지호를 보며 물었다. 을지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초번에게 명했다 모두 불러와. 누구를? 모두 다. 뇌전은 위층에 가서 태상호법님을 모셔오고. 을지호의 음성이 더없이 무거웠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다고 느꼈는지 초번과 뇌전은 토를 달지 않고 즉시 움직였다. 무슨 일이라도.... 강유가 을지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을지호뿐만 아니라 뒤따라온 남궁민 역시 몹시 어두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두 모이면 얘기해 준다는 말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잠시후, 천도문을 비롯한 천양대와 천음대, 그리고 천뢰대의 모든 인원이 도착했다. 끝으로 태상호법이 도착하자 을지호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남궁민에게 눈짓을 했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패천궁이 북상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녀의 말뜻을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도문이 두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북상이라니요? 그렇다면...설마! 질문하는 사이 말의 의미을 알아챘는지 그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전면전이에요. 패천궁과 정도맹, 아니 백도와 흑도라 하는 것이 맞겠군요. 전 무림인들이 뒤엉켜 싸우게 될 테니. 그, 그런 일이! 너무나 갑작스런 말에 모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언제고 일어날 일이라 막연히 생각하고는 있었으나 막상 눈앞에 닥치자 어떤말을 해야 하고 어찌 행동해야 할지 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더냐? 가만히 듣고 있던 태상호법이 을지호에게 물었다. 그렇다는군요, 아주 대대적으로 밀고 올라올 모양입니다 흠, 하긴. 터질 때도 되었지. 꽉 차면 넘치게 마련이니까. 그나저나 대책을 세우느라 난리들 났겠구나? 을지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후후, 보시지 않아도 알 수 있잖습니까?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지요.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소식이 날아들고 정도맹과 연합을 해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말들도 많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태상호법이 시선을 돌려 남궁민을 바라보았다. 그래, 가주는 어쩔 생각이더냐? 아직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들 모인 자리에서 의논해 보려고 합니다. 음, 그것도 좋겠지. 하나 이미 결론은 나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얘기들 나눠보거라. 그리고 너는 잠시 나 좀 보고. 태상호법은 을지호를 따로 불러냈다. 어떤상황까지 이른 것이냐?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도맹에서 전해져 온 소식과 제갈세가에서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패천령인가 뭔가가 흑도문파에 전해졌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패천령. 태상호법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꽤나 대단한 것인가 보군요. 어느 정도 감이 오기는 했어도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듣는데 자신만 모르는 것 같아 일부러 묻지 않았던 것이 바로 패천령이 지닌 의미였다. 한데 담담한 표정으로 묻던 태상호법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로서도 자연 긴장히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하긴 하지. 모든 흑도의 문파들과 무인들에게 명을 내리는 것이니까.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네 말대로 녀석이 패천령까지 동원했다면 붙어도 아주 단단히 붙을 모양이구나. 정도맹에서도 대거 무인들을 모을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그러지 않고는 감히 상대하지 못할 테니. 지난날의 빚을 갚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고, 그나저나 이것은 또 무슨 묘한 인연이더냐? 지난 싸움에선 네 할아비가 끼어들더니 이번엔 네가 엮이게 생겼구나. 휴우~ 그러게 말입니다. 가능하면 피했으면 좋겠는데요. 을지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민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어서 잘 판단하겠지. 그래,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 들어나 볼까? 간단히 대화를 마친 태상호법과 을지호가 한찬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곳에서 다른 세가들과 행동을 함께해야 합니다. 어차피 돌아가는 길은 막혀 있을 것이도, 소수로 움직이다가는 당하기 십상입니다. 뇌전의 말에 초번이 곧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세가에는 곽 노인을 비롯하여 여거 식솔들이 남이 있습니다. 그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길이 되리라는 것엔 이견이 없으나 그래도 뚥고 가야 합니다. 의견은 두 가지였다. 다른 세가와 함께 움직이며 싸우느냐? 아니면 세가로 돌아가 이후의 상황을 살필 것이냐? 천도문과 뇌전 등은 함께 남아 싸울 것을 주장했고, 연능천과 초번은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일단은 세가로 동라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두 가지 의견은 어느 하나가 우위라 할 수 없을 만큼 팽팽했다. 결국 결론은 가주가 내리는 거다. 힘든 결정이지. 자칫 잘못하면 힘겹게 가꾸어놓은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자신의 의견을 묻는 시선에 을지호는 고개를 흔들며 모든 것을 남궁민에게 맡겼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말문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모두 입을 다물고 그녀만을 주시했다. 그렇게 일각이란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남궁민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결론을 듣기 전에 하나만 말해 두마. 그녀가 막 입을 여는 순간 태상호법이 끼어들었다. 말씀하세요. 첫째는 나와 이녀석이 있는 한 남궁세가로 돌아가는 길에 패천궁의 무인들과 만난다 하더라도 별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야. 태상호법은 반무하려는 남궁민에게 손짓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또한 이곳에 남아 싸운다 하더라도 세가의 식솔에겐 아무런 해도 없다라는 것이지. 놈들이 가만 놔두겠습니까? 초번이 물었다. 패천궁이 전력이 빠져나간 문파따위를 어찌할 것이라 보느냐? 패천궁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말거라. 초번은 아차하는 심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느끼고 있었다. 태상호법과 패천궁은 분명 어떤 식으로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태상호법의 말이 끝아기를 기다리던 남궁민이 입을 열었다. 제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과연 본 가가 무사할 것이가? 하나 태상호법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패천궁이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곤 한명도 없는 본가를 공격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다면? 예, 이곳에 남아 싸울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 을지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돌아간다 해도 늦었을 테니까요. 부디 염려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지요. 천도문이 방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제는 남궁세가가 어떤 곳인지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일만 남은 겁니다!하하하!! 누가 저놈 입 좀 막아라, 다 같이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을지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해웅이 몸에 어울리지 않게 번개 같은 몸짓으로 천도문을 덮쳤다. 바로 그때였다. 인연을 맺기는 했어도 아무래도 외인인지라 다소 떨어진 곳에 홀로 앉아 있던 투랑이 남궁민을 불렀다. 가주 누님, 손님 왔는데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신가요? 남궁민의 물음에 사내는 조금은 들뜬, 그러나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보... 아니, 남궁류라고 합니다. 전 가주님과 가모님께서는 그다지 원만한 사이가 아니셨습니다. 가주께서는 세가를 일으키기 위해 애를 쓰시느라 정신이 없으셨고,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가모님 또한 원해서 혼인한 것이 아니고 당가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두 가문의 돈독한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억지로 혼인을 시킨 것이라 하더군요. 두 분의 혼인은 아가씨가 다섯 살 나던 해 더 이상 참지 못한 가모님께서 당가로 돌아가시면서 끝이 났지요, 그런데 당가로 돌아가신 가모님의 뱃속에 또 다른 생명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가주께서 그것을 아신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지요. 가주께서는 그 즉시 아이를 세가로 데려오려 하셨지만 늦어도 너무 늦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가모께서 황보세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은 후였고 태어난 아이도 황보라는 성을 쓰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가주께서는 황보세가의 문 앞에서 몸을 돌리고 마셨습니다. 가모님의 새로운 부군이자 친자식의 부친이 된 인물과 한 잔 술을 나누고 한번도 품어보지 못한 자식이 이름만을 가슴에 담고 말입니다.황보류라는.... 후~ 힘들겠어. 하필이면 이럴 때..... 남궁민이 머물고 있는 방문 앞. 세가를 떠나기 직전 곽 노인에게서 전해 들은 말을 떠올린 을지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잘되겠지.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일단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저를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듣기 싫으니까! 아직도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연시 술잔을 기울이던 남궁민은 슬그머니 걸어 들어오는 을지호를 보며 소리쳤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입도 뻥긋하지 않은 사람에게. 을지호는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혼자 무슨 맛으로 술을 마셔,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그러지말고 나도 한잔 줘라. 남궁민은 별말없이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을지호는 그녀가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곤 잔을 건넸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단숨에 세 병의 술을 비웠다. 세 병의 술을 비우는 동안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힘드냐? 탁자 위에 있던 술이 완전히 바닥난 것을 확인한 을지호가 한참 만에 한마디 던졌다. .....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다. 혼란스러울 것도 없어요. 남궁민이 다소 짜증나느 어투로 대꾸했다. 을지호는 본격적으로 말을 나눌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심호흡을 해싿. 낌세를 눈치 챈 남구인이 재빨리 말문을 막았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아요.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할까? 당장 내일 아침 어디로 떠나야 할지 모른다. 정도맹으로 갈 수도 있고 제갈세가를 돕기 위해 갈 수도 있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 발이 지나고 나면 한가롭게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야. 왜 그런지는 말 안해도 알겠지? 남궁민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어찌하다니요? 되묻는 목소리에 한기가 느껴졌다. 너는 부정할지 몰라도 그 녀석은 틀림없는 남궁세가의 핏줄이야. 네 친동생이기도 하고. 거짓말이에요! 난 동생이 없어요. 세가를 떠나기 전 곽 노인에게 들었다. 곽 노인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말하지만 내갠 동생이 없어요. 아니, 너는 알고 있었어, 동생이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녀석이 찾아왔을 때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테니까. 곽 노인은 네가 모른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아. 너는 분명히 알고 있었어. 어떤 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알고 있었어. 팍! 힘을 견디지 못한 술잔이 조그만 파편이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렀다. 알고 있으면서 왜 부정하는 것이냐? .... 그녀가 동요하고 있었다.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나는 네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애써 찾아온 핏줄을 외면한다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그래요,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떨려오는 가슴을 잠시 진정시키느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해야 하기 때문인지 잔뜩 인사을 찌푸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남궁민의 말문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다시 열렸다.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어요, 핏줄이라고요? 그것까지는 부인할 수 없겠지요. 하지마 피는 남궁세가의 것일지는 몰라도 지금의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황보세가의 사람이니 우리와는 관계가 없어요. 그게 녀석의 잘못은 아니다. 그럼 내 잘못인가요? 한때는 그 여자를 그리워하며 울며불며 날뀌었던 적이 있었지요.그리고 이십 년 가까이 떠나간 여자를 그리워하며, 또 뒤에 태어난 아이를 보고파 하며 남몰래 눈물짓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어요. 이 마음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남편과 어린 자식을 버리고 떠난 그 여자에 대한 이해? 동정심? 아니면 핏줄에 대한 그리움? 남궁민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오로지 증오뿐이에요. 아니, 이제는 증오도 하지 않아요. 그저 경멸할 뿐. 네 어머니를 증오하든 경멸하든 그것은 네가 판단할 일이니까 내가 알 바 아니다. 다만 그 이유로 핏줄을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왜 못해요? 그가 아버지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요? 세가가 어디에 있고, 어떤 건물이 있으며, 식솔들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단 한가지라도 알까요? 조사당에 어느 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지 아는 것이 있을까요? 남궁민은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가 아는 것은 모조리 황보세가의 것이에요. 당장 입고 있는 옷, 살고 있는 집, 먹고 있는 음식, 익히고 있는 무공 또한 황보세가의 것이지요. 그와 남궁세가가 연관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있다면 아버지의 피를 받았다는 것뿐! 그것이면 충분하잖아. .... 넌 도대체 핏줄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고작 먹고, 자고, 입는 것, 따위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새끼 호랑이가 늑대 굴에서 자란다고 해도 늑대가 될 수는 없는 거다. 어느 정도 동화가 되기는 하겠지만 그 본성은 바뀌지 않아. 그 몸속에 흐르는 제왕의 피는 절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네 말대로 녀석이 자란 환경은 황보새가다. 당연히 모든 것들이 황보세가와 관계가 있겠지, 하지만 여기. 을지호가 손을 가슴에 대었다. 이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황보세가의 것이 아닌 바로 남궁세가의 것이야. 너와 같은 피를 지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남궁세가의 피란 말이다. 그 피속에는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닌 본능적인, 수 백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무엇인가가 함께 전해져 온다. 결코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되는 그 무엇인가가. ..... 남궁민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이었다. 더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으마. 다만 스무 해 동안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과 환경을 버리고 단지 핏줄을 찾겠다고 힘겨운 발걸음을 한 녀석의 입장을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봐라. 그동안 네가 살아오면서 겪은 고통과 절망감이 녀석에겐 단 며칠 사이에 찾아왔을 것이야. 아무튼 이곳에 머물게 하겠다. 을지호는 반발하려는 남궁민의 말을 가로막으며 재빠리 말을 이었다. 너무 즉흥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또 네 생각만 하지 마라. 모든 것을 버리고 너를 찾은 녀석의 마음과 동생을 그리워하시던 부친의 마음을 차분히 헤아려 봐. 그래도 정말 아니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 자리에서 일어난 을지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문 앞에서 들려오는 을지호의 말에 남궁민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아까 그 녀석을 볼 때 아무런 느낌도 없든? 녀석 말으 들어보니 몰래 너를 봤을 때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고 하던데. 뭐, 그게 핏줄이라는 것이겠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남궁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손에서 피가 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최악의 밤이야!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와 남궁세가에서 최악의 밤은 황보세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소리없이 다가들고 있었다. ------------------------------- 너... 희들은 ....누구냐? 그런 것이야 죽으면 저절로 알게 되지 않겠소? 곽노인의 가슴을 밟고 있는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도, 도대체 남궁세가와 무슨 원한이 있어서.... 심상치 않은 부상을 당했는지 곽 노인은 점점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물었다. 원한이라? 뭐, 그 딴 것은 없소, 우리야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할 뿐, 아니지, 따지고 보면 큰 원한이 있기는 있는 것같소이다. 옛날 옛적의 일이지만. 보, 본 가엔... 지금 무, 무공을 익힌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알고 있소. 오룡지횐가 뭔가 하는 곳에 간 걸로 알고 있소만. 세,세상에... 무공... 도 모르는 사,사람들을 이리 잔...인하게 해칠 수는 어, 없는 법이다.. 쥐어짜듯 간신히 내뱉는 곽 노인의 말에 사내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법이야 만들면 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들 약시 남궁세가의 식솔이라는 것이외다. 우리의 목적은 남궁세가를 지상에서 깨끗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라오. 사람은 물론이고 기르던 가축, 심지어는 자라고 있는 풀잎도 하나없이 말이오. 알아들이시겠소? 하하하! 네,네놈들이!! 최후의 기력을 짜낸 곽 노인이 사내의 발을 낚아채려고 손을 움직였다. 하니 그러기엔 천천히 가슴을 짓눌러 오는 힘이 너무도 강했다. 손이 사내의 발에 닿기는 했지만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아,아가씨. 곽 노인은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궁민을 보았다. 그리고 을지호와 강유 등을 떠올리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을 끝으로 남궁세가엔 더 이상 숨을 쉬고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었다. 동녘에서 어슴푸레 빛이 보이는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 혀, 형님! 거의 박살이라도 나듯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밤새 술을 마시다 새벽녘에 돌아간 투랑이 옷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허겁지겁 들어섰다. 아침 일찍 대책회의를 하러 집의전으로 간 남궁민을 대신해 세가의 주요 인물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당부하고 있던 을지호는 난데없는 불청객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놈아, 그러다가 문이라도 부서지면 어쩌려고 그래? 네가 물어줄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꼴은 또 그게 뭐냐? 사내놈이 그깟 술 조금 먹었다고 헤매기는, 쯧쯧쯧. 투랑과 함께 밤을 새워 술을 마셨지만 쌩쌩하기만 한 해웅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무슨 일인데 그래? 투랑의 행동에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을지호가 해웅의 입을 막고 물었다. 남궁세가가... 남궁세가? 남궁세가가 뭐? 그, 그러니까.... 투랑이 머뭇거릴 정도의 일이라면 일이 터져도 단단히 터진 것이 분명했다. 을지호는 그의 멱살을 잡아채듯 붙잡으며 물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남궁세가가 어째서? 무너졌답니다. 젠장할! 마치 고자질을 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투랑, 어느새 손을 푼 을지호는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남궁세가가 무너졌다고요. 놈들에게 당했답니다. 누구한테 들었어? 조금 전 태안 분타에서 연락이 왔어요. 누가, 언제? 아니, 지금 어떤 상황이야? 빠르게 질문을 던지는 을지호의 눈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잠결에 듣고 달려와서. 보다 자세한 것은 집의전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가신 두 분 할아버지께 물어보는 것이.... 을지호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당장 움직일 준비를 해둬. 아직 자세한 것은 모르니까 쓸데없이 입놀리지 말고. 강유 등이 뭐라 대답할 땐 이미 그의 모습은 방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지,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보, 본가가 어찌 되었다고요? 벌떡 일어나 묻는 남궁미능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 무너졌다고 하셨나요?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는 물음에 단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민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그대로 자리에 주져앉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남궁세가가 무너지다니? 황보장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믿기지 않지만 그리되었다고 합니다. 조금 전 전해져 온 소식에 따르면... 한없이 어두운 표정의 단견은 슬그머니 남궁민을 쳐다보곤 깊게 숨을 들이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할 말은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황급히 뛰어온 을지호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어찌 된 것입니까? 을지호는 예를 차릴 겨를도 없이 물었다. 소식을 들은 모양이구나. 투랑에게 들었습니다. 도대채 어떤 상황입니까? 태안 분타에서 온 전갈이다. 단견이 그에게 한 장의 서찰을 전해주었다. 을지호가 그것을 읽어가는 사이 단견은 서찰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남궁세가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격은 패천형이 떨어진 직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상황은 최악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황에서 최악이란 말은 절대로 함주로 써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단견은 서슴없이 최악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것은 남궁세가가 처한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그 정도인가? 황보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단견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살... 입니다. 순간, 이곳저곳에서 안타까운 탄식성이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팽무쌍이 분노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 남궁세가의 전력은 오룡지회에 참여하기 위해 여기 계신 남궁 가주를 비롯하여 황보세가를 찾은 이들이 전부인 것으로 압니다. 나고 그리 알고 있네. 허면 지금 현재 남궁세가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그저 집안일을 보고 있는 하인들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더러운 놈들 같으니! 그래도 명색이 무인이라는 놈들이 무공도 모르는 사람들을!! 이게 사실입니까? 잔뜩 구겨진 서찰을 탁자 위에 힘없이 늘어뜨린 을지호가 물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그러나 단견의 입에선 혹시나 하는 그의 마음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절망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런 것 같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개방에서 전해져 온 소식이니. 하지만 개방에서 올라온 정보가 신빙성이 높다고는 해도 남궁세가에 일어난 참사는 지난 새벽, 시간으로 따지자면 고작 서너 시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전서구를 날려도 그렇게 빨리 전해질 수는 없었다. 아,아니,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이!! 그사이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읽은 팽무쌍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왜 그러는가? 깜짝 놀란 제갈경이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단견에게 물었다. 무광 어르신! 이, 여기에 써 있는 말이 진정 사실이란 말입니까? 단견은 긴 한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어허!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답답했는지 재차 묻는 제갈경의 음성이 다소 높아져 있었다. 차마, 차마 입으로 말하기가... 팽무쌍은 천천히 고개를 드는 남궁민을 의식하며 말끝을 흐렸다. 남궁민의 시선이 을지호에게 향했다. 다른 얘기가... 그녀 또한 단견으로부터 들은 내용이라 바야 남궁세가가 무너졌다는 것뿐. 그외의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팽무쌍의 말을 들어보니 뭔가 다른 것이 있는 듯했다. 을지호는 물끄러미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물 자국은 보이지 않았으나 붉게 충혈된 눈, 덜덜 떨리는 입술은 그녀가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말을 해줘야 하는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만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언제가 되어도 알게 될 일, 그는 차라리 자신이 말해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건물은 모조리 불에 탔고 남궁세가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가축이며 초목 등 남은 것이 없다고 하는구나. 아! 남궁민의 몸이 휘청거렸다. 오직... 불에 그슬린 정문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그곳에 사...람들의 시신이... 그만! 그만 하... 컥! 참담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남궁민은 결국 시뻘건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이보게, 가주! 정신 차리게나! 을지호는 기겁하며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접근을 막았다. 그리고 재빨리 그녀의 장심에 기를 불어넣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남궁민이 힘없이 말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세가로 돌아갔어야 하는 것인데... 남궁민의 눈가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구리가 세가로 돌아간다 해도 이미 늦었을 거다. 결코 네 잘못이 아니야. 을지호가 그녀의 어깨를 안으며 달랬으나 남궁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이 제 잘못이에요. 오룡지회에 참석하겠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다면, 오라버니의 말대로 그대로 세가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리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할아범도, 식솔들오 이렇게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남궁민은 그들의 죽음이 오룡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자신이 고집을 부린 것 때문이라며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상황에서 뭐라 말해 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을지호는 그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줄 뿐이었다. 가히 금수만도 못한 놈들입니다. 무공도 모르는 사람들을 해한것도 부끄러운 짓이거늘. 그것도 모자라 죽은 사람들을 욕보이다니!! 분노에 찬 팽무쌍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애당초 그런 놈들이 아니겠습니까? 남궁가주에겐 미안한 말이나 놈들이 야욕을 드러냈다고 했을 때 이미 지금이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쯤 놈들은 남궁세가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지워 버리고 서전을 장식했다고 떠벌려 댈 것입니다. 패천궁은 무인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는 쓰레기 같은 놈들의 집합체일 뿐입니다! 당욱은 더욱 신랄하게 패천궁을 욕했다. 바로 그때였다. 꽝! 여덟 개에 달하는 집의전의 문 중 하나가 박살이나며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패천궁은 그런 곳이 아니다. 깜짝 놀란 이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난데없이 등장한 사람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어,어르신! 을지호는 천천히 걸어오는 태상호법을 보며 기겁했다. 좀 어떠냐?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만, 어찌 아시고? 그나마 다행이구나. 하나 괜찮다고 말은 해도 태상호법은 남궁민이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보았음에도 멍한 표정에, 아니, 그것은 둘째치고 입가에 묻은 피는 분명 울혈을 토해낸 것이었다. 하긴, 충격이 컸을테지. 태상호법의 눈가에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을 쏘아보는 눈초리를 의식하며 고개를 돌렸다. 적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거라. 패천궁은 네놈이 생각하는 것만큼 막돼먹은 곳이 아니다.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당욱이 의자를 박차며 일어났다. 그런 당욱의 반응을 냉소로 무시한 태상호법은 무거운 표정으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을지호에게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너도 패천궁이 그리 만들었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아니, 뭔가 착오가 있을 게다. 이곳에 오기 전 네가 만난 사람이 누군지 잊었단 말이더냐? 그 녀석은 다른 누구보다 남궁세가와 너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해. 을지호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태상호법 자신이 관련된 일이 아니던가. 그는 남궁세가를 멸문시킨 곳이 패천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르신 말씀이 맞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아마도 그들을 추종하는 다른 문파에서 저지른 짓이겠지요. 그렇지만 남궁세가가 너무도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것은 무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패천궁 또한 거기에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싸울 생각이냐? 태상호법의 음성은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남궁세가가 패천궁과 싸우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 호법인 을지호가 그 싸움에 참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태상호법의 질문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아마도요. 음. 을지호의 대답에 태상호법의 입에서 안타가운 탄식성이 터져 나왔다. 하필이면 곤히 자고 있는 맹수를 깨우다니.... 비록 패천궁에 적을 두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별다른 관여를 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인연이라는 것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무심하려 해도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녀석을 한번 만나봐야겠구나. 어찌 된 일인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겠어. 일이 어디에서 틀어진 것인지 모르나 뭔가 모르게 이상해. 느낌이 좋지 않아. 잠시 혼잣말을 한 태상호법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단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전갈이 개방에서 온 것이 맞더냐?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질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었다. 질문보다 질문을 하는 태상호법의 말투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느닷없는 반말에 단견은 물론이고 좌중에 앉아 있던 이들은 저마다 입을 쩍 벌리며 황당해했다. 특히 태살호법을 귀머거리에 벙어리로 소개받은 황보권과 당사자인 단견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단견이 누구던가? 천하에서 강하기가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고수요, 개방에서도 가장 큰 어른이었다. 한데 많이 봐줘야 단견보다 한두살 정도 많은 것 같은 인물이 다짜고짜 반말에 어투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하지 않은가.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태상호법은 태연하기만 했다. 개방에서 온 것이냐고 물었다. 더 이상 참을 단견이 아니었다. 그런데 버럭 화를 내려는 순간 곁에 있던 곽검명이 재빨리 소매를 잡아끌며 전음성을 보냈다. 어제 녀석이 했던 말과 행동을 생각해 보게. 결코 예사 인물이 아니야. 일단 참아. 아닌 게 아니라 을지호가 태상호법의 말이 나왔을 때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 영 수상했다. 제자들을 풀어 뒷조사한다고 농을 하며 넘어가기는 했더도 곽검명의 말대로 뭔가 있는 듯했다. 단견은 치미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대꾸했다. 개방에서 온 것이오. 안의 내용도 확실한 것이겠지? 끝까지 반말이었다. 울화가 목에까지 차 올랐지만 그래도 참았다. 확실하오. 확실해야 할 것이다. 혹여 거짓된 정보라면... 태상호법의 전신에서 묘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내 약속하건대 개방을 피로 씻을 것이다. 실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반발은 태상호법의 기세를 간파하고 어느새 경계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단견이 아니라 곁에 있던 등에서 터져 나왔다.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선배라지만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소이다. 선배 대접을 받고 싶으면 그에 맞는 처신을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또한 이곳은 남궁세가가 아니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실었다. 한마디로 가세가 기운 가문의 어른이랍시고 나서지 말라는 비웃음이었다. 계속 지껄여 보거라. 태상호법이 담담히 대꾸했다. 그의 음성을 들은 을지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더구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이미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이 아닌가. 미치겠구나.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말려야만 했다. 까딱 잘못하다간 엉뚱한 송장을 치우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나서기엔 너무 늦고 말았다는 데 있었다. 또한 아까 보니 패천궁을 두둔하는 말을 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또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리 말한 것인지 해명을 해야 할 것이오. 조금 전과는 말투부터가 달라녀 있었다. 당욱의 말은 상당히 도전적이며 은근한 적의가 섞여 있었다. 해명? 해명이란 말이지. 태상호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난 평생 해명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또한 할 필요도 없었지. 아무튼 묻자꾸나. 네가 당가의 가주냐? 그렇소. 그게 널 살렸다. 태상호법의 말뜻을 헤아릭도 전, 당욱은 자신을 향해 들이닥치는 끔찍한 살기에 기겁하며 몸을 피해야 했다. 순식간에 방 안을 휘감은 살기는 그의 발길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몰아붙였다. 무작정 피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급히 진기를 모아 다급히 손을 휘둘렀으나 태상호법이 일으킨 힘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크헉! 막기는 했어도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 당욱이 피분수를 뿜어내며 날아가 벽에 부딫쳤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망현자실한 표정으로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쓸 뿐이었다. 독왕 당욱이 누구던가, 황보장이나 곽검명에 비해 연배는 낮아도 명색이 강호오왕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절대고수였다. 물론 갑자기 기습을 당한 데다가 장소가 좋지 않았다. 특히 그가 지닌 무공의 특성상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도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당욱 자신이었다. 그는 경악에 찬 눈으로 태상호법을 응시했다. 암왕의 체면을 생각해 주는 것은 이번뿐이다. 무심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던 태상호법이 을지호에게 말했다. 녀석을 만나보고 연락하마. 경솔하게 판단하여 함주로 움직이지 말거라. 그러나 을지호는 쉽게 대답을 못했다.당장 태상호법을 막아선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무슨 뜻이냐? 태상호법이 발길을 가로막는 팽무쌍 등을 응시하며 물었다. 해명을 하셔야지요. 팽무쌍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 눈길에 깃든 적의를 느끼지 못할 태상호법이 아니었다. 해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 그것은 곧 조금 전 당가의 가주께서 하신 말씀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소이까? 그거야 네 마음대로겠지 태상호법의 태도는 여전햇다. 마치 할 테면 해보라는 듯 태연자약했다. 보다 못한 황보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한 가지만 여쭙겠소. 무론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혹여... 패천궁과 관계가 있는 것이오? 태상호법이 을지호를 쳐다봤다. 지금은 안 됩니다, 어르신. 을지호는 슬그머니 고개를 흔들어 부정할 것을 부탁했다. 그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태상호법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대로는 보낼 수 없소. 황보장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의 대답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들이 태상호법의 주변을 에워쌋다. 그래도 간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럴 수는 없을 것이오. 흥, 기습으로 이득을 본 주제에 말이 무척이나 많은 자로군, 말이 필요없습니다. 일단 제압하고 추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도맹의 대표자 격으로 남아 있던 천엽 진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있는 황보장에게 말했다. 그러나 황보장은 그의 의견으 아예 무시했다. 그의 눈은 오직 태상호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집의전에 있는 사람들은 육대세가의 가주들과 아직 돌아가지 않은 명숙들을 포함해 열댓 명에 이르렀다. 그들 모두가 한다하는 고수들, 이름 하나만으로도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한데 그런 고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태상호법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가소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도대체 어디서 이런 여유로움이... 아니, 그보다는 남궁세가와는 어떤 관계란 말인가? 비록 본인의 입으로 패천궁과 관계가 있다고 했지만 현재 그는 남궁세가의 태상호법이란 신분이었다. 함부로 다루다간 낭패를 볼 수가 있었다. 남궁세가와의 관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을지호와 마찰이 있어선 안 됐다. ------------------------------------------------------------ 검왕 비사걸 황보장이 머뭇거리는 사이 사태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태상호법이 정면엔 어느새 기운을 차린 당욱이 작심한 듯 녹피로 만든 장갑을 손에 끼고 있었고, 팽무쌍과 악위군이 그의 좌우를 호위하듯 늘어섰다. 뒤똑은 천엽진인과 황보권, 단견 등이 막고 있었지만 천엽진인을 제외히고는 그다지 내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을지호가 나섰다. 그만들 하시지요, 이분께서는 패천궁과 다소 연관이 있으시기는 하나 지금은 남궁세가의 태상호법이십니다. 남궁세가의 태상호법?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저자가 패천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나와 증조부님, 나아가 당가를 모욕했다는 것이지. 당욱이 코웃음을 치며 을지호의 말을 무시했다. 당가를 모욕했다? 내가 말이냐? 태사호법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네놈이 증조부님의 별호를 들먹이며 나를 욕보이는 순간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미쳤구나! 깜짝 놀란 을지호가 재빨리 만류하려 하였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당욱의 말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긴 태상호법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그리곤 안에 담긴 호박 빛의술을 단숨에 들이킨 후 을지호를 쳐다봤다. 나보고 네놈이라는구나. 한마디로 관여하지 말라는 언질이었다. 을지호는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에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암왕과 직접 손속을 겨룬 것은 아니나 그는 내가 인정해 줄 만한 무인이었다. 한데 그의 핏줄이 앞뒤 분간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라니! 태상호법이 당욱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이 한 줌 모래가 되어 바닥에 흘러내렸다. 암왕이 지금 살아 있다 해도 네놈같이 뻣뻣하게 고개를 들지는 못할 것이다! 격한 노호성과 함께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던 태상호법의 손에서 희뿌연 기운이 솟구쳤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곽검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무, 무형검!! 형태가 없는 검이라는 뜻이다. 하나 희미하긴 해도 태상호법이 일으킨 기운은 분명 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검기를 유형화시킨 검강과 비슷했는데 곽검명은 태상호법이 보여주는 것이 검을 통해 검강을 일으키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고 지고한 경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곽검명이 을지호를 향해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누구냐? 저 노인은!! 근래 들어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경지를 보여주는 노인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경외심이 섞인 음성이었다. 지금은 싸움을 말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모든 이가 덤빈다면 저분을 막을 수는 있겠지요. 단, 얼마의 피해가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집의전 안에는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고수들이 즐비했다. 그들이 막고자 한다면 분명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을지호의 말대로 그 피해는 가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바로 그때 단견으로부터 다급한 전음성이 들려왔다. 형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뭐가 말인가? 저 노인,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마음이 급했던지 곽검명은 다짜고짜 태상호법의 정체를 물었다. 글쎄, 그것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람은 그분밖에는 없지만... 하지만 절대로 그분일 리가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답답하네!! 그러나 답답한 것은 단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떠올린 사람은 분명 과거의 인물, 게다가 아무리 살펴도 태상호법을 그가 떠올린 인물과 동일시하기엔 세월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그들의 답답한 마음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해결되었다. 이쯤에서 이름이나 밝혀라, 그만한 실력이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다! 손을 쓰기 직전인 듯 살짝 주먹을 오므린 당욱이 물었다. 그는 태상호법을 이름을 감추고 남궁세가에 접근한 패천궁의 인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러자 태상호법의 입에서 읊조리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비사걸. 생소한 이름이었다. 비록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잠깐의 충돌로 상대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수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터, 당욱은 그만한 고수라면 패천궁의 인물이라도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비사걸이라는 이름이 어딘지 익숙하기는 해도 기억에는 없었다. 당욱의 눈짓을 받은 팽무쌍과 악위군 등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비사걸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놀라다 못해 하얗게 뜬 곽검명과 단견의 표정을. 그리고 그들 못지않게 놀라고 있는 황보장과 제갈경의 안색을. 거,거, 검왕?! 곽검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단견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얼굴엔 그래도 설마 하는 의혹이 담겨져 있었다. 트, 틀림없습니다. 겉모습은 많이 변한 것 같아도 눈빛만큼은 변할리가 없지요. 분명 검왕 노선배가 맞습니다. 대답하는 단견 역시 곽검명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말은 그리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제갈경의 한마디가 그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검왕 비사걸 그가 한창 명성을 얻을 때 그들은 고작 걸음마나 떼고 있을 때였고, 패천궁의 원로라는 신분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가 벌써 오십여 년 전이었다. 대충 헤아려 봐도 이 갑자가 훌쩍 넘는 나이였다. 그들은 어째서 그가 자신들을 어린애 취급했는지, 또한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암왕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암왕과 함께 활동했던, 아니, 암왕조차도 선배로서 깍듯이 예를 차렸던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곽검명과 단견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그제야 태상호법의 정체를 알게 된 당욱 등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덤벼라! 비사걸이 싸늘하게 외쳤다. 상대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검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검왕 비사걸이었다. 살기를 가득 담은 그의 음성은 듣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위압감이 넘쳤다. 당욱 등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놀라기도 하고 두려움도 느끼고 있었으나 그들 또한 한 세가의 가주요,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는 고수였다. 싸운다면, 무척이나 힘든 싸움이 될 것이고 목숨을 부지하기가 쉽지많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피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황보장과 곽검명이 전음으로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 뿐이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면 되겠지! 냉소를 터뜨린 태상호법이 그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르신. 순간 멈춰지지 않을 것 같던 태상호법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설사 을지호가 만류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라면, 노할 대로 노한 검왕 비사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너무나 연약하고 슬픈 목소리는 검왕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태상호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을지호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고 있는 남궁민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르신.... 실망했느냐? ..... 다른 뜻은 없었다. 다만 우연히 이 녀석을 보게 되었고 따라나서게 된 것이지. 그리고 네 고조부인 검성은 내게 처음으로 패배의 쓴맛을 안긴 구양풍, 검을 뽑지도 못하게 만든 소문이 놈과 함께 나 비사걸이 인정하는 세 명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도운 이유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태상호법은 연이어 밀어닥친 충격에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남궁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도 패천궁이 남궁세가를 그리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너희들과 뜻을 달리하는 문파이기는 하나 패천궁은 그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몰라도 저 녀석을 생각해서라도 패천궁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게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뻔히 알기 때문에. ..... 짧게 한숨을 내쉰 태상호법의 시선이 을지호에게 머물렀다. 다시 말하지만 미리 단정 짓지는 말거라, 내가 일의 전모를 알아보기 전까지는. 제가 직접 알아보겠습니다. 을지호는 태상호법과 남궁민의 의혹에 찬 표정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떠나 남궁세가가 참화를 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 그 일에 패천궁이 개입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그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책임을 피할 수도 없지요.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담하게 죽음을 맞은 이들이 아직도 묻힐 곳을 찾지 못하고 모욕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알아보고 곧 조취를 취하도록 하마. 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야 합니다. 그들의 시신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제가 거둘 겁니다. 또한 그들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고,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똑똑히 보고 올 생각입니다. 받은 대로, 아니, 최소한 열 배는 넘는 이자를 쳐서 돌려줘야 하니까요. 태상호법은 을지호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사라지는 살기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그의 분노가 어찌 터질 것인가를 생각하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비단 태상호법만이 아니라 집의전에 모인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풍혼을 가지고 가십시오. 무슨 의미더냐? 얼떨결에 검을 받아 든 태상호법이 물었다. 별 의미는 없습니다.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일 뿐이지요. 하나 의미가 없다는 말을 믿을 태상호법이 아니었다. 비록 농이었다지만 남궁세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풍혼을 아무에게나 맡긴다고 했었고, 패천궁의 궁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풍혼을 무사히 도려준다는 것은 사실상 선대에 걸친 패천궁과의 인연을 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그는 과거 환야를 사랑했던 만큼 을지호를 사랑했고, 구양풍을 존경하는 만큼 그가 평생을 걸쳐 이룩한 패천궁도 아꼈다. 한데 지금 그 둘 사이에 금이 간 것이다. 남궁세가와 패천궁이 대립하는 것과 을지호와 패천궁이 대립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이나 의미을 따지고 보면 사실상 차원이 달랐다.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다녀오마. 태상호법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했다. 막는다면 모조리 베고 간다. 막는 사람은 없었다. 당욱 등은 이미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언질을 받았고, 뭐라 말을 꺼내려던 천엽진인 또한 곽검명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태상호법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는 집의전을 막 벗어나기 전 고개를 돌려 남궁민을 한번 응시하고선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이럴 수는 없소이다. 태상호법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천엽지인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뭐가 말이오? 단견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비록 곽 장문인이 간곡하게 부탁하기에 참고 있었으나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외다. 저자가 누굽니까? 검왕 비사걸이외다, 검왕 비사걸!! 패천궁에서 저만큼 중요한 인물이 또 누가 있소이까? 절대로 그냥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소! 곽검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흠, 부탁한 기억은 없는 것 같소만. 싸우게 되면 아마 혼자 싸울 것이라고 한 적은 있어도. 험험, 어쨋든 막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럴 필요까지 있겠소? 오래전에 무림을 떠나신 분이오. 그것은 모르는 일이외다! 더구나 남궁세가의 태상호법의 위치였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찌 대처할 것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 아니오? 혹여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패천궁 놈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니, 틀림없이 전해질 것이외다! 흥분할 대로 흥분한 천엽진인은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더 이상 보고 있지 못하겠는지 을지호가 한마디 했다. 함부로 그분을 매도하지 마십시오. 흥, 남궁세가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 패천궁의 원로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곧 패천궁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 아닌가. 어쩐지 이상했어. 남궁세가가 가세를 회복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놈들이 아닌데. 천엽진인은 마치 못 볼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을지호와 남궁민을 쳐다봤다. 어르신의 도움을 받기는 받았소만 조금 전 그분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그것은 나 을지호와 검성 어르신과의 인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여러 어르신께서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분과 패천궁의 인연은 오래전에 끝이 났습니다. 괜한 트집 잡지 마시지요. 을지호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것을 의식했는지 천엽진인은 무척이나 불쾌한 표정이었다. 흥, 어불성설! 그 따위 변명이 통할 것 같은가? 쯧쯧, 소위 명문정파라는 남궁세가가...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을지호의 얼굴에서 싸늘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그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했소? 그렇게 잘난 당신들이 남궁세가에 해준 것이 무엇이오? 그저 나 몰라라 외면만 하지 않았소? 아니! 말이면 다 같은 말인..... 그래서 어쩌라는 거요? 무릎꿇고 사죄라도 드리리까. 아니면 죽은듯이 자빠져 있을까요? 네,네놈이 감히!! 귓구멍 씻고 잘 들으시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오. 확실한 것은 아니나 지금 남궁세가의 본가가 그들에 의해 참화를 입었소, 그런데 무슨 이유로 우리를 그렇게 패천궁과 함께 엮으려는 것이오? 정녕 그것을 원하시오? 좋소이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소! 아니,여기 있는 가주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 남궁세가는 그렇게 못하겠고 나만 패천궁으로 가면 되겠군!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자자, 진정하게나. 보다 못한 황보장이 만류하고 나섰다. 하지만 을지호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나의 첫 번째 목표는 무당파가 될 것이오. 향후 수십 년간 세인들의 뇌리 속에서 무당파라는 이름이 기억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 약속하건데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주겠소! 이...이!! 너무 기가 막히면 말문이 막힌다던가. 천엽진인이 딱 그 꼴이었다. 사실 그는 남궁세가의 일을 걸고 넘어가 차후 정도맹과 육대세가의 연합에서 발언권을 높여보자는 생각에 조금 심하다 하 정도로 남궁세가를 몰아붙인 것이었다. 한데 을지호의 반발은 그가 생각지도 못할 만큼 거셌고, 막상 그리된다면 큰일 날 내용을 포함하고 잇는 것이었다. 어허, 말이 너무 지나치구나! 곽검명이 인상을 찌푸리고 을지호를 꾸짖었다. 천엽진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을지호의 언행도 다소 심한 감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나친 것은 없습니다. 지금껏 힘들게 노력해 온 남궁세가를 이런 식으로 모욕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낫지요. 우리들 중 누가 그것을 원한단 말인가? 천엽진인이 잠시 실수를 한 것뿐이네. 너무 과민하여 받아들이지 말거라. 황보장과 단견은 당장에라도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을지호를 붙잡고 한참 동안이나 달랬다. 그들의 체면을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남궁민마저 소매를 잡고 고개를 흔들자 을지호도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돌아가겠습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남궁민을 부축하며 숙소로 돌아가려 했다. 하나 아직 노기를 풀지 못한 진인이 순순히 보내줄 리 만무했다. 그 따위 말을 내뱉고....! 그러나 그의 고개를 돌려 쏘아보는 을지호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가로막혀 이어지지 못했다. 말로써 천냥 비즐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오히려 만 냥의 빚을 지는 법도 잇소이다. 애써 시선을 천엽진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을지호는 간단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집의전을 빠져나갔다. 후 ~~ 어쩌다가 일이... 을지호와 남궁민이 떠날 집의전엔 끝없는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저도 가겠어요. 안 돼. 을지지호 남궁민의 말을 딱 잘라 거절했다. 어째서죠? 모르지는 않을 텐데, 네가 간다면 이들 모두가 따라나선다. 그리고 이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아무리 조심은 해도 들키게 되어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을지호가 남궁민의 양어깨를 잡았다. 꽤나 힘이 들어갔는지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잔인한 말로 들리겠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다. 큰 싸움을 앞두고 있는 지금, 남궁세가의 가주라면 죽은 이들보다 살아 있는 식솔들을 어찌 보살필 것이가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을지호는 어깨를 잡았던 손을 풀며 나름대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는 식솔들을 가리켰다. 본가의 일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이 녀석들을 이끌어야지. 본가의 참화소식에 식솔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분노에 떨었고 눈물을 흘렸다. 특히 곽 노인과 친분이 깊었던 천뢰대원들의 상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태상호법의 정체가 밝혀졌음에도 식솔들 사이에 별다른 동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젠장, 어쩐지 검왕 정도 되니까 그토록 무지막지하게 강했지 라고 투덜댄 천도문의 반응이 전부였다. 그들 모두 그동안 태상호법이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잘 알고 있는 터, 태상호법이 패천궁과 관계가 있고 없고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 두 분 할아버님께 부탁은 드리겠고 세가의 어르신들께서 어련히 챙겨주시겠냐 마는, 아치피 그분들은 외인이다. 너희들이 가주를 도울 수 있다. 특히 강유, 해웅 둘의 역활이 크다. 명심하겠습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저라도... 뇌전이 말끝을 흐렸다. 자신만이라도 을지호를 수행하고 싶다는 의사 표시였지만 을지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미안한 말이지만, 네 실력으론 나를 따라오지 못해.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까 너무 염려는 하지 마라. 고개를 떨어뜨리는 뇌전의 어깨를 어루만진 그는 남궁민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건넸다. 늘 신중하게 판단하고 결정해.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항상 녀석들과 상의하고.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어제 말한 것은 어찌 할래? 아니다.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대신 내가 오기 전에 결정하지는 마라. 남궁류에 대해 말을 꺼내려던 을지호는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남궁민의 표정을 보고는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 그때까지만 부탁한다. 오라버니. 남궁민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곤 한없이 슬프면서도 처량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부탁해요. 그리고... 조심하세요. 을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어느새 움직였는지 을지호의 모습은 방 안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낭랑한 음성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가자, 철왕. --------------- 주군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예, 모든 것을 군사께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다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겠지. 자칫하다간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음이니. 부설! 군사라 불린 사내는 그의 곁에 차분하게 앉아 있는 제자를 불렀다. 예,사부님. 태상문주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추로담으로 낚시를 하러 가신 것으로 압니다만. 태상문주님을 만나뵐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까? 부설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궁귀와 검왕이 관계된 일이다. 결코 가벼운 일이라 할 수는 없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깜짝 놀라는 부설을 뒤로하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의 이름은 신도, 수백 년간 와신상담하다 마침내 중원제패를 노리고 있는 중천의 군사라는 직함도 지니고 있었다. 가을 이슬이 깃들어 만들어졌다는 추로담. 신도 일행이 뵙고자 하는 태상문주는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낚싯대를 드리우고, 주변에 피어있는 꽃들과 어울려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태상문주님! 쯧쯧, 무슨 일이기에 그리 목소리를 높이느냐. 모야 있는 고기들이 모조리 숨지 않았느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문주님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진 터라... 흠, 문주의 연락?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네녀석이 그리 놀라 뛰어온 것을 보니 꽤나 중요한 전갈인가 보구나? 그, 그렇습니다. 중해도 보통 중한 것이 아닙니다. 들어나 보자꾸나. 태상문주가 그때까지만 해도 추로담을 바라보던 몸을 빙글 돌렷다. 검왕이 나타났습니다. 검왕? 검왕이라면 화산파 문주를 말함이더냐? 패천궁이 북상했다면 화산파의 문주인 검왕 곽화월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되묻는 태상문주의 음성에 다소 짜증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되묻는 태상문주의 음성에 다소 짜증이 묻어 나왔다. 그자가 아니라 전대의 검왕입니다. 패천구의 원로였던 검왕 비사걸이 나타났습니다. 순간 태상문주의 안색이 급변했다. 전대 검왕이라면 오십여 년 전에 사라진 사람이 아니더냐? 그런데 어찌! 문주께서 보내신 소식이니 확실할 겁니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출현했습니다. 어쩌면 검왕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엄청난 고수입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전대의 검왕이라면 사실상 현 무림에서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를 뛰어넘는 고수라니! 누구냐? 궁귀의 후예입니다. 궁, 궁귀라면? 과거 천하제일인의 후손입니다. 음. 태상문주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문제는 그들이 본 문의 행사에 큰 지장을 주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말해 보거라. 더없이 무거운 표저의 신도와 마찬가지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태상문주의 얼굴도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분타가 공격을 받아서 일단 패천령을 발동하기는 했지만 지금쯤이면 패천궁에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지금쯤이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움직인다는 것은 놈들도 야욕이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 태상문주는 패천궁의 야욕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멸문한 것도 아시는지요? 들어 알고 있다. 한데 계획엔 없던 일이 아니었느냐? 조그만 분타도 아니고 남궁세가입니다. 비록 지금은 형편없이 몰락 했지만 백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남궁세가의 그림자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합니다. 패천궁의 분타에 이어 남궁세가를 친 것은 협상의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함이었습니다. 남궁세가가 무너지면서 백도와 흑도 사이에 협상이란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태상문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조그만 빌미라도 만들려고 노력했던 자들이야. 굳이 남궁세가를 멸문시키지 않았더라도 시작된 싸움은 끝장을 보기 전에는 멈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뭐가 문제라는 것이냐? 그런데 하필 궁귀의 후예라는 자와 검왕이 남궁세가와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궁귀의 후예라면 그렇다 쳐도 검왕이 어째서 남궁세가에? 태상문주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한 내막은 소신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검왕이 남궁세가의 참사는 패천궁에서 한 일이 아니라 주장하며 일의 정황을 알아보겠다 나섰고, 궁귀의 후예 또한 직접 남궁세가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우리야 모르고 있었다지만 검왕이 남궁세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패천궁이 모를 리는 없었을 터. 그런데도 남궁세가를 저리 만들었다면 나라도 믿지 못했을 게다. 이리되면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인가! 태상문주의 탄식성에 신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실 남궁세가에서 일어난 일이 저 멀이 황보세가까지 전해지려면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걸려야 했다. 신도는 백도의 수뇌들에게 패천궁의 발호가 알려짐과 동시에 남궁세가의 멸문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야 연속적인 충격으로 앞뒤 가릴 것 없이 패천궁과 싸울 것이니. 그래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개방의 염탐꾼에게 언질을 주는 공작까지 펼치지 않았던가. 하나 따지고 보면 태상문주의 말대로 패천궁의 분타를 공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는지도 몰랐다. 최소한 그랬다면 검왕이 발 벗고 나서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궁귀의 후예라는 자와 검왕의 영향력이라면 벌어진 싸움을 중단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뒤돌아보게는 만들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의 모습이 보다 빨리 드러나게 되겠지. 아니, 어쩌면 이미 추격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저들이라고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나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지금 당장 주요한 것은... 움직이고 있는 두 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어느쪽을 막는 것이 좋을 듯싶으냐? 가능하면 둘 다... 하지만 신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더냐? 둘 중 누구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검왕 쪽이 나을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호랑이보다는 늙은 호랑이가 낫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태상문주님,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여러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속마음을 들킨 신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다 늙어 하릴없는 늙은이들, 이렇게라도 부려먹야야지. 하나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피해가 막심할 듯하구나.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무덤 자리는 이미 파두었습니다. 남은 것은 검왕을 그곳에 누이는 일뿐입니다. 천하의 검왕을 쓰러뜨리는 일이다. 네 말대로 쉽지만은 않을 게다. 하지만 신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태상문주와 문의 어른들이 나선 이상 검왕이 아니라 검왕의 사부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사냥은 어르신들이 하시겠지.그러나 몰이는 내가한다! 신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 을지호와 태상호법이 황보세가를 떠난 이후, 육대세가는 위험에 빠진 본가를 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출발하게 될 제갈세가의 무인들과 더불어 각 문파에서 최정예 고수 오십 명을 선별하여 함께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북상하는 패천궁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안휘성 북서쪽에 위치한 정도맹 태화분타로 육대세가의 힘을 집결시키기로 결정을 했는데 천엽진인은 태화분타를 내어달리는 그들의 요구에 기꺼이 응했다. 어차피 정도맹 혼자선 패천궁을 감당할 수는 없는 처지, 최선이라면 육대세가가 정도맹에 흡수되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이상. 정도맹이 잇는 봉수현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손쉽게 연락을 주고 받을수 있고 언제라도 협조가 가능한 태화 분타에 육대세가의 주력을 머물게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행동 또한 빨라싿. 그들은 제갈세가의 무인들과 오십명의 정예들이 제갈세가로 떠난 다음날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단 육대세가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여러 군소문파의 무인들도 그들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용천방이 정도맹의 석주 분타를 초토화시키면서 시작된 싸움은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패천령과 맹주령이 발동된 지 고작 하루만에 정도맹은 석주 분타에 이어 기강,대창분타가 무너지며 초반 기세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송현 분타의 분타주 진번과 이하 수하들이 분타를 지켜내면서 적의 예봉을 꺾는 데 성공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하지만 곳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어도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졌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직까지 정도맹과 패천궁의 주력이 싸움에 개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북상하는 패천궁과 정도맹의 무인들이 싸우는 시점이 진정한 흑백대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양단풍 대주가 이틀 후면 애주부에 도착한다는 전갈을 보내왓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악양으로 출발한다고 합니다. 강서와 호남의 접경지에 위치한 애주부엔 오십여 년 전 싸움에서 패천둥의 전초기지로 쓰였던 곳이었다. 본성을 떠난 패천궁의 주력도 지금 그곳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렇게나 빨리? 양대주가 꽤나 닦달을 한 모양이군. 그리고 사마유선단주와 혈둥단의 소재가 파악이 되었습니다. 오! 그래, 어디에 잇다던가? 예상대로 혈참마대의 뒤를 쫓아 악양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쯧쯧, 그놈의 천방지축 같은 성격, 내가 차라리 신경을 끊고 말아야지. 안휘명의 말에 조용한 미소로써 대답을 한 온설화가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이곳저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모양입니다. 계속해서 수많은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흠, 벌써부터? 싸움을 시작하라는 명은 내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먼저 공격하여 서로 공을 세우고자 함인 것 같습니다. 뇌학동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안휘명은 그다지 대수로울 것 없다는 태도였다. 뭐, 상관이야 있겠습니까? 어차피 예상 못한 바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싸우되 이겨야 하는 것이지요. 참, 다들 어쩌고들 있나? 정도맹과 육대세가에 대해 묻는 말이었다. 온설화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수많은 무인들이 정도맹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간 신망을 많이 잃은 것으로 아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많은 실기를 했어도 저들로선 본 궁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곳이 정도맹뿐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또한 육대세가에서도 대대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남쪽으로 움직이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정확한 지점은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곧 밝혀지겠지. 어차피 우리와 싸우려고 움직이는 것일 테니. 안휘명의 얼굴에선 시종일관 자신만만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때 가히 좋지 않은 안색으로 서 있던 사중명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궁주님. 무슨 일인가.비혈대주? 저.... 사중명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안휘면의 시선은 온설화를 향했다. 무슨 일인가? 온설화는 사중명과 마찬가지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남궁세가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남궁세가가 무너져? 왜?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는 안휘명, 그는 아직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습격을 받고 초토화당했다고 합니다. 습격? 초토화? 남궁세가가? 예 뭔 소리야!!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안휘명이 사중명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남궁세가가 초토화당하다니! 언제? 이, 이틀 전 새벽이라고... 누구냐? 묻는 안휘명의 목소리는 더없이 싸늘했다. 마치 사중명이 한 일이라도 되는 듯 전신에서 피어난 살기가 그를 압박했다. 그, 그것이 아직.... 일전에 남궁세가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 명령을 내렸다. 또한 이번에 패천령을 내리면서도 주변에 있는 문파들에게 특별히 당부까지 했다. 그런데도 남궁세가가 초토화를 당해? 어느 놈이냐. 노호문이냐? 아,아닙니다. 마영문이냐. 아니면 묵영도문? 두,둘 다 아닙니다. 사중명은 숨 쉴 틈도 없이 밀어닥치는 살기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보다 못한 동방성이 그를 만류했다. 궁주,진정하게나. 비혈대주으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안휘명은 끊어오르는 노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는 재차 물었다. 어느 정도까지냐? 설마, 몰살이냐? 그, 그렇습니다. 사중명은 몰살은 둘째 치고 시신들이 모욕을 당했다는 것까지는 감히 보고할 생각을 못했다. 안휘명의 눈에서 또다시 살기가 피어올랐다. 사흘의 여유를 주겠다. 누구의 짓인지 밝혀내. 조,존명. 알아내거든 즉시 보고해라. 아니, 보고할 필요도 없다, 일단 다 쓸어버려. 수뇌만 잡아서 데리고 오면 돼. 명심하겠습니다. 사중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명을 받았다. 그러나 온설화가 즉시 만류하고 나섰다. 안 됩니다, 궁주님. 안 되다니! 지금은 백도와 전면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비록 궁주님의 명을 어긴 잘못은 있다고 하나, 따지고 보면 남궁세가도 적입니다. 만약 이 시점에서 책임을 물어 벌을 준다면 본 궁을 따르는 여러 문파들의 사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나고 그리 생각하네. 벌은 싸움이 끝난 이후에 내려도 되지 않는가. 동방성이 온설화를 거들고 나섰다. 눈치를 보아하니 주변의 수뇌들 또한 같은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안휘명은 명령을 거둘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남궁세가를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은 남궁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검왕 어르신, 을지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도 했고. 책임을 물으시는 것 자체를 말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뒤로 미루시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 쪽에서 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안휘명을 대신해 동방성이 물었다. 소식을 접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궁주님의 명을 어겨가면서 남궁세가를 칠 문파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를 느꼈는지 안휘명이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제삼의 세력이 꾸민 일일 수 있습니다. 놈들이 을지호와 검와 어르신의 정체를 어찌알고? 그분들 때문이 아니라 백도인들을 자극하기 위함입니다. 여러 분타를 습격해서 우리를 자극시킨 것과 같이. 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대주.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던 안휘면이 사중명을 불렀다. 목소리가 차분해진 것이 냉정함을 되찾은 듯했다. 예, 궁주님. 지금 즉시 남궁세가로 떠나게. 가서 일이 어찌 된 것이지 확실하게 살펴보게. 내 명령을 거부한 것인지, 아니면 군사의 말대로 제삼의 세력이 개입되어 있는 것인지를. 그리고 제삼의 세력이라면 계속 추격을 하여 정체를 밝히고 만약 그것이 나의 명령을 거부한 문파가 한 짓이라면... 안휘명은 고개를 가로젓는 온설화의 당부를 간단히 무시했다. 조금 전에 내린 명령대로 따르게. 수뇌만 살려서 데려오면 돼. 존명! 사중명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명을 받았다. 한번 떨어진 명령을 어찌 막을 것인가. 온설화의 입에서 옅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 후우, 후우. 어깨가 절로 들썩이고 입에선 단내가 났다. 더 이상 무리하면 몸을 상하기 십상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급히 움직이던 을지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황보세가를 떠난 지 어느새 닷세. 평지에선 말을 타고 말이 지치거나 산이 나오면 경공을 사용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린 그는 호북과 호남의 접경지까지 이르게 되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 빌어먹을 놈만 아니라면 산에서 이리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을. 수풀 위에 아무렇게나 몸을 누인 그는 한참 동안이나 산길을 헤메게 만든 약초꾼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놈만이 아니지. 어떻게 만나는 인간들마다 그리 말들이 다른지. 황보세가를 떠난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반나절을 못 견디고 쓰러지는 말도, 점점 피로감이 밀려오는 몸도 아니었다. 문제는 남궁세가까지 가는 최단 길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길을 물어가며 움직였건만 그나마 이러주는 길이 다 다른 것이 아닌가. 한시가 바쁜 그에겐 미칠 노릇이었다.(사실 알려줘도 드가 알아듣지 못한 것도 상당했다.) 만약 제대로 된 길만 알고 있었다면 최소한 하루 반나절은 더 빨리 도착했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제갈세가가 잘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네. 비록 제갈세가가 있는 무창을 들러서 온 것은 아니었으나 근처를 지나면서 을지호는 수없이 많이 몰려드는 무인들을 볼 수 있었다. 제각기 문파도 다르고 들고 있는 무기도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패천령에 의해 움직이는 흑도의 고수들이라는 것이었다. 뭐, 지금 급한 것은 그게 아니니 할 수 없지. 우선 배라도 채워야지 힘들어서 더는 못 가겠다. 철왕아. 지난 며칠 동안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다. 을지호는 허기가 지는지 배를 쓰다듬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철왕을 불렀다. 나도 네놈처럼 날개라도 있어 날아다니면 좋겠다. 철왕이 양 날개를 활짝 펴 어깨로 내려앉자 을지호는 부러운 듯 날개를 몇 번 쓰다듬었다. 가서 토끼라도 몇 마리 잡아오너아. 을지호가 어깨를 들썩이자 주인의 사정을 알았다는 듯 철왕이 천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더도 말고 두 마리만 잡아오너라, 오랜만에 포식이나 하자꾸나. 사냥을 위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철왕을 보며 을지호는 눈앞에서 토끼가 익어가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연신 침을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한 자루의 화살이 철왕을 향해 무섭게 날아 들었다. 어떤 잡놈이! 벌떡 몸을 일으킨 을지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나 그다지 걱정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애당초 그 정도 화살로 인해 사냥이 지연되기 때문이었다. 성질상 절대 그냥 넘어갈 철왕이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철왕은 자신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드는 화살을 날개로 후려쳐 막아냈다. 그리곤 화살의 주인을 찾아 하강하기 시작했다. 철왕의 목표가 되는 사람은 을지호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명의 청년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모양의 적색 갑옷을 상체에 걸치고 보기만 해도 질릴 거대한 철궁을 들고 있었다. 하하하! 제법 깐깐한 녀석인걸.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덤벼드는데. 네가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화살을 쳐낸 철왕이 급격히 하강하며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풍간은 얼궁을 붉히고 있는 오량을 놀려댔다. 이거야 원, 창피해서... 그러니까 평소에 제대로 수련을 하라고 했잖아.이제 어떻게 할래? 어찌하긴 뭘 어찌합니까? 나 잡아라 하고 덤비는 놈 냉큼 잡아야지. 대답을 함과 동시에 화살을 잰 오량이 날개를 접고 달려드는 철왕을 겨냥했다. 하하, 이번에도 실패하면 단주님께 일러서 단단히 망신 줄 테니까 그리 알아. 시끄러워요! 내 저놈을! 핑! 시위를 떠난 화살이 철왕을 향해 날아갔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빠름이었다. 한데 이번에도 오량의 예상은 빗나갔다. 철왕이 갑자기 날개를 펴 방향을 바꾸며 피한 것이다. 허! 세상에!! 풍간이 입을 쩍 벌리며 놀랄 때 화가 날 대로 난 오량은 이를 악물고 재차 화살을 날렸다. 한발, 두발, 세발. 연거푸 세 발의 화살이 철왕을 향해 날아갔다. 철왕은 그때마다 몸을 틀고 날개로 화살을 쳐냈다. 그런데 화살에 실린 힘이 만만치 않은 것인지 날개로 화살을 쳐내는 것이 영 불안했다. 보다 못한 을지호가 그들을 불렀다. 어이, 이봐. 누, 누구냐! 바로 옆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려오자 기겁을 한 풍간이 소리쳤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보면 모르쇼. 사냥하고 있지 않소? 오량이 불쾌한 눈으로 대꾸했다. 주인이 있는 짐승을 사냥하는 법도 있나? 순간 풍간과 오량의 얼굴에서 아차 하는 빛이 지나갔다.하나 그도 잠시, 오량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을 흔들었다. 당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어찌 믿으라는 말이오? 그건 금방 알게 돼. 을지호가 어느새 접근한 철왕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을지호에게 시선을 빼앗겨 철왕이 접근하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오량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나타난 철왕을 보곤 기겁했다 그는 화살을 잴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철궁을 휘두를 뿐이었다. 허나 지상에서 그는 철왕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으,으악! 오량은 머리에 극렬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를 돕기 위해 풍간 화살을 재었으나 미친 듯이 움직이는 오량과 철왕이 한데 엉켜 있어서 차마 쏘지 못하고 있었다. 난데 없는 파공성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직감적으로 철왕의 위기를 느낀 을지호가 어깨에 매고 있던 철궁을 집어 던졌다. 팅! 철왕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날아들던 화살이 철궁에 부딪쳐 땅에 떨어졌다. 촉에서 대까지 온통 핏빛 일색인 화살이었다. 제법이군요. 낭랑한 목소리였다. 을지호의 시선이 그 음성의 주인을 찾아 숲 쪽으로 돌아갔다. 숲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여인, 풍간 등과 마찬가지로 적색 갑옷을 입고 뒤쪽으로 질끈 동여맨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었는데 나이는 이십 대 초반 정도에 눈에 확 띄는 대단한 미모는 아니어도 어딘가 모르게 매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다,단주! 풍간과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오량이 재빨리 뛰어가며 반색했다. 자알들 한다. 사냥해 오라고 보냈더니 망신이나 당하고있고. 여인은 자신보다 서너 살이나 많을 것 같은 풍간에게 대뜸 눈을 흘기며 호통을 쳤다. 단주? 흠, 어린 나이에 대단하군. 하긴, 제법 괜찮은 실력을 지닌 것 같았어. 을지호는 철왕을 향해 날린 화살로 그녀의 실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오래 머물다간 괜한 시비에 휘말릴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풍간 등을 혼내고 있을 때 재빨리 자리를 뜨려고 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대단하더군요, 당신이나 당신이 기르고 있는 새나. 단주라 불리는 여인이 땅에 떨어진 철궁을 회수하는 을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대단할 것 까지야. 당신도 궁을 쓰는 모양이군요. 존대성명이 어떻게 되지요? 무명소졸이오. 을지호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자 풍간과 오량이 쌍심지를 켜고 나섰다. 네놈이 감히! 죽고 싶은 게...흡! 여인의 시선의 받은 오량이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쓰윽 째려보는 것만으로 그들의 행동을 막은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사마유선이라고 해요. ---------------------------------------- 2부 3권 종 비혈대 ..... 을지호는 다짜고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사마유선을 뭐, 이런 여자가 있냐?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리 무림에 적을 두고 있고 여염집 아낙들과 비교해 그다지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지만 사내에게, 그것도 평소 안면도 없는 난생처음 대하는 이에게 대뜸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웬만한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이름을 밝혔음에도 을지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마유선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사마유선이라고요! 재차 이름을 밝혔다. 젠장, 어쩌라는 거야! 을지호는 그녀의 의도를 몰라 뭐라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멀뚱멀뚱 그녀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챈 사마유선이 약간은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대가 이름을 밝혔으면 자신도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닌가요? 아하, 난 또 뭐라고, 통성명을 하자는 것이었군. 그제야 사마유선의 말뜻을 알아들은 을지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림인이 낯선 상대에게 이름을 밝히는 것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니, 생각해 볼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사마유선의 당돌한 태도에 잠시 당황한 것이었다. 을지호요. 그는 자신의 실수를 겸연쩍어하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을지...호. 이름을 따라 되뇌던 사마유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좋은 이름이군요. 아무튼 반가워요. 그녀가 보기만 해도 친근감이 있는 표정으로 환히 웃었다. 왼쪽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려지는 것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쁘기만 한 을지호는 더 이상 다른 일과 사람들에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미 배를 채우기도 힘든 상황인 이상 서둘러 길을 떠날 생각뿐이었다. 특별히 볼일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소. 그는 사마유선의 의견은 더 이상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재빨리 말을 하곤 몸을 돌렸다. 물론 그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바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어느새 앞을 가로막은 사마유선이 한 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살짝 접근을 했을 뿐이었는데 향긋한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평범한 사내라면 당황하거나 안색에 변화가 있었겠지만 을지호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저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알면 되었소, 그러니 비켜주시구려. 무슨 일로 그리 바쁜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갈수록 가관이었다. 초면에 대뜸 통성명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개인적인 일에까지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가. 그는 사마유선이 어떤 꿍꿀이를 가지고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적으로 말투가 차가워졌다. 당신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그래도 사마유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꽤나 지친 드한 모습인데 그렇게까지 서둘러야 하는 일인가요? 촌각을 다투지 않는 일이라면 잠시 머물다 가시지요. 때마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어요. 식사는 아직... 흠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끼어들던 풍간은 곧바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가 뒤쪽으로 슬쩍 치며 올린 주먹을 본 까닭이었다. 특별히 준비한 것은 없어도 간단한 요기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식사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굳이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호의만 감사하게 받겠소. 흠. 툼명스런 대답에 사마유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에 지금껏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화를 지켜보던 풍간과 오량은 서로의 시선을 부딪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믿어지냐, 지금의 상황이? 풍간의 전음에 오량은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보지 않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걸요.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군요. 내가 단주를 모신 지 벌써 사 년, 우리 단주가 사내에게 저렇듯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난 통성명을 할 때부터 저놈이 언제 땅바닥을 구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가다간 오히려 단주가 구를 기세군요. 이거야 원. 어쨌든 단주의 성격상 이리 끝날 거 같지는 않다. 뭔가 사단이 나도.... 그러나 둘의 대화는 거듭되는 사마유선의 질문에 끊기고 말았다. 남쪽으로 가시나요? 무엇이 그리 궁금한 것이오? 분명 알 필요 없다고 했소,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고 당신들은 당신들이 하던 일이나 계속하면 되는 것이오. 을지호는 짜증이 극에 이른 표정으로 속사포같이 쏘아대고는 몸을 홱 돌렸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사마유선이 그의 수하들이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을지호 또한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평소와는 상당히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그라면 지금까지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몸을 돌렸을 것이고 당연히 짜증을 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벗어나기는 커녕 한참동안 말을 섞고 있었다. 만약 강유 등이 그와 함께 있었다면 그들 또한 사마유선을 바라보는 풍간 등의 반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몸을 돌린 을지호는 그녀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벌리며 사라져 갔다.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사마유선. 그것도 잠시, 아쉬움은 곧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축 늘어뜨리고 있던 활을 들어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여기까지였군. 쯧쯧쯧. 풍간과 오량은 결국 이리될 줄 알았다는 듯 힘없이 꼬꾸라질 을지호의 모습을 상상하며 혀를 찼다. 핑!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붉은빛의 화살은 가히 상상하기도 힘든 속도로 을지호를 추격했다.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난데없는 공격에 화가치민 을지호가 몸을 홱 돌렸다. 화살은 어느새 코앞까지 이르고 있었다. 흥. 냉소와 함께 화살을 낚아챈 을지호는 이참에 하늘 모르고 까부는 그녀에게 단단히 쓴맛을 보여주려는 요량으로 역으로 시위를 당겼다. 하나 반이나 당겼을까? 나 이거야 원. 피식 웃음을 터뜨린 그가 힘없이 시위를 풀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곧바로 이어지 사마유선의 낭랑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혈궁단의 단주 사마유선이에요. 그러고 보니 빠르긴 했지만 화살에 실린 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정말 못 말릴 아가씨로군. 결국 을지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몸을 돌렸다. 을지호의 몸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표정이 돌변한 사마유선이 풍간을 불렀다. 풍간. 예, 단주. 가서 한곡을 불러와. 너희처럼 사냥하고 있을 테니까. 이각준다. 늦으면 각오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풍간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오량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출발 준비를 시켜. 곧 떠날 테니까. 어디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오량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매서운 눈초리였다. 일각....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더 이상 머뭇거리면 몸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량 역시 풍간처럼 내쳐 달리기 시작했다. 반 각이 조금 지났을 때 오량에 의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혈궁단의 단원이 부랴부랴 모이고 정확히 이각이 지났을 땐 죽을힘을 다해 달린 풍간과 한곡이 도착했다. 데, 데리고 왔.... 어이쿠야! 간신히 시간을 맞췄다고 마음을 놓고 있던 풍간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늦었어. 이각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풍간 자신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유선이 늦었다면 늦은 것이다. 그는 낏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 한곡. 예, 단주! 대답이 우렁찼다. 괜한 트집을 잡혀 풍간 꼴이 나지 않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무슨 냄새가 나지 않아? 예? 무슨.... 무심코 반문을 하려던 한곡이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코를 벌름거렸다. 질문을 던지느니 자신이 알아내는 것이 더 빠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백일몽이군요. 향기의 정체를 알아낸 한곡이 그렇지 않으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쫓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이래뵈도 전직 비혈대 출신입니다. 그리고 백일몽은 제가 단주께 드린 추종향이 아닙니까? 쫓을 대상이 비를 흠뻑 맞아 씻겨내려가거나 물에 틀어박려 있지 않는 한 지옥이라도 쫓을 수 있습니다. 한곡은 말꼬리를 올리며 묻는 사마유선에게 당연히 쫓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몰랐다. 그래야 될 거야. 놓쳤다가는 다시는 냄새를 맡지 못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사마유선의 성격이라면 백 번이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한곡은 자신도 모르게 유난히 커다란 코를 만지며 대답했다. 알면 됐어, 뭐 해? 빨리 쫓아. 그때였다. 혈궁단에서 유일하게 사마유선의 행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부단주 윤극진이 한곡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주, 우리는 지금 악양으로 가는 중이잖아. 조금 늦어도 돼. 그렇잖아도 대기하라는 명을 어기고 먼저 나선 길이다. 여기서 또 틀어지면 나중에 무슨 벌을 받을지 몰라. 벌? 까짓 받으면 되지. 그 딴 벌을 무서워할 내가 아니지. 어련하실까!!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한곡, 아직도 거기 서 있었어? 아, 아닙니다. 지금 갈 생각이었습니다. 괜한 불똥에 맞을까 겁을 낸 한곡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은 당연히 을지호가 사라진 곳이었다. 사마유선의 눈가에 살짝 웃음이 떠올랐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예요. 궁귀의 후예. 정도맹의 맹주가 거치하는 명심궁. 이른 아침부터 명심궁에 모인 각 문파의 수뇌는 작금의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숙의에 숙의를 거듭하였다. 하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모두들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있었으나 그 대처 방안에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머뭇거릴 시간이 없소이다. 벌써 여러문파와 분타가 무너졌고 지금 이 시간에도 공격을 받고 있소. 정도맹의 장로라는 막강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천강 진인은 그와 정확히 마주 앉아 있는 사내를 노려보며 열변을 토했다. 말을 할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친 낙자엔 보기 흉한 금이 수도 없이 생겨났다. 그러나 어찌 보면 위협적이기도 한 그의 말과 행동, 눈총을 받으면서도 사내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누누이 말했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성급히 판단하고 행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두들 준비된 차로 갈증을 해소하건만 유일하게 술을 들이키는, 그러면서도 조금도 꿀림없이 당당하기만 한 그는 천하의 모든 거지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개방 방주 정소였다. 도대체 성급하다는 것이 무었이오? 놈들이 코앞까지 쳐들어올 때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당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것이 성급하지 않은 행동이오? 설마 놈들이 두려운 것이오? 흥. 언제부터 개방이 이렇듯 꽁무니를 빼었을까! 방주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수많은 동도가 목숨을 잃고 있소이다. 계속되는 의견 대립에 천강 진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었다. 모든 이가 그의 말이 지나치다고 여기며 안색을 찌푸릴 정도이니 방주인 정소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말 다하셨습니까? 막 들이키던 술병으로 탁자를 내리찍고 벌떡 몸을 일으키는 정소.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연약하기만 할 술병이 탁자를 뚥고 들어가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다했다면 어찌할 텐가!! 천강 진인도 지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당장에라도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둘의 기세가 워낙 강해 아무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한참 동안 격론이 오고 감에도 최소한으로 말을 아끼던 무당파의 장문인이 조용히 입을 열렀다. 자리에 앉게, 사제 하지만...... 앉으라니까. 그는 지그시 응시하며 명하는 천중 진인의 음성을 거부할 만한 힘이 없었다. 사제의 무례를 내 대신 사과하겠소. 본심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주께서도 알 것이오. 장문인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나이는 물론이고 연배 또한 한참 윗길인 그의 말에 정소도 어쩔 수 없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정소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천중 진인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말다툼을 하고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드오, 패천궁의 주력이 본격적으로 싸움에 개입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으나 잠깐일 뿐이오, 조금이라도 대응이 늦으면 호북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엔 한껏 오른 그들의 기세를 감당치 못할 수도 있소이다. 천중진인의 시선이 정소를 향했다. 빈도의 짧은 소견으로 신중한 것도 좋지만 너무 늦어서는 안 된다고 보오만. 소생 또한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되 가능하다면 싸움을 피해보자는 것입니다. 일단 저들 수뇌들과 대화를 나누어봐야 합니다. 대화가 될 까닭이 없소이다!! 어쩌면 이번 싸움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비선문의 문주 기도위가 몹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반바했다. 저자들이 이번 싸움을 일으킨 명분이 무엇이오? 우리가 자신들의 분타를 공격했다는 것이외다. 방주께서 우리가 단독으로 놈들을 칠힘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쓴웃음을 지은 정소가 고개를 흔들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야욕을 드러낸 저들이 대화에 응할 리가 없소이다. 오히려 기만만 당할 뿐. 비록 미약한 힘이지만 우리 비선문은 놈들과 싸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 기도위의 당당한 태도의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천강진인은 따로 목례를 하며 인사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소는 자신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선문이 패천궁의 분타를 기습했다는 말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나 절들으 분타가 하루아침에 부너진 것까지 거짓은 아닙니다. 자작극을 수도 있소. 퉁명스런 기도위 말에 정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 곳도 넘는 분타가 당했고 희생된 인원만 어림잡아 삼백이 넘습니다. 이는 개방에서 정확히 확인한 것입니다. 물론 자작극일 가능성도 배재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나 패천궁이 과연 그 정도까지 무리를 해가면서 도발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것이 자작극임이 밝혀질 때의 파급 효과를 생각해 보면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개방이 정보력이 그 어떤 문파, 세력보다도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정소의 단정적인 말에 모두들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정도맹이 개입을 하지 않았고 패천궁의 자작극도 아니라면 그들의 분타가 무너진 것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무당파의 장문인도 정중히 예의를 갖추는 개방의 방주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 노인. 명심궁에 모인 그 누구보다 세인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발언권이 강한 인무이었으나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그는 검왕 곽화월이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검왕으로 더욱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가 말문을 열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자신의 사부와 친분이 돈독한 데다가 과거 큰 가르침을 받앗던 정소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이 제가 패천궁과의 싸움에 신중을 기하자고 하는 이유입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나. 일은 터졌는데 양쪽 모두에서 한 일이 아닙니다. 한데 얼마나 많은 파를 보아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대규모의 싸움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원은 물론이고 변방에서 묘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는 겁니다. 순간 이곳저곳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묘한 움직임이라니? 정확히 파악은 되지 않았으나 세외 쪽 문파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입니다. 전에 없이 많은 무인이 출몰하고 빈번하게 말썽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사천 쪽에서도 일단의 무리가 움직인 것으로 감지가 되었는데.... 정소의 시선이 첨밀각 각주의 신분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왕호연에게 향했다. 두 번의 헛기침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북쪽은 물론이고 사천의 서북쪽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업슨 이들의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날아들고 있습니다.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이고 보고마다 제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아직 뭐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상한 조짐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왕호연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린가, 첨밀각주!! 그런 소식이 있으면 본 맹주에게 재빨리 보고를 해야 할 것이 아니던가? 그토록 중요한 사항에 대해 이리 미적거리다니... 대체 첨밀각주라는 위치가 어떤 자린 줄은 알고 있는 것인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회의를 주관해야 함에도 지금껏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그저 멀뚱히 자리만을 지키고 있다가 무당의 장문인이 나서는 순간부터는 아예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던 맹주 천장 진인이었다. 음. 난데없는 지책을 당한 왕호연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말을 해보게. 어째서 아직까지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인가? 천장진인은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왕호연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호통을 치는 그의 음성은 저에 없이 강경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왕호연이 냉랭한 어조로 대꾸를 했다. 소식이 날아든 것은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말씀을 드렸고 특히 어젯밤에는 그 모든 것을 정리하여 정확히 보고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맹주께서 꽤나 취한 상태라 제대로 들으셨는지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만. 찰나의 틈도 없이 날아온 대답에 지난밤의 일을 기억해 낸 천장 진인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하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험험. 그, 그랬던가? 아,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내 잠시 잊고 있었네. 그때는 몸이 좋지 않아서.... 궁색한 변명에 왕호연은 물론이고 모든 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이 너무도 황당한 일을 겪으면 도리어 말문이 막힌다던가. 몇몇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부끄러웠는지 천강 진인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말았고 천중진인 또한 낯빛을 고치며 눈을 감아버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천장진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일을 수습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사형인 천중 진인만 쳐다보며 진땀을 흘릴 뿐이었다. 그런 천장 진인의 모습에 중인들은 또다시 실망을 금치 못했다. 정도맹은 패천궁과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고 백도를 지켜주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맹을 이끌어야 할 수장은 다른 누구보다 명망있고 뛰어난 인물이어야 했다. 특히 크나큰 적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위기의 순간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현 맹주가 그런 인물이 될 수 없음을 너무나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흠흠. 크게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일신시킨 천중 진인이 정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하면 방주의 판단은 정확히 어떤 것이오? 누군가가 어부지리를 노린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마지막으로 남은 술은 비운 정소가 조용히 술병을 내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모릅니다. 아마도 패천궁과 우리가 반목하고 싸우기를 간절히 바라는 무리겠지요. 절대로 그자들의 의도대로 따라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패천궁과 일의 전모에 대해 논의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저들 또한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확신에 찬 그의 말에 좌중은 또 한 번 술렁였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어찌 되는 것이오? 자칫하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소. 절대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니 그에 대한 준비도 해야겠지요. 다만 비선문의 문주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무작정 맞부딪치지는 말자는 말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되 저들과 대화를 나눈 후 싸움을 해도 늦지는 않다는 생각입니다. 흠. 천중 진인은 나직이 숨을 고르며 정소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비록 탈맹을 했으나 아직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향사하고 있는 소리과 화산파의 분위기를 살폈다. 은연중 전소의 말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들끼리 이미 교감이 있는 듯했다. 어부지리라... 누군가 어부지리를 노리고 패천궁과 정도맹을 싸우게 만드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정소가 말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 방주의 말씀이 사리에 맞는 것 같은데 맹주께서는 어찌생각하시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곤경에 빠져 있던 천장진인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일은 방주께서 책임지고 추진해 보시구려. 알겠습니다. 책임을 지라는 말에 시린 묘한 어감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정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묵묵히 생각에 잠겼던 곽화월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남궁세가가 당한 것도 그들이 소행인가? 정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리라 의심은 해보아스나 무림을 도모하고자 하는 패천궁이 목구멍의 가시 같은 존재를 그냥 지나칠리는 없고... 패천궁이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군. 정소는 침묵으로 그 말을 인정했다. 곽화월의 시선이 오대세가를 대표해 정도맹으로 온 제갈경에게 향했다. 오대세가에서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뭐라 단정 지을 순 없겠지요. 한 여러분들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듯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해 한 인물이 남궁세가로 떠났습니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겠지요. 남궁세가의 태상호법이 비사걸이라는 것은 다른 이들에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천엽 진인으로부터 황보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미리 전해 들은 천강진인은 비사걸을 막지 못한 오대세가의 행동을 은연중에 비웃었다. 화를 낼 만도 하건만 제갈경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들로 인해 사건의 전모가 확실히 드러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강진인이 샐쭉한 표정으로 물러나자 곧바로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명심궁의 기왓장을 흔들 만한 걸걸한 음성이었다. 누가 갔기에 그리 자신만만하신 겝니까? 아직 듣지 못하셨습니까? 폐관 수련을 끝내자마자 서둘러 달려오는 통에 저간의 사정을 알수가 없었소이다. 흠,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인데도 듣지 못하셨다니 급하긴 급하셨던 모양입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 폐관 수련에 들었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두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정도맹에 입성한 종남파의 장문인 오상은 제갈경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허허, 도대체 누구기에 그러시는 것이오? 오 장문인께서도 아실 만한 인물입니다. 호, 알 만한 인물이라.... 황보세가를 떠난 지 정확히 육일하고도 반나절이 지날 무렵 육체가 견디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해 가며 달려온 을지호는 마침내 남궁세가의 북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그는 단숨에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음....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남궁세가에 들이닥친 참화는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음....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남궁세가에 들이닥친 참화는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천금을 들여 힘겹게 재건한 건물들, 그 사이를 누비며 바지런히 움직이던 식솔들의 모습, 또 그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세가에 활력을 불어넣던 곽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꺼멓게 그슬린 담벼락, 잿더미가 되어버린 건물의 잔해와 타다 남은 서까래, 그리고 주변을 배회하며 이곳저곳을 파헤치다 인기척에 놀라 황급히 몸을 숨기는 날짐승 따위가 전부였다. 참담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그는 식솔들이 죽어서까지 모욕을 당하고 있는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날의 참상이 몸으로 느껴졌다. 그것에 비례해 치미는 분노 또한 가슴 한곳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정문에는 정확히 열두구의 시신이 매달려 있었다. 매달 자리가 부족했는지 나머지 시신들은 그들의 발 아래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멀쩡한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목이 잘리거나 가슴이 배어져 죽임을 당한 데다가 무더운 날씨로 인해 삼각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벌레가 시신들을 능욕하며 꿈틀거리고 감당하기 힘든 악취가 주변을 휘감았다. 하지만 을지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유난히 왜소해 보이는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문에 매달린 시신 중에서 곽 노인을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을지호의 무릎이 꺾었다. 곽....노인. 그의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한줄기 바람이 불며 곽 노인의 몸이 흔들렸다. 몸에 붙어 있던 파리 떼가 잠시 움찔하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그들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실로 어쩔 수없는, 예상치 못한 불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그렇지를 못했다.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울화가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적당한 상대가 주변에 있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꽝!!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주먹이 땅속을 파고들며 내는 소리였다. 을지호는 그런 자세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일각을 보냈다. 후~~ 그의 입에서 더없이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이성을 잃어버리게 만들정도로 치밀던 노화를 가라앉히는 한숨이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결정한 한숨이었다. 당장은 버려진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몸을 일으킨 그는 정문에 매달린 시신들을 땅으로 내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데 그런 을지호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남궁세가의 정문에서 정확히 이십여 장 떨어진 숲. 사중며의 명을 받아 남궁세가의 주변을 감시하고 있던 비혈대 예하 은검조의 대원들은 수풀에 몸을 숨기고 을지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맨 좌측에 있던 유흥이 은검조의 조장 정강에게 물었다. 정강이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부조장인 소후가 작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일단 막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현장을 철저하게 보전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정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기는 막아야겠지만 가히 기분이 좋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저자의 행동으로 봐서는 일단 수상한 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마도 남궁세가와 연관이 있는 가겠지. 문제는 저자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영 께름칙하단 것이야. 몸도 근질거리는 것이 상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들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은검조의 조장 정강이라면 비혈대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단순히 무공을 따지자면 다른 조장들에 비해 다소 손색이 있을지 모르나 천부적으로 타고난 위험 감지 능력만큼은 최고였다. 그에 대한 조원들의 신임은 당연히 절대적이었다. 그런 정강이 위험 신호를 감지한 것이다. 그래도 명령이.... 소후가 다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떠한 위험이 잇더라도 그들에게 우선적인 것은 상부의 명령이었다. 그것을 거부할 명분도 용기도 그들에겐 없었다. 아니, 애당초 용납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그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정강이 은신해 있던 수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네 명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검조의 대원들이 을지호에게 접근할 땐 이미 세 구의 시신이 땅에 내려져 있었고 그가 막 곽 노인의 주검을 수습하려는 찰나였다. 남궁세가의 식솔이오? 정강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수습한 시신을 가지런히 누이는 을지호에 조심스레 접근하며 질문을 던졌다. 묵묵부답. 곽 노인을 땅에 누인 을지호는 곧 나머지 사람들을 수습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정강이 고갯짓을 했다. 그의 눈짓을 받은 대원들이 재빨리 돌아가 을지호의 발걸을을 막았다. 유감스럽지만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뒤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소? .... 악의는 없소만 시시들의 수습은 뒤로 미루시오.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가 도와주겠소. 순간,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을지호의 눈에서 혈화가 피어올랐다. 어느새 손에는 곽 노인의 목에서 풀어낸 노끈이 들려 있었다. 악의는 없다라... 네놈들이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악의다. 싸늘한 음성과 함께 손에 들렸던 노끈이 마치 날카로운 채찍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물러나!! 을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기를 느낀 정강이 황급히 몸을 빼며 경고를 했지만 때늦은 감이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노끈안 몸을 날리려는 은검조의 대원들을 대원들을 단숨에 휘감았다. 크아악! 으악!! 누구이 입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비명성이 터져 나왓다. 극한의 공포와 아픔을 내포한 비명성, 듣소 있노라면 마치 자신이 당하는 착각을 일으켜 절로 몸을 굳게 만들 정도였다. 미리 위험을 느껴 재빨리 몸을 뺀 정강은 그나마 간신히 화를 면했지만 그의 부하들에겐 그가 지닌 능력이 없었다. 설사 그런 능력이 있을지라도 을지호의 수법이 워낙 빠르고 악랄한 데다가 위력이 있어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피하지 못한 대가는 참혹했다. 노끈이 지나간 곳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멀쩡한 다리로 땅을 딛지 못했다. 고통으로 인해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네 명의 은검조 대원은 하나같이 허벅지 아래의 다리가 잘려 나간 상태였다. 잘려진 여덟 개의 다리가 아무렇게나 땅에 나뒹굴었다. 허벅지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그저 죽을힘을 다해 땅을 길 뿐이었다. 이,이럴 수가!! 정강은 눈앞에 나타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웃고 떠들며 대화를 나누던 수하들이 졸지에 병신이 되어 무참히 쓰러졌다. 더구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제각기 다른 방형으로 몸을 날리던 수하들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일렬로 세워놓은 짚단을 쓰러뜨리듯 단 일 수에 다리가 잘리고 말았다.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의 신기였다. 극도의 전율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고, 고수다! 그, 그것도 극강의!!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 단 한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킨 을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공격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무심한 얼굴이었으나 정강은 마치 호랑이의 살기에 눌린 가녀린 짐승처럼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누구냐?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음성. 을지호는 너무 깊어 그 속을 들여다보기 힘든 시선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정강의 입에선 별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에 굴복은 했으되 그는 죽음과 비견될 정도로 고된 훈련을 받은 비혈대의 대원이었다. 함부로 정체를 발설할 만큼 약하지 않았다. .... 을지호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손이 움직였다. 크악! 땅바닥을 기고 있던 한 대원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커다란 몸이 한 자 가까이 튀어 올랐다. 다시금 처박힌 몸은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었다. 단지 잔 경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역시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자, 잔인한 놈! 질끈 눈을 감았던 정강이 이를 부득 갈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런 공허한 외침만으론 을지호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누구냐? 또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죽어랏!! 정강은 대답을 하는 대신 주저없이 몸을 날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림없는 일이었고 성공 가능성이 전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직 공격뿐이었다. 을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강을 을시하다가 검이 정면에 이르자 살짝 몸을 틀어 피해냈다. 그리곤 왼손을 뻗어 순식간에 몇 군데의 혈도를 점했다. 기겁을 한 정강이 피하려고 했으나 그럴 틈을 줄 을지호가 아니었다. 아, 안 돼!! 전신으 감각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낀 정강은 아득한 절망감에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하나 그럴 수가 없었다. 수하들만 더 고통스럽다 라는 을지호의 한마디에 그는 이빨 사이에 끼었던 혀를 빼고 말았다. 애당초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비록 상당한 거리를 두고 은신하고 있었고 을지호가 처참하게 무너진 남궁세가의 모습에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그만큼 경계심도 컸다. 스스로가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움직이기 시작한 전신의 감각들이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은검조 대원들을 감지해 낸 것이다.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자 을지호는 당장에라도 그들을 잡아와 정체를 묻고 도륙을 내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하지만 며칠째 방치되어 있는 식솔들의 주검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잠시 살기를 접었을 뿐이었는데 그것을 알리 없는 정강 등이 을지호의 살기를 건드린 것이다.] 억지로 참고 있는, 폭발 일보직전의 살기를 누구냐? 주,죽여라! 여전히 무표정한 을지호의 입가에 진한 살소가 피어올랐다. 물론이다. 네놈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면 편히 죽을 것이냐다. 을지호는 정강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계속해서 쳐다보며 나머지 생존자들에게 다가갔다. 워낙 많은 피를 흘려서인지 다들 눈동자가 풀려있었다. 그는 그들 중 한 사람의 곁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말해 두지만 조금 전 처럼 편한 죽음은 없다. 대답에 머뭇거림이 있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누구냐? 우, 우리는..... 다급한 마음에 입을 열기는 했지만 정강은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을지호는 조금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의 손에 꼬챙이처럼 단단하게 세워진 노끈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내의 허벅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악!! 다리가 잘린 고통도 상당한 것이었으나 교모하게 혈을 자극하고 살을 뚥고 뼈를 갉으며 서서히 파고드는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비명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뭔가가 목에 걸린 돗 연신 컥컥대며 괴로워하는 사내는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다. 그, 그만해라! 정강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을지호가 손을 멈추지 않고 되물었다. 누구냐? 우, 리는.......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비밀을 유지한다는 것. 그것은 모든 비혈대대원 34 ~42p 쫓을 수 있나? 너무나 차가운 말투였다. 간단히 무시해 버리려던 한조로소도 움찔 할 수밖에 없는 음성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못할 것은 없지만.... 낌새가 이상했는지 한조는 말을 얼버무리며 을지호와 사중명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날아온 뭔가가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삼장이나 날아가 처박혔다. 자,자네. 사중명이 당황한 눈으로 을지호와 기절해 버린 한조를 쳐다보는 사이 을지호의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늙은이라... 앞으로는 말을 조심해서 하는 것이 좋을 거다.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 있었다면 그 즉시 목이 떨어졌을 테니, 그나마 일신에 지닌 잔재주로 인해 목숨을 연명하는 줄 알아라. 기절한 한조가 들을 리 없건만 싸늘히 내뱉은 을지호는 나란히 뉘여 있는 시신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후~~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사중명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묵까지 치밀었던 말을 다시 집어넣었다. 힘찬 기합성과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무인들로 채워져야 할 연무장. 비혈대의 도움을 받아 식솔들의 주검을 수습하여 연무장 한쪽에 가묘를 마련한 을지호가 그들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멍한 눈으로 무덤을 응시하는 그의 뒤에서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사중명이 슬며시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이제 그만 떠나는 것이 좋겠네. 시간이 흐를수록 놈들을 쫓기가 힘드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어깨에 올려진 손을 밀쳐 내린 을지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약속하건대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는 법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억울가게 죽은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거이었다. 놈들도 곧 보내 드리지요. 제대로 된 장례조차 없이 아무렇게나 묻힌 식솔들을 생각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문 을지호는 깊게 허리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출발 준비를 마친 비혈대의 대원들은 정문에서 을지호와 사중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치료를 받기 위래 인근의원에게 보내진 상태였다.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 따라간 인원을 제외하고 대기하고 있는 인원은 모두 열 명.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차분히 대기하고 있어야 할 비혈대원들이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대주인 사중명이 다가옴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웅성대고 있었다. 을지호에게 못 볼 꼴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사중명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그제야 사중명의 존재를 인식한 이들이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대, 대주님. 한걸음에 달려온 한조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사중명과 을지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니까? 한껏 짜증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한조는 사중명의 호통에 반응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하늘을 가리키며 당황해할 뿐이었다. 저, 저것을 보십시오. 사중명의 고개가 하늘로 향하고 동시에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말, 말도 안 되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반응은 한조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사중명을 따라 허공을 을시하던 을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철왕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철왕이 아니라 철왕의 발에 잡혀 꼼지락대고 있는 고양이와 비슷해 보이는 동물이었다. 한데 반응을 보아하니 비혈대원들은 물론이고 사중명까지 무척이나 중하게 여기는 동물인 것 같았다. 저게 무엇이오? 딱히 어떤 동물이라 말하긴 뭣하지만 우린 그냥 적묘라 부르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꾸하는 사중명의 음성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리라. 중요한 것이오? 그의 음성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사중명의 고개가 전에 없이 빠르게 돌려졌다. 물론 중요한 것이네. 우리 비혈대의 상징이자 영물 중에 영물이지. 또한 이번 추격에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고. 추격이란 말에 무척이나 힘이 실려 있었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을지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유유히 날아다니던 철왕이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안착했다. 중요한 녀석이란다. 놓아주거라. 그러나 못 들은 척 슬며시 고개를 돌린 철왕은 부리로 겁에 질린 적묘를 툭툭 건드렸다. 허! 그 모양을 본 사중명은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도 없어 헛바람을 뱃어냈다. 빨리 놓아줘. 을지호의 음성이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인의 심사를 눈치 챈것일까? 철왕이 잡고 있던 적묘를 땅에 내동댕이쳤다.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적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사중명 이하 비혈대 원들은 그런 적묘를 보며 말을 잊고 말았다. 적묘가 어떤 동물이던가! 비록 몸뚱이는 일반 고양이보다 작아도 재빠른 몸놀림과 강인한 발톱으로 여타 짐승은 물론이고 맹호마저 우습게 찢어발기던 영물이었다. 한데 한낱 새 따위에게 잡혀 꼼짝 모산 것도 화가 날 지경인데 꼬랑지를 말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을 보니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꽤나.... 강해 보이는 녀석일세. 사중명이 주인의 목에 부리를 비비고 있는 철왕을 지그시 노려보며 말을 했다. 어딘지 묘한 어감이 담긴 어투였으나 그런 시선에 기죽을 철왕도 아니었고 신경 쓸 을지호도 아니었다. 을지호는 대견하다는 듯 철왕의 날개를 쓰다듬어 주며 대꾸했다. 이해해 주시오, 주인을 닮아 성격이 더러우니. 그나저나 한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소. 말해 보게나. 아무것도 확정된 것은 없소, 패천궁이 직접 개입되지 안았다는 것도 입증되지 않았고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세력이 개입해다는 증거 또한 확실한 것이 어니오. 정확한 것은 오직 누군가에게 남궁세가가 당했다는 것뿐. 단언하건데 패천궁과는 관계가 없네. 물론 우리와 관계된 문파의 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네 지금부터 입증해야겠지만. 아마 그러는 것이 좋을 것이오, 당신들이 말하는 세력을 찾아내지 못하면 나는 이번 일을 패천궁의 짓으로 단정 짓게 될 것이니. 길게 숨을 내뱉은 을지호가 손을 들어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 속에는 또 다른 내가 있소이다. 오랜동안 잠들어 있었지만 꽤나 위험한 놈이오. 이놈이 깨어나면 나도 내가 어찌 돌변할지는 모르오,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빌겠소. 한마디로 죽음을 각오하고 남궁세가의 일이 패천궁과 관계가 없단는 것을 증명하라는 경고였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사중명이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보채지 않아도 스스로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네. 한조. 예. 대주님. 쫓아라. 한조는 힘껏 허리를 꺽고 그가 파악한 흉수의 흔적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대기하고 있던 비혈대의 대원들이 따르고 사중명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또 그러는가? 사중명이 또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을지호는 턱짓으로 바람과 같이 움직이는 대원들을 가리켰다. 이 더운 날씨에 꼭 저렇게 온몸을 감쌀 필요가 있소? 더구나 밤도 아니고 대낮에 말이오. 사람들의 이목만 끌지 않을까 싶소만. 을지호는 나름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진지하게 물었으나 냉랭히 고개를 돌리는 사중명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것 참. ------------------------------ 천라지망 안휘성 서남부에 위치한 구화산. 천대봉, 천주봉, 십왕봉 등을 비롯하여 아홉개의 웅장한 봉우리를 자랑하는 구화산은 황산과 더불어 안휘성이 자랑하는 명산으로 특히 숭산, 아미산 등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사찰과 불상이 도처에 널려 있어 해마다 많은 참배객이 찾는 불교의 성지였다. 또한 탁월한 경치로 인해 철마다 시인 묵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으로도 유명했는데 그것은 어디가지나 사람의 발길이 허락된 몇몇 곳으로 한정될 뿐 십왕봉이나 천주봉 주위는 온갖 기암괴석과 이름을 알 수없는 수목들이 빼곡히 우거져 인간의 발걸음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천주봉과 십왕봉 주변을 헤집고 다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헉헉. 집채만한 바위에 기대어 앉은 비사걸이 힘겹게 숨을 쉬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요동쳤고 양 어깨는 얼굴 높이까지 들썩였다. 그는 연신 피가 솟구쳐 오르는 허벅지의 혈을 눌러 지혈을 하고 대충 돌로 찧어 뭉갠 약초를 올려놓았다. 그리곤 이미 누더기나 마찬가지인 상의를 찢어 얻은 천 조각으로 상처 부위를 싸맸다. 후~ 늙기는 확실히 늙었군. 임시방편으로 치료를 끝낸 비사걸이 애써 호흡을 고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남궁세가의 일로 황보세가를 떠난 지 벌써 팔 일, 거리가 멀어 문제지 별다른 일 없이 무난해 보이던 여정은 그가 산동성을 벗어나면서 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일단의 무리들로부터 처음 공격을 받을 때만 해도 비사걸은 상황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적대시하는 백도의 몇몇 옹졸한 위인이 수를 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큰 착각이었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보보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장소 불문하고 함정이 만들어졌다. 그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맞닥뜨렸다. 귀찮기는 해도 일부러 피하거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물론 소속에 사정을 두는 법도 없었다. 처음 이틀간 열두 번의 기습으로 인해 비사걸이 입은 피해는 고작 팔꿈치에 암기 하나가 박히는 것에 불과했다. 기습을 감행했던 이들은 모조리 전멸을 당했는데 그 수가 오십여 명을 넘었다. 한두 명의 목숨은 살려주고 정체를 물어볼 만도 하건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반전한 것은 그가 구화산을 지척에 두었을 때였다. 느긋하게 산길을 걷던 비사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의미를 알 수없는 글자를 앞뒤로 수놓은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일전에 그를 공격했던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들이었다. 우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부터가 달랐다. 걸음걸이, 무기를 들고 있는 자세가 심상치 않았다. 또한 그의 실력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다는 듯 개인의 무리한 공격보다는 철저하게 합공으로 포위 공격을 하였다. 완벽하게만 보이는 합공에 내심 감탄을 하면서도 비사걸의 자세엔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들과 일각 동안 손속을 겨루고 길을 떠나는 그의 뒤에 싸늘히 식은 열 구의 시신이 남겨졌다 그것이 사흘 동안 이어지고 지금껏 끝나지 않은 싸움의 시작이었다. 이후, 정확히 네 번의 공격을 더 받은 뒤 점점 어느 한곳으로 몰린다는 생각을 하고서야 비로소 비사걸은 자신이 누군가가 펼쳐 좋은 천라지망에 빠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모든 싸움을 냉소로써 일관하던 비사걸의 자세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천라지망을 벗아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그는 할 테면 해보라는 듯 정면으로 맞서기만 하던 방식을 버리고 포위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추격자들에게 기습을 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은 더욱더 집요하게 그를 노렸고 포위망은 더욱더 견고하게 좁혀들었다. 얼마나 많은 인원과 고수가 동원됐는지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공과 자존심을 자랑하는 비사걸이 감당하지 못하고 연신 한쪽으로 몰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그는 옴몸에 무수히 많은 부상을 당했다. 팔다리를 베이는 것은 예사고 대여섯 개의 암기를 몸에 막고 다녔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부상은 그와 이십여 초를 넘게 싸우다 결국 목숨을 읽은 독목의 노인이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로 펼친, 실로 예상치 못한 동귀어진의 수법에 옆구리를 크게 상한 것에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대나무 살은 얇게 잘라 봉합을 하였으나 계속된 싸움에 터지고 봉합하기를 여러번, 그는 내장이 휜히 보일 정도로 갈라진 상처를 부여잡고 싸우느라 내격은 급속히 고갈된 상태였고 손에 쥔 검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백 명이 넘는 고수를 더 쓰러뜨리고 또다시 추격자들을 따돌렸으니 이는 오직 검왕 비사걸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크, 천하의 비사걸이 말년에 이런 꼴을 당한 것을 알면 구양 늙은이가 꽤나 비웃겠구나. 또다시 터진 옆구리를 봉합하느라 인상을 찌푸리던 비사걸은 부상을 입고 쫓기는 자신의 처지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후~ 그나저나 이놈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조금 전 자신을 공격하다 몰살당한 이들을 떠올리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처음 공격을 했던 자들은 제법 날카로운 면은 있어도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삼류자객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화산에서부터 맞부딫친 이들은 뭔가가 달랐다. 실력은 둘째 치고 그들이 쓰는 무공은 소위 명문의 무공들이었다. 검을 쓰는 자도 있었고 도를 쓰는 자도 있었으나 검로나 도로를 살펴보건데 의심해 볼 여지가 없었다. 비사걸은 그들의 배후에 정도맹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싸움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를 공격하는 자들이 쓰는 무공이 매우 다양했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명문정파의 무공도 있었고 그들과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사파의 무공도 끼어 있었다. 심지어는 구대문파의 무공도 있었으며 패천궁의 무공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비사걸은 정확히 상대가 누군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조사해 보면 알겠지, 아무튼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 이니까. 한 장소에서 일각 이상을 머물다간 곧바로 추격자들에게 발각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비사걸은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라지망을 피래 목숨을 부지한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추격자들은 비사걸이 몸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상문주와 그를 보필이라도 하듯 좌우를 따르는 두 명의 노인, 군사인 신도와 이십여명의 구인이 뒤를 따랐다. 어찌 되었느냐? 주변의 상황이 대충 정리가 되자 태상문주가 고저차가 느끼지지 않는 음성으로 물었다. 모조리 전멸입니다. 힘없이 대뚜하는 신도는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떠냐? 이랴도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소, 송구합니다. 금방이라고 비사걸을 주살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그가 아니던가. 부끄러움에 절로 낯빛이 붉어졌다. 하긴, 이만항 인원을 동원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 또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태상문주는 비사걸이 일으킨 검기에 난자를 당해 살아생전의 모습을 찾을 길 없는 수하들의 모습을 일별하며 고개를 설래설레 내저었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당했느냐? 배,백이십이 넘었습니다. 음..... 입을 다물었지만 입술을 비집고 침을성이 터져 나왔다. 말이 좋아 백이십이지 그만한 인원이라면 웬만한 문파 하나쯤은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인원이었다. 더구나 희생자들 속에는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정예 오십도 끼어 있었고 중천의 핵심 인물이자 평생을 함께해 온 친우도 끼어 있었다. 그자를 이곳으로 몰아세운 것은 훌륭했지만 처음부터 너무 서둘렸다. 애당초 우리들을 기다렸으면 이렇게까지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 것아니더냐? 죄, 죄송합니다. 태상문주의 곁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노인의 질책 어린 말에 가뜩이나 뒤축되어 있는 신도의 어께는 더욱 오그라들었다. 그러자 홀로 떨러져 주변을 살피던 또 다른 노인이 고개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만두게나. 저 아니가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더라도 이정도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네. 태상문주의 말씀대로 우리 또한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던가? 과연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어. 도저히 보고도 믿지 못하겠군. 설마 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지나칠 정도로 적을 칭찬하는 말에 신도를 질책하던 서대경은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이보게, 유 장로. 상대를 과소평가흐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그렇게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명성은 명성일 뿐이야.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검왕이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객관적으로 따져서 우리들 중 누구도 그자의 상대가 되지 못해. 그 무슨 말을.... 발끈한 서대경이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빠르게 이어지는 유천의 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 바위를 보게나. 유천이 서대경이 뒤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서대경과 태상문주의 고개가 바위로 향했다. 바위 주변에는 비사걸에게 당한 자들의 흔적이 처참하게 널려 있었다. 서대경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바위가 어쨌다고 그러냐? 유천은 대답 대신 바위를 향해 지풍을 날렸다. 순간 장정 서너명은 손을 모아야 그 둘레를 잴 수 있을 것 같던 바위가 수십 조각으로 나뉘며 무너져 내렸다. 허, 뭐 이런 일이.... 난데없이 벌어진 일에 서대경은 말을 잇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바위와 유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태상문주를 따라온 모든 이의 반응도 그와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바위에 다가간 유천이 매끄럽게 잘린 바윗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게 그의 진정한 실력이네. 마음만 먹는다면 자네나 나나 바위를 부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뭐, 죽을힘을 다 한다면 잘게 부술 수도 있겠지. 하나 이렇게 매끄럽게는 하지 못해. 그것도 단 한번으로. 하, 한 번이라고? 되묻는 서대경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틀림없네. 마치 보기라도 했다는 듯 단정 짓는 유천, 그의 안목을 익히 알고 있기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조각난 바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태상문주가 입을 열었다. 나와 비교해서는 어떤가? 유천은 태상문주의 말투에서 참을 수 없이 피어오르는 호승심을 엿 볼 수 있었다. 빙그레 웃음 지은 그가 대답했다. 검왕이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고 최상의 상태라면 솔직히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지존신공으로 싸운다면? 완전하지 못한 무공입니다. 그 자체로도 개세적인 위력은 보이나 잃어버린 부분을 찾지 못한다면 무리입니다. 유천은 간단히 잘라 말했다. 허, 이거야 원. 유 장로, 너무 신랄한 지적 아닌가? 사실 결과가 어찌 될는지는 직접 싸워보지 않고는 모르겠지요.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다만 그 차이가 극히 적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면 그런 것이겠지. 아무튼 부상을 당한 지금은 내가 필승이라는 말인데... 과연 그러할지는 직접 부딪쳐 보면 알 수 있겠지. 신도.... 옛, 태상문주님. 쫓아라. 존명. 신도는 태상문주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추종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수하들을 앞세워 비사걸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후우~~ 계속되는 추격을 뿌리치고 십왕봉의 정상 어귀에 이른 비사걸은 십왕봉과 천대봉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도망칠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를 잡기 위한 포위망은 치가 떨릴 정도로 집요하고 치밀했다.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겪고 포위망을 뚫기 위해 애를 썼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옴을 본능적으로 느끼로 있었다. 비사걸은 붉은 피로 얼룩진 풍혼을 옆에 내려놓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곤 최후의 기력을 끌어 모으기 위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신에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고수라도 운기조식을 할 때 만큼은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별 볼일 없는 공격에도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었고 또 그 공격을 막아낸다 해도 평사심이 흐트러져 주화입마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리 되면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혹여 간신히 살아난다 해도 폐인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해서 운기조식만큼은 은밀히, 그리고 안전한 곳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비사걸처럼 적에게 쫓기는 급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아예 드러내 놓고 운기조식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를 발견한 추격자들의 반응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걸 믿어야 하는 건가? 비사걸을 발견했다는 수하들의 보고를 듣소 다급히 달려온 태상문주는 무모함인지 대범함인지 도저히 구분이 안 가는 비사걸의 행동에 경탄 아닌 경탄을 했다. 후~~ 그토록 애를 먹이더니만... 아무튼 손쉽게 처리할 수 있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한없이 늘어가는 인명 피해에 초조감이 극에 이르렀던 신도는 비사걸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 여기며 하늘에 감사했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 당연히 동의 하리라 여겼던 태상문주는 그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물러나라.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되 조심스레 움직일 것이며 함부로 소리를 내지도 말거라. 좌중을 압도하는 나직한 명령에 신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태상문주를 응시했다. 태, 태상문주님. 무슨.... 기습은 없다. 검왕과 승부를 낼 것이다. 짧지만 힘이 있는 음성이 모든 것을 말해 줬다. 확고한 의지가 담긴 말에 신도는 뭐라 말을 하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유천과 서대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들이 태상문주를 말려주길 바랐지만 그리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자신처럼 다소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유천과 서대경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졌던 비사걸이 눈을 뜬 것은 운기조식에 들어선 지 정확히 반 시진 정도가 흐른 뒤였다.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뱉는 것과 동시에 굳게 닫혔던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주위를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추격자들을 보면서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 그다지 놀라지 안았다. 잠시 그들을 둘러보던 비사걸의 눈이 태상문주에게 향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구나. 천천히 걸어와 비사걸의 정면에 선 태상문주가 담담히 대꾸했다. 더 기다릴 수도 있었소. 한데 너무 위험하지 안았소이까? 마음만 먹었다면 노선배께서는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었소이다. 인생이란 어차피 모험이지. 그리고 날 이 정도로 몰아붙일 수 있는 위인이라면 운공 중에 기습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칭찬으로 알겠소이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꾸나. 태상문주는 침묵으로 허락의 의도를 밝혔다. 너는 누구냐?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군. 어디의 인물이지? 무슨 뜻인지..... 태상문주는 묘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시치미 떼지 마라. 비사걸의 얼굴에 잠시 노기가 떠올랐다. 처음 공격을 당할 땐 정도맹의 늙은 여우들이 수작을 부리는 줄 알았다. 그리고 정파의 무공을 보면서 확신했고. 그런데 시간이 가고 또 다른 자들을 상대하면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그 녀석들은 백도의 무공뿐만 아니라 흑도의 무공, 심지어 패천궁의 무공까지 사용하는 놈들도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정도맹돠 패천궁이 연합하여 나를 공격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물론 말이 되지 않는 소리지. 물과 기름이 섞인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고 특히 정도맹은 몰라도 패천궁이 나를 해칠 이유가 없었으니까. 잡시 말을 끊은 비사걸이 날카로운 눈으로 태상문주를 응시했다. 그는 담담히 비사걸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백도와 흑도의 문파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제삼의 세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노부를 공격한 녀석들을 보건대 숨겨진 힘도 막강하다는 것이다. 흠, 흥미로운 이야기 같소이다. 태상문주는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아싿. 노부는 정도맹과 패천궁의 싸움은 물론이고 남궁세가의 일도 너희들이 개입되더 있다고 생각한다. 틀리더냐? 이런 대화를 나누고자 지켜본 것은 아니오. 난 그저 전설 속의 인물인 검왕 노선배와 손속을 겨뤄보고 싶었을 뿐이외다. 비사걸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너는 내 적수가 아니다. 노선배께서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으리가 생각하오만. 대단한 자신감이로구나. 최선을 다할 뿐이외다. 그 말을 끝으로 한 걸음 앞서 나온 태상문주는 검을 거꾸로 잡고는 살며시 허리를 숙였다. 전대의 선배에게 예를 표하는 자세였지만 비사걸은 순간적으로 전신을 옥죄어오는 예기에 호흡을 가다들으며 풍혼을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오냐, 실력을 보겠다.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오너라. 검을 비스들히 누인 비사걸이 선공을 양보했다. 무릇 싸움에서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세라는 적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었다. 엇비슷한 실력을 지녔을 때는 물론이고 상대에 비해 다소 실력이 부녹하더라도 시세를 살려 기선을 제압하고 끊임없이 공세를 취하다 보면 싸움이 결과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나타날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공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했다. 무림에선 보통 상대에 비해 연배나 실력이 높은 사람들이 선공을 양보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선공을 양보함으로써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킨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선공을 양보함으로써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킨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때때로 쓸데없는 명예나 자존심을 앞세우다 낭패를 보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비사걸의 모습이 그렇게 모일지도 몰랐다. 며칠 동안 이어져온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치고 온몸에는 트고 작은 부상으로 덮여 있었다. 생사기로에 설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도 서너 군데는 되었다. 그럼에도 선공을 양보한 것이다.누가 보더라도 무모하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태상문주는 물론이고 숨도 쉬지 못하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의 노인이 누구던가!! 백 년 이내에 검을 쥔 자들이라면 백도와 흑도를 떠나 소림사의 달마대사나 무당의 장삼봉조사 보다도 먼저 그이름을 듣고 존경하며 흠모한다는 검왕 비사걸이었다. 선공을 양보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과연, 부상을 당했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란 말인가. 살짝 숙인 상체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 보였고 비스듬히 누이다못해 거의 땅에 끌릴 정도로 아래로 내려진 검에서 일말의 날카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허술해 보이기만 한 자세와는 달리 지그시 쏘아보는 비사걸의 눈빛 때문이었다. 태상문주는 그의 눈빛에서 여름 한낮에 이글거리는 태양보다 더 뜨겁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동토를 휩쓸며 지나가는 한풍의 차가움을 동시에 느꼈다. 또한 도저히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무저갱과 심해의 고요함을 보앗다. 대, 대단하다. 역시 검왕. 치열한 싸움을 한 것도 아닌데 등줄기는 이미 축축해진 상태였다. 태상문주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고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파악할 것만 같은 그의 눈빛에서 형언할 수 없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수세적인 입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이러할진데 만약 공세를 취한다면 얼마나 가공할 것인가! 그러나 언제가지 머뭇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상대가 검왕이라면 그 역시 천하를 노리는 거대 세력이 태상문주였다. 힘든 싸움이 될지언정 피할 수는 없었다. 태상문주는 짧게 심호흡을 하며 전신의 기운을 곧추세운 검끝에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그의 눈이 떠짐과 동시에 짧은 기합성이 주변에 울리고 태상문주의 몸이 공간을 가르며 나아갔다. 극고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들에게 상대와의 거리는 그다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기합성이 끝나기도 전에 접근한 태상문주의 검이 낙뢰와도 같은 빠름으로 폭사되었다. 눈으로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로 빠름과 그 순간에도 현란한 변화를 일으키며 접근하는 검. 엄밀히 말하자면 검봉에서 뻗어나온 기라고 할 수 있었는데 하나하나에 숨이 막힐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만 근의 거석이라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한 위력에 비사걸의 얼굴이 묘한 희열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나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 것이 꽤나 즐거운지 방어를 위해 풍혼을 움직이는 비사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좋군. -------------------- 미치겠구나. 눈이 빠져라 땅바닥을 살피는 한조는 화끈거릴 정도로 따갑게 쏘아 보는 시선을 의식하며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코를 흙 속에 처박은 듯한 자세로 흔적을 찾은 지도 벌써 한 시진째. 고개가 뻣뻣이 굳어오고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팠지만 그는 감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남궁세가를 몰살시킨 자들을 추격한 자도 벌써 하루하고 반나절이 흘렀다. 시작은 좋았다. 희미하기는 했지만 흔적은 확실히 남아 있었고 평생을 그 방면에 바친 한조에게 있어 역으로 추격하는 것은 기방의 계집을 후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지고 말아싿. 동북쪽으로 이어졌던 놈들의 흔적이 갑자기 서쪽으로 바뀌고 설상가상으로 지난밤에 꽤나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 가뜩이나 희미했던 흔적들이 빗물에 깨끗이 씻겨 내려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두 눈으로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햇는지 뻔히 봐서 알고 있으면서도 흔적을 찾아내지 못하면 당장에라도 죽일 듯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우라질 놈이 있다는 데 있었다. 을지호는 한조에게 정확히 한 시진의 여유를 주었다. 그리고 시간내에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목숨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하였다. 사중명이 있음에도 대놓고 그리 말한 것은 한조는 물론이고 여차하면 사중명을 비롯하여 비혈대 전원을 쓸어버리겠다는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어느세 시간은 그가 경고한 한 사진을 넘기고 있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 동료의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 한조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흔적을 찾고자 노력했다. 흔적이 끊긴 곳을 중심으로 사방 백여장을 뒤져 보았으나 이미 빗물에 씻겨져 완벽히 사라져 버린 흔적을 찾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미, 미치겠구나. 숨이 턱턱 막히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인해 눈마저 따끔거렸다. 바로 그깨였다. 어이, 견안! 싸늘한 음성에 화들짝 놀란 한조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불안한 눈으로 을지호를 응시했다. 언제부터인가 귀안이란 멋진 별호가 견안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수치감을 느낄 여력도 없었다. 약속했던 한 시진이 지났다. 시, 시간이 부족한.... 시끄럽고.... 못 찾았지? 그, 그게....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시선은 을지호에게서 벗어나 긴장할 대로 긴장하고 있는 사중명과 동료들에게 향해 있었다.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냉정하게 말을 자른 을지호가 손을 뻗엇다. 어느새 옷깃을 잡아채 오는 손, 잡히면 죽음이라느 생각에 한조는 혼신의 힘을 다해 뒷걸음질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런데 자신의 동료들 틈으로 숨으려고 했던 한조는 그들을 휠씬 지나치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고 말았다. 을지호에 대한 공포로 인해 강약을 조절하지 못해 중심을 잡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손을 뿌리치며 도망가는 그에게 날린 을지호의 장력이 그의 등에 적중했기 때문이었다. 멈추게! 깜짝 놀란 사중명이 을지호를 제지하며 소리쳤다. 일제히 검을 뽑은 비혈대의 대원들이 사중명을 에워싸듯 보호했다. 행여나 그들이 섣부른 행동을 할까 살짝 고개를 흔들어 움직임을 제어한 사중명은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흔적을 놓쳐 유감이네만 자네도 보다시피 한조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네. 그는 나뭇가지에 남아 있는 물기를 훑으며 지난밤의 비를 상기시키려 노력했다. 이런 일은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할 뿐, 중요한 것은 그자들을 놓졌다는 것이오. 무슨 뜻인가? 객관적으로 드러난 정황으로 보아 남궁세가의 일에 패천궁이 관련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터, 당신들이 범인이라고 단정한 그자들을 찾지 못한 이상 책임질 곳을 패천궁뿐이라는 것이외다. 나직이 깔리는 그의 음성에서 살의를 느낀 사중명은 자신들이 꽤나 심각한 상황에 처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곁을 지키던 수하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바싹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어쩌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도 아니건만 어쩌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했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당장 급한 것은 위기를 벗아나는 것. 다만 문제라면 상대의 실력이 너무나 강해 그마저도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젠장, 자칫 잘못하면 일을 원만히 해결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곳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겠구나. 자신들과 수하들의 힘이라면 웬만한 고수는 눈에 차지도 않았을 것이나 눈앞에 있는 인물은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당금 무림에서 적수를 찾아보기가 힘든 가히 최강의 고수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패천수호대의 대주 화천명이 그에게 한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부득이한 상황이 온다면... 정면으로 대항할 생각은 하지 말고 무조건 피하십시오. 싸우면 죽음뿐입니다. 죽음뿐이라... 그래. 화 대주는 그와 만난 적이 있었지.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여러 말 하지 않겠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사중명의 전음성이 비혈대 대원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대항할 생각하지 말고 그 즉시 몸을 돌려 피해라. 지금의 상황을 본 궁에 알려 대책을 강구해야... 그러나 다급하게 이어지던 사중명의 전음은 갑작스레 터져 나온 한조의 환호성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차, 찾았습니다! 축축이 젖은 땅바닥에 나뒹구는 바람에 옷이며 얼굴이며 할 것 없이 흙투성이였지만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환했다. 찾다니 뭘? 그의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사중명이 황급히 되물었다. 놈들이 이곳에 머물렀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한조는 자신이 처박혔던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모든 이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엿다. 그리고 그들은 한조의 몸에 의해 한쪽으로 쓸린 흙 속에서 타다 남은 나뭇가지와 숯덩이를 볼 수 있었다. 놈들은 이곳에서 야영을 했습니다. 불을 지핀 흔적도 있고 동물의 뼈도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흠, 과연 그렇군. 진작 찾아냈으면 험한 꽇을 보지 않았을 텐데. 쓰윽 얼굴을 들이민 을지호가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말했다. 발끈한 한조의 대답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흥, 일각의 시간만 더 주었으면 틀림없이 찾아냈을 것이오. 덕분에 일각의 시간을 아꼈으면 된 것이지. 그나저나 이것만 찾아냈다고 다는 아닐 텐데? 야영한 흔적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흔적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을지호는 나름대로 걱정을 하여 지적한 것이었으나 한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오. 냉랭히 쏘아붙이고 몸을 돌린 그는 품에서 꼼지락대고 있던 적묘를 꺼내더니 타다 남은 나뭇가지며 숯, 짐승의 뼈와 그것들에 조금씩 붙어있던 살점들의 냄새를 맡게 했다. 저게 뭣 하는 짓이오? 한조의 의도를 파악한 을지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냄새를 기억시키는 것일세. 생사의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인지 얼굴에 화색이 돌던 사중명이 엷은 웃음을 보이며 대꾸를 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오. 이제부터는 적묘가 놈들을 쫓을 것이네. 개도 아니고 고양이에게 냄새를 맡게 해서 뭘 어쩌자는 것이오? 그리고 행여나 냄새를 맞을 수 있다고 쳐도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소. 비까지 내린 마당에. 을지호는 불신에 가득 찬 어조로 사중명을 다그쳤다. 하나 적묘를 쳐다보며 고개를 돌린 사중명은 태연스럽기만 했다. 믿어보게나. 적묘는 다른 고양이와는 달리 조금은 특별한 녀석이니까. 놈들에게 정확히 안내할 것이네. 자, 움직이지. 사중명이 냄새를 맡고 벌써부터 달리고 있는 적묘를 가리키며 몸을 돌렸다. 후~~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패천궁엔 괴상한 인간들도 많다더니만 인간들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 그렇군. 그나저나 잘 도착하셨는지 모르겠네. 그분의 성정으로 보아 패천궁을 발칵 뒤집고도 남으실 텐데. 그다지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을지호는 그들에게 당장 책임을 묻는 것보다는 지푸라기라도 한번 잡아보자고 생각했다. 또한 사중명이나 한조가 그토록 믿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뒤를 따랐다. --------------------------------- 꽈꽈광!~! 요란한 충돌음이 십왕봉을 뒤흔들었다. 땅이 뒤집히고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오랜 풍상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오던 천년 거석들이 한 줌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좀처럼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던 십왕봉은 그렇게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태상문주의 선공으로 시작된 싸움은 어느새 수십여 초를 교환하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처음 기세 좋게 공격을 하던 그는 점차 비사걸의 기세에 눌려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차츰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들만이 눈치 챌 정도로 미약한 것으로 둘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황급히 몸을 피한 뒤 고개만을 빠끔히 내밀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누구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치열한 싸움으로만 보였다. 이제야 알겠다, 네가 누구인지를.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뒤로 물러선 비사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상문주가 조용히 물었다. 무엇을 말이오? 평생을 검 하나에 목숨 걸고 살아온 나다. 어려서부터 접해보지 못한 검법이 없다.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고 책과 사람의 입을 통해 접한 것은 내 스스로 형상화시켜 보기도 했지 지금 네가 사용하는 검법 또한 과거 접해본 적이 있는 무공. 그랬구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하기는 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상대는 검의 최고봉인 검왕이었다. 태상문주는 그다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근본을 감추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렇게 감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소이다. 담담히 대꾸하는 태상문주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굳이 감추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의 의미를 모를 비사걸이 아니었다. 네가 지닌 무공이 천하의 일절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그 정도의 무공으론 나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당장 검을 놓고 쓰러져도 무방할 부상을 당했음에도 툭툭 내던지는 비사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허세나 자만심이 아니라 절대강자만이 자연스레 지닐 수 있는 여유였다. 그런데 당연히 반발할 줄 알았던 태상문주가 인정한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힘들 것이란 생각을 했소. 승부를 포기한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소? 지금부터 시작이외다. 말을 마친 태상문주가 살짝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음. 짧은 침음성을 내뱉은 비사걸이 긴장된 자세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검을 고쳐 잡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무공은 한 번 펼쳐지면 상대를 쓰러뜨리기 전까진 멈춰지지 않소이다. 조심하시구려. 그 말을 끝으로 생사의 결전을 하면서도 변하지 않던, 어찌 보면 노영웅의 풍모가 절로 느껴지던 태상문주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대신 그의 얼굴을 뒤덮은 것은 죽음의 사자와동 같은 차갑고 소름 끼치는 살기뿐이었다. 검봉에서는 기분 나쁠 정도로 시커먼 흑색 안개가 피어올라 검을 휘감았다. 온다. 검봉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며 공격을 감지한 비사걸은 전신의 기운을 끌어 모아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며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슈우욱!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성이 들리고 한줄기 묵빛이 풀숲을 가로지르며 사냥감에 접근하는 독사처럼 비사걸을 향해 은밀히 접근하였다. 검기? 하지만 일반적인 검기와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엇다. 비사걸은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검을 움직였다. 묵빛의 기운은 그의 검에 부딪쳐 튕겨 나갓다. 그러나 단지 방향을 튼 것인 뿐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헛! 묵빛의 기운이 훑고 지나간 수풀을 본 비사걸의 입에서 묵직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싱싱하게 살아 있던 나무며 수풀이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이름 모를 독에라도 중독된 듯 검을 잡은 손이 마구 저려왔다. 사이 하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검을 휘감고 돌던 시꺼먼 기운이 태상문주의 몸을 타고 오르더니 순식간에 그의 몸을 삼켜 버렸다. 그의 전신이 묵운에 덮이고 겉으로 드러난 것은 고작 다섯 치 길이의 검날뿐. 그러나 전해져 오는 기운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사걸의 목숨을 노리고 연거푸 날아오는 묵빛의 기운. 타핫! 탁한 함성과 함께 비사걸이 움직였다. 풍차처럼 회전하는 그의 검은 단 한 개의 기운도 몸에 접근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묵빛의 기운은 거세어만 갔고 그 숫자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서너 호흡도 채 지나기 전 비사걸의 주변은 온통 암흑으로 뒤덮여 버렸다. 크헛! 비사걸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노도와 같이 밀려든 묵빛의 기운 중 하나가 금성철벽과도 같은 방어막을 뚫으며 적중한 것이었다. 비사걸은 어깻죽지를 파고드는 고통에 이를 악물며 한 주먹도 더 되는 살점을 도려냈다. 묵빛에 적중당한 곳을 중심으로 살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가는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그것이었어. 방금 어깨에서 도려낸 살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썩어 들어간 살점을 보며 비사걸은 기억 저편에 잠들어 있던 하나이 사실을 되살려 낼 수 있었다. 암흑...마검이로구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팔은 물론이고 상반신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음에도 지혈할 생각을 하지 못한 비사걸은 전에 없이 격동하고 있었다. 암흑마검!! 정사를 떠나 당금 무림에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라 할 수 있었다. 기억하기도 싫고 해서도 안 되는, 모든 이의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자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으나 그 중대성으로 인해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무공이 바로 암흑마검이었다. 그리고 암흑마검은 곧 한 집단과 인물을 떠울리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육백여 년 전, 미증유의 힘으로 무림을 피로 물들엿던 세력이 있었다. 사방에서 일어난 그들은 정확히 백 일 만에 전 무림을 석권하고 피의 통치를 시작했다. 그들을 따르지 않는 문파난 무인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니 고개를 숙이지 않는 문파가 없었고 수많은 기인이사가 무림을 저버리고 은거를 해버렸다. 결국 끝까지 정기를 잃지 않고 대항했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힘으로 인해 삼십여년 동안 이어졌던 피의 통치가 끝이 나니 이를 일컬어 사천혈사라 불렀다. 사천혈사는 중원의 은성장, 북해의 한빙곡, 남만의 흑월교, 탑리목의 철혈마단이 연합하여 일으킨 것으로 사람들은 중원에서 일어난 은성장을 중천, 한빙곡을 북천, 남만에서 위력을 떨친 흑월교를 남천, 중원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후예들이 중심이 된 철혈마단을 서천이라 하며 네 개의 세력을 통칭하여 사천혈맹이라 칭했다. 특히 중천의 우두머리로 실질적으로 사천혈맹을 이끌었던 은성장장주의 무공은 하늘 아래 감히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로 개세적이었는데 그는 오대세가 가주들의 합공에도 무려 삼 일 낮발을 버티다가 아깝게 패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묵운에 몸을 숨기고 펼쳐지는 죽음의 검 아래에 그 누구도 칠 초를 버티지 못했다는 무공이 다름 아닌 암흑마검이었다. 사천이 일어선 것인가! 비사걸은 태상문주가 사용하는 암흑마검이라는 것을 알아보자마자 자신이 어째서 정사 양측의 무인들에게 쫓기게 되었는지, 아니, 그전에 무엇 때문에 패천궁이 전격적으로 장강 이북을 도모하게 되었고 남궁세가에 참화가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양의 탈을 쓰고 꽤나 오랬동안 숨어 있었구나. 인고의 세월이었소. 묵운이 격하게 흔들리며 말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멍청한 백도 놈들. 제놈들을 잡아먹고자 엎드려 있는 늑대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노선배가 이곳에서 죽을 이유가 또 하나 생겼구려. 쉽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암흑마검은 그야말로 최강의 무공, 평범한 무공으론 절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온몸에 부상을 입고 최후의 기력을 짜내 버티고 있는 지금의 상태라면 제대로 버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에겐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비사걸은 풍혼을 거둬들이더니 몸 안에 내제해 있는 선천진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명옥신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선천진기란 수련을 통해 기를 키우는, 보통 내공이라고 칭하는 후천진기와는 달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힘을 의미했다. 선천진기는 그 어떤 것보다 순수하고 신비하며 무궁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끝까지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성장하면서 접하는 세속의 탁기로 인해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흩어져 사라지거나 몸안 깊숙이 숨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선천진기를 보호하고 사라진 기운을 회복시키기위해서 온갖 방법을 시도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내공심법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내공심법은 몸 안에 후천진기로써 내공을 쌓을 수는 있었지만 선천진기를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극히 일부의 무공만이 선천진기를 보호하고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비사걸이 익히고 있는 명옥신공이 바로 그러한 무공이었다. 명옥신공을 운기하자 그 즉시 비사걸의 몸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흐릿했던 눈동자에선 쳐다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형형한 빛이 쏟아져 나왔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던 전신의 힘이 충만해졌다. 또한 태상문주가 일으킨 암흑의 기운에 대항이라도 하듯 그의 양손에서는 일설로 표현하기 힘든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하나의 검을 만들고 있었다. 황보세가에서 곽검명 등을 기겁하게 만들었던 무형검이었다. 검... 강인가? 아니, 비슷한 것 같은데 뭔가가 다르네. 분명 뭔가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던 비사걸이 미증유의 힘을 일으키자 서대경과 유천은 그가 지닌 저력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것과는 달리 비사걸의 상태는 가히 좋지 않았다. 비록 선천진기를 일으켜 막강한 힘을 뿜어내고는 있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무섭게 질주하는 거력을 감당하기엔 몸 상테가 너무 좋지 않았다. 오직 한 번의 기회뿐. 시간을 끌면 쓸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긴 비사걸은 한 번의 공격에 모든 힘을 쏟아내고자 하였다. 드드드드드.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지축이 울렸다. 나무가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온갖 동물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아났다. 수하들에게 피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서대경 등의 다급한 모습도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모든 소란을 단숨에 잠재울 거대한 충돌음이 십왕봉을 강타했다. 쿠쿠쿠쿠쿵. 온 세상을 덮어버리기라도 할 듯 가공하게 퍼져 나가는 암흑의 기운과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이 한데 엉켜 뿜어내는 기운은 상상을 초월했다.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천 년을 넘게 뿌리를 박고 십왕봉을 지키던 거목들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온갖 풍상에도 늠름했던 거석들이 힘없이 부숴져 버렸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이들의 애처로운 비명과 함깨 갈기갈기 찢어진 그들의 몸뚱이가 대지를 적셨다. 암흑의 기운이 훑고 간 곳에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빛의 기운도 모든 것을 파괴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 둘의 기운이 부딪친 곳에서 반경 십장은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된 거목도 십왕봉의 수호신과도 같았던 거석도, 비사걸을 잡고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인간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명의 절대자뿐이었다. 크으으으으 검을 땅에 박고 힘겹게 버티고 있던 태상문주의 입에서 탁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반은 잘려 나간 머리카락,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누더기로 변했고 그 마저도 붉은색으로 변해 버린 모습. 연거푸 피를 토해내는 그에게서 암흑의 기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에 반해 굳건히 버티고 있는 비사걸의 모습은 당당하기만 했다.서서히 고개를 들고 싸움의 결과를 살피던 이들은 태상문주가 패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며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비사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졌다. 아,아니외다. 이번 싸움은 나의 패배요. 수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중심을 잡은 태상문주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큰 부상을 당했지만 너는 살아남았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 침투하는 독기는 막았으나 오장육부가 상했고 거의 모든 심맥이 끊어졌다. 이렇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기적이지 ..... 아쉽구나. 조금만 더 버텨주었다면. 비사걸의 입가에 자조의 웃음이 지어졌다. 선천진기의 거대한 힘을 운용하면서도 위태롭기는 했어도 그런대로 잘 버텨주던 몸이 막 승리를 거둘 찰나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며 힘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길게 장탄식을 한 비사걸이 걸음을 옮겼다. 모든이의 시선이 그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몸이 멈춘 곳은 전장에서 좌측으로 십여장 떨어진 낭떠러지였다. 최소한 내 목숨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다. 무엇을 하려는.... 태상문주는 점점 기울어지는 비사걸을 보며 황급히 소리쳤다. 하나 그의 발은 이미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승부를 할 수 있었는데 아쉽구나. 노선배! 태상문주의 외침을 뒤로 비사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쇄혼계...... 영혼마저 부순다는 냇물이란 말인가? 끝났군. 유천은 스물일곱 번을 굽이쳐 흐르는 계곡을 보며 비사걸의 죽음을 확신했다. 시신도 찾지 못할 걸세. 비사걸의 몸이 계곡으로 사라지기 전 은밀히 비도 하나를 날려 확인사살을 시도했던 서대경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군사인 신도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뭣들 하고있어? 당장 내려가서 찾아봐! 절벽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던 그는 멍하니 서 있는 수하들에게 비사걸의 시신을 찾으라고 명을 내렸다. 신도의 해옹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미 기력을 잃고 있는 태상문주는 물론이고 두 장로도 만류하지는 않았다. 모든 일은 확실히 해야 하는 법. 더구나 눈으로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능력을 보여준 비사걸이 아니던가. 그와 같은 인물의 최후는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한다는 신도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보게, 유장로. 예, 태상문주님. 검왕에 대한 자네의 평가는 전적으로 잘못되었네. 차이가 있지만 극히 미미하다고 했던가? 태상문주의 음성은 허탈하기가 그지없었다. 그가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난 이렇게 살아 있지 못하겠지. 아니. 애당초 싸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군. 불완전한 지존신공으론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야. 짧은 안목으로 거목을 재단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돼버렸습니다. 살짝 얼굴을 붉히며 쓴웃음을 짓는 유천을 보며 태상문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부끄러워할 것 없네. 나 역시 자제와 다르지 않았으니. 어쨌든 끝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 주는 법입니다. 서대경의 말에 태상문주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웬일인지 가슴이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웃음 때문인가? 그의 머리 속에 쇄혼계에 몸을 던지며 살짝 보여주었던 비사걸의 웃음이 떠올랐다. ------------------------- 기호지세 패천궁의 악양 분타. 안휘명의 명을 받아 악양에 도착한 양단풍이 분타의 책임을 맡고 있던 고유와 마주 앉았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양단풍의 질문을 받은 고유는 길게 탄식성을 내뱉었다. 후~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네. 처참할 지경이야. 제갈세가가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지난 며칠간의 공격에 목숙을 잃은 자가 벌써 이백을 넘었다고 하는군. 그만한 희생을 치르로서 얻은 결과가 고작 두 개의 방어막을 파괴한 것이라니. 일곱 겹 중에서 말이야. 다른 곳도 아니고 제갈세가입니다.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 무모한 공격을 한 겁입니까? 분명 공격을 멈추라는 명이 내려진 것으로 압니다만. 답답했는지 양단풍의 음성이 다소 높아졌다. 하나 정중함을 잃지는 않았다. 원래 혈참마대 대주의 지위라면 웬만한 부타주룰 아래로 내려다볼 위치였지만 악양은 그 지리적 중대성 때문인지 분타를 책임지는 부타주에게 호법 이상의 지위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그만큼의 피해를 본 것이네. 지금은 공격을 멈추었을 것이야. 그나저나 앞으로는 어찌 되는 것인가? 본격적인 공격 명령은 떨어진 것인가? 간신히 억누르고 있어도 이곳저곳에서 계속 싸움이 일어나고 있어. 패천궁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전면전이 벌더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주력이 움직이지 않아 규모가 작을 뿐이었다. 예. 조금 전 궁주님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송구합니다만 이곳의 지휘권을 제게 일임하셔서.... 무슨 말을, 자네가 맡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자신보다 아랫사람에게 명령의 지휘권을 넘겨주고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궁주의 총애를 받고 있는 패천궁 최고의 무력 단체 혈참마대의 대주였다. 또한 지금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 어떤 식으로 공격할 생각인가? 고유의 질문에 양단풍은 그들 앞에 펼쳐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이곳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리라 생각했네. 고유는 양단풍이 가리킨 곳이 악양 분타와 가장 근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는 정도맹의 전초 기지라는 것을 알기에 쉽게 수긍했다. 그런데 곳곳을 짚으며 북상하는 손가락을 보며 그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아, 아니..... 양단풍의 손가락은 어느 한곳에 이르러서야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지막은 이곳입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가 가리키는 곳은 하남성에 위치한 정도맹의 총단이었다. 그것이 우리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질문을 던지는 고유는 상당히 회의 적인 표정이었다.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지요. 하하.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마하니 우리의 힘만으로 싸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일단 선발이라고 보면 됩니다. 궁주께서 곧 본 궁의 무인들을 이끌고 오실 때를 대비하여 길을 여는 선발대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네. 고개를 흔드는 고유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길게 숨을 내뱉은 그가 입을 열었다. 정도맹에서 파견한 무인들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서둘러 공격을 시작한다면 꽤나 많은 곳을 칠 수 있을 것이네. 문제는 바로 이곳. 고유가 가리킨 곳은 바로 제갈세가가 버티고 있는 지역이었다. 제갈세가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북상을 하면 옆구리가 비게 되네. 자칫 잘못하면 무방비로 당한단 말일세.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양단풍은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대답을 했다. 비지 않게 하면 됩니다. 비지 않다니? 이번 공격 계획은 군사께서 세운 것입니다. 물론 분타주께서 염려하신 제갈세가도 언급하셨지요. 무엇인가? 급한 마음에 재빨리 되묻는 고유와는 달리 양단풍은 느긋하기만 했다. 무리해서 제갈세가를 공격하지는 말 것. 다만 그들이 세가를 벗어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 선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를 한다면 본 궁의 주력이 당도하기까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물론 그 일은 지휘자의 역량에 따라 성패가 갈리겠지만 군사께서는 고 분타주님의 능력이시라면 충분하다고 전해오셨습니다. 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진출하지 못하도록 방어를 한다? 그거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 제갈세가가 무서운 것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세가를 둘러싸고 있는 기관 매복과 괴이한 진이니까. 좋아, 제갈세가는 내가 책임지지. 군사가 계획을 세웠다고는 해도 궁주가 허락을 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법이었다. 그것은 곧 궁주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 절로 힘이 났다. 또한 고유는 이번 일이야말로 하늘이 자신에게 준 중요한 기회라고 여겼다. 패천궁의 수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각 문파의 수뇌들을 소집해 주십시오. 그들에게도 봊 궁의 계획은 알려줘야 할 테니까요. 그리하겠네. 한데 언제쯤 시작할 셈인가? 가능하다면 당장에라도 출발할 생각입니다. 알겠네. 최대한 준비를 서둘러 보지. 고유는 뚫어져라 지도를 쳐다보는 양단풍을 뒤로하고 황급히 방문을 나섰다. ------------------------------------ 해가 중천에 떠오를 오후. 갑작스레 밀어닥친 전서구와 그에 실린 다급한 내용을 파악하는 왕호연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그 모든 소식이 그는 물론이고 모든이가 결코 바라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알려오는 것이디 때문이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말고 확실히 챙기도록 해라. 명심궁에 다녀오마. 몇 가지 서찰을 챙긴 그는 수하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후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멈추십시오. 네 명의 무인이 왕호연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명심궁을 호위하는 호위무사들이었다. 급한 일이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때마침 주변을 순시하던 용정정이 손을 흔들었다. 길을 터라. 관례를 깬 명령이었으나 명심궁은 물론이고 정도맹의 모든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그의 명은 충분히 힘이 있었다. 존명 호위무사들은 대답과 동시에 그들의 은신처로 돌아갔다. 고맙소. 왕호연은 살짝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하고 순식간에 명심궁으로 사라졌다. 흠, 뭔가 큰일이 터진 모양이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만나기 힘들다는 첨밀각주였다. 첨밀각이 정도맹의 눈과 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중한 일이 터졌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맹주님!! 용정정의 도움으로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도착한 왕호연이 명심궁의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어허, 여기가 각주의 안방인가? 많은 손님이 계시거늘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왕호연이 아니던가. 인상을 구기며 질책을 하는 천강 진인의 음성은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그러나 왕호연은 그의 말에 대꾸도 없이 천장진인에게 다가갔다. 맹주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맹주 옆에 있던 천중진인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재빨리 물었다. 빌어먹을 말코. 명목상의 맹주는 천장진인이엇지만 실질적으로 정도맹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천중진인이었다.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쏘아본 왕호연은 결국 엷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놈들이 대대적으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벌써 한개의 분타와 세 곳의 문파가 무너졌습니다.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 설마 저들의 본대가 벌써 올라온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선봉에서 싸움을 이끌고 있는 자들은 혈참마대로 확인되었습니다. 순간 이곳저곳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 혈참마대! 비록 궁주가 이끌고 있는 본대는 아니라지만 삼백여 명의 혈참마대는 명실상부한 패천궁의 주력이었다. 그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건곤일척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천여명이 훨씬 넘는 무인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합니다. 천여 명? 악양에 모인 인원이 그렇게 많았던가? 요 며칠 동안 공격이 없다고 하더니만 아무래도 제갈세가를 공격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그쪽으로 빠진 것 같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앗소이다. 놈들에게 시간만 벌어준 셈이 아니오.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킨 기도위가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는 정소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기회는 이때다 싶은지 천장진인도 거들고 나섰다. 이런 일이 두려워 선수를 치자는 것이었소이다. 하지만 방주의 주장을 따랐다가 선수는 커녕 뒤통수를 맞고 말았소. 피해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도대채 이를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정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패천궁이 이토록 전격적으로 치고 올라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저들에게서 대답은 왔는가? 대답이란 다름 아닌 사건의 전말을 확실히 파악하자는 정도맹 맹주의 친서에 대한 답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갈경의 질문에 왕호연은 손에 들고 있던 서찰을 맹주에게 전달했다. 황급히 서찰을 펴 내용을 확인한 천장진인은 황망한 표정으로 그 내용을 보여주었다. 서찰에는 단 네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기 호 지 세 중인들이 그 뜻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예를 차리지 못한 답변이라느니 불성실한 내용이라느니 하면서 떠드는 사이 그 뜻을 파악한 제갈경이 장탄식을 했다. 허허, 달리고 있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 멈출 수 없다라....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아직 달리는 상황까지 이르지는 않았건만... 어쩌면 저들도 이미 제삼세력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외다. 아니, 의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에 편승하여 무림을 도모하고 있구려. 한마디로 누가 음모를 꾸미든 말든 우리를 제압하고 그들마저 제압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소이다. 제갈경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는 정소의 어깨를 두들겼다. 자네의 주장은 확실히 일리있는 것이었네. 하지만 알면서 덤비는 상대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때였다. 천중진인의 손에서 불꽃이 일더니 맹주에게서 건네받은 서찰이 순식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저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적절한 응대를 해줘야겠지요. 준비는 충분히 되었으니. 중인들이 그의 삼매진화에 놀라는 사이 천중진인이 왕호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의 병력은 어디까지 이동해 있는가? 청운과 풍백당은 하남과 호북의 경계에, 명도와 월훈당은 이미 호북으로 들어선 것으로 압니다. 어디에서 두딪칠 것 같은가? 이쯤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빨리 지도를 펼친 왕호연이 대홍산이라는 곳을 지적했다. 하지만 전력을 따져 보면 열세입니다. 흥, 아직도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는 문파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천강진인이 정소를 보며 냉소를 지엇다. 소림사와 화산파도 걸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그들 문파는 정도맹에서도 탈맹한 상태이고 더구나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이들의 존재감이 아무래도 께름칙했기 때문에 그나마 만만한 개방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만 하게, 사제.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네. 곽화월의 안색이 일변하는 것을 느낀 천중진인이 재빨리 눈치를 주고는 말을 이었다. 청운과 풍백당을 최대한 빨리 이동시킨다면 어떤가? 그래도 하루 정도 늦습니다. 나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맹주의 생각은 어떠시오? 질문을 받은 천장진인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뜨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첨밀각주, 당장 그리 명을 내리게나.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명령에 답한 왕호연이 황급히 자리를 떳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천중진인이 곽화월과 소림사의 대표로 참석한 달마원의 원주 공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 물론이외다. 곽화월이 주저없이 대답을 했다. 공각 대사 또한 합장으로 허락의 뜻을 대신했다. 저들의 본진이 본격적으로 밀고 올라오면 그래도 역부족입니다. 역시 오대세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이제는 육대세가라오. 제갈경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들은 이미 싸움이 참여하고 있소. 본 가에서는 치열한 혈투가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태화 분타에 모여 있던 다른 세가의 정예들도 본 가를 돕기 위해 이미 출발했소이다. 그들과 본 가에 있는 병력이 힘을 합치면 꽤나 큰 전력이 될 것. 곧 연락을 취해 정도맹을 돕도록 하겠소. 고맙습니다. 허허, 가주의 말씀에 빈도의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제갈경의 대답에 천중진인은 다소 과장된 표현을 써가며 사의를 표했다. 그리곤 다소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선 급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제갈세가의 활약이 필요한 일이지요. 천중진인의 입가에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웃음이 지어졌다. ----------------------- 제갈세가의 모든 대소사를 결정하는 무후청. 아우는 어찌 생각하는가? 제갈융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너무나 평범해 오히려 비범해 보이는 문성 제갈은은 질문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저들의 요청대로 방어진을 풀고 공격하는 것은 좋으나 그러다 자칫 역습이라도 당한다면 그야말로 끝장이 아닌가? 하하,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후유~~ 이게 어디 웃을 일인가?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일세. 제갈은의 여유로운 태도에 가슴이 답답했는지 제갈융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방어막을 풀고 공격을 하자니 역습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정도맹이 정식으로 요청한 것을 거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작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어차피 벌어진 싸움입니다. 죽기 살기로 싸워야지요. 제갈은의 말은 사뭇 비장했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제강융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터졌다. 우형의 마음을 드만 애태우고 아우의 생각을 말해 보게. 무슨 좋은 의견이 없겠는가? 농은 이쯤에서 거두게나. 손님들도 있는데. 보다 못한 제갈근이 제갈세가를 돕기 위해 불원천리 달려온 당욱 등을 의식하며 제갈은을 책망했다. 농이라니요. 이 아우는 꽤나 심각하게 말을 한 것인데요. 뭐, 형님들께서 정히 그리 말씀하신다면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 짚어보도록 하지요. 담담히 입을 여는 제갈은의 태도는 조금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기 위해 숨소리마저 감추었다. 무후청엔 질식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어차피 패천궁을 상대하기 위해선 정도맹과 힘을 합쳐야 하고 당연히 그들의 요청은 거부하기가 힘듭니다. 더구나 아버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들의 요청엔 아버님의 의사가 포함되었다고 보면 옳을 것입니다.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 제갈융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정도맹의 계획대로 옆구리를 치고 들어가 포위망을 구축할 수 있다면 지금 진출하고 있는 무리들을 섬멸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다만. 말을 끊은 제갈은은 기다리는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찻잔을 홀짝거렸다. 그리곤 묵직하게 한마디 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가 문제지요. 충분하지 않겠는가? 제갈세가를 공격하던 인원이 대폭 준 데다가 당 가주께서 이끌고 온 지원군도 있고. 제갈극이 당연히 가능하지 않겠냐는 듯 대꾸했다. 제갈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들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원을 줄여 다른 곳을 공격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철저히 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갈은의 시선이 제갈능에게 향했다. 요소요소마다 함정을 파고 매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뚫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성의 말이었다.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패천궁의 본진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오히려 우리가 포위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제갈 가주께서 소식을 저하시길 오대세가의 정예들이 이미 이곳으로 출발했다고 하지 않던가. 당욱이 정도맹에서 온 서찰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래 봤자 패천궁의 본진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정도맹과 육대세가는 물론이고 백도의 모든 힘을 하나로 모아야 싸움이 되는 곳이 바로 패천궁이엇다. 육대세가의 힘만으론 대적하기가 불가능했다. 하니 어쩌면 좋겠는가? 뾰족한 방법이 없잖은가? 최선이라면 이곳에서 놈들과 싸우는 것이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아우의 말대로 정도맹의 요청을 거부할 처지도 아니고.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방법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어서 말을 해보게. 제갈융은 지푸라기라도 잡기위해 발버둘 치는 사람처럼 다음 말을 채근했다. 말씀드린 대로 저들의 본진과의 싸움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싸움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넷째 형님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난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갈능의 한마디한마디는 무한한 믿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야밤에 암습을 하든, 독을 풀든 어떠한 짓을 해서라도 저들이 미쳐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에 포위망을 뚫고 공격을 성공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짓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제갈능은 무네 삼지 않았다. 가주께서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암습에 독만큼 유용한 것이 없는 터, 현 무림에서 그것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독왕 당욱이었다. 어려울 것 없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당욱의 음성은 제갈능과 마찬가지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곳으로 이공 중이라는 오대세가의 정예들에게도 소식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최대한 빨리 움직이라고. 그래야겠지. 무엇보다도 내일 오전 중에는 포위망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만 된다면 저들보다 최소한 반나절은 빨리 모든 것을 매듭짓고 역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중간에서 오대세가의 정예들과도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먼저 진출한 병력은 독 안에 든 뒤지요. 역으로 치고 올라간다 해도 선발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기를 쓰고 달려올 놈들의 추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다소 염려가 섞인 당욱의 말에 제갈은은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쉽게는 되지 않을 겁니다. 무슨 방도라도 있는가? 글쎄요... 뭔가 수가 있겠지요. 담담히 대답하는 제갈은, 표정은 난감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기이하게 짓는 웃음 속에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 저들은 틀림없이 움직일 것입니다. 온설화는 제갈세가가 틀림없이 움직일 것이라 확신했다. 우리의 본진이 북상하고 있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역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나후성이 다소 회의적인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성공시켰을 때의 효과는 충분히 모험을 하게 만들 만큼 유혹적입니다. 또한 그들로선 정도맹과의 관계도 고려해야만 하지요. 흠, 그럴 수도 있겠군, 측면을 뚫고 포위망을 구축할 수만 있다면 혈참마대는 물론이고 공격에 나선 대다수의 문파들을 고립시킬 수 있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나후성이 곁눈질로 안휘명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지도만 살피고 있었다. 우리를 막을 방법이 있다는 건가? 한참 동안 지도를 응시하던 안휘명이 중얼거리듯 물엇다. 온설화가 기다렷다는 듯 대답했다. 아마도 문성 제갈은, 그가 나설 겁니다. 흠, 그자의 명성은 나 또한 들어 알고 있다. 제갈무후 이후의 천재라지? 하나 그가 우리의 발걸음을 막을 만한 힘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안휘명은 천하의 그 어떤 세력, 인물도 패천궁의 북상을 저지할 만한 힘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온설화의 생각은 달랐다. 충분히 있습니다. 충분히 있다? 되묻는 그의 얼굴에 노기가 피어올랐다. 나후성을 비롯하여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러 호법, 장로가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들의 표정 역시 안휘명과 다르지 않았다. 날카로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온설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들은 최대한 빨리 포위망을 뚫고 역으로 치고 올라갈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갈능을 선두에 세우고 공격을 한다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뚫릴 테니까요. 흥, 제갈능이 뛰어나기는 하나 놈들과 대치하고 있는 아군도 그리 만만치는 않네. 유난히 성질이 급한 호법 강소가 딴지를 걸고 싶었는지 한소리 했다. 대다수의 인물들이 그의 말에 동조라도 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 호법께서는 제갈능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사람들이 어째서 그를 화풍검이라는 별호 대신 무성이라 부르는지 생각하신다면 그리 말씀하실 수는 없지요. 하나..... 온설화는 강호가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더구나 독왕과 당가의 고수들이 있습니다. 순수한 무공을 따지자면 독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두려워할 상대는 아니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독을 사용한다면 사정은 달라지지요.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명색이 정파라는 놈들이 독을 쓰겠는가? 곧 죽어도 자존심 운운하는 놈들인데. 나후성이 그럴 리 없다는 듯 대꾸했다. 온설화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얼마나 빨리 포위망을 뚫고 치고 들어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본진과 부딫치느냐 그렇지 않고 피해 가느냐가 결정되니까요. 목숨 앞에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법입니다.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했을 때 백이면 백 사용할 것입니다. 뚫린다면 우리와의 거리는? 안휘명이 물엇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한나절입니다. 못 잡을 거리는 아니군. 문성이 나선다고 말씀다렸습니다. 그가 나선다면 꽤나 긴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도대체 어떤 능력이 있어 우리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늙은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고개를 흔드는 나후성의 말에 온설화는 짧게 그러나 더없이 진지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진법입니다. 진법?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온설화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비록 압도적인 전력은 아니더라도 요 며칠 동안 꽤나 많은 인원이 제갈세가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피해만 입었을 뿐 얻은 소득은 실로 미미한 정도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진법으로 인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한 것입니다. 하면 제갈은이 진법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막는다는 얘긴가? 그렇습니다. 그는 북상로마다 온갖 기진을 설치해 우리의 발걸음을 저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법이라는 것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만한 병력을 막으려면 꽤나 대규모로 펼쳐야 그만한 시간이 있을까? 안휘명이 물엇다. 불가능하겠지요. 하나 제갈은 과 제갈세가의 능력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괴롭힘을 당핳 수 있습니다. 특히 무후 때부터 내려오는 팔진법은 꽤나 난감한 기진으로 난적이 될 것입니다. 흠, 일리가 있는 말이고군. 그런데 팔진법? 과거엔 어땠는지는 몰라도 팔진법이라면 왠만한 식견을 가진 자라면 모두 알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진법이 아닌가? 고개를 끄덕이던 나후성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진법이라 잘 아는 듯하여도 그 단순함에 담긴 오묘한 힘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지세와 자연기물을 이용하여 펼치는 팔진법은 정말 상대하기 두려운 존재입니다. 파훼시킬 수 있겠지? 안휘명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어쩔 수 없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제갈세가가 펼치는 진법이니. 안휘명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강소가 조금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의견을 조용히 내비쳣다. 차리리 제갈세가를 친다면 어떻겠습니까, 궁주님? 제갈세가를? 안 됩니다. 안휘명을 대신한 온설화의 대답은 전에 없이 강한 어조였다. 성공할 수는 있으나 피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웅크리고 있는 적을 상대로 일부러 힘을 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여 시간을 너무 지체한다면 선발대가 고립될 상황이네. 우리가 저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포위망을 뚫은 이들이 역으로 쳐 올라가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네. 나후성이 사뭇 염려스런 몸 동작을 해 보이며 걱정을 했지만 온설화는 태연했다. 두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두 가지라니? 나후성이 괴이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양새를 보니 한 가지 변수는 그 역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시다시피 남하하는 고수들을 막기 위한 패천수호대의 움직임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만독문의 고수들 중 일부가 포위망에 합세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만독문이! 그것참 다행한 일이로군. 혹시 독혈인도 있는가? 다섯뿐인 독혈인을 함부로 굴리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문주의 아들이 참여했다고 하니 한 구 정도는 딸려 보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나마 잘됐군. 독혈인이라면 저들도 꽤나 당황할 것이야. 그 괴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상대니. 절대적인 힘으로 군림하는 패천궁이 오죽했으면 다섯 이상을 만들지 못하게 했으까? 나후성은 독혈인이 지닌 위력을 생각하며 살짝 몸을 떨었다. 어느 정도 설명이 끝난 듯하자 안휘명이 입을 열었다. 변수는 변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 빛을 발휘하려면 그것을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에 달린 법.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할것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속도를 높이라 명하라. 안휘명의 명에 모두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존명. ----------------------------- 독 혈 인 놈들의 공세가 실로 만만치 않습니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격전을 펼치다 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보거를 하는 명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예상했던 일 아니냐. 그렇게 당황할 것 없다. 제갌가를 포위하고 있는 각 문파의 수뇌들과 자리를 함께하던 고유는 나름대로 침착성을 유지하며 벌일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그래, 어느 정도이기에 그리 다급하게 달려온 것인가? 고유의 눈치를 힐끔살핀 거륭방의 방주 상문동이 물었다. 양 옆으로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이며 염서마냥 가늘게 자란 수염이 꽤나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지만 그런 외모와는 달리 그가 잔인하고 매섭기 짝이 없는 손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명천은 재빨리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적어도 백여 명은 넘어 보입니다. 지금껏 수제적인 자세였던 제갈세가가 아니던가. 역습치고는 그 규모가 상당한 것에 놀란 고유가 되물었다. 백여명? 그 정도라면 제갈세가의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느냐? 제갈세가뿐만 아니라 다른 세가의 놈들도 보입니다. 음, 제갈세가를 돕기 위해 왔다는 놈들인가 봅니다. 상문동이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미 정면에서 놈들을 막고 있던 흑성문이 무너졌고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선 귀두문과 선설파도 궤멸 직전입니다. 뭣이!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연락이 온 지가 고작 이각이다. 한데 벌써 그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그들의 수가 얼마인데.... 나름대로 냉정함을 유지라혀 노력하고 있던 고유가 두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세 문파가 동원한 무인들의 수는 거의 이백이 넘는 대규모였다. 물론 그 정도의 수로 실력 면에서 월등한 제갈세가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각이라면 그야말로 손쓸 틈도 없이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흑성문이야 그렇다 쳐도 궁 문주가 직접 나선 귀두문과 선설오객이 지휘하고 있는 선설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을 텐데 그렇게 쉽게 무너졌단 말인가? 상문동이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최근엔 우정으로 변한 궁해수의 안위를 걱정하며 질문을 던졌다. 명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궁 문제깨선 오 초를 버티지 못한 채 목숨을 잃으셨고 선설오객 또한 죽을 힘을 다해 합공을 했자만 십여 초를 견디지 못하고 역시 목숨을 잃었습니다. 팍! 상문동의 손아귀에서 춤을 추던 술잔이 산산이 바스러졌다. 누구냐! 누가 궁 문주를 해한 것이냐!! 제,제갈능입니다. 흠칫 놀라 황급히 대꾸하는 명천, 그 순간 장내엔 깊은 정적이 맴돌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성이었다. 궁해수와 선설오객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이해가 갔다. 결국 그가 본격적으로 나섰군. 고유의 입에서 더할 나위 없이 침울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비단 고유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침음성과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성이라는 별호는 그만큼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바로 그때 한 사내가 몸을 일르켰다. 그렇게 두려월할 것 없습니다. 놈들을 막아내자면 어차피 건너야 할 산이었습니다. 그자는 우리 만독문에서 맡도록 하지요. 무성이란 이름에 주눅이 들어 한숨을 내쉬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서는 사내는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도 무시하지 못할 예기를 뿜어내고 있는 만독문의 소문주 기소강 이었다. 그리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네. 고유가 반색을 하면 환영했다. 상대는 무성 제갈능이오, 궁 문주와 선설오객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괴물이란 말이오. 솔직히 이고에 모인 사람 중에는 궁 문주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겠지만 그 차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보오. 내 만독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너무 위험하지 않겠소이까? 행여 낭패라도 당한아면..... 상문동이 짐짓 염려스런 말투로 기소강을 걱정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자면 자신들과 비고해 손색이 없는 궁 문주가 당했다는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느냐? 쓸데없니 나서지 말고 목숨이나 보전호려는 듯하 노롱이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기소강이 아니었다. 그러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만독문을 뒤두문 따위와 비교하려 하지 마시오. 너! 대노한 상문동이 자리를 박치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고유가 재빨리 그의 팔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귓가를 파고드는 전음성이 있었다. 만독문이라는 것을 잊지마시오. 유난히 무거운 고유의 전음성에 뭔가를 느낀 상문동이 흠칫 놀라며 재빨리 운기를 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놀람으로 물들었다. 미약하나마 느껴지는 것은 분면 독이었다. 어, 어느세. 심각한 것은 아니니까 너무 놀란 표정 짓지 마시구려. 큰 숨을 몇 번 들이쉬면 자연적으로 없어지는 것이니. 그래도 함께 싸우는 처지인데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고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소강이 입가에 지었던 미소를 지우며 대꾸했다. 노선배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 정도로 끝낸 것이지 만약 제가 아닌 아버님께서 계셨다면 상 문주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도.... 후~~ 기소강의 부친과는 그 역시 안면이 있었고 폭급한 성정도 알고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고유는 더 이상 질책을 할 수 없었다. 말씀드린 대로 제갈능이라는 자는 우리 만독문이 맡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이것을 복용하라고 전해주십시오. 명천이 기소강이 내미는 주머니를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다? 해독약입니다. 해독약? 독을 쓸 생각입니다. 조심은 하겠지만 독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제어되는 것도 아니고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것도 아니니.... 슬쩍 고개를 돌려 검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시립해 있는 수라를 보는 그의 입가에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 근처에는 오지말라고 하십시오. 해독약을 복용했다고 자만하다간 자칫하면 손쓸 틈도 없이 목숨을 잃은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측면 지원이나 확실히 해주십니오. 기분 나쁠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기소강을 보며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그의 장담대로 만독만이 제갈능을 막아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 운무에 휩싸인 전방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듣고만 있어도 절로 소름이 끼치고 자신의 목이 잘려 나가는 듯하 느낌을 주는 처절한 비명만이 사람들의 귓가를 자극했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가 들리고 그때마다 귀를 찢는 비명성이 뒤따랐다. 문주님, 지원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전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은섬검문의 문주 곽이문은 고개를 흔들어싿.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기다리다 놈들을 기습하는 것이야. 고유는 제갈세가를 중심으로 그들이 진출을 시도할 여러 길목에 완벽에 가까운 매복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중 은섬검문은 제갈세가의 북문에서 서북쪽의 산길로 이어지는 조그만 소로를 책임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지도 않는 적을 기다리며 시간만 보내다간 저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놈들의 모슴을 보아하니 일단 서문 쪽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뒤에서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 그러나 곽이문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가 갈등하는 사이에도 비명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사부님! 호정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알았다. 그리하자꾸나, 신호를 보내라. 대제자인 호정의 충고를 받아들인 곽이문은 마침내 공격의 결심을 굳힌 듯했다. 호정은 조금도 지체없이 신호를 보냈다. 삐익~ 은밀하면서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을 숨기고 있는 이들을 부르는 신호였다. 그러나 운무를 빠져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삐익~ 조금 전보다 다소 날카롭고 커진 음색의 휘파람이 숲을 울렸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뭣들 하는 거야!! 당황한 호정이 재차 휘파람을 불려고 입을 오므렷다. 그 순간이었다. 한줄기 비웃음이 그와 곽이문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애쓸 것 없다. 휘파람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누구냐! 번개같이 몸을 뺀 호정이 검을 치켜세우며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대답 대신 날카로운 파공음이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비명성. 커컥! 호정은 자신의 목줄기를 파고든 날카로운 물체가 무엇인지도 알기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아야! 곽이문은 애제자의 죽음을 보며 놀라 부르짖었다. 사제의 정이 돈독하군.하나 그렇개 애석하게 생각할 것 없다. 금방 따라갈 터이니. 네놈들이 감히! 곽이문은 조롱 섞인 음성으로 이죽거리고 있는 중년인, 한때는 당욱과 가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던 당무흔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쉬워하지 말라니까. 웃음 띤 당무흔의 음성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고 있던 그의 손끝에서 뭔가가 발출되었다. 곽이움은 그것이 호정의 목숨을 빼앗은 것임을 직감하고는 재빨리 몸을 틀며 물체를 낚아챘다. 이따위 조잡한 물건으로 치졸하게 암습을 하다니. 곽이문이 손가락 사이에 낀 철질려를 내동댕이치며 노호성을 터뜨렸다.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당무흔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역시 사부라 실력이 조금 있군. 그렇다고 무작정 잡으면 안 되지. 뭐가 묻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안타까움이 절로 묻어 나올 듯한 그의 음성에 아차 싶은 곽이문이 철질려를 잡았던 손을 살폈다. 철질려에 극독이 묻어 있었는지 손은 어느새 새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비겁한 놈. 황급히 혈을 눌러 독기가 번지는 것을 막은 곽이문이 원독에 찬 눈빛으로 당무흔을 쏘아보며 몸을 날렸다. 제법 빠르군. 순식간에 접근하는 그를 보면서도 당무흔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슬쩍 발걸음을 바꿔 공격을 벗어나면서도 반격을 하지 않았다. 대신 뜻모를 말을 지껄였다. 넷, 다섯... 일곱, 여덟, 거기까지. 여덟까지 헤아린 당무흔이 발걸음을 멈추고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곽이문을 응시했다. 죽일 놈, 네놈이 언제까지 그런 여유를 부리는지 보겠다. 당무흔의 태도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한 곽이문은 전신의 진기를 남김없이 끌어올렸다. 그러나 막 걸음을 내딛던 그는 활화산처럼 끌어오르던 진기가 한 줌 먼지처럼 사라지고 머리가 어지럽고 호흡이 가빠짐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곽이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팔보추혼. 사자에 대한 예의 하고 생각했는지 당무흔이 조금은 진지한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파, 팔보... 그, 그렇다면 당가... 곽이문의 의식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의 칠공에선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끝났군. 곽이문을 끝으로 은섬검문의 삼십 문도는 변변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대규모의 싸움이 벌어진 지도 벌써 반 시진이 넘었다. 그동안 지키는 데 역점을 두다가 마침내 반격에 나선 제갈세가의 힘은 막강했다. 특히 정면으로 치고 나가 각 문파의 주요 고수들을 제거하는 제갈능의 활약은 단연 발군이었다. 그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수도 없이 많은 적에개 둘러싸여 있어도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 한다 하는 고수들만이 몇 번의 손속을 겨루었고 그나마도 얼마 버티지 못한채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거기에 은밀히 뒤로 빠진 당가를 제외한 나머지 세가들의 측면 지원도 상당한 힘이 돼 계속해서 증원되는 적을 맞이하면서도 제갈세가는 거의 일방적으로 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싸움에 있어 승기라는 것은 잡기도 힘들뿐더러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기란 더욱 힘든 법이었다. 더구나 상대의 전력이 그다지 뒤쳐지지않고, 아니, 어쩌면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자칫 잘못하여 반격의 실마리를 주었다간 낭패를 볼 수 있었다. 닥치는 대로 적을 베면서 제자들과 수하들을 독려하는 제갈극과 팽과해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멈추지 마라. 손속에 인정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숨에 끝내야 한다. 힘들게 잡은 승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바로 그때였다. 으악! 크아아악! 남쪽 어귀에서 난데없이 처절한 비명성이 들리고 기세 좋게 공격을 하던 이들의 진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무슨 일이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짐작한 팽과해가 황급히 몸을 날리며 물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그를 맞이한 것은 짧은 순간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처절한 비명성과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치는 제갈세가, 그리고 팽가 무인들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정신 차려라. 무슨 일이냐? 그가 정신없이 도주하는 이들 중 팽가의 제자로 보이는 사내의 목덜미를 낚아채며 물었다. 기겁을 하고 소리 지르던 그는 팽과해에게 몇차례 뺨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네, 넷째 어르신. 그래, 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괴, 괴물입니다. 괴물? 괴물이라니? 헛소리를 해대는 것을 보니 아직도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아란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말해라. 괴물이라니? 재차 질문을 던지는 팽과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사내는 계속해서 괴물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결국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힘들다고 판단한 팽과해는 사내를 뒤로하고 직접 원인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팽과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코를 씰룩거렸다. 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절로 인상을 찌푸릴 만큼 역한 냄새였다. 독이다. 팽과해는 그 즉시 호흡을 멈추었다. 특별히 몸에 이상이 온 것이 아님에도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그리곤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성도 비명성이지만 힘없이 쓰러지고 있는 자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흙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내공이 강한 몇몇이 힘겹게 버틸 뿐 대다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독공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 빨리 알려야 한다. 독은 고수와 하수를 가리지 않고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하수들에 비해 고수들이 쉽게 당하지 않는 이유는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독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이 조금 더 뛰어나서 그런 것이지 만독불침의경지가 아닌 이상 완벽하게 독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만큼 독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더구나 이렇듯 다수를 상대로 하여 무차별적으로 하독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로 자칫 소홀히 다루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팽과해는 누가 독을 풀고 마구잡이로 살상을 하는지 알아내는 것보다는 우선 상대가 독을 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가가 함깨 있는 이상 빠르게 조치한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악! 그가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 한줄기 비명이 귓가를 강타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수천, 수만 명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른다 하더라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고은 팽과해가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무참히 쓰러졌다. 안,안 돼!!! 팽과해의 몸이 빛살과도 같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리고 간신히 명줄을 붙잡고 있는 청년을 안아 세웠다. 그의 안색은 이미 흑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 역시 같은 색이었다. 아, 아버....지. 고통스러운 듯 오만상을 찌푸린 팽마군이 아버지를 알아보고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아무 말도 말거라, 군아야.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힘들더라도 버텨야 한다. 이 아비가 곧 치료를 해주마. 그러나 팽마군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급격히 꺼져 가는 눈빛으로 부친의 얼굴을 살폈다. 간신히 뻗어 잡은 손에 최후의 힘이 들어갔다. 그리곤 부르르 떨리는 입술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괴, 괴...물...도...망.... 마지막 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 이 녀석. 정신 차려라. 정신을 잃어선 안 돼! 팽과해는 아들의 몸에 필사적으로 진기를 주입하며 안타까이 부르짖었지만 이미 끊어진 숨이 이어질 리 만무했다. 군아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팽과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십 평생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산고를 이기지 못한 부인을 일찍 떠나보내고 홀로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이었다. 어려서는 말썽도 많이 피워 힘들게 했지만 커서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이해해 주는 듬직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지금 당장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런 아들이 무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찢어지는 아픔이 밀려들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지금처럼 참담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대여섯 개의 암기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죽일 놈들!! 소맷자락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암기를 물리친 팽과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공격을 막고 몸을 일으키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아들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죽인다. 활화산같이 터져 나오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옷이 찢어질 듯 부풀어 올랐다. 바람 한 점 없건만 머리카락은 태풍을 만난 듯 휘날렸다. 하늘 높이 치켜세운 도에서는 서릿발 같은 한기와 날카로움이 뿜어져 나왔다. 몸이 움직였다. 십여 개가 넘는 암기가 그의 몸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팽과해는 치켜 올린 도를 재빨리 끌어당겨 암기를 막아냈다. 움직이는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아니, 가속이 붙었는지 더 빨라졌다. 크악! 그에게 암기를 던졌던 만독문 문도들의 몸이 걸레처럼 찢겨 쓰러졌다. 그저 한번 휘두른 것으로 보였건만 도합 서른두 번의 칼질이 그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간 까닭이었다. 분노로 니글거리는 그의 눈이 다음 상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싿. 모조리 죽인다. 크윽. 짧고 미약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숲 속에 잠복해 있던 서른여섯의 목숨이 아무도 모르게 이승을 떠났다. 끝났습니다. 숙부님쪽에서도 모두 마무리 지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수고했다. 하지만 한 겹 걷어낸 것뿐이다. 아직도 처리해야 할 놈이 많이 있는 터, 한 치의 방심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당가의 장자이자 치기 가주에 사실상 내정되었다고 해도 과연 이온 당온이 겸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혹여나 마음속에 자만심이 생각까 염려하여 같으로 드어나지 않았지만 당욱은 겸솜하면서도 당당하만 한 긔 모습에 내심 흐뭇해 해싿. 바로 그때 당욱을 향해 한 청년이 다급히 달려왔다. 백부님! 정견이로구나. 무슨 일이냐? 제갈가에서 급한 연락입니다. 연락? 무슨 연락이? 당전견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당욱이 황급히 되물었다. 독공을 쓰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독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지 않아서 그런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있답니다. 꽤나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는 듯합니다. 어떤 놈들이 독을 쓴다는 말이냐? 당욱이 어이가 엇다는 듯 되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가를 상대로 독공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슬그머니 화도 치밀었다. 아직 정확한 정체는 파악을 못한 듯하나 만독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순간 당욱의 표정이 확 변했다 만독문? 하지만 만독문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당욱이 모르는데 정견이 알 리 없었다. 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렇듯 다급하게 전갈을 보내 도움을 청할 정도면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당온의 말에 당욱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래야 할 듯싶구나. 일단은 우리가 가보자꾸나. 네 숙부에겐 계속 움직이라 연락을 하여라. 아니다, 그럴 것이 아니라 네가 직접 가서 숙부를 돕도록 해라. 하지만 저는 아버님을... 당온이 멈칫거리자 당욱이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괜찮다. 어설픈 독공 따위에 당할 내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살짝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당온은 부친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안심을 하며 대답을 했다. 만독문이라... 황급히 몸을 돌려 걸음을 놀리는 당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걱정이 없을 순 없었다. 만독문이라면 당가와 독을 논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문파였기 때문이었다. 괴이한 놈이군. 과풍도라는 명성에 걸맞게 단숨에 십여명이 넘는 적을 주살한 팽과해가 맹렬히 휘두르던 도를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사내에게 집중되었다. 검은 삿갓을 목에까지 눌러쓴 사내, 별다른 무기도 들지 않았고 걸음걸이도 일정한 그에게선 더할 수 없이 기분 나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생명을 읽고 차갑게 식은 시신을 마주하는 것과 같이 스산하고 기괴한 느낌. 본능적으로 꺼리게 만드는 묘한 기운이었다. 위험한 자다. 팽과해는 조금 전까지 들렸던 끔찍한 비명성이 눈앞의 사내와 연관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나뿐인 아들을 죽인 자라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네놈이로구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흥분하지는 않았다. 강적을 눈앞에 두로 흥분하는 것은 그냥 목숨을 내주는 것과 다름없는 법이다. 그는 상대가 강할수록 침착하지 못하면 낭패를 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타핫! 먼저 공격을 한 것은 팽과해였다. 그는 우선 광풍일순이란 초식을 이용했다. 과풍일순은 그가 익힌 광풍무도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광풍일순은 느린 듯하다 상대의 눈앞에서 갑자기 빨라지는 것이 그 움직임을 예측하기가 실로 어려웠다.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상대의 실력이 어떤지 금방 파악할 수 있어싿. 그런데 사내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들이닥쳤다. 미친.... 예상치 못한 반응에 팽과해의 입에선 허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별것도 아닌 상대에게 긴당한 자신의 꼴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이 경악성으로 바뀌는 것은 실로 순식간이었다. 깡! 헛! 살을 배고 뼈를 잘라야 하는 느낌은 간데없이 난데없이 들려오는 금속음에 그는 기겁을 했다. 더구나 도신을 타고 올라오는 힘에 손아귀가 저려왔다.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주변에 퍼진 독을 두려워하여 최대한 호흡을 자제하고 있음에도 단숨에 폐부로 파고드는 독기였다. 극히 소량을 흡입했을 뿐이건만 머리가 어지럽고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이 독해도 보통 독한 것이 아니었다. 독 따위에 지지 않는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팽과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평생 갈고닦은 절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진광풍과 함께 사내를 향해 무지막지한 공격이 작렬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생명을 담보로 펼치는 팽과해의 공격은 그 누구라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만큼 압도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팽과해의 공격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냈다. 받아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튕겨내기까지 했다. 도기가 그의 옷을 갈가리 찢어놓았지만 그뿐이었다. 구리빛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몸뚱이엔 상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큰 흔적이 허벅지 어귀에 난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살짝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 괴,괴물..... 팽과해는 그제야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만난 팽가의 제자와 아들이 죽어가면서 남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근거석이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한 공격을 받고도 멀쩡하고 움직일 때마다 끔찍한 독기를 뿜어내는 것을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괴물이 아니고서는 진정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컥! 팽과해가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폐부에 깊숙이 침투하여 순식간에 오장육부를 상하게 만든 독기를 더이상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끝장이군. 바로 전의 공격에 전신의 힘을 모두 쏟아낸 그는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죽음을 직감했다. 당장에라도 운기조식을 하여 독에 대항한다면 살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군아야.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먼저 떠난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십수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차가운 손이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까지 팽과해는 눈을 뜨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오로지 공포와 전율만이 존제하는 그곳에 난데없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고 팽과해의 가습팍을 뚫고 들어간 손을 막 빼내려던 사내가 삼 장이나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사내를 부리고 있던 만독문의 소문주 기소강을 비롯하여 그를 수행하고 있던 문도들의 눈이 형편없이 처박힌 사내와 그를 공격한 인물에게 일제히 쏠렸다. 만독문이냐? 어느새 팽과해의 곁으로 다가선 제갈늘이 팽과해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곤 분노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소이다. 그러는 선배는 뉘시오? 기소강이 사뭇 긴장하며 되물었다. 팽과해의 무공은 상상외로 뛰어났다. 그런 그의 무공으로도 감히 어쩌지 못한 독혈인을 단 한번의 공격으로 삼 장이나 날려 버린 인물에 대한 경계가 담긴 음성이었다. 나는 제갈능이다. 무성!! 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기소강이 그 자신도 모르게 흥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음. 만독문이 살포한 독 때문에 주변에서 역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한다고는 해도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독을 사용하는 것은 무인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한 제갈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꽤나 심한 짓을 했구....음. 제갈능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삼 장이나 날아가 처박힌 사내. 얼굴을 가리던 삿갓은 이미 사라져 없었고 의복 또한 넝마나 다름없는 사내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십성의 힘이 실렸거늘.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펼치는 십성의 공력은 웬만한 고수는 감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조금전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궁해수난 선설오객을 상대할 때에도 구성 이상의 힘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힘을 능히 짐작할 만했다. 제날능은 서서히 진기를 모으며 사내를 주의 깊게 살폈다. 구릿빛 피부에 얼굴과 손이 유난히 검었다.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눈엔 흰자위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검은 눈동자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잡초들이 순식간에 말라 죽었다. 독혈인이더냐? 호~ 선배께서 독혈인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소이다. 기소강이 다소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저렇듯 지독한 독덩이는 오직 만독문만이 만들어낸다고 들었다. 과찬이외다. 아무튼 독혈인에 대해 아신다면 그 위력도 알고 있겠소이다. 처음 그를 볼 때에 순간적으로 느꼈던 막연한 두려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하는 기소강은 여유만만했다. 그만큼 독혈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태도였다. 꽤나 단단한 몸뚱이를 지닌 것으로 알고는 있다. 하지만 못 부술 정도는 아니야. 흥, 그런지는 두로 보면 알겠지요.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기소강이 슬며시 턱을 치켜들었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그의 곁에서 멈춰 있던 독혈인이 괴성을 지르며 제갈능을 향해 덤벼들었다. 재밌겠군. 독혈인을 바라보는 제갈능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만독문이란 말인가? 이거 곤란하게 되었군. 속속 들어오는 보고를 접하는 제갈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초반 기선을 제압하는 공격과 은밀히 돌아간 당가의 기습은 스스로 평하기에도 너무나 완벽했다. 특히 당가는 그 이름에 걸맞은 환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당장 다섯 곳의 매복지를 뚫어내고 근 백이십이 넘는 인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으로 사실상의 공격은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만독문으로 인해 모든 것이 꼬이고 말았으니.... 백도에 당가가 있다면 흑도에는 만독문이 있다고 일컬을 만큼 만독문은 당가와 더불어 독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자 빗발치는 날아오는 전갈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독에 당한 이들이 벌써 사십을 넘었다고 하네. 제갈융의 안색도 제갈은 못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도 계속해서 당하고 있다는 것이지. 다른 쪽은 문제가 없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독공을 쓰는 자들과 싸운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네. 저들이 독공을 쓰면 우리도 독공으로 상대해 주면 됩니다. 독왕께서 직접 가셨다니 더 이상의 피해는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광풍도 선배를 물리쳤다는 그 괴물 같은 자인데... 분명 만독문에서도 꽤나 중요한 고수일 것이네. 당연한 생각이었다. 팽과해는 팽가는 물론이고 백도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로 통했다. 그가 당했다면 상대는 최소한 한 문파의 장로 이상되는 실력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라니? 제갈은의 얼굴이 근심으로 얼룩졌다. 검기와 도기에도 상하지 않는 몸뚱이를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전신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극독을 뿜어낸다고 합니다. 소제의 기억으로 이런 능력을 지닌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독혈인입니다. 독혈인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하던 제갈융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 지금 도, 독혈인이라고 해, 했나? 그렇습니다. 도, 독혈인이라면... 공포 그 자체지요. 상대하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설사 넷째 형님과 같은 실력자라고요. 그럼 지금 독혈인과 능 하우가 싸운다는 말인가? 예, 문제는 넷째 형님이 막지 못하면 여기 있는 그 누고도 독혈인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설사 독왕 선배라도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제갈능의 걱정에 또한 전체적인 전세를 걱정하며 제갈융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문제라면 모를까 예상치 못한 독혈인의 출현에는 제갈은 역시 딱히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만독문으로 인해 생긴 전력의 공백은 일단 예비 병력을 모조리 투입해서 만회할 수 있지만 독혈인은... 넷째 형님을 믿어보는 수밖에요. 싸움이 시작된 이래 제갈은의 안색이 지금처럼 어두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미 중독된 사람들은 피독단을 복용시킨 뒤 뒤도 물러나 치료를 하라 이르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빨리 복용시키도록 해라. 독이 살포된 지역에 도착한 당욱이 황급히 명을 내렸다. 짧은 대답과 함께 그를 따라온 다섯 명의 제자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피해가 너무 큽니다. 피독단을 삼키며 당욱의 곁으로 다가온 제갈근이 안타깝게 말했다. 자넨 괜찬은가? 이까짓 독에 당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만독문과 가장 먼저 부딪친 팽가는 전멸을 면치 못했습니다. 광풍도, 그 친구는 어찌 되었는가? 당욱이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했습니다. 역시... 이미 짐작했다는 듯 힘없이 탄식성을 내뱉은 당욱이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제갈능과 독혈인의 싸움을 가리키며 말했다. 독혈인... 저 괴물을 상대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겠지. 그의 눈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만독문! 이 악독한 놈들, 할 짓이 없어서 또다시 저런 마물을 만들어내다니!! 이를 갈며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당욱의 눈에 더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는 기소강과 그를 호위하기 위해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만독문도들이 들어왔다. 스산한 눈빛과 함께 당욱의 신형이 움직였다. 명불허전! 어째서 사람들이 무성을 그리도 치켜세우는지 알 듯하군. 당금 무림에 누가 있어 독혈인과 저렇듯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의 독혈인을 탄생시키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복잡한 과정이 있는지 또 그렇게 만들어진 독혈인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기소강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이니, 오히려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며 공격을 하고 있는 제갈능의 무위에 감탕을 금하지 못해싿.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분명 한계는 있다. 아무리 매서운 공격을 펼쳐도 견뎌내는 독혈인, 수없이 꼬꾸라지고 날아가 처박히면서도 꿋꿋이 일어나는 독혈인을 보며 그는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기소강의 생각은 정확했다. 비록 팽과해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맹한 검기에 독혈인도 많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간신히 독기를 억누르며 싸우고 있는 제갈능 도 많이 지쳐 있었다.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놀리던 발걸음도 점점 무뎌지고 간간히 입은 상처는 살을 한 움큼씩 잘라냈어도 순식간에 변색된 것이 보통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안으로는 독과 싸우고 밖으로는 독혈인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내 오늘 이 자리에서 무성을 쓰러뜨리는 만독문의 위대함을 직접 지켜볼 것이다! 호기롭게 외치는 기소강, 하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갑기는 그지없는 비웃음이 뒤를 따랐다. 흥, 네놈에게 그럴 기회는 없다. 누구냐! 기소강을 호위하던 두 명의 만독문도가 음성의 주인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와 가슴 어귀에 느껴지는 고통뿐이었다. 크아악! 커흑! 외마디 비명과 함께 힘없이 쓰러지는 그들의 가슴엔 너무나도 선명한 장인이 찍혀 있었다. 네가 저 마물을 데리고 온 놈이냐? 일수에 두 명의 목숨을 고혼으로 만들어버린 당욱이 놀라 쳐다보는 기소강에게 물었다. 적멸화장! 의복을 태우고 들어가 수하들의 가슴을 뭉개 버린 장법이 무엇인지 알아본 기소강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당가로군. 상대가 자신의 무공을 단숨에 알아낼 줄은 몰랐다는 듯 당욱의 눈가에 이채가 흘렀다. 적멸화장을 알아보다니 제법이구나. 만독문의 제자가 당가의 무공을 모를 리가 있겠소? 위력 또한 알고 있겠구나. 아직 겪어보지 못해서 모르겠소. 기소강이 기세에 눌리지 않겠다는 듯 소리치며 자세를 잡았다. 그와 더불어 살아남은 일곱 명의 호위가 당욱의 주변을 에워쌌다. 당가의 실력을 보겠소. 당욱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실력을 보겠다? 이길 자신이 있는 말투로구나. 나와 이들이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하외다. 네가 저 마물을 데리고 온 순간 너와 네 수하들의 목숨은 이미 끝이 난 것이다. 당욱의 손이 핏기를 잃고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어찌나 투명한지 가닥가닥 이어지 핏줄마저 보일 정도였는데 그것을 본 기소강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빙옥수! 빙옥수는 녹피로 만든 장갑이나 여타 도구도 필요없이 맨손으로 독과 암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손을 옥과 같이 단단히 만들어 보호하는 당가의 독문무공이었다. 당가에서도 빙옥수를 익힐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 사람뿐이었는데 그가 알기론 빙옥수는 오직 가주와 가주의 위를 이어받을 소가주에게만 익힐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 그렇다면 당신은... 눈앞의 사람은 소가주라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도, 독왕!! 상대를 알아봄과 동시에 기소강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조금 전까지의 자존심은 이미 천리 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겁하다 욕해도 할 수 없었다. 적에게 들을 보이는 것 역시 수치스런 행동이었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더한 것이라도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독왕이라면 애당초 상대가 될 수 없음이니. 이미 끝난 목숨이라고 했다. 싸늘히 외친 당욱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슈슈슉. 뭔가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소리가 멈춘 곳은 맹렬히 돌진하는 일곱 명의 몸에서였다. 파공성이 끝나는 대신 날카로운 비명성이 그 뒤를 따랐다. 도주하는 주인을 위해 필사적으로 덤볐던 그들은 당욱의 그림자도 밟아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아싿. 당욱의 시선은 그들의 주검을 넘어 저 멀리 도주하고 있는 기소강에 이르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놈. 제 목숨을 살리고자 수하를 버리고 도주하는 주인처럼 비열한 모습이 또 있을까? 네놈이 죽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의 철접이 허공을 가르며 기소강을 뒤쫓았다. 너울너울 날아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나비였지만 속도는 나비와 비할 것이 아니었다. 주인의 손을 떠난 철접은 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 기소강에게 짓쳐 들었다. 기겁을 한 기소강이 황급히 몸을 틀며 철접을 회피하려고 하였으나 진기에 의해 조종되는 철접을 피하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는 세 번이나 땅을 구른 뒤에야 간신히 철전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후우~ 하필 독왕이... 컥!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기소강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컥! 컥! 땅바닥에서 몸부림을 치며 목을 부여잡던 기소강은 목에 박힌 것을 간신히 빼내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분명 땅에 처박힌 것을 확인했건만 어느새 날아올라 목에 박힌 것은 다름 아닌 철접이었다. 무, 무슨 놈의 무기가... 그렇게 간단히 피할 수 있다면 생사접이란 이름이 붙지 않았을 것이다. 가소롭다는 듯 외치는 당욱, 이미 숨이 끊어진 기소강은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만독문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역전되었던 전세는 당욱을 필두로 하여 당가의 무인들과 그들로부터 피독단을 얻은 무인들의 활약으로 다시 뒤집어졌다. 모든 이가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이는 독왕의 활약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누구도 그의 일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졌다. 특히 만독문의 문도들은 단 한 사람도 독왕의 손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장내의 싸움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문제는 저쪽인데. 어느덧 걸음을 멈춘 당욱이 염려스런 눈길로 제갈능과 독혈인의 싸움을 주시했다. 후~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할 것 같은데. 현재 제갈능의 상황은 보기만 해도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공격을 제대로 적중시키지 못하고 피하는 데 급급했는데 힘겹게 몸을 놀리는 것이 이미 한계에 이른 듯싶었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제갈능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합공을 하여 물리치고 싶었으나 제갈능의 체면을 생각해서 쉽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욱은 곧바로 결심을 굳혔다. 체면도 중요한 것이지만 대적을 앞둔 당금의 상황에서 제갈능과 같은 뛰어난 고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던 제갈능의 몸에서 빛이 나는가 싶더니 그의 신형이 독혈인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어찌나 빠르던지 독혈인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깨 쪽에 일장을 맞고 독혈인에게서 떨어진 제갈능의 몸은 흩날리는 낙엽처럼 날아가 처박혔다. 안 돼! 기겁을 한 당욱이 제갈능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곤 빠른 동작으로 그의 전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도 제갈능은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수십번도 더 죽었어야 할 정도로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극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시간이 없었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당욱은 독혈인이 어찌 되었는지를 살필 겨를도 없이 치료를 시작했다. 황급히 뒤따라온 당가의 제자들이 그들을 호위했다. 당욱은 우선적으로 독혈인의 일장에 제대로 맞은 어께를 살폈다. 그 주변부에 벌써부터 괴사가 일어나는 것이 여간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일단 품에 있던 피독단을 복용시켰다. 그리고 빠른 손놀림으로 살을 베어내고 피를 뽑아 어깨에 파고드는 독기를 억눌렀다. 독기가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진기를 주입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제갈능이 간신히 의식을 찾았다. 정신이 드는가? 대답할 힘도 없는지 그는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쯧쯧, 무척이나 심하게 당했네. 완쾌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걸세. 마물의 독이 워낙 지독한 것이라서. 노, 놈은.... 독혈인 말인가? 걱정 말게나. 제대로 해치운 것 같으니. 당욱이 웃음 띤 얼굴로 가슴팍에 검이 꽂힌 채 쓰러져 있는 독혈인을 가리켰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금방 쓰러질 것 같던 몸에서 그만한 힘이 솟아나오다니. 놈이 끝장난 것도 모르고 자네를 치료하면서 놈이 달려들까 어찌나 간을 졸였는지 모른다네. 제갈능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조금 전고는 달리 눈을 감은 그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 혈 전 호남과 사천의 경계에 위치한 황곤객점. 주인이 이름은 왕각이었다. 비록 규모는 작아도 근처에 유일한 객점으로 제법 짭짭한 재산을 모아 어깨에 힘을 주는 그에게 난데없는 재앙이 들이닥친 것은 동녘 하늘에 떠오른 해가 본격적으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한 늦은 오전이었다. 틀림없겠지? 그렇습니다. 분명 말씀하신 자들입니다. 행여라도 상대의 기분을 상할까 두려워하며 굽실거리는 왕각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 내기에 정신이 없었다. 한데 대답하는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두덩이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며 더럽혀진 의복이 모르긴 몰라도 대여섯 번은 땅바닥을 구른 모습이었다. 어디로 간다고 하더냐? 추격을 시작한 지도 벌써 닷새째. 그간 을지호의 닦달로 인해 울화가 쌓일 대로 쌓인 한조의 인상은 슬쩍 쳐다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벌했다. 이미 그에게 한차례 경을 친 왕각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했다. 사, 사천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아이쿠! 정강이를 걷어차인 왕각이 죽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 나름대로 성실히, 정성을 다해서 한 대답이었건만 한조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럼 여기까지 와서 사천으로 가지 산동으로 갈까! 그리고 사천이 뉘 집 안방인 줄 알아?! 정확히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그, 그것까지는.... 정강이를 붙잡고 어쩔 줄은 몰라 하는 왕각, 보다 못한 을지호가 한 소리하고 나섰다. 어이, 견안. 왜 그리시오? 퉁명스런 말투였다. 하지만 움찔하며 물러나는 것이 그동안 시달려도 보통 시달린 것이 아닌 듯했다. 도둑놈이 행선지 얘기하고 다니는 것 봤냐? 무슨 뜻이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알 것 아냐. 그놈들 나름대로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미쳤다고 자신들의 행선지를 마구 떠벌리고 다니겠느냔 말이다. 알 수도 있는 것 아니오? 한조가 지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돌아온 것은 한심해하는 비웃음뿐이었다. 쯧쯧, 머리라는 것은 생각을 하라고 있는 것이지 싸움할 때 들이받으라고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억지 부리지 말고 대충 끝났으면 빨리 쫓기나 해. 엉뚱한 사람 잡지 말고. 엉뚱하기는 뭐가... 시끄럽고. 발끈하려는 한조의 반응을 한마디로 무시한 을지호가 사중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조가 이쪽 방면의 달인이라고 하셨는데... 진심이었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이거야 영 믿음이 가질 않으니... 한조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은 사중명의 낯빛도 붉개 물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저자에겐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는 듯하다. 어쨌든 재대로 쫓고 있는 것은 증명됐으니 머뭇거리지 말고 계속 추격해라. 상처를 입혔으니 저자에게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하고 쏘아대듯 말을 마친 사중명은 한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곤 물 주머니에 식수를 챙기고 있는 여상을 불렀다. 누군가가 우리를 뒤쫓는 것 같다. 이곳에 숨어 있다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 너무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다. 반나절을 기다리되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즉시 쫓아오고. 알겠습니다. 을지호가 괴이하다는 듯 물었다. 누군가 쫓아오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네. 다만 우리를 감시하는 눈길이 느껴져서 확인해 보고자 함이네. 그런 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확인해 보면 뭔가 알게 되겠지. 일단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뭐, 그건 그렇소만. 사중명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을지호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아싿. 확실히 해라. 혹시 모르니 조심하고. 사중명이 한 번 더 당부를 했다. 맡겨두십시오. 여상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정확히 이각이 흐른 후, 그들은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여상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팽과해 대협을 비롯하여 목숨을 잃은 자도 도합 삼십육 명입니다. 부상을 당했거나 중독 현상을 보이는 이들은 그보다 조금 많고 특히 팽가는 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멸을 당했습니다. 제갈은의 음성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한숨짓는 제갈융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후~ 예상외로 피해가 너무 큰 것 같네. 시간도 많이 지체된 것 같고. 단 한 번의 교전으로 얻은 승리의 대가는 달콤하기보단 참혹했다. 비록 삼백이 훨씬 넘는 적을 궤멸시키고 포위망 또한 완벽하게 걷어냈으나 제갈세가 역시 전력의 반을 상실했다. 아우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제갈근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우라면 제갈능을 일컫는 말이었다. 당욱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듯싶네. 그만한 부상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인물은 인물이야. 가주깨서 살펴주신 덕분이지요. 곁에서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제갈융이 사의를 표하고 나서자 당욱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마물이 독은 금방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 아니었네. 난 그저 약간의 도움을 주었을 뿐 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내공이 심후하기 때문일세. 하지만 당욱의 헌신적인 노력이 아니었다면 제갈능은 독혈인과 싸웠던 바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완벽하게 회복하기까진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군. 워낙 부상이 중해서...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무슨 말을... 그나저나 남은 인원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당욱이 제갈은을 향해 물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제갈은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너무 큽니다. 무리를 해서 공격을 감행할 수는 있겠지만 그리되면 본가가 위험해집니다. 진법만으론 막을 수 있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또한 말씀드린 대로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결국 만독문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쳤군. 사실이 그랬다. 목숨을 잃은 대다수의 사람이 만독문이 독과 독혈인에게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제갈능이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독혈인을 막지 않았다면 싸움의 결과가 뒤바뀌었을지도 모를 만큼 독혈인의 힘은 가공 그 자체였다. 후~ 모두가 그들의 존제를 눈치 체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제갈근이 제갈은의 처진 어깨를 다독였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만독문의 존재는 감지되지 않았어. 아우의 잘못이 아니네. 자, 어쨌든 싸움의 결과는 이리 나왔네.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제갈융의 말에 제갈은은 잡시 눈을 감앗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일단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오대세가의 정예들을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오대세가의 정예들은? 당욱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차피 우리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 그들이라도 정도맹을 도와야겠지요.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움직인다면 이곳으로 오는 것보다 조금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확실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또한 그들이 도착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계획대로 패천궁의 본진이 북상하는 주요 길목에 진을 설치하겠습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는가? 도주는 했지만 아직도 많은 적이 숨어 있네. 게다가 예상외로 빨리 들이닥칠 수도 있어. 제갈융이 염려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어차피 위험했던 계획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저들의 본진을 이대로 북상시킬 수는 없으니. 나와 우리 당가의 식솔들이 자네를 돕겠네. 당욱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가주께서 도와주신다면 위험할 일이 없겠지요. 누가 감히 덤비겠습니까? 하하. 당연한 일을 가지고 얼굴에 금칠은 하지 말게나. 후~ 가주께서 너무 애를 쓰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일이라도 의도대로 되었으면 좋으련만. 당욱에게 고개를 숙이는 제갈융의 한숨은 끝이 없었다. ------------ 무한에서 서북쪽으로 삼백여리 떨어진 곳. 제갈율의 전갈을 받고 급히 진로를 바꾼 오대세가의 정예들은 패천궁의 선발대와 정도맹의 무인들이 대치하고 있다는 대홍산을 향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윤, 팽가의 가주 팽무쌍, 악가의 가주 악위군을 필두로 하여 그 인원이 이백을 육박했다. 남궁세가는 무리의 가장 뒤편에서 이동했다. 많이 처진 것 같은데 괜찮을까? 어쩔 수 없지. 천뢰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니까. 다소 떨어지는 무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뒤로 처진 천뢰대를 걱정하는 해웅과 강유의 안색은 어두웠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같이 독종들 아닙니까? 곧 뒤쫓아올겁니다. 그나저나 늦지는 않았을까? 고개를 돌려 묻는 물음에 초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정도맹도 필사적이니까. 그곳에서 밀리면 사실상 끝장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거다. 덧붙이는 강유의 말에 해웅이 끼어들었다. 젠장, 해적질이나 하던 내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이런 거대한 세력 싸움에 참여하게 되고. 그것도 우리를 무시하기 바쁜 놈돌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도 해적질하는 것보다 낫지 않냐? 이게 다 우리 세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우리를 위해서라니? 이번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봐라.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길 수 있겠냐? 하긴, 이미 보는 눈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지난 비무대회에서 남궁세가가 보여준 무위는 충격을 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연능천과 강유의 연승도 크게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팽한을 상대로 선전을 한 남궁민과 팽한과 팽무쌍을 압도한 을지호의 실력에 모두들 감복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날 이후 남궁세가를 대하는 모든 이의 태도 또한 크게 달라졌다. 좋아, 이참에 우리들의 힘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안 그러냐? 해웅의 말에 연능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반해 천도뭉은 두 눈을 치켜뜨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물론이지요, 패천궁 놈들 아예 싹 쓸어버릴 겁니다.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는 다른 어떤 세가, 문파보다 한이 많은 이가 뭉친 문파엿다. 가문이 거으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남궁민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천양, 천음대원들 모두 패천궁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굴욕을 당한 문파의 후예들이었다. 패천궁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지금 그들의 심정은 다른 어느 때보다 떨리고 흥분되었으며 날카로웠다. 바로 그 순간, 앞쪽에서부터 웅성거림이 시작되더니 파도를 타는 양 뒤로 전달되었다. 그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남궁민이 뜻 모를 말을 남기며 황급히 앞쪽으로 움직였다. 강유와 해웅이 그 뒤를 따르고 그녀의 수신호위인 뇌정과 초번도 움직였다. 선두에 도착한 남궁민은 오대세가의 앞길을 막아선 일단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패천궁의 무인들이었다. 원래는 이곳에서 만날 것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따라잡느라 무척이나 고생했소. 패천수호대의 대주 화천명이 일말의 표정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흠, 내 듣기로 패천수호대는 궁주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어인 걸음이신가? 잔뜩 긴장했으나 이를 내색하지 않은 황보윤이 물었다. 물론, 그렇소, 하나 명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명이라... 그래, 어떤 명을 받았는가? 남하하는 오대세가이 정예를 막으라는 명이었소. 흥, 패천수호대의 명성이 높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나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잖아도 동생 팽과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팽무쌍이 냉랭히 대꾸했다. 솔직히 우리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건방진!! 자못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화천명의 대꾸에 팽무쌍이 당장에라도 손을 쓸 듯 분노를 드러냈다. 그의 반응에 화천명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군사께서 오대세가의 전력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신 터, 어쩔 수 없이 몇몇 어르신을 모시고 왔소. 말을 끝마친 화천명이 몸을 뒤로 돌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몇몇 노고수. 느긋한 걸음걸이로 나서는 이들의 수는 정확히 열 명이었다. 가장 앞선 노인은 가슴에 커다란 도를 품고 있었는데 황보윤은 그가 누군지 즉시 알아보았다. 도, 도왕! 황보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노부를 알고 있는가? 동방성이 다소 의외라는 듯 물어싿.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소이다. 그 옛날, 단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상대를 일도양단하는 그 막강한 실력이 지금껏 뇌리에 박혀 있었다. 황보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동방성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쟁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패천궁의 호법들이었다. 특히 멘 마지막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호리호리한 노인의 정체가 드러났을때 황보윤과 팽무쌍은 눈앞에 닥친 나놘을 결코 간단히 정체가 드러났을 때 황보윤과 팽무쌍은 눈 앞에 닥친 난관으 결코 간단히 헤치고 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다름 아닌 암왕 낙운기였다. 패천수호대와 패천궁의 호법들로도 부족해 도왕과 암왕까지 모습을 드러냈으니 어쩌면 희망을 갖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지도 몰라싿. 오왕 중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보윤이라 합니다. 황보윤이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음, 황부윤이라면 권왕 선배가... 부친 되십니다. 그렇군, 그래. 권왕 선배는 오시지 않았는가? 아쉽군. 한번쯤은 실력을 겨뤄보고 싶었는데. 낙운기는 진정으로 아쉽게 되었다는 듯 낭패한 표정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동방성이 맞장구를 쳤다. 순간, 팽무쌍 등은 묘한 굴욕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태도야말로 '너희들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 라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니다. 후배가 상대해 드리겠소. 자네는 누군가? 팽무쌍이라 하외다. 그의 이름을 듣자 동방성의 눈동자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호~ 팽가의 가주셨군, 어쩐지 기도가 남다르더니만. 좋네, 자네 정도라면 상대로 부족함이 없겠지. 합공을 해도 상관없네. 합공은 하지... 그러나 팽무쌍의 말은 이어질 수가 없었다. 그는 말을 잇는 대신 순식산에 접근하는 동방성의 도를 피하기 위해 황급히 발걸음을 놀려야 했다. 비겁하지 않소!! 하하하! 자네가 막지 못할 공격은 아니지 않은가? 자, 그럼 어디 본격적으로 어울려 볼까? 쉽지만은 않을 것이외다.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잡은 팽무쌍이 신중히 발걸음을 놀려싿. 가주를 도와야 할 것이오. 자존심 따위가 문제가 아니오. 자칮하다간 우리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을 수가 있소. 황보윤이 팽가의 고수들을 보며 나직이 소리쳤다. 그들도 이미 사태 파악을 하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를 치켜세웠다. 더이상의 대화는 필요없었다. 동방성과 팽부쌍의 싸움을 신호로 팽팽히 대치하던 양측의 무인이 한데 엉키기 시작했다. 싸움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패천수호대는 패천궁에서도 가리고 가려서 뽑은 최고의 정예들로 그들 한 명 한 명이 고수가 아닌 자들이 없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했다. 흠, 제법 만만치 않군. 역시 오대세가야. 조금도 물러섬없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싸움을 지켜보던 낙운기는 사람들이 어째서 오대세가를 치켜세우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즈음 되면 자네들도 나서야 할 것 같은데. 패천수호대를 따라온 열 명의 노고수 중 본격적으로 싸움에 개입한 사람은 팽무쌍과 그를 따르는 고수들의 협공에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팽무쌍과 그를 따르는 고수들의 협공에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동방성,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뛰쳐나가며 살수를 휘두르고 있는 단열 뿐이었다. 낙운기는 물론이고 나머지 호법들은 맨 뒤에서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이 근짉려서 참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하하,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낙운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마다 눈여겨 보았던 상대를 찾아 몸을 날렸다. 그럼 어디 나도 움직여 볼까?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일각도 지나지 않았건만 상대의 실력을 속속들이 파악한 그가 선택한 사람은 악가의 가주 악위군이었다. 내 상대는 자네밖에 업는 것 같군. 악위군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전장을 한가로이 누비며 다가온 낙운기를 보며 다소 놀라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맴돌았다. 후배가 상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소이다. 충분하네. 자네는 이곳의 그 누구보다 강하니까. 과찬의 말씀이시오. 과찬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래. 검을 사용하려는가? 내 듣기로 악가의 창이 무림의 일절이라 들었는데. 선배께서 원하신다면 보잘것 없는 재주지만 보여 드리겠소. 검을 거둔 악위군이 곁을 지키고 있던 제자로부터 창을 건네받았다. 그리곤 오른발을 몸 뒤쪽에서부터 좌로 교차시키고 비스듬히 누여 잡은 창끝을 빙글빙글 돌렸다. 선공을 양보하겠네.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악위군은 조금도 주저없이 공격했다. 교차됐던 발을 힘차게 내딛자 아래로 향햇던 창끝이 어느새 낙운기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낙운기는 슬쩍 뒤로 발을 빼며 공격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어야 할 창이 갑자기 늘어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들었다. 허~ 예상치 못한 빠름, 그리고 생각보다 긴 사정거리에 헛바람을 삼킨 그는 황급히 허리를 젖혔다. 낙운기의 몸이 지면과 거의 나란히 누워버렸다. 타핫!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어느새 창을 회수하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악위군이 맹렬한 기세로 창을 내려치고 있었다. 피하기엔 악위군의 창이 너무 빨랐고 자세도 좋지 않았다. 대단하군. 감탄성을 내뱉은 낙운기가 살짝 몸을 일으키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눈으로 식별하기도 어려운 작은 돌맹이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것은 창을 잡고 있는 악위군의 손을 노리고 잇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만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악위군은 창을 살짝 태려 날아오는 돌맹이를 막았다. 창에 부딪친 돌맹이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낙운기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고작 손톱만한 작은 돌맹이에 공격이 막힐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오직 암왕이기에 가능했다. 과연... 암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았소이다. 악위군은 진정 놀란 표정으로 상대를 칭찬했다. 자네의 공격 또한 예사롭지 않앗네. 자, 그럼 이제 내 공격을 받아보게나. 낙운기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몇 개의 돌맹이를 집어 들었다. 악위군은 긴장된 표정으로 돌맹이를 살폈다. 그는 아무리 하찮은 돌맹이라도 암왕의 손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그 어떤 무기보다 두려운 것으로 돌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엇다. 일순간이었지만 공격은 훌륭했네. 방어는 어떤지 궁금하군. 돌맹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움직임을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팔목이 살짝 움직였다. 낙운기가 던지 돌맹이는 정확히 열두 개였다. 맹렬한 파공성과 함께 한 손에서 출발한 것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위아래, 좌우로 퍼진 돌멩이는 악위군의 각 요혈을 노리며 일제히 날아들었다. 눈으로 쫓아가기에도 버거운 속력이었다. 타핫! 나직한 기합성과 함께 악위군의 창이 움직였다. 파파팍! 가슴팍을 향해 오던 두 개의 돌멩이가 창끝에 부딪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벅지를 노리며 날아들던 돌멩이가 사라진 것도 거의 동시였다. 악위군의 손에 들린 창은 하나였건만 접근한 돌멩이를 차단하기 위해 움직이는 창은 돌멩이의 수와 같은 열두 개였다. 마치 분신술이라고 부리듯 늘어난 창은 환상적인 움직임과 함께 단 한개의 돌맹이도 접근시키지 않았다. 그가 창을 거두고 호흡을 가다듬자 낙운기는 경탄해 마지 않았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손속에 인정을 두신 덕분이외다. 자네의 실력이 뛰어난 것이네. 아무튼 서로의 실력은 대충 보아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겨뤄보세나. 순간 낙운기의 기도가 순식간에 변했다. 허허롭고 여유롭기만 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 악위군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물러서지 마라! 패천수호대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화천명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며 오대세가이 무인들을 쓰러뜨리는 그의 실력은 어째서 그가 패천수호대의 대주가 될 수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줄 만큼 발군이었다. 빠르고 격하게 움직이면서도 그의 동작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그는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했고 최선의 방어를 했다. 그 누구도 그롸 더불어 이십여 초가 넘는 손속을 교환했을 뿐이었다. 물론 일방적인 수세 속에서 큰 부상을 입고 물러났지만. 그의 발걸음이 막힌 곳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너는 누구냐? 화천명이 자신을 막아선 사내에게 물었다. 강유. 남궁세가이 사람인가? 그렇다. 남궁세가라... 아무튼 좋은 자세다. 쾌검을 사용하나? 강유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합이 승부로군. 검을 거둔 화천명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강유에게 접근했다. 강유는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뻗는다면 그대로 목숨을 취할 수 있을 만큼 접근을 하고서야 걸음을 멈춘 화천명이 입을 열었다. 나도 꽤나 빠른 검을 자랑한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강유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질식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다만 강유보다는 화천명이 한결 여유가 있었다. 전신의 세포가 꿈틀댔다. 손가락에 잔 떨림이 왔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는 있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일취월장한 실력을 갖춘 강유에게도 화천명이란 인물은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그렇게 대치하기를 잠시, 둘 사이로 부러진 검날이 날아들엇다. 바로 그순간, 화천명과 강유의 어깨가 동시에 움직였다. 크윽. 누군가의 입에서 탁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신음서의 주인은 강유였다. 길게 뻗은 화천명의 검이 강유의 폐부를 찔렀으나 그듸 검은 화천명의 목에서 다섯 치 정도의 거리에 멈춰져 있었다. 진 건가? 강유는 상대에게 패했다는 사실, 그리고 전신을 타고 흐르는 고통보다도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검을 뻗는 화천명의 눈에선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가 움직이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때 이미 승부는 끝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천명의 움직임을 조금만 더 빨리 감지했더라면, 자신의 팔이 다펴졌더라면 패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화천명이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강유의 신형이 급격히 흔들렸다. 그리곤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후~ 꽤나 아슬아슬했어. 분명 먼저 기회를 잡았고 발검도 빨랐음에도 강유의 검은 순식간에 그 차이를 좁혀 버렸다. 쓸데없는 객기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화천명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싸우고 있던 해웅이 힘없이 쓰러지는 강유의 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달려왓다. 저자 역시 남궁세가. 강유의 모습을 보고 그토록 노한 것을 보니 그역시 남궁세가의 사람일 것이다. 아무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황이었지만 화천명은 을지호와 비사걸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남궁세가 식솔들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었다. 애당초 그런 사정을 감안하지 않았다면 강유를 쓰러뜨린 검도 페가 아닌 심장에 박혀 있을 것이었다. 상처 입은 곰처럼 우직하게 달려드는 그를 향해 화천명의 검이 움직였다. 그는 적당히 상처만 입히리란 생각에 검에 실린 힘을 상당부분 거둬들였다. 그것은 틀림없는 그의 실수였다. 깡! 인육과 오랜 제련 끝에 탄생한 검이 부딪치는 소리치고는 무척이나 낯선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화천명은 자신의 검이 힘없이 튕겨져 나가는 황다한 경험을 해야 했다. 특! 해웅의 육중한 몸에 부딪친 화천명의 신형이 끊어진 연처럼 오장여를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괜찮으냐? 단번에 화천명을 날려 버린 해웅이 강유를 안아 들었다. 뭐...그런... 대로. 강유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급격히 흔들리는 눈동자가 결코 작은 부상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세가 어떻습니까? 어느세 곁으로 다가온 천도문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꽤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지 그의 몸 이곳저곳에 혈흔이 보였다. 모르겠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 어서 피하십시오. 저자는 제가 막겠습니다. 천도문이 잔뜩 긴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해웅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후~ 무척 아픈데, 꽤나 단단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어. 입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걸어오는 화천명의 기도는 조금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최후의 순간에 호시낭기를 일으켜 몸릉 보호했기에 망정이지 일말의 방심에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던 화천명의 뇌리엔 해웅이 남궁세가의 사람이라는 것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죽이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는 적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혼자선 무리다. 나와 함깨하자. 천도문의 곁으로 다가선 사람은 연능천이었다. 그 역시 먼발치에서 강유의 위기를 발견하고 달려온 것이었다. 무척이나 강한 놈이다. 두 사람의 무공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유를 쓰러뜨리고 혼신의 힘이 담긴 자신의 공격에 제대로 맞고서도 멀쩡히 일어난 상대였다. 우리도 강합니다. 물과 불처럼 판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알았다. 금방 돌아오겠다. 걱정은 됐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해웅은 강유를 들쳐 업고 즉시 몸을 날렸다. 그의 동 뒤로 천도문과 연능천의 기합성이 들려왔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구나. 시쓰럽다, 노물! 쌍판때기도 더럽게 생긴 늙은이가 감히 어따 대고 그 더러운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초번과 죄전이 상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하나 정작 모욕을 당한 남궁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트러진 기혈을 가다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쓸 뿐이었다. 남궁민과 그녀를 보호하는 두 수신호위 노전, 초번은 지금 패천궁의 호법 금룡수 탁가강을 맞이하여 무척이나 힘든 싸움은 하고 있었다. 탁강강은 금룡수라는 별호만큼 뛰어난 금나수와 조공을 지닌 자로 금룡팔해라는 금나수법과 두 치가 넘는 손톱을 이용하여 펼치는 비응혈조는 무림의 일절로 인정받고 있었고 도왕 동방성과 천초를 겨눌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나이도 어린 놈들이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것이 아니로구나. 퉤퉤! 너 같은 노물에게 예를 차리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어 뒈지고 말겠다. 뇌전이 누런 가래침을 뱉으며 욕설을 퍼부엇다. 한데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산발한 머리며 찢어진 의복은 둘째 치고 조공에 당한 듯 왼쪽 빰에 흉측하게 패인 다섯 줄의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깨의 살점도 짐승의 발톱에 당한 듯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왼쪽 팔은 어께부터 탈골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부러진 것인지 힘을 받지 못하여 덜렁거리고 있었고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다리에도 꽤나 심각한 부상을 당한 듯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겐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주인 남궁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뇌전에 비해 상처가 가볍기는 했으나 초번 또한 만만치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사지가 떨어져 나가도 그 따위 말을 내뱉는지 내 두고 보겠다. 잔인한 살소를 지은 탁강강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손톱을 붉게 물들인 것은 그들의 피였고 군데군데 묻어 있는 흔적은 그들의 살점이었다. 초번과 뇌전은 잔뜩 긴장하며 그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 둘에 비해 외상은 없었지만 내상 때문에 잠시 물러나 있던 남궁민도 마구 날뛰는 기혈을 간신히 제어하고 다시 싸움에 나섰다. 탁강강의 몸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마치 날게를 펴듯 양손을 활짝 펴며 접근하는 그의 모습은 사냥감을 노리며 하강하는 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가 노리는 사람은 그를 향해 유난히 욕설을 퍼부어낸 뇌전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뇌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카캉. 뇌전의 검과 탁강강의 손톱이 부딪치며 기괴한 마찰음을 냈다. 탁강강의 손이 이용해 검을 결박한 탁강강이 교묘한 각도로 왼팔을 휘둘렀다. 붉은빛이 감도는 손톱이 뇌전의 두 눈을 노리며 접근했다. 깜짝 놀란 뇌전이 검을 움직이려 했으나 요지부동, 어느새 다리마저 그에게 밟혀 있어 몸을 뺄 수조차 없었다. 죽어라, 노물! 기왕 당할 바엔 발악이라도 하자는 심산인지 뇌전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뒷골목에서나 볼 수 있는 듯한 박치기였다. 그러나 그의 머리가 도착하기 전에 방향을 튼 탁강강의 손톱이 관자놀이를 노리며 접근했다. 흐흐흐. 탁강강은 이제 곧 버릇없기가 하늘을 찌르는 건방진 애송이의 죄수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실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멈춰랏! 뇌전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찰나 남궁민과 초번의 검이 동시에 움직였다. 남궁민의 검은 뇌전에게 향하는 팔을 공격하고 초번은 다리를 노렸다. 흥. 나직한 냉소와 함께 탁강강의 재빠른 반응이 이어졌다. 그는 우선 뇌전의 관자놀이를 향하던 팔을 돌려 남궁민의 검을 쳐냈다. 동시에 뇌전의 움직임을 봉쇄하던 다리를 들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크악!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는 뇌전의 입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충격이 컸는지 그는 곧바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탁강강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뇌전의 다리를 부러뜨린 오른쪽 발을 들어 초번의 검을 위에서부터 밟아 눌렀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검의 방향을 틀거나 뺄 사이도 없이 지면과 발바닥 사이에 끼어버렸다. 당황한 초번이 검을 빼기 위해 힘을 쓰는 사이 빙글 몸을 돌린 탁강강의 발이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컥!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날아가는 초번. 둔탁한 격타음이 들린 것으로 보아 목숨은 몰라도 최소한 갈빗대 서너개는 부러진 모양이었다. 단숨에 뇌전과 초번의 움직임을 봉쇄한 탁강강의 시선이 홀로 남은 남궁민을 향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남궁민이 그가 펼칠 수 잇는 최강의 무공 제왕검법을 사용하여 탁강강을 공격했다. 그러나 지난 황보세가의 비무에서도 보았듯이 그녀의 제왕검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은 막강한 내공을 바탕으로 펼쳐야만 비로소 그 위력을 보이는 무공이었다. 이미 한차례 큰 내상을 당한 남궁민으로선 분명 무리가 있었다. 기혈이 역류했는지 입에선 피가 흘러나왔고 움직임 또한 활기차지 못했다. 탁강강 정도 되는 고수가 그런 공격을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계집,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간 것이냐? 좀 더 그럴듯한 공격을 기대했던 탁강강이 짜증난다는 듯 소리쳤다. 그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기묘한 움직임으로 검을 피해 그녀에게 접근하는 손은 너무나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무시무시했다. 탁강강은 남궁민이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손목을 제압하더니 힘없이 떨어지는 검을 발로 차버렸다. 검은 까마득히 날아가 전장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아!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목줄기를 파고드는 손톱을 보며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여기고 체념 섞인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안 돼!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오자 남구민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잇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크으으. 왼쪽 손의 공격을 어깨로 받아내고 재차 휘두른 오른쪽 손의 공격을 옆구리로 받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황보, 아니, 남궁류였다. 피.... 피하.... 세요. 힘없이 고개를 돌린 남궁류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빠.. 빨리.... 너... 너... 누, 누가 도와달라고... 더 없이 커진 눈으로 무참히 무너져 내리는 동생을 보는 남궁민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바로 앞에 적이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쯧쯧, 쓸데 없는 발악들을 하고 있구나. 혀를 끌끌거리며 접근하는 탁강강의 얼굴에 조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어련히 알아서 죽여줄까. 윽! 그런데 끝장을 내주겠다는 늙은이.... 이대로 끝날 줄 알았냐? 탁강강의 발등에 단도를 쑤셔 박은 뇌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단도는 발들과 땅바닥을 뚫고 들어가 손잡이만 보일 정도로 깊게 박혔다.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그가 남궁민의 위기를 보고 최후의 힘을 짜낸 것이다. 버러지 같은 놈!! 다리로부터 밀려오는 통증이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고통보다는 애송이 따위에게 당했다는 수치감에 치를 떤 탁강강은 발등에 꽂힌 단도를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상한 발을 들었다. 그리곤 단숨에 밟아 죽이겠다는 듯 뇌전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초번과 남궁류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그나마 성한 남궁민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간다. 이미 죽음을 직감했는지 뇌전은 초번을 향해 웃음 지었다. 예리한 파공성이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공기를 갈가리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열 발도 넘는 화살이 탁강강을 노렸다. 화살의 빠르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탁강강이 재빨리 발을 거두고 신중히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톱과 강기가 실린 소맷자락에 막힌 화살이 땅에 떨어졌다. 화살을 막은 탁강강은 뇌전을 향해 또다시 살수를 뻗었다. 그만은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간발의 차이로 먼저 날아온 두 발의 화살이 각각 뇌전의 몸통과 허벅지쪽의 옷을 꿰더니 그를 옆으로 살짝 이동시켰기 때문이었다. 흐흐흐. 드디어 왔군. 탁강강을 공격하고 자신을 구한 화살이 누구의 것인지를 파악한 뇌전이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잔꽤를 부리느냐! 눈앞의 고기를 놓친 맹수가 그러할까. 화가 치밀대로 치민 탁강강이 그를 잡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발들 깊이 박힌 단검이 그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그는 목의 심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더니 단검을 빼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또다시 한 무더기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단검을 뽑는 것을 포기한 탁강강은 침착히 화살을 막아갔다.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화살이 하나씩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처츰 그의 가슴 쪽으로 날아들던 화살이 점점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수가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하나를 막으면 어느새 다른 하나가 똑같은 자리를 노리며 날아들었고 그것을 막아내면 또 다른 화살이 날아들었다. 더구나 목표가 머리,목, 가슴, 복부, 팔다리로 분산되면서 탁강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발이 묶인 상황에선 버티기기 힘들다고 판단한 그가 죽을힘을 다해 다리를 뽑아 들었지만 이미 그가 움직일 방향은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마침내 그의 왼쪽 허벅지에 한 개의 화살이 적중했다. 큭! 그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찰나 또 하나의 화살이 그의 발목에 박혀들엇다. 공교롭게도 뇌전에 의해 다친 발등 바로 위였다. 크아악!~ 탁강강의 입에서 괴성에 가까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화살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이제는 승리가 아닌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막는 탁강강의 노력에도 그의 몸에 꽂히는 화살은 하나식 늘어만 갔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한 천뢰대주 율천의 화살이 그의 목에 박히면서 남궁세가를 유린하던 거목은 쓰러졌다. 확인 사살을 하듯 쓰러진 몸으로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율 대주가 우리의 목숨을 구했어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남궁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기막히 순간에 도착했다. 난 이대로 황천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왕욱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뇌전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기꺼워했다. 하하, 꽤나 심하게 당하셨군요. 저 늙은이가 워낙 지독해서 말이야. 그나마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자 뭣들 해? 가주님과 동생 분, 그리고 두 분 호위님을 빨리모셔. 그의 명에 따라 부상자들이 순식간에 뒤로 옮겨졌다. 부상자들의 안전을 확보한 율천과 천뢰대원들이 숲으로 몸을 숨겼다. 본격적으로 싸움에 끼어들기 전 안전을 위한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목표는 좌측, 키 큰 놈. 율천의 명에 따라 천뢰대원들의 화살이 일제히 한 사람을 향해 겨눠졌다. 율천의 궁에서 가장 먼저 화살이 날아갔다. 그것과 동시에 여섯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으악!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상대를 핍박하고 있던 패천수호대 대원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그의 검에 막힌 화살은 정확히 네 개뿐. 세 개의 화살이 그의 몸에 적중했다. 물론 그에게 밀리던 사내의 검도 그의 배를 가르고 지나갔다. 천뢰대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천양대 소속의 좌청은 화살의 주인이 누구인지 직감하고 숲을 향해 검을 흔들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싸움은 처절의 극을 이루고 있었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죽는 냉정한 상황에서 사망자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고작 삼각여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양측의 인원은 삼 분지 일 이상 줄어 있었다. 초반의 전황은 딱히 어느 쪽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허나 본격적으로 움지이기 시작한 패천궁의 노고수들로 인하여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부의 추는 패천궁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은 것이 바로 천뢰대였다. 뒤늦게 도착하자마자 위기에 빠진 남궁민과 뇌전 등을 구한 그들이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하면서 지쳐 가던 오대세가는 가히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기세를 올렸다. 반면에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을 신경 쓰며 싸워야 했던 패천수호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날이는 화살은 한 사람을 공격하되 단 한개의 화살도 같은 곳을 노리지 않았고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순식간에 다섯 명이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수하들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살수를 펼치고 있던 단열이 몇몇 대원을 이끌고 천뢰대원들이 은신하고 있는 숲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그러나 을지호로부터 철저하게 훈련받은 천뢰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율천을 중심으로 일곱 명의 천뢰대원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었다 우선적으로 단열을 뒤따르던 패천수호대 대원들의 목표로 화살을 날려 운신의 폭을 좁힌 다음 선두로 달려오는 단열이 움직임을 봉쇄했다. 절묘한 시간 차와 한꺼번에 요소요소를 노리며 날아드는 화살들, 더구나 어찌나 손이 빠른지 하나를 막으면 대여섯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경천동지할 무위를 지니고 있는 단열임에도 결국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물러나는 그의 어깨에 두 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천뢰대의 활약으로도 전세는 뒤집을 수 없었다. 불리했던 전항이 잠시 비등하는가 싶었는데 또다시 패천궁의 우위로 바뀌고 말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동안 팽무쌍과 팽가의 고수들에게 묶여 있던 도왕 동방성이 치열한 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자유롭게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팽무쌍과 팽가의 고수들을 격퇘하느라 상당한 내공을 소모하고 온몸에 갖은 부상을 당한 그 엿지만 그의 일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황보윤을 비롯하여 각 세가의 연배 높은 고수들뿐이었으나 그들 역시 패천수호대의 부대주 황산을 비롯하여 나머지 호법들에게 묶여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전황이 패천궁의 우위로 바뀐 두 번째 이유이자 결정적인 원인이 된것은 오대세가에 든든한 지원을 해주었던 천뢰대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싸움에선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화살에 의한 수하들의 피해가 계속해서 늘어나자 동방성과 한번 패퇴한 단열은 작심하고 천뢰대원들을 노렸다. 천뢰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접근하는 그들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의 전지늘 막지는 못했다. 결국 더이상 그들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적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라는 을지호의 당부에 따른 것이었으나 어찌나 빨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는지 쫓던 동방성과 단열이 무안해할 지경이었다. 그것으로 사실상 싸움은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오대세가의 정예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버티는 사람들은 낙운기를 상대로 놀라운 정도로 선전을 하고 잇는 악위군과 파양이살이라 불리는 두 명의 호법을 상대로 막 승리를 거둔 황보윤을 비롯하여 몇몇뿐이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다. 힘들게 승리를 거두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전세를 살피는 황보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백에 육박했던 인원은 어느새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고 멀쩡한 사람은 또 그 절반에 불과했다. 패천수호대의 인원이 줄기는 했어도 어림잡아 사십은 되어 보였다. 승산은 없었다. 머뭇거리다간 전멸을 면치 못한다. 일단은 후퇴를 해선 전역릉 가다듬어야겠다. 그나저나 악가주... 정말 대단한 인물이야. 천하의 암왕을 상대로 저토록 치열하게 싸울 수 있다니. 지금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최고수를 꼽으라면 세인들은 단연 도왕 동방성이나 암왕 낙운기를 꼽을 것이다. 그것은 팽무쌍이 합공을 펼치고도 동방성에게 패했다는 것으로 증명됐다. 그런데 악위군은 비록 수세에 몰리고 있어도 낙운기와 나름대로 팽팽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였다. 어쩌면 오대세가가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낙운기의 발걸음을 막아낸 악위군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더 이상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후퇴하라! 참으로 하기 힘든 말이라는 듯 퇴각을 명하는 황보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퇴하라. 이곳저곳에서 퇴각을 명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혼란은 극에 달했다. 물러나려는 오대세가의 무인들과 그들을 쫓는 패천수호대의 함성이 한데 뒤엉켜 온 땅을 울리고 숲을 뒤흔들었다. 그 함성 속에 작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은 신음성이 들려왔다. 졌소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창을 떨어뜨린 악위군이 패배를 인정했다. 그의 전신은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 덮였는데 특히 어께엔 손바닥만한 비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승리를 기뻐해야 할 낙운기의 표정이 가히 놓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노기마저 서려 있었다. 우리의 승부는 다음으로 미루지. 냉랭히 말을 마친 그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렸다. 악위군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징그러운 놈들. 싸움은 끝났다. 이제 그만 가라. 검을 거둔 화천명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앞에 사람인지 아니면 고깃더어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망기진 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지 말고 그냥 보내줘. 화천명이 그들을 향해 접근하는 수하들을 제지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후퇴하는 네 사람의 주변으로 무수히 많은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화살에 얼마나 많은 동료가 목숨을 잃었던가. 감히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수한 화살의 호위를 받으며 물러서는 그들, 패천수호대의 대주 화천명과 치열한 격전을 펼치며 지금껏 살아남은 그들의 이름은 해웅, 천도문, 연능천, 염복이었다. 이겼다! 승리를 알리는 화천명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환호성은 없었다. 살아남은 패천수호대 대원들은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는지 저마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싸움은 종결되었다. ------------------------ 승 천 지 계 패천궁의 최정예 패천수호대와 오대세가의 주력이 맞붙은 싸움은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오대세가의 정예들이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패퇴하고 패천수호대의 승리로 끝난 싸움이었지만 승리한 패천수호대의 상황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사십여 명이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고 그나마 성한 사람은 삼 분지 일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혹자는 패천수호대가 패천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들어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닌 사실상 양패구상이란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흑백 양 진영의 최고 정예들이 맞부딪친 싸움은 그렇게 끝이났고 그 싸움을 시작으로 흑백대전으로 인한 피의 광풍이 전 무림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두 번째의 대규모 접전은 대홍산에서 벌어졌다. 대홍산에서 혈참마대와 흑도의 여러 문파로 이루어진 패천궁의 삼백 선발대를 상대한 것은 정도맹에서 급파된 명도와 월훈당의 고수들이었다. 선발대와 대치하고 있던 기종의 병력과 명도, 월훈당으 백오십 병격이 합쳐지자 정도맹은 수적인 우위를 점한 수 있었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싸움에 참여한 백도의 수뇌들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새벽녘 야음을 틈탄 기습이 완전히 먹혀드었기 때문이다. 기습당한 선발대의 무인들은 우왕좌왕, 속절없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금방 끝날 것 같던 싸움은 한나절이 지나고 밤을 꼬박 새울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시신이 산을 만들고 그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었다. 전장이 된 숲은 마치 가을 단풍이 진 것처럼 숲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새벽이 다가올 즈음해서 선발대 측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삼백이 넘던 병력은 이미 칠십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살아남은 사람 중 대부분은 혈참마대의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대주인 양단풍을 구심점으로 조금도 물러섬없이 끝까지 대항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싸우다 보니 상대에 비해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점점 무너지는 상황에서 동방성과 낙운기를 필두로 오대세가의 정예를 물리치고 방향을 튼 패천수호대가 전장에 도착했다. 부상자들을 제외하고 급히 달려온 인원이라 고작 이십여 명밖에 안되는 인원이었지만 그토록 치열했던 싸움에서 살아남은 그들이야말로 최고의 용사들이었다. 패천수호대의 등장으로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특히 백도측에선 전장을 헤집고 다니는 동방선과 낙운기를 상대할 만한 고수라 없었다. 몇몇이 어설픈 합공을 시도했다가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지기를 여러 차례, 그들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해야만 했다. 명도, 월훈당에 이어 정도맹에서 급파한 청운, 풍백당이 전장에 도착한 것은 퇴각 명령이 떨어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청풍명월이라 하여 같은 반열에 있었지만 일반 문파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명도와 월훈당에 비해 청운당과 풍백당은 구파일방 중 쇠락한 곤륜과 탈맹한 종남, 화산, 소림을 제외한 각 문파의 제자들과 낙원장, 낙검문 들 근자에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문파들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패천궁에 패천수호대가 있다면 정도맹엔 청풍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그들이야말로 정도맹 최고의 정예라 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대홍산과 드 어떤 문파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무당파에서 하산한 노고수들이 대거 싸움에 참여했다. 비록 인원은 아홉에 불과했지만 동방성과 낙운기를 상대하기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동방성과 낙운기를 비롯하여 다른 호법들마저 손발이 묶이면서 전세는 또다시 역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극적인 변수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난데없는 함성과 함께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무인들, 그들은 이제 막 대홍산 어귀에 도착한 본진에서부터 달려온 패천궁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여정도 결코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제갈은과 제갈세가의 숨은 지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펼쳐 놓은 서른두개의 기진을 힘겹게 뚫었고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히 달려오느라 피로가 극에 이르렀다. 곳곳에 설치된 진법에 걸려 검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하로 목숨을 잃은 이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나마 순식간에 파훼법을 찾아낸 온설화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늘엇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발이 묶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청운과 풍백당의 기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패천궁 본진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들과 싸우려면 정도맹의 힘과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백도의 모든 문파의 힘을 아우르고서야 가능했다. 괜한 모험으로 피해를 보는 것보다는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백도의 수뇌들은 그 즉시 후퇴를 결정했고 대홍산에서 북으로 이백여리 떨어진 황룡문까지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대홍산에서 값진 승리를 얻은 패천궁은 그 여세를 몰라 서서히 서북진을 시작했다. 맹주를 비롯한 맹의 수뇌들이 싸움에 참여할 때가지 속절없이 밀렸던 정도맹은 이후 검왕 곽화월이 화산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합류하고 종남파와 소림사가 속속 도착하면서 무당산을 코앞에 둔 곡성에서 패천궁의 전진을 막을 수 있었다. 패천궁은 무당파라는 큰 벽을 무너뜨리고자 노력했다. 그것만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던 정도맹에선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대홍산 싸움이 끝난 지 어느새 닷새가 지났건만 그렇게 밀고 밀리는 치역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 무슨 일이냐? 오랜만에 청한 오수를 방해 받았음인지 신도를 바라보는 태상문주의 눈초리가 가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신도는 태상문주의 불편한 기색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더냐? 태상문주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신도는 최대한 낮은, 그러나 더없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승천지계를 펼치라는 전갈입니다. 잠이 확 달아나는 소리였다. 드디어! 태사문주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언제부터 시작하라더냐? 전갈을 받은 즉시입니다. 사천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더냐? 그것은 아닙니다. 일단 삼천을 움직이라 하셨습니다. 태상문주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조금 불안합니다. 불안하다? 뭐가 말이냐? 너무 서두르시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흑백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꽤나 치열하지 않았더냐? 그만하면 충분히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양측에 많은 피해가 있었다는 것은 소신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예전 절력의 절반 이상은 희생되었을 겁니다. 하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조금나 더 기다린다면 완벽한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싫은 걸 게다. 예?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신도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부지라라... 좋은 생각이지.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겠고. 그러나 대항하는 자가 없으면 정복할 가치도 없는 법이다. 헛기침만으로 무림을 정복할 수 있다면 지금껏 숨어산 세월이 아깝지 않더냐? 문주는 우리의 힘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대항하는 자들을 철저히 짓밟으며 군림하고 싶은 것이란 말이다. 그렇군요. 문주의 의도도 파악하지 못하고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인지 신도으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문주의 명대로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이행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신물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태상문주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승천지계를 펼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놀라는 눈치였다. 그, 그게 진정이더냐? 그렇습니다. 신물이라면 남궁세가 가주의 손에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잠시 뒤로 미룬다고 하였는데... 어찌 얻었다고 하더냐? 소신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번 패천궁과의 충돌에서 자연스레 얻으신 것 같습니다. 허허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로구나. 신물의 행방을 알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마음에 걸렸었는데 승천지계의 발동을 앞두고 되찾다니... 길조로다 참으로 길조로다. 허허허!! 실로 수백 년 만에 되찾은 조사의 신물이었다. 더구나 그 신물에는 암흑마검을 완성시킬 수 있는 지존신공의 마지막 구결이 숨겨져 있었으니... 허허허! 태상문주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 전서구에 달린 밀서를 보던 광풍조 조장 호군위의 눈자위에서 잔 떨림이 일었다. 승천... 지계가 발동했다. 호군위의 말에 그를 따르는 여섯 명의 대원의 눈에 격동의 빛이 흘렀다. 승천지계란 말입니까? 그렇다. 틀림없는 승천지계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맨 좌측에 있던 젊은 여인이 물었다. 예정대로 움직인다. 다만 지금부터는 각자 움직여야 할 듯싶다. 철혈마단이 벌써 움직였다고 한다. 간동, 육승! 예, 조장 너희들은 지금 즉시 아미산으로 떠나라. 이유는 곧 설명해 줄 터, 그들은 주저없이 대답을 하였다. 고정, 너는 염히를 데리고 점창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고정과 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청성입니까? 양무강과 낙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다. 나는 당가로 간다. 각자 해야 할일은 알고 있겠지? 애당초 그들이 사천으로 온 것은 철혈마단에게 길 안내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정보력이 있고 또 현지에서 안내자를 구할 수 있었지만 중원 방방곡곡을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지형을 익힌 그들에 비할 수 없었다. 물론 철혈마단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같은 편이라지만 감시가 상당할 것이다. 본 문에 연락을 취할 때 특히 조심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라. 바로 그째였다. 조소 섞인, 그러나 너무나도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가긴 어딜 가. 누구냐! 양무강이 음성이 들려온 곳을 향해 비도를 던지며 소리쳤다. 질문을 하며 공격한다?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버릇없는 놈이로군. 양무강이 던진 비도를 손가락 사이로 받아낸 을지호가 비도를 만지작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만나고 싶었다. 절로 친근함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하지만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어찌 된 일인지 호군위를 비롯한 광풍조의 조원들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위험한 물건을 함부로 던지는 것이 아니다. 내 물건이 아니니까 돌려주마. 쐐애액!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간 비도가 양부강의 미간을 관통했다. 피하고 어쩌고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빠름이었다. 큭!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비도가 미간 사이를 관통하고 뒤에 있는 나무에 깊숙히 박힌 다음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쯧쯧, 그러게 위험하다고 했잖아. 싱글거리며 접근하는 을지호의 시선이 고정에게 향했다. 네놈이로구나, 좌수를 쓴다는 놈이. 고정이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의 눈은 염희를 훑고 있었다. 계집이 하나 끼어 있다는 말도 맞는군. 좌수를 쓰는 자와 여자가 포함된 일곱 명의 인원, 한조가 말한 것에서 한치의 틀림도 없었다. 너는 누구냐? 이미 상대가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양무강의 죽음으로 확실해졌다. 질문을 던지는 호군위의 음성엔 진득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을지호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로써 정확히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로써 정확히 보름이었다. 치미는 살기를 억제하기 힘든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을지호가 말을 이었다. 오늘로써 정확히 보름이었다. 치미는 살기를 억제하기 힘든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을지호가 말을 이었다. 혹시나 네놈들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모른다.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정체를 밝혀라! 검을 꼬나 쥔 육승이 소리쳤다. 헛소리? 내가 해야 할 말을 네놈이 하고 있구나. 을지호의 눈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정녕 죽고 싶어서....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리려던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속속 모습을 드러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비혈대 대원들을 본 까닭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한 정답이 아니면 무조건 헛소리로 간주한다. 내 귀를 더럽힌 대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지. 을지호의 시선이 호군위에게 향했다. 네놈들이냐? 뭐가 말이냐? 남궁세가. 음. 호군위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비로소 상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는지 알아챈 것이다. 네놈들의 발자취를 쫓아 여기까지 온 나다. 발뺌하려 해도 늦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 즉시 을지호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비명성. 으악! 육승이 갑작스런 통증에 얼굴을 붙잡고 땅을 뒹굴었다. 을지호가 던진 돌맹이가 그의 왼쪽 눈을 관통해 버린 것이다.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은 을지호가 다시 물었다. 네놈들이지? 아니다. 호군위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을지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검이라는 것을 확인한 한조가 황당해하는 사이 그 검에 간동과 낙천의 양팔이 떨어져 나갔다. 너무나도 처절한 비명성이 숲을 울렸지만 을지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을 텐데.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은 말은 모조리 헛소리요, 귀를 더럽힌 대가는 상상에 맡긴다고. .... 네놈들이 제대로 말을 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물을 것이다. 헛소리를 지껄여도 좋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잔인한 놈! 잔인? 네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군. 무공도 없는 식솔들을 처참히 죽인 네놈들의 입에서. 흥, 어차피 약육강식의 세계다. 힘없는 자들의 무능을 탓해야지. 더 이상 발뺌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호군위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 진즉에 그렇게 나왔어야 했다. 검을 땅에 박은 을지호가 호군위를 향해 걸었다. 약육강식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호군위는 자신을 옭죄어오는 압박감을 견디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곁으로 부상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조원들이 호위하듯 늘어섰다. 죽엇! 염희가 앙칼지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슬쩍 몸을 틀어 검을 피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은 을지호가 힘을 주었다. 우직. 듣기에도 괴로운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목이 그 자리에서 부러졌다. 손목만이 아니었다. 발길질 한 번에 무릎이 산산이 부서지고 정강이뼈가 살을 뚫고 삐죽이 솟아나왔다. 어찌나 끔찍했는지 제대로 쳐다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염희는 비명도 지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선 흰색 거품이 배어 나왔다. 을지호의 신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빙글 몸을 돌린 그의 발이 고정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그 발길질엔 천근의 힘이 실려 있었다. 크아악! 고정은 걸랫조각이 된 오장육부의 흔적을 입으로 토해내며 온몸을 꿈틀거렸다. 미약하나마 숨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얼마 못 갈것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공격이 이루어지기까지 걸린 시각은 숨을 한번 내쉬는 순간보다 짧았다. 휴~~ 좌중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못마땅해하는 사중명의 눈초리가 한숨의 주인인 한조에게 향했다.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면 어찌 됐을 것인가 생각하니까... 더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추격에 실패했다면 비혈대가 을지호의 잔인한 손속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대항한다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호군위도 을지호의 손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광풍조의 조장이라고 호군위는 목숨을 담보로 한 최후의 한 수를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접근한 을지호는 그가 미처 손을 움직이기도 전에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염려하지 마라. 네놈만큼은 쉽게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분조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지만 호군위에겐 명부의 목소리만큼이나 끔찍하게 들렸다. 똑같이 돌려주지. 무엇을 돌려준다는 것일까? 모든 이가 궁금해하는 사이 호군위의 몸뚱이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아, 그렇구나! 한조가 가장 먼저 을지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밟아 죽일 셈입니다. 남궁가의 노인이 죽은 것처럼. 사중명의 시선을 받은 그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음. 곽노인이 어떤 죽임을 당했는지 기억해 낸 사중명이 침음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을지호의 발이 조금씩 움직였다. 가슴을 짓눌러 오는 힘에 호군위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우직 폐부를 보호하고 있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몸서리를 칠 만큼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비명이라도 지르면 나으련만 을지호는 그런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아혈이 제압당한 호군위의 입에선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더없이 커진 눈과 좌우로 미친 듯이 도리질 치는 머리가 그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잠시 멈추었던 을지호의 발이 약간 방향을 바꿔 움직였다. 어김없이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을지호는 서두르지 않았다. 호군위의 가슴뼈를 모조리 부순 그의 발은 지루하다 못해 과연 움직이고 있는지를 의심할 정도로 느리게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호군위의 입에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나왔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호군위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잠시만, 잠시만 멈추시게나. 보다 못한 사중명이 을지호를 말리고 나섰다. 아무리 용서 못하 적이라도 이것은 아니라고 보네. 그리고 저자에게서 잠시 알아볼 것도 있으니 그만 멈춰주게나. 그러나 뇌리 속에 온통 곽 노인과 남궁세가 식솔들의 처참한 모습만이 가득 차 있던 을지호의 입에선 참으로 냉랭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싫소. 더 이상 말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차가운 대답에 사중며은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불쾌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성을 잃은 을지호의 행동은 호군위의 가슴을 완벽하게 짓눌러 파괴하고 사시너무 떨듯 요동치언 그의 사지가 축 늘어질 때가지 멈추지 않았다. 호군위의 몸에선 미약한 떨림도 없었다. 을지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렸을까?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던 을지호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식솔들의 주검을 묻으며 약속한 대로 복수를 했건만 이 개운치 않은 기운은 뭐란 말인가. 젠장. 더없이 허탈한 표정으로 물러선 을지호가 한조에게 손을 내밀엇다. 술. 한조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몰래 감추어두었던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을지호는 숨도 쉬지 않고 술을 바닥냈다. 괜찮군. 한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한마디에 아끼고 아껴가며 마신 술이었지만 이상하게 아깝지 않았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른 놈들에게 물어보시구려. 을지호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참, 어떤 놈이 시켰는지 반드시 알아내시오. 일시적인 허탈감에 빠졌지만 그 역시 사건의 본질을 잊지는 않고 있었다. 사중명의 말대로라면 누군가 흑백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남궁세가는 그 음모의 희생양이었다. 결국 비명에 간 식솔들의 원혼을 진정으로 달래려 한다면 음모의 주재자를 찾아내어 복수를 해야 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사중명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육승에게 다가갓다. 을지호의 매서운 손길에 양무강과 고정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사지가 꺾이다시피한 염희와 양팔을 잘린 간동, 낙천은 워낙 많은 피를 흘려서인지 정신이 혼미한 듯했다. 그나마 육승의 몸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 누구냐?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와 을지호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 육승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사중명의 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입을 다물겠다? 과연 잘될까? 난 너희 같은 인간들을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더구나 지금처럼 입을 열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닌 서너 명이 더 존재한다는 것은 꽤나 유리한 조건이다. 입을 열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물을 수도 있다는 말,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또한 어떤 방법을 쓰면 쉽게 입을 여는지 기억나는 것만 해도 수십가지다. 물론 나보다 더욱 유능한 수하들도 있고. 맡겨만 주십시오. 일각 안에 놈의 십팔대 조상이 어떤 계집을 끼고 놀아났는지까지 불게 만들겠습니다. 한조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곤 육승의 얼굴을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그거 알아? 사람의 눈동자을 꺼내 침과 섞어 잘게 부수면 사서오경을 쓰고 남을 만큼의 먹물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흠, 네 녀석은 눈깔이 한 개뿐이니 천자문 정도밖에 안 나오겠다. 눈동자를 갈아 먹물로 만들어 쓴다? 입에 담기에 너무나도 끔찍한, 감히 상상도 못할 잔인무도한 말이었다. 딴생각에 잠겨 있던 을지호마저 어처구니없능 표자을 지으며 고개를 돌릴 정도였으니 육승의 심정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금수만도 못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쯧쯧, 그 정도를 가지고 금수 어쩌고 하면 듣는 사람은 섭하지. 그나마 가장 약하고 무난한 것인데. 이... 개만.... 한조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던 육승이 황급히 말문을 닫았다. 싱글 싱글 웃는 한조의 손이 자신의 눈을 향해 접근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만. 사중명이 한조의 손을 막았다. 아직도 말할 생각이 없나? 주, 죽여라! 육승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럴 수야 없지. 죽여도 쉽게 죽이지 않아. 단, 네가 아는 것을 말해 준다면 목숨은 보장해 줄 수 있다. 개소리! 비혈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는 것이다. 순간, 육승이 흠칫한 표정으로 사중명을 바라보았다. 막연히 남궁세가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로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비혈대.... 비혈대라면 그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그것은 곧 지금까지 했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빌어먹을!! 육승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끝까지 입을 다물 수 없으리란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야, 약속이 다르지 않느냐? 당황한 육승이 도리질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던 동료들은 한조가 접근한 이후로 미동도 없었다. 막 손을 뻗던 사중명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너를 살려주면 우리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은데. 턱짓으로 을지호를 가리킨 사중명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멈칫했던 손을 움직였다. 대신 편안하게 보내주마. 더, 더러운 놈들 같으니!! 아, 안 돼!! 그러나 그의 음성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접근한 사중명의 송이 그의 사혈에 놓여 있었다. 어찌하려는가? 육승의 정수리에서 손을 뗀 사중명이 물었다. 음성은 더없이 무겁고 어두웠다. 생각 중이오. 대답하는 을지호의 음성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앗다. 육승은 온갖 협박과 회유, 그리고 고문 속에서도 한참을 버텼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한조가 고개를 절래절레 흔들며 나가떨어질 정도로 그는 지독했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던가. 무려 한시진에 이를 정도로 계속 이어진 고문에 결국 그의 의지는 꺾이고 말았다. 체념한 듯 순순히 토해내는 육승의 말은 실로 경천동지, 모든 이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의 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사중명의 예측대로 흑백대전의 배후엔 거대한 세력의 음모가 작용한 것이었고 남궁세가는 그 음모에 희생당했다. 음모의 주재자는 다름 아닌 과거 무림을 공포와 피로 지배했던 사천혈맹이었다. 두 번째는 승천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승천지계는 그동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사천혈맹이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니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그들으 오랜 숙원이었던 무림제패를 위해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육승은 현재 움직이고 있는 북해의 한빙곡, 남만의 흑월교, 탑리목의 철혈마단은 과거 삼천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중천의 정체에 대새선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 옛날 사천혈맹의 핵심이자 실질적인 우두머리며 중천으로 불렸던 은성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뭔가 다른 세력으로 변신하여 암약했을 것이다. 사중명은 그것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하지만 알아낸 것은 중천이 여전히 건제하다는 것과 그들 스스로가 한천문이라 부른다는 것뿐이었다. 한천문이라고 했소? 을지호가 육승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그렇네. 뭣 하는 문파요? 잘 모르겠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문파는 들어본 적이 없네. 그런 것 같지는 않네. 그들 스스로가 한이 많다고 자처하여 붙인 이름일 걸세. 물론 대외적으론 다른 문파로 얼굴을 내밀고 있겠지. 음. 을지호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남궁세가를 한낱 장기판의 졸로 취급한 자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화를 자초해쓴지를 보여줘야 했다. 문제라면 대가를 치러주어야 하는 상대는 정해졌는데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것.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사중명이 말을 걸어왔다. 가장 시급한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중단시키는 것이라고 보네. 사천혈맹이 준동했다는 것은 흑도, 백도를 떠나 전 무림의 위기라 할 수 있으니. 승천지곈가 뭔가 하는 것이 발동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모르긴 몰라도 흑백대전에서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본 것 같소. 놈들이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움직일 정도로. 하긴 죽기 살기로 싸웠을 테니까. 그렇지만 어쩌겠나. 지금이라도 전력을 수습해서 놈들에게 대항해야지. 이러다간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끝장나는 수가 있네. 누구 맘대로! 을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러더니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중명에게 물었다. 여기서 아미파까지는 얼마나 걸리오? 이미 아미파의 세력권까지 들어왔으니 반나절만 족히 달리며 도착할 수 있을 것이네.왜 그러나? 을지호는 대답하지 않고 더듭 물었다. 당가까지는? 아무리 빨라야 하루하고 반나절. 점창이나 청성까지는 얼마나 걸리오? 그제야 그의 의도를 파악한 사중명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 자네... 얼마나 걸리느냐 물었소. 저, 점창파는 당가와 비슷, 아니, 조금 더 걸릴 것이고 청성파까지는 사흘은 족히 걸리네. 사흘이면 너무 늦고... 일단 가장 가까운 아미파로 가봅시다. 을지호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결정해 버렸다. 아, 아미파에 무엇 하러 간다는 것인가?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는 사중명의 낯빛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철혈마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움직였다고 했잖소. 낯짝이 어찌 생겼나 구경이나 하러 가봅시다 자, 자네 마쳤나? 뭐가 말이오? 여기 있는 인원을 다 합쳐 봐야 고작 열하나네, 어디에 자빠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상이 도착해도 고작 열둘이고,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을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싸우러 가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놈들인지 구경이나 하자는 것이외다. 남궁세가의 적은 중천이었고 중천은 사천혈맹의 우두머리였다. 그것은 곧 사천혈맹이 결코 용서해선 안 되는 원수라는 것과 상통했다. 원수가 코앞에 있는데 그냥 물러설 을지호가 아니었다. 단순히 얼굴 구경이나 하러 갈 리가 없는 것이다. 장난치지 말게. 사중명이 다소 언성을 높였다. 놈들을 쫓는 것보다 지금의 일을 궁주님과 정도맹에 알리는 것이 우선이네. 살도 통통하게 찐 것이 먹음직하기는 하나 전서구는 비상 식량이 아니잖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외다. 그, 그래도 일단 돌아가서.... 어차피 놈들과 싸우게 될 것, 미리 봐두는 것도 좋을 것이오. 갑.시.다! 을지호가 마지막 말에 유난히 힘을 실었다. 그것은 곧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열둘이 아니라 꽤나 많아질 것 같소. 을지호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나뭇잎 한 장을 떼어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미 돌아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힘없이 묻는 사중명의 얼굴엔 체념의 빛이 역력했다. 적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것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슉! 나직한 파공성과 함께 나뭇잎이 십여장이 넘는 거리를 단숨에 날아갔다. 적엽비화! 을지호의 한 수가 절정의 암기술이라 불리는 적엽비화라는 것을 알아본 사중명이 놀라 부르짖었다. 도대채 이자가 지닌 능력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을지호는 적엽비화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울창한 숲 속에 누군가가 은신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뭇잎에 기를 실어 날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중명이 깜짝 놀란 만큼 숲으로 날아가는 나뭇잎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으악! 숲에서 난데없는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나뭇잎이 수풀을 뚫고 들어간 직후였다. 누구냐! 비혈대의 대원들과 사중명이 일제히 몸을 날려 비명이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숲을 헤치고 들어간 그들은 더없이 황당한 표정으로 치켜들었던 검을 내리고 말았다. 오랜만이에요, 사 대주님. 숲에는 하얗게 질린 얼굴의 여상, 그리고 그의 코앞에서 나뭇잎을 낚아챈 사마유선이 밝은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 아 미 혈 풍 다, 단주가 어떻게 여기를... 지금쯤 한창 흑백대전에 참가해야 할 사마유선이 아니던가!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 사중명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되었어요. 그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사마유선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을지 공자님, 또 보게 되었네요. 흠, 누군가 했더니 사 소저였구려. 그녀가 남궁세가로 향하는 길에 만났던 사마유선임을 기억한 을지호가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을지호를 발견하고 밝게 웃던 그녀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흥, 누가 사 소저라는 거지요? 제 이름은 사마유선이에요. 아차 싶었던 을지호가 재빨리 사과를 했다. 내 잠시 착각을 했소이다. 미안하오, 사마소저. 제 이름 따위는 기억할 가치도 없었나 보군요. 화가 풀리지 않는 듯 그녀의 음성은 냉랭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내 다시 한 번 사과하니 화를 푸시오. 아무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반갑다고요? 그 말이 사실인가요? 물론이외다. 흥, 그런 사람이 다짜고짜 살수를 펼치나요? 살수라니, 그 무슨 말이오? 그럼 이건 뭐지요? 그녀가 손가락 사이에 낀 나뭇잎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그것은... 그가 나뭇잎을 던진 것은 숲 속에서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을지호는 또한 그렇게 가까이 접근했는데도 사중명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라면 숨이 있는 사람이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다지 위력이 실리지 않은 나뭇잎에 목숨을 잃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애당초 살수를 펼치고자 했다면 나뭇잎 따위를 날릴 이유가 없었다. 화살 하나면 조용히 끝날 일이었으니까. 왜 말을 못하지요? 사마유선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사중명과 비혈대 대원들은 다들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특히 한조는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킥킥거리고 있었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누가 쥐새끼처럼 숨어서 엿들으라고 하였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것은 분명 그의 잘못이었다. 아니, 차라리 기억을 못했다면 이렇게 시달릴 일이 없었다. 상대야 화가 나겠지만 그냥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끝날을 테니까. 하나 어설프게 기억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젠장, 누가 알고 싶다고 했나? 그 역시 목구멍에서만 맴돌 뿐 정작 입을 통해 나온 말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그 또한 실수였소. 미안하오.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자니 그처럼 고역이 없었다. 그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사마유선이 표정을 싹 고쳤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다시는 잊지마세요. 제 이름은 사마유선이에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 이런 망신을 당했는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마유선이라는 이름은 이미 그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쩔쩔매는 을지호의 모습에 은근히 통쾌감을 느끼고 있던 사중명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너저나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단주가 어찌 이곳에... 혈궁단도 함깨인가? 그럴 이유가 있다고 말씀다렸잖아요. 더는 묻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혈궁단도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아, 때마침 오는 군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서 두단주 윤극지을 필도로 정확히 스물한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좋아,이유는 묻지 않겠네. 한데 어찌 쫓아온 것인가? 꽤나 힘들었을 텐데. 사마유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비밀이에요. 그런데 한조는 그 비밀을 아는 듯했다. 아마도 동생 녀석이 움직였을 겁니다. 놈에게 백.... 그러잖아도 을지호의 몸에서 솔솔 풍기는 백일몽의 향이 내내 의심스러웠던 한조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는 한곡을 발견하곤 혈궁단이 어떻게 자신들을 쫓아올 수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잇었다. 하지만 그는 백일몽이란 단어를 미처 내뱉기도 전에 결코 그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마유선의 전음성을 들어야만 했다. 겉으로는 활짝 웃고 있었지만 실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경고의 내용이었다. 그사이 윤국진에게 다가간 사중명이 조용히 속삭였다. 혈궁단이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인가? 단주야 그렇다 쳐도 자네는 뭘했어? 질책 섞인 말에 윤극진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궁주님이 직접 나서지 않으시는 한 단주의 의사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하긴, 자네의 말이 맞네. 단주의 성격이야 나도 잘 알지. 천하의 비혈대 대원을 바보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중명의 시선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여상에게 향했다. 중간까지는 어찌 쫓아왔는지 몰라도 그 이후는 여상에게 길 안내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잇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여상의 고개가 한없이 숙여졌다. 뒤에서 너무 흉보지 마세요. 다 들리니까. 그건 그렇고 아미파로 가신다고요? 사중명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몇 가지는 듣게 되었어요. 아직 결정된 것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려는 그의 말은 을지호에 의해 단박에 끊어졌다. 아미파를 비롯하여 사천의 문파들이 공격받는 것 같소. 일이 급하게 돌아가는군요. 그래서 일단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미파로 갈 생각이오. 어차피 싸워야 하는 놈들 미리 낯짝이나 봐두는 것도 좋겠지요. 을지호의 입가에 멋쩍은 웃음이 지어졌다. 사마유선이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단주와 혈궁단이 함깨한다면 큰 힘이 될 것이오. 함께 가시겠소? 물론이지요. 그럼 서두릅시다. 사마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중명과 비혈대는 물론이고 혈궁단원의 의사 역시 완전히 배제된 둘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났다. 이의는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몸을 돌려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 그들 뒤로 사중명과 윤극진의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 아프니까 살살 좀 하쇼! 뇌전이 살벌하게 눈을 뜨며 소리쳤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잖아도 잔뜩 기가 죽어 어쩔 줄은 몰라 하던 의원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던 해웅이 대뜸 핀잔을 주엇다. 시끄러, 뼈 하나 부러진 것 가지고 엄살은. 뼈 하나라니요? 다리뼈는 물론이고 어께도 박살이 났는데요. 잘났다. 뼈 부러진 것이 뭐 자랑이라고 입에 거품까지 물고 따지냐, 따지길! 그와 함께 술을 마시던 강유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그러지 마라. 너야 애당초 강철 같은 몸을 지니고 있으니가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들 몸뚱이는 약하다고. 강철은 무슨 얼어죽을, 강철 같은 몸이 이렇게 망가지는 것 봤냐? 해웅이 온통 붕대투성인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마 우리는 양호하잖아. 피식 웃는 강유,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부러진 뇌전, 갈비뼈 네 개가 부러진 초번은 그나마 쌩쌩한 편이었고 전신을 붕대로 친친 감고 있는 천도문과 연능천 등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엇다. 하지만 가장 심하게 다친 사람은 남궁민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린 남궁류였다. 탁강강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낸 덕에 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어깨는 회복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선고를 받았다. 또한 오장육부가 상했으며 갈비뼈도 일곱개나 부러졌다. 패천수호대에 패퇴하고 강가문이란 조그만 문파에 몸을 의탁한 지 사흘이나 지나서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그는 지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호, 호법님.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천도문이 해웅을 불렀다. 왜? 힐끔 쳐다보는 해웅, 잠시 뜸을 들인 천도문이 말했다. 뱃속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배? 거기는 괜찮았잖아. 갑자기 왜 그런 거야? 해웅이 음성이 커졌다. 당황한 의원이 천도문에게 다가가자 그는 손을 휘저어 의원을 물리쳣다. 그,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뭔데? 주충 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제 술도 좀 남겨주십시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했던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엇다. 해웅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나마 멀쩡한 사지까지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환자한테 술은 안 좋아. 이상하네. 여기 있는 사람중 환자가 아닌 사람도 있었나? 뇌전이 슬그머니 끼어들며 딴청을 피웠다. 그 역시 술 생각이 간절했는지 연신 침을 삼키고 있었다. 가슴에 칼자국 좀 났다고 환자 취급하면 곤란하지, 부러진 곳 하나없는 해웅도 너희들과는 다르고,조금만 더 회복하면 질리도록 마시게 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말은 그리했지만 강유의 상세나 해웅의 상처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남궁민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며칠 동안 꽤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무척이나 수척한 모습이었다. 두 분 호법도 완쾌할 때까지는 자제하도록 하세요. 하하, 그러지요. 강유가 전혀 신뢰를 주지못하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살래살래 고개를 흔든 남궁민이 의원을 불렀다. 어떤가요? 인간 같지 않은 괴물들만 우글거리는 곳에서 그나마 사람 같은 남궁민을 만나게 되어서 그런지 의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워낙 단단한 몸들을 가지고 있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다만... 잠시 머뭇거린 의원이 고개를 돌려 남궁류를 쳐다봤다. 팔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올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음. 무인에게 있어 팔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더구나 황보세가의 무공은 권장지술이 중심이었다. 검을 위주로 하는 남궁세가의 무공을 배우지 못한 그에게 한쪽 팔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괜,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녀는 남궁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남궁민이 몸을 돌렸다. 강유와 해웅등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막 방문을 나서던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는 나를 보호한답시고 나서지 마라. 남궁민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가주께서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도 동생이고 목숨을 구해줬는데. 뇌전이 조금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웅의 호통뿐이엇다. 뭘 알지도 못하면 가만히 있어, 그게 중간이나 가는 거니까. 그의 말에 이어 강유가 침울해 있는 남궁류에게 다가갔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금방 허물어지지 않아. 그러니 마음에 담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사흘 밤낮을 네 곁을 지키셨다. 가주의 부상도 장난 아니었는데. 저, 정말입니까? 남궁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나서지 말라고 하신 것도 네가 다친 것을 염려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렇군요. 활짝 웃는 남궁류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흠, 그게 그렇게 된 건가요? 뇌전이 짐짓 감동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냐? 그러니까 함부로 나서지 좀 마라. 그런데 저는 왜 몰랏지요? 왜긴? 죽는다고 지랄하며 의원 멱살 잡느라 정신없었으니까 그랬지. 해웅이 뇌전의 멱살을 잡더니 마구 흔들었다. 이렇게 말이다. 내, 내가 언제, 캑캑! 수, 숨 막힘니다. 해웅과 뇌전의 장난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어째 환자들이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기운있어 보입니다. 막 방에 들어선 율천이 황당한 표정으로 좌중을 살폈다. 하하.율대주 왔는가? 어서오게나. 그의 등장을 가장 반긴 사람은 해웅이었다. 물론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이 더 반가운 것이었지만. 아무튼 건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자네만 하겠어? 그래,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지금. 난리도 아니지요. 다들 죽어라 싸우는 모양입니다. 패천궁이 조금 우세하다고는 하는데 눈에 띄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오대세가가 작심하고 나선 다음부터는 박빙이랍니다. 남하시켯던 정예들이 패천수호대에 패한 것은 오대세가이 어른들에겐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분기탱천한 그들이 대거 병력을 이끌고 정도맹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이다. 조만간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이동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깜짝 놀란 뇌전이 되물었다. 멀쩡한 사람만 추려서 간다고 하던데. 당연히 그래야겠지, 다들 하루아침에 나을 상세가 아닌데, 환자들은 짐밖에 안 되지. 참 다른 녀석들은 좀 어때? 강유가 옆 건물에서 치료받고 있는 이들의 안부를 물었다. 남궁세가는 패천수호대와의 싸움에서 모두 다섯 명의 인원을 잃었다. 적게는 십수 명에서 많게는 전멸 직전까지 이른 다른 세가와 비교하면 극히 적은 희생이었지만 남궁세가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았다. 그나마 천뢰대의 적극적인 보호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희생됐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술 좀 달라고 난리 피우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습니다. 흥, 누구하고 똑같네. 해웅의 눈이 천도문에게 향하자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형님 소식은 없고? 아직 없습니다. 남궁세가의 일로 길을 떠난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 무척이나 답답했다. 휴~ 이 난리가 났는데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지. 강유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숭산과 더불어 불문의 성지로 추앙받는 아미산. 보현보살이 보살행을 했다는 아미산은 골마다 절과 불상이 들어차 있었고 모든 봉우리듸 이름도 불명이었다. 황급히 길을 떠난 을지호 일행은 사중명이 말한 반나절보다는 조금 못된 시간에 아미산에 접어들었다. 조금이라도 쉬는 것이 좋겠네. 사중명이 여전히 선두에 서서 달리고 있는 을지호를 불러 세웠다. 지금껏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왓네. 너무 지쳤어.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뒤로 달려오는 비혈대며 혈궁단 단원들의 모습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비혈대원들보다 경공에서 약점이 있는 혈궁단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어싿.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순간, 사중명의 눈이 동그래졌다. 순순히 따라주는 것도 그런 것이지만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정중한 말투 때문이었다. 그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듯 을지호가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연배나 나이나 한참 윗길이신데... 전에는 적이었지만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지금 선배로서 예우를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고맙군. 엎드려 절 받기란 이런 것일까? 그러나 왠일인지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래 쉴 수는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며 입을 연 을지호의 안색은 어두웠다. 사시사철 운해로 뒤덮여 있는 아미산의 정상 만불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알겠네. 사중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모두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환호성을 지를 만조 하건만 그럴 힘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괜찮소, 사마소저? 끄덕없어요.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사마유선, 숨소리가 거친 것이 말은 안 해도 꽤나 지친 기색이었다. 휴식은 짧았다. 그러나 그것은 을지호의 의지가 아니라 갑작스레 터져 나온 비명 때문이었다. 으악! 난데 없는 비명소리에 슈식을 취하던 이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 들었다. 을지호는 이미 비명이 난 곳으로달려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혈궁단원 고죽이었다. 무슨 일이냐? 뒤따라온 사마유선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시, 시체가.... 고죽은 세상지라 일컬어지는 개울에 둥둥 떠 있는 시신을 가리켰다. 비구니처럼 보이는 시신은 바위틈에 걸려 있었다. 아미파의 제자네! 그녀가 입고 있는 승복이 아미파의 복장임을 확인한 사중명이 소리쳤다. 음. 을지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서둘러 달려왔는데도 늦은 모양이었다. 그것으로 짧기만 한 휴식은 끝이났다. 시신을 발견한 을지호 일행은 그 즉시 아미파를 향해 움직였다. 그 옛날부너 아미산에는 꽤나 많은 도관과 사찰이 있었다. 아미파는 그 모든 사찰을 아울러서 일컫는 말이었고 가장 규모가 큰 복호사의 주지가 아미파의 장문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을지호 일행이 가장 먼저 발견한 사찰은 우심사였다. 우웩! 사중명의 명을 받아 경내로 들어선 증정이 대뜸 구역질을 해댔다. 그를 따라 들어선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폭의 지옥도엿다. 불심으 닦고 불경을 공부하는 우심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너무나 무참히 쓰러져 있는 여승들의 모습뿐이었다. 모두 나이가 든 노승들이었는데 온전한 시신은 단 한구도 없었다. 사지가 절단된 것은 기본이고 내장마저 모두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시신 위로 파리 떼가 새까맣게 앉아 있었다. 세, 세상에..... 사마유선을 비롯하여 몇몇 이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연불사, 현화사, 수인사, 등 그들이 지나쳐 온 모든 사찰의 상황이 우심사와 다르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미친 듯이 달린 그들은 곧 아미파의 본신이라 할 수있는 복호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을 반긴 것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시신들과 그들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와 땅을 적시는 핏물이 전부였다. 늦... 었군. 사중명이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을지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경내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많은 시신이 눈에 띄었다. 여승들뿐만 아니라 낯선 사내들의 시신도 군데군에 발견되는 것이 거의 일방적으로 당했던 다른 사찰과는 달리 복호사에서는 상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 같았다. 물론 결과는 바꾸지 못했지만. 을지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대웅전 앞에서였다. 대웅전 앞에는 삼십여 구에 이르는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아! 어, 어찌 이런일이!! 뒤따라온 사마유선과 사중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웅전 앞에서 벌어진 참상은 다른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입고 있던 옷이 모조리 찢겨 나가 알몸으로 나뒹구는 그들의 모습은 한눈에 보아도 어떤 일을 당했는지 짐작케 했다. 생사를 초월한 노승들이 사찰을 떠나지 않고 자신들의 목숨으로 시간을 끌며 어린제자들을 피신시킨 것이엇지만 흑백대전 때문에 상당수의 무승들이 아미파를 떠난 지금 그들을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사마유선이 이제 갓 열댓 살이나 되었을 어린 비구니의 시신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고통이 컸는지 악문 입술 사이에서 피가 흘러 나왔고 땅바닥을 긁어댄 손톱은 깨지고 갈라져 있었다. 여,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시신들을 살피던 한조가 미약하게 숨을 쉬는 비구니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살아도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사마유선이 안고 있는 비구니보다 한두 살은 더 어려 보이는 비구니의 가슴엔 기묘하게 휘어진 단검이 박혀 있었다. 그곳으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단숨에 달려간 사중명이 미친듯이 진기를 불어넣었다. 얼마나 그랬을까? 미약하게 숨을 쉬던 그녀가 눈을 떳다. 을지호의 눈과 어린 비구니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한없이 투명한고 맑은 눈, 그러나 고통과 아픔이 극에 이른 너무나 슬픈 눈이었다. 아! 을지호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많이 본 눈이었다.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때때로 꿈에서 만나는 그리운 눈이었다. 옥, 옥령. 머리 속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귀가 열렸음에도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그 옛날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그를 힘들게 하는 기억만이 빙글빙글 맴돌뿐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사, 살려주세요... 순간, 그의 손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살려달라는 비구니의 음성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그래, 그 아이일 리가 없지. 을지호의 입가에 쓴 웃음이 지어졌다. 그의 시선이 사중명에게 향했다. 가망이 있겠냐는 뜻이었다. 사중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려... 주세요... 제...발... 계속해서 울부짖던 음성이 급격히 작아졌다. 잠시 돌아왔던 생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리곤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을지호는 숨이 끊어졌음에도 여전히 닫히지 않은 눈을 바라보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두려움에 떨었는지 공포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비수가 되어 박혀들엇다. 너도 그랬갰지. 또다시 한 아이의 영상이 뇌리에 떠올랐다.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가슴속 깊이 잠재해 있던, 그동안 간신히 억눌러 왔던 무엇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철왕! 벌떡 몸을 일으킨 을지호가 철왕을 불렀다. 엄청난 살기가 담긴 음성이 대웅전을 흔들었다. 사마유선과 사중명은 목소리에 담긴 끔찍한 살기에 진저리를 쳤다. 주인의 분노를 느낀 것일까? 허공에서 유영하던 철왕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가까이에 있다. 찾아! 철왕이 까마득한 하늘로 비상했다. 그리곤 허공을 몇 번 선회하더니 곧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의 수백 배에 달하는 시력으로 일단의 무리를 포착한 것이었다. 을지호는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북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혼자 쫓으려는 것인가요? 사마유선이 황급히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를 악문 그녀가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따라와! 그리곤 을지호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대주님. 한조가 사중명을 불렀다. 어찌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부를 시간이 어딨어! 빨리 움직여. 이미 달리고 잇는 그 역시 을지호와 사마유선에 못지않게 분노하고 있었다. 험준한 아미산을 말을 타고 오를 수는 없는 노릇, 아미파를 쑥대밭으로 만든 철혈마단의 동기령 휘하 질풍대 사십일 명은 말을 매어놓은 아미산의 북쪽 언저리 분지에 모여 있었다. 역시 대주님의 선택은 탁월하셨습니다. 부대주 아리한이 애마에 올라타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뭐가 말이냐? 수하들보다 머리하나는 더 솟아 있는 질풍대주 율목산이 물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녀석들처럼 점창파나 청성 따위를 치러갔다면 오늘 같은 재미는 볼 수 없었을 겁니다. 흐흐, 딴은 그렇구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아미파를 맡겠다고 나선 것은 무척이나 잘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리한이 말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니. 다음 목표인 당가에서도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당가는 사풍대와 승월대가 맡기로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생각보다 아미파에서 걸린 시간이 짧았다. 급하게 서두르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당가 년들의 미모도 꽤나 알려졌다고 하더구나. 성질이 녹록치 않을 겁니다. 계집은 자고로 앙칼진 면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들은 마치 당가의 여인들이 자신의 품에 들어온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엇다. 그도 그럴 것이 사풍대와 승월대의 인원, 그리고 살아남은 질풍대의 인원이면 이백을 육박했다. 그정도의 인원이라면 어떠한 문파와도 자웅을 겨뤄볼 만했다. 더구나 흑백대전이 한창인 지금 각 문파에 남아 있는 무인들은 극히 일부뿐이었고 그나마 고수들의 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천하의 아미파를 치는 데도 고작 스물아홉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힘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가도 예외일 수 없었다. 자, 다른 녀석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늦으면 놈들의 엉덩짝이나 구경하게 될 것이다. 서두르자. 고삐를 죄고 힘껏 발을 구르자 그가 탄 말이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앗! 아리한과 다른 수하들이 곧바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을지호가 도착했다. 바로 네놈들이구나. 제법 거리가 되었지만 맨 후미에 있는 사내의 등짝이 훤히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붉게 충혈된 을지호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가 출행랑을 극성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한 번 도약할 때마다 그의 몸은 칠팔 장을 이동했다. 그렇지만 맹렬히 말을 몰고 있는 그들을 쉽게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을지호가 그들을 따라잡은 것은 일각 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람보다 훨씬 감각이 발달한 말이 출행랑을 시전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을지호의 살기를 감지했다. 히히힝! 말들이 갑자기 광분하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가 그런 것이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거의 모든 말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금껏 그와 같은 일을 겪지 못한 질풍대원들은 고삐를 거세게 움켜쥐며 말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말은 주인의 명령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쐐애액!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핏빛 화살 하나가 맨 후미에 있던 사내의 미간에 박혀 버렸다.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다 당한 것이었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이 말에서 떨어지고 주인을 잃은 말은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쐐애액!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한 사내가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비명성 역시 말들이 내지르는 투레질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으악! 세 번째 사내가 목숨을 잃었다. 발이 사내의 몸을 안장에 매단 채 빠르게 질주했다. 그제야 적이 공격한다는 것을 눈치 챈 아리한이 소리를 질렀다. 적이다! 적이라는 말에 쩔쩔매던 사내들의 기세가 일변했다. 주인의 기세가 감지된 것인지 아니면 을지호가 뿜어내는 기세가 약해진 것인지 광분하던 말들도 점차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사이에 두 명이 더 당했다. 대오를 갖춰라! 적을 파악해라! 아리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질풍대가 일제히 말 머리를 틀었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며 활시위를 당기는 을지호를 볼 수 있었다. 온다.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경고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늦은 감이 있었다. 빛살과도 같은 빠름으로 다가든 화살은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크윽! 빌어먹을! 바로 옆에 있던 수하가 당하자 아리한은 미칠 지경이었다. 원진을 만들어라. 방패를 세워! 그의 명이 아니더라도 수하들은 안장에 메달았던 방패를 필사적으로 집어들고 있었다. 땅!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충돌음이 들려왔다. 방패를 뚫지 못한 화살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한 사내는 방패를 통해 전해오는 압력에 몸서리쳤다. 돌격하라! 질풍대은 율목산의 명이 떨어지자 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투레질 소리며 함성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무기도 제각각이었다. 창을 든 자도 있었고 검을 든 자도 있었으며 도끼를 든 자도 있었다.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있던 을지호는 아미산을 오르기 전 사마유선이 떠넘기다시피 한 마지막 화살을 시위에 재고 있었다. 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이번엔 사람이 아니라 말을 노린 것이었다. 질풍대원들이야 방패로 화살을 막을 수 있었지만 말은 무방비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얇은 갑주를 씌우기는 했지만 무지막지한 힘이 담긴 화살이 뚫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목덜미에 화살이 꽂한 말은 달려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바로 뒤에서 달려오던 말도 발이 엉켜 쓰러졌다. 그들까지해서 을지호가 쓰러뜨린 적이 열에 이르렀다. 그러나 적은 여전히 많았다. 두두두두. 삼십마리가 넘는 말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내가 몸을 비스듬히 누이며 검을 휘둘렀다. 바로 옆에선 창으로 찔러왔다. 을지호의 몸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목표를 놓친사내의 시선이 그를 따라 허공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화살도 없이 시위를 당기는 을지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정수리로부터 전해오는 화끈한 느낌을 이상히 여기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주인을 잃은 말의 등을 밝고 재차 도약한 을지호가 또다시 시위를 당겼다. 크아악! 자신이 무엇에 당하는지 모른 채 다섯 명의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날개가 달리지 않는 이상 마냥 허공에 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가 을지호의 위기였다. 을지호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질풍대가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다. 그리곤 주변을 선회하며 공격의 기회를 노렸다. 타핫! 낭아추를 빙글빙글 돌리며 기회를 엿보던 아리한이 을지호의 다리를 향해 공격을 했다. 그가 훌쩍 뛰며 낭아추를 피하자 기다렸다는 듯 네 방향에서 돌격이 시작됬다. 그러나 그의 빠름을 잡을 수는 없었다. 특히 출행랑을 펼칠 때 전해오는 살기에 깜짝 놀란 말이 움츠러들며 명령을 듣지 않았다. 당연히 제대로 된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말의 문제는 아니었다. 흠칫흠칫 놀라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에도 무영시에 꽤 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마냥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긴 거리에서 소리없이 다가드는 장창의 위력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결국 어깨 쪽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통증이 뼛속까지 밀려들어 왔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러잖아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것이었다. 죽인다. 그가 바삐 놀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철궁의 시위를 풀어버렸다. 크하하하하! 이빨 빠진 늑대새끼가 되버렸구나. 아리한이 광소를 터뜨렸다. 지금 와서 빈다고 목숨을 연명할 줄 알았느냐! 그의 눈에는 그것이 항복의 의사로 비쳐진 모양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짓밟아 버려라. 율목산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잠깐 멈추었던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철궁에 일어난 변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달처럼 휘었던 철궁이 어느새 꼿꼿이 펴져 을지호의 손에 들려 있음을, 그 대가는 참으로 처참했다. 따따땅. 그를 공격했던 이들의 무기가 일제히 하늘로 치솟았다. 일수에 공격을 무마시킨 을지호의 철궁이 춤을 추었다. 철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멀쩡히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말의 다리를 모조리 박살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든 그렇지 못햇든, 을지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빠르게 접근하여 천하의 명검보다 더 강한 예기를 뿜어내는 철궁에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을지호는 지금 어째서 검이 궁보다 접근전에 강한지 그 이유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철궁을 들고 있을 때는 들이닥치는 공격을 피하고 시위를 당기는 두가지 동작을 해야만 했지만 철궁을 검처럼 사용하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수비와 공격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말들의 울부짖음, 끔찍한 비명이 분디를 뒤흔들었다. 그것의 중심에 을지호가 있었다. 남궁세가의 검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구양풍에게 배운 검법과 가문의 검법을 사용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정한 초식도 없었고 정교한 몸놀림도 없었다. 곳곳에 상처가 생겼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몸이 가는 대로 미친 듯이 움직이며 말을 쓰러뜨리고 질풍대원의 목숨을 빼았을 뿐이었다. 낭아추를 사용하던 부대주 아리한은 양끝의 추를 연결하던 만년삭이 실처럼 끊어지는 것에 기겁하다가 되돌려진 추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어라 이놈! 율목산이 속절없이 쓰러지는 수하들을 보며 커다란 도끼릴 휘두르면서 달려들었지만 막강한 내공으로 휘두르는 철궁에 도끼의 날이 박살나고 박살난 도끼의 파편이 암기처럼 날아들다 버틸 도리가 없었다. 무수히 많은 파편이 그의 전신에 박혀 버렸다. 하지만 그의 결정적인 죽음은 목뼈를 으스러뜨린 철궁의 힘이었다. 부대주가 죽었다. 대주인 율목산마저 변변한 힘도 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사십 명이 넘던 인원도 고작 열 명이 갓 넘을 뿐이었다. 남들의 공포를 즐기며 살상을 펼쳤던 질풍대원들이 오히려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전의를 상실한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다. 도, 도망쳐! 후퇴해라! 더 이상 싸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실히 깨달은 생존자을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가만히 놔둘 을지호가 아니었다. 그는 도망치는 자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살수를 펼쳤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나왓다. 아무리 빨라도 그를 벗아날 수는 없었다. 그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뱉을 땐 살아 있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미파를 유린했던 질풍대는 물론이고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 역시 모조리 시체로 변해 버렸다.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아직도 성이 차지 않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을지호, 그는 조금이라도 숨결이 느껴진다 싶으면, 아니, 온기가 남아 있다 싶으면 타작을 하듯 철궁을 휘두럿다. 피가 튀고 살점이 난무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거의 모든 시신이 그런 취급을 당했다. 혈귀로 변해 버린 그를 언제부턴가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 건가요? 사마유선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며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다. 혈궁단원들은 물론이고 일찍이 그의 실력과 잔임함을 살짝 엿보았던 비혈대원들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보지 못하고 들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니... 사중명이 너무도 잔인한 손속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온설화가 어째서 그와 부딪치지 말라고 했는지를 또다시 상기하면서. ----------------------------- 금 사 하 한 마리의 전서구가 패천궁의 진영으로 나아들면서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도 팽팽하게 전개되던 흑백대전이 멈췄다. 세인들은 겉으로는 팽팽하게 보여도 기세에서 우위를 보이던 패천궁이 어째서 공격을 멈추었는지 의아함과 불안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봤다. 사실 패천궁이 공격을 멈춘 것은 사천혈맹의 준동을 알려온 사중명의 전서구도 영향이 있었지만 누구보다 군사 온설향의 힘이 컸다. 애당초 제삼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 명령을 내렸던 궁주 안휘명은 사천혈맹이 움직인다는 소리에도 싸움을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또한 대다수의 장로들과 호법들, 수뇌들이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승리할 수 있다는 미련 때문에 쉽사리 공격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설화는 어째서 싸움을 중단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조목조목 들이대며 궁주와 수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과거 사천혈맹이 지니고 있었던 힘은 가공 그 자체였다. 현재 그들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둘째, 계속해서 공격을 한다면 승리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이미 전력의 반 이상이 소진되었고 최악의 경우 전력의 대다수를 잃어버릴 수가 있다. 그런 상황에선 노도와 같이 들이닥칠 사천혈맹을 상대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 셋째, 사천혈맹 중 남천인 흑월교는 패천궁의 세력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그들이 공격을 한다면 모든 힘이 흑백대전에 동원된 흑도의 여러 문파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 넷째, 사천혈맹 중 드러나지 않은 중천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패천궁 내부에 간자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다섯째,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사천혈맹의 의도를 안 이상 패천궁이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는 것은 치욕스런 일이다. 또한 그들에게 희생당한 수하들의 복수를 할 의무가 있다. 안휘명의 결정은 전 흑도의 결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싸움을 중지시킨 그는 각 문파의 수뇌들을 모아놓고 사천혈맹에 대해 설명했다. 사천혈사를 기억하는 그들이기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온설화는 사중명이 보내온 소식을 정도맹주에게 보냈다. 하지만 정도맹의 수뇌들 중 밀서의 내용을 미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패천궁의 음모라 단정 짓고 전의를 다질 뿐이었다. 곽화월과 황충 등 몇몇 인물만이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대세에 묻히고 말았다. 그들이 사천혈맹이 준동하고 있음을, 패천궁에서 전해온 밀서의 내용이 사실임을 깨달은 것은 아미파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급보를 접한 이후였다. 질풍대가 아무리 샅샅이 뒤졌어도 아미산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사찰을 모두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생존을 했고 그들이 아미산의 참화를 흑백대전에 참여하고 있는 아미파의 장문 혜정신니에게 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급보가 전해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사천에 있는 개방의 제자들에게서도 미친 듯이 보고가 올라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규모의 무인들이 서진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발대로 보이는 자들에게 이미 십여 개의 군소문파가 산산조각났으며 당가와 점창, 청성도 위협받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흑도와는 달리 백도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사천에 본산을 두고 있는 몇몇 문파가 서둘러 움직일 준비를 했는데 특히 오십여 년 전 패천궁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아픈 기억이잇던 청성과 점창파가 그랬다. 그들은 곧 전 제자들을 이끌고 본산으로 향했다. 그들이 있는 곳과 사천의 본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칠팔일은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이엿고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바로 그들의 가족과 형제, 제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패천궁과 정도맹은 매우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소규모로 벌어지고 있던 싸움을 완전히 중단시키고 수뇌들이 회합을 했다. 비록 패천궁주와 정도맹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진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천혈맹을 상대하기 위해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사중명으로부터 전서구가 날아온 지 정확히 이틀, 아미파로부터 급보가 전해진 지 만 하루 만의 일이었다. 한편, 아미파를 공격했던 철혈마단 동기령 휘하의 질풍대를 몰살시킨 을지호 일행은 당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 약재의 집산지로 유명한 회하촌은 성도에서 동남쪽으로 사십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회하촌은 말 그대로 장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강물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강물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마을 북쪽에 있는 금사하는 고운 모래사장과 기암절벽으로 많은 이가 찾는 곳으로 유명했다.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허기진 채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피곤에 찌든 몸으로 싸울 수는 업는 노릇이었다. 당가를 코앞에 둔 을지호 일행은 바로 그곳 금사하의 주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후~~ 일행과 홀로 떨어져 있는 을지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왓다. 질풍대와의 싸움 이후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비혈대와 혈궁단원들의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러내 놓고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한 그들의 시선엔 두려움을 넘어 혐오감까지 느껴졌다. 하긴 나도 내가 끔찍할 정도니. 이성을 찾았을 때 벌어진 참극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가 질풍대에게 한 짓은 그들이 아미파에서 저지른 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멍청한 놈, 그토록 노력했건만 한순간을 참지 못하고. 그의 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살기를 없애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것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옥령의 눈빛이었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옥령의 눈빛을 하필이면 아미파의 어린 비구니의 눈에서 보고 만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로 인해 결국 이성의 끊을 놓고 만 것이었으니... 후~~ 그의 입에서 또다시 자책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슨 한숨을 그리 쉬세요? 땅 꺼지겠어요. 한 손엔 커다란 술병을, 다른 한 손엔 잔을 든 사마유선이 조용히 다가와 앉았다. 술이나 한잔하실래요? 그녀가 잔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과 술잔을 잠시 응시하던 을지호가 잔을 받아 들었다. 어디서 구했소? 그냥 생겼어요. 술이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그럴 리는 없었다. 그녀가 가져온 술은 풍간이 근처에 있는 주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사마유선이 잔을 채웠다. 을지호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녀가 다시 잔을 채웠다. 술은 을지호의 입속으로 단숨에 빨려 들어갔다. 그녀가 술을 따르고 을지호가 잔을 비우기를 얼마간,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술을 따르던 사마유선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랬어요? 막 술잔을 비우던 을지호가 동작을 멈췄다. 그것도 잠시, 단숨에 잔을 비운 그가 처음으로 사마유선에게 잔을 건네며 물었다. 뭐가 말이오? 사마유선이 찰랑이며 넘치는 술잔을 비우고 말했다. 그때 말이에요. 그렇게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사마유선이 힘들게하고 돌려 말했지만 그는 왜 그렇게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싸웠냐는 질문임을 모르지 않아싿. 내가 괴물로 보이오? 뜬금없는 질문에 사마유선이 다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아니예요. 다만... 너무 잔인했다는 말이겠구려. 입술을 꾹 다문 사마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오. 잠시 이성을 잃었소. 그리고 그때의 나는 내가 아이었소. 그렇군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을지호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소. 내가 아닌 한. 혹시... 옥령이라는 사람 때문에.... 여자이 예리한 직감은 하늘마저 감탄할 정도라 하던가. 아무도 듣지 못한, 오직 을지호가 자신만이 들릴 정도로 내뱉은 말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을지호가 이성을 잃고 그토록 잔인하게 변한 이유가 옥령이라는 이름 때문인 것을 그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느끼고 있었다. .... 입을 다문 을지호는 술병을 빙글빙글 돌리며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사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마유선은 채근하지 않았다. 그가 말해주면 듣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깨끗이 포기하려는 자세였다. 을지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궁금하오? 사마유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다시 금사하로 향했다. 그리곤 담담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더라.... 그렇군, 열다섯 살 때였군. 늙어 돌아가실 때가 돼서 그러신 것인지 하니면 할아버지 말씀대로 노망이 난 것인지 두 분 고조부님, 참, 사마 소저도 한 분은 아실 것이오. 구양풍 어르신이라고. 아무튼 그분들이 내게 내공을 몽땅 전수해 주셨소. 뭐 아직까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진 못했지만 내공만을 따지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거요. 아니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계셨구려, 돌아가신 할머니 뱃속에서부터 내공을 키웠다고 하시더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내공을 지니셨소. 을지호가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소. 구름 한 점 없는 정말 맑은 날로 기억하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출행랑의 수련을 마치고 출동하는 나를 반겨주었소. 사실 무척이나 고생했소. 모든 내공을 폐하고 동굴에 들어갔으니. 그래서 동굴만 나가면 집 안을 확 뒤집어놓으려고 했는데...흐흐, 그런데 그놈의 바람이, 폐부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바람이 그런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린 것이오. 실실거리며 웃던 을지호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지어졌다. 친구를 만나러 갔소. 친구... 아니지. 내가 좋아했던 아이요, 나보다는 한 살 어렸는데 사냥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되었소. 옥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는데 눈이 무척이나 예뻤소. 아무튼 집에서 꽤나 먼거리에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소. 왜 집으로 가지 않았냐고 묻고 싶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그땐 그랬소. 그냥 보고 싶어서.. 을지호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지고 슬픔만이 남아버렸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소. 활을 만들어달라고 따라다니던 꼬마들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또 말썽을 피웠냐고, 기왕 왓느니 밥이나 먹고 가라며 반기던 박씨 아저씨도 없었고, 나만 보면 장기를 두자고 판을 꺼내는 먹쇠 아저씨. 아저씨를 꽉 움켜쥐고 억척스럽게 삶을 꾸려나가던 아주머니도 없었소,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슬며시 손을 잡아주던 그 아이도 없었소. 마을엔... 그저 불에 타다 만 집과 사지가 무참히 잘린 시신들만이 널려 있었소. 을지호의 전신에서 사마유선으로선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소. 그저 미친 듯이 찾아 헤맸을 뿐. 그리고 그 시체 더미 속에 발가벗겨진 채 숨져 있는 그 아이를 찾아내었소. 내가 선물한, 늑대 이빨로 만든 팔찌를 꽉 움켜쥔 그 아이를 말이오. 그 뒤론... 그 뒤론 기억이 나지 않소. 사마유선을 압박했던 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술까지 마신 을지호가 금사하의 고운모래 위로 몸을 누였다. 그래서 어찌 되었나요? 묵묵히 듣던 사마유선이 물었다. 살짝 감겼던 눈이 떠지고 닫혔던 을지호의 입이 또다시 열렸다 그날 이후로 며칠이 흘렀는지 몰랐소.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소. 다만... 어린아이의 울음에 눈을 떴을때. 날 찾아 나서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외침을 듣고 정신을 차렸을 때 벌어진 일만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소. 살짝 찌푸린 아미가 을지호의 말을 듣는 그녀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내 손에 어린...아이가 잡혀 있었소, 그 아이는 곧 죽고 말았소. 그리고 끔찍하게 살해된 사람들이 보였소. 크크크,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죽이 사람이 삼백 명도 넘는다는구려 삼백 명... 내 나이 열다섯이었소. 이때만큼은 사마유선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음. 어찌 된 상황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을지호는 분명 마을 사람들을 해친 자들을 찾아 나섰을 것이고 닥치는 대로 살상을 했을 것이다. 그 안에는 패악질을 일삼던 놈들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사람들도 있었을 터, 그가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하늘을 볼 수가 없었소, 집안 식구들도 볼 수가 없었소이다. 죽음까지도 생각했지만 못난 놈이라, 더할 수 없이 비겁한 놈이라 그러지도 못했소. 대신 몸에 깃든 괴물을 없애고자 무던히도 애를 썻소. 그러나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소.보다 강해지면 놈을 제거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집을 떠나 죽어라 수련을 했소. 십여년의 세월을 보낸 지금, 놈을 마음속 깊은곳에 가둘 수 있었소. 하지만 아직도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소. 아직도... ... 이 빌어먹을 기억을 생각할 때마다 차리리 그때 죽었으면,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를 막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소. 흐흐흐. 뭐. 가끔이지만. 사마유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햇다. 그러나 결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팍. 그의 손에서 술병이 깨져 나갔다. 손바닥을 파고든 파편 때문에 손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깜짝 놀란 사마유선이 옷을 찟어 상처를 감쌌다. 공자께서 다소 심했다는 것은 분명해요.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잇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어느세 곁으로 다가와 얘기를 듣던 사중명이 그의 어께에 손을 얹었다. 자네는 할 일을 한 것뿐이야. ...... 어개를 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쳐져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이런 모습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 대신 하나만 약속해 줘요. .... 사마유선이 그의 가슴에 손을 댓다. 다시는 괴물 따위에게 지지 않갰다고 말이에요. 을지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지어졌다. 노력은 해보겠소,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 사마유선이 활짝 웃었다. 틀림없이 잘될 거예요. 가만 글고 보니 술이 떨어졌군요. 그녀의 시신이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엿듯고 있는 혈궁단으로 향했다. 어이 풍간, 그렇게 쥐세끼처럼 엿듣지 말고 냉큼 술이나 가지고와. 그녀가 앙칼진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을지호에게 보여주던 상냥한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마유선 그녀는 분명히 두 얼굴을 지닌 여인이었다. 을지호와 사중명이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본 모습을 익히 알고 있는 사중명과는 달리 그는 사마유선의 성격을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이곳 금사하에서 그 옛날 조부 을지소문이 청하와 환야를 만났고 사랑을 키웠다는 것을. ------------------------------------ 당가. 오대세가의 일원이자 사천의 맹주 당가는 독과 암기로 대표되는 최고의 무가였다. 과거엔 암왕을 배출했고 현재엔 독왕을 배출했으며 빚진 젓이 있으면 하늘이 두 쪽 나고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반드시 그 몇 배로 갚아준다는 지독한 문파. 그런 당가에 위험이 찾아온 것은 무수히 많은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는 늦은 밤이었다. 율목산의 예견대로 철혈마단 은기령 휘하 사풍대와 승월대 백육십 명이 야음을 틈타 전격적으로 기습을 감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미파와는 다르게 당가는 쉽게 당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은밀히 행동한다고 했겠지만 당가에선 사풍대와 승월대의 움직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당가의 주변 몇백 리는 사실상 그들의 영역권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낯선 이들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수상한 자들임은 틀림없었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민다고 여긴 당가는 그들의 움직임을 시시각각으로 파악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들이 침입하자마자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암습하려다가 예기치 못한 매복 기습에 모양새를 구긴 사풍대와 승월대는 곧 전열을 수습하여 정면으로 쳐들어갔다. 당가는 온갖 암기와 독을 이용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삼십 명도 넘는 인원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들 대부분이 독에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물러설 줄 모르고 들이닥치는 사풍,승월대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더구나 독의 상극이라 할수 있는 화공을 이용하여 공격을 하니 초반 기세를 올렸던 당가는 순식간에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으악! 으아아악! 거친 함성 소리와 비명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비명 소리를 듣는 당소기의 마음은 착찹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최일선에서 싸움을 지휘하다 큰 부상을 입고 물러선 그였다. 후~ 천하의 당가가 어쩌다가 이런 한심한 꼴을 당하게 되었단 말인가. 비명성이 점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보니 방어선이 계속해서 뒤로 밀리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달려온 당우곤이 다급히 소리쳤다.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힘든 모양이구나. 전신이 피로 물든 것이 그 역시 꽤나 치열한 격전을 치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백부님. 당가가 밀리는 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고개를 떨구는 그를 보며 당소기가 손을 저었다. 죄송할 것 없다. 전력의 차가 심해서 그런 것이니. 그나마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한 것이야. 독왕 당욱을 비롯하여 당가를 떠난 식솔들은 당가가 지닌 힘의 거의 팔구 할에 이를 정도였다. 그만큼 세가에 남은 전력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껏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일 정도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백부님, 놈들이 곧 이곳까지 들이닥칩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다른 식솔들은 어찌했느냐? 다행히 퇴로가 열려 있어서 규 아우가 일단 아이들과 아녀자들을 피신시키고 있습니다. 하나 그곳도 언제 위험해질지 모릅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그러나 당우곤의 간곡한 부탁에도 당소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 늙은 내가 세가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백부님! 되었다. 퇴로를 보다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시간을 끌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내가 할 일 같구나. 하지만..... 뒷일은 네게 부탁하마. 규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네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당소기의 태도를 보아하니 마음을 돌리기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짧은 한숨을 내뱉은 당우곤이 대답을 했다. 백부님께서 가시지 않는데 제가 어찌 가겠습니까? 저도 남겠습니다. 헛되이 목숨을 버릴 셈이냐? 당소기가 역정을 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식솔들을 구하는 일이 어찌 헛된 일이겠습니까? 백부님 말씀대로 한 사람이라도 더 남아 시간을 끌어야 식솔들이 안전히 대피할 것입니다. 나 혼자도 충분하다.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그 몸이론 무리십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고집불통 같으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당소기가 탄식하듯 몇 마디 내뱉더니 걸음을 옮겼다. 당우곤이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싸움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몸을 피한 식솔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여전히 대항하고 있는 사람은 고작 십여 명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그나마 극심한 부상을 입었는지 근근히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멈춰랏! 당소기의 노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음성이 어찌나 큰지 일순 싸움이 멈출 정도였다. 당소기를 본 생존자들이 황급히 그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하하하! 또 나왔구나. 늙은이. 기괴한 장신구를 치렁치렁 달고 있는 사내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도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보아하니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냐? 나는 승월대의 대주 야안로다. 그리고 저 친구는 사풍대의 대주 나백이라고 하지. 사풍대? 승월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나와 함께 늙은이와 싸운 녀석들은 승월십풍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니지, 늙은이의 손에 일곱이 죽었으니 승월삼풍아라 해야 하나. 십풍이고 삼풍이고 내가 알 바 아니다. 내가 듣소 싶은 것은 뭣 때문에 우리를 공격했느냐다. 빚을 갚기 위해서. 야안호가 잘라 말했다. 빚? 무슨 빚이란 말이냐? 당소기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소리쳤다. 원래 맞은 놈은 편히 발을 뻗고 자고 때린 놈은 그렇지 못한다지? 하지만 그건 개소리야. 약해 빠진 놈이나 편히 자빠져 자는 것이다. 억울해서 잠을 어떻게 자? 무슨 수를 쓰더라도 되갚아줄 생각을 해야지.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당가와 은원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쉽게 얘기해 줄까? 당가는 우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아니, 우리의 선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군. 네놈의 선조가 누구냐? 철혈마단, 서천이라고도 하지. 철혈마단? 서천? 하늘의 서쪽하고 당가가 무슨 상관...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당소기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기억 속 저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사실 하나를 끄집어낸 것이었다. 서,서천... 철혈마단이라면... 그, 그렇다면... 사, 사천혈맹? 제발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표정, 그러나 그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늙은이. 그렇다면 당가가 과거 우리 선조들에게 어떤 빚을 졌는지도 알고 있겠지? .... 충격에 빠진 당소기는 말문을 열지 못했다. 쯧쯧, 그 정도 가지고 놀라기는. 내가 뒤쪽 숲으로 난 쥐구멍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기절하겠군.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당우곤이 기겁하며 되물었다. 무슨 소리는, 도망가는 놈들은 싸움 뒤의 여흥을 위해 남겨 놓은 사냥감이라는 것이지. 비, 비겁한 놈들! 비겁? 웃기고 자빠졌군, 몰래 꽁무니 빼는 것이 더 비겁한 것이다. 야안로의 음성이 커졌다. 동시에 턱이 치켜 올라갔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일단의 무리가 식솔들이 피하고 있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안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야야 했다. 으아아아! 다급히 외치며 달려드는 당우곤의 안색이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그 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야안로의 잔인한 명령이 뒤따랐다. 유희를 즐기는 데 애들과 늙은이는 필요없다. 계집들만 살려서 데리고 와. 하지만 그의 명령은 난데 없이 들려온 파공성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 환 영 시 크아악! 가장 앞서 달리던 사내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움직이던 열두 명의 사내 역시 단말마와 함께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몸에는 핏빛 화살이 뒤덮여 있었다. 어떤 놈들이냐? 대답 대신 날아온 것은 하나의 화살이었다. 너무나 빨라 접근하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화살. 야안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화살은 간발의 차이로 그의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흠, 생긴 것 같지 않게 제법 빠른데. 야안로가 자신의 화살을 피할 줄은 몰랐다는 듯 사뿐사뿐 걸어오며 재차 시위를 당기는 사마유선은 무척이나 흥미로워하는 모습이었다. 냄새 나는 계집 따위가! 뭐, 계집?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뒈져 버렸! 그녀의 분노를 한껏 담은 화살이 야안로의 얼굴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화살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 그의 앞을 가로막는 방패가 있었다. 승월십풍 중 살아남은 삼 인이 야안로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팅. 힘없이 튕겨져 나가는 화살만큼이나 그녀의 화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그녀가 연거푸 세 발의 화살을 날렸다. 쐐애액~ 공기를 찢어발기듯 요란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가는 핏빛 화살, 화살에 담긴 위력이 조금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승월십풍이 방패로 앞을 차단하며 일제히 무기를 휘둘렀다. 그런데 그들의 가슴 높이께로 날아오던 화살이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헛! 절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마치 생명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 기쾌하게 움직인 화살은 미처 대응할 사이도 없이 그들의 발등에 박혀 버렸다. 크악! 뼛속까지 울리는 고통에 비명이 절로 나오고 굳건하던 자세에 허점이 생겼다. 사마유선은 그 짧은 순간의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슈슈슉~ 발등에 박힌 것보다 더욱 은밀히 날아든 화살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허겁지겁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 했으나 이미 늦었다. 눈으로 찾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허점을 교묘히 파고든 화살이 그들의 몸에 박혀 버렸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성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특히 팔뚝과 옆구리에 빗겨 맞은 사내보다는 정통으로 눈을 관통당한 이의 비명은 들어주기 거북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땅바닥을 뒹굴다가 곧 목숨을 잃고 말았다. 찢어죽일 년 같으니! 뭣들 하느냐? 당장 저년의 사지를 분리시키지 않고. 분노가 극에 이른 야안로가 명을 내리자 수십 명이 넘는 승월대원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쓸어버려. 나직한 나백의 명령과 함께 사풍대원들도 노도와 같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당가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인해 꽤나 많은 인원이 희생되엇지만 사풍, 승월대의 인원은 아직도 백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반면에 을지호일행은 도합 삼십사 명, 당가의 인원을 합친다 하더라도 오십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싸움이라는 것은 숫자놀음이 아니었다. 백여명이 열 명을 유린할 수도 있는 것이었고 반대로 열 명에게 백 명이 농락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마유선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화살을 날려대는 혈궁단은 그들의 명성대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곱 명이 하나의 조를 이뤄 목표한 적을 차례차례 공격하여 쓰러뜨렸는데 엄청난 속사에 적당히 흩어지는 화살, 그리고 상대의 움직임마저 예측하여 방향을 차단하는 능력은 최고였다.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시야에 걸린 이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흠, 대단한데. 혈궁단의 활약을 유심히 살피던 을지호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순수 궁술 실력은 천뢰대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개개인이 지닌 내공이나 연륜은 천뢰대가 따라 가기 힘들어 보였다. 물론 그들의 막강한 화력을 뚫고 접근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궁술을 사용하는 이들의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바로 접근전이었는데 사중명이 이끄는 비혈대는 그들을 대신해 접근헤 성공한 적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펼쳤다. 기세가 오른 당가의 무인들도 그들을 도와 마지막 힘을 불태웠다.곳곳에서 화광이 피어오르고 우렁찬 함성과 고통의 비명성이 난무하며 당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공격! 공격하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과 반격,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도 승월,사풍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반면에 점점 화살이 떨어지면서 혈궁단의 날카로움이 많이 약해졌고 애당초 첩보 조직인 비혈대는 그 많은 인원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이미 심각한 부상과 피로가 극에 달한 당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힘들군. 홀로 전각 위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을지호가 궁을 들었다. 아미산에서 일어났던 일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을지호를 위해 사마유선은 그가 싸움에 나서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혈궁단의 힘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혈궁단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 힘에는 한계는 있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사중명이 혈궁단과 비혈대만으론 무리라며 반대를 했지만 소용이 업었다. 도끼눈을 치켜뜨며 방방 뛰는 사마유선은 사중명의 의견을 간단히 묵살하고 을지호에게도 극도로 불리해지지 않는 한 싸움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받아냈다. 평소의 그와는 다르게 을지호는 순순히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여전히 혼란스런 마음도 있었고 혈궁단의 실력도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손을 쓰면 되리라는 생각도 작용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가 생각한 적당한 때였고 사마유선과 약속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여상이 위험에 빠진 것을 발견한 을지호가 시위를 당겼다. 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혈궁단으로부터 얻은 화살이 섬전과도 같이 날아갔다. 큭! 막 여상이 목숨을 취하려던 사내가 허벅지로부터 전해오는 극통에 몸서리치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죽음을 생각하며 질끈 눈을 감았던 여상이 괴성을 지르며 검을 뻗었다. 무방비로 가슴을 노출한 사내는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하고 여상의 공격에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하아, 하아. 여상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그가 을지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마유선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크악! 두 개의 방패로 완벽하게 몸을 보호하며 접근하던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어째서 자신의 뒤통수로 화살이 날아왔는지 이해를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멋진 솜씨요, 사마소저. 오셨군요. 이기어시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던 사마유선이 반색을 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는 괜찮소. 그녀의 표정이 왜 그렇게 변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을지호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궁왕 어르신께 배운 것이오? 을지호는 사마유선이 궁왕 사마후의 후손이라는 것을 사중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사마유선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고조부님을 뵙지 못했어요. 조부님께 배운 것이지요. 하하, 그게 그것 아니오, 어차피 그분께서도 궁왕 어르신의 궁술을 이어받은 것이니. 안타깝게도 조부님께선 궁보다 검에 심취하셔서 고조부님의 무공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하셨어요. 그냥 조금 익히신 것뿐. 흠, 그랬구려. 어쨌든 안타까운 일이요. 천하를 호령하전 어르신의 무공이 이어지지 못했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사마유선이 애써 태연히 대꾸를 했다. 그러나 살짝 떨리는 음성 속에는 궁왕의 궁술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한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을지호와 사마유선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기어시를 이용한 그녀의 공격은 방패를 앞세워 물밀듯이 밀려오는 이들에게 집중되었고 을지호는 이미 접근해 비혈대와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을 공격했다. 음. 사마유선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을지호의 눈이 재빨리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호오, 제법이군요. 그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당황하는 사마유선과는 달리 다소 비웃음이 섞인 탄성이었다. 그들을 놀라게 한 사람은 승월대의 대주 야안로와 사풍대의 대주 나백이었다. 계속해서 전진을 독려하던 그들이 자꾸만 쓰러지는 수하들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선 것이었다. 수하들의 방패에 비해 절반에 불과한 조그만 방패 하나를 들고 전진하는 그들,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달려오는 그들에게 혈궁단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고 순식간에 백여 개의 화살이 그들을 향해 짓쳐 들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적중한 화살은 단 한개도 없었다. 젊반은 교묘히 움직이는 방패에 막힌 것이고 그 나머지 절반은 각기들고 있던 반월도와 단창에 막힌 것이었다. 단창을 사용하는 나백은 그렇다 쳐도 떠벌리기 좋아하고 허풍이나 떠는 위인으로 보였던 야안로의 무공이 의외로 뛰어났다. 유난히 독을 두려워해 승월십풍과 함께 당소기를 상대할 때에는 본래의 실력을 삼 푼도 발휘하지 못했지만 사실상 그는 당소기와 백초는 능히 겨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리고 그의 실력은 사마유선이 작심하고 날린 이기어시를 비교적 가볍게 막아내는 것으로 확실히 증명되었다. 어쨌든 두 대주가 앞장서 화살을 막아내니 그를 따르는 승월, 사풍대의 기세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기세가 올랐어요. 큰일이군요. 싸움에서 상대의 기세가 올라가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 있던가. 사마유선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리 걱정할 것은 없소, 기세야 꺾으면 되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을지호가 시위를 당겼다. 고개를 돌리던 사마유선이 시위에 화살이 없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무영시. 귀가 따갑게 들었으나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그가 질풍대와 싸울 때 견식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뒤늦게 도착하며 미처 보지 못한 궁귀의 절예 무영시였다. 사마유선이 들뜬 표정으로 을지호를 살폈다. 핑~ 사마유선은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뭔가가 날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몸이 느끼고 있었다. 야안로와 나백도 자신들을 노리며 날아드는 뭔가를 알아채고 황급히 방패를 들었다. 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야안로의 손에 들려 있던 방패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방패의 손잡이와 손잡이 주변의 보잘것 없는 방패의 흔적뿐. 손아귀가 찢어졌는지 팔뚝을 타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무영시! 을지호의 무공을 알아본 당소기가 놀라 부르짖었다. 싸움은 일시에 멈춰졌다. 궁을 내린 혈궁단과 당가의 무인들은 무영시라는 무공이 주는 의미를 알기에 놀랐고 승월, 사풍대의 대원들은 강철을 덧댄 방패를 산산조각 내버린 위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사이 나백의 방패도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그 파편에 맞았는지 그의 볼에서 한줄기 혈흔이 보였다. 이게 무영시...인가요? 사마유선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소. 저, 정말 대단해요. 궁왕 어르신의 무공은 더 대단하오. 을지호가 손을 내밀었다. 사마유선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화살 하나를 건넸다. 을지호가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모두들 숨도 쉬지 못하고 그를 지켜봤다. 야안로와 나백 역시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투웅! 날카롭다기보다는 명쾌한 소리를 내며 시위를 떠나는 핏빛 화살. 처음 시위를 떠날 땐 하나였지만 궁을 벗어나는 순간 화살은 이미 두개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곧 네 개로, 여덟 개로 기하급수적으로 수를 늘려갔다. 그리고 화살이 목표에 도착할 즈음 사람들은 곧 온 세상이 핏빛으로 뒤덮인 환상을 볼 수 있었다. 아! 세, 세상에!!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많은 화살의 잔상 중 진짜는 오직 하나. 야안로와 나백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 체념한 듯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나백과는 달리 야안로는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며 발악을 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발악을 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도에 가로막힐 정도로 만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화살은 야안로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크악! 불로 지진다 한들 이보다 더 고통스러울까! 야안로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곤 불신 가득한 눈으로 을지호를 쳐다보며 힘없이 고꾸라졌다. 와아! 비혈대와 혈궁단원들이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반대로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힌 승월, 사풍대의 무인들은 을지호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환영시라는 것이오. 환....영.....시.... 궁왕 어르신의 무공이라오. 아! 사마유선은 가슴을 파고드는 뭉클한 감정이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꼭 감고 감동의 여운을 느끼는 사마유선을 잠시 지켜보던 을지호가 나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라. 의외라는 듯 그의 눈이 커졌다. 살려주는 것이냐? ....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듣고 싶지도 않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을지호. 나백은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돌아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리는 나백, 그 뒤로 오십여 명의 생존자들이 서둘러 걸음을 놀렸다. 이대로 보내는 것인가? 사중명이 당장에라도 추격을 할 기세로 소리쳤다. 을지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놈들이 저지른... 답답하다는 듯 음성을 높이려던 사중명은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팔을 잡은 사마유선이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당가로 오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기한 사중명이 헛기침을 하며 무안해했다. 그때 당소기가 지친 노구를 이끌고 다가왓다. 도움을 받고도 제대로 인사를 못했네. 이 늙은이는 당소기라 한다네. 그가 을지호에게 정중히 예를 차렸다. 깜짝 놀란 을지호도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을지호라 합니다. 혹, 궁귀 을지소문이... 예, 제 조부님 되십니다. 당소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렇군. 무영시를 쓸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렇군. 그 옛날 그 친구에게도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손자에게 또다시 은혜를 입는군 그래. 은혜라는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누가 저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 것이며 당가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을지호가 한 걸음 비켜섰다. 비혈대 대주 사중명이라 합니다. 혈궁단 단주 사마유선입니다. 사중명과 사마유선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허허, 가주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식솔들이 패천궁과 싸우기 위해 세가를 비웠건만 도리어 패천궁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당소기가 고소를 지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큰 신세를 졌소.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사천혈맹은 흑백을 떠나 전 무림의 공적이 아닙니까? 사중명은 당소기가 자신들의 도움을 다소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아체고는 재빨리 사천혈맹을 거론했다. 그래도 신세를 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 내 잊지 않겠소. 그나저나 우리가 위기에 처한 것은 어찌 알고 온 것이요? 남궁세가가 무너진 것을 아시는지요? 당소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을지 공자와 흉수를 쫓다가 그것이 놈들의 간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흠, 그렇게 된 것이었구려. 그리고 흉수들에게서 사천혈맹의 준동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면 저들이 틀림없는 사천혈맹의 무리라는 것이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당소기의 음성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예, 이미 아미파를 비롯하여 몇몇 문파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아, 아미파가 당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허, 아미파가... 당소기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탄식성을 내뱉었다. 어쩌면 점창이나, 청성파 또한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은 놀랄 힘도 없었다. 아미파와 청성, 점창, 당가는 사천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문파이자 정도무림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들이 무너졌다는 것은 사천성이 이미 사천혈맹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사천혈맹이 준동했다는 것은 패천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림에 크나큰 재앙이었다. 허허, 얼마나 많은 피를 보려는가. 벌써부터 피비린내가 온 천하에 진동하는 듯했다. ----------------------- 아미파와 당가를 유린하고 청성파, 점창파를 무너뜨린 철혈마단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엄청난 기동력과 인원, 그리고 잔인함을 앞세워 사천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군소문파를 무릎 꿇렸다. 결국 최후까지 버티다가 개미새끼 한 마리 남지 않고 몰살을 당한 등선방을 끝으로 그들에 대항하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철혈마단이 사천성을 석권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닷새에 불과했다. 사천성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은 입과 입을 통하여 순식간에 전 중원으로 퍼져 나갔다. 전통의 명문 문파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억세기로 유명한 사천성의 무인들이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몰살당하거나 도망쳤다. 사천혈맹 중 고작 한 세력이 움직였을 뿐인데도 그렇다면 나머지 삼천이 움직였을 땐 어떠할까? 세인들은 그들의 압도적인 힘에 깊은 절망과 공포,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장차 몰려올 혈겁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쳣다. 물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철혈마단에 당한 대부분의 문파들은 사실상 빈 껍데기나 다름없었다. 전력의 대부분이 흑백대전 때문에 정도맹에 집결해 있는 상황, 비록 참담한 피해를 당했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사천혈맹이라는 적을 맞아 그동안 치열한 싸움을 펼친 정도맹과 패천궁이 분쟁을 종식시키고 협력하기로 한 것은 무척이나 희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지만 그간 워낙 깊은 불신의 골이 패인 까닭에 당장 어떤 식으로 협력을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함께 싸운다라는 전제만 세워놓았을 뿐이었고 우선은 각자의 대책을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당파에선 정도맹과 백도의 여러 수뇌가 연일 회동을 했고 무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곡성의 패천궁 진지에서도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고심 중이었다. 어쩌고 있다던가? 이런 저런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꽤나 혼란스럽다고 합니다. 온설화의 대답을 들은 안휘명이 혀를 찼다. 쯧쯧, 한심한 놈들 같으니, 적이 코앞에 이르렀다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러니 변변히 대항도 못하고 사천을 빼앗겼지. 어쩌다가 그런 한심한 놈들과 손을 잡았을까!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안휘명의 인상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그놈들과 힘을 합하느니 차라리 단독으로 싸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온설화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하면 하는 것이지. 그녀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퉁명스럽게 내뱉은 그가 다시 질문을 했다. 애주부로 떠날 준비는 끝난 것인가? 애주부엔 패천궁의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가 있었다. 예, 명령하신 내일 아침엔 떠날 수 있습니다. 잘됐군. 싸우지도 않는데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지. 이렇게 가까이 있다 보면 자꾸망 공격 명령을 내리고 싶어서 말이야. 그의 말에 다들 웃음을 보였다. 그나저나 그들에게서 다른 연락은 있었나? 그날 이후 연락이 없던 것 같은데. 안휘명은 아미파로 간다는 소식을 끝으로 끊어진 사중명과 사마유선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했습니다. 뭐라고 그래? 안휘명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당가의 식솔들과 함께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당가? 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예, 을지 공자와 함깨 위기에 빠진 당가를 구하고 그 이후로 계속 함께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흠, 어쩐지, 을지호 그 친구가 그곳에 있었군. 비혈대와 혈궁단도 함께 있었다면 당가를 구할 충분할 전력이 되었겠지. 안휘명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닌 것 같다니? 사 대주가 전한 내용대로라면 비혈대와 혈궁단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을지 공자 혼자서 막아낸 것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아미파를 습격했던 놈들도 혼자 쓸어버렸다고 하더군요. 허!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힘의 공백이 크다 한들 아미파나 당가를 친다면 꽤나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을 터, 그 많은 인원을 혼자서 막았단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천혈맹을 상대로? 비부 뇌학동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엇다. 하지만 안휘명은 당연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과연, 궁귀의 후예로군. 그가 그 정도로 강한가? 동방성이 넌지시 물었다. 강합니다.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궁주와 비교해선 어떤가? 동방성 정도 되는 인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쩌면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질문임에도 안휘명은 조금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모두들 긴장된 모습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요, 이론과 실전이 다르듯 직접 싸워보지 않은 이상 뭐라 말을 하기는 애매하나 이기긴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좌중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일패 안휘명이 누구던가. 소림의 수호신승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절대강자였다. 명성이 하늘을 찌른다는 강호오왕도 그들에 비한다면 초라할 정도였다. 그런 안휘명이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었다. 궁주는 스스로를 너무 낮추는군. 낙운기가 반박을 하며 나섰다. 하하! 태상장로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직접 보기 전엔 믿을 수가 없네. 낙운기의 말에 동방성이 덧붙였다. 궁귀의 무공에 전전대 궁주님의 무공까지 이어받았다고 하니 강하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네. 그러나 그는 궁귀의 후예일 뿐 궁귀본인은 아닐세. 난 그가 궁주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네. 물론 나나 태상장로님보다 강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군. 실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동방성은 스스로가 을지호보다 강하다고 단정 지었다. 그의 말투에서 더없이 강한 호승심을 느낀 안휘명은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하하! 태상호법께서 그리 말쓰하시면 그런 것이겠지요. 아무튼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니 그 얘기는 차후에 나누도록 하지요. 군사. 예, 궁주님. 온설화가 공손히 대답했다.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는가? 안휘명의 물음에 그녀는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우선 위협이 되는 것은 남천인 흑월교로 이미 움직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흑백대전이 벌어지기 전부터 제삼의 세력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던 온설화는 조금의 막힘도 없이 앞으로 패천궁이 어찌 움직여야 하고 경계할 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러나 안휘명은 그녀의 설명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저 조금 전 낙운기와 동방성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의미심자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나중에 직접 겪어보시면 알게 될 것이외다. end궁귀검신2부 5권 제37장 북풍광풍(北風狂風) 서쪽에서 불어온 광풍(狂風)의 충격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남쪽에서 들이닥친 살풍(殺風)은 온 무림을 또다시 경악 속으로 밀어넣었다. 승천지계가 발동함에 따라 본거지인 곤명을 떠나 동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던 흑월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무당산 인근 에 진을 치고 있던 패천궁이 철수를 결정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력으로 단 며칠 만에 사천성을 석권한 철혈마단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그들보다 완벽하 고 보다 확실하게 주변 문파를 굴복시켜 나갔다. 흑월교의 살풍에 희생당한 문파만 어림잡아 십여 곳. 그들이 점령한 지역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많은 수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무너진 각 문파의 면면을 살펴보면 몹시 충격적이었다. 가장 먼저 당한 능한문(凌限門)은 그렇다 쳐도 이백 년의 전통을 자 랑하는 팔극문(八極門)과 묵살문(默殺門), 적운방(積雲幇)등이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무너졌고 그 외에도 인근에서 명성을 날리던 문파 들은 멸문을 면치 못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대항하다 몰살당한 귀혼장(鬼魂莊)을 끝으로 귀주 성의 남부와 광서성 북부 지역엔 더 이상 대항하는 문파가 남아 있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으면 풀 한 포기 남기지 않는 그들의 잔인함에 대 다수의 문파들이 스스로의 전의를 꺾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흑월교의 위세가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패천궁이 당황할 정도로?" 첨밀각주로부터 흑월교의 움직임과 패천궁의 대응을 상세하게 보고 받은 천장 진인이 자못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놈들에게 굴복하는 문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귀주성에서 패천궁이 지니고 있던 영향력은 사실상 상실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나마 광서성이 버티고 있는데 만독문과 지옥벌(地獄伐)까지 무너지고 나면 흑도를 지탱하고 있는 한 축이 무 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왕호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과거에 비해 세가 많이 약해지기는 했어도 지옥벌이라면 패 천궁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문파였지. 만독문도 그렇고. 패천궁이 그리 서둘러 회군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제갈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강 진인이 고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몸통을 태우게 생겼으니 놀랄 수밖에요. 아무 튼 놈들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맹주님." "그럴 리야 있겠는가?" 천장 진인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내심 안 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그 역시 은근히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들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흑백대전이 벌어지고 무당파가 위험에 빠지면서 무당산에는 백도의 모든 힘이 집중되었다. 정도맹은 물론이고 탈맹했던 화산, 소림, 종남 파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문파들이 힘을 보탰다. 그랬기에 노도와도 같이 몰려드는 패천궁의 힘에 맞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 천혈맹이 준동하고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전력이 뿔뿔이 흩어진 지금 은 아니었다. 비록 정도맹의 맹주를 비롯하여 주요 수뇌들이 여전히 무당파를 떠 나지 않고 있었으나 아미, 점창, 청성, 소림, 화산, 종남 등 핵심 문 파들이 무당산을 떠나면서 남은 전력은 이전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순간에 패천궁이 전격적으로 들이닥친다면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 해서 패천궁이 회군한다는 소 식을 접하고도 좀처럼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있었건만 흑월교의 거센 공격으로 그런 걱정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나저나 철혈마단을 상대하기 위해 떠난 이들은 어찌 되었나? 지 금쯤이면 도착했을 것 같은데. 무슨 연락이라도 있었는가?" 무당파의 장문이자 사실상 정도맹을 장악하고 있는 천중 진인이 물 었다. 사천성을 접수하고 동진하는 철혈마단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인 문 파는 아미, 점창, 청성을 주축으로 하여 본가에 닥친 참화 소식을 듣 고 달려온 일부의 당가 문인들, 그리고 사천성에 본산을 두고 있는 여 러 문파들이었다. 움직이는 인원만 족히 삼마백, 그러나 정면으로 싸워선 승리를 장담 할 수 없었다. 아니, 백이면 백 패배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흑백대전으로 인해 가뜩이나 전력이 약화된 지금 한 번의 패배는 곧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게 될 터였다. 정도맹의 수뇌들은 복수 에 혈안이 되어 당장에라도 사천성으로 달려갈 듯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고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 사천성과 섬서, 호북의 경계를 이 루는 대파산(大巴山)에서 철혈마단을 막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 정을 내렸다. 정도맹의 결정은 곧 사천성에 있는 본산을 포기하라는 말이나 다름 이 없는 말. 아미파를 비롯하여 몇몇 문파가 거세게 반발했다. 하나 그 이상의 대안은 없었다. 평지에선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는 철혈마단의 기마대를 상대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나 진배없었다. 결국 그들로서도 정도맹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 었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듯싶습니다만 적의 첨병과는 이미 한차례 충돌 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충돌이라니?" "당가를 쫓아온 놈들이랍니다.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 듯 손쉽게 물 리쳤다고 합니다." 왕호연이 맹주를 찾기 바로 직전에 도착한 소식을 기억해 내며 차분 히 대꾸했다. "그래, 당가의 식솔들은 어찌 됐다고 하던가?"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인 법이던가? 같은 오대세가로 혈연 과도 같은 인연을 이어오던 당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제갈경의 낯빛은 몹시 초조해 보였다. "오랫동안 추격을 받아서 그런지 다들 지치고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 만 대다수가 무사하다는 전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잠시 말을 끊은 왕호연이 슬며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없는 신위로 추격자들을 격살한 을지호 대협과 혈궁단, 비 혈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 다." 순간, 이곳저곳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몇몇은 노골적으 로 반감을 드러냈는데 천강 진인이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대협이란 말을 너무 함부로 쓰는 것 같군. 또한 혈궁단과 비혈대라 면 패천궁의 무인들이 아닌가? 그자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수치 라면 수치, 결코 자랑할 것은 못 되지." "어차피 한 배를 탄 사람들 아닙니까?" 왕호연도 지지않고 대꾸했다. "한 배를 타다니! 그 무슨 망발인가?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중단하기 는 하였으나 놈들은 사천혈맹 못지않게 위험한 놈들이야. 조금이라도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일세!" 천강 진인은 천장이 들썩일 정도로 음성을 높였다. 더 대꾸해 봐야 모양새만 구길 것이라 생각했는지 왕호연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 나 제갈경의 심사는 그리 편치 못했다. "수치라...... 자랑 할 것은 못 되지만 당가가 어째서 그렇게 힘없 이 당했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리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사 천의 본가가 당하고 있을 때 당가의 주력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언제나 온화한 웃음만을 머금고 있던 제갈경의 얼굴에 냉기가 피어 오르고 음성 또한 더없이 싸늘했다. "그,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파악한 천강 진인은 일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살아남은 식솔이라 해봐야 대다수가 무공을 모르는 아녀자들과 어 린아이들, 그나마 간신히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수치스런 것입 니까?"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제 말뜻은......" 무공은 그 누구보다 약했지만 오랜 연륜과 학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릿발과도 같은 위엄은 일대종사에 못지 않았다. 가히 추상과도 같은 질책에 천강 진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무량수불! 당가를 비롯하여 함게 피 흘려 싸운 오대세가에 큰 무례 를 저질렀습니다. 하나 사제가 패천궁을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 것이지 다른 뜻은 없을 겁니다. 빈도가 사제를 대신하여 용 서를 청하겠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해주시지요." 천중 진인이 고개를 수그리며 정중히 용서를 구했다. 상대가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이상 계속해서 화를 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한 제갈경이 적당히 사과를 받아들 였다. "장문인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노부도 조금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과는 받아들였어도 무겁게 굳은 안색까지 되돌리지는 못 한 것이 여전히 앙금이 남은 듯했다. 천장 진인이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아무튼 당가의 식솔들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하니 천만다행입니다 다. 이제 문제는 놈들을 어찌 막아내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맹주님." 가만히 듣고 있던 호법 구척(丘倜)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입을 열 었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선 여우가 왕이라고, 한순간일 뿐입니다. 놈들 이 비록 사천을 유린햇다지만 빈집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놈들이 저 지른 만해을 심판하고자 여러 문파들이 나선 이상 이제 그 대가를 받 게 될 것입니다." 호기 넘치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천장 진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량수불! 구 호법의 말씀대로 된다면야 오죽 좋겠소. 물론 놈들을 지지하기 위해 나선 분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만 적의 기세 가 저렇듯 하늘을 찌르니 솔직히 걱정을 아니 할 수 없구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천장 진인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제갈 경이 위로의 말을 던졌다. "지형을 잘만 이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심 려하지 마십시오." 왕호연도 거들었다. "노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들이 무서운 것은 상상도 할 수 없 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기동력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파산(大巴 山)처럼 험준한 산에선 그들의 장기가 발휘되기 힘듭니다. 또한 기마 대의 발이 묶이는 이상 놈들을 반드시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 그렇기는 하네만......" 천장 진인은 좀처럼 안심이 되지않는 모양이었다. "화산파와 종남파, 삼광문이 빠진 것이 아쉽네. 그들의 힘이라면 이 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사천에 적을 두고 있는 문파들이 철혈마단을 막기 위해 대파산으로 움직이는 사이 무당산에 모여 있던 여러 문파들도 자파를 보호하기 위 해 속속 복귀를 했다. 지리적으로 북천과 가까이에 위치한 하북의 낙검문이 제일 먼저 떠 나고 소림사와 화산 등도 그들의 뒤를 이어 무당산을 떠났다. 정도맹 의 수뇌들이 그들을 잡아두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북천을 막기 위해 움직인다는 말에는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소이다, 맹주. 서천과 남천이 움직였다면 북천이라고 가 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일. 그들도 준비 를 해야 했을 것이오." 천중 진인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자 제갈경이 곧바로 맞장구를 쳤 다. "오대세가가 북상을 하고는 있다고 하나 솔직히 오대세가의 힘만으 론 북천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 아닐까 합니다. 단일 세력인 서천과는 달리 북천은 한빙곡을 중심으로 새외 여러 문파들의 연합한 것으로 그 힘을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솔직히 북천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고... 참, 그들의 움직임은 간파가 되었나?" "장성(長城)을 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대뜸 대답을 한 사람은 천강 진인이었다. 그의 대답에 천장 진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왕호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확인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며 못마땅한 듯 인상을 구 기고 있던 왕호연이 입을 열었다. "분명 그런 전갈이 오기는 왔습니다만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 다." "명확한 보고가 올라와 있건만 확실하지 않다니!" 천강 진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목청을 높이려 할 때 눈짓으로 그 의 음성을 막은 천중 진인이 되물었다.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보고가 명확하지 않다는 말 인가?" "그렇습니다. 하루에도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건에 이르는 소식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한데 그 모든 소식의 진위가 밝혀지지 않 았습니다. 물론 정확한 것도 있겠지만......" "거짓 정보가 섞여 있다는 말인가?" 왕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수가 그런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은폐하고 적을 기만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정보를 교란하여 혼란을 주는 것이지 요." 천장 진인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어떤 소식들이 올라오기에 그러는 것인가?" "가령 북천이 아직 장성을 넘지 않았다는 소식과 이미 장성을 넘어 맹렬히 남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습니다. 또한 하북성이 놈 들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말도 있고 산서성이 위험에 빠졌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천강 진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반응에 냉소를 지은 왕호연이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 소식들이 모두 정확한 선으로 보고가 올라온다는 겁니 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완전히 인정하지도,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 하고 있습니다." "허!" "이거야 원." 천장 진인은 물론이고 좌중에 모인 모든 이들의 입에서 어처구니없 다는 탄식성이 터져 나왔다. "하면 북천에서 이미 손을 쓰고 있다는 말인가. 그토록 광범위하게? 흠, 아무래도 어딘가이상해. 자넨 어찌 생각하는가?" 제갈경은 왕호연의 말에서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을 느끼곤 잔뜩 이맛살릉 찌푸리며 물었다. 왕호연도 이미 그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천도 북천이지만 아무래도 다른 쪽에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쪽이라면? 음, 중천이로군. 하긴 삼천이 모두 움직였는데 우 두머리인 중천이 가만있을 리는 없겠고... 어쩌면 그 모든 일이 그들 의 계획에 포함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하던 제갈경은 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 겼다. "정보에 혼선이 오는 것은 적의 교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흑백대전을 치르느라 모든 눈과 귀가 패천궁 쪽에 맞춰져 있었기에 그 리된 듯싶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지요. 아무튼 방 주께서 개봉부(開封府)로 떠나셨고 개방의 수많은 방도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곧 놈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전력을 다해 철혈마단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정도맹의 맹주가 엄연히 있음에도 천강 진인의 질문은 맹주인 천장 이 아니라 천중 진인에게로 향했다. "무슨 말인가?" "어차피 패천궁은 흑월교로 인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또한 북천의 움직임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말이 많지만, 제가 생 각하기엔 장성을 넘지 못한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또한 중천 역시 암 중모색(暗中模索)을 할 뿐 드러내놓고 활동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순간, 나직한 코웃음이 들렸고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천강 진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은 곧 생각만큼 적의 위협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 쩌면 사천혈맹이 이름만 혈맹이지 아직 이름만큼 끈끈한 관계가 아닌 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놈들의 위협이 조금이라도 덜한 지금이 기회인 것 같습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무당파의 제자 들과 정도맹의 전력을 총동원한다면 철혈마단쯤은 간단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자파로 돌아간 소림이나 화산앞의 제자들을 다시 불러 함께 싸운다면 더욱 손쉽게 끝날 것이고 그렇다면 이후에 있을 싸움에 보다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빙의 전력을 보내 철혈마단을 상대하느라 불안에 떠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의견이었으나 곧바로 반발에 부딪쳤다. "불가(不可)합니다." 왕호연이 더없이 강한 어조로 천강 진인의 의견을 비판하기 시작했 다. "장로께서는 자신감이 자나쳐 자만심에 빠진 것 같습니다." "감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천강 진인이 뭐라 화를 내기도 전에 왕호연의 음성이 빠르게 이어졌다. "혈맹이 단단하지 못하다고요? 수백 년 동안 잊혀졌던 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햇습니다. 그것도 승천지계란 이름으로 말입니다. 또한 승천지계를 발동시킨 장본인이 다름 아닌 중천임은 모두 다 알고 있습 니다. 막강한 힘을 보여준 철혈마단이나 흑월교를 움직이는 중천이 그 저 단순히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그다지 위협이 되 지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저는 그들의 발톱을 드러냈을 때 어떤 피의 회오리가 무림을 덮칠지를 생각하면 밤잠이 오지 않습니다." 왕호연은 그동안 쌓인 것을 한꺼번에 풀어내려는 심산인지 누가 말 릴 사이도 없이 목청을 드높였다. "북천이 장성 밖에 있다고 하셨습니까? 좋은 말입니다. 그렇기만 하 다면야 천만다행한 일이지요. 보다 여유를 가지고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정보가 수도 없이 올라오 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거짓으로 여긴 정보들 중 하나라도 사실일 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놈들이 하북을 지나 하남성에, 소림 사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정보가 사실이면 어찌하시렵니까? 철혈마단 을 상대하기 위해 본산을 비운 소림과 화산이 무너진다고 상상을 해보 십시오." 소림이 무너진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호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들 불안한 마음에 진저리를 쳤 다. 잠시 호흡을 고른 왕호연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천강 진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도대체 그 알 수 없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 아 둔한 머리로는 이해를 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참에 체질에도 맞이 않는 정도맹을 떠나려는 듯 작심하고 내뱉는 왕호연의 말은 가시가 돋친 것을 엄어서 독설(毒設)이나 다름없었다. "네놈이!!" 노호성을 외치는 천강 진인의 얼굴은 썩은 감자와 다르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아무래도 사단이 날 듯 싶었는지 천장 진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둘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허, 허흠." 천장 진인은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일 듯 서로 를 노려보는 천강 진인과 왕호연 사이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그들 사이로 한숨을 내쉰 제갈경이 끼어들었다. "노부는 첨밀각주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천강 진인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니나 무당파와 정도맹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언 제, 어느 순간 뒤통수를 노릴지 모르는 중천을 견제하기 위함인 것.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며칠 전 논의가 끝난 것이니 재차 거론할 필요 가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 까?" "흠, 맞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이곳저곳에서 수긍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논의가 끝난 것이니 재차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제갈경의 말에 여러 수뇌들이 호응을 하고 나서자 천강 진인의 주장은 순식간에 쓸데없이 혼란만 부추기는 의견이 되고 말았다. "물론 자네의 주장 역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하나의 가정일 뿐이 라는 것을 잊지 말게. 또한 아무리 상대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 하더라 도 최소한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것이 있네. 자네의 지금 태도는 분명 과한 것이었어." 자신의 의견을 중론으로 굳힌 제갈경은 끝으로 왕호연을 살짝 꾸짖 는 것으로 천강 진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왕호연도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기 싫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러 어르신들 앞에서 제가 너무 언성을 높였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하나 말을 그리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듯 왕호연의 얼 굴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뭔가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천강 진인 은 화를 삭이느라 꽤나 불편한 모습이었다. * * * 북천의 행보를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장성을 넘어 한참이나 남하한 그들의 은밀한 움직임을 간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설왕설래(設往設來)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하북성 보정부 (保定府)에 위치한 낙검문과 그 주변의 문파들은 큰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처럼 오랜 전통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명성도 그에 미치지 못했지만,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근래 들어 급성장한 신흥 검파 낙검문에 대한 북천의 공격은 동녘이 밝아오던 새벽에 시작 되었다. 개전 초기, 비록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해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 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으나 낙검문 은 흑백대전에 참여했다가 급히 돌아온 문주 양웅천(陽雄天)을 중심으 로 서서히 전열을 정비하고 필사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북천의 무인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 로 많았다. 그럼에도 낙검문의 제자들은 조금도 물러섬 없이 죽음으로 써 자신들의 문파를 지키고자 하였다. 화강이 충천하고 비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평화로웠던 연무장은 순식간에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며 아비규 환(阿鼻叫喚)의 지옥도(地獄圖)로 변해 버렸다. 새벽에 시작된 싸움은 아침이 훌쩍 지날 때까지 그 끝을 보이지 않 았다. 아침이 오기 전까지 모든 싸움을 마무리하려 했던 북천의 수뇌부를 민망하게 만들 정도로 낙검문의 저력은 대단했다. 하나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처음 기습을 감행했던 문파에 뒤이어 뒤로 물러나 지켜보기만 하던 문파들이 하나둘 싸움에 참여하자 그동안 수 십 배도 넘는 적을 맞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투혼을 보여줬던 낙검 문의 제자들은 하나둘 차가운 시신이 되어 쓰러졌다. 게다가 목이 터져라 싸움을 독려하며 고군분투하던 양웅천마저 한빙 곡의 대공자 위지청(尉遲靑)에게 무릎을 꿇고 마니 그 싸움을 마지막 으로 사신(死神)마저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치열했던 전투는 사실상 끝이 나고 말았다. "죽여라!" 반쯤 부러진 검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양웅천이 당당 하게 소리쳤다. 산발한 머리며 잘려 나간 수염, 찢어진 의복과 전신을 붉게 물들인 상처들이 그가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지쳐 있 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살이 에일 만큼 날카로운 눈빛에서는 조금의 위축감도 보이지 않았다. "나, 이거야 원." 그의 당당함에 기가 질렸는지 위지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 러났다. 그러자 그와 양웅천의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한빙곡의 곡 주(谷主)요, 북천을 이끌고 있는 천주(天主)인 위지요(尉遲嶢)가 수하 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왔다. "죽기를 바라는가?" 양웅천은 대답 대신 싸늘히 되물었다. "네가 북천의 수괴냐?" 순간, 위지요를 수행하던 이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요절을 내겠다는 눈빛으로 위지요의 명을 기다렸다. 하지 만 그는 별로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위지요는 슬쩍 손을 들어 수하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선선히 대답 했다. "내가 북천의 천주다." "음." "내 질문엔 답하지 않았다. 죽고 싶은가?" 양웅천은 조금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죽여라." "흠, 하나뿐인 목숨을 그렇게 소홀히 여겨서야 쓰나. 난 그대와 같 은 인물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 어떠냐?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위지요의 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양웅천이 이글거리는 눈빛 으로 노호성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닥쳐라! 혈육과도 같은 제자들과 수하들이 모조리 목숨을 잃었는데 나보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라는 것이냐! 내 비록 변변한 실력을 지니지 못해 이 꼴이 되었으나 하늘에 맹세하건대 지금껏 한 점 부끄 럼도 없는 삶은 살아왔다! 스스로 무인이라 자부한다면 나에게 치욕을 강요하지 마라!" "......" 위지요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이나 그를 응시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히고설켰다. 그러기를 얼마간, 짋은 숨을 내뱉은 위지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몸을 돌린 위지요가 위지청에게 시선을 두었다. 직접 싸워 승리했으 니 목숨 또한 스스로 거두라는 의미였다. 살짝 입술을 깨문 위지청이 양웅천의 등 뒤로 걸어갔다. 그가 막 손 을 쓰려는 찰나 위지요의 음성이 들려왔다. "약속하지. 명맥은 유지하게 될 것이다." 위지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웅천의 신형이 힘없이 무너졌다. 그 러나 천천히 눈을 감는 그의 얼굴엔 끝까지 자존심을 지켰다는 만족감 과 일말의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 "낙검문의 식솔들은 어찌 되었느냐?" 씁쓰레한 표정으로 양웅천의 주검을 바라보던 위지요가 물었다. 누 군가의 입에서 재빨리 대답이 흘러나왔다. "모조리 구금(拘禁)하여 감시 중입니다." "그들에겐 일체 손대지 마라. 또한 부상당한 이들도 더 이상 건들지 말고. 어차피 끝난 싸움이다." 조금은 볼멘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승자의 권리를 누려야......" 순간, 벼락과도 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공도 모르는 이들을 유린하는 것이 승자의 권리라면 개에게나 줘 버려라!" "하지만 아버님, 본보기를 보일 필요는 있습니다. 함부로 대항하지 말라는 경고 차원에서 말이지요." 위지청이 다소 조심스런 태도로 의견을 내놓았다. 앞으로 수많은 문파와 싸우게 될 북천으로선 어쩌면 필요한 행동일 지도 몰랐다. 그러나 위지요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식으로 본보기를 보여서 어쩌자는 것이냐? 우리는 피에 굶주 려 날뛰는 철혈마단이나 흑월교가 아니다. 대항을 한다면 꺾어버리면 되는 것이고 굴복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야." 위지요가 좌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싸울 때는 추호의 인정도 베풀지 마라! 하지만 싸움이 끝난 후 승 자의 권리 운운하며 분탕질을 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승자의 권리라는 것은 항복한 적을 유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승리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해라!" 실로 추상과도 같은 엄명이었다. 감히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위지요를 에워싸고 있던 한빙곡의 제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꺾으며 대답했다. "청아야." 수하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위지요가 위 지청을 불렀다. "예, 아버님." "이곳에서 잠시 머물러야겠다. 서둘러 시신들을 수습케 하고 각 문 파의 수장들을 불러오너라. 다른 곳을 공격하는 이들은 그냥 놔두고 올 수 있는 이들만 불러 모아. 그나저나 마땅히 쉴 곳이 있으려나 모 르겠다." "이미 봐두었습니다." "호~ 잘되었구나. 그래, 어디냐?" "내원으로 조금 들어가셔야 합니다. 한빙오영(寒氷五영)이 모실 겁 니다." 그의 신호를 받고 모습을 드러낸 다섯 명의 청년이 허리를 꺾었다. "아버님을 모셔라." "봉명(奉命)." 낙검문 내에서도 제법 한적한 곳에 위치한 만추각(晩秋閣). 한빙오영의 호위 속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위지요는 저 녁 무렵 그의 부름을 받고 속속 모여든 각 문파의 수장들과 향후 행보 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꽤나 저항이 거셌다고 들었습니다, 천주." "장백파(長白派)의 문주 장백선옹(長白仙翁)이 배꼽까지 내려온 수 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대내외적으로 지닌 힘이 워낙 막강하여 한빙곡이 곧 북천처럼 인식 되기는 하였으나 북천은 한빙곡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이십삼 개의 문 파로 이루어진 연합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장백파(長白派)는 흑룡문 (黑龍門), 천권문(千拳門), 세하보(勢遐堡)등과 함께 북천을 떠받드는 네 개의 기둥이라 불리는 문파로 오랜 전통과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한빙곡도 장백파를 비롯하여 이들 세 문파에 대해선 연합이라기보 다는 단순한 하부 조직에 불과한 여타 문파와는 달리 상당한 발언권 을 인정해 주었고 수장들에겐 천주 다음가는 권위를 존중해 주었다. "하하, 그렇소이다. 고생을 조금 하기는 하였소. 낙검문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더니만 과연 소문이 틀리지 않더이다. 안타깝게도 선봉 을 맡은 거경궁(巨鯨宮)이 꽤나 피해를 보았소. 그래, 남가장(南家莊) 에서의 일은 어지 되었소이까?" "장주가 낙검문의 문주와 같은 인물이 아니라 그런지 비교적 손쉽 게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장백선옹은 살려달라며 비굴하게 애원하는 장주의 얼굴이 떠오르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무튼 고생하셨소. 솔직히 조금 걱정을 하였건만 첫 번째 행보가 나름대로 수월하게 풀렸소.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오. 우리에 겐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소이다." "다음 목표는 어디입니까?" 흑룡문의 문주 반포(班抱)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탁탑천황(托搭天王)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구 척 장신에 검은 수염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그는 남들보다 서너 배는 돼 보일 듯한 주먹 을 지니고 있었다. "팽가입니까?" 장백선옹이 덧붙여 물었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성을 석권하기 위해선 낙검문보다 더욱 위명을 떨치는 유일한 무가인 팽가를 반드시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그들의 반응을 살피던 위지요의 입가엔 기묘한 웃음이 감돌았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당장에라도 달려가 쓸어버리겠습니다!" 반포가 커다란 주먹을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다음 목표가 팽가임을 당연하게 여기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위지요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팽가는 아니요." "하면 어디를?"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다들 의아심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뜸을 들인 위지요가 담담히 말했다. "소림을 칠 생각이오." "아, 예." "그렇군요." 너무나 태평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의 말에 다들 그런가 보 다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 고는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멍한 눈으로 위지요를 응시했다. "소, 소림사를 말입니까?" 장백선옹이 떨리는 음성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고. 소림사요." 뭘 그리 놀라냐는 듯 위지요는 태연스럽기만 했다. 좌중에서 그런 여유를 보이는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대저 소림사가 어떤 곳인가? 수없이 많은 문파들이 흥하고 쇠하는 동안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무 림의 으뜸가는 지위를 지키고 있는 거인이요, 불문의 성지이며, 백도 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들과 다른 길을 가고 적대시하는 문파들마저도 소림사에게만큼은 한발 양보하고 존종할 정도로 소림사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절 대적이었다. 또한 도저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저력은 뭇 문파들에게 경외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게 만들었다. 그런 소림사를 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도 마치 술 한잔 걸 치러 주루에 가는 듯 가벼운 표정으로. "소림사는 결코 만만히 볼 곳이 아닙니다. 물론 싸움에 승리하기 위 해선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나 보다 신중히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봅 니다." 학자풍의 세하보 보주 척목은(戚穆恩)이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고 개를 흔들었다. 그는 위지요가 너무 서두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백선옹이 그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노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의 전력이면 소림사 정도는 충분 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곳곳에 적을 두고 소림을 치기엔 다소 무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선은 차 근차근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아버님. 일단은 팽가를 위시하여 황보세가 등을 처리 한 다음 치는 것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림에는 수호신승 이라는 큰 인물이 있습니다. 비록 그가 부상을 당해 오랫동안 의식 불 명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수호신승의 위명은 중원뿐만 아니라 멀리 새외(塞外)에까지 널리 알 려져 있었다. 수호신승은 소림, 아니, 중원무림을 치기 위해선 무슨 수를 쓰든지 넘어서야 하는 무림의 최강자였다. 쉬쉬했던 그의 부상 소식이 지난 흑백대전을 통해 결국 알려졌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패천궁 측에서 지어낸 단순한 소문으로 여길 뿐이었다. "어차피 붙어보고 싶은 상대였다. 그리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 정 소림을 치자는 것은 아니다." 위지청을 비롯하여 모든 수뇌들의 만류에도 그의 의지는 확고부동 (確固不動)했다. "우리가 소림을 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알려지면 주변 문파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날 것이오. 어쩌면 철혈마단을 상대하기 위해 떠난 자들도 소림으로 몰려올지 모르는 일이고." "다른곳도 아니고 소림입니다." 척목은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까짓 상대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소? 난 우리가 절대로 진다고 생각하지 않소. 다만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소림을 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장백선옹의 말에 위지요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이오. 굴복시키기 힘든 만큼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엄청난 것이오. 소림을 치는 데 성공하면 수십, 아니, 수백의 문파들 을 굴복시킨 것보다 더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장차 우리의 성과 를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오. 삼천 중 그 누구라도 말이오. 이후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려면 다른 문파는 몰라도 소림만큼은 절대로 선 점해서 굴복시켜야 하오." 위지요는 이미 사천혈맹이 무림을 장악했을 때의 일도 염두해 두고 있는 듯했다. "음, 그도 그렇겠군요." 소림을 굴복시켰다는 상징성은 나머지 삼천과 장차 무림을 분할하 는 협상에서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제야 위지요의 의중 을 파악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도 하나같이 무거운 표정들인 것을 보면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천주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나 이곳에서 소림까지는 장장 삼천 리 길입니다. 적의 이목을 속이고 소림사까지 이동하는 것도 문제이고 설사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화산파와 종남, 그리고 오대세가가 옆구리 를 치고 들어온다면 전후좌우에서 협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역시 생각하고 있었소. 그래서 병력을 둘로 나눌 생각이오. 하 나는 오대세가를 견제하여 이목을 집중시키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남 하해 소림을 치는 것이오." 위지요의 고개가 장백선옹 등에게 향했다. "팽가나 황보세가 등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들을 돕기 위해 많은 문 파들과 무인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것이고 행동할 것이오. 장백파 와 천권문, 세하보 등이 주축이 되어 오대세가를 맡아주시오." "알겠습니다." 위지요의 결심을 돌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순순 히 명을 따랐다. "싸워서 이긴다면 좋겠지만 굳이 충돌할 필요는 없소. 그저 위협을 가해 저들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만 하면 될 것이오. 가 능하면 윌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부풀려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소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따라 이동을 하 면 적의 이목에 잡히지 않고 소림사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소림을 치는 것은 한빙곡과 흑룡문이 해야 할 일이니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것 이오." 위지요의 눈짓을 받은 반포는 만추각이 떠나가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하하, 맡겨만 주시지요! 소림사 땡중들의 목을 모조리 비틀어 버 리겠소이다!" "하면 언제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척목은이 물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나 오늘은 꽤 힘든 싸움을 겪었으니 푹 쉬도록 하고 내일 아침에 움직이는 것으로 합시다. 자, 다들 돌아가서 쉬도록 하시구려." 그의 말이 끝나자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은 저마다의 기대와 흥분, 불안감을 지니고 만추각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가기를 기다린 우지청이 다소 염려스런 음성으로 물었 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무척 위험한 계획인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출정한 이상 위험은 각오한 바가 아니더냐. 기왕 벌인 싸움, 화끈하게 놀아봐야지." "차후에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중천을 말함이냐? 너무 걱정 말거라. 다 생각이 있으니. 그리고 그 들 역시 조만간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킬 것이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던 위지요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 졌다. "그나저나 그놈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모르겠습니다. 계속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올 뿐 자세한 위 치나 일정은 알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열흘 전에 끊어졌고요." 위지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망할 놈!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렇지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다니."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지 탁자를 탁탁 두드리는 위지요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별일없을 것입니다. 녀석이 누굽니까? 늘 덜렁거리고 장난기가 가 득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한빙곡이 배출한 최고의 기재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웃으면서 살아날 녀석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놀다 지 치면 히죽 웃으면서 돌아오겠지요." "흥, 걱정은 무슨! 부모 형제 버리고 제 편하자고 도망간 놈을 뭣 하러 걱정을 해? 행여나 돌아온다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서 내쫓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의 관심은 끊도록 해라. 망할 놈!" 위지청은 대답 대신 엷은 미소를 지었다. 늘 그렇듯 내일이면 다시 아우의 소식을 물어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38장 잠룡부(潛龍簿) "싫다니까 그러네. 무영(無影), 자꾸만 헛소리하면 혼자 가는 수가 있어." 위지황(尉遲皇)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호통을 쳤지만 비무영(飛無影) 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쩌시려고 이럽니까? 잠깐 바람이나 쐬러 가신다고 한 것 이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따라오라는 소리 안 했다." "그림자만 홀로 남을 수는 없는 법이잖습니까?" 퉁명스레 내뱉는 비무영. 하나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위지황의 모습엔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이제는 돌아가실 땝니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니까." "도대체 때가 어느 땐데 이렇게 고집을 피우십니까?" "때라니?" "드디어 주군께서 움직이셨습니다. 광활한 대륙, 무수한 실력자가 산재해 있는 무림을 정복하기 위해서 영광스런 칼을 뽑으셨단 말입니 다. 공자께서도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게 아들 된 도리 아닙니 까!!" 열변을 토하는 비무영의 음성은 더없이 진지하고 엄숙했다. "도리는 개뿔......" "예?" 잘 못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렇게 뜨고 되묻는 비무영. 못 알 아 들었다기보다는 황당해하는 반응이었다. "네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충성스러움으로 꽉 차 있는 미련곰탱이라 는 것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핏대까지 세워가며 떠들어댈 필요 는 없고, 이 참에 확실히 해둘 것이 있다. 사실 네가 뭘 잘 모르는 모 양인데 내가 이렇게 도망친 것은 그 빌어먹을 싸움에 참여하기 싫어 서야."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비무영이 입을 쩍 벌리고 되물었다. "네게는, 아니, 아버지나 아버지를 따르는 위인들에겐 영광스런 싸 움인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엔 그저 한심하기가 그지없는, 만고의 쓸데 없는 짓이거든." "서, 선조님들의 한을 푸는 일입니다!!" "한풀이? 흥, 그 한풀이를 꼭 그딴 식으로 해야 하냐? 너도 귀가 있 으니 들었을 것 아냐, 철혈마단인지 견단인지 하는 놈들과 흑월교 놈 들이 저지른 짓을." "그, 그건......" "얼마나 지독하게 굴었으면 그놈들이 지나간 자리엔 풀도 나지 않는 다는 소리가 들려! 잔인한 놈들 같으니. 애당초 그런 놈들하고 연합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어. 시꺼먼 어둠 속에 쳐박혀 눈동자 나 굴리고 계산이나 하는 중천이라는 놈들도. 지가 뭔데 우리보고 움 직이라 마라야." 그는 사천의 우두머리랍시고 이것저것 명을 내리는 -물론 직접적으 로 명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부탁의 형식을 띠었지만- 중천이 꽤나 마 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선조님께서 약속하신 일입니다!" 비무영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위지황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 다. "약속은 무슨 얼어죽을 약속. 이건 마치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후예들이 나라를 되찾겠다고 난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 잖아? 하긴, 수백 년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약속 운운하는 것도 우스 운 일이지만 얼씨구나 받아들인 것도 문제가 있지." 위지황이 정색을 하며 비무영을 응시했다. "혹시 아버지가 노망나신 게 아닐까?" 비무영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공자님!!" "알아, 알아. 하도 답답해서 해본 소리니까 그렇게까지 발작할 필요 는 없어. 아무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난 이따위 싸움에 관 여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니까 날 끌어들일 생각은 애당초 하지 말라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돌린 위지황이 느긋한 팔자걸음으로 발걸 음을 놀렸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비무영이 잔뜩 불만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말했잖아. 쓸데없는 일에 기운 빼지 마라. 설득한다고 들을 내가 아니다. 난 이대로 천하 유람이나 할란다. 이 참에 동정호(洞庭 湖)도 구경하고 천하 절경이라는 소주, 항주도 보고, 정 싸우고 싶으 면 너나 가서 싸워라." 휘휘 걸음을 내디디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드는 모양이 조금 의 미련도 없다는 태도였다. 비무영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씩씩대더니 냅다 자갈 하나를 걷어 찼다. 맹렬히 날아간 자갈이 노송에 부딪쳐 박살이 났다. "내가 미치고 말지 정말." 그래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그는 위지 황의 곁으로 재빨리 따라붙었다. '왜 왔냐?'라는 듯 쳐다보는 위지황에게 한소리 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그림자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 봤습니까?" 바로 그때였다. 위지황이 손가락을 입에 대며 주의를 주었다. "쉿!" 난데없는 행동에 당황한 비무영이 위지황을 응시했다. 이미 전신의 감각은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는비무영의 감각엔 일체의 기척도 감 지되지 않았다. "아무 이상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안 들려? 싸우고 있잖아. 그것도 꽤나 치열하게." 위지황의 말에 한참 동안이나 주의깊게 주변을 살핀 비무영이 고개 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으신 것 아닙니까?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 는데요. 누가 싸운다고......" "네가 감지하는 것은 나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감지하는 것을 네가 다 감지할 수 있을까?" "그건 또 뭔 소립니까?" 위지황이 혀를 찼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너보다 더 고수라는 소리다. 불만없지?" "예? 아예." 비무영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면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저쪽이야." 이미 내달리는 위지황의 신형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에 누가 보더라도 유약하게만 보이는 가녀린 몸이 백면서생이라 불리기에 딱 적당했건만 비무영을 채근하며 몸을 날리는 그의 움직임 은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신속하고 빨랐다. "젠장, 같이 가자고요." 그를 따라잡기 위해 비무영은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그는 수풀에 몸을 숙이고 전방을 주시하는 위지황을 발견했다. 그 역시 인기척을 지우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의 눈에 칠 대 일의 치열한 싸움이 들어왔다. 묵의(墨衣)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사내는 상당한 격전을 치렀는지 몹시도 지친 모습이었다. 전신에 크고 작은 많은 상처들이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쯤에서 항복하는 것이 어떠냐?" 사흘 밤낮 동안 사내를 추격해 온 맹한(孟閑)이 항복을 권유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그의 음성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 안에 은근히 깔린 살기는 누구라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거칠게 어깨를 들썩일 뿐 이었다. "네놈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능력에 감 탄을 금할 수 없었다. 백 명도 넘는 인원이 너를 쫓았건만 철저하게 농락당했으니... 과연 혈영대. 사람들이 어째서 혈영대를 그토록 두려 워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결국 꼬리를 밟혔지." 사내가 자조의 웃음을 보였다. "그 대가로 나는 열이 넘는 수하들을 잃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끝난 것 같군. 자,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쓸데 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항복해라." 눈앞에 닥친 일이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무심한 음성이 사 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항복을 하면 목숨은 살려주나?" 맹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먼저 간 수하들을 생각해서, 그리고 기밀 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 다만 최대한 편안한 죽음을 준다는 것은 약속하마." "거절한다면?" 순간, 맹한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당연히 죽는다. 대신 고통스럽게 죽겠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 통을 겪으면서." 잠시 사내를 노려보던 맹한이 말을 이었다. "기왕 죽을 것 고통을 당하느니 편안히 죽음을 맞는 것이 좋지 않겠 느냐? 내놓아라. 훔쳐 간 것을 순순히 내놓기만 하면 편한 죽음을 약 속한다." "무엇을?" 무엇을 원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던져 보는 질문이었다. "잠룡부(潛龍簿)." "크크크."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억지로 참다가 더 이상 첨지 못하고 터뜨리는 웃음처럼 살짝 어깨만 들썩이던 웃음은 곧 숲이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 것이냐?" 사내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맹한이 싸늘히 물었다. "흐흐, 대단해. 정말 대단해. 쥐새끼들에게 잠룡이라는 거창한 이름 을 붙일 수 있다니 말이야. 고작 몰래 숨어들어 와 첩자 노릇이나 하 는 쓰레기들이거늘." "말 다했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힘이 드는지 가쁜 숨을 내뱉은 사내는 최후의 기력을 짜내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곧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항복이라고? 나 위속(衛速)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비록 네놈들에 게 이 모양으로 당하고 말았지만 혈영대 서열 삼위란 지위는 주사위 따위를 굴려서 얻은 것이 아니다." 듣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진한 살기를 담은 소리에 맹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이 그랬다. 혈영대는 그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치명적인 살예(殺藝)를 익 힌 밤의 지배자였다. '패천궁이 아니라 혈영대를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패 천궁에 고개를 숙인 흑도의 문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로 혈 영대였다. 또한 이번 흑백대전에서도 수많은 백도의 명숙들이 그들의 살수를 피하지 못하고 무참히 쓰러졌다. 그런 혈영대에서 서열 삼위라는 것은 웬만한 문파의 장로,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고도 적이 그를 제대로 쫓지 못했다는 것, 그 리고 그를 쫓던 이들의 무공이 결코 낮지 않았음에도 열 명도 넘는 인 원이 그의 손에 당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자신있으면 나를 쓰러뜨려. 그리고 네놈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라. 하지만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했다. 맹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이냐? 설마 하니 명단이 네게 없다는 것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위속이 훔쳐 간 명단은 승천지계는 물론이 고 나아가 중천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밀(機密)중의 기밀 사 항이었다.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으나 명단을 탈취당한 군사 신도의 명령으로 그를 쫓기를 사흘, 그가 움직이는 반경 백 리 안에는 완벽한 포위망이 구축되었다.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접선할 수도 없었다. 그만한 여유를 줄 그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줄기 의심이 드는 것은 그것 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또한 그동안 위속이 보여준 능력 때문이었 다. "빨리 말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시험하게 될 것이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지를 수 없고, 죽 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장담하건대 너는 나에게 죽여 달라고 애원을 할 것이다. 훔쳐 간 명단의 행방은 물론이고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잡다한 것을 스스로 밝히고 죽음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할 것이다. 그것을 원하는 것이냐? 비록 적이지만 나는 너의 능력에 찬사 를 보낸다. 가급적이면 편한 죽음을 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 어디다 두었느냐?" 맹한의 눈빛은 진정이었다. 그러나 위속에게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 다. "스스로 알아보라니까." "결국 벌주(罰酒)를 원하는구나."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잠시 멈추었던 공격이 맹렬하게 시작 되었다. 위속은 자신의 사지를 자르고 몸을 갈가리 찢기 위해 다가오 는 것을 보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여기가 내 무덤 자리인가 보군.' 애당초 검에 인생을 걸고 살아온 몸. 싸우다 죽는다 한들 후회는 없 었다. 그저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우연찮게 자신이 알게 된 비밀, 거대한 음모의 열쇠가 되는 비밀을 전 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지만 시신이라도 혈영대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동료들이 자신의 몸을 잠시라도 살필 기회가 있 다면 비밀은 그냥 묻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꼼수도 준 비해 두었다. '최소한 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는 높겠지.' 생각은 더 이상 정리되지 못했다. 그를 노리는 공격이 코앞까지 접 근했기 때문이었다. "타핫!" 언제 비틀거렸느냐는 듯 힘껏 기합성을 지른 위속이 몸을 빙글 돌리 며 공격을 피해내고 그 탄력을 이용해 뒤에 있던 사내에게 역공을 펼 쳤다. 대다수의 살수들이 그러하듯 그의 검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한 사내가 기겁하며 고개를 들었 다. 위속의 검이 간발의 차로 그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야, 대단한 놈인데요." 지금껏 그와 같이 빠른 검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한눈에 보기에도 움직이는 것이 용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가 아닌가.' 비무영은 힘겹기는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대항하는 위속의 무위에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저기까지야. 이미 끝난 싸움이다." 냉정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위지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직은 모르......" 사람은 무릇 약한 상대를 응원하기 마련인 법. 위속의 선전에 은근 히 응원을 보내던 비무영이 뭐라 대꾸를 하려는 찰나 나직하면서도 묵 직한 신음성이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결국 최후의 순간까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싸우던 위속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것이었다. "크으으." 위속은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든 검을 움켜쥐며 고통의 신음성을 내 뱉었다. "극한의 고통을 맛본다고 말했을 것이다." 검을 교묘하게 비틀며 위속의 내부를 뒤집는 맹한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뒤져라." 그가 수하들에게 명했다. 네 명의 수하는 여전히 검을 겨누고 있었고 두 명이 위속의 몸을 뒤 지기 시작했다. "없습니다." 상체를 뒤지던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맹한이 낭패한 표정으로 다른 수하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체를 뒤지던 사내가 환호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찾았습니다!" "비켜라." 재빨리 몸을 숙인 맹한은 수하가 가리키는 대로 각반(脚絆) 속에 교 묘히 숨겨져 있던 조그만 책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책자를 집더니 책장을 몇 장 넘겨보았다. 두어 장이나 넘겼을까? 그것이 진본임을 확신한 맹한은 품속으로 황급히 책 자를 갈무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본이 맞습니까?" 수하 중 한 명이 물었다. 맹한은 비교적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께서 말씀하신 대로다. 틀림없을 것이다." 잠룡의 명단이 적힌 책은 맹한 정도의 위치에선 그 존재도 모르는 기밀이었다. 다만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신도는 몇몇 인물에 게 책의 앞부분에 적힌 몇 가지 내용을 알려주었는데, 맹한이 그중 한 명이었다. 물론 목숨으로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과 그에 대한 다짐을 받은 이후였다. "생각했던 대로 명단이 적힌 책자는 네 몸에 있었다. 결국 내 앞에 서 허풍을 떤 셈이로구나." 맹한이 진한 살소를 내비치며 힘겹게 숨을 쉬고 있는 위속을 노려보 았다. "크크, 쉽게 찾을 수 없다고 했지 내 몸에 없다고는 안 했다. 스스 로 그렇게 단정한 것은 당신 아니었나? 흐흐, 그나저나 제법 은밀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쉽게 찾아니다니 정말 대단하군. 정말 대 단해. 크크크!!"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의 조룡에 맹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난 그래도 네놈의 재주를 높이 사 가능하면 편한 죽음을 주려 했 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네놈 스스로가 깨우치게 해 주는구나. 알았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놈을 끌고 가라! 가서 우리를 농락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줘라." 그렇잖아도 혈육이나 다름없는 동료를 잃은 사내들은 진득한 살소 를 뿜어내며 명을 받았다. 위속에게 접근한 네 명의 사내가 각각 사지를 하나씩 움켜잡았다. 이미 위속의 완전히 무장 해제된 상태였다. 아니, 무기가 있다고 해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그는 큰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롱 섞인 웃음은 이미 그쳤고 반쯤 돌아가 떠진 눈 은 흰자위뿐이었다. 최소한 그들에겐 그렇게 보였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본 사람은 오직 위지황이었다. "멍청한 놈들." "예?" 뜬금없는 말에 비무영이 습관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위지황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위속을 가리켰다. 비무영의 고개가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도저히 믿기 지 않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맹한의 명을 받은 사내들이 위속의 사지를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 간이었다. 흰자위뿐이었던 눈에 더없이 차가운 눈동자가 돌아오고 빈 손이었던 그의 손엔 어느새 서슬 퍼런 단검이 각각 들려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사내들이 기겁하며 물러나려 하였지만 양팔을 잡은 이들의 목엔 이미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혈선을 따 라 점점이 핏물이 배어 나왔다. "크크크,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한다. 함부로 남에게 맞기지 않아,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양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교차하여 자신의 가 슴에 꽂았다. 위속은 부릅뜬 눈으로 두어 번 몸을 떠는가 싶더니 힘없이 몸을 늘 어뜨렸다. "지, 지독한 놈입니다!" 팔이 아닌 다리를 잡은 덕에 목숨을 구한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리쳤다. 설마 하니 그 상황에서 반격을 하고 스스로 검을 박아 목숨을 끊을 줄이야... 지독해도 보통 지독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들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질린 표정을 지었다. "혈영대... 익히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적이지만 대단한 놈들이다. 남자라면 저쯤은 되어야지." 그 짧은 시간에 또다시 두 명의 수하를 잃은 맹한의 얼굴은 굳을 대 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만한 인물을 키워낸 혈영대와 그런 혈영대를 수족으로 부리는 패천궁의 저력에 대한 은근 한 두려움이 자리잡았다. "후~" 차갑게 식어가는 위속의 주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맹한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작 한 사람을 상대로 한 것치고는 피해 가 너무 컸다. '그래도 임무는 마쳤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아니지, 아직은 아니야.' 단지 명단을 찾은 것만으로 맡은 바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명 단을 가지고 무사히 복귀했을 때 비로소 모든 임무가 끝나는 것이다. "가자."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의 결과를 상상하며 고개를 흔든 맹한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왠지 찜찜한 기분에 인상을 구기고 있던 수하들도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고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고 반 각 정도가 흘렀다. 수풀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위지황과 비무영이 위속의 곁으로 다 가갔다. "대단한데요. 이런 엄청난 독종은 처음 봅니다." 비무영은 교차해서 가슴에 박힌 단검을 툭 건드리며 마치 그것이 자 신의 가슴에라도 박힌 듯 몸소리를 쳤다. "장난치지 말고 물러나. 아직 안 죽었어." "예?" 죽은 사람을 가리키며 살아 있다니! 비무영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끔뻑거리며 멀뚱거렸다. "단검을 가슴에 박을 때 이자의 눈과 나의 눈이 부딪쳤다. 분명 우 리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그리고 심장과 폐를 관통한 것 같지만 자 세히 보면 비스듬히 휘어져 있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빗겨 박혔을 거 다." "에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비무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듯 싱겁게 웃을 때였 다. 여전히 단검을 잡고 있던 위속의 손가락이 까딱이고 옆으로 돌려 졌던 고개가 스르르 움직여 그의 눈과 비무영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쳤 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으악!" 기겁을 한 비무영이 어덩방아를 찧으며 나뒹굴었다. 그 모습이 한심 했는지 위지황이 혀를 찼다. "쯧쯧, 사내놈이 간담이 그리 작아서야." "하, 하지만......" 이게 어디 간담 운운할 상황이란 말인가! 비무영은 위지황과 서서히 고개를 쳐드는 위속을 바라보며 말을 잇 지 못했다. "나, 나는 혈영대의......" 위속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들어서 알고 있소." 그 급박한 순간에 죽음을 위장했다면,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그런 일을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더구나 상세가 심각했다.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그의 곁에 재빨리 무릎을 꿇고 앉은 위지황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판단했는지 위속의 말을 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위지황의 말에 위속은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는 손을 들어 옆구리 의 상처를 가리켰다. "이, 이 안을......" 위지황은 조금도 주저함없이 상처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 리곤 옆에서 지켜보는 비무영이 인상을 구기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상 처를 헤집었다. 이미 흘릴 만큼 피를 흘렸는지 굳은 피가 엉켜 있는 상처 부위에선 한줄기 선혈만이 살짝 비칠 뿐이었다. 죽음을 코앞에 두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 정도의 상처는 고통을 주지도 못할 정도라서 그런지 간신히 숨을 이어가는 위속은 조금의 미 동도 없었다. 비무영만이 차마 못 볼 것을 본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찾았소." 위지황이 새끼손가락의 마디만큼이나 작은 뭔가를 흔들며 소리쳤다. "그, 그것을 패천궁... 아니, 어디...든 상관없소. 사,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 "간세들의 명단이오?" 위지황이 다급히 물었다. 일의 상황을 지켜본 그로선 어느 정도 짐 작이 가능했으나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위속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부, 부디... 사, 사람드렝게 이 사... 실을... 사, 사천... 어, 엄 청난... 음모가... 반드시 알려야......" 위속은 위지황의 손을 꽉 잡고 최후의 기력을 짜내서 하고픈 말을 이어갔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손이 끊어질 것만 같은 아픔이 밀 려왔다. 그럼에도 위지황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알았소. 약속하겠소." "고, 고......" 위속의 음성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위지황의 약속에 최후로 짜낸 기력이 다한 것인지 힘겹게 이어오던 숨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하나 안심했다는 듯 처음과 달리 무척이나 편안한 얼굴이었다. "후우~" 위속의 죽음을 확인한 위지황이 긴 탄식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 리곤 땅을 파기 시작했다. 비무영도 묵묵히 일을 거들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위속이 숨을거둔 자리엔 조그만 무덤 하나가 생겨났다. 위지황이 위속의 옆구리에서 꺼낸 물건을 살피기 시작한 것은 망자 (亡者)를 위해 최소한의 도리를 한 직후였다. 아무래도 상처 속에 있어서 그런지 붉은 핏물이 묻어 있고 축축하였 으나 겉을 유지(油紙)로 보호했기 때문에 안의 내용물은 무사했다. "뭡니까, 그건? 진자 간세들의 명단입니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비무영이 고개를 빼며 물었다. 하나 묵묵부답.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위지황은 종이에 빼곡히 적힌 명단을 일일이 살피기 시작했다. "이, 이건!" 어깨 너머로 안의 내용을 살피던 비무영의 눈이 급속도로 커지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속이 남긴 종이 조각은 예상대로 각파에 사천, 아니 엄밀히 말해 서 중천이 오래전부터 심어놓은 간세들의 명단이었다. 비록 맹한이 회 수해 간 책자처럼 지위나 연락 방법 등 자세한 사항이 적힌 것은 아니 었으나 어느 문파에 누가 중천의 간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화산파, 종남파, 무당파... 소, 소림사까지!" 비무영의 눈은 더 이상 커질래야 커질 수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조그만 종이 쪽지에 적힌 간단한 형식의 글.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간 단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도 간세들의 이름은 오십을 훌쩍 넘겼다. 남궁세가와 제 갈세가, 당가 등 몇몇 세가를 제외하고는 이름있는 문파라면 죄다 올 라와 있었다. 심지어는 패천궁의 호법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의 이름도 있었다. "음." 호들갑을 떨고 있는 비무영과는 달리 침착하게 명단을 읽어가던 위 지황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없었는지 가뜩이 나 흘려 쓴 글씨는 명단의 맨 아래쪽에선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 는데 그곳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호, 그랬단 말이지. 중천의 간세였단 말이지." "누가 말입니까?" 비무영이 재빨리 물었다. "넌 몰라도 돼." 비무영의 질문을 한마디로 일축한 위지황은 종이 조각을 돌돌 말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 모양을 보던 비무영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그 리곤 퉁명스레 물었다. "어쩔 겁니까?" "뭐가?" "그 명단 말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알일 생각입니까?" 위지황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쩌면 좋을까? 간세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냥 알려줄 까?" "예? 그, 그 무슨 말을!!" 비무영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게 얼마나 유용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유용하기야 하겠지. 그리도 약속을 했잖아." "약속도 약속 나름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안됐지만 그것도 팔자지 요. 하필이면 우리들 손에 들어올 것은 뭐랍니까? 아무튼 그자들만 잘 활용하면 이번 싸움을 손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중천이 아무리 마음 에 안 든다고 해도 알려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야. 놈들은 언젠가 우리들의 뒤통수를 치려고 할 거다." 그의 말에서 묘한 의미를 느낀 비무영이 얼굴을 굳혔다. 그렇잖아도 조금 전의 말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혹시 북천에도......" 위지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 남쪽에도 다 있더라. 글씨가 이상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 지만 그대로 한 사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지." "그게 누굽니까?" 비무영이 싸늘히 물었다.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엄청난 살기가 그 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몰라도 돼." "공자님!!" "지금 당장은 알아도 소용없잖아. 어차피 알려봐야 분위기만 흉흉 해질 것이고, 그리고 간세 한두 명쯤은 데리고 있는 것도 괜찮아. 반 간계(反間計)라는 쏠쏠한 계책도 있거든." "하지만......" "쉿, 여기까지. 이곳저곳 돌아보려면 꽤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잖아. 지금 당장은 이딴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의 뇌리 속은 위속이 남긴 유언이 맴돌고 있 었다. '흠, 그리도 죽으면서 부탁한 것인데... 알려줄까, 아니면 조금 더 두고 볼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제39장 창파령(蒼波嶺) "찾았느냐?" "예, 회수했습니다." 태상문주의 말에 신도는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패천궁의 손길이 벌써 우리들에게 이른 것이냐?" 굳은 안색을 좀처럼 풀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보던 태상문주가 조용 히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필사적으로 찾고는 있는 눈치지만 아직까지 우 리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냐?"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말해 보거라." 태상문주가 다소 안색을 풀며 재차 물었다. "놈은 어르신을 암살하러 잠입해 온 살수 같습니다." "허허, 나를?" 놀랄 만도 하건만 놀라기는 커녕 태상문주는 오히려 너털웃음을 지 었다. "그렇습니다. 놈은 패천궁에서 흑백대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파견 한 혈영대의 살수였습니다. 그자들에게 당한 각 문파의 명숙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지요." "그래, 들어본 것 같구나. 꽤나 지독하고 대단한 놈들이라 들었다. 아무튼 네 말은 놈이 나를 노리고 잠입을 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태상문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놈들이 아무리 뛰어난 살수라지만 놈들도 자신의 실력을 알 고 있다. 내가 고작 살수 따위의 목표가 될 정도였을까? 그리고 나를 노렸다면 어째서 내 거처로 잠입을 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을 공격했을까?" "하, 하오시면?" "애당초 녀석은 너를 노리고 온 것이다. 내가 아닌 너를."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단정 짓는 말에 신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태상문주의 말에 다소 어패가 있을지는 몰라도 일의 결과가 이미 그렇게 나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너도 무사하고 명단도 무사히 회수했다니 다행이다. 조만간 본격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크나큰 실기를 할 뻔햇어. 설마 명단의 내 용이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겠지?" "놈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습니다. 놈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비 밀은 완벽하게 지켜졌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태상문주가 미심쩍은 음성으로 물었다. 신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허, 대단한 녀석이로구나. 우리 아이들도 그만한 배짱과 근성을 키 워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적들의 움직임은 어떠하냐? 우리를 찾기 위해 꽤나 필사적일 텐데." "예. 모든 정보력을 다 동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 그림자를 밟아오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완벽하게 접근하지는 못했습니 다." 신도는 꽤나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시간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인물들이 만나는 장면을 보았다면 그는 결코 그런 말 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 * *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온설화는 더없이 공경한 태도로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예를 차렸 다. "하하, 난 이미 예상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오만." 온설화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말대로 어느 정도는 짐작하 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문성 선배님이라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 각하고 있었지요. 서둘러 철수하지 않았다면 제가 제갈세가로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역시! 군사의 혜안(慧眼)이 하늘에 이른다는 소문은 결코 헛된 것 이 아니구려. 어린 나이에 참으로 대단하오." "태양 앞에 반딧불과 같습니다. 짧은 식견으로 어찌 문성 선배님의 명성에 비하겠습니까?" "이거야 원, 군사에게 그런 칭찬을 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소." "사실이니까요. 사람들은 천하의 모든 지혜가 제갈세가, 그중 문성 에게 모였다고 하지요." "하하, 그만 합시다. 이거 어째 욕을 먹는 느낌이오. 원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란 사실과는 다르게 과장되는 법이라오. 아무튼 그건 그 렇고......" 서로에 대한 인사와 공치사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한 제갈은의 얼 굴이 다소 심각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그래 알아내셨소?" 앞뒤의 말을 다 잘라낸 갑작스런 질문이었건만 온설화는 기다렸다 는 듯 대꾸했다. "아직은요. 제갈세가는 어떤가요?" "우리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소." "심증이 가는 문파는 있겠지요?" "물론이오." 사천이 준동한 이후 제갈은과 제갈세가의 지자(智者)들은 즉시 사천 혈사 이후 무림에 벌어진 모든 일들을 세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선조들이 기록해 놓은 당대의 각종 사건들을 바탕으로 사소 한 일도 빠짐없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는데 개인과 개인, 문파와 문파의 분쟁은 물론이고 떠도는 소문도 가벼이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각 문파 로 흘러 들어가는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격론 끝 에 의심이 가는 다섯 개의 문파를 추려냈다. "군사께서도 어느정도 파악은 했으리라 생각하오만." 온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문파로 압축은 됐습니다. 확실한 것은......." 제갈은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흑도의 문파는 아니라는 것." "맞습니다. 또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제외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에 제갈은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서로 심중에 두고 있는 문파를 말해 봅시다. 그래, 군사께서는 어떤 문파를 염두해 두고 있소?" "서로 한 번씩 얘기를 하는것이 어떨까요?" 흔쾌히 허락한 제갈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합시다. 우선 낙원장을 생각하고 있소." "역시 그렇군요." 온설화가 맞장구를 쳤다. "같은 문파를 염두해 두고 있었구려. 군사 차례요." "비선문, 어떤가요?" 온설화가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입을 열었다. 제갈은이 고개를 끄덕 였다. "내 생각과 같소. 아무래도 온 군사와 나의 생각은 일치하는 것 같 소." "나머지 문파를 들어보기 전까지는 모르지요." 온설화의 말에 제갈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맞을 것이오. 역사가 제법 오래되었고 꽤나 강한 힘을 가지 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파. 거기에 무림의 분쟁에도 일체 끼어들지 않으며 화제의 중심에서 늘 벗어나 있는 문파는 그리 많지 않소." "최근까지는 그랬지요." 의미심장한 온설화의 말에 제갈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부디 악가를 조심하세요. 어쩌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문파니까요.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요." "......" 제갈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실 것은 없어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 아요."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선 악가가 중천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듯한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후~ 그렇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그나저나 전황은 어떻소? 꽤나 고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는지 제갈은이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온설화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다지 좋지는 않아요." "천하의 패천궁이 고전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소." 언뜻 들으면 빈정거리는 말일 수도 있었으나 제갈은에게 그런 의도 는 조금도 없었다. 그로서는 나름대로 놀라움의 표시였다.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밤 지옥벌이 무너졌다고 하는군요. 광 서성 쪽에서 남은 곳은 만독문뿐이예요." "허! 지옥벌이 무너졌다는 말이오? 주력이 빠진 상태였소?" 그녀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천이 움직인다는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철수한 곳이 바로 지옥 벌이었답니다." "하면 주력이 깨졌다는 말이오? 패천궁 다음으로 강한 힘을 가진 문 파가?" 제갈은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힘이 생각 외로 거대해요. 솔직히 막을 수 있을 것이란 생 각을 하지는 않았어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어요. 최소한 본 궁이 움직일 동안은 버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제 일방적으로 밀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온설화의 마지막 말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것은 곧 패천궁의 정 예와 흑월교의 싸움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도맹 쪽은 어떤가요? 북쪽에선 아직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아는 데." "그렇지는 않소. 북천도 이미 움직였소. 낙검문을 비롯하여 벌써 꽤 나 많은 문파가 당했다고 하오." "그랬군요. 낙검문이라면 중천이라 의심할 정도로 강한 문파였는 데." 제갈은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려. 본 가 역시 낙검문도 예의주시하 고 있었소. 결론적으론 소용없게 되었지만." "아무튼 꽤나 힘들겠군요. 서천과 북천을 동시에 막으려면 말이지 요." "북천은 문제없소. 놈들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놈들의 길목엔 오대세가가 버티고 있소. 또한 천하의 소림사를 비롯하여 화산과 종 남, 개방, 삼광문 등 수많은 문파들이 응원을 하고 있소. 문제는 서천 인데......" 제갈은이 말끝을 흐리자 온설화가 즉시 입을 열었다. "철혈마단을 막기 위해 움직인 병력 또한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아는 데요." "그러나 솔직히 역부족이오. 중천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무당과 정 도맹의 주력이 움직이지 않았소. 지리적 이점이 있는 대파산에서 제대 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한순간에 밀릴 수가 있소. 후~ 지금이라도 무당 과 정도맹이 움직여야 하는데 중천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그마 저도 힘든 상황이니......" "우리가 도울 수도 있었어요. 거절만 하지 않았다면." 온설화는 원정군을 보내겠다는 패천궁의 제안을 정도맹이 생각해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한 일을 거론하며 안타까 워했다. "하하,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라오. 부디 잘 버텨주기만을 바랄 뿐." 그러나 천하의 제갈은도 그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철혈마단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최대한 오래 버텨주 기만을 막연히 바랄 뿐이었다. * * * 사천성을 석권하고 계속해서 동진을 하려는 철혈마단과 그들을 저 지하기 위해 움직인 백도의 무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곳. 싸움이 시작된 이래 대파산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울려 퍼지는 고통과 공포, 살기가 담긴 비명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몸살을 앓았으며 그들이 흘린 피로 인해 녹음(綠陰)으로 우거졌던 수풀은 점 점 붉게 물들어갔다. 대파산맥의 동남쪽 지류에 속해 있는 창파령(蒼波嶺). 사천과 섬서, 호북의 경계에 걸쳐 있는 매우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창파령은 대파산을 넘기 위해선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 중 하 나로, 철혈마단은 끊임없이 병력을 투입해 창파령을 공략했다. 처음엔 화성문(和成門)과 제룡문(制龍門)이 연합하여 지켰지만 단 하루 만에 무너지고 이후엔 혜정 신니가 아미파의 칠십 제자들을 이끌 고 철혈마단을 상대했다. 비록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살계를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창 파령을 지키는 그들로 인해 철혈마단은 창파령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 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천하의 아미파라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속절없이 밀리는 제자들을 보며 아미파의 장문 혜정 신니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퇴각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미파를 돕기 위해 나섰던 혈궁단의 단주 사마유선이 다급하게 소 리쳤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달려드는 적을 향해 매서운 화살을 날리 고 있었다. "크하하! 죽여라! 모조리 죽여라!!"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금기령(金旗令) 휘하 천리대의 대주 서율 (舒聿)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수하들을 독려했다. 그동안 창파령을 뚫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통에 얼마나 심한 문책을 당해야 했던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 하여 천리대(千里隊)란 영광스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겐 참으로 걸맞지 않은 창피한 일 이었다. "이곳만 넘으면 된다! 이놈의 빌어먹을 산만 넘으면 곧 우리들의 세 상이다! 머뭇거리지 마라. 죽여! 죽이란 말이다!" 온 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명을 내리고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도를 휘두르는 서율의 전신에선 핏빛 귀기가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은 힘듭니다. 이러다간 퇴각하기도 힘들어요." 아미파와 혈궁단을 몰아붙이는 천리대는 그들의 유일한 퇴로마저 서 서히 장악하고 있었다. 혈궁단이 필사적으로 활을 쏘며 퇴로가 막히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보려 했지만 온몸을 가리는 방패를 앞세우고 조금씩 치 밀하게 전진하는 천리대를 저지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퇴각을 명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혜정 신니를 이어 다음 대 아미파의 장문인 자리가 유력한 일연 사 태가 사마유선을 거들었다.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꽤나 오랫동안 싸 운 그녀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 물러나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혜정 신니가 처연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산인 아 미파는 이미 무너졌고, 그녀를 따르던 나머지 제자들의 수도 기하급수 적으로 줄어 있었다. 며칠 동안의 싸움으로 남아 있는 제자는 고작 스 물둘. 그나마 아미파의 배분 높은 고수들은 철혈마단의 본진에서 차출 된 괴이한 고수들과 싸우다 대다수가 목숨을 잃고 치명적인 부상을 당 하고 말았다. 혜정 신니 또한 같이 죽자고 덤비는 독랄무비한 합공에 큰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장문인의 심정이 어떠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일연 사태는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마유선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 쳤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어요! 여기서 그냥 죽을 생각이신가요? 일단 살아야 먼저 간 제자들의 복수도 할 수 있잖 아요. 목숨을 아껴 훗날을 도모해야 해요!" 바로 그때였다. 사마유선의 음성을 들었는지 서율이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크하하하! 어디 냄새나는 계집 따위가 군자의 복수를 운운한단 말 이더냐!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로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그녀가 서율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놈의 면상은 절대 잊지 않으마!" "지금 덤비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겠다? 도망을 가겠다는 말인데 그 게 가능할까?" 그의 말에 뭔가를 느꼈는지 사마유선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때를 맞춰 외마디 비명이 그녀의 귓가를 자극했다. "크윽!" 가슴을 불로 지진 듯한 고통 속에서도 상대의 미간에 화살 하나를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은 윤극진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었다. 그 러나 서율과 마찬가지로 악에 받칠 대로 바친 천리대원의 잔인한 손속 은 그에게 편안한 죽음을 주지 않았다. 그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 역으로 쳐 올려진 도에 의해 가슴이 반으 로 갈라지며 몸이 세워지고 그 몸에 또다시 커다란 장창 하나가 날아 들었다. "안 돼!!" 사마유선의 안타까운 외침에도 불구하고 일 장이 넘는 장창은 윤극 진의 몸과 바로 뒤에 있던 나무를 하나로 엮으며 관통해 버렸다. "유, 유......"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윤극진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하나 죽음의 사 자는 너무나도 빨리 엄습했고 단숨에 생기를 빼앗아 가버렸다. 눈도 감지 못하고 고통과 아쉬움, 안타까움, 그리움 등 온갖 기운으 로 물든 두 둔을 사마유선에게 고정시킨 윤극진은 결국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퇴로는 완벽하게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다 행이라면 윤극진의 명으로 그와 먼저 목숨을 잃은 조정옥(趙訂沃)을 제외한 혈궁단 전원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과 몸을 피한 이후에도 사 마유선과 아미파의 탈출을 돕기 위하여 계속해서 공격을 한다는 것이 었다. 물론 그 성과는 미미했다. 옥쇄(玉碎)를 각오했는지아미파의 제자들이 혜정 신니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포기할 때도 되었거늘 지독한 년들 같으니. 뭣들 하느냐! 당장 쓸어버려!!" 서율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잠시 멈추었던 천리대의 공격이 시 작되었다. 그들은 가히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아미파의 제자들을 압박 해 들어왔다. 그들의 공격 방식은 매우 단순했다. 일단 다수로 적의 기세를 제압 하고 고수들을 상대할 때에는 철저하게 합공을 했다. 합공으로 상대를 제거하면 다행이고 쓰러뜨리지 못한다 해도 시간을 끄는 것으로 충분 했다. 그사이 다른 동료들이 적을 베고 힘을 보탤 테니까. 물론 혜정 신니나 일연 사태 정도 되는 고수가 여럿이면 웬만한 수 적 우위로는 승기를 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본대에서 지원 온 고수 들, 이제는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지만, 그들로 인해 아미파에 남 은 고수는 몇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혜정 신니와 일연 사태만 막으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혜정 신니에게는 부대주 요종종(擾種種)을 비롯하여 무려 일곱 명의 사내가 달라붙었고 일연 사태에게도 그 정도의 인원이 달려들었다. 챙챙! 날카로운 병장지 소리에 이어 거친 함성과 날카로운 기합성이 창파 령을 울렸다. 죽음을 각오한 아미파의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도 최후 의 일인까지 싸우고자 했다. 몇몇 나이 어린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고 있었지만 대다수는 이미 죽음을 초월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가 쓰러지면 곧바로 다른 자가 자리를 채우는 천리대와는 달리 아미파는 한 명의 제자가 쓰러질 때마다 드러나는 빈 자리가 너무나도 컸다. "하아, 하아." 호흡이 가빠오고 가슴이 답답했다. 천리대주 서율과 단독으로 맞선 사마유선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느 라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녀는 지금 궁 대신 검을 들고 서율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화살도 떨어진 데다가 거리가 너무 가까워 도저히 궁술을 활용할 수가 없었 다. 을지호나 과거 일세를 풍미했던 그녀의 선조 궁왕 정도의 실력이라 면야 약간의 거리만 주어져도 충분히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겠지만 아 무래도 배움이 짧은 그녀에게는 턱밑까지 접근해 온 적을 상대로 궁을 사용하는 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해서 검을 들고 서율을 상대했는 데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궁을 전문적으로 익혔으되 그녀의 조부는 궁보다 검에 빠진 무 인. 그녀 역시 어느 정도의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 술은 말 그대로 단지 익혀 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 면에 서율의 검은 생과 사를 오가는 경험 끝에 얻은 실전검이었다. 그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엄밀히 따져 서율보다 뛰어난 검술 실력 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마유선은 승기를 잡기는커녕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공격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은 곧 생사를 가늠하는 싸움에 있어 서 실전 경험의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었 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성과 함께 사마유선의 몸이 이 장이나 날아가 쳐박혔 다. 서율의 공격을 막아냈음에도 무기에서 실려오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크하하하! 어떠냐? 이제야 이 어르신의 실력을 알아보겠느냐?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보거라!" 서율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허리보 다도 훨씬 굵은 도를 무지막지하게 휘둘렀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치를 떨었지만 사마유선은 피하기에 급급했다. "악!" 충격이 남았던 것일까? 힘겹기는 했어도 계속되는 서율의 공격을 나름대로 잘 피해내던 사 마유선이 결국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공격을 피해 몸을 날리는 순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시신이 그 녀의 움직임을 지체시켰고, 그 잠깐의 멈칫거림을 놓치지 않은 서율의 도가 그녀의 허벅지를 스친 것이었다. 스쳤다고는 하나 워낙 무지막지 한 도라 그런지 상처가 제법 깊었다. 그녀의 하의가 상처에서 흘러나 온 피로 인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앙탈은 여기까지다!" 그녀의 움직임을 잡느라 꽤나 힘들었는지 서율은 마치 장거리 질주 를 끝낸 말이 투레질을 하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떠냐? 이만 항복을 하는 것이?" "항복 따위는 하지 않는다!" "흐흐, 안 해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아. 네년은 나의 시중을 들게 되어 있다." "너 따위에게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 사마유선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거야 네년 선택이지." '아!' 서율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수십 마리의 뱀이 몸을 휘감는 듯 징그 러운 느낌에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사마유선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혜정 신니와 일연 사태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 여섯 명에게 합공을 당하고 있는 그녀들도 몹시 힘겨운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 점점 숫자가 줄 어드는 아미파의 제자들에게 도움을 바란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 었다. 어느새 서율은 그녀의 코앞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아득한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린다면 죽음보 다 더한 모욕을 당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 다. "크크크, 당장 목숨을 끊을 것 같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지? 왜, 막상 죽으려니까 두려운 것이냐?" "닥쳐라!" 서율의 빈정거림에 이를 깨문 사마유선이 반으로 잘라진 검을 천천 히 들어 올렸다. 목덜미에 닿는 검날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네놈 따위에게 모욕을 당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사마유선이 눈을 감았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내는 웃는 얼 굴, 화난 얼굴, 슬픈 얼굴, 노한 얼굴 등 실로 다양한 표정으로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님......' 눈을 뜨면 당장에라도 그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날 것 같았다. '아직 하고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무엇보다 그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상 념은 길지 않았다. 사마유선의 손이 움직였다. 바로 그때였다. 한줄기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사마 소저?" 흠칫 몸을 떠는 사마유선. "......" 너무나 익숙하고 그리운,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들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닌 가 하여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뭐 하냐고 물었소." 음성은 조금 전보다 더욱 또렷이 들려왔다. 질끈 감았던 사마유선의 눈이 살며시 떠지고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을지호를 볼 수 있었다. "고, 공자님......" "설마 하니 그 날카로운 것으로 약하디약한 피부에 상처를 내려는 것 아니오? 이런, 벌써 긁히지 않았소." 사마유선의 목에서 점점이 핏방울이 맺히자 깜짝 놀란 을지호가 그 녀의 손에서 부러진 검을 낚아챘다. "어, 어떻게?" 멍하니 검을 뺐긴 그녀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는 을지호와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무서운 기세로 철혈마단을 몰아붙이고 있는 무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서둔다고 서둘렀는데 조금 늦고 말았소. 미안하오." 옷을 찢어 사마유선의 목에 묻은 피를 살며시 닦아주는 을지호의 손 길은 더없이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을지 호를 보며 사마유선은 말을 잇지 못했다. 두 눈은 이미 축축해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끊임없이 떨 어지는 눈물이 볼과 턱을 지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을지호의 손등까지 적셨다. 을지호가 넓은 가슴으로 그녀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울지 마시오." 그런다고 멈춰질 눈물이 아니었다. 사마유선은 그의 품에 안겨 한참 이나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눈물을 멈추고 을지호의 품에서 벗어난 것은 을지호와 함께 창파령에 도착한 당가와 점창파 무인들에 의해 장 내의 싸움이 어느 정도 수습된 다음이었다. "어찌 된 것인가요? 공자님은 기마봉(騎馬峯) 쪽으로 점창파를 돕기 위해 가셨잖아요." 을지호의 품에서 빠져나온 사마유선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소." 아미파가 위기에 빠졌다는 전갈을 받은 후 황급히 창파령으로 달려 왔다. 그리고 사마유선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움직였다. 최초 그를 막던 몇몇 사내는 어째서 자신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지는지 의식도 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고, 사마유선에게 달려 들던 서율은 분노한 을지호의 일수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 고 말았다. 고수라면 나름대로 고수라고 할 수 있는 그를 찰나지간에 잠재운 무공은 다름 아닌 절대삼검의 제일초식 무심지검(無心之劍)이 었다. "저자는......." 사마유선이 목과 몸이 분리되어 쓰러져 있는 서율을 가리키며 말문 을 흐렸다. "원래는 사마 소저에게 맡겨야 했으나 시간이 없어서 대신 처리했 소이다. 이해해 주시오. 하하, 사마 소저의 미모에 정신을 놓고 있어 처리하기가 무척이나 쉬웠소." "그럴 리가요." 사마유선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품에 안겨 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을지호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쪽 방면으로 둔감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을지호가 눈치챌 정도로 그 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일이 이쯤 되자 그로서도 민망함을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험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헛기침을 해보았으나 오히려 분위기만 더 이 상해졌다. 사마유선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홍조가 목덜미까 지 덮고 있었다. '이거야 원.' 사마유선이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일 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을지호가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이 장내를 정리한 당우곤이 다소 가쁜 숨 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이곳은 대충 정리가 된 듯하네." 을지호가 반색을 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우리야 뭐 한 것이 있겠나. 후~ 아미파가 고생을 했 지." 당우곤이 다소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미파는 지난 며칠 사이에 본산의 제자들은 물론이 고 혜정 신니를 따라 흑백대전에 참가했던 제자들마저 대부분이 목숨 을 잃었다. 남은 사람이라야 헤정 신니와 일연 사태, 그리고 일연 사 태와 동배분의 고수 두어 명과 열 명이 안 되어 보이는 제자들뿐이었 다. 한마디로 멸문과 다름없는 극심한 피해를 당한 것이었다. 을지호와 당우곤이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쉴 때 생존한 제자들을 다독 이던 혜정 신니가 다가왔다. "두 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혜정 신니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례를 표하자 당황한 을지호와 당 우곤이 급히 허리를 꺾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조금만 빨리 왔더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 인데 이곳저곳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서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그 나마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제때에 도착하고도 힘든 싸움을 할 뻔했습 니다." 당우곤의 말에 을지호는 당치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지 만 혜정 신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포위망 한쪽을 완전히 정리하며 뛰어든 을지호가 아니었다면, 그의 손에 일연 사태를 핍박하던 무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천리대의 단주 서율의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혈궁단의 지원이 있었더라도 당 가와 점창파의 고수들만으로 이렇듯 빨리 적을 완벽하게 제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번번이 신세를 지는군요. 아미는 을지 대협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혜정 신니는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미파를 유린했던 질풍대를 전멸시켜 대신 복수를 해준 것에 대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건만 또다시 구함을 받았으니 아미파는 을지 호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큰 빚을 진 셈이었다. "은혜라니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요. 그건 그렇고, 몸은 좀 어떠십니까?" "기혈이 다소 뒤틀린 것을 제외하고는 괜찮아요. 오히려 대협의 몸 이 걱정되는 군요.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혜정 신니가 피로 물든 그의 옷을 보며 걱정스러워했다. 을지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감히 청하건대 그 대협이란 소리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어째 민망 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민망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을지호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혜정 신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무튼 견딜 만은 합니다. 그런데 놈들의 공격이 실로 매섭군요. 승부가 되지 않을 것 같아도 생사를 도외시하고 덤빕니다. 특히 회의 (灰衣)의 노고수들은 온몸이 흉기인데다가 동귀어진을 마다하지 않고 덤벼드는 통에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함께 오던 점창의 하선(夏仙) 선배는 결국 놈들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미타불!" 혜정 신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불호를 외웠다. 혜정 신니 역시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깊은 내상도 그들의 합공에 당한 것이었고 아미파의 고수들 대다수가 회의인들이 펼치는 자살 공격에 당한 터였다. "우리도 꽤많은 이들이 당했지요. 인원은 얼마 되지 않지만 하나같 이 괴이하고 악독한 무공을 펼쳐 상대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 다. 자신의 몸을 폭사시켜 상대와 함께 죽으려는 수법은 치가 떨릴 정 도예요." 혜정 신니가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힘없이 흔들었다. "전문적으로 그런 훈련을 받은 자들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대다 수가 오랫동안 수련을 한 듯 무공에 연륜이 묻어 나왔습니다. 또한 은 연중 공경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당우곤의 말에 그렇잖아도 어두운 혜정 신니의 안색에 더욱 그늘이 졌다. "그러니 더 무서운 것이지요. 그만한 연륜과 무공을 지니고도 스스 럼없이 목숨을 던져 목표를 제거하려 하는 모습이라니. 철혈마단이 얼 마나 무서운 집단인지 알면 알수록 두려움이 몰려오는군요." "그나저나 놈들이 또다시 몰려오기 전에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벗어나다니요? 하면 이곳을 포기한다는 것인가요?" "예,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듭니 다." 혜정 신니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비록 도움을 받기는 했어도 우리는 이곳 창파령을 지켰어요. 앞으로도 끝까지 지켜낼 생각입니다. 어째서 이곳 을 포기한다는 것이지요?" 창파령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제자가 얼마던가. 그들의 노고를 생각 해서라도 순순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창파령을 지켜낸다는 것. 어쩌 면 그것은 이제 빈 껍데기만 남은 아미파가 지닌 마지막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우곤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혜정 신니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 었다. 갑작스레 돌변한 혜정 신니의 태도에 당황한 당우곤이 우물쭈물 제 대로 대꾸를 못하자 을지호가 대신 나섰다. "잠시 고정하시지요. 이곳 창파령을 지키기 위해 아미파의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사정이 여의 치 않게 되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조금 전에 운필봉(雲馝峯)이 무너졌습니다." 운필봉을 지키고 있는 곳은 청성파. 혜정 신니가 깜짝 놀라 되물었 다. "청성이 무너졌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힘에 밀려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적전분열(敵前分裂)이 생겨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무슨 소린지......" 적전분열이라니! 적을 눈앞에 두고 같은 편끼리 틀어졌다는 말이 아 닌가. 혜정 신니는 을지호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40장 무극지검(無極之劍) 운필봉은 대파산에 펼치고 있는 방어선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해서 청성파를 비롯하여 광룡보(洸龍堡), 삼성관(三星館), 무령방(武 逞幇) 등 사천성에서 이름깨나 날린 문파들이 모조리 집결해 있었다. 그런데 무너졌다고 한다. 그것도 힘에 밀린 것이 아니고 자중지란(自 中之亂)을 일으켜서. 뭐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엇기에 대적을 앞에 두고 자중지 란을 일으켜 운필봉을 내주었단 말인가? 혜정 신니의 얼굴은 풀리지 않을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을지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운필봉의 중요성은 그들도 알고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지요.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는 인원이 죽어나갔 습니다. 실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요. 하나 모두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덕에 철혈마단의 파상공세에서도 지금껏 버틸 수 있었습니다." 거기까지는 혜정 신니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 에서 을지호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 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녀가 듣고 싶은 것은 그토록 힘들게 운필 봉을 지켜낸 이들이 대체 무슨 일로 자중지란을 일으켰느냐는 것이었 다. "놈들의 비열함이 하늘에 이르렀습니다. 처음 무작정 힘으로만 밀어 붙이던 놈들이 작전을 달리한 것은 지난밤부터였습니다." 천천히 입을 여는 을지호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긴장이 되는지 혜 정 신니가 침을 꿀꺽 삼켰다. "놈들은 새벽의 은밀함을 틈타 기습을 했습니다. 물론 긴장을 늦추 지 않고 있던 우리들의 역공에 철저하게 당하고 말았지요. 문제는 그 들이 철혈마단의 무인들이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하면?"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는지 혜정 신니의 고운 아미가 파르르 떨렸 다. "그들은 철혈마단에게 점령당한 군소문파의 무인들이었습니다. 그 리고 오늘 아침엔 그들과 더불어 무공도 모르는 노약자와 아녀자들을 앞세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아미타불!" 무슨 일이 있어도 운필봉을 지켜야 했던 이들. 그리고 그들과 직,간 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식솔들. 그중에는 친족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 다. 물러설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서로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분루 를 삼켜야 했을 그 광경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 다. "결국 물러나면 인질들을 싸움에서 배제시키겠다는 말을 듣고는 후 퇴를 결정했습니다." "그 과정까지 꽤나 진통이 심했지요." 그곳의 싸움에 직접 참여했고, 또 일단 퇴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 던 당우곤이 한마디 거들었다. "어쨌든 조금 전부터 후퇴는 시작되었습니다. 운필봉은 물론이고 기 마봉, 절운곡(切雲谷)에서도 병력을 물렸습니다." "놈들이 선선히 보내주지는 않았을 텐데요?" 아무리 튼튼한 방벽이라도 조그만 틈새로 인하여 결국 무너지고 마 는 법이다. 비록 패퇴한 것이 아니라 자의로 물러난 것이었지만 운필 봉에서 벌어진 일이 대파산 전반에 걸쳐 진을 치고 있는 백도의 무인 들에게 끼칠 영향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병법에 이르기를 안전 하게 물러나는 것보다 힘든 것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꽤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대다수가 무 사히 몸을 피해 집결지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신니께서 결단을 내려 주시면 여기 있는 모두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 혜정 신니는 금방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순리상 당연히 퇴각을 결 정하여 남은 제자들의 목숨을 구해야 했지만 자꾸만 미련이 남는 것은 창파령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 무리 망설이고 숙고해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상황이 이리 되었는데 고집을 부려 우리를 구하고자 달려온 당가와 점창파의 제자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지요. 물러 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니." 혜정 신니가 행여나 고집을 피울까 은근히 걱정했던 당우곤이 안도 의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꺾었다. 그리곤 대충 주변 상황을 수습한 식 솔들에게 명을 내렸다. "집결지로 돌아간다. 놈들의 추격이 있을 것이니 한시도 긴장을 풀 지 말거라!" 당가의 식솔들이 철수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혜정 신니는 점창파의 도움을 받아 제자들의 가묘를 만들어주고 그 앞에서 눈물 짓는 일연 사태에게 말했다. "우리도 돌아가자꾸나." "예, 사부님." 재빨리 눈물을 닦은 일연 사태가 애써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을 했 다. 당가의 무인들이 가장 앞서 철수하고 점창과 아미파의 제자들이 뒤 를 이었다. 혈궁단이 그들을 호위하듯 후미에 처져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하나 공격은 뒤가 아닌 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악!" 앞서 걷던 당가의 식솔들 사이에서 난데없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주 인을 잃은 머리 몇 개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웬 놈들이냐?" 당우곤이 당황하는 식솔들을 다독이며 재빨리 전열을 정비했다. 그 리곤 정면의 적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우문(愚問)일 뿐이었 다. 대파산에서 그들을 공격할 자가 또 누가 있을까? 그것을 증명이라 도 하듯 한껏 비웃음이 담긴 음성이 들려왔다. "쥐새끼들처럼 잘도 도망가는구나!" 흉흉한 살기를 내뿜는 사내들을 가르며 나타나는 장년인. 그는 비상 하는 백마(白馬)의 모양을 수놓은 흑갈색 무복을 입고 햇살보다 눈부 신 금빛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철혈마단이냐?" 당우곤이 재차 물었다. 사내가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한 것을 자꾸만 묻는 것을 보니 바보가 아닌가? 철혈마단이 아 니라면 그럼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음." 당우곤의 입에서 나지막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나 막상 철혈마단이라는 소리를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쩌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흠,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군요. 몸을 뺄 여유는 있을 줄 알 았는데." 어느새 다가온 을지호가 금빛 장삼의 사내와 그를 에워싸듯 보호하 며 언제라도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는 양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사내들 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이쪽 길목을 막고 나타난 것을 보니 기마봉 쪽에서 온 것 같은데......" "기마봉은 아닙니다. 기마봉에 나타난 놈들은 가슴에 하나같이 은 (銀)자를 새겨 넣은 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놈들을 지휘하는 자의 옷 도 금빛이 아니라 은빛이었지요. 차림새를 보니 저자는 금기령주가 아 닌가 싶습니다. 주변의 수하들은 당연히 금기령에 속한 자들일 것이 고." "아무튼 큰일이네. 그다지 차이는 없다지만 동기령보다는 은기령이, 은기령보다는 금기령에 속한 자들이 강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저렇듯 인원이 많으니......" 언뜻 보기에도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이들의 수는 백여 명을 훌쩍 넘길 정도였다. 한데 을지호의 입에선 더욱 기막힌 말이 흘러나왔다. "뒤에도 있습니다." 순간 당우곤의 고개가 엄청난 속도로 뒤로 향하고, 그는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은 들개 떼처럼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무복에 적혀 있는 글씨는 동(銅)이었다. "동기령 놈들까지!" 당가와 점창의 인원과 온갖 격전으로 부상당하고 지친 아미파 제자 들의 수를 합해봐야 간신히 오십을 넘을 정도였고 혈궁단의 인원까지 포함한다 해도 칠십이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한데 적은 어림잡아도 이백이 넘는 수였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아니, 전력 자체 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거야 원, 단단히 작심하고 나선 모양입니다." 고작 칠십 명. 그것도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이들을 제외하면 오십도 되지 않는 소수 인원을 상대하고자 동원한 인원이 이백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는지 을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그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아니, 그가 들고 있던 궁을 뚫어져라 쳐 다보던 금빛 장삼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후설담(後洩啖)이다. 네놈이 삼시파천(三矢破天)이라는 놈이냐?" "삼시파천?" 을지호가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슬그머니 다가온 사마유 선이 귓속말을 했다. "공자님의 궁술 솜씨에 놀란 자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 어요." 삼시파천! '세 개의 화살이면 하늘까지 부순다' 라는 실로 광오한 별호는 을지 호가 아미파를 급습했던 질풍대를 전멸시키고 당가의 후미에서 그들을 쫓는 추격자들을 오로지 궁 하나로써 격퇴하며 보여준 무위에 감탄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삼시파천이라는 별호는 대파 산을 넘어 전 중원에 퍼지고 있었다. 한데 재밌는 것은 그 별호의 진원지를 따지고 들어가자면 그에게서 도움을 받은 당가나 아미파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의 일 방적으로 당한 철혈마단의 무인들이 지어냈다는 것이었다. '삼시파천? 훗, 나쁘지는 않은데.' 단어의 뜻은 둘째 치고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해서 두어 번 조용히 읊조리고 있는데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후설담의 호통이 들려 왔다. "네놈이 삼시파천이라는 별호를 쓰는 애송이냐고 물었다!" "대충 그런 것 같다." 오는 말이 좋지 않으니 가는 말이 고울 리 없다.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툭 내던진 그의 말에 후설담의 얼굴이 순간 적으로 오색 단풍으로 물들었다. "같다?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미친 놈. 네놈은 반말을 해도 되고 나는 반말을 하지 말라는 법이 라도 있더냐?" 싱글거리며 놀리는 을지호. 하지만 찬찬히 주변을 살피는 그의 내심 은 그렇지 못했다. '어쩐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었다. 좌우는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들 때문에 몸을 피하기가 여의치 않았고 앞뒤는 네 배가 넘는 적에 의해 차단이 된 상태였다. 결국 한쪽 길을 뚫지 않고는 전멸을 면치 못하는 상황. '아무래도 이쪽인가?' 기왕 뚫어야 한다면 당연히 집결지로 통하는 길이었고, 그곳은 금기 령의 무인들이 막고 있었다. 을지호의 시선이 후설담을 넘어 그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사내들 을 둘러보았다. 일부의 사내들은 검을, 일부의 사내들은 창을 들고 질서 정연하게 포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입을 쩍 벌리고 먹잇감을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맹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곳뿐이었고 반드시 뚫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마음을 다잡은 을지호가 재빠르게 전음을 날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의 전음에 혜정 신니와 당우곤, 사마유선이 흠칫 몸을 떨었다. [살기 위해선 정면을 뚫어야 합니다. 일단 제가 앞장을 서서 길을 내겠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그의 전음성은 빠르게 이어졌다. "아직 멀었느냐?" 을지호와 당우곤 등이 전음을 주고받으며 뭔가 계책을 세우고 있다 는 것을 파악하고는 있었으나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태연자약하게 노 려보던 후설담이 이죽거리며 물었다. "기다리기가 몹시 지루하구나. 빨리 끝내라." "끝났다면?" "항복을 해도 죽고 하지 않아도 죽는다. 그래, 어찌 죽을 생각이 냐?" "당연히 싸워야지. 또 죽지는 않을 생각이다. 죽는 것은 오히려 네 놈들이야." 후설담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그게 잘될까?" "못 믿겠으면 확인을 해보던가. 어때, 나와 일 대 일로 붙어보는 것 이." 후설담은 을지호가 그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하나 곧 안색을 회복하고 코웃음을 쳤다. "네놈 따위와 손을 섞을 만큼 심심하지 않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네놈이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옳지, 마침 저기 오시는 구나." 후설담의 시선이 어깨를 넘어 뒤쪽으로 향하자 을지호의 고개도 반 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어기적거리며 걸어 오는 다섯 명의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위험하다.' 조금 전부터 느껴오던 이질적인 느낌. 그것이 어디서 연유됐는지 비 로소 알게 된 그의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다. 후설담은 기분 나쁠 정도 로 존재감이 큰 노인들이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왔다고 했고 접근하기 도 전에 전해오는 기세를 감안하면 그런 자신만만함이 이해도 갔다. '만약 발목을 잡히기라도 한다면 도주는 무리다.' 노인들의 모습에 다급해진 을지호는 당우곤을 향해 즉시 전음을 보 냈다. [지금입니다.] 그의 전음이 끝나자마자 힘껏 고개를 끄덕인 당우곤이 품에서 주머 니 세 개를 꺼내 어느새 칠장 가까이 접근한 동기령의 무인들에게 뿌 렸다. 독낭(毒囊)엔 치명적인 독은 아니어도 잠깐의 시간은 벌어줄 수 있 을 만큼의 독분(毒粉)이 담겨져 있었다. "독이다!" "피해랏!" 허공에서 터진 독낭에 의해 주변은 삽시간에 독에 오염되었다. 다가 오던 동기령의 무인들이 기겁하며 호흡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발사!" 때를 같이하여 사마유선의 낭랑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맨 후미에서 서서 지금껏 동기령을 겨누고 있던 혈궁단이 반대로 궁을 돌려 전면을 막고 있는 금기령의 무인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 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은 당가의 식솔들과 아미, 점창파 제자들의 몸을 교묘하게 피하며 날아갔다. 순식간에 그들과 금 기령 사이는 온통 붉은 빛으로 덮여 버렸다. 펑! 나직한 파공성과 함께 후설담을 노리며 한 발의 무영시가 날아갔다. 동시에 몸을 움직인 을지호는 날아가는 화살에 올라타듯 몸을 띄워 붉 은 빛에 모습을 감추고 금기령의 무인들에게 접근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시위를 제거한 궁이 들려 있었다. 혈궁단이 먼저 화살을 날렸지만 그들의 화살이 도착하기도 전에 들 이닥친 무영시가 후설담의 목숨을 노렸다. 처음이라면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어쩌면 감당하지 못하고 그 대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고작 며칠 동안에 불 과했으나 후설담은 무영시의 악명(惡名)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 다. 그는 추호의 방심도 하지 않고 더없이 신중한 모습이었다. "하앗!"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하여 보이지 않는 무영시의 기척을 잡아 낸 후 설담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검끝에서 한줄기 빛이 피어올랐다. 꽈꽝! 무영시가 후설담이 발출한 검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소멸헸다. 간단 한 충돌이었음에도 그 파장은 제법 컸다. 뒤따라 날아오던 몇몇 화살 이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고 수 십여 발의 화살은 후설담과 금기령의 무인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후설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살의 기세가 녹록치 않았지만 까짓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 연이어 무영시가 날아온다면 그때는 방법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충돌로도 손이 저려오는 무영시를 연달아 막는다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막아랏!" 재빨리 몸을 뺀 후설담이 소리쳤다. 순간, 그의 앞에는 방패로 만든 견고한 담벼락이 만들어졌다. 탁탁탁. 방패에 막힌 화살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더러는 박히기도 하 고 방패와 방패 사이의 미약한 틈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 위력 은 현저히 떨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공격은 혈궁 단의 화살이 아니라 전신의 내공을 끌어 모으며 뒤따라 달려오는 을지 호의 공격이었다. "타핫!" 아군에겐 더없이 청명한 구원의 소리요, 당하는 적에겐 악마의 외침 과도 같은 기합성과 함께 땅에 끌릴 듯 말 듯 처져 있는 철궁의 끝에 서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떨림이 끝나는 찰나 땅으로 향했던 철궁이 대각선으로 치켜 올려졌 다. 파스스슷. 먹이를 노리며 달려드는 비사(飛蛇)의 꿈틀거림이 이러할까? 한 치 정도의 깊이로 땅을 가르며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검기의 빠름과 날카 로움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꽈지직! 가장 먼저 검기에 노출된 사내가 외마디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쓰러 졌다. 그가 들고 있던 방패는 이미 수백 조각으로 나뉘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냐?" 난데없는 굉음과 함께 쓰러지는 동료. 금기령의 무인들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나 자신의 동료를 사자(死者)로 만든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밀 어닥친 검기는 그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검기의 폭풍이란 바로 이런 것이던가!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처음의 공격과 연계하여 그 힘을 증대시켰다. 검기와 검기가 얽히고섶켜 마이 구룡(九龍)이 승천(昇天) 하듯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을 만들어내더니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일엽편 주(一葉片舟)를 노리는 기세로 금기령의 무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꽈꽈꽝!! "크아악!" "아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끔찍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혈궁단 의 화살로부터 그들을 구했던 방패가 힘없이 박살나고 들고 있던 무기 도 주인을 잃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검기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이들은 열이면 열, 목숨을 잃거나 치명적 인 부상을 당했다. 검기의 영향력 밖에 있던 이들은 육체적 부상보다 는 정신적인 충격에 몸을 떨어야했다. 고작 한 호흡 사이에 이어지는 공격으로 을지호는 이미 포위망을 뚫 고 들어갔다. 그러나 안정적인 퇴로를 확보한 상태는 아니었다. 만약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게 된다면 뒤는 물론이고 양쪽에서 합공을 당하 게 될 터. 그는 적들이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사이 확실하게 포위망 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에 재차 궁을 휘둘렀다. "타핫!" 을지호는 아예 작심을 했다는 듯 추호의 인정도 없이 손을 썼다. 그 의 손에서 곧게 펴진 철궁이 춤을 추고 뭉뚝한 철궁의 끝에선 희뿌연 검기가 끊임없이 발출되었다. 그것에 맞서던 방패가 어찌 되었는지 직접 목도한 후설담이 목이 터 져라 소리쳤다. "피, 피해랏!" 금기령의 무인들에게 금기령주의 음성은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잖아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들은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검기의 해일을 피해 좌우로 흩어졌다. 그렇지만 모든 이가 피할 수는 없었다. "크아악!" 또다시 터지는 비명성. 땅바닥을 구르고 나무 뒤로 숨으며 필사적으로 움직였으나 미처 피 하지 못하고 허무히 목숨을 잃은 이들만 해도 대여섯 명이 넘었다. 그 것이 자신의 비명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는지 저마다 두 눈 을 질끈 감았다. 연속적인 공격이 끝난 직후, 을지호는 적들에 의해 가려졌던 반대편 의 길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길이 열렸다. 하늘을 가리고 있는 묵운(墨雲)을 뚫고 내비치는 한줄기 햇살과 같 은, 그와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의 오직 하나뿐인 생명선. 그러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발출한 검기를 감당하면서도 굳건히 서 있는 자들이 있었다. 금기령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로 이루어진 낭아대(狼牙隊)가 길의 마지막을 막고 있었다. 금기령을 이루고 있는 천리대, 혈루대(血淚隊), 참인대(斬人隊) 등 의 인원은 각 칠십이었으나 낭아대의 인원은 고작 이십오 명에 불과했 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금기령이 지닌 전력의 삼분지 이를 넘어설 정 도로 막강했다. "우리가 마지막이다!" 낭아대의 대주 고혈랑(孤血狼)이 삼 척의 낭아봉(狼牙捧)을 치켜들 며 소리쳤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고작 몇 번의 호흡이 지났을 뿐인데도 목숨을 잃은 자가 삼십 명을 웃돌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는 검기의 바다는 사십 평 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두렵고도 황홀한 광경이었고 철판을 덧댄 방패로는 몸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고 꼬리 를 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낭아대마저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면 포 위망이 뚫리는 것은 물론이고 금기령, 나아가 위대한 철혈마단이 고작 한 사람을 막지 못했다는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반 각, 아니, 촌각(寸刻)만 버티면 된다!' 고혈랑은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점창파의 무인들을 격살하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달려오는 다섯 명의 노인을 보면서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 다. "아악!"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분명 적은 아니었다. '어느새 따라붙었군.' 을지호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당우곤이 던진 독낭은 다른 이들의 발길은 잠시 지체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노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한 듯했다. 또한 잠시 두려움 에 떨며 길을 내주기는 했으나 곧 정신을 수습한 금기령의 무인들도 좌우에서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이곳만 벗아나면 된다.' 일단 포위망을 벗어나면 급격히 좁아지는 지형을 이용해 충분히 시 간을 끌 수 있었다. 문제는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이었다. 최대한 빨리 뚫 고 나가야 하는데 풍겨오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하나같이 죽음을 각오했는지 그들은 방패도 집어 던지고 오직 무기만을 든 채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그렇다고 뚫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약간의 시간은 지체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노력 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무리일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지금껏 사용한 무공은 구양풍으로부터 전수받은 파검삼식(破劍 三式)이었다. 파검삼식은 구양풍이 달마삼검을 꺾기 위해 수십 년간 고심해서 만 든 무공으로써 천하에서 그 적을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환검(幻劍)의 묘리를 이용해서인지 파괴력만큼은 그 가 지금 사용하기로 결정한 무공에 비해 다소 손색이 있었다. 달려가는 속도에 더해 을지호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더불어 철 궁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죽음으로 막는다!" 자기 자신과 수하들에게 다짐이라도 해두려는 듯 소리친 고혈랑의 전신에서 거센 투지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모든 만물(萬物)의 생명력과 힘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는 무(無) 에서 시작될지니......" 검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 을지호의 입에서 꿈결과도 같은 음성 이 터져 나오고 순간 그를 중심으로 하는 엄청난 강기의 소용돌이가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올려졌던 철궁이 점점 밑으로 내려왔다. 그의 주위를 감 싸던 기운은 더욱더 용솟음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함인가! 낭아봉을 꼬나 쥔 고혈랑의 눈에 공포가 어리고 그를 따라 죽기를 각오했던 낭아대의 대원들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곧 들이닥칠 미증유의 재앙을 두려워했다. "피, 피해!" 후설담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고혈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죽음으로, 죽음으로 막을 것입니다!" "미, 미친!!" 너무 무모했다. 이런 기운을 감당할 사람은 오직 뒤쪽으로 달려오는 오대봉공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꽈꽈꽈꽈꽝! 갑자기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에 후설담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해져 오는 것은 소리만이 아니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爆音)과 함께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몸으론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살인적인 강기, 그리고 그 대부분이 낭아대를 향해 폭사되고 있었다. "저, 저럴 수가!"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몸으로 어찌 저런 힘을 뿜어낸단 말인가. 가장 먼저 강기에 부딪친 고혈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결국 두려움에 굴복한 낭아대의 대원들이 미 친 듯이 도망쳤으나 사방 십여 장을 초토화시키는 강기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순 없었다. 잠시 후 창파령, 아니, 대파산을 울리던 굉음이 잦아들고 끝을 모르 고 치솟던 먼지와 파편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찾아 내려섰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두려움과 공포, 경악, 놀라움, 감탄을 넘어선 뭔가 다른 의미의 묵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탄성은 이곳저곳에서 동시다 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멀쩡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조그만 바위, 잡초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수령의 나무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대파산과 그 역사를 같이한 몇몇 아름드리 나 무들만이 뿌리째 뽑혀 볼쌍사나운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약해 빠진 인간이 어찌 견딜 것인가. 을지호의 앞을 막아섰던 낭아대의 대원들 중 생존자는 없었다. 그들 은 노도와 같이 덮쳐 온 강기의 폭풍을 피하지 못하고 갈가리 찢긴 모 습으로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눈길조차 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 게 망가진 그들의 주검에선 생전의 모습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 다. 그 중심에 우두커니 서서 몸을 돌리고 있는 을지호가 있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할지 아 무도 몰랐다.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사마유선이었다. "서두르세요." 촌각을 다투는 찰나에 멍청히 서 있다니, 실수도 그런 실수가 없었 다. 지금과 같은 기회를 만들고자 을지호가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녀 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당우곤은 스스로를 자책할 시간도 없이 황 급히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모두들 앞으로!" 충격이 너무 컸던가? 적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를 하는데도 후설담 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뭣들 하느냐, 쫓아라!" 황급히 달려온 오대봉공이 버럭 호통을 쳤다. 뇌리를 뒤흔드는 호통 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후설담은 아차 싶었다. 포위망이 뚫린 것도 모 자라 도주하는 자들을 그냥 보고 있었으니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터였 다. 그는 힘없이 소리쳤다. "쪼, 쫓아라!" 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당가의 식솔들과 점창, 아미파의 제자들, 그리고 혈궁단의 단원들은 이미 완벽하게 포위망을 벗어난 상태였다. "가요!" 맨 뒤에서 수하들을 보호하며 내다리던 사마유선이 을지호의 팔을 낚아채며 소리쳤다. "......" 을지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응?' 뭔가가 이상했다. 대답이 없는 것도 그랬고 몸도 경직되어 있었다. 사무유선이 재빨리 몸을 틀어 을지호를 살폈다. 을지호는 두 눈을 꼭 감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대삼검, 그중에서도 마지막 초식인 무극지검(無極之劍)은 그 위력 만큼이나 막대한 내공이 필요했다. 웬만한 내공으론 감히 펼칠 수도 없고 또한 사용한다 하더라도 내공이 바닥나 기운을 잃기 일쑤였다. 그 옛날 중원을 평정한 조부 을지소문도 초창기엔 고작 한두 번 사 용하고 녹초가 될 만큼 무극지검이 원하는 내공은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그대의 을지소문과 지금의 을지호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였다. 제 대로 소화를 시키지는 못했어도 을지호의 몸에는 구양풍과 고조부가 남긴 엄청난 내력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몸 이 최상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대파산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가장 바삐 움직인 사람 은 단연 을지호였다. 객관적인 전력이 열세인데다가 싸움이 치열했던 만큼 그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 그는 단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이 산 저 산을 넘나들며 위기에 빠진 아군을 도왔다. 사무유선과 혈궁단이 최선을 다해 도왔어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만큼 몸에 피로는 쌓여갔다. 그런데다가 반나절 전, 그는 절운곡에 갇힌 아군을 구출하다가 가볍 다고만은 할 수 없는 부상도 입었다. 몸을 돌보지 않는 자살 공격으로 혜정 신니에게 부상을 입히고 아미파의 많은 고수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던 회의의 노고수들, 그들의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당한 것 이었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부상까지 당하고 또한 절대삼검에 비해 결코 아 래가 아닌 파검삼식을 구사하느라 몸에 무리가 온 상황에서 펼친 무극 지검. 물론 예상대로 포위망을 뚫을 수는 있었다. 하나 몸이 버티지 못했다. 무극지검을 끝까지 펼치기도 전에 힘겹게 이어오던 진기가 끊기고 전신의 기혈이 들끓었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도도히 흐르던 기운이 방향을 잃고 각 세맥 (細脈)과 요혈(要穴)을 들쑤시고 다니며 미친 듯 질주했다. 아무도 눈 치 채지 못했지만 이미 상당한 양의 울혈(鬱血)도 토해냈다. 절대적인 위력이 오히려 역린이 되어 그를 곤란케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41장 생사기로(生死崎路) "괘, 괜찮아요?" 행여나 적이 들을까 최대한 조용히, 그러나 걱정스레 묻는 그녀의 음성은 무척이나 떨렸다. 힘겹게 눈을 뜬 을지호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부상이 심해 보여요." "아직까지는 버틸 만하오.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었소?" 바로 옆을 통과했는데도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부상이 심하다는 소 리. 사마유선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다 피했어요." "다행이오. 사마 소저도 어서 피하시오." "예? 공자님은요?" "난 가지 않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요?" 을지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설마 또 싸우려는 건가요?" 사마유선이 그의 팔목을 낚아채며 물었다. "저들을 막지 못하면 다 죽소." 을지호가 다섯 명의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어요." "내 몸은 그리 약하지 않소." 하나 사마유선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요.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은 무리예요. 부상당한 몸으로 누구 를 상대하겠다는 거예요." 일신에 지닌 무공도 약하지 않았지만 패천궁에서 숱한 고수들과 생 활을 해온 사마유선의 안목은 남달랐다. 그녀는 오대봉공의 무공이 패 천궁의 노고수들에 못지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피해야 돼요." 그녀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렇지만 이미 결심을 굳히 을지호는 고집 을 꺾지 않았다. 그사이 그들에게 접근하던 몇몇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철궁에 힘없 이 나가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오대봉공은 공연한 피해만 누적될 것 을 염려하여 즉시 공격을 중지시켰다. 천천히 다가오는 오대봉공을 보며 을지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저들이 강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또 내 부상이 작지 않다는 것도. 그러나 이 정도에 꺾일 내가 아니라오. 그러니 걱정말고 피하시 오." "아니요. 당신이 남는다면 저도 남겠어요." 죽는 길이었다. 남는다면 십중팔구 목숨을 보존키 어려웠다. 그런데 도 그녀는 남겠다고 하였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을지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같이... 죽겠다는 것이오?" "걱정하지 말라는 사람이 어째서 죽음을 말하나요? 홀로 싸우는 것 보다는 살 가능성이 더 높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죽으며 저들에 의해 어차피 나도 죽어요." "......" "함께 싸우던가 아니면 도망쳐요." "훗, 도망치기는 너무 늦은 것 같소." 피식 웃음을 터뜨린 을지호가 좌우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사마유선도 빙긋이 웃었다. "그렇군요. 결국 함께 싸워야겠네요." 어느새 접근한 오대봉공을 보면서도 그녀는 두려운 표정이 아니었 다. 다만 그의 팔목을 살며시 잡앗던 손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을지호가 몸을 홱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깜짝 놀란 그녀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몸과 몸 이 밀착되고 얼굴과 얼굴 사이는 채 한 뼘이 되지 않았다. 그의 거친 숨결을 느낀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사마... 아니, 그대가 있으면 그대 걱정에 마음껏 싸우지 못하오. 정신이 분산되어 오히려 더 위험해질 뿐. 먼저 가서 기다리시오. 곧 뒤따르겠소." "하, 하지만......" 황급히 말을 끝맺은 그는 울먹이며 고개를 흔드는 사마유선의 시선 을 외면하고 그녀의 손과 허리를 잡아 힘껏 던졌다. 사마유선의 몸은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십여 장이나 날아가 지면에 사뿐히 안 착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재빨리 중심을 잡은 사마유선이 멀리서라도 돕겠다는 듯 시위를 당 겼다. 하나 미처 반이나 당겼을까? 그녀는 시위를 풀고 힘없이 고개를 떨 구고 말았다. 묵묵히 쳐다보는 을지호의 눈빛을 마주한 까닭이었다. 어째서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느냐는 의미가 담긴 처연한 눈빛을. '정녕......' 더 이상 고집을 피운다면 그의 말대로 오히려 싸움에 방해만 될 것 이었다.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돕는 길이리라. "꼭... 돌아오셔야 돼요!" 사마유선이 입술을 깨물고 소리쳤다. 그리곤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 했다. 그녀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맑은 눈물이 점점이 뿌려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을지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소, 약속하오." 바람결을 타고 전해지길 바라는가. 그녀에게 한 말 치고는 너무나 작았다. "네가 그 유명한 삼시파천 을지호로구나. 나는 귀곡도(鬼哭刀) 낙청 (駱靑)이다." 가장 나이가 들어보이는 노인이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그리고 고맙소." 아무런 제지도 없이 사마유선을 보내준 것에 대한 인사라면 인사였 다. 그러나 낙청은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할 것도 고마울 것도 없다. 네가 진다면 어차피 죽을 아이다. 물론 다른 녀석들도 함께." "특히 우리를 상대로 잔머리를 쓴 놈들은 더욱 살려둘 수 없지. 모 조리 대갈통을 박살 내주마. 우선 네놈의 머리 속이 어덯게 생겼는지 알아본 다음에." 잔머리라면 아마도 당우곤이 독을 쓴 것을 말함이리라. 나름대로 청 수한 모습의 낙청과는 달리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독두옹(禿頭 翁) 태세적(邰勢寂)은 무척이나 호전적인 모습이었다. 을지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나머지 사 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뚱뚱한 노인이 히죽거리고 있었고 쌍둥이 노인이 비릿한 웃음을 지 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불(魔佛)과 음양쌍귀(陰陽雙鬼)라 불리는 뇌격(雷擊), 뇌 온(雷溫) 형제로 철혈마단에서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조금 전 을지호의 놀라운 무공을 보았음에도 그들은 하나같이 여유 로움과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강자 들만 득실거린다는 철혈마단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들이었 다. 그만한 자신감은 일부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몸에 밴 것 이었다. 또한 을지호가 상당한 부상을 입고 있는 것도 그런 자신감에 일조를 했다. "쯧쯧, 네가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그럴듯한 곳에서 만나 죽도록 싸웠을 것을." 흑도에 악인만 있는 것이 아니듯 잔인하게만 보이는 철혈마단에도 낙청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성격이야 괴팍하고 다른 이들처럼 잔인할 지 몰라도 그는 부상당한 상대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는 듯 했다. "실수를 하도 많이 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소." "철사담(鐵獅膽)이라는 아이를 아느냐?" "모르오." "기마봉에서 만나지 않았더냐?" "기마봉에서 철혈마단과 싸운 것은 맞지만 누구를 말하는지는 모르 겠소." "금빛 갑주(甲胄)를 걸치고 있었다." "아, 그녀석 말이구려." 을지호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처구니없는 놈이었소. 괴상한 차림새 하며 그다지 뛰어날 것 없 는 무공 실력을 지니고도 무슨 배짱으로 그리 날뛰는 것인지. 결국 눈 에 화살 하나를 장식하고서야 물러났소." 낙청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바로 단주의 손자다." "아하!" 비로소 그때의 의문을 해결한 을지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 래살래 내저었다. "그래서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날뛰던 놈들이 서둘러 물러났군." "네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 들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소?" "철사담 본인이. 아니냐?" "내가 손을 썼으면 지금껏 살아 있지도 못하오." 을지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낙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삼시파천이란 명성을 얻는 자가 실수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단주의 명을 받은 사람들. 어디 실력이나 한번 보자꾸 나." 그의 시선이 태세적을 향했다. "타핫!!" 기다렸다는 듯 우렁찬 함성과 함께 무섭도록 예리한 태세적의 공격 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낫을 쇠사슬에 연결하여 무기로 쓰는 그는 살짝 몸을 숙이 며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천 일을 갈아 날을 세운 낫이 땅바닥을 스 치듯 미끄러지며 발목을 노려왔다. 그 기세가 얼마나 빠르고 강맹했는 지 미처 이르지 않았는데도 을지호는 그 예기(銳氣)에 살이 저미는 고 통을 느꼈다. 을지호는 침착히 철궁을 들어 낫을 찍어 눌렀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빠르면 발목이 어찌 될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건만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바로 그때 태세적의 손목이 살짝 튕겨지고 발목을 노리며 날아들던 낫이 갑자기 위로 솟구쳤다. 낫이 노리는 것은 철궁을 잡고 있는 팔이 엇다. 하지만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을지호는 재빨리 철궁을 비 틀어 낫을 막고 그 탄력을 이용해 뒤쪽으로 접근해 오는 마불에게 발 길질을 했다. "헛!" 그런 반격을 에상치 못한 마불이 헛바람을 내뱉으며 뒷걸음질쳤다. 하나 그 와중에도 목에 걸고 있던 염주(念珠)를 암기 삼아 뿌리는 것 을 잊지 않았다. 파파팍! 허공에 뿌려진 염주 하나하나가 가공할 암기가 되어 팔방(八方)을 점하며 들이닥쳤다. 때를 같이하여 잠시 방향을 잃었던 태세적의 낫이 기묘하게 흔들리며 날아오고 음양쌍귀 형제의 강맹한 장력(掌力)도 힘 을 보탰다. 위기였다. '제발 버텨주기를.' 피하는 것은 늦었다고 생각한 을지호가 가슴 어귀로 철궁을 끌어당 겼다. 그리고 느릿느릿 회전을 시켰다. 철궁에서 기묘한 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철궁을 휘감고, 철궁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팔과 몸을 휘감 았다. 힘이 드는지 이를 악물고 있는 그의 코에선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 다. 입가에도 선혈이 비쳤다. 그의 몸이 철궁에서 일어난 기세에 동화되는 순간 그를 향하던 공격 이 일시에 들이닥쳤다. 꽈꽈꽈꽝! 그렇지 않아도 폐허로 변한 주변에 또다시 일진광풍(一陳狂風)이 몰 아쳤다. 미친 듯이 하늘로 치솟는 흙먼지로 인해 주변은 아무것도 보 이지 않았다. 스스슷. 공기를 가르는 나직한 소성이 들린 것은 먼지가 미처 가라앉기도 전 이었다. "위험하네!!" 안력(眼力)을 돋우어 상황을 살피던 낙청이 마불의 위기를 보며 기 겁해 소리쳤다. 마불도 상황이 위급함을 알고는 있었다. 문제는 알고서도 피하지 못 한다는 것. "크으윽!" 마불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나며 비대한 몸이 허무하게 무너졌 다. "이놈!" 지금껏 수수방관하던 낙청이 노기탱천하여 거무튀튀한 도를 휘둘렀 다. 파파팟ㅡ 예리한 기운이 먼지를 가르며 마불의 심장을 반으로 가른 을지호를 노리며 날아갔다.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는 최고의 수비 초식 무애지검(無愛之 劍)으로 오대봉공의 합공을 막고 출행랑과 더불어 가공할 쾌검인 무심 지검을 사용하여 마불을 단숨에 잠재운 을지호는 있는 힘껏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한줄기 검기가 그의 발끝을 스치며 지나갔다. 하지만 뒤쪽에서 접근한, 아무런 소리도 없고 살기도 느껴지지 않 는, 게다가 절묘하게 때를 맞춰 날아든 장력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크으윽!" 허공에서 장력에 적중당한 을지호가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고통의 신음성을 내뱉었다. 균형을 잃은 몸은 날개 잃은 새인 양 바닥으로 추 락했다. 이 참에 아예 끝장을 내겠다는 듯 공격에 성공한 음양쌍귀와 테세적 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멀리서 그 모양을 보던 철혈마단의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땅바닥에 추락하기 직전 철궁을 땅에 대고 몸을 한 바퀴 돌려 착지 를 한 을지호는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곧게 펴진 철궁을 휘며 친친 감 아두었던 시위를 재빨리 풀어 연결했다. '젠장.'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간신히 제어했던 기혈이 날뛰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고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궁을 잡은 손과 시위를 당기 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옆구리에 적중한 장력에 의해 적어도 대여섯 대의 갈비뼈가 부러진 듯했다. 그중 한 대가 폐를 찔렀는지 숨조차 쉬 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을지호는 혀를 깨물어 자꾸만 약해지는 정신을 일깨우고 한 줌도 남 지 않은 내공을 이용해 무위공(無爲功)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하에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신공 무위공이라도 그 짧은 시간에 내상을 치유하고 내공을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그가 원한 것은 무위공을 이용해 몸 안에 내재된 선천진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을지호는 전신에 힘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며 끝까지 시위를 당겼 다. 그의 전신에서 일어난 불꽃이 철궁과 그의 몸을 화염으로 뒤덮었 다. 언젠가 오룡지회에서 보여준 적이 있는 모습. 그런데 뭔가가 달랐 다. 그때는 활활 타오르는 화살이 형상화가 되어 나타났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당겨졌던 시위가 제자리를 찾고 네 발의 무영 시가 각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한데 묘한 것이 방향이 전혀 엉뚱하 다는 것이었다. 어느 것은 하늘로 치솟고 어느 것은 땅바닥을 기듯이 날아갔다. 그렇지만 을지호가 누구던가! 궁귀의 후예요 삼시파천이라 명성을 날리고 있는 궁술의 귀재(鬼才)였다. 그를 공격하던 이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침착히 화살, 아니, 화 살이라 여겨지는 기운에 대비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엉뚱한 곳을 향하 던 화살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잔재주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탁한 음성으로 호통을 친 태세적이 낫을 휘둘러 무영시를 막아냈다. 낙청은 물론이고 음양쌍귀도 비교적 손쉽게 무영시를 막았다. '응?' 뭔가가 이상했다. 을지호가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 하더라도 무영시였다. 귀에 못이 박 히도록 들었던 무영시의 위력을 생각했을 때 너무나 쉽게 막힌 감이 있었다. '서, 설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낙청이 황급히 을지호를 살폈다. 그리고 그는 상대의 진짜 공격을 볼 수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하나의 화살. 화살에 불이 붙은 것인지 아니면 불꽃이 화살을 만든 것인지 모르겠 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은 순식간에 수십, 수백의 잔상(殘像)을 만들며 날아들었다. 그중 진짜는 단 넷. "이, 이게 뭐야!" 태세적이 기겁하며 낫을 휘두르고 음양쌍귀 역시 미친 듯이 장력을 날리며 화살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낙청만이 정중동(靜中動) 의 자세로 도를 치켜세우며 수많은 잔상에서 진정한 화살을 찾고자 애 썼다. "윽!"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태세적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 다. 그는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구멍이 뚫린 허벅지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나마도 재빨리 몸을 틀엇기에 망정이 지 하마터면 단전(丹田)에 적중당할 뻔한 상황이었다. "위, 위험!" "크헉!" 음양쌍귀의 입에서도 황급한 외침과 함께 비명성이 흘러나왔다. 형 인 뇌격이 반쯤 으깨진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동생인 뇌온은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왼쪽 가슴을 파고든 화살은 그의 생명을 찰나지간에 빼앗아 가버렸다. 거기까지였다. 온 세상을 불꽃으로 뒤덮으려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 로 날아들던 화살의 잔상은 뇌온의 죽음과 함께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직도 여파가 남았는지 주변은 뿌연 먼지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충돌의 결과는 확연했다. 을지호가 준비하 최후의 한 수로 인해 태세적과 뇌격이 꽤나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뇌온이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낙청만이 그의 공격을 피했는데 그 역시 쉽지 않았는지 그 짧은 시간에도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반면에 선천진기까지 끌어올려 공격을 했던 을지호의 모습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시야를 가로막았던 먼지들이 사그라들었음에도 그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묵묵히 고개를 들어 맞은편 숲을 바 라보는 낙청의 눈빛이 실로 예사롭지 않았다. '놈, 과연 대단했다. 하나 살아나지는 못할 것이다.' 사마유선은 정신없이 내달렸다. 길도 아닌 곳을 헤치며 달리느라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덩굴이 발목을 잡았어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하아, 하아." 숨소리는 거칠었다. "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어요. 버틸 수 있죠?" 대답을 듣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신음 소리 한 번 내뱉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아무런 대꾸가 없자 그녀는 치미는 불안감에 어 쩔줄을 몰라 했다. 당장에라도 걸음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 추격자들에게 꼬리 를 밟힐지 몰랐다. 충분히 따돌린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안심할 단계 는 아니었다. 그녀는 애써 불안감을 잊으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힘을 내요. 절대로, 절대로 죽으면 안 돼요.'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눈가가 또다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선천진기까지 짜낸 공격으로 오대봉공을 물리칠 수는 있었으나 을 지호가 입은 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음양쌍귀의 장력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양쪽 허벅지를 훑고 지나간 낙청의 검기로 인해 하마터면 다리를 잃을 뻔했 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도주하라는 을지호의 말에도 차마 혼자 떠나지 못하고 되돌아온 사 마유선이 정신을 잃고 비틀거리는 그의 신형을 업고 달리기 시작할 때 낙청의 손을 떠난 단검이 먼지를 뚫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앞 만 보고 달리느라 정신이 없었던 사마유선은 단검이 날아온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을지호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철왕이었다. 단검이 을지호의 등에 막 꽂히려는 찰나 주인의 위기를 눈치채고 날 아온 철왕이 날개를 활짝 펴서 단검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철왕의 몸이 단단하여도 낙청 정도의 고수가 한껏 힘을 실어 던진 단 검을 완벽하게 쳐낼 수는 없었다. 단숨에 날개를 찢어발긴 단검이 을지호의 등을 꿰뚫었다. 그러나 애 초 심장을 노렸던 단검은 심장을 살짝 빗겨나 왼쪽 어깻죽지와 심장 사이의 좁은 틈에 깊숙이 박혔다. 철왕의 필사적인 날갯짓에 단검의 방향이 살짝 틀어진 것이었다. 철왕의 입에서 터진 울부짖음을 듣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사마유선은 치미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힘없이 땅에 처박힌 철왕을 품에 안았 다. 그리고 을지호의 등에 박힌 단검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도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도망치기를 꼬박 이틀. 휴식은 고사하고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한 상태로 전력을 다해 도 망치고 있던 그녀는 탈진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털썩 주저앉아 달콤한 휴식을 맛보고 싶은 유 혹이 절로 치솟을 정도로 너무나 힘들었다. 하나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에겐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만 벗어나면 된다.' 운무에 싸여 신령스런 기운을 품고 있는 봉우리가 그녀의 가슴에 한 줄기 희망을 심어주었다. 지금 그녀가 넘고 있는 봉우리는 대파산맥의 마지막 자락이라 할 수 있는 무산(巫山), 그리고 무산을 넘으면 바로 장강이었다. * * * 산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야트막한 언덕을 바삐 넘는 세 명의 사내가 있었다. 문사풍의 중년 사내와 그를 호위하듯 양 옆에서 걷는 두 명의 청년. 그다지 먼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닌지 등에 매달린 봇짐은 단출했는 데. 그들은 다름 아닌 온설화와의 비밀스런 만남을 끝내고 세가로 돌 아가는 제갈은 일행이었다. "휴~ 어디 아무 데서나 조금 쉬었다 가자꾸나." 패천궁의 강남 총타에서 떠나온 지도 벌써 두 시진이 지났다. 그동 안 한 번의 휴식도 갖지 못했던 제갈은이 다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 했다. "예. 숙부님." 그렇잖아도 숙부의 호흡이 거칠어진다고 여긴 제갈소우(諸葛蘇旴)가 재빨리 대답을 하고는 장정 열댓 명은 충분히 쉬어갈 만큼 넉넉한 그 늘을 만들고 있는 소나무로 제갈은을 안내했다. 그사이 봇짐을 푼 제 갈촌(諸葛忖)이 간단한 요깃거리와 물을 풀어놓았다. "드시지요." "고맙구나." 타는 듯한 갈증에 목말랐던 제갈은은 사양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너희들만 고생이다. 쯧쯧, 혼자 와도 되는 길을 형님의 고집 때문에......" 물주머니 하나를 단숨에 비워 버린 제갈은이 멋쩍은 미소를 띠며 말 했다. 애당초 그는 홀로 온설화를 만나고자 하였다. 하나 때가 어는 때인 가? 며칠 전만 해도 흑백대전이 한참이었고 지금은 사천이 준동하여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무림이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허락할 수 없다고 방방 뛴 제갈융은 반드시 온설 화를 만나야 한다는 제갈은의 말에 스무 명의 호위 무사를 데려간다는 조건으로 마지못해 허락을 하였다. 결국엔 제갈소우와 제갈촌으로 줄 어들기는 하였지만. "아닙니다. 숙부님. 오히려 영광입니다." 제갈소우와 제갈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제 갈가의 청년들에게 무성 제갈능과 문성 제갈은은 가히 우상과도 같은, 그저 가까이 모시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떨리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 런 존재였다. "이런, 어른을 놀리면 못 쓰는 법이다. 아무튼 갈 길이 멀구나. 그 만 일어나자." "조금 더 쉬시는 것이......" 제갈촌이 제갈은이 건네는 물주머니를 받으며 말했다. "아니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 야." 순간, 제갈소우와 제갈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평소의 제갈은은 하늘이 무너져도 '허허' 웃고 말 인물이었다. 한데 두 시진을 달려와 고작 반 가도 쉬지 못하고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더구나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고 했다. 제갈은이 촌 각을 다투어야 할 일이라면 그것은 곧 하늘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힘주어 대답한 제갈소우가 앞장을 서고 제갈은이 그 뒤를 따랐다. 재빨리 봇짐을 꾸린 제갈촌도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바로 그때, 그들이 지나온 깅를 따라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제갈촌이 재빨리 검을 꺼내 들고, 걸음을 멈춘 제갈소우도 잔뜩 긴 장한 표정으로 제갈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오른손은 이미 검의 손잡이에 놓여 있었다. "잠시 길을 멈추게나!" 단숨에 거리를 좁힌 반백의 노인이 소리쳤다. 꽤나 오랫동안 달려왔 는지 옷에선 먼지가 풀풀 풍겼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마엔 땀방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선배께서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히 달려오셨습니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제갈은이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군사가 못다 한 말이 있다 하여 그 말을 전하러 왔네." "아, 그렇군요. 한데 무슨 말씀이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께서 직접 달려오신 겁니까?" 제갈은이 아는 한 노인은 고작 심부름 따위나 할 인물이 아니었다. 패천궁의 호법이란 지위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듯 손수 달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중한 소식이라는 의미. 공손히 묻는 질문에 절로 긴장감이 깃들었다. "내용은 나도 모르네. 다만 중요한 것이라면서 서찰을 전해주더군. 아무도 모르게 전해주어야 한다면서." 제갈은의 안색이 급변했다. 노인조차 모르게 전할 소식이 대체 뭐란 말인가. 단언컨대 오직 중 천에 대한 일 뿐이리라! 노인이 단단히 밀봉이 된 봉투를 내밀었다. 제갈은이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하나 그보다는 제갈촌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제갈은을 호위하는 입장에서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나 어찌 보 면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것을 대변이라도 하듯 노인의 짙은 눈썹이 하나로 모아졌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구나." 제갈은이 눈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갈촌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갈소우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위험해!!" 그러나 그의 경고는 늦은 감이 있었다. 그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 섬 전과도 같은 노인의 우수가 제갈촌의 목을 틀어쥐었다. "크으윽!" 목을 제압당한 제갈촌은 전신의 힘이 삽시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 꼈다. 노인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기는 했지만 그의 노 력은 어린아이의 몸짓만도 못했다. "손을 놓아랏!"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휘두르며 달려온 제갈소우가 노인의 손을 향 해 가공할 기세로 검을 내려쳤다. 하나 노인이 슬쩍 손을 잡아당기자 검의 동선엔 목표로 한 노인의 손은 사라지고 되려 제갈촌의 머리가 노출되었다. "젠장!" 기겁한 제갈소우가 검을 거둬들이자 당연히 그럴줄 알았다는 듯 음 산한 미소를 지은 노인이 뒷걸음질치는 그를 향해 좌수를 슬며시 뻗어 한줄기 음유(陰柔)한 장력을 발출했다. "컥!" 별 것 아닌 것 같은 단순한 동작에 어찌나 빠르고 은밀하며 강맹한 힘이 실려 있는지 장력에 가슴을 격타당한 제갈소우는 허공으로 한 장 높이나 튀어 오르며 피를 토했다. "소우야!" 재빨리 달려간 제갈은이 그의 신형을 안아 들었다. "위, 위험하... 웩!" 제갈소우가 또다시 피를 토했다. 검붉은 피와 함께 섞여 나온 살점 들은 틀림없이 잘게 부서진 내장 조각들. 회생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소우야! 힘을 내거라. 정신 차려!" 제갈은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그러나 힘없이 눈을 감은 제갈소우는 더 이상 숙부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뚜뚝. 절로 소름을 돋게 만드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제갈소우의 죽음에 망연자실하고 있던 제갈은은 귓가로 파고드는 파열음에 본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안 돼.'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목뼈가 부러져 축 늘어진 제갈촌의 모습과 양손을 툭툭 털며 사이한 미소를 짓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너... 마저." 얼마나 놀라고 고통스러웠으면 눈도 감지 못했을까? 부릅뜬 눈에서 조카의 슬픔과 분노를 읽은 제갈은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눈을 감고 말았다. 양쪽 눈꼬리에서 굵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니 너무 애통해하지는 마라." "......" 아무런 대꾸도 없이 굳게 눈을 감고 있는 제갈은을 보며 노인은 그 가 목숨을 포기했다고 여겼다. "고통없이 보내주마." 그러나 그는 미처 한 발을 내딛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눈을 뜬 제갈은과 두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중천이오?" 조금 전까지 슬픔에 잠겼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결코 믿 을 수 없는, 너무도 담담하여 오히려 부담스러운 음성에 노인은 자신 도 모르게 위축감을 느꼈다. 무엇이든 한쪽 방면에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선 뭔가 알 수 없는 힘 이 있는 법. 비록 무공 쪽은 문외한이지만 학문에서만큼은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성취를 이룬 제갈은의 기도는 일대종사에 못지않았 다. '과연, 문성이란 말이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상대에게 위축되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하나 노인은 조카들의 죽음을 보았고 또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서도 그토록 태연하게 묻는 제갈은에 게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어찌 알았느냐? 군사의 명일 수도 있거늘." "간단한 이치. 패천궁, 아니 내가 아는 온 군사는 이따위 치졸한 짓 을 할 사람이 아니오. 궁주가 명을 내렸다고 해도 목숨을 걸고 막을 사람이고." "그도 그렇구나." "그나저나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려면 꽤나 고생을 했을 터. 너무 쉽 게 정체를 드러낸 것 아니오? 내가 죽은 것을 알면 온 군사가 직접 조 사를 할 것이고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텐데." 노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너희들이 너무 깊숙한 곳까지 접근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소. 도대체 그 비밀이 언제까지 지속되리 라 보았소?" "언젠가는 다들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노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가 죽음으로써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질 것이오." "과연 그럴까? 그때쯤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 제갈은은 말없이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로구나. 수백 년을 음지에서 살아 온 이들이 아니더냐. 패천궁이 아니라 더한 문파에도 간세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했어야 했다. 최소한의 주의는 했어야 했거늘. 제갈은아, 제갈은아! 너의 자만이 조카들의 죽음을 불렀구나. 아니, 어쩌면 오대 세가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음이니. 죽음보다 귀중한 정보를 전하지 못하다니 이를 어이한단 말이냐!' 제갈은의 입에서 깊은 탄식성이 흘러나왔다. "조카들이 기다린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는지 노인이 손을 뻗 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 고 움직였겠지만 그가 노인의 손속을 피한다는 것은 장강에 빠진 바늘 을 찾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신이여.'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제갈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42장 소림사(少林寺) 산동성 태안의 황보세가. 주변을 아우르는 담벼락만 하더라도 팔 리요, 평소 상주하는 인원만 육백이 넘는 대무가(大武家)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활짝 열려 있더 정문도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을 지키는 문이들도 평소보 다 서너 배는 증가한 듯했다. 그리고 집의전엔 황보세가는 물론이고 팽가, 당가, 악가의 가주와 종남파와 화산파 등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소림과 개방의 무인들을 제외 하고 북천의 남하를 막기 위해 모인 여러 문파의 수뇌들이 한데 모여 긴장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숙의(熟議)에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말이냐?" 중앙에 앉아 있는 황보장이 물었다. "예. 아버님. 비성(肥城)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흠, 벌써 이틀째인데... 혹 우리가 놓치고 있는 움직임이라도 있는 것은 아니더냐?" 거듭되는 물음에 황보윤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비성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까지 샅샅이 살피고 있습니다. 놈들은 당성무관(當城武館)을 점령한 이후 일체의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뭔가 꿍꿍이속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천 본가에 닥친 비극을 듣고도 직접 움직이지 않은 채 당무혼을 대신 보내고 황보세가로 달려온 당욱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보윤의 안색도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분명 뭔가가 있겠지요. 하나 지금까지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차라리 선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보다 못한 팽무쌍이 물었다. 일전, 동방성과의 싸움에서 큰 부상을 당한 그는 아직도 회복을 하지 못했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그것은 좋지 않다. 함정을 파고 기다릴 수도 있어. 어쩌면 놈들이 바라는 것이 그것인지도 모르고." 팽가의 전대 가주 팽만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북천의 위세가 아무리 하늘을 찌른다 하여도 세가를 버리고 몸을 피 한 것은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식솔들과 함께 황보세가로 몸 을 피한 그는 며칠 만에 십 년은 더 늙은 듯했다. 팽무쌍이 입을 다물고 물러나자 종남파의 장문인 오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놈들에게 당한 문파와 크고 작은 무관들이 벌써 백여 곳에 이르고 자칫 이런 식으로 싸움이 고착되다 보면 하북을 놈들에게 넘겨줄 수도 있습니다. 장강 이남을 패천궁에게 넘겨준 것처럼." 오상의 지적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이어 화산파의 제 자들을 이끌고 달려온 곽화월이 의견에 힘을 실었다. "오 장문인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렇듯 대치만 하고 있다간 놈들이 원하는 대로 계속 끌려만 다닐 것 같습니 다." "하면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황보장이 정중히 되물었다. "선공이 최선일 것입니다." 분명 곽화월에게 한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오상에게서 들려왔다. 하 지만 오상의 급한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그들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 았다. "함정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소이다." "함정이라면 그때 가서 적절히 대처하면 된다고 봅니다. 일단 부딪 쳐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상은 선공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갑론을박(甲論乙駁)은 이후에도 한참을 계속되었다. 조금 더 신중하자는 의견과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 선공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소림과 개방의 무인들이 도착한 이후 다시 논의하기로 결정하 였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지어졌습니까?" "별거없었다. 서로 떠들어대기만 했지 제대로 의견을 모은 것은 아 무 것도 없었어. 그건 그렇고... 흠." 건성건성 대답을 하며 서찰을 읽는 중년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약간의 안도감과 더불어 감탄이 뒤섞인 탄성이 뒤를 이었 다. "어느 정도 쫓아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과연 제갈세가라 해야 하 는가?" "설마... 발각된 것입니까?" 서찰의 내용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 사부 신도의 명으로 문주의 곁 을 지키고 있는 부설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일단 급한 불은 끈 듯하구나. 하지만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패천궁 어린아이의 능력도 생각 외로 뛰어난 듯하고." 지금껏 온설화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서찰을 건넸다. 찬찬히 서찰을 살피던 부설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거기엔 제갈은과 온설화가 은밀히 나눈 말이 너무도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닙니까?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했다지 만 제갈은이 알고 있다는 것은 제갈세가가 모든 조사를 마쳤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은 아니다. 의심은 하고 있으나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어. 제 갈세가나 패천궁 모두."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특단을 내리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특단이라......" 문주는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부설의 눈빛을 슬쩍 외면한 채 모락모 락 피어나는 용정차(龍井茶)의 향을 음미했다. "좋은 향이야. 너도 한잔하거라." "괜찮습니다." "사양 말고 들어. 혼자 음미하기엔 아까운 향이다." "가, 감사합니다." 엉거주춤 찻잔을 받아 든 부설은 용정차를 마치 술잔 비우듯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뭔가 기묘한 향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향 따위를 음미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쯧쯧, 서둘기는... 누가 보면 죄짓고 쫓기는 놈인 줄 알겠다."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 마시든 네 자유니까 죄송할 것은 없고, 그나저나 시작했을 까?" 질문을 던지는 문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무슨 말씀이신지?" 부설이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공손히 되물었다. 그러자 문주 는 빙글빙글 돌리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상체를 약간 뒤로 뉘었다. "북천 말이다." 그제야 질문의 요지를 이해한 부성리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부의 계산대로라면 곧 시작될 것입니다. 어쩌면 벌써 시작되었는 지도 모르지요." "무너지겠지?" "무너집니다. 제아무리 소림사라 하더라도 한빙곡의 거센 힘은 버틸 수가 없습니다." 부설이 단언하듯 대답했다. "그래도 소림이다. 그 저력을 알 수 없는 소림." "소림의 정신적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수호신승이 존재하지 않는 하, 또 황보세가를 돕기 위해 정예가 빠진 이상 한빙곡과 흑룡문의 힘 을 감당하지는 못합니다." 부설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소림이 벌 써 무너져 북천에 무릎을 꿇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소림이 한 빙곡을 막지 못한다는 것은 문주 또한 알고 있었다. "시선을 이곳으로 돌리고 소림을 친다. 따지고 보면 꽤나 괜찮은 판 단이었어. 결국 선수를 친 셈인데......" 북천이 무엇 때문에 서둘러 소림사를 치는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주먹을 쥐어 턱을 괴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패이고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북천에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에서인지 다소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부설은 다른 의미에서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문주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어떤 큰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 반 각의 시간이 흐르고 감겼던 문주의 눈이 살짝 떠졌다. 벌떡 일어난 부설이 하명을 기다렸다. 신도가 보내온 서찰에 힐끗 시선을 던진 문주가 말했다. "제갈세가와 패천궁이 눈치를 챘다고 하니 더 이상 기다리는 것도 무리겠다. 어차피 우리의 실력을 보여줄 때도 된 것 같고. 그래, 준비 는 끝냈느냐?" "이곳에 칠십. 그리고 은밀히 몸을 숨긴 정예 삼백이 문주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비 병력은?" "사부의 전언에 따르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문주님의 명만을 기다 리신다 합니다." 문주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면 공격의 때는 언제입니까?" 긴장에서 오는 떨림이지 아니면 마침내 웅지를 펴고 비상을 하게 되 었다는 흥분 때문인지 질문을 하는 부설의 음성이 격하게 떨렸다. "네 말대로 소림은 얼마 버티지 못한다. 그리고 소림이 지닌 위상과 상징성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어찌 행동할지는 뻔한 일. 아직까지 행동 을 결정하지 못하고 갑론을박하고 있으나 모르긴 몰라도 그 즉시 소림 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이곳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나 소림을 구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이곳의 전력은 최소 반으로 줄어든다." "그때 치는 겁니까?" 황급히 되묻는 부설. 문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 었다. "그 정도 병력이면 대치하고 있는 북천의 인원들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또한 떠나기 전 우리가 살짝 도움을 준다면 더욱 쉬운 싸움 이 되겠지." "하오면?" "우리는 소림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정예를 친다. 싸움은... 그래, 한빙곡주에게 응원을 나오라고 하려면 개봉 정도가 좋겠군. 이 참에 개방까지 쓸어버리면 될 테니까. 비성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에게도 적 당히 시간을 맞춰 공격하라고 해. 다짜고짜 쳐들어오지 말고. 일단 그 렇게 알고 준비를 갖춰라." "존명!"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대답한 부설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서자 문 주는 빈 찻잔에 약간은 미지근해진 용정차를 따랐다. 뜨거운 열기는 없었으나 향은 여전했다. "후후, 이제 소림이 무너졌다는 소식만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그나 저나 아쉽군. 수호신승과의 멋진 재대결을 기대했는데 아직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듯하니." * * * 약사전(藥師殿). 소실산(少室山) 북쪽 기슭에 위치한 소림사와는 달리 맞은편 태실산 (太室山)의 중턱에 한가로이 자리한 이곳은 불쌍한 중생을 병과 재난 으로부터 구해준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신 곳이었다. 같은 의미 로 약사전은 소림사 승려의 모든 건강을 책임지는 중요한 장소였다.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십여 개의 병사(病舍)엔 몸이 불편한 환자 들 몇몇이 있었지만 다들 가벼운 병증을 지니고 있음인지 누구 하나 어두운 기색이 없었다. 또한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빈 병 사에서 약초 구별법을 배우는 어린 동자승과 그들을 지도하는 중년 스 님의 웃음이 약사전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고 밝음{明}이 있으면 어둠{暗} 이 있는 법. 약사전 내 가장 조용하고 깊은, 약사전주가 거주하는 불심각(佛心 閣) 바로 옆 병사엔 깊은 수심이 내려앉아 있었다. "후~ 아직도 차도가 없으신 겝니까?"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미약하게 가슴을 들썩이고 있는 환자를 보며 소림 방장 공선 대사(空宣大師)의 안색은 깊은 안타 까움과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약사전주 공양(空楊)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네. 뚜렷한 회복세는 아니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차 도가 보이는 것 같네." 일순 약사전에 모인 이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지객원의 원주 공은(空恩)이 기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내가 방장 사제 앞에서 농이라도 한다는 것이냐?" 기본적으로 의원이 지녀야 하는 것은 따뜻한 마음과 환자와 보호자 를 안심시키고 믿음을 줄 수 있는 부드러운 태도이다. 그런데 약사전 주 공양은 인자해 보이는 얼굴과는 전혀 딴판으로 말투가 차갑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함께 보내온 공선이나 공은 등에게 그런 차 가운 말투나 쌀쌀맞은 태도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럼 언제쯤 완전히 회복하실 수 있는지요?" 공은과 마찬가지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 공선 대사가 물었다. "그것은 나도 장담 못하네. 솔직히 이만큼이나 차도가 있으신 것도 신승께서 스스로 치유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네. 그 냥 곁을 지켜 드렸을 뿐."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여 신승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일까? 공양의 얼굴에서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그가 수호신승을 구하 기 위해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정확히 삼 년 하고도 육 개월 전. 소림에는 그야말로 청천벽력(靑天 霹靂)과도 같은 날벼락이 떨어졌다. 산책을 하러 산에 오른 수호신승(守護神僧)이 말 그대로 시체가 되 어 돌아온 것이다. 만약 오랜 시간이 되어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기 위해 제자들이 산에 오르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천만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제자들의 등에 실려 약사전으로 온 수호신승의 상세를 살핀 공양은 한참 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신에 무수히 많은 검상은 치료할 수 있었다. 몸 이곳저곳에 입은 골절상(骨折傷)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완치가 가 능했다. 심각한 것은 내상이었다.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이탈했고 기경팔맥 (奇經八脈)이 큰 손상을 입어 구심점을 잃은 진기가 마구 요동쳤다. 거기에 극독에 중독된 현상도 있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단전에서 일어난 웅혼(雄渾)한 기운이 심맥(心脈)을 보호하며 필사적으로 대항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수 호신승의 목숨은 이미 끊어졌을 것이다. 수호신승의 상태를 전해 들은 많은 고승(高僧)들이 자신들의 내공으 로 내상을 치유하겠다고 나섰으나 공양은 허락되지 않았다. 수호신승 의 몸은 외부에서 들어간 힘과 내부에서 일어난 힘이 너무도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힘으로 외부의 힘을 몰아내면 다행이겠으나 오히려 팽팽한 힘의 균형을 깨뜨리고 말 뿐이라면 어던 결과를 가져올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소환단(小丸丹) 몇 알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것도 극도의 주의를 요하는 일이었지만. 공양은 우선 외부에 드러난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전념했다. 부러진 뼈에 호랑이 뼈를 정제해 만든 접골제(接骨劑)를 바르고 독상으로 부 패하기 시작한 상처도 약사전에 대대로 내려오는 소림비방(少林秘方) 을 이용해 깨끗하게 치유했다. 그러나 내상은 감히 손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삼 년여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아미타불! 미약하나마 차도가 있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지요. 사 형께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좀 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네. 신승께서 스스 로 치유하신 걸세." 끝까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 고집불통 사형을 보며 공선 대사 의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맺혔다. "그나저나 방장의 안색이 말이 아니네. 무림에 닥친 우환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겠지?"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후~ 대환단(大丸丹)만 빨리 만들 수 있어도 신승께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고 무림의 우환도 덜 수 있을 터인데. 힘들게 재료를 모으고 연단(鍊丹)을 한다 해도 앞으로도 최소한 몇 년은 더 걸릴 터이니..." 사실 수호신승의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 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수호신승의 몸 안에서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기운 을 압도할 만한 고수가 진기를 불어넣어 팽팽하게 대치하는 기운을 억 제하고 진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상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대로 선대가 후대에게 내공을 전수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수호신 승은 천하에 짝을 찾을 수 없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버금가는 내공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대치하고 있는 기운까지 아우르려면 실로 엄청난 내공이 필요했다. 또한 그만한 힘을 몸이 견디어 내려면 최소한의 기운은 지니고 있어 야 했다. 극도로 약해진 몸은 대해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기운을 감당 하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 분명한 터, 약의 힘을 빌려 약해진 몸 을 회복시키고 강맹한 기운을 이겨낼 힘을 북돋게 해야 했다. 하나 웬만한 약으로는 그만한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있다면 오직 대환단뿐이었다. 문제는 소림사에 단 하나의 대환단도 남아 있지 않다 는 데 있었다. 첫 번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내공 문제는 노승들이 격체전공을 이 용하면 극복이 가능했다. 그러나 대환단만큼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 가 불가능했다. 오직 만드는 방법뿐이었다. 공양은 그날부터 대환단을 만드는 조제법을 알기 위해 오천 권도 넘 는 약사전의 의약서(醫藥書)를 일일이 독파했다. 그것도 부족해 장경 각까지 이 잡듯이 뒤진 끝에 하나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의지해 지금까지도 대환단 제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 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지만. 공양의 초조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공선 대사가 담담한 어 조로 입을 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소환단만 하더라도 얻기가 극히 힘들거 늘 하물며 대환단입니다. 언젠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처음 일곱 알의 대환단을 얻기 위해 공들인 시간이 무려 삼십 년이라 하셨습니 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그건 그렇네만......" "사형께선 반드시 대환단을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그것을 복용하시 고 신승께서도 자리를 털고 쾌차하시겠지요. 소승은 그리 믿고 있습니 다." "후~ 방장 사제가 이토록 믿어주니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힘이 나는군. 알았네. 내 미력하나마 더욱 노력을 하겠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건 그 렇고......" 입가에 미소를 짓던 공선 대사가 고개를 돌려 금강당(金剛堂)의 당 주 공능(空陵)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 잠시 잊고 있었네. 그래, 나한당주(羅漢堂主)에게서 연락이 왔 는가?" "예. 지난밤 양산(梁山)에 머물렀다고 하니까 지금쯤 거의 도착했을 겁니다." 공능이 공손히 대답했다. "허, 벌서 그렇게나 움직였단 말인가? 나한당주가 꽤나 서두른 모양 이네." 공은이 탄성을 내뱉자 곁에 있던 계율원주(戒律院主)가 빙그레 웃음 을 지었다. "급한 성격이 어디 가겠습니까? 그 사부에 그 제자겠지요. 아니 그 런가?" 계율원주의 짓궂은 물음에 공능의 낯빛이 다소 붉게 물들었다. "사안이 급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천하의 나한당주가 아니면 그렇게 빨리 움직 일 수는 없었을 것이네. 그러고 보면 그를 보낸 것은 참으로 잘한 일 입니다, 방장 사형." 계속되는 계율원주의 농에 방장인 공선 대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서둘러 도착한 것은 다행한 일이나 한편으론 걱정이네. 얼마나 많 은 제자들이 피를 흘리게 될지. 또 무림에 몰아치는 이 겁난(劫亂)이 언제쯤이나 끝날 것인지." "아미타불!" 모두들 숙연히 불호를 외웠다. "그럼 말씀들 나누게나." 좌중의 대화가 무림의 중대사로 넘어가자 공양은 자신이 상관할 바 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인지 방문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살피던 공선 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도맹 쪽에선 연락이 왔는가?" "예. 공각 사형이 매일같이 연락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래, 전황이 어떻다고 하던가?" 공은 대사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다지 좋지는 않아 보입니다. 서천의 동진을 막기 위해 대파산에 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는 있으나 밀리는 기색이 역력하답니다. 시신 을 실은 수레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간다 하였습니다." "아미타불!" 공선 대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불호를 외웠다. "무당과 정도맹에선 어찌하고 있다던가?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 하 던가?" 조금 전까지 농을 하던 계율원주의 음성이 싸늘했다. 그는 중천을 핑계로 움직이지 않는 무당과 정도맹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흥.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일 심사인 모양이군. 뭔가 다른 뜻 이 있지 않고서야......" "그만 하게, 공문(空門). 말이 너무 지나치군. 그들도 나름대로 고 충이 있겠지." 보리원의 원주 공청(空靑)이 차분한 어조로 공문을 말렸다. "하지만......" 뭐라 반박하려는 공문. 하나 그의 음성은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음에 막혀 멈춰졌다. 쿵쿵쿵!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질 정도로 요란스레 달려오는 발소리에 공선과 공청을 제외한 모든 이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꽝!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좌우로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스물한 두 살이나 먹었을 것 같은 청년승이었다. "사조(師組)님!" 청년승이 공능을 향해 소리쳤다. "정인(正忍),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이리도 함부로 소란을 피운 단 말이냐!" 그렇지 않아도 이런 소란을 떠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 단단히 버릇을 고쳐 주겠다고 마음머고 있던 공능은 그 주인공이 자신의 직계사손(師 孫)이자 불같이 화를 냈다. "따라 나오너라!" 당장 밖으로 끌어내려는 듯 벌떡 몸을 일으키는 공능, 그의 허리춤 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잠깐 기다리게나." 다름 아닌 약사전. 그것도 수호신승이 누워 있는 곳이었다. 나이 어 린 제자들은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고 수염이 허옇게 물든 노승도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뱉지 못하는 곳. 그럼에도 이토 록 급히 달려온 것이라면 분명 뭔 일이 터져도 터진 것이리라. "무슨 일이냐?" 공은 대사가 황급히 물었다. "저, 적이......" 어찌나 급히 달려왔는지 정인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신히 내뱉은 그의 한마디에 좌중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았 다. "적이라니! 적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냐?" 정인의 양 어깨를 잡은 공능이 되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산문을 지키고 있던 사제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 다." "누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몰려왔단 말이냐? 그들을 막기 위해 누 가 갔느냐?" 공능의 질문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러나 정인이 대답할 수 있는 것 은 하나뿐이었다. "이, 일단 반야당의 사형제들이 막고 있습니다. 정운(正雲)이 금강 당(金剛堂)의 사숙(師叔)들에게 연락을 취하러 갔고 저는 이곳으로 달 려왔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느냐?" 공선 대사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가보면 알겠지. 그래, 애썼구나." 여전히 숨을 할딱이는 정인의 어깨를 살며시 짚어준 공선 대사가 방 문을 나서자 수호신승의 상세를 살피기 위해 약사전에 모였던 소림의 주요 인사들도 황급히 뒤를 따랐다. 한빙곡과 흑룡문의 전격적인 기습, 미리 알리지 않고 공격을 했으니 기습은 기습이되 당당하게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고 또 대응할 만한 충 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했으니 딱히 기습이라 고도 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정확히 일각 전부터 벌어진 싸움은 벌써 꽤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삼십도 넘는 흑룡문의 문도가 산문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호문각(護 門閣)을 공격하며 목숨을 잃었고 호문각을 지키던 소림의 제자 열셋이 전멸을 당했다. 호문각을 무너뜨린 흑룡문을 막아선 이들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온 반야당의 제자들이었다. 소림에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무공을 가르쳤는데, 보통 반야당에서 나한당, 금강당순이었다. 반야당은 어느 정도 기초적인 수련을 끝낸 어린 제자들과 속가의 제 자들이 한데 어울려 무공을 배우는 곳이었다. 배분상 사숙뻘인 금강다의 고수들이 주로 가르쳤는데 그곳에선 소 림칠십이절예(少林七十二絶藝) 중에서 철비공(鐵扉功)과 옥대공(玉帶 功) 등 소림 제자라면 누구나 익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여섯 종의 절예를 사사받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나한당으로 올라가 본격적인 무공을 배 우게 되는데, 소림칠십이절예 중 서른두 가지를 선별하여 배울 수 있 었으며 또한 이십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나한동(羅漢洞)에 도전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금강당은 나한당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올라갈 수 있는 곳으로 나 한동을 통과해 금강당으로 오르는 사람은 한 번에 고작 열 명 안팎에 불과할 정도였다. 금강당에선 칠십이절예 중 방장만 익힐 수 있는 일지선공(一指線功) 을 비롯하여 금기시되는 몇 가지 무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익힐 수 있 는 권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제자들은 자신에게 맞는 무공 몇 가지만을 중점적 으로 익혔다. 한 가지 무공에만 빠져들어도 그 끝을 보기엔 요원한 일 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적의 출현을 연락받고 급히 달려온 반야당의 제자들은 당주 명언(明焉)의 지휘를 받으며 선봉으로 나선 흑룡문의 문도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흑룡문주 반포는 고작 열 몇 명밖에 안 되는 인원을 제거하는 데 그 배가 넘는 수하들이 목숨을 잃은 것에 화가 난 데다가 반야당의 무승 들에게 길이 막히자 분기탱천하여 체면도 잊고 본격적으로 싸움에 나 섰다. "항복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지는 마라. 부상당한 이들 또한 저항하 지 않는다며 가급적 해치지 말고." 백학(白鶴)이 수놓아진 섭선을 휘두르며 느긋하게 전황을 살피는 위 지요에게선 소림이라는 거인을 공격한다는 긴장감은 조금도 없는 듯 보였다. "필요없는 살생은 하지 말라고 이미 명을 내려두었습니다."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완함(脘咸)이 대답했다. "흑룡문은?"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장담은 못하겠습니다만." "하긴. 싸움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탁탑천왕 그 친구에게까지 그러라는 것은 무리겠지." 위지요는 이해한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미친 듯이 움직이며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탁탑천왕 반포에게 시선을 주었다. "뭣들 하느냐! 이런 애송이들을 상대로 머뭇거려서야 흑룡문의 제자 라고 할 수 있겠느냐! 싸워라! 전진해라! 소림의 땡중들에게 너희들의 힘을 보여줘라!" "훗, 역시 무리야." 북천에서 일대 고수로 추앙받는 반포의 손속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금강석(金剛石)과도 같이 단단 한 두 주먹으로 펼치는 천왕팔권(天王八拳)의 위력은 그에게 탁탑천왕 이라는 별호를 안겨줄 만큼 가히 독보적이었다. 반야당의 당주인 명언이 그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은 주먹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며 쓰러지고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던 속가제 자 넷이 피분수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순간 그때까지 잘 버티던 반야 당의 제자들이 급격히 흔들리며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애당초 소림에서 가장 무공이 약한 그들이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백 명 가까이 되는 인원 중 칠 할이 넘는 이들이 삽시간에 도륙을 당하고 생존한 사람은 고작 이삼십에 불과했다. 그나마 본산에 남아 있던 나한당의 나한들과 금강당의 고수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 고 사대금강(四大金剛)이라 불리는 명종(明踪)과 명단(明旦)이 반포를 막지 않았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비록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한당과 금강당의 고수들은 소림 의 무공을 계승하는 진정한 고수들. 세 배가 넘는 흑룡문도들을 상대 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압도하며 몰아붙였다. 한빙곡에서 일 부의 병력이나마 지원하지 않았다면 처음 기세를 올렸던 흑룡문은 낭 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고작 팔십여 명에 불과한 인원을 상대하면서 흑룡문과 한빙곡이 동 원한 인원은 무려 삼백에 가까웠다. 하나 그만한 이들을 동원하고도 싸움을 끝내지 못했다. 그렇게 반 각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제43장 소림지루(少林之淚) "흠, 이제는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사대금강을 맞이하여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치열하게 싸우는 반포 의 가공할 무위를 잠시 감상하던 위지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 렸다. 싸움이 시작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곳곳에서 고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지마 정 작 소림사의 핵심 인물들은 아직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약사전에서 달려온 공선 대사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미타불!" 공선 대사의 기가 한껏 실린 사자후(獅子喉)가 좌중으로 퍼져 나가 고 그토록 치열하고 처절하며 살기등등했던 전장에 일순간 침묵이 찾 아들었다. '왔군.' 불호에 담긴 힘만으로도 이미 추측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졌다. 그만 한 인물이라면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아도 뻔한 일. 천천히 몸을 돌리는 위지요의 눈종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의 신음성과 산사(山寺)를 뒤덮은 역 한 피비린내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난도질했다. 천천히 전장 을 가로지르며 걷는 공선 대사는 눈앞에 드러난 참혹한 상황에 연신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걸음을 멈춘 공선 대사의 입에서 안타까움과 괴로움, 연민, 슬픔, 분노 등 온갖 감정이 뒤섞인 불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선은 가장 먼저 흑룡문을 막아섰다가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반야당 제자들의 주검에 고정되어 있었다. 치열한 싸움 중이었기에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 져 있는 반야당 제자들의 주검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 었다. 상처 부위는 흙과 피가 뒤엉켜 더러웠고 피 묻은 승복(僧服) 위 로 온갖 발자국이 뒤덮여 있었다. 공선 대사의 심사를 짐작한 것일까? 담담한 눈으로 그의 모습을 지 켜보던 위지요가 입을 열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우선은 먼저 떠난 이들의 주검을 수습하기로 하지요." 위지요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눈짓을 했다. 그의 눈짓을 받은 완함이 재빨리 명을 내렸고 한빙곡과 흑룡문의 제 자들이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상대가 그리 나오는데 소림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몸이 성한 반야당과 나한당 제자 들을 중심으로 사형제들의 시신을 거두었다. '젠장, 이게 무슨 장난질인가! 어차피 죽은 놈들이고 또 죽어나갈 놈들인데!' 한참 흥이 오른 마당에 싸움을 멈추게 된 반포는 다소 못마땅한 표 정이었다. 다만 수습되는 시신들 중 삼분의 이가 흑령문의 제자인데다 가 또 북천의 우두머리인 위지요가 하는 일에 전격적으로 제동을 걸 수는 없었기에 잠자코 지켜볼 뿐이었다. 어느 정도 장내가 정리가 되었다고 판단한 위지요가 포권하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소생은 위지요라고 합니다." 상대가 예의를 차리는데 화를 낼 수는 없는 일. 공선도 합장을 하며 인사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공선이라 합니다." "하하, 인불(人佛)이라 추앙받으시는 공선 대사셨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탕하게 웃은 위지요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칭찬을 받아서 싫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의도를 알 수 없는 칭찬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법. 하물며 소림을 공격하는 적의 수장 입 에서 나오는 칭찬이었다 공선 대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살짝 굳은 얼굴로 위지요와 그의 주 변에 포진되어 있는 인물들을 살폈다. '내자불선(內者不善)이라. 이들의 기세가 흉험하기 그지없으니 위기 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겠구나.' 공선 대사는 소림이라는 이름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않고 당당한 위지요와 그를 따르는 수하들을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 언뜻 보기에도 족히 사오백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나한당의 제 자들이 있었다면 모를까 그들이 본산을 떠나고 반야당의 어린 제자들 마저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지금 소림의 인원은 백 명이 채 되지 않았 다. 물론 소림에 적을 두고 있는 인원을 모두 합한다면 사백은 능히 육 박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무공보다는 불경(佛經)을 연구하고 수 행에 정진하는 학승(學僧)으로 이런 상황에선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 소림과는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런 일을 벌이신 것이오?" 차갑게 묻는 공선 대사의 안색엔 은은한 노기가 피어올랐다. "하하, 딱히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큰일을 도모 함에 있어 소림의 양해를 구하고자 하여 온 것입니다." 위지요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대답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 던 공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양해를 구한다는 자들이 이토록 잔인한 살수를 펼친단 말인가! 그 래, 보아하니 사천혈맹이라는 놈들이구나! 중천이냐?" "흠, 설법(設法)이 아니라 욕이라... 꽤나 입이 걸걸한 스님이시구 려. 아무튼 중천은 아니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 위지요의 말투는 공선 대사를 상대할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사천혈맹이 아니란 말이냐?" 위지요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중천이 아니라고 했지 사천혈맹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소. 우리는 북쪽에서 왔소." "북천!" "아미타불!" 도대체 누가 있어 소림을 치려는 대범함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있 다면 오직 패천궁과 근자에 모습을 드러낸 사천혈맹뿐. 어느 정도 예 상했다지만 막상 소림을 침범한 이들이 북천임이 드러나자 누구 하나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침착히 위지요를 응시하던 공은과 공선 대사는 위지요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고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은이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성동격서(聲東擊西)!" 황보세가를 치는 듯 위협을 가하여 그쪽으로 병력이 모이게 한 후 소림을 치니 이것이 성동격서. 공선 대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호이산(調虎移山)의 계." 산에서 호랑이를 쫓아낸다. 곧 소림의 제자들을 황보세가로 보내도 록 유인하여 소림의 전력을 약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했다. "하하,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다른 곳보다는 소림을 우선적으로 도모해야겠기에 조금 바삐 달려왔을 뿐이지요." "소림을 도모한다?" 차갑게 되묻는 공능의 말에는 불제자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살기 가 묻어 나왔다. "소림을 넘지 않고는 무림을 넘볼 수 없는 노릇." 위지요의 전신에서 절대자의 기도가 피어올랐다. "저희가 잠시 동안 소림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항복하라는 말이었다. 선언하듯 내뱉는 그의 말엔 자신감이 넘쳤다. 동시에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무서운 기운이 공선 대사를 압박했다. "아미타불!" 소림을 이끄는 공선 대사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간단히 합장하는 것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기운을 소멸시킨 후 조용히 대꾸했 다. "소림은 쉬운 곳이 아니라오." 그의 한마디엔 뭐라 할 수 없는 묵직한 힘이 있었다. 금방 표정을 고챈 위지요가 말했다. "쉽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대 사께서도 아시잖습니까?" 그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정확히 삼십육 명의 나한과 스물한 명의 금강, 그리고 숭산의 이곳 저곳에 흩어져 홀로 수련 중이던 제자들이 속속 도착하고 보리원의 노고수들도 황급히 달려왔지만 상대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그렇다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소림은 그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소." 위지요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하는 공선 대사의 모습에서 소 림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었다. "흠, 가급적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서로 간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군요. 대화는 잠시 후에 계속하도록 하지요. 충분한 조건을 만든 후에." 빙긋이 웃은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터지는 함성. "쳐랏!" "와아아!!" 공격을 허락하는 눈빛을 본 반포가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가고 흑룡 문의 문도들이 그뒤를 이었다. 몸을 돌려 걷던 위지요가 완함을 불렀다. "완함." "예. 곡주님." "입이 지저분한 땡중이 고승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다." 공능을 말함인가? "보았습니다." 비릿한 살소를 보인 완함이 슬며시 고개를 돌려 공능을 찾으며 대답 했다. "버릇을 고쳐 놓아라." "존명!" 공능이 막말을 늘어놓을 때부터 이미 그러한 명이 떨어지리라 예상 하고 있던 완함이 순식간에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청아야." "예, 아버님." "소림이 전력으로 부딪쳐 오는 한 우리도 모든 힘을 동원해야 할 것 이다. 그렇지 않다면 낭패를 볼 수 있어. 설풍단(雪風團)은 물론이고 송림(松林)의 영감들도 한가로이 놀지 말라고 전해라." "송림의 어르신들까지 말입니까?" 설풍단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직접 싸운 것은 아니나 조금 전 금강당과 나한당의 고수들이 얼마나 막강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똑똑히 보았다. 특히 몇 명 안 되는 금 강당의 고수들은 어째서 소림이 태산북두(泰山北斗)인지 뼈저리게 느 끼게 해줄 정도로 대단했다. 그렇지만 송림의 어른들까지 나설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왜, 내 말이 이상하더냐?" "소림이 강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흑룡문과 설풍단이면 충 분하지 않겠습니까?" 설풍단을 언급하는 위지청의 음성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들은 한빙곡이 작심하여 키워낸 최고의 정예들로 어려서부터 온갖 영약과 비급을 지급받고 혹독한 수련에 단련된 자들이었다. 개개인의 무공이 이미 일류를 넘어섰고 특출한 능력을 보이는 몇몇은 일파의 어 른들고 비교해도 조금의 손색도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위지청의 명에 의해 위지요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한빙오영이 대표 적이었는데 위지요조차 그들 다섯의 합공이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 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과장 섞인 말이기도 하였으나 설 풍단원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설풍단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위지청이었다. 설풍단의 대원들은 곡주인 위지요가 아닌 자신들과 함께 고된 훈련 을 이겨내고 지금껏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한 단주 위지청에게 절 대적인 복종을 하였다. 그들은 또한 홀로 유랑을 떠난 위지황에게도 위지청 못지않은 지지를 보냈는데 위지황이야말로 북천, 아니 설풍단 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이자 최고의 동료요, 그들의 우상이었기 때문이 다. 아무튼 설풍단 백 명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위지청으로선 송 림의 어른들까지 동원하라는 부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아들의 불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차분히 전장을 살피던 위지요 의 입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인원으로만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설풍단의 능력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소림이란 산의 골은 넓고도 깊구나. 하니 시키는 대로 하 여라." "알겠습니다." 다소 의구심이 들기는 했으나 거듭 당부하는 부친의 명령을 어길 수 는 없었다. 위지청은 설풍단의 부단주이자 친우인 장방형(張倣形)에게 자신의 명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 당부하고는 한가로이 뒤따라오는 송림의 어른들에게 부친의 명을 전하기 위해 직 접 달려갔다. 촌각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노인들을 대동하고 싸움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르신들을 모셔왔습니다. 한데 싸움이......" 전장으로 시선을 돌린 위지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싸 움의 양상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가. 압도적으로 몰아붙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는 어느 한쪽이 우위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소림은 강하다고." 위지요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말했지만 위지청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놀란 눈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는 싸움을 지켜볼 뿐이 었다. "물러서지마라! 공격, 공격하란 말이닷!" 반포가 점점 밀려나는 수하들을 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역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조금 전 그를 막아섰던 사대금강에 막혀 또 다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악도들에게 소림의 힘을 보여주어라!" 반포의 호통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좌측의 나한진을 진두지휘하는 공은의 입에서 제자들을 독려하는 음 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음성에 발맞춰 나한들의 손에 들린 계도(戒 刀)가 더욱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소림은 나한진(羅漢陳)을 펼치고 금강당의 제자들이 좌우에서 밀려드는 적을 상대했다. 평소 사용하던 단곤(短棍)이나 봉(棒)을 버리고 계도를 든 그들에게 선 부처님을 모시는 불자임을 무색케 하는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 다. 아마도 수없이 많은 사형제들을 잃은 상황에서 자신들마저 무너진 다면 소림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무림의 정기가 무 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크아악!" 그렇잖아도 정신없이 변화하는 나한진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갈피 를 잡지 못한 이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오고 순시간에 십여 명도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하지만 물러서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흑룡문과 한빙곡의 무인들은 동료들의 시신을 밟으 며 끝도 없이 나한진을 공격했다. 그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밀려드는 적에겐 아무리 신묘한 나한진이 라도 중과부적(衆寡不敵). 결국 진을 구성하고 있던 나한 중 한 명이 큰 부상을 입고 말앗다. 동료들에 비해 다소 무공이 짧았던 그가 진의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던 나한진에 잠깐의 틈이 생기고 말았다. 비록 공은의 부름을 받고 다급히 달려온 금강당 제자 의 합류로 진이 와해되지는 않았으나 나한진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 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저들도 지쳤다! 두려워하지 말고 진격해라!" 나한진이 흔들리는 것을 직접 목격한 수뇌 중 한 명의 입에서 명령 이 떨어지고 흑룡문을 돕기 위해 나선 한빙곡의 무인들이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잠시 흔들리기는 했어도 열여덟 명이 한 조가 되어 이루는 시팔나한진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원진(圓陳)!" 공은의 외침과 더불어 공세에서 수세로 진세가 변하고 그것이 자신 들로 인해 위축된 것이라 여긴 한빙곡의 제자들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진의 영향권 속으로 뛰어들었다. "멍청한!" 적의 움직임이 속임수라는 것을 간파한 위지청이 자신도 모르게 욕 설을 내뱉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진의 영향권 내로 뛰어들었던 한빙곡의 무인들은 수세에서 갑자기 공세로 돌변한 나한진에 갇혀 아무것도 하 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기 시작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나한들, 서로 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 며 종횡(縱橫)으로 움직이는 그들은 가히 폭풍과도 같은 힘으로 한빙 곡의 무인들과 흑룡문도들을 쓸어갔다. "사, 살려줘!" "으악!" 막힘이 없었다. 공은과 공문 대사의 주재 하에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나한들이 하 나가 되어 펼치는 십팔나한진의 위력 앞에 한빙곡과 흑룡문의 무인들 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그들은 어찌 대응해야 할지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거기에 일당백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금강당의 고수들. 또한 소림 의 위기를 알고 나타난 보리원의 노승들은 비록 그 수는 얼마 되지 않 아도 선발로 나선 한빙곡과 흑룡문의 기세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 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사기는 땅에 떨어 졌다. "흠, 역시 소림이군. 대단해."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전황을 살피는 위지요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청수한 음성. 고개를 돌린 위지요가 인상을 찌푸렸다. "뻔히 알면서 이렇게 굼뜨게 행동하면 어찌합니까?" "이놈아! 어디 너도 한번 나이를 먹어봐라.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 있나." 천하를 노리는 북천의 천주에게 누가 감히 이놈 저놈 할 수 있을까? 하나 부친인 위지요의 의제(義弟)이자 어려서부터 그에게 무공을 가 르쳐 온 우문걸(宇文傑)은 능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었다. "도와주랴?" 우문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위지요가 대답하기도 전에 앞으로의 상황이 어찌 돌아갈지 뻔히 알 고 있던 위지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설풍단을 움직이겠습니다. 나한진을 맡지요." 위지요로부터 그렇게 눈짓을 받은 위지청이 사라지자 그가 예상했던 대로 위지요와 우문걸 사이에선 요상한 흥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천하의 명주(名酒)라 일컬어지는 소흥(韶興) 가반주(加飯 酒), 그중에서도 이제는 제조법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봉래춘(蓬 萊春)을 구해주는 것으로 흥정은 끝을 맺었다. "녀석이 나한진을 뚫는다고 했으니 우리는 저들을 맡으면 되는 것이 냐?" 지금껏 농을 하며 떠들던 우문걸이 입가에 지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금강당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쪽은 아닙니다." 위지요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 "금방 무너질 듯해도 흑룡문엔 아직 충분한 여력이 있습니다. 직접 적인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문주가 저리 힘든 싸움을 해도 움직이 지 않는 괴팍한 자들 말입니다." "흑면살귀(黑面殺鬼)들 말이구나. 웃기는 놈들이야. 뭐 가릴 게 있 다고 귀신탈을 쓰고 있는지." "그래도 실력은 있는 자들입니다." 정확히 삼십 명. 하나같이 시꺼먼 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들을 보며 입을 열던 위지요는 미동도 없이 전장을 주시하던 그들이 서서히 움직이는 것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움직이는 것을 보니 사대금강은 탁탑천왕에게도 힘에 부치는 모양입니다." "탁탑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알고 싶지 않다. 그래, 우리는 누구를 상대하면 좋겠느냐?" "저들입니다." 위지요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우문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적당한 상대로구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긴장의 빛이 흘렀다. 위지요가 지적한 상대는 바로 소림 방장 공선 대사를 비롯한 보리원 의 고승들. 송림이 북천의 진정한 힘이라면 소림의 힘은 바로 보리원 의 고승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젠장, 입만 요란한 땡중인 줄 알았더니 이런 실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어깨를 들썩이며 힘겹게 숨을 고르는 완함은 이 장 정도 떨어진 곳 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차분히 노려보는 공능의 모 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와 손속을 나눈 지 벌써 이각여. 알고 있는 모든 무공과 경험을 동원하여 전력으로 맞부딪쳤지만 어찌 된 일인지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능의 무공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위압적이지 않았고 날카롭 지도 않았으며 그다지 빠르지도 않았다. 처음 공격했을 때만 해도 짧으면 십여 수, 길어야 이십여 수면 충분 히 제압하리라 여겼다. 하나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굳건히 버텨내는 잡초처럼 공능은 모든 공격을 완벽에 가깝도록 막아냈다. 일각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성공한 공격은 어깨와 팔뚝에 약간의 검상을 남긴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자신의 가슴 한곳에 커다란 손자 국을 만들면서. '징그러운 땡초 같으니!' 솔직한 마음으론 당장에라도 싸움을 멈추고 싶었다. 이상하게 전의 가 불타오르지 않는 데다가 아무리 공격을 해도 쉽사리 이길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지요로부터 직접 명령을 들은 이상 반드시 끝장을 봐야 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구!" 기합을 넣으며 재차 기운을 끌어 모으는 완함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 이 일었다. 지그시 뜬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공능이 합장을 풀고 양손에 기를 끌어 모았다. 지금껏 완함을 괴롭힌 천불장(千佛掌)의 은은한 기운이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타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완함의 검이 공능에게 쇄도했다. 공능은 빙글빙글 손을 돌리며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빌어먹을!' 재차 검을 휘둘러 검기를 내뿜어보았지만 순식간에 수십, 수백으로 늘어난 수영(手影)이 거대한 장막을 치며 힘을 해소시켰다. '괴물 같은 중늙은이 같으니!!' 완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과 똑같은 양상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검은 마치 귀신에 라도 홀린 듯 상대의 맨손에 이끌려 번번이 목표를 빗나갔고 회심의 일격 또한 허무하게 막히고 말았다. 이쯤 되면 체면이고 뭐고 아무것 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 미친 듯이 달려드는 완함. 그의 모습에선 이미 날카로운 면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미타불!" 크게 불호성을 내뱉은 공능이 유연한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 며 손을 뻗었다. 공능은 때로는 부드럽게 상대의 예봉을 피하고 때로는 강맹하게 손 을 놀렸다. 그의 움직임에 막혀 완함의 검은 점점 그 날카로움을 잃는 가 싶더니 어느 순간 움직임이 멈춰 버렸다. 공능이 칠십이절예 중 하 나인 금강수(金剛手)의 기운을 일으켜 검을 낚아챈 까닭이었다. "뭐, 뭐야!" 당황한 완함이 미처 대처하지 못하는 순간,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변 한 공능의 손이 검을 내려쳤다. 땅! 완함은 처음부터 금이라도 난 듯 너무나도 쉽게 부러지는 검을 멍청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공능의 장력이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깜짝 놀라기는 했으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위기를 보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고 공능은 그의 옆 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 장력을 거둘 것이다. 문제는 벌써부터 느껴지는 위지요의 따가운 눈초리였다. '젠장, 죽었군.' 훌쩍 뒤로 물러나는 완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아도 산 느낌이 아니었다. * * * "아이구야! 힘들다, 힘들어. 어차피 오늘내일 도착할 것도 아닌데 조금 쉬었다 가죠." 아침부터 꽤나 오랬동안 걸음을 걸어서 그런지 죽을상을 한 뇌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쯧쯧, 그러기에 자빠져 누워 있으라 했잖아. 그 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직 무리라고. 누가 고집 피우래! 어서 일어나!" 해웅이 무지막지한 손으로 귀를 잡아끌며 소리쳤다. "젠장,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렇잖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엄청 후 회하고 있다고요." 재빨리 팔을 뿌리치며 한 걸음 물러난 뇌전이 볼멘소리를 했다. 웃으면서 둘을 지켜보던 강유가 앞서 걷고 있는 남궁민에게 다가갔 다. "잠시 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꽤나 힘 들어합니다." 남궁민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강유의 말대로였다. 천뢰대와 몇몇을 제외하고는 힘든 표정이 역력했다. 특히 부상 정도 가 심했던 천도문과 연능천 등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걷지요. 어차피 요기도 해야 할 터이니. 가까운 객점이 나 주루가 보이면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네요." 아무것도 없는 산길에서 쉬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남궁민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할 말이라도 있는지 강유가 남궁민의 안색을 살폈다. "다른 할 말이라도 있나요?" 그녀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험, 다른 것이 아니라 저 친구 말입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한기와 홍조(紅潮)가 동시에 어우러지는 기이 한 표정으로 변했다. "아마 끝까지 따라올 요량인 것 같습니다만 차라리......" "차라리라니요?" 질문을 던지는 남궁민의 어조가 실로 날카롭다. 그러나 아예 작심을 한 듯 크게 심호흡을 한 강유는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그가 무림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상계(商界) 사람이기는 하나 그에 게 무공을 사사해 준 어른이 백도의 어른이라 했으니 친구나 마찬가 지입니다. 그리고 몸은 저렇게 약해 보여도 제법 실력이 있습니다. 특 히 그를 수행하는 자의 무공은 장난이 아닙니다. 최소한 저와는 동수 (同手)라 생각됩니다." "설마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남궁민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강유와 동수라면 남궁세가에선 그를 상대할 사람이 그녀뿐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은연중 시험을 해봤는데 틀림없습니다. 함께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거듭되는 강유의 말에도 남궁민은 그다지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중요한 것은......" 잠시 말을 끊은 강유는 남궁민과 저 멀리 뒤따라오는 두 명의 사 내를 번갈아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끝까지 쫓아올 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 가 그에게 따라오라 마라 할 권리도 없지요." "하하, 맞습니다. 꽤나 믿음직한 친구입니다. 덩치에 비해 술도 잘 마시고, 헛!" 입을 열던 해웅은 날카롭게 치켜뜨는 그녀의 시선에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벌써부터 술을 나눠 마실 정도로 친분이 생긴 모양이군요." "그, 그게 아니라...." "강 호법도 마셨나요?" 물론이었다. 지난밤에도 주거니 받거니 두 동이의 술을 비웠으니 까. 하나 지금 시인을 했다간 될 일도 안 될 터였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말을 하면서 해웅을 노려보는 강유는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말라는 듯 두 눈을 부라렸다. "흥, 과연 그럴까요?" 남궁민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 약 삼십여 장 뒤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살피는것이 영락없는 철부지 애 송이였다. "고향이 산동이라 했던가요?" "예, 위해(威海) 어디라고 들었습니다." "흠." 남궁민은 정확히 나흘 전 머물던 객점에서 식사를 하던 중 점잔을 빼며 접근했던 그를 잠시 떠올렸다. 강호초촐(江湖初出)이라고,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는지 명성이 자자 한 남궁세가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인사하던 청년. 가주를 만나서 인사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정작 자신이 가주임을 밝히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안색을 붉히더니 이후, 시간만 나면 접근해 입을 헤벌 리고 몽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백면서생. '이름이.....' 나궁민이 초승달 모양처럼 아름다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위황... 그래, 위황이라고 했었지.' * * * 싸움은 점점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팽팽했던 싸움은 위지청과 설풍단, 그리고 탁탑천왕 반포의 명을 받은 흑면살귀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점차 북천의 우위로 돌아 섰다. 특히 소림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보리원의 고수들 이 송림의 고수들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느라 묶 이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와아아!"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설풍단에 의해 마침내 좌측의 나한진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진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던 장방형이 힘든 기색이 역력한 한 제 제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렸고, 그는 장방형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계속 몰아쳐 오는 적을 상대하느라 가뜩이나 지친 상태에다가 하나 가 되어 움직여야 할 진에 약점마저 생기자 결국 몇 배가 넘는 적을 상대햐면서도 그토록 굳건히 버텨내던 십팔나한진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진이 무너지자 불뿔히 흩어진 나한들은 곧 성난 설풍단원들의 공격 에 하나둘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애썼다." "휴~ 말도마라. 나한진... 소문으로만 들었지 정말 지독하다. 다시 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위지청의 격려에 장방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그러게.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어." "열둘이 죽었다." "아니, 스물일곱이야." 위지청은 무슨 소리냐는 장방형의 시선에 거의 무너지고 있는 우측 의 나한진을 가리켰다. 그쪽에서 나한진을 공략하고 있던 설풍단원도 열다섯이나 목숨을 잃었다는 말이었다. "젠장, 지칠 대로 지친 상대와 싸우면서 이런 한심한 꼴이라니. 지 나가는 개가 웃겠다." "그래도 저쪽보다는 상황이 나아." 쓴웃음을 지은 위지청이 금강당의 제자들과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흑면살귀를 가리켰다. 삼십 명이나 되었던 인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일곱 정도였고 그나마 멀쩡한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크고 작은 부상 을 당했지만 금강당의 제자들은 반수가 넘는 인원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장난 아닌데. 흑면살귀라면 제법 실력있는 자들이잖아." "흑룡문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야. 솔직히 설풍단에서도 저들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십도 안 될걸." "그런 놈들을 거의 전멸에 가깝도록 작살을 내고도 반수가 훨씬 넘 게 살아남았단 말이야? 그것도 수적으로도 열세인 상황에서? 이거야 원. 나한진하고 싸운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겠구만." 위지청은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엄살을 피우는 장방형에게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이제는 우리가 상대할 차례다." "흑룡문에서 알아서 하겠지." 관심없다는 태도였다. "흑룡문주의 체면을 봐서라도 몰살당하는 것은 막아줘야 돼." "피해가 커질 텐데?" 장방형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나한진을 무너뜨리는 데 꽤나 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몇 남 지 않았지만 금강당의 제자들은 어쩌면 그보다 많은 희생을 요구할지 도 몰랐다. "다 나설 것은 없어. 저들도 꽤나 지쳤을 테니까 나하고 너, 그리고 위에서 스무 명 정도면 되지 않을까?" "충분하겠지. 음, 위에서 스무 명이라.. 하긴. 그게 쓸데없는 피해 를 막는 방법이긴 하다." 위에서 스무 명이면 개개인의 실력이 흑면살귀를 능가하고 남음이 있었다. 멀쩡한 몸이라면 모를까 피로와 부상에 지친 상대라면 큰 피 해 없이 굴복시킬 수 있었다. "빨리 움직여야겠다. 그사이 다 당하고 말겠어!" 또다시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흑면살귀를 보며 위지청이 소리쳤다. "당하든지 말든지." 장방형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장난치지 말고 서둘러서 따라와. 먼저 갈 테니까." 위지청은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상대로 점찍은 금강당의 제자 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젠장, 급하기는." 몇몇 설풍단원에게 눈짓을 보내곤 그를 따라 움직이는 장방형의 얼 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 * * "졌소." 고개를 떨구는 우문걸의 입에서 허탈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흘러나 왔다. "아미타불! 소승이 운이 좋았습니다." 공선대사가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아니오, 그것을 어찌 운이라 하겠소? 분명한 실력이었소." 우문걸은 세조각으로 나뉘어 나뒹구는 검을 살피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지금껏 이토록 위력적인 지공(指功)은 경험해 보지 못했소. 검 을 박살 내고도 여력이 남아 이만한 상처를 입히다니. 대사의 공력이 조금만 더 깊었다면 이렇듯 마주 보고 있지도 못할 터. 손속에 인정을 두어서 고맙소." "아미타불!" 공손 대사의 안색이 살짝 붉어졌다. 곳곳에서 제자들의 비명성이 들리고 죽고 죽이는 상황에서 어찌 손 속에 인정을 둘까. 우문걸을 상대했던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눈앞의 적을 빨리 쓰러뜨리고자 하는 살심뿐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무공인지 알 수 있겠소?" "일지선공이라 합니다." "일지선공이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소." 소림이 자랑하는 칠십이절예 중에 일지선공이라는 무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우문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것이 방장게게만 전수되는 것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어쨌든 패자는 말이 없는 법. 노부는 이대로 물러나겠소. 보내주시 겠소?" "......" 눈파의 상대는 보리원의 고수들을 상대하고자 고수들을 이끌고 싸 움에 참여한 자였다. 모르긴 몰라도 북천에서는 꽤나 높은 신분을 지 닌 자가 분명할 터였다. '그를 사로잡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그를 사로잡거나 쓰러뜨린다고 하여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북천의 진정한 우두머리는 그가 아니라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는 위지요였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에겐 아직 여력이 있어 보였다. 스스로 물러난다는 사람을 굳이 상대하느라 시간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것 이 나을 듯했다. "아미타불!"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공선 대사가 가벼운 불호성과 함께 몸을 돌렸 다. 그리고 송림의 다른 고수를 찾아 걸음을 움직였다. "크헉!" 공선 대사의 등을 무심히 쳐다보던 우문걸이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휘청거렸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고 공선 대사 정도의 고수가 눈치를 못 채고 그냥 물러날 정도로 당당하게 행동했지만 사실 그가 입은 내상은 목숨 을 걱정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공력이 그의 오장육부를 뒤흔들었고 손가락 끝 에서 흘러나온 한줄기 기운이 예리한 칼이 되어 근육을 자르고 뼈를 부 숴 버렸다. 그럼에도 태연히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적에게 비참한 꼴 을 보이지 않겠다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다.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다가온 한빙오영이 우문걸을 부축했다. 우문걸은 그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구나." 입을 여는 것은 패배의 아픔을 감내하고 있는 존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한빙오영은 모두 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허! 인품만 훌륭한 줄 알았더니 무공 또한 대단하군. 과연 소림을 이끌 만한 인물이야, 공선 대사는." 공선 대사와 우문걸의 싸움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 우문걸의 패배를 직감하고 한비오영을 급파했던 위지요는 자존심이 강하기로 견줄 사람 이 없다는 우문걸이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고 그것도 부족해 한빙오영에 게 꼼짝없이 업혀오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끝난 싸움 아닙니까?" 명령을 수행하기는커녕 공능의 손속에 하마터면 비명횡사(非命橫死) 할 뻔한 완함이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위지요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한심해 죽겠다는 듯한 시선으로 완함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따라와." "예? 어, 어디를?" 한바탕 호통이 터질 것이라 예상했던 완함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어디긴, 이쯤 되었으면 싸움을 끝내야 할 것 아냐."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위지요는 멍청히 쳐다보는 완함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헛!" 우문걸을 쓰러들리도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몰아붙이고 있던 공선 대 사는 난데없이 밀려드는 살기에 기겁하며 몸을 틀었다. 찰나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도 비틀거리는 상대에게 결정타를 가할 수 있었겠지만 그 랬다간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 그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접고 뒷걸 음질쳤다. 그리곤 자신에게 살기를 뿜어낸 상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아미타불! 위 시주였구려." 상대가 위지요라는 것을 발견한 공선 대사의 안색이 긴장으로 물들 었다.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모두 멈 춰라!" 그의 호통 소리에 금강당의 제자들을 몰아치던 설풍단이 물러나고 보리원의 고수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송림의 고수들도 싸움을 멈추 었다. 단 한마디로 싸움을 중지시킨 위지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음에도 소림이 밀리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위지요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 는지 알 수 없었던 공선 대사는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위지요를 노려 보았다. "소림의 힘은 충분히 보았습니다. 꽤나 많은 전력이 빠졌는데도 '과 연 소림이다!'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미타불!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오." 공선 대사가 애써 반박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나한진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도 모두 제압당했습니 다." "아미타불!" 공선 대사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아직 우리들이 남았다!" 완함을 격퇴하고 송림의 고수와 치열한 접전을 펼친 공능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러자 위지요가 슬며시 완함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땡중 같으니!' 눈길의 의미를 알고 있던 완함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공능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박살 내버리겠다는 굳은 다짐과 함께. "쯧쯧쯧."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내다본 위지요가 한심스런 표정 으로 혀를 차고는 공능에게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물론 알고 있소.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였소." 위지요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진실로 감탄하고 있었다. 송 림의 고수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었던 그는 그들이 소림의 고승들과 충분히 겨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허나 그것이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알 수 있 었다. 수는 비슷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송림에 속한 고수들이 몇 명 더 많았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자면 참패나 다름없었다. 송림의 수장인 우문걸이 공선 대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고 삼 분지 일이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그들이 승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입은 피해에 비하면 내세울 가치도 없는 수준이었다. 위지요가 서둘러 싸움을 멈추고자 하는 이유 중엔 이미 끝난 싸움에 구태여 피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은 더 이상 송림의 고수들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소?" "감히!" 발끈하려던 공능은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한진이 무너지고 금강당의 제자들 중 태반이 죽거나 큰 부상을 당 했다. 애당초 무공이 약한 반야당의 제자들은 나한진이 무너지는 시점 에서 모조리 제압을 당했다. 남은 사람은 사대금강과 보리원의 고수들 뿐이었는데 그들 역시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쉬고 싶을 만큼 지친 상태 였다. 문제는 그만한 싸움을 치르고도 상대는 아직도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능이 입을 다물자 살짝 냉소를 지은 위지요는 공선 대사에게 공손 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싸움이 계속된다면 저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미타불!" 부상을 당하거나 사로잡히 제자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말 에 공선 대사의 눈이 절로 감겼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의 목숨도 안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말의 의미가 섬뜩했다. 계속해서 대항을 한다면 무승뿐만 아니라 학승까지 피해를 볼 수 있 다는 의미. 순간, 공선 대사의 눈이 번쩍 떠졌다. 치미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한 듯 단전까지 늘어진 수염이 마구 흩날 렸다. "무공을 모르는 불제자까지 살상하겠다는 말이오!!" 위지요는 자신을 향해 쏟아져 오는 기운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소림의 제자들입니다." "아미타불!"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다른 고승들이 분노의 불호성을 터뜨리고 당 장에라도 공격할 듯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송림의 노고수들을 비롯하 여 설풍단의 무인들이 위지요를 감싸듯 보호하며 그들을 포위해 버렸 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인간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모 조리 도륙을 내버리지요!" 사대금강에 막혀 지금껏 고전을 한 반포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 의 시선은 지금도 오로지 사대금강에게 꽂혀 있었다. 그의 말을 간단히 무시한 위지요가 재차 물었다. "제가 소림을 배려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항복하시겠습니 까? 아니면....." 공선 대사의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위지요는 말꼬리를 흐렸다. 하나 그 뒷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미타불! 정녕, 정녕,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공선 대사는 참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소림이 언제 이와 같은 대덥을 받은 적이 있던가? 과거 패천궁에게 잠시 패배감을 맛본 적이 있으나 이렇듯 무참하지 는 않았다. "우리가... 소림이 어찌하길 바라시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선 대사가 힘없이 물었다. "방장 사형!!" "방장!" 공능을 비롯하여 보리원의 고승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으나 공선 대 사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늙은 우리들이야 목숨을 버린들 아깝겠나? 하나 어린 제자들을 생 각해야 하네.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다른 제자들도." 공선 대사의 음성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만큼 크나큰 좌 절과 절망을 담고 있었다.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으나 공능 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가늘게 떨리는 공선 대사의 어깨를 보면서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의견이 통일되었다고 판단한 위지요가 반색하며 입을 열 었다. "몇 가지 일에만 협조해 주시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말해 보시오." "우선 이곳을 우리 북천의 임시 거처로 삼을 것입니다. 가급적 불편 을 드리지 않도록 외원(外院)에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공선 대사는 계속하라는 듯 침묵을 지켰다. "오늘 이후 소림의 제자는 일체의 활동을 금할 것입니다. 오직 절 안에서만 생활을 해야 할 것이고 무림의 일엔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장 핵심적인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기에 위지요는 잠시 숨을 골랐 다. "무공을 익혔든 그렇지 않든 간에 소림의 모든 제자들은 하루에 한 번씩 군자산(君子散)을 복용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될 것이며 해독을 하려 하거나 거짓으로 복용을 해도 안 됩니다. 또한 절대로 탈출을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약속하건대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아미타불!" 모두의 입에서 참담한 불호서이 터져 나왔다. 군사산이 무엇이던가? 독은 독이되 인체에 큰 해가 되지 않는, 오직 내공만을 흩트려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독이었다. 그것을 매일 같이 복용하고 일체의 활동을 금지한다는 것. 한마디로 감옥에 갇힌 죄 수처럼 꼼짝 말라는 소리였다. "다 끝났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은 공선 대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상만 지켜주시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소림에 피해 가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미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소." "감사합니다, 대사." 위지요는 승자의 웃음 대신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그로선 나름 대로 예를 표한 것이지만 그것이 더 굴욕감을 주었다. "감사라... 패한 자에게 하는 위로의 말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공선 대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곤 사대금강 중 으뜸인 명종을 불렀다. "명종아." "예, 사부님." 눈물을 흘렸는가? 두 눈을 붉게 물들인 명종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 다. "들었느냐?" "예, 사부님." "사부는 천년소림에 참으로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지었구나." "사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공선 대사는 처연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방장인 내가 어리석어 벌어진 일. 어찌 변명 을 하겠느냐? 못난 사부는 그 책임을 지고 싶구나." "사부님!" 처연한 공선 대사의 음성에 뭔가 불안감을 느낀 명종이 황급히 고개 를 쳐들었다. 공선 대사는 명종의 시선을 외면하고 참담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 형제와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계율원주는 잠시 후 녹옥불장(綠玉佛杖)을 그에게 전하게." 방장의 신물인 녹옥불장을 전하라는 것은 곧 방장의 지위를 명종에 게 넘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미타불!" 이미 명종을 부를 때부터 그와 같은 일을 예상한 계율원주는 불호로 써 대답을 했다. "제, 제자는, 제자는 실로 감당하기 힘듭니다." 명종이 고개를 흔들며 사양했다. "내 너를 믿고 있음이니 거절하지 말고 따르도록 하여라." "사부님!" 공선 대사가 흐느끼는 명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소림을 부탁하마." 참으로 듬직한 제자였다. 어느새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도 눈망울을 굴리던 동자승 때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아울러 그 때의 선한 마음까지도. "아미타불! 네게 참으로 힘든 짐을 지게 만들었구나. 그래도 명종 아, 이 못난 사부에게 약속 하나만 해주겠느냐?" 명종이 고개를 쳐들었다. "다시는, 다시는 소림이 오늘과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만들겠 다는 약속말이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반드시 그리 만들 것입니다." "아미타불! 고맙구나. 참으로 고맙구나." 십육 년 동안 소림을 이끌었던 공선 대사는 명종의 피맺힌 절규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패배를 당한 적은 있어도 지금껏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소림 의 정기(正氣)가 유린당하는 순간이었다. 제44장 암중모색(暗中摸索) 쾅! 그렇잖아도 약해 보이는 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살나듯 활짝 열 렸다. "공자님! 공자님!" 문을 열고 들어선 비무영이 위지황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아, 뭐야아~" 눈도 뜨지 못하고 신경질을 내는 위지황, 배배 꼬인 몸은 여전히 이 불을 감아 품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세요! 지금 잠을 잘 때가 아닙니다." "시끄럿! 잘 때야." 간단히 대꾸한 위지황은 잠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주먹 쥔 손을 휘 휘 내저었다.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태연스레 대꾸한 비무영은 조심조심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위지황이 끌어안고 있는 이불을 냅다 잡아당겼다. "아이쿠야!" 이불과 함께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진 위지황의 입에서 비명성이 터 져 나왔다. 제법 충격이 있는지 그는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 잠시 멍한 얼굴로 있던 위지황은 모든 상황 파악이 끝나자 비로소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지금 나하고 해보자는 거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비무영이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아니면 뭐야? 내가 새벽잠이 많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새벽이 아니라 아침잠이겠지요." 비무영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게 제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은 없잖습니까?" "시끄러! 너는 지금 네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했는지 알지 못하지?" "예?" "꿈이, 그 꿈이 어떤 꿈이었는데...." 그때까지 바닥에 누워 있던 위지황이 치를 떨며 일어났다. 눈에선 시뻘건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평소라면 이미 십 리 밖으로 도망갔을 비무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어디 한번 대꾸해 보라는 듯 주먹을 치켜드는 기세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좋은 소식입니다. 그것도 최고로요." "좋은 소식?" 치켜든 손이 슬그머니 내려왔다. "호, 혹시 남궁 가주께서 나의 마음을 받아주시겠다는....." "....." 한껏 기대감에 조심스레 입을 연 위지황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아니면 뭔데?" "위지황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저 남궁 소저 생각뿐입니까?" "네놈도 사랑에 빠져 봐라. 똑같을 테니까." "사랑이라니요? 도대체 얼마나 봤다고 사랑 타령입니까, 사랑 타령 이!" 비무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하지만 위지황은 그런 반응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건 말이다. 살짝 스쳐 지나가는 인연만으로도 시작되는 거다. 눈 한 번 마주쳤는데도 영혼까지 빼앗길 수 있는. 그녀의 말 한 마디, 손짓, 눈짓 하나에 울고 웃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지. 난 그 런 사랑에 빠졌어." 사랑에 빠진 날을 상상하는가? 침상에 털썩 주저앉는 위지황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했다. 복귀하자는 비무영의 말을 무시하고 동정호를 향해 남하를 하던 위 지황이 조그만 마을의 이름도 없는 주점에서 북상하는 남궁세가, 아니 남궁민을 만나게 된 것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의 오후였다. 입이 한 자나 나온 비무영을 달래면서 술을 들이키던 위지황은 시끌 벅적 요란을 떨며 주점으로 들어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보고는 잠시 시 선을 두었다가 즉시 고개를 돌렸다. 저마다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이 분 명 무림인이었고 눈을 마주쳐 괜한 시비에 시달린 것이 한두 번이 아 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뭔가가 이상했다. 자꾸만 뒤통수가 간지러운 것이 영 신경 쓰이고 기분도 묘했다. 그 냥 무시하기엔 뭔가 운명적인 것이 느껴졌다. 결국 막 술잔을 들어 술 을 입 안에 털어 넣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기운에 이끌려 고개를 돌렸 다. 그리고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들어서는 남궁민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머리 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온몸이 굳었다. 입에 댔던 술잔이 떨어지고 술이 흘러 옷을 적셨다. 팔은 여전히 술잔을 든 모습이었다. 동그랗게 떠진 눈은 태어나서 그만큼 커진 적이 없었다. 당황한 비무영이 아무리 눈치를 줘도 그녀가 주루에 들어서고 자리 에 낮을 때까지 위지황은 굳은 모습 그래로였다. 바로 그날부터였다.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어설픈 인사를 나눈 후부터 위지 황은 남궁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다. 모든 대화는 그녀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끝났으며 시선은 단 한시도 그녀에게서 덜어지지 않았다. 남하하던 발길도 그녀를 따라 뒤로 돌려졌다. 동정호 얘기를 꺼냈던 비무영은 '그까짓 것 네놈이나 실컷 보고 와라!' 라는 핀잔을 들어야 만 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했지만 먼발치에서라도 그녀를 보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다가 어제야 비로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동행을 허락한 것이었다. 지난밤에는 꿈속에서 그녀를 만나는 행복도 맛볼 수 있었다. 꿈에서 도 그녀는 선녀처럼, 아니 선녀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아름다웠다. 비록 꿈이었지만 그녀와 행복한 시간, 달콤한 밀어(密語)를 나누던 순간이 비무영에 의해 깨졌다는 것을 상기한 위지황이 몽롱했던 표정 을 돌변시키며 소리쳤다. "그런데 네놈이 그것을 깬 것이다!" "이거야 원. 제발 그만 하세요. 짝사랑도 그쯤 되면 병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짝사랑이 아니라니까요." "중요한 게 아니라니!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다고! 대체 네 놈이 중요하다는 게 뭐야?" 위지황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북천이 본격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래∼ 움직였다면서, 네가 전에 말했잖아." "소림이 무너졌습니다." 순간, 지금껏 귀찮다는 표정으로 일관햇던 위지황의 얼굴이 확 변했 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림이 무너져? 누구한테? 서, 설마?" "예, 우리 북천에게 무너졌습니다. 곡주님께서 직접 나서셨다고 하 더군요." 지금껏 소림을 무너뜨렸던 문파가 몇이나 있었던가! 한껏 가슴을 펴며 대꾸하는 비무영은 그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운 모 양이었다. "진짜냐?" "그럼 거짓말이겠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밖은 말 그대 로 난리가 났다니까요." 사실이었다. 비무영의 표현대로 지금 무림은 엄청난 충격과 경악에 휩싸여 있었 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소림사가 무너진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작 반나절의 시차를 두고 전해진 세 가지 소식이 무림을 강타했다. 첫 번째 소식은 서쪽에서 들려왔다. 동진하는 서천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던 대파산이 무너졌다. 사 천무림인들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배수의 진을 쳤던 정도맹의 무인들은 결국 노도와 같은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패퇴를 하고 말았다. 혹자는 실력에서 밀린 것이 아니라 인질을 앞세운 저열한 방법에 어 쩔 수 없이 물러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패자의 변명일 뿐이었다. 또한 이전부터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대파산에선 삼시파천이라는 별 호를 얻을 만큼 적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을지호가 혈궁단의 단주와 함 께 실종되었다. 서천에서는 자신들의 손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주장하 였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대파산의 수비진이 무너지고 을지호가 실종된 것은 분명한 사실. 그것만으로도 세인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 소식은 남쪽에서 들려왔다. 파죽지세로 몰아치던 남천 흑월교, 그리고 풍전등화(風前燈火)에 빠 진 만독문. 만독문마저 무너지면 광서성은 완벽하게 흑월교의 손아귀에 떨어지 게 되고 패천궁의 입지는 그만큼 약해지게 될 터. 그것만큼은 무슨 일 이 있어도 막아야 했던 패천궁은 만독문을 돕기 위해 흑기당과 적기당 을 급파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백오십 적기당의 무인들이 모조리 전멸하고 흑기당 또한 고작 이십 여 명 안팎의 생존자를 남기고 무너졌다. 지금껏 패배보다는 승리에 익숙했던 그들이기에 전멸과도 다름없는 결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패배보다 더 큰 충격을 안긴 것은 따로 있었다. 함께 흑월교를 상대하는 듯했던, 철석같이 믿고 있던 만독문이 결정 적인 순간에 칼을 돌려 공격을 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흑기 당과 적기당의 무인들은 변변한 대항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도륙 을 당하고 말았으니. 이후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만독문은 사천혈사 이후 중원에서 철수 하던 흑월교가 훗날을 위해 은밀히 남겨놓은 전초 기지였다. 수백 년 간 철저하게 위장한 채 때를 기다렸던 만독문은 마침내 단 한 번 그 본모습을 드러내어 흑월교, 나아가 사천혈맹의 가장 큰 적이라 할 수 있는 패천궁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그 한 번의 싸움으로 패천궁은 전력의 삼분지 일을 잃었다. 그것은 곧 흑월교와 꽤나 버거운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 소식은 앞의 두 가지 일보다 조금 늦게 알려졌다. 하지만 그 것이 몰로 온 파급 효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소림사가 무너졌다. 태산북두라는 이름으로 무림에 우뚝 솟아 있던 소림사가 비밀리에 남하한 북천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굴욕적인 조건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는 것.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천에 의해 날조된 소식이라며 애써 무시를 했 다. 그렇지만 소문은 불같이 일어났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삽시간에 전 중원에 퍼졌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소림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소림사를 찾은 이들은 소문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광경을 목도하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 사람도 있 었다. 결국 그들의 입을 통해 모든 소문이 사실임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크 나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소림은... 무너진 것이었다. "흠,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을 텐데." 뜻 모를 한숨을 내뱉은 위지황이 말했다. "꽤나 치열하게 저항을 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쪽도 피해를 많이 입 고. 그러나 결국 굴복했습니다." "소림이 무너졌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었어?" "밑에서요. 벌써 전 중원에 퍼진 모양이던데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듯합니다. 남궁세가 사람들도 모여서 그 얘기를 하고 있습 니다." 위지황의 눈이 반짝였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그럼, 가주도 계시냐?" 지금껏 했던 모든 말들의 의미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궁금하면 내려가 보시던가요." 비무영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치황의 신형은 문을 나서고 있었다. "중증(重症)이야, 중증." 썰렁하게 흔들거리는 문을 보며 비무영은 피식 웃음 짓고 말았다. * * * 황보세가 내 집의전. 원래는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북천에 어떤 식으로 선공을 가할 것인 지를 논의하고자 모인 자리였으나 갑작스럽게 전해진 비보(悲報) 때문 인지 좌중의 분위기는 극도로 침울했다. 특히 지난밤 백팔나한을 이끌고 황보세가에 도착한 나한당주 명경(明 憬)은 본산이 악도들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할 말을 잃 고 있었다. 황보장이 먼저 운을 뗐다. "참으로 황망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천하의 소림사가 어쩌다가..." "결국 선공을 미루고 놈들에게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 생한 것이외다." 오상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팽만호가 즉시 반박을 했다. "애당초 놈들의 목적은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것. 공격을 했다고 뭐 가 달라졌겠소이까?" "그건 아니지요. 이렇게 대치만 하고 공격을 하지 않으니 정예를 우 회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놈들을 상대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함부로 준동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소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다니! 흠흠, 그건 무슨 소린가?" 버럭 화를 내던 오상이 헛기침을 하고 어투를 바꿨다. 비록 그에 비해 한참 어린 정소였으나 한 문파의 주인이었다. 나이 어린 후배 대하듯 함부로 하는 것은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단견의 안색이 확 바뀌는 것을 의식한 봉학경이 그의 옆구리를 재빨리 찌르며 눈치를 준 까닭이었다. "놈들이 비성에 똬리를 틀고 움직이지 않은 것은 고작 사나흘밖에 안 됐습니다. 물론 그 정도 시간이라면 소림까지 이동을 할 수 있습니 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한다면 말이지요. 하나 그것은 애당 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재빨리 되묻는 오상의 말에는 약간의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만한 인원이 빠져나가는데 눈치재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 습니다." 정소의 말에 오상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그토록 많은 인원이 비성을 비롯하여 인근 지역을 철저하게 살피는 수백의 눈 동자를 피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미리 움직였단 소린데....." 팽만호의 말에 정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낙검문을 위시하여 주변 문파들을 무너뜨린 이 후 따로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흠, 이후의 놈들의 행보를 본다면 일리가 있네. 유난히 소란스럽게 움직였지."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멋지게 속고 말았지요." 정소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지어졌다. 천하의 모든 정보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다는 개방의 방주로서 수백 명이나 되는 인원이 움직이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 었다. 상황이 그러할진대도 오상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굽히지 않았다. "어쨌든 선공을 했어야 했습니다." "커흠!" "흠!!" 모두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신중론을 주장했던 팽만호 등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곽화월이 나섰다. "다들 진정하시요. 어차피 지난 일입니다. 지금은 과거의 일을 따지 기보다는 앞으로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상의해야 할 것입니다. 소림이 무너졌습니다. 어저면 인근에 있는 개방의 총단도 공격을 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공격해 봤자 별거 없습니다. 개방은 방주가 있는 곳이 곧 총단이지 요." 단견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정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무튼 지금은 과거의 일고 다툴 때가 아니라 차후의 일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입니다." 곽화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시 입을 다물었던 오상이 말했다. "논의라 할 것도 없습니다. 당장 놈들을 쳐야 합니다." "어디를 말함입니까?" "당연히 눈앞에 있는 놈들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소림을 칠 정도라 면 최정예가 움직였을 터. 남아 있는 자들의 전력이야 뻔하지 않겠습 니까?" 오상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보윤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공격하기는 쉬워도 승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쉽지 않다니, 어째서 그런가?" "기다리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많은 위험을 수반합니다. 특히 작정 을 하고 수비하는 자들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애당초 병력을 나누어 한쪽은 시선을 끌고 다른 한쪽으로 소림을 공격한 것은 위험을 감수한 작전이었습니다. 그것이 들켰을 때를 대비한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겁니 다. 어쩌면 우리들이 공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황보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저마다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허허, 이거야 원." 답답한 마음에 오상이 가슴을 두드렸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한쪽 구석에서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있던 노 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병력을 둘로 나누는 것이 좋겠네."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 노인에게로 행했다. 그는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거인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면서도 태연 하기 그지없었다. 지나온 세월을 기록이라도 하듯 얼굴에 무수한 흉터 자국을 지니고 있는 노인. 과거 실전 싸움의 달인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지금은 삼 광문에서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니 투귀(鬪鬼) 이 성진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보윤이 정중하게 물었다. "저들이 싸우지 않고 버티기를 일관한다면 까짓 원하는 대로 해주잔 말일세. 우리도 병력을 나눠 한쪽은 소림을 구하러 가고 다른 한쪽은 그냥 이렇게 대치만 해도 좋지 않겠나?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 할 필요도 없어." "제 생각도 같습니다. 눈앞에 있는 상대도 중하긴 하나 소림을 구하 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림이 무림에 차지하는 위치도 위치고, 그대로 방치했다간 언제 화산이나 종남파가 위기에 빠질지 모 르니까요. 어쩌면 벌써 움직였을지도......" 곽검명은 숭산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화산과 종남마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를 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는지 모두들 우 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형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으나 혹여 병력을 나누었다가 각개격파 라도 당한다면....." 단견이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림이 중하듯 이곳도 역시 중하지.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아 니니까 그리 걱정할 건 없네. 저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전 력에 구멍이 났다는 것이고 우리 또한 공격이 아닌 수비만 한다면 쉽 게 당하지는 않을 터.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걸세. 그렇지 않습니까?" 황보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은 들겠지만 가능할 것 같네. 물론 어느 정도의 도움은 필요하겠 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마 황보세가에 모든 짐을 지우겠습니까?" 곽검명이 살짝 웃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것으로 병력을 양분하자는 이성진의 의견은 사실상 받아들여진 것 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것은 어떻게 병력을 나누느냐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예상대로다. 빠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출발할 것이 다." "하오면 이곳은?" "황보세가와 팽가, 방주와 그를 수행하는 몇몇을 제외한 개방이 남 기로 했고 악가도 절반의 인원이 남는다." "그렇게나 많이 말입니까?" 부설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리되었다. 또한 인근의 군소문파들이 남을 것이다. 당가에서도 몇 명이 남을 것이고." 황보세가에 남을 문파들을 열거하던 문주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다 소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손쉽게 일을 도모하려면 당가를 주의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떠나면 즉시 제거를 시작해라." "제거를 말입니까?" 부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그리 놀라느냐?" "제거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행여나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제거된 것을 모르게 하면 될 것이다." "예?"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부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문주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거를 하되 그것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면 되지 않느냔 말이다. 역 용(易容)을 해도 상관이 없고 필요하면 인피면구(人皮面具)라도 뒤집 어 쓰면 될 것이다." 한마디로 당가의 무인들을 제거하고 수하들로 하여금 위장시키라는 말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문주의 말을 이해한 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단번에 끝장을 내야 한다. 저들과 협 조도 잘하고." "명심하겠습니다." 부설은 자신감 넘치는 음성으로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그 소식은 확실한 것이더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부설은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을지호 말이다. 삼시파천이라는 별호를 얻었다며?" "철혈마단이 놈에게 꽤나 많이 시달린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누가 뭐라 해도 궁귀의 후예다. 그 실력이 어디 가겠느 냐? 한데 실종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었을까?" 한데 그리되기를 원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철혈마단에선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단정할 만큼 확실하지 가 않습니다." 그다지 자신없는 대답이었다. "살았을 거다." 문주는 단언하듯 말했다. "영웅은 그렇게 쉽게 죽는 법이 아니거든." * * * "정신이 들어요?" 너무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음성이었다.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본 을지호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 렸다. "후∼" 긴장이 풀린 것인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린 사마유선이 을지호의 손을 꼭 움켜 쥐었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감격과 환희로 격렬하게 떨렸다. 그의 상세를 살핀 모든 의원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고 결국 의식을 회복한 것. 어찌 기쁘지 않을까?" 한데 방 안에는 을지호의 회복을 그녀만큼이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 었다. 정확히 사흘 전, 새로 얻은 첩의 펑퍼짐한 엉덩짝을 두들기다가 난 데없이 쳐들어온, 한줄기 숨결만 남긴 채 아무리 살펴봐도 죽은 시체 나 다름없는 을지호를 치료해야 했던 이름 모를 늙은 의원은 환호성을 지르는 것도 부족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무조건 살려내라는 사마유선의 기세가 어찌나 무섭고 살벌하던지 노인은 사흘 동안 잠은커녕 숨조하 제대로 못 쉬면서 을지호에게 매달 렸다. 인근에서 제법 실력있는 의원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재산도 남부럽 지 않게 모았고 또 스스로의 실력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노인. 그런데 을지호가 입은 내상은 그로서도 난생처음 접하는 것이었 다. 또한 손쓸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그저 외부의 상처가 덧나지 않게 매일같이 소독하 고 외상약을 발라주는 것과 극도의 회의감을 느끼며 날개에 커다란 상 처를 입은 매 한 마리를 돌보는 것뿐이었다. 결국 을지호가 의식을 회 복한 것은 노인의 의술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막 강한 내공과 천고제일의 심법인 무위공이 어우러지며 준동했기 때문이 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을지호가 의식을 회복한 것이고, 그것 은 생과 사의 기로에 섰던 노인이 생로(生路)로 들어섰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그토록 기뻐하면서 눈물까지 흘릴 수밖에. "여기가 어디요?" 천천히 눈을 돌려 방 안을 살핀 을지호가 물었다. "옥루(玉淚)라는 마을이에요." "옥루?" "장강을 끼고 있는 조그만 마을이지요." 사마유선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장강이라면... 꽤나 멀리 왔구려." 대파산에서 장강이라면 아주 먼 거리는 아니나 가깝다고도 말할 수 없는 거리였다. "죽자 살자 달렸지요." "후∼" 을지호가 엷은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오대봉공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는 것과 그 공격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는데, 다만 자신을 구하고자 사 마유선이 어떠한 고초를 겪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며칠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소?" "닷새요." "고생이 심했구려." "아니요. 공자께서 영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웠을 뿐이지요. 고생이라니요? 이렇게 살아나신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답니 다." 사마유선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점점이 떨어지는 눈물을 말없이 쳐다보던 을지호가 손을 뻗어 눈물 을 닦아냈다. "울지 마시오, 사마 소저. 소저의 말대로 이렇게 살아나지 않았소." 을지호는 뭉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고개를 번쩍 들며 쳐 다보는 그녀의 눈매가 곱지만은 않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건가요?" "무슨?" "언제까지 '사마 소저'라고 부를 것인지 물었어요." "아! 그, 그게, 그러니까....." 당황한 을지호가 답을 찾지 못해 허둥거리자 그녀가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름은 유선이에요. 사마유선! 사마 소저가 아니지요." 그 즉시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을지호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알겠소. 사마 소... 아니, 유선. 이제는 편하게 대하리라." "정말인가요?" "약속하겠소." "고마워요, 오라...버니." 스스로가 입을 열고도 민망한 모양이었다. 사마유선의 얼굴이 홍시 처럼 달아올랐다. "불러놓고 뭐 그리 부끄러워하시오?" "흥, 누가 부끄러워한다고 그래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인지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표정을 싹 바꿨 다. "하하, 알았소. 내가 오해한 모양이니 화를 푸시오.' "화는 나지 않았어요." 그의 사과에 언제 그랬냐는 듯 빙그레 웃는 사마유선. "몸은 좀 어떤가요?" "나도 모르겠소.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한 것은 며칠 더 지나 봐야 알 것 같소." "그렇군요." 걱정 때문인지 사마유선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을지호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나 저나 밖은 어찌 돌아가고 있소?" 그렇잖아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무림이었다.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러나 그가 의식을 잃고 있는 내내 그의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사마유선도 무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사마유선이 가까이에 있던 주루를 떠올리며 말했다. * * * 비성에 주둔하고 있는 북천의 진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들이키던 수뇌들에게 하나의 서찰이 도착한 것 은 해가 막 떨어진 초저녁 때였다. "흠, 소림을 구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이 떠났다고 하는군." 우선적으로 서찰을 살려본 장백선옹이 서찰을 척목은에게 전하며 말했다. "수하들로부터 이미 보고를 받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것은 황보세가 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남아 있냐는 것이지요." 천권문의 문주 헌원후(軒轅吼)가 술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황보세가는 그렇다 치고 팽가와 개방이라...... 제법 굵직한 문파 들이 남았소이다." 단숨에 서찰을 읽어 내려간 척목은이 서찰을 건넸다. "그래 봤자 적수가 될 수는 없겠지요. 비록 한빙곡과 흑룡문이 빠졌 어도 그 정도 인원을 상대하지 못할 우리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쉬울 것 같지만은 않네." 고개를 흔들며 부정을 한 장백선옹이 수염에 묻은 술을 훑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인근의 크고 작은 문파들이 모두 남아 있다고 하네. 게다가 작심하 고 수비만 할 모양인데....." 서찰은 내려놓고 술잔을 든 헌원후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수비만 한다고요? 하하하!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턱밑에 비수가 꽂혀 있는 것도 모르는 불쌍한 바보들이지요." 장백선옹이 살짝 안색을 찌푸렸다. "너무 자만하지는 말게나. 자칫하다간 바보들에게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아무튼 저들이 돕는다고 했으니 황보세가를 무너뜨리는 데엔 큰 무리는 없을 걸세." "언제쯤 공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선옹?" "저쪽에서 때를 알려온다고 햇으니 기다리세. 술이나 한잔하면서 말 이야. 시간이 좀먹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장백선옹이 술잔을 들자 척목은과 헌원후도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 리곤 서로에게 웃음을 보인 후 단숨에 들이켰다. 그것은 마치 아직 시 작도 하지 않은 싸움의 승리를 자축하는 축배처럼 보였다. * * * "확실한가요?" 아니길 바라며 묻는 온설화의 음성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 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사중명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확인했습니다. 문성이 분명합니다." "......" 온설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예기치 못한 만독문의 배반으로 받은 피해를 수습하 느라 극도로 지친 그녀에게 제갈은의 죽음은 또 다른 의미에서 큰 충 격으로 다가왔다. "제갈세가에 소식은 전했나요?"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녀가 힘없이 물었다. "예. 일단 전서구를 띄웠습니다. 지금쯤이면 저들도 알고 있을 겁니 다." "시신은 어찌했습니까?" "관에 안치시켰습니다. 오늘 내로 제갈세가로 보낼 생각입니다." "정중히, 최대한의 예를 갖춰 준비하세요." "그리하고 있습니다. 한데 문제는......" 사중명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일이 우습게 되었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지요?" 그녀는 사중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일단 들어보고자 하였다. "지금이야 같은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못 죽여 안달하던 사이였습니다." "계속하세요." "제갈세가라면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사실상 정도맹의 머리와도 같은 가문입니다. 제갈은은 그런 제갈세가 내에서도 화룡점정(畵龍點睛) 같 은 인물이지요. 한데 그런 제갈은이 패천궁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제거했다고 여기겠지요." "그렇잖아도 힘든 싸움을 하는 중인데 자칫하다간 정도와 또다시 틀 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최악의 상황. 사중명은 무척 이나 심각했다. 그런데 정작 누구보다 걱정을 하고 두려워해야 할 온 설화에게서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설화의 알 수 없는 태도에 살짝 의구심을 가지는 사이 그녀가 고 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일이 그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약간의 오해는 받을 수 있겠지만 생각만큼 심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분과 제가 나눈 일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일어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갈세가에서도 분명 그 점을 직시하고 있겠지요." "그러면야 다행이지요." 확신하는 온설화의 태도에 사중명도 약간은 안심하든 듯했다. "참, 흉수에 대해 어떤 흔적이라도 남았나요? 사용한 무공이라도..." "후∼ 아직 조사 중입니다만,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압도 적인 실력에 당했는지 변변히 대응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중명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갈은 선배가 다녀간 것은 궁주님을 비롯하여 극소수의 인물만 알 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적의 간세가 패천궁에서도 암약하고 있 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것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가." "조사하실 생각입니까?" "물론이지요."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위가 높은 만큼 반발이 클 수도 있습니다." 제갈은의 방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 도 그의 행적이 노출되었다는 것은 그 열 명 안에 적의 간세가 숨어 있 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제는 그 열 명이 패천궁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단 궁주님께 보고를 올려 재가를 받아야겠지요." "재가를 받는다 하더라고 가급적 은밀히 조사해야 합니다. 조사를 당하는 사람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치밀하게." "대주께서 고생을 좀 하셔야겠네요." 온설화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요." 이미 그 일이 비혈대에게 맡겨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는지 사중명 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휴우∼ 어쨌든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우리도 상당한 피 해를 보았고 저쪽에서는 대파산에 이어 소림까지 무너진 상황입니다. 가급적 빨리 흉수를 찾아내세요. 참, 사마 단주의 소식은 들어왔나요?" 순간, 사중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하나 수하들을 급파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는 을지호를 따라가겠다는 사마유선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혼자 돌아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반드시 찾아내야 해요. 사마 단주도 그렇지만 을지호라는 인물의 존 재는 꽤나 특별해요. 어쩌면 지금의 상황에 큰 변수를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누구보다 사중명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 비혈대에게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군요." 한숨을 내쉬는 온설화의 낯빛이 미안함으로 물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 이유니까요.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담담히 대꾸한 사중명이 모든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방문을 나섰다. "아, 그리고......" 아직 못다 한 말이라도 있는지 막 방문을 나서던 사중명이 고개를 돌렸다. "을지호 그 친구도 중요한 현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변수가 되겠지만 유일한 존재는 아닙니다." "예?" 온설화가 그 말의 의미를 되묻자 사중명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 답했다. "침묵하는 원로원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입니다." 제45장 경송창어세한(勁松彰於歲寒) 대황하(大黃河). 정주(鄭州)의 북쪽에서 도도히 흐르는, 반대편 강가가 보이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어떤 곳은 강폭이 십여 리에 이를 정도로 대단한 위용 을 자랑하는 강을 일컬어 사람들은 대황하라 불렀다. 한데 지금은 지 난해 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대황 하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강의 물줄기가 말라 버린 상태였다. 강의 중심을 제외하고 바닥의 대부분이 쩍쩍 갈라지고 황토먼지가 풀출 일어나는 대황하. 바로 그곳에서 소림사를 구하기 위해 황보세가를 떠난 무인들과 그 들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인 북천의 주력이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마 주했다. 앞으로 벌어질 참상이 보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오랜 가뭄을 걱정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지 하늘엔 진한 먹구름이 끼 어 있었다. "아미타불! 소승은 명경이라 합니다." 나한당주 명경이 합장하며 허리를 숙였다. 주변엔 그보다 나이도 많고 연배가 훨씬 윗길인 사람도 있었지만 소 림사를 구하기 위해서 출정한 것임을 감안해 그가 대표로 나선 것이었 다. "위지요입니다." 위지요도 마주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이렇듯 선선히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 소림을 피로 물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미타불!" 명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림을 피해 싸우자는 의견을 따라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미 한차례 피로 물들인 그들이 아니던가. 참으로 뻔뻔한 말이 아닐 수 없 었다. "본 사가 큰 은.혜.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라면야 거처를 얻게 된 우리들이 받았 지요." 이 이상 심한 모욕이 어디 있을까?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인식한 명경이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면 그 답례를 하시지요. 무운(武運)을 빌겠습니다." "하하, 적에게 무운을 빌어주다니... 하하하, 아무튼 고맙게 받겠소 이다." 위지요는 조금의 여유도 잃지 않았다. "......"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기는 위지요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명경이 몸을 돌렸다. 피식 웃은 위지요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때를 같이하여 양측 진영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위지요가 동원한 북천의 병력은 사백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는데 그 에 반해서 소림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이들은 거의 천여 명에 이르 는 엄청난 숫자였다. 처음 황보세가를 나설 때만 해도 수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았다. 하 지만 소림사가 북천에 의해 무너졌고 그런 소림사를 구하기 위해 본산 을 떠나 있던 백팔나한을 비롯하여 화산파, 종남파, 삼광문 등이 나섰 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도 없이 많은 문파와 무인들이 힘을 보탰다. 소림사와 인접해 있던 대부분의 군소문파가 참여를 했고 멀리 산동 에서도 구성문(苟成門), 무량검파(無量劍派) 등이 달려왔다. 딱히 내세 울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기(義氣)만큼은 하늘을 찌른다고 자부 하는 이들가지도 속속 모여드니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던 인원은 대황 하에 도착할 즈음엔 천을 넘어서고 있었다. "와아아아!!" 족히 천오백에 이르는 무인들이 지르는 함성은 대항하의 물줄기를 움츠러들게 만들 만큼 어마어마했다. "공격하라!" 어디선가 묵직한 힘을 실은 명령이 떨어지고 화산파의 제자들이 가 장 앞서 달려나왔다. 검왕 곽화월의 장문제자이자 차기 장문인으로 유력한 유현(喩晛)이 선두에 서고 화산삼수(華山三秀)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곽온(郭溫), 곽열(郭烈) 형제와 신강생(伸剛生)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여섯 개의 십팔나한진이 펼쳐지고, 그 나한진들이 서로 연계하여 만 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백팔나한진이 그 뒤를 받쳤다. 좌측엔 종남파를 중심으로, 우측엔 삼광문이 여러 군소문파들을 이 끌고 포위하듯 적을 압박해 들어갔다. 맨 후미에선 악가와 당가가 나머지 인원들을 이끌었는데, 그들은 예 비 병력의 성격이 강했다. 까깡! 미친 듯이 솟아오르는 황토먼지를 뚫으며 최초의 충돌음이 울려 퍼 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넓디넓은 대황하는 날카로운 병장기의 부딪침, 고 통의 신음 소리, 피에 굶주린 살귀(殺鬼)들의 함성이 한 치 앞도 보이 지 않게 피어오른 먼지들과 한데 어울려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공격하랏!" 정오 무렵. 장백선옹의 입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이른 아침 비 성을 떠나 미리 진을 치고 있던 북천의 무인들이 황보세가를 향해 일 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천하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는 북천의 무인들. 슈슈슈! 그 함성들 사이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물체가 있었다. "피, 피햇!" "크아악!" 가장 앞서 달러나가던 이들이 갑자기 날아든 화살에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컥!" "크흑!" 곳곳에서 비명성이 터졌다.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데다가 화 살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고슴도치가 되어 찰라지간 열 명도 더 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북천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물러서지 마라! 공격, 공격하랏!!" 미친 듯이 외쳐 대는 고함 소리가 효과를 본 것일까?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사오십 명도 넘는 인원이 접근에 성 공했고, 그들은 달리던 탄력을 이용해 힘껏 도약을 했다. 한데 난데없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 "크악!" 처음으로 황보세가의 담을 타고 오른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 이 터져나왔다. 기세 좋게 올라선 담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날카로운 세침이 무수하게 널려 있었는데, 그것 중 하나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사내의 발을 파고든 것이었다. 독까지 묻어 있었는지 힘없이 굴러 떨어진 사내는 거품을 물며 경련 을 하다가 곧 숨이 끊어졌다. 막 담을 타고 넘으려던 대다수의 인원 이 그와 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물론 다 중독이 되어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멀쩡한 몸으로 담을 넘은 사람도 있긴 하였다. 하나 그들을 기다리 는 것은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는 적뿐. 차라리 담을 넘지 않으니만 못 한 신세였다. "비겁한 놈들 같으니!" 척목은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놈들이 독과 암기를 깔아놓았다! 담을 거치지 말고 단숨에 뛰어넘 어라!" 척목은이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도 과히 좋은 방법 은 아니었다. 담을 뛰어넘기 위해선 지면에서 양 발을 떼야 햇고 그만큼 허공에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었다. 자연적으로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밖 에 없는데, 그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적이 넘어오 기만을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춘 자들이 있기에 더욱 그랬다. 물론 쓰러진 자들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담을 넘었고 결국 굳건히 닫혀 있던 황보세가의 정문은 활짝 열렸다. 하지만 백여 명이 넘는 인 원이 변변한 싸움도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고작 정문을 여 느라 입은 피해치고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죽일 놈들!" "이제 시작인데 생각보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구려." 백 명도 넘는 인원을 희생하면서 얻은 결과가 고작 정문을 통과하고 이십이 간신히 넘는 적을 주살했다는 것을 보고받은 장백선옹의 안색 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 * * "어린 나이에 제법 훌륭한 성취를 이루었구나." 곽화월이 숨을 헐떡이고 있는 위지청에게 마치 손자를 대하듯 부드 럽게 말했다. "그러나 아직 나의 상대는 아니다." 곽화월은 싸움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게 달려온 위지청의 용기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나이에 맞지 않는 훌륭한 무공 까지 지닌 것을 보며 나름대로 손속에 인정도 두었다. 위지청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나기엔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이다." 곽화월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만용(蠻勇)도 상대를 봐가면서 부려야 하는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소이다." 위지청이 검을 곧추세우며 대꾸했다. 하나 곽화월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다가와 위지청의 어깨에 살며 시 손을 얹는 위지요에게 향해 있었다. "그만하면 애썼다. 저분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사내라면 물러서야 할 때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타이르듯 이르며 아들의 고집을 꺽은 위지요가 빙글 몸을 돌렸다. "과연 명불허전! 검왕이 어째서 검왕인지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 었습니다. 더불어 못난 자식에게 인정을 베풀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고마워할 것 없네. 피아(彼我)를 떠나서 인재를 아끼는 마음은 똑같 은 법이니, 또한 살심을 품었다 하여 쉽게 목숨을 빼앗을 수 있겠는 가? 다른 누구도 아닌 북천의 천주께서 친히 지켜보고 있는 것을." 곽화월은 위지청과 싸움을 하는 동안 한 쌍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자 신을 관찰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이 위지요라는 것 을 금장 알 수 있었다. '맹수일수록 새끼를 강하게 키운다던가!' 곽화월은 검왕이라는 명성에 짓눌리지 않고 덤벼든 위지청도 위지청 이지만 어쩌면 사지(死地)에 발을 담그고 있는 아들을 그저 방관으로 일관한 위지요에게 더욱 감탄하고 있었다. "하하, 검왕게서 살심을 품으셨다면 제가 나서도 소용없는 일이지 요." 위지요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곽화월도 뜻 모를 미소로써 그에 대 응했다. 피가 난무하는 주변의 상황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한가로운 풍경. 그 러나 천천히 한 발을 내딛은 위지요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자 분위 기는 삽시간에 변해 버렸다.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군요." 곽화월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원하던 바네." 상대는 적의 우두머리였다. 그를 쓰러뜨린다면 예상외로 손쉬운 승리를 얻을 지도 모르는 일. 검 을 쥐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선공(先攻)을 양보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네." 당연한 소리였다. 지금의 싸움은 단순히 무공을 겨루는 비무가 아니 었다. 생사를 겨누는 싸움인 것이다. 곽화월의 말에서 치열한 전의(戰意)를 느낀 위지요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곽화월의 시선이 위지요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눈 동자에 박혀 있었다. 그것은 위지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노려보던 그들은 무슨 힘에라도 이끌렸는지 한 발짝씩 서로에게 접근해 갔다. 삼 장, 이 장, 일 장. 그리고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 지 않았다. 검을 맞댄 그들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치 열하게 상대를 견제하고 일격을 가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는 애써 설 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르르. 미간(眉間)에 맺힌 땀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흘렀다. 순간, 곽화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땀의 일부가 눈 속을 파고들어 주의를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타핫!" 힘찬 기합성이 터져나왔다. 단숨에 검을 밀쳐 내고 그것과 동시에 화산파 최고의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십팔로낙영검범(十八路落英劍法)을 펼치는 곽화월. 극쾌(極快)의 원리까지 도입한 그의 검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 르게 움직였고 그 빠름 속에서도 눈을 현혹 시키는 수많은 변초(變招) 가 숨어 있었다. 그 변화무쌍한 빠름 앞에서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분루와 한숨을 흘 렸던가! "아!" 멀리서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감탄과도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피할 수 있는 길목을 모조리 차단한 채 가히 섬전과도 같은 공격을 보며 그들은 어째서 곽화월을 검왕이라 부르는지, 또 와왕 중 으뜸으 로 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맞서는 위지요가 한 줌 고혼(孤 魂)이 되어 스러지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정각 위협을 느껴야 할 위지요는 태연했다. 검을 맞대던 처 음의 자세 그대로였다. 하지만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는 눈동자는 곽화 월의 움직임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채챙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느려 보이기만 하는 위지요의 검에 곽화월 의 고역이 무위로 돌아갔다. 빠름을 상대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 상대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거나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정중동(靜中動).' 위지요의 고요한 자세를 본 곽화월의 눈빛이 흔드렸다. 그리곤 어설 픈 공격으론 오히려 치명적인 역습을 허용할 뻔한 무지함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선공을 하기는 했으나 최상의 것은 아니었다. 팽팽한 대치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움직인 것뿐. 제삼자가 보기엔 어떤지 몰라도 분명 기세 에서 밀리고 있었다. '탐색전은 없다. 전력으로!' 고요함 속에 자신을 위장하고 있지만 위지요에겐 분명 미증유의 힘 이 존재했다. 전신의 감각이 그것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승부는 박빙. 어쩌면 패할 수도 있었다. 패배란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 애써 불안감을 떨친 그가 구궁보(九宮步)와 유운보(流雲步)를 절묘하 게 배합하며 몸을 움직였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장을 내겠다는 듯 검에 모든 힘을 집중시킨 곽화월! 파스스슷! 검봉에서 치솟은 희뿌연 기운이 위지요의 전신을 노리며 날아들었 다. 머리를, 가슴을, 옆구리를, 아랫배를...... 검은 하나일진대 뻗어 나간 기운은 열여덟 개. 지금껏 누구도 알지 못한 십팔로낙영검법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처음으로 안색을 굳힌 위지요가 가슴께로 검을 끌어당겼다. "대단하군." 짧은 한마디. 그게 다였다. "크하하하! 나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제법이다,늙은이!" 탁탑천왕 반포가 자신의 옆구리와 허벅지에 만들어진 검상(劍傷)을 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닥쳐라!" 오상이 노호성을 지르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한데 부상을 당한 것은 반포였건만 오히려 오상의 얼굴에서 초조감 이 묻어 나왔다. 목숨을 잃고 쓰러져 있던 시신에 의해 반포의 중심이 살짝 흔들리고 그 미세한 틈을 파고들어 승기를 잡은 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다. 승부를 끝내겠다는 생각에 오상은 종남이 자랑하는 분광형(分光形) 을 최후의 일격으로 사용했다. 분광형. 말 그대로 빛을 가르는 검. 하지만 빛을 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반포의 몸을 가를 수는 없었 다.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쳤건만 고작 두어 곳의 상처를 얻는 것에 만 족해야 했던 것이다. "늙은이! 이 몸에 상처를 입힌 대가는 톡톡히 받아야 할 것이다!" 반포가 오상의 검을 피하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태연한 겉모 습과는 달리 단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뻔한 그는 식은땀을 흘리 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 번은 운이 좋아 피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또다시 그런 위기가 찾 아온다면 장담할 수가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때려죽일 늙은이!' 반포가 이를 부득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타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그렇잖아도 쩍쩍 갈라진 강바닥이 요동칠 정도 로 힘껏 발을 내딛은 반포가 그의 독문절학이자 흑룡문을 지금의 위치 까지 끌어올린 천왕팔권(天王八拳) 중 연속기인 육권 교철몽락(交綴蒙 絡)과 수비는 젖혀두고 오직 공격만을 생각하는 칠권 저양촉번(저羊觸 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대금강을 맞이하면서도 사용하지 않고 아껴두었을 만큼 하나같이 막강한 위력을 지닌 공격. 주먹을 내지르기도 전에 이미 가공할 만한 압박이 느껴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권풍(拳風)에 오상의 옷과 허연 수염이 미 친 듯이 흔들렸다. 오상은 추호의 방심도 없이 공격에 대비했다. 그는 검을 두어 번 흔드는 것으로 권풍의 압력을 지워 버렸다. 하지 만 그것은 미끼와 같은 것이었다. 상대가 어찌 반응할 것인지를 떠보 는 미끼. 본격적인 공격은 바로 뒤따라오는 한줄기 웅휘한 기운이었 다.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압박이 심했다. 오상은 태을신공(太乙神功)을 운용하며 전신을 젓이기듯 들이닥치는 무형의 기에 대항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태을연환검(太乙連環劍) 을 펼쳤다. 꽈꽝! 권풍과 검풍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엉뚱하게도 주위에서 싸움을 하던 인물들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죽어랏!" 당연히 막을 줄 알았다는 듯 연속해서 주먹을 휘두르는 반포. 삽시 간에 무수히 많은 권영(拳影)이 난무하고 그것과 동시에 반포가 괴성 을 지르며 어깨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뒷골목의 삼류 무뢰배의 싸움도 아니고 상대가 저렇듯 무식하게 밀 고 들어올 줄은 생각지 못했는지 오상의 얼굴에는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막천석지(幕天席地)라는 초식을 이요해 노도처럼 밀려드는 권 영을 침착하게 막아니겨 선풍보(仙風步)를 이용해 재빨리 몸을 틀었 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상의 몸이 좌측으로 틀어지며 바람과 같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반포는 낭패한 표정 대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끝이다, 늙은이!" 오상에게 접근할 때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던 그는 천왕팔권의 마지막 초식이자 필살(必殺)의 초식인 비폭광류(飛瀑狂流) 를 쏟아냈다. '아뿔싸!' 옆구리를 파고드는 거력을 느끼며 오상의 안색이 하얗게 변해 버렸 다. 그제야 비로소 적의 공격에 너무도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것을 느 낀 것이다. 그러나 후회라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몸을 틀어도 피하지 못할 것 같았고 검을 돌리기에도 늦은 감이 있 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오상의 왼손이 반원을 그리며 공격에 대비했다. 꽈꽈꽝! "크헛!" "음." 조금 전과는 달리 다소 이질적인 충돌음이 들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 라도 한 듯 뒷걸음질쳤다. 결과는 극명하게 갈렸다. 절호의 기회를 맞아 자신이 지닌 최고의 무공을 펼친 반포가 고작 두 걸음 물러난 반면 임기응변의 방법으로 맞선 오상은 무려 일곱 걸 음이나 밀려났다. 옆구리 주변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흩날리고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가 내상이 만만치 않음을 반증했다. 그나마 태을장법(太乙掌法)이라 도 운용하지 않았다면 그의 목숨은 그 자리에서 끝장났을 것이다. "흐흐흐. 어떠냐, 늙은이! 느낌이 제법 묵직하지?" 승리를 확신한 반포가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마구 뒤끓는 진기를 진정시키느라 애쓰는 오상은 아무런 대꾸도 하 지 못했다. "이제 뒈져야 할 시간이다!" 반포가 진한 살소와 함께 접근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한 걸음을 내 딛기도 전에 고개를 홱 돌려야만 했다. "너는 또 웬 늙은이냐?" 그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다소 굳은 얼굴의 노인을 노려보 며 소리쳤다. 오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노인이 대답했다. "난 봉학경이라 한다네." * *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수적인 우세를 믿고 거친 파도처럼 들이닥친 북천의 무인들은 황보 세가 곳곳에 만들어진 함정과 매복으로 인해 예상외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정문을 돌파하느라 백여 명의 인원이 목숨을 잃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저지선을 뚫을 때도 그만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다만 일 방적인 피해를 입었던 첫 전투와는 달리 그들도 상대에게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실상 마지막 저지선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제외한 황보세가와 팽가의 모든 식 솔들이 싸움에 참여했고 그들을 돕기 위해 황보세가로 몰려들었던 여 러 군소문파의 무인들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연무장, 전각의 뜰, 전각과 전각을 연결하는 담벼락, 심지어 건물의 지붕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다. 집의 규모가 조그만 성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한 황보세가였지만 천여 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 싸우기엔 너무나 협소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가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다. 강호오왕으로 추앙받는 권왕 홍보장과 동생 벽력권 황보권, 그리고 그들 형제와 같은 연배인 팽가의 전대 가주 팽만호의 무공은 가히 전 율스러웠다. 그들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북천의 무인들은 추풍낙엽처 럼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렸다. 더러는 대항이라는 것을 하는 자들이 있 었지만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북천의 사기는 순식간에 땅에 떨어지고 반대 로 황보세가를 지키는 이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장백선옹이 장백파의 대장로(大長老) 이정(李淨)과 이장로(二長老) 도일곤(導一昆)을 동원하여 황보장을 막 고, 세하보와 천권문의 호법과 장로들이 합세하여 황보권과 팽만호 등 을 막고 나서야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기세를 다소나마 꺾을 수 있 었다. 그러나 한번 기울어진 승기는 좀처럼 회복되지가 않으니 일진일되(一 進一退)를 거듭하던 승부의 저울추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황보세가 쪽 으로 기울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는 어떻게든 싸움의 흐름을 바꿔보고자 척목은과 헌원후 도 싸움에 참여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몇몇의 인물을 단 숨에 쓰러뜨리고 각각 황보윤과 팽무쌍을 상대로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정말 끔찍한 늙은이로군." 홀로 후미에 남아 전반적인 싸움을 관장하던 장백선옹이 두 명의 장 로로도 부족하여 결국 세 명의 장로를 상대하는 황보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술직히 세 명의 장로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그로선 불가능한 일이 었다. 어쩌면 두 명의 합공도 버거울 수 있었다. 그러나 황보장은 불 가능해 보이는 일을 너무도 간단히 해치우고 있었다. 조금도 지친 기색없이 상대를 끊임없이 몰아치는, 가히 무신(武神) 과도 같은 그의 신위(神威)를 보며 장백선옹은 두려움과 전율가에 사 로잡혔다. 동시에 승패를 떠나 한바탕 시원하게 실력을 겨뤄보고 싶은 호승심이 생겨났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겨뤄보고 싶은 마음. 무인 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법한 마음이었지만 전체적인 싸움을 지휘해 야 하는 장백선옹으로선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피해가 계속 누 적되고 있거늘!" 마음껏 싸워보고 싶은 상대와 겨룰 수 없는 현실이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자꾸만 줄어만 드는 북천의 무인들이 가여워서일까? 장백선옹은 함께 황보세가를 치기로 하였던 중천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무척이나 화가 난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마치 그의 음성을 듣기라도 한 듯 전장 이곳저곳에서 당황해하는 비 명성이 터져 나왔다. 황보세가와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문파를 지켜내 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으로 대항했던 이들이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흠, 이제야 시작했군." 상황이 급변한 이유를 알고 있던 장백선옹이 살짝 풀어진 얼굴로 고 개를 끄덕였다. 하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선 미치고 환장할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내력이 흩어지고 있다!' 오랜 시간을 싸웠음에도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도도히 이어지던 내 력이 급격히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황보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더군다나 주변 상황을 보니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무 인들이 그런 상황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독?' 우선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독뿐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이 넘는 무인을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 는 것은 오직 독뿐이었다. '하지만 언제?' 이 정도로 치명적인 독이라면 분명 그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무형 (無形), 무색(無色), 무취(無臭)한 독도 있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책 에서나 있을 법한 말이었고 웬만한 독은 하독과 동시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었다. 한데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더구나 목숨을 빼앗는 독 이 아니라 내공만을 사라지게 만드는 독이라니! 죽자 살자 달려드는 상대를 뒤로하고 황급히 몸을 뺀 황보장이 같은 이유로 물러난 황보권과 팽만호를 보며 물었다. "자네들도 그런가?" 황보권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팽만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분명 독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독이 살포되었는지 모르겠습니 다. 더구나 놈들은 아무런 이상도 없고 우리들에게만 영향을 주고 있 습니다." "선별해서 중독시키는 독이라니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황보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내공이 점 점 사라지는 현상을 감안하면 달리 뭐라 해석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 상태로 싸우다간 전멸일세. 당장 물러나야 돼."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로든!" "그렇다면 일단 안심거 쪽으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식솔들도 그쪽에 있고." 황보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황보장이 남아 있는 내공을 애써 끌어 올리면서 힘껏 소리쳤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그렇잖아도 힘든 싸움을 하고 있던 이들은 퇴각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 즉시 몸을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망가는 상대를 순순 히 보내줄 북천의 무인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상대는 점점 내공을 잃 고 약해지는 중이 아니던가! "크악!" "으아아아악!" 곳곳에서 귀를 막고 싶을 정도의 처참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공격, 공격하랏!"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될 것이다!" 수많은 제자들과 수하들을 잃은 북천의 수뇌들이 악을 써가며 소리 치고 북천의 무인들은 더욱 미쳐 날뛰었다. 삽시간에 백여 구의 시체가 생겨났다. 지금까지 목숨을 잃은 이들이 모두 이백여 명. 한데 반 각도 되지 않 는 짧은 시간에 절반도 훨씬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 이럴 수가!" 후미에서 도주하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던 황 보장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에 안타까운 신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으아악!" 갑작스런 비명 소리, 그런데 후미가 아닌 앞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황보장과 팽만호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그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경악으로 문들었다. "도, 도대체가!"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가가, 다른 곳도 아닌 당가가 배반을 하여 도주하는 이들을 공격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생과 사를 함께 넘나들던 당가가 아니던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황급히 몸을 날린 황보장이 잔인한 살수를 휘두르는 사내의 목덜미 를 낚아채며 소리쳤다. 사내가 그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그의 손을 빠져나 갈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지....." 재차 소리치던 황보장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손에 잡힌 자의 얼굴과 막 드러난 목의 피부색이 확연히 차이가 나 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목덜미의 느낌도 뭔가 이상했 다. "인피면구!" 황보장에 의해 인피면구가 벗겨지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들은 누구냐!" 죽음을 각오한 듯 사내가 원독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중천!" "음!" 황보장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튀어나왔다. "네놈들이 독을 쓴 것이냐?" "그렇다." "아무런 낌새를 느낄 수 없었는데......" 황보장의 읊조림에 사내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어리석기는!" "뭣이!" "우리는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하지 않는다." "무슨 뜻이냐?" "독이라는 것은 그 독성을 떠나 상대로 하여금 방비하지 못하도록 얼마나 은밀히 하독을 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리는 법. 너희들은 지 금 중독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한참 전부터 중독된 상태였다." "설마......" 황보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흐흐흐. 중독시킬 기회와 방법은 참으로 많았다. 우물도 있었고 음 식도 있었다. 다만 그 양을 조절하여 당하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게 하 는 것이 다소 힘들었을 뿐. 결과는 지금 본대로다. 하하하하!!" 사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주변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황보장은 망연자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가의 식솔들은 어찌 되었느냐?" 황보장의 손에서 그를 낚아챈 팽만호가 물었다. 사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인피면구를 보고도 그리 묻다니." 하긴 그랬다. 인피면구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면 그 얼굴의 주인이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팽만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죽인 놈들 같으니! 네놈들이 이런 짓을 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모조리,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주마!" 노한 주먹이 사내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와 같은 심정이었던 황보장은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너무도 부드러운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과연 그럴까요?" * * * "크윽!" 절대로 굽혀지지 않을 것 같았던 반포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고, 그 는 고통보다는 패배감으로 인한 괴로움에 신음성을 내뱉었다. 오상을 꺾은 후 기고만장했던 반포는 종남일학 봉학경을 상대로 간 단히 끝내 버리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무척이나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기기는 하였으되 오상과 비교하여 확실히 누가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엇비슷한 실력을 지니고 있던 그로선 봉학경을 감당할 수 없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종남파의 최고 고수는 장문인인 오상이 아니라 그의 사제인 봉학경이었기 때문이다. 봉학경으로서도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반포를 쓰러뜨리기 위해 그가 치른 대가도 상당했다. 서너 대의 갈비뼈가 부러졌고 족히 보름은 요양해야 할 정도로 큰 내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까짓 상처보다는 위지요와 함께 북천을 이끌 고 있는 수뇌를 쓰러뜨렸다는 것이 중요했다. 반포가 오상과 봉학경을 상대로 하여 혈전을 벌이는 동안 다른 한쪽 에선 그들의 싸움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의미있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 었다. 검왕 곽화월과 북천의 천주 위지요의 혈투. 곽화월의 선공으로 시작된 싸움은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팽팽했다. 곽화월이 처음부터 화산파 최강의 검법이자 그를 검왕의 지위까지 이끌어준 십팔로낙영검법을 사용하여 거센 공격을 퍼부었지만 위지요 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은 물 론이고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그 즉시 반격을 가했다. 내공엔 내공으로, 초식엔 초식으로, 빠름엔 느림으로, 때로는 비슷하 게, 때로는 정반대의 것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수비하며 이어지는 그들 의 싸움은 시간이 흘러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둘의 대결에 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 작한 것은 곽화월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면서부터였다. '정말 지독한 한기(寒氣)다. 지금껏 이런 음한지기(陰寒之氣)가 있 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거늘.' 처음 위지요의 검을 타고 한기가 흘러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몸에 침투한 한기가 별다는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그저 상대가 익힌 내공이 조금 특이한 것이려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나 싸움이 오래 지속되고 몸에 들어와 쌓이는 한기의 양이 커지면 서 그는 뭔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위지요의 검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한기는 단순한 한기가 아니었다. 극음(極陰)의 한독(寒毒)을 지닌 지독한 음한지기. 그것을 알았을 때엔 이미 그의 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이후였다. 오장육부가 한독에 중독되어 상하기 시작했고 혈맥을 타고 흐르는 피가 온기를 잃고 차갑게 식어버렸다. 몸이 절로 떨리고 숨을 쉴 때마다 지독한 통증이 뒤따랐다. 일단 음한지기의 극성인 양강지기(陽剛之氣)를 일으켜 한독이 온몸 으로 퍼지는 것을 막고 외부에서 밀려드는 음한지기를 차단하고는 있 었으나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상대의 공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매서워지고 날카로워졌다. 그와는 반대로 안으로는 음한지기와 밖으로는 위지요라는 무인과 싸워 야 했던 곽화월은 점점 손속이 무뎌지고 내공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실 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이기지 못한다 하여도 지지는 않는다.' 이미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이곳저곳 크고 작은 부상을 입히기는 했어도 상대는 그다지 큰 타격 을 받지 않았다. 그에 반해 자신은 치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독에 중독된 상태였고 몸을 갉아먹은 한독을 억제하느라 그만 왼쪽 어깨에 제법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최상은 승리를 하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다면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 것. 마음을 굳힌 곽화월은 음한지기를 억누르느라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한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순간, 오장육부를 중심으로 엄청난 한 기가 일어나더니 전신을 얼리기라도 하려는 듯 매서운 기세로 퍼져 나 갔다. '음.' 추운 느낌을 넘어서 온몸이 칼로 난자당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하나 이를 악물고 곽화월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직 눈앞의 적만을 생 각했다. 그리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아니, 익히면서도 과연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을 했던 십팔로낙영검법 최후의 초식을 떠 올렸다. "좋은 승부였네." 난데없이 입을 여는 곽화월. 입가엔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 위험한데.' 갑자기 돌변한 상대의 기세에 위지요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곽화월의 검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검강?"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검강이란 말 그대로 무형의 기를 유형화시키는 것. 그런데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어떤 특별한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았다. 상대의 공격을 파악하지 못한 위지요는 심각한 표정으로 긴장을 늦 추지 않았고 그 사이에도 곽화월은 서서히 검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 다. '시, 신검합일(身劍合一)?' 검이 일으킨 기운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가는 곽화월의 모습에 비로 소 상대의 무공을 눈치챈 위지요가 기겁하며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 렸다. 순간, 그의 몸에서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얼려 버릴 듯한 한기 가 쏟아져 나왔다. "컥!"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은연중 그의 곁으로 접근한 흑룡문과 화산파 의 제자가 갑자기 엄습한 음한지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자신들엑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의식도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그들의 몸에는 마치 서리라도 내린 듯 하얗게 냉 기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음한지기도 지금의 곽화월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 지 못했다. "추운 겨울에야 비로소 소나무의 강건함이 빛을 발할지니......" 검과 하나가 된 곽화월에게서 낭랑한 음성이 터져 나오고 십팔로낙 영검법의 최후 초식이자 일격필살(一擊必殺)의 동귀어진(同歸於盡) 수 법인 '경송창어세한(勁松彰於歲寒)'이 펼쳐졌다. 한 번 펼치면 상대는 물론이고 시전자까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시 무시한 공격. 위지요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곽화월은 결국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위험하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공격이었다. 하나 곽화월 정도의 인 물이 죽을 각오를 하고 펼친 무공에 그만한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오직 정면으로 부딪쳐 깨뜨리는 방법뿐이었다. 위지요의 얼굴이 그토록 심각하게 굳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 침내 승부를 결정짓는 충돌이 있었다. 꽈꽈꽈꽈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변으로 퍼져 가는 충격파.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갈라지는 소리가 이럴까?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운은 주변을 초토화 시키며 생명을 지닌 것들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거침없이 쏘아져 나갔다. "크악!" "으아아악!" 반경 오 장 안에서 싸움을 하던 이십여 명의 무인이 주변을 휩쓰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마, 말도 안 돼!" 멀리서 둘의 충돌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대황하에서 벌어지던 모든 싸움도 그 둘이 일으킨 거대한 회 오리에 의해 한순간에 멈추어졌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너무나 무거워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후, 어차피 황토 바닥에 불과했지만 사방 십여 장을 초토화시 키며 휘몰아친 광풍이 잦아들고 끝없이 치솟아오르던 황토먼지가 가라 앉으며 곽화월과 위지요의 모습이 드러났다. 넝마가 되다시피 한 옷에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위지요는 무릎을 꿇 고 연신 기침을 해댔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 사이로 상당한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반면에 곽화월은 검을 땅에 꽂고 마치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거목인 양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우뚝 서 있었다. 누가 보아도 곽화월의 승리였다. "와아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결과를 지켜보던 백도의 무인들은 곽화월의 승리를 확신하며 기세를 올렸다. 위지요가 패배하리라고는 조금도 생 각하지 않은 북천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정말 대단한 무공이었습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위지요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으로 보아 진정으로 감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곽화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혼은 이미 육신을 떠났고 뜨거운 열정을 담았던 심장은 싸늘하 게 식었기 때문이다. 위지요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미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던 곽검명이 곽화월의 곁으로 다 가갔다. 그리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제야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치챈 화산파의 제자들은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히고, 곽화월이 승리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도 갑작스 런 상황의 반전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것은 승리를 축하해야 할 북천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득달같이 달려온 위지청이 위지 요를 부축하려 하였다. "되었다." 고개를 흔든 위지요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지켜만 보실 생각이오?" 누구에게 한 말일까? 의혹에 찬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 쏠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들려 오지 않자 위지요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쯤 했으면 충분히 즐겼을 것이 아니오? 언제까지 우리의 피해를 지켜만 볼 생각이오? 이제 그만 끝냅시다." 위지요의 음성이 점점 싸늘해졌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것을 의미했 는데...... 바로 그 순간, 백도의 무리에서 한줄기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하하하! 그렇잖아도 그만 끝낼 생각이었소이다." 위지요에게 향했던 시선이 일제히 음성의 주인을 찾아 움직였다. 그 리고 그들은 태연히 웃음 짓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음성의 주인은 악가의 가주 악위군이었다. * * * "하아! 하아!" 숨이 가빴다. 이마를 타고 흐른 땀으로 인해 눈을 뜨기도 쉽지 않았다. 양 발은 쇳덩어리라도 달아놓은 듯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아! 하아!" 황보장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그 순간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저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 다. 살기도 오래 산 몸. 자신의 목숨은 상관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조금 이라도 더 시간을 끌지 못하면 그만큼 많은 생명이 사라질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며 자꾸만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일으켜 세우 는 황보장. 그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갖다 댔다. '척목은이라 했던가?' 꽤나 날카로운 실력을 지닌 자였다. 내공을 잃지 않은 상태라도 막 기가 까다로울 정도의 실력자. 한 줌밖에 남지 않은 내공으로 상대하 기엔 너무나 강한 상대였다. 그가 남긴 검상은 깊고도 중했다. 흘러나오는 내장을 억지로 밀어 넣고 벌어진 상처를 옷에서 대충 찢 은 천으로 감아놓기는 하였으나 움직일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한데 지금 상황에선 그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그 고통으로 인 해 아직도 손방를 놀릴 수 있었으니. "오라!" 황보장이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기가 질 렸을 뿐이었다. 치열했던 싸움은 한참 전에 끝난 상황이었다. 당가로 위장한 중천의 인물들이 은밀히 독을 살포하고 그로 인해 승 기를 잡았던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거기에 갑자기 배반을 하고 손을 쓰기 시작한 악가에 의해 황보세가에 모인 이들은 그야말로 절체절명, 몰살의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나마 최후의 기력을 짜낸 황보장과 팽만호 등의 선전으로 포위망 을 뚫고 안심거까지 후퇴할 수 있었지만 생존자는 채 백여 명이 되지 않았다. 싸움을 시작할 때 인원이 오백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 분지 사에 달하는 인원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힘겹게 안심거에 도착한 그들은 그 즉시 비밀 통로를 열고 식솔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밀 통로는 너무 어둡고 협소했다. 아 무리 빨리 움직인다 해도 식솔들을 포함한 근 이백에 달하는 인원이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우선 나이 든 노인과 어린아이, 여인들을 대피시키고 조금의 힘이라도 남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추격을 막는 것이 최선이라 는 결론을 내렸다. 하늘의 도움이던가! 그들을 독 안에 든 쥐라고 여긴 북천의 무인들은 아예 피를 말려 죽 이겠다는 듯 서둘지 않고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고, 그들의 발걸음을 막기 위해 또다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 덕에 무공을 모르는 식솔들은 모두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생존자는 급격히 줄 어 있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황보장은 고개를 내젓는 황보 윤과 팽무쌍에게 훗날을 부탁한다는 당부와 함께 비밀 통로로 억지로 밀어 넣고는 입구를 폐쇄해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생존자들과 함께 비밀 통로에 접근하기 위해 펼치는 파상공세에 당당히 맞서 나갔다. 비밀 통로를 막아선 이들은 대부분이 각 세가와 문파들의 원로들. 하나 아무리 뛰어난 무공과 오랜 경험을 지니고 있는 그들이라도 내 공이 없이는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하나둘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팽만호와 벽 력권 황보권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일각여가 흐르자 남은 사람은 오직 황보장뿐.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 버텨내는 중이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장백선옹은 당장 숨이 끊어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몸으로 지금껏 꿋꿋이 버티는 황보장을 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정말 그렇습니다. 내공을 잃고도 저 정도인데 멀쩡한 몸으로 상대 를 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지 헌원후는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끝난 목숨입니다. 문제는 도망간 놈들이지요." "비밀 통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아보았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부설이라는 아이가 제 수하들을 동원 해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곧 발견될 것입니다. 제깟 놈들 이 두더지가 아닌 이상 땅속에서 살수만은 없겠지요. 그건 그렇고 언 제까지 보고 계실 참입니까?" 척목은이 홀로 남은 황보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 장백선옹이 말끝을 흐리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일에 후환을 남겨선 안 되는 법. 당장 입구를 뚫고 추격해야 합니다." 답답하다는 듯 다소 언성을 높인 척목은이 직접 손을 쓸 기세로 걸 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발걸음을 제지한 장백선옹이 조용히 입을 열었 다. "내가 처리하지." 고개를 끄덕인 척목은이 슬그러미 뒤로 물러나고 엷은 한숨을 내쉰 장백선옹이 황보장에게 다가갔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누군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 황보장이 다짜고짜 주먹을 내질렀다. 내공을 거의 사용하지 못함에도 그 주먹에 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장백선옹 정도의 고수에게는 솜방망이보 다 못한 주먹이었다. 단숨에 그의 팔을 움켜쥔 장백선옹이 황보장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 다 가슴 어귀에 손을 갖다 댔다. '잘 가시오.' 이미 비명을 지를 힘도 없을 만큼 지쳤던가? 장백선옹의 품으로 힘없이 무너지는 황보장의 입에선 미약한 신음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주먹 하나로 강호를 풍미했던 권왕 황보장은 그렇게 조용히 잠들었 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황하의 북쪽 지역은 사실상 북천이 석권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북천의 천주가 질문을 하고 악가의 가주가 대답했다. 한데 오랜 친 분이 있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햇다. 그저 불안한 눈으로 악위군을 쳐다볼 뿐이었다. "서, 설마?" 유난히 정보에 민감한 정소가 마구 흔들리는 눈빛으로 악위군을 쳐 다봤다. 하나의 가설이 세워졌다.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중... 천이오?" 정소의 물음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로소 뭔가를 느낀 것이 었다. "하하하, 역시 개방의 방주답구려. 그렇소이다. 내가 바로 중천의 천주요." 꽝! 멀쩡히 길을 가다 뒤통수를 두들겨 맞는 기분이 이러할 것인가? 아 니, 그 정도는 비교도 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의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그들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어깨를 들썩인 악위군이 담담하면서 도 위엄 섞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중천의 무인들은 명을 받아라." "존명!" 악위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곳저곳에서 우렁찬 대답이 터져 나왔다. 예비 병력으로 빠져 있던 사람들도 있었고 조금 전까지 북천 의 무인들과 치열한 싸움을 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위의 시선 에 아랑곳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려 삼백에 육박하는 인원들이 무릎을 꿇고 한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세, 세상에!" 그들의 모습은 또 한 번의 충역을 몰고 왔다. "구성문이!" "허! 이거야 원. 무량검파까지 놈들의 주구란 말인가!" 소림을 구하고자 산동에서 달려온,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협 의(俠義)를 중히 여기는 문파로 평판이 자자한 구성문과 무량검파의 제자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고 중천의 수하임을 자처하자 놀라움을 떠 나 허탈하기까지 했다. "설마 하니 악가가 중천일 줄은 꿈에도 몰랐군." 조금 전까지 그의 곁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당욱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한천문이라 부르기도 한다오. 어쨌든 칭찬으로 알겠소." 살짝 미소를 지은 악위군이 곽검명의 품에 안겨 잠든 곽화월을 응시 했다. "흠, 대단한 실력이었소. 기회가 되었다면 한번 겨루어보았을 것인 데 아깝게 되었소." "네놈 따위가 넘볼 분이 아니다." 곽검명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훗, 내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 같소이다. 대단한 실력이라고 했지 넘지 못할 실력은 아니라고 했소. 검왕이라는 명성 그대로 뛰어 난 무위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수호신승에 비해선 부족함이 있었소. 그 리고 그 정도라면 나의 상대도 되지 못하오." 순간, 악위군의 말뜻을 알아들은 명경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 그럼 당신이 수호신승께 부상을 입힌 자란 말이오?" "부상을 입힌 것은 맞지만 엄밀히 말하면 승부를 가리지는 못했소. 나 또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으니까. 그것을 치료하느라 어찌나 고생 을 했던지......" "아미타불!" "그래, 신승은 좀 어떠시요? 그때 못다 한 승부를 보아야 하는데 말 이오." "시, 신승께서는 아직도....." 명경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대신하여 위지요가 대답을 했 다. "아직 회복을 못했소. 나름대로 치료를 하는 것 같은데 워낙 지독 하게 당해서." 위지요는 약사전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수호신승이 어떤 무공에 당 해서 그리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존신공(至尊神功)과 암흑마검(暗黑魔劍). 북천을 비롯하여 남천과 서천이 중천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무공이었다. "그것참, 아쉽게 되었구려. 극성에 이른 무공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상대는 그뿐인데. 뭐, 할 수 없지요. 아쉬운 대로 적당한 상대가 있으 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위지요를 바라보며 슬며시 검을 건드린 악위 군이 명경을 향해 걸어갔다. "백팔나한진, 지금껏 두 번을 허락했다고 들었소. 내가 세 번째 인 물이 될 수 있는지 시험을 해보겠소이다." 도전이었다. 허락을 했다는 말인즉슨 진을 깨뜨렸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두 명 이란 곧 초대 패천궁주였던 구양풍과 전전대 궁주 환야를 말함이었다. "원한다면 보여주겠소." 수호신승이 진 빚을 갚을 기회이자 어쩌면 무림에 몰아닥친 겁난(劫 亂)의 원흉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백팔나한진에 절대적 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명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시원시원하니 좋소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끼리만 싸우면 다 큰 사람들이 지루해할 터이니....." 악위군의 시선이 한쪽에 조용히 시립하고 있는 중천의 무인들에게 향했다. "중천의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내딛는 발걸음이다. 부끄럽지 않도록 해라." "존명!" 그들은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살기를 뿜어냈다. "자자, 여기는 귀찮은 것들이 많으니 우리는 이쪽에서 놀아봅시다." 악위군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명경과 백팔나한이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죽여랏!" "와아!" 그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거대한 함성과 함께 중천과 북천의 대대적 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백도에 속해 있던 삼백의 병력이 돌아서자 양측의 병력 상황은 이미 역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중천의 무인들은 대다수가 예비 병 력으로 뒤에 빠져 있었기에 힘이 남아도는 터. 북천을 상대하며 치열 한 격전을 벌이느라 지친 이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전력의 가 장 핵심이자 구심점 역할을 했던 백팔나한진이 악위군을 상대하느라 빠지면서 전력의 공백이 더욱 심화되었다. 한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반 각이나 지났을까? 뿌연 황톳빛 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히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 었다. 인원은 정확히 삼십삼 명. 나이는 모두 삼십대 중반 정도였다. 용혈대(龍血隊)라 불리는 그들은 패천궁의 패천수호대처럼 어려서부 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육성된 자들로 비록 인원은 적어도 지닌 힘만큼은 패천수호대를 능가할 것이라 단언할 정도로 최고의 정예들이 었다. 그렇잖아도 암울한 상황에 처했던 백도무림인들에게 그들의 출현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한편 악위군과 백팔나한진의 치열한 싸움도 시작되었다. "방진(方陳)!" 명경의 음성이 들리며 무승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그리고 저마다 싹 을 이뤄 하나의 작은 원을 만들었다. "흠, 이것이 십팔나한진!"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악위군이 고개를 끄덕 였다. 그사이 작은 원은 또다시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변했다. 열여덟 명이 모여야 비로소 그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는 백팔나한진 (百八羅漢陳). 마침내 수호신승과 함께 소림을 지켜온 백팔나한진이 악위군 한 사 람을 상대로 펼쳐진 것이었다. "좋구나!" 악위군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미타불! 소림의 힘을 보여주어라!" 명경의 명령에 맞춰 나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계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가슴 한 켠을 서늘하게 만들 절로 무시무시했지만 백팔나한진에는 그 살기와는 이질적인 웅장 한 서기(瑞氣) 또한 은연중 나타나고 있었다. "아미타불!" 명경의 나직한 도호성과 함께 악위군의 좌측에서 움직이고 있던 나 한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악위군은 침착하게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공격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저 두어 걸음 옮기고 살짝 몸을 비틀며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자 신을 위협하는 모든 공격을 해소한 악위군은 물러나는 그들을 향해 곧 바로 역공을 가했다. 쉬이잇!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가는 검기. 무지막지한 힘이 담긴 검기가 그들의 코앞까지 짓쳐들었지만 목표 가 된 나한들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애써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뭐지?' 악위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쉬워도 너무 쉬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난데없이 등장한 나한들이 그 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사라졌다. 종(縱)으로, 그리고 횡(橫)으로. 도도히 흐르는 장강의 물결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는 백팔나한진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가히 화산과도 같은 힘으로 악위군을 압박했 다. 좌측의 나한진이 공격을 하면 우측의 나한진이 역공에 대비해 그들 을 보호하고 그들은 또 다른 나한진의 보호를 받았다. "후∼ 대단해. 과연 대단해." 악위군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처음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는 달리 악위군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몸 이곳저곳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아무리 빠르 게 움직여도 진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힘 대 힘으로 부딪쳐 보았으나 가히 철옹성과도 같은 방어에 철저하게 막혀 버렸다. 하나 그것은 백팔나한진의 위력을 몸소 체험하고 약점을 찾기 위한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많은 상처를 입었으나 결 정적으로 큰 부상이 없다는 것과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가 지닌 최고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지만 딱히 이렇 다 할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저 백팔나한진의 명성이 거짓이 아니 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나한진 자체엔 약점이 없다고 판단한 악위군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 렸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그는 과거 구양풍과 환야가 찾 아낸 것처럼 나한진의 유일한 약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 사부 밑에서 똑같이 무공을 배워도 수준의 고하가 있듯 같은 나 한들이었지만 엄연히 수준 차이가 있는 법. 개인의 능력도 차이가 있 었고 백팔나한진을 이루는 여섯 개의 십팔나한진 사이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악위군은 그중 가장 약한 십팔나한진,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가장 무 공이 약한 나한을 찾아냈다. 목표가 정해진 이상 행동만 하면 되는 일. 그는 손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집요하게 목표가 된 나한을 노렸다. 목이 잘릴 뻔한 위기도 넘겼고 손목이 끊어질 뻔한 위기도 넘겼다. 팔뚝에 깊은 자상을 입기는 했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정도였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이들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악 위군은 결국 목표했던 나한의 목을 벨 수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어선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그때까지 아껴두었던 암흑마검을 사용 한 까닭이었다.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악위군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한 명의 인원이 빠짐으로써 십팔나한진에 구멍이 생기고, 그것은 혼 연일체가 되어 움직여야 할 백팔나한진 전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악위 군은 더욱더 그 약점을 파고들었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한진의 위 력은 현저하게 감소했다. "수진(數陳)!" 명경이 다븍하게 명을 내리고 나한들이 나한진의 진세를 최대한 좁 혀 서로에게 연결된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필사적으로 버텼 다. 하나 불완전한 상황에서도 수호신승과 양패구상을 할 정도로 막강 했던 암흑마검이었다. 더구나 최후의 비결을 얻어 완벽에 가까워진 지 금, 그들이 암흑마검의 힘을 막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백팔나한진은 더 이상 백팔나한진 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진세를 유지하려고 노력은 하였으나 십팔나한 진 하나가 완벽하게 무너진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소 림의 자랑 백팔나한진은 구양풍과 환야에 이어 세 번째로 패배를 기록 하고 말았다. 용혈대가 등장을 하고 악위군에 의해 백팔나한진이 무너지는 순간 모든 싸움은 끝나 버렸다. 백도의 무인들이 이를 악물고 대항했지만 한낱 미약한 발버둥에 불과할 뿐이었고 사실상 일방적인 학살이나 마 찬가지였다. 염라대왕마저 고개를 돌려 버릴 끔찍한 학살의 순간은 무 조건적인 항복이 있고서야 멈춰졌다. 중천으로 돌아선 삼백의 인원을 제외하고도 칠백이 넘던 인원 중 포 위망을 뚫고 탈출한 사람은 정소와 당욱 등을 비롯하여 고작 사십여 명뿐. 오백 명이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사람들 대부분은 극심한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되었다. 어쩌면 향후 무림의 운명을 걸고 시작된 싸움. 양쪽 모두 사활을 걸 고 벌인 싸움은 사천혈맹의 일방적인 승리로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 * * 수백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 사천혈맹의 힘은 실로 가공했다. 서쪽에서 달려온 철혈마단이 사천무림을 초토화시키고는 대파산을 넘었고, 남쪽에서 시작된 흑월교의 힘은 패천궁이 광서와 광동을 버리 고 물러나게 만들 정도였다. 소림사를 비롯하여 팽가와 황보세가 등 하북과 하남의 명문대파 등 을 휩쓸며 남하한 북천은 개방은 물론이고 섬서성의 화산파와 종남파 까지 무너뜨리며 위세를 떨쳤고,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산동, 안휘, 강 소, 절강성을 완벽하게 석권하며 강서, 호북, 호남성에도 그 영향력을 확장시킨 중천의 힘은 막강 그 자체였다. 승천지계가 펼쳐진 지 정확히 백일. 대황하의 싸움이 끝난 지 석 달 만에 무림은 사천혈맹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무당파, 그리고 과거에 비해 현저하 게 줄어든 전력이지만 그래도 무시 못할 힘을 지닌 정도맹이 대파산을 넘은 철혈마단과 남하한 북천의 연합 공격에도 나름대로 성공적인 싸 움을 하고 있었고 앞뒤로 적을 맞은 패천궁 또한 이름에 걸맞는 저력 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들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고 무림은 사천혈맹의 손에 떨어지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사람들 은 무림에 암흑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모든 일엔 변수가 있는 법이었다. 비록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작금의 상황을 뒤흔들 수 있 는 변수가 태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네 가지나. 슈우우욱! 만물이 모두 잠든 고요한 새벽, 허공을 가르는 불화살 하나가 있었 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며 날아간 화살은 철혈마단 안평(安坪) 분타의 마사(馬舍) 지붕에 정확히 떨어졌다. 기와로 이루어진 여타의 건물과는 달리 짚과 갈대로 엮어 만든 지붕 은 불화살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성난 불길은 말을 먹이기 위해 산처 럼 쌓여 있는 건초(乾草) 더미로 옮겨 붙었다. 히히히힝! 삼십여 필이나 되는 말이 미쳐 날뛰고 불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불이야!" 갑자기 환해진 것보다는 말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노구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곤히 잠을 자고 있던 무인 들이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허겁지겁 달려왓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불이라니!!" 지난밤 술이 과했던가? 아직도 얼굴이 벌건 분타주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소리쳤다. "마사에 불이 났습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순간, 그렇지 않아도 벌건 그의 얼굴이 더욱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말은? 말은 어찌 되었느냐?" 철혈마단의 무인들에게 말은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 그에게도 예 외는 아니었다. "절반 정도는 구했지만 불길이 워낙 강해 나머지는... 큭!" 황급히 달려와 대답하던 노구는 분타주의 분노 서린 주먹에 얼굴을 맞고 땅바닥을 굴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뭐라고? 절반이 어쩌고 저째? 그 말들이 어떤 말인 줄 알고나 지껄이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필요없어! 당장 살려내! 네놈 목숨을 걸고 살려내란 말이다! 한 마리라도 죽었다간 네놈도 끝장날 줄 알아!" 분타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바로 그때였다. 슉! 불길이 치솟으며 나는 소리, 분타주가 발광하는 소리, 불길을 잡기 위해 죽을힘을 쓰는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함성과 신음 소리 등이 뒤섞여 난장판이 되어버린 안평 분타를 가로지르는 은밀한 파공음이 있었다. "으악!" 옆으로 번지고 있는 불길을 잡기 위해 연신 물을 퍼 나르고 있던 우 증(牛繒)은 갑자기 들이닥친 고통에 비명를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커윽!" 연이어 들리는 비명성. 우증과 마찬가지로 허리를 꺾으며 쓰러지는 원명(元冥)의 입에서도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란히 바닥에 몸을 누인 우증과 원명의 아랫배에는 불길을 받아 빛나는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저, 적이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이들이 일제히 몸을 숨기며 소리를 질렀다. 쉬쉭! 또다시 파공음이 들리고 곧바로 비명성이 뒤를 따랐다. "멍청하게 숨지 말고 적을 찾아라! 공격하는 놈을 찾아!" 바로 옆에 있던 수하가 화살을 맞으며 쓰러지는 것을 보며 재빨리 몸을 숙인 분타주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대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대낮처럼 환한 불길 옆에 있었고 화살을 날리는 사람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도 용기를 낸 몇몇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달려보기도 했지 만 그들은 채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으으으!" 분타주는 순식간에 줄어드는 수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평 분타의 인원은 총 오십육 명, 그중 철혈마단의 인원은 열일곱 이었고 나머지는 인근 문파에서 항복한 자들과 노구처럼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이었다. 한데 적은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철혈마단의 무인들에게만 화살을 날렸다. 문제는 누구도 그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 반 각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철혈마단의 무인 중 멀쩡한 사람 은 오직 분타주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몸을 숨기고 경계해도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교묘하게 날아드는 화살을 피할 수 없었 다. "크악!" 결국 그도 단전을 파고든 화살을 잡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의 비명성과 함께 철혈마단이 사천성에 설치한 삼십이 개의 분타 중 하나인 안평 분타는 초토화되었다. 비록 인원도 얼마 되지 않고 그 규모 또한 가장 작았지만 그것이 지닌 의미는 몹시도 의미심장했다. 하늘마저 덜덜 떨게 한다는 철혈마단의 분타를 무너뜨린 사람은 다 름 아닌 을지호. 일찍이 온설화가 예견한 대로 부상에서 회복한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첫 번째 변수였다. 노인과 중년인의 대화는 시종일관 무겁게 진행되었다. "결정은 했는가?" "예, 아버님." "힘든 싸움이 될 것이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제자 이십이 물에 올랐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목숨을 잃은 것도 부족해 차마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복수해야 합니다." 정확히 칠 일 전, 이십 구의 시신이 도착했다. 뭍에 올랐던 제자들 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멀쩡한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 머리는 물론이고 팔다리도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에 찢겼는지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나머지 인원은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때의 아픔을 생각했는지 중년인의 눈에서 한광(寒光)이 피어올랐 다. "어쩌면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도 못할 수 있어." "각오하고 있습니다." "자네의 결심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부디 조심하게나." "다녀오겠습니다." 중년인은 노인에게 큰절을 올리고 방문을 나섰다. 연무장에는 사형제들의 죽음에 분노한 제자들이 무장한 채 그를 기 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사흘 후, 광동성 최남단의 해안에 조그만 여객선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어선 십여 척이 정박을 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들보다 실전에 강한, 삼백 검수(劍手)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째 변수였다. 뿌연 안개가 서려 있는 절운곡(絶雲谷). 노인과 이제 막 소녀티를 벗어난 소저(小姐)가 서 있었다. "다녀오너라." "저 혼자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반시진 후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뭐, 상관은 없겠지만 혼자 가면 제 말을 믿어줄까요?" 어린 소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면 될 게다." 노인이 허리춤에 달고 있던 검을 건넸다. 무게가 제법 나가는지 검을 받아 든 소저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알았어요. 한데 어딜 가시는 거예요?"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노인이 쓸쓸하게 대꾸했다. "재 너머에 친우(親友)들의 무덤이 있구나. 오랜만에 왔으니 잡초나 몇 개 뽑아주고 올란다." "그렇군요. 그럼 다녀오세요. 어르신들이 좋아하시겠네요." 애써 밝은 웃음을 보인 소저는 몸을 돌려 걷는 노인의 등을 잠시 지 켜보다 자신도 절운곡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짙게 끼었던 운무(雲霧)가 걷히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몇 개의 초옥(草屋)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초옥 앞 나 무 그늘에서 두 노인이 무척이나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러줘." "안 돼!" "그러지 말고 물러줘." "일수불퇴(一手不退)라고 했던 것이 누구더라?" 승자의 모습이련가? 팔짱을 끼며 한껏 뒤로 몸을 누이는 노인은 지금의 상황을 무척이나 즐기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물러줘." "싫어." 짧고도 단호한 음성에 벌떡 일어난 좌측의 노인이 눈썹을 부르르 떨 었다. "정말 이리......" "싫다니까." 순간적으로 말을 끊긴 노인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냅다 장기 판을 걷어찼다. 조금전가지만 해도 노인들의 손에 의해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 키던 장기알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두께가 한 자에 이르는 장기 판이 그대로 박살나 버렸다. "쯧쯧, 장기판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부족한 실력을 탓해야 하 지." "시끄러!" "아무튼 오전 오승이라... 후아∼ 다섯 동이의 술을 언제 다 마시려 나." 술내기를 했던가? 약을 올리던 노인이 갈증이 나는지 슬며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설마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지?" "내가 네놈 같은 줄 아냐! 준다, 줘! 지금 당장 보내줄 테니까 혼자 배터지게 잘 처먹어라!" 내기에 패한 노인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호호호호, 참 재밌는 할아버지네요." 노인 몇과 시중을 드는 하인들 몇뿐인 절운곡(絶雲谷)에 난데없이 울려 퍼지는 여인의 웃음소리. 이미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네년은 누구냐?" "소녀의 이름은 임여령(林璵伶)이에요. 한데 여기가 절연곡(絶緣谷) 이 맞는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노인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골짜기의 원래 이름은 절운곡으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알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가 언급한 절연곡이란 말은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산다고 하여 그들 스스로가 붙인 이름으로 오직 곡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아는 이름이었다. "네, 네년은 누구냐! 어찌 절연곡을 알지?" "들었으니 알지요." "누구에게 들었는지 말해 봐라! 사지가 찢겨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불어!" "흠, 다른 이에 비해 약간 작은 키, 호리호리한 몸매, 입에 욕을 달 고 살며,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을 듯 급한 성격. 할아버지가 유불살 (有不殺) 송찬(宋璨)이지요?" "네, 네년은 누구냐!" 깜짝 놀란 송악이 조금 전과는 다소 의미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동 시에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아파요, 놔주세요." "누구냐고 물었다!" "말했잖아요, 임여령이라고. 손이나 빨리 놔주세요. 전할 말이 있으 니까." "그래,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잠자코 지켜보던 우측 노인이 송악의 손을 제지하며 물었다. "이것을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송악에게 잡혔던 목이 아픈지 잠시 어루만진 그녀가 허리춤에 매달 고 있던 검을 건넸다. "검? 검을 전하라고 했단 말이냐?"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노인이 임여령의 손에 들린 검을 낚아 챘다. "이, 이것을 어디서 얻었느냐? 아니, 이것을 전해주라고 한 사람이 누구더냐?" 검을 살피던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어루만지며 격동에 찬 음성 으로 물었다. "절연곡에 가면 과거 한 수 가르쳐 달라고 노부를 귀찮게 했던 혈류 도(血流刀) 냉악(冷岳)이라는 멍청한 녀석이 고만고만한 아이들 몇과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전해주고 당장 데리고 나오너라." 말을 하며 살짝 눈치를 보는 임여령. 그녀는 노인의 안색이 백지장 처럼 하얗게 변하자 살며시 미소 지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검을 제게 주신 분이." "허! 설마 하니 살아... 계셨던가? 그분이, 정녕 그분이.....!" 풍혼(風魂)이란 이름이 멋들어지게 새겨진 검을 살피는 혈류도 냉 악, 그의 노안(老眼)이 붉게 물들었다. 세 번째 변수였다. * * * 북경성(北京城) 서문(西門). 담장의 높이가 오 장에 이르고 둘레만도 수십 리에 달하는 북경성은 명의 수도이자 천하의 주인인 황제가 있는 곳이니만큼 그 경계가 몹시 도 삼엄했다. 대낮에도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을 하지 못했고 날이 밝기 전에는 장 벽 근처로도 접근하지 못했다. 한데 지금, 이른 야음을 틈타 월담을 시도하려는 간 큰 인물들이 있 었다. "흐흐흐, 여전히 높구나. 어째 옛날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아. 경계 도 삼엄해진 것 같고." 장벽을 어루만지던 노인이 말했다. "요즘 나라가 어수선하다고 하잖아요. 아무래도 그런 영향이 있겠 지요." 노인의 곁에 있던 노부인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뭐,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노릇이니까." "아버님, 꼭 이렇게 하셔야 합니까?" 아들인 듯한 청년과 나란히 서 있던 중년인이 다소 불만 어린 음성 으로 물었다. "뭐가 말이냐?" "엄연히 정문이 있고 통행증도 있는데 구태여 월담을 할 필요까지 는......" "내 말이! 정말 쓸데없는 짓 하기를 좋아한다니까." 먼저 입을 연 노부인, 차분해 보이는 그녀와는 달리 성정이 괄괄해 보이는 또 다른 노부인이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노인은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뭐, 문으로 들어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난 여기로 갈란다. 오 랜만에 옛날 기분도 내고. 흐흐흐, 호랑이 한 마리만 때려잡으면 정말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텐데. 어떠냐? 네가 가서 한 마리 잡아오련?" 노인이 이제 갓 약관에 이른 손자를 보며 말했다. 그는 잊고 있던 오래전의 추억을 떠올려서인지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다. "할아버지께서 필요하시다면 잡아오지요." "허허허, 고 녀석. 늘 토를 다는 네 아비나 죽어도 말을 듣지 않는 형보다는 네가 훨씬 낫구나." 흐뭇하게 미소를 지은 노인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푹 푹 내쉬면서 노려보는 노부인을 살짝 가리켰다. "하지만 여기서 호랑이까지 잡아온다면 네 할미가 나를 잡아먹으려 고 할 터이니......"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노부인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노인. 곁에서 입을 갈며 웃던 노부인 이 화를 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호호, 너무 그러지 마세요. 오랜만에 옛일을 생각하시는 것 같은 데." "그건 나도 알아, 동생.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잖아. 길을 떠난 지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났어. 그 시간이면 집에서 여기까지 수십 번은 왕 복했을 시간이야. 누군가가 엉뚱한 곳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지만 않았 다면 말이지.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월담까지? 이거야 원, 도둑놈도 아니고!" 노부인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쳤다. "자자, 뭣들 하고 있어. 빨리 올라와." 어느새 담장을 올라간 노인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행동을 재촉했다. "어떻게 할 테냐, 애비는?" 노부인이 중년인에게 물었다. "뭐, 할 수 없지요. 이리된 마당에 저희들만 따로 정문으로 갈 수는 없잖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아들에게 시선을 주자 그렇지 않아도 기 대에 찬 눈으로 기다리고 있던 청년이 훌쩍 몸을 띄웠다. 뒤를 따라 중년인도 몸을 날렸다. "조손지간에 아주 신났군, 신났어." "우리도 가야지요, 언니." "후∼ 이게 뭔 짓인지." 그러나 다들 가는데 혼자 남을 수는 없는 노릇. 친자매처럼 다정히 손을 잡은 노부인들도 단숨에 담장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녀들이 담장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노인이 갑자기 함성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그래, 잘 있었느냐! 내가 왔느니라!! 하하하하!!" 온 천하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였다. 아무리 깊은 잠을 자는 사람이라도 당장 경기를 일으켜 일어나게 만 들 정도의 우렁찬 음성, 물론 그에 대한 책임도 따라왔다. 삐이이이! 이곳저곳에서 어둠을 가르는 경적 소리가 들리고 군인들의 발소리 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잡아랏!" 노부인이 노인의 옆구리를 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재밌잖소." 간단히 대답한 노인이 훌쩍 담을 내려섰다. 벌써부터 화살은 빗발치듯 날아왔다. 물론 그들에게 접근하는 화살 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내가 정말 미쳐!" 노인을 따라 가장 늦게 담에서 내려선 노부인이 가슴을 쳤다. 모든 화살이 그녀를 향해 집중되었다. "이것들이 정말!" 그렇잖아도 화가 치밀 대로 치민 그녀가 서너 개의 화살을 잡았다. 그리곤 화살을 날린 궁수들에게 집어던졌다. 가히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가는 화살. 궁수들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간 화살은 뒤의 성벽에 가공할 만한 힘 으로 부딪쳤다. 꽝! 화살에 부딪친 성벽이 화포(火砲)에라도 맞은 듯 흉측하게 파였다. "어디, 또 한 번 화살을 날려봐!" 물론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저 목숨을 구했다는 안도의 한숨만이 흐를 뿐이었다. 네 번째의 변수이자 중원을 뒤흔들 가장 강력한 변수의 시작이었다. ★★★★☆☆☆☆★★★★ 궁귀검신2부 6권 제46장 삼시파천(三矢破天) 꽝! 둔탁한 격타음과 함께 지붕이 들썩이고 수십, 수백 조각으로 나뉜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마치 암기와도 같이 매서운 힘을 내포하 나무 파편은 문과 벽을 파 고들었고 심지어는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날아들었다. 그렇 지만 십수 명도 넘는 인원 중 어떤 특별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슬그머니 고개를 틀거나 기운을 끌어올려 최소한 의 보호만 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괜한 움직임으로 노기가 하늘 끝까지 뻗친 철포산 (鐵抱山)의 눈에 잘못 띄었다간 어떤 치도곤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 었다. "또! 또 실패했단 말이더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리게 만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딱 벌어진 어깨, 칠십 노구에 어울리지 않게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철 혈마단의 단주 철호산이 가슴 밑에서부터 치미는 노기를 이기지 못하 고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벌서 며칠째냐?! 그깟 도관 하나를 점령하지 못해서 엉거주춤 시간 만 허비하고 있는 것이?!!" 쩌렁쩌렁 울리는 질책에 모두들 자라목이 되었다. "금기령주!" "옛!" 금기령주 후설담이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가장 선봉에 섰기에 실패에 대한 추궁은 이미 단단히 각오한 상태였 다. 그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사흘 안에 오룡궁(五龍宮)을 접수하겠다고 장담한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따위를 듣고자 함이 아니다. 약속한 사흘이 닷새가 되고 벌써 열흘이 되고 말았다. 열흘 동안 대체 한 것이 무엇이냐?" "적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큭!" 대답을 하던 후설담이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어디서 그따위 것을 변명이라고! 그럼 네놈은 놈들이 서방을 맞이 하는 계집처럼 다소곳이 반겨줄 줄 알았더란 말이냐? 한심한 놈 같으 니." 힘겹게 일어난 후설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피해가 어느 정도냐?" "새, 새로 조직한 천리대 인원 서른둘과 혈루대와 참인대의 인원까 지 포함하여 도합 육십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놈들은?" "어림잡아 백이삼십은 쓰러뜨렸습니다." "사천에서 투항한 놈들은 몇 명이나 동원했느냐?" "이백 정도를 동원하여 백여 명 정도가....." 뒤에 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자알 한다. 그래, 그만한 인원을 투입하고도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피해만 잔뜩 입고 돌아왔단 말이지!!" 철포산이 또다시 노호성을 터뜨렸다. 금기령과 그에 배속된 인원을 합하면 도합 삼백오십에 육박하는 인 원이었다. 그 정도의 전력을 동원하고도 뚫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손을 쓸 태세로 다가들자 보다 못한 나렴(那簾)이 한숨을 내 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철포산의 분노가 터진 지금 그를 막을 수 있 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목숨을 나누어가진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 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네." "뭐가?" 철포산이 잔득 화난 표정으로 되물었다. "생각해 보게. 오룡궁이 뚫리면 놈들의 본거지인 자소궁(紫소宮)이 코앞이네. 자네 말대로 누가 선선히 물러나 주겠는가? 놈들도 필사적 으로 달려들고 있을 것. 애당초 금기령 정도의 인원으로 뚫으라는 것 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네." "자소궁 따위가 뭐라고. 놈들의 본거지가 옥허궁(玉虛宮)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잖아. 우두머리 놈들은 금전(金殿)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도망갔고." "그렇다고 싸움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은기령과 동기령은 지금도 승전보를 전해오고 있어." "오룡궁만큼 요충지가 아니니까 그렇지. 누가 뭐라 해도 금기령주는 지금껏 가장 힘든 곳을 담당하면서 나름대로 뛰어난 선전을 해왔네.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는 말게나." "흥." 콧방귀를 뀌며 탐탁치 않는 얼굴을 해도 나렴의 거듭되는 두둔으로 철포산의 노기는 약간 수그러든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한심한 일이야.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지도 벌써 백 일이 넘었는데 얻은 성과라고는 고작 도관 몇 개를 점령한 것뿐이니." "허허, 무당산에 산재한 도관의 삼분지 이를 점령했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나렴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림사는 물론이고 오대세가마저 무너진 지금 무당파와 정도맹이 버티고 있는 무당산은 사실상 정도무림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었다. 무당에서마저 패하면 그것으로 모든 싸움이 끝나 버리는 것. 그것을 알기에 무당파와 정도맹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사천의 압도적인 무위 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당산으로 패퇴한 각 지역의 여러 무인들 여기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대항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철혈마단은 수많은 도관과 요충지를 점령하며 조 금씩 승기를 잡아갈 정도로 엄청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동안 나머지 삼천은, 아니지, 남천도 패천궁을 상대하느라 꽤나 고생하고 있다고 하니까......" "패천궁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도 정체 모를 적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 더군." "어쨌든 우리와 남천이 고생하고 있는 동안 북천이나 중천은 지금도 계속해서 세를 확장하고 있잖아. 처음에 우리를 지원하겠다고 하던 북 천 놈들도 그저 생색이나 내는 정도이니. 참, 놈들 지부(支部)가 몇 개라고?" 철포산의 물음에 철혈마단의 두뇌 역할을 하는 요증(寥蒸)이 그 즉 시 대답했다. "몇 개인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드나 북천과 중천은 그들이 점령한 각 성에 적게는 두어 곳, 많게는 서너 곳의 지부를 두고 각 지부 밑으 로 크고 작은 분타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중천의 세는 하 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어 오늘 다르고 내일이 다를 정도입니다.' 철포산의 고개가 나렴에게 돌려졌다. "그에 반해 우리가 점령한 곳은 고작 사천뿐이야. 이러니 내가 급해 질 수밖에." "이곳만 무너뜨린다면 최소한 호북과 호남은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 겠는가?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게. 자기들도 염치가 있으면 최소한 그 정도는 양보해 주겠지." "흠." 철포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각만큼 일이 간단치 않 다는 것은 고개를 끄덕이는 철포산이나 말을 꺼낸 나렴 역시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잠시 누그러졌던 철포산의 눈에서 또다시 화염이 들끓었다. "그놈은 어찌 되었느냐?" 딱히 누구에게라고 말할 것 없이 묻는 질문인지라 서로들 눈치를 보 기에 바빴다. "그놈은 어찌 되었냐고 물었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는 철포산과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 아지는 것을 느낀 요증이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놈의 종적은 잡았느냐?" "아, 아직......" 요증은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떠듬거렸다. "삼대봉공은?" 철포산이 음양쌍귀 중 아우인 뇌온과 마불이 목숨을 잃어 이제는 세 명분인 봉공들의 움직임을 언급했다. "그분들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한 듯싶었습니다." "흑풍(黑風)과 백풍(白風)은 뭘 하고?" "늘 간발의 차이로 놓친다고......" "병신 같은 놈들!"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는지 철포산이 버럭 소리를 질 렀다. 처음에 안평 분타가 무너지고 연속적으로 두 곳의 분타가 무너졌어 도 철포산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세 곳 모두 규모가 작은 분타 였고 목숨을 잃은 수하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단 순히 살아남은 몇몇 불나방들이 쓸데없는 분탕질하는 것이라 여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단 이십 일 만에 추가적으로 네 곳의 분타가 맥없이 무너지 고 각 분타를 무너뜨린 적의 정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을지호 라는 것이 드러나자 상황은 급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유일한 핏줄이자 장차 철혈마단을 이어받을 손자를 애 꾸로 만든 을지호에 대해 노할 대로 노해 있던 철포산은 그 즉시 철혈 마단의 최정예이자 계속되는 전투에서도 아끼고 쓰지 않았던 흑풍과 백풍을 후미로 돌려 을지호를 쫓게 하였다. 그는 고작 두 명의 적을 상대하는 데 흑풍과 백풍을 모두 동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수하들의 의견을 간단히 묵살하 고 동료를 잃은 봉공들이 추격을 하겠다고 요청하자 두말없이 수락하 였다. 그만큼 을지호를 척살하기 위한 철포산의 의지는 대단했다. 그것은 비단 손자에 대한 일뿐만이 아니라 사천성을 공략하고 대파 산을 넘으면서 을지호에 당한 피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난 지금 결과는 무척이나 실망스런 것이 었다. 두 곳의 분타가 더 무너졌다는 소식은 날아들었지만 을지호의 종적 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전혀 없었다. 철혈마단의 최정예인 흑풍과 백풍에 봉공들까지 투입하고도 아무런 소득이 없자 철포산의 인내력은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다. "요증!" "에, 단주님." 요증이 바싹 긴장하여 대답했다.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을 단 한 자도 빠뜨리지 말고 흑풍과 백풍에게 전해라." "존명!" 철포산은 긴장한 채 명을 기다리는 요증과 궁금함으로 이목을 집중 하고 있는 수하들을 응시하며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 * * "으아악!" "불이야!!" 사위가 어둠에 잠긴 깊은 밤. 분타를 뒤흔드는 비명성과 울부짖음이 철혈마단의 사천성 관도(官渡)분타에 울려 퍼졌다. 한참 꿀맛 같은 잠을 청하고 있다가 난데없는 비명 소리에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선 이들은 불길로 인해 대낮같이 밝혀진 주변을 보며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곤 누구의 명령이라고도 할 것 없이 불 을 끄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그러나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불길은 어느 한곳이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데 다가 때마침 북서풍마저 강하게 부는지라 아무리 물을 붓고 흙을 뿌려 도 소용이 없었다. 바람이 들이닥칠 때마다 널뛰기하듯 번져 나간 불 길은 삽시간에 관도 분타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불길이 치솟은 지 반 각도 되지 않아 관도 분타는 전소(全燒)의 위 기에 맞닥뜨렸다. 하나 그들에게 들이닥친 진정한 위기는 불이 아니라 불길을 잡느라 정신이 없는 그들을 향해 은밀히,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정확하게 날아드는 화살이었다. 을지호와 사마유선이 날리는 화살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철혈마 단의 무인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화살을 맞은 이들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했고 지른다 하여도 아 수라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 비명 소리에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은 거의 모든 건물을 불태운 후에야 조금씩 사그라들었는데 그 짧 은 시간 동안 근 이십에 이르는 철혈마단의 무인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이, 이럴 수가!" 한참 후에야 사태를 파악한 분타주 낭한(郎漢)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고, 공격이 있었단 말인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어보아도 모두 멀뚱멀뚱 서 있을 뿐 그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이쓴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적(麻赤)! 마적은 어디 있느냐?" 낭한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부분타주 마적을 불렀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너져 내린 건물 근처에 쓰러져 있는 마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열기 때문인지 머리카락의 절반이 그슬렸고 무엇 때문에 목숨 을 잃은지 모르겠다는 듯 부릅뜬 눈엔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했다. "도대체 누구냐! 감히 어떤 놈이 이따위 짓을 저지른 것이냐?!" 갑자기 검을 빼 든 낭한이 엉거주춤 서 있는 이들을 노려보며 소리 쳤다. 당장에라도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살벌한 기세에 함부로 입을 여 는 사람은 없었다. 낭한의 검이 움직였다. "크악!" 그의 검에 가까이에 있던 한 사내의 목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허 공으로 튀어 올랐다. "모조리 뒈지고 싶은 것이냐? 죽기 싫으면 빨리 말해라! 어떤 놈이 냐?" 낭한이 시뻘건 피로 물들인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한데 바로 등 뒤에서 나직한 탄식성이 터져 나왔다. "후∼ 무식한 놈 같으니. 그렇게 다짜고짜 검을 휘두를 줄이야." 탄식을 터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을지호였다. 그는 땅에 쓰러진 사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빨리 움직 였어도 구할 수 있는 목숨이었기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누구냐?"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두르는 낭한. 한껏 살기를 내뿜는 검이 섬전과도 같은 빠름으로 을지호의 목숨을 노리며 짓쳐 들었다. "꽤나 날카롭군 그래." 하나 이죽거리는 말투로 보아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을지호는 슬쩍 발걸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간단히 검을 피하고 들고 있던 철궁으로 낭한의 손목을 후려쳤다. "큭!"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검을 떨어뜨린 낭한은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곧바로 비아냥이 뒤따랐다. "도망가는 것은 빠르구만." "네, 네놈은!" 손목을 어루만지며 을지호를 살피던 낭한은 관도 분타를 불태우고 수하들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삼시파천!" "호∼ 나를 아는 모양이군." 어찌 모르겠는가? 사천성을 공략할 때부터 부딪치기 시작하여 대파산에서 절정을 이 룬, 삼시파천 을지호라는 이름은 철혈마단의 무인들에겐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이름이었다. 더군다나 최근에 그에게 당한 분타가 하나둘이 아닌 상황이고 보니 낭한은 그저 들고 있는 철궁만으로도 상대가 누구 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설마 하니 이곳까지 공격할 줄은 몰랐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낭한은 오히려 차분한 모습으로 변했다. "공격 못할 이유가 없지." "이유는 분명 있지만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군. 아니면 무시할 만큼 얼음 같은 냉정함을 지니고 있던지."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마유선의 눈가 에 이채가 피어올랐다. 낭한의 말투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이 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풀기도 전에 낭한의 입가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심맥을 자른 것이 었다. "후... 회할 것이다." 낭한은 뜻 모를 한마디를 내뱉고는 힘없이 고개를 꺾고 말았다. "이거야 원." 손을 쓰지도 않았고 채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건만 낭한이 그토록 갑작스레 목숨을 끊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을지호는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뜻일까요?" 그의 곁으로 다가선 사마유선이 물었다. "뭐가?" 고개를 돌려 되묻는 을지호의 시선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저자의 말이 마음에 걸려요. 특히 마지막 말이." 사마유선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헛소리니까 신경 쓸 것 없어." "하지만......" "괜한 소리라니까. 자신이 지키고 있는 분타는 공격당할 줄 몰랐다 는 소리. 자만심이 머리끝까지 차 있는 놈들이니까." 지금껏 그들이 무너뜨린 분타의 수뇌들의 반응은 거의 한결 같았다. 설마 공격당할 줄은 몰랐다는 경악에 찬 모습들. 한데 이번만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은 그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삼시파천 을지호 대협이시오?" "초로(初老)에 이른 노인이 정중히 예를 갖춰 물었다. "대협은 아니지만 소생이 을지호는 맞습니다." 을지호도 공손히 대답했다. "역시... 소문은 익히 들었소이다. 또한 눈부신 활약상도. 노부는 이한상(李限嘗)이라 하외다." 노인은 자신의 사문이나 가문을 밝히지 않고 그저 이름만을 간단히 밝혔다. 철혈마단에 굴복한 모습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이 노인이셨군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후∼ 위명이 자자한 을지 대협을 만나게 되어 노부 또한 반갑기 그 지없소. 하나 그렇게 반가워할 수만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구려." 노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렇지 않아도 주위의 분위기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던 사마유선이 재빨리 입을 열 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이한상이 힐끗 시선을 던지더니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타주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구려." "무엇을 말씀이세요?" 사마유선이 황급히 되물었다. "철혈마단에서 두 분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쫓고 있는 것은 아실 것이오." 을지호와 사마유선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분이 이토록 건재하다는 것은 그들이 아무런 소득도 얻 지 못했다는 것. 문제는 이에 분노한 철혈마단의 단주가 수하들에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끔찍한 명을 내렸다는 것이오." "어떤 명령입니까?" 을지호의 음성이 절로 심각해졌다.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은 확실하나 정확히 뭐라고 명령을 내렸는지 는 모르겠소. 다만 이후에 벌어진 상황을 보면서 그 내용을 짐작하는 것뿐." 다시 말문을 닫은 이한상이 깊은 한숨을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 무너뜨린 분타의 인근 문파들이 모조리 멸문을 당하였 소." 을지호와 사마유선은 이한상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애당초 대항을 했던 문파들은 이미 멸문을 당한 지 오래지 않던가. 그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이한상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멸문을 당한 이들은 모두 놈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군소문파 들이었소. 무공을 익힌 사람들은 물론이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어린아 이들과 아녀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쓸어버렸다는 소문이오." 을지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쳘혈마단주가 내린 명령이란 것이......" 떨리는 음성에 이한상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두 분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분타가 무너지면 그 대가로 이 유를 불문하고 인근의 모든 문파를 제거하라는 천인공노(天人共努)할 명령 같소." "하지만 이미 항복하지 않았습니까?" "놈들에겐 항복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차이가 없을 것이오. 혹 누성 (淚城) 분타를 아시오?" "사흘 전에 무너뜨린 곳입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소." "그, 그렇다면 혹시......" 불안해하는 을지호의 시선을 보며 이한상이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 아침에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인근 문파들의 씨가 말랐다고 하외다." "......" 을지호와 사마유선의 안색은 이미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문제는 우리도 곧 그 꼴이 되리라는 것이외다! 잘나디잘난 누구 덕 분에." 이한상의 뒤에서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던 장한이 소리쳤다. "어허!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어르신? 명성이 자자한 저자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물러나면 그만이지만 그 뒷감당은 누가 해야 합니까? 고스란히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만 하라니까!" "제 목숨은 상관없습니다. 까짓 칼밤을 먹고사는 처지에 목숨 따위 에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여편네며 토끼 같은 애들은 이제 어쩌란 말입니까?" 이한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언성을 높이는 장한의 표정은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명성 운운하며 비웃음을 보내는 그의 말에 차갑게 안색을 굳히 던 을지호도 절망에 빠진 그의 표정을 보며 결국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해해 주시구려. 본심은 아닐 것이외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후∼" 답답하기는 이한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라고 어찌 가족들과 제자들 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이는 단순히 누구 한 사람의 공격 대문이 아니라 어쩌면 철혈마단에게 고개를 숙이고 목숨을 구걸 한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수순일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변변한 대항 도 하지 못하고 굴복한 이들은 그저 쓰고 버리는 한낱 소모품에도 미 치지 못했으니까. "우리들은 단지 철혈마단을 견제하기 위해서 벌인 일인데 일이 그렇 게 되고 말았군요. 여러분께 피해를 줄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죄송합 니다." 을지호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대협께서 죄송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놈들의 행동이 잔악(殘惡)한 것이지."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만 우리들로 인해 벌어진 일. 책임 을 지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갑작스런 을지호의 말에 놀란 이한상이 되물었다. "이곳에 남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사마유선이 당황한 눈빛으로 을지호의 팔 소매를 잡아채며 눈 치를 주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곳도 피로 물들게 될 거야. 그걸 알면서도 모 른 체하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 슬며시 손을 뿌리친 을지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작심하고 쫓는 놈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지금껏 은밀히 행동한 것도 놈들의 추격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잖아요." "그거야 모르지." 을지호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다.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는 짧은 한숨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건 아니 되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한상이 미간을 한데 모으며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을지호와 사마유선은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쌍수를 들어 환영해도 부족하련만 오히려 거부를 하다니 이해 가 되지 않았다. 둘의 표정에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낸 이한상이 더 욱 목소리를 높였다. "비록 이런 촌구석에 있으나 우리는 무림이 사천의 악도들에게 장악 당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고 놈들에 대항해 이곳저곳에서 치열한 싸 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이다. 지금은 놈들에게 굴복하여 비굴한 목숨을 연명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때는 의기와 정의를 논하며 당당했던 적이 있던 터.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을지 대협 같은 분을 위기에 빠뜨릴 수는 없소이다." "그리되면 여러분의 목숨이......" "물론 위험할 것이오. 그러나 대협께서 남는다고 위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외다." 그는 을지호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고개를 돌리더니 불만을 털어놓았던 장한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내 말이 틀렸는가?"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게. 무엇이 옳고 그 른지를." "젠장, 난 모르겠습니다.' 선두에 섰던 장한이 고개를 홱 돌렸다. 여전히 불만 어린 표정. 그러나 더 이상 반발은 하지 않았다. 이한상 의 말대로 어차피 물은 엎질러진 것이었고 다시 주워 담는다고 될 일 도 아니었다. 모인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도 장한과 다르지 않았다. 다들 체념하 다시피 한 표정에선 걱정과 두려움이 교차했으나 처음과는 달리 적의 는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면 어찌하실생각이십니까?" 을지호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언젠가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소. 그에 대 한 준비도 조금씩 해두었고. 놈들에게 우리의 신세는 집에서 부리는, 하루하루 죽어라 일만 하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짐승과 같았으니까. 아무튼 갑작스레 닥쳐 어찌 될지는 잘 모르나 몸을 피할 약간의 여유 는 있을 것이오.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여도 뿔불히 흩어져 도주하는 우리 모두를 쫓을 수는 없을 것이고 또한 근처 관청(官廳) 쪽으로 몸 을 피하면 구차한 목숨 어찌어찌 연명할 수는 있을 게요. 하니 대협 께선 함부로 목숨을 버리려 하지 말고 우리를 대신해 놈들과 싸워주시 오." "어르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이 정도 뿐이라오. 함께 싸울 용 기도 없다고 너무 욕하지는 마시구려." 이한상이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욕이라니요! 제가 어찌 어르신과 여러분께 욕을 하겠습니까? 목숨 을 위태롭게 만든 죄도 크거늘." 을지호는 당치도 않다는 듯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말은 쉽게 하고 있어도 을지호는 이한상의 말대로 그들이 철혈마단 의 마수에서 몸을 건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관에서 직접적으로 관여를 한다면 모를까 관에서 끼어들 가능성이 상당히 희 박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차라리 우리와 함께 무당산으로......" 말을 꺼내면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을지호는 끝까 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한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은 고마우나 우리들만이라면 모를까. 가족들까지 데리고 움직 이는 것은 불가능하외다." "그렇지만......"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에 을지호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이미 끝난 사안이니 더 이상 재론하지 마시구려. 자자, 다들 무엇 하고 있는가? 한시가 급하네. 그나마 숨 쉬는 목숨 연명하고 싶거든 어서들 움직이게나. 대협께서도 이만 떠나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이한상은 일사천리로 주변을 정리하고 정중하게 예을 차리며 몸을 돌렸다. 끝까지 당당한 태도와 여유있는 말투로 인사를 했으나 을지호는 고 개를 돌리는 그의 옆모습에서 어둡기 그지없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 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어떻게 하지요?" 사마유선의 물음에 을지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후∼ 모르겠는걸. 정말 어찌해야 할지......" "그러게요. 놈들이 그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차라리 싸울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슬쩍 고개를 돌린 을지호는 침울한 표정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이들의 등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후∼ 돌아가야겠어." "네?" "놈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더 이상 기습은 의미가 없어. 엉뚱한 이들의 피해만 커질 뿐이야."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인지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럼 어디로?" "일단 무당산으로 가서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남궁세가의 식솔들에 게 돌아가야지. 오래 떨어져 있었더니 아무래도 불안해. 뭐, 그 난리 를 겪고서도 일단은 무사하다니까 다행이지만." "소문에 의하면 무사한 정도가 아니던데요." 슬그머니 다가와 팔짱을 끼는 사마유선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지 어졌다. "나름대로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것 같아요, 그들도." 제47장 위지황(尉遲皇) 하남성 상성현(商城縣) 외곽의 한 허름한 관제묘(關帝廟). 평소 인적이 드문 그곳에 일단의 무리들이 은밀히 숨어든 것은 정확 히 나흘 전부터였다. 거의 육십에 이르는 인원들. 대다수는 관제묘 밖 숲이나 나무 위 등에 안식처를 마련하고 은신하 였는데 그들은 앞으로 있을 싸움에 대비하여 편안히 휴식을 취하면서 한시도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잠깐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참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은 그간 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관제묘를 지 켜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관제묘 안에서 머리를 맞대 고 있는 인물들을 지켜야만 했다. 어두컴컴한 관제묘 안은 작은 등잔 하나만이 힘겹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딱히 의자도 없이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 다름 아닌 남궁민을 중심으로 한 남궁세가의 인물들과 개방의 방도들 및 사천에 대항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군소문파의 무인들이었다. "어떤가요?" 남궁민이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녀와 정반대에 앉아 있는 한 노개가 탄식 어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계속해서 살피고 있습니다만 놈들의 감시망이 워낙 치밀하여 쉽지 가 않소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지금은 무너졌지만 한때는 개방의 호북총타를 책임지던 장로 풍찬 (風粲)의 낯빛에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큰일이군요. 벌써 사흘이나 지났어요. 너무 오래 지체했다간 낭패 를 볼 수도 있는데." 남궁민이 짧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바로 곁에 앉아 있던 청년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초번 형님과 곡양(曲楊) 선배께 서 직접 나섰으니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는 심각하기만 한 주변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완벽하게 동떨어지 는 밝은 얼굴이었다. "위 공자님의 말씀대로라면 정말 다행이지요." 남궁민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제 말이 틀림없다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뇌전 형님?" 곧바로 뇌전의 핀잔이 날아들었다. "왜 안 나서나 했다. 임마, 지금이 그렇게 실실 웃을 때냐? 까딱 잘 못하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잖아요.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시끄러! 아무튼 주둥이에 뭘 처발랐는지 그저 말만 번드르르 해서 는." 상대해 봐야 골만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뇌전. 그의 모습을 보며 다들 웃음을 보였다. "그나저나 초번이 올 때가 지났는데......" 힐끗거리는 시선으로 관제묘의 입구를 살피는 뇌전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새벽녘에 정찰을 나간 초번이 돌아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 났는데도 깜깜무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끼이이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낡아 빠진 관제묘의 문이 요란한 마찰음 과 함께 활짝 열리고 정찰 나갔던 초번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 죽는 꼴을 보고 싶냐? 대낮에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소리 해댄 그가 남궁민을 향해 허리를 숙였 다. "조금 늦었습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남궁민이 초번과 그들 뒤따라오는 곡양에게 안도의 표정을 내보이 며 어서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앉기가 무섭게 풍찬이 황급히 물었다. "그래, 어떠냐? 자세히 살펴보았느냐?" "예, 장로님. 가능한 한 최대한 꼼곰히 살폈습니다." "달라진 것이라도 있느냐? 새로운 소식이라도?" 거듭되는 풍찬의 채근에 초번이 곡양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네가? 알았네. 그래 공격이 가능하겠는가? 인원이 더 추가되었 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남궁민이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선 놈들이 점령하여 상성(常性) 분타로 삼고 있는 현무관(玄武 館)에 상주하는 총 인원은 대략 백여 명 정도입니다. 그중 단순히 허 드렛일을 하는 자들을 제외한 중천의 무인들은 약 오십 명으로 추정됩 니다." "추정은 안 돼. 정확해야지." 강유가 말을 자르고 나왔다. "최대한 정확히 알아낸 것입니다. 현무관에 잠입하지 않고는 이 이 상은 힘듭니다." "계속하세요." 뭐라 더 말을 하려던 강유를 제지한 남궁민이 설명을 재촉했다. "분타주는 무명도(無名刀) 이소유(李少柳)라는 자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자입니다. 실력은 강 호법과 비슷한 수준으로 파악됩니다." "확실한 거냐? 지난번처럼 되도 않는 실력을 지닌 고수는 아니겠 지?" 뇌전이 진저리를 치며 물었다. 무당산 인근과 패천궁의 영역을 제외한 무림의 전 지역이 사천의 수 중에 덜어진 이후 그들에 대항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몸을 숨기고 을지호를 기다리자는 강유와 해웅의 만류에도 남 궁민은 독자적으로 사천에 대항할 것을 결정했고 지금껏 싸움을 이어 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풍천을 비롯하여 개방의 인물들과 몇몇 몰락한 문파의 무인들이 합세하여 인원도 제법 늘었다. 그래 봤자 사천이 각 지역에 세운 분타 하나를 상대하기가 버거울 정도인지라 정면 대결을 벌인다 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격이었다. 결국 정면으로 싸움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오직 기습 공격만이 최 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목표를 정하면 그 목표물에 대해 몇 날 며칠을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인원과 장비는 물론이고 언제, 누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이동을 하는지까지 파악하였다. 목표물에 감당하기 힘든 고수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모든 계획을 접고 과감하게 포기하였다. 다소 무리를 한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으나 만에 하나 무리수가 통하지 않았을 경우 뒤에 닥칠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풍찬을 필두로 한 개방 제자들의 뛰어난 정보 수집력 과 초번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세력과 인물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었다. 지금껏 일곱 번의 계획을 세워 그중 여섯 번을 성공했지만 단 한 번 뼈저린 실패를 맛보았다. 달포 전,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장경(長庚) 분타를 공격하던 때였 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전격적으로 기습을 펼쳤건만 그들의 정보력 을 비웃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개방의 정보와 인물편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분타주 조욱(曺旭)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본 신의 실력을 철저하게 숨긴 고수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궁민과 강유의 눈물 겨운 합공으로 그에게 부상을 입 히고 간신히 도주에 성공을 하긴 했으나 그 한 번의 싸움으로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그나마 그 정도의 피해에 그친 것을 감사 해야 했다.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뻔하였으니까. 뇌전은 바로 그때의 일을 언급한 것이었다. "후∼ 그렇게 따지자면 현재 놈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녔는지 아무도 모르겠지. 워낙 실력을 감추고 있는 놈들이 많으니. 그래도 이번만큼은 확실히 믿어도 될 것 같다." "어째서?" "과거 전력이 있어. 천풍객(天風客) 황석종(黃昔從)과 양패구상한 전력이." "흠, 그렇다면 다행이지." 뇌전은 황석종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다만 초번이 그토록 자신있 게 말하는 것을 보며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남궁민이 나 강유 등도 마찬가지였다. "천풍객과 승부를 겨룬 적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양패구상이라... 잘 되었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풍찬은 천풍객 황석종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아시는 자입니까?" "조금 안면이 있네. 나름대로 실력은 있는 친구였지. 분명 조욱 같 은 고수는 아닐세." "잘되었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민이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풍찬의 안색이 밝아졌다는 것은 초번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다소 안심이 되는지 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초번에게 시선을 주었다. 초번이 끊어졌던 설명을 다시 시작했다. "이소유 이외에 다소 경계해야 할 인물은 추소열(追逍熱)이라는 자 가 있습니다. 과거 이소유에게 패한 전력이 있지만 그에 버금가는 고 수로 생각됩니다. 이 둘 이외에도 열 명 내외의 인물이 상당한 실력 을 지니고 있습니다. 싸움이 벌어지면 우선적으로 그들부터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그들만 제압하면 비교적 쉽게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같은 생각이신가요?" 남궁민이 곡양에게 물었다. "예." 곡양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자 남궁민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 었다. "좋아요. 다소 불안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면 충분하다고 봐 요. 공격하도록 하지요." 풍찬이 물었다. "언제쯤이 좋으시겠소?" 그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남궁민이 곧 힘주어 말했다. "이 밤은 넘기지 말아야겠지요." "크윽!" 악다문 입술 사이를 뚫고 나오는 신음 소리.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으나 살이 갈라지고 뼈가 드러나며 느껴지 는 고통은 장난이 아니었다. 어깻죽지에서 시작하여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간신 히 중심을 잡은 강유는 여전히 호전적인 자세인 이소유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긴 것 같소." 강유가 당당히 어깨를 펴고 말했다. 자신의 패배가 믿기지 않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강유를 응시하던 이소유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대구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나도 빠르다고 자부했건만... 꽤나 빠른 검이었다." 그의 가슴 어귀에서 조금씩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강유의 검이 남 긴 흔적이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오." 강유는 진심 어린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단 일 합으로 결정된 둘의 싸움은 누가 우위에 있다고 확실히 말하기기 힘들 정도로 박빙이었다. 다만 패배라는 것을 조금도 생각지 않고 약가는 여유롭게 싸운 이소유에 비해 강유는 반드시 그를 제거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그 약간의 심리적 차이가 지 금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누군가 그러더군. 운도 실력이라고. 그러나 승부를 떠나 오늘의 일 만큼은 그대들에게 결코 좋은 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이소유는 뜻 모를 말을 남기며 힘없이 꼬꾸라졌다. 강유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적의 우두머리 를 제거했다는 안도감에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전황이 어찌 돌아가는 지 살피기 시작했다. 동이 틀 무렵 전격적으로 시작된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생각보다 강했지만 강유가 이소유를 제거했고 추소열을 상대하는 해웅도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나머지 핵심 고수와 치열하게 싸우는 뇌전, 초번 등도 다소간 우위를 보여주고 있었고 남궁민과 풍찬이 중 심에서 싸움을 독려했다. 특히 후위에서는 천뢰대가 확실한 지원 사격 을 했는데 그들의 화살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적의 목숨을 노렸다. "성공이구나." 강유가 다친 상처를 어루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곳곳에서 여전히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는 있었으나 승기는 이미 기울어진 것 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쐐애액! 귀청을 울리는 파공성과 함께 그다지 넓지 않은 현무관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물체가 있었따. 이어 울려 퍼지는 신음성. "크윽!" 궁지에 몰아넣은 추소열에게 승리를 확정짓는 최후의 일타를 날리 려던 해웅의 거대한 몸이 삼 장이나 날아가 처박혔다. "해웅!" 기겁을 한 강유가 허공으로 몸을 띄웠고 치열하게 펼쳐졌던 싸움도 한순간에 멈춰 버렸다. "크으으." 대 자로 뻗은 몸을 일으키려 노력하는 해웅은 자신의 아랫배에 깊 숙이 박혀 있는 창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비록 금 강불괴(金剛不壞)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웬만한 도검은 물론이 고 검기의 수발을 자유자재로 할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상처 하나 입지 않는 몸이 아니던가. 한데 난데없이 날아온 창은 그런 자신감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괜찮은 거냐?"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강유가 부축을 하며 물었다. "모, 모르겠다.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움직이지를 못하겠어." "조금만 참아라." "젠장, 더럽게 아프... 큭!" 입을 열던 해웅이 눈을 치켜뜨며 비명을 질렀다. 그가 뭐라 입을 여 는 사이 강유가 창날을 뺐기 때문이다. 강유는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창을 내동댕이치고 재빨리 지 혈을 했다. "천만다행이다. 단전을 비껴갔어." 그나마 안심했다는 듯 가벼이 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강유. 하나 어느샌가 기절한 해웅은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강유는 급히 달려온 천양대 대원에게 해웅을 맡기고 새롭게 등장한 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궁민 등이 이미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살벌한 인상의 노인 넷과 세 명의 중년인, 그리고 맨 앞에는 삼십이 못되어 보이는 청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좋지 않다.' 강유는 한눈에도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남궁민과 풍찬 역시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는데 풍찬은 특히 맨 뒤의 두 명의 노인을 보며 거의 사색이 되다시피 했다. 아마도 그들의 정 체를 아는 듯했다. "서, 섭혼도(攝魂刀) 장현일(張現溢) 선배!!" "오랜만이네, 풍찬." 왼쪽의 노인이 고개를 까딱이며 아는 체를 했다. 별호만큼이나 살벌 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그는 가슴에 큼지막한 도를 품고 있었다. "선배가 중천의 주구일 줄은 몰랐소이다." 섭혼도 장현일 겉으로 풍기는 외모와는 다르게 그는 산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 는 일대 고수로 뛰어난 인품과 넓은 도량으로 뭇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무림의 선배였다. 한데그런 그가 중천의 일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히 기절할 일 이었다. "듣기에 조금 그렇군. 난 처음부터 한천문, 아니, 자네들이 알고 있 는 중천의 사람이었네." "....." 풍찬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자 장현일의 옆에 있던 노인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늙은 거지까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걸." "벽력창(霹靂槍) 이굉(李宏)! 네놈까지 왔더냐." 과거에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는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가히 좋 지 않았다. "흐흐, 실력은 쥐뿔도 없는 놈이 버릇없는 말투는 여전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저 굼뜬 곰보다는 네놈의 주둥이를 막아버리는 건 데 그랬어." '저 노인이 창을......' 말을 들어보니 해웅에게 치명타를 입힌 창의 주인이 바로 이굉인 것 같았다. 그를 노려보는 강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강유의 눈빛을 의식한 이굉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훗, 어린놈의 눈빛이 꽤나 쓸 만하구나. 조금만 기다리거라. 곧 상 대해 줄 터이니." "기다릴 필요가 있겠소?" "건방진 꼬마 놈!" 당차기만 한 강유의 음성에 이굉이 버럭 화를 냈다. 하나 모든 일에 는 순서가 있는 법. 아직 그가 나설 때는 아니었다. "자자, 인사는 그쯤해 두시고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슬그머니 눈치를 주는 것으로 이굉이 움직이는 것을 제지한 맨 앞의 청년이 싱글거리며 나섰다. "항복을 한다면 자비를 베풀 수는 있습니다만." 부설이 남궁민을 향해 한 걸음 나서며 살짝 허리를 숙이고 입을 열 었다. 사부의 명을 받아 하남성의 남부 일대에서 암약하고 있는 남궁세가 를 잡기 위해 들인 공과 시간이 얼마던가. 이제는 모두 끝났다고 여겼 는지 부설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닥쳐라! 항복 따위를 할 성싶으냐?" 풍찬이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도리어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당신에게 물은 것이 아니니 나서지 마시오. 난 남궁세가의 가주께 여쭌 것이니." 남궁민의 생각이라고 풍찬과 다르지 않았다. "항복을 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어요." "흠, 하나뿐인 목숨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하시는구려. 자결이라... 뭐, 선택은 자유라지만 그 고운 입술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너무나 매 섭소이다. 하하하." 아래위 전신을 훑어내려 가며 내뱉는 부설의 음성에 모멸감을 느낀 남궁민이 얼굴을 굳히는 순간 강유의 싸늘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죽고 싶다면 그리해 주마!" 동시에 한껏 살기를 담은 강유의 검이 부설의 목덜미를 향해 움직 였다. "헛!" 가히 전광석화와도 같은 빠름에 당황한 부설이 움찔하며 눈을 감았 고 단숨에 그의 면전에 이른 검이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목을 관통 하기 일보 직전. 검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훌륭하구나.' 그 짧은 찰나에 품에 안고 있던 도를 움직여 부설을 보호한 장현일 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직 부족하오." 가주를 모욕한 부설의 목을 베지 못한 것이 억울한 듯 퉁명스레 내 뱉은 강유의 시선은 붉어질 대로 붉어진 낯빛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 는 부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얼마나 놀랐는지 부설의 표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그따위 망발을 입에 담아라. 반드시 죽여주마." "그럴 기회가 있을 성싶으냐!" 부설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난 분명히 기회를 줬다. 그것을 걷어차 버린 것은 바로 네놈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잔인한 살소를 흘리며 쏘아붙인 부설이 번쩍 손을 들었다. 동시에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무인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인원은 서른 남짓이었으나 하나같이 형형한 안광을 빛내는 것이 예사롭지 않 았다. '함정이었구나.' 그제야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남궁민은 순식간에 포위망을 구축하는 중천의 무인들을 보며 아득 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흐흐흐, 네놈들을 잡기 위해 두어 달간 꽤나 고생했다. 이제 그 고생한 보람을 찾게 되겠구나." "네놈의 말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강유가 또다시 그의 목숨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이미 한차례 식은땀을 흘렸던 부설이 재빨리 몸을 물리고 그것이 신호인 양 사방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지금껏 기습 공격에 일방적으로 밀리다 구사일생한 상성 분타의 무인들도 기세를 올리며 반격했다. "우선 저 녀석들을 제압하세요. 놈들이 마음껏 화살을 날리게 가만 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부설이 온 세상을 뒤덮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화살을 날리는 천뢰대 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세 명의 중년인 이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그들은 일체의 군더더기도 없는 동작으로 천뢰대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단 몇 발자국도 되지 않아 거리를 좁혀오는 그들을 살피는 율천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접근을 허용하지 마라.' 그가 나직한 음성과 함께 시위를 당겼다. 핑!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언뜻 보기엔 평범하기만 한 화살이었다. 그러나 그 화살 뒤에 중년 인들의 각 요혈을 노리며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드는 것을 본다면 결 코 평범하리라 말하지 못할 것이었다. "헛!" 화살은 비단 어느 한 사람에게만 쏟아지지 않았다. 각자가 어찌 움 직일 것인지를 미리 예측이라라도 한 듯 모든 방위를 완벽하게 차단하 며 날아든 화살에 중년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천뢰대와 의 싸움이 생각만큼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들로 인해 남궁세가 측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천뢰대 의 공격이 멈춰졌고 그것은 싸움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중천의 무인들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의 위협에 서 벗어나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었으며 수적으로도 우위를 점 했다. 반면에 다 잡은 승기를 빼앗긴 남궁세가와 그 외의 무인들은 앞 뒤로 적을 상대하게 된 데다가 함정에 빠졌다는 위기감에 기세가 꺾여 꽤나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부설의 명으로 새로 싸움에 참여한 이들은 중천의 오랜 숙원을 이루기 위해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자들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 듯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고 그 자신감만큼이나 실력 또한 발군이었다. 천음대와 천양대에서도 그들을 상대하여 우위를 점하는 사람은 천 도문 등 양 대주를 비롯하여 고작 한 손으로 꼽을 정도. 그 외의 대 원들은 대체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검왕 비사결과 을지호가 전력을 다해 키워내 개개인 모두가 상당한 실력을 지닌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그러할 진대 개방의 방도들과 군소 문파의 인이들이 그들의 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궁여지책으로 원진 을 구성해 대항해 보려 하였으나 역부족. 상대가 살기 띤 검을 번뜩일 때마다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속절없이 쓰러졌다. 곡양을 비롯하여 몇 몇 선배만이 미친 듯이 움직이며 힘겨운 대항을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힘겨운 듯 보였으나 실상은 여유롭게 적과 대치하고 있던 비무영이 위지황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특히 저 노인은 너무 위험해.] 위지황이 섭혼도 장현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장현일이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 되는 것과 동시에 쏟아진 눈길이건만 한참이 지나도 거둬지지 않는 것 이 마치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라고 말이라도 하는 듯하여 신경을 몹시 건드렸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비무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잘...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위지황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본신의 실력을 드러낸다면 지금 자신을 핍박하고 있는 상대 따위는 일초지적도 되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극도로 불 리한 전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장밋빛 환상에 불과했다. 우선 섭혼도 장현일과의 싸움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지지않을 자신 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길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와 버금가는 이굉 또한 버티고 있었다. 침묵을 지키는 나머지 노인들 또 한 평범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본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야 몰래몰래 도움을 주 며 대충 감출 수 있었다지만 저 정도의 고수와 싸우게 된다면 필시 정 체가 드러납니다. 자칫 하면 중천과 북천 사이에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비무영은 위지황의 정체가 드러나면 북천의 입장이 몹시 난처해질 것이라는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위지황은 귓등으로도 새겨듣지 않았 다. [시끄럿! 까짓 정체가 드러나면 어때? 아버님껜 죄송하지만 난 이미 북천을 등지고 떠난 몸이야. 물론 꼬투리야 잡힐 수 있겠지만 그뿐이 야.] [하지만......] [하지만은 뭔 하지만! 계속 왈가왈부 떠들어대면 놈들이 몰래 잠입 시킨 첩자의 목을 자라 보내 버리면 돼. 놈들의 표정이 아마 가관일 거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북천의 힘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아는 중천이 함부로 분란을 일으킬 리가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염려 는 붙들어 매. 지금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니까.] [예?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비무영이 불만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위지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알게 된다는 것이지. 내가 북천의 인물이라는 것을.' 그랬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위지황이 함부로 나 설 수 없는 것은 중천과 북천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남궁민이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사천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 그녀는 어찌 행동할까? 그녀에 게 있어 사천은 원수나 다름없는데.' 어쩌면 자신을 원수와 동일시 할 수도 있었다.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지.' 맺고 끊음이 확실한 성격을 감안하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다. 한눈에 반해 그녀를 쫓아다닌 지도 이미 백여 일. 강유, 해웅 등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도 그는 남궁민과는 절대 로 남매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남매처럼 친근한 관계도 좋았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러한 관계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원하지 않는 싸움도 했다. 동맹 관계인 중천의 분타를 공격할 때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해도 잠깐뿐 이었다. 그에게 있어 지상 과제는 오직 남궁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 으니까. '이제 겨우 시작인데.' 위지황의 안색이 더없이 침울해졌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 고 하늘도 무심하지 않아 최근 들어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 을 느끼며 얼마나 기뻤던가. 한데 바로 지금, 그 모든 것들이 한낱 물거품처럼 흩어질 위기에 봉 착한 것이다. "후∼"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악!" 그의 귓가로 지금까지의 모든 상념을 일시에 날려 버리는 비명성이 들려왔다. 주변의 함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가려 거의 들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 음성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 이 갈라지는 혼란 속에서도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번개같이 돌려지는 시선, 이미 그의 상대는 칠공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상태였다. 벽력창 이굉을 맞아 나름대로 선전을 하던 남궁민은 결국 막강한 내공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은하칠식(銀河七式)을 감당하지 못하고 큰 부상을 당한 채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에 앞서 이미 한 차례 격전을 펼쳤는지 강유는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이굉이라고 마냥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강유의 쾌검에 하마터면 목이 잘릴 뻔했고 남궁민이 휘두른 검이 가슴에서 옆구리에 이르는 흉칙한 상처를 만들었다. 그래도 최후의 승자는 결국 이굉이 었다. '멍청한 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위지황은 남궁민이 부상을 당한 것 모두가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에 몰두하는 바람에 생겨난 일이라 자책했다. "따라와라, 비무영." "젠장! 일났군, 일났어.' 위지황이 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이상 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 었다. 단 일 격에 정신없이 덤벼드는 상대를 격살한 비무영도 곧바로 몸을 날렸다. "저 늙은이가 미쳤나!" 남궁민에게 다가가던 위지황은 괴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최후의 일 격을 가하려는 이굉의 모습에 그대로 검을 던졌다. "감히 어따 창을 들이대! 꺼져라, 늙은이!" 쉬이익! 한껏 내공이 실린 그의 검은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지르며 이굉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날아갔다. 이굉은 자신을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폭사되는 검을 보며 황급히 창을 들었다. 챙! 간발의 차이로 검을 막아낸 이굉. 하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를 노렸던 검에는 위기에 빠진 남궁민을 돕고자 하는 위지황의 마음이 담 겨 있었다. 그것은 상당한 부상을 당한 데다가 급히 대응하느라 미처 힘을 쏟지 못한 이굉이 감당하기에는 실로 버거운 거력이었다. "크헉!" 힘을 이기지 못한 그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러는 사이 재빨 리 접근한 위지황이 이굉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젠장맞을!' 막지 못하면 죽는다는 위기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굉은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비릿한 울혈을 억지로 집어삼키고는 마주 손을 뻗었다. 꽝! 장력과 장력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아!" 남궁민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아는 한 위지황의 무공은 뇌전이나 초번보다도, 아니, 엄밀 히 말해 남궁세가의 일반 제자만큼의 실력밖에는 도지 않았다. 그런데 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굉 같은 고수와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결과 는 너무도 뻔했다. 하지만 그녀도 미처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위지황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던진 검에 얼마나 강맹한 힘이 실려 있는지, 또 그가 십여 장이 넘는 거리를 겨우 두어 번의 도약으로 접 근하여 공격을 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이굉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방어 를 했는지를. 그것을 알 길 없는 남궁민은 피를 토하며 쓰러질 위지황을 생각하며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짚는 부드러운 손길이 있었다. "괜찮으세요?" 염려가 가득 담긴 음성에 남궁민의 눈이 번쩍 떠지고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위지황을 볼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남궁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당연 히 죽었으리라 생각한 사람이 살아 있는 거이다. 살아 있는 정도가 아 니라 보무도 당당히 어깨를 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이굉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이게......" 위지황이 살았다는 것은 너무도 다행한 일이지만 그렇다 쳐도 이굉 이 쓰러져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아다. 강유와 자신이 혼신의 노력 을 다하여 싸우고 최후의 필살기까지 썼음에도 고작 부상을 입히는 데 그쳐던 그가 아니던가. "도, 도대체가......" 태산과 같이 높은 장벽처럼 느껴졌던 그가 머리를 땅에 처박고 쓰러 져 있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심정을 어찌 모를까? 그렇지만 위지황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대단한 실력을 지녔구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지만 그토록 손쉽게 이굉을 쓰러뜨릴지는 몰 랐다는 듯 섭혼도 장현일의 안색은 놀라움에 물들어 있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감추려고 해도 감 추어지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다. 은은히 드러나는 기도로 보았을 때 네가 이들 중 가장 강할 것이란 예상은 했었다. 한데 설마 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더구나 놀라운 것은......" 이굉의 시신을 살피며 입을 열던 장현일의 눈가에 이채가 어렸다. 위지황의 장력을 직접 받았던 양손은 물론이고 드러난 피부에 하얗게 내려앉는 서리를 본 것이었다. "네가 어째서 한빙곡의 무공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 "손은 물론이고 이미 온몸을 꽁꽁 얼려 버렸구나. 내 알기로 이만한 극음의 냉기를 뿜어낼 수 있는 장법은 오직 하나 한빙곡의 한음신장 (寒陰神掌)뿐이다. 더구나 익힌 경지를 보니 십 성 이상. 내 말이 틀 렸느냐?" "맞소." 무공의 연원에 성취한 수준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고수의 눈을 어찌 속일 것인가. 위지황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빙곡이 어째서 우리를 적대시 하느냐?" "한빙곡이 중천을 적대시 하지는 않았소." "그게 무슨 소리냐?"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장현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나의 의지와 행동은 한빙곡과 관계가 없소. 그곳을 떠나온 지 이미 오래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위지황.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남궁민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제야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충 감을 잡은 장현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네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다. 그만한 나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하나 다른 사람이 네 말을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부설을 말함인가? 그렇잖아도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부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또한 이해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어디 실력을 한번 보자꾸나." 말을 마친 장현일은 한 걸음 물러나더니 가슴에 품고 있는 도를 늘 어뜨리며 자세를 잡았다. 남궁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눈앞의 상대는 반드시 꺾어야 했다. 문 제는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것.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싸움 이었다. "비무영!" 마음을 굳힌 위지황이 썩은 감자를 씹은 듯 인상을 구기고 있는 비 무영을 불렀다.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위엄있는 모습과 음성에 재빨리 표정을 지 운 비무영이 허리를 꺾으며 대답했다. "예, 공자!" "지켜라!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 목숨을 걸고 반드시 지켜내라." "존명!" 위지황이 지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 다. 대답과 함께 몸을 움직인 비무영은 지금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 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궁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때마침 간신히 정신을 차린 강유가 기다시피 하여 다가왔다. 비무영은 그들 앞에서 다가오는 그 어떤 적도 허용하지 않게다는 듯 살기 띤 자세로 검을 들고 있었다. 비무영이 남궁민의 곁으로 다가간 것을 확인한 위지황이 자세를 잡 았다. "한 수 가르침을 받겠소." "오너라." 흔쾌히 대답한 장현일이 도갑(刀匣)을 집어던지며 대꾸했다.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행동에 부설을 비롯하여 놀라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무인이 싸움을 앞두고 검집이나 도집을 던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던 가? 도저히 승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어쩌 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떨쳐 버리고 스스로 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곧 위지황과 의 싸움이 승부를 단언할 수 없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었다. "타핫!"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으로 달려들며 도와 검을 휘둘렀다. 꽝! 그들이 발출한 도기와 검기가 앞서 나가 허공에서 엇갈리며 지축을 울렸다. '역시나 강한 상대로구나.' 단 한 번의 충돌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한 장현일이 손끝에서 은근히 전해오는 저림을 느끼며 감탄하였다. 물론 두려움 따위가 있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늘그막에 상대다운 상대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투지가 타올랐다. 장현일은 활활 타오르는 투지를 바탕으로 애도를 곧추세웠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괴이한 기운이 일렁였다. 아찔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 를 두려움을 일게 만드는 기운. 그에게 섭혼도라는 별호를 안겨준 취 혼천심공(取魂穿心功)을 운기할 때 이는 기운이었다. 취혼천심공은 상대의 마음을 흔드는 데 가히 탁월한 내공이자 심공 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펼치는 칠 초 반식의 칠 혼유도(七魂幽刀)는 무림의 일절로 손꼽힐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품 고 있었다. "각오하랏!" 힘껏 힘이 담긴 외침과 함께 장현일의 도가 환상적인 움직임을 보 이며 짓쳐 들기 시작했다. '이거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위지황은 비스듬히 들고 있던 검을 재빨리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한음신공(寒陰神功)을 극성으로 끌어올 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옷 위로 하얗게 서리가 내리며 천하를 얼리고도 남을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곧 들고 있는 검에 집 중되었다. 우우우웅! 웅휘한 떨림이 커다란 소리가 되어 주변으로 퍼졌다. "검명(劍鳴)? 저 나이에!" 부설의 곁에서 그를 지키며 신중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두 노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약관에 불과한 나이에 장현일과 자웅을 겨루는 것도 기겁할 일이건 만 검명이라니! 비록 섭혼도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들 역시 어느 정도의 명 성은 얻고 있던 터, 하나 검명을 낼 정도의 실력에는 아직 이르지 못 한 상태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그들의 뒤로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도 확연 히 다른 기운을 품고 있는 두 무공이 격돌했다. 꽈꽈꽝! 둘의 사이는 정확히 일장. 가까운 거리에서 맞부딪친 만큼 그들은 그 사이에 이는 충격파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나직한 신 음 소리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둘의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대부분의 힘이 둘에게 집중되었음에도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충격파 의 위력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비무영이 남궁민과 강유를 보호하기 위해 다급히 검을 휘둘러 보호 막을 쳐야 했고 부설 또한 두 노인의 보호가 없었다면 큰 낭패를 보 았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잠시 떨어져 서로의 무위에 감탄하던 둘은 힘찬 기합성과 함께 또다 시 어울리기 시작했다. 제48장 함정(陷穽) "그래, 무당산에 올랐다고?" "그렇습니다." "하하, 재주도 좋아. 무당산은 철혈마단 친구들이 완전히 봉쇄하고 있을 텐데. 하긴, 애당초 그런 허술한 놈들에게 당할 친구가 아니지." 중천의 천주 악위군이 무엇이 그리 좋은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 다. "완전히 영웅의 귀환이로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신도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다니? 무슨 소린가?" "전해져 온 소식에 의하면 몇몇 문파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특히 사천에 적을 두고 있는 문파는 노 골적으로 그를 적대시 하고 있다 합니다." "적대시 하다니? 무엇 때문에?" 악위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철혈마단의 단주의 명이......" 신도는 말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예측한 악위군이 말을 잘랐기 때문이었다. "아! 그랬지. 그가 얼토당토않는 명을 내렸다고 했지." 철혈마단이 을지호가 다녀간 분타 인근의 문파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알고 있던 악위군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라도 그렇게 당했으면 그런 명을 내렸을지도 모르지. 그토 록 멍청하게 당한다면. 그렇지 않은가?" 악위군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의미심장하게 신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신도는 가슴이 뜨끔했다. 마치 하남성 일대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는 남궁세가의 잔당들을 어째서 빨리 잡지 못하냐는 질책이 담긴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꼬리를 밟았다 하니 곧 해결될 것입니다." "하하, 누가 뭐라나? 그나저나 재밌게 되었군. 산 구석에 처박혀 어쩔 줄을 모르는 인간들이 제 분수도 모르고 홀로 거대한 적에 맞서 싸운 영웅을 박대하다니 말일세. 뭐, 우리들에겐 좋은 일이겠지만." "하여 이참에 아예 흥미로운 일을 하나 만들어볼까 합니다." "흥미로운 일이라니?" "놈들에게서 그자를 떼어낼 생각입니다. 잘만 하면 아예 원수를 만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호∼ 가능하겠는가?" "무당에 잠입시킨 잠룡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잠룡이라... 꽤나 공을 들인 것으로 아는데." "그래도 그자의 가치와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건 그래. 벌써 희생시키기 아깝긴 하지만 그 친구와 백도 놈들 을 이간질시킬 수만 있다면 충분하겠지. 추진하게." "존명." * * * 하남성 등봉현 숭산과 인접한 어느 야산.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일 남 이 녀의 노인들과 부자 간으로 보이는 두 명의 사내. 그들은 참으로 요란하게 북경성을 넘고 남하하여 어느새 하북성을 지나 하남성 숭산에 이른 을지가의 인물들이었다. "장백파의 늙은이라 했더냐?" 갑자기 고개를 돌린 을지소문이 물었다. "예, 아버님." "허∼ 이거야 원. 어째 잠잠하다 했더니 이 먼 곳까지 와서 난리를 피우고 있었구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만 주제에 소림사 를 꿰차고 들어앉았단 말이지." 말투가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그게 어디 그 늙은이가 혼자 한 짓인가요? 북천인가 뭔가 하는 놈 들고 함께 작당해서 한 짓이라잖아요. 기습을 당한 데다가 수호신승 은 병석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상태고." 환야의 말에 남궁혜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소림사를 친 자들은 북천의 천주가 이끄는 한빙곡과 흑룡문이라 하지 않았나요? 장백선옹은 소림사를 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 들 었는데요." "선옹은 무슨 얼어죽을! 제 분수도 모르고 공명심에 날뒤는 노망난 늙은이를 보고." 꽤나 심기가 불편한지 을지소문은 좀처럼 안색을 펴지 못하고 있었 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있어 소림사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 었고 또 애정을 지닌 곳이었다. 선조 때부터 본의 아니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고, 구양풍을 만난 곳도 소림사였으며 전대와 현재의 수호신승과의 인연도 깊은 곳 이었다. 그런 소림사가 듣도 보도 못한 인물들에게 점령을 당한 것이다. 더 구나 소림사엔 그와 형제의 예를 맺은 곽검명과 단견을 비롯하여 과 거 친분이 있었던 이들이 상당수 포로로 잡혀 있다지 않은가. 그것을 안 이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만약 낯선 풍토에 적응하지 못한 을 지룡이 크게 앓지만 않았다면 벌써 한참 전에 도착하여 끝장을 봐도 봤을 것이다. "몇 놈이나 있다고 하더냐?"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놈들의 우두머리가 소림사를 장백선옹... 흠흠." 대답을 하던 을지휘소는 부친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하는 것을 보 며 재빨리 말을 바꿨다. "장백 늙은이에게 남기고 무당산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주력은 떠났 다지만 그래도 장백파의 수하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고 소림사 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장백파 이외에도 상당수의 인원이 지키고 있 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몇 놈이라는 거냐?" 을지소문이 짜증 섞인 음성으로 되물었다. "최소한 삼사백은 남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 겠고요." "그만한 인원이면 조심해야 할 것 같군요." 남궁혜가 조금은 걱정스런 어투로 말했다. "상관없소. 삼백이든 삼천이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참으로 자신감 넘치는 말이었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 어도 골백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던가. 천하제일인 으로 불렸던 궁귀 을지소문.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 다. 어디 그뿐이던가. 그와 함께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그의 말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전대의 패천궁주이자 이미 한 차례 무림을 장악했던 전력을 지닌 환야와 조부 검성이 남긴 검을 완벽하게 깨우치고 나아가 한층 더 발 전시킨 남궁혜가 죄우를 지켰고 무엇보다 을지 가문의 무공은 물론이 고 구양풍의 무공까지 완벽하게 깨우친, 그 옛날 구양풍이 그 실력을 도저히 가늠할 길이 없다고 인정한 을지휘소가 버티고 있었다. 병으 로 인해 핼쓱한 얼굴은 하고 있는 을지룡도 이들에겐 귀염움을 받는 존재였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실로 무시하지 못할 고수였다. 가히 천하를 진동시키고도 남을 만한 고수들이 넷에 장차 그렇게 커 갈 인재까지 도합 다섯 명. 그러고 보면 결코 적은 수, 약한 전력 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정확한 머릿수는 파악하고 가야지요." 환야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꼭 파악할 필요는 없소. 필요하다고 해도 어떻게 파악을 한단 말 이오?" 을지소문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궁하면 다 통하는 법이에요. 급한 대로 우선은 저놈들에게 물어보 지요." 환야의 시선을 따라 가족 모두의 시선이 멀리 앞서 가는 일단의 무 리들에게 돌려졌다. 건들거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사내를 중심으로 뒤따르는 일 곱 명의 사내. 하나같이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 무림인이 틀림없 었다. "숭산에서 저렇듯 활보할 수 있는 놈들은 북천의 수하들뿐이겠지 요." 환야의 말에 모두들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누군 가를 향하는 눈빛.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하지만 꼭 말을 해야만 의미가 전달되 는 것은 아니었다. "후∼ 알겠습니다." 을지룡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곤 다소 짜 증나는 어투로 그들을 불렀다. "어이, 이봐요. 아저씨들!" 듣지 못했는지 그대로 걸음을 옮기는 사내들. "좀 봐요!" 을지룡이 재차 소리쳤다. 그제야 맨 뒤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네 녀석이 불렀냐?" 이마가 반쯤은 벗겨져 번들거리고 유난히 코가 큰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짜증나는 어투로 소리쳤다. 멈춰 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을지룡에게 쏠렸다. "뭣들 하는 거야?" 가장 앞서 가던 사내, 유원(儒圓)이 수하들의 어깨 사이로 고개를 빼내며 물었다. "웬 꼬마 녀석이 불러서 말입니다." "세월좋다. 꼬마 놈하고 노닥거릴 시간도 있고. 서둘러. 아직도 살펴볼 곳이 많아." "예, 조장님." 대머리의 사내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모습을 보아하니 평소에 꽤나 시달림을 당한 듯싶었다. 그가 굽혔던 허리를 펴기도 전에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있던 을 지룡이 물었다. "꼬마? 지금 꼬마라고 했습니까?" 막 몸을 돌리던 유원이 콧방귀를 뀌며 그를 바라봤다. "허, 고놈 참 당돌한 놈일세. 그럼 꼬마 보고 꼬마라고 하지, 어른 보고 꼬마라고 하겠느냐? 어르신들은 바쁘니까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얼른 사라져라. 경을 치지 전에."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상대에게 꼬마라고 부르지 뭐 라 하겠는가. 유원으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듣는 을지룡은 꼬마라는 말에 극도의 거부 반응을 보였다. "지금 말 다했습니까?" 목소리가 은근히 떨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귀를 기울이던 을지소문이 혀를 찼다. "쯧쯧, 녀석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을." "뭐, 유난히 동안(童顔)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사실, 아직 어린 나이이기도 하고." 을지휘소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뭐가 어려? 대장부가 나이 열여덟이면 일가를 이룰 나이인데. 너무 응석받이로만 키우면 안 되느니라. 아무튼 저 녀석만 불쌍하게 되었 구나." 을지소문은 멀리 유한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만이 아니라 나머지 식구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신세가 재단되는 줄도 모르고 유원은 아침부터 재밌 는 꼬마를 만났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하, 고 녀석 참 말 많...어라?" 유원은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을 참으로 손을 뻗었다. 한데 뭔가가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였던 을지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흙으로 뒤덮여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가죽신 한 짝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어이쿠!" 왜 눈앞에 그런 것이 보이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굴을 향해 다가오 는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안면을 강타당한 유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뭐, 뭐야!" 갑작스런 상황의 반전에 나머지 일행이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허공 으로 몸을 띄워 왼발로 유원의 얼굴을 후려친 후 아직 착지를 하지 않 은 을지룡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대머리 사내의 가 슴을 냅다 걷어찼다. "크악!" 가슴팍을 강타당한 대머리 사내가 한참이나 날아가 처박혔다. 그 반 탄력으로 다시금 치솟은 을지룡이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아이고!" "으악!" 연이어 터지는 당혹스런 외침과 고통의 비명 소리. 사내들은 저마다 얼굴이며 가슴, 어깨 등을 부여잡고 땅바닥을 제집 안방인 양 구르면서 죽는시늉을 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일곱 명을 잠재운 을지룡은 아직도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원에게 다가갔다. "아까 뭐라고 했지요?" "으으......" 겁에 질린 유원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정통으로 맞았는지 코뼈가 내려앉고 형편없이 일그러진 코에서는 코피가 샘솟듯 흘러나왔다. "아직도 꼬마처럼 보입니까?" 너무 심하게 손을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을지룡의 음성에는 다소 미안한감이 묻어 있었다. "버버버버." 유원이 고개를 흔들며 뭐라 하는것 같았지만 흐르는 피가 입과 코 를 막고 있는지라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그 모양을 본 을지소문이 한소리 했다. "이 녀석아! 그렇게 쥐어 패놓고 물으면 그렇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어쨌든 수고했다. 놈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으니 너는 이만 비켜나거라." "네." 누구의 말이라고 토를 달 것인가. 간단히 대답한 을지룡이 두어 걸 음 물러섰다. 한데 조금은 미안했는지 물러서던 그가 유원에게 슬그머니 전음을 보냈다. [할아버님 성질이 꽤나 급하시니 묻는 말에 재깍재깍 대답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을 친다는 게 뭔지 제대로 알게 될 겁니다. 또 몰라 도 무조건 안다고 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단, 거짓말을 했다간 어찌 될는 지는 장담 못하지만.] 을지룡의 전음이 아니더라도 유원은 거짓말을 하거나 아는 것을 모 른다고 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많지 않은 나이, 오직 눈치 하나로 지금껏 버텨온 인생이 아니던가. 그는 을지소문의 눈빛을 본 순간 무조건 털어놓는 것이 살 길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옷을 찢어 대충 코를 틀어막은 유원은 을 지소문이 소림사의 '소' 자를 꺼내기도 전, 현재 소림사를 지키고 있 는 문파는 어디이고 총 인원은 몇이며 군자산에 중독되어 제압당한 소림사의 승려들이 머무는 곳과 그 외에 사로잡힌 포로들이 어디에 구 금되어 있는지를 단숨에 토해냈다. 심지어는 누가 언제 순찰을 돌고 몇 명이 순찰을 하며, 어떻게 음식을 조달하는지까지 세세하게 설명했 다. 그 대가로 그와 그의 수하들은 목숨을 보장받았다. 을지소문으로선 애당초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 없었음에도 그는 자 신이 사실대로 고했기에 살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비록 점혈(點穴) 을 당해 하루는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할 처지였지만. 아무튼 북천을 이루는 이십삼 개의 문파 중 가장 규모가 작은 문파. 문주 포함하여 총인원 사십칠 명. 문주인 독행도(獨行刀) 양웅천(楊雄天)과 몇몇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뒤어난 인재가 없었던 독도문(獨刀門)의 외당(外堂) 조장 유원 은 그렇게 악몽 같은 아침을 보내는 중이었다. * * * "죄송합니다.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 자초지종을 묻는 남궁민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그간의 과정을 말해야 만 했던 비무영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남궁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위지황과 장현일의 싸움 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무심한 척 애를 써도 속눈썹이 파르르 떨 리는 것을 보아 마음속의 격동이 결코 작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북천에서 온 사람이란 말인가.' 남궁민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만큼 편했던 이가 없었는데......' 이십의 나이를 훌쩍 넘기는 동안 그녀는 변변한 남자 한 명 사귀어 보지 못했다. 몇몇 이들이 접근해 오기는 했지만 다들 제풀에 나가떨 어졌다. 비록 형편없이 몰락은 했어도 남궁세가의 후예였던 그녀에게는 왠 지 함부로 말을 걸거나 접근하기 힘든 위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 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품을 차 갑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어린 나이에 가문의 중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면서 더욱 그 렇게 변했다. 비사걸과 을지호를 제외하고 남궁세가에서 그녀를 어려 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스런 입장 에 있는 강유와 해웅은 물론이고 때로는 을지호에게조차 엉겨 붙는 뇌전과 천도문도 함부로 말을 붙이지 못했다. 스스로가 원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그녀는 극히 몇 명을 제외하고는 편히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위황, 아니 위지황은 달랐다. 처음 일행이 되기는 했어도 자꾸만 달라붙어 말을 걸며 다가오는 것 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부러 냉랭하게 대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때로는 화를 낼 만도 하 건만 조금도 싫은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웃는 낯빛으로 말을 걸어왔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결국 그의 끈기와 노력에 지쳐 위지황이 어떤 행동을 하건 더 이상 제동을 걸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때로는 몇 마디 말도 나누었다. 그 몇 마디가 백 마디, 나아가 수천 마디가 되어 지금은 다른 누구보다 편하고 친근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남몰래 좋은 감정을 만들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북천......' 한편으로 배신감이 다른 한편으로 안타까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그런 남궁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지황은 장현일을 맞아 필 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실로 괴물이 아닌가!' 혼신의 힘을 다해 온갖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그것도 모자라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의 날카로운 반격을 가하 는 위지황의 무위에 장현일은 기가 질렸다. 내공은 물론이고 실전 경험 면에서도 상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분 명하건만 그는 좀처럼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기습적으 로 펼쳐지는 역공에 쩔쩔매기까지 했다. 특히 끊임없이 허점을 노리며 파고드는 음한지기는 치가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상대의 무위에 감탄하며 칭찬할 수는 없었다. 애당 초 힘든 싸움을 예상했기에, 물론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도 갑을 버려가며 각오를 다지지 않았던가. 이제는 중천을 위해서가 아니 라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다. '시간을 끌면 내가 당한다.' 내공에선 약간의 우위가 있었으나 근본적인 체력 면에선 현저히 열 세였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질 것은 뻔한 이치.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오랜 격돌로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쑤셔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사이 위지황의 매서운 공격이 쏟아졌다. "타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허공으로 몸을 띄운 그가 검을 휘둘렀다. 마구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얗게 변해 버린 그의 의복이 극단적인 대조를 이뤘다. 그 역시 오랜 격전으로 곳곳에 상처를 입었으나 장현일처럼 피는 흐르지 않았다. 외부로 흘러나온 피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로 인해 그대로 얼어버려 자연적으로 지혈이 된 것이다.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공격해 오는 위지황의 모습은 황무지를 질주하는 야수(野獸)처럼 위협적이었다. '승부!' 장현일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격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도 를 치켜세웠다. 그의 몸과 비스듬히 세운 도끝에서 뿌연 기운이 흘러나와 전신을 보 호했다. 순간, 위지황의 검이 잠시 주춤거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 위 지황의 검은 더욱 빠르고 강맹한 힘으로 몰아쳐 왔다. 장현일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던 도를 집어던졌다.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엇비슷한 상황에서 무기를 던진다는 것은 예 측할 수 없다는 이유만큼 효과적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것이 무위로 끝났을 경우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이 당하고 마는 양날의 검과 같은 공격, 그러 나 장현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도를 던졌다. 칠혼유도의 마지막 초식이자 최근에 들어서야 깨우친 한성비폭류(澣 星飛瀑流). 장현일의 손을 떠난 도는 삽시간에 일곱 개의 잔상을 만들며 맹렬히 회전했다. 일곱 개로 나뉜 도 하나하나에서 거센 폭풍이 일며 주변의 공기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위지황이 비명과도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몸을 회전시켰다. 스스스슷! 검에 몸을 싣고 회전하는 그의 몸에서 장현일의 도가 일으키는 폭풍 보다 더욱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쳤다. 그들 주변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하기에 급급했다. 어떻게 든 화살의 막을 뚫고 전진하려는 세 명의 중년인과 뚫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화살을 날리는 천뢰대원들을 제외하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둘의 대결에 쏠렸다. "세, 세상에!" "엄청나다!"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함성.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광경에 저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꽈꽈꽈꽝! 천둥 소리였다. 하나의 거대한 폭풍에 각 일곱 개의 작은 폭풍이 부딪치며 내는 소 리는 여름날 만물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뇌성벽력과 같았다. 둘의 충돌은 그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크으으."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뚫고 나지막하게 들리는 신음성이 있었다. 신음성의 주인은 장현일이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의 명치를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서리가 내린 듯 얼어 있는 옷 위로 너무도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있 었다. "분명히 이겼다고 생각했거늘." 위지황이 만든 기세도 대단했지만 한성비폭류가 만들어낸 힘을 이 겨낼 만큼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위지황의 검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보며 승리를 자신했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버렸다. "후∼ 졌다." 무인으로서 가장 비참할 때는 바로 패배를 인정할 때였다. 하나 진 정한 호적수를 만나 통쾌하게 싸웠을 때는 패배도 그리 비참한 것만 은 아니었다. 담담히 패배를 언급하는 장현일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 표정이었지 만 슬프다거나 비참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패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 는 사실이었고 결과는 냉정했다. 패배는 곧 죽음이었다. 명치를 파고든 한음신장의 한기는 단 한 번의 공격에 혼신의 힘을 쏟은 그가 어찌 손쓸 틈도 주지 않고 삽시간에 오장육부와 혈맥을 얼 려 생명의 온기를 빼앗아 버렸다. "잘...가시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위지황이 천천히 눈을 감는 장현일의 모습을 보 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싸움은 이겼을지 모르나 실력에선 졌소이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자신의 검이 부서지는 것을 보 며 승리를 자신하지 않고, 그래서 정확히 심장을 향하던 도의 방향이 살짝 틀어지지 않았다면 최후의 일격을 날리지도 못했을 것이고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다. 장장 반시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그에게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이다. "공자님!" 황금히 달려온 비무영이 그를 부축했다. "난 괜찮아. 가주께선?" "무사하십니다." "잘됐군." 위지황이 피로 얼룩져 있는 입가를 쓰윽 문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몸을 가눌 힘도 없으면서 그는 오직 남궁민의 안위를 염려했 다.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남궁민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부설의 냉랭한 음성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과연 그럴까?" 이굉에 이어 장현일까지 목숨을 잃었다. 이굉도 그랬지만 장현일의 패배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황당하고 화가 치밀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부설의 얼굴은 어이없음을 넘어서 분노의 살기로 번들거렸다. "운이 좋았지만 여기까지다. 나는 네놈들은 가급적 목숨을 살려서 끌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굴러들 어 온 복을 걷어찬 것은 다름 아닌 네놈들이니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부설은 자신을 쳐다보는 수하들을 살피며 명을 내렸다. "포로는 필요없다. 모조리 죽여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던 싸움 이 다시 시작되었다. "두 분 어르신들도 나서 주시지요."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좌측의 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나서주십시오. 놈들이 살아 설치는 꼴을 못 봐주겠습니다. 특히 저놈들을요." 부설이 가리키는 이들은 최초 그의 명을 받고 움직인 중년인들과 치 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천뢰대원들이었다. 사실 말이 치열한 싸움이지 승부는 이미 천뢰대에게 기울어 있었다. 간신히 버티고는 있으나 중년 사내들의 몸에는 많게는 다섯 개가 넘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흠, 꽤나 대단한 놈들이다. 평상삼호(坪常三虎)라면 결코 만만한 친 구들이 아닌데 저리 애를 먹으니. 알았다. 우리들이 나서마." 두 노인이 나란히 나섰다. 그러나 부설이 고개를 흔들었다. "좌경(左炅) 어르신께선 놈들을 맡아주시고 단성(檀醒) 어르신께선 저자들을 해결해 주십시오." 부설이 가리키는 이들은 힘겹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위지황과 강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남궁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앞을 지키고 있는 비무영 등이었다. 부설의 말에 그들에게 시선을 주어 찬찬히 살핀 단성이 고개를 끄덕 였다. "남궁가의 어린 계집은 부상을 당했지만 가시가 있어 보이고 또 제 법 어울릴 만한 녀석이 있구나. 놈도 북천의 인물인 것 같은데... 그 래, 내가 해결하마." "감사합니다." "한데 정녕 몰살을 시키려고 하느냐? 사로잡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그만한 아량을 베풀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흠, 그래도 남궁세가의 가주 정도면 요긴하게 쓸 데가 있지 않겠 느냐?" 좌경이 표독하게 노려보는 남궁민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어차피 망한 가문입니다. 혹, 다른 문파의 수장이라면 고려해 볼 수는 있겠지만 망한 가문의 수장 따위가 어디에 쓸 데가 있겠습니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부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좋은데 참 싸가지없게 말하는 아저씨네요." "누구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아가는 몸, 그리고 그들은 예쁘장하게 생 긴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소리칠 것까지는 없고요." 여느 소녀라면 시산혈해로 변한 주변의 상황만으로도 겁을 집어먹 고 벌벌 떨 것이다. 하나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선 망설임이나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황당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중천의 무인들은 그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 남궁민에게 다가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남궁민의 앞에서 임여령이 물었다. "언니가 남궁세가의 가주인가요?" "그, 그런데요." 얼떨껼에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민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예쁘네요. 같은 여자가 봐도. 아무튼 반가워요. 난 임여령이라고 해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것이 눈앞에 닥친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고맙군요." 남궁민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뭣들 하는 수작이냐! 네년은 누구냐?" 멍하니 바라보던 부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 나 임여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검상이 네 곳에 약간의 내상이라... 언니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 네요." 남궁민을 살피던 임여령의 눈이 강유와 위지황에게 향했다. "어머나, 이쪽은 꽤 심하게 당했네요. 외상이야 문제가 될 것 없지 만....." 다소 걱정스런 눈으로 접근한 그녀가 거침없이 그들의 손목을 잡았 다. "흠, 역시 내상이 심하군요. 치료하려면 꽤나 고생해야겠어요. 뭐, 그래도 걱정할 것은 없어요. 삼 일 안에 깨끗하게 완치시켜 줄 테니 까." 갑자기 등장하여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도 황당하건만 지금의 행동 이며 말투는 영락없는 의원이 아닌가. "이, 이봐요, 동생."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부설의 얼굴을 의식하며 보다 못한 남궁민이 임여령을 불렀다. "왜요?" "여기는 동생같이 어린 아가씨가 올 곳이 아니야. 위험하니까 어서 피하도록 해요." "위험해요? 누가요?" 참으로 철없는 아가씨가 아닐 수 없었다. 끈적거리는 살기를 한눈에 받고도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임여령에게 선 천하의 남궁민이라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누구긴 누구냐? 바로 네년과 이곳에 있는 년놈들이지." 나직하면서도 살기를 한껏 담은 부설의 음성에 임여령은 그제야 살 짝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야. 그러니 어서 피해." 남궁민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짚으며 힘없이 말했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임여령은 도리어 고개를 흔들었다. "내버려 둬요. 누가 위험한지도 모르는 멍청이들. 가만히 놔둬도 곧 세상 하직할 자들의 말에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설을 비롯하여 모두의 안색이 심각하 게 굳어버렸다. 이쯤 되면 어린아이의 애교로 봐줄 수 없는 노릇이 아 닌가. "이거야 원. 가만히 두고 보자니까 어린 년이 못하는 소리가 없구 나." 애당초 어린아이의 말장난 따위를 듣고 있던 것이 잘못이었다는 듯 부설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쳐라!"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오는 무인들. 두어 걸음이나 떼었을까? 가장 앞서 나가던 사내 둘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꼬꾸라졌다. 순간, 모두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들의 눈은 양 다리가 잘려 허우적 거리고 있는 사내들에게 쏠렸다. "이, 이게 어찌 된......" 깜짝 놀란 부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그사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 낀 좌경과 단성이 그를 보호하듯 감싸며 주변을 살폈다. "으아악!" 또다시 비명성이 터졌다. 그리고 두 명의 사내가 재차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여전히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고인(高人)이 납신 것이오?" 전신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린 좌경이 현무관이 떠나가라 외쳤다. 그러자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노회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고인(故人)이라니? 그럼 내가 죽었단 말이 냐?" "말장난을 하고 싶지는 않소이다. 그렇게 숨어 있지 말고 정정당당 하게 얼굴을 보이시오." "흥, 네놈이 찾아보지 그러냐?"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듯 들려오는 음성엔 장난기가 가득했 다. "내 비록 약간의 재주는 있으나 쥐구멍까지 수색할 능력은 없소이 다." 좌경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차분 하게 주변을 훑어갔다. "쥐구멍? 같잖은 격장지계는 그만두......" 들려오던 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좌경보다 한발 앞서 적의 위치를 파악한 단성이 의심이 가는 어느 한 지점을 향해 검을 날렸고 그것이 적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공격한 곳이 묘했다. 그의 검이 노린 목표는 이미 목숨을 잃고 쓰러져 있는 수하의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곳이었다. "얼씨구! 제법인걸." 모두들 의아해하는 사이 한줄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검붉은 피가 갑자기 위로 솟구치며 괴이한 형상을 만들더니 곧 키가 작고 호 리호리한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괴, 괴물이다!" "사, 사술(邪術)!" 이곳저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핏물이 사람으로 변하다니! 기사(奇事)요 괴사(怪事)였다. 그런데 정 작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되려 화를 냈다. "쯧쯧, 한심한 놈들 같으니. 환술(幻術)과 사술도 구별 못하는 머저 리들만 모였구나. 어이, 송충이 눈썹을 한 놈. 제법 눈썰미가 있었다. 아무튼 잠시만 기다리거라. 곧 상대해 주마." 노인은 모을 홱 돌려 임여령에게 다가갔다. 단성은 간신히 은신한 곳을 알아내고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을 했음 에도 너무도 간단히 피해 버린 노인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단성을 뒤로하고 임여령에게 다가간 노인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 으며 그녀를 나무랐다. "이 녀석아, 잠시 기다리라고 했더니만 뭐가 그리 신났다고 앞서 왔 느냐? 내가 서둘렀기에 망정이지 자칫 늦기라도 했다간 큰일 날 뻔하 지 않았느냐?" "뭐, 오실 줄 알았으니까요." 노인이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하건 말건 간단히 대꾸한 임여령이 남 궁민의 소매를 잡았다. "소개할게요. 유불살 송찬 할아버지예요." "남궁민입니다.' "알고 있다. 뭐,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만." 송찬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무리 곤란한 처지라 해도 한 세가의 가주가 아니던가. 문파의 수 장에게 하는 말 치고는 너무나도 차갑고 오만한 말투였다. 남궁민의 안색이 살짝 굳어지자 송찬의 성격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흔든 임여령이 남궁민을 달랬다. "신경 쓰지 말아요. 퉁명쟁이 할아버지니까." "누가 퉁명쟁이란 말이냐?" 송찬이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임여령은 눈 하 나 까딱하지 않았다. "늘 퉁퉁거리잖아요. 방금 언니한테도 그랬고." "그거야......" 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오?" 좌경과 단성이 노기 띤 얼굴로 둘의 대화를 끊고 나섰다. 그들은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였다. 난데없이 나타나 수하들을 상하 게 한 것도 그랬지만 눈앞에 자신들을 놔두고도 말장난을 하며 노닥거 린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시한다는 태도가 아닌가. 실력 고하를 떠나 육십이 넘도록 지금과 같은 경우를 당해본 적이 없었던 그들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기다려 달란 적 없다. 네놈들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지." 송찬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닥치시오! 우리는 당신처럼 기습 따위나 하는 사람이 아니오." "기습? 병신들. 기습이 뭔지나 알고 지껄이는 거냐? 내가 마음만 먹 었으면 네놈들은 이렇게 짖지도 못하고 있을 게다. 아무튼 시끄러우니 덤벼라.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오랜만에 몸이나 제대로 풀어보자꾸 나." 좌우로 손을 벌리며 느긋하게 움직이는 송찬의 얼굴.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전신에선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 오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던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쯧쯧, 어쩐지 급하게 달려가더라니. 그런 속셈이 있을 줄 알았다. 뭐가 어째? 여령이가 걱정이 돼?" "놔두자고. 워낙 동작이 굼떠서 저렇게 서두르지 않으면 차례가 안 오는 줄 알고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이니까." 동사다발적으로 들려오는 야유에 송찬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졌고 또 다른 적의 등장에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음성의 주인들을 향했 다. 제49장 원로원(元老院) 정확히 일곱 명의 노인들. 하나같이 백발이 성성한 것이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였고 전신 에서 풍겨오는 기도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중천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남궁세가의 인물들 역시 긴장하며 그들의 등장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태상호법님!!" 가장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노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초번이 벼 락같이 쇠를 질렀다. "태, 태상호법님이라니?" 눈썰미가 어두웠던 뇌전이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어르신....." 비사걸을 알아본 남궁민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태상호법님!" "태상호법님이시다!!" 정식으로 사제지연을 맺은 것은 아니나 몇 년 동안 무공을 배웠다. 어찌 모를 것인가? 비사걸의 모습을 확인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제야 비사걸을 알아본 뇌전도 얼떨결에 만세 를 불렀다.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온 비사걸이 남궁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애썼다." "어르신......" 남궁민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내가 사정이 있어 일찍 찾지 못했구나. 다행이다. 난 너희들이 어 찌 된 줄 알았다." "패천궁에 계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남궁민이 볼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비사걸이 쓴웃음을 지었다. "패천궁이라... 가보지도 못했구나.' 비사걸의 눈이 부설에게 향했다. "악가 옆에 있던 애송이로구나. 그래, 네가 우두머리냐?" "그, 그렇소."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무, 물론이오." 모를 리가 없었다. 악위군을 수행하며 이미 황보세가에서 안면이 있 었다. 물론 그때는 그가 검왕 비사걸인 줄은 몰랐지만 그를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해가 났는지도 익히 알고 있었다. "중천에서 네 직책이 무엇이냐?" "딱히 직책은 없소. 그냥 사, 사부를 도울 뿐이오." "네 사부의 직책은 무엇이냐?" "구, 군사요." "군사라... 그렇다면 네가 중천의 군사 삼지안(三智眼) 신도의 제자 란 말이구나.' "그렇소." 부설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대답을 했다. 좌경이 옆에서 그 의 허리를 건드려 경고했으나 늦은 감이 있었다. 노인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는 부설이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있는지 의아해했다. "본인은 좌경이라 하오. 선배의 존성대명은 어지 되시오?" 부설의 앞을 가로막은 좌경이 물었다. 비사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오직 부설뿐이었고 좌경이나 단성 등 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하나 불행히도 부설은 그들에게 비사걸의 정체 를 말해 줄 여유를 갖지 못했다. "네놈 따위가 여쭐 이름이 아니다.' 유난히 붉은 눈썹의 노인이 싸늘히 소리쳤다. "흥, 황제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 좌경의 말은 미처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미 (赤眉) 노인이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좌경이 필사적으로 물러났지만 온전히 피할 수 는 없었다. 그는 허벅지에 깊은 자상을 입고 말았다. "크으." 좌경은 뼛속까지 울리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러나 억울하다거나 기습에 당했다고 분노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숨을 구했다는 안도감이 제일 컸다. 그만큼 상대의 검은 빨랐으며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 당신 누구요?" 그제야 두려움에 찬 눈으로 좌경이 물었다. 적미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쯧쯧, 꽤나 오랫동안 썩더니만 한 번 뽑으면 반드시 피를 본다는 혈류도(血流刀)가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려." 적당한 키에 적당한 체구, 하나 어린아이의 얼굴만한 주먹을 지니고 있는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이름은 응사웅(鷹娑雄).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권 장지술(拳掌之術)의 극을 본 사람으로 전대의 강호오왕이었던 권왕 응 천수가 그의 조부였다. "그러게. 나 같으면 이미 끝장을 보았을 텐데." 송찬이 자신의 목을 그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적미노인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혈...류...도?' 단성이 노인들을 경계하며 좌경의 상처를 살피는 사이 비사걸의 등 장에 이미 혼이 반쯤은 빠져 있던 부설이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혈류도라면 분명 기억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다. '혈류도라는 이름을 쓰는 적미의 노인. 적미, 적미라......'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바로 그때, 번개같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패천궁 자체도 무서운 상대지만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저력 은 더욱 무섭다. 궁주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원로원. 비록 인 원은 몇 안 되나 그들의 힘은 실로 가공하다. 과거 패천궁이 무림 재패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들의 힘이 있었기 때문 이다. 원로원의 수장은 과거 혈참마대를 이끌고 무림을 질타했 던 혈류도 냉악이라는 자로... '그, 그래. 혀, 혈류도... 혈류도 냉악이다!' 마침내 적미 노인의 정체를 알아낸 부설은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하 며 나머지 노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유불상 송찬, 살수계의 전설. 밤의 황제이자 그 옛날 환야를 도와 무림을 평정했던 무불살 송무(宋霧)의 직계 자손.' '뭘 보느냐?'는 듯 싱글거리며 째려보는 송찬의 모습에 한기를 느낀 부설의 시선이 다른 노인에게 향했다. '용권풍(龍拳風) 응사웅, 곡지통(哭之痛) 구양숭(歐陽嵩), 경의비마 (輕衣肥馬) 한가풍(韓佳楓), 송백검(松柏劍) 백준(白俊).' 과거 신도가 해주었던 말들과 노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대조해 가 며 노인들의 정체를 기억해 낸 부설은 미칠 지경이었다. 검왕 비사걸 만 하더라도 죽고 싶은 심정이건만 이름만으로도 천하를 들썩이는 사 람들이 눈앞에, 그것도 무더기로 적이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결론은 하나였다. 원로원이 움직였다는 것. '끝이군.' 아득한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 들이닥쳤다. 싸움은 비사걸이 몸을 돌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아니, 싸움이라고 도 할 수 없었다. 애당초 싸움이 되지도 않는 일방적인 학살이었으니 까. 손을 쓴 사람은 고작 세 사람에 불과했다. 이미 피를 본 송찬과 혈류도 냉악, 그리고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곡지통 구양숭이 그 들이었다. 냉악은 자신의 도를 피한 좌경을 단 이 초 만에 황천길로 보내는 것 으로 싸움을 끝내고 검을 거두었다. 곡지통은 십여 초 만에 단성을 쓰러뜨리고 급변한 전황에 천뢰대와 의 싸움을 접고 뒤로 물러난 평상삼호와 어울렸다. 실력으로 보아 금 방 끝날 싸움이었지만 양상은 그렇지 않았다. 구양숭은 마치 어린 제자의 어리광을 받아주기라도 하는 듯 평상삼 호의 모든 공격을 받아주었는데 그는 단 한 번의 공세도 펼치지 않았 다. 그럼에도 그의 몸에는 조그만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 친 사람들은 공격을 하는 평상삼호였다. 오랜만에 살심을 드러낸 송찬만은 본신의 실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오직 일 검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한 명씩 목숨을 잃었다. 종횡무진,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 접근하여 목숨을 앗 아가는 검을 피할 사람도 없었다. 두려움에 질린 몇몇이 미친 듯이 소리치며 저항을 했지만 차라리 하 지 않느니만 못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죽음의 공포와 고통만 더할 뿐이었다. 그렇게 정확히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싸움을 끝낼 때라고 여긴 곡지통이 평상삼호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 을 남기는 것으로 모든 싸움은 종결되었다. 부설이 이끌었던 중천의 무인들 중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송찬에게 걸린 이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었고 그나마 천뢰대나 남궁세 가의 무인들과 싸운 이들만이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그들 역시 치명 적인 부상으로 신음하는 신세였지만. 비사걸과 원로원이 나섰음을 알고 있던 부설은 처음부터 이리 될 것 임을 예견했다는 듯 멍한 눈으로 전장을,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 사걸을 응시했다. 부설 앞에 멈춰 선 비사걸은 차가운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 다. 그리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마주 쳐다보는 그에게 천만 뜻밖의 말을 했다. "돌아가거라." "무, 무슨......" 부설은 비사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돌아가거라. 가서 네 사부와 주인 되는 놈에게 알려라. 내가 살아 있음을. 그리고 구화산에서의 빚을 곧 갚으러 가겠 다고 말이다." 담담히 할 말을 쏟아낸 비사걸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부설에게서 몸을 돌렸다. '사, 산 것인가?' 부설은 믿을 수가 없었는지 멍한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비사걸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그의 발길 을 막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떤가요?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는 건가요?" "하하, 괜찮습니다. 이까짓 상처야 금방... 윽!" 너털웃음을 지으며 상체를 흔들던 위지황은 상처 부위에서 밀려오 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곤 곧 겸연쩍은 표정으로 상처를 어 루만졌다. "뭐,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견딜 만합니다." "그만하길 다행이에요." "그 꼬마 아가씨의 의술 덕분이지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요." 위지황은 가녀린 손길로 능숙하게 상처를 다루던 임여령에게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했다. 하나 남궁민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진 않았다. 말을 이어가려던 위지황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 는 그녀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쓴웃음을 지은 위지황이 힘없이 물었다. "실망했습니까?" "....." "일부러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하 였지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린 그는 애꿎은 탁자만 툭툭 건드렸다. 그 모습이 그렇게 처연할 수가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남궁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다고 미련 따 위를 둘 수는 없었다. 그래 봤자 서로의 마음만 더 크게 다칠 뿐이었 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마음의 동요를 애써 짓누른 남궁민이 다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도 갔으나 위지황은 애써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도리어 과장된 몸짓을 했다. "하하, 부탁이라니요. 말씀만 하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한 뭐든 들 어드리겠습니다.' "그만... 떠나주세요." 정신이 번쩍 났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위지황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남궁민 을 응시했다.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 그러나 남궁민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 을 뿐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보다 못한 비무영이 간섭을 하고 나섰다. "비록 사천이 남궁세가와 적대시하는 관계라도 공자님이 남궁세가를 적대시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비무영!" 위지황이 끼어들지 말라는 듯 소리쳤으나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 았다. "적대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남궁세가의 편에서 싸웠습니다. 지금껏 수차례의 싸움이 있었지만 이렇듯 무사할 수 있었던 게 모두 누구의 덕이라고 생각합니까? 공자님이 은연중 손을 쓰지 않았다면 아무도 무 사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달포 전, 장경 분타 를 공격하던 당시를 기억하십니까?" 갑작스런 비무영의 질문에 남궁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의 분타주 조욱은 상당한 고수였습니다." "그만 해!" 위지황이 소리쳤다. 하지만 비무영의 말은 점점 빠르고 힘차게 이어 졌다. "가주와 강유 공자님이 합공을 해서야 간신히 부상을 입힐 수 있었 을 만큼 그는 무서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 공자님께서 암암리에 손을 써서 돕지 않았다면 결과는 그 반대로 나왔을 겁니다." '그랬던가?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인가?' 남궁민은 조욱과의 치열했던 대결을 떠올리며 그가 어째서 결정적인 위기 때마다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는지 비로소 이해를 했다. 은연중 위지황의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자뿐만이 아닙니다. 농산 분타에서도 그랬고, 황정 분타에서도 그랬습니다. 공자님의 활약이 없었다면 남궁세가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모르시고 계시겠지만 말이지요." "그만 하라고 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위지황이 노기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참을 걸 참으라고 하십시오!" 버럭 소리를 지른 비무영이 황당해하는 위지황을 외면하고는 매서 운 눈초리로 남궁민을 쳐다봤다. "그럼에도 내색도 못하고, 혹시라도 자신이 북천의 사람임이 알려질 까 봐 전전긍긍했던 멍청한 사람입니다. 사랑 때문에 부모 형제, 친구 다 버리고......" 비무영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위지황을 가리켰다. "결국엔 저 모양이 된 한심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까짓, 일이 이 지 경이 된 마당에 그간의 일에 대해서 칭찬을 바라진 않습니다. 생색을 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남녀 간의 일도 제가 알 바는 아닙니 다. 두 분께서 서로 사랑을 하건 미워하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몸은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상처는 도대체 누구 때문에 입은 것입 니까? 바보처럼 싱글거리고 웃고 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상처는 돌봐준 다음에 떠나라고 해야 되지 않느냔 말입니다. 그게 지독히도 누군가를 사모한 멍청한 사내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 아닙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 침묵을 지키는 남궁민의 시선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비무영에게 있지 않았다. 오직 위지황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애써 감정을 추스르 려고 하였으나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최소한 공자님은 그만한 자격은 있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 도, 아니, 누구도 그럴 수는 없겠지만, 특히 가주께서 이리 매정하게 대하실 수는 없는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비무영은 걷어차듯 문을 세차게 열어젖히고는 방을 나섰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지켜보던 위지황이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 적거렸다. "으이구, 성질 머리 하고는. 하하,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공연히 신경질이 나서 그러는 거니까." "제가... 너무하는 것이라 생각하나요?" 위지황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고요히 가라앉은 눈 속으로 마구 떨리는 그녀의 손이 들어왔다. 치 맛자락을 찢어져라 부여잡고 있는 손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섬섬 옥수(纖纖玉手)에 어울리지 않는 핏줄이 툭툭 튀어 올랐다. 악다문 입 술에 혈흔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얼마나 힘겹게 감정을 정리하 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끝까지 몰랐으면 했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라며 마 음을 졸였건만 막상 모든 것이 밝혀지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무엇 보다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참기 힘들었다. 아픔을 감내하는 것은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하하, 너무하긴요. 가주의 입장에서야 당연한 선택이지요. 마음 쓰 지 마십시오. 곧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위지황은 애써 밝은 웃음과 과장된 행동으로 대답했다. "미안...해요." 남궁민은 자신을 위하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이 더욱 안쓰러웠다. 결국 참지 못한 한줄기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하, 저 때문에 눈물을 보이시는 겁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죽으 러 가는 것도 아닌데." 당당하게 소리친 위지황이 손을 뻗었다.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손을 보며 흠칫했으나 남궁민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저는 아직 가주... 아니, 아가씨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 시 물러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눈물을 보이지는 마세요. 눈물은 아 가씨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살며시 볼을 쓰다듬은 위지황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곤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품을 더듬었다. "아, 그리고 떠나기 전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가 꺼낸 것은 손바닥 크기만한 조그만 책자였다. "우연찮게 얻은 것인데 제법 쓸 만할 겁니다." 얼떨결에 책자를 받아 든 남궁민이 의아한 눈빛을 보냇고 그것과 동 시에 조금 전 문을 박차고 나가서는 몰래 방 안의 동정을 엿보고 있던 비무영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왔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뭐가?" "뭐가라니요!! 저, 저게 어떤 물건인 줄 아시잖습니까?"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남궁민의 손에 들린 책자를 가리키는 비무영 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한데 호들갑을 떠는 그와는 달리 위지황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표정 이었다. "알지." "아, 알면서 그러신단 말입니까?" "어차피 우리 것도 아니었잖아. 그리고 죽어가면서 한 부탁이기도 하고.' "미, 미쳤습니까?" 비무영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무리 막역하게 지내는 그라도 분명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놀라고 있다는 증거였고 그것을 알기에 위지황 또한 빙그레 웃으며 별다른 무넺로 삼지 않았다. "너무 멀쩡해서 탈이다. 어쨌든 유언은 지켜줘야지. 그것이 사자(死 者)에 대한 예의야." "예의는 개뿔이, 뭐가 예의입니까?"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지만 뭐가 중요한 것이 고 그렇지 않은지 구별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위지황이 지금 넘겨주려 하는 책자는 잠룡부의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었다. 그것을 건넨다는 것은 사실상 사천이 지닌 여러 무기 중 가장 치명 적인 한 가지를 포기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그 책임을 북천에서 떠맡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절부절 못 하는 비무영과는 상관없이 위지황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끄러. 이미 명단은 넘어갔고 네가 뭐라 떠들어도 소용없어. 그냥 포기해." "정말입니까?" "성격 알잖아." "젠장,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마음대로 하십시오. 더 이상은 저도 모 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반드시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겁니 다." "뭐를?" "명단을 넘겼을 때 닥쳐올 후폭풍을. 어쩌면 그것을 공자님과 우리 북천이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건 그때지. 그리고 따지자면 애당초 잃어버린 놈이 멍청한 것 아 냐? 그만큼 중요한 것이면 알아서 조심했어야지." 비무영의 말을 간단히 일축한 위지황이 남궁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들으셨습니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꽤나 중요한 겁니다. 이 녀석 이 이리도 길길이 날뛸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니 부디 소중히 간직하 세요."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경악을 금치 못하는 비무영의 반응을 보며 남궁민 역시 위지황이 건넨 책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부담으로도 전해왔다. "어찌 이것을....." 남궁민의 물음에 위지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인연의 끈이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인연의 끈.' "생사괴의 그 친구가 구화산에 은거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사실 그 때 쇄혼계에 몸을 던진 것은 누가 보더라도 최악의 선택이라 할 수 있 었다." "그렇게 험한 곳입니까?" 뇌전의 물음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비사걸은 대답 대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그러자 언제쯤 입을 열까 눈치를 보고 있던 임여령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험한 정도가 아니에요. 좁은 내가 스물일곱 번 굽이쳐 흐르는데다 가 물살이 워낙 거세어 솜씨 좋은 사공도 고개를 젓고 칼날처럼 날카 로운 바위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물고기보다 바위가 많다고 할 정도지 요. 의식을 잃은 검왕 할아버지가 하류까지 무사히 떠내려 오기란 번 개를 맞고 죽은 다음 환생하여 또다시 번개를 막고 죽는 것이 아마 확 률적으로 쉬울 거예요." "설마요∼" 뇌전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자 임여령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그럼 나중에 시도를 한번 해보던가요. 아 마 십 장도 못 가서 물고기 밥으로 변할 걸요." "아니, 꼭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니라 뭐요?" 임여령의 앙칼진 추궁에 넉살 좋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뇌전도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난처한 기색이었다. 곱상한 외모와 티없이 맑은 미소를 지닌 열일곱의 어린 임여령이었 지만 천하를 풍미했던 괴의(怪醫) 임종대의 후손이었다.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그녀의 말과 행동은 그 나이의 또래와는 확실히 다른 괴팍 한 면이 있었다. "여령이 말대로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내상도 내상이었지만 상처가 워낙 중해 꼬박 백 일을 넘게 치료해야 했으니까." 잔을 비운 비사걸이 말했다. 임여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쇄혼계를 지나고도 그 정도면 멀쩡한 거라니까요. 천운이 따랐어 요." "천운이 아니라 네 의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뭐, 약간 그런 면도 있기는 하지만요." 임여령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막 방으로 들어서던 남궁민이 맞장구를 쳤다. "동생의 의술이 그토록 뛰어난 줄 몰랐어. 동생이 치료를 해줘서 다 들 회복이 빨라. 모두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 "호호, 뭘 그 정도를 가지고요." 남궁민의 칭찬에 임여령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그런 모 습은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뇌전 등 이를 지켜보는 사 람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서 참으로 괴팍한 소녀 와 일행이 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배분이나 신분이 참으로 무지막지 할 정도로 높아 남궁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하대를 하지 못하는. "다들 치료는 잘하고 있느냐?" 남궁민이 자리에 앉는 것을 기다리던 비사걸이 물었다. "예. 여령 동생이 도와준 덕분에 차도가 빠릅니다." "다행이구나. 그 녀석은 어찌 되었느냐?" 멈칫하는 남궁민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가 대답을 못하자 또 다시 임여령이 나섰다. "누구요? 위지황인가 뭔가 하는 그 잘생긴 오빠요?" "그래. 상태가 꽤 심해 보이던데.' "심해 봐야 그게 그거지요. 넉넉 잡아 한 사나흘 신경 쓰면 괜찮아 요." 임여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짝 입술을 깨문 남궁민이 입을 열 었다. "떠났어요." "떠나요? 어디로요? 아직 그 몸으론 무린데요." 깜짝 놀란 임여령이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조금 전에." "그걸 가만히 보고 있었어요?" 남궁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그 오빠가 당한 상처는 모두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 된 것 같던데... 두 분이 좋아하는 사이 아니었나요?" "......" 남궁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살며시 고개를 떨구었다. "보면 모르겠습니까? 그 녀석은 사천의 인물입니다. 중천과 함께 장 강 이북을 초토화시킨 북천의 인물이요. 우리와는 적이란 말입니다." 보다 못한 뇌전이 임여령의 옆구리를 툭 건드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하나 좁은 방 안에서 나직하게 말한다고 해도 듣지 못할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탁자 위에 올려진 남궁민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말도 안 돼. 그 집안이 적이라고 그 오빠가 적은 아니잖아요. 좋아 하는 사람 때문에 목숨까지 건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법이 어디 있어 요? 그리고 이상하네요. 아까 얘기를 할 때는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 았는데." "내가 보냈어." "언니가요? 왜요?" 황급히 되묻는 임여령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지금은 아닐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적이 될 사람이야. 그의 부모 형 제와 검을 겨눌 수도 있지. 내가 죽을 수도 있고 그의 가족이 다칠 수 도 있어. 그때 그는 어찌해야 할까? 나는 또 어찌해야 하지?" "그, 그야......"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임여령도 쉽게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훗날 그런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지금 보내는 것이 낫겠지. 가슴이 아프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 마지막 말은 임여령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이나 마찬가지였 다.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물씬 풍기게 만드는 처연한 표 정과 슬픔이 깃든 말에 임여령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아 다. 일순 좌중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급한 대로 치료는 했다고 하니까 별일은 없을 게다." 남궁민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비사걸이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이냐? 지금처럼 움직이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위험 부담도 커 보이고." "글쎄요. 다른 방식으로 싸우기는 해야겠지요." "다른 방법? 그렇다면 을지호에게 가려느냐? 듣자니 사천 쪽에서 싸 우고 있는 것 같더구나." "흥, 삼시파천인가 뭔가 하는 별호도 얻었다던데요. 남궁세가로 떠 난 지가 얼만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우리는 요 모양 요 꼴로 고 생하는 줄도 모르고 어여쁜 마누라를 얻어서 아주 신난 모양입니다." 뇌전이 흥흥거리며 대꾸했다. "마누라라니? 녀석이 언제 부인을 얻었더냐?" "삼시파천이 있는 곳에 늘 함께 하는 여인이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붙어 다니는 것을 보면 저희들 몰래 도둑 장 가를 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되지. 만약 아니라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초번이 넌지시 경고를 했다. 호들갑스런 행동이며 유난히 큰 음성이 남궁민 때문에 침울한 주변 의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노력인 줄은 알지만 그냥 듣고 넘어가기엔 조 금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 뒷감당 운운할 때 한쪽 구석에서 시립하고 있던 천도문과 연능천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것이 그들 여기 초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뇌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과장된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뒷감당은 무슨... 안 보이는 곳에선 황제의 욕도 하는 법입니다." "어디 녀석을 만난 이후에도 그러는지 보겠다." 비사걸마저 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녀석이 데리고 다닌다는 여자가 부인인지 아니면 단순한 동 료인지는 나중에 보면 알 것이고. 그래, 녀석이 있는 곳으로 가려느 냐?" 비사걸의 물음에 남궁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좀 더 생각을 해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냥 이대로 가 좋습니다."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던 비사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편한 대로 하여라. 어차피 내가 함께 있을 것이니 이전과 같은 큰 위험은 없겠지." "고맙습니다, 어르신." 남궁민은 그의 빈 잔을 채우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한데 혹시 유수(劉秀)와 유영(劉寧)이라는 자를 아시는지요? 형제라 고 합니다만." "흠, 유수와 유영이라... 들어좀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 다." 비사걸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곁에 있던 냉 악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라면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 뭐 하는 자들이냐?" "패천궁의 장로입니다. 개개인의 무공도 무공이지만 둘이 함께 펼치 는 합격술은 천하에 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신묘하면서도 위력적 이지요. 제가 원로원으로 물러날 즈음하여 장로라는 직함을 받은 것으 로 기억합니다. 한데 가주께서 그들은 어찌 아시는가? 그다지 알려지 지 않은 인물인데." 남궁민의 낯빛에 살짝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 형제는 패천궁의 장로라는 직함도 가지고 있지만......" "직함도 가지고 있지만?" 뭔가 이상한 기척을 눈치챈 것일까? 응사웅이 기다리지 못하고 채근 했다. "패천궁 장로 이전에 중천의 인물입니다. 중천에서 패천궁에 간세로 잠입을 시킨 것이지요." 꽝! 엄청난 충격이 좌중에 휘몰아쳤다. "그, 그럴 수가!"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로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 다. 그도 그럴 것이 장로라면 한 문파의 최고 어른들에게만 주어지는 직 함이었고 그만큼 그들이 지닌 지위나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더구나 패천궁이었다. 사천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단일 세력으로 감히 맞 상대할 곳이 없다는 패천궁. 그런 곳의 장로가 적의 간세라는 것이니 경악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절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이 사실인가? 그들이 패천궁에 들어온 지도 벌써 삼십 년이 넘 었네.' 냉악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확실한 것은 확인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 충분히 근거가 있 는 정보입니다. 또한 첩자가 암약하는 곳은 패천궁만이 아닙니다." 남궁민의 시선이 곡양에게 향했다. 그는 조금 전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풍찬을 대신하여 개방의 방도들을 이끌고 있었다. "개방은 물론이고 무당과 화산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소림까지. 오대 세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문파에 간세가 섞여 있더군요. 오래전부 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 같습니다." 기겁을 하는 곡양. 그의 반응도 원로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디서 얻은 정보인가?" 침착성을 되찾은 냉악이 물었다. "사천이 준동하기 전 악가에 잠입했던 혈영대원이 정보를 입수했다 고 합니다. 그가 목숨을 바쳐 지킨 그것이 위지...공자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제게 온 것입니다.' 남궁민이 위지황에게 전해 받은 책자를 건네며 대답했다. 위지황을 언급할 때 음성이 살짝 떨렸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책자를 살피는 비사걸과 냉악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음, 이것이 정녕 사실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일이로구나. 백도나 패 천궁이 놈들에게 지금껏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 "그렇습니다. 놈들로 인해 이쪽의 동태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질 테니까요." "이거야 원. 그럼 지금껏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는 손오공의 꼴이었다는 거야?" 송찬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으나 냉악의 표정은 훨씬 심각 했다. "어쨌든 정보의 진위를 떠나서 이는 굉장히 중요한 일일세. 자칫 잘 못하면 궁주가 위험할 수도 있겠어." "궁주가 위험하다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송찬이 황급히 물었다. "생각해 보게. 명색이 장로까지 오른 자들일세. 그것도 순수한 실력 을 인정받아. 그런 그들이 고작 정보나 빼돌리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라 생각하는가?" "암살이란 말입니까?" 응사웅의 물음에 냉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운이 좋았든 아니면 기회가 없었든 지금까지야 무사히 넘 어갈 수 있었지만 놈들은 호시탐탐 궁주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것일 세. 또 그만한 실력이 충분히 되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궁주에게 위 기가 닥쳤는지도 모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혹 궁주가 잘못된다면 힘겨우나마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는 싸움은 급격히 기울게 될 것이네. 패천궁에서 궁주라는 위치는 그만한 영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자리 니까."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패천궁을 감히 뭘로 보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 무림을 떠났으나 원로원의 원로들은 한평생 패 천궁에서 잔뼈가 굵었고 그만큼 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사람들. 한 데 그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온 패천궁이 위험에 빠진 것이다. 힘겨운 싸움을 하는 것도 염려가 되고 화가 날 지경인데 거기에 더해 수십 년 전에 잠입한 첩자가 궁주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 니 저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어지나 강맹한지 무공이 약한 이들은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궁주에게 가봐야겠습니다. 놈들도 놈들이지만 전황이 어 찌 돌아가는지도 살펴야 할 것 같고요." 냉악의 말에 비사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예기치 못한 기습을 당해 꽤나 고전하고 있을 터. 너 희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어르신께서는....." "난 이 녀석들고 있을 생각이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남궁세가의 태 상호법이라는 지위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대신 저들을 남기고 가겠습니다.' 그가 가리킨 사람은 송찬과 응사웅이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곳이 아니 라 그곳이다." 비사걸이 간단히 거절했지만 냉악은 자신의 뜻을 접지 않았다. "그럼 한 명이라도 남기게 해주십시오." 그는 비사걸의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고 엉거주춤 서 있는 송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어르신을 지키게." "알겠습니다." 냉악과 같은 생각이었던 송찬은 비사걸이 말릴 새라 황급히 대답을 했다. 하지만 비사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잔을 들 뿐이었다. 그것은 곧 냉악의 밸를 받아들이겠다는 허락의 의미였다. 제50장 대환단(大丸丹) 무당산 옥허궁의 정문. 을지호와 사마유선이 몇몇 사람들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사흘 전, 그들은 철혈마단의 포위망을 뚫고 힘들게 무당산에 올랐 다. 한데 크나큰 환대는 원하지 않더라도 그동안 고군분투한 것을 생 각한다면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줄 줄 알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 들의 시선은 가히 곱지 않았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들을 잡지 못한 철혈마단에서 그들이 지나 온 길의 모든 문파를 초토화시켜 버렸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 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피해를 당한 몇몇 문파와 인사들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심 지어는 책임을 지라는 억지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미파나 당가처럼 도움을 받았거나 또 그들의 활약에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은 일의 부득이함을 강조하며 을지호와 사마유선을 두둔하고 나섰다. 양측 간에 치열한 설전이 오갔다. 말싸움이 번져 주먹다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각 문파들 간에 점점 반목이 심해 졌다. 을지호는 자신으로 인해 분란이 생기는 것을 운하지 않았다. 애당초 목적지가 무당산이 아니었기에 미련도 없었다. 해서 산에 오른 지 정 확히 사흘 만에 전격적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어디로 가려는가?" 본가로 복귀하지 못하고 지금껏 정도맹을 지키고 있는 제갈경이 물 었다. "남궁세가로 가야겠지요." "그들이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하하, 어른신께서 하남 어딘가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 니까? 다소 귀찮기는 하겠지만 발품을 팔아보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걸세. 사방 천지가 사천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 는 터라." "지금까지도 견뎌왔습니다. 조심조심 다니면 되겠지요. 너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후∼ 자네를 이렇게 보내선 안 되는 것인데......" 담담해 보이는 을지호와 다소 냉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마유선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제갈경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부디 오해는 하지 말게. 자네가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놈들이 그들의 문파에 한 짓이 너무 끔찍한 것이라 그러니." 을지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오해도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느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으니까요." 하나 그의 눈가에 스치는 서늘한 기운은 그가 이번 일로 꽤나 서운 한 감정을 품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제갈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뭐라 해줄 말도 없었다. 그저 팽팽히 대립하 는 양측을 중재하지 못하고 수수방관하여 결국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 르게 만든 정도맹과 무당파의 수뇌들이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분명 후회할 것이야.' 살며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곤 떠나가는 을지호의 뒷모습을 보며 제갈경은 마음 한쪽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한데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만은 아닌 듯했다. 을지호와 사마유선이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것을 먼발치 에서 지켜보던 천강 진인이 천중 진인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이대로 보내도 되는 것입니까?" "뭐가 말인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함께 떠나는 여인은 패천궁의 사 람입니다. 행여나 저자가 패천궁으로 가기라도 한다면......" 뒷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설마 패천궁으로 가기야 하겠는가? 남궁세가 사람이라 알고 있네 만." 천강 진인이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남궁세가는 이미 존재감마저 희미해진 지 오랩니다. 더구나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은 패천궁의 여인. 그녀가 원한다면 남궁세가가 아니라 패천궁으로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관없지 않겠나? 그가 어디를 가든 싸워야 할 상대는 사천이니 말 일세."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이야 사천과 싸움을 하고 있지만 백여 일 전만 해도 상대는 패천궁이었습니다. 사천과의 싸움이 끝나면 필연 적으로 패천궁과 부딪치게 되어 있는 터. 앞으로의 일을 감안한다면 그가 패천궁으로 가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잡으려면 그가 길을 나서기 전 잡아두었어야 한다. 이미 길을 나선 이상 끝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되묻는 천중 진인의 말투에 은근히 짜증이 묻어났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억류를......" 순간, 천중 진인의 고개가 매섭게 돌려졌다. "억류? 사제는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싸늘히 내뱉는 말투가 가히 추상같았다. "자, 장문인." 그러한 반응은 생각지도 못한 듯 천강 진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당장 일어날 일도 아니고 또 일어날지도 불분명한 사안에 대 해 어찌 이리 가볍게 입을 놀린단 말인가? 억류? 도대체 누가 누구를 억류한단 말인가? 억류를 한다면 그만한 죄가 있어야 하거늘 그에게, 아니 다른 이들에겐 뭐라 말을 할 것인가?" 서슬 퍼런 호통에 천강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들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나선 두 명의 제자 역시 진땀을 흘릴 뿐 감히 나서지는 못했 다.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천강을 보며 천중의 표정이 다 소 부드러워졌다. "사제의 마음은 내 모르는 바가 아니나 무당파의 장로로서 그렇게 가벼이 할 말은 아니었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또 있네. 자네 말대로 억류를 한다고 치세. 그런데 만약 그가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어찌하겠나? 작심하고 대항하면 또 어 찌 상대하려는가? 철혈마단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고 하였으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한 인물일세. 일신에 지닌 무공이 하늘에 닿아 있 다고 하였지 아마. 오죽하면 그가 삼시파천이란 광오한 별호를 얻었을 까. 누가 있어 그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자네가 하려는가?" "......" 천강 진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여럿이 합공을 한다면 능히 제압할 수는 있을 것이네. 하지만 그간 입을 피해는 어찌할 것이며 여러 동도들에겐 뭐라 해명할 것인 가? 자칫 잘못하다간 자중지란만 일어날 뿐이야. 지금처럼 서로 대립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끝장날 수 있단 말일세."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천강 진인이 재차 머리를 조아렸다. "후∼ 용서랄 것이 뭐 있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사제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음이니." 가벼이 숨을 내뱉은 천중 진인은 점점 멀리 사라지는 을지호의 뒷모 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일이 결코 순리대로 흐르지 않을 것만 같은 묘한 불안감이. * * * 해질녘 날아든 한 장의 서찰. 특별한 장식도 없고 귀한 종이도 아니었다. 그다지 잘 쓴 글씨도 아닌 데다가 덜떨어진 차림의 상인을 통해 전 해진 터라 처음엔 아무의 주목도 받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 이 전해지면서 무당을 공략하고 있는 철혈마단의 본진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어수선해졌다. 서찰이 단주인 철포산에게 전해진 뒤 이각 후, 그의 거처로 군사격 인 요증을 비롯하여 수뇌 열둘이 모여들었다.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을지호와 사마유선이 은밀히 무당을 떠나 남하하고 있다는 것. 서찰의 진위를 놓고 한참 동안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비록 그 의도 를 파악할 수는 없을지라도 놓쳐서는 안 될 절호의 기회라며 출저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쩌면 적이 파놓은 함정일 수도 있다면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반반으로 나뉘어 펼쳐진 설전은 끝이 나지 않았다. 결국 결정은 한참 동안 설전이 벌어짐에도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서찰만 을 응시하던 철포산에게 넘겨졌다. 애당초 그의 결정이 절대적이긴 하 였지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철포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요증,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그와 마찬가지로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 홀로 한참 동안 심사숙고하 던 요증이 조심스레 대답을 했다. "확률은 반반이지만... 아무래도 사실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우선 놈들의 움직임에 별다른 이상이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함정이라면 보다 그럴듯한 장소, 곧 매복하기가 용이한 곳을 고르게 마 련입니다. 하나 서찰대로라면 그쪽 지역은 매복하거나 포위 공격을 하 기 위한 장소로는 마땅하지가 않습니다." "포위 공격을 하기엔 적당한 장소지.' 나렴이 반박을 하고 나섰다. "상대가 철혈마단이 아니라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최강의 기동력 을 자랑하는 우리들을 상대로 하여 평야에서 포위 공격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인간은 단언하건데 없을 겁니다." "그도 그렇군." 나렴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솟아나온 못이 정을 맞기 쉬운 법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철포산이 물었다. "을지호는 뛰어납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철혈마단을 상 대로 거둔 전과는 혁혁하지요. 어쩌면 지금까지 입을 피해 중 오 할 이 상이 그와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칠 할 이상이다." 나렴이 거들었다. "하지만 너무 뛰어나면 주변에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입니 다. 특히 겉으로 점잔을 빼고는 있어도 자신들보다 뛰어난 사람을 인 정하기 싫어하는 정파 놈들은 더욱 그렇지요." "하면 네 말은 그를 시기하는 자 중 누군가가 그의 이동 경로를 전해 왔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그들이 무당을 떠났고 천주봉을 넘어 남하하고 있으며 내일쯤이면 백하구(白河口)에 도달한다는 사실 을 알 수가 없겠지요." "흠, 일리가 있는 말 같네. 자네의 명으로 놈이 지나온 곳을 초토화 시켰으니 놈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자들도 꽤나 많을 것이고." 나렴의 말에 철포산도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움직일 텐가?" "어차피 서찰의 진위를 떠나 움직일 생각이었어." "그럼?" 순간, 철포산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삼시파천이라는 놈을 잡는 일이야. 만에 하나 서찰의 내용이 사실 이라면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셈.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이번과 같 은 기회가 또 온다고 보장도 못하고. 해서 말이네만 자네가 나서주어 야겠어." "내가?" "그래. 어차피 흑풍과 백풍이 움직이겠지만 아무래도 안삼이 안 돼. 자네가 녀석들을 데리고 놈을 쫓아주게. 그리고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 라면 놈의 목을 반드시 내 앞으로 가지고 오고, 아니, 가능하다면 살려 서 데리고 오는 것이 좋겠군. 어찌 생긴 면상인지 구경이나 하게. 해 줄테가?" "노력해 보지." 나렴의 성격상 한다면 하는 것이다. 또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 는 사람이었다. 담담히 대답하는 그의 음성에 만족한 미소를 지은 철 포산이 요증을 불렀다. "요증." "예, 단주님." "함정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수하들을 총 동원해 놈들 의 움직임을 단 하나도 놓치지 마라.' "존명." 요증이 명을 받고 물러나자 시선이 금기령주에게 향했다. "오룡궁을 접수했다고?" "그렇습니다." 오룡궁에서 패퇴하여 질책을 당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후설담은 한결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좋아. 이참에 더 밀어붙여라. 또한 은기령주와 동기령주에게도 명 을 전해 총격에 나서라고 해. 행여나 놈들이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존명." 금기령주가 허리를 꺾으며 명을 받자 철포산은 그제야 탁자 위에 놓 인 술잔을 들었다. '진위를 떠나 꽤나 기대가 되는군. 놈, 과연 이번에도 무사히 빠져 나갈지 궁금하구나.' 비취 빛으로 빛나는 술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이 투영 되었다. "어찌할 생각이더냐?" 우문걸의 물음에 위지요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움직여야지요." "만만치 않은 상대야." "알고 있습니다. 철혈마단이 기를 쓰고 잡으려고 해도 그림자조차 밟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을."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요. 잘만 하면 어설픈 텃세를 부리는 놈들에게 톡톡히 망신을 줄 수도 있고요." 위지요가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지원했던 북천이 본격적으로 무당을 공략하기 위해 나선 지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났으나 예상보다 성과는 미미했 다. 거기엔 무당산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이들의 저항이 상당한 데다가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철혈마단의 은근한 견제가 한몫을 했다. 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무당산을 점령하기 위해선 북천의 도움이 필 요했지만 무당을 점령하고 정도맹을 무너뜨려 호북에서의 영향력을 확 고히 하려던 철혈마단으로선 북천의 활약을 마냥 환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양측의 신경전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심지어는 칼부림이 일어나기도 했다. 가급적 마찰을 줄이라는 위지요의 명이 있기에 더 이상 큰 사단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철혈마단에 대한 북천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한 상태였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잖아도 철혈마단의 횡포에 화가 나 있던 우문걸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무리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면 북천도 알고 있을 터. 괜한 충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북천 놈들도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게야. 그래, 하면 누구를 보낼 생각이냐?" 우문걸의 물음에 완함이 자신을 보내달라고 연신 신호를 보냈다. 이 를 간단히 무시한 위지요의 고개는 모른 척 딴짓을 하는 위지청에게 향했다. "네가 다녀와야겠다." "예." 위지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설풍단에서 실력있는 녀석만 추려서 떠나라. 한빙오영도 데리고 가 고." "알겠습니다." "단, 절대 무리하지는 말아라. 철혈마단에서도 분명히 나섰을 게야. 괜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먼발치에서 놈들이 어찌 움직이는지 관찰한 후에 나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어쩌면 어부지리를 얻 을 수도 있고." "그리하겠습니다." 위지청은 한마디도 토를 달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하지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강한 사람 을 만나게 되면 불이 붙은 전형적인 무인의 눈빛이었다. * * * 숭산과 마주하고 있는 정심객점(正心客店)은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 의 객점이었는데 일층과 이층은 술과 음식을 팔고 삼층과 사층은 여행 객들을 위한 객실로 쓰였다. 정심객점은 탁월한 음식 솜씨와 고관대작이 들러도 감탄할 만큼 휘 황찬란하게 꾸며놓은 객실 덕에 늘 사람들로 붐볐다. 그곳의 가장 높은 층, 가장 구석진 객실에 을지 가문의 사람들이 묵 고 있었다. "어떻더냐?" 을지소문이 막 돌아온 을지휘소에게 물었다. 그는 탁자에 놓인 차를 가볍게 들이키더니 한나절을 허비하며 조사 한 것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병력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되는데?" "사백 정도입니다." 예상보다는 많은 숫자였으나 을지소문은 그다지 신경 쓰는 안색이 아니었다. "현지 소림사는 장백파를 중심으로 몇 개의 문파들이 각자의 구역을 맡아 관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장백파가 중심이기는 합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아도 대충 그 녀석의 말대로구나." 며칠 전 을지룡에게 치도곤을 당했던 유원을 말함이리라. "예, 하지만 이제부터는 경비가 훨씬 강화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 "유원인가 뭔가 하는 자가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을 보고 오는 중입 니다. 아무래도 그가 복귀하면 우리와 만난 것을 발설하지 않겠습니 까? 당연히 경비도 강화되겠지요." "발설이라고 할 것도 없다. 몸뚱이가 움직이면 당연히 제가 몸담고 있는 곳으로 갈 것이고 상관을 만나 보고하는 것이 순리겠지. 이렇게 시간을 지체할 것이었으면 차라리 끝장을 내버리는 것인데 그랬어." 을지소무이 자신의 목을 비트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의 모습에 저마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당장에라도 소림사를 뒤집어놓을 것만 같았던 을지소문은 보다 철저한 준비를 갖춘 뒤에 치자며 완강하게 반대하는 환야와 남궁 혜의 만류로 결국 숭산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대신 바빠진 사람은 을지휘소와 을지룡이었다. 정심객잔에 여장을 풀자마자 부친의 명으로 숭산에 오른 을지휘소는 소림사의 상황을 차분히 살피기 시작했다. 유원의 자백으로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직접 보고 확인하는 것이 만일을 생각 해서라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림사의 경내로 은밀히 잠입한 그는 소림사를 장악하고 있는 문파 와 무인들의 수, 경내의 경비는 어찌 되고 있으며, 어느 곳에 누가 포 로로 잡혀 있는가를 살폈다. 특히 수호신승이 치료를 받고 있는 약사 전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심지어는 병사로 들어가 신승의 병을 살피며 진맥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족적을 발견한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가 소림사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을지룡은 저잣거리를 헤매고 다 녔다. 조부의 명으로 군자산을 해독할 수 있는 약재를 찾아 약방이란 약방은 모두 돌아다녔다. 비록 개개인이 가히 일기당천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 또한 있 었으나 억류되어 있는 포로들과 소림사의 무승들을 제어하고 있는 군 자산만 일시에 해독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구태여 힘든 싸움을 할 필 요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소림사로 간 부친보다 먼저 도착한 을지룡은 옆방에서 이미 조부의 설명대로 열심히 약재를 배합하고 있는 중이었다. "참, 수호신승은 찾아보았으냐?"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예. 그분이 계신 약사전도 돌아보고 왔습니다." "심각하더냐?" 질문을 던지는 을지소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만큼 그에 대 한 걱정이 크다는 증거였다. "때마침 기회가 되어 수호신승의 몸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두 개 의 기운이 몸 전체를 휘감고 있더군요." "두 개의 기운이라니?" 수호신승과의 인연이라면 환야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주의 깊게 듣 고 있던 그녀가 재빨리 물었다. "하나는 외부에서 들어온 독의 기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독을 제 어하고자 하는 신승의 기운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것이 두 힘이 어느 한쪽의 우위도 잡지 못하고 서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어느 한쪽이 우위를 잡았다면 중독되어 목숨을 잃었거나 해독했을 게다. 그나저나 어떤 독이기에 수호신승의 능력으로도 제거하지 못하 는 것일까? 웬만한 독이라면 침범조차 하지 못할 것인데." 가히 도검불침,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르렀을 수호신승을 중독시킨 독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극독의 출현에 을지소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인기척이 들려 더 이상 자세히는 살피지 못했습니다." "괜찮다. 곧 알게 되겠지. 다른 포로들은 어찌하고 있더냐?" "군자산으로 인해 무공을 사용할 수는 없어도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 다지 큰 제재를 받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경내에서 대체적으로 자 유롭게 움직이며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한당 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나한당?" "예. 이십 정도 되어 보였는데 크게 학대를 당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접근하기가 힘들어 먼발치에서만 살폈으나 그리 보였습 니다." "제법 예의를 차릴 줄 아는 놈들이구나." 싸움에 승리를 하고 포로를 잡았다는 것은 곧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포로들은 온갖 수모와 학대를 당 하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승리자를 위한 한낱 여흥거리로 전락하기도 하였는데 소림사에선 다행히도 그와 같은 극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림사도 소림사지만 그들을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된 사람들 중에는 단견과 곽검명이 있었다. 포로들이 무사하다면 그들 역시 무사하다는 말. 을지소문의 얼굴이 한결 밝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나저나 약재는 마련되었습니까? 룡이가 뭔가를 하고 있던데 말 입니다.' "부족한 대로 마련하였다. 군자산이 그리 심각한 독도 아니고 중화 시키기 위해 그다지 많은 약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룡이가 지금 약재들을 배합하여 가루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리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 를 훔치며 을지룡이 들어섰다. "다 끝났습니다." 을지룡이 조그만 항아리를 내밀며 말했다. 약 내음이 방 안 가득 스며들었다. 항아리에는 고운 모래와 비슷한 형태의 흙색 가루가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따로 정제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을지휘소가 흙색 가루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럴 시간이 없다. 물론 정제한 것만큼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겠 지만 이 정도면 괜찮아.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해약의 상태를 찬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인 을지소문의 시선이 가 족들에게 향했다. "이것으로 대충 준비가 끝난 것인가?" "바로 시작할 생각인가요?" 환야가 물었다. 을지소문의 고개가 힘차게 끄덕여졌다. "이틀, 꽤나 긴 시간이었소." 그의 기분이 전달되었는지 환야도 더 이상 반대는 하지 않았다. "정면 대결입니까?" 을지룡이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묻자 을지소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석아, 애당초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미 결판을 보았어. 이따위 해 약을 만들 필요도 없었고." "그, 그렇군요. 그, 그러면 어디부터......" 어린 손자의 머쓱한 웃음이 귀여웠는지 을지소문이 그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허허, 그렇게 궁금하더냐? 그래, 말해주마. 이 할애비는 우선 수호 신승을 구할 생각이다." 그의 시선이 을지휘소에게 향했다. "약사전이라고 했느냐?" "예." "비록 병석이지만 명색이 수호신승이다. 경비가 만만치는 않을 터. 몇 명이나 지키고 있느냐?" "독도문이라는 문파가 전담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독도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난번 유원이 모 두 고한 사실이지만 단지 그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을 뿐이었다. "북천에서 가장 작은 문파입니다. 인원은 오십 남짓 되어 보입니다. 아, 지난번 그 녀석도 독도문 출신이었지요." "흠. 오십이라... 그래도 요란 떨지 않고 처리하려면 제법 주의를 해야겠구나." 을지소문이 다소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하나 말만 그러할 뿐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확신에 찬 자신감이었다. 태실산 중턱에 자리한 약사전. 과거엔 소림사 승려의 건강을 책임지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북천의 무인들을 위한 곳으로 바뀌어 버린 상태였다. 병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승려들이 아니라 각종 싸움에서 부상을 당한 북천의 무인들 이었고 치료를 하는 사람들 역시 북천에 속한 의원들이었다.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수호신승이 치료를 받고 있는, 위 지요의 명으로 정해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 지도 또 소란을 피우지도 못하는 외딴 병사뿐이었다. 을지가의 사람들이 약사전에 접근하기 시작한 순간은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대지를 잠식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첫 번째 희생자는 약사전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사내였다. "그 얘기 들었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왕복을 하며 주변을 살피던 사내 중 한 명이 말 을 꺼냈다. "무슨 얘기?" "이제 곧 큰 적이 찾아들 것이라는 말." "큰 적이라니? 누가 그래?" 큰 병을 앓았는지, 아니면 태생이 그런 것인지 젊은 나이임에도 머 리카락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왼쪽 볼에 상처까지 입어 쳐다만 봐도 기절할 만큼 험상궂은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가뜩이나 더러운 인상에 얼굴까지 찌푸리자 실로 가관이었다. 하나 매일같이 얼 굴을 맞대고 지내온 좌측의 사내에겐 그것은 조금의 문제도 되지 않았 다. "점심 때 외당 당주가 돌아와서 그랬다던데." "유원 조장 말이야?" "그래. 수하들을 이끌고 진탕 술을 마시느라 어제 돌아오지 않았다 고 소문이 났잖아." "그랬지." "한데 그게 아닌 모양이야. 복귀를 하던 중 습격을 받았다나." "습격? 누가?" 대머리 사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자세히는 몰라. 대충 들은 얘기로는 어마어마한 무공을 지닌 고수 들이 출현했다고 하더라. 그리고 중요한 것은 놈들의 목표가 바로 이 곳, 소림사라는 거야." "아, 그래서 아까 문주님이 급히 소림사에 다녀오셨구나." 대머리 사내가 굳을 대로 굳은 얼굴로 인사도 받지 않고 걸음을 옮 기던 문주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놈들이야.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아무튼 저쪽에선 난리도 아닌 모양이더라. 완전히 비상이 걸린 것이지." "여기는 괜찮을까?" 대머리 사내가 다소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여기? 여기에 뭐가 있다고? 나중엔 몰라도 지금 당장은 문제 될 것 이 없어. 어느 멍청한 놈이 중요한 곳을 놔두고 별로 쓰잘데기도 없는 이곳부터 공격하겠냐? 당연히 저쪽부터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리키는 방향은 산사에서 내걸은 등불로 인해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소림사였다. "그,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는 대머리 사내. 한데 그는 동료의 손길을 따라 엉거 주춤 시선을 돌리다 난데없이 눈에 들어오는 인영(人影)을 보며 기겁 을 하고 말았다. "누, 누....." 깜짝 놀라 소리를 치려던 그는 고작 한마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점 혈을 당해 몸이 굳어졌다. 직감적으로 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감지한 사내가 번개같이 몸을 틀 며 검을 빼 들었다. 하나 그것은 단지 상상 속의 시도에 불과할 뿐 정 작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고개가 미처 돌아가기도 전, 손이 검집 에 닿기도 전에 점혈이 되어 뻣뻣하게 굳는 것뿐이었다. 통나무처럼 굳어버린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을지가의 사람들이었 다. "누군지 궁금하냐?" 을지소문이 사내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몸이 굳긴 하였으나 감각은 남았는지 사내의 얼굴에 고통스러움이 피어났다. "쯧쯧, 데굴거리기는."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두려움에 떠는 사내의 모습에 코웃음을 친 을 지소문이 손가락으로 사내의 이마를 튕겼다. 딱! 돌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사내의 몸이 그대로 넘어갔다. "우리가 누구냐 하면 말이지. 네 녀석이 방금 말한 것처럼 중요한 곳을 버려두고 엉뚱하게도 약사전을 접수하려는 어느 멍청한 놈이란 말이다." 장난스레 말을 던진 을지소문은 그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환야와 남궁혜, 을지휘소가 뒤를 따르고 결국 그들의 처리는 뒤에 처진 을지룡의 몫이었다. "에휴." 짧은 한숨과 함께 그들의 신형을 길 옆 숲에 숨긴 을지룡이 자리를 떠나기 전에 한마디 했다. "얼마 지나면 점혈이 풀릴 것이니 얌전히 계세요. 괜히 떠들어 대다 가 치도곤을 당하지 말고. 뭐, 그때쯤이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을 테지만." 물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동쪽에서 불어와 이제 곧 소림사에 들이닥칠 광풍은 그렇게 시작되 었다. * * * 과거엔 약사전 전주가 기거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독도문의 문주 양웅천의 거처가 된 불심각. 소림사에서 돌아온 양웅천은 유원이 만났다는 정체 모를 고수들에 대해 부문주 마총(麻寵)과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 다. "경비는 철저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예, 문주님. 일일이 돌아다니며 점검했습니다. 한데 너무 과민 반 응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유 조장이 만났다는 적 말입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유 조장 말대로 그를 제압했던 자들의 무공이 강하다는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고작 다섯입니다. 그 인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 니까?" 한마디로 몇 명 되지도 않는 적에게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었다.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네. 다른 사람들도 그리 말하더군. 하나 사 람에겐 느낌이라는 것이 있어. 어쩌면 오감보다 더욱 정확한 육감이 말일세." 고개를 가로젓는 양웅천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하오면?" "그래, 나의 육감이 말을 해주고 있다네. 극도로 위험한 일이 터질 것 같다고. 유 조장의 말을 듣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솜털까지 곤 두서는 느낌이었어. 그리고 그런 느낌은 나만이 갖는 것은 아닌 것 같 아." "예?" 마총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자네 말처럼 다른 이들은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네. 하긴, 누구라도 그럴 테지. 소림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만 사백이 훨씬 넘으 니. 그렇지만 장백선옹 선배만큼은 달랐네.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는 것이 나만큼이나 긴장하는 눈치였어." 타는 듯한 갈증 때문인지, 아니면 원인 모를 불안감 때문인지 연거 푸 석 잔의 술을 들이킨 양웅천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튼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말게나.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 는 상황이야."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차적인 목표는 약사전보다 는 저쪽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총의 말에 양웅천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지 않네. 나라면 이곳부터 치겠어." "어째서 그렇습니까?" 마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거대한 둑이라도 조그만 구멍이 생기는 것부터 시작하여 무 너지는 법. 강한 상대를 상대하려면 단단한 곳보다는 약한 곳부터 야 금야금 잠식해 들어가는 것이 최고일세.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현 재 소림에서 가장 약한 곳은 우리가 지키고 있는 약사전이 아닌가. 더 구나 이곳엔 수호신승이 있네. 비록 의식을 잃고 있는 상태라지만 그 가 지닌 상징성은 소림에 못지않아. 만약 적의 손에 그의 신병이 확보 된다면 꽤나 힘든 싸움을 각오해야 할 것이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난데없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 "누구냐!" 번개같이 몸을 일으킨 마총이 양웅천의 앞을 가로막으며 칼을 빼 들 었다. "역시 우두머리라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꽤나 나이가 든 노인의 목소리. 하지만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것이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직감적으로 적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느낀 양웅천이 조용히 물었다. "어느 고인이시오?" "고인일 것까지는 없다. 그냥 나이 먹은 늙은이일 뿐이야." 노인의 음성은 여전히 방을 울리며 들려왔다. "볼일이 있어 여기까지 왔을 터. 하면 그렇게 모습을 숨길 필요는 없 지 않겠소?" "흠, 숨은 게 아니라 너희들이 찾지 못하는 것이다. 뭐, 네 말도 일 단은 맞는 것 같다."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노인. 을지소문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양웅천의 면전에서 태연히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볼 마총이 아니었다. "죽어랏!" 거리라야 고작 일 장 정도. 고작 한 걸음 내디딘 것으로 거리를 확보한 마총이 눈부신 속도로 칼을 휘둘렀다. 등잔 빛을 반사하며 접근한 칼날이 순식간에 목을 노리며 접근을 했 지만 을지소문은 미동도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마총은 회심의 미 소를 지었다. '끝장이다, 늙은이.' 그러나 미소를 짓기엔 너무나 일렀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다가오는 칼을 지켜보던 을지소문의 입꼬리 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팅. 참으로 듣기 민망한 소리가 들리며 기세 좋게 나아가던 도가 반 토 막이 나버렸다. 살짝 몸을 튼 을지소문이 수도(手刀)로 칼의 옆면을 후려친 것이었다. "헛!" 경악을 한 마총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오직 마음뿐이었다. "버르장머리없는 놈 같으니." 대뜸 칼을 휘두르며 달려든 것이 못마땅했던 을지소문이 마총의 멱 살을 틀어쥐더니 번쩍 허공으로 치켜 올렸다. "으아아!"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고 삽시간에 푸줏간에 걸린 고기로 전락해 버 린 마총이 발악하듯 발길질을 하고 토막난 검을 휘둘렀다. "고놈 아주 발광을 하는구나." 애당초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반발을 예상했다는 듯 을지소문은 왼쪽 발로 쇄도하는 발 을 후리듯 툭 건드리며 쳐 올리고 한쪽 손으로 멱살을, 다른 한 손으 론 칼을 든 손을 제압했다. 순간, 발악을 하던 마총의 몸이 끊어진 연 처럼 힘없이 공중제비를 하더니 머리와 발끝의 위치가 바뀌었다. "어른에겐 함부로 까부는 것이 아니니라." 마혈까지 제압당했는지 마총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칼 하나에 몸을 의지하며 살아온 지 벌써 수십 년. 언제 지금과 같 은 자세를 상상이나 했을까. 수치심에 사로잡힌 마총은 죽고 싶은 심 정이었다. "비, 비겁한 늙은이!" 마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신의 마혈을 제압당했는지 몰라도 아 혈까지 제압당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데 그 또한 실수였다. 실력을 인정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끝났을 일이었으나 괜스레 놀린 입으로 인해 그의 몸은 또다시 수난을 당해야 했다. 우당탕!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은 마총의 몸이 땅바닥을 굴렀다. 거꾸로 들려진 상황에서 그대로 내던져진 것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참이나 바닥을 구른 그의 몸은 침상다리에 부 딪치고서야 멈춰졌다. "게서 조용히 찌그러져 있거라. 함부로 나불대지 말고." "이......" 그렇게 심하게 바닥을 구르고도 정신만은 멀쩡했는지 마총의 입이 또다시 실룩거렸다. 그러자 양웅천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며 그를 만류 했다. "노 선배는 누구시오?" 마총을 진정시킨 양웅천이 을지소문을 향해 최대한 정중히 물었다. 겉은 태연했으나 이미 전신의 몸에선 엄청난 위기감이 경종을 울리고 잇었다. '고수다. 그것도 가히 극강의!' 마총이 누구던가. 비록 세가 약하다고는 하나 독도문의 부문주였다. 무공 또한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참으로 민망한 자세로 바닥을 구른 것이다. 그것도 변변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알고 있을 터인데." "무슨 뜻이오?" "지금껏 우리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냐?"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을지소문의 말에 양웅천의 몸이 움찔거렸다. 짐작한 대로 적은 유원이 만났다는 노인인 것이다. "음." 양웅천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이곳으로 먼저......' 나름대로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더 군다나 이렇듯 아무런 제지도 없이 불심각까지 잠입했다는 것은 밖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마도 불심각을 지키 는 수하들은 귀신같이 제거가 되었으리라. "유 조장에게 보고를 받아 알고 있소.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너무 무모한 것 아니오?" "무모? 쯧쯧, 한 문파의 문주라는 사람이 자신감과 무모함도 구별하 지 못한단 말이냐?"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궁금하구려." 을지소문을 노려보는 양웅천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명색이 고수라고 자부하는 무인이자 북천의 한 축을 담당하는 독도문 의 문주였다.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어도 양웅 천은 그리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궁금하면 시험해 보거라. 하나 각오는......" 을지소문이 잠시 말을 끊더니 방문으로 눈을 돌렸다. "흠, 끝난 모양이군."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 람은 을지휘소였다. "어찌 되었느냐?" "끝났습니다." "빠져나간 사람은 없느냐?" "없습니다." "수호신승은?" 을지소문에게 수호신승의 안위는 무엇보다 우선했다. "큰어머니께서 가셨습니다." 무사하다느니 하는 일체의 설명이 배제된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러 나 최상의 대답이었다. 환야가 움직였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 설명은 있을 수가 없었다. 한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양웅천은 이들처럼 여유로울 수가 없었 다. '끝나다니? 하면 벌써 모든 싸움이 끝났단 말인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거늘.' 수백 명이 우글거리는 소림사에 비해 약사전을 지키는 독도문의 인 원은 채 오십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십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 었다. 물론 절정의 무공을 지닌 고수의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적의 출현을 알릴 수 있을 정도의 고수는 그래도 열 손가락은 넘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는 것. 적의 출현을 알리기는 고사하고 문주인 자신의 거처까지 적이 쳐들어올 정도로 방비가 허술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 세상에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그가 산책을 마치고 불심각에 들어와 흐른 시간이 정확히 삼 각이었 다. 한데 둘의 대화에 의하면 그 삼각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려 오 십에 이르는 수하가 제압당했다는 것이 아닌가. "믿을 수 없다!!" 발작적으로 소리를 치는 양웅천.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을지휘소의 코앞까지 접근한 그의 도가 싸 늘한 냉기를 머금으며 공간을 베어왔다. 몸놀림이 마총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양웅천을 보며 을지소문이 혀를 찼다. "쯧쯧, 상대를 골라도......" 안쓰럽기 그지없는 음성에 양웅천의 가슴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싹 텄다. 그렇다고 이미 뽑은 칼을 다시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 구나 이렇듯 전격적인 기습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상대는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을지휘소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필요성 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눈앞에 접근한 도의 옆면을 단지 손가락으로 튕겨내더니 손 을 빙글 돌려 양웅천의 손목을 가격하는 것으로 증명했다. "큭!" 손목에서 시작하여 팔을 타고 흐르는 극통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 양 웅천이 황급히 칼을 거두며 물러났다. "호∼" 을지소문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을지휘소가 그에게 쓴 수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고 그것이 지닌 위력 또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금나수와도 견줄 정도로 뛰 어난 수법으로 왠만한 인물이라면 그 자리에서 무기를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한데 양웅천은 팔을 타고 전신으로 이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며 손에 든 무기를 지켜냈다.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물러나는 양웅천을 따라 을지휘소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러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접근한 을지휘소가 양웅천의 발등을 밟았다. 당황한 양웅천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오고 상대의 움직임을 단 박에 봉쇄한 을지휘소의 발이 양웅천의 손목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쉬이익! 탁! 맹렬한 기세로 치솟은 칼이 천장에 깊이 박혀 버렸다. 일순간에 무기를 잃었지만 양웅천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 은 이상 싸움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받아랏!" 손목이 가격당하고 손에서 칼이 빠져나가는 순간 양웅천은 온 힘을 왼쪽 팔에 집중시켰고 일격필살의 기세로 을지휘소의 아랫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절묘한 반격에 막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싸움을 지켜보려던 을지소 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간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끝난 싸움이라 생각하며 다소 방심을 하던 을지휘소의 안색도 급변 했다. "타핫!" 을지휘소가 밀려오는 공세를 막기 위해 마주 손을 뻗었다. 꽝! 손과 손이 부딪치며 천장에 꽂힌 칼이 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이 방 안을 휘감았다. "크으윽!" 우뢰와 같은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가기도 전 묵직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무릎을 꿇고 있는 양웅천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상대를 쳐 다보았다. 분명 공격을 한 것은 자신이었다. 을지휘소가 때늦은 반격을 하기는 하였으나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한 자신에 비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 였다. 힘을 모을 여유도 주지 않았다. 당연히 필승을 자신했다.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을지라도 치 명적인 부상은 안겨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것만으로도 독도문과 자 신의 자존심은 지켰다고 생각했다. 한데 너무도 어이없게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오고 말았다. "미,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그, 그런 힘이... 컥!" 양웅천이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옷을 적시고 바닥에 흥건히 고일 정도로 검붉은 피를 토하는 모습이 상당한 내상을 당한 듯했다. "쯧쯧, 그러게 적당히 할 것이지. 칼을 놓쳤을 때 포기를 했으면 그 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게 아니냐." 깜짝 놀란 것도 잠깐,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앉은 을지소문이 당연 한 결과라는 듯 양웅천이 마시던 술을 대신 홀짝이며 말했다. "도, 도대체 다, 당신들은 누구요?" 양웅천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미 그에겐 더 이상 대항할 힘 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말이냐?" 을지휘소에게 힐끗 고개를 돌린 을지소문의 얼굴에 능청스런 웃음 이 피어올랐다. "그냥 삼 년이 넘도록 연락 한 번 없는 손자놈을 찾기 위해 먼 길을 온 사람들이라고만 해두자." 순간, 양웅천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손자와 소 림사가 무슨 상관이기에'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이. 불심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외딴 병사. '후∼ 다행히 나쁜 의도를 가진 자들은 아니로구나. 한데 도대체 이 들은 누구인가? 누구기에 이런 상황에서 이리도 태연할 수 있단 말인 가?' 약사전주 공양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주 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 약재를 살피고 돌아오던 길에 그는 병사 밖에서 늘 자신과 수호신승을 감시하던 네 명의 사내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 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독도문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들이라던 그들은 고작 두어 번 손을 놀리는 것이었던 상대의 움직임에 모조리 제압당하고 말았다. 한데 노라운 것은 그들을 제압한 사람이 꽤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 파(老婆)라는 것이었다. 그 노파는 그가 말릴 사이도 없이 병사로 들어갔다. 행여나 수호신 승에게 해를 끼칠까 하여 서둘러 따라 들어갔으나 염려하는 일은 일어 나지 않았다. 노파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 동안이나 수호신승을 살펴보더니 그 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긴장된 표정으로 연신 질문을 던지 는 공양에게 단 한 번 입을 다물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하나 그는 수 호신승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고 결국 아혈 이 제압당하여 병사 구석에 처박히는 꼴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아혈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일각 후. 노부부와 아들로 보이는 중년인이 병사로 찾아오면서부터였다. 중년인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 며 구석에 처박혀 있는 공양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아혈이 제압당하여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다 짜고짜 손을 뻗어 수호신승을 진맥하려 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소리 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들을 살피는 것뿐이었다. "어떤가요?" 수호신승을 진맥하는 을지소문의 굳은 안색이 펴질 줄을 모르자 궁 금함을 참지 못한 환야가 물었다. "후우∼" 수호신승의 손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은 을지소문이 긴 탄식을 내뱉 었다. "안 좋은가요?" 환야가 재차 물었다. "좋은 상황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소. 그렇다고 최악의 상황은 아니 니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소." "자세하게 말씀해 보세요." "아범이 말했듯 현재 수호신승의 몸에는 두 개의 기운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소. 어느 한쪽이 우위도 점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계속해서." "하면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요?" 환야의 곁에서 역시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던 남궁혜가 물었다. "다소 무리가 따르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오. 다만 함부로 손 을 썼다간 큰일이 날 수 있소. 지금 신승의 몸은 팽팽히 당겨진 실과 같은 상태. 자칫 잘못하여 그 균형이 깨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벌어질 수 있다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오." "그래서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없다는 말인가요?" 답답했는지 환야의 음성이 다소 커졌다. "고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험, 우선은 몸을 보호 할 수 있는 영약이 필요하고... 하지만 웬만한 것으로 감당하기 힘든 데다가... 있다면 오직 하나뿐인데..." 을지소문이 계속해서 말꼬리를 흐리며 눈치를 보자 환야가 냉소를 지었다. "흥, 그렇게 말을 돌리지 않아도 되요. 그렇잖아도 이미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품에서 꺼내놓은 것은 주먹만한 약합(藥盒)이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이 투박해 보이기만 하는 약합. 한데 그것을 보는 이들 의 눈빛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진정이오? 꽤나 귀한 것인데." 을지소문이 기꺼운 표정으로 물었다. "처음부터 내 물건도 아니었어요. 원래의 주인한테 돌려주는 것인데 아까울 것도 없지요." "잘 생각하셨어요." 남궁혜가 환야의 손을 잡으며 활짝 웃었다. "이러지 마, 동생.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쓸 데도 없는 건 데 뭐." "허허, 아무튼 고맙소, 부인. 이것으로 일단 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 찬가지라오." 행여나 마음이 변할까 황급히 약합을 챙긴을지소문이 조심스레 뚜껑 을 열었다. '지, 지금 무, 무슨 짓을!!' 을지소문이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지 눈치챈 공양의 낯빛이 새하얗 게 질려 버렸다. 적의가 없어 보여 다행이라 여겼다. 수호신승의 몸 상태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상당한 실력의 의술도 지닌 것 같았다. 다행이란 생각에 다소 안심을 하고 있었건만 난데없는 행동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이 몰아쳐 왔다. 하는 모양새를 보니 제법 뛰어난 영약이라도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 다. 하나 그따위 호의는 적의만도 못한 것. 얼마나 뛰어난 영약인지는 모르나 수호신승의 병세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대환단뿐이었다. 엉뚱한 영약은 오히려 상세를 악화시켜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 었다. '아, 안 돼!' 당장에라도 말리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말려야만 했다. 그러나 아 혈이 제압당한 지금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의 음성은 입 밖으로 흘 러나오지 못했다. 딸칵! 약합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양의 얼굴에 절망감이 깃들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응?' 참담한 표정을 짓던 공양의 안색이 괴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약합 에서 은은한 약향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병사를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향기라니!' 단지 살짝 들이마셨을 뿐인데도 폐부까지 찔러오는 상쾌함. 약합에 서 흘러나온 향기는 병이란 병은 모조리 쓸어버릴 것만 같은 신묘한 기운이 있었다. 단번에 병사를 물들인 약향은 마치 천하를 뒤덮을 기세로 밖으로 퍼 져 나갔다. "허허, 역시 대환단이로구나." 꽝!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엄청난 충격이 공양의 전신을 강타했다. '대, 대환단? 서, 설마!' 공양은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을지소문의 손에 들린 환단을 살피 기 시작했다.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제, 제발!'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심장을 간신히 억누른 공양의 뇌리에 대환단을 묘사한 글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크기는 호두알만하고 빛깔은 적갈색이나 은은히 피어오르는 광채는 금빛이다. 그리고 천하에서 짝을 찾을 수 없는 신묘한 향기를 내포하고 있어 천 리 밖에서도 알 수 있는데... 눈앞의 단환은 기억 속의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더구 나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을 하지 않았던가. '대환단이다! 대환단이야!!' 부처가 다시 환생한다 해도 이만큼 기쁠 것인가? 비록 아혈이 제압 당해 환호성을 지르지는 못할지라도 공양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연신 불호를 외는 그의 눈에서 어린아이처럼 뜨거운 눈물 이 흘러나왔다. 그런 공양의 기분을 눈치챈 것일까? 한줄기 지풍이 그의 아혈과 마 혈을 풀어주었다. "또다시 시끄럽게 굴면 아예 밖으로 내던져질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환야가 퉁명스럽게 경고를 하였다. 공양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 하나 그와 같은 반말에도 전혀 기분 이 나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수호신승을 구할 수 있 다는 기쁨과 눈앞의 노파가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실 때가 되었소이다. 너무 오래 쉬시는 것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오, 신승."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친근하게 말을 한 을지소문이 대환단을 신승의 입에 넣어주었다. "너무 크지 않겠습니......" 굳게 다문 입에 비해 대환단의 크기가 너무 크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을지휘소는 수호신승의 입에 닿자마자 봄눈 녹듯 녹아 사라지는 대환 단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을지소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대환단이니라." "그렇군요. 제가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것으로 첫 번째 준비는 끝난 것 같구나. 이제 남은 순서 는 독기운을 몰아내는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해봐야지요." "함께하는 것이 어떠냐?" "혼자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자신있는 모양이구나. 아무튼 힘을 내거라. 수호신승의 생사는 전적으로 네게 달려 있음이니." 을지휘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이미 기운을 끌 어 모으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우리는 이만 나가볼까?" 을지소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환야와 남궁혜도 자리에 서 일어났다. 공양만이 엉거주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자 곧바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뭐 해? 나가라는 소리 안 들려?" "쯧쯧, 나이 지긋한 스님한테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이오." 대뜸 환야를 나무란 을지소문이 난처한 기색의 공양에게 살짝 허리 를 숙였다. "성격이 조금 괄괄해서 그러니 스님이 이해를 해주시구려. 한데 스 님께서는 법명이 어찌 되시오?" "아, 아미타불! 약사전을 맡고 있는 공양입니다." "공양 대사셨구려. 그래, 수호신승과는......" "수호신승께선 제게 사숙조 되십니다." "허, 그리도 차이가 난단 말이오?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아, 그러 고 보니 옛날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잇는 것 같구려. '무(無)' 자배 가 나이에 비해 배분이 높다는 소리를." "예, 그렇습니다. 한데 시주께서는 사숙조님과 어떤 관계이신지..." "허허허, 꽤 깊은 인연이 있소이다. 현대와 선대의 수호신승과. 아 무튼 그 얘기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은 자리를 비켜줍시다. 치료 에 방해가 되기 전에 말이오." 을지소문은 공양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 그의 팔을 잡으며 방문을 나섰다. 공양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으나 수호신 승을 위해 대환단이라는 희대의 명약을 아낌없이 사용한 사람들이 아 니던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또 지금의 상황에선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51장 백하구(白河口) 무당산을 떠나 도하(堵河)의 물줄기에 의지하여 남하하던 을지호와 사마유선이 백하구에 도착한 것은 꽤나 늦은 시각이었다. "후∼ 아무래도 더 이상은 못 가겠어요." 사마유선이 걸음을 멈추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철혈마단의 포위망 을 뚫고 무당산을 빠져나오느라 제법 많은 긴장을 했는지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조그만 가면 마을이 있다고 했어." "아무려면 어때요. 여기도 나름대로 괜찮은데요." 사마유선이 듬성듬성 쌓여 있는 짚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나그네들이 하룻밤 쉬어 가기에 충분할 만 큼 많은 짚 더미가 흩어져 있었다. "나야 상관없지만 불편하지 않아?" "상관없어요. 하루 이틀 노숙(路宿)하는 것도 아닌데, 이만하면 훌 륭하지요." 그녀가 짚 더미 위로 몸을 던졌다. "푹신푹신한 것이 여느 비단 금침 부럽지 않은 걸요. 어서 올라와 봐요." 최대한 편하게 몸을 누인 그녀가 을지호를 향해 손짓을 했다. "하하, 이거야 원." 못 말리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을지호가 훌쩍 몸을 띄워 그녀 의 곁에 누웠다. 그리곤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들더니 팔베개를 해주 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많은 것 같아요." 그의 체온을 느끼며 사마유선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게, 달빛이 어두워서 그런지 더 잘 보이는 것 같고." 을지호는 달이라고 하기엔 그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는 그믐달을 가 리키며 대꾸했다. "후∼ 그나저나 이렇게 평하로운 시간은 참 오랜만에 가져보는 것 같군." "오랜만은 무슨 오랜만이요. 처음 아닌가요?" 을지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세가를 떠나 오룡지회에 참여한 이후엔 계속해서 싸움, 싸 움, 또 싸움이었으니까." "언제나 끝날까요?" "글쎄, 쉽지는 않을 거야. 사천과의 싸움은 결코 단시일 니에 끝나 지 않을 테니까. 힘든 싸움이기도 하고. 하지만 언젠가는 끝이 나겠 지." "싸움이 끝난 후엔 어찌할 생각이에요?" "어쩌긴. 그만 돌아가야지." 흠칫 하는 그녀의 떨림이 몸을 통해 전해왔다. "어디로요?" "고향. 애당초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남궁세가를 위함이었어. 사천 의 일만 아니었으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는데... 아무튼 싸움이 끝나는 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가족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군요." 어딘지 침울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을지호가 사마유선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혼자는 안 가. 올 때는 혼자였지만 갈 때는 누군가와 함께 갈 생각이야." "누구와요?" 되묻는 사마유선의 음성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런 사람 있어." "내가 아는 사람인가요?" "그럴 거야. 밥도 못하고 빨래도 못하고 살림이라곤 해본 적도 없 지먄 사랑스런 사람이지." "고생 꽤나 하겠군요." "아무렴. 하나하나 배우려면 무척이나 고된 시집살이를 각오해야 할 걸. 특히 우리 집 사람들은 다들 요상한 성격들을 지니고 있거든. 나 만 빼고." "호호, 설마요?" "겪어보면 알지." "뭐, 그럴 것도 같군요. 당신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순간, 벌떡 상체를 일으킨 을지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제일 양호하다니까." "호호, 어련할까요?" "정말이라니까!" "알았어요. 누가 뭐라나요. 그러니까 조금 더 얘기해 봐요." "얘기? 무슨 얘기를?" 을지호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향 얘기요. 가족들이랑 친구들, 이웃 등등 말이에요." "고향 얘기라......" 천천히 상체를 누인 을지호가 그녀의 고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리곤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 했다. "우리 고향은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을지호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품에 안긴 사마유선이 이미 한참 전에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말은 끝날 줄을 몰랐다. 어쩌면 그의 고향 이야기는 사마유선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아련하게 밀려오는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안 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조금 춥고 괴팍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좋은 곳이야. 우리 고향, 우리 집은. 안 그러냐?" 을지호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개를 접고 있던 철왕을 보며 물었 다. 철황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활짝 날개를 펼치며 몸을 띄웠 다. 하늘 높이 비상한 철왕은 곧 하나의 점으로 변해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너도 고향이 그리운 거냐? 하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야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두 같겠지. 임마, 그렇다고 그 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은 없잖아. 지금 당장 갈 수도 없는 노릇이 고... 응?" 살짝 주먹을 흔들며 중얼거리던 을지호의 눈빛이 변한 것은 눈으로 살피기도 힘든 높은 곳에서 선회하는 철왕의 날갯짓이 어딘가 이상하 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였다. '설마!' 그것이 철왕이 보내는 경계의 표시라는 것을 알아본 을지호의 표정 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적인가?' 을지호는 온몸의 감각을 동원하여 주변을 살폈다. 아무런 느낌도 전 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경고를 보내는 철왕의 몸짓은 더욱 격렬히졌 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저렇게 경고를 보낸다는 것은...' 뭔가가 느껴지는지 팔베개를 했던 팔을 슬그머니 빼며 짚단에서 내 려온 을지호는 신중한 태도로 땅에 귀를 갖다댔다. 드드드드. 미약하기는 해도 확실한 떨림이 전해왔다. 드드두두 '기마대다.' 소리는 점점 명확해져 왔다. 더구나 그것은 한쪽 방향이 아니라 동 서남북 사방에서 조금씩 좁혀들고 있었다. '포위된 것인가? 한데 어떻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곤히 자고 있는 사마유선을 흔들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오랜만에 단잠을 이루던 중이었는지 그녀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적이 온 것 같소." 착 가라앉은 음성은 또다시 꿈결로 떠나려는 그녀의 의식을 확 돌아 서게 만들었다. "적, 적이라니요?" 튕기듯 일어나더니 짚에서 뛰어내린 사마유선이 굳은 표정으로 주 변을 살폈다. 사위를 둘러봐도 적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에 적이......." "곧... 나타날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축을 흔드는 조그만 떨림이 있었다. 그 떨림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커지더니 곧 천지를 울리는 거대한 진 동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이제는 몸으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울림이 사방에서 느껴 졌다. 사마유선이 을지호의 손을 잡았다. 그 짧은 순간에 땀이 고인 것을 보니 꽤나 긴장한 모양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 그녀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인지 의미가 모호한 말을 내뱉은 을지호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기마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혈마단......' 어느새 그의 손에는 거무튀튀한 철궁이 들려 있었다. "어쩌지요?" "기마대하고 이런 곳에서 싸울 수는 없어. 일단 피하고 봐야지. 틈 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그나마 포위망이 약해 보이는 동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단숨에 치고 나가야지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완벽하게 갇히고 말 거 야." "알고 있어요." "먼저 갈 테니까 바로 따라와." 사마유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속력을 높인 을지호. 출행랑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달려가는 그의 몸은 가히 섬전과 같았 다. 또한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사마유선은 물론이고 백 여 장 떨어진 곳에서 접근하는 기마대의 말들까지 동요를 일으킬 정도 로 엄청난 것이었다. 핑! 드넓은 평야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한줄기 소 성이 울렸다. 첫 번째 무영시는 좌우로 크게 펼쳐져 달려오는 기마대의 정중앙 사 내를 노리며 날아갔다. 핑핑! 첫 번째 화살이 도착하기도 전에 연이어 무영시가 날아갔다. 위험을 감지한 기마대가 급히 회피 기동을 하였으나 그것을 허락할 무영시가 아니었다. "크악!" 외마디 비명성이 터지고 첫 번째 무영시에 가슴을 허락한 사내의 몸 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 무려 십여 장이나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말과 사람의 음성이 뒤섞인 비명성이 연속적으 로 터졌다. 히이이힝! "으악!" "컥!" 을지호가 날린 무영시는 백발백중이었다. 특히 처음 날리 화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십여 발의 무영시는 모두 말을 노린 것이었다. 잔득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을 노린 의도는 적중했다. 무영시에 맞은 말은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고 말의 주인들 또한 달리 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나뒹굴었다. 더러는 황급히 몸 을 틀며 뛰어내린 자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말과 함께 힘없이 땅바닥 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기마대와 을지호의 간격은 어느새 육칠 장 정도 로 좁혀져 있었다. "타핫!" 주변을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과 함께 몸을 날린 을지호가 깜짝 놀라 칼을 휘두르는 사내의 공격을 피해 공중제비를 한 후 그대로 발길질을 했다. "크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힘없이 쓰러지는 사내.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탄 을지호가 그 틈을 노려 옆으로 치고 들어오 는 사내를 향해 무영시를 날렸다. 가까운만큼 위력도 컸다. 그는 자신의 몸이 어째서 상대와 멀어지는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죽어랏!" 좌우에서 또다시 협공이 들어왔다. 재빨리 고개를 숙여 첫 번째 칼을 피한 을지호가 고삐를 힘껏 낚아 챘다. 히히히힝! 순간 그를 태운 말이 앞발을 하늘 높이 치켜세우며 급제동을 했고 그를 공격하느라 미처 제동을 걸지 못한 이들은 삽시간에 그를 스쳐 앞으로 치고 나갔다. 핑핑. 연속적으로 시위가 당겨지고 그들은 어찌 손쓸 틈도 없이 목숨을 잃 고 말았다. 주변의 위험을 대충 정리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위기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손을 잡아!" 지원 사격을 하며 뒤늦게 달려오는 사마유선에게 접근한 을지호가 비스듬히 몸을 숙이며 손을 내밀더니 마주 손을 뻗은 사마유선을 재빨 리 말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곤 속도를 죽이지 않기 위해 짧은 원을 그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가히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치고 나가느 그의 뒤로 남겨진 것은 주 인 잃은 말 몇 필과 공격은커녕 변변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진 십여 명의 기마대원이 전부였다. "흠, 대단하군. 삼시파천이라는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어. 저렇듯 위 력적인 궁술은 처음 봐." 멀리서 을지호의 싸움을 지켜본 나렴이 진정 탄복했다는 듯 연신 혀 를 내둘렀다. "하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놈의 명성은 오늘로서 끝입니다. 쥐새 끼처럼 도망 다니는 것도 말이지요!" 곁에 있던 흑풍의 대주 암흑마신(暗黑魔神) 낭곡(郎梏)이 그 옛날 장비가 사용했다는 장팔사모를 고쳐 잡으며 소리쳤다. "피해가 제법 만만치 않겠는데. 단 한 번의 충돌로 벌써 저만큼의 인원이 당했어." "저 녀석들은 어차피 몰이꾼에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백풍 녀석들 이 벌써 따라잡았군요." 낭곡이 창을 들어 을지호를 가리켰다. 을지호와 사마유선을 태운 말은 뒤쪽에서 추격하는 희색 기마대에 의해 서서히 둘러쌓이고 있었다. * * * 덜컹. 병사의 문이 열렸다. 초조한 기색으로 소식을 기다리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방문으로 향했다. 상당한 기운을 소모했는지 초췌한 얼굴의 을지휘소가 걸어나왔다. "어, 어찌 되었느냐?" "성공한 것이냐?" "사, 사숙조께선 무사하십니까?"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질문은 그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방문 이 열리기를 기다렸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공했습니다." 을지휘소가 엷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잘됐구나. 정말 잘됐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을지소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들어가 보시지요. 눈을 뜨셨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병사 안으로 들어섰다. "신승!" 재빨리 병석으로 다가간 을지소문이 그의 손을 잡았다. 수호신승은 여전히 누워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의식은 회복이 되었는지 을지소문을 향한 눈가엔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다. "이 늙은이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신승?" "아미...타불! 어찌... 모르겠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이 없었던 환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또렷한 발음이었다. "을지 시주, 오랜만입니다." "허허허, 기억을 하고 계시는군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요." "아미타불! 백 년이 지났다 한들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궁귀 을지소문을." 살짝 웃는 노승의 눈가에 잔주름이 일었다. "궁주께서도 오셨구려." 수호신승이 을지소문의 뒤쪽에 있는 환야에게 아는 체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신승. 몸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궁주께서 주신 대환단 덕에 거뜬합니다. 소승이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순간, 환야의 안색이 살짝 붉어졌다. "은혜랄 것도 없지요. 어차피 소림의 물건이었으니까요." 과거 수호신승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 무림을 일통한 그녀 는 소림사에 대환단을 요구했었다. 당시 소림의 방장이었던 영오 대사는 대환단이 소림의 보물인 데다 가 남은 것도 단 하나뿐인지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하나 거절했 을 경우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여러 장로들의 반대 에도 불구하고 대환단을 건네주고 말았다. 사실 그 당시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무림을 떠나 을지소문을 따라 나서기로 결심한 그녀가 대환단을 탐낸 것은 오직 어린 을지휘소를 위 해서였다. 한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린 을지휘소는 애당초 대환단이 필요없을 만큼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상태였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고독(蠱毒)에 중독된 상태로 출산을 준비 하던 산모(産母)를 위해 소림사는 상당량의 소환단을 제공했다. 비록 대환단의 효과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소환단이 지닌 약효도 결코 무 시 못할 정도로 무궁무진했다. 또한 화산, 개방 등에서도 상당한 영약을 보내왔고 그의 증조부와 구양풍이 온갖 귀하디귀한 영약은 모조리 구해 복용시켰다. 그것들 무두가 산모가 무사히 고독을 이겨내고 출산에 이르도록 돕 기 위함이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영약의 기운은 뱃속에 있던 을지 휘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대환단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하면서 도 실로 엄청난 힘을. 아무튼 이후 을지호, 을지룡이 태어났지만 의술에 전념하고 있는 을 지소문으로 인해 그녀는 딱히 대환단을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해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관해 왔던 것이었고 때마침 수호신승 에게 복용시켰다. 결국 그녀의 말대로 원주인을 찾아간 것이었으니.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승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 고... 혹, 남궁 시주가 아니신지요?" 환야에게 거듭 감사를 전한 수호신승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 남궁혜 에게 시선을 주었다. "예, 신승. 남궁혜입니다." "아미타불! 하도 소문이 무성해도 걱정했었는데 소승의 생각이 맞았 군요. 이렇듯 건강히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남궁혜의 안색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더 이상 참지 못한 공양이 수호신 승을 불렀다. "사, 사숙조님!!" "공양이로구나." 수호신승이 엎드린 그를 향해 힘겹게 손을 뻗어 떨리는 등을 어루만 졌다. "사숙조님......" "의식 너머에서 네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이렇듯 목숨을 부 지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덕이로구나.' "아, 아니옵니다. 하지만 소림이... 소림이..." 간신히 고개를 쳐드는 그의 노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의 의미를 짐작한 수호신승이 달래듯 말했다. "이미 알고 있다 조사님들께 큰 죄를 지었구나. 참으로 감당키 힘 든 죄를 범했어." "그게 어디 신승의 잘못이란 말입니까?" 을지호가 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수호신승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소승의 불찰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이렇듯 큰 부상을 당하여 저들을 막지 못했으니 어찌 고개를 들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명색이 사천인가 뭔가 하는 곳의 우두머리라니까." "우두... 머리라면?" 을지휘소를 통해 대충 주변이 어떤 상황인지 전해 들었지만 아직 자 세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수호신승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듣자하니 신승과 양패구상을 한 녀석이 사천의 우두머리라고 하더 군요." 공양이 덧붙였다. "산동악가가 중천이었습니다. 지금껏 양의 탈을 쓰고 숨겨왔지만 결 국 마수(魔手)를 드러냈습니다." "아미타불! 악가가......" 수호신승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불호를 되뇌었다. 수백 년 동안 명문가로 이름을 날리던 악가가 아니던가. 그런 악가 가 감쪽같이 정체를 숨긴 중천이라니! 수호신승은 그제야 구파일방이 속절없이 쓰러져 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방장은 어찌하고 있느냐?" 긴 탄식을 내뱉은 수호신승이 물었다. "명종이 녹옥불장을 받았습니다. 방장 사제는 책임을 지고 물러난 후 달마동(達摩洞)에 칩거하는 줄로 압니다." "일이 그리 되었구나." 공양의 침울한 대답에 수호신승 역시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곧 끝날 것이니 너무 걱정마시구려." 을지소문이 수호신승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수호신승이 안심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군요. 제자들 걱정에 곁에 을지 시주가 계신 것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수호신승이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다들 만류하였지만 결국 공양의 도움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수호신 승이 을지소문과 환야를 응시하며 정중히 물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을지소문과 환야가 동시에 대답을 했다. "감사합니다. 부끄럽게도 소림과 소승은 두 분의 도움만 받게 되는 군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을지 가문 은 물론이고 저의 모든 인연 역시 소림에서 시작되었지요. 그런 소림 을 결코 놈들의 손아귀에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곧 놈들을 정리할 것 입니다." "인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참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아미타불! 소승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수호신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비로소 그가 과거에 천하제일인 으로 불리웠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수호신승이 살아났다는 기쁨에 겨워 정신이 없었던 공양. 지금껏 을지소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그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뜻은 고마운 일이나 지금의 인원으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입니다. 소림엔 지금 수백 명의 적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 인원을 어찌 감 당하려고 하시는지요." "허허, 다 방법이 있소이다. 스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신승을 잘 보살피고 계시구려." 을지소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구석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을지휘소를 불렀다. "멀었느냐?" "다 되었습니다." 눈을 뜬 그가 대답했다. "그럼 가자. 다녀오겠습니다, 신승." 수호신승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을지소문이 벌떡 일어나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공양만은 불안한 기색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려야 합니다, 사숙조님." 공양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한데 들려온 대답은 너무나 의 외였다. "괜찮다. 그냥 저들에게 맡겨두어라." "예?"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 아무리 그렇지만 수백의 적이......" "너는 저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공양이 머뭇거리자 수호신승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조금 전 듣지 않았느냐? 궁귀 을지소문." "궁...귀... 을지소문... 구, 궁귀!!" 그제야 궁귀라는 말이 지닌 의미를 파악한 공양의 얼굴에 경악이 떠 올랐다. 비록 무림과는 담을 쌓고 오직 약사전의 일에만 매달린 그라지만 궁 귀 을지소문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 그렇다면 그가?" "천하제일인이지." "아!" 공양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과연 누가 있어 수호신승에게서 천하제일이란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직 그뿐이었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옆에 있던 노부인의 내력도 만만치 않다." 공양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혈검 환야. 처음으로 무림을 일통했던 전전대 패천궁의 궁주이자 내게 처음으로 패배의 쓴맛을 안겨준 인물이다." 혈검 환야! 소림의 제자가 어찌 이 이름을 모를 것인가! "아, 아미타불!" 공양은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로 극한의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또 다른 부인은 검성의 후인으로 남궁세가의 사람이다. 그녀 역시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더구나. 하나 진정한 고수는 따로 있 었다. 그들 모두를 뛰어넘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궁귀와 혈검, 그리고 검성의 후인. 개개인의 능력으로 능히 천하를 오시할 만한 절대자들이었다. 한데 그들을 뛰어넘는 고수라니. "누, 누구이옵니까?" 공양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을지 시주의 아들이라고 했던가? 그래, 어렸을 적 그를 본 적이 있 다. 허허허, 훌륭하게 장성하였더구나." 평범하게만 보이는 을지휘소의 인상을 떠올린 공양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가 그리도 강합니까?" "암, 강하지, 강하고말고. 천하에 그 누가 있어 그를 상대할 것이 더냐? 단언컨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공양에겐 더 이상 놀랄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질린 표정으 로 그들이 떠난 문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 * * 눈처럼 하얀 백마(白馬). 백마보다 더욱 흰 의복의 사람들.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어 사막에 부는 백색 광풍, 일명 백풍이라 불 렀다. "후∼" 을지호는 어느새 도주로를 끊고 퇴로 역시 차단하고 있는 기마대를 살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무리였나?' 아무리 뛰어난 명마와 기마술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홀로 말을 달리 는 것과 두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더욱이 상대는 그러한 허점을 놓칠 리가 없는 기마술의 달인들. 애당초 사마 유선을 태우고 도주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삼시파천!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다." 새하얀 의복과 어울리지 않게 검은 수염이 턱을 뒤덮은 대주 탕평(湯 萍)이 앞으로 나오면 소리쳤다. "글쎄, 뭣 때문에 그리 날 만나고 싶어했을까 모르겠네. 난 남색(男 色)엔 그다지 취미가 없는데." "흐흐흐, 딴에는 그게 우스운 농담인 줄 아는구나." 탕평이 누런 이를 내보이며 웃자 이곳저곳에서 비웃음이 터져나왔 다. "그렇게 목매지 말고 웬만하면 다른 놈을 알아봐라." "죽일 놈 같으니. 농담 따위는 집어쳐라. 네놈 뒤꽁무니를 쫓느라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웃음을 멈춘 탕평이 진한 살기를 내뿜었다. 을지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시키지 않았다." 겉으로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였으나 내심은 그러지 못했다. [신호를 하면 우측으로 고삐를 당겨. 머뭇거리거나 멈추면 안 돼. 무조건 달려.] 사마유선에게 고삐를 전하며 은밀히 전음을 보낸 을지호는 동그랗 게 눈을 뜬 그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탕평에게 소리쳤다. "운치있는 밤이다. 괜히 피 보지 말고 그냥 길을 터라." 어이없다는 듯 탕평이 누런 가래침을 뱉었다. "운치? 웃기는 소리, 흐흐흐. 네놈에겐 곧 지옥 같은 밤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 그럼 한번 덤벼보든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발으 무영시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탕평 에게 날아갔다. 한껏 비웃음을 흘리던 탕평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졋다. 그는 을지호가 어째서 삼시파천이란 별호를 얻게 되었는지 익히 알 고 있었다. 더구나 조금 전엔 직접 보기까지 했다. 자칫 방심을 했다간 어떤 꼴이 되는지 충분히 인식하고 있던 그는 여인네의 아미처럼 멋들어지게 휘어진 반월도(半月刀)를 치켜세워 아 랫배를 향해 접근하는 무영시를 막아갔다. 꽝! 강렬한 격타음이 들리며 탕평의 몸이 약간 휘청거렸다. "음." 그의 입에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영시에 부상을 당하거나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니었 다. 다만 반월도를 타고 팔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무영시의 위력에 놀란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보다 배는 묵직한 느낌이었다. "제법이다.' 탕평은 애써 놀란 마음을 감추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이번 싸움 에서 많은 수하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건 내가 할 소린데.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만. 좋아, 그렇 다면 이것도 한번 막아봐라." "얼마든지." 이쯤 되면 기세 싸움이었다. 을지호가 또다시 시위를 당겼다. "쏴봐!!" 탕평도 지지 않고 가슴을 탕탕 쳤다. 한데 이번 목표는 그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전음성이 떨어지고 신호를 기다리던 사마유선이 힘껏 고삐를 당겼 다. 히히히힝! 울음소리와 함께 급히 방향을 튼 말이 우측으로 쏜살같이 달리기 시 작했다. "막아랏!"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눈치챈 탕평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핑핑. 그의 외침과 함께 공기를 가르는 시위 소리가 들리고 연속적으로 날 린 무영시가 길을 막고 있는 두 사내를 단숨에 쓰러뜨렸다. 백풍의 일원으로 제아무리 단련된 그들이었지만 형체도 없이 날아 드는, 그것도 한 번에 서너 발이 넘는 무영시를 막아낼 재주는 없었다. 을지호와 사마유선을 태운 말은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그들을 지나 쳐 단숨에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러나 백풍의 대응은 참으로 빠르고 신속했다. 재빨리 따라붙은 사내들이 원형으로 생긴 일월권(日月圈)을 꺼내 들 더니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 말의 옆구리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누였 다. 그리곤 을지호와 사마유선을 향해 한 쌍으로 이루어진 일월권을 힘껏 내던졌다. 파스스슷! 땅바닥을 스치듯 비행한 일월권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기괴 한 궤적을 그리며 쫓아가 말의 다리를 노렸다. 달리는 말의 속도를 간단히 따라잡고 맹렬히 접근하는 일월권을 보 며 을지호가 시위를 당겼다. 타탕! 두 개의 일월권이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하나 여전히 세 개의 일월 권이 쫓아오고 있었다. 연거푸 몇 발의 무영시를 더 쏘았다. 그러나 적중시키기가 쉽지 않 았다. 퍽퍽! 땅만 괜스레 움푹움푹 파였다. '어쩔 수 없지.' 무영시로 일월권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을지호가 몸을 날렸다. 그리곤 일월권을 향해 철궁을 휘둘렀다. 따땅.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낮게 깔려 날아오던 일월권이 하늘로 치솟 았다. 을지호의 철궁에 의해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오, 오라버니!"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사마유선이 고개를 돌리자 을지호가 버럭 소 리를 질렀다. "멈추지 마! 달려!"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는 조그만 돌멩이를 집어 말에게 던졌다. 쏜살같이 날아간 돌멩이는 말의 엉덩이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히히히힝! 깜짝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세우더니 이내 속도를 높였다. 놀란 말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제, 제발, 몀춰.' 사마유선은 필사적으로 말을 제어하려 했다. 고삐를 잡아채는 손등 에 심줄이 툭툭 튀어 올랐다. 분명 지금과 같은 일이 과거에도 있었다. 둘은 수많은 적에게 쫓기는 상황이었고 퇴로도 끊긴 상황이었다. 앞 에는 흉험한 기운을 내뿜는 일단의 무리들이, 그리고 뒤에는 엄청난 기 운을 내뿜는 노인들과 앞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적들이 있었다. 그 상 황에서 을지호는 홀로 적을 상대했다. 자신을 피신시킨 뒤 목숨을 걸 고 그 많은 적을 상대했다. 그때 함께하지 못했던 것을 얼마나 많이 후 회했던가.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번만큼은 홀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했다. 결심을 굳혔는지 그녀가 고비를 놓았다. 그리곤 안장에서 뛰어내리 고자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였다. [유선!]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자신도 모르게 고삐를 잡았다. [지난날 대파산의 일을 기억하고 있지? 그때도 지금과 같았어.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결과는 좋았잖아. 목숨을 구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 가지야. 함께 있다간 방해만 될 뿐. 나를 염려한다면 걱정하지 말고 먼저 피해 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라는 놈은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지는 꼴을 보지 못해. 나를 믿는다면 그렇게 해줘. 반드시 뒤쫓아갈 테니까.] 전음으로 전해지는 그의 음성이 다급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함께 있어도 싸움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자신... 있나요?"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을지호는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똑 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자신? 물론이야. 대파산에선 정말 최악이었지. 지금보다 훨씬 나쁜 상황이었어. 상처 입고 지칠 대로 지쳤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놈들의 목숨을 걱정해 주는 것이 좋을 거야. 난 강하거든. 놈들이 생 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 사마유선은 말에게 몸을 맡긴 채 고개를 돌려 을지호를 응시했다. 꽤나 먼 거리였지만 바로 곁에 있는 듯 둘은 서로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말대로 해.] 을지호가 그녀의 대답을 채근했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어요." [죽긴 왜 죽어.] "얼마 안 가 마을이 있다고 했죠? 입구에서 기다릴께요." 하지만 기마대에 둘러싸여 이미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을지호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입술을 꼬옥 깨문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애써 참은 눈물이 볼을 타 고 흘러내렸다. "그냥 보내도 되겠습니까?" 누군가가 탕평에게 물었다. "추격할까요?" "계집 따위를 잡아서 어디다 쓰게. 놔둬. 목표는 저놈이다." 탕평의 살기 어린 눈은 벌써 두 명의 부하를 쓰러뜨린 을지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일 대 사십의 싸움. 혹자는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힘은 들겠지만 운이 좋으면 이 길 수도 있겠지'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나 상대가 기마대라면 그따위 말을 내뱉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이다. 말 위에서 싸운다는 것에는 생각지도 못한 이점이 있었다. 우선 기마대를 상대하는 사람은 적의 모습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언제 어느 순간에 공격이 시작되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고 단순히 휘두르는 칼에도 평소보다 배는 감당하기 힘든 힘이 실렸다. 또한 무 섭게 돌진해 오는 말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말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우는 이는 그 모든 이점을 안고 싸울 수 있 을 터. 결국 평지에 땅을 딛고 서서 기마대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계 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을지호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해서 사마유선이 무사히 떠난 것 을 확인한 그가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은 말을 탈취하는 일이었다. 하지 만 그들은 을지호가 말 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가히 필사적으로 몸부림 쳤다. 행여나 말을 빼앗길 것 같으면 스스로,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 으면 그 옆의 동료가 먼저 말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그와 같은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자 을지호는 말을 빼앗는 것을 포 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목표를 바꿔 기마대원보다는 말을 집중적으 로 공격했다. 그 또한 쉽지는 않았다. 그는 호랑이도 주춤하게 만드는 출행랑의 살기를 견뎌내는 백마들 을 보며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의 머뭇거림이 있기는 하 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수많은 전장에서 광기에 찬 싸움을 견뎌온 기마들은 주인의 명에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을지호를 압박했다. 또한 눈 깜짝할 사이에 치고 빠지는 상황에서 말을 노리며 화살을 날리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선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을지호는 가히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차분하게 말을 제거해 나갔 다. 핑. 활시위가 튕겨지고 무영시가 허공을 갈랐다. 목표는 접근해 오는 말의 앞다리. 히히히히힝! 가만히 듣고 있어도 가슴이 아플 만큼 처절한 울림과 함께 목표가 된 말이 쓰러졌다. 마치 내려오지 못한 주인이 육중한 몸에 깔려 그대 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땅에 쓰러져 허우적거리는 말은 다리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허벅지 근처에서 흉측하게 잘려 나간 것이다. "윽!" 을지호의 입에서도 나직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짧은 사이에 칼 하나가 왼쪽 어깨를 베며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상당한 고통이 전해져 왔다. 상처를 준 상대는 이미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음 공격을 위해 선회를 하고 있었다. '제길, 끝이 없군.' 한참을 싸웠다. 출행랑을 이용해 공격받는 범위를 최대한 줄이며 수도 없이 많은 화 살을 날렸다. 얼마나 많은 말을 쓰러뜨리고 말 주인의 목숨을 빼앗았 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전후좌우 가릴 것 없이 밀려드는 공 격은 좀처럼 약해지지를 않았다. '절반은 없앤 것 같은데......' 적의 숫자를 파악할 여력도 없었다. 사실, 그것은 무의미했다. 또 다른 적이 거대한 포위먕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들군.' 숨이 가빠왔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견뎌야 했던 대파산에서의 싸움도 힘이 들었지만 기마대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는 비할 바가 아니 었다. 최상의 몸 상태로 싸움을 시작했으나 이내 파김치가 되고 말았 다. 무엇보다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공격을 막아내기가 힘들었다. 왼쪽인가 싶으면 어느새 오른쪽에서 공격이 들어왔고 오른쪽인가 싶어 막아가면 뒤쪽에서 칼이 날아들었다. 거기에 그들이 무차별적으로 던져 대는, 교묘하게 아군을 피해 접근 하는 일월권은 큰 골칫거리였다. 닥치는 대로 부순 것만 해도 수십 개 는 될 텐데 끊임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행여나 허공으로 몸을 띄울라 치면 무수히 많은 일월권이 함께 비상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친만큼 공격을 퍼붓고 있는 백풍도 지쳐 가고 있었 다. 특히 공격을 지휘하고 있는 탕평의 안색은 이미 굳을 대로 굳어 있 었다. 반시진에 걸친 싸움 끝에 목숨을 잃은 수하가 스물둘. 을지호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절반이 넘는 인원이 목 숨을 잃은 것이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쉽지 않은 싸움을 예상하기는 했어도 이토록 많은 피해를 입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만한 피해를 당하면서 상대에게 입힌 피해라고는 고 작 미미한 상처 몇 개뿐이었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더구나 흑풍이 보고 있었다. 고작 한 명 의 적을 상대하지 못하고 쩔절매느냐는 비아냥이 귓가에서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흑풍이 싸움에 끼어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죽인다! 반드시 죽이고 만다!' 탕평이 거친 콧김을 내뱉으며 말고삐를 단단히 말아 쥐었다. 그리고 을지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흠, 그만 말려야겠는걸." 백풍과 을지호의 싸움을 지켜보던 나렴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 다. 탕평과 대원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가만히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생 각보다 피해가 너무 컸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자칫 전멸을 당할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낭곡이 맞장구를 쳤다.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백풍이 약한 것은 아니나 저자를 상대하 기엔 역부족입니다." "맞는 말이야. 백풍의 특징이라면 전광석화와 같이 치고 빠지는 빠 름인데 저자는 백풍의 움직임을 능가할 정도로 빠르군. 공격은 더욱 치명적이고." "저런 자를 상대하려면 다소 느리긴 하더라도 이런 것이 필요하지 요." 그가 자신의 갑주를 두드리며 말했다. "더 늦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겠군." "언제든지 명만 내려주십시오." "좋아. 백풍에겐 뒤로 물러나라 하고 자네들이 나서게." "그리 하겠습니다. 명을 받은 낭곡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구를 썼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수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가자." 제52장 혈검(血劍) 환야(幻倻) 부스럭.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운(晶雲)이더냐?" 살며시 눈을 뜬 공선 대사가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공선 대사의 얼굴에 노기가 피어올랐다. 그를 수발하는 소사미 정운이 아니라면 근처에서 달마동을 감시하는 북천 의 무인들이라는 말이었다. "이곳은 그대들이 올 곳이 아니오. 물러가시오." "......"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러간 것도 아니었다. 인 기척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인가!" 앉은 채로 몸을 돌리며 소리치는 공선 대사. 그런데 달마동을 기웃거리고 있는 사람은 북천의 무인이 아니라 낯 선 노파였다. "흠, 달마동, 달마동 하기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가 싶더니 그것 도 아니로군." 약간은 실망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환야. 을지소문의 부탁으로 공선 대사를 만나러 온 그녀였다. "시주는 누구시오?" 공선 대사가 물었다. "네가 공선이냐?" 환야가 되물었다. 을지소문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환야의 말투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공선 대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노승이 공선이 맞소만 시주는 대체 누구시오? 북천의 무인이오?" 환야갸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외인이 함부로 드나드는 곳이 아니오. 더구나 인근에서 북 천의 무인들이 감시하고 있소. 행여 화를 당할까 걱정이니 빨리 떠나 시구려.' "아, 아까 그 녀석들이 이곳을 감시하는 놈들이었군." "그들을 보앗소?" 환야는 달마동을 오르는 자신의 발걸음을 막아서던 두 명의 청년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꽤나 버릇없는 놈들이었다. 하나 놈들은 걱정하지 마라. 푹 자고 있을 테니까." "어째서 그들을 건드렸단 말이오?" 공선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건드리면 어때서?" "그 화가 어디에 미칠지 생각이나 해보셨소? 어째서 쓸데없는 분란 을 만드는 것이오? 당장 돌아가시오." "놀고 있군." "말씀이 지나치지 않은가!" 무례한 언사를 참지 못한 공선 대사가 결국 노호성을 터뜨렸다. 그 러나 환야는 냉랭한 조소를 보낼 뿐이었다. "언제부터 소림이 이 모양 이 꼴로 변했나? 변변치 않은 적 따위에 게 본산을 빼앗기질 않나, 전대 방장이라는 자가 놈들의 비위를 맞추 기에 급급해하는 모습이라니!" 환야는 진정 화가 난 듯했다. 그 옛날 폭풍 같은 기세로 무림을 휩쓸던 구양풍의 발걸음을 막은 곳이 소림이었고 환야 역시 무림을 일통하기 위해서 소림을 넘어서야 했다. 수호신승과의 힘겨운 싸움을 승리로 이끌면서 결국 소림이라는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으나 이후 그녀의 마음속에는 소림에 대한 경외 심이 자리하게 되었고 그것은 을지소문에 못지 않았다. 그녀의 호통은 가히 추상과도 같았다. 일순 할 말을 잃은 공선 대사는 부끄러움에 잠시 안색을 붉혔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시주의 비난에 할 말은 없소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어쩔 수 없소이다. 그만 하시고....." 공선 대사는 다음 말을 이를 수가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환야가 그 의 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목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자존심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단 말 이냐? "......" "내가 아는 소림은 이렇지 않았다. 이렇게 나약하지 않았단 말이다." 당장에라도 목숨을 거둘 듯 살기 띤 얼굴로 공선 대사를 노려보던 환야는 나직한 한숨을 내뱉더니 목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곤 품 에서 조그만 종이를 꺼내 그의 얼굴에 뿌렸다. '독인가?' 공선 대사는 흑색 가루가 코며 입을 통해 체내로 들어오는 것을 느 끼며 눈을 감았다.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핀잔이 날아들었다.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운기나 해라.' 우당탕! 몸이 허공에 붕 든다는 것을 느꼈을 땐 이미 바닥에 내동댕이 처진 이후였다. 온몸으로 아픔이 밀려왔다. 하나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무, 무슨 뜻이오?" 달마동 한쪽 구석에 처박힌 공선 대사가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 "군자산의 해약이다. 독기를 몰아내고 빨리 무공을 회복해라." "무슨 뜻이냐고 물었소!" 공선 대사가 거듭 물었다. 비록 무공은 잃었지만 한때는 소림의 방장이라는 자리에 있던 사람 이었다. 정색을 하고 되묻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일대 종사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환야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품속에서 꺼낸 해독약을 건네며 말했다. "소림을 점령하고 있는 북천 놈들을 칠 생각이다. 이것으로 제자들 을 해독시켜라." "무리요. 적이 너무 많소이다. 부끄러운 말이나 소림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오." 해독약이라는 것을 얼떨결에 받기는 하였으나 공선 대사는 회의적 인 표정이었다. "갇혀 있는 나머지 포로들도 해독시킬 생각이다." "포로라야 고작 기십에 불과하오. 물론 그들의 무공이 탁월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래도 놈들을 칠 전력은 되지 못하오." "발뺌하려 해도 이미 늦었다. 말은 이미 달리기 시작했으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놈들을 치기 위해 이미 움직였다는 말이다. 약사전은 이미 우리 수 중에 들어왔어. 수호신승의 신원도 확보했고." 수호신승이란 말에 공선 대사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수호신승께선 아직 병석이오. 어찌하여 그분을 끌어들였단 말이오!" "깨어났다." 환야의 말에 공선 대사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지, 지금 뭐라 하셨소? 사, 사숙조께서, 수호신승께서 깨어나셨단 말이오?" 환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분께서......" 수호신승이 부활을 했다면 충분히 승산있는 싸움이었다. 더구나 북 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한빙곡은 무당으로 떠나지 않았던가. 소림 의 무승들과 나한당에 갇혀 있는 포로들이 무공을 회복하고 수호신승 이 이에 가세하면 열세인 것은 분명하나 자웅을 겨뤄볼 수는 있었다. "아미타불!! 그분께서 신위를 보이시면 싸워 볼만하이오이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한순간에 짓밟히고 말았다. "수호신승은 아직 무공을 회복하진 못했다. 지금은 의식만 되찾은 것이다. 과거의 무공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라. 내가 돕는다. 그리고... 우리가 돕는다." 실로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특히 우리 어쩌고 할 때 보여준 그녀의 표정에선 단순한 자신감을 넘어선 어떤 확신과도 같은 믿음이 드러났다. 불현듯 지금껏 눈앞에 있는 노파의 정체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한 공선 대사가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시주는 누구시오? 그리고 우리라면 혼자가 아니란 말이오?" "내 이름은 환야다. 그리고 우리라 함은 나의 가족. 소림사를 구하 기 위해 을지 가문이 나섰다는 말이다. 설마 을지 가문을 모르지는 않 겠지?" 공선 대사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빨리 제자들을 해독시켜." 그 말을 끝으로 환야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경악에 사로잡힌 공선 대사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혈검 환야... 궁귀 을지소문....." 그의 뇌리 속에서 수호신승을 쓰러뜨리던 과거 패천궁의 궁주 모습 이 떠올랐다. 그리고 천하를 질타하던 을지소문의 당당한 모습도. 공선 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그의 불호성은 그 어떤 때보다 힘차고 간절한 무엇인가가 담긴 채 달마동에 울려 퍼졌다. 지난 날, 사실상 무림의 운명을 결정했던 대황하 전투에서 패배해 북천의 포로로 잡힌 이들이 억류되어 있는 나한당. 비록 죄수들처럼 포박되어 신체를 구속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천하 가 좁다 하며 무림을 질타하던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들에게 오직 나 한당 내에서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은 창살 없는 감옥에 서 생활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우∼" 자정이 훨씬 넘은 늦은 시각, 잠을 청하지 못했는지 누군가의 입에 서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곳저곳에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쯧쯧, 한숨만 내쉰다고 해결되는 것이 있겠소이까? 마음만 상하지." 한창 장기에 열중이던 단견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남이야 어떻든 신경 쓰지 말고 그저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시구려." 종남파의 장문인 오상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니지 않소." "누가 뭐라 했소? 만사태평하게 하던 일, 그냥 두던 장기나 두란 말 이오." 오상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단견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말 다하셨소?" 단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러자 마주 앉아 있던 곽검명이 재빨리 손짓을 했다. "그만 하게." "하지만 형님!" "그만 하래도." 곽검명이 고개를 흔들며 거듭 만류했다. "젠장." 단견이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 주정앉자 곽검명이 오상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 장문인도 그만 하시지요." 오상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단견과 곽검명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지켜보다간 큰일 나겠다 싶었는지 멀리서 경서를 뒤적이던 봉학경이 황급히 다가와 오상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 것도 없네." 오상은 봉학경의 소매를 뿌리치며 몸을 돌렸다. 참다못한 단견이 발끈하여 소리치려 했으나 살짝 고개를 숙여 미안 함을 내보이는 봉학경의 태도에 간신히 화를 누그러뜨렸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인간입니다.' 단견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들며 말했다. "쉿,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까짓 들으라지요. 겁날 게 뭐가 있습니까?" 단견이 매서운 눈초리로 오상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목소 리가 나직한 것을 보니 그 역시 괜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 는 듯했다. "후∼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듯하네. 잠도 제대 로 못 자는 것 같고. 마치 잘 벼려진 칼날 같아. 하긴, 이곳에 갇혀 지낸 지가 벌써 백 일이 훨씬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참, 바깥은 어찌 돌아간다던가? 더 이상 들어온 소식은 없나?" "글쎄요. 철혈마단을 돕기 위해 북천의 주력이 무당산으로 이동했다 는 것을 제외하곤 별다른 소식은 없는 것 같던데요." 단견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패천궁은?" "그쪽도 꽤나 고전하는 모양입니다. 남천의 위세가 장난이 아니라 니, 중천도 압박하는 것 같고요." "우리가 악가에 배반당한 것처럼 패천궁 역시 만독문에 뒤통수 맞은 것이 치명적이었어." 결정적인 순간에 배반을 당한 그때를 잊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악가의 가주이자 중천의 우두머리인 악위군에게 형 곽화월이 목숨을 잃어서 그런 것인지 악가를 언급하는 그의 눈빛에선 감당키 힘든 살기 가 뻗어 나왔다. "특히 만독문이 자랑하는 괴물 있잖아요?" "괴물? 뭐 말인가?" 곽검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독혈인 말입니다. 패천궁에서 그 괴물들을 감당하지 못해 애를 먹 는다더군요." "하긴, 독혈인이라면 애를 먹을 만도 하지. 정말 지독한 괴물들이었 어." 그 옛날 독혈인의 무서움을 톡톡히 맛보았던 곽검명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면 그 괴물들을 갖고 놀았던 소문 형님은 참 대단했습니 다. 아마 만독문이 만들어낸 독혈인의 대부분이 소문 형님에 의해 박 살이 났을 걸요?" "그랬지. 정말 대단했어. 후∼ 무심한 친구 같으니. 어찌 그렇게 소 식을 끊고 사는지." 곽검명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 번쯤은 연락을 해볼 만도 한데요. 우리가 요 모양 요 꼴로 잡혀 있는 것도 모르고." 단견 역시 침울한 표정이었다. "손자가 이곳에 있고 사천과 싸우고 있으니 언젠가는 우리 소식도 전해 듣겠지. 자, 그 얘기는 그만 하고 두던 것이나 마저 두고 잠자리 에 드세나. 다른 사람들 자는데 방해하지 말고." "그러지요." 그래도 침울한 마음을 감추지는 못하겠는지 애써 장기판으로 고개 를 돌리는 둘의 안색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좌우에서 마주 보고 있는 나한당의 두 개의 출입구 중 왼쪽 출입구 가 은밀히 열렸다. 미리 잠을 청한 사람은 물론이고 깨어 있는 사람도 미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소리없이 열린 문을 통해 낯선 인영(人影)이 들어섰다. 상당히 왜소한 몸을 지닌 그는 극도로 조심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낯선 출입자의 방문을 눈치채고 있었다. "누구냐?" 크지도, 그렇다고 아예 듣지도 못할 정도로 작지도 않은 음성이 그 를 불러 세웠다. 자신의 존재가 발각되었다고 판단한 방문객이 잠시 움찔하는가 싶 더니 곧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와 음성의 주인, 두귀 이성진의 마혈 을 단숨에 제압했다. '이거야, 원.'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제어당한 상태라지만 그것은 단지 내공이 흩어진 것 일 뿐 몸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내공을 일으키기 않고 반응을 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는 있었다. 하나 이처럼 아무 것도 못해보고 어이없게 제압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대로 반응을 해보기도 전에 마혈을 제압당한 이성진은 뻣뻣이 굳 어버린 몸과는 달리 원활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의 마혈 을 제압한 상대를 살폈다. 그사이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챈 곽검명 등과 그렇잖아도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성진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누구냐?" 잔뜩 긴장한 음성으로 곽검명이 물었다. 그러자 이성진의 뒤에서 몸 을 숨기고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잖아?" 오상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조심하십시오. 누가 어린아이라는 겁니까?" 발끈해 소리치는 인영은 다름 아닌 을지룡이었다. "어리니까 어리다고 하는 것이지, 어름보고 어리다고 하겠느냐? 아 무튼 넌 누구냐? 누구기에 이곳에 침입한 것이냐?" "흥, 침입은 무슨... 누가 들으면 주인이라고 하겠습니다." "네, 네놈이!" 당돌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 오상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그러나 그의 반응을 간단히 무시한 을지룡이 처음부터 주의 깊게 살 폈던 단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단견 할아버지 아니세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오상의 반응에 내심 조소를 보내던 단견은 뜻 밖의 질문에 다소 놀란 듯했다. "그래, 내가 단견이 맞는다만... 그러는 너는 누구냐?" 그는 일자면식도 없는 상대가 자신을 아는 것이 못내 궁금하다는 표 정이었다. 을지룡은 대답 대신 품에서 군자산의 해독약을 꺼냈다. "군자산의 해약입니다. 다들 독을 해독하시고 무공을 회복하십시오." "군자산의 해약?" "그렇습니다." "하면 이곳을 탈출하라는 말이더냐?" 질문을 던진 단견은 을지룡이 대꾸하기도 전에 고개를 흔들었다. "목숨을 걸고 우리를 구하러 온 네 행동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나 우 리는 그럴 수가 없구나." "그, 그게......" 자신의 의도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고 느낀 을지룡이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단견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까짓 군자산 때문에 우리가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 면 이런 곳은 언제든지 탈출할 수가 있다. 하나 그렇게 끝날 일이 아니 지. 우리가 움직이면 소림이 다친다." "누가 탈출을 한다고 했습니까? 소림을 탈환하자는 것입니다." 순간, 단견은 물론이고 모든 이들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공연한 객기로 될 일이 아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거라. 네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 도 말하지 않았구나. 그래, 너는 어느 문하의 누구더냐?" 단견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구하러 온 을지룡의 모습에 무척이나 감동한 모습이었다. '미치겠네.' 촌각의 시간도 아까웠던 을지룡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러나 처음부터 정체를 밝혔다면 이토록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을 것. 그저 빨리 해약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에 이름도 말하지 않고 서두르기 만 한 것은 틀림없는 그의 불찰이었다. "을지룡이라고 합니다." "을지룡?"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단견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을지룡이 빠르게 덧붙였다. "저는 할아버지의 명을 받고 작은 할머니와 함께 어르신들을 해독하 러 왔습니다. 할머니는 이곳을 지키는 놈들을 감시하고 계시지요. 참, 지금쯤이면 소림사의 스님들도 대부분 해독을 했을 것입니다. 곧 대대 적으로 싸움도 벌어질 겁니다. 그러니 빨리 무공을 회복하세요."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 단견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혹시... 동방에서 왔느냐?" 짐작된 바가 있는지 곽검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예." "그리고 네 형의 이름은 을지...호겠지?" 을지룡의 고개가 크게 흔들렸다. "아!" 곽검명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 다. "왔...구나!" 환야에겐 공선 대사와 소림을, 남궁혜와 을지룡에겐 나한당의 포로 들을 맡긴 을지소문과 을지휘소는 북천의 본거지로 쓰이는 지객원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각 위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밤이 깊어 이제는 새벽이라 해도 좋을 시간이건만 지객원은 대낮처 럼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무슨 회의들을 하는 모양입니다." "우리들 때문에 그렇겠지. 그래도 이건 생각도 못한 일인걸.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모여서 저러고 있을 줄이야. 아무튼 이리되면 힘들겠 지?" "예. 우두머리가 모두 모인 자립니다. 더구나 주변을 지키는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아쉽구나. 오랜만에 장백 늙은이의 얼굴이나 보려고 했는데 말이 야." 을지소문은 오랜 친우를 눈앞에서 보지 못한다는 듯 안타까운 기색 을 보였다. 그런 부친을 보며 을지휘소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하셨을까요?' 그는 부친이 어떤 의도로 장백선옹을 만나려고 하는지 익히 알고 있 었다. 대저 큰 싸움에서 우두머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인 것. 부친은 아마도 장백선옹을 먼저 굴복시켜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을 것 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도 부친을 따라나서지 않았던가. 그러나 인원 이 너무 많았다. "돌아가시지요." "그래, 지금은 일단 물러나야겠다." 한데 아쉬운 마음을 접고 전각에서 내려오기 위해 몸을 조금씩 뒤로 물릴 때였다. 삐이이익! 난데없는 경적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에 놀란 그들이 다시금 전각 위로 올라가고 난 후 그들은 소림사의 내원 쪽에서 지객원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는 몇몇 사내들을 볼 수 있었다. "벌써 움직였단 말인가? 이쪽에서 먼저 치기로 하였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빠릅니다." "하면?" "들킨 것 같습니다." 을지휘소가 단정하듯 말했다. "쯧쯧, 조심들 하지 않고." 한순간에 계획이 틀어졌다는 생각 때문인지 을지소문의 얼굴이 찌푸 려졌다. "안 되겠다. 네가 큰 어미에게 가보거라. 난 이곳의 동태를 조금 더 살피다 룡이에게 가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을지휘소가 복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발각된 일. 애써 몸을 숨기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전각 사이를 넘나드는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편, 장백선옹의 주재로 긴급 회의를 열고 있던 지객원도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소림의 무승들이 움직였단 말이냐?" 장백선옹이 내원에서 달려온 사내에게 달려들며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장백선옹의 곁에 자리하고 있던 반포가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소 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놈들은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 군자산에 중독된 놈들이 무슨 힘으로 싸움을 걸어?" 지객원 천장을 털썩털썩 울리는 목청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라는 듯 사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그것이......" "꿀이라도 쳐 먹었느냐? 왜 말을 못해!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어찌 된 일이야!" 사내의 태도가 답답했는지 반포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더욱 목 청을 키웠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말을 해라.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 봐." 장백선옹이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반포를 만류하여 물 었다. "독을... 군자산을 해독한 것 같습니다." 반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군자산을 해독해? 어떻게?" "그, 그것은... 잘......" 진땀을 흘리며 대답하던 사내가 다시 말을 얼버무렸다. "얼마나 움직였느냐?" 장백선옹이 다시 물었다. "이, 일단 확인된 인원만 오십이 넘습니다. 그 수가 계속해서 늘어 나고 있습니다.' "오십이라... 그리고 계속 늘어난다?" "그렇습니다." "결국 소림이 감추었던 발톱을 드러낸 모양이군. 현원 문주." "예, 선옹." 천권문의 헌원후가 천천히 다가오며 대답했다. "내원엔 몇 명이나 배치되었나?" "육십 정도 될 겁니다." "작심하고 덤비는 상황이네. 그 정도로는 턱도 없이 부족해. 천권문 이 나서줘야겠네." "그러지요." 헌원후는 대답과 동시에 자리를 떠났다. 장백선옹의 고개가 반포에게 돌려졌다. "자네는 지금 즉시 나한당으로 가보게." "나한당은 어째서요? 그쪽은 별일 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장백선옹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가 않아. 단독으로 우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다른 누구 보다 소림이 잘 알아. 모르긴 몰라도 나한당의 포로들과 교감이 있었 을 것일세. 어쩌면 이미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자네가 가서 그들을 막아주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군자산이 아니라 아예 단전을 박살 내버 릴 것을 그랬습니다. 중천처럼 말입니다." 지난날, 대황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은 어림잡아 백여 명이 넘었다. 그중에서 약 사십여 명은 북천에, 나머지 인원은 중천에서 사 로잡았는데 이후 북천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포로들 중 핵심적인 인물 들 이십여 명을 나한당에 구금하고 무공이 약하거나 어린 제자들은 모 두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그에 반해 중천은 육십이 넘는 모든 포로들을 싸움이 끝난 후 그 자 리에서 풀어주었다. 다만 군자산을 이용해 잠시 내공을 억제한 북천과 는 달리 모조리 단전을 파괴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다음에. 무인에게 있어 단전이란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단전이 파괴당한 이들 중 상당수는 치욕과 수치심에 그 자리에서 목 숨을 끊어버렸다. 그 피가 스며들어 황하를 붉게 물들였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당시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반포는 바로 그때의 일을 거론한 것이었다. 순간, 장백선옹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깊에 파였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 싸움에서 이기면 된 것이지 자존심까지 밟 을 필요는 없네.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것은 무인된 사람으로서 할 도 리가 아니지." '도리는 무슨 얼어죽을.'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 마음에 전혀 와 닿지 않는 소리였으나 반포 는 대놓고 반발하지 않았다. 그저 늙은이의 잔소리라는 생각에 한 귀 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뿐이었다. "아무튼 빨리 가보게.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네. 절대로 그들 을 움직이게 해서는 안 돼." "맡겨주시지요. 한데 죽여도 됩니까?" "그리하게." 장백선옹은 그 자리에서 허락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실수였 다. 그가 허락한 것은 나한당의 포로들이 움직였을 경우 죽여도 된다고 말한 것이지만 반포는 그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참살해도 되겠냐는 뜻 으로 물은 것이었다. 반포가 말한 의도를 알았다면 당연히 거부했을 것이나 순간적으로 착각을 해버린 장백선옹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엉뚱한 명령을 내리고 만 것이다. "흐흐흐. 그럼 사냥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반포는 진하디진한 살소를 흘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나머지 사람들도 황급히 지객원을 떠났다. 남은 사 람은 장백선옹과 그를 보필하는 대장로 이정과 이장로 도일곤 등 장백 파의 수뇌들뿐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하네." "뭐가 말입니까?" 이정이 물었다.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드는군." "그리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소림은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원도 얼마 되지 않고요. 행여 나한당 의 포로들과 함께 움직인다 하여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한당의 포로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들일세. 그리고 독도문의 조장이 만났다는 그 고수들, 어쩌면 을지......" "예?" 이정의 물음에 장백선옹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닐세. 이번 일에 혹여 그자들이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야." 그러자 이장로 도일곤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나한당의 포로들 중 두귀 이성진을 비롯하여 진짜 고수라 부를 만 한 인물은 채 다섯 손가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고수는 우 리 쪽에도 얼마든지 있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일세." "방심이 아니라 자신감입니다." 이정과 도일곤이 동시에 대답했다. 하나 장백선옹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으련만......' "후∼" 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한당의 주변을 감시하던 이들이 나한당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요 란한 경적 소리가 울리고 뭔가 사단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이 었다. 그러나 가장 앞서 달려온 사내는 문에 손을 대기도 전 손목이 잘려 나가는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나한당에 을지룡을 은밀히 침투시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들 을 살피고 있던 남궁혜가 손을 쓴 것이었다. 그것으로 내원에 이어 나 한당에서도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중요성만큼이나 나한당을 지키는 인원은 많았다. 밤을 세워가며 지키는 인원만 열둘이요, 잠을 청하러 갔다가 황급히 뛰어나온 인원도 삼십이 넘었다. 그리고 그 몇 배에 달하는 인원이 순식간에 충원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한 남궁혜는 손속에 추호의 인정도 두지 않 았다. 북천의 노고수들이 나오지 않는 한 이미 과거 검성의 무위를 뛰어넘 은 그녀의 검에 버텨낼 자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악!" 단말마의 비명성이 터졌다. 몸에서 분리된 머리가 차디찬 바닥을 굴렀다. 베어 넘긴 자에게서 붉은 피가 튀었지만 남궁혜는 눈 하나 깜짝 하 지 않았다. 삽시간에 일곱의 인원이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 가거나 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나한당을 지키는 것이 었고 그것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본진에서도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상 조금만 참고 있으면 곧 지원군이 올 터.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그들의 의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공격을 막지 못한 이들이 날 카로운 칼날 아래 한 줌 고혼이 되어갔으나 도망가는 사람은 단 한 명 도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은 인원이 계속 충원되었다. "나한당으로!"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누군가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몇몇 이들이 남궁혜의 검을 피해 좌측으로 우회를 하더니 나한당으 로 뛰어들었다. "으아악!" 그들의 모습이 나한당으로 사라지자마자 묵직한 격타음이 들리고 비명성이 터졌다. 우지직! 남궁혜를 피해 나한당으로 들어서는 데는 성공했지만 을지룡의 발길 질을 감당하지 못한 한 사내가 나한당의 창문을 부수며 그 파편들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동료들의 비명이 뒤따랐다. "아직 멀었느냐?" 계속 충원되는 인원에 다소 부담을 느낀 남궁혜가 을지룡에게 물었 다. 한데 대답은 을지룡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해독을 하고 운기조식을 끝 낸 이성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끝났소."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본 남궁혜가 재빨 리 검을 거두고 물러나더니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누구... 신지?" 이성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남궁혜입니다, 선배." "남궁...혜...아!" 그제야 희미하나마 과거 그녀의 모습을 기억해 낸 이성진이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이거야 원. 세월의 힘이라니. 그때 그 아리따운 아가씨가 이 렇듯 변했군." "선배님은 옛날 모습 그대로군요." "허허, 어째 욕으로 들리는군, 그래." 그래도 싫지는 않은 듯 미소를 짓는 이성진. 그 순간, 둘의 주변을 에워싼 북천의 무인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꺼져랏!" 한기가 서릴 정도로 차갑게 내뱉은 이성진이 주먹을 뻗자 빈틈이라 여기고 공격했던 사내의 몸이 무려 오 장이나 날아가 처박혔다. 동시 에 몸을 띄운 그의 발이 허공을 수놓았다. 퍼퍼퍼퍽! "크아아아!" 둔탁한 격타음과 함께 다섯 명의 사내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탄 성이 나올 만큼 빠르고 강맹한 발길질을 피하지 못하여 모두 목이 돌 아갈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나한당을 지키는 북천의 무인으로 오인받아 을지룡에게 마혈을 짚 이는 창피를 당한 그였으나 단 두 번의 움직임으로 여섯의 사내를 절 명시킨 이성진의 무위는 과연 투귀라는 명성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 다. 짝짝짝! 갑자기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고개가 돌아가고 이성진은 박수를 치 며 천천히 걸어오는 탁탑천왕 반포를 볼 수 있었다. "늙은이! 대단한 실력이다." 장백선옹의 명을 받고 지객원으로 달려온 반포의 눈에서 호승심과 더불어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뒤로 흑룡문의 장로와 호법들, 그리고 지난날 소림과의 치열 한 싸움에서 살아남은 흑면살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을 보며 남궁혜와 이성진의 얼굴이 동시 에 굳어졌다. [다른 사람은 아직인가요?] [아마도 그럴 걸세. 나야 속성으로 운기를 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 이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하지. 내공을 되찾으려면 조금 더 시간 이 필요할 게야.] [어쩌지요? 우리 둘로는 역부족인데.] [뭐, 어떻게든 막아봐야지. 일단 안쪽으로 접근하는 적은 꼬맹이에 게 맡기기로 하고.] [제가 저자를 맡지요.] 마지막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이성진의 시선이 남궁혜에게 향했다. 자신있냐는 눈빛에 남궁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리하지.] 어찌 보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이미 은연중 그녀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던 이성진은 두말하지 않고 허락을 하였다. "더 기다려야 하는냐? 도대체 언제까지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릴 생 각이냐?" 둘이 전음을 주고받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반포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한 발 앞으로 나선 남궁혜가 조 용히 대꾸했다. "기다릴 필요 없어요. 제가 상대를 해주지요." 반포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것이냐? 늙은 계집 따위는 필요없다. 늙은이 네가 덤벼라!" 그러나 이성진은 단 한 마디로 그의 말을 일축했다. "살아남으면 싸워주마." "사, 살아남으면? 느, 늙은이가 가, 감히!" 말을 더듬을 정도로 화가 치민 반포는 그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재빠른 동작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성진에게 접근도 하기 전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았던 남궁혜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뻗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고수다!' 반포는 서늘해진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남궁혜를 찬찬히 살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만 같은 늙고 가녀린 몸에서 어찌 그런 기운 이 뿜어져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쳐라!" "와아아아!!" 명이 떨어지고 뒤에 있던 흑룡문도들이 이성진과 나한당을 목표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나 남궁혜의 상대는 오직 반포뿐이라는 듯 단 한 명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둘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반포였다. "타핫!" 양손에 한껏 기운을 끌어 모은 반포가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천왕 팔권 중 오직 공격만을 추구한다는 철권 저양촉번(저羊觸藩)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초식이 다 전개되지도 않았는데 권풍에 휘말린 남궁혜의 옷이 요란 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단순히 검을 치켜세우는 것만으로 반포를 물러 나게 만들어던 남궁혜는 상대의 공세가 코앞에 이를 때까지 조금의 미 동도 없었다. 번쩍! 마침내 그녀의 검이 움직였다. 힘에는 힘으로 상대해 주겠다는 듯 그녀가 펼치는 무공은 조부가 남긴 제왕검법이었다. 꽝! 허공에서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며 어마어마한 굉음을 만들 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저양촉본이란 초식으로 공격을 시작한 반포는 기선을 놓치지 않겠 다는 양 미친 듯이 주먹을 뻗었다. 일권 견마곡격(肩摩穀擊)에서 칠권 저양촉번까지. 반포는 천왕팔권의 마지막 초식을 제외한 나머지 초식들을 단 한 번 의 호흡으로 쏟아내더니 이것을 다시 역으로 펼쳤다. 숨 쉴 틈도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공격. 초식에 초식이 겹쳐졌다. 앞선 공격과 이어지는 뒤의 공격이 하나가 되어 감당하기 힘든 거력 을 만들어냈다. 주먹질 한 번에 나한당의 기왓장이 날아가고, 주먹질 두 번에 기둥 이 흔들렸다. 주먹질 세 번에 땅거죽이 뒤집히고 주먹질 네 번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토록 거세고 강맹한 그의 공격도 남궁혜를 어쩌지는 못했 다. 때로는 제왕검법의 강력한 힘으로 부딪치기도 하고 때로는 더할 나 위 없이 유한 답청검법으로 폭풍처럼 몰아쳐 오는 공세를 무위로 돌려 버리는 그녀. 하지만 이따금씩 하는 반격은 상대로 하여금 기겁을 하 게 만들 정도로 날카로웠다. 여유롭기만 한 남궁혜에 비해 반포의 몸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 나둘 상처가 늘어만 갔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천왕팔권의 마지막 초식 비폭광류(飛瀑狂流)마저 완벽하게 무위로 돌아가자 반포 는 더 이상 혼자 싸울 의지를 잃고 말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반포가 무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남궁혜를 쳐 다봤다. 호흡이 다소 가쁘고 이마에 땀이 맺혀 있을 뿐 지친 기색은 전혀 보 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옷이 찢어져 있었으나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 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싸움을 해왔으나 지금처럼 초라하다고 느낀 적 은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함, 참담한 패배감이 밀려들었다. 차라리 통쾌하게 싸우고 패배를 했다면 이토록 비참하지 는 않을 것이다. "크악!" 반포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저 아래에서부터 끓어오 르는 분노를 풀지 못해 기혈이 역류한 것이다. "문주님!" 초조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장로들이 황급히 반포의 곁으로 다가오며 그를 부축했다. "비켜랏!" 반포가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핏발선 눈, 얼굴은 물론이고 가슴까지 적신 붉은 피. 보기만 해도 몸소리가 처질 정도였다. "네년, 가만두지 않겠다.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죽여버리겠단 말이 다!!" 남궁혜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는 반포. 이미 그녀는 여러 장로들에게 둘러싸여 합공을 당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쐐애액! 일순간 모든 싸움을 멈추게 만들 정도로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고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날아온 무엇인가가 반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 갔다. 남궁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던 반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 성을 잃은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본능 은 살아 있을지 몰라도 의식은 그렇지 못했다. "컥!" 반포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지고 그는 자신의 몸이 왜 기우는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런 그의 양쪽 허벅지엔 화살이 깊게 박혀 있었다. 그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지객원을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이 들려 왔다. 아마도 화살의 주인이리라.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 감히 누구를 죽이겠다는 거야?"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나로 모아졌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화살 하나를 빙글빙글 돌리며 접근하는 노인. 궁귀 을지소문이었다. 제53장 소림탈환(少林奪還) 을지소문이 단 두 발의 화살로 반포를 무너뜨리며 나한당 앞에서 벌 어진 싸움은 사실상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포에게 처절한 패배감을 안긴 남궁혜도 건재했고 물밀 듯이 밀려 오는 공격을 막아내느라 많이 지치고 부상도 당했지만 투귀 이성진의 신들린 움직임 또한 여전히 계속됐다. 게다가 군자산을 해독하고 무공을 회복한 나한당의 포로들이 속속 싸움에 참여하면서 그들을 막기 위해 움직인 흑룡문의 무인들은 전의 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반포를 대신해서 문도들을 지휘하던 노장로의 전격적인 퇴각 명령에 흑룡문은 나한당을 버리고 본진이 있는 지객원으로 황급히 물 러났다. 그들이 떠나간 뒤에 남겨진 것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무기들과 나한 당을 지키던 무인들, 그리고 지원을 온 흑룡문도의 인원을 합쳐 거의 육십에 이르는 시신뿐이었다. "끝났군." 이성진은 핏물이 줄줄 흐르는 칼을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아직은 아닙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그에게 다가온 을지소문이 환한 웃음을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선배." "오랜만일세. 자네가 왔다는 소식은 꼬맹이를 통해 이미 들었네. 무 척이나 당돌한 아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서진 창문을 통해 뛰쳐나온 을지룡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소리쳤다. "꼬맹이 아니라니까요!" "허허, 이거야 원. 알았다. 취소하마."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과한 이성진이 을지소문에게 고개를 돌렸다. "불같은 성격은 꼭 자네를 닮았군."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 생각엔 저보다는 오히려 제 할머니를 많이 닮은......" 을지소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이 그를 향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형님." 단견이 달려와 그의 손을 잡았다. "단견, 자네로군." 손으로는 부족했는지 힘차게 포옹을 하는 을지소문. "나도 있네." 단견의 뒤에 서 있는 곽검명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를 불렀다. "검명 형님." 단견과의 짧은 포옹을 끝낸 을지소문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의제 을시소문, 의형을 뵙습니다." "반갑네. 정말 반가워." 곽검명의 떨리는 손이 을지소문의 어깨를 힘껏 움켜쥐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 속엔 오랜 그리움, 무한한 믿음과 신뢰, 그리 고 깊은 정이 담겨 있었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이란 세월의 터울 따위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곽검명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큰아이를 통해 그간 소식은 듣고 있었네." 을지소문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녀석을 만났습니까?" "암, 만났지. 거침없는 말투며 자신만만한 태도, 그리고 엄청난 실 력까지, 자네와 아주 판박이더군. 옛날의 자네를 보는 것 같아서 어찌 나 반갑던지......" "거침없는 말투에 자시만만한 태도라... 허허, 녀석이 어찌하고 돌 아다녔는지 알 만합니다." 을지소문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끼어든 단견이 퉁명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무하십니다, 형님." "뭐가 말인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은 했지만 을지소문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어찌 연락 한 번 없었습니까?" "그러는 자네는 어찌 연락이 없었나?" 을지소문이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예?" "그토록 연락을 기다렸으면 내 연락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네가 먼저 연락을 했으면 될 것 아닌가? 그 많은 수하들 두고 뭘 했을까나?" "그, 그게... 그러니까....." 대답이 궁색했는지 단견은 뭐라 대꾸를 못하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다 그런 것이네. 어찌어찌하다 보니 이만큼 시간이 흐른 것이지. 뭐, 그러면 또 어떤가? 내 마음속엔 언제나 자네와 형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데." 을지소문이 단견의 어깨를 살며시 짚어갔다. "눈으로 보고 못 보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보네. 그저 서로를 잊지 않고 그 존재를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 돼." 을지소문이 그 정도까지 자신들을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는 듯 눈시울을 붉힌 단견은 애써 무안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툴툴거렸다. "젠장, 말 하나는 언제나 번지르르 하다니까. 그래도 너무한 건 너 무한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왔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그렇지. 그것이면 된 걸세. 죽기 전에 한 번만 만나봤으면 했는데 그 소원도 풀었고 또 이렇듯 절묘한 시기에 나타나 도와주니 더 바랄 것이 없네그려. 그건 그렇고 너무 우리만 생각했군. 자네에게 소개해 줄 사람도 많은데." 곽검명은 자꾸 옆구리를 찌르는 투랑을 우선적으로 소개했다. "말년에 얻은 손자일세." "신걸입니다.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궁귀 할아버지를 뵙게 되어 무 한한 영광입니다." 투랑이 공손히 허리를 꺾으며 말했다. "인석아, 네 본모습을 보여라. 언제 그렇게 예의가 발랐다고. 겉모 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게나. 이놈도 보통 괴물이 아니야." 단견이 싱긍싱글 웃으며 농을 걸었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투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봐라, 저 잡아먹을 듯한 눈이며 싸가지없는 말투." "할아버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두른 곽검명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 다. "이 녀석 별호가 투랑이라네. 자네도 조심하게나. 언제 비무를 하자 고 덤빌지 모르니." "허허허, 녀석도 아무하고나 비무하자고 덤빕니까? 형님을 닮은 모 양이군요. 그래, 몇 살이냐?" "열여덟입니다." "그럼 룡이와 동갑이구나. 친하게 지내도록 하여라." 을지소문이 남궁혜 곁에 서 있는 을지룡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설마요. 저런 꼬맹이하고." 평소의 말투였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실수였다. 유난히 어리게 보이는 얼굴 때문에 늘 나이 얘기만 나오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을지룡의 귀에 그의 음성은 천둥보다도 커다랗게 들려왔 다. 꼬맹이란 말에 이성진에게도 대들던 그가 그대로 참고 넘길 리가 없었다. 투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온 그가 쏘아붙였다. "한 번만 더 꼬맹이라 부르면 땅바닥을 기어다닐 줄 알아!" 난데없는 행동에 투랑은 물론이고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 단견만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크하하하! 이놈, 이제야 제대로 임자를 만났구나. 땅바닥을 기는 꼴을 보면 아주 볼 만하겠다." 투랑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흥, 누가 기게 될지는 나중에 보면 알겠지요!"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딱! "아이고야!" 동시에 머리를 붙잡고 괴성을 지르는 그들. 갑자기 벌어진 긴장된 상황은 곽검명과 을지소문이 동시에 휘두른 주먹에 머리를 맞은 투랑과 을지룡이 샐쭉한 표정으로 물러나며 일단 락되었다. 잠깐의 소란이 끝나고 곽검명의 소개는 계속되었다. 과거의 인연으로 소개가 필요없는 사람도 몇 되었으나 대부분은 모 르는 사람이었다. 그들 모두 존장들로부터 궁귀의 명성을 귀가 따갑게 들었던 터. 저마다 몸가짐을 바로하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 였다. "화산의 장문인과 화산... 이수네." "화산의 후배들이 선배님을 뵙습니다." 곽화월의 뒤를 이어 장문 자리에 오른 유현과 곽온이 목숨을 잃어 이제는 화산삼수라는 이름을 버릴 수밖에 없는 곽열과 신강생이 동시 에 인사를 했다. "반갑소이다." 곽화월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내색 하지 않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었다. 시간이 흐르고 봉학경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서로에 대 한 인사는 금방 끝이 났다. 오직 한가로이 떨어져 힐끗힐끗 시선을 던지던 오상만이 남았을 뿐 이었다. 청년 시절, 을지소문과 나름대로 많은 인연을 쌓았다고 생각한 그는 곽검명이 머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큼 다가와 살짝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갑소이다. 종남의 오상이오." "을지소문입니다." 마주 포권을 하며 인사하는 을지소문. 한데 그의 얼굴은 인사를 나 누는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구... 신지?" 순간, 오상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진 감자처럼 팍 상해 버렸다. '이자가!' 사제인 봉학경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덜떨어진 위인들 몇도 기 억하고 있었다. 한데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일부러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진짜 기억을 못하는 것인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종남을 맡고 있는 오상이외다, 오상!" 애써 화를 억누른 오상이 다시 소개를 했다. "아, 종남파의 장문이셨구려. 불초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해를 해주시지요. 귀향한 이후 무림과는 담을 쌓고 지내서 저간에 대 한 사정이 어둡습니다." 을지소문은 다소 과장된 태도를 취하며 사과를 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한 단견이 곽검명에게 전음을 보냈 다. [아예 경극배우로 나서도 되겠습니다. 오 장문인을 단숨에 바보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래.] 둘은 이미 을지소문이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긴, 소문 형님이 종남과는 맺힌 게 조금 있지요.] 오상이 당하는 게 고소해 죽겠다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조금 심한걸. 오 장문인을 보게. 폭발 일보 직전이야.] 그러나 곽검명의 염려처럼은 되지 않았다. 모욕감에 부들부들 떨던 오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려는 순 간, 을지소문이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제가 어찌 오 장문인을 모르겠습니까? 장 문인, 그동안 별래무양(別來無恙) 하셨습니까? 아무튼 이렇듯 늠름한 모습을 뵈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오상은 싸늘한 시선으로 을지소문을 노려보았다. 이것은 또 무슨 수작인가? 병 주고 약 주자는 수작이 아니던가! 그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을지소문은 거듭 사과를 했다.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잠시 장난을 친 것이니 노여움을 푸시지 요." 웃는 낯에 어찌 침을 뱉을 것인가? "기억하고 있다니 고맙소. 아무튼 우리를 구하러 와주었다니 고맙소 이다." 그러나 인사를 하는 오상의 떨떠름한 표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 * * 경건하고 고즈넉해야 할 산사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리고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 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대웅전(大雄殿)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는 싸움은 어느 한쪽이 우위 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팽팽했다. 소림의 무승은 약 칠십 명이었고 북천은 거의 두 배가 넘는 인원으 로 이들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북천은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 는 무승들의 용맹을 압도하지는 못하였다. "막아랏!" "물러서지 마라! 조금만 버티면 된다!" 정신없이 움직이며 제자들을 독려하는 공선 대사. 본인의 것인지, 아니면 쓰러뜨린 적의 것인지 구분이 안 가는 피로 인해 그의 회색 가사는 이미 붉게 물들어 원래의 색을 잃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러고도 너희들이 천권 문의 제자란 말이냐! 공격해라! 소림을 피로 물들여라!" 장백선옹의 명을 받고 무승들을 제압하기 위해 나선 헌원후도 핏대 를 세워가며 소리를 질렀다. "소림은 예전의 소림이 아니다! 한낱 몰락한 문파에 불과하다! 이참 에 그 존재를 지워 버려라!" 사실이 그랬다. 지금의 소림은 과거 화려했던 시절에 비하면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형편없이 전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북천의 주력과의 싸움, 그리고 대황하의 싸움에서 핵심 고수라 할 수 있는 금강당과 나한당의 고수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남아 있 는 이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서른이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보리원의 몇 몇 노승들과 변변한 실력을 지니지 못했거나 제대로 무공을 익히지 않 은 어린 제자들뿐이었다. 한데 그 정도의 전력으로도 소림은 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훌륭히 싸우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북천 내에서 천권문의 지위를 격상시키려던 헌원후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초조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망신이 있나? 이제 곧 있으면 흑룡문이나 장백파의 무인들이 올 것인데.' 그들에게 고작 얼마 되지 않는 적을 상대로 전전긍긍하는 한심한 꼴 을 보일 생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제길, 저들만 빠지지 않았어도." 헌원후가 대웅전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싸움을 봄 이를 갈았다. 사실 처음 그가 수하들을 이끌고 내원에 당도했을 때까지만 하더라 도 손쉬운 승리를 장담했었다. 보리원의 고승들과 일 대 일, 더러는 합공을 하면서 대등한 싸움을 하는 천권문의 장로, 호법들을 보며 자신의 생각에 더욱 확신을 굳힐 수 있었다. 노승들의 움직임만 묶을 수 있다면 나머지 인원이야 쪽수 로 몰아붙이면 그만이었다. 바로 그때, 난데없는 사내의 등장은 그의 계획을 여지없이 박살 내 버렸다. '정말 난데없이 나타났지.' 갑자기 나타나 결정적인 위기에 빠진 보리원주 공청을 구해내는 것 도 모자라 그를 공격했던 두 호법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중년인. 이후, 그의 활약은 경탄을 넘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물론 당하는 입 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지만. 헌원후의 명을 받은 몇몇 호법이 그를 막고자 나섰으나 한두 명의 합공으로는 그의 발걸음을 막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를 막지 못하면 싸움에서 패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 잡힌 헌원후는 보리원과 금강당의 잔존 고수들을 상대하던 모든 장로 들과 호법들에게 그를 합공하라 명령했다. 열세 명의 장로와 호법들은 천권문의 모든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하나같이 엄청난 무공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누가 보더라도 상 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승리는 고 사하고 벌써 다섯에 이르는 인원이 쓰러진 것을 보면 오히려 밀리는 듯했다. 만약 다른 이를 통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들었다면 코웃음을 치고 말 일이었으나 눈앞에서, 그것도 자신에게 닥친 일이었다. "도대체 누구냐? 저 괴물 같은 놈은 누구냔 말이다!!" 말도 되지 않는 싸움을 지켜보던 헌원후가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하 고 괴성을 질렀다. 예상치도 못한 대답은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을지휘소. 괴물은 아니지만 괴물같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 "누구냐!" 기겁을 한 헌원후가 황급히 몸을 틀며 소리쳤다. 혹여 공격이 있을까 좌우로 몸을 흔들며 자리에서 벗어난 그는 태연 스레 서 있는 한 노파를 볼 수 있었다. 지금껏 싸움에 관여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만 보던 환야였다. "네가 우두머리냐?" 그녀의 물음에 헌원후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뿐이었다. 비록 천하제일을 꿈꿀 정도는 아니나 나름대로 상당한 무공을 지녔 다고 자부하던 그는 환야의 출현을 알지 못했다는 것, 그것도 바로 곁 으로 다가올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 스스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암습이라도 당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누구시오?" 한참 만에 입을 연 그가 물었다. 극도로 긴장을 했는지 꽉 쥔 주먹 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환야." 이미 오십여 년 전 무림을 떠났던 이름이었다. 무림에서도 어느 정 도 나이 든 고수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이름을 헌원후가 알 리 없었다. 헌원후가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애쓰는 사이 환야가 발밑에 굴러다니는 검 하나를 주워 들었다. "헉!" 헌원후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으며 몇 걸음 물러났다. 그 녀가 검을 쥔 순간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살기가 밀려왔기 때문이었 다. "최선을 다해라." 나직한 한마디. 검을 쥐지 않은 그녀와 검을 쥔 그녀는 기도에서부터 차이가 있었 다. 싸우지 않으면 모를까 싸우기로 결정한 이상 그녀는 이미 과거의 패천궁 궁주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검을 든 자세 하나만으로도 가히 폭풍과도 같은 기세가 사위를 압도 하며 뻗어나갔다. "음!" 헌원후의 입에서 탄성과도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껏 환야와 같은 기도를 보인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북천의 천 주 위지요뿐이었다. 다시 말해 눈앞의 상대는 최소한 위지요에 버금 가는 고수라는 소리였다. '설마 하니 그 정도의 고수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위지요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과거엔 중천의 천주가 제일 강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위지요야말로 나머지 삼천의 천주를 제압하고 당당하게 천하제일인으 로 추앙받을 수 있는 고수라 믿었다. "천주에 대한 모욕이다!" 뜻 모를 소리를 외치며 그의 몸이 앞으로 치고 나오고 만근거석이 라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큼 위력적인 주먹이 허공을 갈랐 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환야를 공격할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 것인지 그는 위지요와 흑룡문주 반포가 극찬에 마지않았던 파황뇌전권(破荒雷電拳)의 절초로 환야를 공격했다. 일순간에 수백, 수천의 주먹이 허공을 수놓았다. 어느 것이 실초이고 허초인지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완 벽에 가까운 공격. 드드드드. 몸이 흔들릴 정도로 지축이 흔들리고 헌원후의 주먹에서 이는 거대 한 풍압에 흙이며 돌멩이며 가릴 것 없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대단하군.' 환야는 헌원후가 그 정도 경지까지 이를 줄을 몰랐다는 듯 다소 의 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 어릴 적부터 권왕 응천수의 무위를 직접 보고 겪었던 그녀가 아니던가. 애당초 그 정도의 무공에 놀랄 리 가 없었다. '진실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 환야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냉정한 눈빛으로 눈앞까지 다가온 권 영(拳影)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극도로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침내 허 초에 몸을 숨긴 실초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검이 움직였다. 순간, 헌원후가 만들어낸 권영을 능가하는 엄청난 검기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검기의 홍수란 이런 것을 말함인가!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처음 공격과 연계되어 삽시간에 천지를 뒤덮어 버리는 검기의 바다. 그리고 검기의 파도와 환영 속에서 이어지는 그녀의 마지막 공격 천 검파천(天劍破天)은 그녀 앞에 펼쳐졌던 모든 권영을 산산조각 내버리 면서 헌원후에게 짓쳐 들었다. '이, 이런 무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미증유의 거력이었다. 헌원후는 직감적으로 최후를 예감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 었다. "으아아아!" 마지막으로 내지르는 주먹엔 그의 혼이 담겨져 있었다. 꽈꽈꽈꽈꽝!! 엄청난 굉음과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 충격파를 견디지 못한 대웅전의 한쪽 기둥에 균열이 갔다. 수백 년을 버텨오던 기둥이 그러할진대 그 안에서 사람이 무사할 리 없었 다. 온몸으로 환야의 공격을 받아낸 헌원후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 하고 날아갔다. 끊어진 연과 같이 힘없이 날아가는 헌원후의 몸을 때마침 달려오던 장백선옹이 재빨리 받아 안았다. "문주, 헌원문주." 장백선옹이 다급히 불렀으나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감긴 눈 은 떠지지 않았다. "제발 정신을 차리게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피를 지혈하고 기를 불어넣기를 얼마간, 굳게 감겼던 헌원후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정신이 드는가?"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몸을 돌리고 있는 환야를 가리켰다. 그것이 복수를 부탁하는 것이라 여긴 장백선옹이 그의 손을 꼭 잡 았다. "알았네. 내 반드시 자네의 복수를 해주겠네." 그러나 헌원후는 고개를 흔들었다. "싸... 우면....." 입술을 뚫고 나오는 음성이 너무나도 희미해 장백선옹이 그의 입으 로 재빨리 귀를 가져갔다. "저... 절대... 고수.. 싸..우지 말...고... 도, 도..망을... 오직 처...천주만이...." 최후의 기력을 짜내 더듬더듬 몇 마디 말을 남긴 헌원후는 결국 숨 을 거두고 말았다. 장백선옹은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부릅뜬 눈을 감겨주고 도저히 믿 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환야를 살폈다. 헌원후가 누구던가! 흑룡문주 반포와 더불어 천권문에서 가장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한 데 그가 최후로 남긴 말이 고작 상대하지 말고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오직 천주만이 상대할 수 있다면서.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건만 그는 똑똑히 보았다. 부릅뜬 그의 눈에 어린 극한의 공포를.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죽어가면서까지 공포를 감추지 못한단 말인가.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기에.'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가 본 것이라곤 오직 쓰러지는 헌원후의 모습일 뿐,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을 환야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무용지물(無用之物)로 만들 어 버리고 나아가 그의 몸을 완벽하게 부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 었다. '용서할 수 없다.' 장백선옹의 몸에서 활화산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뭣들 하느냐! 쳐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백에 육박하는 무인이 공격을 시 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소림사의 무승들은 천하를 뒤덮을 듯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적을 보며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나한당을 탈출한 포로들도 곧 몰려올 것일세. 준비를 하게." 이미 패퇴한 흑룡문도들의 보고를 받고 나한당에 갇혀 있던 포로들 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장백선옹이 여타 수뇌들을 보며 말했다. "대장로." 그의 부름에 장백파의 대장로 이정이 다가왔다. "자네는 나와 함께 움직이세." 헌원후의 죽음을 보기 전이라면 모를까 그의 처참한 시신을 본 이정 은 환야의 강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합공을 하자는 장백선옹의 말에 이정은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 였다. 헌원후에 비해 장백선옹이 강하다지만 그렇듯 무참한 지경까지 이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장백선옹이 환야를 향해 검을 빼 들며 말했다. "각오하랏!" 바로 그때였다. 쐐애액! 그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깜짝 놀란 이정이 소리를 치려는 순간, 장백선옹은 자신의 면전으로 날아오는 물체를 침착하게 낚아챘다. 그의 손에 잡힌 물체는 다름 아닌 화살이었다. "윽!" 화살에 담긴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화살을 낚아챈 장백선옹은 손 을 통해 전해오는 힘을 해소하기 위해 서너 걸음이나 뒷걸음질쳐야 했다. '무, 무슨 놈의 화살이......'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인상을 찡그린 장백선옹이 낚 아챈 화살을 살폈다. 그토록 위력적인 힘을 지녔던 화살이라곤 보기 힘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화살이었다. '서, 설마?' 화살을 집어던지며 그의 뇌리에 생각하기도 싫은, 머리 속 저 너머 에 애써 묻어놓은 기억의 편린(片鱗)이 번적 스치고 지나갔다. 장백선옹은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람은 한가로이 걸어오는 노인에 의해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장백 늙은이, 오랜만일세." 나한당을 탈출한 이들의 앞에 서서 보무도 당당히 걸어오는 사람은 당연히 을지소문이었다. "을..지..소..문!" 지옥의 악귀를 본다면 이럴까? 을지소문을 노려보는 장백선옹의 얼굴을 무참히 일그러졌다. 한데 그런 반응은 비단 장백선옹만이 아니었다. 대장로 이정, 이장 로 도일곤을 비롯하여 장백파의 수뇌들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제자들 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더러는 땅에 주저앉아 덜덜 떠는 이들도 있었다. "쯧쯧, 뭘 그리 놀라나? 다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안 그런가, 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을지소문이 무릎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 도일곤이라고 했지. 장백파의 장로. 그나저나 다리는 다 나 았나? 꽤나 고생을 했을 텐데." "으으으." 도일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어느새 지난날 겪었던 악몽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 년 전, 장백산 북쪽 자락에서 중원 정벌을 위해 은밀히 힘을 기 르던 장백파에 세 명의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장백파의 제자들이 약초꾼들이 캔 약초들을 자꾸만 강탈해 간다면서 이에 대한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며 문주와의 면담 을 요청했었다. 내심 그러한 일을 벌인 제자들을 엄히 다스리겠다고 마음을 먹었으 나 자존심 때문인지 장백선옹은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 렸다. 문제는 장백선옹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찾아온 불청객이 막연히 소 문으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가문의 인물들, 을지소문과 을지휘소, 을지 호 삼대(三代)라는 것을 모르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가장 먼저 을지소문과 손속을 나누었던 도일곤이 양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도일곤과 몇 몇 장로들도 최소한 서 너 달은 치료를 요해야 할 만큼 중상을 입었다. 특히 을지휘소와 일 대 앨로 맞섰던 장백선옹은 평생 씻지 못할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후, 을지소문은 인근 약초꾼들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만 들려오 면 인편을 통해 경고장을 보냈다. 마치 연례 행사처럼 날아드는 경고 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장백파는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더러는 그를 찾아가 공격을 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 었으나 그가 중원무림을 진동시켰던 궁귀 을지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와 같은 마음은 조용히 접고 말았다. 이후, 장백파의 무인들은 을지가문의 '을'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 킬 정도였다. '하필이면 이들이......' 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그야말로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을지 선배, 우리와 싸울 생각이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장백선옹이 물었다.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싸우고 안 싸우고는 장백 늙... 장백선 옹 자네의 몫이야." 명색이 한 문파의 문주였다. 나름대로 체면은 살려줘야겠다고 생각 한 을지소문이 호칭을 바꿨다. "이번 일은 선배가 나설 일이 아니지 않소? 이는 중원무림과 사천 의 싸움이오." 장백선옹은 어떻게든 을지소문을 싸움에서 배제하고 싶은 모양이었 다. "흠,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하나 아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야. 우선 소림은 나완 무척이나 인연이 깊은 곳이라네. 아니, 우리 가문 과 인연이 깊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겠군. 또한 자네들이 포로로 가둔 사람들 중에는 나와 의형제를 맺은 분들이 계시지. 내 어찌 이들 의 위험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 그래도 그분들에게 무례하지 않고 제대로 예우를 해주었다니 고마운 마음이 드는군. 해서 그냥 물 러간다면 이전의 일은 추궁하지 않을 생각일세." 이전의 일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소리에 공선 대사를 비롯하여 소림 제자들의 낯빛이 변했으나 그들은 딱히 뭐라 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백 명도 되지 않은 인원이오. 반면에 이쪽은 삼백이 넘는 인원, 너 무 자신만만한 것 같소이다." 을지소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왜?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원한다면 그리해 보게 나. 대신 후회는 하지 말고." "음." 장백선옹은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신음성을 막지 못하고 얼굴 을 굳혔다. 어찌해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싸우자니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았고 그냥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허 락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에게 소림을 맡기고 간 천주를 대할 면목도 없었다. "선옹, 도대체 뭐가 두려워서 망설이는 겝니까? 저따위 늙은이는 제가 책임지고 황천으로 보내 버리겠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장백선옹의 태도를 이 해할 수 없었던 포태청(浦太淸)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는 북천을 구성하는 스물세 개의 문파 중 열아홉 번째 정도의 규모를 지닌 천일 문(天一門)의 문주였다. "모르고 있으면 그냥 가만히 있게나. 자네는 궁귀에 대한 소문도 듣 지 못했는가?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어차피 옛날 명성입니다." '후∼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부럽군.' 장백선옹은 을지소문을 앞에 두고 그토록 호기를 부릴 수 있는 포태 청의 기백이 부럽기까지 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그만입니다.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포태청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앞으로 치고 나왔다. "문주!" 깜짝 놀란 이정이 그를 말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백선옹이 그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놔두게. 내가 왜 이렇듯 고민을 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지. 저들은 아직 궁귀의 무서움을 몰라. 겪어보면 알겠지.] 순간, 이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사이 을지소문에게 접근한 포태청이 신중히 검을 들었다. 자신만만하게 나서기는 하였으나 궁귀라는 명성도 명성이었고 장백 선옹 정도의 인물이 두려움에 떨 정도면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상대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을지소문이 아니었다. 느긋 한 태도로 시위를 당기려는 그의 손을 잡아 뒤로 물리며 포태청을 향 해 다짜고짜 공격을 펼친 사람은 환야였다. 잔뜩 긴장했던 포태청이 어이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할망구 따위를 상대하려는 것이....." 하지만 그는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자신이 어떠한 실수를 했는 지 여실히 느껴야만 했다. 천권문의 문주를 불귀의 객으로 만든 환야가 아니던가. 그렇잖아도 매서운 손속이 할망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매섭다 못해 끔찍할 정도로 무서워졌다. 꽝! "크악!" 고통의 비명성과 함께 포태청의 몸이 휘청거렸다. 얼떨결에 공격을 막아내기는 하였으나 단 한 번의 충돌로 그는 치명 적인 내상을 입고 말았다. 때마침 손속에 인정을 두라는 을지소문의 외침이 없었다면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문주님!" 걱정스런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던 천일문의 고수들이 황급히 달려 왔다. 일부는 포태청을 보호하고 일부는 환야를 공격했다. "죽어랏!"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세 명의 노고수를 보며 환야의 입가에 싸늘 한 미소가 지어졌다. 밝으려고 작심하면 확실히 밟아버려야 했다. 어설프게 밟았다간 언 제든 다시 기어오르게 마련인 법. 그녀는 이참에 단순히 인원이 많다 는 것이 전력의 우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연속적으로 파검 삼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크헉!" "컥!" 첫 번째 초식에 달려들었던 노고수들이 피를 토하고, 두 번째 초식 에 무기가 박살나 버렸다. 그리고 세 번째 초식, 헌원후를 쓰러뜨린 천검파천에 그들 역시 변변한 대항을 하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다. 을지소문이 뭐라고 외쳤으나 단단히 마음을 먹은 그녀는 손속에 조 금의 인정도 두지 않았다. 어찌나 위력이 강했는지 사오 장이나 날아 가 처박히는 그들의 시신은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 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상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을지소문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버렸고 각 파의 수뇌들은 그제야 장백선옹이 어째서 그리도 결단을 미루고 머뭇거리며 망설였는지를 이해했다. 그들은 물론이고 나한당에서 벗어난 이들도 왜 혈검 환야의 명성이 궁귀에 버금가는지 비로소 알겠다는 표정이었 다. 장내에는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질식할 것만 같은 긴장감만 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장백 늙은이라고 했나? 나는 환야하고 한다. 덤빌 테면 덤비고 그 렇지 않다면 어물쩡거리지 말고 꺼져라. 난 누구처럼 인내심이 깊지 못해." "......" 참으로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러나 장백선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 할머니." 남궁혜의 곁에서 환야를 지켜보던 을지룡이 남궁혜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큰할머니께서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집에 계실 땐 형님 표현대로 다소 괴팍하기는 하셨지만 웃음이 많으셨는데...." "괴팍?" "형님 표현을 빌리자면요." "무서운 모양이구나." 남궁혜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냥 집을 떠나온 이후 너무 갑자기 변하시는 것 같아서... 말투도 완전히 남자처럼 변하신 것 같고요." "잠시 무인으로 돌아가신 것뿐이야. 너희들의 할머니가 아니라 과거 무림을 좌지우지했던 무인으로 말이야. 무림이라는 곳은 비정하기 그 지없어서 냉정하지 않으면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거든. 변하신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그래도 환야를 살피는 을지룡의 안색은 조금도 환해지지 않았다. 다 만 남궁혜의 말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는지 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살며시 흘러나왔다. 을지룡과 남궁혜가 말을 나누는 사이 장백선옹도 각 문파의 수뇌들 에게 전음성을 보내고 있었다. [다들 보았는가? 내가 어찌 이리 머뭇거리고 있는지.] 다들 대다을 하지 못했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난... 소림을 포기했으면 하네.] 곧바로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하나 소림을 포기하면 우리의 근거지가 사라지게 됩니다. 자칫하다 간 하남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싸움은 무공이 뛰어난 한두 사 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수적으로 압도하고 있는 우리 들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아니.] 장백선옹은 단호히 부정했다. [한두 사람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수도 있네. 그만한 능력이 저들에 겐 충분히 있어.] [하지만......] [짐승들을 예로 들어볼까? 아무리 많은 토끼들이 있다고 해도 토끼 가 호랑이 한 마리와 싸워 이길 수는 없네.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야. 호랑이의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도 토끼들은 힘없이 죽어나 가지. 반면에 토끼는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 힐 수가 없다네. 한마디로 절대고수에게 숫자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일세.] 장백선옹의 전음은 계속 이어졌다. [다만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늑대들이라면 사정이 다르겠지. 비록 일 대 일의 싸움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일 대 십, 혹은 일 대 이십이 면 능히 호랑이를 쓰러뜨릴 수도 있네.] [호랑이는 없을지 모르나 우리에게도 늑대는 충분히 많습니다. 호랑 이 한두 마리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네. 한두 마리가 아니야. 저쪽을 보게나.] 장백선옹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의 시선이 대웅전에서 서북방으로 삼십여 장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고개를 돌린 그들은 을지휘소와 천권문의 노고수들이 벌이는 싸움 을 볼 수 있었다. 움직이고 있는 천권문의 고수라야 고작 두 명. 치열 하게 전개되었던 싸움은 을지휘소의 승리로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치열한 싸움을 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가지고 논 것처럼 보이네. 저자가 바로 을지휘소. 그는 부친보다 더 강하네.] 그것으론 설명이 부족했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그에게 십 초를 버티지 못했다네.] 모두들 믿지 못하겠다는 듯 경악에 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런 반응을 애써 무시한 장백선옹이 말을 이어갔다. [저들 부자와 환야라는 노파를 상대하려면 나와 자네들을 비롯하여 최소한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합공을 해야 하네. 물론 승부를 장담할 수도 없지. 어쩌면 그 정도로도 부족할 지 모르겠고. 문제는 그들 말 고도 저들에겐 투귀 이성진과 같은 고수가 남아 있다는 것이네. 주광 단견이나 곽검명 또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고수들이지. 흑룡문주를 쓰러뜨렸던 봉학경이라는 자는 어떤가? 과연 누가 있어 그들을 상대하 겠는가? 부족하네. 인원은 많을지 모르나 우리 쪽엔 저들을 상대할 만 한 절대고수가 부족하단 말일세.]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이에 아무도 토를 다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삼 할이 되지 않는다 고 보네. 해서 난 싸움을 포기할까 하네. 무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네. 까짓, 우리들만이라면 무엇이 두렵겠나? 명예롭 게 죽는 것도 무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복이라 할 수 있으니. 하나 그 렇다고 애꿎은 수하들의 목숨까지 담보로 해서 모험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수하들의 목숨까지 담보로 싸울 수는 없다는 장백선옹의 말에 동의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스스슷! 그들 바로 앞으로 한줄기 검기가 훑고 지나갔다. "적은 눈앞에 두고 도대체 언제까지 쑥덕거리고 있을 생각이냐? 난 인내심이 깊다고 하지 않았다." 싸늘히 내뱉은 그녀가 싸움을 끝내고 천천히 걸어오는 을지휘소를 불렀다. "아범아!" "예, 어머니."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냐? 이번에도 그렇게 사정 봐가면서 싸우다간 소림의 피해가 커질 것이다. 손속에 인정을 두지 말거라." 사실 을지휘소가 마음만 독하게 먹었다면 끝나도 아까 끝났을 싸움 이었다. 다만 목숨을 빼앗고 싶지 않은 생각에 다소 여유롭게 싸운 것 이 지금까지 싸움을 끌게 된 원인이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너라." 검을 곧추세운 그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을지휘소가 곧 보 조를 맞추었다. 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을지휘소 의 주변을 휘감고 도는 기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흠, 어쩔 수 없지." 짧게 한숨을 내쉰 을지소문도 궁을 들었다. 그리고 화살도 없는 시 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장백선옹이 입을 연 것은 환야와 을지휘소의 공격이 막 시작될 찰 나, 그리고 을지소문이 무영시를 날리기 바로 직전이었다. "물러나겠소." "응? 지금 뭐라 했는가?" 똑똑히 들었음에도 다시 한 번 묻는 을지소문. 장백선옹이 침울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물러나겠다고 했소. 하니 공격을 멈춰주시오." "암, 멈춰야지. 멈춰야 하고말고." 훌쩍 몸을 띄운 을지소문이 환야와 을지휘소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러난다는데?" "늦었어요." 환야가 싸늘하게 소리쳤다. "한번 봐줍시다. 딴에는 고민 꽤나 한 듯한데." "그렇게 하시지요. 구태여 피를 볼 필요는 없잖습니까?" 을지휘소도 거들고 나섰다. 환야는 별다른 대꾸없이 북천의 진영을 살폈다. 두 눈을 지그시 내려깔고 노려보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 는 사람은 장백선옹을 비롯하여 몇 명 되지 않았다. "꺼져라." 환야는 단 한 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상대의 기분이 어떨지 전 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장백선옹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몸을 떨었 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생사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끝난 일이었다. "퇴각...하라." 참으로 하기 힘든 말이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잘 생각했네." 여러 말을 건네는 것이 항복을 한 상대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을지소문도 간단히 한마디하고는 몸을 돌렸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북천의 무인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주검을 재 빨리 수습하더니 순식간에 내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얼마 되지 않아 소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으로 싸움은 끝이났다. 북천의 손아귀에 들어가던 소림도 다시 원주인을 찾았다. 소림이 북천의 전격적인 기습으로 점령을 당한 지 정확히 백 일 하 고도 이십칠 일이 지난 새벽녘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54장 일거양득(一擧兩得) "이만 물러나라는 명이네." '제길, 결국은.' 낭곡의 말에 무리하게 공격을 하다 큰 부상을 당한 탕평은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네들의 복수는 나와 우리 흑풍이 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당한 만큼 돌려주겠네." "......" 탕평이 불편한 표정으로 낭곡을 노려보았다. 비록 백풍이 흑풍에 비해 전체적인 전력에서 아래에 있는 것은 사실 이었으나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주 때문이지 개개 인의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온 그로서는 낭곡의 말 한 마디 한마디가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탕평은 시꺼멓게 타 들어가는 가슴 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지켜보던 낭곡의 시선이 백풍을 대신해 어느새 을지호를 포위하고 있는 수하들에게로 향했다. "공격해!" 하지만 그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을지호의 무영시가 먼저 날 아들었다. 땅! 경쾌한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의당 뒤따라야 할 비명 성이 터지지 않았다. '이럴 수가!' 무영시를 맞고도 멀쩡하게 고삐를 틀어쥐는 사내를 보며 을지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핑! 좀 더 힘을 실은 무영시가 다시 한 번 사내를 향했다. 사내는 피하 지 않았다. 아니,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의 가슴에 무영시가 적중했다. 땅!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망치로 쇳덩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리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크게 휘청거리기는 했으나 그는 곧 자세 를 바로잡고 더욱 단단히 고삐를 쥐었다. "크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낭곡은 주변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에겐 그따위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낭곡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는 자신과 수하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주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무게의 금값과 맞먹는다는 곤오철(崑烏鐵)을 천 일 동안 제련 하여 만든 갑주는 도검이 불침하는 것은 물론이고 웬만한 검기에는 흠 집조차 남지 않았다. 이를 악문 을지호가 다시금 시위를 당겼다. 한데 기세부터가 달랐다. 그의 몸이 삽시간에 불꽃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엔 활활 타오르는 화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룡지회 때 팽가의 가주에게 보여주었던 화염시였다. '대단하다.' 낭곡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 들었다. 그의 불안은 적중했다. 시위를 떠난 불화살은 절대로 뚫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곤오철의 갑 주를 뚫고 들어가 사내의 심장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가슴에서 일 기 시작한 불길은 삽시간에 그의 몸으로 퍼져 나갔다. "크아아악!" 말 위에서 떨어지는 사내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성이 터져 나 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곤오철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순간, 낭곡을 비롯하여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한 줌 잿더미로 변해 버리는 동료와 을지호를 번갈아 응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화염시 하나로 적의 비웃으을 단숨에 잠재워 버린 을지호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내공 소모가 너무 심해.' 그랬다. 비록 성공은 했으나 그들 모두를 화염시로 상대하기엔 분 명 무리가 있었다. 반도 쓰러뜨리기 전에 그가 먼저 지쳐 쓰러질 것 이었다. 거기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계속된 싸움으로 인 해 약해져 버린 활시위가 마침내 화염시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낭곡이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하하하하, 이거야 원. 이빨이 없으니 이제는 잇몸으로 싸워야겠 구나." '잇몸이라.......' 낭곡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을지호는 천천히 일 자로 펴지는 철궁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그리고 휘어졌던 철궁이 완전히 펴지는 순간 번 개같이 움직였다. "그럼 어디 한번 상대해 봐!" 파스스슷!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 같은 철궁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 와 낭곡을 노렸다. "뭐, 뭐냐?" 기겁을 한 낭곡이 황급히 창을 휘두르며 밀려드는 기운에 대응했다. 꽝! 두 기운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요라스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히히히힝! 깜짝 놀란 말이 뒷걸음질을 치고 애마(愛馬)를 진정시키는 낭곡이 어이없다는 듯 을지호를 응시했다. 그의 귀로 나렴의 질책이 전해져 왔다. [정신 차리게! 봉공들의 말도 듣지 못했나? 그의 무공은 궁술만이 전부가 아니야.] '그랬지. 대파산에서 낭아대를 몰살시킨 무공은 분명 상상을 초월 는 검법이라고 했다. 잠시 잊고 있었어.' 낭곡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을지호를 노려보았다. 상대를 경시 하던 눈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공격하라!" 낭곡이 장팔사모를 번쩍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두두두두. 사방에서 말들이 질주하며 을지호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앞서 달려온 자가 언월도(偃月刀)를 휘둘렀다. 쉬이이잉, 바람을 가르는 그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을지호는 맞서 부딪치지 않고 살짝 몸을 틀어 공격을 흘려버렸다.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말의 다리를 항해 철궁을 휘둘렀다. 말에도 곤오철로 만든 갑주를 씌우기는 햇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몸통에 국한된 것이지 다리까지 보호하지는 못했다. 히히히힝! 고통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다리가 부러진 말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 라졌다. 을지호를 향해 언월도를 휘둘렀던 사내가 말의 육중한 몸에 깔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래도 마상의 적을 쓰러뜨리자면 철궁보다는 긴 병장기가 필요 하다고 생각한 을지호가 언월도를 빼앗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상대 는 그가 무기를 집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제이, 제삼의 공격이 날아들고 있었다. 등 쪽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앞으로 움직인 을지호. 그러나 앞 에서도 거대한 낭아봉(狼牙棒)이 짓쳐 들고 있었다. 다급히 숨을 들이 킨 을지호가 철궁으로 몸을 보호했다. 꽝!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충돌음 이 들리고 을지호의 몸이 일 장 가까이 밀려났다. 양 다리가 순간적으 로 지면에서 들릴 정도였으니 그 힘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가 없었다. '과연.' 철궁을 든 손목이 저려왔다. 말이 달려오는 속도에 위에서 내려치는 힘이 더해지자 그 힘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대로 물러날 을지호가 아니었다. 낭아봉과 부딪치고 몸이 떨 려나는 순간, 그는 사내의 목을 향해 철궁을 휘둘렀다. 절대삼검의 첫 번째 초식 무심지검(無心之劍)이 폭발한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갑주를 몸에 착용하고 있어도 관절과 관절을 연결하 는 부분에는 분명 약점이 있을 터.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 다. 무심지검에 틈을 허락한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 명하고 말았다. "저, 저것은?" 탕평과 함께 싸움을 지켜보던 나렴의 노안이 거칠게 흔들렸다. 단순히 흑풍대원이 목숨을 빼았겼다는 것에 놀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을지호의 쾌검을 보며 격동한 것이다. '저만한 빠름이 있다니!' 오직 쾌검 하나에 칠십 평생을 바쳐온 그였다. 천하의 그 누구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만큼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자 부했다. 한데 무심지검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가 끓었다. 손은 이미 검을 잡고 있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호승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그는 을지 호의 면전에 서 있었다. "어르신." 갑자기 끼어든 나렴으로 인해 공격을 중지시킨 낭곡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오직 을지호에게 두 눈의 시선을 고정시킨 나렴의 귀에는 그 의 음성이 들릴 리가 없었다. "엄청난 빠름이었다. 지금껏 구경해 본 적이 없는." "고맙소." 을지호가 담담히 대꾸했다. "나 역시 평생 동안 쾌검에 목숨을 바친 몸. 누가 빠른지 겨뤄보자 꾸나." 그는 을지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힘이라곤 조금도 들어간 것 같지 않은 축 늘어진 어깨, 미세하게 구 부려진 무릎, 검의 손잡이에 살짝 얹어놓은 손, 그리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 '엄청난 고수다.' 을지호는 나렴의 자세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쾌검을 구사할 지 짐작이 갔다. '도전한다면 피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극한의 빠름을 자랑하는 무심지검이 있었다. 한마디로 자 존심이 걸린 싸움이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본 채 한참이나 움직이지를 못했다. 두 눈은 서로의 눈에 고정되었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마저도 일치를 시켰다. '먼저 움직이면 당한다.' 둘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싸움을 지켜보는 흑풍대원들도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삽시간에 일각이란 시간이 흘렀다.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얼마나 심력을 쏟아 부었는지 둘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땀이 흘러들어 가 눈을 괴롭혔어도 그 정도에 집중력을 떨어뜨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히히히힝!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을 끊은 것은 말의 투레질 소리였다. 흑 풍대원들의 책망하는 시선이 일제히 말의 주인에게 쏠리는 순간, 그 때까지 꼼짝 않고 있던 나렴과 을지호의 신형이 움직였다. 서로를 스치듯 지나간 그들은 등을 마주하고 섰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이긴 것이냐?" 말의 투레질 소리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흑풍대원들은 승부의 결과 를 알지 못해 웅성거렸다. 하나, 끝까지 지켜본 몇몇 사람들도 결과 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나렴이었다. "좋은 승부였네." "......" 을지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낭곡이 있는 곳까지 걸어온 나렴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뒷일은 아무래도 자네에게 맡겨야 하겠네." "예, 그게 무슨 뜻인지... 어르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낭곡은 갑자기 휘청이는 나렴과 그의 옷을 적시며 배어나오는 붉은 피를 보며 기겁을 했다. "어, 어르신!!"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린 그가 나렴의 몸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어르신을 모셔라!" 그러나 그의 손을 잡은 나렴이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난 이미 틀렸다. 심장이 반으로 갈리고도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어르신......" "정말 빠른 검이었다. 일찍이 그만한 검을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인가? 나렴의 눈동자에서 급격히 생기가 사라져 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체력이 받쳐 줬다면..." 그의 음성엔 참을 수 없는 아쉬움이 깃들어 있었다. "미안...하다고... 머, 먼저 가서... 기... 다리겠다고 저...전해.. 주게나..." 평생의 지기였던 철혈마단의 단주 철포산에게 전하는 유언을 끝으 로 나렴은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르신!!" 힘없이 늘어지는 나렴의 모습을 지켜보는 낭곡의 눈에 핏발이 섰다. "죽여라! 어르신의 원수를 갚아라!" 그는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옆구리에 꽤나 큰 부상을 입은 을지호를 보며 소리쳤다. 그리곤 탕평에게 나렴의 주검을 맡기 고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속전속결. 시간을 지체하다간 당한다.' 나렴에게 당한 부상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을지호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두두두두. 나렴의 죽음에 분노한 흑풍이 을지호를 향해 일제히 돌진했다. 을지호가 눈을 감으며 철궁을 천천히 치켜세웠다. 전신의 힘을 일으키는 듯 그의 몸을 중심으로 엄청난 기운이 소용 돌이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그의 몸을 단숨에 짓밟아 버리겠다는 기세로 밀려드는 기마대. 순 간, 번쩍 눈을 뜬 을지호가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철궁을 휘둘렀다. 철궁을 통해 펼쳐진 무극지검(無極之劍)과 지금껏 무적을 자랑해 온 철혈마단의 흑풍이 충돌했다. 꽈꽈꽈꽈꽝!!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는가? 천하를 뒤흔드는 폭음성과 함께 가히 살인적인 강기의 물결이 사방 을 휩쓸며 지나갔다. "크아아악!" 히히히힝!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사방 십여 장을 초토화시키는 미증유의 거 력에 정면으로 맞선 몇몇 기마대가 그대로 날아가 처박혔다. 곤오철 로 만들었다는 갑주도 그들의 몸을 보보하지는 못했다. "이럴 수가!" 간신히 몸을 피한 낭곡이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입을 쩍 벌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아홉이나 되는 수하가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의 인원이 부상을 당했 다. 고작 단 한 번의 충돌로 무적을 자랑하던 기마대의 사 분지 일이 넘는 전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놀람은 을지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무공. 한데 쓰러뜨린 적은 고작 아홉뿐이었 다. 상대가 도망을 친 것도 아니었다. 정면으로 맞부딪친 상대를 맞 아 무극지검이 이토록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제길, 갑주 때문인가?' 인원이 많기는 해도 상대가 막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것은 오직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주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무극지검이야말로 그가 지닌 최고, 최강의 수단이었다. 만약 통하 지 않는다면 죽음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옆구리의 상처가 더욱 벌어져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이를 악문 을지 호가 다시금 무극지검을 사용했다. 쿠쿠쿠쿵! "피, 피해랏!" 이미 그 무공의 위력을 본 흑풍대는 정면으로 맞서는 것보다는 일 단 그 영향권 아래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미처 말머리를 돌 리기도 전에 들이닥친 강기의 소용돌이에 또다시 대여섯 명이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을지호라고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역린이 되어 돌아오는 무극지검. 부상단한 몸으로 무리하게 펼쳐서 그런지 벌써부터 힘이 빠졌다. 나렴에게 당한 부상도 점점 상태가 악화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갑주 가 박살이 나고 온몸에 극심한 부상과 양팔이 부서지는 고통까지 감 내하면서 접근한 낭곡의 장팔사모가 손잡이가 부러진 채 등 쪽 깊숙 이 박혀 버렸다.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반드시 전의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한 을 지호는 전신에 퍼지는 고통을 무릅쓰고 연거푸 무극지검을 사용했다. "크아악!" "아악!" 땅을 뒤흔드는 굉음과 비명성이 난무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김 없이 몇 명의 주검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으으으." 낭곡은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부딪쳤다. 지금껏 수많은 적을 상대했지만 이와 같이 막강한 적은 없었다. 어 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극심한 부상에 신음하던 낭곡은 차례차례 쓰러지는 수하들의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연이어 펼쳐진 무극지검에 마상에서 버티고 있는 기마대는 절반에 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공포심에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끝난 건가?' 머뭇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달려드는 기마가 없자 을지호는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는 있었지만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흐트러진 모습 을 보여줄 순 없었다.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다. 물러가라!" 을지호가 낭곡과 생존한 기마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낭곡과 을지호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러기를 얼마간, 낭곡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싸워봐 야 희생만 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죽 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바로 그때, 그의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전신을 붉게 물들인 탕 평이었다. "우리가 진 것이네." "......" "돌아가세. 복수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네. 일단은 어르신을 모셔 야지. 언제까지 차가운 땅에 계시도록 할 수는 없지 않나." 낭곡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탄식 을 내뱉은 탕평이 낭곡을 대신하여 명을 내렸다. "퇴각한다." 그의 눈짓을 받은 기마대원 중 몇 명이 다가와 낭곡을 부축하며 물 러났다. "오늘의 빚은 언젠가 갚아주겠다, 반드시!" 탕평이 을지호를 노려보며 싸늘히 내뱉었다. "언제든지." 을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탕평은 수하가 끌고 온 백마에 올라타더니 말 머리를 돌렸다. 두두두두두. 흑풍과 백풍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같이 사라져 갔다. 을지호라 는 강적을 만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채.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몸을 돌린 을지호가 이십여 장 떨어진 짚 더미를 향해 소리쳤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이냐? 나와라."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재차 소리쳤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빨리 나와!" 그러자 짚 더미의 뒤쪽에서 낭랑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쥐새끼라... 너무하는걸." 천천히 걸어나오는 일단의 무리들. 인원은 도합 여섯이었는데 그들 은 다름이 아니라 위지요의 명을 받고 을지호와 사마유선을 치기 위 해 달려온 위지청과 한빙오영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을지호가 물었다. "북천." 위지청은 정체를 감출 이유가 없다는 듯 간단히 대꾸했다. "북천?" "그렇소. 북천의 위지청이라 하오." "북천도 나를 노리는 것이냐?" 위지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철혈마단처럼 이가 갈릴 정도는 아니나 삼시파천이라면 사 천의 공적(公敵)이니까." "그럼 덤벼라." 당장에라도 공격을 할 듯 을지호가 철궁을 치켜세웠다. "아아, 흥분하지 마시오. 지금은 싸울 생각이 없소이다." 위지청이 한 걸음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면 물러나라." 을지호는 위지청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사마유선이 도주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며 등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보기 안쓰럽다는 듯 위지청이 혀를 찼다. "쯧쯧, 그 몸을 해가지고 어디를 간다고 그럴까? 가봤자 소용도 없 는 것을." '소용없다?' 말하는 의도가 어딘지 모르게 수상했다. 걸음을 멈춘 을지호가 위 지청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이냐?" "뜻은 무슨 뜻, 말한 그대로지. 아아, 서두르지 마시구려. 내 말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을지호가 철궁을 움직이려 하자 재빨리 만류를 한 위지청이 한빙오 영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을지호에게 걸어오더니 화살 하나를 건넸다. "이, 이것은!" 얼떨결에 화살을 건네받은 을지호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붉다 못해 시뻘건 화살은 혈궁단의 상징. 곧 사마유선이 지니고 있 는 화살이었다. "사마 소저는 우리가 잘 모시고 있소이다." "네놈들이 감히!" "그렇게 흥분하지 마시오. 그녀는 안전하게 잘 있으니까." "믿을 수 없다." "그럼 확인시켜 드리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빙오영 중 가장 맏형인 마등(馬騰)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휘파람 소리는 한없이 크게, 그리고 멀리 퍼져 나갔다. 그 소리가 끝날 즈음 한 무리의 기마가 달려왔다. "유선......" 을지호는 점혈을 당했는지 마상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사마유선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잠시 혈도를 제압한 것이니 걱정은 하지 마시오. 그리고 이 녀석 은 돌려주겠소." 위지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풍단의 무인 하나가 죽은 듯 축 늘어진 철왕을 들고 왔다. "처, 철왕!" 위지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마 소저를 제압하는 것보다 이 녀석을 잡는 것이 훨씬 더 힘들 었소. 어찌나 빠르고 난폭한지 다친 사람도 있소." 그의 말에 한빙오영과 설풍단 무인들의 시선이 한 사내에게 쏠렸 다. 머리를 천으로 친친 감은 사내는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주, 죽었나?" 을지호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잠시 기절한 것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오." "고맙군." "녀석이 운이 좋았소. 미물인 주제에 주인을 위하는 충성심이 대단 해 수하들이 기특하게 본 모양이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운이 좋았던 것은 철왕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 만약 철왕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그들은 물론이고 나아가 북천까지도 을지호라는 지긋지긋한 악몽을 꾸어야 했을 테니 까. "원하는 게 뭐냐?" 을지호의 음성이 차분해졌다. 지금은 냉정하게 판단하여 대처해야 할 때지 감정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내 목숨이냐?" 그 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위지청이 물었다. "원한다면?" "너희들은 죽는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위지청과 한빙오영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깃들 었다.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대답이 아닌가. 당연히 '그녀만 살 릴 수 있다면 내어주겠다' 라는 반응 정도를 생각했던 그들로서는 당 연한 반응이었다. "사마 소저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이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너희들도 죽지만 나도 죽는다."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희가 그녀를 풀어주더라도 내가 죽는다면 어차피 그녀도 죽는 다. 그녀가 죽으면 물론 나도 죽는다. 이런 상황이다. 내가 어찌할 것으로 보이느냐?" 위지청은 대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너희를 죽이고 나 역시 그녀와 함께 죽을 것이다." "자신있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앞에 두고 허언 따위를 내뱉 지는 않는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이며 태도가 아닌가? 위지청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킨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명불허전, 역시 삼시파천이오. 하나,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소. 난 당신의 목숨을 원하지 않으니까." "진정이냐?" "대신 그녀를 풀어줄 수는 없소." 을지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함께 죽는 일뿐이다." "그렇게 너무 극단적으로만 몰고 가지 마시오. 난 당신과 그녀를 해 칠 생각이 없소.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준다면." 비로소 본론이 나온 것이다. "부탁?" "그렇소. 그녀를 푸어주는 조건이라 해도 무방하오." "무엇이냐?" 을지호가 조용히 되물었다. "한 명의 목숨이 필요하오." "......" "가능하겠소?" "누구냐?" "천중 진인." "무당파의 장문인을!" 순간, 을지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하니 무당파 장문인의 목숨을 원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 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것 같으냐?" "아니며 그녀는 죽소이다."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너희들도 죽는다. 그리고 나 역시도." "답답하오. 어째서 그리 쉽게 목숨을 버리려 하시는 게요? 그것도 자신을 배반한 자들 때문에....." 위지청이 일부러 말꼬리를 흘렸으나 그 정도를 듣지 못할 을지호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배반이라고 했소. 그들은 당신을 배반했소." "그따위 말에 속을 것 같으냐?"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을지호는 그의 말을 생각해 볼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간단히 일축해 버렸다. "잘 생각해 보시오. 철혈마단은 물론이고 우리는 당신이 이곳을 지 나갈 것이라 미리 알고 있었소. 어떻소. 뭔가 이상하지 않소?" 혹여나 적에게 발각될까 봐 극도로 조심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잖아도 싸우는 내내 철혈마단이 어떻게 해서 추격할 수 있었는 지 의심하고 있던 을지호는 그의 말에 뭔지 모를 흑막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변화를 감지한 위지청이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날렸 다. 너울너울 날아간 서찰이 을지호의 손에 잡혔고 그는 단숨에 서찰 을 읽어 내려갔다. "이, 이것이......" 서찰을 읽는 을지호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것이 사실이냐?" 서찰을 구겨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뭐라 한다고 당신이 믿겠소? 아무튼 그 서찰이 무당 쪽에서 온 것은 분명하오. 모르긴 몰라도 철혈마단에서도 똑같은 내용의 서 찰을 받았을 것이오. 사실 여부는......" 잠시 말을 끊은 위지청이 분노로 떨고 있는 을지호를 응시하며 말 했다. "서찰의 진위는 당신이 확인하시오. 그리고 나의 말이 맞는다면, 무당이 당신을 배반한 것이 확실하다면 아까 말한 부탁을 들어주시오. 천중 진인의 목숨이 끝장났다는 소식이 들리는 순간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오." 을지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뼈아픈 배반의 충 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천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무당이... 그들이 진정....'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는 증거물이 손 안에 있었다. '그래, 확인을, 확인을 해보면 알겠지.' 결국 마음을 굳히 그가 서찰을 품에 갈무리하더니 사마유선을 향해 걸어갔다. 설풍단의 무인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고개를 흔드는 위지청 의 신호를 보고 모두 물러섰다. "그녀의 마혈을 제압한 것은 한빙곡의 독문 무공이오. 공연한 애를 쓰지는 마시오." 위지청이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 "유선, 당신도 들었을 거야.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겠어." 축축이 젖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놈들의 말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금방 구하러 갈께. 나를 믿 고 조금만 참아줘." 을지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을지호는 그녀의 눈빛을 통해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까짓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아무튼 기 다려. 최대한 빨리 당신에게 달려갈 테니까." 더 보고 있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는 이를 꽉 깨물며 몸을 돌렸다. "약속은......" "북천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지킬 것이오." 위지청이 재빨리 대답했다. "이 녀석은 두고 가겠다. 그녀와 함께 있게 해줘라." 을지호가 철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하겠소." "부디... 약속을 지키기 바란다." "물론이오. 그리고 제법 먼 길이오. 타고 가시구려." 위지청의 신호를 받은 마등이 말 한 필을 끌고 가 그에게 건넸다. 을지호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미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 다. "차라리 그를 제압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마등이 물었다. "어째서?" "철혈마단을 농락한 자입니다. 그런 자를 우리가 사로잡았다면..." "명성이 높아진다고?" 마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부상당한 호랑이를 잡아서 참으로 명성이 높아지겠다. 그리 고 사로잡히기는 한데?" "예?" "아까 그자의 무공을 봤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흑풍, 백풍 과 연 소문대로 막강한 놈들이었어. 만약 싸운다면 어떻게 상대해야 할 지 난감할 정도로. 그럼에도 그자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부상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기엔 제대로 움직 이지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나도 그렇게 봤다." "하온데 어째서?" 마등이 의구심이 가득 찬 음성으로 물었다. "만약에 그자가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면? 여러 번도 필요없이 단 한 번이라도 아까와 같은 무공을 펼친다면......" 위지청은 상상하기도 싫은지 몸소리를 쳤다. "절대 못 막아. 아마 다 죽을 거다. 그런데 그런 모험을 나보고 하 라고?" "그, 그렇군요." 그제야 위지청의 심중을 헤아린 마등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단언컨대 그 서찰은 무당파에서 보낸 것이야. 그자도 짐작하고 있을 거다. 운이 좋으면 무당파 장문 인의 목숨은 그에 의해 사라질 거고 최악의 경우라도 명성은 땅에 떨 어지겠지. 물론 그와 무당, 나아가 정도맹과의 관계도 이미 끝장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이것을 보고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고 하지 아마." 나직하게 웃는 위지청, 그의 시선은 어느새 하나의 점으로 변해 버 린 을지호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 궁귀검신2부 7권 제55장 이간계(離間計) 두두두두. 일단의 군마가 무당산 북동부의 원화관(元和觀)으로 들어섰다. 초입 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사내들이 잠시 긴장하는 빛을 띠었으나 이들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깍듯이 인사를 했다. "워워." 고삐를 낚아채는 것만으로 비호와도 같이 내달리던 말을 간단하게 제어한 사내들이 일제히 하마를 했다. 꽤나 오랫동안 달렸는지 의복 엔 뽀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연신 투레질을 하는 말들도 지친 기 색이 역력했다. "고생들 했다. 가서 술 한잔씩 걸치고 푹 쉬도록 해라. 사마 소저에 게도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최대한 정중히 모시도록." 딱히 누구에게라고 말할 것 없이 간단히 명령을 내린 위지청은 허리 를 살짝 굽혀 대답을 대신하는 마등에게 잠시 눈길을 주고는 몸을 돌 렸다. "날 언제까지 잡아둘 생각인가요?" 막 몸을 돌리던 위지청의 시선이 사마유선에게 향했다. "날 언제까지 잡아둘 것인지 물었어요." 포로로 잡혀온 신세이기는 해도 사마유선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그것은 뭐라 장담할 수 없겠소. 당장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 도 있소. 어쩌면 꽤 오랜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지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은 그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오." "흥, 그래도 명색이 천하를 도모한다는 사람들이건만 고작 이따위 흉계밖에 꾸미지 못한다니 참으로 한심스럽군요." 사마유선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그쪽에선 흉계라 생각하겠지만 이쪽에선 나름대로 묘계(妙計)라 할 수 있소.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따라주길 바라오. 최대한 편의를 배려해 줄 테니." 위지청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배려 따윈 필요없어요. 당장 나를 보내줘요." "그것은 안 된다고 했소.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건대 소저가 자유 로운 몸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린 것이오. 그리 알고 소식이 오기나 기다리시오." 사마유선의 말을 단박에 잘라 버린 위지청은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 내 그녀를 데려가게 하더니 곧 북천의 천주가 거처하는 회심각(回心閣)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심각에 들어서던 그는 방문을 열기도 전부터 밀려드는 기운에 흠칫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묵직하고 착 가라앉은 느낌. '흠,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러고 보니 다들 불안해하는 모습이던데.' 그는 정문을 지키던 경계병, 그리고 회심각으로 걸어올 때까지 만났 던 다수의 사람들이 평소와는 달리 풀이 죽어 있던 얼굴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지체없이 방문을 열었다.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곳이라 어쩔 수는 없겠지만 천하를 좌지우지 하는 북천의 천주가 대소사를 관장하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 큼 협소한 집무실, 그러잖아도 좁은 그곳에 십수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뭔 일이 터져도 단단히 터졌군.' 그들이야말로 북천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수뇌들이었다. 그는 직감 적으로 뭔가 큰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어서 와서 앉아라." 위지요가 손짓을 하며 말을 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위지청은 그들에게 살짝 허리 를 굽혀 예를 표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래, 갔던 일은 잘되었느냐?" 위지요가 물었다. "만족할 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으나 그래도 헛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떠난 이후 철혈마단에서 흑풍인가 백풍인가 하는 놈들을 파견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괜히 보낸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그나 마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니 다행이구나. 그래, 삼시파천이란 자는 그 자들이 상대했겠구나?"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했을 때엔 이미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찌 되었느냐?" 위지요가 다소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바로 곁을 지키고 있던 우문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허허, 천주는 너무 뻔한 걸 묻는군. 흑풍과 백풍이라면 철혈마단 에서도 최정예들이 아니던가? 소문에 듣자 하니 철혈마단의 단주는 그들만으로도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다더군. 뭐, 어느 정도 허풍이 있다곤 해도 그만한 실력이 되니까 허풍도 떠는 것일세. 그것만으로도 이미 결과는 나온 것이나 다름없지. 죽었을 게야. 혹여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말꼬리에 끌려가는 신세 로 전락 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느냐?" "......" 우문걸이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며 위지청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나 잠자코 듣고 있던 위지청은 단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의 행동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위지요가 입을 열었다. "네 표정을 보니 일이 단순하게 끝난 것 같지는 않구나." "그렇습니다." "엥? 단순하지 않다니? 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단 말이냐?" 우문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소문대로 흑풍과 백풍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만약 그들과 싸운다면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엄청났지요. 그런데 삼시파천이란 자는 더 대단했습니다." 순간, 회심각엔 뭐라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고 위지요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자가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했단 말이냐?" 위지청이 나직이 한숨을 내뱉더니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주한 것이 아니라 아예 패퇴시켰습니다." "뭣이!" 깜짝 놀란 우문걸이 벌떡 일어났다. "패퇴라니! 그게 진정이란 말이냐?" "예. 흑풍과 백풍 모두 치명적인 타격을 입으며 패퇴하고 말았습니 다. 삼 분지 일 정도가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반수도 큰 부상을 당했 지요. 흑풍과 백풍의 대주들도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쓰러졌 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노, 놀라운 것은?" 우문걸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나렴 노선배까지 목숨을 잃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때까지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던 위지요도 이번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나렴이라면? 설마 하니 뇌정검(雷霆劍) 나렴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뇌정검이 맞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의자에서 반쯤 엉덩이를 떼었던 위지요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는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른 이들의 반응 또한 그와 다 르지 않았다. 뇌정검 나렴. 비록 중원무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외 쪽에선 뇌정검 나 렴이라는 이름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나이 서른에 시작해 무려 십 년 동안 이어진 비무행(比武行). 꼭 삼백 번을 채우고서야 끝난 비무행에서 그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오직 전대 북천의 천주가 천주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에 가졌 던 마지막 싸움에서 승부를 가르지 못하고 물러선 것이 그의 최초의 실패라면 실패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렴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 고 그의 비무행은 지금까지 전설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나렴이 비록 얼마간의 명성은 얻었다지만 그에 비하자면 한낱 애송이에 불과한 인물에게 쓰러졌다는 말이니 그 누가 믿겠는가? "놈이 암계를 쓴 것은 아니더냐?" 과거 나렴의 비무행에서 이백구십구 번째 상대였고 그의 쾌검을 감 당하지 못하여 패배당했던 우문걸은 나렴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 다는 태도였다. "그 쾌검이란 정말......" 나렴 정도의 인물에게 애당초 암계 따위가 통할 리가 없었다. 을지 호와 나렴의 대결을 똑똑히 지켜보았던 위지청은 그때를 잠시 떠올리 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긴장감이 다시 느껴지는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는 전율감에 몸을 떨었다. "둘은 검을 뻗기만 하면 쓰러뜨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무기를 잡고 상대의 눈과 눈을 노려보 며 기회를 살폈지요. 하지만 그들은 상대의 허점을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들의 자세에서 허점을 찾기 란 불가능했을 겁니다. 팽팽했던 대치는 그렇게 한참이나 계속되었지 요. 한데 승부는 일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기도 전에 이미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졌다는 말이더냐?" "예. 뇌정검 선배의 검이 삼시파천의 허리를 갈랐으나 역부족이었 습니다. 승리를 거두기에는 상대의 검이 너무 빨랐습니다." "......" 꿈결처럼 중얼거리는 위지청의 말에 질문을 던졌던 우문걸은 물론 이고 경악을 금치 못하며 경청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저 장강의 앞물결은 언젠가 뒷물결에 밀려 흘러 나 가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할 뿐이었다. "그러나 소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위지청이 다소 커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무슨 뜻이냐?" "요행히도 그와 함께 다니던 여인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계집 따위를 잡아서 어따 쓰게? 그리고 남자라면 인질을 잡고 협박 을 하는 그따위의 행동을 해선 안 된다." 우문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인질을 삼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면?" "결론적으로 그리는 되었습니다만, 사실,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삼 시파천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구라니?" 위지청의 말에 어폐가 있었기에 되묻는 우문걸의 안색은 그다지 좋 지 않았다. "무당파의 장문인을 죽이라는 요구였습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우문 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쓸데없는 짓을 하였구나. 아무리 계집에 미친 사내라도 그 따위 짓을 하까? 혹 네 요구를 이행하려 한다 해도 그가 어찌 무당파 의 장문인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냐? 인의장막으로 겹겹이 보호를 받 고 있는 그를 말이다." "꼭 죽이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허! 이거야 원." 점점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죽이라고 요구했다고 하고는 또 그것을 바란 것은 아니라는 위지청 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구나. 네가 심중에 담고 있는 말을 해보 거라." 위지요가 그의 말을 재촉했다. "서찰을 넘겼습니다.' "가만있자... 서찰이라면 우리에게 그의 행적을 알려주었던 그 서찰 말이더냐?" "예. 그것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당에서 전해진 것이 라 하였습니다." 서찰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위지청의 의도를 파악한 위지요는 그 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하지만 쉽게 믿지는 않았을 텐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지요. 최소한 확 인은 하고자 할 것입니다." "흠, 네 말대로라면 일이 꽤나 흥미롭게 되어가는 것 같구나. 뇌정 검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겠어. 저들끼 리 자중지란도 일어날 수 있겠고. 소림 때문에 큰 걱정을 하고 있었 는데 어쩌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큰 기회를 잡을 수도 있겠구나." "소림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러잖아도 주변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던 위지청이 재 빨리 물었다. "후∼ 소림을 빼앗겼다.' 힘없이 대답을 하는 위지요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소, 소림을 말입니까?" "조금 전 장백선옹이 그렇게 전해왔다." "중천 놈들이 감히!" 분노를 참지 못한 위지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록 주력이 무당 산 인근으로 이동을 했다지만 소림을 지키는 이들은 북천 전력의 사 할에 육박할 정도로 막강했다. 이미 소림을 비롯하여 화산, 종남 등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들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 다. 그가 아는 한 그런 세력이 있다면 오직 중천뿐이었다. "중천! 그놈들이 뒤통수를 친 것입니까?" 흥분할 대로 흥분한 위지청이 물었다. 그는 이미 중천이 개입한 것 이라 단정짓는 모습이었다. "아니다. 적은 전혀 엉뚱한 인물들이었다. 아니, 가문이라 해야 하 나?" 순간, 위지청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물들었다. "가문이라니요? 대체 그놈들이 누굽니까?" "을지 가문." 낯선 이름이었다. "을지 가문이라면....." "너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을지소문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위지청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궁귀!" "전대 패천궁의 궁주도 함께였다. 뿐만 아니라 은밀히 군자산을 해 독한 소림사의 무승들과 포로로 잡혀 있던 고수들까지 합세한 모양이 더구나." 그제야 어째서 북천의 수뇌들이 하나같이 무거운 표정으로 회심각 에 모여들었는지 이해를 한 위지청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 다.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반수 정도는 당한 것 같다." 반수라도 엄청난 피해였다. 게다가 소림사를 빼앗겼다는 것은 인근 의 화산과 종남까지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었고 나아가 하남성에서의 영향력 상실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 는 법. 중요한 것은 소림을 빼앗긴 상황에서 어찌 대처할 것인지 후속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조금 전가지만 해도 회군하여 소림을 다시 찾는 것으로 중지를 모 았다. 그만큼 소림이 지니는 가치는 큰 것이니까. 하나 네 말을 듣고 보니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듯하구나."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주면 줄수록 벽은 견고해지는 법입 니다. 인원도 늘 것이고." 소림이 수복되었다는 것을 알면 무너진 문파들의 잔당들은 물론이 고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많은 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터. 그 것은 분명 북천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계획한 일이 어찌 되어가는지는 보고 가 야겠지. 그것을 확인한 이후에 움직여도 늦지는 않을 것 같구나. 운 이 좋으면 정도맹과 무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어. 물 론 네 계획대로 진행되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 그자는 무당으로 향 했느냐?" "예. 부상이 심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아마도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겁니다. 어쩌면 벌써 난리가 났을 수도 있겠지요." 담담히 대꾸하는 위치정의 뇌리엔 어느새 흑풍과 백풍을 상대로 믿 을 수 없는 실력을 보여줬던 을지호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분명 뭔가가 터질 겁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 * * 백도무림의 최후 보루라 할 수 있는 정도맹과 무당파. 그리고 각 문파의 수장들이 한데 모여 앞으로의 일들을 논의하고 대책을 세우는 옥허궁의 회의실. 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었던 그곳엔 웬일인지 호탕 한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술잔들이 찻잔을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했고 도관 가득 물들이는 주향이 향 기롭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팽팽한 대치 상태와 무당산 곳곳에서 크 고 작은 싸움이 계속되었기에 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저마다 잔을 비우며 아침나절 들려온 소식에 연신 축배를 들었다. 무당산에 북천에게 점령당했던 소림사가 탈환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비합전서구(秘盒傳書鳩)가 도착한 것은 을지 가문과 소림사의 무승,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고수들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 단한 장백선옹이 전격적으로 싸움을 중지하고 물러난 지 꼭 하루 만 이었다. 간절히 바라고는 있으나 일말의 가능성도 없었기에 생각지도 못했 던 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소식에 철혈마단과 북천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백도의 무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 을 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특히 소림을 구한 사람이 다름 아닌 궁귀 을지소문이라는 사살이 알려지자 그들은 과거의 천하제일인이 누란의 위기에 빠진 무림을 구 하고자 오랜 은거를 깨고 마침내 궁을 들었다며 감격에 마지않았다. "그러잖아도 철혈마단에 이어 북천의 힘이 무당으로 집결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는데 소림이 부활을 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 지 모르겠습니다." 제법 술을 마셨는지 안색이 대춧빛으로 물든 제갈경이 천장 진인에 게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명목상의 맹주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나름대로 마음 고생이 심했는 지 얼굴이 반쪽이 된 천장 진인이 단숨에 술을 털어 넣으며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후∼ 그러게 말입니다. 놈들의 힘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한시름 놓았습니다." 천장 진인의 곁에서 묵묵히 술병을 기울이던 무당파의 장문인 천중 진인이 제갈경에게 넌지시 물었다. "가주께서는 저들이, 아니 북천이 어찌 나올 것이라 예상하십니까? 이대로 물러나겠습니까?" "음, 쉽게 생각하자면 당장 회군을 해야겠지요. 철혈마단과는 달리 북천에겐 소림이야말로 목에 가시와 같은 존재니까요. 배후에 소림과 같은 큰 적을 두고 싸운다는 것 자체가 떨떠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칫하다간 중원에서의 존립 기반마저 흔들릴 수 있으니.' "가주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천장 진인을 비롯하여 둘의 대화를 듣던 몇몇이 긴장된 얼굴로 제갈 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갈경은 입에 댔던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 로 대답을 하였다. "제가 북천의 천주라면 회군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곳 을 치는 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천중 진인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대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조금 전 연락을 받고 조용히 자리를 떴던 왕 호연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와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맹주님!" "무슨 일인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문제? 문제라니?" 첨밀각의 각주 왕호연이 그와 같은 말을 할 때마다 꼭 중대한 문제 가 터지곤 했다. 황급히 묻는 천장 진인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커 지고 말았다. 화기애애했던 술자리에 싸늘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모든 이들의 시 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모아졌다. "말해 보게. 무슨 문제가 터진 것인가?" "을지 대협이... 무당산을 떠났던 그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합니다." 순간, 잔뜩 긴장했던 천장 진인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다. "휴∼ 난 또 뭐라고. 볼일이 있으니 다시 오는 것이겠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하는가?"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제갈경이 재빨리 물었다. 그가 아는 왕호연은 웬만한 일로는 낯빛조차 변하지 않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이처럼 당황하는 것을 보면 분명 문제가 생겨도 아주 큰 문 제가 발생한 것이 확실했다. "지금 막 올라온 소식에 의하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을지호 대협 이 옥허궁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조만간 도착할 것이라 고....." 바로 그때였다. 꽝!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구의 문이 활짝 열렸다. 왕호연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산의 중턱을 통과했다고 보고를 받은 을지호의 모습을 볼 수 있 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찢어진 의복, 전신이 피에 젖은 모습. 아직도 피가 멈추지 않았는지 피와 먼지가 한데 뒤엉켜 검붉게 변 한 다른 곳과는 달리 옆구리에선 붉은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그의 모습에 입구 쪽에 앉아 있던 일연 사태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으, 을지 대협!" 을지호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내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가 내뿜는 기운에 압도를 당한 것인지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 이 없었다. 그저 앞으로 닥칠 일을 어렴풋이 짐작을 하며 몸을 떨 뿐 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맹주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용 정정만큼은 심상치 않은 을지호의 행동을 그냥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멈추시오." 천장 진인을 향하던 을지호의 신형이 멈추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나... 헛!" 황급히 앞을 가로막고 나섰으나 무심한 눈길로 쏘아보는 을지호의 눈빛을 접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쁜 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 살기였다. 직감적으로 위기를 느낀 용정정은 이미 검을 빼 들고 있었다. 멈추었던 을지호의 신형이 다시 움직였다. '으으으.' 막아야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용정정은 을지호 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짓눌려 그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 을 보면서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을지호의 걸음이 다시 멈춘 것은 천장 진인과 천중 진인의 바로 코 앞에서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을지호가 물었다. "정도맹의 뜻이었습니까?" 뜬금없는 소리였다. 도대체 무엇이 정도맹의 뜻이란 말인가? 장내에 있는 사람들 중 그의 말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정도맹의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을지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음성 또한 한층 더 싸늘해졌다. "무엇이 정도맹의 뜻이라는 것인가? 우리는 자네 말을 이해할 수가 없네." 보다 못한 천중 진인이 물었다. 더 이상 차가워질 수 없는 을지호 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아니면 무당의 뜻일 수도 있겠군요." 순간, 천중 진인의 아미가 좁혀졌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그의 언사 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의 기분을 알아챈 천강 진인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지나치지 않은가! 삼시파천이라는 이름이 근래 들어 제법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인정하나 설마 하니 맹주님과 무당파의 장문인을 핍 박할 정도일 줄은 몰랐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며 무엇을 듣고 싶은 것인가? 꼭 알고 싶군. 내용을 알아야 우리도 그것이 정도 맹의 뜻이었는지 무당의 뜻이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떤 일 이기에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는지도!" 당장이라도 손을 쓰겠다는 듯 앞으로 나서는 천강 진인을 보며 을 지호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더 이상 두고 보아서는 사단이 나도 아주 크게 날 것이라 여긴 제 갈경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자자, 진정들 하게나. 무슨 오해가 있는 듯한데 이렇게 감정만 앞세워서야 되겠나. 차분히 말로 풀어야지." 손짓으로 천강 진인을 만류한 제갈경이 을지호에게 다가왔다. "남궁세가로 돌아간다더니 이게 무슨 꼴인가? 어쩌다가 이 지경 이... 그리고 사마 소저는 어디 있는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자신들을 걱정해 주던 제갈경이었다. 퉁명스레 대답 을 해도 살기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포, 포로로 잡히다니? 어떤 자들에게?" 깜짝 놀란 제갈경이 황급히 되물었다. "무당산을 떠난 이후 철혈마단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백풍과 흑풍 이라는 놈들이었습니다." "철혈마단! 그럼 사마 소저가 놈들에게?" 을지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놈들은 아닙니다." "하면 누구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인가? 답답하네. 자세히 말을 좀 해 보게." 을지호는 천장, 천중 진인에게 잠시 시선을 던지더니 그간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은 짧고 간명했다. "...그렇게 해서 철혈마단의 기마대는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 만 그녀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북천의 무인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지 요." 을지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곳저곳에서 탄식성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그토록 은밀히 움직였음에도 을지호의 행적을 파악한 철혈 마단과 북천의 가공할 정보력에 한숨을 내뱉었고 소문으로만 듣던 철 혈마단의 주력 흑풍과 백풍을 패퇴시킨 을지호의 무공에 경악했다. 그리고 북천의 무리에게 사마유선이 납치되었다는 말에 안타까운 한숨 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설명으로는 을지호가 어째서 이토록 적대적인 모 습으로 무당산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런 의문을 해소하기라도 하듯 을지호의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의 상대는 천장과 천중 진인이었다. "놈들이 어떻게 우리의 행적을 알게 된 것입니까?"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가?" 천중 진인이 싸늘히 되물었다. "놈들의 정보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우리의 행적을 파악할 수는 없 었습니다. 한데도 너무나도 정확히 뒤를 밟았습니다. 아니, 아예 함 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더군요." "하면 우리가 놈들에게 자네들의 행적에 대한 정보를 흘렸단 말인 가?"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천중 진인 의 몸에서 형언하기 힘든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닥쳐랏!" 제갈경에 의해 잠시 가로막혔던 천강 진인의 분노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보자 보자 하니까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구나. 정보를 흘리다니! 네놈은 우리 무당을 어찌 보고 그따위 망발을 하는 것이냐?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책임이라... 지금 책임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말도 안 되는 말 따위를 늘어놓지만 말고 네 말에 책임을 져봐라! 증거를 대보란 말이다!" 천강 진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를 향해 날아가는 물건이 있 었다. "읽어보시구려." "흥!" 냉소를 지은 천강 진인이 날아오는 물건을 낚아챘다. 한데 그것에 담긴 힘이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몸을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은 그는 손아귀를 찢을 듯한 고통에 인 상을 찡그렸다. 애써 무안함을 숨긴 천강 진인이 을지호가 건넨 서찰을 단숨에 읽 어 내려갔다. 그리곤 천중 진인에게 서찰을 넘기며 한껏 비웃음을 흘 렸다. "어리석구나. 세 살짜리 꼬마도 눈치챌 한심한 계교에 속고 말다 니. 고작 이런 거짓된 정보에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란 말이냐?"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까?" "당연하지." 천강 진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나 당당하고 자신있 게 말하는지 서찰의 내용을 알 길 없는 이들조차 고개를 끄덕일 정도 였다. "그의 말이 옳은 것 같네. 무당에서 이런 서찰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는가?" 천중 진인과 함께 서찰을 읽은 제갈경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당에서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거짓말일 걸세.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아마도 자네가......" 제갈경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뒤의 말은 들어보지 않아 도 뻔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큰 부상을 당하고 사마유선까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선 분명히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했으리라. 을지호를 쳐다보는 제갈경의 눈가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인가?' 사실, 을지호도 서찰의 내용이 진짜라고 단정지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당당하기 그 지없는 천강 진인, 그리고 제갈경의 말에 그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 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무례에 대한 죄는 벌을 청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만이었지만 만약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었다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그 역시 가늠키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긴, 내가 너무 멍청했지.' 서찰의 내용이 거짓이라 느낀 을지호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 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거짓말에 너무도 쉽게 속 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은 을지호가 자신이 저지 른 무례에 대해 용서를 빌려는 찰나에 벌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사형?" 뚫어져라 서찰을 응시하는 천중 진인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천강 진인이 물었다. 천중 진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서찰의 내용을 살피고 또 살폈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고 서찰을 살피는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서찰을 들고 있는 손도 눈에 띄게 떨렸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의구심을 가진 좌중의 시선이 일 제히 쏠렸음에도 그는 오직 서찰만을 살필 뿐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절대로 그럴 리가!' 그렇지만 아무리 부정을 해보아도 서찰의 내용이, 아니 서찰에 적 힌 글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꿰뚫었다. 서찰에 적힌 독특 한 서체는 다름 아닌 그의 막내 제자 자운(紫雲)의 것. 벌써 이십여 년을 넘게 지켜본 제자의 글씨를 못 알아볼 그가 아니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 참담함이 밀려들었다. 또한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덮어야 한다.' 만약 서찰을 쓴 것이 자운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 뒤에 벌어질 일 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었다. 무당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쏟아질 무림 동 도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피바람을 일으킬 듯 이성을 잃고 있는 을지호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면 옥허궁이 피로 잠길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무슨 수 를 쓰더라도 반드시 막아야 했다. 천중 진인이 혼자만의 상념에서 빠져나온 것은 몇 번을 불러도 대 답이 없는 그를 이상하게 여긴 천장 진인이 그의 팔을 흔들면서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는 그의 행동은 모든 이들의 의 혹을 살 만큼 충분히 어색했다. "이 무례한 자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천강 진인이 물었다. "험험, 다행히 오해가 풀린 듯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두어 번 헛기침을 한 천중 진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천강 진 인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그냥 넘어가다니요! 우리 무당은 물론이고 정도맹, 그리고 여기 모 인 모든 분들을 능멸한 놈입니다!"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 네." "하지만....." "그만, 되었다니까." 간단히 말을 자른 천중 진인이 을지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상이 심한 것 같에. 어서 치료를 받도록 하게나. 지금까지의 일 은 없던 것으로 하겠네." "......" 을지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돌변한 천중 진인 의 태도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오해가 풀리지 않은 것인가? 무당의 이름을 걸고 말하지만 이번 일에 우리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네. 자네와 우리를 이간질하 려는 놈들의 계책일 뿐... 이네....."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던 천중 진인. 한데 구석 쪽에서 천천 히 걸어나오는 사람을 보며 말끝이 급작스레 흐려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면에 나선 중년의 도인. 청색 도복(道服)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나온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 으며 소리쳤다. "사부님!" "무, 무슨 일이더냐?" 갑작스런 자운의 등장에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천중 진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요, 용서라니?" "큰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쿵쿵. 오체투지(五體投地)하고 엎드린 그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어하! 이게 무슨 짓이더냐! 죄가 있다면 당연히 죄를 청하고 용서 를 빌어야 하겠지만 그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 이곳은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니 당장 물러나거라." 안색을 찌푸린 천강 진인이 그의 몸을 일으키며 호통을 쳤다. 하지 만 자운은 그의 팔을 뿌리치며 계속해서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삽시 간에 이마가 깨지고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난데없이 나타나 죄를 청하며 바닥에 머리를 찧는 자운. 옥허궁엔 일순 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특히 제갈경을 비롯 하여 몇몇의 안색은 이미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자운의 행동이 서찰 과 얽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의심의 눈초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일을 빨리 수습하지 못했다 간 낭패라고 생각한 천중 진인이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근엄하게 소리쳤다. "자운아, 네가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이 사부는 이미 알고 있다.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규(門規)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일이지 이 자리에서 거론할 것은 아니구나. 네 죄는 따로 처리하도록 하겠다. 이만 물러나도록 하여라." 최대한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리고 한 문파의 존장으로서의 위엄을 갖추며 제자를 달래는 천중 진인. 그의 모습에선 잠시 흐트러졌던 조 금 전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무량수불!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좌중을 향해 정중하게 사죄를 한 그가 천강 진인에게 슬그머니 눈치 를 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천강 진인이 자운에게 다가갔다. 천강 진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자운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는 뭔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며 머리를 찧었다. "사부님의 명을 이행하지 못하고 이런 모욕까지 당하게 한 죄 그 무엇으로 용서를 받겠습니까? 오직 죽음분입니다! 제자의 죽음으로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리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을지호를 향해 소리쳤다. "네가 비록 몇 가지 잡기로 허황된 명성을 얻었기로서니 그 자만심 이 하늘을 찌르고 그것도 모자라 패천궁의 간녀(奸女)에게 눈이 멀어 우리를 능멸하려느냐? 하늘이 비웃는다! 내 비록 네놈을 제거하여 땅 에 떨어진 무림의 정기를 살리라는 사부님의 명을 이행하지 못하고 먼저 가지만 죽어서라도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가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을지호에게 일갈을 한 자운의 고개가 천중 진인에게 향했다. [사부님, 그동안 보살펴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제자를 부디 용서해 주시길....] 처연한 눈빛으로 전음을 보낸 자운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무, 무슨 짓이더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한 천중 진인이 번개같이 몸을 놀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 해도 작심하고 자결을 하려는 자운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후려친 자운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자운아!" 간발의 차이로 늦어버린 천중 진인이 그의 몸을 안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도, 도대체가.....!" "죄, 죄송...합니다... 사..부님.. 제..자도 어..쩔..어쩔 수... 가 없...었..." 자운은 마지막 말을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녀석아! 이놈, 자운아!" 유난히 아끼던 제자였다. 가장 늦게 받아들였으나 자신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다지 재능도 없고 잘나지 못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듬직한 제자였다. 그런 제자가 스 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 평소와는 달리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설마 하니 영문도 모를 말 로 자신과 사문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자결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는 망연자실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 다. 제56장 파국(破局) "사, 사형, 자, 자운이 어째서......" 천강 진인이 새하얗게 변한 낯빛으로 천중 진인을 불렀으나 천중 진인으로서도 뭐라고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장내에 모인 모든 눈이 자운의 시신을 안고 있는 천중 진인에게 향 했다. 모두들 당혹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더러는 안타까워하는 모 습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이었다. 천중 진인에게 보 내는 그들의 눈빛은 자운이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 을지호를 제 거하라 명했다는 그 말에 대해 설명을 하라는 무언의 요구를 담고 있었다. "......" 천중 진인은 자운이 어째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하 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이란 꼭 영문을 알아야 말을 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변명을 해야 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바로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 다. "설명을 해주시지요." 을지호가 말했다. "나는...모르는 일이네." 자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천중 진인이 힘없이 대꾸했다. "훗,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소립니까?" 을지호가 싸늘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나도 어찌 된 일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 으니."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을지호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 전 장문인의 명을 받고 우리를 제거하 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와 사마 소저는 저자나 다른 무당파의 제자들과 싸운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막은 것은 철혈 마단과 북천이었습니다. 결국 뭡니까? 한마디로 저자가 철혈마단과 북천에 우리의 정보를 흘렸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런 대꾸도 없었지만 다들 수긍하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천중 진인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무당의 명예를 걸고 말하지만 난 모르는 일이네." "그럼 죽어가는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는 말입니까?" 을지호가 조소가 담긴 어투로 되물었다. "이 아이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나 역시 이해하지 못하고 있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은 없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제갈경이 더없이 차가운 음성으로 일침을 놓았다. "그렇기는 하오만 드러난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자무언(死者無 言)이나 그가 죽기 전 남긴 말은 노부를 비롯하여 여기 있는 모든 분 들이 틀림없이 들었습니다.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셔야 할 겁니다." "아미타불! 한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듯 떠들 일은 아니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라 봅니다." 혜정 신니가 거들었다. "해명을 하고 싶어도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어찌 해명을 한단 말입니 까? 만약 해명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곧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 하는 것이거늘, 뭔가 오해가 있습니다." 천중 진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했으나 반응은 싸늘했다. 제갈경 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당우곤이 곧바로 물어 왔다. "조금 전 장문인께서 서찰을 보시곤 많이 놀라셨습니다. 어째서 그 런 것입니까?" "그, 그건......" "추측컨대 아마도 장문인께서 자운 도장의 글을 보고 놀라신 것 같 습니다. 제자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사부는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날카롭게 이어지는 당우곤의 질문에 천중 진인은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을 한다 해도 서찰이 남아 있고 거기에 자운의 글씨가 남아 있는 한 금방 밝혀질 일이었다. "그렇소. 분명 자운의 필체였소." "한데 장문인께선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셨습니다." "....." "결국 철혈마단과 북천으로 날아들었다는 투서, 그것을 쓴 사람은 자운 도장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뭔가 덧붙이는 말을 하려 했으나 당우곤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을지 대협의 정보를 적에게 넘겨준 사람이 자운이고 그가 죽으면 서 남긴 말이 그 모든 것이 사부의 명이었다고 했습니다. 한데도 장 문인께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는군요. 참으로 괴이하지 않습니까? 자결을 한 제자는 사부의 명이었다 하고, 사부는 아니라고 하니 말입 니다." "분명 자운의 글이 맞소! 하나 거기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 해가 있을 것이오! 노도는 그런 명을 내린 적도 없고, 자운도 절대 그런 일을 할 아이가 아니오!" 천중 진인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거기에 호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있으리라 보십니까?" "차라리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시오." "무당파가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불똥은 천장 진인에게도 튀었다. "맹주께서는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하고 계셨습니까?"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은 아닙니까?" "설마 무당과 한통속은 아니겠지요?" 봇물과도 같이 쏟아지는 질문에 천장 진인은 연신 고개를 흔들어대 며 부인하기에 바빴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무당파의 잘못을 추궁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잘못된 일이기는 하나 그럴 만도 했다', '사천에서 그의 독단 적인 행동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패천궁의 여인과 함께하 는 그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등등 을지호가 무당산에 서 떠나는 데 일조를 했던 여러 문파의 사람들, 처음엔 입을 다물고 있던 그들도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결국 곳곳에서 이어지는 불신 어린 음성과 그것에 대한 반박과 재반 박의 호통 소리로 인하여 옥허궁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 다. "그래서, 이런 증거와 증언이 나왔는데도 인정을 못하시겠단 말씀 입니까?" 옥허궁의 모든 소란을 일시에 잠재우는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수 십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한 사람에게 쏠리자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을지호는 곧게 펴진 철궁에 서서히 힘을 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분명히 오해네. 아니, 음모라 하는 것이 옳겠 군." "음모라... 하면 어째서 음모인지 제게 정확하게 이해를 시켜주시지 요." 말투는 더없이 정중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들끓고 있는 살기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라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그건......" 분명 할 말은 있었다. 자운이 죽기 전 전음으로 남긴 말, 그리고 품 에서 숨을 거두면서 못다 한 말을 감안하면 결론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러나 할 수가 없었다. '첩자라니......' 차라리 자신이 시켰다고 인정을 했으면 했지 그는 차마 수십 년 전 에 거둔 제자가 사천이 무당에 잠입시킨 첩자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 다. "자네와 사마 소저에겐 뭐라 할 말이 없네. 자운이 얽혀 있는 것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 노도가 정중히 사과를 하겠네. 부디 이해하고 용서를 해주시게.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주게. 믿기지 않겠지만 이는 노도와 무당을 음해하기 위한 음모일세. 지금 당장 밝힐 수는 없 으나 반드시 밝혀낼 것이네." 여기까지가 무당파의 장문인인 그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나 을지호가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궁색한 변명이오!" 을지호의 몸이 움직였다. "멈춰랏!" 그러잖아도 을지호의 기세를 예의 주시하던 천강 진인이 손을 뻗 으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웅휘한 기운이 을지호의 옆구 리를 노리며 짓쳐들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맹한 힘이었다. 을지 호는 천중 진인에게 향하던 몸을 틀어 공격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꽝! 간단한 공수의 교환이었으나 일신에 지닌 실력 자체가 워낙 막강하 다 보니 그 여파가 제법 컸다. 장내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근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병과 잔들이 충격파에 휩쓸려 바닥에 떨 어졌다. "저자를 막아라!" 천강 진인의 외침과 동시에 장내에 있던 무당파의 고수들이 천중 진 인의 앞을 막아서고, 옥허궁을 지키는 무당파의 제자들은 일제히 을지 호를 포위하고 나섰다. 중앙에선 천강 진인이 노기 띤 눈으로 을지호 를 노려보았다. "물러나라. 이대로 물러난다면 지금까지의 무례는 없던 것으로 하겠 다." 무당파의 장문인 앞에서 살기를 뿜어내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행위였다. 게다가 무기를 들고 공격까지 하려 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그냥 덮어둘 일이 아니었다. 치도곤을 안길 수는 없다 하더라 도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를 용 납하지 않았다. 적의 기습 공격에 을지호는 큰 부상을 입었고, 사마유선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장문인의 개입 여부는 불문하고서라도 무당파의 제자 인 자운이 그 일에 관련이 있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서찰이라는 옴짝 달싹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 데다가 본인 스스로가 인정을 하고 자결 을 하고 말았다. 피해자가 책임을 지라는 것이니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더구나 좌중의 분위기도 무당파에 좋지 않게 흐르고 있었다. 이미 무당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뭉개진 상태였다.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 어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천강 진인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를 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그의 고심에 찬 배려를 산산이 부 수는 것이었다. "물러설 수 없다면?" 순간, 천강 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알아라. 단지 상황이 명확하 지않기에 그냥 덮어두려는 것이다." "덮어둘 필요 없소. 난 이미 결심이 섰으니까." "무슨 결심 말이냐?" "서찰이 무당파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이상 나는 사마 소저의 목숨 을 구하기 위해 놈들이 내건 조건을 이행할 생각이오만." '좋지 않다.' 을지호의 말을 듣는 제갈경의 안색은 더없이 어두웠다. 그의 일에 무당파가 관여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이었고 분 명 용납될 수 없는 잘못된 행동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사천과 피 말 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 지금 무당파의 죄를 묻기엔 그들이 드리운 그 늘이 너무나도 컸다. 당장 백도의 최후 보루라 할 수 있는 무당산이 무당파의 영역이었 고 정도맹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무당파였다. 또한 무자 비하게 피해를 입은 여타 문파들과는 달리 무당은 전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싫든 좋든 지금은 무당파와 한 배를 타야 했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을지호가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고 무당파가 이를 실력으로 제지하려 한다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질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을지호에게 큰 은혜를 입은 아미파나 당가는 분명 그를 두둔하고 나설 것이고 몇몇 문파 역시 이에 동조하고 나설 것이 분명했다. 자칫 잘못 하다간 옥허궁에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었다. 아니, 나아가 사천이라는 큰 적을 코앞에 두고 아군끼리 내분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절대로 막아야 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제갈경 한 사람의 힘만 으로 막기엔 버거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건? 설마 하나 놈들의 조건이라는 것이 장문인의 목숨이라도 되 는 것이더냐?" 아무리 흥분을 했더라도 할 말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말이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감히 입에도 올릴 수 없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천강 진인은 노하고 있었다. "아마도." 을지호가 고개를 까딱였다. "네놈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 천강 진인의 말과 함께 을지호를 포위하고 있던 무당파의 제자들이 서서히 움직였다. 동시에 천중 진인의 앞을 막아섰던 노고수들까지 이에 합세했다. '속전속결.' 치료를 했다지만 제대로 된 치료가 아니라 그저 간단히 지혈을 하고 금창약을 조금 바른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해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오래 끌어봐야 자신만 불리하다고 판단한 을지호는 최대한 빨리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무자비한 살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필요한 건 한 사람의 목뿐이었다. 철궁을 꽉 움켜쥔 을지호의 신형이 움직였다. 잠시 흔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그는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한 무당 제자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큭!" 미처 검을 움직여 볼 기회도 잡지 못하고 당하고 만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을지호는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공세를 고작 발 몇 번 바꿔 움직이 는 것으로 유유히 피해내며 연거푸 철궁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어 김없이 비명성이 터져 나오고 예외없이 쓰러지는 자가 발생했다. 그들 이 지닌 무공도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으나 눈에 잡히지도 않을 만 큼 빠르게 움직이며 공격을 하는 을지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여섯 명의 제자가 땅바닥을 굴렀다. 여전히 꿈틀거리는 것 으로 보아 다들 목숨은 부지한 것 같았지만 한눈에 보아도 적지 않은 부상을 당한 듯싶었다. 을지호는 교묘하게 노고수들을 피하며 어린 제 자들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애당초 무공을 비교할 수가 없던 그들은 을지호의 손속을 감당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놈!" 천강 진인을 비롯하여 무당의 노고수들은 분기탱천했다. 비록 무당 파가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고는 하나 여러 중인들 앞에서 이렇듯 일방 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노할 대로 노한 천강 진인이 전면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육 양심공(六陽心功)의 기운을 한껏 끌어올린 그의 태청검법(太淸劍法) 은 가히 무당파의 절기라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눈이 부 신 검영(劍影)이 다소 어두웠던 옥허궁의 장내를 훤히 밝혔다. 을지호는 자신을 난도질할 것만 같은 위협감을 주며 전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예리한 기운에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특히 네 명의 초로인, 처음엔 그저 조용히 술이나 마시며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었 으나 을지호가 처음 공격을 시작할 때 천중 진인의 좌우를 보호하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그들의 기세는 소위 말해 장난이 아니었다. 각 기 짝을 지어 교묘히 검을 놀리며 압박하는 것이 그 어떤 적들보다 위 협적이었다. "양의합벽검진(兩儀合壁劍陳)이로구나!" 노고수들의 움직임을 알아본 혜정 신니가 놀라 부르짖었다. 익히기 가 극히 까다로워 열이면 열 다 실패하고 만다는, 대신 익히기만 한 다면 가히 적수가 없다는 양의합벽검진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저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초라한 노인들의 몸에서 펼쳐 지는 것이었다. 천강 진인의 매서운 공격에 양의합벽검진까지, 을지호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공격에 포위당하여 금방이라도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다. "장문인!" 혜정 신니가 다급하게 천중 진인을 불렀다. "목숨을 거두지는 말라고 하였습니다." 무심한 눈길로 싸움을 응시하는 천중 진인이 대꾸하였다. 그는 혜정 신니가 아마도 을지호의 목숨을 염려하여 이를 만류코자 자신을 부르 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이목이 있습니다. 함부로 해하지는 못할 겁니다." 옆으로 다가온 제갈경까지도 잠시 지켜보라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제갈경도 혜정 신니의 행동을 단순히 을지호를 걱정하여 그러는 것이 라 판단했다. 하나 애당초 말릴 수 없는 싸움이라면 최대한 피해없이 끝나는 것이 최선이었고 천강 진인과 양의합벽검진이면 가능할 듯도 했다. 하지만 혜정 신니는 그런 의미에서 천중 진인을 부른 것이 아니었 다. 을지호를 염려하기 위함이기보다는 오히려 천강 진인과 양의합벽 검진을 사용하는 노인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천중 진인을 부른 것이 었다. 그녀를 비롯하여 당우곤 등 과거 창파령에서 을지호의 무공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은 천강 진인과 노고수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을지호가 적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보여 준 무공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칼질로 십수 명, 그것도 잘 단련된 무인들을 쓸어버리는 무공이 어찌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 혜정 신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을지호의 철궁이 크게 원 을 그리며 천강 진인과 노고수들의 합공을 무위로 돌려 버리는 것을 본 것이다. 탄성은 길지 않았다. 곧바로 이어지는 을지호의 행동에서 그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직감한 혜정 신니는 질끈 눈을 감고 자신도 모르 게 불호성을 외쳤다. "아미타불!" 꽈꽈꽝! 천강 진인과 네 명의 노고수가 펼치는 양의합벽검진의 공세와 을지 호가 펼친 무극지검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쿠쿠쿠쿠쿵!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옥허궁이 마구 흔들렸다.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온갖 집기들이 제각가 암기 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나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뛰어나 무공을 지닌 자들, 더러 약간의 내상과 외상을 입기는 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옥허궁이었다. 꽤나 오래전에 축조된 건물인 데다가 목조 건물이었던 옥허궁은 내 부를 뒤흔드는 거력을 온전히 감당할 여력을 가지지 못했다. 두 힘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힘에 직격당한 왼쪽 모서리의 기둥이 힘없이 부러 지며 지붕이 주정앉았다. 또한 을지호의 맞은편 벽면은 이미 사라져 퀭한 것이 마치 흉가의 무너진 담을 보는 듯했다. 단 한 번의 격도로 승부가 끝나 버린 듯 더 이상의 충돌은 없었다. 다만 지붕이 내려앉으며 일으킨 흙먼지가 옥허궁의 내부를 뒤덮어 버 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승부의 향배도 알지 못 했다. 과거 을지호의 무공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승리를 예상했고 반면에 무당의 저력, 특히 양의합벽검진이 어떤 것인지 익 히 알고 있던 이들은 천강 진인과 노고수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 았다. 잠시 후, 옥허궁의 내부를 뒤덮었던 황진(黃塵)이 서서히 걷히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이곳저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먼지가 걷히기만을 기다리던 천장 진인은 눈앞에 드러난 결과에 입 을 다물지 못했다. 을지호의 중앙에서 양의합벽검진을 펼친, 정면이었기에 무극지검의 힘을 가장 직접적으로 상대한 노고수들은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한 명은 뜯겨져 나간 벽면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 에서 칠공에서 피를 쏟은 채 쓰러져 있었다. "처, 처... 천광(天光), 천음(天陰) 사제....." 천장 진인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그들을 불렀다. 하나 이미 숨을 거둔 그들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고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양의합벽검진을 펼친 노고수들 역시 아무렇게나 널브러 져 있었다. 가슴 쪽에서 미약하게나마 움직임이 있는 것을 보아 숨은 붙어 있는 모양이었으나 살아 있다고 산 것이 아니었다. 전신이 피칠 갑이 된 그들 중 한 명은 양다리가 절단된 상태였고 다른 사람은 한 쪽 팔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또한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도 입으로 피를 토해내는 것을 보면 치명적인 내상도 입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가장 상태가 양호한 사람은 천강 진인이었다. "으으으으." 을지호의 왼쪽에서 공격을 했던 천강 진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 이 흘러나왔다. 부러진 검, 연신 휘청거리는 몸.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자신들의 패배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 정으로 을지호를 응시하던 천강 진인. 그는 곧 처참한 모습의 사형제 들을 보며 단말마의 비명과 동시에 검붉은 피를 흥건하게 쏟더니 정신 을 잃고 말았다. "사제!" 천장 진인이 재빨리 달려가 그를 안았다. "모셔라." 더없이 무겁고 슬픔에 잠긴 천중 진인의 명령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무당파의 제자들이 절명한 시신과 힘겹게 숨을 잇는 부상자를 업 고 옥허궁을 빠져나갔다. 그사이 천중 진인은 오직 을지호만을 노려보 았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가?' 대저 그가 쓰러뜨린 다섯 명의 고수가 누구던가? 천강 진인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무당파에서 으뜸가는 실력을 지닌 고수였다. 물론 이미 은퇴하여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앞두고 있는 몇 몇 선대의 고수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속세와의 인연을 끊 은 분들이었다. 뿐이던가? 양의합벽검진의 조력을 받고 있었다. 개개인의 실력은 천강 진인에 뒤져도 둘이 하나가 되어 펼치는 무당파 최고의 절기 양 의합벽검진은 천강 진인은 물론이고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을지호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다. 두 명이 죽고 두 명은 회복하기 힘든 부상을 당했다. 그나마 천강 진인의 상세 가 양호해 보였으나 역시 두어 달은 족히 요양을 해야 할 중상이었다. 을지호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두 눈을 감고 기둥에 의지하여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의 의식도 이미 반쯤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철혈마단과의 싸움에서 당한 부상이 제대로 낫지도 않은 몸이 었다. 치료라 해봐야 금창약 조금 바른 것이 전부였고, 급히 달려오느 라 변변한 운기조식 한번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당파 최고고 수들과 일전을 벌인 것이다. 애당초 무극지검까지 사용한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왼쪽 손은 옆구리를 잡고 있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핏물이 솟 구쳤고 언뜻언뜻 내장의 흔적도 보였다. 일전에 큰 부상을 당한 데다 가 도다시 큰 충격으로 인해 상세가 더욱 악화된 것이다. 또한 힘겹게 철궁을 들고 있는 손은 아래로 축 늘어진 것이 뼈가 부러졌거나 아니 면 심줄을 크게 다친 것이 분명했다. 그것들에 비하면 몸 이곳저곳에 거미줄처럼 흩어진 세세한 부상 따위는 생채기에 지나지 않았다. "크으으." 천중 진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힘겹게 눈을 뜬 을지호가 다시금 발 걸음을 움직였다. 들어 올릴 힘도 없는 것인지 움직일 때마다 바닥을 긁는 철궁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과연 무당은, 천중 진인은 어찌 대처할 것인가? 을지호가 천중 진인에게 다가갈수록 좌중의 시선은 천중 진인이 어 떤 식으로 대응할지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보다 못한 제갈경이 물었다. 그러나 천중 진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 지 않았다. "그는 이미 싸울 힘을 잃었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천중 진인이 싸늘히 대꾸했다. "사제들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되거나 회복 불능의 부상을 당했습니 다. 그럼에도 저자는 노도를 죽이러 오고 있습니다. 힘을 잃었다고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장문인, 참으셔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분명 오해라 하지 않았습 니까? 하면 더 큰 오해를 불러오기 전에 멈춰야지요." 제갈경이 다급한 심정으로 천중 진인을 달랬다. 혜정 신니도 초점 없는 을지호의 눈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소리쳤다. "아미타불! 을지 대협은 이미 의식을 잃었습니다." "오해라.. 분명 오해였습니다. 하나 저자는 물론이고 여러분도 믿 지 않았습니다." 천중 진인의 입가에 냉소가 지어졌다. "한데 이제 와서 오해 운운하니 참으로 우습군요. 그 오해로 인해 우리 무당파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사이 을지호는 천중 진인의 코앞까지 이르고 있었다. "오해는 분명히 밝혀낼 것입니다. 그래도 저자가 저지른 일을 덮어 두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천중 진인이 양손을 모았다. 한껏 진기를 모았 는지 손끝에서 은은한 청광이 흘러나왔다. 가히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혜정 신니가 천중 진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함께 움직인 당우곤은 을지호의 마혈을 짚으며 그의 몸을 안았다. 일연 사 태를 비롯하여 당가의 몇몇 제자들이 당우곤과 을지호를 에워싸며 만 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들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본 천중 진인이 조용히 물었다. 그 안 에 담긴 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혜정 신니는 절로 몸소리를 쳐야 했 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을지 대협이 분명 성급한 행동을 하기는 했으나 그 또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장문인께서 아량을 베풀어주시지요." "그에게 베풀 아량 따위는 없습니다. 비키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정녕 무당과 척을 두시겠단 말씀입니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나 혜정 신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척을 두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을지 대협이 아니었다면 빈니는 물론이고 아미파는 이미 존재할 수가 없었을 터, 이대로 보고 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당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우곤이 혜정 신니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혜정 신니와 당우곤이 그토록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천중 진 인도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덮어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 다. 하지만 처참한 모습으로 제자들의 등에 실려 가는 사제들의 모습 을 떠올리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도는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결의에 찬 혜정 신니와 당우곤의 모습을 보며 천중 진인은 더 이상 비키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을 적으로 치부하며 공세를 일으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몇 남지 않은 아미파와 당가의 제자들이 분분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에 덩달아 무당파의 제자들 역시 일제히 검을 곧추세우며 그들을 압박했다. 그러자 천중 진인과 혜정 신니를 중심으로 좌측엔 무당파와 무당파 를 지지하는 수뇌들이 모여들었고 우측엔 을지호에게 큰 은혜를 입었 던 문파들의 인물들이 아미파에 힘을 보태는 묘한 형국이 되었다. 물 론 전체적인 전력의 비는 천중 진인 쪽이 현저히 우세했다. 금방이라도 피바람이 불 것 같았다. 그 같은 불상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제갈경이 천중 진인과 혜정 신니 사이에 끼어들며 다시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짓들입니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적을 눈앞 에 두고 아군끼리 피를 보려 하다니요. 장문인, 이래선 안 됩니다. 무 림을 생각하셔야지요." "이미 늦었습니다." "어허, 뒷감당은 어찌하려 하십니까?" "오해는 반드시 풀릴 것입니다. 비키십시오." 천중 진인은 크게 기세를 일으키며 그의 말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의 결의가 얼마나 단호한지 단순한 기세만으로도 제갈경은 전선이 난도질당하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오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제갈경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을지가문의 사람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의식하며 제갈경이 다시금 크 게 외쳤다. "그는 궁귀 을지소문, 그의 손자입니다." 궁귀 을지소문이라는 이름은 그냥 한 귀로 흘려듣고 잊어버릴 만한 이름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이 지 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누구의 후손을 상대하려는지 비로소 의식한 것이었다. 천중 진인도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일단 분위기가 잡혔다고 생각했는지 제갈경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 했습니다. 만약 이곳에서 을지 대협이 잘못 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들은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옛날, 지금의 일과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궁귀 을지소문과 백도가 잠시 척을 둔 일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장문인? 화산파에서 있 었던 일을." 잊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사람들로 하여금 궁귀 을지소문이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도록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었던 일. 당시 당가와의 원한을 갚고자 화산에 올랐던 을지소문은 홀로 종남 파와 공동파, 그리고 화산파의 장문인과 개방의 방주를 격파했다. 더 구나 종남파의 장문인을 제외하고는 일 대 일의 승부도 아니었다. 복 마단(伏魔團)에 속했던 천중 진인은 바로 그때 소문으로만 들었던 궁 귀 을지소문의 실력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머리 속 저편에 각인이 되었다. "당대의 최고수들이 상대를 했으나 막지 못했습니다. 또한 무수히 많은 인원이 달려들었다가 큰 피해를 보았지요." "하면 그들이 무서워 잘못이 있는데도 그냥 덮어주자는 말씀이십니 까!" 자꾸만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가 짜증이 났는지 천중 진인 이 버럭 화를 냈다. 제갈경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잘못은 그대들이 먼저 하지 않았는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 기 위해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을지 가문과의 오해는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나 뻔하기에." "......" 천중 진인은 쉽게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라고 어찌 모를 것인가? 분명 을지 가문은 적으로 만들어서는 결 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냥 물러나기엔 무당파가 당한 피 해가 너무나도 컸다. 오해는 오해대로 받고, 물론 완전한 오해는 아니었지만, 명예는 땅 에 떨어져 진흙탕을 뒹굴고 있었다. 무엇보다 합공을 하고서도 밀렸다 는 사실은 소림과 더불어 천하에서 으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무당 의 자부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사제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능력은 충분했 다. 비록 아미파와 당가를 비롯하여 몇몇 문파의 인물들이 막고는 있 어도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을지 가문이라면 확실히 부담스러웠다. 고작 궁귀 을지소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기겁 을 하며 전열에서 이탈하는 무리가 있을 정도였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천중 진인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갈등을 눈치챈 제갈경은 이쯤에서 모든 분쟁을 마무리해야겠 다는 듯 다시금 입을 열었다. "또한 문주께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미 반쯤은 포기를 했는지 되묻는 음성엔 힘이 없었다. "모두 알고 있듯 포로로 잡혀 있던 고수들을 구하고 소림을 탈환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을지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소림이나 여러 고수들이 그들에게 구명지은(求命之恩)을 입은 셈이지요. 아미 파나 당가와 마찬가지로." 제갈경은 특히 아미파와 당가를 유난히 강조하며 말을 마쳤다. 소 림사나 여러 고수들이 을지호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무당과 대치하는 아미와 당가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언급하며 자칫 그들과도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경고한 것이었다. 확실히 소림을 들먹인 것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잖아도 을지 가문 의 파괴력을 두려워하여 망설이던 천중 진인에게 소림은 물론이고 그 외 문파의 고수들과도 적이 될지 모른다는 제갈경의 말은 지금의 난 처한 상황을 넘기기엔 꽤나 훌륭한 핑곗거리였다. "무량수불! 어쩔 수 없겠군요. 무당의 슬픔이 하늘을 찌르나 무림 제패의 야욕을 품고 있는 사천을 앞에 두고 아군끼리 다투는 것은 분 명 어리석은 짓. 그만두겠습니다. 하나 이번의 일은 차후에 분명히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천중 진인이 주저하는 것을 보면서도 내심 안심을 못하던 제갈경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장문인. 오해가 풀리면 자연히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니라 코앞까지 밀려든 적을 어찌 상대해야 할 것인지 서로 의논하고 걱정할 때입니 다." 잔뜩 긴장을 한 상태로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혜정 신니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천중 진인의 결정을 환영했다. "아미타불! 정말 훌륭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좌중의 분위기 역시 대체적으로 싸움을 피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 같았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던 장내의 대치 상태는 그렇게 해결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을 반전시키는 변수는 또 있었다. "그것은 안 됩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갑작스런 외침의 주인을 찾았다. "자온(紫溫)아!" 그를 알아본 천장 진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단숨에 앞으로 걸어나온 그는 조금 전 자운이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이게 무슨 짓이더냐? 당장 물러나거라!" 행여나 자운과 같은 행동을 할까 염려한 천장 진인이 황급히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러나 자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부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자운 사제가 한순간의 실수로 무당 과 그에게 큰 죄를 지었으나 이미 목숨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 자운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제자는 그 이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해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장문인께서도 그것을 아시고 극진한 사과와 함께 오해를 풀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하셨습 니다. 하지만 저자는 어찌 행동했습니까? 사숙님들을 죽이고 큰 부상 을 입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장문인의 목숨까지도 노렸습니다. 그 런 자를 어찌 이처럼 쉽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용서한 것이 아니라 잠시 뒤로 미룬 것뿐이다. 사숙들의 복수도 중요하고 무당의 체면도 중요하지만 장문인께선 무림의 안위를 걱정 한 것이야." "제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인들도 그리 생각하지 않 을 것입니다. 무당은.. 무당은 을지세가의 위세에 굴복한 것입니다." 자온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놈! 너무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어찌하여 네 짧은 소견으로 고 뇌에 찬 장문인의 결정을 재단한단 말이냐! 당장 잘못을 빌지 못하겠 느냐?" 천장 진인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호통 쳤다. 자온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자가 아는 무당은 이렇지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옳은 길이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도 그렇게 가 르치셨습니다. 어찌하여 을지 가문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강해서입니까? 그들이 강하다는 것은 제자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래도 약자에겐 약하고 강자에겐 강한 것이 무당입니다. 이토록 굴욕 적으로 물러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천장 진인은 자온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누군 가의 입에서 이에 동조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흠, 자온 도장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소이다. 물론 함부로 목 숨을 빼앗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무당에서 그를 보호해야 한다고 봅니다." 말이 좋아 보호지 구금을 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극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을 치료도 하지 않고 구금하자는 말이오?" 당우곤이 그에게 소리쳤다. 대답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치료를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소. 대신 분명 제약은 가해야 할 것이오. 미리 금제를 가해 일시적으로 무공을 제어하거나 구금도 가능 하겠지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어허,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리라 봅니까? 다들 한 가지를 잊고 있 군요. 애당초 시작은 무당에서 했다는 것을. 자운 도장이 그를 사천 에 팔지 않았으면 이런 분란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자 운 도장은 무당의 제자, 그의 잘못은 곧 무당의 잘못입니다. 을지 대 협은 분명 그에 대해 추궁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다소 심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솔직히 자온 도장의 말처럼 그가 무당에 무슨 잘못을 그리 크게 했는지 이해를 못하겠소이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오. 사숙들이 죽임을 당하고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당했는데 잘못이 없다니요!" 벌떡 일어난 자온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당우 곤의 비웃음뿐이었다. "그럼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는데 멀쩡하게 당하라는 말이오? 만약 죽거나 다친 사람이 을지 대협이라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소? 자 신은 해도 되고 남은 하면 안 되는 것이 무당파의 논리요? 그렇다면 참으로 편리한 논리구려." 갑작스런 자온의 등장으로 당혹해하던 제갈경과 혜정 신니가 황급 히 당우곤을 제지했으나 일은 이미 틀어지고 있었다. "말조심하시오!" "그들의 대결에 부당한 점이 있었소? 아니, 부당한 점이 있기는 했 군. 무당파의 고수들은 멀쩡한 상태였고 그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다가 합공까지 당했으니까. 그러고도 패배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자중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어찌 피해자도 아니면서 피해자인 척하는 것이오?" 사실 을지호도 잘한 것은 없었다. 자운이 죽으면서 그 모든 것이 장문인인 천중 진인이 시킨 것이라 말했다지만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 었고 다짜고짜 목숨을 내놓으라며 공격을 한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무 리가 있는 것이었다. 당우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틀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몰고 가버리는 당가 특유의 외곬수적인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자꾸만 무당이 어쩌구 하며 떠들어대는 자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그는 제갈경과 혜정 신니의 만류에도 불구하 고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도대체 당가의 무공은 어떻기에 그런 말을 하는지 보겠소." 얼굴을 붉힌 자온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곤 가히 전광석화와도 같은 몸놀림으로 접근하여 당우곤의 목을 노렸다. "기습이나 하는 것이 무당이 말하는 정의인가?" 싸늘히 웃은 당우곤도 지지 않고 반격을 했다. 천중 진인을 비롯하여 무당파에선 누구도 자온을 말리지 않았다. 더 이상의 중재가 힘들다고 판단한 제갈경도 될 대로 되라는 표정이 었다. 양측의 묵인 하에 벌어진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감정이 상 할대로 상한 그들은 삽시간에 수십여 초를 교환하며 서로의 몸에 큰 상처를 입혔다. 바로 그때, 첨밀각에 급보가 도착했다는 수하의 전언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왕호연이 하나의 서찰을 들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자온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추시오!" 당우곤의 위기를 본 왕호연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자온의 검은 멈출 줄 몰랐다. "제기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왕호연은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굴러다 니는 술잔을 걷어찼다. 비록 뛰어난 무공을 지니지 못했기에 위력 또 한 크지는 않았으나 술잔은 자온의 검을 주춤거리게 만들었고, 당우 곤은 그 틈을 이용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무슨 짓이오?" 자온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승리를 확신했던 무 당파의 도인들도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용 단주님." 무당파 도인들의 반응엔 신경도 쓰지 않은 왕호연이 용정정을 불 렀다. "왜 그러시오?" 잔뜩 긴장한 채 맹주 곁에 있던 용정정이 물었다. "단주님의 허락도 없이 제가 임의로 쉬고 있던 충혼단(忠魂團)을 움직였습니다." 밤낮없이,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맹주를 보호하는 충혼단은 총 오 개 조 육십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맹주를 따라다니며 밀착 보호하는 인원은 일 개 조 열두 명이었고 나머지는 맹주의 거처 외곽에서 보호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왕호연의 말은 곧 옥허궁 외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충혼단원들을 움직였다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용정정이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충혼단은 맹주나 단주인 용정정을 제외하고는 누구의 명도 따르지 않았다. 한데도 그들이 왕호연의 말을 듣고 움직였다는 것은 그럴 만 한 충분한 이유가, 맹주의 안위를 위협하는 뭔가 상당히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유는 곧 알게 될 겁니다." 말을 아낀 왕호연이 천장 진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좌중의 시선이 왕호연의 발걸음을 쫓았다. 싸움은 이미 멈춰져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천장 진인이 다소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예. 맹주님." 살짝 입술을 깨무는 왕호연을 보며 천장 진인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 을 느꼈다. 입술을 깨무는 것은 그의 버릇, 문제는 뭔가 큰일을 보고 할 때마다 나타나는 버릇이라는 것이었다. "무, 무슨 일인가? 말해 보게." "조금 전, 첨밀각에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그것도 대지급(大至急)으 로 말이지요." "어떤 일이기에?" 천장 진인의 음성은 절로 떨리고 있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반드시 아셔야 하는 소식입니다." "허, 무슨 소식이기에 그리 뜸을 들이는 것인가? 어서 말을 해보게 나." 제갈경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식을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천 형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왕호연의 시선이 조금 전 을지호를 구금하자는 자온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며 당우곤과 말싸움을 했던 무진검문(無盡劍門)의 장문제자에 게 향했다. "그, 그게 무엇이오?" 난데없이 지목을 당한 천홍(千鴻)이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 했다. "혹여 잠룡부라는 것을 아시오?" 순간, 천홍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모르십니까?" "그, 글쎄요. 처, 처음 듣는 말이외다." "그래요? 이상하군요. 천 형이라면 아실 줄 알았는데. 그러면 유 장 로는 어떠십니까? 잠룡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왕호연의 질문이 천홍에게서 노가장(魯家莊)의 장로 유삼변(酉三變) 에게 향했다. "그, 글쎄올시다. 노부도 처음 듣는 말이오만." 애써 담담히 말은 하였으나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느 낄 수 있을 정도였다. "잠룡부가 무엇인가? 설명을 해보게." 천장 진인이 더 이상 말을 돌리지 말라는 어투로 물었다. "잠룡부는 일종의 명단입니다." "명단이라니?" 왕호연은 천홍과 유삼변의 안색을 살피며 차갑게 말을 했다. "첩자들의 명단이지요. 사천에서 무림의 각 문파에 잠입시킨 첩자 들의 명단" 좌중이 술렁거렸다. "하면 첨밀각에 올라온 보고라는 것이?" 제갈경의 물음에 왕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명단을 확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품에서조그만 책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것이 잠룡부입니다." "하, 한두 명도 아니고 그, 그렇게나 많단 말인가? 책으로 만들 정 도로?" 천장 진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왕호연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천홍과 유삼변에게 향해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지 않소이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천홍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상한 질문을 계속하는 것인지 영문을 모 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왕호연은 싸 늘한 조소를 보냈다. "이상하구려. 이 책 중간 부분에 보면 천 형을 언급한 글이 나오는 데 말이오." 한껏 비웃음을 흘리며 책장을 넘긴 왕호연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무진검문의 장문제자 천홍의 원래 이름은 두일곤(斗一棍)입니다. 또한 노가장의 장로 유삼변 또한 가명이지요. 그들은 사천, 아니 엄밀 히 말하면 중천이겠군요. 어쨌든 그들은 중천에서 무진검문과 노가장 에 잠입시킨 첩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왕호연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무진검문의 장문인 곡 운(曲雲)이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천홍이 중천의 첩자라니! 어릴 적부 터 지켜본 나일세. 내가 첩자 따위를 못 알아볼 사람으로 보이나?" "유 장로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님께서 노가장에서 몸담으신 지 벌써 수십 년입니다. 더군다나 부친과는 의형제를 맺으신 분입니 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노가장의 젊은 장주 노안검(魯按劍)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왕호연은 선언하듯 딱 잘라 말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소?" 사부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잠시 불안에 떨었던 천홍이 안정을 되찾 고는 냉랭히 되물었다. "부인해도 소용없소. 이미 그대의 처소에서 중천과 내통을 하고 있 는 물증을 잡았으니까. 여기 그 물건이......" 왕호연은 품 안을 뒤지는 시늉을 하며 천홍의 안색을 살폈다. 물증 까지 확보했다는 그의 말에 천홍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놈, 걸렸구나!' 당황하는 천홍을 보며 왕호연은 쾌재를 불렀다. 사실, 물증 같은 것은 없었다. 잠룡부를 통해 중천이 심어놓은 첩자 가 누구인지 알자마자 수하들을 시켜 그들의 거처를 뒤지게 하였으나 아직은 아니었다. 그래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다만 어찌 반응하는 지 한번 떠본 것에 불과했는데 제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끝인가?' 물증까지 있는 이상 발뺌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천홍은 그 즉 시 결단을 내렸다. "죽어랏!" 느닷없는 기습에 모든 이들이 기겁을 하였다. 하나 천홍은 미처 공 격을 펼치기도 전에 제갈경의 눈치를 받고 은연중 왕호연을 보호하고 있던 혜정 신니에게 일장을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아도 꽤나 심하게 맞았는지 입에선 연신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저, 정녕 네가?" 그에게 다가간 곡운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온몸을 떨고 있 었다. "정녕, 정녕 네가 중천의 주구란 말이더냐?" "....." "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네가 중천의 첩자냐고 물었다!" 힘겹게 고개를 든 천홍, 그는 제발 아니라고 말하기를 간절히 바라 는 사부의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사부가 자신을 얼마나 아꼈던가? 비록 중천을 위해 암약했지만 자식처럼 자신을 아끼는 사부를 진정으 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죄..송합니다." "죄, 죄송? 하면 진정... 이놈!" 분노를 참지 못한 곡운이 검을 쳐들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벨 기세 였다. 천홍은 눈을 감았다. 마음이 편했다. 정체를 들킨 첩자에겐 오직 죽 음뿐이다. 기왕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사부의 손에 죽고 싶었다.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몰랐다면...., 허허, 허허허." 허탈하기 그지없는 웃음. 곡운은 치켜 올렸던 검을 차마 내려치지 못했다. 힘없이 검을 떨어 뜨린 곡운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옥허궁을 나섰다. 옥허궁을 에워싸고 있는 충혼대가 잠시 그를 막았지만 왕호연 의 신호로 곧 길을 내주었다. '부디 용서를......' 천홍은 힘없이 걸어가는 사부를 보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곤 스스로 머리를 내려쳤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 무도 말리지 않았다. "당신도 어디 계속 발뺌을 해보시구려!" 왕호연이 유삼변에게 소리쳤다. "이미 드러난 일 변명 따위를 하고 싶지는 않다." 털썩.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바닥에 던진 유삼변이 어쩌면 곡운보 다 더욱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노안검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게는 할 말이 없다." "왕...각주의 말이 사실입니까?" 천홍의 죽음으로 왕호연의 말이 사실임이 증명되었음에도 노안검은 여전히 믿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네 부친과의 예기치 못한 인연으로 노가장에 머물렀고 여기까지 왔 다. 그동안 꽤나 힘들었다. 후∼ 수일간 조용히 떠나려 하였건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씁쓸한 웃음을 보인 유삼변이 노안검을 향해 살며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무인들은 경계하는 표정이 역력했으나 노안검은 여전히 망연자 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너는 분명히 훌륭한 장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노력한 다면 네 부친의 명성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게야." "아저씨...." 유삼변이 어떤 각오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한 노안검이 사석에서 나 부르는 칭호로 그를 불렀다. 음성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억지로 눈 물을 참고 있는 듯했다. "그래, 내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당부하건대 강해져야 한다. 약해져서는 안 돼. 특히 유약한 마음을 지녀서는 안 된다." 등을 토닥여 주려는 듯 유삼변은 처연한 미소와 함께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와 살짝 눈이 마주친 왕호연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비록 첩자로 밝혀지기는 했으나 한 문파의 어른으로서 그가 돌보던,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의형의 아들에게 최후의 당부를 남기는 모습 은 더없이 슬프고 처량하며 안타까웠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나 표정 도 더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왕호연은 보고 말았다. 그런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교활하기 그지없게 움직이는 두 눈동자를. "위험해!" 왕호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늦고 말았다. 유삼변은 이미 노안검의 마혈을 제압한 상태였다. "비겁한 놈 같으니!" "노 장주를 당장 풀어주어라!" "참으로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아닌가!" 설마 하니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이곳저곳에서 욕설이 터 져 나왔다. "그런다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소?" 왕호연이 말했다. "닥치고 비키기나 해. 이 녀석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당장 길을 트 란 말이다!" 노안검을 제압한 유삼변은 그의 몸을 질질 끌며 옥허궁을 벗어나려 고 하였다. "아저씨....." 몸을 움직일 수는 없어도 아혈은 제압당하지 않았는지 노안검이 슬 픈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날 원망하지 마라.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유삼변이 자신을 포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살피며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물었다. "그날,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노가장이 그토록 힘없이 무너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입니까?" 움찔하는 유삼변, 잠시 망설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단 한 가지 일을 했을 뿐이다." "기관매복이었습니까?" "그래, 내가 망가뜨렸다." "그로 인해 부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변변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백오십이 넘는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그만 해라. 나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흠, 언젠간 그리되겠지만 미안하게도 그게 지금은 아닌 것 같구나. 네가 내게 잡혀 있는 한 안전은 보장되는 것이지." 그사이 둘은 어느새 옥허궁의 출입문을 넘고 있었다. "경고하건대 내 발길을 막지 마라. 한 놈이라도 나서는 순간, 이 녀 석의 목숨은 장담하지 못한다." "비겁한 놈 같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마음대로 떠들어라. 어쨌든 난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나직한 음성, 그리고 그 음성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유삼변은 자신 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어, 어떻게...!" 유삼변은 노안검이 어떻게 제압당했던 혈을 풀고 반대로 자신의 몸 을 제압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잊으신 모양이군요. 노가장의 무공에 이혈대법(移穴大法)이 있다 는 것을." "이, 이혈대법!" 유삼변은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날 일에 대해선 끝까지 함구했어야 했습니다." 노안검이 천천히 검을 들었다. "제, 제발...." 죽음이 두려운 것인가? 그토록 자신만만해하던 유삼변이 덜덜 떨었 다. "그냥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 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느니 제가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제 마지 막 배려입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연민 때문인 것인지 노안검의 눈이 붉 게 충혈되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검을 휘둘렀다. "아, 안 돼!" 유삼변의 비명 소리는 금방 끊어지고 말았다. 결국 옥허궁을 벗어난 것은 그의 목뿐이었다. "후∼" 길고 긴 장탄식. 유삼변이 다가오는 순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혈대법을 시전하며 경계를 했고 그로 인해 가족에 대한 원수를 일부분이나마 갚게 된 노 안검은 곡운이 그랬던 것처럼 힘없이 옥허궁을 벗어났다. 삽시간에 두 명의 간세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둘의 죽음으로 모 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혹, 자운의 이름도 그곳에 있는가?" 소란이 잠시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천중 진인이 왕호연에게 물었 다. 또다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왕호연에게 집중되었다. "예. 틀림없이 있습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당파의 제자들 입에서 탄식성이 터져 나 왔다. 털썩 주저앉는 사람까지 있었다. "무량수불!" 살며시 눈을 감는 천중 진인.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도호성을 되뇌 었다. '그랬구나, 그랬기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가 을지호의 행적을 철혈마단 과 북천에 알려줬는지,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되도 않을 말로 자신과 사문에 누명을 씌웠는지를. 천중 진인은 수백 년 동안 고고하게 쌓아온 무당의 명예가 한순간 에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왕 호연의 말은 탄식 정도가 아니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이었 으니. "한 명이 더 있습니다." "더 있다니?" 번쩍 눈을 뜬 천중 진인이 물었다. "자운 말고 또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누군가?" 왕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자온...인가?" 묻는 사람은 천장 진인이었다. "그렇습니다.' "음." 천장 진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용정정이 재빨리 부축 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주저앉았을 만큼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서, 설마 하니 자온 도장까지!" "허, 이거야 원. 그래서 그렇게 을지 대협을 몰아붙였구만."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천중 진인이 우두커니 서 있는 자온에게 물었다. "할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느냐? 방금 전, 기회가 있었을 텐데." "......" 자온의 마음을 알 듯도 싶었다. 아마도 죽으면서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자운의 심정과 같으리라. 천중 진인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 다. "데려가거라." 천중 진인의 명에 의해 자온은 포박을 당한 채 옥허궁 밖으로 끌려 나갔다. "무량수불!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놈들의 계획이 워낙 치밀하였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첩자를 암약시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갈경이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나저나 을지 대협의 일은 어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당우곤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천중 진인이 허탈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비록 오해로 벌어진 일이고 적의 계교에 속아 그리된 것이나 제자 를 잘못 받아들인 무당의 책임이 크니 그의 행동을 어찌 추궁하겠소? 그냥 덮어두기로 하겠소." "그래도 일이 이쯤에서 마무리되니 다행입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을 지 가문으로 인해 큰 사단이 날 뻔했는데... 아, 그나저나 첨밀각주." 천중 진인의 낯빛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알아챈 제갈경이 재빨리 말 을 바꿨다. "예, 어르신." "그 잠룡분가 뭔가 하는 것에 적힌 이들이 이곳에 있던 자들뿐인가?" "아닙니다. 훨신 더 많은 인원이 조직적으로 숨어 있습니다." "쳐내야겠지?" "물론입니다. 맹주님?" 왕호연이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천장 진인을 불렀 다. "왜 그러는가?" 대답은 더없이 처량했다. "놈들이 눈치를 채고 도주하기 전 은밀히 제거하기 위해선 충혼단이 필요합니다.' "알겠네. 재량권을 줄 테니 지금 당장 놈들을 잡아들이게." "알겠습니다." 살짝 허리를 굽혀 대답을 한 왕호연은 용정정에게 눈인사를 보내곤 곧 옥허궁을 빠져나왔다. 그날 충혼단은 전에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들에 의해 소리 소문 없이 제압을 당하거나 제거된 중천의 첩자는 무려 이십 명이 넘 었다. 무당과 을지호를 이간하려는 중천의 계획은 다만 무당파의 고수 몇 과 무당파의 명예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그 러나 그것이 남긴 생채기는 무척이나 크고 깊은 것이었다. 제57장 배반(背反) "잠룡부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조금 전 연락을 받았다.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백도문 파에 잠입시켜던 대다수의 요원들이 은밀히 제거당했다고 하는구나." "그, 그렇다면?" "그래. 백도 놈들이 알았다면 패천궁에서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 제다. 아무래도 일을 서둘러야겠어." "서두르다니요, 뭐를 말입니까?" "궁주의 암살." "혀, 형님. 그건 이미 불가능하다고 한참 전에 결론을 내리지 않았 습니까?" "아니, 과거에는 그런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오늘 저녁은 다시없는 기회지." "그는 강합니다." "정상일 때야 그렇겠지. 그렇지만 오늘 밤은 아니야." "정녕... 하는 겁니까?" "그래, 어차피 기약할 수 없는 목숨이 아니더냐? 그냥 꽁무니를 빼 며 도망가느니 끝자을 봐야겠어. 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후∼ 그야말로 살벌한 밤이 되 겠군요." "오늘 밤에 무림의 역사는 틀림없이 바뀐다. 바로 우리들의 손에 의 해서." "흠, 안색이 가히 좋지 않은 것을 보니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전해 진 모양이구나." 안휘명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처진 걸음걸이로 방에 들어서던 온설 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너무 티를 내지는 말거라. 명색이 패천궁의 군사가 아니더 냐. 힘을 내야지." "예." 온설화가 애써 표정을 바꾸며 대꾸했다. "그래, 이번엔 어떤 소식인지 들어나 볼까?" "중천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닌 것을." "지금까지는 제갈세가가 잘 버텨주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제갈세가가 무너진다면 그쪽으로 쏠렸던 인원이 모조리 남하할 것이고 그리되면 지금 대치하고 있는 병력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제갈세가가 쉽게 무너질까?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중천이 벌써 백여 일이 훌쩍 넘었는데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어." 다소 미심쩍은 표정으로 묻는 안휘명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살며 시 내저었다. "제갈세가가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세가 주변에 펼쳐진 상고 (上古)의 절진(絶陳)들 때문이지 단순히 무력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절진이라도 그 역시 사람이 만들어낸 것, 언젠 가는 파훼법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특히 중천의 군사를 맡고 있는 삼 지안 신도 정도의 인물이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지요." "하면 제갈세가가 무너진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그리될 것입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흠, 그쪽으로 병력을 더 보내야 하나? 그러자니 남천도 문제인데.. 참, 놈들과의 상황은 어떻지?" "힘들기는 해도 그럭저럭 버티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해남파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래, 해남파,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았어." 안휘명은 패천궁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밀리게 되었는지 한심스런 생각에 다소 씁쓸한 웃음을 뱉어냈다. 해남파. 뭍에 올랐다가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은 사형제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광동성에 상륙한 해남파는 과거 패천궁의 영역이었던 지역을 하 나둘씩 점령하며 동진하는 남천을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복수심에 불타 있었지만 무조건 공격을 감행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 았던 그들은 정면 대결로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철저하게 치고 빠지는 식으로 기습, 매복 공격을 하였다. 어찌나 은밀하고 귀신같이 움직였는지 기세 좋게 진격하다 난데없 이 뒤통수를 맞게 된 남천의 수뇌부들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만 한 달여, 무려 육백에 달하는 인원이 희생당하고 난 뒤 였다. 그들의 정체를 파악한 남천은 해남파를 잡기 위해 온갖 계략과 함정 을 팠다. 그러나 일보(一步)를 움직일 때에도 만전을 기하는 해남파 는 좀처럼 함정에 빠지지 않았고 그 흔적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어쩌다 한두 번 남천의 계략이 성공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 만 거의 매일같이 왜구를 상대로 생사를 건 싸움을 해왔던 해남파는 그 어떤 무림문파보다 실전에 강했다. 함정에 빠진 해남파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역공을 펼치고 남천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포위 공격을 하고서도 변변한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큰 피해만 입고 힘없이 물러 나고 말았다. 이후, 기세등등하게 동진하던 남천은 결국 해남파를 견제학 위해 전력의 일부를 남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고, 전력을 다해 패천궁을 공략할 수 없었다. 초반 흑기당과 적기당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연 신 뒤로 패퇴하던 패천궁으로선 해남파가 선전하고 있는 남쪽 방향으 로 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연락은 제대로 하고 있겠지?" "예.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비혈대 대원들에게서 꾸준히 보고 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또한 이쪽에서도 계속 전서구를 띄우고 있습 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해남파와 정보 공유는 확실하게 하고 있습니 다." 안휘명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줘. 정보든 자금이든 뭐든 제공하 고. 뭐,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인원을 요청하면 패천수호대의 대원들을 차출하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줘. 숫자가 꽤나 줄었다지?" "백여 명, 삼 분지 일 정도가 희생당한 것 같습니다." "후∼ 정말 대단해. 그들에게 쓰러진 남천 놈들만 적어도 천은 넘 을 텐데." "남천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항복한 주변 문파들입니다. 과거 패천 궁의 영향력에 있었던." "그거나 저거나. 아무튼 원하는 것 다 들어줘. 의도했든 그렇지 않 았든 그들은 우리에게 그만한 요구를 할 권리가 있고, 우리는 의당 들 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한데 제갈세가 쪽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안휘명은 금방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 곤 생각에 잠겼다. 꽤나 긴 시간이었으나 온설화는 묵묵히 명을 기다 렸다. "어느 쪽 전력이 약하다고 보느냐?" 한참 만에 나온 말치고는 뜬금없는 것이었으나 질문의 의도를 알아 챈 온설화는 살짝 숨을 들이키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남천 쪽이겠지요." "역시, 내 생각도 긇다. 그러면 제갈세가는 최대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달포를 넘기기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달포라... 승부를 걸어볼 만한 시간이긴 한데...." 그동안 최고의 정점에서 패천궁을 진두지휘하느라 피곤에 지친 안 휘명의 충혈된 눈이 더욱 붉게 빛났다. "흑기당과 적기당은?" "정비가 끝났습니다.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팔 할 이상의 힘은 지녔 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호∼ 벌써 그만한 힘을?" "도왕과 비부 두 분 호법께서 진두지휘하신 덕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온설화의 말에 안휘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전력을 다해 한쪽을 친다." "남...천입니까?" 온설화가 신중히 물었다.. "그래. 어차피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면 버티기 힘들다. 아니, 어찌 어찌 버틸 수는 있겠지. 하나 그뿐이야. 역공은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할 터. 그럴 바엔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친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서 지금껏 아껴두고 아껴두었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서 말이야. 아, 해남파에도 연락을 취해둬. 가능하면 함께 움직이자고." "예." "또한 우리가 전력을 다해 남천을 치는 것을 알면 중천에서도 가만 있지는 않을 터, 중천을 막고 계신 암왕 장로님께 미리 연락을 해. 패 퇴해도 좋으니까 최대한 시간을 끌어달라고 말이야." "그리 전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수뇌들에게 회의 소집을 알려." "알겠습니다, 그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 안휘명의 명이 어떠한 무게를 지닌 것 인지 알고 있는 온설화는 전에 없이 신중한 몸가짐으로 방에서 물러났 다. "허허, 군사께서 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뭔가 중대한 일이 라도 터진 모양입니다." 그녀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두 명의 노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하하, 어서 오십시오." 안휘명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두 명의 장로, 유수와 유영에 게 자리에 앉기를 청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유수가 물었다.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살짝 미소를 지은 안휘명은 즉답을 피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제게 무슨 특별한 볼일이라도 있는 겁 니까?" "뭐, 딱히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유수가 말을 흐리자 너털웃음을 지은 유영이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질녀(姪女)가 궁주 걱정을 하도 해서 말입니다. 궁주 를 찾아가 술동무라도 되라고 어찌나 성화를 부리던지. 이렇게 술병까 지 쥐어주며 말입니다." 유영이 고풍스럽게 치장된 술병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다지 많은 양 의 술이 담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을 터, 세 명이서 주향(酒香)을 즐기기엔 충분한 양이 담긴 것 같았다. "하하하, 그러셨군요. 아무튼 잘되었습니다. 그러잖아도 한잔 생각 이 간절했는데 말입니다. 무슨 술입니까?" "장락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장락주(張樂酒)일 겁니다. 비법을 알아냈다고 좋아하던데 그것인 모양입니다." "장락주라... 이름은 그럴듯합니다만 맛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마셔보면 알겠지요. 자, 우선 한잔 받으시지요." 술병을 집어 든 안휘명이 유수에게 술을 권했다. "아니오, 궁주께서 먼저 받으시구려." 유수는 손사래를 치며 술병을 빼앗듯 건네받더니 술을 따랐다. 단숨 에 잔을 비운 안휘명이 술잔을 건네자 유수는 사양하지 않고 술잔을 받았다. 그렇게 몇 배순의 잔이 돌고 나자 술병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말 았다. "허허, 이거야 원. 벌써 술이 바닥난 모양입니다." 유영이 아무리 병을 기울여도 아무것도 쏟아지지 않는 술병을 살피 며 입맛을 다셨다. "하하,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락주에 비할 바는 아니나 이곳에도 꽤나 괜찮은 술이 있으니까요." 기분 좋게 웃은 안휘명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서너 걸음이나 걸 었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가 돌연 몸을 휘청거렸다. "왜 그러시오, 궁주?" 깜짝 놀란 유수가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잠시 어지러워서 그랬습니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다지 독한 술은 아닌데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꽤나 취하는 느낌입니다." "쯧쯧, 그동안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더라니. 그럴수록 몸을 아끼셔 야지요. 궁주는 패천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영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요 근래에 잠을 조금 설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꾸하던 안휘명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 렸다. '살기?' 천천히 다가오는 유영. 얼굴은 분명 걱정스런 얼굴이었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분명 살기였다. 비록 잠깐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으나 전신의 감각은 그 미세한 살기를 감지해 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궁주라는 위치는 모든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중 요한 자리였다. 안휘명은 부축하고 있는 유수의 팔을 슬그머니 뿌리치 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하, 좀 더 마시고 싶지만 피곤하군요. 조금 쉬어야겠습니다. 곧 중요한 회의도 있고 말이지요. 하니 두 분도 이만 돌아가서 쉬시지요." 흠칫 걸음을 멈춘 유영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유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정쩡 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 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유수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만 물러가세나. 궁주께서 꽤나 피곤하신 모양이네. 궁주, 늙은이 들은 이만 물러갈 테니 잠깐만이라도 근심 걱정을 잊고 푹 쉬도록 하 시구려." '역시, 지치긴 지친 모양이군. 쓸데없이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보 니.'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을 앞에 두고 괜한 오해를 할 뻔 했다고 자책한 안휘명은 애써 미안한 마음을 감추며 부드럽게 대답했 다. "잘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하도록 노력은 하지요."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유수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예.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안휘명은 온설화를 통해 수뇌회의를 소집한 것을 떠올리며 인사를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가만히 서 있던 유영이 벼락같이 달려들고 동시에 유수가 손을 뻗었 다. 어느새 빼 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잘 벼린 단검이 들려 있었다. 난데없는 기습에 놀란 안휘명이 황급히 몸을 틀며 단검을 피하고 소 매를 흔들어 유영의 공격을 막아갔다. 파파팡! 유영의 주먹에서 뻗어 나온 기운과 안휘명의 소맷자락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안휘명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둘의 기습 공격을 간단히 막아냈음에도 그의 안색은 가히 좋지 않았다. 단전에서 용솟음쳐야 할 내공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모래알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 이다. '독인가? 하지만 언제?' 하독(下毒)의 기미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 마신 술에도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과연 패천궁이 궁주. 내공이 모아지지 않을 터인데도 그만한 움직 임을 보여주다니." 유수가 진정 감탄한 듯 탄식성을 내뱉었다. "어째서 나를 공격하는 것이오? 그것도 당신이!" 안휘명은 믿어지지 않은다는 듯 소리쳤다. 그들을 대하는 어투도 이 미 달라져 있었다. 그사이 방 안에서 일어난 변괴를 눈치챈 패천수호대 대원 여섯이 방 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검을 곧추세우며 두 장로의 앞을 가로막았 다. 그중 한 명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궁주님?" "그런대로." 간단하게 대꾸한 안휘명은 당장이라도 공격하려는 그들을 제지하며 유수를 바라봤다. "이유를 듣고 싶소. 아니, 그보다 무슨 독이오? 웬만한 독은 위협조 차 되지 않거늘." "딱히 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냥 산공독(散功毒)이라고 해두지." "산공독? 언제 하독을?" "술." "술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소. 게다가 나만 마신 것이 아니라 당신 들도 함께 마시지 않았소?" "우리에겐 전혀 해가 되지 않는 것이 들어 있었지. 그 약은 오직 궁 주의 몸에 축적된 어떤 성분에 반응하는 것이었으니 말일세." "축적된 성분? 그렇다면 내가 이미 중독된 상태였단 말이오?" "딱히 중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애당초 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데다가 이상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대량으로 복용시킨 것도 아니고 조 금씩 아주 조금씩 쌓이게 만든 것이었으니까. 다만 술병에 든 것과 함 께라면 꽤나 쓸 만한 산공독이 된다는 것뿐." 유수의 말인즉슨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 비를 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언제 나에게 하독을 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정도의 허점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럴 사람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좋소. 그건 둘째 치고 왜 이러는지 이유나 들어봅시다. 비공식적이 지만 나에게 장인이 되시는 분이 사위를 공격하여 죽이려는 이유를 말 이오." 쏘아보며 내던지는 어투가 꽤나 신랄했다. "이유라? 적의 수뇌를 제거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 "적? 적이라면 간... 세라는 말인데... 서, 설마!"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는지 말끝을 흐리던 안휘명의 안색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현재 나에게 적이라 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한곳뿐. 사천의 인물이 었소?" 살며시 고개를 저은 유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니, 중천." "......" 안휘명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누구던가? 패천궁에 입궁한 지도 벌서 수십여 년. 숱한 싸움 속에서 생사의 고 비를 몇 번이나 넘겨가면서도 패천궁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그 공로를 인정받아 궁내 최고의 지위라 할 수 있는 장로 직에까지 오 른 인물들이었다. 한데 그들이 간세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막강한 전력으로 패천궁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붙이고 있 는 중천의 간세. "한...가지만 더 묻겠소." 힘없이 내뱉는 안휘명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그가 어떤 질문을 던 지려는지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듣고 있던 유수의 안색에도 미미한 변 화가 일었다. "그녀...도 관...계되었소?" 대답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관계되었냐고 물었소." 안휘명이 재차 물었다. 잠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유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뿌리가 같으니까." "음." 꽉 깨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전신의 기 운이 모조리 빠져버린 상황에서도 지금껏 굳건히 버텨주던 다리가 휘 청거리며 몸 전체가 균형을 잃었다. '그녀가... 그녀가 관계되었단 말인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친의 일을 장성한 딸이 모를 리가 없었 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아내를 잃고 외롭게 지내던 자신에게 접근한 것 자체가 음모의 시작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중독시킨 사람도 그녀?" "그 아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궁주의 음식에 독을 집어넣을 수 있었 겠나?" "크크크! 결국그동안 독이 든 음식을 잘도 받아먹었다는 말인가? 뒈질 줄도 모르고. 크크크!!" 안휘명은 어깨를 들썩이며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하지만 웃음소리 가 멀리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방 안에서 웅웅거리는 것이 은연중 방 안의 음파를 차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참으로 대단하오. 당신이야 그렇다고 쳐도 말년에 얻은 딸이라며 그토록 아끼던 그녀까지 희생시키다니 말이오." 순간, 유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안휘명의 조롱 섞인 말에 눈물을 흘리며 그럴 수 없다고 연신 고개 를 내저으며 안쓰럽게 호소하던, 그러나 결국엔 고개를 끄덕인 후 경 멸스럽게 노려보던 딸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를 위해선 소가 희생해야 하는 법." 착잡한 마음을 애써 감춘 유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만 끝내라." '끝내? 누구를?' 엉뚱하기 그지없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휘명이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 또다시 예상치 못한 배반의 칼이 그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헛!" 안휘명은 난데없이 접근하는 칼날을 보며 기겁을 했다. 그는 어째서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패천수호대의 등을 뚫고 칼날이 나타났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몸 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보다는 등을 꿰뚫고 접근하는 칼날이 조금 더 빨랐고 두 개의 칼날 중 하나가 배를 관통하며 깊숙한 상처를 남겼다. "컥!" 절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 다. "죽어랏!" 좌우 측에서 빙글 몸을 돌린 네 명의 패천수호대가 각각 옆구리와 다리를 노리며 공격해 왔다. 안휘명은 자신의 배를 관통한 칼날을 부 러뜨려 몸을 자유롭게 하더니 그 즉시 몸을 뒤로 누였다. 스스스. 바닥에 닿을 듯 눕는 그의 몸 위로 네 개의 검이 스치듯 베며 지나 갔다. 그중 하나가 방향을 바꿔 아래로 향했지만 부러뜨린 칼날을 치 켜올려 억지로 막아냈다. "타핫!" 벌떡 몸을 일으킨 안휘명이 들고 있던 칼날을 던졌다. 비록 내공이 흩어져 본신의 실력은 발휘할 수 없었으나 그가 던진 칼날은 한 사람 의 목숨을 빼앗기엔 충분할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힘이 실려 있었다. "컥!" 칼날에 적중당한 대원 하나가 목을 붙잡고 휘청거렸다. 그리곤 두어 걸음도 못 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안휘명은 그가 쓰러지며 놓친 검을 재빨리 집어 들고 응전의 자세를 취했다. 아랫배에서 쏟아진 피가 하반신을 적셨지만 지혈 따위를 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크크크, 네놈들까지 한통속이었구나. 좋아, 오너라. 어디 내 목을 취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는지 친히 시험해 보마." 내공을 잃었다 해도 명색이 패천궁의 궁주였다. 비틀거리며 검을 드 는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그를 공격했던 패천수호대의 대원들 이 기세에 눌려 쉽사리 공격하지를 못할 정도였다. "뭣들 하느냐? 빨리 공격해!" 잘못하다간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유수가 몸을 움직이며 소리쳤다. 그것과 동시에 잠시 멈칫거렸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인가?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적을 보는 안휘명의 입에서 오히려 허탈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아랫배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는 순간 발은 이미 묶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상처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 단순한 고통과는 차 원을 달리하는 기분 나쁜 느낌은 틀림없이 단전이 파괴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리라. '바보가 됐군.'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내공이 흩어지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산공독에 당해 흩어진 내공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모이지만 단전히 파괴당했다는 것은 흩어진 내공이 모일 수 있는 장소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으로 지금껏 익힌 내공은 물론이고 다시는 내공을 모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그냥은 안 되지!!" 발이 묶이면 손으로, 손이 묶이면 몸통으로라도 싸워야 했다. 비참 하게 죽을지언정 최소한 비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다가오는 적을 향해 그의 검이 움직였다.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느 린 데다가 위력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방어란 있을 수 없었 다. 오로지 공격뿐이었다. 등허리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불에 덴 듯 뜨거운 고통이 밀려들었 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검을 날린 사내의 목을 날려 버렸다. '크윽!' 정신이 아득했다. 고개를 숙이니 옆구리를 파고드는 칼날이 보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칼날을 움켜쥐고 더 이상의 진 행을 막았다. 칼에 찔린 옆구리와 손에서 피가 솟구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방심 따위를 해서야 되나!" 안휘명이 싸늘히 외치며 그런 식으로 막을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하 며 물러서는 사내를 향해 검을 내던졌다. "크아악!" 최후의 기력을 짜내 찌른 검이 사내의 가슴에 박혔다. 믿어지지 않 는다는 표정으로 뒷걸음질치던 사내는 곧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하 지만 거기까지였다. 단전을 파괴당하고, 등과 옆구리에 치명적인 부상 을 당한 안휘명은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워낙 많은 피를 흘렸 기에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그런 상태론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다가오는 유수를 막기란 불가능했다. '끝이군.' 유수의 육장이 가슴팍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안휘명은 눈을 감았 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휘명의 신형이 끊어진 연처럼 힘없이 날아가 처박혔다. 폐부를 감싸고 있는 뼈가 부러질 만큼 강한 충격이 들이닥 쳤지만 그의 입에선 조금의 신음성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만 서서히 정신을 잃어갈 뿐이었다. "끝이겠지요?" 지금껏 방 안의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던히 도 애를 쓴 유영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아마도 그렇겠지." "흠, 그래도 아직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안휘명의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들썩이는 것을 본 유영이 발을 치켜 올렸다. "무슨 짓이냐?" 유수가 차갑게 소리쳤다.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끝난 목숨이다. 온몸이 부서지고 열 번을 더 숨이 끊어질 만큼 피를 흘렸다.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살아나지 못 해. 가슴이 움직이는 것은 살아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직 식지 않은 것뿐이다." "그래도..." 유영은 영 찜찜한 모양이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말았지만 한때는 우리가 모시던 주군이었다. 욕보일 생각은 하지마라." '냉정하신 형님이 오늘따라 너무 감상적이시군. 하긴, 형님의 입장 에서야 그럴 수 있겠지. 그래도 사위라면 사위인데.' 목적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사위를 죽인 마음이 편할 리는 없을 터. 유수의 태도가 완강하다고 느낀 유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한발 물러났다. 그리곤 홀로 살아남은 패천수호대 대원에게 다가갔다. "애썼다." "아닙니다." "네가 할 일은 알고 있겠지?" "예." "네게 죽음을 강요해서 미안하구나. 너의 희생으로 우리는 천하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입니다. 제 목숨으로 패천궁을 무너뜨리고 군림 천하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다만..." 유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가족들은 걱정하지 마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유수와 유영을 향해 허리를 꺾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왔다. "이곳은 저 아이에게 맡기고 이만 가시지요, 형님." "그래야겠지." 유수와 유영은 홀로남은 사내에게 보내던 안타까운 눈빛을 접고는 곧 궁주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격변이 일어난 실내와는 달리 전각의 외부는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 지 않았다. 때가 때이니만큼 다소 긴장된 모습들이었으나 전각의 주변 을 돌며 궁주의 안위를 지키는 패천수호대원들도 안에서 벌어진 일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지금 나오십니까?" "그래, 고생들 하는구나. 궁주께서 휴식을 취한다고 하셨으니까 급 한 용무가 아니면 잠시 동안 출입을 막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 장로님." "그럼, 수고들 하여라." 유수와 유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사라진 지 이각 후, 궁주의 거처에서 터져 나온 광소(狂笑) 로 패천궁, 아니, 나아가 무림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외부로 알려 졌다. 패천궁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대회의장. 궁주가 암습을 당했다는 급보에 몰려든 수뇌들은 믿어지지 않는 상 황에 다들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원래는 남천을 치기 위한 토론의 장 이 되었어야 했지만 상황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탕! 뇌학동이 탁자를 후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탁자가 부서지고 그 위에 놓여 있던 집기가 바닥을 굴렀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복수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왕 동방성이 그의 팔을 잡았다. "흥분할 일이 아니라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궁주가 암습을 당했 습니다. 그것도 전장터도 아닌 패천궁 한가운데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흥분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럴수록 흥분을 가라앉혀야지. 우리가 흥분하여 날뛸수록 적은 미 소를 지을 뿐일세."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당하고도 머뭇거린 다면 수하들의 사기만 떨어집니다. 그것이야말로 놈들이 바라고 기다 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둘러서 될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네. 지금은 서두를 때 가 아니네." "하지만!" "그건 태상호법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서로의 의견이 격해지려 하자 중앙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노 (老)원로 원헌(元櫶)이 말을 끊었다. "지금은 복수를 말할 때가 아니라 방비를 단단히 할 때라 생각되는 군. 놈들의 목적이 단순히 궁주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네. 분명 다른 흉계를 꾸밀 것이야. 어쩌면 대대적인 공세가 뒤따를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그전에 치자는 겁니다." "쯧쯧, 지금은 때가 아니라니까." 자꾸만 호전적으로 나오는 뇌학동에게 핀잔을 준 원헌이 침묵을 지 키고 있는 온설화에게 물었다. "군사는 어찌 생각하는가?"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복수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냉 정해야 합니다. 보다 방어에 신경 쓰고 최대한 빨리 이번 사태를 수습 해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놈들에게 특별한 점은 없던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비혈대를 총동원하여 적들을 살피라 명해두 었습니다." "잘했네. 그건 그렇고...." 뭔가 하기 힘든 말이 있는지 원헌이 말끝을 흐렸다. "궁주...의 상세는 어떤가?"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수십 쌍의 눈이 오직 온설화의 입을 주시했다. 그들이 어떤 의도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지 알고 있었지만 온설화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위급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모여 있는 대다수가, 아니 패천수호대의 대주 화천명과 온설화를 제외하고는 궁주의 상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극심한 부 상을 당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들의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가망이.. 없는.. 것인가?" 온설화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재차 질문을 하는 원헌의 안색은 절로 무거워졌다. "일단 이 밤을 넘겨봐야 알겠습니다만 뭐라 장담을 드릴 수가 없습 니다. 그리고 설사 살아나신다 해도 다시는 무공을 사용하실 수 없습 니다." "무, 무슨 소린가?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시다니? 하면 폐인이라도 되셨단 말인가?" "단전이... 파괴되었습니다." "허!" "단전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곳저곳에서 탄식과 분노가 뒤섞인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오직 두 사람의 탄식만은 그 의미가 달랐는데. '아직 살아 있단 말인가? 그 정도의 부상을 당하고도? 믿을 수가 없구나.' '그러게 그때 확실히 끝을 냈어야 했는데. 궁주가 의식이라도 회복 하면 큰일이 아닌가!' 유수와 유영이 각자의 생각에 잠길 때 아직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던 뇌학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닙니까? 적이 코앞에 있는 데 궁주께서 무공을 사용하실 수 없다면....." 그의 말은 허공을 격하고 들려온 음성에 끊기고 말았다. "한심한!" 꽝!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의실의 문이 박살이 났다. 감히 누가 있어수뇌들이 모여 대사를 논의하는 회의실의 문을 박살 낼 수 있을까? 있다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패천궁의 수뇌들은 음성 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주가 생사기로(生死岐路)를 헤매고 있거늘 무공의 유무 따위를 논할 때더냐?" 성큼성큼 걸어오며 호통을 치는 노인. 안휘명의 부친이자 전대 패천 궁의 궁주 안당이었다. 회의실에 들어선 그는 다짜고짜 뇌학동을 다그쳤다. "궁주의 목숨이 중요하냐? 아니면 무공이 중요한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명색이 패천궁의 호법이었다. 육십을 훌쩍 넘긴 나이 또한 그리 적 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뇌학동은 안당에게 조금의 불만도 내비치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노장 로 원헌을 비롯하여 장로 두어 명뿐이기 때문이었다. "화천명!" "예. 어르신." 화천명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패천수호대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더냐?" "궁주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말은 잘한다. 한데 네놈은 뭐 한 것이냐? 더구나 이번 일을 저지른 놈들이 패천수호대에 속한 놈들이라지?" "죄..송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구나. 패천수호대라면 패천궁의 가장 핵심적 인 전력이다. 그런 곳에 적의 간세가 잠입한 것도 모르는 안목으로 어 찌 궁주를 보호하고 패천궁을 수호하는 패천수호대의 대주가 될 수 있 다더냐?" 추상과도 같은 질책에 바닥에 엎드린 화천명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거라!"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궁주를 보호하지 못한 잘못, 죽 음으로써 용서를 빌겠습니다." 고개를 들고 비장하게 소리친 화천명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자 검 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칼을 뽑기도 전 그의 몸은 한참이나 날아가 처박혔다. "크으으." 꽤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간신히 몸을 추스르는 그의 얼굴이 고통으 로 일그러져 있었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잘못을 했으면 더욱 분발하여 잘할 생각을 해야지 다짜고자 목숨을 끊으려 하다니! 그따위 정신 상태로 어찌 적 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이냐?" 간단한 손짓으로 화천명을 구르게 만든 안당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 함부로 목숨을 버리려는 것을 보니 네가 패천궁에서 어떤 위 치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안당은 몇몇 수뇌들의 얼굴에 의혹이 솟아나는 것을 보며 엄숙히 소 리쳤다. "패천궁은 장차 네가 이끌어야 할 것이다!" "어, 어르신!" 참으로 뜬금없는 말이요, 선언이었다. 그의 말에 화천명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있었다. "벌써 몇 년 전에 결정된 사항이었다. 궁주가 그러기를 원했고 내가 허락했다. 장로들과도 이미 상의가 끝난 일이었고, 말하자면 너는 다 음 대 패천궁을 이끌 소궁주의 위치란 말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멍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화천명의 눈을 잠시 마주하다가 주변으로 고개를 돌린 안당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이후부터는 화천명을 소궁주의 지위로 대해라. 단, 당분간, 아니, 이번 위기가 끝날 때까지 패천수호대의 대주의 직에는 변함이 없다." "알겠습니다." 누구의 명이라고 토를 달까? 모두들 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너도 그런 줄 알고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하여 이번과 같은 실수는 다시 범하지 않도록 해라." "......." "어허, 뭘 하고 있나? 어서 대답하지 않고." 화천명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원헌이 대답을 재촉했다. 사실 안당이 이토록 전격적으로 후계자를 결정할 줄은 그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저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날 것을 미리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라는 것만을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화천명은 끝내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되었네. 그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아무튼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때 까지는 내가 궁주의 위를 대신하겠다. 군사." "예. 어르신." 온설화가 공손히 대답했다. "어찌 대처해야 하느냐?" "우선은 궁주께서 암습을 당한 것을 비밀로 했으면 합니다." "어째서?" "무릇 수장의 안위에 이상이 있으면 밑에 있는 수하들이 동요하는 법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굳이 궁주의 부상을 알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동방성이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을 것 아닌가? 이미 알 만한 사람 은 다 아는 눈치던데." "그래도 자세한 것은 모를 겁니다. 그냥 부상을 당하셨다는 정도로 밝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견대로 하여라. 문제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을 막아내는 일 이다. 그래, 놈들을 물리치기 위한 어떤 계획이라도 있었느냐?" "예. 예정대로라면 오늘 이 자리에서 중대한 결정을 하기로 되어 있 었습니다." "무엇이더냐?" 온설화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음성을 다소 높였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제갈세가가 곧 무너질 것으로 예측되 고, 이후 중천의 대대적인 공세가 예상됩니다. 그에 발맞춰 남천에서 도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올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제갈세가가 중천의 발목을 잡고 있고 해남파의 조력으로 그런대로 버텨왔지만 양쪽에서 본격적으로 합공을 해온다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버티기조차 힘든 실정 입니다." "충분히 버틸 수는 이다. 다만 반격을 하여 주도권을 회복하기가 힘 들겠지." 안당의 생각 역시 안휘명과 다르지 않았다. "예. 궁주님도 같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갈세가가 무너지기 전 패천궁의 모든 힘을 동운하여 해남파와 함께 남천을 치려 하였습 니다. 현재 중천과 대치하고 있는 병력의 패퇴도 감수하고 말입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려 하였구나. 하긴, 나라도 그리했을 터. 판단은 좋았다." "하지만 궁주께서 저리 쓰러지시고 말았으니 틀어져 버린 계획이 아 닙니까?" 유수가 조용히 물었다. "아직 포기할 단계는 아니네, 유 장로." "그럼 강행하실 생각입니까?" "지금 물러나면 끝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궁주가 저 몸이 되어 직접 지휘를 할 수는 없으니 나라도 나서야겠지. 군사는 준비를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참, 궁주를 암습한 녀석은 어찌 되었느냐? 중천에서 파견된 첩자라 는 것은 들었다만." "그렇습니다. 함께 발견된 나머지 오 인과 함께 어려서부터 잠입한 첩자로 밝혀졌습니다." "순순히 자백을 하더냐?" "예. 이미 살기를 포기했는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있습 니다. 다만 궁내에 다른 첩자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입을 굳게 다 물고 있습니다." "흠, 한 놈도 아니고 무려 여섯이나 패천수호대에 있었다. 분명 뒤 를 봐주는 놈이 있을 게다. 게다가 궁주는 산공독에 중독되었더구나. 비록 극독은 아니라지만 고수를 상대함에 있어 어쩌면 가장 적절한 것 이라 할 수 있을 터. 문제는 궁주 정도나 되는 고수를 중독시킬 실력 을 지녔다는 것인데 패천수호대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짓이다." "그 말씀은...." "그래, 분명 다른 방조자가 있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 가. 더 다그쳐 봐. 뭔가 나올 테니까. 유 장로." "예, 어르신!" 내심 긴장을 하고 있던 유수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며 대답했다. "그 일은 자네가 책임지도록 하게. 틀림없이 있을 것이야. 반드시 찾아내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 그리고 딸아이를 잘 위로해 주게. 궁주의 곁을 지키고 있네 만 꽤나 놀란 모양이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나 안쓰 럽던지." "예....."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유수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기만 했다. 제58장 만변환환쇄금진(萬變幻幻鎖禁陳) 일패, 패천궁의 궁주가 죽었다! 누가 손쓸 틈도 없이 번져 나가 소문은 사천의 준동으로 뒤흔들리 던 무림에 또다시 거대한 회오리를 몰고 왔다. 그러잖아도 잠룡부의 존재와 그들의 활약으로 무당파가 쑥대밭이 되고 을지호마저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하던 사람들 은 거의 차이를 두지 않고 전해진, 정도맹과 함께 무림을 지키는 양대 축이었던 패천궁의 궁주마저 적의 간세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엄청난 충격과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당황한 패천궁의 수뇌들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자 하였으 나 애당초 그 소문 자체가 중천에서 퍼뜨린 것으로 진화될 리가 없었 다. 소문은 와전에 와전을 거듭하여 나중엔 패천궁의 궁주뿐만 아니라 주요 수뇌들은 물론이고 아예 패천궁 자체가 무너졌다는 허황된 소문 까지 나돌았다. 그 소문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선 안휘명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길뿐이었다. 하나 며칠이 지나도 그는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여전히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었다. 패천궁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반대로 그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던 중천과 남천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은 불문가지. 해남파와 연 합하여 남천을 친다는 계획마저 유보될 만큼 상황은 심각했다. 한편, 잠룡부를 통해 유수와 유영의 존재를 알고 급히 남하하던 냉 악 일행은 패천궁과 고작 하루 거리에 있는 객점에서 그 소식을 접하 게 되었다. "늦은... 것인가?" 헐레벌떡 뛰어온 송백검 백준으로부터 패천궁에 벌어진 참상을 듣 게 된 냉악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뭐가 어째! 궁주가 당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침상에 누워 덜 깬 잠을 쫓고 있떤 응사웅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 다. "나도 믿기는 싫지만 이미 저잣거리에 퍼진 소문이다. 입만 열면 다 들 그 얘기를 하고 있어. 제기랄!"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백준이 술병을 집더니 단숨에 병을 비워 버 렸다. "어디까지가 소문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던가?" 냉악이 물었다. "소문에 의하면 암습을 당한 궁주가 목숨을 잃었고, 수뇌들도 여럿 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세하게 말해 봐! 답답하다!" 어느새 옆 자리를 꿰차고 앉은 경의비마 한가풍이 가슴을 치며 채근 했다. "궁주가 암습을 당해 큰 부상을 당한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 목숨을 잃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쉽게 당할 궁주가 아니지. 다만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 는 것을 보면 상세가 꽤나 심각한 모양이군." 냉악이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궁주를 암습한 자들이 유수와 유영이 아니라 패천수호대에 잠입한 놈들이라 합니다." "뭐? 그게 말이 돼? 궁주가 어떻게 그딴 놈들한테 당해!" 멱살이라도 잡을 듯 흥분하여 달려드는 응사웅, 술잔엔 입도 대지 않았건만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난들 알아? 소문이 그렇다는 거야." "아니, 틀림없이 함께 암습을 했을 것일세. 다만 놈들은 뒤로 빠진 것이겠지. 여전히 할 일이 많을 테니까. 서둘러야겠군. 놈들이 있는 한 궁주의 목숨은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이니까." "그나저나 연락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양숭이 넌지시 물었다. 그는 냉악이 의문 섞인 표정으로 쳐다보자 재차 입을 열었다. "여령이 말입니다. 물론 최고의 의원들을 동원하고 있겠지만 어디 생사괴의의 후예만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연락을 하여 부르는 것이 좋 겠습니다." "딱히 연락할 방법이 없지 않나? 아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 소문을 들었다면 이미 달려오고 있을 테니까." "하긴, 검왕 어르신은 그렇다 쳐도 유불살 그 친구가 가만히 있지 못할 테니까요. 아마 업고서라도 달려올 겁니다." "일단은 궁으로 들어가세. 가서 놈들의 상판을 한번 봐야겠어." 차갑게 식은 찻잔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킨 냉악이 발걸음을 움직였 다. 최대한으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원로들이 분분히 그 뒤를 따랐 다. * * * 몸을 회복한 수호신승과 여타 고수들에게 소림을 맡기고 남궁세가 를 찾아 남하하던 을지소문 일행이 무당산에서 벌어진 일과 패천궁의 참사를 듣게 된 곳은 하남성 각산(角山) 지방을 지나칠 때였다. "어찌할 생각이오?" 객점을 빠져나온 을지소문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따라오는 환야에 게 물었다. "가봐야지요." "그럼 이곳에서 헤어집시다." "헤어지다니요? 하면 아버님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을지휘소가 당황한 낯빛으로 되물었다. "따로 가볼 곳이 있다." "호에게 가실 모양이군요." 환야의 곁에서 조용히 묻는 남궁혜의 말에 을지소문은 그럴 리가 있 느냐는 듯 괘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턱도 없는 소리. 멍청하게 맞고 다니는 놈을 찾아서 뭐 하게!" "그럼 어째서...." "놈이야 그렇다 쳐도 손자며느리는 구해야 하지 않겠소?" "아! 그렇군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남궁혜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을 지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손자며느리라면 형님과 함께 움직인다는 여인 말인가요? 납치를 당했다는?" "알면서 뭘 묻느냐?" "하지만 형님의 부인이라는 말은 없지 않았나요? 그냥 함께 다니는 여인이라고 하던데요." "그거나 저거나. 남녀가 유별한데 같이 붙어 다니면 뻔한 거지. 아 무튼 사내놈이 제 여자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빼앗기다니. 쯧쯧, 정말 가문의 망신이야, 망신." "그 아이를 납치한 곳이 북천이라 들었습니다. 수백, 어쩌면 수천이 넘는 무인들이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님 혼자서는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을지휘소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괜찮다. 어차피 싸울 생각도 없으니까. 그냥 몰래 가서 빼올 생각 이다." "그래도..." "되었다니까.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을지소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그의 고 집을 알기에 다들 뭐라 말을 하지 못하자 환야가 을지휘소의 팔을 잡 았다. "아범은 우리와 함께 가자." 환야까지 그리 말하자 을지휘소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직이 내 뱉는 한숨으로 부친의 말을 따랐다. 그래도 불안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을지소문이 그런 을지휘소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염려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고, 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의 시선이 환야에게 향했다. "중천의 우두머리는 꽤 강하다고 들었소. 부디 조심하구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손자며느리나 잘 챙겨요." 환야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을지소문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여기며 피식 웃고 말았다. "자 아무튼 다들 조심하고 조만간 웃는 얼굴로 만납시다. 먼저 가 겠소." 말이 끝날 땐 그의 몸은 이미 무당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예. 아버님. 조심하십시오." 멀어지는 그를 향해 다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자, 우리도 가자꾸나." 을지소문이 거의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쯤 환야도 걸음을 옮겼다. 패천궁이 있는 남쪽 방향이었다. * * * 제갈세가와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는 중천의 진영. 손수 제갈세가를 치기 위해 나선 중천의 천주 악위군은 유려하게 굽이쳐 흐르는 냇물을 뒤로한 채 신도로부터 전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지난밤 싸움에서 발생한 전사자가 일곱이고 부상자는 스물을 조금 넘었습니다." "놈들은?" "제대로 파악은 되지 않으나 그래도 대여섯은 쓰러뜨린 것으로 보입 니다." "죽은 것인가? 아니면...."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질문에 신도는 진땀을 흘렸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일이군. 제갈세가를 치기 위해 들인 시간과 병력이 얼마인데 무너뜨리기는커녕 아무런 성과도 없이 피해만 늘어가 니, 그동안 입은 피해가 얼마던가?" "어림잡아...." "어림은 무슨! 정확하게!" "예. 지금까지의 집계로는 전사자가 사백칠십에 부상자가 칠백이 조 금 넘고 있습니다." "허, 말이 안 나오는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 대다수가 인근 지역에서 항복한 문파와 무인들이라는 겁니다. 중천이 입은 피해는 오십 미만으로 그들과 비교 하면 미미합니다." 신도로선 패배의 아픔을 조금 덜고자 한 말이었으나 오히려 타오르 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러잖아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악위군은 그의 말을 용납하지 않았다. "피해가 미미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북풍한설이 이보다 찰 것인가? 신도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전력이면 제갈세가를 무너뜨리고 이미 패천궁과 최후의 일 전을 벌이고 있어야 했다! 한데 이게 무슨 꼴인가? 눈앞에 큰 적을 두 고도 뒤통수가 무서워 전력을 다하지 못하지 않는가? 아니지, 엄밀히 말해 패천궁이 아니라 오히려 이쪽에 전력을 쏟고 잇는 셈. 그런데 결 과는 어떤가? 아군의 피해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는데 얻은 것이 무엇인가? 놈들이 설치한 진을 무너뜨렸는가?" "아닙니다." "하면 잃은 만큼의 목숨을 거뒀는가?" "아닙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결론 이로군. 하하하, 이거야 원. 웃겠어, 지나가는 개가 웃겠어." "죄, 죄송합니다." 악위군의 앞에서 시립하고 있던 신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땅바 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외면한 채 오후 햇사을 받아 빛나고 있는 시냇물을 바라보던 악위군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후∼ 일어나게, 군사. 사실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나 또한 지금껏 저토록 말도 되지 않는 진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 니. 하지만 군사의 능력이라면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 네. 그렇지 않은가?" "송구합니다." "없는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신도, 옷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그 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방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악위군이 반색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 말해 보게, 어서!" "지금 제갈세가 주변에 펼쳐진 진법은 만변환환쇄금진(萬變幻幻鎖 禁陳)이라는 천고의 절진입니다." 그래도 진식에 제법 많은 견문이 있다고 자부했건만 들어보지 못한 괴이한 이름이었다. "만변환환쇄금진? 그러한 진법도 있던가?" "예. 문헌으로만 전해오던 상고의 진법입니다. 저 또한 본 적은 없 습니다. 어쩌면 제 추측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과연 제갈세가란 말이군." 제갈세가가 아니라면 어찌 문헌으로만 전해오는 진법을 직접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제갈세가의 끝없는 저력에 악위군은 새삼 놀라고 있 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또 있는가?" "큰 틀로 만변환환쇄금진을 펼치고 동서남북 각 방향엔 오운지진(烏 雲之陳)과 금문진(禁門陳), 구궁진(九宮陳), 팔진법을 응용한 팔로연 환진(八路連環陳)이 뒤섞여 펼쳐져 있습니다. 각각의 진은 오직 하나 뿐인 생문(生門)을 서로의 사문(死門)으로 막아버리면서 완벽한 진세 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부딪치는 족족 별 피해를 입히지 못 하고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사실, 사망자나 부상자 의 대다수가 적과 직접 싸워 그리된 것이 아니라 진법이 일으키는 기 운에 휘둘려 그리된 것입니다." "허, 갈수록 태산이군. 아무튼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는 법. 진법의 정체를 알았다면 파훼할 수 있는 방법도 알고는 있겠지?" 약간의 기대감이 깃든 음성이었다. "네 개의 진세라면 모를까 주축을 이루고 있는 만변환환쇄금진은 파훼법이 없습니다." 신도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음." 악위군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주군 말씀대로 절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 비록 파훼 는 하지 못한다 해도 약점은 파악했습니다. 그 약점을 파고들면 제갈 세가를 무너뜨릴 방법이 분명히 보일 것입니다." "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군사라면 묘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네. 그래, 어떤 약점이 있던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항상 선제공격을 한 것은 우리 들이었습니다. 놈들은 그저 방어에만 신경을 쓸 뿐 먼저 공격을 한 것 은 열 번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전력이 열세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또한 주변에 펼친 진세를 믿고 있을 테니, 굳이 선공을 할 이유가 없을 터." "그러나 참으로 묘하게도 보름에 한 번씩은 꼭 선공을 가하고 있습 니다." "보름이라...." 신도의 음성에 묘한 기운이 깃든 것을 느꼈는지 조용히 읊조리는 악위군 또한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유가 있겠지?" "예. 그 이유를 괴이 여겨 차분히 조사한 결과 생문은 존재하지 않 고 오직 사문만이 존재하는 만변환환쇄금진도 때로는 한 번씩 생문이 열릴 때가 있었습니다." "보름마다?" 악위군도 감을 잡은 듯했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보름마다 생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생문이란 곳도 일정치 않아 그 장소가 매번 다르지만 분명히 보름 주 기로 진세에 미미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갈세가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겠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 약점이라는 것이 언제쯤 다시 나타나겠는가?" "오늘 밤입니다." "오늘 밤? 지금 오늘 밤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해시(亥時:21-23)나 자시(子時:23-01)경입니다." "좋아, 놈들이 그때 도발을 해온다면 보다 확실하겠지." "하지만 약점을 알았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째서?" "잠시, 따르시지요." 신도는 의문을 표시하는 악위군을 진영 안으로 인도하여 그가 직접 제작한 지형도를 보여주었다. "그 동안의 일을 토대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오늘 밤 생문이 열리 는 지점은 바로 이곳으로 예상됩니다." 신도가 가리킨 곳은 제갈세가의 동북방으로 다른 곳보다 유난히 숲 이 우거져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이곳의 지형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숲인가?" "죽림(竹林)입니다. 하나같이 수십 년은 묵은 데다가 빽백하기가 여 느 삼림 못지않습니다." "죽림이라... 게다가 우거지기까지? 매복하기에 딱 좋은 장소인걸. 기습하기도 좋겠어." "거기에 더해 그쪽 지역은 오운지진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만변환환 쇄금진을 뚫고 들어간다 해도 언제 어디서 매복 공격을 받을지 모르고 또한 만변환환쇄금진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진세를 이겨내야 합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되겠군." "놈들로서도 그곳이 뚫리면 어찌 되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사활을 걸고 덤벼들 것입니다." "하긴. 한번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일 테니까." 사방이 포위당한 상태에서 방어막이 뚫린다는 것은 곧 전멸을 의미 하는 것.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생문이 열리는 시간은 얼마 정도나 되지?" "최대 한 시진입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악위군은 고개를 돌려 지형도를 물끄러미 살폈다. 그리곤 조용히 물었다. "오운지진은 어떤가?" "예?" "오운지진은 파훼할 수 있느냔 말일세." "그동안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지형도를 살피던 악위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좋아, 그렇다면 되었네. 이번 싸움엔 자네도 직접 참가하게." "알겠습니다." 즉시 대답을 했으나 직접 전투에는 참여한 적이 없었던 신도는 다소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그렇게 걱정하지는 말게. 이번 싸움엔 내가 직접 참여할 것이니." 악위군이 살짝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주, 주군!" 깜짝 놀란 신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악위군을 응시했다. "자네도 들었지? 패천궁의 궁주가 사경을 헤매고 있네." 중천의 모든 정보는 일차적으로 신도에게 전달된다.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쉽게 살아나지 못할 거야. 사기도 말이 아니라 하고. 지금이 기회네. 엉뚱한 곳에서 발목을 잡혀 자칫 시간을 지체하다간 절호의 기회를 잃을 수 있어. 또다시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겠지. 물론 언 젠가는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나긴 하겠지만 패천궁의 저력을 생각하면 피해 또한 만만치 않을 터. 우왕좌왕하고 있는 틈을 타 단번에 몰아붙 여야 돼." "그래도 너무 위험합닏. 재고를 하심이......" 우두머리란 결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악위군의 실력 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신도였으나 그로선 일 할, 아니 일 푼의 변수라 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면 그야말로 끝장이 아니던가. "위험? 자네가 진법만 확실히 파훼시킨다면 이곳에 위험 따위는 없 네. 나와 무공을 논할 수 있는 자도 없네. 있다면 다른 곳에 있겠지." 단 한 마디로 신도의 걱정을 지워 버린 악위군은 슬쩍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소림사였다. 물론 진영 안에 있는 그가 바깥을 볼 수는 없었다. 또 본다고 하여 도 소림사가 보일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소림에 닿아 있었고 북천의 손에서 소림을 구했다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떠올 리고 있었다. * * * 제갈세가의 무후청. 희미한 등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제갈융이 젊은 청녀과 마주 보고 있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시작한 모양이구나." "예, 백부님. 아버님과 숙부께서 와룡대(臥龍隊)를 이끌고 선공을 하셨습니다." 제갈융과 독대를 하고 있는 청년은 온설화를 만나기 위해 패천궁으 로 떠났던 제갈은이 중천의 암계에 걸려 목숨을 잃자 그 자리를 대신 하여 제갈세가의 두뇌 역할을 하고 있는 제갈근의 막내아들 제갈선 (諸葛宣)이었다.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으나 그는 제갈은이 인정할 정도로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기재였다. "후∼ 걱정이다.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것인지."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만변환환쇄금진의 유일한 생문이 생성되 는 지금, 적의 시선을 끌지 못해 노출이라도 되는 날엔 그야말로 끝장 이니까요."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따라 불안하구나.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 어." 제갈융은 도무지 안색을 펴지 못했다. "혹여 놈들이 생문을 눈치채지는 않았을까?" 아니란 대답을 해주길 바랐건만 제갈선은 냉정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명색이 천하를 노리는 집단입니다. 뛰 어난 지략을 지닌 인사도 부지기수로 많을 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백 여 일이 훨씬 넘은 지금이라면 최소한 세가를 둘러싸고 있는 진이 어 떤 것인지는 알아냈겠지요. 어쩌면 보름마다 약점을 노출한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정녕 큰일이 아니더냐?"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오늘만큼은 괜찮을 겁니다." "어째서?" "이 밤, 생문이 열리는 곳이 바로 청죽림(靑竹林)입니다. 생문을 찾 아 들어온 적을 치기에 가장 좋은 장소지요. 무사 열이며 능히 백은 상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며 또한 오운지진이 위력을 발휘하기 가 가장 좋은 장소 역시 청죽림입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네 말이 맞기는 하다만...." 제갈선의 여유로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제갈융은 좀처럼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러자 빙그레 웃은 제갈선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안심을 할 수 있는 것은 둘째 숙부께서 봉추대(鳳 推隊)를 이끌고 그곳을 지키고 계시다는 겁니다." "넷째가 그곳에?" "그렇습니다." "넷째가 그곳에 있다니 다행이구나. 후∼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 한 데 어째서 공격을 하지 않고?" 원래 선공을 할 때 늘 앞장선 인물이 제갈능이었다. 지금껏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진법의 위력도 있었지 만 바로 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부탁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백부님. 먼저 말씀을 드렸어 야 했는데." "아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백부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쯤이면 생문을 눈치챌 가능성이 있다고요. 말슴드렸다시피 저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 다. 공격을 하여 이목을 끄는 것도 중요하고 피해를 줄이는 것도 중 요하지만 지금으로선 무엇보다 생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구 나 오늘따라 천기(天氣)가 좋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에...." "처, 천기가 말이냐?" 제가융이 황망히 되물었다. "예. 해서 둘째 숙부님께 생문의 방어를 부탁드렸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리할 생각입니다. 제 행동이 너무 주제 넘는 것은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잘했다. 천기가 좋지 않다는데 그리해야지. 허허, 그나저 나 벌써 천기를 읽을 수가 있더냐? 참으로 대견하구나. 막내 숙부도 네 나이 때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먼저 간 문성 제갈은을 생각하는지 그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과찬이십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었을 뿐입니다. 아무튼 크게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천하에 누가 있어 무성 숙부님을 뚫고 침입을 하겠습니까?"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비로소 안심을 했는지 제갈융의 안색이 홀짝 펴졌다. 하지만 그는 미처 몰랐다. 제갈선의 능력에 너무 감탄한 나머지 몇 가지 중요한 사 싱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빼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제갈선이 천재들 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 그 첫째요,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학식을 지니고 있던 불세출의 천재 제갈은이 나이 서른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하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이 둘재요, 특히 어느 날 천기를 살피던 제갈은이 '젊어 보았던 하늘과 지금 본 하늘은 참으로 딴판이 군요' 하고 웃으며 말했던 것을 잊은 것이 그 세 번째였다. 그것을 잊음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 * 제갈세가 동북 방면. 일단의 무리들이 침묵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맨 앞에 먹 물색의 무복을 입고 청홍색의 수실로 장식된 검을 든 악위군이 서 있 었다. "이제 시작인가?" 악위군이 조용히 물었다. 비록 눈에 확 들어올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동안 시야를 완벽하게 차 단하고 있던 짙게 깔리 안개가 조금씩 엷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안개가 짙군." "생문이라 하여도 웬만한 절진의 사문보다 더 위험합니다.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무공은 약하다지만 아무래도 진법에 가장 밝은 사람은 단연 그였다. 신도는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 그가 두어 걸음을 나서기도 전 그의 앞을 가로막는 손이 있었다. "내가 앞서 가지. 자네는 내 뒤를 따르게. 두 분 호법께서 군사에게 신경을 써주시오." 신도의 발길을 막은 악위군이 그를 따라나선 성한(成閑)과 소무(昭 武)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두 호법의 대답을 듣고 그들이 신도의 양 옆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 인한 악위군이 빙글 몸을 돌리더니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제갈세가가 있는 곳은 서남방입니다. 일단 그쪽으로 방향을 잡으십 시오." "알았네." 파훼법이 없다는 천고의 절진 만변환환쇄금진. 한번쯤은 망설일 만 도 하건만 악위군은 조금도 주저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신도와 성 한, 소무 두 호법이 그 뒤를 따르고 신도가 고르고 고른 정예 칠십도 은밀히 이동을 시작했다. "당숙,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합니까?" 제갈능과 함께 청죽림을 방어하고 있는 봉추대의 대주 제갈승(諸葛 昇)이 물었다. 비록 나이는 비슷하지만 서열에서 차이가 나는지라 꽤 나 조심스런 태도였다. "아직까지 생문이 열려 있다. 생문이 닫히고 진세가 원래대로 돌아 올 때까지는 이곳을 떠날 수 없겠지." "생문이 열린 지 한 시진이 다 되어갑니다. 그런데도 적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만변환환쇄금진에 대해 파악을 하지 못했거나 이목을 흐 리기 위해 시작된 싸움에 시선을 빼앗긴 탓 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기다린 적은 없다. 오지 않기만을 빌었을 뿐." "예?" 제갈승은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변환환쇄금진은 감히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진 이다. 오죽했으면 공격해 들어오는 적은 물론이고 진에 대해 알고 있 는 아이들까지도 진세가 만들어낸 환상에 아까운 목숨을 잃었을까? 비록 생문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험하기가 말로 할 수 없을 터. 한데 그러한 진세를 헤치고 적이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거라. 실로 두려운 자들일 게야.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실력을 지닌." 그제야 적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이해한 제갈승은 자신 도 모르게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숙께서 염려하실 만한 적은 없는 것 같... 당숙?" 제갈승은 어느 순간 청죽림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제갈능의 안색이 급변하는 것을 괴이 여기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적이 나타난 것 같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갈능은 거의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는 듯했다. "저, 적이란 말입니까? 확인해 보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제갈승이 재빨리 몸을 날려 청죽림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가장 앞선 곳에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수하들로부터 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그는 굳을 대로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당숙 말씀이 맞았습니다. 지금 적이 침입해 오고 있다 합니다." "몇 명이나 되느냐?" "삼십이 조금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삼십이라...." 제갈능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만변환환쇄금진을 뚫은 고수가 삼십 이상이라니. 힘든 싸움이 되 겠군.' 세가를 둘러싸고 있는 만변환환쇄금진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늘 선봉에서 싸움을 해왔던 제갈능 자신이었다. 하마터면 그 자신까지도 진세에 휩싸여 크게 낭패를 당한 경험이 있지 않던가. 한데 그런 진세를 뚫고 삼십에 가까운 인원이 침입했다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고 다시 말해 제갈세가에 극도로 위 험한 상황이 밀려오고 있음을 의미했다. '봉추대 인원이 칠십이던가? 인원은 배가 넘고 지리적 이점도 취하 고 있다. 또한 저들은 진을 뚫고 오느라 많이 지쳤을 터. 분명 승기는 우리에게 있다. 하나 어째서 이리 불안한 것인가?' 제갈능은 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전신의 감각들이 극도로 예민해지 는 것을 의식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이곳에서 뼈를 묻 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요소요소에 은신하고 있는 봉추대의 대원들에게 하는 말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지만 제갈능은 필승의 의지 를 뿜어내고 있었다. "만변환환쇄금진이 뚫렸다면 오운지진도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한번에 친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 고 은신하라 일러라. 내가 움직일 때, 그때가 공격 시점이다." "알겠습니다!" 힘찬 어조로 대답을 한 제갈승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뛰어가고 어 느새 평정심을 회복한 제갈능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검집 을 버렸다. 상상도 못할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청죽림을 바로 앞둔 지점. 만변환환쇄금진을 빠져나온 악위군 일행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 다. 처음에 비해 인원은 반으로 줄었고 하나같이 악전고투를 치른 사 람들처럼 지치고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오운지진입니다." 신도가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뚫을 수 있겠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아예 용납하지 않겠다는 음성이었다. "물론입니다. 진법이 숲 전체에 펼쳐져 있는 듯하지만 외부를 둘러 싸고 있는 진세만 뚫고 들어가면 오운지진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저 안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적 이 은신해 잇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관없다! 기습 따위를 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니까. 그리고 적이 나타난다 해도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악위군은 뿌연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대나무의 모습을 보며 차갑게 소리쳤다. 전에 없이 살기 가득한 악위군을 보며 신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 다. '많이 흥분하셨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시지.' 그는 악위군 못지않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수하들을 살폈다. '지독한 진세였다. 주군께서 앞장을 섰는데도 반수가 넘게 당했다. 그나마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일 정도야.' 만변환환쇄금진은 과연 천하제일의 절진이라 할 만했다. 사문도 아니고 생문을 통해 이동을 했음에도 그 위력이란 인간으로 서 감당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세에 몇 발자국 들여놓지 않았음 에도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온갖 괴이한 환상들 이 그들을 괴롭혔고 판단력을 잃은 수하들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하였다. 심지어 신도는 자신을 보호하라고 붙여 준 호법들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만약 악위군이 앞장을 서지 않 았다면, 그리고 수하들의 공격을 받아 부상까지 입는 어처구니없는 상 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들을 일일이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환영에 빠 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진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진법 같으니!' 신도는 잠시 전 겪었던 그때의 아찔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이동하겠다. 방향을 잡아라." 악위군은 신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저, 정면으로 팔 보(八步), 오른쪽으로 칠 보(七步)입니다." 깜짝 놀란 신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두 눈을 감고 오직 감각에만 의지하고 있는 악위군은 신도의 외침대 로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뒤로 삼 보(三步), 다시 우로 이 보(二步)....." 거침없는 악위군의 움직임에 신도의 음성에도 점점 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러 정신없이 외쳐 대던 그의 음성이 딱 멈췄 다. "바로 그곳입니다." 순간, 굳게 감겼던 악위군의 눈이 번쩍 떠지고 그의 분노가 가득 담 긴 검이 횡으로 움직이며 대나무 숲을 쓸어갔다. 꽈꽈꽈꽝! 지면을 스치듯 조용히 나아가는가 싶던 검기가 대나무 숲에 이르자 거대한 폭음을 만들어냈다. 후두두둑. 그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밑동이 잘린 대나무가 벽이 허물어지 듯 힘없이 쓰러졌다. 파파파팍! 연속적으로 검기가 날아가고 쓰러지는 대나무의 수는 기하급수적으 로 늘었다. 대나무가 쓰러짐과 동시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운무(雲 霧) 또한 급속도로 힘을 잃었다. "으아아아!" 이곳저곳에서 비명 소리도 터졌다. 대나무에 몸을 숨기고 공격 명령 을 기다리고 있던 봉추대의 대원들이 대나무와 함께 땅으로 떨어져 내 리며 내뱉는 소리였다. 그들의 비명을 듣는 악위군의 얼굴에 살소가 지어졌다. "흥, 위에 숨어 있었군." 청죽림을 아예 지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기세로 검을 휘두르는 악 위군, 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무수히 많은 대나무가 쓰러지고 봉추 대원들의 당황한 음성은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다, 당숙!" 멀리서 악위군의 무위를 멍하니 쳐다보던 제갈승이 참지 못하고 제 갈능을 불렀다. 악위군의 검기가 대나무에 집중된 관계로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기습 공격을 하려는 의도는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든든한 아군이라 할 수 있었던 오 운지진도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 그는 어찌 대처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기습은 이미 틀렸다. 이제는 정면 대결뿐이다. 따라오너라.' 제갈능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곤 악위군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나아갔다. 한번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사오 장씩 앞으로 나 가는 모습은 가히 물찬 제비와 같았다. 제갈승과 대기하고 있던 봉추대가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대나무 에 은신하고 있던 대원들도 대나무의 사이사이를 넘나들며 일제히 공 격을 시작했다. 위에서, 그리고 좌우, 아래에서 시작된 협공에 중천의 무인들은 신 도를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진형을 갖추었다. "꺼져라!" 홀로 앞선 악위군이 자신을 향해 짓쳐 드는 공격을 보며 검을 휘둘 렀다. 대나무를 베어가던 것과는 기세 자체가 다른 강맹한 검기가 사 방으로 뻗어나가고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 뛰어내렸던 세 명의 봉추대 원은 지면에 내려 서기도 전에 몸이 사분오열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 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대나무를 붉게 물들였다. "모두 물러나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제갈능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자와 싸 워봤자 애꿎은 피해만 늘 뿐이었다. "저자는 내가 맡는다. 봉추대는 목숨으로 적을 제지해라.' 제갈승에게 당부화 같은 명령을 내린 제갈능이 악위군을 상대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접근하는 상대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자 악위군이 얼굴에 이채를 떠 올렸다. "그대는 누군가?' "제갈능." "무성?" 제갈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 그대가 말로만 듣던 제갈가의 창룡(蒼龍) 무성이었군. 과연, 기세가 다르군." 눈앞의 상대가 혁혁한 명성을 날리는 무성 제갈능이라는 것을 알자 악위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상대의 몸에서 전신의 세포 들이 긴장감으로 수축될 만큼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는 당신은 누군가?" 제갈능이 물었다. "악위군, 아니, 중천의 천주라고 하는 것이 더 빠르겠군." "음!" 제갈능의 입에서 그도 모르게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천주라니!' 그는 만변환환쇄금진을 뚫고 나온 실력, 그리고 오운지진을 단숨에 무력화 시키며 매복 작전을 무위로 돌리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보아 악 위군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중천에서 꽤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인 물일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설마 하니 그가 중천의 천주일 줄은 꿈 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중천이라면 천하를 도모하는 세력이다. 그리고 천 주는 그 세력의 정점에 선 인물. 실력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뼈를 묻을 수도 있겠군.' 그러나 뼈를 묻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악위군을 막지 못한다는 것은 곧 침입자들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곧 제갈세가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다. 제58장 홍로상일점설(紅爐上一點雪) "그럼 무성의 실력을 한번 볼까?" 악위군이 검을 까딱거리며 제갈능을 도발했다. 그것은 상대가 어떠한 실력을 지녔다 해도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변변한 실력은 아니나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오." 제갈능이 비스듬히 들고 있던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곤 곧바로 상대 에게 달려들었다. 칠초사십구식으로 되어 있는 군자칠검의 두 번째 초식 만자천홍(萬 紫千紅)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깔이 있다는 의미대로 순식간에 엄청난 변화 를 일으킨 검영(劍影)이 둘 사이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흥, 어디서 잔재주 따위를!" 악위군의 검이 빠르게 치고 나갔다. 슈슈슈슉! 그저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수십, 수백의 잔상(殘像)에서 진영(眞影) 을 찾아낸 듯 거침이 없었다. 꽝! 격한 충격음이 퍼지고 둘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던 검영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자신의 공격이 그렇게 간단히 막힐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 했지만 제갈능은 놀랄 틈도 없이 공격을 이어갔다. 파파팍! 예리한 검기가 땅을 스치며 날아갔다. 화사(花蛇)가 풀숲을 헤치며 나가는 듯 기묘하게 흔들리며 접근하는 검기에 악위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두렵다거나 감당하기가 힘들어 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갈능의 공격이 생각보다는 까다롭다고 여긴 것이다. 악위군이 바닥에 대고 있던 검을 사선으로 치켜 올렸다. 파스스슷! 묵빛의 기운이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발 아래로 접근하는 검기 에 맞서 나갔다. 꽝! 또 한번의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처음과는 달리 이번 충돌 에서는 실력의 우위가 확연히 드러났다. 악위군이 발출한 묵빛의 기운은 그에게 접근하는 검기를 무력화시 키고도 힘을 잃지 않은 채 제갈능을 향해 쇄도했기에 제갈능은 그 기 운을 없애기 위해 연속적으로 검을 휘둘러야 했다. 그만큼 악위군이 발출한 기운의 강맹함은 대단했다. "제법이군." 냉소를 터뜨린 악위군이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묵빛의 기운이 제갈능을 노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댔다.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에 제갈능도 지지 않고 군자칠검의 모용 으로 맞서 나갔다. 꽝! 꽝! 꽝! 연속적인 충돌, 삽시간에 십여 초의 공방이 지나갔다. 땅이 뒤집히고 나무가 부러져 나갔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싸움 을 압도하고도 남을 충격파에 근처에 있던 이들은 피아의 구분 없이 멀리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기세좋게 공격을 했던 제갈능은 악위 군의 기세에 눌려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 시작했고 검을 잡은 손아귀에서 도 피가 흘렀다. 무엇보다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내공을 감당하기가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었다. "크하하하! 재밌군. 정말 재밌어." 제갈능이 자신의 공격을 그토록 잘 막아낼 줄은 생각지 못한 악위군 이 광소를 터뜨리며 공세의 수위를 한층 더 높였다. 검끝에서 흘러나오는 묵빛의 색도 한층 더 짙어졌다. '중천의 천주, 과연 대단하다.' 제갈능은 끊임없이 공격을 하면서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는 상대 의 가공할 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 서 자신의 내력은 서서히 고갈되고 있건만 악위군의 기운은 오히려 강 해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의 공격이라면 어찌어찌 막아낼 수는 있다. 문제는 그가 아직도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 전력을 다한 그의 공 격을 막을 수 있을까?' 그는 악위군이 전력을 다해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 끼고 있었다. '이곳에서 이자를 막지 못하면 제갈세가, 아니, 무림은 이자의 손아 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반격할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지금 승 부를 내지 못하면 끝까지 수세에 몰리다 허무하게 패하고 말 터. 되든 안 되는 해보는 거다.'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내력에 한계를 느낀 제갈능은 지금이 최후의 승부수를 띄울 시점이라 생각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대의 공격을 흘려버린 그가 검을 움직 였다. 그와 악위군 사이에 또다시 화려한 검영이 수놓아졌다. 처음 공 격할 때 사용했던 만자천홍이었다. "밑천이 떨어진 것인가?" 오랜만에 쓸 만한 상대를 맞아 흥취에 젖어 있던 악위군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 공격은 이미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실망인걸." 한데 바로 그 순간, 검영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제갈능의 입에서 힘찬 기합성이 터지며 혼신의 힘을 다한 최후의 한 수가 펼쳐졌다. 소리도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만자천홍이 일으킨 화려한 검영 사이에 몸을 숨긴 제갈능의 애검은 악위군의 심장을 향해 너무나도 은밀히, 그러나 빛살과 같은 빠름으로 날아들었다. "헛!"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고 손쉽게 공격을 해소 시키려 했던 악위군은 검영 한가운데를 가르며 나타난 물체에 기겁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명확하지는 않아도 그것은 분명히 검. 더구나 그 속도란 인간이 따라갈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검을 끌어당겨 심 장을 보호하며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보다 짓쳐 드는 검의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탕! "크윽!"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악위군이 내뱉은 고통의 신 음성이 그 뒤를 이어 터져 나왔다. '하늘은 제갈세가를 버리려는가?' 상대에게 큰 부상을 입혔건만 비틀거리는 악위군을 바라보는 제갈능 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오히려 허탈하기만 한 표정. 제갈세가의 운명과 무림의 운명을 걸고 펼친 최후의 한 수, 제갈능 이 던진 검이 심장을 빗나가 하필이면 어깨를 꿰뚫어 버린 것이었다. '끝이로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것은 무슨 공격인가?" 비틑거리는 악위군이 어깻죽지에 박힌 검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었다. "홍로상일점설(紅爐上一點雪)." "화로에 떨어진 한 점의 눈꽃? 꽤나... 그럴듯하군." 말은 그리했지만 그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만약 몸을 틀며 검을 치켜드는 동작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리고 그가 치 켜든 검이 제갈능이 던진 검의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싸늘 한 주검으로 변했을 터, 그의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성공하지 못한 공격이오." 제갈능이 씁쓸히 대꾸했다. 만자천홍과 함께 연계하여 사용하는 군자칠검의 마지막 초식 홍로상 일점설은 엄청난 내공을 필요로 했다. 바닥난 내력을 끌어올려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그는 제대로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무엇보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허탈감이 그를 더욱 못 견디게 했다. "지금껏 이만한 위협을 느껴본 공격은 단 하나뿐. 그마한 대접을 해 주지." 어깨에 박힌 검을 빼내며 과거 수호신승과의 대결을 떠올린 악위군 이 천천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자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기운이 그의 전신을 에워쌌다. 가히 전율이 일어날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끼며 제갈능은 최후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형님....' 그는 초조히 자신의 소식을 기다릴 제갈융의 모습을 그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 지금 뭐라 했느냐? 전멸이라고?" "그렇습니다." "네, 넷째는, 넷째 아우는 어찌 되었느냐?" "무성께선 놈들의 우두머리와 맞서 싸우시다가 그만...." 청죽림의 참상을 알리러 달려온 봉추대 최후의 생존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가!" 제갈융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잘못 안 것이다. 넷째가 당할 리가 없다. 그가 누구더냐? 무성 이다, 무성!! 그런 그가 적의 손에 당하다니! 뭔가 잘못 안 것이다. 틀 림없이 잘못 안 것이야!!" 발악하듯 소리치며 힘없이 주저앉는 제갈융의 입술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충격에 사로잡혔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냉정했던 제갈선이 물었다. "놈들은 어찌하고 있습니까?" 눈물을 훔친 사내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비록 청죽림이 무너지며 봉추대가 전멸을 하고 말았지만 적에게 간 단히 길을 내주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놈들의 우두머리인 중천의 천주 는...." "자, 잠깐! 지금 뭐라 했습니까? 천주라고 했습니까?" 사내의 말을 끊은 제갈선이 기겁을 하며 되물었다. "예, 틀림없이 천주라 하였습니다." 죽어가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청죽림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달리던 순간, 등 뒤로 '천주님 만세' 를 외치는 함성이 들려왔음을 똑똑히 기 억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수가! 그가 직접....."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과거 독혈인의 독에 중독되었다가 회복한 제갈능의 무위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무공에 확연한 진전이 있었 다. 이미 무성이란 칭호를 얻을 정도로 막강했던 무공이 근자에 들어 선 누구와 상대해도 결코 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설 만큼 대단한 경 지에 이으렀다. 하지만 상대가 중천의 천주라면 얘기가 달랐다. 들려 오는 소식에 의하면 수호신승을 그리 만든 자가 다름 아닌 중천의 천 주라 하지 않던가. "그랬구나! 그래서 아우가...." 제갈융은 세가를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웠을 제갈능의 모습을 떠올 리며 눈물을 흘렸다. "무성 어르신께서 그자에게 큰 부상을 입히셨습니다. 또한 진을 뚫 고 들어오기는 했어도 나머지 적들 또한 많이 지친 상황입니다." "그래서, 놈들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까?" "금방 들이닥칠 것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방문을 열 틈도 없었던가? 싸움을 끝내고 돌아오던 제갈근과 제갈극 이 앞을 가로막는 문을 그대로 걷어차며 들어와 사내의 멱살을 틀어쥐 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적이 들이닥치다니?" "설마 하니 아우가 당했단 말이냐?" 하나 숨이 막힌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캑캑댈 뿐 이었다. "아버님!" 제갈선의 외침이 있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제갈근이 멱살 을 틀어쥐었던 손을 풀며 다시 물었다. "어서 말을 해라! 어찌 된 일이냐?" 사내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조금 전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들의 반응 역시 앞선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제갈근은 멍한 눈으로 천장만을 응시했고, 제갈극은 죄없는 기둥을 후려치며 울분을 토했다.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제갈선이 주위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대책이랄 것이 뭐 있겠느냐? 당장 가서 놈들의 목을 베어줄 테다!" 제갈근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제갈극이 이에 동조했다. "그래야지요. 봉추대가 당했다지만 아직 와룡대가 있습니다. 그들 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갈선의 생각은 달랐다. "막기 힘들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막기 힘들다니? 놈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고 하 지 않았느냐?" "막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당연하지!" "그럼 한 가지 더 확인해 보지요." 제갈선의 고개가 봉추대의 생존자에 향했다. "목숨을 잃은 적이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여섯 정도는...." "적이 총 몇이었지요?" "삼삽이 조금 안 됐습니다." "사, 삼십?" "고작 그만한 인원에 당했단 말인가!" 예상은 했지만 침입을 한 적은 꽤나 강적이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 쉰 제갈선이 경악에 찬 눈으로 사내를 응시하고 있는 부친과 숙부를 돌아보았다. "들으셨습니까? 두 배가 넘는 인원으로 공격을 하여 고작 삼 분지 일 정도밖에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중천의 천주가 둘째 숙부 에게 잡혀 있는 사이에 말입니다." "......" 와룡대가 조금 윗길이긴 해도 전체적인 무위에선 봉추대와 큰 차이 가 없었다. 당장 공격을 하자던 제갈근과 제갈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면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제갈융이 물었다. "최후의 방법뿐인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제갈선이 침울한, 그러나 결의에 찬 어조로 대 답을 했다. 화들짝 놀란 제갈극이 반박을 했다. "너무 극단적이지 않느냐? 놈들이 비록 강하다고는 해도 많이 지친 상황이다. 게다가 잠입한 적도 많은 수는 아니고. 죽음을 각오하면 막 을 수 있다." "곧 많아질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적이 침입을 했다는 것은 곧 진이 뚫렸음을 의미합니다. 주변의 자 연지물(自然之物)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만변환환쇄금진은 밖에서는 허 점이 없는 천고의 절진입니다. 웬만한 충격으로는 끄덕도 하지 않지 요. 외부에서 침입을 시도하려면 그야말로 지형을 바꿀 만한 엄청난 충격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화공(火攻) 정도만으로도 틈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 보름에 한번씩 나타나는 진세의 약점을 파악하여 뚫고 들어온 놈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곧 방법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동북쪽 방향에서 때 이른 밝음이 나타났다. 이제 겨우 자정을 넘긴 시간에 해가 뜰 리는 만무할 터. 그것이 숲을 태우는 불길이라는 것은 너무도 확연했다. "벌써 알아낸 모양입니다." 제갈선이 일부러 상기시키지 않아도 모두들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 하고 있었다. "네 말대로 최후의 방법뿐인 것 같구나." 불길에 눈을 고정시킨 제갈융이 말했다. "형님!"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저 불길은 틀림없이 진을 파훼하기 위한 놈 들의 시도일세. 그리고 곧 엄청난 병력이 몰려들 것이야. 방법이 없 네, 방법이." 한숨을 내쉰 제갈융이 제갈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식솔들은 어찌 되었나? 다들 피할 준비는 되어 있겠지?" "예. 명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비밀 수로(水路)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책들은?" "전부는 아니나 중요한 것들만 추려 감추어두었습니다." "후∼ 중요하지 않은 서책이 어디 있겠나? 안타깝군. 그것이야말로 제갈세가의 진정한 힘이자 보물이거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제갈근이 그를 달랬다. "그래, 자네의 말이 맞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식솔들의 안전 이지. 지금 당장 와룡대와 함께 수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식솔들을 보 호하게나."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제갈근이 봉추대의 생존자와 함께 황급히 무후전을 빠져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제갈융이 애써 담담한 음성으 로 말을 이었다.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겠군. 놈들이 들이닥치면 그나마 감추어 둔 비장의 한 수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어. 어서 움직이게나." "예. 가시지요, 형님." 제갈극이 제갈융을 호종(護從)하기 위해 그의 곁으로 움직였다. 그 러자 제갈융이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가지 않네." "예?" "나는 가지 않는다고 했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갈극이 당황한 어조로 되물었다. "기관을 발동시키기 위해선 어차피 누군가는 남아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어째서 형님이십니까? 세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 그 일을 할 사람은 무수히 많습니다! 제가 할 수도 있고 여기 있는 이 녀석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부님. 어서 피하시지요." 제갈선이 제갈융의 팔을 잡으며 거들었다. "아니다. 지금껏 제갈세가의 장자로서 내가 한 일이 무엇이 있더냐? 무공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학식이 뛰어나지도 않다. 그렇다고 크게 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 그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대접을 받고 살았을 뿐이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비록 세가의 안위를 지키 지는 못했어도 최후는 함께하고 싶구나." "형님!" "못난 아들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셨을 터. 내 대신 아버님께 죄송 하다고, 부디 불효를 용서하시라고 말씀드리게." "형님!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더 이상 듣기 민망했는지 제갈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나 제갈 융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서 가게나. 이곳은 내가 책임을 지겠네." "그렇게는 못합니다." "형으로서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야." "그래도 안 됩니다. 절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제갈융도 그랬지만 제갈극 역시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정녕 이 우형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셈인가?" 제갈융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어째서 이리 고집을 피우십니까?" "두말하지 않겠네. 더 이상 고집 피우지 말고 가게. 만약 가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면 놈들의 최후보다 나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먼저 보 게 될 것일세." "형님...." "내 시신을 먼저 보고 싶은가?" 확고하다 못해 너무도 강경한 모습에 제갈극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 지 못했다. 한참 동안이나 제갈융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한숨 을 내쉬며 체념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형님 말을 따르도록 하지요." 그제야 안색을 편 제갈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네. 어서 가게나. 이러다가 늦겠어." 고개를 끄덕인 제갈극이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는 듯 안타까운 표정 을 지으며 슬며시 다가왔다. 그러자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선 제갈융이 손을 내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게나. 내 비록 자네나 여러 형제들에 비해 볼품없는 무공을 지닌 것은 사실이나 순순히 점혈을 당할 정도로 형편 없지는 않네." "형님!! 진정으로 떠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점혈을 하여 고집을 꺾으려 했던 최후의 의도마저 간파당한 제갈극 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아버님과 형제들에게 잘 말해 주게나."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린 제갈융이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좋군."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차에서 진한 향이 날 리 없건만 그는 두 눈 을 감고 차 향을 음미했다. "형님...." 죽음을 달관한 듯한 그의 모습에서 도저히 마음을 돌려놓을 틈이 없 다는 것을 느낀 제갈극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힘없이 마지막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절을 할 때마다 굵은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일배에 그에 대한 정과 안타까움이, 이배엔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리 게 된 제갈세가의 아픔과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마지막 삼배엔 반드 시 적을 쓰러뜨리고 복수를 하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었다. "가자."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제갈융을 쳐다보던 제갈극이 몸을 돌렸다. 흐 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제갈선이 마지막으로 예를 차린 후 그의 뒤를 따랐다. 방문이 닫히는 순간, 천천히 눈을 뜬 제갈융이 더없이 슬픈 눈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잘들 가게나."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갈세가의 주변은 날개 달린 짐승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지 않던가. "그럴 리가 있나? 분명 또 다른 흉게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좀 더 철저히 샅샅이 찾아봐!" 신도가 보고를 올린 수하에게 소리쳤다. 사내는 찍소리도 못하고 뒤 로 물러났다. "정말 빠져 나간 것은 아닐까?" 악위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변에 펼쳐진 만변환환쇄금진은 입(入)은 물 론이고 출(出) 또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진입니다. 무공을 지닌 자 들만이라면 모를까 모든 인원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 다." "아무도 없다니 하는 말일세." 열을 올리는 신도와는 달리 제갈세가를 무너뜨렸다는 생각에 다소 안심을 한 것인지, 아니면 제갈능과 같이 긴장감을 맛보게 해줄 상대 가 없어서인지 악위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아닙니다. 좀 더 조사를 해보면 알게 되겠지만 놈들은 틀림없이 이 곳 어딘가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되도 않을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 고 있겠지요." "글쎄, 자네 말이 맞겠지. 그렇지만 웬일인지 자꾸만 헛다리를 짚는 느낌이야." "반드시 찾아낼 것입니다." 하지만 애써 찾아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홀로 무후전을 빠져나와 제갈세가의 장자로서 마지막 해야 할 일을 마친 제갈융이 그들을 향해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산보라도 나온 듯, 아니면 다시는 보지 못할 곳이었기에 마음속에 담아두려는 듯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세가 이곳저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도 여유만만한 그의 태도에 악위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금 전 최후의 발악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최후의 발악치고는 어 째 싱겁군." "뭣들 하느냐? 당장 잡아와!" 뭔가 흉계가 있을 거라고 강하게 주장했던 신도는 애써 무안함을 감 추기 위하여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 몇 사내들이 달려가 제갈융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칼을 치워라." 악위군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치자 제갈융의 목에 생채기를 만들 었던 칼이 재빨리 치워졌다. "오랜만이오, 제갈 형." 안면이 있는 듯 사뭇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악위군. 제갈융도 마주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외다." "한 십 년 정도 되었던가요?" 악위군이 그 옛날 제갈세가를 대표하여 악가를 방문했던 제갈융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십일 년 전이었소." "허, 벌써 그렇게 되었소? 하하하, 이해하시구려. 워낙에 기억력이 없어서." 악위군이 이마를 툭툭 치며 웃었다. "그때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진정 몰랐소이다.' 제갈융이 다소 차갑게 대꾸했다. "하하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사 아니겠소? 다 그런 것이지요." "어쨌든 참으로 놀랍구려. 그 오랜 세월 동안 숨죽이며 살아온 것도 그렇고, 이토록 짧은 시간에 무림을 평정할 수 있다니 말이오." "아직은 아니외다. 무당과 패천궁이 남았소. 제갈세가가 아니었다 면 이미 평정을 했겠지만 말이오." "그래서 우리를 치기 위해 손수 나선 것이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제갈세가의 방비가 너무 굳건하여 어쩔 수 없었소. 하하하! 얼토당토않은 진 때문에 고생꽤나 했소이다." 악위군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변환환쇄금 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진법이었다. "그나저나 어찌 된 것이오? 다른사람은 다들 어디 갔소?" "이곳엔 나 혼자뿐이오.' "거짓말하지 마시오! 흉게가 숨어 있는 것을 모를 것 같습니까!" 한발 떨어져 있던 시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곧 악위 군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으며 입을 닫아야 했다. "빠져나간 것이오?" "아마도." 그 한마디에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했다고 열변을 토했던 신도의 얼 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하지만 악위군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 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 꾀 많은 토끼가 세 개의 굴을 가지고 있 다더니만... 하긴, 제갈세가를 어찌 토끼에 비할까? 세 개의 굴이 아 니라 열 개, 아니, 천 개의 굴을 지녔다고 해도 믿겠소. 한데 제갈 형 은 어째서 이곳에 남은 것이오? 그 많은 인원을 이처럼 감쪽같이 빼돌 릴 수 있는 능력이라면 충분히 피하고도 남았을 텐데." "명색이 제갈세가의 장자요. 세가를 놔두고 내 어찌 떠날 수 있겠 소?" "목숨은 귀한 것이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라오." 죽음에 대히 초연한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 있을까? 악위군은 평범하 기 그지없는 제갈융에게서 꺾이되 휘지 않는 굳은 의지를 보고는 자신 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우리의 인연을 생각해서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소. 군사!" 악위군이 신도를 불렀다. "예, 주군." "제갈 형을 모셔라. 그리고 주변에 설치된 만변환환쇄금진을 해체해 라. 우리에겐 필요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승리했다! 이후, 제갈세가는 정도맹과 패천궁을 무너뜨리고 무림제패를 이룩할 우리들의 전초 기지가 될 것이다!" 악위군은 주변의 건물이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승리를 선언했다. 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와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만변환 환쇄금진을 돌파한 정예들과 이후 화공으로 파괴된 길을 따라 제갈세 가로 들어온 백여 명의 무인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천주님 만세!" "중천 만세!" 한데 그들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는 제갈융의 태도가 몹시 이상했 다. 패배한 것도 모자라 세가가 적의 기지로 쓰인다는 치욕스런 소리 를 들으면서도 그는 분노로 몸을 떨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자 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런 태도가 마음에 걸렸는 지 신도가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제갈세가가 우리의 기지가 된다는데 분하지도 않습니까?" "분하지." "한데 어찌 그리 태연한 것입니까?" "분하기는 해도 내가 어찌해 볼 일이 아니니까." 말을 잃은 신도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응시 했다. 그리곤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비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쳇,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배알도 없는 인간이었군." 그러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중얼거리던 그가 미처 듣지 못한 말이 있었으니...." "분하기는 하지만 아쉬울 것도 없지. 어차피 나와 운명을 함께할 테 니까. 과연 한 줌 잿더미로 변할 곳을 기지로 쓸 수 있을까?" "지금... 지금 뭐라고 했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악위군이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신 도는 듣지 못했어도 그와 신도의 대화를 지켜보던 악위군이 그가 조용 히 내뱉은 말을 들은 것이었다. "들었소?" "뭐라고 했느냐 물었소!" 말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손을 쓰겠다는 태도에 제갈융은 진정 하라는 손짓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과거 제갈세가는 패천궁에게 세가를 빼앗긴 적이 있었소. 학문을 업으로 삼았던 우리가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우게 한 계기가 된 바로 그날의 치욕을 나는, 제갈세가는 절대 잊지 못하오."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싸움이 끝나고 세가를 다시 찾은 가문의 어른들은 이후 다시는 그 와 같은 치욕을 당할 수 없다고 맹세를 했소. 그러나 앞날의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일. 그분들은 만에 하나 일어나 일을 대비해 미리 안배 를 해두셨소." "그 안배라는 것이..." 악위군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첫째는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식솔들만큼은 안전하게 탈출시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 그것은 이미 증명을 하였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잠시 말을 끊은 제갈융은 동이 트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동녘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키지 못하면, 목숨을 다해서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제갈융의 음성이 갑자기 격해졌다. "차라리 부숴라! 세가가 적의 손에 유린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그, 그렇다면?" "아무도,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악 형은 물론이고 세가에 들어선 모든 이들이. 방법이 궁금하오? 궁금할 것 없소. 이미 시작되 었으니까."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싸늘히 내뱉는 제갈융, 그리고 미세하게 느껴 지는 진동. '폭약? 큰일이다!!' 돌변한 제갈융의 모습에 당황할 사이도 없이 몸을 돌린 악위군이 아 직도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는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피해라! 도망쳐!" 그러나 난데없는 외침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피하란 말이다!!" 악위군과 제갈융의 대화를 듣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린 신도 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여전히 멀뚱멀뚱 쳐다보는 수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도망쳐라! 지금 당장 밖으로 도망쳐!"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고 느낀 중천의 무인들이 뒷 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늦었다니까." 제갈융이 안쓰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말과 함께 저 밑에서 미 세하게 느껴지던 진동이 점차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드드드드드!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이들이 휘 청거리고 전각의 기왓장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바로 오늘을 위해서 제갈세가가 십 년 동안 은밀히 간직했던 만근 (萬斤)의 폭약이오.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던 터. 저승길 노잣돈 으론 충분할 것이오. 하하하!!" 대폭발이 임박했음을 느낀 것인가? 세가가 떠나가라 웃어 젖히는 제 갈융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쿠쿠쿠쾅! 저 멀리 정정각(淨淨閣)에서 본격적인 폭발이 시작했음을 알리는 첫 번째 굉음이 들려왔다. 단아한 자태를 자랑했던 정정각이 삽시간에 화 염에 휩싸이며 사라지고 이후 연속적인 굉음과 함께 세가 곳곳에서 폭 발이 일어났다. 바닥이 갈라지며 흙과 자갈들이 십 장 높이로 치솟고 전각은 한 줌 재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으아아아!" "크악!"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폭발에 휘말려 허공으로 치솟는 사람, 옷에 붙은 불을 끄느라 땅을 구르는 사람, 그 어떤 암기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잔해에 맞 고 그대로 목숨을 잃는 사람. 그렇게 제갈세가는 삽시간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으으으으." 눈앞에서 수하들이 갈가리 찢겨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악위군은 피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라고 안전할 수는 없었다. 동시 다발적으로 시작된 폭발은 제갈융은 물론이고 악위군과 신도의 몸도 삼켜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제갈융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제갈세가는,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제60장 색출(索出) "제갈... 세가가?" 안당이 침울한 어조로 물었다. "예." 온설화가 힘없이 대답했다. "제갈세가... 결국 무너졌단 말인가!" 안당의 탄식이 회의실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예상보다 너무 빠릅니다. 대 책을 세워야 합니다." "대책? 물론 세워야겠지. 하지만 수하들의 사기가 저리 떨어져 있으 니 딱히 대책이라 할 만한 게 있을는지......" 세간에 돌고 있는 궁주의 암살 소식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궁주가 부상당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 것이 중천과 남천의 협공을 당하면서도 굳건히 버티고 있던 패천궁 무 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며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것이었고 가뜩이나 힘든 전세를 더욱 위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데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제갈세가를 무너뜨리지 위해 중천에서도 꽤나 큰 손실을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제갈세가인데 쉽게는 당하지 않았겠지. 그래도 피해라고 해봐야 미미한 수준 아니겠느냐? 지금까지 주로 싸움에 동원 된 이들이 주변에 굴복한 군소문파의 무인들이라고 들었다만." "이번은 상황이 다릅니다. 제갈세가에 파견되어 있던 비혈대의 대원 이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이번 싸움에 투입된 중천의 무인들은 최정예 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근거라도 있는가?" 원헌 노장로가 물었다. "중천의 천주가 직접 움직이는데 어설픈 수하들을 데리고 가지는 않 았겠지요." "주, 중천의 천주? 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말인가?" "예. 그리고 목숨을 잃었거나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큰 부상을 당했 을 것이라 했습니다." "목숨을 잃어? 부상? 내 제갈세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중천의 천주라면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안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중천의 천주에 의해 수호신승이 큰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제갈세가에 그 만한 고수가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제갈세가에 무성이라 불리는 고수가 있다고 들었네. 혹, 그가 중천 의 천주에게 부상을 입힌 것인가?" 그 와중에도 호승심을 느끼는 것인지 동방성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 었다. 온설화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중천의 천주와 그를 따라 제갈세가를 공격했던 패천궁의 정예를 쓸어버린 것은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아니라 제갈세가 그 자체였습니다." "제갈세가 자체?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해가 가지 않네." 모두들 동방성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그녀를 응시했다. "제갈세가를 수호신처럼 버텨주던 진세가 무너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중천의 무인들을 최대한 유인하여 함께 폭사(爆 死)했습니다. 그 많던 전각이 단 하나도 남김없이 잿더미가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고 하는군요. 물론 식솔들과 상당수 전력이 포 위망을 뚫고 몸을 피한 이후에 말이지요." "포, 폭사란 말인가?" "과연 제갈세가로다!!" "허! 세상에!" 과연 누가, 어느 세가가 그와 같은 과감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든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감격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것인지 탁 자를 치며 벌떡 일어난 몇몇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천주의 생명은?" 안당이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중천 내에 잠입시킨 비혈대원도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열 명 내외의 생존자가 있다고 하는데 접근하기가 쉽 지 않은 모양입니다." "흠, 폭발 속에서 열 명 정도가 살아남았다면 그만한 고수가 죽었을 리는 없겠고... 그래도 세가를 통째로 날려 버리는 폭발이었다면 신이 아닌 이상 무사하지는 못하겠군. 시간을 번 셈인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천의 천주가 부상을 당했다는 것보다는 그들을 막고 있던 제갈세가가 무너졌다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요. 중천 의 천주가 직접 지휘하는 것보다는 다소 여유가 있겠지만 놈들은 당연 히 기세를 살려 대대적인 공격을 해올 것입니다. 저라면 그리합니다." 온설화는 확신에 찬 어조로 중천의 공격을 경고했다. "남천에서도 이에 호응을 하겠지?" 안당의 물음에 온설화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 질문은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당연한 것이었다. "후∼ 결국 수성(守成)뿐인가?" 안당의 한숨에 동조라도 하듯 모두들 깊은 수심에 잠겼다. 애당초 계획은 제갈세가가 중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이 남천을 치 는 것. 하나 그것은 궁주의 부상으로 인해 물거품이 돼버렸고 제갈세 가가 무너진 지금, 패천궁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회의실로 들어선 것은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무려 반 각이나 계속된 다음이었다. "두호(斗虎), 무슨 일이냐?" 가장 말석에 앉아 있던 패천수호대 부대주 황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가 회의실 문밖에서 경계하는 패천수호대의 대원이라는 것 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정문에서 급보입니다." "급보?" "예. 정체 불명의 고수들이 정문을 뚫고 침입했다고 합니다." "뭐야! 그게 정말이냐? 몇 놈이나 되는데? 정문을 지키는 놈들은 대 체 뭘 한 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황산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 그것이 저는......" 그저 전해져 온 보고를 전한 두호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호, 소식을 가지고 온 자를 데리고 와라." 어느새 달려온 화천명이 두호에게 재빠른 명을 내리고 황산에게 고 개를 돌렸다. "자네가 가보게. 이미 비상이 떨어졌겠지만 행여나 소홀히 대처하는 지 확인을 해. 그렇듯 대놓고 침입을 했다면 대단한 고수들일 수도 있 으니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내 어떤 놈들인지 모르나 아주 요절을 내버리겠습니 다. 가소로운 것들! 감히 패천궁을 넘보다니!!" 황산은 그 즉시 몸을 돌려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하지만 방문을 빠 져나간 그의 거구는 뛰쳐나가던 속도보다 서너 배는 빠르게 뒤로 날아 와 길게 늘어진 탁자에 처박히며 쭉 미끄러졌다. 챙! 적이 이미 가까이에 접근했음에 대경실색한 화천명이 검을 꺼내 들 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부대주 황산은 패천수호대에서도 그 다음 가는 고수. 그런 그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은 자신 역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조심을 하는 것이었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오직 안당뿐이었다. 원헌 등 몇몇 노 장로들이 그의 좌우에 포진했고 동방성과 뇌학동은 화천명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달려왔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 한데 난데없이 들려온 호통은 그런 분위기 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요절을 내? 뭐, 가소로워? 에라이, 이놈아! 실력은 쥐뿔도 없는 것 이 큰소리만 치는 것이냐?" 노호성을 터뜨리며 내달리던 황산의 혈을 단번에 제압해 집어 던진 곡지통 구양숭이 쑥 고개를 내밀며 방문을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냉 악과 응사웅 등이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옷을 툭툭 털며 들어섰다. "잘들 있었는가?" 냉악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동방성과 뇌학동에게 웃음을 던 지더니 곧 안당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궁주." "쯧쯧, 오려면 진즉에 오던지, 그리고 왔으면 조용조용 찾아들 것이 지, 이리 요란을 떨 것은 무언가? 그러지 않아도 다들 심기가 편치 않 거늘 잔뜩 긴장만 하게." 안당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는 원 로들에게 툴툴거렸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그와 함께 평생을 바쳐 패 천궁을 지켜온 사람들. 그 반가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애써 감 추고는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제갈세가의 소식을 듣고 침울해하던 조 금 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허허허, 하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어째 나이를 거꾸로 자시는 것 같습니다. 혹여 회춘(回春)의 방법이라도 터득하신 것은 아 닙니까?" "흥, 자네야말로 그런 것이 아닌가? 객쩍은 소리 말고 어서 와서 앉 게나. 이렇듯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많이 밀리고 있다지요?" 자신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이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냉악이 주변을 찬찬히 살피며 대꾸했다. "음, 지금까지는 그나마 버티고 있었지만 지난밤 제갈세가가 무너졌 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네." "제갈세가가요?" "그래. 우리로선 큰 방패막이 없어진 셈이지. 곧 놈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걸세." "공격이야 막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까짓 별것 아니라는 듯 너무도 손쉽게 대답하는 냉악을 보며 안당 은 잠시 동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그와 함께 온 원로 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다시금 환기하며 곧 환히 웃음 지었다. "허허, 말이야 쉽지. 하나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언제는 쉬운 일이 있었씁니까? 죽어라 싸우다 보면 다 잘되겠지요. 그나저나 궁주의 상세는 좀 어떻습니까?" 순간, 안당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네. 이러다가 자식을 앞서 보내는 것은 아닌 지 몰라."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길게 잡아 사나흘만 그 상태로 버티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안당이 황급히 물었다. "그건 무슨 소린가?" '궁주도 많이 늙었군. 하긴, 자식 앞에서야 누군들 이러지 않을까?' 초조해하는 안당의 모습을 보며 냉악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생사괴의 어르신께 후예가 있었습니다." "아! 지, 진정 그 어른의 후손이 있단 말인가?"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생사괴의의 고명한 의술을 똑똑히 기억하 고 있떤 안당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예. 지금쯤 유불살 그 친구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오고 있을 겁니다." "허허허허! 잘됐군. 참으로 잘됐어. 그분의 후손이라면 녀석이 목숨 을 잃을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을 해서일까? 털썩 주저앉는 안당에게선 절대자의 풍모는 간데 없었다. '역시, 자식이란....' 평소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의 모습에 냉악은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손님께서도 오실 수 있 습니다. 그것도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질문을 받는 냉악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검왕 어르신을 만나뵈었습니다." "그, 그게 사실인가?" 또다시 벌떡 일어나는 안당의 놀람은 조금 전에 비해 비길 바가 아 니었다. "아직 모르셨습니까? 꽤 오래전에 출두하신 것 같던데." "그, 금시초문일세." 안당의 매서운 눈초리가 온설화에게 향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이냐?" 은거한 원로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패천궁의 군사인 그녀가 모를 리 없었고 그런 중요한 사실을 어째서 지금껏 자신이 모르고 있는지에 대 한 엄한 추궁의 눈빛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궁주께서 어르신께 비밀로 하라고 하여......" 사실, 여러 수뇌들 중에서도 검왕의 출도를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 람은 그녀를 비롯하여 핵심 수뇌 몇몇에 불과했다. 오룡지회를 통해서 야 비로소 모든 이들에게 검왕의 출현 소식이 알려졌을 뿐이었고 그나 마 안휘명의 엄명으로 안당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이, 이 빌어먹을 녀석!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더란 말이냐!" 검왕의 출도를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안당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온설화가 잔뜩 풀이 죽은 음성으로 그 연유에 대해 설명했다. "원래는 그분의 존재를 알게 된 궁주께선 가장 먼저 어르신께 알리 려 했습니다. 한데 그 당시가 어르신께서 지병으로 크게 고생을 하고 계실 때인지라....." "지병이라니?" "소갈(消渴) 말입니다." "음." 안당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그런대로 증세가 많이 나아졌으나 과거 소갈과 그로 인한 합 병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다. 그때의 후유 증으로 한쪽 눈은 거의 실명에 가까운 상태가 아니던가. "궁주께선 그분의 출현을 알게 되신 어르신께서 행여나 몸을 돌보지 않고 길을 나서실까 걱정하신 것입니다. 이후, 어르신의 상세가 많이 좋아지시면 말씀드린다고 한 일이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괘씸한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 모든 것 이 자신을 위해서 한 일.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침울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냉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한 분은...." "다른 한 사람은 나도 짐작이 가는군." 안당이 말을 잘랐다. "며칠 전, 소림을 구한 일가의 소식은 이미 이곳까지 전해져 왔네. 궁귀 을지소문... 허허, 꽤나 지긋지긋한 이름이야. 지금 다시 그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아무튼 그가 다시 무림에 나왔다지?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가족을 이끌고?" "그렇습니다." "난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무림을 일통한 패천궁을 헌신짝 팽개치듯 내버리고, 따지고 보면 패천궁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 는 자를 따라간 못된 사람의 얼굴을 말이야. 손을 흔들며 떠날 때의 미소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 그 당시 혈참마대를 이끌고 무림을 질타햇던 냉악이 어찌 그 심정을 모를까? 그러나 이미 까마득히 오래된 일. 지금은 그저 가끔씩 떠올리 며 빙그레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유쾌한 기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능력도 없는 숙부에게 큰 짐을 맡겨놓고 간 아이, 환야... 무림을 일통한 위대한 절대자. 궁귀가 등장했다면 그 아이 역시 함께일 터."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패천궁에 대한 애착이 크신 분입니다. 궁주 가 저 지경이 되고 패천궁이 위기에 빠진 것을 아시면 반드시 이곳으 로 오실 겁니다." "흥, 오기만 하라지. 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콧방귀를 뀌는 안당, 하나 말은 그리하면서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간절한 그리움이었다. "지금 하신 말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허허로운 웃음을 짓던 냉악이 안색을 굳혔다. "궁주를 저리 만든 놈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한 놈만이 살아남았네." "다른 자들도 있을 텐데요." 냉악의 시선이 좌중을 훑어갔다. 특히 유수와 유영 형제를 살필 땐 그의 눈에서 한광이 뿜어져 나왔다. 물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재 빨리 숨기기는 하였지만. "분명히 있겠지. 하나 아무리 추궁을 해도 다른 놈들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아. 그렇지 않은가, 유 장로?" 지목을 당한 유수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사건 이후 궁내를 자세하게 내사했지만 뚜렷한 성 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몇 명 의심이 가는 자들을 점찍어두기는 하 였으나 확증이 없는 상황인지라...." "무턱대고 덮어씌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후∼ 힘들겠지만 자네가 좀 더 수고를 해줘야겠네." "죄송합니다. 반드시 며칠 내로 놈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내 패천궁 에 잠입한 간자를 모조리 색출하겠습니다." 유수가 사뭇 비장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한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제까지 저런 개소리를 들어야 하는 겁니까?" 송백검 백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난데없는 말에 놀람을 넘어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유성이 벌떡 일어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이 패천궁의 장로요, 호법들입니다. 아무 리 원로원의 어른이라도 그리 함부로 말을 하셔도 되는 겁니까?" 그러자 백준의 곁에 있던 응사웅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나댈 것 없다. 네가 보채지 않아도 금방 머리통을 부숴줄 테니까." 경의비마 한가풍도 한 소리를 보탰다. "심장이 어찌 생겼는지는 내가 확인하지." 참으로 살벌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유수와 유영은 모욕감에 얼굴 을 붉히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원로들께서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비록 아직까지 큰 성과는 없으나 유 장로께선 최선을 다해 간자를 색출하고자 노력하고 계십니 다. 한데 그렇게 말씀하시다니요." 동방성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유영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러자 몇몇 장로들도 이에 동조하는 의사 표시를 하며 유수, 유영 형제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안당도 어째서 원로들이 그런 험한 말을 내뱉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노력이라... 자네는 그가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보는가?" 냉악이 동방성에게 물었다. "분명 그리 보입니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지." "유 장로도 모자라 제게도 모욕을 주시는 겁니까?" 동방성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냉악의 태도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간자의 우두머리가 간자들을 잡아들인 다고 하니, 자네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리 연륜이 깊고 무공이 높아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있 는 법이었다. 동방성은 물론이고 원로들을 제외한 좌중의 그 누구도 냉악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했다면 오직 두 사람,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유수와 유영뿐이었다. "무슨 말이긴, 말 그대로지. 간자의 우두머리가 간자를 잡는다고 하 니 우습다는 것이네." "닥치시오! 아무리 원로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는 것이 아니오? 간 자라니! 우리가 간자란 말이오?" 유영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아니란 말이냐?" "모함하지 마시오. 수십 년 동안 패천궁을 위해 싸운 우리를 뭐로 보고.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참지 않겠소." 분기탱천한 유영이 검을 빼 들었다. "어허, 참으시오!" "궁주의 앞에서 이게 무슨 불경스런 짓이오!"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될 줄은, 그것도 안당의 앞에서, 미처 생각하 지 못한 이들이 당황하기 시작하고 더러는 본능적으로 검을 빼 든 사 람도 있었다. 그러나 무슨 언질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냉악이 결코 의미없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인지 안 당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하군. 그 입 좀 다물어야겠어." 냉악이 앞에 놓인 찻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응사웅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아예 찢어놓지요." 대답과 함께 그의 몸은 이미 유영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안당의 묵인 하에 벌어진 싸움이라 여기는지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최대한 자리를 넓혀 편하게 싸우도록 배려하는 것이 전부였다. "타핫!" 상대가 자신에게 살기를 품은 데다가 정체마저 드러난 듯한 상황인 지라 응사웅을 향해 검을 내치는 유영은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슈슈슈슉. 주먹과 검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금강불괴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이상 맨살과 잘 벼린 칼날이 부딪치 면 그 결과란 뻔한 것. 살이찢기고 뼈가 갈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 다. 하나 한번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강맹한 회오리가 주변을 휩쓸고, 사막에 부는 폭풍처럼 예측하기가 힘들다고 하여 용권풍이라는 별호를 얻은 응사웅의 권. 힘찬 기합성과 함께 내지른 주먹은 모든 이들의 예 상을 보란 듯이 비웃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팅! 유영의 검은 응사웅의 주먹에서 일어난 권풍(拳風)에 의해 거한과 부딪쳐 나가떨어지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힘없이 튕겨 나갔다. "큭!" 당황한 유영이 이를 악물며 검을 수습하자 냉소를 지은 응사웅이 그 를 향해 연속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휘류류류륭! 가슴 한편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묘한 파공음과 함께 어느샌가 나타 난 여덟 개의 회오리가 유영을 향해 꿈틀댔다. 생명이라도 담긴 듯 서 로 얽히고설켜 가며 접근하는 회오리는 여의주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하는 여덟 마리의 용과 같았다. "팔룡쟁투(八龍爭鬪)? 호∼ 다짜고자 저것을 펼치는 것을 보면 작심 을 해도 아주 단단히 한 모양이군." 검을 만지작거리며 둘의 박투를 지켜보던 송백검 백준이 다소 의외 라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가 아는 한 팔룡쟁투는 응사웅의 성명절기인 용형십삼권(龍形十三 拳) 중에서 최고의 절기는 아니었다. 하나 가장 살벌하고 무지막지한, 그것에 제대로 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는 것으로 응사웅 본인도 가 급적 사용하기를 꺼려한다는 초식이었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지금 응사웅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꺼져랏!" 유영이 전신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회오리를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 둘렀다. 그러자 무수한 검기가 뿜어져 나와 그다지 넓지 않은 회의실 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이미 장내엔 온전한 집기가 하나도 없었다. 꽝!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가장 먼저 접근하던 회오리가 검기에 막혀 소 멸했다. 꽝꽝꽝! 연속적으로 이어져 오는 충격음. 둘을 중심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사 방으로 퍼져 나가고 산산조각난 집기들만이 미친 듯이 비산했다. 꽝! 또 한 번의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지금껏 굳건히 버텨내던 유영의 몸이 휘청거렸다. 애당초 세 개의 회오리를 막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자네!" 깜짝 놀란 유수가 그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구양숭과 백준이 그의 앞 을 가로막았다. "서둘 것 없다. 다음 차례는 어차피 네놈이니까." 백준이 외친 싸늘한 한마디에 몸이 얼어붙은 유수는 단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다. 백준과 구양숭이 뿜어내는 살기가 온몸을 난도질하며 그의 움직임을 제어했기 때문이다. "크악!" 유영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성이 터지고 붕 뜬 몸이 벽을 향해 날 아갔다. 하지만 그의 몸이 벽에 부딪치기도 전, 어느새 반대편으로 움직여 대기하고 있던 한가풍이 왼손의 장력으로 날아오는 속도를 제 어하더니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구부린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쑤 셨다. 퍽! 조금 전의 비명이 유영이 살아 내뱉은 최후의 말이었기에 비명성은 없었다. 털썩. 호기롭게 검을 배 들었던 유영은 응사웅이 발출한 권풍에 사지 육신 이 산산이 조각나고 최후엔 가슴마저 뻥 뚫린 처참한 신세로 바닥에 팽개쳐졌다. "간자 놈도 있을 것은 있군." 약속대로 심장을 확인한 한가풍은 싸늘히 식어가는 유영의 몸 위에 여전히 팔딱이고 있는 심장을 툭 던졌다. "으아아아아!" 그 모양을 본 유수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아직 아니라니까!" 차갑게 소리친 백준이 검을 움직였다. 딸깍 하는 소리가 들린 것뿐인데도 유수의 발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평소의 그라면, 제아무리 원로원의 고수라도 그토록 쉽게 당하지는 않 았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함께해 온 유영의 죽음은 그의 머리 속을 백지로 만들어 버렸다. "으으... 컥!" 힘없이 무너지는 그의 몸을 구양숭이 걷어찼다. 끊어진 연처럼 날아 간 유수의 몸이 하필 냉악의 면전에 떨어졌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리고 냉악은 천천히 발을 들어 유수의 이마 를 살며시 짓눌렀다. 그리곤 안당에게 고개를 돌렸다. 깍지를 끼고 턱을 괸 처음의 자세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었던 안당이 손을 풀며 말했다. "일이 이쯤 되었으면 설명을 해주어야겠지?" "듣고 싶으십니까?" "이 소란을 보고서야 당연하겠지. 왜 그랬는가?" "이 둘이 간자의 우두머리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궁주는 아마도 이 자들의 손에 당했을 겁니다." 좌중이 무섭게 술렁거렸다. "물론 그만한 증거도 있겠지?" "잠룡부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들어 알고 있네. 사천에서 각 문파에 잠입시킨 간자들의 명부라지?" "잠룡부를 보았습니다." 순간, 지금껏 미동도 없던 안당의 눈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확... 실한가?" "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던 동방성이 떨리 는 음성으로 물었다. "진정 잠룡부가 맞습니까? 혹, 잘못 아신 것은...."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자네...."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응시하는 냉악의 몸에선 안당도 보여주지 못 한 칼날 같은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나?" "그, 그건 아닙니다만....." 명색이 강호오왕이라는 도왕이었다. 하나 환야가 떠나고 안당을 도 와 지금의 패천궁을 만들어낸 냉악의 압도적인 기세는 순수하게 무공 의 고하를 떠나 감히 대적하기 어려운 힘이 있었다. 동방성이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나자 기세를 푼 냉악의 시선이 안당을 향했다. 그의 발 아래 놓여 있는 유수의 처분을 묻는 것. 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극심한 부상까지 당한 유수는 미동도 없이 멍한 눈으로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잠룡부를 보았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명줄을 이어줄 필요가 없겠군." '아령아, 미안하구나. 결국 이렇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수의 눈가에서 물기가 배어나왔다. 궁주를 암습한 것에 대한 후회는 아니었다. 평생을 간자로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도 아니었다. 지금도 중천을 위해 할 일을 했다고 여길 뿐이었다. 그저 한 가지. 행복한 삶을 꿈꾸다 자신으로 인해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린 딸의 운명을 생각하며 아비로서 흘리는 눈물이 었다. 그러나 홀로 남겨질 딸의 운명을 걱정하던 그의 생각은 이어지 지 않았다. 퍽! 기분 나쁜 파열음과 함께 모든 이들이 안색을 찌푸렸다. 유수의 이 마를 밟고 있던 냉악이 안당의 허락을 받아 그의 목숨을 단번에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놈들도 있겠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허연 뇌수가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안당 이 차갑게 물었다. "몇 놈 있습니다." "알아서 조치하게. 아니, 자네들이 그런 일까지 나설 필요는 없겠 지. 천명아." 안당이 화천명을 불렀다. "예." "지금 즉시 궁내에 잠입한 간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아니다. 잡 아들일 필요도 없다. 변명 따위 듣고 싶은 생각조차 없구나. 그 자리 에서 모조리 목을 베어버려라." "알겠습니다." "이것이 명단이다." 냉악이 화천명에게 조그만 서찰을 건넸다. "처리는 신속해야 할 것이다." 그러잖아도 지난번 실수 때문에 이를 갈고 있던 화천명이 서찰을 꽉 움켜쥐며 대답했다.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그 아이는 말이다...." 누군지 말해도 알고 있었다. 화천명은 안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단은 지켜만 보거라. 단, 궁주의 곁에는 없어야 할 게야." 부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하고 지금은 그의 병상을 지키는 불쌍한 여인. 안당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살아 도 산 것은 아니었지만.... "존명!" 허리를 꺾으며 대답한 화천명이 간자들을 색출하러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그 외에는 어느 하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회의실은 그렇게 한참 동안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 * * 무당을 쑥대밭으로 만든 을지호는 옥허궁 서남방에 위치한 용천관 (龍泉觀)에서 당가의 식솔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후∼ 아직 멀었군." 용천관 앞을 흐르는 검하(劍河)의 물줄기를 벗 삼아 산책을 하던 을 지호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긴 숨을 내쉬었다. 철혈마단과의 싸움에서 당한 부상도 치료하지 못하고 연이은 격전 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을지호는 용천관에 온 지 사흘이 되어서야 간신히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를 돌보던 당가의 식솔들로부터 그가 의식을 잃고 난 후에 벌어진 일, 그 모든 사건들이 잠룡이라는 사천의 간세들이 꾸민 일이 라는 것을 전해 들었다. 적의 간계에 철저히 농락을 당했다는 생각에 쓰디쓴 웃음을 지은 을지호는 이후 몸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내상은 둘째 치고 외상이 너무 심해 의식을 회복하고도 다시 사흘이 지난 어제서야 비로소 거동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렇게 움직여도 되는 것인가?" 그의 뒤에서 제갈경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재빨리 몸을 돌리다 상처를 건드렸는지 인사를 하는 을지호의 인상 이 찌푸려졌다. "쯧쯧, 너무 무리하는 것은 아닌가?" 제갈경이 혀를 차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자꾸 써야 빨리 낫습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지. 아직은 누워서 요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 서 그러네." "괜찮습니다. 빨리 몸을 추슬러야지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흥분을 하라고 했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네. 그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리했을 테니까. 설마 하니 무당파의 제자가 간세일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그래도 너무 성급했습니다. 앞뒤 사정을 파악하고 보다 차근차근 풀어나갔어야 했는데. 참, 제갈세가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 타까운 일입니다. 어르신께서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제갈경의 안색이 살며시 어두워졌다. 제갈세가의 숭고한 희생은 이미 전 무림에 퍼진 상황이고 칭송을 받 았다. 그럼에도 당사자로선 괴로운 일일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 그만큼 버틴 것도 나름대로 최선이었을 테니. 그래도 상당수가 몸을 뺐다고 전해왔다네." "참으로 다행입니다." 을지호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부터가 문제일세." "문제라 하시면....." "제갈세가가 무너지면서 중천은 그들의 모든 역량을 패천궁에 쏟아 부을 터, 자칫하다간 패천궁이 무너질 수도 있네." 병상에 있어도 들을 것은 다 들은 을지호는 안휘명이 간자들에 의해 쓰러졌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궁주의 부재가 크게 작용하겠지요." 제갈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수가 건재한 병력과 그렇지 못한 병력의 전력은 하늘과 땅 차이 니까." "그래도 버틸 수는 있을 겁니다. 누가 뭐라 해도 패천궁 아닙니까?" "그렇다면야 좋으련만..." 을지호의 호기 어린 말에도 제갈경의 안색은 펴지지 않았다. "아, 그리고 그 소식도 들었는가?" "무슨 소식 말씀이신지요?" "자네의 조부께서 소림을 구한 일 말일세." "예. 듣기는 들었습니다만..." "정말 다행스런 일이지. 사천이 무림을 제패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을지 가문 때문일 걸세. 허허허!" "설마 그렇기야 하려구요...." 을지호는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한데 기분 좋게 웃는 제갈경과는 달리 그의 웃음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것이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은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 * * 광동성 화평현(和平顯)에 자리한 화화장(花花莊). 온갖 기화요초가 아름답게 피어 있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그 곳에 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천의 주력이 자리잡은 것도 벌써 달포 전의 일이었다. 봉황각(鳳凰閣). 날개를 활짝 펴고 펄럭이는 나비들, 꽃과 꽃 사이를 누비는 이름 모 를 생물들의 숨결 소리, 흐르는 물소리며 영롱하게 울려 퍼지는 새소 리,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절로 시흥이 떠오를 만한 곳. 그러나 화화 장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소였던 봉황각은 원래 주인이었던 화화장주 가 살해되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버리고 남천의 천주가 차지한 뒤부 터 생기를 잃었다. 주변을 노닐던 모든 생물들이 사라졌고, 사시사철 활짝 피던 꽃마저 시들어 버렸다. 그것들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한 것은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살기 어린 호통과 고함 소리였다. 꽝! 봉황각의 한쪽 창문이 박살나며 술병 하나가 주변 연못으로 날아들 었다. "도대체 이따위를 보고라고 하는 건가?" 남천의 천주 기요후(夔耀吼)는 손에 잡히는 대로 온갖 집기를 부수 고도 화가 삭지 않는 듯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희번덕거렸 다. "율평(慄萍)!" "예, 천주님." 오십이 갓 넘어 보이는 중년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말해 봐, 이게 말이 되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 죄송! 언제가지 죄송만 할 건데?" "죄송합니다." 율평은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만 하라니까!" 계속 반복되는 대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기요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엄청난지 연못을 차고 오르던 제비가 떨어 지고 봉황각 주변을 지키던 수하들마저 귀를 붙잡고 뒹굴 정도였다. 물론 율평을 비롯하여 기요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남천의 수뇌들 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살짝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오늘 들어온 보고만으로도 벌써 백 명이 뒈졌다. 사흘 전에는 칠 십, 열흘 전에는 육십. 우리에게 굴복한 문파란 문파는 모조리 깨져 나가고 애써 만든 분타가 하나둘 박살나고 있다. 지금까지 당한 인원 을 헤아리면 천도 넘는다. 천 명도! 천 명이 누구 애 이름이냐? 도대 체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건데? 희염(晞琰)!" "예? 예!" 사십이 갓 넘어 보이는 사내가 움찔하여 대답했다. "그쪽은 안심하라고 하지 않았으냐? 분명히 어떤 낌새도 없다고 했 을 텐데?" "그, 그것이..."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자 기요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 그래도 꼬, 꼬리를 잡았으니 곧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겁니..아 이쿠야!" 희염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면상을 걷어 채이곤 요란하게 바닥 을 나뒹굴었다. "일망타진? 웃기고 있네. 놈들을 포위했던 것이 세 번이었다. 세 번! 그때마다 모조리 전멸을 당한 것은 놈들이 아니라 함정인 줄 모르 고 얼씨구나 하고 걸려든 우리들이었고. 명색이 적의 동향을 살피는 취밀단(取密團)의 단주라는 놈이 놈들의 움직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니까 그따위 함정에 걸려든 것 아니냐?" "죄, 죄송합니다.' "시끄러!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을 쓰는 놈이 있으면 입을 찢어 놓을 줄 알아!" 기요후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대로 꼬리를 밟은 듯합니다. 지금 열 명도 넘는 취밀단의 인원이 놈들으 뒤를 바싹 뒤쫓고 있다니까요." 그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한 노인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 "흥, 이번에도 함정에 빠지는 것 아니야?" "아, 아닙니다. 이번엔 틀림없습니다." 엉금엉금 기어온 희염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틀림없다?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믿어주십시오. 이번만큼은 확실합니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생각보다 강한 어조에 지금껏 불신의 표정을 짓던 기요후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호∼ 그 정도 각오란 말이지? 좋다, 그럼 내 한번 물어보자. 놈들 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녹산(鹿山) 지역을 지나고 있다 했습니다." "녹산? 지독한 놈들. 벌써 그만큼이나 이동을 했단 말이지?" 그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상대의 기동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 랬기에 지금껏 잡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예. 녹산을 지나 조만간 남곤산(南昆山)으로 접어들 것이라 판단됩 니다." "남곤산이라... 확실한 것이냐?" "놈들을 뒤쫓고 있는 수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확실합니다." "보고 따위를 물은 것이 아니라 네 의견을 물은 것이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기에 희염은 금방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분명 남곤산으로 갈 것입니다." "좋아, 네가 목숨을 걸고 그리 말하니 믿어보지. 낭왕(狼王)!" "예. 천주님." 가요후의 부름에 육중한 덩치를 지닌 사내가 봉황각이 쩌렁쩌렁 울 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더 이상 놈들에게 당하는 것도 지쳤다.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가 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놈들보다 패천궁을 치는 것이 급하니 어쩔 수 없다. 네가 가서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라." "감사합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출정을 하지 못해서 늘 불만이었던 낭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봉후(蜂后)가 지원을 해라." 기요후가 낭왕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여인에게 고개를 돌리 며 말했다. 화들짝 놀란 낭왕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알아. 그래도 같이 가. 이 참에 아주 뿌리를 뽑아야겠어. 희염!" "예, 천주님." "이 정도 지원을 해주면 되겠지?" "충분합니다." 희염이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하며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러나 기요후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자신하지 마라. 네놈 목숨이 걸린 것이다. 그래, 기왕 움직 이는 것 확실하게 지원해 주마. 만독문의 독혈인도 데리고 가라. 기하 학(奇蝦虐)!" "예." 만독문의 문주 기하학이 공손히 대답했다. "대기하고 있는 독혈인이 몇이나 있느냐? 이름만 독혈인인 어설픈 것 말고 제대로 된 것으로." "셋입니다." "둘만 지원해 줘." "알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희염은 기요후의 배려에 감격해 마지않았다. "낭왕에 봉후, 그리고 독혈인까지 지원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돌 아올 생각 하지 마라. 차라리 그 자리에서 뒈져 버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하나 천주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남천의 사천왕(四天王) 중 두 명이 나서고 거기에 단 하나만으로도 절대무적이라는 독혈인까지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일부러 실패를 하 려고 해도 절대 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눈앞에서 쓸데없이 지껄이지 말고 결과로 말해. 가라! 가서 놈들을 끝장내!" "존명!" 기요후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고 봉황각을 빠져나온 희염은 낭왕과 봉후를 기다리며 남쪽 하늘을 노려보았다. '기다려라, 해남파! 반드시 네놈들의 명줄을 끊어줄 테니까.' 놈들로 인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수모와 고초를 당했던가. 그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무득부득 갈았다. 제61장 구출(救出) "후∼ 이제 코앞이군." 식솔들과 떨어져 정신없이 달려오기를 나흘, 어느덧 호북성 균현에 들어선 을지소문의 눈에 멀리 무당산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우선은 요기부터 해야겠구나." 제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배를 움켜쥐고 싸울 수는 없는 법. 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휴식도 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작정 적진 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을지소문은 주린 배를 채우고 바닥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눈에 띄 는 대로 아무런 주점이나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손님." 대략 열서넛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오며 환대 를 했다. "간단하게 요기나 하고 가련다. 그런데... 자리가 없는 것 같구나." 주점의 내부를 살펴본 을지소문이 다소 짜증나는 어투로 말했다. 널찍한 내부에 놓여 있는 탁자는 대략 열두어 개. 한데 마땅한 자리 가 없었다. 한두 곳 비집고 들어가면 될 듯하였으나 자리 자체가 마치 시장통에 들어선 것처럼 몹시 시끄러울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았 다. "이층에도 없느냐?"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층은..." 을지소문이 이층을 거론하자 점소이의 반응이 어째 수상했다. 그렇 다고 신경 쓸 그도 아니었다. "가보면 알겠지." 말릴 틈도 없이 이층으로 성큼 발걸음을 옮긴 을지소문은 이층에 도 착하기도 전에 점소이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층보다 다소 좁은 이층에 놓여진 탁자는 모두 일곱이었는데 모두 주인이 있었다. 각 탁자마다 많게는 대여섯 명에서 적게는 서너 명씩 앉아 술과 음식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들을 뿜어 내고 있었다. '무인들이었군.' 이층에 올라서자마자 전신으로 끈적한 살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몇 몇은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검에 손을 대고 언제라도 손을 쓸 수 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꽤나 실력이 있는 자들로 느껴졌다. "흠, 이곳도 다들 주인이 있었군." 그러나 말은 그리해도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난간 쪽 탁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그를 위협했지만 애당초 그 정도에 겁을 먹을 위인이 아닌지라 그는 오히려 살기를 뿌리는 무 인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노인장, 미안하지만 합석해도 되겠소? 아무리 살펴봐도 여기만한 자리가 없구려." 을지소문이 다가올 때부터,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가 주점에 들어 설 때부터 지켜보던 노인은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마침 혼자 술을 마시느라 적적하던 참이었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을지소문을 노리던 모든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역시, 이 노인을 따르는 자들이군.' "허허허, 고맙소. 꼬마야."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사의를 표한 을지소문이 거의 울 듯한 표정으 로 서 있는 점소이를 불렀다. "예? 아, 예." "뭘 그리 놀라느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주문이나 받거라." "뭐, 뭐를 올릴까요?" "흠, 뭐가 좋으려나. 그래, 그냥 밥하고 여기서 잘하는 고기나 몇 접시 구워 오너라. 술도 잊지 말고."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대충 뭔가를 끄적이는 것 같던 점소이는 잠깐이러도 이층에 있기 싫 은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먼 곳에서 오신 듯합니다." 노인이 을지소문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살피며 물었다. "어이쿠! 이런 실례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탁자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 먼지를 털어내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긴장들 하기는.' 을지소문은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일렁이는 예리한 기운을 느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급히 달려오다 보니 옷에 먼지가 앉은 줄도 몰랐구려." "여행을 하다 보면 다 그렇지요. 신경 쓰지 말고 음식이 나오기 전 에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빙긋이 웃음을 지은 노인이 한잔 술을 청했다. 그러잖아도 목이 탔 던 을지소문이 거절할 리가 없었다. "고맙소이다." 단숨에 술을 들이킨 을지소문이 반대로 노인에게 술을 권하고 그렇 게 서너 번 술잔이 돌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요. 노부는 위지건(尉 遲乾)이라 합니다." "허허, 그까짓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소. 딱히 내세울 이름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냥 산골 구석의 촌로(村老) 정도로만 알아주시구려." 을지소문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그냥 가볍게 대꾸한 것이었다. 자신을 위지건이라 소개한 노인 또한 그럴 수 있다 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노인을 수행하던 수하들은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례하지 않은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어르신께서 손수 이름을 밝히셨으면 노인장 또한 의당 예를 갖춰야 할 것 아니오?" "일성(日星)!" 곁에 앉아 있던 노인이 팔을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게다가 어르신께 하는 말투를 좀 들어보십시 오.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 건방지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네. 어서 앉게나.' 노인은 위지건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을 살피며 재빨리 사내를 주 저앉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는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위 지건의 안색을 살핀 일성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송합니다. 흥분을 잘하는 친구라." "괜찮소. 원래 주인을 위해 짖는 개는 나무라지 않는 법이라오." "이 늙은이가 미쳤나! 개라니!" 또다시 참지 못한 일성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짓이냐, 일성! 손님께 너무 무례하구나." "하, 하지만 저 늙은이가..." "입... 다물어라." 짧지만 강렬한 힘이 담긴 말이었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근래 들어 위지건이 그와 같이 화를 내는 것을 보지 못했던 일성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용서를..." "용서는 이분께 구해라." 누군의 명이라고 거역을 할까? 일성은 주저없이 을지소문에게 고개 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상황이 그쯤 되면 다소간 미안해하거나 적어도 무안한 표정이라도 지어야 할 것이나 을지소문은 참으로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 다음부터는 조심 하게나. 오래 살고 싶거든 나설 때, 나서지 않을 때를 가려야 할 게 야." '씹어 먹을 늙은이 같으니라고!' '이놈아, 그리 노려본다고 되겠는냐? 차라리 시원스럽게 덤벼보거 라.' 이층에 오르던 순간부터 유난히 자신에게 적의를 보인 일성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도발을 한 을지소문은 죽을힘을 다해 화를 삭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자리로 돌아가거라." 위지건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아지곧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는지 음 성은 차기만 했다. "이것 참, 부끄럽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구려. 허허, 참으로 충직한 수하인 것 같소. 성격만 조금 고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소이다." 병 주고 약 주는 것인가? 애써 고개를 돌린 일성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나저나 이곳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로 가시는 게요?" 을지소문의 물음에 위지건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집을 떠난 아들 녀석이 동료들과 일을 벌였는데 어찌 돼가 는지 한번 살펴보려고 왔습니다. 처음엔 그럭저럭 잘해 나가는 것 같 더니만 근래 들어 꽤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뭐, 응원차 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구려." "노인장도 이곳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지요." "한데 어째서?" 그러자 을지소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 노형(老兄)과 똑같은 이유라오. 손자 놈이 일을 저질렀는데 제대로 수습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야단을 좀 치려고 왔소이다." "허허허, 그렇습니까? 이것 참 기묘한 인연이로군요. 자자, 한 잔 더 받으시지요.' 무엇이 그리 좋은지 크게 웃음을 터뜨린 위지건이 연거푸 석 잔의 술을 권했다. 둘의 술자리는 을지소문의 음식이 나오고 또 그가 시킨 술이 바닥 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만 일어나시렵니까?" 위지건이 천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을지소문을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소." 제법 술이 올랐는지 묻는 위지건이나 대답하는 을지소문 모두 안색 이 대춧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맞는 술친구를 만났는데 아쉽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하나 어쩌겠소. 손자 놈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일이 급하니." 헤어지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을지소 문이 위지건에게 포권을 했다. "즐겁게 잘 마시고 쉬다 가오이다." "천만에 말씀을. 만나뵙게 되어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봅시다." "예. 한번쯤은 더 뵈올 날이 있겠지요." "그럼, 이만." 을지소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렸다. 위지건은 그의 몸이 이층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다가 빈 잔에 술을 따르 더니 곧 난간으로 다가갔다. 계단을 내려간 을지소문은 어느새 일층을 가로지르며 출입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노인장, 이별주나 한 잔 더 받으시지요." 위지건이 을지소문을 향해 술잔을 던졌다. 진기가 실린 것인가? 그의 손을 떠난 술잔은 천천히 하강을 하며 느릿느릿 날아갔다. 거 의 칠팔 장의 거리를 격하며 날아가는 술잔은 조금도 떨리지 않고, 단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은 채 을지소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야!" "시, 신기로다!" 일층에서 그 모양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워했 다. 더러는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허허, 고맙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낚아챈 을지소문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곤 잔을 돌려주며 말했다. "술이 없으니 빈 잔밖에 돌려주지 못하겠구려. 언제고 기회가 되면 이 한잔 술의 빚을 갚도록 하겠소." 을지소문의 손을 떠난 잔은 내려올 때와 똑같은 속도로 주인에게 돌 아갔다. 위지건이 술잔을 받았을 땐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중원은 참으로 넓은 것 같소. 그렇지 않고, 태상(太上)?" "예. 저만한 인물이 존재할 수 있다니 그 저력이 무섭습니다." 위지건의 곁으로 다가온 백미노인은 그의 손에 들려진 술잔을 보며 다소 굳어진 얼굴로 대답을 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구나." 위지건이 입이 한 자나 나와 있는 일성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 그것은 아니오나..." "할 말이 있으면 해보아라." 잠시 머뭇거리던 일성이 살며시 입술을 깨물고 입을 열었다. "예. 소신은 태존(太尊)께서 어째서 저런 늙...노인에게 이리 환대 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무례한 것도 적당해야지 아예 하늘을 찌르지 않습니까?" "그리 보였느냐?"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까?" "쯧쯧쯧, 멀어도 아주 한참을 멀었도다." 위지건은 한심하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하긴, 네 탓만 할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저 노인의 힘을 가늠할 수 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태상과 좌(左), 우상(右相)뿐이겠지." "그, 그정도로 대단한 인물입니까?" 위지건의 입에서 그 정도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 나 있을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일성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모든 이 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받아보겠느냐?" 위지건이 술잔을 들었다. 애당초 거절할 수 없는 명령. 일성은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위지건은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술잔을 던졌다. 십여 쌍의 눈이 느릿느릿 날아가는 술잔에 집중되었다. 일성이 술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그의 입에서 탁한 신음서잉 흘러나오고 몸이 크게 휘청거렸 다. "크윽!" 술잔에 담긴 힘이 어찌나 거대한지 혼신의 힘을 다했건만 일성은 연 거푸 일곱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고서야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오성의 힘이 실린 것이다." "아!" 위지건의 말에 모든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성 정도 의 무공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터. 그 정도의 고수를 이 처럼 속수무책 뒷걸음질치게 만든 것이 고작 오성 공력이라니! 하지 만 그들이 진정 놀라야 할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난 그에게 십성의 공력으로 술잔을 던졌다." 꽝! 거대한 둔기로 뒤통수를 맞으면 이런 느낌일런가! 일성 정도의 고수도 고작 오성의 공력을 감당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십성이라니! "......." 애당초 을지소문의 힘을 알아본 세 명의 노고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십성의 공력이 담긴 술잔을 받으면서도 그는 태연자약했다. 보아서 알겠지만 술잔에 담긴 술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고 그의 자세 또 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술잔을 보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가 사용한 힘에 정확히 일 푼 정도의 힘을 더 담 아서 말이다." "그, 그럴 수가!"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는 일성은 얼이 빠져 있었다. "태상은 그 노인의 힘을 어느 정도라 보는가?" "글쎄요...." 백미노인은 말을 아꼈다. "괜찮네. 말해 보게." "태존과 동수(同手) 정도의 고수로 보입니다." 백미노인은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대답을 했다. 하나 위지건은 담담 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에게 그렇게 후한 점수를 줄 필요까지는 없네. 내가 보기 엔 최소한 동수야." "그 정도까지는...." "확실하네. 다른 무엇보다 내 몸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어. 처음 그 를 봤을 때 전신의 모든 털이 곤두서는 느낌, 지금껏 이런 긴장감을 맛본 적은 없었네. 과연 어떤 인물일까? 저만한 고수라면 이름이 알려 지지 않을 까닭이 없는데." "알아볼까요?" "아니, 관두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네. 왜 그런지 몰라도 언제고 다시 만날 것만 같단 말이야.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위지건은 아직도 저려오는 팔을 의식하며 천천히 술잔을 들었다. '정말 궁금하군.' * * * 북천의 본진이 자리잡은 원화관(元和觀)에서도 가장 엄중히 보호를 받는 회심각. 보통 이중, 삼중으로 호위 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 난히 인원이 많았다.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인원이 배치되어 있었 고 그들 모두의 얼굴엔 팽팽한 긴장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늦은 오후, 하루 종일 온몸을 불태우며 세상을 밝히던 태양이 서산 마루로 지친 몸을 기대고 있을 무렵 일단의 무리들이 원화관으로 몰려 들었다. 처음엔 적이 침입한 줄 알고 잔뜩 긴장하던 북천의 수뇌들은 그들이 서천의 천주 철포산과 그가 대동하고 온 수하들이라는 것을 알 고는 극진한 예로 대접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질 무렵, 회심각에선 연 회를 겸하여 중대한 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정신들 똑바로 차려. 쥐새끼 한 마리도 침입을 시켜선 안 돼!" 설풍단의 부단주 장방형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회심각 주변을 돌았 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행여나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자가 접근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한빙오 영, 설풍단이 경게를 서는 한 그 누구도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단번에 짓밟으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흠, 저곳이 회심각이렷다.' 야음을 틈타 원화관에 잠입한 뒤 은밀히 사마유선을 찾던 을지소문 은 서천의 수뇌들이 자신보다 먼저 도착하여 큰 환대를 받고 회심각에 모여 매우 중대한 회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사마유선을 찾는 일을 잠시 미루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부딪칠 인물들, 아무래도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제법 만만치 않겠는걸.' 을지소문은 회심각 주변을 빽빽이 에워싸고 있는 인의 장막을 보며 침입이 생각만큼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개인의 무공 이야 문제될 것은 없지만 아무런 소란도 없이 수십 쌍의 눈을 피한다 는 것은 그로서도 꽤나 부담스런 것이었다. '그래도 어딘가엔 틈이 있겠지.' 느긋하게 마음을 먹은 그는 회심각의 주변을 돌며 경계가 가장 허술 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들키지 않으면서 회심각의 경계가 어떤지 살피는 일도 결코 만만 치 않은 일이었으나 그 정도는 을지소문에게 있어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참 동안이나 주변을 살피던 그는 결국 회심각의 북쪽, 연못 쪽에 서 약점을 찾아내고는 한빙오영 중 한 명이 그들의 경계 상태를 살피 는 틈을 타 지붕으로 날아들었다. 호위들은 물론이고 한빙오영도 마치 밤안개처럼 자연스레 어둠에 몸을 숨기고 순간적으로 공간을 이동하여 숨어드는 그를 발견할 능력은 지니지 못했다. 회심각의 지붕으로 숨어든 을지소문은 지붕과 지붕 사이의 사각에 몸을 숨기고 지붕 기와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켜 외부에서 그의 존재 를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그리곤 천천히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어 찌나 조심을 했는지 새끼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미세한 구멍을 만들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반 시진. 그나마 다행인 것 은 회심각에서 벌어진 연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구멍을 완성할 수 있 었는데 만약 연회가 끝난 상황이었다면 제아무리 을지소문이라 해도 적의 이목을 숨기고 지붕에 구멍을 뚫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후∼ 간신히 시간을 맞췄군.' 음악을 켜던 악사(樂士)들과 무희(舞嬉)들이 퇴장을 하고 들떠 있던 좌중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 것을 살피며 을지소문은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리곤 일체의 인기척을 감추고 회심각의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천주의 환대, 참으로 고맙소." 철포산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을 했다. "급히 준비하느라 대접에 소홀했습니다." 위지요는 부드러운 미소로 예를 차렸다. "아니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까지 환대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소." "과찬의 말씀입니다. 예부터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은 사이 아닙니 까? 당연한 것이지요." "허허, 딴은 그렇소. 아무튼 나름대로 여흥도 즐겼고 밤도 깊은 것 같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소." 무희들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위지요도 고 개를 끄덕였다. "예. 천주께서 직접 이곳을 찾으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실 터, 어떤 연유로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잠시 숨을 가다음은 철포산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연합을 합시다." "연합은 이미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철포산이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위지요는 시 치미를 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무당을 치기 위해 허비한 시간도 벌써 백여 일이 훌쩍 넘었 소. 많은 도관을 점령하고 또 그만한 피해를 입혔다지만 사실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소. 북천에서도 그다지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고 알고 있소." "하하하, 저들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다 보니..." "그러나 언제까지 이곳에서 머뭇거릴 수는 없지 않겠소? 우리가 무 당산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저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세를 확장하고 있소." 그제야 위지요의 안색에도 변화가 왔다. "하나 저들 또한 패천궁에 막혀 고전하고 있습니다." "천주는 소식을 듣지 못했소? 중천의 발목을 잡던 제갈세가가 무너 지고 패천궁의 궁주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 하오. 패천궁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오? 아니, 버틴다고 해도 고작 명맥을 유지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오. 귀주, 광서, 광동은 남천에게 산동, 안휘, 강 소, 절강, 강서 지역은 이미 중천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렸소. 남은 것 은 호북과 호남뿐. 한데 호남은 남천에게 거의 넘어가 버린 상황이고 중천은 호북으로 세를 뻗치면서 하남까지 노리고 있는 상황이오." "음." 하남의 얘기가 나오자 위지요는 뼈아픈 신음성을 내질렀다. 애당초 하남은 소림사를 치면서 북천의 영역으로 굳어진 것이었다. 하나 소림 사를 다시 빼앗기면서 그 영향력이 급속도로 사라져 지금은 사실상 없 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들어 중천에서 호시 탐탐 하남성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중천의 간세들로 무당이 쑥대밭이 되면서 우리도 놈들을 칠 수 있 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소. 그러나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아니, 오히려 서로를 견제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아무튼 서로의 힘을 의식하고 견제를 하다 보니 공격은 지지부진하고 제대로 된 요충지를 점령하지 는 못했소. 이러다간 저들이 패천궁을 무너뜨리고 북상할 때까지도 우리는 무당산에 묶여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만약 오늘 철포산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직접 서천을 방문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위지요 로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면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우선 일체의 사심 없이 힘을 합쳐 무당파와 정도맹을 무너뜨려야 하오." "그 다음은요?" "호북은 우리가, 하남은 북천에서 차지하는 것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하면 어떻겠소?" "호북을 그대로 넘겨달라는 말씀입니까?" 위지요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들이 소림사를 빼앗겼다는 소식 을 듣고도 아직까지 무당산에 머무는 것은 오로지 호북에 진출하기 위함이었다. 생각만큼 일이 쉽게 풀리지 않고 있어서 문제이기는 하 지만. "대신 섬서를 넘보지 않겠소. 알고 있겠지만 섬서는 북천보다는 우 리의 힘이 미치기 쉬운 곳이오." 사실이었다. 서천이 마음만 먹으면 섬서 땅은 수일 내로 그들의 손 아귀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북천의 입장에선 호북보다 하남이 중요하지 않소? 하남을 중 천에 빼앗긴 다음에 호북을 차지해서 뭣 하겠소? 외딴 섬도 아니고." "하남에는 소림사가 있습니다. 그리 쉽게 놈들 수중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허, 설마 하니 이빨 빠진 소림이 중천의 힘을 막을 수 있다고 생 각하는 것이오? 중천이 마음만 먹으면 소림을 무너뜨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오." '저것들이 소림을 뭘로 알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을지소문은 자꾸만 소림을 무시하는 철포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한데 그 때문이었을까? "누구냐!" 철포산이 갑자기 호통을 치며 앞에 놓인 젓가락을 던졌다. 팍! 연약한 나무로 만들어진 젓가락은 천장과 단단한 지붕을 뚫고 단숨 에 사라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위지요가 긴장하며 물었다. 그러자 한참 동안이나 천장을 응시하던 철포산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인기척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랬소." "저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가 조금 예민했던 것 같소.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면 뭔가 반응이 있었을 터인데 전혀 없는 것을 보니 말이오." 철포산은 자신의 신경이 너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것이라 여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십성의 공력을 실어 던진 젓가락을 간단히 피하고 또 그러면서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는 고수가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 짧은 순간에 손가락 하나로 온몸의 체중을 버텨내며 그가 던진 두 개의 젓가락 중 하나를 피해내고 다른 하나는 입으로 받아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향해 엄청난 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 이야기가 겉돈 것 같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 오. 서천과 북천이 힘을 합쳐 최대한 빨리 무당산을 쓸어버리고 병력 을 몰아 소림사까지 점령한다. 이후, 호북은 우리가, 하남은 북천이 차지한다. 물론 남천이나 중천의 반발이 있겠지만 그 지역을 먼저 선 점한 후 서로 힘을 합쳐 대응하면 그들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오." "호남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호남은 포기할 생각이오. 호남은 애당초 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진 출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곳이잖소. 또한 그곳을 포기하면 저들의 반발 도 최소한으로 할 수 있고 나름대로 생색도 낼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그다지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군요." "최선일 것이오." 위지요의 반응으로 보아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최종 대 답을 듣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것. 수염을 쓰다듬으며 목을 축이 는 철포산은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위지요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철포산도 대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두 눈을 감고 한참이나 숙고하던 위지요는 철포산의 의견이 현 시점 에서 최선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약속만 지키신다면 함께 힘을 합치는 것도 나쁠 것 같 지는 않군요." "허허허허! 잘 생각했소." 그제야 자신의 의도대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에서인지 철 포산은 회심각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세부적인 것은 차후 논의하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잠시 물렸던 술이 나 한 잔 더 하시지요." "허허, 어디 한 잔뿐이겠소. 대취하도록 마셔봅시다. 아, 그전에 한 가지 청이 있소.' "무엇입니까?" "천주도 알고 있겠지만 이번에 노부의 평생지기를 잃었소." '나렴을 말하는군.' 위지요는 위지청의 보고로 나렴이 을지호의 손에 죽은 것을 이미 알 고 있었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친구를 그리 만든 놈이 무당산에 있소." "삼시파천 말입니까?" "그렇소. 삼시파천 을지호! 내 이놈의 가죽을 벗겨 신으로 삼고 뼈 를 갈아 마시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소." 나렴의 죽음을 떠올리는 철포산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 져 나왔다. "북천은 놈에게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 행여 놈과 싸우더라도 천주 께 넘겨 드리지요." "고맙소. 하나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오." 순간, 위지요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흠, 말씀해 보시지요." "이곳에 놈의 계집이 있다고 들었소. 그 계집을 넘겨주시오." "예?" 설마 하니 철포산이 사마유선을 넘겨달라고 할 줄은 몰랐던 위지요 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을 하고 말았다. "무당산을 점령한다고 해도 놈의 목숨을 취할 수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하오. 놈이 마음만 먹으면 몸을 빼기는 쉬울 것이오. 그렇지만 제 계집이 내 손에 있는 한 나를 피하지는 못하오." "아무리 그래도..." "부탁이오. 계집을 내게 넘겨주시오." "그것이...." 위지요가 망설이는 사이 위지청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것은 안 됩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인가?" 철포산이 다소 기분 상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기는 하오나..." 위지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위지요가 재빨리 전음으로 그 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네. 하나 나 또한 계집 따위로 놈을 위 협할 생각은 없어. 그냥 도망만 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걸세. 내가 원 하는 것은 놈이지, 놈의 계집이 아니거든." 철포산의 시선이 위지요에게 향했다. "계집을 다치게 하여 북천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계집은 놈을 낚기 위한 미끼일 뿐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오. 하니 넘겨주시구려." 넘겨달라고 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거부라도 한다면 지금까 지의 모든 대화를 단번에 뒤집어 버릴 수도 있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표정. 처음부터 아니라면 모를까 지금 와서 판을 뒤집고 싶지 않았던 위지요는 열심히 고개를 흔드는 위지청을 외면하고 결국 허락을 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북천의 명예를 지켜주겠다는 말씀을 믿고 넘겨 드리겠 습니다." "고맙소." "아버님!" "그만 되었다. 네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먼저 약속을 어긴 자는 그 자다. 그는 무당파의 장문인의 목을 베지 못했어. 뭐, 그녀를 구하고 싶으면 그가 직접 움직이겠지. 지금 가서 사마유선을 데리고 오너라." 위지청은 왠지 부친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힘없이 대답을 한 위지청이 회심각을 빠져나왔다. 지붕에서 안의 동정을 엿보고 있던 을지소문의 몸도 어느새 사라지 고 없었다. "흥, 아무리 포로 신세라지만 이 밤중에 쳐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 군요." "미, 미안하오. 아직은 초저녁인지라..." "도대체 나를 언제까지 잡아둘 셈이지요?" 재빨리 옷매무새를 다듬고 허리춤에 손을 얹은 사마유선이 차갑게 물었다. '참으로 대단한 여자야.' 위지청은 포로로 잡혀와 과연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여자가 또 있 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언제까지 잡아둘 생각인지 물었어요." "그것이..." "흥,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일이 제대로 안 풀리는 모양이군 요. 그럴 줄 알았어요. 고작 여인네나 인질로 잡고 위협할 줄 아는 이 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왜, 찔리나 보지요? 그러니까 더 이상 날 붙잡아두지 말고 풀어줘 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미안하게도 그럴 수가 없게 돼버렸소." 사마유선은 위지청의 음성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요?" "당신은 곧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것이오." "다른 곳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건가요?" "서천." "서천이라면... 철혈마단!" 사마유선이 깜짝 노라 소리쳤다. "그렇소. 서천의 천주가 당신을 원했소." 일순 사마유선의 얼굴에 냉기가 피어올랐다. "나를 이용하여 오라버니를 잡겠다는 것이겠군요." "아마도. 하나 당신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오.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우리와 약속했소." 사마유선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약속? 웃기는군. 누가 누구를 위해 약속을 한다고. 왜? 그따위 말 을 들으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나 보지? 꺼져 버려!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소인배 따위와는 말도 하기 싫으니까." "약속은.. 그가 먼저 지키지 않았소." "헛소리! 나는 귀가 없는 줄 알아? 애당초 그 서찰은 사기였잖아. 무당에서 보냈으되 보낸 자가 무당파의 인물이 아니라 너희가 잠입시 킨 간세였다면서?" "중천에서 한 짓이오." "어쨌든 똑같은 말이잖아. 결국 무당파는 우리를 해칠 의도가 없었 어. 무당파와 우리를 이간하려는 의도만 있었을 뿐. 그것을 안 이상 오라버니는 무당파의 장문인을 죽일 이유가 없고. 그렇다면 당신들은 나를 풀어줘야지. 북천의 명예 어쩌구 하며 거창하게 굴었으면 그게 당연한 것 아냐?" 조리있게 풀어가는 사마유선의 말솜씨에 위지청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억지스런 말도 있었으나 대부분 옳은 소리였고 특히 북 천의 명예를 거론할 때는 낯이 뜨거워 얼굴을 돌려야 할 정도였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명색이 천하를 노린다는 놈들이 고작 여인네나 인질로 붙잡아서야 쓰나."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건만 난데없이 들려오는 음성은 무엇 인가? "누구냐!" 기겁을 한 위지청이 재빨리 몸을 틀며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하나 검은 허공을 벨 뿐이었고 시선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 어디로?' 위지청은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쯧쯧, 제법 실력은 있는 것 같다만 검은 그렇게 앞뒤 재지 않고 휘 두르는 것이 아니다."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위지청의 몸이 또다시 회전을 하였고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검은 허공 을 가를 뿐이었고 두 눈 역시 적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했다. "모습을 보여라!" 위지청이 고개를 마구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이놈아." 또다시 장난기 어린 음성이 들리고 위지청은 자신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위지청이 놀란 눈을 껌뻑일 때 그의 등 뒤에서 그가 몸을 틀 때마다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장난을 쳤던 을지소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잘났다고 그리 고함을 지르느냐? 귀찮게 다른 녀석들이라도 몰 려오면 어찌하려고." 그리곤 손가락으로 위지청의 이마를 튕겼다. 혈을 제압당해도 몸의 감각은 남아 있는지 위지청의 눈가가 고통으로 씰룩거렸다. "정신이 번쩍 날 것이다." 위지청의 이마를 한 번 더 튕긴 을지소문이 토끼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움에 입을 가리고 있는 사마유선에게 다가갔다. "네가 사마유선이라는 아이냐?" "예? 예." 사마유선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구나. 나는 을지소문이라고 한다." 난데없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사마유선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하나 을지소문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그녀와는 달리 비록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진 못하더라도 귀는 열려 있었던 위지청은 그 이름을 듣고 기절할 듯 놀라고 있었다. 궁귀 을지소문! 과거엔 몰라도 무림을 도모하고 있는 지금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 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 더구나 그로 인해 소림사에 남아 있던 북천의 무인들이 패퇴하여 쫓 겨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내가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 그것이..." 생면부지인 노인이 다짜고짜 나타나 이름을 밝히고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으니 사마유선으로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을지소문은 최대한 근엄하면서도 위엄있는 음성으로, 그러나 나름대로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소개 했다. "내가 너의 시할아버지가 된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하지 못한 사마유선은 여전히 황당한 표정이었다. "허허, 조금 전 모습으로 봐선 꽤나 당찬 것 같더니만 눈치가 꽤나 느리구나. 내 말인즉슨, 너를 이곳에 두고 고생만 시키는 을지호라는 한심한 놈이 바로 내 손자라는 말이니라." "오, 오라버니의 할아버님이시라면...." "네가 내 손자며느리란 소리니라.' "아!"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사마유선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사마유선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어르신은 무슨, 그냥 할아버님이라 불러라." 그러나 사마유선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을지호와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장래를 약속하기는 하였으나 아직은 혼인을 하지 않은 사이인지라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을지소문은 그런 사마유선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를 닮아서 여자 보는 눈은 있는 것 같구나. 하 는 짓을 봐선 평생 장가도 못 갈 것 같더니만.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네놈은 거기서 뭐 하는 것이냐? 오랜만에 봤으면 인사를 해 야 할 것 아니더냐?" 을지소문은 방 안 한구석에서 날개를 접고 있는 철왕을 보며 호통을 쳤다. 철왕은 날개를 펴지도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부리를 을지 소문의 다리에 비벼댔다. "에라이!" 을지소문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철왕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평소라 면 무슨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났겠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른 법. 철왕은 감히 발광도 하지 못하고 죽은 듯 물러났다. "으이구! 주인 놈이나 데리고 다니는 새나!" 또다시 분통을 터뜨린 을지소문은 옆에 있는 사마유선을 의식하고는 애써 화를 삭이곤 위지청에게 다가갔다. "네놈들 하는 짓이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내 손자며느리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으니 이번 한 번만 참고 넘어가겠다. 차후, 이따 위 졸렬한 짓을 했다간 그날로 제사상을 차리게 될 줄 알아." 오로지 눈만 껌뻑이고 있는 위지청에게 간단히 경고를 준 그는 사마 유선의 의사를 들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무 지체했다. 가자꾸나." "하, 하지만 적들이..." "아무 것도 신경 쓸 것 없다. 허수아비 같은 놈들에게 잡힐 내가 아 니니라. 그리고 너와 내가 빠져나가는 것을 아는 놈들도 없을 게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것이 에상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62장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는 을지소문의 장담과는 달리 그들은 방문을 나서자마자 새로운 적과 만나게 되었다. "웬 놈이냐!" 막 안으로 들어서던 장방형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을지소문과 사 마유선을 보며 소리쳤다. 챙챙. 장방형을 비롯하여 옆에 있던 사내들이 재빨리 검을 꺼내며 경계를 했다. "그건 알아서 뭣 하게?" 을지소문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검을 곧추세우는 그들을 보며 가 소롭다는 표정이었다. "단주님을 어찌한 것이냐?" "걱정하지 말거라. 잠시 쉬고 있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심드렁히 대꾸하던 을지소문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짜짝!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장방형이 볼을 감싸 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린 놈이 어디서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것이냐!" 어느새 손을 쓰고 사마유선의 곁으로 다가간 을지소문이 짐짓 노여 운 표정을 지으며 꾸짖었다. '어, 언제?' 장방형은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한 눈빛으로 을지소문을 응 시했다. 그가 본 것이라곤 을지소문의 어깨가 잠시 들썩이는 것뿐. 그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는 이미 처음의 위치로 돌아가 있었고 자 신은 양쪽 뺨을 한 대씩 얻어맞고 쓰러진 상태였다. 눈으로도 따라가 지 못하는 움직임. 결코 인간의 몸짓이 아니었다. 한데 뺨을 맞은 것은 장방형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사내들 역 시 함부로 검을 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뺨을 한 대씩 얻어맞고 나뒹 굴었다. "그만 가자꾸나." 고작 두어 번 손을 쓰는 것으로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완벽하게 무 장 해제시킨 을지소문이 사마유선의 손을 잡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뭐, 뭣들 하느냐! 빠, 빨리 신호를 울려라!! 침입자가 있음을 알려 야 한다!"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머리가 어지러운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 거리는 장방형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삐이익! 요란한 경적 소리가 어둠으로 물든 원화관에 울려 퍼졌다. 그사이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위지청의 점혈을 풀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은 거냐?" 장방형이 입을 열기도 전 이미 밖의 상황을 알고 있던 위지청이 도 리어 그를 걱정하며 물었다. "그런대로." "다행이군. 손속에 인정을 둔 모양이다. 사마 소저는 어찌 되었냐?" "괴노인과 도망쳤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흥, 하지만 침입자가 있다 는 신호를 보냈으니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거다." "쉽게 잡힐 인물이 아니야."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영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도대 체 누구냐? 명색이 설풍단의 단주인 너나 내가 꼼짝 못하고 당할 정도 면 이름깨나 알려진 사람일 텐데." "을지소문." "을지소문?" 귀에 확 들어오지 않는 이름이었다. 장방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위 지청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궁귀." "구, 궁귀?" 장방형은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였 다. "지, 진짜냐? 그 재수없는 영감탱이가 구, 궁귀라는 것이?" "그래. 너나 나나 운이 좋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우리는 이미 저승길로 접어들었을 거다." "젠장, 설마하니 그런 괴물일 줄이야. 그렇다고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잖아. 빨리 보고를 해야지." 침입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궁귀 을지소문이라면 그들 손에서 해 결할 일이 아니었다. 만사를 제쳐 두고 우선적으로 보고해야 할 만큼 그의 존재는 엄청난 것이었다. "내가 뒤쫓을 테니까 네가 가서 보고를 해."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장방형이 지체없이 몸을 날리고, 위지청은 그와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 참, 이상하다. 이쪽이 맞는 것 같은데...." 사마유선을 데리고 탈출한 을지소문은 좌우로 갈라진 길을 앞에 두 고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화관이 비록 자소궁이나 옥허궁처럼 규모가 큰 건물은 아니었으 나 주변에 크고 작은 도관을 상당히 거느리고 있었다. 더구나 하나같 이 비슷한 모습인 데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길엔 크고 작은 나무들 이 자라고 있어 상당히 복잡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을지소문은 머리를 긁적이며 몹시 난감해했다. "큭!"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마유선의 입에서 웃음소리 가 터져 나왔다. "허흠!" 민망했던지 크게 헛기침을 하는 을지소문. 사마유선은 자신의 실수 를 깨닫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어째서 웃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혼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말해 보아라." "그, 그것이....." 사마유선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말해 보래도." 거듭되는 채근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오라버니는 유난히 길눈이 어두웠습니 다. 특히 밤에는 더욱 심했지요. 한데 할아버님께서도 그러신 것 같아 서... 죄송합니다." "험험, 그, 그랬느냐?" 젊었을 때부터 길눈이 어두워 한두 번 고생한 것도 아닌 터, 누가 손자 아니랄까 봐 그것마저 닮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곧 추격이 있을 것이야. 네가 보기엔 어느 쪽 길이 맞는 것 같으냐? 왼쪽 길이더냐?" 애써 무안함을 감춘 을지소문이 물었다. "조금 전에 왼쪽으로 갔었습니다." "그럼 오른쪽?" "예." "그럼 오른쪽으로 가보자꾸나. 이거야 원. 이러다간 몇 걸음 도망도 가보지 못하고 잡히고 말겠다." 한데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잘 알고 있구나, 영감!" 을지소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조금 전 지나 온 길에서 열두엇도 넘어 보이는 인원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장 앞장서 달려오며 호통을 친 사람은 원화관에 울려 퍼지는 호각 소리를 듣자마자 직속 수하들을 이끌고 직접 침입자를 찾아 나선 완함 이었다. "방금 네놈이 지껄인 것이냐?' 을지소문이 다소 싸늘해진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 영감. 그나저나 뭐야? 비상 호각이 울리기에 뭐 큰일이라 도 난 줄 알고 달려왔건만 고작 다 늙은 영감탱이 하나 때문인 거냐? 나 원, 어처구니가 없으려니." 큰 적이라도 쳐들어온 줄 알았건만 상대라고 해봐야 고작 주먹 한 방이면 끝장날 것 같은 비리비리한 늙은이가 아닌가! 잔뜩 긴장을 했 던 완함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실수였다. 아니, 실수라기보다는 재수가 없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적이 침입했다는 것만 들었지 완함은 그 적이 을지소문이라는 것을 미처 전해 듣지 못했고, 또한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안다면 오직 한 명,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을지소문뿐이었다. "다 늙은 영감탱이라...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였느냐?" "쯧쯧, 귓구멍까지 막힌 모양이군." 순간, 사마유선은 을지소문의 어깨가 살짝 들썩인다고 느꼈다. 그리 고 그것을 느꼈을 땐 이미 그의 신형이 완함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뭐, 뭐야!" 난데없이 짓쳐 드는 을지소문. 한데 그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 겁을 한 완함이 황급히 몸을 빼며 검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도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방어하는 솜씨는 천주의 호위대장이라는 명색에 걸 맞게 무척이나 빠르고 적절했다. 하지만 상대는 안타깝게도 을지소문 이었다. 그는 달리던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서너 번 몸을 흔드는 것만 으로도 완함의 검을 피해내고 좌우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드는 사내들의 공격마저도 완벽하게 흘려버린 뒤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든 완 함의 코앞까지 단숨에 치고 들어갔다. "있으되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 을지소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왼쪽 눈을 부여잡은 완함의 입에 선 비명성이 흘러나왔다. "크악!"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것도 말인 줄 아는 방정맞은 입." 을지소문의 주먹이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그 즉시 완함의 비명성이 이어졌다. "컥!" 두 손으로 눈과 입을 가리며 그대로 주저앉는 완함. 눈 깜짝할 사이 에 벌어진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수하들이 그의 위기를 보고 일 제히 덤벼들었다. "대장님을 보호해라!" "거져라, 늙은이!!" "죽어랏!" 사방에서 공격이 밀려들었다. 을지소문은 땅에 떨어진 완함의 검을 대충 주워 든 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챙, 채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고 동시에 번쩍번쩍 불꽃 이 일었다. 공격은 제법 그럴듯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 번의 충돌이 전부 였다. 기세 좋게 공격을 했던 사내들은 팔이 끊어져 버릴 것만 같은 고통을 겪으며 모두들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들고 있던 검 은 모조리 부러져 나간 상태. 그들은 재차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을지소문의 눈치만 살폈다. "성질 같아서는 모조리 요절을 내고 싶다만 손자며느리 앞에서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많이 참았느니라. 그러니 썩 꺼져라. 지금 당장!" 호랑이 앞의 토끼가 이럴 것인가? 그의 호통에 열 명도 넘는 사내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완함을 들쳐 업었다. 고작 두 번의 주먹질에 기절 일보 직전까지 간 완함은 맞은 왼쪽 눈과 입이 퉁퉁 부어 있었는데 특히 땅바닥에 토해낸 피에 섞인 희끄무레한 조각 몇 개는 틀림없는 그의 이빨이었다. "휴∼ 또 쓸데없는 놈들 때문에 괜한 시간을 지체했군. 손을 잡거 라. 차라리 우리가 먼저 사라지는 것이 낫겠다." 을지소문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사마유선이 그 손을 잡자마자 지 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심각 쪽에서 한 무더기 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어찌 된 것이냐?" 장방형의 보고로 을지소문의 출현을 알고 황급히 달려오던 위지요 가 수하들의 등에 업혀 있는 완함을 보며 물었다. "다, 다..개..스니다. 바, 바싱을..."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멍청한 놈!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방심을 한단 말이냐!"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버럭 소리를 지른 위지요는 한심하다 는 듯 그를 노려보다 곧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방심을 하고 덤볐으니 이 정도였지 죽자 사자 싸웠다면 죽었 을지도 모르는 일. 네겐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천주, 이곳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빨리 움직여야 하지 않겠소? 그 자가 추격을 따돌리고 도주하기 전에 말이오." 서천의 수뇌들을 데리고 위지요를 따르던 철포산이 완함의 상세를 힐끗 살피며 말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흥분한 모습. 아마 도 그 명성을 사해에 떨치는 궁귀 을지소문을 만날 수 있고, 또 서로 의 무공을 겨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 듯싶었다. 물론 그것은 고개를 끄덕이는 위지요라고 다르지 않았다. "가시지요." 위지요가 앞장서서 달리고 그 뒤를 철포산이 따랐다. 방향은 당연히 을지소문이 사라진 쪽이었다. 그사이 방향을 제대로 잡고 원화관을 빠져나온 을지소문과 사마유 선은 산길을 따라 그대로 남하하고 있었다. 무당파가 인근에 있었지 만 아무래도 적이 밀집되어 있을 터. 그쪽보다는 일단 산 아래로 내려 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도관에 비해 원화관이 그 규모가 크기는 해도 근 천여 명에 이 르는 무인들이 모두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해서 근처 도관은 물론이고 인근 숲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여 머물고 있는 문파와 무인 들도 많았다. 한데 끝없이 울리는 비상 호각에 본진에서 다급히 달려 온 전령들이 그들 모두를 준동케 했다. 원화관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인의 장막,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펼쳐진 것이다. "저쪽이다! 잡아랏!" 삐이이익! 누군가 을지소문을 발견했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연이어 호 각 소리가 숲을 뚫고 퍼져 나갔다. "막아랏!" 길을 막으며 삽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무인들. 족히 삼사십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더 많은 인원이 충당되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좀 더 서둘러야겠어." "예? 하지만 어떻게..." 정면의 길은 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좌우는 빽빽하게 가로막은 나무 들이 있어 움직이기 편하지 않았다. 그 사이 드문드문 보이는 소로 주 변으로도 짐승으로는 보이지 않은 미묘한 흔들림이 있었다. 아마도 적 이 매복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해도 다 방법이 있느 니라." 사마유선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며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 은 을지소문은 팔을 빙글 돌려 그녀를 안아 들었다. "하, 할아버님!" 당황한 사마유선이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을지소문이 너 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뭘 그리 부끄러워하느냐? 그럴 필요 없다. 할아비가 손자며 느리 좀 안았기로서니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사마유선을 안아 든 을지소문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곤 조용히 말했다. "잠시만 눈을 감거라." 의문이 들었지만 의심하지 않았다. 사마유선은 그가 시키는 대로 두 눈을 감았다. 몸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보다 훨씬 큰 진동, 그리고 얼굴에 와 닿는 거센 바람. 그녀는 을지소문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곤 자신도 모르 게 눈을 뜨고 말았다. '아!' 살짝 눈을 뜬 사마유선은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광경에 숨이 턱 막 히는 것만 같았다. 삽시간에 지나쳐 가는 나무와 바위들. 보았다고 생각하면 이미 한참 이나 지난 상태였다. 어쩌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았다. 원화관을 빠져나올 때도 빨랐지만 지금의 속도에 비하면 가히 조족 지혈(鳥足之血)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을지호도 가공하다 할 정도로 빠른 경공술을 자랑했으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 쩌면 자신 때문에 지금껏 걸음이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머, 멈춰랏!" "쏴라! 공격해!" 적이 그렇게 무대포로 달려올 줄은 몰랐다는 듯 길을 막고 있던 누 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슈슈슈슉! 가장 앞서 화살이 날아갔다. 무수히 많은 암기와 비수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한번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오 장을 움직이며 방향을 바꾸는 을지소문에게 제대로 접근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으샤!"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을지소문의 몸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는 일차 저지선을 펼치는 이들의 머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버렸다. "뭐, 뭐야!" 그런 식으로 도주할 줄은 몰랐다는 듯 다들 황당한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그토록 멀리 뛸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 다. 내리막길인 데다가 공격을 피하면서도 전혀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지만 무려 십여 장이 넘는 공간을 뛰어넘는 경공술. 오직 출행랑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정신들 바짝 차려라! 상대는 궁귀다!" 일찌감치 이십 명이 넘는 설풍단을 이끌고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위 지청은 삽시간에 일차 저지선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비록 경공 하나뿐이었지만 말로만 듣던 궁귀의 무공을 직접 보게 되자 전신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모든 무인이 지니 고 있는 강자에 대한 동경 내지는 호승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개개인이 공격해서는 소용이 없다. 일제히 움직인다!" "저런 식으로 회피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을지소문의 엄청난 도약력을 보고 놀란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쪽은 능선이다. 저 정도까지는 뛰지 못해. 그리고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경궁(巨鯨宮)의 고수들도 있다." 과거 낙검문과의 싸움에 선봉에 섰다가 심각한 피해를 당한 거경궁 이었지만 여전히 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있었다. 특히 설풍단의 뒤를 받치고 있는 사람은 거경궁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 풍항 (馮伉)이었다. "옵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일부러 주지시키지 않아도 그 압도적인 존재감 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쳐랏!" 위지청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설풍단원들이 동시에 몸 을 날렸다. 오지 단 한 번의 공격. 혼신의 힘을 다해야 막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모두들 죽기를 각오학 젖 먹던 힘까지 쏟아냈다. '제법이로군.' 모든 방위를 완벽하게 차단하며 밀려드는 공세에 을지소문도 긴장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나뭇가지 하나를 분질렀다. 그 모습을 본 위지청은 궁귀 대신 검신(劍神)이란 별호를 떠올렸다. 처음 궁으로써 명성을 날렸기에 궁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궁을 들었 을 때보다 더욱 가공한 것이 그의 검술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이었다. '어쩌면.....' 침을 꿀꺽 삼킨 위지청은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생각했다. 공연히 앞을 가로막아 동료들을 죽게 하는 것은 아니가 하는 후회감도 밀려들 었다. 그의 생각이 정리가 되기도 전, 사위를 휩쓰는 설풍단의 공세에 한 손에는 사마유선을, 다른 한 손엔 막 꺾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있던 을지소문이 뛰어들었다. 따땅! 경쾌한 충돌음과 함께 나뭇가지와 부딪친 검 네 자루가 허공으로 치 솟았다. 진정한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 법. 을지소문 정도의 고수에게 나 뭇가지라도 그 어떤 명검과도 비교해 꿀리지 않는 것이었다. 따땅! 또다시 세 자루의 검이 힘없이 날아가고 검의 주인은 손목을 타고 올라와 전신을 뒤흔드는 충격에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마, 막아랏!" 위지청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달리던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이쪽저쪽으로 몸을 흔들며 접근 하는 을지소문.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춤을 추었고, 어김없이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 명도 넘는 설풍단원이 무기를 잃었다. 더러는 손목이 부러지기도 했고, 내상을 입어 피를 토하며 쓰러진 사람도 다섯 이 넘었다. 감히 맞서 써울 수 없는 질풍노도(嫉風怒濤)와 같은 맹렬한 기세였 다. "크윽!" 수하들을 독려하며 싸우던 위지청의 입에서도 고통이 신음성이 흘 러나왔다. 그의 손엔 검신(劍身)이 박살나며 손잡이만 남은 검만이 들려 있었 다. 손목이 부러졌는지 그나마도 덜렁거리는 것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번까지는 경고로 하겠다." 을지소문은 나직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스무 명이 넘는 설풍단,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위치정도 을지소문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고작 몇 푼의 시간을 지체시킨 것이 전부였 다. '틀렸군.' 망연자실한 위지청은 어느새 한참이나 멀어져 가는 을지소문의 등 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대가 제아무리 궁귀 을지소문이라지만 이 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이제 남은 방어선은 거경궁뿐이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도 그들이 그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진정... 대단하다." 위지청은 어째서 궁귀라는 이름이 인구에 회자되는지 비로소 뼈저 리게 절감할 수 있었다. 한데 바로 그 즈음해서 일단의 무리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밤이 많이 깊었음에도 서두를 것 없다는 듯 느긋한 걸음걸이에 온 산이 추격전으로 떠들썩했지만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여유로운 태도. 다름 아닌 이름 모를 주점에서 을지소문과 술잔을 기울였던 위지건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저들이 누구냐?" 잠시 걸음을 멈춘 위지건이 앞을 가리키며 물었다. "자세히 보이진 않으나 불빛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표식을 보니 아무래도 거경궁 같습니다." 두어 걸음 앞선 일성이 다소간 자신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거경궁이 어째서?" "거경궁뿐만이 아니라 산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큰 싸움이 벌 어진 것 같습니다." 일성이 산을 훤히 밝히는 횃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태상이라 불리는 백미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신호음에 따르면 큰 싸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쫓 는 것으로 보이는군. 침입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태존." "침입자라? 한데 어떤 자가 침입을 했기에 이리 부산을 떤단 말인 가? 쯧쯧, 한심하기는. 이건 마치 대적이 쳐들어온 것 같지 않은가?" 위지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제가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놔두거라. 어차피 가던 길 아니더냐? 굳이 알고 싶지 않어도 곧 알 게 되겠지. 걸음이나 재촉하... 헛!" 무엇을 본 것일까?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 자세를 취하는 일성을 말리던 위지건의 표정 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성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의 눈이 위지건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그들은 저 멀리 거경궁의 무인들이 들고 있는 횃불 너머러 환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따르거라!" 이제껏 느리기만 했던 위지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동시에 그를 따 르는 이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보다 자세 히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안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오는 노인. 수십 명이 넘는 적을 상대함에도 그는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어떤 수를 썼는지 확인 할 길은 없었으나 그의 몸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무인들 서넛이 쓰러 졌다. 거경궁의 무인들이 그의 발걸음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벼들 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와 그를 돕는 몇몇의 저항이 거셌는데 그 또한 부질없는 짓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를 돕던 이들이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찰나의 차이를 두고 중심에 있던 사내의 몸마저 기우뚱 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꼬꾸라졌다. 위지건의 발걸음은 미이 멈춰져 있었다. 그리곤 놀라움이 가시지 않 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노인을 응시했다. "대단하다." 위지건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껏 그와 같이 단순하고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노인 같습니다." 그들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노인을 가만히 살피던 태상이 조용히 말 했다. 위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리 보았네." "어찌하시렵니까?" "글쎄." "적이라면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넌지시 말하는 태상, 하나 위지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두고 보세. 그와는 이런 곳에서 대적하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사이 천라지망을 뚫어낸 을지소문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허허, 이게 누구시오? 위 노형이 아니오?" 위지건을 발견한 을지소문이 사마유선을 내려놓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볼 수 있으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허허허,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인연이 꽤나 깊은 모 양이오." 을지소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저 소저는 누굽니까?" "내 손자며느리라오. 얘야, 인사드리거라." 사마유선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사마유선입니다." "허허, 반갑네." 나름대로 정중히 인사를 한 위지건이 을지소문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손자며느님이 참으로 미인입니다." "그렇소? 험험, 아무튼 고맙소." 경박한 노인처럼 보이는 것이 싫어 애써 담담히 대꾸했으나 을지소 문도 가히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한데 쫓기시는 모양입니다." 위지건이 산 위에서부터 점점 다가오는 횃불과 그들을 번갈아 바라 보며 물었다. "멍청한 손자 놈을 대신하여 적에게 사로잡혀 있는 이 아이를 빼오 다 보니 그리되었소. 뭐, 그렇다고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오." "허!" 위지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당산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이들이 철혈마단과 북천이라는 것은 세상천지가 다 아는 사실이고, 적이라고 말하는 이들 역시 두 곳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 조금 전 그를 막았던 이들이 거경궁임을 감안하면 적이란 북천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천하를 노리는 북 천을 상대하면서도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 참으로 두둑한 배포가 아 닐 수 없었다. "그러나 노형이 나를 막는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오 만."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위지건이 빙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건 노형이 더 잘 알 것 아니겠소." "어찌하리라 보십니까?" "내 입장에서야 뭐라 할 수 있겠소. 그저 죽어라 싸울 뿐이지." "뚫을 자신은 있습니까?" 위지건이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오히려 곁을 지키는 수하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물론이오." 을지소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간단하게 대꾸했다. "......" 위지건의 안색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래도 심각하게 고민을 할 줄 알았건만 묻는 즉시 나오는 대답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하나 그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나의 도주로 끝날 것이오." "무슨......?" 위지건이 의문이 드는 얼굴로 쳐다보자 살짝 한숨을 내쉰 을지소문 이 말을 이었다. "이 아이를 품에 안고 노형과 같은 고수와 싸우면 결과는 너무 뻔하 지 않겠소? 용을 빼는 재주가 있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오. 그 러나 몸을 피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말이오. 난 꽤나 빠른 발을 자랑한다오.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나를 따를 수 없는." 도망을 칠 수는 있으나 싸울 수는 없다는, 한마디로 위지건의 실력 을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그제야 말뜻을 헤아린 위지건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이 찾아들었다. "노부 또한 이런 식으로 노인장과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좀 더 그럴듯한 무대가 있겠지요." 말고 함께 살찍 몸을 틀며 수하들을 쳐다보는 위지건. 길을 내주라 는 의미의 몸짓에 은연중 길을 막고 있던 수하들이 좌우로 비켜났다. "고맙소. 조만간 그 무대가 마련될 것 같소." "그렇겠지요." "그럼, 그때 봅시다." "기대하겠습니다." "나 역시." 을지소문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엄청난 파공성이 들리며 뭔가가 날아들었다. 을지소문이 재빨리 손을 휘둘러 그 물체를 낚아챘다. "건방진!" 손에 잡힌 물체를 확인한 을지소문의 얼굴이 더없이 굳어졌다. 사마유선의 시선이 을지소문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적과 싸우면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을지소문이 어째서 그토록 분노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을지소문의 손에 들린 것은 길이가 석 자에는 이를 것 같은 철시(鐵 矢)였다. 거무튀튀한 몸통에 살짝 닿기만 해도 피부를 뚫고 들어올 것 같이 날카로운 촉을 자랑하는 화살. 화살이라니! 천하의 궁귀에게 화살을 날렸다는 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재미있군." 을지소문의 입술이 묘하게 뒤틀렸다. 그의 시선이 화살의 주인을 찾 아 산 쪽으로 향했다. "거기더냐?" 그는 거의 사오십 장은 떨어져 있는 곳에서 거대한 궁을 들고 있는 자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서천의 천주 철포산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궁을." 을지소문이 일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인에게 있어 무기란 생명과도 같은 것. 난데없는 요구에 일성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궁을!" 을지소문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드려라." 뭔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힌 위지건이 재빨리 손짓을 했다. 어깨에 메고 있던 궁을 풀며 마지못해 건네는 일성.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용할 수 있으면 해보시오. 하나 꽤나 힘들 것이오. 워낙 강궁(强 弓)이라서." 다소간 조롱기 섞인 그의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는 금방 밝 혀졌다. "시위가 너무 허술하군. 그래도 한두 번은 쓸 수 있겠어." "이!" 무기를 빌려주는 것도 자증이 나건만 거기에 트집이라니! 일성은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궁을 다시 빼앗으려 하였다. 하나 갑작스레 날아든 전음성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일성!] 멈칫한 일성이 재빨리 대꾸했다. [예. 태존.] [잘 봐둬라. 어쩌면 궁을 사용하는 너로선 평생 얻을 수 없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일성이 위지건으로부터 날아든 전음을 듣고 있는 사이 을지소문이 시위를 당겼다. "먼저 받은 것을 돌려주마." 퉁. 한껏 당겨졌던 시위가 튕겨지고 철포산으로부터 날아온 화살이 맹 렬한 기세로 날아갔다. 평이했다. 훌륭한 솜씨였지만 거기까지는 웬만큼 궁을 다뤄본 사람 이라면 누구다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다지.....' 위지건의 전음을 듣고 나름대로 기대를 했던 일성의 얼굴이 실망으 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이지. 이자까지 쳐서 보내주 마." 을지소문이 또다시 시위를 당겼다. 한데 이번엔 화살이 없었다. "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던 사마유선이 자신도 모르게 탄 성을 터뜨렸다. 일성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의 얼굴에 의혹이 물들었다. 퉁! 청명한 소리와 함께 크게 당겨졌던 시위가 원위치로 돌아왔다. 분명 화살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느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무엇인가가 궁을 떠났다는 것을 .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세 개의 기운이. 하나는 길을 따라 정면으로, 다른 하나는 좌우 숲을 크게 가로지르 며 날아갔다. 그 세개의 기운이 하나로 뭉치는 곳. 처음 날아온 철시를 간단히 막아낸 철포산은 형체도 없이 날아드는 기운에 바싹 긴장을 했다. 꽝! 정면에서 날아온 기운과 황급히 쳐낸 그의 검이 부딪쳤다. 꽝꽝! 좌우에서 날아든 기운은 위지요와 우문걸이 막아냈다. "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성이 터져 나 왔다.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뒤로 밀려나거나 중심이 흔들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손목을 타고 전해오는 아련한 떨림에 다들 충격을 받 은 모습이었다. 그 한 수로 궁귀라는 이름이 어째서 천하를 진동시키 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궁귀 을지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에 비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던 일성은 상상을 초월 하는 충격을 받았다. "세, 세상에!"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느새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 "무영시(無影矢)라고 해요." 을지소문을 대신해 사마유선이 대답했다. "무... 영... 시." 일성은 꿈결처럼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런 일성을 쳐다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을지소문이 입을 열었다. "보잘 것없는 재주를 보였소." "무슨 말씀을! 진정 신의 솜씨가 아닙니까?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 다." "허허, 고맙기는 하나 얼굴에 금칠을 할 필요는 없소." 담담하게 웃음을 지은 을지소문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 는 일성에게 궁을 건넸다. "잘 썼네." "아, 아닙니다." 두 손으로 공손히 궁을 받아 드는 일성에게선 조금 전과 같은 건방 진 태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뭐든 그렇겠지만 궁이라는 것도 단순히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 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야 비로소 제대로 된 실력이 나오는 것 이지. 끊임없이 계속 수련하게." "며, 명심하겠습니다." 일성은 마치 사부를 대하듯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너무 지체한 것 같소. 다음에 봅시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한 을지소문이 사마유선의 손을 잡고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다시 보게 될 터, 노인장의 존대성명을 다시 여쭤봐도 되겠습 니까?" 위지건이 그의 등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 지고 없었다. "후∼ 내가 짐작한 사람이 맞는지 꼭 확인학 싶었거늘." 위지건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을지소문의 목소리가 날 아들었다. "을지소문, 이 늙은이의 이름은 을지소문이라오." "구, 궁귀!!" 궁을 익힌 자라면 모두들 꿈에서라도 한번 만나기를 원한다는 그가 아니었던가! 일성은 혼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으며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건 다 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막연히 짐작을 하고 있던 위지건만이 뛰는 심장을 살며시 진정시키며 다음 만남을 기대할 뿐이었다. 제63장 암운(暗雲) 북천의 포위망을 뚫고 산을 내려갔던 을지소문과 사마유선은 마을 의 객점에서 하룻밤 푹 쉬며 몸을 추스르고 이튿날 아침 일찍 무당파 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엔 자소궁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전기봉(展旗峰) 중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사이 둘은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마유선과 을지호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떤 식으로 사랑을 키 워갔는지, 철혈마단을 상대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움을 하였는지, 그리 고 그녀는 자신이 궁왕의 후예라는 것을 밝히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을지소문은 사마유선의 설명을 들으며 크게 탄식도 내뱉고 기분 좋 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특히, 그녀가 창파령에서 벌어져던 격전을 설명할 땐 무척이나 흥분 을 하였는데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을지호가 무리해서 절대삼검 을 펼친 것에 대해선 크게 책망을 하였다. 근 한 시진에 걸친 사마유선의 설명이 대충 끝나고 이후 궁왕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을지소문은 을지호가 싸움 도중 환영시를 사용 했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질문을 했다. "참, 환영시를 보았다고 했느냐?" "예, 할아버님." "그랬구나. 녀석이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 몰라도 그 옛날 궁왕 어 르과 대결할 때 그분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환영시는 어찌 막아야 할 지 암담함을 느낄 정도로 뛰어난 위력을 지녔었다."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을지호가 시전한 환영시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리고 그것 이 선조의 무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감동이란.... "그래, 너도 궁을 배웠다니 그러하겠지. 한데 진정 아쉽구나. 그분 의 무공이 이어지지 않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기회가 되면,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 "정말이신가요?" 사마유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무렴. 따뜻한 밥을 먹고 왜 쉰소리를 하겠느냐? 내 차근차근 일 러주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당연한 것이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이 할애비, 나아가 우리 가문이니라." "예?" "녀석의 나이가 벌써 내일 모레면 삼십이다. 게다가 가문의 대를 이 어야 하는 장자이기도 하고." '그 정도의 나이는 아닌데...' 사마유선이 살짝 웃음을 보였다. "내색은 안 했지만 우리 모두 걱정이 태산 같았으니. 한데 너처럼 예쁘고 똑똑한 아이를 얻게 될 줄이야! 이거야말로 조상님의 보살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거듭되는 칭찬에 부끄러웠던 것인지 고개를 숙이는 사마유선의 얼굴 이 붉에 물들었다. "흠, 그나저나 저 봉우리만 넘으면 되는 것이더냐?" "예, 할아버님. 저 봉우리만 넘으면 바로 자소궁이 보일 것입니다." "어쩐지, 부산을 떨더라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곧 알게 될 게다." 하지만 사마유선은 이해를 하지 못한 눈치였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사내들이 나타나더니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놀라지 말거라. 벌써 한참 전부터 우리를 따르던 녀석들이니라. 아 마도 정도맹의 무인들일 것이다." "예, 할아버님." 자소궁과 곧바로 이어지는 전기봉은 그야말로 요지 중의 요지였다. 그처럼 중요한 장소를 지키는 사람이 없을 리 없을 터, 더구나 청색 도복이 보이는 것을 보아 무당파의 제자들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짐작은 정확했다. "무량수불! 두 분 시주는 잠시 걸음을 멈춰주시지요." 무당파 특유의 도복을 입은 중년인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무당 제자 자선(紫仙)입니다. 두 분께선 어인 일로 이곳을 오르시 는 겁니까?" 예를 차리는 듯 보였으나 다소 고압적인 음성이었다. 말을 섞기가 싫었는지 을지소문이 고개를 돌리며 침묵을 지키자 햇 빛을 가리기 위해 잠시 머리에 썼던 방립(方笠)을 벗은 사마유선이 공손히 대답을 했다. "사마유선입니다." 의외라는 듯 흠칫 놀라는 자선. "흠, 누군가 했더니 사마 소저시구려. 북천 놈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만?" "다행이 빈틈이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는데 다행이오." '그게 걱정하는 놈의 말투냐?' 겉으로는 걱정하는 듯해도 자선의 냉랭한 말투에서 사마유선을 그 다지 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을지소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데 이곳은 어인 일이시오?" "오라버니가 이곳에 계신 것으로 압니다." "을지 공자를 찾아오신 모양이구려. 그라면 용천관에서 부상을 치료 하고 있소." "부, 부상이라니요?" 깜짝 놀란 사마유선이 황급히 되물었다. "모르셨소? 하긴, 인질로 잡혀 있었으니 몰랐을 수도 있겠구려. 을 지 공자 때문에 무당에 얼마나 큰 난리가... 후∼ 관둡시다." 을지호로 인해 무당은 엄청난 치욕을 맛봐야만 했다. 무당이 자랑하는 양의합벽검진이 깨졌고, 그와 대적했던 문파의 어 른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고 말았다. 비록 그 모든 일들이 중천에서 잠 입시킨 간자들이 꾸민 흉계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을지호에 대한 감정 이 좋을 리 없었다. "용천관은 어디에 있나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사마유선이 공손히 물었다. "옥허궁과 인접한 곳에 있으니 그곳으로 가시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오. 한데 저분은 누구신지?" 자선이 아까부터 딴청을 피우고 있는 을지소문을 찬찬히 살피며 물 었다. "할아버님 되십니다." 사마유선은 아무런 뜻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소개했다. 하지만 듣 고 있는 자선은 그럴 수 없었다. 사마유선이 패천궁의 사람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 것 때문에 을지호가 패천궁으로 갈 것이라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돈 적 도 있는 터. 그녀와 관계가 있다는 있다는 것은 곧 그 역시 패천궁의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패천궁의 어른께서 어째서 무당산에 오신 겁니까?" 지금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 사천이라는 공동의 적을 맞아 싸우고 있 다지만 백도의 무인들에게 있어 패천궁은 사천과 거의 동일시되는 집 단이었다. 질문에 묻어 나오는 기운이 자연히 냉랭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사마유선이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되었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뭣 하러 변명을 하려는 게냐. 그럴 필요 없느니라.' 사마유선의 말을 막은 을지소문이 말했다. "어째서 무당산에 오르느냐고 물었는가?" "그렇습니다." "오를 만하니까 오르는 것이네."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와 같은 이유지. 을지호라는 녀석을 보러 왔네. 아무렴, 아 무런 이유도 없을까?" 심기가 불편한지 을지소문의 음성이 점점 뒤틀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죄송하오나 오르실 수 없습니다." "어째서?" 을지소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무당산은 패천궁의 인물을 반기지 않습니다." "반기지 않는다? 그래도 간다면?" "부득불 막아야겠지요." 자선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든지." "할아버님!" 사마유선이 막 손을 쓰려던 을지소문의 팔을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 을지소문은 사마유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된 다는 간절한 눈빛. '참 많이 닮았어.' 성격은 어떤지 몰라도 눈빛 하나만큼은 그 옛날 청하를 빼다박았다 고 느꼈다. 순간, 타올랐던 노기가 금방 가라앉았다. "허허허, 이놈의 성질은 나도 어쩌지 못하겠구나. 그래, 알았다. 그 만두자꾸나." 너털웃음을 지은 을지소문이 몸을 홱 돌려 자선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헉!' 가히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전신을 압박하자 자선은 그제 야 눈앞의 노인이 결코 범상치 않은 고수라는 것을 알아채곤 그 자신 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패천궁의 사람이 아니라면 보내줄 수 있겠나?" "조, 조금 전 사마 소저가 말하기를 노선배가 할아버님이라고..." 을지소문의 기세에 완전히 압도당한 자선이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이 아이는 나의 손자며느리일세." '손자...며느리? 며느리? 소, 손자? 으, 을지호?' 자선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서, 설마... 으, 을지 공자가...." "내 손자일세." "헉!" 강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그 충격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하마터 면 들고 있던 검을 놓칠 뻔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한 것인가?' 만약 사마유선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와 싸움이 벌어졌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마, 말학 후배가 궁귀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구, 궁귀!" "천하제일인!!" 그제야 눈앞의 노인이 누구인지 알게 된 이들의 입에서 저마다 탄성 과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거만 분분히 허 리를 꺾으며 극도의 존경심을 나타냈다. "이제 가도 되겠는가?" 갑작스럽게 돌변한 상황에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을지소문은 몹시 겸연쩍어 했다. "후배가 모시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네." 을지소문은 자선의 배려를 정중히 거절했다. 방금 전까지 얼굴을 붉 힌 사람끼리 안내를 하고 받는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고집을 꺾지 않은 자선은 옆에 있던 젊은 도인에게 버럭 호통을 쳤 다. "뭣 하고 있느냐! 어서 가서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예? 아, 알겠습니다." 자선에게 꾸지람을 들은 젊은 도인은 머리를 묶은 끈이 풀어지는 것 도 모르고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가시지요." 자선이 앞장서며 말했다.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다고 여긴 을지소문 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마유선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것 참, 아무튼 가자꾸나." "예, 할아버님." 일이 잘 해결되어 천만다행이라 여기고 있던 사마유선이 밝게 웃으 며 대답했다. "누, 누가 오고 있다고?" 천장 진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구, 궁귀...." 젊은 도인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제갈경이 물었다. "그, 그게 사실인가? 진정 그가 오고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간밤의 소란도 그가 벌인 일이군." 때마침 지난밤에 북천 진영에 있었던 소란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제 갈경이 파안대소를 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누군지 모를 엄청난 고수가 잠입하여 사마 소저 를 빼갔다고 하더니만 설마 하니 그가 한 일일 줄이야." 천장 진인이 북천에 잠입시킨 간자로부터 전해져 온 서찰을 흔들며 맞장구를 쳤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다들 움직입시다. 마중을 해야 하지 않겠습 니까?" "그래야겠지요." 문 쪽에 있던 혜정 신니가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시작으 로 회의실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곤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무림인들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궁 귀 을지소문을 만나기 위해 분주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근 이십에 가 까웠던 이들이 삽시간에 빠져나가고 잠시 후, 회의실엔 오직 무당파 장문인 천중 진인만이 남아 있었다. "반길 수도, 그렇다고 반기지 않을 수도 없고...." 모든 오해를 풀고 지난 일을 덮기로 하였으나 아무래도 을지호와 무 당파의 관계는 소원할 수밖에 없는 터. 그런 와중에 무림인들의 절대 적인 신망과 존경을 받고 있는 을지소문이 나타난 것이었으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천중 진인은 무척이나 곤혹스런 얼굴이 었다. * * * "서천의 천주는 돌아갔느냐?" 한가로이 산책을 하던 위지건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위지요에게 물었다. "예, 아버님. 아버님과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였다고 아쉬 워 했습니다." "기회가 있겠지. 일선에서 물러난 내가 딱히 나설 처지도 아니지 않느냐? 난 그저 네가 어찌 싸우는지 보러 온 것뿐이야." 단순히 지켜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위지요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심려를 끼쳐 드려서 송구합니다." "공연한 소리 하지 말거라. 지금껏 잘해오고 있지 않았더냐? 그래, 함께 공격하기로 했다고?" "예. 중천과 남천이 패천궁을 끝장내기 전에 이쪽 상황을 먼저 정리 할 필요가 있어서....." "어련히 알아서 결정했겠지. 인원은 얼마나 되느냐?" "서천과 합친다면 이천오백은 족히 될 겁니다." 위지건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쪽 말고 무당산에 모인 적의 숫자 말이다." "확실히 파악은 못했지만 대략적으로 칠팔백 정도는 되는 것으로 파 악됩니다." "칠팔백이라...." 위지건이 말끝을 흐리자 위지요는 진땀을 흘렸다. 부친의 말을 어째서 그만한 인원을 아직도 처리하지 못하고 쩔쩔매 느냐는 질책으로 여긴 위지요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지형이 불리하여 공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허, 오해를 했구나. 내 말은 너를 질책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토 록 많은 피해를 당하면서도 아직껏 그 정도의 인원이 남아 있다는 것 이 놀라워서 그랬던 것이야. 공격은 언제쯤 시작할 셈이냐?" "내일 새벽, 동이 트기 직전입니다."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빨랐는지 위지건이 다소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 었다. "내일이라면 너무 빠르지 않겠느냐?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 "언제든지 싸울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서천의 천주와도 지난밤을 지새며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조율을 끝마쳤지요." "승산은 어느 정도나 있느냐?" "싸움에 이기는 것보다는 우리의 피해를 얼마나 줄이느냐에 초점을 둘 생각입니다." 승리가 아니라 피해를 줄이는 데 힘쓴다? 애당초 패배란 생각지도 않는다는 자신감에 찬 말이었다. "싸움이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다. 또한 네 말대로 상대가 유리 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지 않더냐? 죽기를 각오하고 수성하는 자들을 공략하기란 쉽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전력이 압도적인 데다가 새벽에 하 는 기습이니만큼 큰 효과가 있을 겁니다. 놈들에겐 일말의 승산이 없 습니다." "그가 있는데도?" 순간, 위지요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대적하지 못할 상대라 여기지는 않습니다." "자신감은 좋은 것이다. 단, 그것이 자만심으로 번지지 않도록 경계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해 두마." "말씀하십시오." "그의 상대는 오직 나뿐이다." 위지요는 물끄러미 부친을 응시했다. 그리곤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의 얼굴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호승심이라는 것 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한, 그런 각오로 싸우는 부친에게 적수란 있을 수 없었 다. 그것은 천하제일인이라 일컬어지는 궁귀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 * * 자선의 안내로 옥허궁에 도착한 을지소문과 사마유선은 마중 나온 정도맹과 무당파의 수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용천관으로 향했다. 인편을 통해 이미 그들이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을지호 는 용천과 정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을지소문이 곁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사마유선이 그를 향해 달려갔 다. "고생이 심했지? 놈들에게서 도망쳤다는 소리는 들었어." "부상은 괜찮아요?" 사마유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울 것 없어. 상처 부위가 조금 쑤시기는 하지만 다른 곳은 아주 멀 쩡해." 을지호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걱정 많이 했어요." "걱정? 누구를?" "누구긴요?" "나를? 하하하, 이거야 원. 걱정할 사람은 유선이 아니라 나로 기억 하는데." "자알 논다!" 둘의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지켜보던 을지소문이 더 이상 참지 못하 고 버럭 호통을 쳤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가관이구나! 네놈 눈엔 이 할애비가 보이지 도 않는 것이냐?" "어머!" 깜짝 놀라 물러나는 사마유선. 반가운 마음에 자신이 누구와 함께 무당산에 올랐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녀의 안색은 부끄러움과 죄 송스러움으로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녀에 비해 을지호는 태연자약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장손이 어찌 할아버님을 잊었겠습니까? 자, 절을 받으시지요. 그간 별래무양하셨...." 딱! "아이고!"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절을 하려던 을지호는 무릎을 굽히기도 전 에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에라이!" 을지소문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주먹을 휘둘렀다. 피하자면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후환이 두려웠던 을지호는 질끈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딱! "크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찌르르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의 얼굴이 고 통으로 일그러졌다. "네놈이 집을 떠난 지도 벌써 삼 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뭐 했 느냐?" 을지소문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야 남궁세가에서......" "시끄럽다. 네놈이 남궁세가에서 낮잠을 쳐 잤는지 애들 모아놓고 병정놀이를 했는지는 내 알 길이 없으니 일단 젖혀논다고 하여도 최 소한 어찌 지내고 있다고 연락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너를 보내 놓고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가족들을 생각했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 이니라." "노심초사라...."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놓고 노심초사를 했을 사 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그래도 두 분 할머님이나 어머니는 걱정을 하셨겠군. 할아버님이나 아버지도? 과연!!' 을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가족의 사랑과 정을 떠 나 노심초사라는 단어가 할아버지나 부친에게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웃어? 이놈이 정녕!" 을지소문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더 이상 맞았다간 머리에 이상이 생길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한 을지호가 사마유선의 등 뒤로 숨었다. "이리 오지 못할까!!" 그 짧은 순간에 조부의 약점을 파악한 을지호가 순순히 따를 리 없 었다. 사마유선이 자꾸 떠밀었지만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던 을지소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후∼ 도대체 네놈은... 어찌해 하나도 변한 것이 없더냐?" "죄송합니다."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을지호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고나 있는 것이냐?" "예." "알기는 개뿔! 나나 네 아비야 상관없다손 치더라도 네 걱정을 하느 라 얼굴 펼 날이 없었던 어미에겐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할머님들 에게도 그렇고. 최소한 잘 도착은 했다, 남궁세가의 사람들과 이러저 러하게 지내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 이 정도의 연락은 해주었어야지." ".....' "고작 해남도를 거쳐 갔다고 네 외조부께서 보낸 소식이 전부였으니 어미가 어찌 걱정을 하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어머니는....." "흥, 네 녀석이라면 잘 있겠느냐? 그래도 일다는 네 소식에 대해 전해놨으니 안심은 하고 있을 게다." "어머니만 남은 겁니까?" 을지호가 다소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친정으로 가 있으라고 했건만 부득불 남겠다고 고집을 피우 더구나." "할머님들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글쎄다. 원래는 함께 움직이고 있었는데 난 너 때문에 이곳으로 왔고......" 말을 멈춘 을지소문이 잠시 노려보자 을지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놈! 아무튼 큰할머니는 패천궁으로 갔을 게다. 궁주가 그 리되었다는데 그 성정으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지." "그렇겠지요." "둘째 할머니는 남궁세가를 찾고 있을 게다. 그리고 아범은..글쎄, 아범이 어찌할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냥 막연히 패천궁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을지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두 분 할머님이 헤어지시기 전 다 같이 남궁세가 사람들을 만나셨 다면 아버지는 패천궁으로 가지 않았을 겁니다." "어째서?" "남궁세가 일행 중엔 지금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이 계시니까요." 잠룡부를 전하러 온 사람을 통해 비사걸이 남궁세가 일행에 다시 합 류했음을 알고 있던 을지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이라니? 누구를 말함이더냐?" "할아버님도 익히 아시는 분입니다.' "누구냐니까?" "궁금하십니까?" "어허, 당장 말하지 못하겠느냐?" 을지소문이 역정을 내며 크게 소리쳤다. 그래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을지호는 한참 동안이나 뜸을 들인 후에야 비로소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검왕 어르신께서 계십니다." "검왕? 검왕이라니? 그분은 분명 지난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생각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을지소문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반문을 했다. 지난날 대황하에서 벌어진 검왕 곽화월과 북천의 천주 위지요와의 싸움. 초반 전세를 결정짓는 싸움이기도 하였고 처절하다 못해 아름답 기까지 했던 둘의 대결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그리고 을 지소문은 그 싸움으로 검왕 곽화월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게다가 곽검명을 만나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한데 난데없이 검 왕이라니? "그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아니라면 누가 검왕이란 말이냐?"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 말고도 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시는 분 이 분명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조금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말이지요." 오래되었다는 말을 언급할 땐 을지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넘쳐흘 렀다. "오래되었다? 오래... 서, 설마!"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던 을지소문이 번쩍 고개를 들었 다. "서, 설마 하니 그분이!" "그 설마가 사실입니다." "그, 그게 말이 되느냐? 그분 연세가 얼마인데!" "소손도 처음엔 그리 생각하였지요. 하나 틀림없이 그분입니다. 믿 기지 않으시겠지만." "진정이냐?" "틀림없습니다." "허허, 세상에... 그분이! 허허허!" 비로소 믿은 것인가? 을지소문의 입에서 너무나도 반가운 웃음이 터 져 나왔다. 그와는 달리 슬며시 사마유선의 손을 잡은 을지호는 또 다 른 의미의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휴∼ 일단은 넘어갔군.' * * * 아직 동이 트려면 이른 시간. 남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움직이는 사 내가 있었다. 제법 한적한 곳에서 이리저리 주변을 살핀 그는 품 안에서 조그만 새 한 마리를 꺼냈다. 그리고 새의 발목에 달리 조그만 통에 뭔가를 집어넣었다. "가거라. 빨리 가서 알려야 한다." 푸드드득!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하듯 힘차게 날갯짓을 한 새는 그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더니 단숨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한데 숲을 벗어나기나 하 였을까? 어떤 충격을 받은 것인지 멈칫하는가 싶더니 새는 날개를 접 고 힘없이 추락을 했다. '발각됐다.' 멀쩡히 날아오르던 새가 갑자기 추락한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뿐이었다. '제길!' 사내는 그 즉시 새가 떨어지는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대 여섯 걸음도 떼기 전에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인물을 보고 절망 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발걸음을 막은 사내는 설풍단의 부단주 장방형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장방형은 진한 살소를 흘리며 사내를 노려봤다. 단순히 눈빛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이미 그는 절명을 하고도 남을 매서운 눈빛이었 다. "부단주님." 뒤편에서 세 명의 설풍단원이 달려왔다. 그중 맨 앞의 사내의 손에 는 간신히 꿈틀거리는 새가 들려 있었다. "놈이 날린 전서구입니다." 사내가 새를 내밀었다. "꺼내 봐라, 묵운(墨雲)." "예." 묵운이라 불린 사내는 새의 발목에 달린 통에서 아무렇게나 말려 있 는 종잇조각을 꺼내 장방형에게 건넸다. "이럴 줄 알았지. 크크크, 이놈들 아주 똥끝이 탔구나.' 장방형이 쪽지를 구겨 바닥에 버리며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네놈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우린 진작부터 네놈을 주시하고 있었다. 네놈까지 벌써 여섯 놈째다. 먼저 걸린 놈들은 모두 첨밀각인가 뭔가 하는 곳에 소속된 놈들이었지. 그래, 네놈도 거기서 나온 놈이냐?" "......" "묻느니 뒤져 보는 것이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장방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사내를 에워싸고 있던 설풍단의 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나는... 개방 소속이다." 사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공격은 멈춰졌다. "개방?" "그렇다." "하하하, 개방의 거지새끼로군. 하도 말끔하게 차려입어서 생각도 못했네. 하지만 간자로서 자질은 형편없구나. 이처럼 쉽게 입을 열다 니." 장방형은 어깨까지 흔들며 한껏 비웃음을 흘렸다. 사내가 겁에 질려 입을 열었다고 생각했는지 곁에 있던 설풍단원들도 마주 보며 따라 웃 었다. 바로 그 순간,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손을 뻗 었다. 어느샌가 꺼내들었는지 그의 손엔 네 자루의 비도가 들려 있었 다. 혼자서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기에 그는 일단 한 사람만을 노렸 다. 길을 막고 있는 장방형이었다. 쐐애액!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네 자루의 비도가 장방형을 향했다. 동시에 사내의 몸이 힘차게 도약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갑작스런 암습에도 장방형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는커녕 기 다렸다는 듯 너무나도 침착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비록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길은 열 수 있으리라 여긴 사내는 그 런 장방형의 모습에 불길함을 느꼈다. 그의 예감은 금방 현실로 나타났다. 네 자루의 비도를 간단히 막아낸 장방형의 검이 힘을 잃지 않고 사 내를 향해 그대로 짓쳐들었다. 이미 허공에 뜬 몸, 막을 방법이 없었 다. "컥!" 그는 살과 뼈를 가르며 옆구리를 파고든 싸늘한 감촉을 느끼며 그대 로 꼬꾸라졌다. "그럴 줄 알았다. 다른 녀석들도 다 마찬가지였거든. 체념을 한 듯 하면서도 어떻게든지 탈출을 하려고 기회를 노리는 눈빛들이 말이다." 장방형이 싸늘히 웃으며 사내의 가슴팍을 밟았다. 적진에 숨어드는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었기에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그가 알아낸,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것이었다. 정도맹과 무당, 나아가 무림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한 사실을. '알려야... 알려야 하는데....' 사내는 자꾸만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 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독한 놈 같으니." 장방형은 죽는 순간까지 임무를 위해 몸부림치는 사내에게 기가 질 린 듯했다. "너희들의 노력은 인정해 주겠다. 하나 이미 늦었어. 날이 밝기 전 무림의 역사는 바뀐다." 나직하게 읊조린 장방형이 고개를 돌렸다. "대충 정리가 끝났다고 알려라." "더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모르지. 그렇지만 감시하던 놈들은 모조리 끝장을 냈잖아. 우리의 눈을 벗어난 놈이 있다면 그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놈의 능력 을 칭찬할 수밖에."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묵운의 신형은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옥허궁을 공격하기 공격하기 위해선 이곳을 먼저 쳐야 하오." 위지요가 지도에서 가리킨 곳은 팔선관(八仙觀)과 옥허암(玉虛岩)이 었다. "척 보주." "예, 천주." 세하보의 보주 척목은이 대답했다. "선봉을 맡겨도 되겠소이까?" "가장 먼저 결정된 사항이 아닙니까? 다들 출전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팔선관을 부탁하겠소."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믿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위지요의 시선이 위지청에게 향 했다. "보주께서 공격을 시작하면 그 즉시 설풍단을 이끌고 옥허암을 치거 라." "예." "어르신께서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그리하지. 우리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네." 우문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팔선관과 옥허암 이외에도 주변에 산재한 도관이 정확하게 열두 곳. 비록 병력의 수는 많지 않으나 확실하게 무너뜨리고 가야 할 것 이오." "맡겨주십시오." 각 문파의 수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소. 기습 공격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외다." "하늘이 돕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렇소. 분명 하늘은 우리의 편이오. 하지만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여러분의 힘을 믿소." 굳게 다문 입술, 예기로 번쩍이는 눈동자.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 저 위지요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자신이 언제 움직이고 또 어디를 공격해야 하는지 세부적인 것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지금 즉시 출 발하시오. 바로 오늘, 이곳 무당산에서 우리들이 지닌 힘을 사해에 떨 쳐 봅시다." 마침내 출전의 명이 떨어졌다. "존명!" 벌떡 몸을 일으킨 수뇌들이 결의에 찬 음성으로 명을 받았다. 촌각도 되지 않아 모든 이들이 빠져나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회의실엔 위지요와 등이 굽은 노인 한 명 만이 마주하고 있었다. "움직였소?" 위지요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기습을 한다 해도 적의 촉수가 사방에 뻗쳐 있소. 어쩌면 생각보다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소." "싸움엔 언제나 변수가 있기 마련이지요." "그렇소. 그래서 사혈곡(死血谷)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오. 그러나 지 금 이 순간도 후회하고 있소. 꼭 그래야 했는지 자책하며 말이오. 사혈 곡이야말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장의 무기와 같기에." 사혈곡. 고주 노은(盧隱)을 포함하여 총인원 육십육 명. 북천 내에서도 가장 작은 문파 중 하나였다. 문도 전원이 하나같이 뛰어난 살수들로 구성된 사혈곡은 북천의 사 대기둥이라 할 수 있는 장백파, 천권문, 세하보, 흑룡문에 못지않은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위지요가 서슴없이 비밀 무기라고 말할 만큼 어 떤 면에선 그들보다 더욱 요긴한 전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다 먼 훗 날을 생각하여 쓰지 않고 감춰둔 사혈곡을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 상황 에 위지요는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급한 것은 훗날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옥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후∼ 하긴, 곡주의 말도 일리가 있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오. 참, 어찌 움직여야 하는지 이해는 시켰소?" "예."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 경동해서는 안 될 것이오." "은밀히 적진에 숨어들되 함부로 살인을 하지 말라고 당부해 두었습 니다. 그 아이들이 움직이는 것은 공격이 시작된 이후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적의 배후를 교란시키는 순간, 이미 절반의 승리는 얻은 것 이나 다름없을 것이오." "과찬이십니다." "그것이 과찬인지 아닌지는 곡주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자, 대충 준비가 끝난 것 같소. 우리도 움직입시다." 위지요는 방문 밖에 있던 완함의 헛기침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자리 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키에 그다지 변함이 없 는 사혈곡의 곡주 노은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 * * 기나긴 밤을 지나 슬며시 어둠의 옷을 벗어던지고 있는 옥허궁. 을지소문 본인의 극구 반대로 조촐하게 열린 연회도 그 끝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연회라봐야 정도맹의 수뇌들을 비롯하여 각 문파들의 어른 들이나 참석한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나름대로 좋았다. 특히 과거 복마 단이나 의혈단(義血團)에 속해서 을지소문과 함께 젊은 날의 청춘을 불태웠던 노고수들은 지난 얘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물론 그런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을지호와 직접적인 충돌이 있었던 무당파가 그랬고, 무당파에 동조 하며 을지호와 사마유선이 무당산을 떠나는데 일조를 했던 몇몇 문파 의 수뇌들이 그랬다. 그리고 을지소문으로부터 서천과 북천이 공조를 하여 곧 대대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잠입시킨 간자들로부터 연락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첨밀각의 각주 왕호연이 그랬다. 물론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을지호도 예외는 아니었 다. 조부 때문에 애써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며칠 전만 해도 무당파를 발칵 뒤집어놓은 장본인이 아니던가. 연회 내내 그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그나마 왕호연이 옆에서 말동무를 해주었기에 지금껏 버틴 것이 었다. "일어나시려는 겁니까?" 왕호연이 슬며시 의자를 빼는 을지호를 보며 물었다. "예. 조금 있으면 날도 밝을 것 같고 더 이상 있을 필요는 없을 듯 하여..." 그의 고충을 밤새 지켜봤던 왕호연이 한쪽 눈을 깜빡거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조용히 자리를 뜬 그는 곧바로 옥허궁을 빠져 나왔다. "휴우∼ 무슨 말씀들이 그리 많은지 원." 제갈경 등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을지소문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 레절레 내흔든 을지호는 방립과 함께 유지를 덧씌운 도롱이를 걸치고 황급히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그의 눈에 용천관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횃불을 밝히고 경계를 서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고생들 하는군. 그나저나 잘 자고 있겠지?" 을지호는 아무래도 불편했는지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후 자리를 뜬 사마유선을 생각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뭔가를 발견한 것인지 을지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몸을 숨 겼다. '동물인가?' 하지만 그 움직임이 동물처럼 여겨지지는 않았다. 경계 서는 이들의 눈을 피해 용천관으로 접근하는 물체는 분명 사람이었다. 그것도 극도 로 조심하며 움직이는 것을 보면 좋지 않은 뜻을 품은 사람이 분명했 다. 그의 뇌리에 곧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란 조부의 말이 떠올랐 다. '침입자로군.' 그는 용천관에 잠입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적정을 미리 살피려고 파견된 척후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체의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척후치고는 너무도 뛰어난 자들 같았다. 경계병의 눈을 피해 용천관의 담을 넘은 그들은 좌우를 살피며 조심 스레 이동을 했다. 그들의 모습을 빠짐없이 살피던 을지호의 안색이 확 구겨졌다. 용천 관에 잠입한 네 명의 인원 중 두 명이 하필이면 사마유선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저것들이!" 신경질적으로 도롱이를 벗어 던진 을지호가 황급히 몸을 날렸다. 완 전히 완쾌가 되지 않은 옆구리에서 은근한 통증이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번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오 장을 넘나들며 단숨에 용천관의 담을 넘은 그는 경계병은 물론이고 은밀히 발걸음을 옮기는 침입자들의 이 목도 속이고 사마유선이 머물고 있는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리곤 그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스스스. 자세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전혀 들리지 않을, 더구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더욱 알아채기 힘든 미세한 마찰음이 들리며 온 몸을 묵의로 감싼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극도로 조심을 하며 조금씩 이동을 한 그들은 출입문이 있는 반대쪽 의 용마루에 몸을 숨기고서야 비로소 안심을 했는지 서로의 얼굴을 바 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런 그들의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애썼다." "헉!"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기겁을 한 사내들이 튕기듯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을지호의 발길질을 피하지 못했다. 퍽! 퍽!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격타음. 거의 무방비 상태로 턱을 얻어맞은 침입자들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 지 못하고 지붕에서 떨어졌다. "누구냐!" 지붕 위의 소란을 눈치챈 경계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그리 고 그들은 바닥에 큰대 자로 뻗어 있는 두 명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몰래 잠입해 들어온 간자들이오." "을지 대협!" 경계병들이 을지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될 것 같소. 빨리 보고를 하시오." "알겠습니다." 경계병 중 가장 빠른 경공을 자랑하는 이가 옥허궁으로 달려갔고 나 머지 인원은 잠을 자고 있는 이들을 깨우기 위해 서둘러 용천관 내부 로 들어갔다. "시작....인가?" 그들과 기절해 있는 살수들을 물끄러미 살피는 을지호의 안색은 무 척이나 어두웠다. 사혈곡의 서열순으로 스물한 번째와 두 번째의 살수이자 용천관에 잠입한 네 명의 살수 중 두 명은 그렇게 허무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말 았다. 문제는 그들로 인해 복천의 준동이 감지되었다는 것이었는데 본 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다. 동쪽 하늘에서 먼동이 트고 있었다. ★★★★☆☆☆☆★★★★ 궁귀검신2부 8권 제64장 전면전(全面戰) "모두 연락하였습니까?" 을지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용천관의 경계를 총괄하고 있던 당 천우(唐天佑)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지금쯤이면 모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한데 너무 성급한 판단 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첩자들이 잡혔다고는 하지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조심스레 입을 열던 당천우는 슬며시 말꼬리를 흐렸다. 하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를 을지호가 아니었다. "대규모의 공격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단 말이군요."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그간 서로를 도외 시하던 철혈마단과 북천이 힘을 합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상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심각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특히 오늘같이 날이 어둡고 비가 내리는 날은 기습을 하기에 최적 의 조건이지요. 게다가 각 문파의 어르신들이 자리를 비우신 상황입 니다. 놈들이 말씀대로 단순한 첩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대대적 인 공격의 전조일 수도 있습니다. 미리미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당천우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을지호의 말대로 만일에 있을지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적의 공격이 정말 시작될까요?" 당천우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사마유선이 물었다. "그거야 모르지." 너무나도 담담한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자 천천 히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부르럽게 어루만진 을지호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십중팔구 공격이 있을 것 같군.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 아." "그렇군요." 어떤 불길함을 느낀 것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사마유선의 몸이 살짝 떨렸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을지호를 중심으로 현 상 황을 심각하게 논의하던 이들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돌려졌다. "오셨습니까?" 선두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이 을지소문인 것을 확인한 을지호가 황 급히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곁을 지키던 사마유선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상황이 어떠하냐?"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제갈경, 당우곤을 비롯하여 지난밤 내내 옥 허궁에서 함게 술을 마시던 몇몇 인물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선 을지소 문은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일단 각 도관에 전려을 띄워 경고를 하였습 니다만 몇몇 곳은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 "늦다니?" "명진암(明眞庵), 백운암(白雲庵) 등이 무너진 것으로 확인되었고 회룡관(回龍觀)도 위험하다 합니다." "허! 그렇게나 빨리?" "팔선관은 어떤가?" 을지소문을 따라 용천관에 온 제갈경이 황급히 물었다. "재차 전령을 보냈지만 답신이 없습니다.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긴, 명진암과 백운암이야말로 팔선관의 좌청룡(左靑龍), 우백호 (右白虎)와도 같은 존재, 그곳이 당했다면 팔선관의 상황이야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겠군. 그나저나 어찌하여 저들의 움직임이 지금껏 감 지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네. 놈들의 진영에 잠입한 이들도 있고 근 처를 감시하는 자들만 해도 수십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거늘." "제거를 당했겠지요. 머리 손을 쓰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인원이 얼마인데 이 지경이 되도록 한 명 도 소식을 전한 사람이 없다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제갈경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 어 있었다. 그는 몰랐다. 적의 진영에 잠입한 이들은 장방형 등에 의해 일찌감 치 제거가 되었고, 다른 이들 역시 기습을 펼치기 한참 전부터 암약하 기 시작한 살수들에 의해 모조리 목숨을 잃었음을. 그리고 각 도관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떠났던 이들 중 상당수도 그들의 살수에 연락을 전하기는커녕 도관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쓰러졌다는 것을. "옥허암은 어떠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을지소문이 물었다. "그쪽도 기습을 당한 것 같습니다. 급한 대로 당가의 무인들을 보내 돕게 하였습니다만 역시 소식이 없습니다." 허락도 없이 임의로 당가의 식솔들을 움직인 것이 미안했는지 을지 호가 당우곤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상황이 다급하여 당가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니네. 지금 상황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어디 있겠나? 잘했네." 당우곤은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들만 보냈느냐?" 을지소문이 약간은 채근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제가 직접 가고 싶었지만 용천관은 옥허궁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과 도 같은 곳입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얼마나 많은 적이 또 어 떤 식으로 공격을 할지 정확히 파악도 못한 상태에서 이곳을 비울 수 는 없었습니다." "그건 이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을 도우려다 이곳 을 기습당하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당우곤이 맞장구를 치며 을지호를 옹호했다. "노부도 같은 생각입니다. 후∼ 어쨌든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자소궁 쪽도 여유는 없을 것 같은데." 제갈경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흠칫 놀란 을지호가 황급히 되물었다. "그쪽도 공격을 당한 것입니까?" "놈들이 연합하여 공격하기로 했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 은가? 이곳으로 오기 전 전기봉 쪽으로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네. 전기봉과 가까이 있는 상원(上元), 중원(中元), 하원(下元) 과 윤희암(尹喜岩)은 이미 놈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을 것이야. 아니, 벌써 끝장이 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 아무튼 무당파의 제자들과 정도맹의 무인들이 전력을 다해 막는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양쪽이라 니... 후∼ 버거운 싸움이 될 것 같구만." "이쪽으론 얼마의 병력이 지원됐습니까?" "백 명 정도네." "그렇군요....." 을지호의 낯빛이 살짝 굳어졌다. 적의 병력이 얼마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군의 병력이 너무나 초라했다. '백 명이라... 너무 적은데......' 용천관에 남아 있는 병력이 삼십여 명. 지원 나온 병력을 합해봐야 백오십도 되지 않았다. 만약 팔선관이나 옥허암의 병력이 무사히 합쳐 진다면 상당한 전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일 찌감치 기대를 접는 것이 나을 듯했다. "할아버님이 오셨으니 옥허암으로 가봐야겠습니다." 을지호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전력의 열세를 조금이라도 극복 하려면 흩어져 공격을 받고 있는 이들을 최대한 집결시켜야 한다고 생 각한 것이었는데 을지소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되었다. 내가 가마. 너는 이곳이나 잘 지키고 있거라." "할아버님." "앉아 있으래두. 술을 조금 과하게 마셨는지 머리가 띵하구나. 바람 이나 조금 쐬어야겠다. 다녀오마." 을지소문은 더 이상 말을 섞기가 귀찮다는 듯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하여 아직 회복하지 못한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어찌 모 를까? 을지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침울한 표정으로 입 을 다물 뿐이었다. 그러자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제갈경이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들겼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는 것이네. 바람을 쐬러 간다? 허허허, 이거야 원, 정말 궁귀다운 말이지 않은가? 믿고 맡기도 록 하고 우리는 그저 이곳을 어찌 지켜야 하는지 대책이나 강구하세 나." "한데 선배님, 꼭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차라리 옥허궁으 로 물러나서 싸우는 것이...." 당우곤의 물음에 제갈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싸움은 고사하고 자칫 잘못하면 그곳에서 완전히 고립될 수 있네. 또한 옥허궁이나 자소궁이야말로 우리들이 지켜야 하는 최후의 보루, 그곳을 싸움터로 만들 수는 없겠지." 을지호가 몇마디 덧붙였다. "또한 옥허궁보다는 공간이 협소한 이곳에서 싸우는 것이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그러나 지형적 우위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결국 문제는 병력의 압도적인 열세를 어찌 해소하느냐 하는 것인데......" 제갈경이 두 눈을 굳게 감고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천하의 그라 해도 갑작스럽게 좋은 방법이 떠오를 리 없었다. "흠, 애써 움직일 필요도 없다는 것인가?" 용천관을 나서서 네다섯 걸음이나 걸었을까? 문득 걸음을 멈춘 을지소문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귀를 기울였다. "어찌하여 머추신 것입니까?" 옥허암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의 안위가 걱정된 혜정 신니가 다소 초 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모두 준비하라고 일러두십시오. 놈들이 오는 것 같습니다." "예?" 깜짝 놀란 혜정 신니가 고개를 돌렸지만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아무도 없지..." 되물으려 하던 혜정 신니도 뭔가를 느꼈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고 정 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드드드드드. 지축을 울리는 은은한 느낌. 거기에 점점 다가오는 거대한 살기들. 을지소문의 말대로 틀림없는 적의 출현이었다. 두두두두두. 마침내 눈으론 보이지 않고 오직 귀로만 들렸던, 희미하기만 했던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그 실체를 드러냈다. "왔군." 을지소문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밤새 내린 비가 무색할 정도로 먼지를 일으키며 필사적으로 달려오 는 일단의 무리들과 그 뒤를 아귀와 같이 뒤쫓은 거대한 인영군(人影 群). 맨 앞에서 선 이들이 아미파의 제자란 것을 알아본 혜정 신니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하 였다. "할아버님!" 달려가려던 혜정 신니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고, 동시에 적의 기 척을 눈치채자마자 용천관의 담을 단숨에 넘은 을지호가 도착했다. 그 의 뒤를 이어 많은 무인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의 기세가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을지소문이 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설마 하니 이토록 빨리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는 듯 흙먼지를 일으키 며 다가오는 적에게 두 눈을 고정시킨 을지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 었다. "아무래도 따라잡히겠습니다. 도와야겠습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이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진 그들의 거리를 보며 혜정 신니는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패퇴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당가의 수하라는 것을 확인한 당우곤의 심정 또한 그녀와 다르지 않 았다. 당장에라도 구하러 가겠다는 듯 무기를 거내 드는 그들. 하지만 그 들이 움직이기에 앞서 을지소문이 을지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궁을." "제가 하겠습니다." "이리 주거라." 을지호는 두말하지 않고 철궁을 건넸다. 궁을 건네받은 을지소문은 화살도 없는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힘껏 당겨 진 활시위와 저 멀리 미친 듯이 몰려오는 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당겨졌던 시위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약속이라 도 한 듯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죽어랏!" 매섭게 칼을 휘두르는 설풍단 단원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옥허암에서부터 추격해 온, 그리고 마침내 가장 후미에 있던 젊은 도사를 따라잡은 그는 곧 허공으로 치솟게 될 적의 목을 상상했다. 무영시가 도착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뭐, 뭐지?' 그의 칼이 도사의 목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칼끝으로 전해져 온 묵 직한 느낌과 승리의 쾌감을 감상하기도 전에 그는 가슴 쪽의 극렬한 통증과 함께 어째서 자신의 몸이 젊은 도사의 몸에서 점점 멀어져 가 는 것인지 의아해하며 힘없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저, 적이다!" 기세 좋게 달려가던 동료가 가슴이 휑하게 뚫린 모습으로 처참하게 쓰러지자 뒤따라오던 설풍단원들은 그 즉시 주변의 동료들에게 경고를 보내며 또 다른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눈으로 식별하기도 힘든 거 리에 보이지도 않는 화살, 그리고 혹여 식별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무영시의 급습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은 그들 누구에게 도 없었다. "크악!" "컥!" 연거푸 들려오는 비명성와 함께 선두로 나섰던 이들이 계속해서 땅 에 꼬꾸라졌다. 적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들은 주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엎드려!" "몸을 피해!" 이곳저곳에서 고함성이 터져 나왔다. 분명 눈앞의 적은 아니었다. 옥허암과 팔선관에서부터 패퇴한 그들은 지금껏 변변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몇몇 이들이 약간의 저항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것도 잠 시일 뿐, 그들이 쓰러지고 나면 그저 죽어라 도망만 치기에도 바쁜 그 들이 아니던가. 물론 저 멀리 용천관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적들이 보이긴 하였으나 어림잡아 백여 장이 넘는 거리에서 도움을 준다는 것 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적의 기습을 받는 바람에 약 팔 할에 가까운 병력을 잃 고 패퇴한 팔선관의 무인들과 그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인원이 살아남 은 옥허암의 병력들 또한 어째서 자신들을 추격하던 적들이 힘없이 쓰 러지는지, 또 두려움에 떠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도움의 손 길이 있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온몸에 부상을 입어가면서 도 얼마 남지 않은 아미파의 제자들과 옥허암에서 함께 머물렀던 동도 들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일연 사태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대 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을지 대협인가? 아니면 궁귀 어르신?'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도움을 줬느냐가 아니라 마침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조금도 머뭇 거릴 여유가 없었다. "눈앞에 용천관이 있습니다! 조금만 힘을 내세요. 여러 동료들과 궁 귀 어르신이 돕고 있습니다!" 궁귀 을지소문이 돕고 있다는 그녀의 한마디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 했다. 그녀의 말은 지칠 대로 지쳐서 용천관을 코앞에 두고도 거의 자포자 기했던 이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쫓고 있던 설풍단의 기세를 완벽하게 꺾어버렸다. "구, 궁귀?" 일연 사태의 외침에 그제야 자신들을 공격했던 그 무엇인가가 궁귀 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깨달은 설풍단원들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하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 무림에 그 명성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가 아니라면 어찌 지금과 같은 공격이 이루어지겠는가? 게다가 일말의 의심을 날려 버리는 것은 여전 히 동료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것. "멈춰라! 모두 멈춰!" 비교적 후방에 있다가 수하들이 속속 쓰러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받고 황급히 달려온 위지청이 미친 듯이 고함을 쳤다. 하지만 그의 외 침이 아니더라도 설풍단원들의 발걸음은 이미 멈춰져 있었다. 공격을 받고 쓰러진 동료가 벌써 일곱을 넘었고 그들 모두가 절명한 상태였 다. 그 공격이 궁귀 을지소문의 솜씨라는 것을 알고도 움직일 수 있는 간담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그렇게 소리칠 필요도 없어. 봐라. 움직이는 놈이 있는지." 뒤늦게 달려온 장방형은 어느덧 자신들보다는 용천관에 훨씬 가까 이에 접근한 적들을 보며 아깝다는 듯 소리쳤다. 그리곤 아무런 죄도 없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제길,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라고! 다 잡은 고기였는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일단은 성공이다. 저놈들을 제외하고는 목표로 한 곳과 인 원들 대다수를 잡았어. 이만하면 기습으로 얻은 성과치고는 대단한 거 지. 팔다리를 잘랐으니까 이제는 마지막 목만 취하면 그만이야." "후∼ 그게 말처럼 쉬우면 좋겠다." 위지청이 흉측하게 나뒹굴고 있는 수하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째서? 고작 늙은이 하나 때문에? 뭐, 그 늙은이의 실력이 출중하 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어차피 독불장군(獨不將軍)이야. 혼자서 아무 리 날뛰어봤자 버틸 수 없을걸. 게다가 우리 쪽에도 그와 상대할 수 있는 어르신들고 계시고." 다소 회의적인 표정의 위지청에 비해 장방형은 자신만만했다. "그럴까? 넌 모르겠지만 난 그자의 실력을 직접 경험했다. 고작 나 뭇가지 하나를 가지고 나와 스무 명도 넘는 설풍단의 공격을 가볍게 뚫었어. 아니, 뚫은 정도가 아니었다.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면 모조리 죽었을 거야. 게다가 너도 들었잖아. 그와 부딪친 거경궁의 고 수들은 아직도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풍항 선배는 결 국 목숨을 잃었지." 그제야 장방형의 얼굴도 굳어졌다. 거경궁의 풍항이라면 최소한 송 림의 고수들과 필적하는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어루만졌다. 일전에 을지소문을 막다가 뺨 을 얻어맞고 부러진 어금니 자리가 마구 쑤셔왔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장방형과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수하들이 너무 위축된다고 생각했 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 위지청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궁귀가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대단하신 분을 알 고 있잖아." 그의 시선을 따라 모든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가히 압도적인 힘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흐흐흐, 걸음도 늦으셔라. 이제야 오시는군."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다가가는 장방형의 입가에 웃 음이 흘렀다. 그가 바라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눈이 부시도록 흰 백의 를 걸치고 수백의 수하들을 이끌고 있는 북천의 천주 위지요였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위지청이 말한 대단한 분이란 천주가 아 니라 그보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세 명의 노인과 중년인의 호위 를 받으며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사람, 바로 전대의 천주 태존 위지건이라는 것을. * * * 전기봉. 자소궁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천혜의 요지. 화려함과 기괴함보다는 은은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명산은 그곳을 점령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들이 흘린 피로 이해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북천보다 다소간 일찍 시작된 철혈마단의 전격적인 기습으로 인해 전진 기지 역할을 하던 주요 도관이 모조리 점령을 당하고, 전기봉에 서 남은 것이라곤 뇌신동(雷信洞)과 태상관(太常觀)뿐이었다. "뭣들 하느냐! 고지가 눈앞이다. 머뭇거리지 마라!" 태상관을 점령하라는 명을 받은 금기령주 후설담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태상관과 인접해 있는 상원을 점령하고 기세 좋게 공격을 시작한 지 도 벌서 한 시진이 지나지만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시작은 좋았다. 매복해 있는 적의 움직임을 간파한 뒤 오히려 그것 을 역으로 이용해 십수 명이 넘는 적을 몰살시키고 기세를 올렸다. 하 지만 그것도 잠시, 상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손쉬운 싸움을 예 상한 수하들이 공을 다투기 위해 무분별하게 공격을 감행하다가 엄청 난 타격을 입고 말았다. 겉으로 드러난 매복을 희생양으로 삼아 이중 삼중으로 매복을 친 적 의 간계에 천리대 인원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혈루대도 꽤나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때마침 참인대를 이끌 고 적의 배후를 쳐서 또 다른 공격을 막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돌 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뻔했다. 이후, 본격적인 공격에서 후설담과 그가 이끄는 금기령의 무인들은 태상관을 점령하는 것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 껴야만 했다. 특히 정도맹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청운당이 급파되면 서 전황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크악!" 후설담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청운당의 단원이 외마디 비명을 지 르며 쓰러졌다. 핏발 선 눈과 반쯤 벌어진 입에선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했으나 그의 의식은 이미 이승을 떠난 후였다. "지독한 놈들 같으니!"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일수를 날리는 적을 보며 질린 표정으로 걷어차는 후설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돌아버리겠군." 이런 식의 싸움을 벌써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또 얼마나 해야 할지 몰랐다. 수적으로도 열세인 적은 아무리 베어도 물러설 줄 몰랐다. 아니, 더 욱더 독기를 품고 달려들었다. 그 자신이 쓰러뜨린 적만 해도 벌써 십 여 명, 목숨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쉬운 상대는 한 명 도 없었다. 그들을 쓰러뜨리느라 입은 크고 작은 부상이 온몸을 피로 적시고 있었다. "제길,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또다시 덤비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후설담이 신경질적으로 소 리를 질렀다. 하지만 딱히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 고 있었다. 태상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뇌신동에선 그야말로 이번 싸움의 향배를 결정하는 건곤일척의 승부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무당을 지키기 위해 어느 곳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뇌 신동은 자소궁으로 통하는 최후의 길목으로써 그 중요성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해서 정도맹과 무당파의 거의 모든 전력이 뇌신동을 사수하기 위해 집중됐고, 철혈마단에서도 금기령을 제외한 은기령과 동기령, 그리고 단주인 철포산이 직접 이끄는 친위대(親衛隊)까지 모 조리 동원됐다. 또한 지금껏 나서지 않고 있던 천마원(天馬院)의 노고 수들, 비록 일선에서 은퇴한 그들이기는 하였으나 과거 철포산과 함께 최강의 철혈마단을 이룩한 그들이 무당과 정도맹의 노고수들을 상대하 기 위해 직접 나서면서 싸움의 치열함은 필설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 였다. 뇌신동에서 약 오십여 장 떨어진 암석군(巖石群). 미지근해진 술맛에 인상을 찌푸리는 철포산이 철통과도 같은 호위 를 받으며 앉아 있었다. 직접 싸움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존 재 하나만으로도 미증유의 힘으로써 수하들을 독려할 수 있었던 그는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박빙을 유지하고 있는 전황을 살피며 연신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흠, 하나같이 약해 빠진 놈들처럼 보이더니만 꽤나 끈질기군." 그는 뇌신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며 악착 같이 덤벼드는 무인들을 보며 정도맹을 그저 허명만을 쫓는 군상(群像) 들의 집단으로 치부했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명예만을 탐하는 놈들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야." "아무래도 목숨이 걸린 일이니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뇌신동이 무너지면 남은 것은 오직 자소궁뿐.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곁에서 술을 따르고 있던 요증이 전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자세로 대 꾸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뭐,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저자는 누구냐?" 더 이상은 마시지 못하겠다는 듯 술잔을 집어 던진 철포산이 물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고개를 빼며 되묻는 요증. 철포산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청포(靑布)를 휘날리며 전장을 누비는 노도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정도맹의 맹주 말씀이십니까?' "맹주? 저자가 정도맹의 맹주란 말이냐?" "예. 제 기억이 틀림없다면 정도맹의 맹주인 천장 진인 같습니다." "진인은 무슨, 말코도사들 같으니." 가소롭다는 듯 웃어넘긴 철포산이 곧 웃음을 지우고 다시 물었다. "어쨌든 맹주란 말이지? 그리고 맹주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런 진흙탕 같은 싸움에 직접 참여한단 말이고." "그렇습니다. 틀림없는 정도맹의 맹주입니다." "좋아. 적의 우두머리가 나섰으니 이쪽에서도 그만한 대접은 해주어 야겠지."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를 하지 못한 요증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 철포산이 손을 내밀었다. "무기." "예? 아, 예." 되묻던 요증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호위 무사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철포산의 애병을 대령했다.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만년설의 은빛보다 더욱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한 쌍의 은륜(銀輪).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 다. 그 은륜이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피를 머금은 마물(魔物)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철포산의 손에 들렸을 때야말 로 그 진정한 위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날이 무뎌지는 법이지."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습관적으로 대답하기는 했으되 요증은 질려 버린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날이 무뎌졌다면서 흔든 은륜이 단지 스치는 것만으로도 암석의 한 귀퉁이를 잘라 버리는 날카로움을 보였기 때문이다. 요증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포산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요증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모 를 혼잣말을 주절거리면서. "무릇 우두머리를 때려잡으면 무리는 흩어지기 마련이지."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맹주." 천장 진인을 향해 천마원의 원로들과 생사를 다투는 싸움으로 인해 온몸에 피칠갑을 한 장로 노삭(魯索)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버텨내기는 하였으나 수적으로 너무 열세입니 다. 수하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했습니다." 막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시작된 싸움이 벌써 한 시진을 넘기고 있 었다.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적을 맞이하여 동원된 인원은 근 사백. 결코 적지 않은 인원임에 틀림없었고 무당산에 모인 병력의 절반이 넘는 인 원이었지만 세 배를 훌쩍 넘기는 인원을 상대하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한 명이 쓰러지면 계속해서 인원을 충원하고, 때로는 전후의 병력을 교체해 가며 공격해 오는 적과는 달리 아군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잠시도 쉬지 못하고 대적을 하였다. 자연 그 피 로감이 극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수하들과 함께 싸워온 천장 진인이 그 같은 상황을 어찌 모 를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 다. "그래도 버텨야 하오. 이곳이 무너지면 그야말로 끝장이외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런 식으로 싸우다간 전멸을 면키 힘듭니다." "하면 어쩌자는 것이오?" "잠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러나 전열을 정비한다...." 천장 진인이 아미를 찌푸렸다. 만일 전장이 뇌신동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면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 었다. 문제는 뇌신동에서 물러나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자소궁뿐이라 는 것. 자소궁을 피로 뒤덮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비록 저과 근접해 있는 이유로 정도맹의 본거지를 옥허궁으 로 옮기기는 하였으나 자소궁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 니고 있었다. 특히 정도맹의 맹주이기에 앞서 무당파의 제자였던 그 에겐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마냥 버티기엔 노삭의 말대로 상황이 너 무 좋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용단(勇斷)을 내려야 합니다." 노삭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맹주의 빠른 결정을 촉구했다. 천장 진인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무당파의 제자인 그가 자소궁을 피로 물들일 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결정을 혼자서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 오직 하나뿐이었다. "장문인과 상의해 보도록 하겠소." 순간, 노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치겠군!' 촌각이 급한 상황에 상의라니! 복장 터질 일이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상황이....." 한데 무슨 기운을 느낀 것일까?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던 노삭이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천장 진인 은 이미 어느 한곳을 향해 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하나의 길이 생겼다. 겹겹이 쌓이는 시신과 병장기들, 그 위를 넘나들며 혈전을 벌이는 수백의 사람들. 피아를 구별할 수도 없고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장에 기적적으로 길이 생겨났다. 너무나 좁아 그것이 '과연 길인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지만 천장 진인과 노삭에게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 로 너무나도 넓은 길이었다. 그 길을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싸움과는 전혀 별개라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 리며 한가로이 걸음을 옮기는 노인. 주변이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혈전의 장이 아니라면, 그의 손에 한 쌍의 륜이 들려 있지 않았다면 아침 산보를 나온 촌로(村老)의 모습이 라 말해도 수긍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하에 누가 있어 철혈마단의 단 주를, 천하를 도모하는 서천의 천주를 한낱 촌로라 말할 수 있을까?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걸어올 때마다 노삭과 천장 진인은 숨이 턱턱 막히는 중압감에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마침내 철포산이 그들의 면전에 섰다. "철포산이라 한다. 그대가 정도맹의 맹주인가?" 정중한 인사 따위가 있을 수 없었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철포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소. 노도가 정도맹의 맹주외다." "실력을 보고 싶군." "원한다면 상대해 드리겠소." 철포산이 철혈마단의 단주라면 천장 진인은 정도맹의 맹주였다. 비 록 무당파의 힘에 의해 떠밀리듯 맹주가 되었고 과거의 맹주들처럼 일 성(一聲)으로 사해를 흔들던 힘은 없었지만 눈앞의 적에게 자신의 흔들 림을 내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노삭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상대해 주마." 노삭이 천장 진인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철포산은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그의 곁으로 따라붙은 낙청이 한 걸음 나섰다. "그대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군. 그대는 내가 상대하지." "너는 누구냐?" "낙청." "귀곡도?" 노삭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호, 나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물론 알고 있다." 철혈마단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낙청은 이미 그 명성을 만방에 떨 치고 있는 터, 정도맹의 장로 정도 되는 인물이 모를 리 없었다. "알고 있다면 얘기가 쉽겠군. 자리를 옮길까?" 낙청은 노삭의 대답을 구하기도 전에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노삭은 천장 진인의 눈치만을 살폈다. 하나 천장 진인은 둘의 대화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철포산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더 이상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여긴 노삭이 찗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였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말릴 수도 없었고, 또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최선을 다해라." 철포산은 낙청과 노삭이 자리를 비키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곤 축 늘어뜨렸던 양손 중 한 손을 가슴 어귀까지 끌어올리며 천 천히 자세를 잡았다. 천장 진인은 아무런 대꾸 없이 검을 곧추세웠다. "좋은 자세로군." 상대의 기세만으로도 실력을 가늠하는 것이 고수라던가? 철포산은 단순히 검을 세웠을 뿐인데도 천장 진인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간 파했다. 그것은 천장 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과연 철혈마단의 우두머리!' 천장 진인은 철포산의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 숨소리 하나에도 위협 을 느끼며 전신의 힘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상대보다 약세인 것은 이미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승리를 기대하 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천중 진인은 되어야 상대를 할 수 있으리 라. 하나 이번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또 앞으로의 전황에 있 어 어느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있던 그는 필사의 각오를 다 졌다. 이기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대에게 최소한 큰 부상은 입혀야 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선공(先攻)!' 실력이 약하다면 그거을 만회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선을 제압하는 것, 선공뿐이었다. "타핫!" 육양심공(肉陽心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리고 있던 천장 진인은 칠초 구식, 예순셋의 변초로 이루어진 태청검법 중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 는 초식을 사용했다. 휘류류륭!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천장 진인을 중심으로 거센 광풍이 불었다. 그 광풍이 더할 나위 없이 예리한 기운이 되어 철포산을 노렸다. 앞선 기운은 명문 도가의 무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더없이 날카로운 것이었고 뒤로 갈수록 그 날카로움에 강맹함을 더하는 위력적인 공격 이었다. "허!" 철포산은 다짜고짜 그런 식의 공격이 올 줄은 몰랐다는 듯 양손을 흔들며 연신 뒷걸음질쳤다. 꽝꽝! 천장 진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강맹한 기운이 서로 교차하며 움직 이는 은륜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 것만 같았던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힘없이 사라졌다. "타핫!" 체면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 그렇듯 맥없이 막히는 것에 안색을 굳힌 천장 진인이 입술을 깨물고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취일망운(就日望雲)에서 만경창파(萬頃蒼波), 임림총총(林林叢叢)으 로 이어지는 화려한 초식들. 천장 진인은 초식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 넣었고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그 위력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 도였다. 서로의 약세를 은연중 뒤덮으며 강함을 더욱 강하게 연결하는 연환 공격엔 어떠한 약점도 보이지 않았고 천하의 그 어떤 고수라도 피할 길은 없을 듯 보였다. 주변을 휩쓰는 기운에 놀라 잠시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난 이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러는 환호성을 지르 며 섣부른 승리를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정도맹 무인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철포산의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 시 작된 것은 천장 진인의 공격에 거푸 뒤로 물러나던 그의 입가에 비릿 한 미소가 걸리면서부터였다. 기묘한 보법으로 몸을 움직이며 공세를 피해내고 단순히 몸의 움직 임만으론 감당하지 못할 공격은 은륜을 적절히 이용하여 무력화시켰 다. 특히 은륜의 중심에 손가락을 넣고 회전시키며 공격을 튕겨내는 기술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그토록 매서웠던, 보는 이들로 하여금 천장 진인의 승리를 예상하게 만들었던 공격은 단 하나도 은륜의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이지." 거세게 몰아붙이던 천장 진인의 공격이 약해질 쯤 철포산의 나직한 외침과 더불어 지금껏 공세를 막기 위해 회전했던 은륜이 그 움직임을 멈췄다. 창! 섬뜩한 음성과 함께 네 개로 이루어졌던 륜의 날이 각각 서로 네 개 의 작은 날로 분리되었다. 열여섯의 작은 날이 햇빛을 받으며 살기 어 린 빛을 사방에 뿌리더니 다시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회류류류륭! 듣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파공성이 요란하게 뿜어지고 은 륜은 그저 하나의 원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 다. "우선 가벼운 인사로 시작하지. 하앗!" 충분히 회전을 시켰다고 생각했는지 철포산은 탁한 외침과 함께 반 원을 그리며 왼쪽 팔을 크게 휘둘렀다. 슈슈슈슛! 팔의 회전력과 자체의 힘을 더해 쏘아져 간 은륜은 맹렬한 소리와 함께 눈으로 따라잡기가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천장 진인을 노렸다. 은륜의 방향은 직선이 아니었다. 다소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목표를 벗어난 은륜은 땅바닥을 스치듯 지나치며 먼지를 일으켰다. 그리곤 그 흙먼지 속에 몸을 숨기더니 천장 진인의 왼쪽 다리 쪽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천장 진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땅! 묵직한 금속성과 함께 하늘로 치솟은 은륜. 한데 그것이 끝이 아니 었다. 힘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은륜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이 번엔 옆구리를 노리며 다시금 쇄도했다. 미처 그와 같은 움직임을 예 측하지 못한 천장 진인이 깜짝 놀라 허리를 꺾었고, 은륜은 참으로 아 슬아슬하게 그의 배를 스치듯 지나가 철포산의 손으로 돌아갔다. "제법이군. 자, 이것은 방금 공격에 대한 답례." 철포산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번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두 개의 은륜을 던졌다. 하나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바닥을 스치며 모습을 감 추었고, 다른 하나는 허공으로 솟구치며 비스듬히 정점을 지나 맹렬한 기세로 하강을 했다. 피리리리릿! 조금 전보다 더욱 날카로운 파공성이 주변을 휘감았다. '하나라도 놓치면 끝장이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륜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것뿐이 었다. 하지만 극과 극에서 날아오는 두 개의 륜을 한눈에 담기란 애당 초 불가능한 것. 그는 전신의 감각에 모든 것을 맡겼다. "하앗!" 천장 진인은 륜에서 흘러나오는 파공성과 소름 끼치는 살기를 감지 하며 검을 휘둘렀다. 간운폐일(干雲蔽日)이라는 초식.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고 해를 감춘다는 간운폐일은 태청검법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했지만 그 살기가 짙어 가급적 사용을 자제하는 위력적인 초식이었다. 그 힘은 여실히 증명됐다. 따땅! 연속적인 금속성과 함께 천장 진인을 노리며 쇄도했던 은륜은 그에 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하고 원위치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단 지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 위기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 천장 진인은 륜에 담긴 거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려 일곱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우욱!" 간신히 중심을 잡은 천장 진인이 한 바가지가 넘는 피를 토해냈다. 피 색이 검붉은 것으로 보아 결코 예사롭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했고, 손아귀가 찢어진 듯 검을 잡은 손에서도 피가 흘렀다.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은륜은 단순히 연사(鍊 絲)나 그 어떤 매개체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철포산의 기로 인 해 조종이 되는 것이었다. 비록 천장 진인이 타격을 받은 만큼은 아니 었어도 그 역시 약간의 충격은 있었다. 다소간 굳어진 그의 얼굴이 그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도약시킨 철포산은 하강하 는 힘에 더해 좌우로 팔을 휘둘렀다. 가히 빛살과도 같은 빠름의 은륜, 지금껏 두 번의 공격 때와는 비교 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맹렬하게 접근한 은륜은 각기 반원을 그 리며 천장 진인의 전면과 배후를 노렸다. 천장 진인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전신의 감각으로 은륜의 움직임 을 감지하려 했다. 그의 의도는 이번에도 성공하는 듯했다. 완벽하게 막지 못해 내상 과 함께 몸 두어 곳에 상처를 입었지만 아예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 로 치명타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천장 진인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한데 그의 눈에 아침 햇살을 받 으며 찬연히 빛나는 은륜이 들어왔다. 뭔가가 이상했다. '이럴 수가!' 천장 진인이 봉목을 치뜨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튕겨져 나갔다고 여긴 두 개인 륜이 튕겨져 나갈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것 도 놀랍건만, 그 수가 어느새 네 개로 늘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 전후좌우에서 밀려드는 륜을 바라보며 그는 최후의 기력을 짜내 발 을 움직이고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모든 륜을 막을 수는 없 었다. 세 개... 거기까지였다. '끝... 인가?' 죽음의 사자와도 같이 접근하는 네 개의 은륜을 막기란 애당초 불가 능한 것. 자신의 검을 피해 가슴팍을 파고드는 륜을 바라보며 그는 절 망감에 몸을 떨었다. "컥!" 천장 진인의 입에서 고통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따뜻한 기운과 함께 생명력이 넘쳐 나던 곳엔 이 미 차가운 륜이 깊숙이 박혀 뜨거운 피를 식히고 있었다. 힘없이 무너지는 천장 진인은 가슴에 박힌 륜을 빼내려고 했다. 하 지만 희미해져만 가는 의식과 함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결국 가슴 깊이 적의 무기를 박은 채 그는 차가운 대지 위에 몸을 누 이고 말았다. "맹주라......" 담담한 음성, 만족한 미소와 함께 천장 진인의 가슴에 박힌 륜을 거 둬들인 철포산은 어느새 한 쌍으로 변한 은륜을 하늘 높이 치켜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승리를 자축했다. "와아!" "이겼다!!" 가까이에서 그의 싸움을 지켜보던 철혈마단의 무인들이 미친 듯이 함 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그들의 함성은 곧 주변으로 퍼져 나갔고, 그토록 치열했던 싸움은 삽시간에 종결되었다. "정도맹의 맹주가 죽었다!" "단주님 만세!" 기쁨의 환호성은 뇌신동은 물론이고 삽시간에 전기봉 전체로 퍼져 나갔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힘겹게 버티고 있던 정도맹의 무인들은 눈앞의 결과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천장 진인은 비록 정도맹, 나아가 백도 최고의 고수는 아니었으나 정도맹의 맹주라는 상징적인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적에 게 패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맹주!" 노호성이 터지며 한줄기 빛이 철포산을 노렸다. 파파파팍! 땅을 가르며 밀려드는 기운. 철포산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뻗어 공격을 막아갔다. 조금 전 승리 때문인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방심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 기운에 담긴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땅!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주인을 잃은 륜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륜을 회수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난 철포 산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찾았다. 그의 눈에 천장 진인과 마찬가지로 청포를 입은 노도인이 들어왔다. "저자가 바로 무당파의 장문인입니다. 맹주인 천장 진인과는 사형제 사이지요." 노삭을 쓰러뜨린 것인가? 거의 잘려 나가다시피 하여 간신히 덜렁거 리는 팔을 흔들며 다가온 낙청이 말했다. "무당파의 장문인?" "예. 백 년 내 무당파가 배출한 최고의 고수라 알려지고 있습니다." "최고의 고수라......" 불의의 기습에 망신을 당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최고의 고수라는 말에 전의(戰意)가 불타는 것인지 철포산의 안색이 조금 전 천장 진인 과 싸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매섭게 돌변했다. 하지만 싸 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철포산을 뒤로 물리고 천 장 진인의 시신을 수습한 천중 진인이 전격적으로 퇴각을 명령했기 때 문이다. 철포산은 퇴각하는 그를 쫓지 않았다. 그들이 도주한 것은 보지 않 아도 알 수 있었고 시간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이제 남은 것은 자소궁뿐인가?" 도주하는 적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는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 소가 흘렀다. 제65장 용쟁호투(龍爭虎鬪) 전기봉에서 벌어진 싸움이 혈투(血鬪)라면 용천관에서 벌어지고 있 는 싸움은 사투(死鬪)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팔선관과 옥허암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용천관으로 들이닥친 북천의 병력은 어림잡아 천여 명. 그에 반해 용천관을 지키는 병력은 옥허암 등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패퇘한 오십여 명을 포함하여 간신히 이 백을 넘기고 있었다. 천 대 이백의 싸움. 애당초 성립이 될 수도 없는 싸움이었고, 혹여 싸움을 한다 하여도 삽시간에 끝날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였다. 하지만 싸움이 시작 된 후 반 시진. 싸움의 양상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 로 흐르고 있었으니...... "대, 대단... 진정 대단하구나!" 전장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위지건을 보필하며 싸움을 지켜보던 태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었다. 좌상 위경(衛擎)이 그의 말을 받았다. "대단한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껏 저만한 인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째서 그를 찬양하면서도 두려워하는지 알겠군요. 그렇지 않은가?" "후∼ 이거야 원.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세상에 저 정도의 무위를 지닌 자가 과연 또 있을까? 두렵도록 강한 자야." 막문위(莫雯葦)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우상의 눈에는 내가 저자와 싸운다면 어찌 될 것처럼 보이나?" 담담히 듣고 있던 위지건의 물음에 막문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 다. "싸, 싸우실 생각입니까?" "새삼스럽긴. 주점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네." "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심이......" 막문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흠, 우상의 반응을 보니 마치 내가 질 것같이 느껴지는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어차피 이기는 싸움에 서 구태여 위험을 자초하실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당황한 막문위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화를 내려 한 것은 아니니 그렇게 정색할 것은 없네. 그래, 태상,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우상과 같은 생각인가?"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린 위지건이 백미노인에게 물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측불허! 이 늙은이의 눈엔 박빙으로 보입니다." "그래?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보다 확실하게 실력을 가늠할 여력이 없을 뿐입니다." "내 생각도 자네와 같네. 아무래도 쉽게 이길 수는 없는 상대야. 물 론 쉽게 지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우상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애써 모험을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위험하다 싶었는지 태상은 완곡한 어조로 싸움을 말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단단히 결심을 굳힌 위지건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저런 상대를 두고 지켜만 보라는 것인가? 나 위지건에게?" 점점 커지는 음성, 그럴 때마다 위지건의 몸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 운이 뻗어 나왔다. "힘들게 무공을 익히고 북천의 천주로서 지금껏 수많은 상대와 싸움 을 했지만 지금처럼 흥분된 적은 없었네. 이토록 전신이 주체할 수 없 을 정도로 떨린 적이 없단 말일세. 아는가? 장부로 태어나 저만한 상대 와 손속을 겨뤄본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 을. 한데 어찌하여 자네들은 나의 기쁨을 빼앗으려 하는가?" "하, 하지만......" 뭐라 대꾸하려던 태상은 위지건에 의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설사 그것의 대가가 나의 패배, 나아가 죽음일지라도 난 기꺼이 받 아들일 용의가 있네. 그것이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의미일 수도 있음이니." '후∼' 위지건의 단호한 태도에서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태상 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위험했다. 물론 위지건의 패배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기엔 상대가 너무나도 강했다. 태상의 시선이 우문걸을 비롯하여 송림의 고수 열둘과 한데 어울려 싸우고 있는 을지소문에게 향했다. '나라면 어떨까? 저들을 상대로 지금껏 버틸 수 있을까?' 그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림없는 일이지. 잠시도 버티지 못했을 게야.' 그러나 을지소문은 간단히 버텼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버티는 것 이 아니었다. 그저 그를 막기 위해 송림의 고수들이 필사적으로 대항 하는 것이었을 뿐. "제길, 공격을 하란 말이야, 공격을!!" 세하보의 보주 척목은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지금 치미 는 노화를 억제하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용천관 공격의 선봉을 맡아 자신만만하게 공격을 시작한 지 벌써 한 참의 시간이 흘렀다. 하나 좀처럼 성과가 없었다. 성과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당하고 있었다. "이놈! 어째서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냐? 네놈이 그러고도 세하보의 무인이란 말이냐!" 척목은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는 수하에게 소리쳤다. "사, 살려... 크악!" 겁에 질려 변명하던 그는 척목은이 휘두르는 칼에 그대로 목이 떨어 지고 말았다. "진정하십시오, 보주님!" 척목은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던 총관 용초구(龍樵灸)가 기겁하며 그 의 팔을 잡았다. 또 다른 수하를 향해 칼을 휘두를까 놀란 것이었다. "진정? 지금 나보고 진정하라는 것인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 부르르 떨리는 입술, 그는 이미 학자처럼 보이 던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어찌 그의 심정을 모를까? 그래도 수하들에게 화풀이를 해서는 가뜩 이나 떨어진 사기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것. 말려야만 했다. "보주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녀석들이라고 어디 물러나고 싶어서 물러나는 것이겠습니까? 저 괴물 같은 놈 때문에....."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용천관 지붕에 우뚝 서서 냉정하게 활 시위를 당기는 한 인물을 노려보았다. 삼시파천 을지호. 싸움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세하보의 노고수들을 단숨에 쓸어버리고 송림의 고수들이 필사적으로 막아선 뒤에야 겨우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었던 궁귀 을지소문과 더불어 진정 말도 되지 않을 싸움을 지금껏 이어오게 만든 장본인. 을지소문에게 궁을 건네받고 사마유선과 함께 용천관의 지붕으로 올 라간 을지호는 예의 그 무서운 활 솜씨를 뽐냈다. 그는 용천관 주변에 광범위한 화살의 장막(帳幕)을 만들었는데, 그 가 한 번의 시위를 당길 때마다 세하보의 무인들은 속절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한 번에 한 명씩, 때로는 서너 명도 쓰러뜨리는 활 솜씨는 어째서 그가 삼시파천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증명했다. 상당수의 무인들이 그가 펼친 화살의 장막을 피해 용천관의 무인들 과 직접적으로 무기를 맞대고 싸웠으나 그들은 난데없이 날아들어 목 숨을 빼앗는 화살에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어찌나 정교한 솜씨를 지녔 는지 그 많은 인원이 얽히고설킨 전장에서도 을지호는 단 한 번의 실 수도 없이 세하보의 무인들만을 정확하게 골라 쓰러뜨렸다. 상황이 이쯤 되자 눈앞의 적은 물론이고, 어느 순간 다가와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화살에도 신경을 써야 했던 세하보의 무인들은 본실 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당연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나름대로 인원 을 동원해 지붕 위의 을지호를 공격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며 시위를 당기는 을지호의 빠른 몸 놀림에 모든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특히 그의 곁에서 든든 하게 보필하고 있는 사마유선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비록 솜씨는 비교 할 것이 못 되지만 과거 혈궁단의 단주였던 그녀의 궁술 또한 다른 이 들이 보기엔 가히 독보적인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래, 문제는 바로 저놈이지!" 용초구의 눈을 따라 을지호를 살피는 척목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 조금 전 수하의 목을 날려 버리던 그 광기 어린 눈이 아니었 다. 뭔가를 결정한 듯 그는 들고 있던 칼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모습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용초구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응 시했다. "보, 보주님!" "애당초 애꿎은 수하들만 잡을 것이 아니었어. 놈만 끝장을 내면 되 는 것을." 척목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 안 됩니다." 용초구가 재빨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어째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인가?" 무심한 눈으로 용초구를 쳐다보는 척목은. 용초구는 일순 말문이 막 히고 말았다. "그, 그것이......" "내가 놈에게 당한다는 것인가?" "......" "자네의 표정을 보니 그런 모양이군. 놈이 강하다는 것은 나도 알 지. 그렇지만 자네가 알고 있는 것이 내 모습의 전부는 아니라네. 더 이상 수하들의 희생만 강요할 수도 없고."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용초구의 말문을 막은 척목은은 더할 나위 없 이 진중한 걸음걸이로 용천관, 정확히 말해 을지호를 향해 나아갔다. 고수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 사마유선이 그의 걸음을 제지하기 위 해 연거푸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뛰어넘는 고수라는 것을 느낀 사마유선은 그 즉시 을지호를 불 렀다. "오라버니!" 그녀와 등을 마주하고 있던 을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을지호가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꽤 강한 사람 같아요. 공격이 통하지 않아요." '흠." 척목은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추호의 흔들 림도, 주저함도 없는 단단한 걸음걸이. 그녀의 말대로 보통의 고수가 아니었다. 북천의 우두머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위치 의 인물이리라. "기꺼이 맞아주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은 을지호가 시위를 당겼다. 미리 준비해 둔 화살은 이미 떨어진 지 오래. 당연히 무영시였다. 핑!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무형의 기운이 척목은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 만 북천을 지탱하는 네 기둥 중 하나인 세하보의 보주 척목은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잔뜩 몸을 웅크린 그는 무영시가 그의 몸을 꿰뚫기 바로 직전 몸을 틀었고, 무영시는 간발의 차로 그의 몸을 빗나갔다. 꽝! 목표를 놓친 무영시가 바닥에 부딪치며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이것이 무영시? 무섭군!" 척목은은 움푹 파인 바닥을 보며 새삼 무영시의 위력에 놀랐다. 상대가 그토록 간단히 무영시를 피할 줄 몰랐던 을지호 역시 놀라기 는 마찬가지였다. "쉽지 않은 상대가 되겠군." 나직이 읊조린 그가 재차 시위를 당겼다. 첫 번째 무영시를 피한 상대는 이미 코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더 이 상 접근시켜선 좋을 것이 없었기에 다소 긴장된 표정이었다. 핑! 조금 전보다 다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번엔 세 발의 무영시가 허공을 갈랐다. 하나는 바닥을 스치며 날아가 다리를 노리고, 다른 하 나는 배, 마지막 화살은 머리를 노렸다. '위험하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공격을 해소할 수 없다고 판단한 척목 은이 칼을 치켜세웠다. 그리곤 자신의 독문무공이자 북천의 천주인 위 지요까지 감탄해 마지않았던 뇌섬도법(雷閃刀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뇌섬도법을 시전할 때 들리는 특유의 우렛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치 켜세웠던 칼이 힘차게 회전을 했다. 그때마다 섬전과도 같은 빛이 환 상처럼 뿜어져 나와 그를 향해 접근하는 세 발의 무영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꽈꽈꽝! 무영시에 담긴 기운과 척목은이 발출한 도기가 부딪치며 거대한 충 격음을 만들어냈다. 용천관의 기둥이 흔들리고 지붕 위의 기와들이 마 구 비산했다. "대단하군." 을지호는 진정 어린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감탄만큼 호승심이 일었다. 그는 더욱 신중하게 시위를 당겼다. 핑! 언제나 그렇듯 경쾌한 소성과 함께 시위가 튕겨지고 예의 무영시가 목표를 향해 은밀히, 그러나 파괴신과도 같은 강맹한 힘을 담고 움직 였다. 한데 이번엔 한두 발이 아니었다. 아예 끝장을 내겠다는 듯 을 지호는 마치 거문고의 현을 퉁기듯 연속적으로 무영시를 쏘아댔다. 한 발, 두 발, 세 발...... 순식간에 수십 발의 무영시가 허공을 수놓았다. 물론 눈에 보일 리 는 없었으나 전신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린 척목은은 그 모든 것들을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하기 위해선 보통의 방법 으론 어림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막아내지 못하면 역습도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만 쳐서도 역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대도 그렇게 연속적으로 공격을 한 다면 그만큼 큰 무리가 따를 것. 막아낼 수만 있다면 충분히 반격을 할 수 있으리라. '목숨을 건다.' 칼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타핫!" 지면을 밟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허공에 띄우고 있는 것인지 미끄 러지듯 움직이는 두 발은 기기묘묘한 방위를 밟아가며 환상적으로 움 직이고, 바닥으로 향했던 칼끝은 위로, 때로는 밑으로 전후좌우 사방 을 가리지 않고 움직였다. 홀로 도무(刀舞)라도 추는 것인가? 척목은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보보마다 힘이 있었고 일도를 휘두를 때마다 광풍이 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집요하게 날아드는 무영시. 꽝꽝꽝! 연속적인 충돌음이 들리고 최초로 시위를 떠난 무영시의 기운이 힘 없이 사라졌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직도 여러 발의 무영시가 그 를 노렸고 힘은 점점 배가되었다. 꽝꽝꽝! 또다시 들려온 충돌음, 이제는 충돌을 뛰어넘어 마치 폭발이라도 난 듯 소리가 요란했다. 소리와 비례해 척목은의 신형이 눈에 띄게 흔들 렸다. 최선을 다해 막고는 있었으나 힘에 부쳐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크으." 척목은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결국 한 발의 무 영시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단지 스쳤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의 왼쪽 어깨는 뼈가 보일 정도로 흉측하게 뭉개져 있었다. '안 되는 것인가?' 척목은이 입술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고통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 었다. 어깨에서 시작해 머리 속까지 울리는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더 욱더 그를 아프게 한 것은 패배감이었다. '정녕, 정녕 안 되는 것인가!!' 혼신의 힘을 다했건만, 충분히 막아낼 자신도 있었고 또 역습을 펼 쳐 수하들이 진 빚을 갚을 자신도 있었건만 결과는 너무도 참담했다. 수차례의 공격을 받는 동안 자신은 고작 두어 걸음을 전진했을 뿐이었 다. 반격은커녕 막기에도 힘에 부쳤다. 그때였다. "보주님!" 초조하게 지켜보던 용초구가 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척목은 을 노렸던 무영시가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기겁을 한 척목은이 쓰러 지는 그의 몸을 부여잡았다. "용초구!" 척목은이 의식을 잃어가는 그의 어깨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용초구 는 한참 동안이나 눈을 뜨지 못했다. "용초구! 정신을 차려라! 눈을 떠!" "보, 보주님...." 척목은의 외침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간신히 눈을 뜬 용초구는 힘겹게 손을 뻗더니 척목은의 팔뚝을 잡았다. "위, 위험합니... 피, 피해야......"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에 어린아이 머리만큼 이나 큰 구멍이 나고도 잠깐 동안이나마 의식을 차렸다는 것이 기적이 라면 기적이었다. "용... 초구....." 자신의 곁에서 평생 동안 궂은일만 하던 그였다. 결국엔 자신을 위 해서 목숨까지 바친 수하. 삽시간에 온기를 잃어가는 용초구의 시신을 땅에 눕히는 척목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알 수 없 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놈!" 벌떡 몸을 일으킨 척목은의 몸에서 끔찍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살기 가 향하는 방향은 철궁을 내려뜨리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을지호 에게였다. "으아아아아아!"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척목은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와 을지호와의 거리는 대략 십여 장. 하나 그 정도 거리 가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단 두 번의 도약으로 거리를 좁힌 그가 최후 의 힘을 모아 칼을 휘둘렀다.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엄청난 힘이 을 지호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자칫하면 당할 수도 있다고 여긴 을지호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시 위를 당겼다. 어느새 시위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불꽃은 곧 철궁을 통해 손으로, 그리고 그의 몸으로 전해져 전신을 불 태울 것처럼 무섭게 타올랐다. 치익! 전에 없이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시위가 퉁겨지고 시위 중간에 자리 하고 있던 불꽃이 지옥의 염화(炎火)가 되어 척목은에게 날아갔다. 짧지만 더없이 격렬한 둘의 싸움은 용천관의 싸움을 일시에 멈추게 하는 힘이 있었다. 잠시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 있던 을지소문이 다소 놀랍다는 표정 으로 을지호와 그의 손에서 발출되는 불화살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 화염시? 끝났군." 을지소문이 단언하듯 경탄성을 터뜨렸고,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 듯 척목은이 일으킨 도기를 갈가리 찢어발긴 화염시는 그 기세를 조금 도 잃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이미 마지막 공격에 모든 힘을 쏟 아 부은 척목은은 화염시를 피할 여력이 없었다. '용초구......' 체념과도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염시를 보던 척목은 이 슬그머니 눈을 감았고, 바로 그 순간 화염시가 그의 이마를 꿰뚫었 다. 털썩. 화살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해 이 장이나 뒤로 날아간 척목은의 신 형이 땅바닥에 무참히 팽개쳐졌다.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승리의 환호성도 없었고, 분노에 찬 외침도 없었다. 그저 침묵으로 승자와 패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위지건이었다. 그는 안타까움과 분노로 일그러진 위지요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의 눈이 위지건에게로 향했다. 그를 알지 못하는 백도의 무이들은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그 리고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고 있던 북천의 무인들은 경외심이 가득 한 눈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끔찍할 정도로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헤치며 걸어온 그가 을지소 문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입니다." "허허, 지난밤에 보지 않았소?" 을지소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랬던가요? 이거야 원, 꽤나 오래된 것 같았는데 고작 하룻밤이라 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위지건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아무튼 다시 보니 반갑소. 그래, 나를 막기 위해 온 것이오?" 을지소문이 다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위지건은 살 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막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면?" "대화를 나누어보기 위함이지요." "대화? 아!" 무슨 말인가 잠시 의아해하던 을지소문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대화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법. 더구나 그들과 같이 무공의 끝 을 본 사람들의 대화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렇잖아도 기대하던 참이오. 참으로 유익한 대화가 될 것 같구려." "같은 생각입니다." "자, 더 기다릴 필요가 있겠소? 난 이미 준비가 되었소만." 을지소문의 말에 위지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검을 비스듬히 들어올린 위지건과 그에 반해 살짝 늘어뜨린 을지소 문. 둘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얼굴을 그저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였다. 실로 참기 힘든, 질식할 것만 같은 기운이 둘을 에워싸고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지켜보는 사람들마저도 못 견디게 만드는 끈끈한 긴장감이 계속되기 를 얼마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오 장 정도의 거리가 사 장으로 좁혀들고 다시 삼 장, 이 장... 그리 고 마침내 일 장 정도의 거리까지 도착한 그들의 신형은 또다시 움직 일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번의 침묵은 조금 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전 자가 서로의 실력을 존중하며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필 승을 위해 상대의 약점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공방전은 펼쳐지고 있었다. '음한지기인가?' 을지소문의 눈가에 잔경련이 일었다. 위지건의 몸에서 일어난 기운이 어느새 자신의 몸까지 뒤덮고 있다 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더구나 그 기운이라는 것이 인간의 힘으론 도 저히 감당하기 힘든 극한의 음기를 담고 있는게 아닌가. 또한 그 기운 안에는 극음과는 다른 한독이 실로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으니.. 상대의 무공이 극한의 음기와 한독을 품은 것이라 직감한 을지소문 은 그 즉시 무위공을 운용하여 몸속으로 침투하는 음한지기와 맞서 싸 웠다. 중원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무위 공의 공능은 전유스러운 것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하였으나 을 지소문의 몸속으로 침투했던 음한지기는 바다 속으로 흘러드는 강물과 도 같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오히려 차갑게 얼어붙었던 주변의 공기마 저도 바꿔 버렸다. '역시 천하제일인. 쉽지는 않군.' 단순한 음한지기에 쓰러지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했으나 그토록 쉽 게 해소할 줄은 몰랐다는 듯 위지건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것 에 더해 주체할 수 없는 흥분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칠십 평생, 비로 소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 것이었다. "괘, 괜찮으시겠지요?" 멀리서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위지청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그의 옷은 마치 비라도 맞은 듯 흠뻑 젖 어 있었다. "물론이다. 네 할아버님을 이길 자는 하늘 아래 아무도 없다." 위지요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가 아는 한 부친 위지건은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빙곡에서 두 번 다시 태어나기 힘든 천재였다. 대를 이어오며 수도 없이 갈라져 이제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방대한 무공을 하나로 집대성하였 고, 그것을 바탕으로 완성시킨 세 가지 무공은 그 위력을 감히 상상조 차 할 수 없었다. 구 초의 장법으로 이루어진 한천구식(寒天九式)을 펼치면 하늘마저 얼려 버릴 것 같은 장영(掌影)이 천지를 뒤덮었고, 한음지(寒陰指)는 뚫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오직 일 초 삼 식뿐인 한류천경(寒 流天驚)은 위지건에게 불패의 승부사, 또는 일초의 승부사라는 명성을 안겨준 천고의 절학이었다. '분명히 이기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상대가 다름 아닌 천하제일인. 이미 하나의 전설로 화해 버린 궁귀 을지소문이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때였다. 스윽. 위지건의 왼쪽 발이 반걸음 앞으로 나왔다. 동시에 비스듬히 기울어 졌던 검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이 한류천경을 펼치기 위한 예비 단계인 것을 알고 있던 위지요 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침내 위지건의 몸이 움직였다. 서리라도 내린 듯 전신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그의 다리가, 그의 몸 이, 그리고 그의 검이 움직였다. 처음엔 느리게, 그러나 점점 빠르게. 종내엔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극쾌의 움직임으로 을지소문을 압박했다. 그의 검엔 단순히 빠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빙곡에 내려오던 삼십육 종의 검법을 그 일 초에 담아낸 그의 검 엔 극쾌(極快)는 물론이고 극강(極剛)과 극변(極變), 극환(極幻)의 묘 용까지 담겨 있었다. '막으면 이긴다.' 상대의 공격에 뒤가 없다는 것을 간파한 을지소문은 오직 한 번의 공격과 방어에 승부의 향배가 달려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에겐 어떠한 공격이라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 있었다. 문제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공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 자신도 예 측할 수 없다는 것.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불신을 갖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을지소문은 늘어뜨린 검을 가슴 어귀로 끌어올렸다. 그리곤 느릿느 릿 회전을 시작했다.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희뿌연 기운들이 을지소문의 몸을 삽시간에 에워싸고 검막(劍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강기막을 만들었다. 절대삼검의 두 번째 초식이자 천하의 그 어떤 무공도 뚫지 못한다는 무애지검(無愛之劍)이 시전된 것이다. 평범하게만 보이는 검의 움직임을 보며 승리를 자신했던 위지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꽈꽈꽈꽈꽝!! 마침내 숨이 막힐 듯 치열했던 승부를 종결하는 충돌이 일어났다. 온 산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려는가? 하나만으로도 일성을 부술 수 있다는 진천뢰(震天雷)가 한꺼번에 수 십 개나 터지는 듯 엄청난 굉음이 일고 주변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 무시한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갔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다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이러할 것 인가? 천지사방,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나간 기운은 주 변을 초토화시키는 것도 모자라 천지를 뒤흔들었다. "으아악!" 반경 십 장 안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수십의 무인들이 충격파를 감당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피를 토하고, 그중 내공이 약하거나 가까이에 잇던 이들은 손쓸 틈도 없이 절명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을지호와 척목은의 격돌에 시달려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는 용천관의 건물 대부분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 말도 안 되는.....!" "어, 어찌 이것을 인간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선 저마다 경악성이 터져 나왔 다. 딱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더러는 입을 벌리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굳어져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둘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놀람과 경악으로 비명을 터뜨리고 있는 사이에도 목숨, 아 니, 목숨보다는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 고 있던 을지소문과 위지건은 참으로 짧고고 긴 종착점을 향해 내달리 고 있었다. '지독한 위력이군.' 옷은 이미 넝마가 되어버렸고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었으며 전신에는 가느다란 상처들로 뒤덮였다. 막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무애지검도 위지건이 평생에 걸쳐 완 성시킨 한류천경을 완벽하게 막지는 못한 듯했다. 그러나 두 발을 땅 에 대고 굳건히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는 승리를 거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다.' 을지소문의 검이 움직였다. 무애지검을 펼칠 때와 같이 느릿느릿한 검이 아니었다. 위력은 어떤지 몰라도 위지건이 펼쳤던 한류천경보다도 최소한 배는 빨라 보이는 움직임.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날카롭고 빠르게 파고드는 검. 오직 을지호만이 그것이 절대삼검의 첫 번째 초식인 무심지검(無 心之劍)임을 알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애지검으로 적의 공격을 막 아내고 무심지검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승리를 의미했기 때문 이었다. '이, 이런 빠름이!' 위지건은 자신의 가슴을 향해 쇄도하는 검을 보며 놀라움을 넘어 결 국 허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반격을 할까 하였으나 구차한 몸부림이 될까 두려웠다.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남지 않았다. 어차피 늙고 늙어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아까울 것도 없었다. 뼈아픈 패배감도 들지는 않았다. 다 만 뭔가 모를 아쉬움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인정을!" 부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을 본 위지요가 간절하게 소리쳤 다. 그보다 빨리 그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사람들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접해서 지켜보던, 평생을 위지건에게 바친 태상과 좌우상은 그가 모시는 주군의 위험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달려 들었다. 하지만 무심지검은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든 방해받지 않을 정돌 독보적인 빠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을지소문의 검이 위지건의 가슴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 위지요가 절망의 탄식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 안 돼!" "죽어랏!" 태상과 좌우상의 합공이 을지소문에게 밀려들었다.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위지건에 비할 바는 아니나 결코 약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전대에 혁혁한 명성을 날린 그들의 합공은 위지건의 공격에 비견될 정도로, 아니, 그 이상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정상적 인 몸으로도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위지건을 상대하느라 꽤나 지쳐 버린 을지소문이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꽝!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을지소문의 신형이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 갔다. "할아버님!" 그들이 움직이는 순간, 이미 지붕에서 뒤어내린 을지호가 을지소문 의 신형을 낚아채 내려앉았다. "할아버님!"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소란 떨 것 없다." 을지소문이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큰 내상을 당했는지 입으론 연신 검붉은 피를 토해냈고 가슴 어귀엔 방금 전 공격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비겁한 놈들 같으니!" 그와 함께 놀라 달려온 사마유선에게 을지소문의 부축을 맡긴 을지호 가 철구의 시위를 풀었다. 일자로 펴진 철궁, 그것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 까? "용서치 않겠다!" 엄청난 살기를 주저리주저리 뿌리며 일어서는 을지호. 비록 일전에 입은 상처가 완쾌되지 않았고, 또 그런 몸으로 조금 전 척목은을 쓰러뜨리기 위해 무리를 해서인지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의 전신에선 가히 투신(鬪神)과도 같은 기세가 뻗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손을 뻗은 을지소문이 그 의 손을 움켜 잡았기 때문이다. "할아버님!" "그만 되었다." "하지만...." "그만 하래도!" 을지소문의 음성이 커졌다. 위지건과의 싸움에 이어 갑작스런 공격을 받는 바람에 제법 큰 부상 을 당했지만 공격을 받는 순간 몸을 뒤로 날려 대부분의 힘을 흘려보 냈고, 가슴을 막고 있던 울혈을 토해내 내상이 악화되는 것을 막은 을 지소문은 자신으로 인해 을지호가 날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엄명에 을지호는 할 수 없이 치켜들었던 철궁을 내리고 말았다. "늙은이들! 일 대 일의 대결에서 그따위 짓을 하다니!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오늘 일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을지호는 원독에 찬 음성으로 을지소문을 공격했던 태상과 좌우상을 힐난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위지건이 이미 그 들의 행동을 크게 나무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따위 행동을 한 것인가?" "죄, 죄송합니다, 태존." 추상과 같은 호통에 태상과 좌우상은 뭐라 대답할 바를 몰라 했다. "죄송하다는 말 따위로 끝날 말이 아니야! 자네들의 행동으로 나와 우리 북천의 명예는 땅으로 떨어졌네." "......" "내가 그런 식의 도움을 받고 살아난들, 또 승리를 거둔들 그것이 진 정한 승리가 되리라 보는가? 내가 만족할 것이라 여겼는가?" "....." "어처구니가 없군.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저지른 짓이 어떠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 었다. 더구나 죽은 줄 알았던 위지건까지 멀쩡히 살아 잘못을 추궁하 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허허, 참으로 부끄럽도다. 지난날 그에게 사주었던 한잔 술이 나 의 목숨을 구했건만...." 위지건은 가슴 어귀 잘려진 옷가지를 만지며 처연한 웃음을 흘렸다. 가슴을 가를 것처럼만 보였던 을지소문의 검이 가슴 대신 그저 옷가지 만을 자르고 지나간 것이었다. '허허허, 지난날 대접했던 술에 대한 답 례외다' 라는 말을 남기면서. "못난 수하들이 추태를 보였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위지건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 다. "허허, 괜찮소이다. 수하들의 입장에서야 능히 그럴 수도 있는 것 아 니겠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구려.' 을지소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허허롭게 웃어넘겼다. 그의 웃음 을 들으면 들을수록 위지건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힘없이 몸을 돌린 위지건이 위지요를 불렀다. "천주." "예, 아버님."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저 부친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을 한 위지요가 단숨에 달려와 대답했다. "부탁을 하나 하자꾸나." "말씀하시지요." 그 부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위지요는 내색하지 않았다. "병력을 물렸으면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들렸지만 위지요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 했다. 그리곤 단숨에 명을 내렸다. "일단 팔선관으로 철수한다!" 천주가 내린 명에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천의 무인들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몸을 돌린 위지요가 을지호에게 말했다. "하루의 기회를 주겠네." "무슨 뜻입니까?" 을지호가 되물었다. "이번 싸움에서 자네들이 승리할 것이라 여기는가?" "......" 사실상 지금껏 버틴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을지호 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선봉에 섰던 이들은 세하보의 무 인들. 북천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한빙곡은 제대로 싸움에 나서지 도 않은 상태였다. "내일까지 시간을 주도록 하겠네. 또다시 대항을 하든, 아니면 도주 를 하든 그건 자네들이 선택할 문제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내일까 지는 참도록 하겠네. 그것이 아버님께 인정을 베출어준 것에 대한 감사 와 세 분 어르신이 범한 결례에 대한 나의 사죄일세. 하지만 거기까지 네. 북천의 천주로서 난 무당을 쳐야 하고 싸움을 끝내야 하는 의무가 있네. 이해하는가?" "이해합니다." "고맙군." 을지호를 향해 시선을 두었던 위지요가 위지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여기까지가 소자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아니다. 힘든 결정을 해주어서 고맙구나." 무당산은 어차피 점령당할 수밖에 없었고 훗날 철혈마단과 논공행상 (論功行賞)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하루의 시간이 얼마나 큰 손실인지 위지건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위지요가 얼마나 힘든 결정을 했는지도. 미안한 표정으로 위지요를 응시하던 위지건의 시선이 을지소문에게 향했다. "끝이 좋지 못했지만 만족할 만한 대화였습니다." "허허허, 그렇소? 꽤나 살 떨리는 대화였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찾아뵙도록 하지요." "이런 번거로운 상황만 아니라면 나 역시 언제든지 환영이라오." "그럼, 이만." "잘 가시오." 을지소문과 위지건은 서로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인사를 하 고 훗날을 기약했다. 위지건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태상과 좌우상의 호위를 받으며 느릿 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위지요가 따랐고 위지청과 설풍단원들이 맨 후미에 남아 차례로 철수했다. 챙그랑.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병장기 떨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꺼번에 긴장이 풀리며 힘이 빠진 것인지 거의 모든 이들이 무기를 집어 던지고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동틀 무렵부터 시작한 북천과의 싸움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 * * "자소궁으로 가는 것입니까?" 척후로부터 적의 추격이 잠시 끊겼다는 보고를 받은 정도맹의 대장 로 강언(康堰)이 천중 진인에게 물었다. "......" 천중 진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천장 진인의 주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정도맹의 맹주 자리에 오른 천장 진인. 그의 죽음 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 양 처연하고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선 슬픔이 하나 가득 묻어 나왔다.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렇게 넋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 다. 강언이 다시금 그를 불렀다. "장문인." "예?"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드는 천중 진인. "자소궁으로 피하느냐 물었습니다." "예, 일단 그곳으로 전열을 정빟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옥허궁 쪽이 어찌 되었는지 걱정입니다. 북천의 전력 또 한 철혈마단에 못지않았을 텐데." "......" "궁귀 선배와 그의 손자를 비롯하여 극강의 고수가 몇 있다고는 하 나 이쪽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힘들지 않 았겠습니까?" "대장로께선 옥허궁이 무너졌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천중 진인의 물음에 강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는데, 어두운 표정을 보니 천중 진 인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선두 쪽에서 웅성거림이 일더니 무당파의 한 제자가 허겁지겁 달려 왔다. "장문인!" "무슨 일이더냐?"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천중 진인이 재빨리 물었다. "자, 자소궁이... 자소궁이!" 삼십 전후로 보이는 무당파의 제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 다. 천중 진인이 그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말해 보거라! 자소궁이 어쨌다는 것이냐?" "자, 자소궁이...." 천중 진인의 다그침에도 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비키거라!" 답답함을 참지 못한 천중 진인이 몸을 날리고 강언이 그 뒤를 따랐 다. 한데 네다섯 걸음이나 달렸을까? 앞서 가던 천중 진인의 몸이 그 자리에서 멈춰졌다. 아니, 멈춘 정도 가 아니라 온몸을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지난 수백 년 동안 도도히 무림을 굽어보던 무당파의 본산 자소궁이 불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불길이 자소궁의 전각들을 넘나들었다. "이럴 수가! 자, 자소궁이!" 강온은 혹여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연신 눈을 비벼댔다. 강온뿐만이 아니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을 눈앞에서 목도한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특히 무당파의 제자들은 화마(火魔)에 휩싸인 자소궁을 보며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몇몇 이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불길을 향해 무작정 뛰어가기도 하였다. "자... 소궁을... 네, 네놈들이 감히 자소궁을!!" 격렬히 몸을 떨던 천중 진인이 분노에 찬 일갈을 외치며 몸을 날렸 다. 장문인의 행동을 기다렸던 무당파의 제자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 다. 하나, 천중 진인의 행보는 얼마 가지 못했다. 이미 지금과 같은 상 황을 예견한 왕호연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기 때문이다. "진정하십시오." "비키게!" "부디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흥분을 가라앉히라? 지금 눈앞의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자소궁이, 자소궁이 불타고 있단 말일세!" 천중 진인의 기세는 실로 살벌했다. 비키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그를 치고 나가겠다는 듯 싸늘한 눈초리였다. 그러나 왕호연은 비키지 않았 다. 오히려 더욱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 가셔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자소궁이 저리된 것은 안타까 운 일이나 이미 늦었습니다. 잘해야 잿더미로 변한 전각들과 타다 남 은 기둥 몇 개만 건질 수 있을 뿐입니다." "어허, 자네 말조심하게!" 천중 진인의 안색을 살피던 강온이 황급히 왕호연을 말리고 나섰다. 차갑다 못해 얼음장으로 변하는 그의 모습에서 불길함을 감지한 것이 다. "모르긴 몰라도 자소궁 주변엔 놈들의 매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 다." "노도가, 우리 무당파의 제자들이 고작 매복 따위를 두려워할 것으 로 보는가? 자소궁에는 수많은 부상자들과 어린 제자들이 있네. 그들 을 버리라는 것인가?" "이미 늦었습니다." 왕호연이 냉정하게 말했다. "확인해야겠네." "구할 수 있다면야 오죽 좋겠습니까? 하지만 상황을 보십시오. 그들 이 지금껏 살아 있을 것이라 여기십니까? 불길 따위가 문제가 아닙니 다." 한두 곳도 아니고 자소궁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자소궁 이 적에 의해 완벽하게 점령당했다는 것과 그곳에 머물고 있던 이들의 운명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놈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지금처럼 흥분하신 장문인께서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 "주변을 보십시오. 다들 힘든 싸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목숨입니 다. 또한 놈들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최후의 전력이지요. 그나마도 모조리 끝장이 나면 도대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 천중 진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왕호연을 노려보았다. 인정하고 싶 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도 않았지만 그의 말에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 다. "매복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장문인과 무당의 고 수들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그 후의 일입니다. 놈 들의 매복에 발목을 잡혀 자칫 시간이라도 끄는 날엔 어찌 되겠습니 까?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을 추격대에 의해 포위를 당할 것입니다. 하면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굴욕 적인 일이라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쩌면 놈들이 패퇴하는 우리들을 여 유롭게 지켜만 본 것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했기에 그랬는지도 모 릅니다." "해서 어쩌자는 말인가! 어차피 자소궁이 아니면 우리는 갈 곳이 없 지 않은가?" 천중 진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로선 옳고 그름을 떠나 여전히 불타고 있는 자소궁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었건만 왕호연은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촌각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옥허궁이 있습니다." "그쪽이라고 괜찮을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와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 는 공격을 받았을 터인데." 천중 진인을 대신하여 강온이 물었다. "버텨낸 것 같습니다." "버텨내? 하면 옥허궁이 아직 건재하단 말인가?" "예. 방금 수하들에게서 전갈이 왔는데 궁귀 어르신과 삼시파천 그 친구의 활약에 힘입어 격전 끝에 북천의 예봉을 꺾었다고 합니다." "그 말이 진정인가? 허허, 대단하구만. 실로 대단해." 강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 많은 적을." "이거야 원. 허허허, 과연! 과연 천하제일인야." 전력 차만 해도 몇 배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승리를 거뒀 다는 것이다. 강언을 비롯하여 정도맹의 수뇌들은 이 믿겨지지 않는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문인, 옥허궁이 건재하다고 합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왕 각주 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엔 불타는 자소궁보다는 앞날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습니다. 옥허궁으로 가야 합니다." "자소궁은... 이미 늦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천중 진인의 결단을 촉구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천중 진인은 그저 망연자실한 눈으로 자소궁을 응시할 뿐이었다. "장문인!"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불길을 잡을 수도, 또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다는 것은 천중 진인 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무당파의 장문인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원하는 일에 언제까지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옥허궁으로 가지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천중 진인. 그가 얼마나 힘들게 내린 결정 인지는 꽉 쥔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알 수 있었다. '아, 내 무슨 낯으로 조사님들을 뵙는단 말인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연신 자소궁을 살피는 천중 진인과 무당파 제자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옥허궁.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연회로 떠들썩했던 옥허궁의 분위기는 몹시 어두웠다. 특히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힘든 싸움을 뚫고 간신히 생존한 정도맹과 각 문파의 수뇌들의 얼굴은 침울 하기 그지없었는데, 크고 작은 부상에 저마다 피곤에 지친 모습에 더 러는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남은 병력이 모두 삼백 정도라는 것인데......" 제갈경이 참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단 두 시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절반이 훌쩍 넘는 전력이 사라졌다 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음성이었다. "그나마도 육십여 명은 부상이 심해 싸울 수조차 없습니다." 강언이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놈들은 어찌하고 있다는가? 제갈경의 물음에 말석에 앉아 있던 왕호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선관과 자소...궁을 불태운 철혈마단은 재신묘(財神廟) 인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합니다." "재신묘라면 바로 지척이 아닌가?" "예." "결국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라는 말인데......" "북천과는 상관없이 철혈마단 단독으로 공격을 해올 공산이 큽니다." 잠시 숨을 고른 왕호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피하다니? 하면 옥허궁마저 버리잔 말인가?" 누군가의 입에서 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기습을 당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전력으론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자고 덤비는 격입니다. 전력의 차이가 너무나 큽니다. 게다가 북 천까지 밑에서 치고 온다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니 왕호연은 그 결과를 상상하기도 싫 은 듯했다. 곧바로 반박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싸워보지도 않고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맞소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소이댜." 그 반박에 또 다른 의견이 제시됐다. "허허, 답답합니다. 애당초 싸움이 되지 않는 전력이라는 것을 왜 모 르십니까?" "차라리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며 왕호연이 제기한 문제, 옥허궁에서의 철수 를 놓고 벌어진 갑론을박(甲論乙駁)은 한참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 았다. '쯧쯧, 도대체가......'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적을 코앞에 두고 언제까지 토론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야지, 이런 식 으로 가다간 죽도 밥도 죄지 않을 것이라 염려한 제갈경이 결국 근 반 시진이 넘어가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천중 진인에게 물었다. "장문인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일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누가 뭐라 해도 천중 진인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 람은 없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될 수도 있는 상황이 었다. "왕 각주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 사형!" "장문인!"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지 무당산을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천엽 진인이 기겁하며 돌아보고 무진검문의 장문인 곡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지금껏 핏대를 올리 며 퇴각을 주장하던 왕호연과 그의 의견에 동조하던 이들도 몹시 놀라 는 눈치였다. 불타는 자소궁을 보며 무모하리만큼 고집을 부리던 그가 아니던가. 무당산을 포기하자는 그의 말은 진정 의외였다. "어째서 무당산을 버리려고 하십니까?" 천엽 진인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평소 천중 진인의 말이 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했던 그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무당 파의 제자로서 무당산을 버리자는 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 다. "방법이 없지 않은가? 왕 각주의 말대로 싸움이 되지 않아." 이미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회복한 천중 진인은 전황을 객관적 으로 살피고 있었다. "금전(金殿)으로 피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곳이라면 놈들이 만, 아 니, 십만 명이 넘더라도 능히 싸울 수 있습니다!" 천엽 진인의 말에 금전을 알고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 였다. 무당파에서도 최고의 성지로 꼽히는 금전. 무당파의 제자들에게까지 함부로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금전은 깎아 지른 절벽과 우거진 수풀을 자랑하는 천주봉(天柱峰) 정상에 위치한, 그야말로 천혜의 요지였다. 하지만 천중 진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옥쇄(玉碎)를 하자는 것인가?" "옥쇄가 아니라 이길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네. 사제 말대로 금전이 불가침의 요지이기는 하나 그것이 야말로 양날의 검이네. 이 많은 인원이 먹을 음식도 없거니와 무엇보 다 물을 구할 수가 없다네. 적이 금전 주위를 봉쇄하면 그야말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굶어 죽는다는 것을 왜 모르나? "우리보다 길을 잘 알지도 못하고 온 산을 포위할 수는 없습니다. 부 족한 식량과 물은 충분히 조달할 수 있습니다." "그저 시간만 약간 끌 수 있을 뿐이야. 천엽 진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천중 진인은 도리질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만 하게. 사제와의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내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촉박하네." 단숨에 말을 자른 천중 진인이 왕호연에게 물었다. "자네 말대로 퇴각을 해야 할 것 같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만 묻 지." "말씀하십시오." "이후에 어찌해야 할 것 같나?" "소림사와 힘을 합쳐야 할 것입니다." 왕호연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소림? 소림사까지 도주해야 한단 말인가?" 대답이 다소 기대 밖인지 되묻는 천중 진인의 음성에 실망감이 묻어 나왔다. "현재 우리의 전력은 사분오열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나마 전 력을 보전하고 있는 곳은 이곳과 소림사뿐입니다." "그동안 숨어 지내던 많은 이들이 소림사에 모인다고 들었습니다." 제갈경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곳까지의 길이 너무 멉니다. 또한 호시탐탐 소림사를 노 리는 북천에서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고." 천중 진인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소림사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림사로 갈 필요가 없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지금 장난하자는 것인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의 천엽진인이 버럭 화를 냈다. 소림사와 힘을 합치자고 주장하면서 소림사엔 갈 피요가 없다는 왕호년의 말에 결국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그의 호통에도 아랑곳 없이 왕호연은 차분히 말 을 이었다. "무당 이후엔 다음 목표가 소림이 될 것은 자명한 일. 조금 전 장문 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소림사도 위험합니다."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로군." 뭔가를 느낀 제갈경이 재빨리 물었다. "예. 여기를 잠시 주목해 주십시오." 왕호연이 갑자기 커다란 지도 하나를 꺼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지도에 쏠리자 그는 붉은색 표시가 되어 있는 어느 한곳을 지적했다. "그곳은 복우산(伏牛山)이 아닌가?" 제갈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무당과 소림사의 중간 지점. 우리가 물러나 전열을 정 비할 수 있는 곳은 이곳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누구보다 먼저 왕호연의 의도를 파악한 강언이 고개를 흔들며 대꾸 했다. "왕 각주의 생각은 좋으나 대장로 말씀이 맞네. 놈들에게 노출이 되 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많은 인원이 상주하기엔 그곳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어."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그런 것입니까?" 어투를 들어보니 천중 진인도 왕호연이 말하는 의미를 알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한 제갈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천중 진인과 강언의 시선이 왕호연에게 향했다. 그에게 설명하라는 뜻인 듯했다. "복우산엔 정도맹의 비밀 분타가 있습니다." "비밀 분타?" 금시초문의 말이었다. 황급히 되묻는 제갈경은 물론이고 가만히 듣 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놀람이 가득했다. "예. 삼 년 전부터 복우산 중턱에 비밀 분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 다." "허! 어찌하여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몰랐을까?" "후∼ 송구합니다. 워낙 은밀히 처리하다 보니 대외적으로 알리지 못 했습니다." 미안한 표정으로 강언이 덧붙였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현재 어느 정도까지 완성이 되었느냐지요. 그래 준비는 어느 정도나 되었습 니까?" "칠 할가량 입니다." 대답은 천중 진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비록 정도맹의 수뇌는 아니 었으나 오히려 맹주보다 더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가 아니던가. 복우 산에 건설 중인 비밀 분타에 대해선 어쩌면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 사 람도 없었다. "칠 할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건물만 완성이 되었을 뿐입니다. 적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할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허허, 장문인께선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구려. 그것만 해도 어디 입니까? 솔직히 이곳에도 그러한 장치는 없었습니다. 허허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까짓 미비한 것은 우리 제갈세가에서 해결하면 될 것입니다." 본가가 중천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아는 사실. 제갈 세가를 언급하는 그의 음성엔 약간의 격동이 있었다. "세가와는 연락이 되는 것입니까?" "간헐적으로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다행이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소림사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군요." "소림사로 말입니까?" "예. 하지만 복우산에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면 구태여 소림사로 갈 필요는 없겠지요. 그쪽으로 이동하라고 곧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제갈경은 복우산으로의 퇴각을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힘이 합쳐진다면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격입니다. 대장로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퇴각을 한다면 현 시점에서는 복우산뿐일 듯합니다. 하지만 이곳을 어찌 벗어냐느냐도 문제입니다. 놈들이 길목마다 진을 치고 있을 터인 데." "방법이야 찾으면 있겠지요. 참, 궁귀 선배와 삼시파천 그 친구의 부 상은 어느 정도라고 합니까? 이곳을 무사히 탈출하려면 두 사람의 힘 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말이지요." 질문을 던지는 천중 진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힘들게 퇴각이 결정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행동은 무척이나 빨랐다. 옥허궁에 고립된 무인들은 천중 진인의 명령으로 급조된 수십 개의 뗏 목을 검하(劍河)에 띄우고 유유히 포위망을 벗어났다. 위지건의 부탁으로 그들에게 하루의 여유를 준 북천은 그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았고, 뒤늦게 그들의 탈출 소식을 접한 철혈마단이 급히 뗏목을 만들고 여러 부유물을 검하에 띄우고 그것을 발판 삼아 공격에 나섰지만 그들은 제대로 접근도 못해보고 검하의 고기밥이 되 고 말았다. 뗏목엔 천하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궁사가 두 명이나 타 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당산을 벗어난 천중 진인과 무당파의 제자들은 멀리 무당산을 보 며 피눈물을 흘렸다. 천엽 진인처럼 몇몇 이들은 피를 토하고 쓰러지기도 하였는데, 그들 이 흘린 피눈물이 주변 땅을 붉게 물들였다고 하여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을 혈루평(血淚坪)이라고 불렀다. 이후, 그들은 추격자들을 의식하 며 은밀히 몸을 숨겼다. 그리곤 복우산을 향해 조심스레 북상하기 시작 했다. * * * "무당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늦은 오후, 무당산으로부터 전해진 급보를 전하는 수호신승의 안색 은 몹시 어두웠다. "그, 그게 정확한 사실입니까? 무당이, 무당이 무너졌다는 것입니 까?" 당가의 가주 당욱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지난날, 대황하의 싸움에서 개방 방주 정소와 함께 간신히 몸을 피 한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국지적인 대항을 하다 보름 전에서야 소림 에 도착한 그는 그동안의 고생을 말해 주는 듯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 었다. "왕 각주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도주하는 도중이나 소림에 도착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와 연락을 끊지 않고 있던 정소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결국 그리되고 말았군." 당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려쳤다. 침묵을 지키고는 있었 지만 다들 그와 같은 심정이었다. "피해가 얼마나 된다고 하는가? 설마 전멸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을지호는, 그 녀석의 소식은 없느냐? 녀석을 찾아 무당산으로 떠난 궁귀 형님의 소식은? 답답하다. 빨리 말해 보거라!" 곽검명과 단견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처참하게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수 인원이 포위망을 뚫었다 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궁귀 어르신과 그 손자 분의 힘이 절대적이었다는군요." 정소는 단번에 두 개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 게 이곳저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하면 앞으로의 일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렇잖아도 요즘 들어 놈 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하던데." 예기치 못한 곽화월의 죽음으로 갑자기 화산파를 떠맡게 되었지만 몇 남지 않은 문도들을 추슬러 가며 재기의 발판을 다지고 있는 유현 이 소림에서 패퇴하여 물러났던 북천이 최근 다시 소림사 근처로 집결 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물었다. 탁히 누구를 지목하여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선 이 무당산에서 전해진 서찰을 정독(精讀)한 수호신승에게 향했다. 사 실 그 서찰이 아니더라도 그의 한마디가 곧 소림의 뜻이었고, 소림에 모인 정도인들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무당산을 빠져나온 이들은 복우산의 비밀 분파로 이동한다고 하는 군요. 소승은 복우산의 비밀 분타가 무엇인지... 방장은 아시는가?" 애당초 무림의 일에는 무관심했던 수호신승이 정도맹이 은밀히 벌이 는 일을 알 수가 없는 터. 그는 소림사 방장의 신분으로 곁에 앉아 있 는 명종에게 물었다. 소림사 탈환 이후 석고대죄까지 해가며 방장 자리를 사양했으나 결 국 방장의 자리에 오른 명종은 전대 방장이자 사부였던 공선 대사에게 일지선공을 비롯하여 방자으로서 익혀야 할 무공에 정진하느라 밤낮을 잊고 살았다. 급히 연락을 받고 회의에 참석하게 된 지금도 그의 의복 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제자도 잘 알지 못합니다." 명종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음, 공선 대사로부터 듣지 못하셨습니까?" 정소가 물었다. "예." "하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우산에 있는 비밀 분타는 오늘과 같은 일을 대비하여 은밀히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완성은 되지 않 았습니다. 또한 비밀 분타가 정확히 언제, 어디에, 어떤 식으로 만들어 지는지에 대한 일도 정도맹에서도 극히 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 요." "나도 일전에 들어 알고는 있네. 하나 완성도 되지 않는 곳으로 피한 단 말인가?" 오상이 회의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완성은 되지 않았으나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곳만한 장소도 없을 것 입니다." 정소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너무 무모해. 언제까지 알려지지 않으리라 보는가?" "계속해서 숨어 지낼 수만은 없으니 언젠가는 알려지겠지요. 다만 짧은 시간이나마 우리에게 전력을 추스르고 힘을 기를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봅니다." "희망 사항일 뿐이지. 자네의 생각대로 되리라 보는가?" "매사에 부정적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정 마음에 들지 않으 시면 장문인께서 묘안을 내보시지요."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는 오상, 정소도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둘 사이에 불꽃이 튀자 쓸데없는 일로 시 간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곽검명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정도맹에선 소림도 그쪽으로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로군." "예. 그렇게 요청해 왔습니다." "신승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아미타불! 소승이 뭘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의견을 따라야겠지 요." 수호신승은 모든 결정을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물었다. 살짝 입술을 깨문 곽검명이 이번엔 명종에게 물었다. "방장께선 어찌 생각하시는가?" "예? 그,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설마 하니 자신에게 먼저 물을 줄을 몰랐던 명 종은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명종은 주변의 인물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무공도 강하지 못했다. 그 러나 정도맹과 무당이 무너진 지금 수호신승이 건재한 소림사는 정도 무림의 또 다른 구심점이었고, 명종은 바로 그 소림사의 방장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 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대답을 사뭇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단견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거들었다. "허허허, 당황하지 말고 말씀하시게나." "소, 소승이 생각하기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대답하던 명종의 시선이 수호신승과 마주하고 있는 보리원의 원주 공청을 살폈다. "눈치 볼 것 없다네. 소림사의 방장으로서 의견을 말하면 되는 것이 야." 수호신승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격려했다. 그 말에 힘을 얻은 것인지 다소 안정을 찾은 명종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최근 북천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의 주력이 곧 돌아오겠지요. 또한 중천 쪽에서도 묘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 소림과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의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위협에 굴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느 냐, 그렇지 않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말을 끊은 명종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다소 무 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소승은 아직은 그럴 힘을 얻지 못했다고 봅니다." 오상을 비롯한 몇몇 위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으나 아무런 반 박도 하지 못했다. 개방 방주 정소를 비롯하여 당가의 가주, 황보세가 에서 탈출한 사람들, 그리고 각지에서 몰려든 무인들이 소림에 힘을 보 탰으나 여전히 그 힘은 사천, 아니, 북천 단독의 힘보다 열세인 것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소승은 소림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모든 이들의 입에서 탄식 어린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 정 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알고는 있었으나 명종이 그렇듯 전격적으로 철수 를 주장할 것이라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명색이 한 문파의 문주였다. 그것도 보통 문파던가? 태산북두라는 소림 의 우두머리였다. 더구나 소림을 점령당하는 치욕을 당한 지 얼마 되지 도 않은 시점에서 또다시 소림을 버리자는 말을 한 것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었는지 알고 있던 명종이 고개 를 떨구고 공청은 그런 명종에게 감탄 어린 시선을 보냈다. '과연, 사형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공청 그 자신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다지만 문중의 어른인 수호신승과 자신이 있는 상황 에서 단호하게 철수를 주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소 놀라기는 하였 으나 그래도 그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알기에 그는 아무의 눈치도 살피 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신임 방장의 결단력이 그렇게 흡족할 수 없었다. '소림은 반드시 부활하리라!' 그래도 수호신승이 어찌 생각할지 걱정됐던 그가 조심스레 수호신승 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다른 이들 역시 같은 심정으로 수호신승과 명 종을 살폈다. 그러한 공기를 눈치챈 것일까? 빙그레 웃음 지은 수호신승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명종을 살 피며 부드럽게 말했다. "방장의 결정은 곧 소림의 결정입니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감히 내뱉을 수가 없었 다. 소림사 방장의 결정과 그 결정을 인정하는 수호신승의 말로 소림사 에서의 철수는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66장 해후(邂逅) 안휘성 북서부에 위치한 금채(金寨). 관도에서 다소간 벗어나 들길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두 명의 나이 든 미부(美婦)와 한 명의 장년인, 그리고 세 명의 청년이었 다. 한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맨 앞에 선 사내는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씩씩대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마치 폭격이라도 당한 듯 무참히 뭉개 져 있었는데, 오뚝했을 것으로 보이던 콧날은 주저앉자 납작해졌고 찢 어진 입술, 양볼은 물론이고 눈두덩이가 크게 부어올라 눈매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젠장, 꼭 이러고 싶습니까?" 사내는 똑바로 말을 내뱉기도 힘든지 탁한 숨을 내뱉으며 툴툴거렸 다. 그의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사내가 그를 다독였다. "뭐, 어쩔 수 없잖아. 가족을 찾아주는 일인데." "흥,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공자께서 어디 가족을 찾 아주고 싶은 요량입니까?" "아니면?" "뻔한 것 아닙니까? 상사병(相思病)을 치료하러 가는 것이지." "쓸데없는 소리!"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간다고 반겨줄 것 같습니까? 그냥 저들과 함께 은근히 묻어서 넘어가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없는 일이지 요. 공자님의 정체가 탄로난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끝장난 일이란 말 입니다." "시끄럽다고 했다. 애당초 네놈이 싸움에 지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사내가 비아냥조로 중얼거리자 그렇잖아도 알아보기 힘든 그의 얼굴 이 더욱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지긴 누가 졌다고 합니까?" "진 것이 아니면?" "단지 방심했을 뿐이라고요." "방심? 에라이! 그게 방심이냐? 그래, 먼저 공격을 당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이렇게 박살이 나? 네놈 얼굴이 그 꼴이 될 동안 네가 한 일 이라곤 그저 땅바닥을 구르는 것뿐이었어." "....." 벌써 사흘이나 되었다지만 어찌 잊을까? 사내는 그때의 처참한 기억 이 떠오르는지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분해하지 마라. 솔직히 내가 싸운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나 위지황,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껏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인간은 본 적이 없으니까." 나름대로 위로라고 해주는 사내. 한데 위지황이라면? "비무영, 네가 약한 게 아니라 저 친구가 강한 거다." 그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이들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와 떨어져 북상하던 위지황과 그의 호위 무사 비무영이었다. 한데 둘의 대화가 이상했다. 비무영이라면 웬만한 고수라면 찜을 쪄 먹고도 남을 정도의 고수건만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제대로 대항도 하 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고, 위지황이 스스로 고개를 저을 정도의 고 수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뒤쪽에 처져 있던 사내, 아니, 딱히 사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어색 한 청년 한 명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음성에 화들짝 놀란 비무영이 고개를 돌리며 뒷걸음질치고, 그 렇게 비굴한 비무영의 모습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위지 황이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쯧쯧, 천하의 비무영이 어쩌다가......' "상처에 도움이 될 듯하여 할머니께 얻어왔습니다.' 나이 어린 청년이 구슬처럼 생긴 환약 세 알을 내밀었다. "하하, 약은 무슨. 금방 괜찮아질 터인데.'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부기가 빠지지 않아서....."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손을 쓴 것이 미안했는지 청년은 비무영의 얼 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흥, 병 주고 약 주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할아버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상처도 상 처지만 내공 증진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된다고....." 하지만 말과는 달리 비무영의 손은 어느새 환약을 낚아채더니 단숨 에 입 속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은 청년 이 위지황에게 물었다. "할머니께서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것인지 여쭈라 하셨습니다." "금방일세. 한 시진 정도면 도착할 것이야." "예, 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활짝 웃은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위지황은 청년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해. 가문의 내력인가? 아니면 특별한 재능이 라도 있는 것인가?' 이제 겨우 약관이 지난 나이. 그럼에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청년. 을지룡의 등이 무척이나 거대하게 보였다. 중천의 금채 분타.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가는 중천이 세운 수많은 분타 중의 하나로, 비 록 여타 분타에 비해 규모도 작고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었지만 그 존재 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부담을 주었던 금채 분타가 불에 타고 있었다. "끝났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강유가 걸어왔다. 가냘픈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끝없이 타오르는 불 길을 응시하던 남궁민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어요. 그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요?" "피해랄 것도 없습니다. 태상호법께서 난다 기다 하는 놈들을 모조 리 쓸어버리셔서... 우리는 그저 뒤치다꺼리만 한 셈이지요. 아, 북쪽 으로 치고 들어갔던 개방 친구들 몇이 부상을 당한 모양입니다." "목숨을 잃은 이가 있는가?" 남궁민의 곁에 있던 풍찬이 물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되었네. 부상이야 늘 있는 것을.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신 분 이 아닙니까? 중천에서 제법 출중한 고수들이 파견되었는데 말이지요." 풍찬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사전 조사에 따르면 금채 분타엔 새롭게 충원된 고수가 꽤 있었다. 특히 그들을 이끌고 온 건천삼절(建天三絶)은 안휘성에서 무척이나 유 명했던 의형제로, 상대하기가 몹시 까다로운 자들이었다. 해서 공격에 앞서 무척이나 걱정을 하였건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싸움이 시작됨 과 동시에 앞장선 태상호법 비사걸은 그들이 미처 출수하기도 전에 끝 장을 내버렸다. 아울러 그들을 따라온 고수들마저 단숨에 쓸어버리니 싸움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이니 어련하시겠어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녀로선 그저 별다른 피해 없이 싸움을 승 리로 이끈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뭔가가 다가왔다. "조심!"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있던 강유가 그 움직임을 간파하고 소리치며 검 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보다 허공을 격하며 날아온 물체가 훨 씬 빨랐다. 땅! "크윽!" 짧은 비명과 함께 검을 떨어뜨린 강유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떨 어뜨린 칼과 칼의 손잡이에 부딪친 조그만 돌멩이를 쳐다봤다. "어느 고인이신가요?" 또 다른 공격을 염려한 남궁민이 강유를 보호하며 소리쳤다. 풍찬 역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십 장 밖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백의(白衣)의 미부가 보였다. "누구시오?" 풍찬이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고 남궁 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적이 분명하건만 남궁민은 그녀의 눈길에서 어 떤 적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따뜻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녀만 의 생각이리라. "네가 남궁세가의 가주더냐?" 한참 동안이나 남궁민을 살피던 그녀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남궁민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가운데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실력을 보고 싶구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깢고짜 손을 쓰는 그녀. 남궁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접근하는 공격에 기겁하며 몸을 보호했다. 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내고 남궁민과 백의의 미부가 한 데 뒤엉켰다. 고작 돌멩이 하나로 강유 정도나 되는 고수의 검을 떨어뜨린 고수, 한 치의 소홀함이 있을 수 없었다. 남궁민은 그녀가 지닌 모든 힘을 동원하여 백의의 미부를 공격했다. 상대의 거센 공격은 답청검법의 부드러움으로 피해 가고 기회다 싶 으면 제왕검법의 강맹함으로 공격을 했다. 성격이 정반대인 두 개의 검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그녀는 이미 고수라 칭해도 전혀 무리 가 없을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둘의 싸움이 어찌나 치열한지 풍찬과 강유는 한껏 염려스런 표정으 로 싸움을 지켜볼 뿐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남궁민의 날카로운 공격을 여유있게 막아내는 미부를 보며 강유의 표정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근래 들어 급성장한 남궁민의 실력은 이미 그가 따라잡기가 힘들 정 도로 장족의 발전을 보였는데, 특히 한결 완숙해진 답청검법의 부드러 움과 제왕검법의 날카로움은 도저히 여인의 실력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데도 백의의 미부는 여유가 있었다. 결코 과장되지 않는 몸 동작으로 흘려보낼 공격은 자연스레 흘려보내고 간 간이 내뻗는 공격은 구경하는 그의 몸을 절로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날 카로웠다. "아무래도 힘을 보태야 할 것 같네."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풍찬이 말했다. 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붉어지는 안색과 가쁘 호흡을 보며 남궁민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태상호법이 곁으로 다가온 것은 그들이 남궁민을 돕기 위해 움직이 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 여자는 누구냐?" 물에 빠진 순간 손에 잡힌 생명 줄이 이렇게 반가울 것인가? 둘의 도 움으로도 남궁민의 위기를 해소할 자신이 없었던 강유는 묵직하게 들려 온 비사걸의 음성이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난데없이 나타나 실력을 보겠다고......" 대답을 하던 강유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싸움을 응시하는 비사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 세상에......!' 안휘성을 쩌렁쩌렁 울린다던 건천삼절을 단 일 수에 제압해 버린 태 상호법 비사걸. 천하를 오시하는 실력을 지닌 그를 저토록 놀라게 할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그것은 곧 백의의 미부가 자신의 생각 보다 훨씬 더 고강한 인물이라는 것이었으니. "놀랍구나. 여인의 몸으로 저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니!" 비사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강유와 풍 찬은 또다시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태상호법의 입에서 저 정도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그가 알기론 오직 을지호뿐이었다. "그, 그 정도로 고수입니까?" 비사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 어르신, 그렇다면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그러나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비사걸이 들고 있던 검 을 백의의 미부에게 던졌기 때문이다. 간단한 동작으로 보였지만 검왕 비사걸이 누구던가! 허공을 유영하는 검에는 가히 만 근의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또다시 벌어졌다. 엉 뚱한 방향에서 날아온 검이 비사걸이 날린 검을 쳐낸 것이었다. 꽝! 쇠로 만든 병장기가 부딪치면 의당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기 마련인 법이건만 허공에서 들려온 소리는 어처구니없게도 폭음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비사걸의 얼굴. 그의 얼굴이 자신의 검을 무력하게 만든 주인을 찾아 돌려졌다. 그리고 그는 세 명의 청년가 한 명의 장년 인을 앞세운 또 다른 미부를 볼 수 있었다. 위지황과 비무영의 안내를 받고 마침내 남궁세가의 족적을 찾아낸 환야와 을지휘소, 을지룡이었다. 한발 앞서 나선 남궁혜는 이미 남궁 민의 실력을 시험하고 있었다. "자, 자넨!" 몰골이 몰골이니만큼 비무영은 도저히 못 알아볼 상태였으나 강유는 그의 곁에 있던 사내가 위지황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봤다. 순간, 그의 뇌리에 그가 북천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스치고 지나갔다. "북천!" "오랜만입니다, 형님." 위지황이 번쩍 손을 들며 인사했다. 하지만 강유의 안색은 싸늘했다. "북천의 고수들인가?" 말뜻을 파악한 위지황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 만 그가 뭐라 하기도 전 사단은 이미 벌어졌다. "누구냐!" "멈춰랏!" 싸움을 정리하고 돌아오다가 남궁민의 위기를 목도한 해웅과 뇌전, 초번 등이 환야 일행을 보며 적으로 간주, 다짜고짜 공격을 한 것이었 다. 그들을 맞아 움직인 사람은 가장 나이 어린 을지룡이었다. "꼬마 놈이 어디서 나서느냐? 당장 꺼져라!" 뇌전이 버럭 소리를 쳤다. 순간, 을지룡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본 사 람은 오직 위지황과 비무영뿐이었다. "크크크, 잘한다, 잘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그리는 비무영, 그와는 반 대로 위지황은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쯧쯧, 일났군.' 정중히 길을 묻는 을지룡에게 '꼬마' 운운하던 비무영이 아무런 대항 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한 것이 바로 며칠 전. 앞으로 벌 어질 일은 애써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의 염려가 끝나기도 전 뇌전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어이쿠!" 정강이를 채이고 삼 장이나 내던져진 그는 자신이 언제 어떤 방법으 로 던져졌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의문을 해소 하기도 전에 초번이 그의 곁으로 나란히 굴러왔다. 다만 맷집이 남달 랐던 해웅만은 치열한 박투를 펼치며 선전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말이 좋아 선전이지 일방적인 구타나 다름없었다. "룡아, 그만 하여라." 을지룡이 너무 심하게 해웅 등을 몰아붙인다고 생각한 을지휘소가 을지룡을 말렸다. 부친의 말을 들은 을지룡은 손속을 멈추고 뒤로 물 러났지만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해웅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자네도 그만 진정하게." 을지휘소가 손을 뻗었다. 병장기로도 꿈쩍 않는 단단한 몸을 지닌 해웅은 코웃음을 쳤다. 그 러나 어느 순간 웃음은 사라졌다. 힘없이 다가온 손이 가볍게 가슴 어 귀를 스쳤을 뿐이건만 호흡이 멈추는 것 같고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 져나가는 것이,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뭔가가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으으으." 신음성을 내뱉는 그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사내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네." 빙긋이 웃으며 재차 손을 뻗어 해웅을 짓눌렀던 힘을 해소시킨 을지 휘소가 태상호법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검왕 어르신입니까?" "네가 검을 날린 것이냐?" "아닙니다." 비사걸이 생면부지인 사내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데 의심을 품기도 전 을지휘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몸을 비켜섰다. 환야가 스치듯 그를 지나쳐 걸어왔다. "거, 검왕 할아버지......" 그녀의 음성이 격동으로 떨렸다. 할아버지라니? 이 무슨 황당한 소리던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비사걸이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살폈다. '나를 알고 있단 말인가? 흠, 낯이 익은 얼굴이긴 한데.' 천천히 환야의 모습을 살피던 비사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할아버지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렇게 정정하시다 니......" 위지황으로부터 남궁세가를 지켜주고 있는 태상호법이 과거 자신을 친손녀 이상으로 사랑해 주던 검왕 비사걸이라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환야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서, 설마......" 비사걸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제야 오십여 년이란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여전히 중년의 모 습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어렴풋이나마 기억 속 인물의 흔 적을 찾아낸 것이었다. "서, 설마... 화, 환야더냐?" "예... 예! 할아버지." 격동을 참지 못한 환야가 비사걸의 품으로 뛰어들고, 그녀를 품에 안은 비사걸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흘 렸다. "허허, 허허허허!" "저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상라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랍 고 반가웠는지 모른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품에서 떨어진 환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허허, 오래 살긴 살았지.' "젊어지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걸요. 반로환동 이라도 하신 건가요?" "반로환동은 무슨. 어찌하다 보니 그리되었다." 비사걸은 멋쩍은 듯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사이 싸움을 정리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남궁혜가 다가와 인사 를 했다. "남궁혜가 어르신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남궁가의 여식이 놈을 따라갔다는 소식은 들었다. 바로 너였 구나." 남궁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제는 나이가 나이니만큼 덤덤하 게 받아들일 만도 하건만 과거의 일을 상기하면 여전히 부끄러운 모양 이었다. "을지가의 사람들이 무림에 출도했다는 것은 나도 들어 알고 있었 다. 소림사를 구했다지? 힘들었을 텐데 용케도 해냈구나." "뭐, 그럭저럭 해지웠지요. 소림사와 인연도 있고 해서." 환야는 그닥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 녀석은 어디 있느냐?" "호호호." 환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녀석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을지소문을 말함이었다. 천하제일인이자 나이만 해도 일흔을 훌쩍 넘은 궁귀 을지소문을 녀석 운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 것인가? 오직 눈앞의 비사걸뿐이었다. "칠칠히 못한 장손을 찾아갔지요. 지금쯤 아마 무당에 있을 거예요." "아, 호 말이로군. 녀석이 무당에 있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부상 을 당했다고 하더니 그게 염려돼서 간 모양이구나." 비사걸의 말에 환야를 비롯한 을지가의 모든 사람이 고소를 지었다. 을지소문이 구하기 위해 간 사람은 을지호가 아니라 장래 손주며느리 인 사마유선이었으니까. "인사드리겠습니다. 을지휘솝니다." "그래, 네가 휘소로구나. 허허, 그 갓난아이가 어느새 이리 컸단 말 인가?" 너털웃음과 함께 비사걸의 시선이 을지룡에게 향했다. "꼬마야, 네가 호의 동생이더냐?" "꼬마 아닙니다. 을지룡입니다." 을지룡이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비사걸의 얼굴에 황 당함이 떠오르자 환야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을지룡의 볼을 꼬집었다. "호호, 할아버지가 이해하세요. 저 아이는 꼬마라고 불리는 것을 제 일 싫어해요." "허, 고 녀석 참. 나이가 어찌 되느냐?" "열여덟입니다." 을지룡이 어깨를 펴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흠, 꼬마라는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로구나. 한데 얼굴이...." 뚱한 표정으로 바뀌는 을지룡의 안색을 살피며 비사걸은 '동안(童 顔)'이라는 뒷말을 차마하지 못했다. 과거 칼날 같았던 비사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어디 상상이나 되는 모습이던가. '세월은 속이지 못한다고 많이 부드러워지셨구나.' 환야는 한결 부드러워진 지금의 모습도 좋았지만 그 옛날의 서슬 퍼 렇던 비사걸의 모습을 떠올리자 약간은 슬퍼졌다. 오십여 년 만에 이루어진 환야와 검왕 비사걸의 만남은 그렇게 잔잔 히 미소와 애잔한 슬픔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급박하 게 돌아가는 무림의 사정은 그들의 만남을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 * * * 강서성 남창(南昌)에 위치한 중천의 강남 총타에서 수뇌 회의가 열 렸다. 최전선에서 패천궁과 치열한 접전을 지휘하고 있는 몇몇 인물을 제 외하고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는데, 그 수가 무려 칠십이었다. 물 론 그중에서 발언권이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지만 회 의에 참석하는 인원의 규모만으로도 중천이 여타 문파와는 비교도 되 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십 쌍의 눈길이 중앙 태사의에 앉은 악위군에게 향했다. 제갈세가에서의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생사기로를 넘나들기를 수십 일. 마침내 부상을 딛고 일어나 수뇌들을 소집했지만 여전히 붕대가 친친 감겨 있는 것이 꽤나 큰 후유증이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다시 보니 반갑소." 초췌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짧고도 힘있는 음성. 악위군의 한마디는 그의 부상을 염려했던 모든 이들의 걱정을 일시 에 해소시킬 수 있을 정도로 당당했다. 그의 숙부이자 태상장로의 지위에 있는 악호(岳虎)가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인사를 했다. "건강을 회복한 천주를 보니 무척 다행이오." "감사합니다, 숙부님. 모든 것이 숙부님과 여러분들이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한 악위군이 다소 굳어진 표정으 로 좌중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군사로부터 그간의 전황은 대강 들었소이다." "예. 제갈세가를 무너뜨린 본진이 남하하여 파죽지세로 놈들을 제압 하고 있습니다." 호법 성한이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간 점령한 분타가 열둘에 황천길로 보낸 숫자가 천을 헤아리고 있 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무이산(武夷山)에서 놈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 의 저항이 격렬하기는 하나 곧 뚫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이산만 뚫으면 패천궁까지는 금방입니다.' 호법 사마표(司馬豹)와 상양(尙鴦)이 앞 다투어 전황을 보고했다. 그들로선 전공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지만 가만히 듣고 있 는 악위군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악위군의 모 습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열심히 떠들어대던 사마표와 상앙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사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악위군의 입이 다시 열리기 만을 기다릴 뿐. "내가 며칠 동안이나 누워 있었지?" 근 반 각이 지나 입을 연 악위군이 신도에게 물었다. 제갈세가의 엄청난 폭발 속에서도 악위군의 보호로 치명상을 입은 그와는 달리 가벼운 부상만을 입고 살아난 신도가 조용히 대답했다. "정확히 이십 하고도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렇군." 태사의에 깊이 몸을 파묻은 그는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또다시 반 각이 지나서야 깨졌다. "몇 개의 분타를 부수고 어디까지 진격했다고?" "열두 개의 분타를 접수하고 무이산 인근까지 진격했습니다." "우리 측이 입은 피해는?" "전사가 육백칠십에 부상자가 삼백입니다." "꽤나... 많군." "그래도 놈들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입니다, 처 주. 더군다나 절반은...." 황급히 입을 열던 사마표는 악위군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황급히 말문을 닫았다. "무너뜨린 분타가 열둘, 목숨을 빼앗은 인원이 천여 명. 그것이 그리 도 자랑스럽소?" 악위군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냉랭했다. "그, 그것이....." '쯧쯧, 가만이나 계실 것이지.' 군사로서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고 이미 매섭게 질책을 당했던 신도 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따지고 보면 남하한 거리가 얼마나 되오? 고작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남하해 놓고 훌륭한 전과라 자화자찬하고 싶은 것이오?" "소, 송구합니다." "우리가 고작 이 정도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을 때 서천은 무당을 무 너뜨리고 호북을 제패했다고 들었소. 북천은 소림사를 또다시 차지했 다고 하고." 무당파가 무너진 소식이 저 무림에 퍼진 지도 벌써 보름이 훌쩍 지 났고, 주인이 떠난 무당산은 물론이고 호북성이 철혈마단의 수종에 완 전히 떨어졌다. 닷새 전엔 그들과 모종의 계약을 하고 전격적으로 철 수를 한 북천이 다시금 소림사에 무혈입성(無血入城)을 하였다는 충격 적인 소식도 전 무림에 퍼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얻은 것이라곤 고작 쓸모도 없는 분타 몇 개하고 지근거리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남하한 것이 전부였소. 이게 말이 된 다고 보시오?" 가히 추상같은 호통에 사마표 이하 모든 수뇌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보다 못한 악호가 입을 열었다. "아직 부상 중이오, 천주. 너무 흥분하면 몸에 좋지 않소. 그리고 천 주의 마음에 차지 않을지 몰라도 저들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오." "최선을 다한 것 치고는 성과가 너무 없습니다." "상대도 상대 나름 아니겠소. 패천궁은 거목(巨木)이라오. 그리 쉽 게 쓰러뜰리 수 있는 곳이 아니오. 또한 천주의 부상을 염려한 군사가 만일을 대비해 전력을 아껴둔 영향도 있소이다."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악위군이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산동악가로서의 이름을 벗어던진 중천은 여타 조직을 배제하고 순 수 전투만을 위한 무력 단체로, 독립적인 삼단(三團)과 육당(六堂) 이 하 십팔대(十八隊)를 운영하고 있었다. 삼단은 순수 악가의 무인들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등천(登天), 회천 (回天), 파천(破天)으로 불리었는데, 전투력만을 따지자면 중천에서도 단연 최강이었다. 육당은 노호(怒虎), 창응(蒼鷹), 승룡(乘龍), 거웅 (巨熊), 섬뇌(閃雷), 폭렬(爆裂)이란 이름을 지녔고 각 당에 세 개씩 의 예하 부대를 두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패천궁과 싸우는 이들은 소림 인근에 배치한 폭렬단을 제외하고 바로 오당과 그 예하 십오대였는데, 신도는 삼단을 움직이자 는 장로들과 호법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남창, 결국 악 위군의 안위를 지키게 하였다. "너무 과했습니다." 악위군이 다소 질책하는 시선으로 신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있었기에 조금 전처럼 노한 눈빛은 아니었다. "다소 과한 느낌이 들기는 하였으나 모든 것이 천주의 안위를 걱정 하여 내린 결정인지라 우리는 군사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소. 다만 그 영향으로 천주가 원한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이니 이해를 해주 시구려." "숙부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 까? 하나 제가 깨어난 이상 삼단이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야 엽가 있겠소." 악위군의 노기가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악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 며 맞장구쳤다. "사마 장로!" "예, 천주님." "등천단을 이끌고 머너 출발하시오." "알겠습니다." "상 장로!" 상앙이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예, 천주님!" "회천단을 이끌고 사마 장로를 도우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파천단은 내가 직접 이끌고 가도록 하겠소.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즉시 전장으로 떠나시오." 일사천리로 명을 내린 악위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내노라하는 중천의 수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다시 만날 곳은 패천궁이 될 것이오. 패천궁의 본 궁은 내 가 직접 공격하겠소. 자, 가시오. 가서 놈들이 막고 있는 전선을 단숨 에 뚫어버리시오!" "존명!" 회의가 끝난 시각은 늦은 밤이었다. 하나 새벽이 오기 전, 수십의 수 뇌들과 수백의 무인들이 조용히 남창을 벗어났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무이산을 비롯하여 패천궁과 중천이 치열한 격전을 펼치고 있는 전선 이었다. * * * 강서성 남단 감주. 남궁혜 일행과 헤어져 며칠 동안 감강의 물길을 헤치며 도착한 환 야 일행은 감주 포구의 객점에서 하루를 묵었다. "대규모 병력이라고?" 이른 아침, 그다지 입맛에 맞지도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은 탓인지 아니면 뜻하지 않게 들은 소식 때문인지 가히 안색이 좋지 않은 환야 가 물었다. "예, 천주가 직접 이끌고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합니다." "흠, 그렇다면 부상에서 회복한 모양이군." "그만한 인물이 쉽게 죽을 리는 없겠지요." "인물이라... 하긴 천하를 노릴 정도면 인물은 인물이겠지."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패천궁의 저력을 너무 무시하지 말거라. 놈들이 아무리 거세게 몰 아붙여도 쉽게 무너질 패천궁이 아니다."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들의 전력이 상당해 보여서..." "머릿수로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그건 그렇고 아범은 어찌할 생각이더냐? 처가의 상황도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후∼ 잘 모르겠습니다. 그쪽도 급하기는 하지만 패천궁의 일도 걱 정이고....." 중천의 주력이 대거 남동진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동안 남천의 동진을 막으며 선전했던 해남파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을 지휘소는 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처가인 해남파를 돕기 위 해 움직이자니 강적과 싸우게 될 패천궁, 아니, 엄밀히 말해서 환야의 안위가 걱정이었고, 그렇다고 환야를 돕자니 해남파에 닥친 위기가 마 음에 걸렸다. 특히 수많은 고수가 버티고 있는 패천궁에 비해 홀로 남 천과 싸워야 하는 해남파의 전력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지금까지 는 포위망을 잘 뚫으며 어찌어찌 정면 대결을 피하며 버텨내는 것 같 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발목이라도 잡히는 날에는 그야말로 끝장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을지휘소의 마음을 알고 잇던 환야는 결국 자신이 결정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해남파를 구하도록 하여라." "어머님!" "말했지 않느냐? 패천궁은 결코 약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껏 패천궁이 버틸 수 있었던 것엔 해남파의 도움이 결정적이었 다고 하더구나. 그들이 아니었다면 패천궁은 중천과 남천의 합공에 정 말 힘든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하나 아무리 용맹한 그들이라도 수적 인 열세는 어쩔 수 없었을 것. 이곳까지 소식이 날아든 것을 보면 정 말 위험한 상황에 빠진 모양이다. 아범 말대로 패천궁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으나 해남파의 안위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 더구나 그 어떤 이유에 앞서 해남파는 아범의 처가요, 호와 이 녀석의 외가가 아니더 냐? 가거라, 가서 도움을 주거라." 환야는 걱정스레 쳐다보는 을지룡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되 한 번 결정하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 환 야의 성격을 알고 있던 을지휘소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을지휘소가 환야와 을지룡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라도 데리고 가야 심심치 않지." 환야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을지휘소의 능력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너무 강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던 환야는 홀로 남천을 상대해야 하는 을지휘소보다 그녀 자신이 을 지룡을 데리고 움직이는 것이 훨씬 안전하리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을지휘소도 그것을 알기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할머님을 잘 모셔야 한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금방 파악한 을지룡이 당당히 어깨를 펴며 말했다. "그래, 부탁하마." 가만히 다가간 을지휘소가 을지룡을 안았다. '녀석, 많이 컸구나.' 어리게만 여겼던 아들의 덩치가 자신만큼 큰 것을 새삼 확인한 을지 휘소는 뭔가 알 수 없는 뿌듯한 마음을 느끼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들 겨 주었다. "한시라도 지체할 수가 없을 터. 그만 가거라. 육로보다는 뱃길로 계 속 남하하는 것이 빠를 것이야." "예, 어머님.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벌떡 일어난 을지휘소가 큰절로 예를 차렸다. "나와 룡이는 염려 말고 아비나 몸조심하여라. 사돈 총각도 조심하 도록 하고." 담담히 을지휘소의 인사를 받은 환야가 지난밤부터 잠을 설치며 불 안해하는 강유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예, 어르신. 가, 감사합니다." 을지휘소와 함께 큰절로 인사를 하던 강유는 조심하라는 그녀의 말 이 감사한 것인지, 아니면 을지휘소를 해남파로 보내주는 것이 감사한 것인지 그 스스로도 정확히 무엇이 감사한 것인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재차 머리를 조아렸다. "어서 가거라. 촌각의 시간 대문에 천추의 한을 남길 수도 있음이 야." 환야가 거듭 재촉했다. 애잔한 눈빛으로 환야와 을지룡을 응시하던 을지휘소가 묵묵히 고 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고, 강유가 황급히 그의 뒤를 좇았다. 방문에서 잠시 멈칫하던 을지휘소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환야와 을지룡을 쳐다본 후 곧 방을 나섰다. 환야는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조심하여라.'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전신을 엄습했다. * * * 남천의 주력이 주둔하고 있는 화화장. "아이고!" 매일같이 호통과 비명성이 터져 나오는 봉황각에서 또다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뭐가 어째? 기다려?" 죽는시늉을 하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율평을 노려보며 기요후는 노 기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도대체 그 기다리라는 소리를 언제 까지 할 참이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 뭐가 죄송한지 알고나 지껄이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시끄럽다! 허구한 날 그놈의 죄송 소리! 이제는 아주 지긋지긋하 다. 다시는 죄송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마라! 경고하건대 또다시 죄송 이라는 소리를 입에 올리면 아예 주둥이를 찢어놓고 말겠다!" "죄... 헙!" 늘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죄송이라는 말을 내뱉으려던 율평은 싸늘 하다 못해 얼음장같이 변하는 기요후의 눈길을 접하곤 필사적으로 입 을 틀어막았다. "변변치 못한 놈 같으니!" 일갈을 내뱉은 기요후가 술잔을 들었다. 얼음장 같던 눈길이 거둬지자 율평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다면 꼭 하고 마는 기요후의 성격상 입을 틀어막는 것이 조금만 늦었으면 틀림없이 입이 찢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 이 돋았다. "지금 어디에 있다고 했지?" "매강(梅江) 어귀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매강? 매강이라면 남곤산에서 이백 리 이상 떨어진 곳 아니냐?" "삼백 리가 조금 넘습......" 정확한 거리를 말하려던 율평은 지그시 노려보는 기요후의 시선에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남곤산에서 잡는다고 했던 놈들이 그만큼이나 도망을 갈 때 까지 뭘 했다고 하더냐? 이러다가 아예 놓치는 것 아냐?" "그, 그렇지 않습니다. 희염이 전해온 바로는 놈들의 도주로를 끊고 확실히 추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희염, 멍청한 놈! 그만큼이나 지원을 해줬는데도 아직까지 끝장을 내지 못하고 빌빌거리고 있으니." "그래도 벌써 오십도 훨씬 넘는 목숨을 취했다고 합니다." "뭐, 오십? 에라이!" 기요후는 들고 있던 술잔을 냅다 던졌다. 정확히 이마를 향해 날아오는 것도 알고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실력 도 되었지만 율평은 그저 질끈 눈을 감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라 리 한 대 맞고 말지 괜히 피했다가 경을 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쨍! 머리카락을 스치며 간발의 차이로 비껴간 술잔이 벽에 부딪치며 산 산조각이 났다. "흥, 곰 같은 놈이 제법 머리를 쓰는구나." 마지막 순간에 술잔의 방향을 바꾼 기요후가 술병을 입에 대며 조소 를 흘렸다. "아무튼 지금 당장 희염에게 전갈을 보내라." "하, 하명하십시오." "닷새, 아니, 사흘 내로 놈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소금에 절이지 않 는다면 소금 통에 제 놈 목을 담아 보내라고 해. 낭광과 봉후도 예외 는 없을 것이라고 전해라. 명색이 사천왕이라는 놈들이 대체 뭣들 하 는 거야?" "그, 그리 전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보내. 참, 그건 그렇고 준비는 어찌 되고 있어?" "무슨.... 아!" 거두절미한 그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율평이 재빨리 대답 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냈습니다. 천주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123페이지가 없네요> 러다가 뒤통수를 맞는 수가 있다." "하오시면...." "모르긴 몰라도 무이산의 방어선은 곧 뚫린다. 그리고 패천궁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겠지. 우리가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때다." "중천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지 않으면? 지금도 나름대로 생색은 내고 있잖아. 몇 놈 이나 살아남았지?" "백이 조금 넘습니다." "거봐. 삼백 동원해서 백 명 남았으면 피해도 많이 봤네. 뭐, 아쉬 울 것 없는 놈들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우리에겐 해남파라는 아주 좋 은 핑곗거리가 있지." "그, 그렇군요." 그제야 기요후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한 율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일단은 해남파 놈들부터 작살내야 돼. 내가 조금 전 말한 대로 전갈을 띄워라. 사흘! 사흘이라는 말을 절대로 빼먹지 말고." "존명!" 명을 받고 물러나는 율평.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술병을 든 기요후는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단숨에 병을 비웠다. * * * "어, 어르신!" 기별도 없이 방으로 뛰어든 희염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봉후와 술잔을 기울이던 낭왕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 이것이..." 희염이 낭왕에게 전한 것은 기요후의 명을 받고 율평이 대지급으로 보내온 서찰이었다. 서찰을 받아 든 낭왕은 본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걱 정하며 황급히 읽어 내려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 종내엔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것은 곁눈질로 함께 서찰을 읽은 봉후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르신!" 당황한 희염이 어쩔 줄을 모르자 낭왕이 그에게 술잔을 건넸다. "걱정하지 말고 술이나 받아라." 얼떨결에 술잔을 받아 들기는 하였으나 술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서, 서찰의 내용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사흘 내에 해남파 놈들의 목을 소금에 절이지 않으면 저와 어르신들이 목을..." 뒤의 말을 담기도 두려웠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희염의 안색은 펴질 줄을 몰랐다. 하지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비우는 낭왕과 봉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르신!" 결국 참지 못한 희염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자신이 감히 누구에게 소리를 질렀는지 의식하며 재빨리 고개를 숙일 때 너털웃음을 지은 낭 왕이 입을 열었다. "쯧쯧, 뭘 그리 걱정하느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목이 떨어질 것이었으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호호호, 아무렴요. 본녀의 목숨은 적어도 네다섯 번은 떨어졌을걸 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희염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사내놈의 간담이 이리도 작아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알았다. 그렇잖아도 이제는 그만 끝낼 생각이었느니라." "사, 사흘뿐입니다. 가, 가능하시겠습니까?" 바짝 고개를 쳐든 희염이 물었다. "명색이 취밀단의 단주라는 놈이 이렇게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해서 야... 너는 지금껏 남곤산에 갇혔던 해남파가 실력이 좋아서, 아니면 지지리도 운이 좋아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하, 하오면?" "놈들이 이곳까지 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놈들의 실력도, 운도 아니 다. 그저 한낱 우리들의 유희(遊戱)였을 뿐." "유, 유희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지금껏 우리가 놈들에게 당한 것이 얼마더냐? 금방 끝을 낼 수야 없지." 봉후가 덧붙였다. "호호호. 낭왕 선배와 본녀는 놈들에게 죽음의 공포와 절망감을 조 금씩 심어주고자 일부러 사정을 봐준 것이다. 슬슬 지겨워지기도 했지 만 나름대로 재밌었지."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친 희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을 접어두고 온 김에 술이나 한잔하여라. 참, 취밀단 녀석들에게 놈들의 족적을 놓치지나 말라고 이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단숨에 술을 들이키는 희염의 모습은 처음 방에 들어올 때와 천양지 차로 변해 있었다. * * * 매강 어귀 망산(罔山). 바로 그곳에 오랜 쫓김과 부상에 시달리는 해남파의 무인들이 은거 하고 있었다. "초구는 어찌 되었느냐?"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던 강운교가 조심스레 다가온 강명에 게 물었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순간, 강운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랬더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초구가 수천 리 떨어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곧 그의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후∼" 그의 입에서 처연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천의 집요한 추격을 뚫고 매강의 서쪽 면에 우뚝 솟아 있는 망산까지 도주할 수 있었지만 계속 해서 쓰러져 가는 제자들로 인해 그의 가슴은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다." 강운교는 아들에게 애써 웃음을 보이며 안심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결코 괜찮은 것이 아니었으니,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 해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심각한 내상 때문인지 얼굴으 흙색이었 다. 팔뚝부터 잘려 나간 오른팔의 상처 부위에선 피고름이 끊이지 않았 는데, 상처 부위가 점점 위로 올라오는 것이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 았다. 더구나 그간의 전투로 인해 하루에도 수명씩 목숨을 잃어가는 제 자들과 언제, 어디서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 폐해진 정신은 그로 하여금 지금껏 남천의 동진을 막으며 막대한 피해 를 준 해남파의 장문인이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놈들의 추격은 어떠하냐?" "더 이상이 추격은 없는 것으로 보아 따돌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말은 그리해도 그의 안색은 그다지 안심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상자들이 많아서......" 강명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나... 남았지?" "백 명이 조금 안 됩니다." "음." 지그시 눈을 감는 강운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단 며칠 사이에 그 많은 인원이......' 광동성에 상륙한 해남파의 무인들의 수는 대략 삼백 명이 넘었다. 오랜 싸움으로 인해 점점 피해가 쌓이기는 했으나 적절히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한 해남파는 남천에 비해 피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의 인원을 잃어가며 선전했다. 문제는 남곤산에서부터였다. 남곤산에 머 물 때만 해도 이백이 넘던 숫자가 포위 공격을 당하고 탈출하는 과정 에서 근 백여 명으로 줄고 만 것이다. "네 막내 사숙은 어찌 되었느냐?" 강운교가 그와 함께 싸우다 부상을 당한 외전 전주 장염의 안위에 대 해 물었다. 멈칫거린 강명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죽은... 모양이구나." "예. 둘째 사숙께서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순식간에 파고든 독기 가 내장을 상하게 하여...." 강명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강운교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흘러내 렸다. "독이라... 그랬구나. 결국 나 때문에......" 제자들이 낭왕이 부리는 늑대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는 동안 그는 만 독문이 자랑하는 독혈인과 목숨을 걸고 싸웠다. 천하제일은 아니었으나 해남파의 무공이 약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성취가 낮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자아가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없 앤 만독문의 독혈인은 가공, 그 자체였다. 금강불괴를 능가하는 단단 한 몸뚱이는 둘째치고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는 도저히 인 간의 몸으로 감당치 어려운 것이었다. 단지 스쳤다는 이유만으로 스스 로 잘라 버린 그의 팔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장염이 당한 부상도 바로 독혈인과의 싸움에서 위기를 맞은 강운교 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당한 것이었다. 다만 목숨을 부지한 강 운교에 비해 가슴을 강타당한 장염은 어찌 손써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은 것이 차이라면 차이. "하루라도 빨리 패천궁으로 가야 한다. 해남파로 돌아갈 수 없는 지 금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패천궁의 상황도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나?" "무이산에 최후의 방어선을 치고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고 합니다만 언제 뚫릴지 모른다고 합니다." "패천궁은 저력이 있는 곳이다. 본궁이 무사하면 괜찮아. 문제는 우 리가 놈들의 추격을 뚫고 본궁까지 갈 수 있느냐인데..." "부상자들이 많아서 걱정되기는 하나 놈들의 추격은 충분히 따돌렸 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길, 무사히 갈 수 있습니다." "후∼ 그리만 된다면 다행이지만....."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강운교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잠시 몸을 떨 었다. 그의 불안감이 전해진 것일가? 강명의 얼굴 또한 더없이 굳어졌는 데.... 그런 그들의 머리 위 천장에 조그만 벌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제67장 무이산(武夷山) 패천궁 본궁의 의사청. 태상궁주 안당을 위시하여 원로원의 고수들, 전장에 나가지 않은 장 로, 호법 등 패천궁의 수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 다. "전황이 어떠하냐?" 중앙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안당이 온설화에게 물었다. "힘듭니다.' 온설화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렇듯 단정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안당의 안색이 다소 굳어졌다. "힘들다? 하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냐?" "어차피 승부는 본궁에서 겨룰 수밖에 없습니다. 무이산에선 그저 최대한으로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낙장로에게서 연락은 왔느냐?" 냉악이 물었다. "수삼일 내에 철수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음." 이곳저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무이산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암왕 낙운기가 누구던가! 불패의 승부사! 후퇴를 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리고도 남을 사람이 었다. 그런 그가 후퇴를 한다고 전해온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전황 이 얼마나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흑기당, 적기당에 이어 혈참마대까지 투입했는데도 안 되는 것인 가?" "애당초 수적으로 차이가 너무 큽니다. 지금껏 버틴 것도 기적이지 요." "낙 장로가 후퇴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래, 이후의 대책 은 어떤 것이 있느냐?" 안당의 물음에 온설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패천궁 주변의 지형을 자세히 묘사해 놓은 지도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무이산에서 이곳까지는 정확하게 사흘 길입니다. 하나 힘들게 무이 산을 차지한 저들이 금방 쳐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전열을 정비하겠지." 누군가 말했다. 온설화가 끄덕였다. "저들의 공격이 시작되는 시점은 나흘에서 닷새 후, 그리고 공격은 바로 이곳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온설화가 가리킨 곳은 패천궁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옥산(玉山)이 었다. "그리고 이곳과 이곳에서도 동시에 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또한.." 이미 모든 계획을 수립했는지 지도의 이곳저곳을 지적하며 설명하는 온설화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무공은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고작 이십 전후에 불과한 그녀에 비해 회의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은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을 무림에 적을 두 고 연륜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하나 아무도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지 못 했다. 의문점에 질문을 하고 더러는 몇몇 의견을 제시하기는 하였지만 그녀가 세운 계획의 틀에서 벗어난 것은 없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 고수들의 싸움입니다. 단 한 번 의 싸움이 전세를 뒤집을 수도 있는 터,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특히 중천의 천주는 제갈세가의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은 무서운 고수입니 다." "그자는 내가 상대하마." 안당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냉악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태상궁주께서 친히 싸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상대하도록 하지 요." "내가 놈에게 질 것이라 생각하는가?"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다만 강한 상대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대답이 궁색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한 말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 까? 더 이상 추궁해 봐야 서로 어색하기만 할 뿐인지라 안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원한다면 내가 양보하지.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감사합니다." "냉 원로님께서 중천의 천주를 상대하신다면 남천의 천주는 제가 상 대하겠습니다." 중천은 물론이고 남천의 공격도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도왕 동 방성이 가슴을 펴며 나섰다. "어허, 그자는 이미 내가 점찍어놓았네. 자네는 다른 자를 찾아보게 나." 응사웅이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거야 원. 천주 말고 딱히 상대가 있겠습니까?" "왜 없나? 듣자니 사천황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있다고 하던데." "다 허울 좋은 이름 아니겠습니까?" 동방성은 자신만만했다. 그러한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안당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얘기를 들은 자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아무 튼 좋아, 그런 자신감은 좋은 것이지." 바로 그때였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면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리 좋으신가요?" "오, 령이로구나. 어서 오너라." 음성의 주인공이 임여령이란 것을 확인한 안당이 반색하며 손짓을 했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나 봐요?" "즐거운 이? 뭐, 즐거운 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피, 그런 일이 어딨어요? 즐거우면 즐거운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 이지." 혓바닥을 낼름 내미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안당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그런 것까지는 알 필요 없다. 그래, 녀석의 상태는 좀 어떠하 냐?" "아저씨요?" 패천궁의 궁주를 동네 아저씨 부르듯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시 큰둥하게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에 안당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이들 의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그래, 상세는 조금 나아졌느냐?" "흥, 의원이 실력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나아지지요." "아직도 그 상태더냐?" "예." 임여령이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안당의 얼굴이 굳어졌다. 중천이 잠입시킨 간자에 의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안휘명은 생사 의 갈림길에서 유불살 송찬의 등에 업혀온 임여령의 치료를 받고 기적 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생사괴의 임종대의 후손답게 임여령의 솜씨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생혈(生穴)과 사혈(死穴), 상리(常理)를 뒤엎는 기괴한 침술엔 지켜보 는 모든 이들을 바짝 긴장시키는 힘이 있었고, 개똥만큼이나 쓸모없는 잡풀과 독초(毒草)로 탕재를 만들 때엔 그녀가 오기가지 안휘명을 구명 하던 의원들의 필사적인 반대를 불렀다. 그러나 말도 되지 않을 침술 과 탕약의 절묘한 조합으로 그녀가 치료를 시작한 지 이틀, 안휘명의 의식이 돌아오고 사흘 만에 입을 뗄 정도로 호전이 되자 그 누구도 임 여령의 솜씨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임여령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악화가 되는 것을 막기는 하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안휘명의 상세는 그 이후론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부친이 중천의 간자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안휘명을 배반해야 했 던, 그를 사랑했지만 독을 풀어 부친을 도왔던, 안휘명의 의식이 돌아 온 것을 확인한 이후 결국엔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라는 말을 남기고 웃으며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버린 여인. 그녀의 죽음을 안 뒤부터 안 휘명은 삶에 대한 의욕을 버렸다. 병마와 싸워야 할 환자가 스스로 삶 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 아이가 죽는 것을 막았어야 했는데.' 안당은 그녀를 가두라고만 하고 이후 신경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했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지금은 그저 안휘명이 하루라도 빨리 기운을 차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네가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계속 애를 써주거라." "알았어요." 안당의 슬픔이 몸으로 전해졌는지 임여령도 공손히 대답했다. "태상궁주님." 안당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고 잠시 주의를 환기한 온설화가 입을 열었다. "패천수호대를 동원했으면 합니다." "패천수호대를?"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되묻는 안당의 음성에 의문이 깃들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전 정도맹과의 싸움으로 다소 약해지기는 했 어도 패천수호대는 그야말로 패천궁 최고의 전력, 결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도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온설화가 패천수호대 를 거론한 것이었으니.... "맞서 싸우는 것보다 퇴각하는 것이 더 힘든 법입니다. 지원을 했으 면 합니다." "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지금은 최소한의 전력이라도 보호해야 합니다." 냉악이 거들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혹여 패천수호대가 피해라도 입는다면...?" 송백검 백준이 다소 염려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충분히 걱정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칫 무질서하게 퇴각하다간 예상치 못한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들의 퇴각을 도와야 합니다." "군사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전에 없이 강경한 온설화의 주장에 백준은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네가 수고를 해줘야겠구나." 안당이 화천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화천명이 조용히 대답했다. 차기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그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변모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해남파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남천에게 제대로 쫓기고 있다고 하던데,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비혈대의 대주 사중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해남파......" 해남파가 입에 오르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해남파가 남천의 추격으로 위기에 빠진 것은 속속 올라오는 보고로 인해 다들 알고 있었다. 그들이 패천궁을 위해, 물론 패천궁을 위한 것 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도 인식하 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껏 버티는 것도 그들이 남천의 발목을 잡고 놓 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들은 남 천과 생사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방치하면 전멸을 당할지도 모릅 니다." 해남파에 비혈대의 대원을 파견한 사중명은 현재 절체절명의 위기 에 빠진 해남파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을 도울 여력이 없다는 것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중천 과의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둔 지금 병력을 빼기란 무리야. 시간적 여 유라도 있다면 모를까 힘들다고 보네." 동방성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비록 우리와 길은 같지 않더라도 지금껏 도움을 받은 처지인데 어 찌 외면하고 싶겠나.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군사는 어찌 생각하나?" 안당이 물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에 잠긴 온설화가 반짝거리는 눈동 자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현 상황에서 전력을 빼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겠지요. 그래도 도와줘야 합니다. 그것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를 도와준 그들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렇다고 대규모로 병력을 지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 고 보면......" 가녀린 몸에 어울리지 않게 힘있는 어조에 모두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혈영대를 파견했으면 합니다." "음." "혈영대!" 인원은 얼마 되지 않지만 하나같이 살수의 수업을 쌓아 무시 못할 실력을 지닌 혈영대, 빠르게 기동하여 해남파를 도울 수 있어야 하는 지금 그들만큼 적절한 대안이 있을까? "멋진 생각이야!" 한가풍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저마다의 반응 이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것으로 사실상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냉혈." 안당이 말석(末席)에 앉아 지금껏 단 한 마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한 사내를 불렀다. "예." "가거라." "존명." 큰 목소리의 거창한 대답 따위는 없었다. 냉혈은 조용히 한마디 대 답을 남기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그를 따라 정확히 사십사 명의 혈영대원이 패천궁을 빠져나갔다. * * * "자네들이 와주었군. 고생했네." 그간의 고충이 대단했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낙운기는 설마 하니 패천수호대가 올 줄을 몰랐다는 듯 무척이나 고마워하는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저희들이야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그간 애쓰셨습니다.' "애는 무슨. 결국 지켜내지 못했으니 자네들을 볼 면목이 없네." "이만한 병력으로 지금껏 버텨낸 것만 해도 기적이지요. 어르신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몇 배가 넘는 적을 맞이하여 패천궁의 무인들은 누구나가 인정할 정 도로 훌륭히 싸웠지만 낙운기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가능이라... 훗, 그랬나?" 낙운기의 입가에 슨웃음이 지어졌다. "아무튼 이제는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퇴각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전력을 최대한 보전해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아직 최후의 일전이 남아 있으니." "저희가 할 일을 하명해 주십시오." 궁주의 칙명으로 도우러 오기는 했지만 화천명은 스스로의 할 일을 결정하거나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지 낙운 기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흘렀다. "이리 오게나." 회의실로 화천명을 부른 그는 전황도(戰況圖)를 보여주며 얼굴을 굳 혔다. "무이산 자락의 방어선은 크게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네. 왕공진 장로 가 책임지고 있는 북쪽의 포성(浦城), 뇌 호법이 책임지고 있는 남쪽 의 황강봉(黃崗峯), 그리고 나와 자네가 서 있는 이곳 무이산 본류." "북쪽입니까, 남쪽입니까?" 화천명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낙운기가 버티고 있는 곳은 애당 초 논외라는 듯. "아무래도 북쪽이겠지. 적의 공격이 이쪽만큼이나 거세다고 들었네.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모양이야. 자네들의 힘이 필요할 걸세." "남쪽은 어떻습니까?" "뇌 호법이 전하기론 한결 여유가 있다고 하네. 거리도 거리고 이곳 이나 포성만큼 중요한 곳은 아니라 그런지 적도 그다지 신경 쓰고 있 지는 않은 것 같네. 그래도 일다는 신중하게 퇴각하라 말해 두었네." "알겠습니다. 그럼 어르신 말씀대로 저희는 왕 장로님을 도우러 가 겠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을 터인데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는 것이 어 떤가?" "아닙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을 수는 없습니 다. 휴식은 그곳에 도착해서 취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허허, 자네가 그리 말하는데 내 어찌 말릴 수 있겠는가? 알았네. 그 럼 고생하게나." 화천명이 차기 궁주 자리에 낙점되었다는 것은 이미 만방에 알려진 사실. 낙운기는 믿음직한 그의 모습에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오늘의 위기만 넘기면 패천궁은 또다시 도약할 수 있겠어.' 낙운기가 흐뭇해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화천명이 허리를 꺾었다. "그럼 궁에서 뵙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알았네. 자네들도 고생하게나." "예. 어르신." 재차 예를 차린 화천명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에게 곧바로 명 을 내렸다. 패천수호대는 낙운기 등의 배웅을 받으며 왕공진이 버티고 있는 포성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공격힙니까?" 창응당의 당주 황주(黃宙)가 주먹을 불끈 쥐며 물었다. 창응당을 이끌고 황강봉을 공략한 지가 벌써 수일, 삼분지 일도 되 지 않는 병력을 어찌 하지 못해 시간만 끈 것이 못내 분했던 그에게 상앙과 회천단의 등장은 그야말로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없지 않느냐? 당장 총공격 을 감행하여라."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주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그의 뒷모습 을 보는 상앙의 눈매도 서늘해졌다. '놈들은 우리의 전력이 모두 무이산 본류로 집중된 것으로 알고 있 을 터. 아예 끝장을 내주마!' "호, 호법님!" 비부 뇌학동의 거처로 달려오는 용설호(龍雪虎)의 음성은 무척이나 다급했다. "무슨 일이냐?" 지도를 보며 주변 지세(地勢)를 꼼꼼히 살피던 뇌학동이 언짢은 표 정으로 물었다. "저, 적이...."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용설호는 숨이 턱까지 차 올라 제대로 말 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심하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던 뇌학동은 헐 떡이던 그의 숨이 잦아들 쯤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리 당황하는 것이냐?" "적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뇌학동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쯧쯧, 그럼 놈들이 언제는 가만히 있었느냐? 적당히 상대해 주면 될 것을." 황강봉이 어떤 곳인던가? 비록 무이산 본류나 그 윗자락에 위치한 포성에 비해 적의 공세가 덜하기는 해도 단 하루도 싸움이 멈추지 않 은 곳이었다. 싸움으로 시작해 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하루 일과. 적이 공격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니 용설호의 반응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둘이 아닙니다. 대, 대규모입니다!" "대규모?" 용설화의 표정에서 평소엔 볼 수 없는 다급함을 읽은 것일까? 그제 야 얼굴을 굳히는 뇌학동이 황급히 물었다. "대규모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개 떼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대충 몇 명으로 보이느냐?" "모르겠습니다. 파악이 안 됩니다. 너무 많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몰려오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뇌학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 다. "으아악!" 부술 듯 문을 차고 나간 그의 귀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성이 들려왔 다. 순간, 그대로 몸을 멈춘 뇌학동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보통 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황강봉 중턱에 있는 황강평(黃崗坪)과 그 위쪽에 위치한 협곡(峽谷)이었다. 본진과 제법 거리가 있는 그곳에 선 아무리 큰 싸움이 벌어져도 비명성이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따 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데 함성 소리며 비명, 탁한 금속성이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결론은 하나였다. "어느새 이곳까지 밀렸단 말인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신 뒷걸음질치는 패천궁의 무인들과 그들을 노도처럼 뒤쫓는 일단의 무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 이는 인원이 백을 훌쩍 넘었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도끼를 움켜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모두 나를 따르라!" 명령과 함께 그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네다섯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전장에 도착한 그가 도끼를 던졌다. 붕붕붕붕붕. 요란한 파공성과 함께 손을 떠난 도끼, 그다지 크지도 않고 날카로 울 것 같지도 않은 두 개의 도끼가 추격자들을 향해 날아갔다. "피, 피햇!" 패천궁의 무인들에게 막 손을 쓰려던 사내들이 황급히 방향을 틀어 자신들을 위협하는 도끼를 막아갔다. 하나 비부라는 명성이 단순히 얻 어진 것은 아니었다. 적의 무기를 단숨에 날려 버린 도끼는 마치 생명 이라도 있는 듯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사내들의 목을 쓸어갔다. "크악!" "커흑!" 이곳저곳에서 비명성이 터지고, 좌우로 교차하며 크게 선회를 한 도 끼가 뇌학동의 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정확히 일곱 구의 시체를 남 긴 후였다. "물러서지 마라! 정신들 차리고 적을 맞아!" 온 산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친 그가 정면으로 나서고 그의 뒤를 이어 본진에서 쏟아져 나온 많은 무인들이 따르지 정신없이 후퇴 만 하던 이들도 크게 사기가 올라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 정도에 기가 꺾일 중천의 무인들이 아니었다. 창응당의 병 력만으로도 상대의 전력을 뛰어넘고 있는데, 중천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회천단까지 지원을 온 상태였다. 더구나 후미에서 싸움을 지켜 보던 상앙과 회천단의 주요 고수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그들 의 기세는 패천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저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상앙의 곁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전장 한복판에서 무위를 뽐내고 있 는 비부 뇌학동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능하겠는가? 비부 뇌학동... 패천궁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실력자 야." "상관없습니다." 중년 사내는 자신만만했다. "허허, 하긴 회천단의 단주가 몸소 나설 정도라면 저 정도 상대는 되 어야겠지. 알겠네. 자네 마음대로 해보게." "감사합니다." 허락할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목례를 한 사내가 긴 창을 어깨에 둘 러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광뢰(狂雷) 악영(岳煐). 창으로선 그 상대가 없다고 하던데 과연 그 런지 어디 실력이나 한번 볼까?'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 악영이 뇌학동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가 막 두 번째 도끼를 회수한 직후였다. 또다시 많은 이들의 피를 묻혔음에 도 도끼의 날엔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어 있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악영." 뇌학동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 는 실로 예사롭지가 않았다. "악...영?"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일 것이오. 회천단을 이끌고 있소." '회천단? 이번에 새로 움직였다는 그들인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뚜렷이 기억되지 않는 것을 보면 분 명 익숙하지 않은 이름임은 틀림없었지만 최근 중천의 주력이 대대적 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터, 그들 중 일부인 듯했다. "나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느냐?" "그렇소." 악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학동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살짝 나타 났다. "호기심이 강한 자는 명줄이 짧은 법이다." "호기심인지 자신감인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오." 담담히 대꾸하는 악영의 태도나 음성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고수로군. 그것도 상당한 실력의.' 대답하는 그 모습에서 뇌학동은 상대의 실력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그에게 잡혀 있는 동안 전황이 어찌 돌아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 싸움을 지휘하고 있는 적의 최고 수뇌가 악영이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타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뇌학동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연배가 높다는 이 유로 체면 같은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속전속결(速戰速決)!' 무리일 수도 있었으나 최상의 선택이었다. 악영은 무섭게 쇄도하는 뇌학동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 지만 그것은 보는 이들의 착각이었다. 슈슈슉! 뇌학동의 움직임보다 배는 빠르게 그를 향해 날아가는 물체가 있었 다. "헛!" 뇌학동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터져 나오고 허공을 가르던 그의 몸이 방향을 틀며 회전했다. 순간, 그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물체는 아무렇게나 들고 있던 악영의 장창이었다. 뇌학동을 놓친 창은 곧바로 회수가 되고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날아 들었다. '제길!' 단순히 몸을 틀어 피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뇌학동이 도끼를 교차 하며 몸을 보호했다. 땅!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악영이 찌른 창이 뇌학동의 몸에서 불과 몇 치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졌다. 교차된 도끼에 잡힌 것이었다. 그 러나 그것도 잠시, 창간(槍杆)을 빙글 돌려 잡힌 창을 빼낸 악영의 공 격이 재차 이어졌다. 미간을 노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악골(下顎骨:턱뼈)을 노리고, 뇌학 동이 그것에 대응하자 악영의 창은 현기혈(玄機穴:흉골 아래쪽)을 집요 하게 공격했다. '허! 뭐가 이리 빨라.'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짓쳐 들어오는 공격은 뇌학동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수십 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싸 움을 거쳐 왔지만 지금처럼 무방비로 당해보기도 처음이었다. 한번 시작된 악영의 공세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되 었다. 기세를 잡은 그는 현기혈과 기문혈(期門穴)을 연거푸 노리며 뇌학동 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전후좌우 기쾌 하게 밟아가는 발놀림은 경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다. 특히 그런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곳곳의 요혈에 찔러 넣는 창이 속도 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랬기에 경천동지할 정도의 내 공을 지닌 것도 아니었고, 눈이 부셔 입을 쩍 벌릴 정도로 화려한 초식 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뇌학동이 반격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 는 것이었다. 삼각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싸움은 나름대로 팽팽했다. 악영의 그토록 거센 공격에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당했으면서도 뇌학 동은 잘 버텨냈다. "놀랍구나! 진정 대단들 하다." 멀리서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상앙의 입에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천주의 친인척이라는 이유 때문에 회천단의 단주가 되었다는 소문 이 있더니만, 이거야 원." 상앙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비부 뇌학동의 명성이야 익히 들 어 알고 있던 것. 하지만 악영이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지닌 줄은 꿈에 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 아쉽구나. 결국 이런 식으로 마무리가 되어야 하다니." 상앙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록 적이지만 그는 뇌학 동의 무위를 존경했다. 승패를 떠나 악영과의 싸움을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러나 이제 그 싸움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진정한 실력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실수 때문에. "하아, 하아." 어깨가 들썩이며 뇌학동의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도끼를 놓 친 왼쪽 손은 우측 옆구리를 잡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진한 피가 배어 나오는 옆구리는 흉측하게 패어 늑골(肋骨:갈비뼈)이 보이고 있 었다. '끝인가?' 옆구리에서 올라와 전시을 울리는 고통에 절로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놈의 시체 때문에....' 애써 자위를 해보지만 그것 또한 실력이었다. 자신이 발을 잘못 디뎌 시신을 밟은 것과 마찬가지로 공격을 하던 악영 역시 시신으로 인해 중심이 흐트러진 적이 있었으니까. 차이라면 상대는 기회를 잡았을 때 정확한 공격을 해왔지만 자신은 헛되이 날렸 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냥 물러서기엔 자존심이 용납하 지 않았다. 자존심을 살려줄 만한 충분한 무공도 지니고 있었다. 애써 호흡을 가다듬은 뇌학동이 떨어뜨린 도끼를 잡았다. 손을 뗀 상처 부위에서 맹렬히 피가 솟구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음." 짧은 신음성과 함께 악영이 창을 고쳐 잡았다. 뇌학동의 얼굴에서 죽음을 각오한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시전할 무 고에 어떤 위력이 있을지는 애써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앗!" 탁한 기합성과 함께 허공으로 치솟은 뇌학동의 몸. 어느 정점에 이르러 멈춘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도끼를 날렸다. 이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맹렬한 회전과 힘을 담은 도끼가 춤 을 추며 비행을 했다. 절로 침이 삼켜졌다. 창을 잡은 손에 땀이 묻어났다. 뇌학동이 던진 도끼는 두 개. 그러나 눈에 보이는 도끼는 수백, 아 니, 수천이었다. 하나하나에 생명력이 있는지 그 움직임이 살아 있었 다. 그것이 뇌학동이 지닌 최후의 필살기(必殺技) 금곤복차(金困復車)임 을 알 길 없는 악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할 길은 없다. 있다면 오직 깨부수는 것뿐!' 상대의 무공이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느낀 악영이 창을 회전시켰 다. 그리곤 힘껏 발을 뻗으며 팔을 뻗었다. 허리의 회전과 팔의 회전 이 더해지자 창에 이는 힘이 실로 가공했다. 멀리서도 창 주변에 이는 기운을 똑똑히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격탁양청(激濁揚淸)!" 악영이 사용하는 초식이 악가창법이 자랑하는 삼대절기 중 하나라는 것을 확인한 상앙이 놀라 부르짖었다. 천지를 뒤덮는 도끼의 그림자와 창끝에서 이는 소용돌이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파스스스. 묘한 소리를 내며 삽시간에 사라지는 도끼들. 단번에 수십의 그림자 를 없앤 소용돌이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뇌학동을 향해 쇄도했다. 소용돌이의 중심엔 날이 시퍼렇게 선 창날이 있었다. 그 창날이 뇌 학동의 가슴 어귀를 파고들 즈음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한데 신음성 이 하나가 아니었다. 뒤로 오 장여나 날아가 무참히 처박히는 뇌학동의 입에서는 물론이 고 상대의 절기를 무력화시키고 회심의 공격에 성공한 악영의 입에서 도 고통의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뇌학동은 몸을 일으킬 힘도 없는지 간신히 고개만 쳐들었다. 그의 가슴엔 어린아이의 머리라도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 려 있었다. 절명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치명적인 부 상을 당한 그는 허탈한 눈으로 악영을 살폈다. 악영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상대의 공격을 완벽하게 파괴한 듯 보였 으나 그것이야말로 허상, 그의 양어깨엔 뇌학동이 던진 도끼가 깊숙하 게 박혀 있었다. 그의 창이 뇌학동의 가슴을 꿰뚫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뇌학동이 도끼의 움직임을 촌각이라도 더 제어할 수 있었다면 목숨을 잃게 되는 사람은 뇌학동이 아니라 그였을 것이다. "내가... 졌군." 고개를 떨어뜨리며 힘없이 내뱉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패천궁의 호법으로 무림을 질타하던 비부 뇌학동은 그렇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싸움은 사실상 끝이 났다. 수뇌를 잃은, 그것도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뇌학동의 죽음 앞에서 패천궁의 무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일방적인 도륙만이 있을 뿐이었다. 몇몇 수뇌들이 뇌학동을 대신하여 수하들을 지휘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이들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뇌학동이 쓰러진 지 반 각도 되지 않아 목숨을 잃은 수가 삼분지 이 가 훌쩍 넘었다. 이곳저곳에서 후퇴하라는 말이 들려왔으나 이미 퇴로 마저 차단당한 그들이 살아날 길은 참으로 요원했다. 바로 그 순간, 하나의 검이 날아들었다. 목표는 상앙이었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 뇌학동의 죽음으로 끝난 싸움, 무료하게 전장을 지켜보던 상앙의 고 개가 홱 돌려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드는 검 한 자루를 볼 수 있었다. 검에 담긴 힘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신중히 대응을 했다. 하나 신중히 대응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음을 그는 깨달아야 했다. 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상앙이 들고 있던 검이 산산조각이 나 흐트러졌다 그와 같은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앙이 어처구니없 는 표정으로 손잡이만 남은 자신의 검과 그것을 단숨에 박살 낸 또 다 른 검을 좇아 고개를 돌리는 사이 검은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주인을 찾아 돌아갔다. 중년 미부와 청년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소년 한 명. 패천궁으로 향하던 환야와 을지룡이었다. 돌아온 검을 잡은 환야는 싸늘한 시선으로 전황을 살폈다. 일방적인 도륙으로 이어지던 싸움도 어느덧 그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너희들의 수장은 어디 있느냐?" 환야가 부상에 신음하고 이쓴 패천궁의 무인 한 명에게 물었다. "호, 호법님께선... 돌아가셨습니다." 전장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뇌학동의 시신을 가리키며 얼 떨결에 대답한 그는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광(寒光)에 기겁 하며 고개를 돌렸다. '호법이란 말인가?' 천천히 몸을 돌린 그녀가 소리쳤다. "패천궁의 무인들은 모두 물러나라!" 그녀의 말에 어떤 힘이라도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싸움이 멈춰졌다. 패천궁의 무인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르는 그녀의 명령을 따른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공격을 하던 중천의 무인들까지 손속을 멈춘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대는 누군가?" 상대의 실력을 도저히 예측하지 못한 상앙이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도리어 질문이었다. "네가 우두머리인가?" 질문도 질문이거니와 말투가 너무 무례했다. 상앙의 얼굴이 무참하 게 일그러졌다. 그의 음성도 자연스레 거칠어졌다. "지금 내게 지껄인 것이냐?" "우두머리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늙은이의 솜씨인가?' 환야가 뇌학동의 시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손쓸 만큼의 실력은 없었다." 뇌학동은 싸워보면 승부가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고수였다. 특 히 마지막 무공을 보았을 땐 솔직히 약간은 열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한 그였다. 하지만 비위가 뒤틀린 그의 입에선 뇌학동을 간단히 무시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큰소리칠 만한 실력을 지녔는지 궁금하군." 환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짜고짜 손을 썼다. 그녀의 검에서 엄청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만한 공격을 무기도 없이 상대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 다. 감히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한 상앙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 자 그의 뒤에 있던 수하들이 엉뚱하게 재앙을 뒤집어썼다. "크아악!" "으아아악!" 상앙도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피한 검기를 수하들이 막아낼 리가 만 무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십여 명이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표정들은 가지각색이었다. 패천궁 무인들의 얼굴엔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싹 텄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그들을 공격하던 이들의 얼굴 엔 은근한 놀라움과 두려움이 깃들었다. "고작 숨는 실력 뿐인가?" 환야가 검을 취하고 나서는 상앙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상앙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환야 의 공격을 본 그는 상대가 얼마나 고수인지 그 즉시 알 수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껏 그와 같은 각오로 싸움을 했던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그는 전신을 자르르 울리는 긴장감과 두려움, 아울러 희열과 전율감 을 느끼며 검을 곧추세웠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그와는 달리 환야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상앙의 호승심을 더욱 자극했다. 어쩌면 단 한 번으로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앙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리곤 어느 순간 몸을 날렸다. 환야의 눈꺼풀 이 감기는 찰나였다. 휘류류륭! 명색이 중천의 호법이라는 위치에 있는 상앙이었다. 그의 공격은 빠 르고 날카로웠으며 강맹한 힘을 품고 있었다. 거대한 바람이 주변을 휘감으며 환야를 향했다. 그에 비해 환야의 움직임은 짧고 간명했다. 환야의 검에서 뿌연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음.' 단순하게만 보이던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루고 중첩이 되 며 뿌려지자 상앙의 안색은 무섭게 변했다. 첫 번째 아지랑이가 그가 일으킨 기운을 단숨에 흡수해 버리고 두 번 째 아지랑이는 그의 방어막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세 번째의 기운에 그는 전신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무공이 있었나?' 검기의 파도와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화려한 환영 속에서 상앙은 절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리고 전신을 난도질하는 고통 속에서 간신 히 입을 열었다. "이, 이것이... 무, 무슨 무... 공이오?"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환야가 입을 열었다. "천검만파(天劍萬波)." 그랬다. 지금 환야가 사용한 무공이야말로 그 옛날 구양풍을 천하제 일인으로 추앙받게 만들었던 파검삼식의 첫 번째 초식이었으니. "천... 검... 만....." 상앙은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단 한 번의 충돌.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앙을 잠재운 환야는 주춤거 리고 있는 중천의 무인들에게 소리쳤다. "꺼져라!" 그러나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환야는 조금도 주저함없이 검을 움직였다. 파스스스슷! 조금 전보다 더욱 위력적인 검기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수뇌들이 검기를 막기 위해 애썼지만 쉽게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 니었다. 그들은 무사해도 그들의 주변에 있던 수하들은 또다시 무참하 게 쓰러졌다. 그것으로 단숨에 포위망이 뚫렸다. 무슨 지시가 있었는 지 패천궁의 무인들이 뛰기 시작했다. "마, 막아랏!"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곧 수하들의 비명 소리에 잠기고 말았다. 얼떨결에 몸을 움직였던 몇 명이 후미를 막고 있던 환야의 검에 난도질을 당한 것이었다. "그, 그만... 추격을 중...지해!" 뇌학동에 의해 동귀어진과 다름없는 피해를 당한 악영이 힘겹게 소리 쳤다. 몇몇 이들이 정색하며 만류했으나 그는 명령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도저히 감당할 인물이 아니라 판단한 것이다. 물론 회천단에 많은 고수 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상앙에 비할 바는 아니나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 닌 무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단 일 수에 상앙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수 십 명을 쓸어버린 환야의 무위를 감당할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그녀 의 곁에서 완벽하게 보조를 하고 있는 꼬마, 나이는 어려 보이나 실력 만큼은 징그러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 그 둘이 지키는 길을 뚫고 추격 을 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끄, 끝까지 추격하여 싸운다면 어찌어찌 이...길 수는 있겠지만 이 겨도 과연 얻...는 것이 있을까 의문이다. 추...격을 멈...춰라..." 혼절을 하기 전에 악영이 남긴 말이었다. * * * 환야 일행과 헤어져 남하한 을지휘소와 강유가 매강을 지나 복건성 접경의 창악산(槍岳山)에 도착한 것은 중천에 뜬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데 해남파의 흔적을 찾아 헤매며 정신없이 달려 온 그들을 반긴 것은 해남파의 무인들도, 또 그들을 쫓고 있는 남천의 무인들도 아니었다. "대, 대체 이건...." 강유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뜻 보기에도 십여 구는 넘어 보이는 시신들. 그런데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지가 몸통과 분리된 것은 예사였고, 그나마 남아 있 는 것이 드물 정도였다. "우욱!" 몸을 돌린 강유가 구역질을 해댔다. 비록 토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 었지만 그의 구역질은 한참이 지나도 멈춰지지 않았다. "죽일 놈들!" 거의 반 각이 넘는 시간 동안 구역질을 해대던 강유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지금껏 수많은 싸움을 했고 또 참상을 보아 왔어도 눈앞의 상황처럼 무참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 에게 당한 것인가?" 굳어진 눈으로 시신을 살피던 을지휘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짐승이란 말입니까?" "그래, 시신에 난 흔적들을 봐라. 칼이나 도에 당한 것이 아니야. 하 나같이 날카로운 이빨에 찢긴 흔적들뿐. 더구나 남아 있는 흔적들을 봐서는...." 을지휘소는 잡아 먹혔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하나 주변에 널 브러진 시신들의 상황을 보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들이 해남파의 무인들이 맞느냐?" "틀림없습니다. 검의 손잡이에 이런 식으로 매듭을 지은 오색 끈을 달고 다니는 문파는 오직 해남파뿐입니다." 강유가 동강난 검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 남천의 인물들이 아니고?" "분명 해남파의 무인들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왠지 남천의 무인들도 아닌 것 같고...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해남파에 합류한 이 지역의 무인들이겠지. 아무튼 가자. 약간의 온 기가 남아 있는 것이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이 근처에 있겠 어." "예." 대답하고 몸을 날리려던 강유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그리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의 참상을 살피다 고개 를 돌리는 을지휘소의 전신에서 감히 뭐라 말할 수 없는 살기가 뿜어 져 나왔기 때문이다. 창악산 동쪽의 계곡. 추격자들에 쫓긴 해남파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그들의 발걸음을 막고 좌측으로 거친 물길이 운신의 폭을 좁혔다. 어찌 보면 배수의 진을 친 것으로 보였지 만,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원해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추격에 몰려서 그리된 것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길은 오직 정면과 우측뿐. 그러나 정면엔 수백의 늑 대 떼가, 우측엔 흑빛 피풍의를 걸친 사내 둘이 지키고 있었다. "크크크, 죽일 놈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해남파의 무인들을 살피는 낭왕의 입 에서 살소가 터져 나왔다. "공격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곁에 있던 희연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물었다. "암, 해야지. 모조리 황천길로 보내야지. 특히 그놈! 나를 이 꼴로 만든 그놈만큼은 뼈를 발라 잘근잘근 씹어 먹고 말 것이다!" 낭왕은 붕대로 친친 감겨 있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노호성을 터뜨렸 다. "백아(白牙)야." 그의 부름에 약간 앞으로 나가 앉아 있던 백색 늑대가 크르렁거렸다. "더 이상 봐줄 필요 없다. 네 마음대로 하여라. 모조리 끝장내!"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키는 백색 늑대. 백아라 불린 그 늑대는 잡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이 흰색으로 빛났는데, 그 덩치가 여타 늑대의 서 너 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몸통을 자랑했다. 오우우우우우우! 백아의 입에서 창악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때를 같이하여 수백이 훨씬 넘어 보이는 잿빛 늑대 무리가 일제히 달 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수백의 늑대 무리가 한곳을 향해 달리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하나 정작 목표가 되는 이들의 심정은 그렇지 않았으니. "결국...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 되는 것인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힘겹게 눈을 끔뻑이는 강운교. 부상으로 지친 그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늑대의 울부짖음과 곧 바로 이어진 진동으로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낀 그가 물끄 러미 전방을 주시하던 한 사내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우리들 때문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바로 혈영대의 대주 냉혈이었다. "명령에 따랐을 뿐."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대답을 한 그가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를 따라 첫 번째 전투에서 살아남은 삼십삼 명의 혈영대가 움직였다. "미물 따위에게 당할 수는 없다. 모두들 정신 차려라!" 강운교를 대신해 해남파를 이끌고 있는 강명이 선두에 서며 소리쳤 다. "와아아아!" 일제히 함성을 지르는 해남파의 무인들. 하나 그들의 음성은 곧 늑 대들의 포효에 파묻히고 말았다. 수백의 늑대들과 백여 명이 채 안 되는 인간들의 싸움은 처절 그 자 체였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주인의 명을 받기는 하였다지만 늑대들은 본능 으로 상대를 죽이고 죽임을 당했다. "크아악!" 늑대에게 목을 물린 사내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그를 물어 절명시킨 늑대도 곧 날아온 칼에 의해 단말마의 비명과 함 께 힘없이 늘어졌다. "사, 살려줘!" 양다리를 물리고 팔까지 물려 쓰러진 사내. 그의 가슴을 밟고 서 있 는 늑대. 집단 사냥에 성공한 늑대들은 마치 그의 공포를 즐기기라도 하듯 으르렁거리다가 동시에 그의 사지를 찢어버렸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늑대들은 자신들이 사냥한 인간의 인육을 질겅거리며 또 다른 목표 를 노렸다. 그리곤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도약했다. 삽시간에 이십 명도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냉혈을 비 롯한 혈영대의 대원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 다면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늑대들이 땅 에 나뒹굴었으나 남아 있는 늑대는 너무도 많았다. "저놈이다! 바로 저놈!" 느긋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낭왕이 참으로 깨끗한 솜씨로 늑대들을 베어가는 냉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냉혈이라고 했던가?" 희염이 재빨리 대꾸했다. "예. 조사에 따르면 혈영대의 대주 냉혈이 틀림없습니다." "나를 암습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낭왕은 지난밤 자칫 잘못했으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떠 올리며 몸을 떨었다. "네놈의 목숨만큼은 내가 접수하마!" 하지만 호언장담과는 달리 그는 아직 나서지 않았다. 다만 백아로 하 여금 더욱 거세게 몰아붙일 것을 명령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늑대들이 너무 많습니다." 전장에서 잠시 몸을 뺀 강명이 말했다. "하니 어쩌면 좋겠는냐? 그렇다고 저쪽으로 가자니..." 강명의 말에 고개를 돌려 우측 길을 살피는 장로 노적상(櫓寂霜), 그 의 표정은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래도 퇴로는 저곳뿐입니다. 여기만 벗어나면 놈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괴물을 상대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 노적상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듯 회의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 긴 그럴 만도 했다. 유일한 퇴로라고 할 수 있는 좁은 우측 길을 지키 는 두 명의 사내는 다름 아닌 독혈인이었다. 문주였던 강운교에게 치 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외전 전주 장염의 목숨을 빼앗은 독혈인. 그들 의 무서움을 익히 보아온 노적상은 차라리 맞서 싸울 수 있는 늑대들 을 상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한 놈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지산의 비부를 열고 해남파의 최고 절기를 익힌 그의 무공은 이미 강운교에 필적,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독혈인의 상대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은 그도, 노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 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알았다. 그럼 다른 놈은 내가 맡으마." "내가 돕겠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장로 문초(文梢)가 말했다. 가슴까지 내려온 새하얀 수염이 이미 붉은빛으로 물들었지만 노익장을 과시라도 하듯 그의 음성은 자신만만했다. "괜... 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어린 너도 목숨을 거는데 다 늙은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놈이 비록 괴물이라지만 불사의 몸은 아닐 터, 방법이 있 겠지." 문초가 가슴을 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나 그를 보는 강명과 노 적상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진한 안타까움이었다. "호호,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요." 불길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이 저러할까? 강명을 비롯하여 몇몇 장로 들이 독혈인에게 달려드는 것을 본 봉후가 허리를 꺾으며 비웃었다. "흐흐흐, 그러게 말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독혈인을 상대로 덤빌 생각을 하다니." 희염이 맞장구를 치며 음침한 미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차라리 독혈인에게 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아무래도 고통이 덜할 테니까. 아무튼 독혈인이 놈들을 어찌 요리하는 지 구경이나 할까?" "일각이면 끝날 겁니다." "일각씩이나? 반 각이면 끝날 것 같은데." 봉후와 희염은 경쟁하듯 입을 열며 독혈인과 강명 등의 싸움을 재단 했다. 그사이 앞장선 강명이 첫 번째 독혈인과 손속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깡!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독혈인의 옆구리를 가격했던 강명의 검이 힘 없이 튕겨져 나왔다. "제길!" 뻔히 그럴걸 알았으면서도 욕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상대의 역습을 보며 황급히 몸을 튼 강명이 번개같이 옆으로 빠지며 검을 휘둘렀다. 검은 정확하게 독혈인의 목덜미를 훑어갔다. 그러나 예의 소성과 함께 그의 공격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젠장, 벌써부터.' 상대의 공격에 당할까 멀찌감치 피한 강명은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 키며 안색을 굳혔다.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고 상대와 직접적으로 맞 상대한 것도 아니건만 호흡이 힘든 것으로 보아 독혈인이 내뿜는 독기 가 침투한 모양이었다. "그만둘 생각이냐? 그렇다면 어서 꺼져라!" 기분 나쁠 정도로 환하게 웃은 독혈인이 소리쳤다. 덤비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겠다는 듯 뒷짐을 진 자세에서 강명은 더할 수 없는 굴욕 감을 느꼈다. "찢어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내 다시는 그따위 헛소리를 늘어놓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마." "할 수 있다면 해봐." 독혈인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강명을 도발했다. 참지 못한 강명의 몸이 허공에서 뛰어오르고, 오 장이나 되는 거리를 단숨에 좁힌 그의 검에서 눈부신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제법이군." 상대의 공격을 보면서도 독혈인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껏 공 격해 보라며 양손을 활짝 펴 무방비 자세로 검기를 맞아들였다. 파파팍! 예리한 검기가 독혈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피풍의를 비롯하 여 그의 상의가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그러나 구릿빛 몸뚱이엔 아무 런 상처도 없었으니 금강불괴의 강건함을 자랑하는 독혈인의 몸 앞에 선 웬만한 공격은 자그마한 상처 하나 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 다. "괴물 같은 놈!" 자신의 공격이 너무도 허무하게 막히자 강명의 얼굴엔 참담함이 스 쳐 지나갔다. 그것도 잠시, 굳데 입을 다문 그의 검에서 조금 전과는 뭔가가 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거, 검강!"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희염이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그의 외침이 얼마나 컸던지 백아를 통해 늑대들을 독려하던 낭왕마저도 고개를 돌 릴 정도였다. "저건 검강이 아니다." "거, 검강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희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무래도 검환(劍環) 같구나." "검환이란 말입니까?" "그래, 검기를 유형화시킨 것이 검강이라면 검기를 응축시켜 마치 하나의 고리처럼 만든 것이 바로 검환이다. 물론 위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놀랍구나. 저만한 나이에 저런 무공을 지니고 있다니." 아무리 높게 봐줘야 이제 겨우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강명. 하 나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고한 경지의 무공이었다. "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설마 독혈인이...." 있을 수도 없는 말이었기에 희염은 말끝을 잇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라. 저자의 무공이 놀랍기는 하지만 그 정도에 쓰러질 독혈인이 아니다." 낭왕은 단언하듯 말했다. "물론 어느 정도 위협은 되겠지만." "위협... 이란 말입니까?" 낭왕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강명과 독혈인과의 싸움에 시선을 고정시킬 뿐이었다. 낭왕의 말대로 금강불괴의 경지에 이른 독혈인도 강명의 무공에서 위협을 느낀 모양이었다. 지금껏 여유있던 모습과는 달리 잔뜩 몸을 숙이고 손을 교차하여 가슴을 보호하는 것이 제법 긴장한 모습이 보 였다. 꽝! 꽝! 꽝! 연속적으로 세 번의 격타음이 들리고 강명이 일으킨 검환이 독혈인 의 몸에 적중했다. 힘을 이기지 못한 독혈인이 연신 뒷걸음질치며 십 여 장이나 물러났다. 초조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몇몇 장로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더 러는 함성도 지르며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작 기뻐해 야 할 강명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비록 약간의 이득은 얻었는 지 몰라도 자신의 무공으론 결국 독혈인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후우, 후우." 무리하게 진기를 끌어 모아서인지 강명의 호흡이 눈에 띄게 가빠졌 다. 그에 반해 손을 풀고 천천히 다가오는 독혈인은 처음 모습 그대로 였다. 아니, 약간 다르다면 강명의 공격으로 인해 의복이 갈가리 찢어 졌고 손목과 옆구리 등에 약간의 상처가 보인다는 정도였다. 상처를 입었다는 것에 기분이 나쁜 것인지 독혈인의 입가에서 미소 가 사라졌다. 대신 자리한 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침한 살기와 양 손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묵빛 기운이었다. '독?' 재빨리 호흡을 멈춘 강명이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동시에 독혈인 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됐다. 독혈인이 팔을 휘둘렀다. 미처 팔이 펴지기도 전에 강명을 압박하는 기운이 장난이 아니었다. 빠르고 맹렬히, 알 수 없는 기운을 담은 무엇인가가 접근했다. 강명은 좌우로 몸을 흔들고 기묘하게 발의 위치를 바꾸며 몸을 피했 으나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세를 모두 회피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맞받아 칠 수밖에 없었는데. 꽝! 독혈인이 뿜어낸 묵빛의 기운과 강명의 검에서 솟아난 찬연한 빛의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상당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쓰는 가운데 연 이은 충돌이 이어졌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펼치는 독혈인은 여유가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무공은 혼원추혼장(混元追魂掌)이라는 것으로 만독문 의 절기 중 하나였다. 독혈인이 되기 전 만독문에서 나름대로 상위권 에 들던 실력이었던 그였기에 독혈인이 되고 난 후의 위력은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에 반해 독혈인의 공세를 힘겹게 막고 있는 강명은 죽을 맛이었 다. 손에서 뻗어 나오는 맹렬한 기운도 기운이지만, 그보다는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을 잠식해 들어오는 독이 너무도 위협적이었다. 아 무리 호흡을 멈추고 참는다지만 한계가 있는 법이었고, 그토록 격렬히 움직이면서 호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중독될 것을 뻔히 알면서 호흡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가 택한 것은 피부 호흡이었지만 독혈인의 손에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는 결 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들이마시는 것보다는 미세 한 양이었으나 피부 호흡만으로도 충분히 중독이 될 정도였다. '제, 제길!'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가 흐려지고 자꾸만 구토가 나올 것 같았 다. 무엇보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걸음도 늦어지 고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속도도 느려졌다. 바로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독혈인과 치열한 싸움을 하 고 있던 문호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문호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자 재빨리 다가간 노적상이 혈도를 눌러 독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 하였으나 독기는 이미 심장을 파고 들 어 갔다. 힘겹게 몇 번의 숨을 할딱이던 문호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 다. "문 장로!" 노적상이 문호의 몸을 몇 번 흔들었으나 이미 목숨이 끊어진 그가 대답을 할 리 만무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히죽 웃고 있는 독혈인 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으아아아아!!" 청악산이 떠나가라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기세가 가히 천하를 울 릴 정도였으나 독혈인에겐 그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안 돼!" 강명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노적상과 독혈인의 모습을 보며 그의 눈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노적상의 검이 독혈인의 목을 베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사이 쭉 뻗은 독혈인의 손이 그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었다. "으으으으." 축 늘어지는 노적상의 모습을 보며 강명의 입에선 흐느낌이 흘러나 왔다. 눈앞에 독혈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게 중독된 것도 있었지만 장로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괴감 에 정신을 놓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제법이었다." 강명에게 다가온 독혈인이 무심히 입을 열더니 손을 치켜 올렸다. 내려치기만 하면 그대로 목숨이 끝장날 순간이었으나 그는 내려치지 못했다. 독혈인을 비롯하여 창악산의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 는 장소성이 울려 퍼진 것이었다. 제68장 신위(神威) "우우우우우우!!" 불문의 사자후가 이럴 것인가! 처음엔 까마득히 먼 곳에서, 그러나 어느 순간 바로 눈앞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웅대한 장소성에 그토록 미쳐 날뛰던 늑대들이 움직임을 멈추었고 봉후 주변을 날아다니던 독봉들이 일제히 날개를 접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절벽 쪽으로 돌아갔다. 하나의 점으로 여겨지던 물체가 확대되어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 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실로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볼 수 없는 가공할 속력에 다들 눈을 비비고 있을 즈음 단숨에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내가 막 강명의 목숨을 끝장내려던 독혈인을 향해 다짜고짜 손을 뻗었다. 당황한 독혈인이 손을 틀어막으려고 하였으나 제대로 된 대응을 해 보지도 못하고 오 장여나 날아가 처박혔다. "괜찮으냐?" 독혈인을 단숨에 날려 버린 사내가 강명에게 물었다. "누, 누구...." 힘없이 고개를 든 그는 자신을 구해준 사내가 누군지 확인하려 했다.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던 강명의 동공이 크게 확대됐다. 절망감에 물 들었더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희에 휩싸였다. "이, 이모부님!" "많이 다쳤느냐?" "겨, 견딜 만합니다." "고생했다. 형님은 어디 계시느냐?" "아버님은 저쪽에서... 위험합니다." 독혈인의 접근을 본 강명이 황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눈치챌 정도인에 을지휘소가 모를 리가 없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을 뻗 어 독혈인의 손을 낚아챈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독혈인의 목덜미를 움 켜쥐었다. "어련히 알아서 상대해 줄까? 하니 그렇게 보챌 필요 없다." "조, 조심하십시오! 놈은 독혈인입니다. 이모부님!" 독혈인의 몸을 맨손으로 만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강 명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독혈인의 입가에도 음침한 미소가 흘렀다. 그러나 을지휘소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 을지휘소의 시선이 독혈인에게 향했다. "그렇군. 네놈이 독혈인이란 말이지." 과거 부친으로부터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가 들었던 독혈인, 이지 (理智)도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주인의 명을 따른 그것과는 많은 차이 가 있었으나 어차피 괴물이라는 것은 같을 터. 그는 목덜미를 잡은 손 이 새까맣게 변색되는 것을 보며 독혈인을 멀찌감치 집어 던졌다. "이, 이모부님, 독이..." "걱정하지 마라." 강명에게 웃음을 보인 을지휘소. 그 웃음의 의미는 곧 밝혀졌다. 새까맣게 변한 손에서 어느 순간 붉은 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독기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독이야 태워 버리면 되는 것이지."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간단히 독기를 제거한 을지휘소가 손 을 털었다. 강명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말이 좋아 삼매진화지 그런 것 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을 것인가? "형님께 가자." 을지휘소가 강명을 부축하여 몸을 일으켰다. "예? 예." 강명은 자신의 몸에 거대하 진기가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독혈인이 아니었다. 을지휘소가 강적이라는 것을 느낀 것일까? 강명과 상대하던 독혈인 은 물론이고 두 명의 장로를 불귀의 객으로 만든 다른 독혈인까지 살 기를 뿌리며 다가왔다. "보채지 말라고 했을 텐데. 도망가지 않는다." 간단히 소리친 을지휘소는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강명 을 안고 사라졌다. 독혈인과 백여 장 정도 떨어진 곳의 전장. 인간과 늑대의 처절한 싸움은 거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여전히 수백이 넘는 늑대들에 비해 살아남은 인간의 수는 고작 사십 여 명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혈영대의 대원이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 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강명의 안내로 강운교를 만난 을지휘소가 애써 웃음을 보이며 인사 했다. "자네... 로군."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에 한참 동안이나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강운교가 엷은 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괜찮습니까?" 을지휘소가 안타까운 음성으로 물었다. "뭐, 이 정도면 양호하지. 아직까지 목숨은 붙어 있으니까." "누구에게 당한 것입니까?" "누구긴, 바로 저놈들이지." 강운교가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독혈인이었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을지휘소. 그의 눈에서 예리한 살 기가 삽시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받은 빚은 제가 갚아주지요." "그래 주겠나?" "잠시 쉬고 계십시오. 일단 주변 정리부터 하겠습니다." "가능...." 강운교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쓴웃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애당 초 그에게 가능이라는 말 따위는 필요없는 것이었으니까. "고맙군." "술이나 한잔 사십시오." "여부가 있겠나." "참, 유아도 곧 올 겁니다." "그 아이를 만났나?" 강운교가 반색을 했다. "예. 상황이 급한 듯해서 일단 먼저 왔습니다. 그럼." 을지휘소는 강운교의 손을 지그시 잡더니 몸을 일으켰다. "와주서... 고맙네." "뭘요." 을지휘소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한데 몸을 일으켜 전장으 로 걸어가는 그의 표정이나 기세는 이미 백팔십도 바뀌어 있었다. 보보마다 살기가 가득했다. 과거 출행랑을 익히면서 몸에 배인 살기가 서서히 묻어나기 시작했 다. 그토록 미쳐 날뛰던 늑대들이 그의 모습을 보며 꼬리를 말기 바빴 다. 켕! 주제도 모르고 으르렁거리던 늑대 한 마리가 그의 발길에 걷어차여 까마득히 날아갔다. "내 나이 열넷에 때려잡은 늑대 수가 백 마리다." 지난날 동굴에서의 생활을 떠올린 것인가? 그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 다. "감히 미물 따위가 인간을 넘보다니!" 땅에 떨어진 검을 집어든 을지휘소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 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성을 가르며 검이 움직일 때마다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고 머리가, 몸이 반으로 갈라져 사분오열되는 늑대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저, 저런 죽일 놈이!" 삽시간에 십여 마리의 늑대를 잃자 낭왕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곤 상처도 아랑곳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봉후가 그를 말리려고 하였으나 낭왕은 이미 한참이나 내달리고 있었다. 낭왕이 소리치는 그 짧은 사이에도 수십 마리의 늑대가 사라졌다. 이곳저곳에서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우두머리 격인 백아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무리를 독려했지만 을지 휘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하고도 엄청난 살기에 주눅 든 늑대들 은 덤빌 생각은커녕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갔다. 결국 참지 못한 백아가 을지휘소에게 달려들었다. 크기가 거의 대호(大虎만한 백아의 등장에 을지휘소도 잠시 주춤거 렸다. 겁을 먹었거나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난생처음 보는 그 크기와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도 아랑곳없이 이빨을 들이 대는 모습에 다소 놀란 것뿐이었다. "그래, 네놈이 우두머리로구나." 을지휘소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백아는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그 커다 란 몸을 날렸다. 주둥이를 벌리자 손가락보다 더 커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 다. 어디를 공격해야 목표의 목숨을 단번에 빼앗는지 알고 있다는 듯 백아의 이빨이 노린 것은 목덜미였다. 을지휘소는 미동도 없이 백아의 모습을 지켜보다 살짝 몸을 띄웠다. 그리곤 다리를 높이 치켜세운 후 백아의 정수리를 찍어버렸다. 발뒤꿈 치에 찍힌 머리가 그대로 땅에 처박히자 그 커다란 몸도 힘을 잃고 땅 에 쓰러졌다. 울부짖음도, 비명도 없었다. 소리가 나기도 전 머리가 땅 속 깊이 박혀 버린 탓이었다. "백아야!" 자식보다도 더 애지중지 아끼던 백아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자 낭왕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죽어랏!" 그는 미친 듯이 낭아봉(狼牙棒)을 휘두르며 을지휘소를 공격했다. 그 런 낭왕을 보는 을지휘소의 눈은 늑대들을 보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늑대로 하여금 인간을 공격하게 하고 또 인육(人肉)을 먹이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낭왕을 인간으로 여기 지 않았다. 그저 또 다른 한 마리의 늑대로만 여길 뿐. 낭아봉이 코앞까지 이르렀음에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낭아봉이 정수리에 불과 몇 치까지 도달했을 때 슬그머니 고개를 틀 어 그것을 흘려 버린 후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더니 팔꿈치를 휘둘러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오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날아가는 낭왕, 그 의 얼굴은 이미 무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튼실 했던 이가 모조리 부러지고 반쯤은 잘려 너덜너덜해진 혀가 입 밖으로 삐져 나왔다. "으으으으." 그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찌어지 몸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뇌를 울린 충격이 치명적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을지휘소가 중심을 잡기 위해서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 갔다. 단 한 방으로 상대를 무력화시켰음에도 그의 얼굴엔 조금의 연 민도, 안쓰러움도 없었다. 낭왕 앞에 우뚝 선 그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상대의 사혈(死穴)을 지 그시 짚었다. 생각 같아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고 싶었지만 그나 마 예우를 해준 것이었다. 주인이었던 낭왕이 죽고 우두머리였던 백아가 죽었다. 겁에 질린 늑 대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그동안 늑대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던 해 남파의 무인들과 혈영대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늑대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이백은 되어 보이는 늑대들이 도주하기 시작했 다. "인육을 맛본 놈들은 또다시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법이지." 을지휘소는 늑대들을 그대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의 검이 죽어라 내달리는 늑대들을 향해 움직이고 검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수백의 검기가 늑대들을 휩쓸었다. 꽈꽈꽈꽝! 오랜 세월을 버텨온 거목들이 잘려나가고 바위가 모래알이 되어 무 너져 내렸다. 하물며 연약한 몸뚱이를 지닌 늑대가 버틸 수 있을까? 늑대들은 검기에 직접 맞아 처참히 찢기고, 쓰러지는 나무에 깔리 고, 폭풍에 휘말려 목숨이 끊어졌다. 그 와중에도 수십 마리의 늑대가 도주했지만 그것들 역시 모두 무사하지 못했다. 뒤늦게 도착한 강유가 을지휘소의 전음을 받고 하나하나 도륙했기 때문이다. 만약 늑대들이 작심하고 달려들었다면 숫자도 숫자이니만큼 몇 마리 해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강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 하나 이미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는 늑대는 강유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사신(死神)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달릴 뿐 이었고 강유의 쾌검에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왔느냐?" "예. 몇 마리는 놓쳤습니다." "그 정도로 되었다." 간단히 대꾸를 한 을지휘소가 봉후와 희염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 졌다. 희염은 몇 가닥 남지도 않은 염소수염을 배배 꼬면 덜덜 떨고 있 었다. "가라고 해도 그냥 갈 것 같지 않고 덤비려면 빨리 덤벼라. 저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을지휘소가 낭왕의 죽음을 보며 움직이고 있는 독혈인을 가리키며 말 했다. "너는 누구냐?" 봉후가 물었다. "말해도 모를 것이니 그냥 덤벼라." "건방진 놈! 낭왕을 해치웠다고 기고만장했구나! 그가 부상을 당하 지 않았다면 죽는 것은 바로 네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두지."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봉후의 봉목이 싸늘해 졌다. 그렇잖아도 날카로운 눈매가 화를 내자 사갈(蛇蝎)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네놈이 언제까지 당당할 수 있는지 보겠다." 날카롭게 쏘아붙인 그녀가 손바닥보다 조금 커 보이는 피리를 꺼내 들었다. 삐이이이. 청량하기보다는 쇠를 긁는 듯 거북한 소리가 피리에서 흘러나오고 순간, 그녀의 주변에서 조용히 맴돌던 독봉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독봉이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는 가히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삐이이. 피리 소리가 재차 울리자 독봉이 을지휘소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독봉에 쏘여 목숨을 잃은 동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치명적인 독을 지닌 독봉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시작하자 이를 지켜 보는 해남파의 무인들의 얼굴엔 저마다 걱정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을지휘소가 독봉들을 향해 검을 풍차처럼 휘둘러 몸을 보호했다. 삽 시간에 수백은 넘어 보이는 독봉이 땅에 떨어졌지만 그 정도로는 표시 도 나지 않았다. 삐이이. 피리 소리에 맞추어 전후좌우, 위아래로 흩어진 독봉이 맹렬히 달려 들었다. 을지휘소가 더욱 빠르게 검을 휘둘렀으나 분명 한계가 있었다. 검으 로 친 방어막이 뚫리고 한두 말이의 독봉이 접근하기 시작하더니 온몸 이 순식간에 독봉으로 뒤덮였다. "아, 안 돼!" "아!"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의 전신이 독봉으로 덮이자 이곳저곳에서 안타 까운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호호호호! 기고만장하더니만 꼴좋구나!" 봉후는 승리를 확신하며 몸을 비틀고 교소를 흘렸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한 번만 쏘여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독봉이 그 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으니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 이다. 하나 그녀의 웃음이 잦아들기도 전 을지휘소의 냉랭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즐겁나?" 흠칫 놀란 봉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그녀는 을지휘소의 몸에 서 빛이 난다고 느꼈다. 그 빛은 점점 밝아지더니 종내엔 제대로 쳐다 보지도 못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와 환한 빛을 사방에 뿌렸다. "이,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을 하지 못하는 봉후.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꽉 쥔 주먹에 흥건히 땀이 고일 정도로 긴장하며 지켜보던 이들 또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괴사에 숨을 쉬지 못했다. 오직 강명만이 미친 듯 이 웃을 뿐이었다. "크크크, 끝장이로구나!" 조금 전, 독혈인의 독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독하는 것을 보지 않았 던가! 그때 사용한 것이 다름 아닌 삼매진화. 강명은 을지휘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열기가 바로 삼매진 화를 일으키는 것임을 눈치챈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이 무식하게 삼매진 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지만. 강명이 미친 듯이 웃어 젖히는 사이 을지휘소를 뒤덮었던 독봉들이 힘을 잃고 하나둘씩 땅에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모든 독봉이 땅바닥으 로 추락했다. 그토록 잔인하고 무시무시하던 독봉들이 그가 뿜어낸 열 기에 모조리 타 죽고 만 것이다.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는 놈들도 있었 으나 그야말로 극소수였다. 봉후는 넋이 나간 듯했다. 낭왕이 늑대들을 아끼듯 봉후 역시 그녀 가 키우는 독봉을 새끼처럼 애지중지했다. 그런 독봉이 한두 마리도 아 니고 모조리 죽고만 것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멍한 눈으로 독봉을 응시하는 봉후를 일별한 을 지휘소가 몸을 돌렸다. 싸움이 끝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네, 네놈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린 봉후가 을지휘소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현실을 직시한 희염이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남천의 사천왕이라 손꼽히기는 해도 그녀와 낭왕은 순수 무공 실력으로 다른 사천왕에 비해 손색이 있었 다. 특히 그녀는 딱히 내세울 만한 무공도 없었다. 그들이 하는 양을 살피던 을지휘소가 빙글 몸을 돌려 어느새 코앞까 지 접근한 독혈인을 향해 말했다. "기다리느라 고생했다." 독혈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낭왕과 봉후 를 물리친 실력을 보아서인지 꽤나 신중하게 접근했다. "조심하십시오. 도검이 불침하는 놈들입니다!" 멀리서 강명이 소리쳤다. 순간, 을지휘소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강한 것은 더 강한 것에 부숴지는 법이다."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일까?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독혈인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무기 따위는 없었다. 애당초 그들 몸 자체가 무기였다. 그들의 손과 발, 몸뚱이 자체가 독덩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뱉는 숨결에도 흡입하기 만 하면 그대로 숨통을 끊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독이 포함되어 있었 다. 특히 진기를 끌어올리면 그 정도가 더했다. 그랬기에 아군이 당하 는 것을 보면서도 함부로 나서지 못한 것이다. 독은 피아(彼我)를 가 리지 않으니까. '과연 지독한 독이군.' 아직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 것도 아니건만 전신을 엄습하는 어두 운 기운에 을지휘소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역시 만독불침(萬 毒不侵)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독혈인의 독은 그것을 무시할 정도로 충 분히 위협적이었다. 을지휘소는 한층 신중한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파파팍! 희뿌연 검기가 독혈인들에게 쏘아져 갔다. 검기는 그들의 반응을 무 시하고 몸을 강타했다. 하지만 얻은 성과라곤 고작 두어 걸음 뒷걸음 질치게 만든 것이 전부였다. 독혈인은 그의 공격에도 아랑곳없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익혀온 혼원추혼장과 만독번천장법(萬毒飜天掌 法)을 연달아 사용하며 을지휘소를 압박했다. 장력이 스치고 지나가는 곳의 풀과 나무는 곧바로 생기를 잃고 죽어 갔다.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까지도 순식간에 부패하게 만드는 가공할 독기에 을지휘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많이 움직일 것도 없이 단지 몇 걸음 떼는 것만으로 독혈인의 공세를 벗어났다. 독혈인들이 지닌 무공이 나름대로 뛰어난 것이긴 해도 애당초 을지 휘소의 실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순수한 무공으로만 따지자면 독혈인은 강명은 물론이고 해남파 장로들도 상대하기 힘들 정도였다. 다만 그 무공 차이를 완벽하게 상쇄하고 나아가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은 도검이 불침하는 단단한 몸뚱이와 접근할 엄 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독 때문이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고사하고 살짝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독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연적으로 몸놀림이 둔해지고 과감한 공격을 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지휘소는 달랐다. 독에 대한 두려움도 그다지 없었고,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겁먹을 사람은 아니었다. 꽝꽝! 인간의 몸을 때리는 소리치고는 참으로 듣기 힘든 소리가 나며 독혈 인의 몸이 흔들렸다. 연속적으로 가슴을 타격한 을지휘소는 피해를 주 기는커녕 자신의 손만 독에 중독되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었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내부를 뒤흔드는 중수법을 사용했음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은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까지 충분히 단련되 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크흐흐흐흐." 을지휘소가 약간의 머뭇거림을 보이자 자신감을 회복한 독혈인들이 웃음을 흘렸다. "그따위 공격에 끄덕이나 할 것 같으냐!" 독혈인은 상대의 공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포효하듯 외쳤다. "몸에 대한 자신감이 상당하군. 좋아,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 지 보여주지." 을지휘소가 실소를 흘렸다. 순간, 기수식이 묘하게 변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던 강유가 소리를 질렀다. "무심지검!" 어찌 못 알아볼 것인가? 몇 날 며칠을 쫓아다니며 간신히 배운 무공 이 바로 무심지검이 아니던가? 파공성도 없었다. 눈으로 좇을 수도 없었다. 그의 검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검은 이미 독혈인의 몸을 베 고 있었다. 깡! 강유의 외침과는 달리 을지휘소의 검도 독혈인의 몸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다만 아무런 흔적도 내지 못하는 강명과는 달리 눈으로 똑똑 히 보일 정도의 실선이 만들어졌다. "역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몸뚱이군. 과연 대단해." 진정 감탄했다는 듯 외치는 을지휘소. 그런데 목을 어루만지는 독혈 인의 안색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없건만 목에서부터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의 몸을 사로잡았다. 그렇다 고 겁을 집어 먹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패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독혈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 다고 여길 정도로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고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간신히 이룩한 경지였다. 패배란 있을 수도 있어 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만 을지휘소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영 불안 했다. 일단 조심을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는 재빨리 동료의 등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그가 미처 몸을 틀기 도 전 을지휘소의 검이 움직였다. 막는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을 정도 로 빠른 속력. 서걱! 이전과는 분명 다른 소리였다. 몸은 달려가고 있었지만 머리는 제자리였다. 툭. 몸에서 분리된 머리가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몸통 역시 서너 걸음도 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사람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던 독혈인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것 을 지켜보며 입을 쩍 벌렸다. 도검이 불침이라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어쩌지 못하던 독 혈인이 단 두 번의 칼질에 목이 댕강 잘린 것이었으니. 특히 바로 앞에서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본 독혈인의 충격은 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의 뇌리에 죽음이라는 공포가 아로새겨졌다. 독혈인이 된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으으으으." 공포에 사로잡힌 독혈인이 뒷걸음질쳤다. 을지휘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그것 이 더욱 공포로 다가왔다. 독혈인은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도주하기 시 작했다. 꽝! 또 한 번의 충격이 모든 이들의 뇌리를 강타했다. 말 그대로 공포의 대명사였던 독혈인이, 그 독혈인이 비 맞은 쥐새끼 처럼 덜덜 떨며 도주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이다. 순식간에 이십여 장이 넘게 도주하는 독혈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을지휘소가 검을 들었다. 그리곤 잠시 갈등하는가 싶더니 검을 던졌다. 쐐애액! 맹렬한 소리와 함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희뿌연 빛에 휩싸인 채 우 아한 궤적을 그리며 독혈인을 뒤쫓는 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기어 검(以氣馭劍)의 경지였다. 퍽!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허공으로 치솟은 독 혈인의 몸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쓰러진 독혈인과 그의 심장을 단숨에 박살 내고 박힌 검이 묘한 대조 를 이뤘다. 금강석과 같은 단단한 몸뚱이와 지독한 독으로 공포의 대명사로 군 림하던 독혈인의 최후치고는 참으로 허무했다. "더 해보겠나?" 탁탁 손을 턴 을지휘소가 희염을 보며 물었다. 어림없는 말이었다. 낭왕이 쓰러졌고 봉후의 독봉이 한 줌 잿더미로 변했다. 거기에 단 하나만으로도 절대무적이라는 독혈인까지도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사신도 이런 사신이 없었다. 인간이 아니라 마치 염라부에서 자신을 죽 이라고 보낸 사자(使者) 같은 느김이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묘한 여운이 담긴 말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희 염은 봉후를 부축하며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가 무엇인지, 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을 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 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어떻게든지 눈앞의 사신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는 공포심과 더불어 최강의 적이 등장했음을 본진에 알려야만 한다는 취밀단 단주로서의 최소한의 의지뿐이었다. * * * 패천궁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일반 수하들은 물론이고 호법, 장로, 심지어 원로들까지도 패천궁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정문으로 집결했다. 정 문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무인들이 좌우로 도열하였는데 기대감과 경 외심, 약간의 설렘, 두려움 등 온갖 표정들을 나타내고 있는 그들의 시 선은 모두 한곳을 향해 있었다. "온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외침에 좌중이 술렁이고, 그들의 술렁거림 이 멈출 때쯤 일단의 무리가 정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와아!" 마침내 환야의 모습이 보이자 함성은 더욱 커졌다. 더불어 그녀를 알 고 있는 수뇌들의 얼굴은 한층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현대 패천궁에 남 아 있는 인물 중 그녀를 알거나 함께 생활했던 사람은 극소수로 원로원 의 원로들과 장로, 호법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초면인 상태였 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어서, 어서 오십시오!" 원로들의 수장이라는 체면도 잊은 채 한달음에 달려온 냉악이 예를 차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냉 대주. 아니, 이제는 대주가 아닌가?" "어느새 다 늙어 원로 자리를 꿰찼습니다." "호호,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러고 보면 세월이 참 많이 흐르긴 흘 렀군요." "많이 흘렀지요. 옛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얼마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론 감히 어쩌지 못하는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는 것인 가? 냉악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아무튼 냉 대... 원로를 만나게 되니 반갑군요. 또 누가 있을런 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나큰 호통이 뒤따랐다. "이 녀석아! 왔으면 냉큼 달려와 인사를 할 것이지 왜 이리 꾸물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찌 그 음성을 잊을 것인가? 고개를 돌리는 환 야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숙부!" "인정머리없는 놈!" 어느새 다가온 안당이 노안을 글썽이고 있었다. 늙어 지친 안당의 얼굴에서 반항기 넘치던 과거의 모습을 찾기 힘든 것이었을까? 물끄러미 쳐다보던 환야가 쓴웃음을 흘렸다. "많이... 늙으셨네요." "그럴 수밖에. 오십 년 세월이 훌쩍 뛰어넘었으니. 한데 너는 그다 지 변한 게 없는 것 같구나." "그런가요? 나도 많이 변했는데...." "아무리 변해도 내게는 그 옛날의 말썽꾸러기 조카일 뿐이다." "호호, 그거야 그렇지요. 참, 인사드려라. 작은할아버님이시다." 환야가 멀뚱히 서 있는 을지룡을 앞세우며 인사를 시켰다. "을지룡입니다." "그 녀석 참 잘도 생겼구나. 네 둘째더냐?" 을지룡을 살피는 안당의 시선은 무척이나 자애로운 것이었다. "예." "허허, 큰 녀석의 활약이 대단하다는 것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인석도 만만치는 않겠어." 환야는 대답 대신 빙긋이 웃음 지었다. "자자, 어쨌든 길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 리는 사람들도 많고 할 얘기도 많아." 안당은 그녀가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손을 덥석 잡고는 안으로 이 끌었다. 패천궁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인원에 다소 위축이 된 것인지 평상시와 는 다소 다른 태도의 을지룡이 그 뒤를 따랐다. * * * 혈영대의 부대주 무풍(無風)으로부터 현재 패천궁이 처한 상황을 간 단히 전해 들은 을지휘소의 안색이 몹시 어두웠다. "중천과의 전력이 백중세라...." "열세일 수도 있습니다." "싸움은 시작되었나?"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라, 녹영(菉英)." 무풍이 해남파에 파견 나온 비혈대의 대원에게 물었다. 지금껏 피 튀기는 혈전을 어찌 감당했는지 의아하게 보일 정도로 연 약하게만 보이는 녹영이 입을 열었다. "본궁과는 하루에 한 번씩 연락을 합니다만 아직까지 공격이 시작되 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적의 주력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 중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결전이 멀지 않았음은 확실합니다." "아마도 남천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강유가 말했다. "내 생각도 같네. 비록 지금은 수세에 몰려 있으나 패천궁은 쉽게 당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야. 중천의 전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하 더라도 만만히 보지는 못할 것일세. 또한 단독으로 패천궁을 쳤을 때 의 피해를 감안하면 웬만한 간담으로는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터, 남 천이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군." 강운교의 말에 모두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남천의 동진을 막느냐 못 막느냐는 것이 이번 싸움의 열쇠라 는 것인데...."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을지휘소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리곤 물었다. "남천의 주력이 지금 어디쯤에 있다고 했지?" "남동쪽으로 이백 리 떨어진 곳에서 계속 동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녹영이 대답했다. "흠, 이백 리라...." 말하는 모양새가 뭔가를 결정한 모양이라고 여겼는지 강운교가 조심 스레 물었다. "자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무슨 생각이라니요?" "행여나 엉뚱한 생각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하, 글쎄요." 애써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하였으나 강운교는 그의 행동에서 드러난 어색함을 놓치지 않았다. "막으려고 하는군." "그렇게 보입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게. 자네가 강한 것은 인정하나 남천은 자네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이 아니야." 강운교가 언성을 높였다. "패천궁을 보호하려면 막기는 막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놈들의 숫자가 얼마인 지 알기나 하는가?" 강운교의 시선이 녹영에게 향했다. 녹영이 재빨리 대답했다. "남천에 잠입한 동료의 전언에 따르면 주력이 팔백에, 인근에서 굴복 한 무인들까지 합치면 천여 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수백 명을 줄였음에도 그만큼입니다. 무리입니다, 이모부 님." 강명까지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을지휘소는 그저 담담히 웃음만 흘 릴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우리 해남파가 온전하여 지원할 수 있다면 말리지 않았을 것이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겠지. 그러나 이제 그만한 힘이 없네. 다 들 오랜 싸움과 부상에 지쳐 있어." "지금까지의 선전으로 충분합니다. 해남파에 더 이사의 희생을 요구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요." "그렇다고 자네 혼자만 보낼 수는 없네." "패천궁엔 어머님과 룡아가 있습니다. 또한 저와는 많은 인연이 있 는 곳이지요. 이대로 당하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기어이 할 생각인가?" 강운교의 안타까운 물음에 을지휘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답과 동시에 그의 시선이 냉혈에게 향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네." "예." 오가는 말속에서 이미 을지휘소의 뜻을 간파한 냉혈은 두말하지 않 았다. 더구나 패천궁을 위하는 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찌하려고 하는가?" 강운교가 재차 물었다. "숫자가 많은 이들과 싸우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뭐, 다소간 치사한 방법처럼 보이겠지만 효과는 좋지요." "치고 빠지기 작전으로 싸우려 하는군." "비슷합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강유가 나섰다. "아버님 곁에 남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강유의 시선이 잠시 부친에게 향했다. 그러나 결심을 굳혔는지 곧 정색하곤 또박또박 대답했다. "섬을 떠나올 때부터 이미 각오했던 바입니다. 가겠습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만...." 을지휘소가 말끝을 흐렸다. 강유 정도의 실력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면서도 아무래도 강운교가 신경 쓰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데리고 가게. 그나마 조금이라도 거들어야 가능성이 보일 것 아닌 가." "하하, 괜찮겠습니까?" "자네도 그렇고 어차피 저놈도 내 말은 듣지 않아. 지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해주게나." "알겠습니다. 강명아." "예, 이모부님." "나와 유아, 그리고 이 친구들이 떠나면 아버지를 모시고 피해 있도 록 해라. 굳이 싸움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 "그리하겠습니다." "참, 남천에도 첩자를 심어놓았다고 했지?" 을지휘소가 녹영에게 물었다. "예." 약간은 떨떠름하게 대꾸하는 녹영. 아마도 곧 이어질 말을 예견한 듯싶었는데. "자네도 따라오게. 아무래도 자네와 그 친구의 도움이 필요하겠어." "알... 겠습니다." 이제야 겨우 사지에서 벗어나는가 싶어 안심했던 녹영의 대답엔 힘 이 없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무풍이 어깨를 툭 쳤다. "사람이라면 어차피 한 번은 죽는다. 기왕지사 죽는 것, 멋지게 죽 는거야." 나름대로 위로를 하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소태 씹은 듯한 그의 표 정으로 보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듯했다. * * * "낭왕이 죽었다?" "그, 그렇습니다." "독혈인도 당했단 말이지?" "예...." 각 질문마다 살기가 번뜩였다. 납작 엎드린 채 대답하는 희염은 전 신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도망갔고?" "그, 그, 그렇습니다." 어느새 살기는 사라지고 기요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 렸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예. 예? 으악!"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던 그는 갑자기 날아온 술병에 이마를 맞고 나 뒹굴었다. "어디 믿을 만한 말을 지껄여야 믿던가 하지! 낭왕과 봉후가 당했다 는 것도 믿기 힘들거늘, 뭐가 어째? 독혈인이 당해? 독혈인이 네놈처 럼 빌빌대는 물건일 줄 알아?" "하, 하오나 트, 틀림없는....." 깨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자세를 바로잡은 희 염이 뭐라 대꾸하려 했으나 단숨에 막히고 말았다. "아가리 닥치지 못해!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입을 쫙 찢어놓을 줄 알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희염의 말문을 막아버린 기요후가 힘없이 앉아 있는 봉후에게 물었다. "네가 말해 봐. 저놈처럼 헛소리는 할 생각 하지 말고. 왜 놓쳤어? 또 함정에 당한 거냐? 그나저나 낭왕 이 자식은 어디 있어? 큰소리만 뻥뻥 쳐대더니만 어디로 내뺀 거야?" "죄, 죄송합니다." 봉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한지 아닌지는 내가 들어보고 판단할 테니까 빨리 말해 봐. 뭐 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주, 죽여주십시오, 천주님." 봉후는 머리가 깨지도록 이마를 찧어댔다. "죽이든 살리든 얘기를 들어야 결정할 것 아냐!! 복장 터지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취밀단 단주가 말한 대로입니다." 순간, 기요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 정이냐?" "예...." "......" 기요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목숨이 열 개가 아닌 한 희염이 거짓 보고를 올릴 리는 없을 터, 뭔 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났다는 것은 그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사안 이 너무도 엄청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 그러나 봉후의 대답으 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다 당한 거냐?" 기요후의 음성이 지금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은 적이 있었던가? 봉후 가 흠칫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낭왕은?" "죽었습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 그놈이 자랑하는 늑대들은 어쩌고? 수백 마리나 되는 놈들이 주인 하나를 지키기 못했단 말이냐?" "늑대들도 모조리 당했습니다. 제 독봉 또한 순식간에..." "허!" 이쯤 되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기요후는 더 이상 호통 칠 힘도 없는지 연거푸 술만 마셨다. "좋아, 좋아. 낭왕과 네가 당했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독혈인은 어찌 된 거야? 그 괴물들이 쉽게 당할 리가 없을 텐데." "역부족이었습니다. 독혈인들 역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그게 무슨 말이오? 독혈인이 힘도 쓰지 못하고 당하다니!" 만독문의 문주 기하학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평소의 그라면 천주의 대화에 절대로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 만 독혈인이 무엇이던가? 만독문이 사활을 걸고 만들어낸 지상 최강의 병기! 도검이 불침함은 물론이고, 웬만한 고수의 공격으론 생채기 하나 생 기지 않는 독혈인은 그의, 만독문의 자랑이었다. 그런 독혈인이, 그것 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 한꺼번에 당했다는 것. 그가 이성을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기요후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봉후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독혈인... 강했어요. 해남파 놈들을 쓸어버리는 데 거칠 것이 없었 지요. 감히 덤비는 놈도 없었고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놈들에게 주는 그 위압감이란... 참으로 대단했어요. 문주가 그토록 자랑했던 말이 허 언이 아니더군요. 누가 뭐라 해도 독혈인은 최강의 무기라 할 수 있었 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독혈인보다 더한 인간이 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독혈인보다 더 강한 자가 있었다는 말이에요." "미, 믿지 못하겠소이다." 기하학이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후∼ 사실 눈앞에서 본 나 또한 지금껏 믿어지지 않으니 무리도 아 니지요. 하나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 "그자에 대해 말해 봘. 대체 얼마나 강한 놈인 거냐?"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기요후가 물었다. 한데 독혈인을 제 거했다는 인물에게 은근한 호승심을 느끼는지 그의 음성은 노기를 드 러내던 조금 전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격앙되어 있었다. "지금껏 그와 같이 빠른 몸놀림을 본 적이 없습니다." "빠른 놈들이야 쌔고 쌨지." "빠르면서도 경망하지 않고 오히려 날카롭고 강맹합니다." "흥!" 기요후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에게 낭왕을 비롯하여 그를 지키던 늑대들이 모조리 떼 몰살을 당했습니다. 또한 놈을 공격했던 저의 독봉들마저도 모조리..." "늑대들이야 그렇다 쳐도 독봉이 한두 마리도 아닐 텐데 어떻게?" "모조리 태워 버렸습니다."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었지만 봉후는 을지휘소가 전신에 달라붙은 독봉을 온몸에서 뿜어낸 삼매진화의 열기로 태워 버렸던 일 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이 끝날 즈음 기요후의 안색이 심 각하게 굳어 있었다. "독혈인, 독혈인과의 싸움은 어찌 되었소?" 기하학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질문에 다소 어폐가 있었다. 그는 싸움이 어찌 되었는지를 물었지만 결과는 이미 나왔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당했어요." 순간, 기하학은 물론이고 방 안에서 숨죽이고 귀를 기울이던 이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기요후의 표정까지 돌변할 정도였으 니. "지, 지금 일방적이라고 했소이까?" 그가 아는 한 독혈인은 결코 일방적으로 당할 만큼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황급히 되묻는 기하학의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독혈인의 움직임으로는 그의 발걸음을 잡지 못했어요. 무엇보다..." 또다시 나서려는 기하학,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 던 봉후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독혈인이 내뿜는 독이 그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나름 대로 조심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절대로 두려워하는 모습은 아니었습니 다. 하긴, 맨손으로 목을 움켜쥐고도 멀쩡했으니까." "맨살을 맞대고도 멀쩡했단 말이오?" 더 이상 놀랄 힘도 없는지 기하학의 음성은 오히려 차분했다. "그래요. 아마도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닐까 싶 네요." "공격이 통하지 않더라도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 아냐? 쇳덩어리 보다 단단한 몸뚱이를 지닌 놈들이니까." 기요후가 말했다. "첫 번째 독혈인은 두 번의 칼질에, 그리고 삼십여 장이나 도주를 하 던 두 번째 독혈인은 그가 던진 칼에 심장이 꿰뚫려 즉사했습니다." "서, 설마 이...기어검!" 기요후는 상대가 삼십 장 정도의 거리를 격하고 검을 날려 독혈인을 쓰러뜨린다는 것을 듣자마자 이기어검을 떠올렸다. "이거, 진정 괴물이 아닌가?" "괴물... 그렇습니다. 괴물이라고밖에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습니 다." 탄식 어린 말과 함께 봉후의 설명이 끝났다. 이곳저곳에서 한숨 소리만 새어 나올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기요후의 침묵은 방 안의 공기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기요후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노인을 불렀다. "이보게, 마독(魔毒), 자네가 생각할 땐 어떤가?" 사천왕 중 가장 연장자이자 남천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기요후의 의 사 결정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마독 묵염(墨染)이 말했다. "글쎄요, 낭왕이나 봉후라면 모를까 독혈인을 깼다는 것은 분명 걱 정해야 할 일입니다." "자네라면 어떤가? 독혈인과 상대해서." "하나라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둘이라면 솔직히 자신없습니다." 마독은 조금의 가감도 없이 비교적 담담하게 자신의 실격을 평가했 다. 그러나 다소 아쉬웠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지지는 않겠지요." 엄청난 발언이었다. 독혈인이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아는 사람이라 면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발언. 그러나 어 느 누구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만큼 마독이라는 인간 또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 다. "아무튼 골치 아프게 되었군. 고수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고수 가 등장했단 말이지. 그것도 우리의 적으로." "그래도 한두 사람의 힘으론 지금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율평." "예? 예, 천주." 갑자기 자신을 호명할 줄은 몰랐는지 율평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패천궁에서 연락이 왔다고?" "예. 하루빨리...." "됐다. 무슨 내용인 줄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어. 단독으로 공격하 자니 큰 피해를 볼 것은 뻔할 테고. 뭐, 함께 공격하자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갈까? 재촉은 얼어죽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그래도 서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독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아네. 그렇다면 결국 해남파를 저리 놔두고 가야 된다는 말인 데." 바로 그때,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희염이 극도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해남파라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기요후가 턱짓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예상치 못한 놈의 등장으로 놈들을 지상에서 완전히 지우는 것은 실패했지만 살아남은 놈이라야 고작 기십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제 대로 움직일 수 있는 놈은 거의 없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상황 에서 감히 도발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한심하기는! 그럼 네놈은 여태까지 그놈들이 제 정신인 줄 알았느냐?" "예?" "애당초 얼마 되지도 않는 수를 가지고 우리에게 덤볐을 때부터 그 놈들은 미친놈들이었단 말이다." "아, 아무리 미친놈들이라도 제 몸 귀한 줄은...." 진땀을 흘리며 변명하려던 희염은 온몸에 내리 꽂히는 싸늘한 시선 에 황급히 꼬리를 말았다. 희염의 입을 막은 기요후가 좌중을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독혈인을 해치웠다는 자가 마음에 걸리지만, 어쨌든 지금은 패천궁 을 쳐야 할 때다. 그자와 해남파는 조만간 마무리를 지으면 될 터. 지 금부터는 전속력으로 패천궁을 향해 이동한다. 혹시 모르니 경계를 게 을리하지 마라!"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명을 받았다. "존명!" 마침내 패천궁을 불과 며칠 거리에 둔 남천의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 되었다. 제69장 악몽(惡夢) 복건성 서남부 남정(南靖)의 야산에 위치한 이름 모를 사당(祠堂). 요란하게 울리는 풀벌레 소리로 인해 귀가 따가울 정도였거만 허름 하기 그지없는 사당엔 고요한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락은 왔는가?" 침묵을 깨는 음성의 주인은 을지휘소였다. "예. 이곳에서 정확히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숙영을 하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인원은 변함이 없고?" "보급 때문에 꽤나 많은 인원이 남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칠팔백은 족히 되는 인원이라고 합니다." 녹영은 조금 전 남천에 잠입한 동료로부터 전해온 소식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십 리라... 그다지 멀지는 않군. 어차피 정면 대결을 할 것도 아 니니 인원이 많고 적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보게, 냉 대주." "예." "준비는 되었는가?" "예."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싸움은 저들을 괴멸시키는 것이 아니네. 그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저들의 발길을 막는 것이네. 그것이 불가능하면 최소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하고. 놈 들이 중천과 합류하는 시기를 늦춰야 한다는 말이네." "예." 너무나도 짧고 간명한 대답에 을지휘소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추 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비록 함께한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여러 말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던 을지휘소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냉혈을 비롯하여 혈영대원들에게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게. 반드시 상대할 수 있는, 아니, 한 수 아래 의 놈들만을 골라 상대하도록 하게. 놈들의 발길을 막자고 자네들의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하루아침에 끝날 싸움도 아니고 며칠 을 끌어야 하는 싸움이네. 또한 지금은 얼마나 많은 고수를 제거하느 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놈들의 진영에 얼마나 크게 동요를 일으키느 냐가 중요한 것일세."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해 두거니와 한시도 냉정함을 잃지 말고 적절한 상대 를 찾게." "예." "그럼 움직이도록 하지. 녹영, 자네는 이곳에 남게. 새벽이 오기 전 에 돌아올 것이니 잠이나 푹 자는 것도 좋겠군." "아, 알겠습니다." 혈영대원들을 따라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녹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 았다. 그믐달의 희미한 빛이 무색할 정도로 남정산(南靖山) 중턱의 분지는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이 피워논 횃불로 인해 환하게 밝혀져 있 었다. 중앙의 거대한 천막을 중심으로 어림잡아도 수십은 훨씬 넘어 보이 는 천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천막에는 그곳에 머물고 있는 문 파, 또는 개인의 표식이 눈에 잘 띄게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수백이 넘는 인원 중 천막에서 지낼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얼 마나 될까? 대다수의 인원은 나무 그늘 아래나 바위틈에서 동료들의 몸을 벗 삼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한꺼번에 잠을 청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막과 천막 사이와 그들이 잠을 청하고 있는 곳곳에서 느릿느릿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혹시 모를 적에 대한 경계를 서는 보초들이었 다. 워낙 많은 인원과 방대한 지역에 걸쳐 숙영을 하다 보니 보초를 서 는 인원도 수십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봐, 일어나. 시간 됐어." 숙영지 외곽을 돌며 보초를 섰던 가력(假靂)이 나무 아래서 모포를 둘둘 말고 단잠에 빠져 있는 동료 능곡(陵斛)을 깨웠다. "으, 음. 뭐...라고?" "시간 됐다니까. 어서 일어나." "후아암∼ 오랜만에 하는 노숙(露宿)이라 그런지 어째 적응이 안 되 는걸." 시간이 되었다는 말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능곡은 잠자리가 편 하지 않았던지 어깻죽지와 목덜미를 연신 주물렀다. "편한 소리 하지 마. 난 고작 한 시진을 자고 일어나 지금까지 경계 를 섰단 말이야." "누가 뭐라나. 아무튼 영 불편해." "시끄럽고! 경계나 잘 서. 참, 다음번 보초가 누군지는 알지?" "극엄(劇儼)... 이던가?" 확신을 하지 못하는지 능곡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바라봤다. "으이구, 금낭(禽狼)이다. 저쪽 바위 밑에서 자고 있으니까 엉뚱한 사람 깨우지 말고 제대로 깨워." 쏘아붙이듯 몇 마디 말을 내뱉은 가력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능곡 이 덮던 모포를 말며 몸을 뒤집었다. "뭐, 아무튼 고생했다. 잘 자라고." 머리끝까지 모포를 쓰고 자는 것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 능곡이 몸을 돌렸다. 몇 발자국이나 떼었을까? 모포가 살며시 내려가 더니 한쪽 눈을 감은 가력이 입을 열었다. "독혈인을 박살 냈다는 그 괴물 때문에 윗대가리들의 신경이 날카로 우니까 제대로 해. 행여나 지난번처럼 몰래 잠을 처자다간 치도곤을 당할 거다." 능곡이 고개를 돌렸을 땐 살며시 내려갔던 모포는 이미 원상태로 돌 아가 있었다. "어허,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 "염려하지 마라, 나도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너털웃음과 함께 능곡은 허리춤에 달려 있는 칼자루를 툭툭 치며 걸 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각 후, 장담과는 달리 그는 금낭이 잠을 청하 고 있는 바위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음." 능곡은 뭔가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살며 시 눈을 떴다. "누..." 더 이상의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가 눈을 뜨고 입을 열려는 찰나, 그를 목표로 다가온 어둠의 손이 입을 틀어막고 단검으로 목을 그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기도가 잘린 능곡은 비명은커녕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었 다. 일수에 능곡의 목숨을 빼앗은 손길은 곧이어 금낭에게까지 이르고 있었다. 스윽. 미약하지만 분명한 소리와 함께 금낭은 누군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 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상태로 조용히 숨이 끊어졌다. 선잠이 들었 던 능곡과는 달리 깊은 잠에 취해 있던 그가 일으킨 반응이라곤 허리 를 살짝 튕기는 것뿐이었다. 능곡과 마찬가지로 그의 목에도 조그만 혈선이 하나 그어졌다. 목에 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그가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음을 보여줄 뿐 이었다. 한 호흡도 되지 않아 두 명의 사내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와 똑같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 다. 물론 제법 연배가 있거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머무 르고 있는 몇몇 천막도 예외는 아니었다. "적이다!!" 동료의 죽음을 알아챈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외침이 분지를 울 릴 때까지 어둠의 손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꽝! 원목으로 만든 탁자가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더러는 천막을 뚫고 밖으로 나갈 만큼 날카로운 것도 있었으나 안에 있는 사 람들 중 그 누구도 함부로 반응하지 못했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하건만 살기 띤 눈으로 무복을 갖춰 입은 기요후는 노할 대로 노해 있었다. "암습을, 암습을 당했단 말이야?" "......" "입만 처닫고 있으면 끝나는 건 줄 알아! 율평!" "예, 옛! 천주님!" 겁에 질린 유평이 한 걸음 나서며 대답했다. "몇 놈이나 당했느냐?" "그, 그것이... 컥!" 머뭇거리던 율평은 기요후가 내지른 장력에 맞아 힘없이 땅을 굴렀 다. "희염! 피해 상황을 보고해라!" 이미 율평이 당한 것을 보고 있던 희염은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입 을 열었다. "사십이 명입니다.' "보다 자세히!" "일반 수하들이 사십에, 당주급이 두 명입니다." "당주급? 누가 당했느냐?" 마독이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남천에서 당주급이라면 상당한 고수였다. 그만한 고수를 아무런 흔 적도 없이 없앨 정도의 능력이라면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은령당(隱靈堂)의 당주 나소(那宵)와 곤령당(坤靈堂)의 당주 골패 (骨覇)가 당했습니다." "나소와 골패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니고 있는데..." "흥, 어찌 당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계집을 끼고 있다가 당했겠 지." 평소 그의 행실을 알고 있던 기요후가 콧방귀를 뀌며 소리쳤다. "하지만 나소까지 그렇게 당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암습을 당한 시점에서 이미 심각한 문제가 되어버렸어. 그렇게 주의 를 줬건만 암습 따위에 당하기나 하고." 말을 하면 할수록 열이 받는지 기요후는 침상으로 걸어가더니 옆에 놓인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떤 흔적이 남았느냐?" 마독이 물었다. "보다 자세하게 조사를 해봐야겠습니다만, 하나같이 목이나 심장을 잘렸습니다." "흠, 목이나 심장이라... 모두 일격에 끝냈다는 말이군." "예. 몇몇 시신은 자기가 죽는 줄도 몰랐는지 잠자는 모습 그대로 당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목이 잘리고 심장이 뚫리는데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는 것은 입을 틀어 막혔거나 네 말대로 당한 자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분명 뛰어난 살수가 벌인 짓일 게야. 그것도 한두 놈이 아니라 거의 문파를 이룰 정도로 대규모의. 한데 주 변에 그만한 살수들이 있을까?" "있습니다." "어떤 놈들이냐?" 준비된 모든 차를 단숨에 비워 버린 기요후가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 로 물었다. "혈영대입니다." "혈영... 대? 아!" 다소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요후가 크게 검미(劍眉)를 꿈틀거렸다. "해남파를 지원하기로 온 놈들이 혈영대였지, 아마?" "그렇습니다.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살 수로 키워진 놈들이라 패천궁에서도 패천수호대와 더불어 가장 상대하 기 힘든 놈들로 꼽히고 있습니다." 마독이 몇 마디 덧붙였다. "지난 정도맹과의 싸움에서도 맹활약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 약 그들에게 정도맹의 고수들이 암습당하지 않았다면 싸움의 양상은 크 게 변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지요." "그런 건 상관없네. 놈들이 어떤 놈들이고 누구를 상대했다는 것은 상과없어. 문제는 놈들이 나를 건드렸다는 것이지. 바로 코앞에서 내 수하들을 죽이고 유유히 사라졌단 말일세. 이거야말로 나를 농락한 것 이지. 그렇지 않은가, 마독?" 마독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염!" "옛!" "찾아라! 근처를 샅샅이 뒤져. 놈들도 인간인 이상 분명 흔적이 있 을 것이다. 취밀단은 물론이고 흑염단(黑炎團)과 흑렬단(黑烈團)의 지 휘까지 맡기마." "조, 존명!" "반드시 찾아. 만약 찾아내지 못하면 네놈 목을 베어버릴 줄 알아!" "아, 알겠습니다." "뭣해! 여기서 알짱거릴 시간이 있으면 가서 놈들의 목이라도 따와!" 거듭되는 호통에 희염은 제대로 에를 갖추지도 못하고 천막을 뛰쳐 나갔다. 그리곤 취밀단을 비롯하여 흑염, 흑렬단의 이백 인원을 동원 하여 남정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이라곤 을 지휘소가 곤히 자고 있는 녹영을 데리고 피하면서 남겨논 경고문뿐이 었다.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라. 남천의 악몽(惡夢)이 시작됨을 알리는 문구였다. * * * 복우산(伏牛山). 서부 고산 지대에 그 뿌리를 두고 내달려 서안(西安)을 지나 하남성 서남부 남양(南陽)에까지 이르는 복우산은 석인산(石人山), 노군산(老 君山)과 같이 이름있는 명산을 비롯하여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근 마을에선 신령한 산으로 숭상받는 수없이 많은 산들고 고봉(高峰) 을 한 자락에 품고 있는 거대한 산줄기였다. 정도맹의 비밀 분타가 잘한 곳은 좌로는 노군산과 우로는 석인산의 주봉을 바라보고 있는 백운산(白雲山)이었다. 정도맹과 무당파를 비롯하여 무당산에 모인 무인들이 불타는 무당산 을 뒤로하고 비밀 분타에 도착한 며칠 후, 하루 차이로 제갈세가와 소림사의 무인들이 속속 도착을 하였다. 적의 눈을 피해 마침내 비밀 분타에서 합류에 성공한 그들은 자신들 이 지닌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미완성이었던 비밀 분타를 꾸미기 시작 했다. 어차피 기본적인 건물이나 시설 등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기에 그들이 중점적으로 힘을 쏟은 곳은 기관매복과 진식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역시 제갈세가가 있었다. "얼마나 진척이 되었습니까?" 새로이 정도맹의 맹주 자리에 오른 강언이 물었다. "팔 할 이상은 된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않느냐?" 제갈경의 시선이 옆에 앉은 제갈선에게 물었다. "예, 할아버님. 분타 내부의 시설은 이미 끝이 났고 외부의 진식만 보다 견고히 하면 될 것으로 봅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나 제갈세가가 배출한 천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 이 보여준 제갈선은 지난날 제갈세가의 몰락의 책임을 지고 한결 성숙 해진 모습이었다. "진식이라면 어떤 것을 말함이더냐? 본 가에서와 같은 진식은 펼치 기가 힘들 것인데?" 손자의 능력을 자랑이라도 하고자 함인가? 그가 어떤 식으로, 또 무슨 진식을 펼칠지 뻔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뗀 제갈경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마음이야 지난 번 본 가에 펼쳤던 만변환환쇄금진(萬變幻幻鎖禁陳) 을 펼치고 싶지만 장단점이 있는지라 배제했습니다." "펼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야." "예. 그래서 동북쪽엔 금문진(禁門陳), 구궁진(九宮陳)을 펼쳤고, 서 북 방면엔 팔로연환진(八路連環陳)을 펼쳤습니다. 또한 분타의 정면으 론 팔진법을 응용하여 칠성참장진(七星斬將陳)과 현양지진(玄襄之陳) 을 연계해 펼쳐 두었습니다." "호∼ 칠성참장진과 현양지진을?" "예. 수목이 우거지고 유난히 암석이 많아 그것들을 이용하기 위함 입니다." "제대로 파악을 했구나." "하지만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는 소손도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워낙 다급하게 펼친 것이라...." "신경 쓸 것 없다. 미완이라 하더라도 하나하나가 만만히 볼 것이 아니야. 또한 계속해서 손을 보고 추가로 보완을 하면 될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하는 제갈선의 모습을 보며 제갈경의 입가에 절로 미소 가 지어졌다. "솔직히 진법에 대해선 잘 모르나 가주께서 그리 흐뭇해하실 정도면 꽤나 훌륭한 것 같습니다." 정전(正殿) 중앙에 위치한 맹주 강언이 물었다. "촉박했던 시간과 인원 등을 생각한다면 괜찮은 편입니다." "허허, 가주의 표정을 보니 그저 괜찮은 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갈세가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을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전에 모인 모든 이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제갈경의 음성에서 제갈선과 세가의 인물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펼친 진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제갈선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특히 당가의 도움이 컸습니다." "하하, 도움은 무슨.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네." 말은 그리하면서도 당가가 자랑하는 모든 장인들을 동원하여 기관 매 복에 필요한 암기와 독을 충당한 당욱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당가의 힘이 지대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너무 겸양하지 말게나. 그나저나..." 너털웃음과 함께 당가를 칭찬한 곽검명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급한 대로 이곳을 지킬 방어막은 충분히 갖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서 숨죽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상이 소리쳤다. "당연히 반격을 해야지요!" "당연한 겁니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또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하느 냐 입니다. 우선적으로 그것부터 결정해야 한다고 봅니다만." 이곳저곳에서 의견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체적인 의견은 철혈마단 을 쳐서 무당파를 수복하자는 것과 북천을 공격하여 소림사를 다시 찾 는 것으로 모아졌다. 더러는 패천궁을 지원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으 나 그들의 말은 금방 무시되고 말았다. "장문인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곽검명이 천중 진인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병력을 몰아 무당산을 제 안방 누비듯 하고 있을 철혈마단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체 면상 그리할 수는 없었다. 천중 진인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곽검명은 이번엔 소림사의 신임 방 장 명종에게 질문을 던졌다. "방장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아미타불! 소승의 짧은 생각으로 어찌 대사를 논하겠습니까? 여러 어르신들께서 고견을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다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성급히 생각하고 결정해서는 안 될 것이고 신중히 추진해야 할 일이라 고 생각합니다."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는 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 곽검명의 곁에 앉아 있던 단견이 술병을 탁 내려놓으 면서 소리쳤다. "흠, 그렇다면 패천궁을 지원하면 어떻겠소이까?" 일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조금 전, 패천궁 운운하는 사람 이 있기는 했으나 그의 의사는 곧바로 무시되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 도 아니고 단견의 말을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사람도 없었다. 대다수는 그의 의견 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무당파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주장하던 천엽 진인이 그랬다. "패천궁을 돕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우리를 제외하면 그나마 패천궁만이 놈들에 대항해 싸울 수 있소. 만약 패천궁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당연히 우리가 될 것이 오." "그렇다고 해도 패천궁을 도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소림사도 구 해야 하고 무당파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우선이라고 봅니다 만." 천엽 진인은 무당보다는 소림사를 앞세워 반대했다. 대다수의 인원 이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과 소림은 언제라도 회복할 수 있소. 분명히 기회가 있단 말이 오. 하나 패천궁이 무너지면 그야말로 끝장이오. 가령 소림사와 무당 파를 놈들에게서 되찾았다고 칩시다. 이후, 패천궁을 무너뜨린 중천과 남천이 그 여세를 몰아 북상하면 어쩌시려오? 북천과 철혈마단도 가만 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그들을 막을 자신은 있는 것이오?" 자신이 있을 리 없었다. 대답이 궁색했는지 헛기침을 하는 천엽 진 인의 낯빛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다고 지원을 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조용히 입을 연 사람은 왕호연이었다. "어째서 그러냐?" "우선 거리가 너무 멉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해도 지원병이 도 착하려면 넉넉잡아 열흘은 걸립니다. 전갈에 따르면 무이산 방어선이 뚫린 패천궁은 본궁으로 철군을 했고 주위를 에워싼 중천이 곧 총공세 를 펼칠 것이라 합니다. 상황을 따져 보건대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패천궁의 저력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도... 그렇군." 단견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소림이나 무당을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또 어째서 그런가?" 천엽 진인이 되물었다. "아무리 신중을 기했다 하더라도 천 명도 훨씬 넘는 인원이 이곳으 로 이동을 했습니다. 적이 모르리라 보십니까? 결코 만만한 놈들이 아 닙니다." "하면 자네의 말뜻은?" "놈들도 지금쯤은 우리가 이곳에서 재정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 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천과 중천이 힘을 합쳐 패천궁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처럼 북천과 철혈마단 또한 이곳을 공격할지 모릅니다. 지난번 무당산에서처럼 말이지요." "그때처럼 당하지는 않을 것이네." 강언이 슬며시 주먹을 쥐며 말했다. "물론 각개격파를 당했던 그때와는 다르겠지요. 저 또한 지금이라면 아무리 거센 공격이라도 능히 지켜내리라 믿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쩌자는 것인가?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천중 진인이 다소 짜증나는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왕호연의 눈길이 제갈선에게 향했다. 의미심장한 둘의 눈빛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흠흠,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것인가?" 맹주인 자신을 배제하고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기분 나빳 는지 묻는 강언의 음성엔 불쾌감이 한껏 묻어 나왔다. 하지만 애당초 그런 반응을 신경 쓸 왕호연이 아니었다. "딱히 좋은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여기 제갈 공자와 몇 가지 의 논을 해보기는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의견에 접근했지요." "그것이 무엇이냐?" 참지 못한 단견이 물었다. 맹주가 뭐라 해도 시답잖은 표정을 지었던 그가 자세를 고쳐 잡고 설명을 시작했다. "패천궁의 지원도 힘듭니다. 무당파나 소림사를 구하고자 함부로 준 동할 상황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놈들에 게 힘겹게 대항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정도맹이 건재하고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방법이 뭐냐니까!" 단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왕호연이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지도로 다가갔 다. "이곳을 주목해 주십시오." 수십 쌍의 눈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왕호연이 가리킨 곳 은 산동반도였다. 대다수가 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으나 눈치 빠른 몇몇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렸다. "설마 하니 중천의 본거지를 치자는 말은 아니겠지?" 제갈경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 산동악가!" 그제야 산동반도에 어떤 가문이 존재하는지를 인식한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렇습니다. 산동악가를 치는 겁니다." "미, 미친 짓일세!" 천엽 진인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리 주력이 빠져나갔다고는 하지만 악가는 사천 중 최강의 세력이라는 중천의 핵심일세. 놈들을 치자면 전력을 기울여야 하네. 자네 말대로 이곳이 노출되었다고 하면 우리가 떠난 사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 애써 구한 이곳을 놈 들에게 그대로 바치자는 말인가?' 천엽 진인은 물론이고 대다수가 왕호연의 계획에 회의적인 표정이었 다. 그러나 왕호연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악가에 대해선 이미 알아볼 만큼 알아봤습니다. 소수만으로도 충분 히 공략할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의 공백이 심한 상태입니다." "흠, 일리가 있군. 공격을 하자는 우리가 깜짝 놀랄 정도이니 그쪽이 야말로 공격당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테니까." 제갈경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흘러나왔다. 단견이 맞장구를 쳤다. "하긴, 철혈마단과 북천의 사이에 긴 우리가 그들을 공격할 것이라 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뭐, 한 번 해봄 직도 하군. 놈들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 이거늘 내가 빠질 수 없지." 왕호연의 의견에 늘 반대했던 오상이 동조하자 좌중의 분위기가 급 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군. 전선을 우회해 패 천궁의 본거지를 기습했던 일이 있었어. 궁주를 쓰러뜨리고 거의 승리 를 쟁취할 뻔했지." 곽검명의 말에 단견이 쓴웃음을 지었다. "원로라고 불리던 괴물 같은 노인들과 환 궁주만 없었다면 말이지 요." "그 얘기는 뭣하러 꺼내는 것이오? 제길,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거늘." 오상이 인상을 찡그리며 툴툴거렸다. "하면 도대체 누가,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것인가? 아무리 허술하다 하더라도 결코 만만치 않은 전력일 텐데." 천중 진인의 묵직한 말은 과거에 빠졌던 이들을 다시금 현실로 되돌 아오게 만들었다. "최대 이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이십? 지금 농담하는 건가?" 천중 진인의 이마에 석삼(三)자가 그려지고 다들 의구심 어린 표정 으로 왕호연을 응시했다. "여기서 악가까지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습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공격하고 회군하려면 많은 인원이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무공이 약해서도 안 되겠지요. 최소한 한 문파의 장로급 선배님들 수준의 무 공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한 수준의 무공을 지닌 사람을 뺀다면..." 천엽 진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왕호연 이 말을 잘랐기 때문이다. "참, 지금 와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궁귀 어르신께서 이번 계획에 참여한다고 하셨습니다. 을지호 그 친구도 함께요." 을지소문이 참여한다는 말에 좌중이 마구 술렁거렸다. 그리고 제갈 선과 눈빛을 교환한 왕호연이 연이어 결정타를 날렸다. "또한 수호신승께서도 힘을 보태신다고 하셨고, 지난밤 도착한 남궁 세가의 무인들 역시 찬성하였습니다. 뭐, 그들 중 이번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작 한둘에 불과하지만 말이지요." "허허, 이거야 원. 소문 형님이 움직이시면 을지 가문과 남궁세가가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겠지. 아울러 남궁세가의 태상호법을 자처하시는 검왕 노선배도 역시. 그렇다면 나도 빠질 수 없는 노릇." "아우가 가는데 이 우형(愚兄)이 빠질 수는 없겠지." 단견과 곽검명이 마주 보며 웃었다. "난 이미 지원했소." 과거와 마찬가지로 을지소문과 엮여야 하는 것이 다소 못마땅한지 오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흠, 그렇다면 나도 빠질 수는 없지." 투귀 이성진이 싸움에 빠질 리가 없었다. "소승도 참여하겠습니다. 아미타불!" 명종이 합장하며 불호를 되뇌었다. 곽검명과 단견에 이어 오상, 이성진, 공명 등의 지원이 잇따르자 왕 호연과 제갈선이 계획한 악가 정벌 계획은 사실상 결정지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중 진인을 비롯하여 몇몇은 여전히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반대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 * * "간밤엔 얼마나 당했느냐?" "열일곱 명입니다." "지난밤에 비해 조금 줄었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자조의 웃음을 짓는 기요후의 안색이 싸늘하다 못해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놈들의 흔적은 찾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아직......" 공포에 질린 희염이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를 바라 보는 기요후의 눈길이 더욱 매서워졌다. "나흘째다 지난 나흘 동안 목이 잘린 인원만 백여 명에 육박하고. 한데도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주, 죽여주십시오." "진짜? 진짜로 죽여줄까?" 벌떡 일어난 기요후의 몸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납 작 엎드린 희염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참으십시오. 그래도 아주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잖습니까?" 마독이 기요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소득? 고작해야 살수 세 놈 잡은 것 말인가?" "그래도 더 이상은 쉽게 당하지 않는다는 경고가 됐을 겁니다." "어추구니가 없어서 그러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함정을 파고 온 갖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수하들은 수하대로 잃고 생포한 놈들은 스 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게다가 지금쯤이면 패천궁에 도착했어야 할 우리가 놈들에 의해 발길이 묶여 있으니." "오늘부터라도 밤에 이동하고 낮에 잠을 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평이 조심스레 말했다. 두 눈을 치켜뜬 기요후가 소리를 질렀다. "뭐가 어째? 살수 몇 놈이 무서워서 편법을 쓰라는 것이냐? 감히 나 보고!"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다들 동요가 큽니다. 언제 목숨이 끊어질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상황에서 강행군은 무리입니다." 마독이 율평을 두둔하고 나섰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바로 옆의 동료들이 그런 식으로 죽어나가는데 무리도 아니지요. 아무튼 피해를 줄이고 최대한 빨리 패천궁에 도착을 하려면 그 방법뿐 인 것 같습니다." "흥, 그렇다고 꼭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을까?" "중천도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음." 마독이 슬며시 중천을 거론하자 굳게 다문 기요후의 입에서 침음성 이 흘러나왔다. "천주님." "알았네. 자네 말대로 하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무렇게나 손을 흔들어 허락하는 기요후는 자 신의 입술을 피가 배어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이제는 틀렸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저렇게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놈들을 제거하기란 무리입니다." 적진을 살피고 돌아온 혈영대의 부대주 무풍이 낯빛을 굳히며 말했 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더구나 무공이 낮은 자들이라면 모를까 고 수들의 이목을 숨긴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할 테니까. 밤에 이동하고 낮에 휴식을 취한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적으로선 어쩌면 가장 좋 은 대처일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큰일인데요. 후∼ 놈들이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면 우리가 어찌 해볼 길이 없지 않습니까?" 비록 살수의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지금껏 다른 누구보다 활약이 컸 던 강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럴 수도." 강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을지휘소. 한데 그의 안색은 그다지 걱 정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눈치챈 강유가 재차 물었다. "방법...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순간, 그를 비롯하여 모여 있는 혈영대원들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을 지휘소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짐짓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 는 냉혈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것이, 대답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 다. "있기는 있지. 다소 무식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게 무엇입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슬그머니 대답을 미룬 을지휘소의 입가엔 뭔지 모를 미소가 걸려 있 었다. 추수가 끝나지 않은 광활한 들판. 야음을 뚫고 일단의 무리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백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인원들. 한데 그만한 인원이 움직이는데도 가볍게 내뱉는 숨소리를 제외하곤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산을 벗어나느라 많이 지쳤습니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마독의 말에 기요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이 탁 트인 곳. 암습의 걱정이 없다고 판단한 수뇌부의 명에 따라 밤새 백여 리의 길 을 이동한 남천의 무인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각자 편한 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그때, 밤을 가르는 나지막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조심해랏!" 뭔가가 날아온다고 느낀 마독이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 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거의 지면에 붙어 날아오는 화살의 빠름에 비 할 바가 아니었다. "크헉!" 마독의 외침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려던 사내 한 명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적이다!" "주의를 경계하라!" 이곳저곳에서 경계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남천의 무인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의 달콤함을 미처 느껴보지도 못한 채 팽팽한 긴장감에 휩 싸였다.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살펴봐라." 기요후의 명을 받은 희염이 득달같이 시신을 살폈고 가슴에 박혀 있 는 나뭇가지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박혀 있었습니다." 희염이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있는 것은 새끼손가락보다도 더 얇은 나뭇가지로, 길이는 한 자 반 남짓 되었다. "화살 대용으로 쓴 것인가?" 나뭇가지를 들어 이리저리 살피는 기요후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 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 법이라고, 뛰어난 궁수라면 나뭇가지가 아 니라 더한 것으로도 시위를 당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 도 이건 아니었다. 그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는 곧게 뻗은 것도 아니고 중간 부분이 요 철이 있어 방향을 잡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닌 것이 억지로 화살 삼아 날린다면 웬만큼의 거리는 날아갈 듯 보 였다. 문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백여 장 내에 은신할 곳이란 없다는 데 있었다. "이따위 것으로 백여 장을 격하여 쏠 수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만한 살상력을 유지한 채로?" 기요후가 어이가 없어 물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었 다. 좌중의 소람이 가라앉을 즈음 화살이 날아온다는 것을 알아채자마 자 즉시 방향을 잡고 달려갔던 마독이 돌아왔다. "어찌 되었나?" 마독이 낭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놓쳤습니다." "놓친 것인가? 아니면 아예 발견도 못한 것인가?" 마독은 대답치 못하고 씁쓸히 웃고 말았다. "미칠 노릇이군. 암습이 힘드니까 이제는 아예 작심하고 달려드는 모양인데...." 그의 손에 들렸던 나뭇가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독혈인을 제압했다는 그 괴인 같습니다." "그럴까? 나뭇가지를 화살 삼아 백 장이 넘는 거리를 공격할 정도라 면 단순히 무공이 강해서만은 불가능해. 가히 측량하기도 힘든 활 솜 씨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야. 허, 천하에 대체 이런 솜씨를 지닌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스스로 자문하는 것이었거만 의외로 금방 대답이 들려왔다. "두, 두 명 있습니다." "두 명? 그들이 누구냐? 말해 봐라, 희염!" "하, 한 명은 오십여 년 전 천하제일로 추앙받던 궁귀 을지소문입니 다." "흠, 나도 그자에 대해선 들었다. 대단했었다지?" 무림에 적을 둔 자치고 을지소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 았다. 기요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했다. "다른 하나는?" "그자의 손자입니다." "손자?" "예. 근자 들어 삼시파천이라는 별호를 얻고 있는 자인데..." "아! 그래, 기억이 난다. 철혈마단에게 개망신을 주었다는 바로 그 녀석 말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조부의 궁술을 그대로 이어받았는지 활 솜씨가 가히 전율스러울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겠지. 궁술로써 천하를 흔들었던 자의 손자일 터이니. 하지만 그자들이 이곳에 나타날 리는 없... 응!" 기요후의 고개가 갑자기 돌려졌다. 그것과 동시에 예리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파공성이 끝날 즈음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쫓아라!" 기요후가 소리쳤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율평이 화살이 날아 온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반 각 후 돌아온 그의 표정도 조금 전 마독과 다르지 않았다. "놓쳤느냐?" "죄, 죄송합니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애꿎은 화살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조금 전 정면에서 날아온 화살이 이번엔 정반 대에서 날아왔습니다. 우리의 눈을 피해 우회하려면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입니다." "탁월한 경공 실력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마독의 얼굴은 심각할 대로 심각해져 있었다. "크크크, 놀랍군, 놀라워. 나 기요후를 이처럼 처참하게 농락할 수 있는 자가 있다니. 정말 어떻게 생겨먹은 위인인지 궁금하구나! 진정 궁금해! 크하하하하!!" 분노를 참을 수 없었음인가? 기요후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한데 그것에 대한 답례인지 웃음이 끝날 즈음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 왔다. 그리고 기요후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애마(愛馬)를 잃어야만 했다. 제70장 결전(決戰)의 서막(序幕) 무이산의 방어막을 뚫고 중천이 패천궁을 포위한 지도 며칠, 그동안 양측 간엔 치열한 탐색전과 정보전, 그리고 암살전이 벌어졌다. 사소 한 규모의 국지전도 벌어졌으나 승패를 결정지을 만한 대규모의 싸움 은 벌어지지 않았다. 최소한 지난밤까지는 그랬다. "어찌 되었나?" 매실주(梅實酒)를 반주 삼아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악위군이 술을 따 르는 신도에게 물었다. "이차 방어선까지는 뚫었습니다." 담담히 대답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신도의 음성엔 자신감이 넘쳐흘 렀다. 패천궁이 펼치고 있는 방어막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요소요소에 몸을 숨기고 매복하며 적을 기다리는 것이 첫 번째였고, 이 차 방어막은 궁 주변에 온설화가 심혈을 기울여 펼쳐 놓은 기관진식이 었다. 세 번째 방어막은 외성, 네 번째이자 마지막 방어막은 당연히 패 천궁의 내성, 즉 심장부라 할 수 있었다. 신도는 그중 두 개를, 그것도 새벽 무렵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한 지 반나절 만에 뚫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호∼ 벌써?" 기분 좋게 잔을 비운 악위군이 되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예. 그동안 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었지만 치밀하게 조사한 것이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놈들이 매복하고 있는 장 소, 감추어놓은 기관진식이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고생했군. 그래, 피해는 얼마나 입었는가? 놈들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백에 조금 못 미치는 사상자를 냈습니다." "적은?" "절반 정도 됩니다." 악위군의 얼굴에 드러났던 웃음이 지워졌다. "흠, 그다지 효과적인 싸움을 한 것은 아니군." "삼분지 이가 넘는 인원이 기관진식에 당했습니다." "기관진식?" "예. 꽤나 지독하게 설치를 해놓아서...." "자네가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안 봐도 알겠네. 자네를 곤란하게 할 정도라면 저쪽에도 꽤나 쓸 만한 인물이 있다는 말인데." "온설화라고... 나이는 어리나 뛰어난 군사가 있습니다." "아, 일전에 얘기했던 그 여자 아이 말이군." "예." "어쨌든 거치적거리는 것은 다 치운 셈이니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겠지. 이후의 계획은?" "일단 공격을 멈추고 천주님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와 는 달리 앞으로의 싸움은 쉽지 않은지라...." "쉽지 않을지는 몰라도 결과는 이미 정해진 싸움이지. 요는 얼마나 빨리 피해 없이 끝내는 것일세. 그나저나....." 악위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천은 어찌하고 있나? 약속대로라면 도착을 해도 한참 전에 했어 야 하거늘." "여전히 이동하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이동? 흥, 싸움이 끝날 때까지 이동만 할 셈인가 보군. 승냥이 같 은 놈들." "해남파에 꽤나 고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신도의 말에 악위군의 입술에 비릿한 조소가 지어졌다. "해남파? 웃기는 소리지. 핑계를 대려면 좀 그럴듯한 핑계르를 댈 것 이지, 해남파라니! 헛기침만으로도 쓸어버릴 놈들에게 묶여 수백, 수천 의 인원이 꼼짝 못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단순한 핑계 같지는 않습니다." "핑계가 아니면?" "뭔가 이상하기는 합니다. 일전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일부의 병 력이 해남파를 쓸어버리기 일보 직전이라고 했고 본진은 빠르게 동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해남파가 멸문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한 이동 속도가 급격히 늦어진 데다가 낮을 피해 밤에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밤에? 설마 하니 해남파에 당했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리없는 것 같습니다. 싸움이 끝난 후에 도착하면 생색을 낼 수도 없 고 그 어떤 이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 고 있을 테니까요." "흠." 그제야 악위군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조소가 사라졌다. 그리곤 정색 을 하며 물었다. "어떤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보는가?" 잠시 멈칫거린 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악위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르는 자들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더구나 싸움이란 기세가 올랐을 때 단숨에 해치워 야 하는 것이지 이렇듯 진을 빼며 기다리다간 죽도 밥도 안 돼." "하오면?" 악위군이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지금 즉시 명령을 내리게. 오늘밤, 패천궁을 우리가 접수하도록 하 지." "알겠습니다." 악위군의 눈빛에서 이미 확고한 결심을 읽은 신도는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빈 잔에 마저 술을 따르곤 조용히 물러났다. * * * 나뭇잎이 아프도록 볼을 스치며 지나가고 주변의 지형지물이 삽시간 에 변했다. 그럼에도 마독은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빨리 내달렸다. 시선은 이십여 장 앞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 인영에게 고정된 채. '놓치지 않는다!' 암습자의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 추격하기를 수차례. 단 한 번도 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건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어 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던 적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놈! 어림없다.' 깊은 숲, 어둠은 도망치는 자에겐 더할 수 없이 유용한 친구지만 쫓 는 자에겐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끝장인 것을 알기에 마독은 턱밑까지 차 오르는 숨을 억지로 참으며 속도를 높였다. 그러기를 얼마간, 은신처에 도착했는지 아니면 추격을 완전히 뿌리 쳤다고 생각했는지 앞서 달리던 인영의 발걸음이 더뎌졌다. 그의 주변 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본 마독이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찾았다!'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마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 디어 수일 동안 자신은 물론이고 남천을 괴롭혀 온 적의 실체에 접근 한 것이었다. '하나, 둘....' 불빛에 비쳐 희미하게 드러나는 적으 모습을 헤아린 마독이 슬그머 니 몸을 돌렸다. 행여나 기척이라도 일까 네다섯 걸음 물러나는 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하지만 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날카로운 파공 성이 들려왔다. 피이잉. 마독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춰졌다.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채였다. 딱! 어둠을 뚫고 날아온 화살이 조금 전 그가 기댔던 나무에 깊숙이 박 혔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독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화살에 하얀 천이 묶 여 있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흔적이 발견된 것은 기정사실. 그는 조금 도 머뭇거리지 않고 화살에 묶여 있는 천을 풀었다. 밑도 끝도 없이 단 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래(來)! 굳게 다물어진 입, 한곳으로 모인 눈썹,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에 자조의 웃음이 피어올랐다. "쫓은 것이 아니라 내가 유인을 당한 것이군." 몸을 숨기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마독이 불길을 향 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행여나 기습이라도 해올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몸은 극도로 긴장하 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적은 그가 코앞까지 다가갈 때까지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어서 오시오." 중앙에 자리잡고 있던 을지휘소가 말했다. 몸을 일으킨 혈영대원들이 그의 뒤로 물러나고 마독은 모닥불을 사 이에 두고 을지휘소와 마주하게 되었다. "한잔하시겠소?" 을지휘소가 잔을 내밀었다. 마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불길을 통과한 잔이 그의 손에 빨리듯 다가 왔다. 단숨에 잔을 비운 마독이 잔을 던지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불길을 통고한 잔이 을지휘소의 손에 안착했다. "열넷이라...." 주변을 살펴 확실하게 인원을 파악한 마독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고작 열넷에 불과 한 인원 때문에 수백의 발길이 묶인 것이 확실해지자 참을 수 없는 참 담함이 밀려들었다. "어째서 날 불렀느냐?" "부른 적은 없소만." "쓸데없는 신경전은 하고 싶지 않다. 어쩐지 이상했다. 지금껏 흔적 조차 발견하지 못한 적을 이토록 쉽게 쫓을 줄을 생각도 못했으니까. 불렀으면 용건을 말해 봐라." 마독이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자 을지휘소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다. "언제까지 이런 소모전을 계속할 생각이오?" "무슨 뜻이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패천궁으로의 움직임을 멈춰주시오." "역시 그것이었군. 패천궁의 인물이냐?" "아니오." "저들은?" 마독이 혈영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이 패천궁의 무인들인 것은 맞지만 나는 아니오. 아주 연관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소만." "너희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느냐?" "지금껏 막아왔소만." 마독의 얼굴에 냉기가 깔렸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따위 치졸한 암습에 휘둘릴 우리가 아니 다." "경고로서는 충분히 통했다고 생각하오." "이전까지는 몰라도 이후부터는 아니다." "계속해서 이동하겠다는 것이오?" "물론. 또한 네놈들도 용서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응징할 것이다. 단, 곱게 물러난다면 그간의 일은 덮도록 하겠다." 평소의 마독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겁했을 것이나 을지휘소는 그가 지금 얼마나 크게 양보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겠구려." "후회할 것이다." "누가 후회할 것인지 보면 알 것이오. 후∼ 이만 돌아가시오." 을지휘소가 한숨을 내쉬며 축객령을 내렸다. 하나 마독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이대로 돌아갈 것이라 여기는 것이냐?" 순간, 그의 음성에서 전의를 느낀 혈영대원들이 일제히 칼을 뽑으며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미동도 없이 을지휘소를 노려보는 마독이 싸늘 히 외쳤다. "꺼져라! 네놈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흥, 목이 떨어진 다음에도 그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지...헛!" 비아냥거리던 무풍은 마독의 소매에서 뭔가가 날아온다고 느끼곤 기 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반응보다는 마독이 날린 돌멩이가 훨씬 빨랐다. 돌멩이가 무풍의 얼굴을 강타하려는 찰나 을지휘소의 손을 떠난 잔 이 무풍과 돌멩이 사이을 가로막았다. 땅! 경쾌한 충돌음과 함께 돌멩이가 산산조각나며 흩어졌다. 조그만 파 편이 무풍의 얼굴을 훑고 지났으나 상처를 입힐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무풍이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치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 마독 이 말했다. "과연 훌륭한 솜씨로군." "천만에 말씀이오. 노인장의 탄지신공(彈指神功)은 귀신이 놀라고 도망칠 경지였소." 마독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 술잔도 뚫지 못하는 것이다." "술잔이 단단해서 그렇소. 아무튼 더 이상 소란은 원치 않으니 돌아 가시오." "분명 말했을 것이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진정이오?" "그렇다." 을지휘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태도에서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음을 느낀 것이다. "네가 독혈인을 쓰러뜨렸느냐?" 한 발 앞으로 다가온 마독이 물었다. "그렇소." "역시 그렇군." 마독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나는 남천의 묵염이다 보통 마독이라 하지." 그는 차분하게 자세를 잡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을지휘소라 하오." 마독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을지라면... 혹, 궁귀 을지소문과는..." 무림에 을지라는 성을 쓰는 사람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가 기억하기론 남천에서도 두엇은 되었으니까. 하나 어째서 그런 의문이 들었는지 의식도 못한 채 마독은 궁귀 을지소문과 그와의 관계를 물 었다. "부친 되시오." "그.. 랬..군." 마독이 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혈인을 쓰러뜨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강적임을 인식하 고 있던 바, 거기에 그가 과거 천하제일인이었던 궁귀 을지소문을 부친 으로 두고 있다는 말은 마독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을지휘소의 눈을 차분히 응시한 마독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피리링. 괴이한 소리와 함께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것은 여인네들이 많이 쓴 다는 연검(軟劍)이었다. 채찍처럼 힘없이 땅에 끌리고 있는 연검은 대 충 헤아려도 그 길이가 보통의 검보다 두 배는 더 됨 직해 보였다. 을지휘소도 검을 비스듬히 누이며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땅에 끌리는 연검보다는 마독의 왼 팔뚝을 덮고 있는 비갑(臂甲)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구 멍들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어떠한 장치가 되어 있는 듯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낀 반지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마독의 공격이 시작됐다. 피리리리링. 언뜻 휘파람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연검이 날아들었다. 흐물거 리며 넘실대는 것이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움직 임 또한 무척이나 기기묘묘했다. 을지휘소는 침착하게 검을 들었다. 그리고 가슴 어귀로 날아오는 연 검을 향해 검을 뻗었다. 검과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으나 그 흔한 병장기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연검의 날이 을지휘소의 검을 휘감으며 타고 올랐기 때문이 다. 연검은 을지휘소의 얼굴을 노렸다. 황급히 몸을 누이며 공격을 피한 을지휘소가 검을 움직이려 하였다. 하지만 연검에 의해 단단히 결박당한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에 도 방향을 튼 연검이 그의 목덜미를 노리며 다가들었다. 검을 빼는 것 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오히려 앞으로 몸을 숙이며 마독을 향해 돌진했다. "큭!" 미처 몸을 빼지 못한 마독이 을지휘소의 어깨에 가슴팍을 들이 받히 고 신음성을 내뱉었다. 비틀거리는 몸은 네다섯 걸음을 물러나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연검의 결박을 풀고 검을 회 수한 을지휘소가 반격을 시도했다. "꺼져랏!"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마독이 연검을 채찍 휘두르듯 휘둘렀다. 피리리링. 몸의 회전이 팔을 타고 연검에 전해지자 격한파도와도 같은 움직임 이 시작됐다. 어찌나 빠르고 날카롭고 기묘한지 그 움직임을 미처 예측할 수 없었 던 을지휘소도 함부로 반격하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손목을 트는 마독, 그의 움직임에 따라 연검이 미 친 듯이 춤을 추었다. 멈춘 듯 멈추지 않고, 흔들리듯 흔들리지 않는 연검의 움직임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을지휘소가 출행랑을 이용하여 황급히 몸을 뺐다. 하지만 마독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 발걸음을 막고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판단한 을지휘소가 가볍게 심호흡을 했 다. 그리곤 시선을 집중하여 쇄도하는 연검의 움직임을 살폈다. "위, 위험!" 을지휘소가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한 혈영대원들이 어쩔 줄을 몰라하 며 소리를 질렀다. 다만 강유와 냉혈만은 냉정을 잃지 않고 조용히 싸 움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연검의 움직임이 아무리 날카롭고, 빠르고, 기 묘하다 하더라도 을지휘소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기엔 지 금까지 그가 보여준 무위는 너무나 강했다. 그것은 곧 증명되었다. 일직선으로 펴진 연검이 을지휘소의 목을 꿰뚫으려는 순간, 그의 어 깨가 들썩였다. 그리고 마독의 연검은 목표까지 불과 한 치를 남겨두 고 허망하게 튕겨져 버렸다. 단숨에 공격을 막아낸 을지휘소가 몸을 전진시켰다. 동시에 펼쳐지는 천하제일의 쾌검 무심지검. 눈으로 좇기에도 벅찬 빠름, 인식을 하긴 했어도 막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마독이 팔을 들어 필사적으로 몸을 보호했다. 누가 봐도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숨죽이고 싸움을 지켜보던 혈영대원들은 처참하게 잘려 나갈 팔을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더러는 눈을 질끈 감기도 하였다. 상황이 급반전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창! 난데없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당연히 잘려 나가야 할 팔은 멀쩡했다. 팔뚝에 착용한 비갑 때문인지 오히려 을지휘소의 검이 한 자나 튕겨져 나갔다. 을지휘소의 공격을 막아낸 마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부 터 비갑과 손가락에 낀 반지를 주의 깊게 살폈던 을지휘소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죽어랏!" 마독의 일갈과 함께 비갑에서 무수한 세침이 쏟아져 나왔다. 슈슈슈슉! 한두 개가 아니었다. 삽시간에 수십 개의 세침이 그와 을지휘소가 마주하고 있는 좁은 공간을 점령해버렸다. 단순히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을지휘소가 진기를 실어 팔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나 세침의 수는 너무도 많았고, 충분히 대비 를 했음에도 그 속도 또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결국 서너 개의 세침이 소매를 뚫고 팔뚝에 박혔다. 고작 바늘만한 세침 몇 개가 박혔다고 신경 쓸 일도 아니었으나 팔 뚝에 박힌 세침을 재빨리 제거하는 을지휘소의 안색은 그다지 밝지 않 았다. 침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피부색이 변색하더니 급속도로 팔이 저려왔기 때문이다. '독이군. 그것도 꽤나 지독한.'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른 몸이 위험 신호를 보낼 정도라면 보통의 독 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삼매진화를 일으켜 독기를 제거할 여유는 없 었다. 기선을 제압했다고 여기 마독이 득달같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혈도를 점해 독이 침투하는 것을 막은 을지휘소는 전신의 요혈을 집 요하게 노리는 마독의 공격을 피하며 연거푸 뒷걸음질쳤다. 슈슈슉! 연검과 합세하여 무수한 세침이 날아들었다. 하나같이 극독을 품고 있는 세침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접근하여 을지휘소를 괴롭혔다. 하지만 긴장할 대로 긴장하여 완벽하게 대처를 하는 통에 그 의 몸에 적중한 세침은 단 하나도 없었다. "끝장이다!" 확고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마독이 최후의 공격을 위해 허공으 로 뛰어올랐다. 연검은 어느새 허리춤에 감겨 있었다. 마독의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비갑과 반지에 연결된 실선에 힘이 가 해지고, 비갑에 숨겨놓았던 세침이 일시에 쏘아졌다. 동시에 몸을 빙 글 회전시키며 전포(戰袍:싸울 때 입는 긴 도포)를 벗어 휘둘렀다. 파파파팍. 전포 곳곳에 숨겨둔 수백의 비수, 암기 등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 며 을지휘소를 노렸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여전히 허공에 떠 있던 마독이 허리에 차고 있던 연검을 풀었다. 몸에 감겼다 빠르게 풀리는 힘에 의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표창들이 일제히 비산(飛散)을 하고 마지막으로 단단하게 펴진 연검이 을지휘소의 미간을 노리며 짓쳐들었다. 천하제일을 자랑한다는 당가의 만천화우(滿天花雨)가 이럴 것인가? 혈영대원들은 천지사방을 뒤덮는 무시무시한 암기들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심지어 지금껏 여유를 보였던 냉혈과 강유마저도 두 눈을 부릅 뜬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암기군을 보며 을지휘소의 안색이 살며시 굳 어졌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마독의 공격이 충분히 위협적이고 다소 간 공포를 느낄 만한 위력이긴 해도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애지검으론 힘들다.' 을지휘소는 조금 전 진기를 잔뜩 불어넣은 소맷자락을 뚫고 들어온 세침이 마음에 걸렸다.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도록 만들어진 암기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세침이 바로 그런 암기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애지검이 어떤 것이던가? 그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는 최강의 수비 초식. 어쩌면 무애지검으로 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었따. 무애지검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무극지검뿐이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무위공을 일으키자 지금껏 단전에 얌전히 잠 자고 있던 거력이 꿈틀거렸다. 단전에서 시작해 단숨에 기경팔맥(奇經 八脈)을 돌아 전신의 세맥(細脈)까지 그 힘이 미치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터질 듯한 힘을 주체하지 못한 을지휘소가 검을 곧추 세웠다. 검을 통해서 발현된 거력이 그의 몸을 감쌌다. 을지휘소의 몸은 검 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의해 삽시간에 사라졌다. 파스스스. 가장 먼저 도착한 세침이 그 힘에 막혀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 와 마독의 사이엔 여전히 많은 암기들이 있었고 하나같이 맹렬한 힘과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암기 하나하나엔 독혈인이 뿜어내 던 독과 버금가는 극독이 발라져 있었다. "타핫!" 을지휘소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그의 몸을 휘감고 있 던 빛의 무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피, 피해랏!" 긴장된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냉혈과 강유가 놀라 부르짖고, 그렇 잖아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던 혈영대원들이 황급히 물러났 다. 파파파팍! 먼저 도착한 암기군이 빛무리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더러 는 힘없이 떨어지고 더러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으며 어떤 것은 날아올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꽈꽈꽈꽝! 을지휘소의 몸에서 뻗어나가기 시작한 기운이 주변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땅거죽이 뒤집히며 나무가 쓰러지고 바위가 박살났다. 천지 의 기운이 모조리 그 기운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가더니 종내엔 더욱 큰 힘으로 발출되었다. "아!" 눈으로 보았음에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두 손을 축 늘어뜨린 마독은 멍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 전히 많은 암기가 그에게 날아갔지만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 무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핏!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상대에게 던졌던 비수 하나가 볼을 스치며 지 나갔다. 상처에서 곧바로 피가 흘렀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퍽퍽. 그의 몸에 연거푸 암기가 박혀들었다.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음에도 그에겐 이미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의 회오리가 그의 몸을 휩쓸었다. 비명은 없었다. 더 이상의 폭음도, 천지를 울리는 굉음도 없었다. 미친 듯이 요동치던 흙먼지와 자갈들이 제자리를 찾고 주변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천천히 검을 내리 는 을지휘소와 두 손을 마주 잡고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독이 있었다. 그는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후∼" 물끄러미 마독을 바라보던 을지휘소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 었다.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는 해도 그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았기 때 문이다. "유아야." "예, 이모부님." "말 한 필만 가지고 오너라."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예." 황급히 뛰어간 강유가 진한 갈색의 준마를 데리고 왔다. "그를 말에 태워라." 고개를 끄덕인 강유가 도와주러 온 무풍에게 말고삐를 넘기고 조심 스레 마독을 안아 들었다. 그리곤 힘겹게 안장에 태우더니 끈을 이용 해 단단히 고정을 시켰다. "다녀오마." 말고삐를 받아든 을지휘소가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열은 물론이고 순수 무공만으로도 천주인 기요후에 이어 두 번째 였던 마독 묵염. 그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 * * 자시(子時:23시∼01시)가 넘을 무렵의 패천궁 외성. 총공세를 펼치는 중천을 맞이하여 패천궁의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막아랏!" "물러서면 안 된다!" 거친 함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곳저곳에서 고통의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단 한 시진 동안 벌어진 싸움에 쌍방 족히 이백 이 훌쩍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주변은 쓰러진 시신들과 널린 병 장기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그들이 흘린 피는 은회색으로 이루어진 벽돌 바닥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싸움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 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대치한 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좌측을 지원해! 그쪽이 뚫리고 있다!" 사마유선을 대신하여 혈궁단의 단주를 맡은 풍간이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따라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혈궁단원들이 일제히 활을 돌렸다. 그리곤 한 호흡이 끝나기도 던에 수백여 발의 화살을 날려 댔 다. 핏빛의 화살, 공간을 가득 메우고 한곳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의 모 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크악!" "커흐흑!"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무방비로 당한 이들이 가슴이며, 목, 옆구 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삽시간에 십여 명이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 다. 기세를 올렸던 중천의 무인들이 겁에 질려 주춤거리고, 그때를 놓 치지 않은 흑기당의 무인들이 그들을 맹렬히 몰아붙였다. "또 저놈들이군." 일선에서 싸움을 지휘하고 있는 호법 사마표와 종자기(宗玆氣)가 얼 굴을 찡그렸다. "숫자는 몇 놈 되지도 않는데 꽤나 성가시군. 놈들에게 당한 놈들이 벌써 얼마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떠는 사마표와는 달리 종자기는 냉정했다. "결코 만만하게 볼 놈들이 아닐세. 이런 혼전 중에 저 정도로 정확 하게 화살을 날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훈련이 잘되었다는 것. 놈들 을 제압하지 못하고선 싸움을 이길 수 없네." "허니 어쩌면 좋겠나? 시도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사마표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 역시 혈궁단을 제압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역으로 화살을 날려보기도 하고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그들을 노리기도 하였다. 하지 만 화살을 날렸던 이들은 역으로 공격을 받아 모조리 몰살당했고, 우 회를 했던 자들도 미처 접근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 았다. 하필이면 혈궁단 바로 정면에 위치하여 이들을 보호하고 싸우는 이들이 바로 패천궁의 주력이라 할 수 있었던 혈참마대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혈궁단 주변엔 예사롭지 않은 노인들 몇이 눈에 띄기도 하였 다.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등천단을 움직이지." 종자기의 말에 사마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등천단을?" "싸움을 빨리 끝내려면 어쩔 수 없네." 삼단 중 현재 싸움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회천단이 유일했다. 파천 단은 천주의 호위를 맡기 위해 빠져 있었고 등천단은 패천수호대를 상 대하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중이었다. "흠, 그렇기는 하지만... 앞으로 패천수호대도 있고..."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어도 사마표는 등천단을 움직 이는 것에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 듯했다. "패천수호대는 파천단이 상대하면 되네. 어차피 저놈들도 물리쳐야 하고." 종자기가 가리킨 사람들은 대주 일검경천 양단풍을 중심으로 기세 를 높이고 있는 혈참마대였다. "혈궁단 못지않게 위험한 놈들이야. 놈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이곳을 뚫기는 힘드네." "흠." 그는 혈궁단과 혈참마대를 제압하지 못하곤 싸움에 이길 수 없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네. 자네 말에 따름세." 결국 고개를 끄덕인 그가 후방에 연락을 취했다(후방이라 봐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등천단은 연락받기가 무섭게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담은 깃발을 앞 세우고 달려왔다. "자네들이 고생 좀 해주어야겠네." 사마표가 등천단의 단주 혈룡(血龍) 악후(岳珝)에게 말했다. 이제 겨우 중년으로 접어든 그는 회천단을 맡은 광뢰 악영과는 달리 일찌감치 그 무공을 인정받고 있던 자였다. "알겠습니다." 살며시 허리를 꺾으며 대답하는 악후의 모습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목표는 혈참마대! 가자!" 짧고도 강렬한 말로 명을 내린 악후가 앞장서 달려나가고 그 뒤를 이어 등천단의 고수들이 노도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크아악!" 악후의 발길을 막던 흑기당의 무인이 처참한 비명성과 함께 쓰러졌 다. 자신의 실력에 확신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뒤처 리를 할 사람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그는 자신이 쓰러뜨린 사내의 생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그의 목표는 당연히 혈참마대의 대주 양단풍이었다. "건방진!" 매섭게 달려드는 악후를 보며 양단풍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아직 상 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그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 것이었 다. 그는 수하들이 만류할 틈도 없이 대열에서 이탈해 악후에게 달려갔 다. 깡! 검과 검이 부딪쳤다. 맹렬한 불꽃이 허공에서 산화했다. 끼끼끼! 검과 검이 서로 대치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단 한 번의 출수로 그 들은 상대의 강함을 인식했다. 한 치의 우열도 가리기 힘든 박빙의 실 력. "너는 누구냐?" 양단풍이 대치하고 있는 검에 진기를 불어넣으며 물었다. "악후. 당신이 일검경천?" "잘 알고 있군."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검과 검 사이, 고작 팔 하나의 거리도 두지 않고 대치하고 있는 그들 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격렬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고 화려한 공수를 교환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의 시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척은 물론이고 호흡 하 나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짧은 순간, 찰나의 틈이 생 사에 직결됨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이 벌어진 혈참마대와 등천단의 싸움 또한 치열하기 그지없었 다. 수적으로도 혈참마대가 우세했으나 등천단의 용맹 또한 만만한 것 이 아니었다. 어쩌면 개개인의 실력은 혈참마대를 능가하고 있었다.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적을 맞이하여 당당히 맞서는 것은 물론이고 조 금씩이나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물론 정도맹과 싸 우기 전 과거의 혈참마대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혈참마대는 숫자는 비슷할지 몰라도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수준 이 떨어진 상태였다. 정도맹과의 싸움에서 워낙 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은 까닭이었다. "혈참마대를 지원해라!" 풍간의 외침에 따라 혈참마대를 돕기 위한 혈궁단의 활이 일제히 등 천단을 향했다. 하지만 여유있게 화살을 날리던 조금전과는 상황이 달 랐다. 활을 돌렸으되 그들은 화살을 날릴 수가 없었다. 등천단이 그들 의 시선을 빼앗는 사이 종자기가 몇몇 호법과 등천단 내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대원 열 명을 데리고 우회하여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공격하랏! 접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풍간이 필사적으로 소리치고, 그들을 향해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갔 다. 그러나 지금껏 그토록 정확하게 어떠한 목표도 놓치지 않았던 화 사른 단 하나도 적중하지 않았다. 맨 앞에선 종자기와 그를 따라나선 네 명의 호법에게 막힌 것이다. 그들과 혈궁단의 간격이 급격하게 좁혀졌다. 바로 그때, 혈궁단의 뒤쪽에서 싸움을 지휘하고 있던 호법 나후성이 풍간의 어깨를 잡았다. "물러나라." "하지만 어르신." "너무 많이 접근했어. 너희들로는 무리다." "할 수 있습니다."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이곳에서 객기를 부릴 필요는 없다. 너희들은 후방에서 지원할 때 빛이 나는 존재임을 잊은 것이냐?" "....." "물러나라. 저들은 우리가 상대하마." "알겠습니다." 안타까웠지만 현실이 그랬다. 사실, 혈궁단이 위력을 떨치는 것은 원거리에서의 싸움이지 접근전의 양상으로 바뀌면 개개인의 무공이 달 리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은 그다지 없었다. "물러난다!" 풍간과 혈궁단의 대원들은 나후성의 보호를 받으며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그리고 그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에서 중천의 호법과 패천 궁의 호법들이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 * * 마독의 시신이 돌아온 것은 어둠이 힘을 잃고 동쪽 하늘로부터 서서 히 밝음이 시작될 때였다. 마독의 시신을 말에 태우고 남천으로 향하던 을지휘소는 그를 찾기 위해 인근을 샅샅이 뒤지고 있던 취밀단의 대원에게 조용히 고삐를 건 넸다. 적의 실력을 알기에 사내는 함부로 입을 열지도, 또한 덤비지도 못했다. 그저 을지휘소가 시키는 대로 고삐를 잡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본진에 돌아오자 남천의 진영은 그야말로 난 리가 났다. 남천에서 마독이 차지하는 위치나 위상은 상상외로 엄청났다. 특히 그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던 간부들은 시 체로 돌아온 마독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의 심정이 그러할진대 말단 수하들이 느끼는 두려움이야 오죽할까?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 다. 어수선한 가운데 마독의 시신을 태운 말은 기요후가 있는 곳까지 도 착했다. "......" 기요후는 말이 없었다. 율평이 마독의 시신을 말에서 끌어 내릴 때도, 그의 시신에 난 상처 를 살필 때도 침묵을 지켰다. 한참 동안 시신을 살피던 율평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기요후가 묻지 않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어떠냐?" 마독의 시신에 두 눈을 고정시킨 기요후가 물었다. 너무나도 차갑게 가라앉아 이것이 과연 인간의 음성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살기 짙은 음성이었다. "전신의 심맥이란 심맥은 모조리 끊어졌고 오장육부가 자리를 이탈 했습니다." "그리고?" "극독에도 중독되셨습니다." "독이라? 마독이 독에 중독이 되었다? 독혈인을 능가하는 독의 대가 가?" "그게 아무래도..." 율평이 머뭇거리자 기요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똑바로 말해 봐. 어재서 그가 독에 중독이 된 거냐?" "그분이 사용하신 암기에 묻은 독 때문입니다." 기요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마독의 몸에서 찾아낸 몇몇 암기를 조심스레 집어 들더니 설명을 덧붙였다. "평소에 사용하시던 암기입니다. 한데 이것이 몸에..." 행여 독이라도 남아 있을까 조심스레 암기를 잡은 율평과는 달리 그 가 건넨 암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든 기요후는 손바닥에 올려놓 은 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격을 했는데 오히려 자신의 무공에 당했다, 이런 말이냐?" "그렇습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뭐냐?" "그분께서 평소에 지니고 다니시던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허리춤 에 차고 다니시던 연검은 물론이고 비갑 안에 숨겨진 세침, 그리고 전 포 곳곳에 숨겨놓은 암기들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요후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챈 것 같았다. "예. 아무래도 암뢰섬파황(暗雷閃破荒)을 시전하신 것 같습니다." "......" 기요후가 다시 침묵을 지켰다. 암뢰섬파황! 당가가 자랑하는 만천화우를 가볍게 비웃을 수 있다는 마독의 최후 비전 절기이자 지금껏 무적을 자랑했던 필살기(必殺技). 문제는 그것 을 펼치고도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사용한 무기에 당할 정도로 상대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의할 것은 어르신의 직접적인 사인(死因)입니 다." "직접적인 사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전신을 강타했습니다. 어르신 의 호신강기를 뚫고 일격에 즉사시킬 만한 엄청난 무엇인가가." "일격이라...." 또 한 번의 충격이 기요후의 뇌리를 강타했다. 암뢰섬파황을 사용하고도 상대를 꺾지 못한 것도 황당하건만, 일격 이라니! 비록 그가 마독보다 실력이 뛰어나긴 하여도 최소한 백 초 이상을 겨루어야 우위를 잡을 수 있던 터. 그것만으로도 마독을 쓰러뜨린 상 대가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 아닌가. 도저히 인 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마독의 시신에 의해 그의 자존심은 간단히 짓밟혔다. "그... 놈이겠지?" 기요후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애써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놈인지 정말 궁금하군. 어떻게 생겨먹은 낯짝을 지니 고 있는지 말이야." 수하이기에 앞서 친우의 죽음을 보고도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었 던 것이 슬펐던 것일까? 기요후는 처참할 정도로 슬픈 자조의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두 손을 마주하고 있는 마 독의 손에 머물렀다. "저게 무엇이냐?" 손 안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물건을 본 기요후가 물었다. "사용하신 암기 같습니다." "가져와 봐." 명을 받은 율평이 눈짓을 하고 재빨리 달려간 희염이 마독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안쪽으로 접힌 손가락 하나하나를 곧게 폈다. 꽤나 단 단하게 굳었는지 희염은 손가락을 하나둘씩 펼 때마다 진땀을 흘려야 만 했다. 마침내 꽉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모두 펴지고 손 안에 들려 있던 자 그마한 세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세침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요후를 비롯하여 그곳에 모인 수뇌들의 모든 시선은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마독의 손바닥을 치켜세우는 희염, 그리고 손바 닥에 집중되어 있었다. 죽음의 순간에 새긴 것인지 엉망진창이었지만 손바닥에는 희미하긴 해도 그 뜻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부전(不戰). "부... 전...." 마독이 남긴 것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글귀.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기요후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 * * "좌측을 맡고 있던 무인들이 전멸했습니다." "우측의 흑기당 역시 피해가 큽니다." "적기당도 밀리고 있습니다." "혈참마대 또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연거푸 올라오는 보고가 하나같이 비관적인 것뿐이었다. 그러나 성 벽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안당은 동요하지 않았다. 비록 열세이기는 해 도 아직까지 싸움은 박빙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지켜만 보실 생각이지요?" 그의 곁에 있던 환야가 조용히 물었다. "놈들이 지칠 때까지." 말은 그리했지만 누가 들어도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오히려 지치는 것은 우리 쪽입니다. 벌써 많이들 지쳤습니다. 움직 임이 둔화된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래도 외성을 빼앗길 수는 없다."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외성의 방어막이 무너지면 곧바로 내성까 지 몰려올 터,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냉정 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환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틀렸어요. 퇴각 명령을 내리세요." 순간, 난간을 잡고 있는 안당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요." 차분한 그녀의 말에 안당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래, 내가 너를 잊고 있었구나. 그리고 저들을."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살벌한 전장을 앞에 두고 한가로이 무기를 정비하고 있는 원로들이었다. "퇴각하라." 그의 입에서 조용한 명령이 떨어졌다. 둥둥둥둥. 맹렬한 북소리와 함께 격전을 펼치던 패천궁의 무인들이 서서히 후 퇴하기 시작했다. 그에 발맞춰 중천의 진영에서도 싸움의 중지를 알리 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싸움이 시작하고 정확히 세 시진. 견고하기만 했던 외성의 방어막이 무너진 것이었다. "피해를 보고해라." 약간은 들뜬 음성의 악위군이 말했다. "모두 오백을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자 악위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자세하게." "우선 선봉을 맡았던 창응당과 노호당이 전멸했습니다. 그들을 지원 했던 파천단도 삼분지 일 이상의 전력을 잃었습니다." "등천단은? 혈참마대랑 붙었다면서?" "예. 등천단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습니다. 물론 상대였던 혈참마대 역시 그와 같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등천단주가 고생깨나 했겠군." 피해가 크긴 했으나 적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혈참마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악위군의 얼굴이 다소 부드러워 졌다. 그에 반해 신도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등 단주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신도의 말에 막 술잔을 들었던 악위군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목숨을 잃어?" "예. 혈참마대의 대주와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군." 힘없이 주저앉는 악위군. 그의 뇌리에 어려서부터 유난히 자신을 따 랐던 악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후∼ 당숙께 죄스런 일이 생기고 말았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너무 상심 말게나. 당숙도 이해할 것일세." 악위군의 곁에 있던 악호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했다. "그나저나 종 호법이 보이지 않는구나." 악호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신도의 안색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종자기 호법님과 허유 호법님께서도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뭐야! 그들이?" 이번엔 악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자세하게 말해 보게." 악위군이 대답을 채근했다. "적진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패천궁의 호법들과 싸움이 붙으셨다고 합니다." "그 얘기는 나도 들었네. 그런데?" "역시 양패구상입니다. 싸움에 참여했던 네 분 호법님 중 종 호법님 과 허 호법님이 목숨을 잃으셨고 나머지 분들도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 습니다." "상대가 정확히 누구였느냐?" 악호가 물었다. "반혼귀 나후성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악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반혼귀 나후성이라면 패천궁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고수였다. 상대치고는 너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자 역시 종 호법님과 허 호법님의 합공에 목숨을 잃었습 니다." "그랬군. 그 친구가 그렇게..." 나후성의 죽음을 전해 들은 도왕 동방성이 눈시울을 붉혔다. 유난히 친하게 지냈던 친우의 죽음 앞에서 그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 다. "놈들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곧 내성으로 진입하려 할 것입니다." 종자기 등과의 싸움에서 제법 큰 부상을 입은 오진(梧瑨)이 상처 부 위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리의 피해는 어떠하냐?" 안당의 물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온설화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패천궁을 돕기 위해 입궁한 이들 중 태반이 이번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안당이 크게 탄식하였다. "후∼ 누구보다 열심히 싸워준 그들이었건만... 그리고?" "흑기당과 적기당의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혈궁단의 역할 이 컸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 어두어졌던 안당의 안색이 살짝 밝아졌다. "하지만 혈참마대는 더 이상 전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 인 피해를 당했습니다. 양단풍 단주와 부단주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목 숨을 잃었습니다." "그 얘기는 나도 들었다. 아직 할 일이 많은 친구인데...... 아무튼 생각보다 피해가 적다고 하니 다행이다." "지금은 잠시 소강 상태지만 전력을 재정비하자마자 놈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그때는 제가 선봉에 서지요." 도왕 동방성이 힘주어 말했다. "누가 선봉에 서고 말고 할 것이 없네. 이제부터는 어차피 총력전이 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그래도 선봉을 누가 맡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초반 기 세를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흠, 그도 그렇군. 하면 자네하고 패천수호대가..." 바로 그때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가 안당의 말을 끊었다. 두두둥둥둥둥! 점점 커지는 북소리를 들으며 좌중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결연해졌다. 북소리가 끝날 즈음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시작됐군." 안당이 조용히 읊조렸다. * * * 하남성과 산동성의 접경지 동명(東明). 이른 아침 동명포구를 출발하여 제남으로 향하는 여객선은 평소와 다름없이 붐비고 있었다. 그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애당초 소규모의 배인지라 선실의 개념이 없는 터. 간신히 배의 후미 쪽에 자리하고 조용조용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바로 복우산을 떠나 산동악가를 치기 위해 비밀리에 이동하고 있는 을지소문 일행이었다. 동정(東征)이라 명명된 이번 계획에 참여한 사람은 을지소문과 수호 신승을 비롯하여 하나같이 쟁쟁한 무인들로만 구성되고 있었는데, 억 지로 우겨 참여한 남궁세가의 몇몇 인원은 제외하고, 그 인원은 정확 하게 서른한 명이었다. 단 이틀 만에 적의 눈길을 피해 황하 지류에 접어든 그들은 나름대 로 변복(變服)을 하며 적의 눈을 속였다. 이후, 하류로 향하는 배에 올 랐고 악가를 향해 조금씩 동진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도대체 언제까지 이따위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 지." 나이 든 상인으로 변장하고 있는 오상이 갑갑해 죽겠다는 듯 옷가지 를 흔들며 말했다. "참으십시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습니다." 정소가 대뜸 핀잔을 주었다. "배에 오른 지 벌써 이틀이네. 대체 얼마나 가야 하는가?" "뱃길로 적어도 사흘은 더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틀 정도는 걸아야지요." "후∼ 이 지겨운 배에서 사흘이나 더?" 더 이상 말하기도 질렸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오상은 쌓아놓 은 짐 사이에 대충 자리를 잡더니 잠을 청했다. "아침부터 낮잠은." 그 모양새가 가히 보기 좋지 않았던지 정소가 툴툴거렸다. 물론 오 상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음성이었다. "그러고보니 신승께선 참으로 오랜만에 하시는 여행인 것 같습니다." 을지소문의 말에 수호신승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렇지요. 오십여 년 전 패천궁과의 싸움 이후에 처음이니. 아, 그 나저나 패천궁이 어찌 하고 있는지 걱정입니다." 때마침 생각이났다는 듯 수호신승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패천궁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는 터, 비 록 추구하는 바, 가는 길은 달라도 패천궁의 안위가 곧 무림의 안위로 직결되는 지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견 아우." 을지소문이 곽검명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단견을 불렀다. "예. 형님." "패천궁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는가? 해남파도." "글쎄요. 아직 별다른 전갈은 없는 것 같던데... 확인을 해봐야겠습 니다, 방주." 단견이 정소를 불렀다. 그렇잖아도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소가 득달 같이 다가왔다. 그리곤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지난밤부터 패천궁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전갈이 막 도착했습니다." "결국 시작된 모양이군." 곽검명이 중얼거렸다. "예, 어찌 보면 많이 늦은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사나흘 전엔 공격이 시작될 줄 알았으니까요." "왜 그리 늦게 시작된 것이라나?" "저들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남천 때문이 아니 겠습니까?" "남천?" "예. 해남파에 발이 묶인 남천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고 합니다." "흠, 그렇다면 남천이 도착한 모양이구나. 뒤늦게나마 공격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보면." 단견이 말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가 않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단견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남천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나 분명 남천 진영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중 천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엄 청난 피해를 감수하고 말이지요." "허허, 휘소가 해남파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더니만, 그 때문은 아 닐까?" 곽검명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을지휘소라니! 참으로 뜬금없는 말에 단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 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남천의 전력이 얼마인데 고작 한 명 때문 에 발길이 묶이겠습니까?" "왜 한 명인가? 해남파도 있거늘." 그러자 정소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정보에 따르면 해남파는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 습니다. 해남파는 더 이상 남천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휘소 혼자서 한 일인가 보군." 곽검명은 남천의 일에 을지휘소가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한다는 듯 자신의 의견을 거듭 피력했다. "허허, 휘소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어도 혼자서 백 명, 천 명을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친 단견이 을지소문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연히 '그렇다' 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을지소문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오히려 담담하게 웃는 것이 '그럴 수도 있다'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설마 하니 형님도 그렇게 믿고 계시는 겁니까? 남천의 발이 묶인 것이 휘소 때문이라고?" "충분히 가능성있는 말이야." 순간, 단견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녀석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뛰어난 정도가 아니야." "예?" 말에 담긴 어감이 이상하다고 여긴 단견이 순간적으로 되묻고 좌중 의 시선이 을지소문의 입으로 향했다. 잠을 청한다고 여긴 오상 역시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녀석의 아비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네." 을지소문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을지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어미 뱃속에서부터 내공을 쌓았어. 자네도 알지 않는가?" 과거 을지휘소의 탄생 비화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앞둔 청하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약이 소비 됐던가? 당시 태아였던 을지휘소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리가 없는 것 이다. "난 아범의 내공이 어느 만큼이나 깊고 거대한지 가늠하지 못했네." "설마 하니...." 단견이 기겁하며 도리질을 쳤다. 을지소문이 누구던가? 천하제일인이었다. 그가 가늠하지 못하는 실 력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실력 또한 알 수가 없어. 얼마나 강한지, 어느 만큼의 실력을 쌓 았는지 말이야. 단,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네. 나는 물론이고 온 무림 을 뒤져 봐도 그 아이와 백초를 겨룰 사람은 단언컨대 한 한 명도 없 다는 것을." 온 무림을 뒤져도 백 초를 겨룰 사람이 없다니! 점점 더 가관이었 다. 문제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궁귀 을지소문이라는 사실이었는데. 그들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을지호가 쐐기를 박았다. "할아버님 말씀이 사실입니다. 그 옛날 두 분 고조부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요. 두 분 고주부님께서 합공을 하시더라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더 이상은 놀랄 힘도 없었다. 을지호가 말하는 두 분 고조부님 중 한 명이 바로 초대 패천궁의 궁 주 구양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단견은 오히려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거야 원, 천외천(天外天)의 기인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군. 지난 번 활약으로 어느 정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설 마 하니 그 정도였을 줄이야..." 뭔가가 아쉬운지 곽검명이 입맛을 다셨다. "왜요? 비무라도 한번 신청하시게요?" 단견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못할 건 또 뭐 있나?" "쯧쯧, 관두십시오. 다 늙어 망신당할 일 있습니까?" "뭐, 어떤가? 그런 망신이라면 얼마든지 당해도 상관없네. 강한 사 람과 싸울 수만 있다면." "허허, 한동안 괜찮다 싶더니만 고질병이 또 도진 것 같습니다." "고질병은 무슨,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아무튼 다행 아닌가? 휘소 가 남천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는 모양이니 패천궁으로서는 한결 편 히 싸울 수 있겠어." "그래도 힘든 싸움입니다. 전력상 너무 차이가 많이 나서." 누구보다 중천의 전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정소가 들뜨기 시작한 좌 중의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승이 아는 한 패천궁의 저력은 그 끝이 없지요. 또한 환야 시주께서 계시지 않습니 까? 잘 해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승은 그리 믿습니다." 수호신승이 을지소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마주 웃음을 보이기는 했어도 그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환야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진 정시킬 수 없을 정도로 중천의 힘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 * *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중천과 패천궁의 최후 결전은 해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음에도 끝나 지 않고 있었다. 비록 전력에선 상당히 차이가 났지만 목숨을 각오하고 막는 패천궁 의 최후 방어선은 가히 금광석과도 같이 단단하고 견고했다. 전방을 패천수호대가 책임지고 좌우는 흑기당과 적기장, 그리고 혈 참마대의 생존자들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우회해서 들어오는 적은 중 천의 핍박을 피해 패천궁으로 들어온 여타 문파의 무인들이 그들 문파 의 존망을 걸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산화(散花)하며 지켜냈다. 아울 러 일전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혈궁단 또한 손가락의 피부가 벗겨지고 갈라질 정도로 부지런히 화살을 날려댔다. 특히 을지룡의 가 세는 혈궁단의 위력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그러나 물량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파천단을 궤멸시킨 패천수호대는 연이어 달려온 회천단의 무인들에 의해 점점 그 수가 줄고 있었다. 애당초 그들을 겨냥해 선봉에 나선 파 천단을 쓰러뜨리느라 너무나도 큰 힘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랜 싸움에 피곤이 누적된 흑기당과 적기당의 무인들도 끊임없이 밀 려드는 적에게 조금씩이나마 허점을 보이고 있었다. 승패는 분명히 중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힘에 부치는구나." 안당의 말에 입술을 꼬옥 깨문 온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 지난날 정도맹과의 싸움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장로님들은 물론이고 호법님들까지 모조리 싸움에 나섰습니다. 더 이 상 전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은 오직...." 냉악 등 원로들을 살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던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들이 나설 때가 된 것 같군." 전황을 살피던 냉악이 말했다. "기다리느라 지칠 지경이었습니다!" 응사웅이 어린아이 머리만한 주먹을 움켜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쯧쯧, 그리 요란을 떨어서야. 그냥 조용히 가서 끝내면 되는 것이 지." 송찬이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자, 요란을 떨든 조용히 끝장을 내든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움 직이자고." 경의비마 한가풍이 거대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부탁하네." 안당이 냉악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냉악은 대답 대신 그의 애도를 슬며시 치켜 세우며 몸을 돌렸다. 그 를 따라 나머지 원로들이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움직였습니다."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신도가 패천궁의 진영에서 느긋하게 걸어 오는 노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로원의 고수란 말이지?" 악위군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패천궁의 마지막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만 꺾으면 끝입니 다." "쉽지는 않겠어."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무기를 맞댄 것도 아니건만 악위군은 원로들에게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자네 말대로 예사롭지 않은 자들이야." "한 세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입니다. 개개인이 천하를 질타할 만한 힘을 지닌 고수들이지요. 저들을 막지 못하면 이번 싸움은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까짓 막으면 되는 것이지!" 악위군의 곁에 있던 악호가 호기롭게 외쳤다. 이미 모종의 조치를 취했던 것인가? 악호를 바라보는 악위군의 눈엔 믿음이 가득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숙부님." "맡겨두게나."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악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장로들은 나서게!"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금껏 단 한 차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악가의 십팔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칠순을 넘긴 악 가의 노고수들. 그들이야말로 중천이 원로원에 맞서는 비장의 무기였 다. "가세나." 악호를 필두로 열여덟 명의 장로가 걸음을 옮겼다. "너희들은 누구냐?" 송백검 백준이 물었다. "악가에서 왔소." 악호가 대답했다. "악가?" 고개를 끄덕인 악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소?" 명백한 도발이었다. 원로들 입가에 실소가 피어올랐다. "도전이라면 피하지 않는다!" 차갑게 외친 냉악이 몸을 돌렸다. 원로원의 원로들과 악가의 십팔장로,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아비 규환의 전장에서 다소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사는 아까의 대화로 족했다. 적당한 장소에 도착했다고 여긴 그들 은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손을 썼다. "저들도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양이군요." 원로들을 에워싸며 합공하는 십팔장로를 응시하는 환야의 얼굴에 그 늘이 드리웠다. 패하리란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세를 반전시 키기 위해 나선 그들이 묶이면 패배는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가봐야겠습니다." 안당은 말리지 않았다. 원로들까지 발이 묶인 이상 최후의 희망은 오직 환야뿐이었다. "부탁한다."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전장으로 향하는 환야. 그녀의 손에는 비사걸로부터 다시 전해 받은, 과거 천하를 호령할 때 늘 함께였던 애병(愛兵) 풍혼(風魂)이 들려 있었다. 마침내 검을 든 환야는 주변의 싸움엔 관심없다는 듯 악위군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우두머리를 치면 그 싸움은 끝나기 마련,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승패를 결정짓고자 함이었다. 그녀의 기세를 느낀 것일까? "검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친 악위군의 몸에서 지 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거리를 좁히는 환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의 거리는 이십여 장, 그러나 기세는 이미 허공에서 격렬하게 맞 부딪쳤다. 패천궁의 운명을 결정지을 절대자들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 었다. ★★★★☆☆☆☆★★★★ 궁귀검신2부 9권 제71장 회전(會戰) "지, 지금 뭐라 하셨어요?" 엉겁결에 한 걸음 물러난 임여령이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녀의 놀란 반응과는 달리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 안휘명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초혼잠능대법(招魂潛能大法)을 펼쳐 달라고 했다." "지, 지금 제정신이세요? 죽지도 않은 사람의 혼을 어찌 부른다고.. 난 못해요." 임여령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죽지 않았으니까 펼쳐 달라고 하는 것 아니더냐? 죽은 다음에 펼쳐 봤자 소용없지. 다시 살아나도 이 모양 이 꼴일 테니까." 안휘명은 놀람과 두려움으로 마구 떨리는 임여령의 눈동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숨이 끊어진 지 일각이 지나지 않았다면 몸에 남은 한 가닥 잠력을 이용하여 혼을 되돌릴 수 있다는 생사괴의의 비전절기가 바로 초혼잠 능대법이라지? 또한....." 잠시 말을 끊은 안휘명은 애써 고개를 돌리는 임여령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또한 아무리 폐인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예전의 힘을, 아니, 더욱 강 력한 힘을 갖게 해줄 수 있다고 알고 있다. 아니더냐?" "......" "생사괴의의 후예인 너는 알고 있다, 분명히!" "고작 반 시진이에요." 다 알고 있으니까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한 안휘명의 태도에 임여령 이 냉정하게 소리쳤다. "아저씨 말대로 초혼잠능대법을 펼치면 잃어버린 힘을 찾을 수 있어 요. 어쩌면 이전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힘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고작 반 시진뿐이에요. 더 빨라질 수도 있고요. 그리고 반 시진이 지나면...." "죽겠지." 안휘명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임여령이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요. 온몸의 잠력을 일순간에 불태우고 먼지처럼 사라지겠지요. 마치 저것처럼." 그녀가 가리키는 것은 밤새 방을 밝히고 서서히 빛을 잃고 사그라지 는 등잔불이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이야.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 니까." "아무리...." "내가 이렇듯 누워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패천궁에 충성을 다했던 이들이 속절없이 쓰러지고 그들이 외치는 비명성이 가슴팍을 헤집고 있다. 그런데도 너는 나보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을 한가로이 앉아 기다리라는 것이냐?" "이길 수도 있어요." "이길 수도 있다? 그러니 비참하게 목숨을 연명하라고? 수하들의 목 숨을 담보로?" "......" "내 비록 지금은 젓가락 하나 쥘 힘도 없는 네 눈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병자로 보일지는 모르나 최소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 다. 내가 목숨을 던질 곳은 이런 화려한 침상이 아니라 수하들의 주검 이 있는 곳. 패천궁의 궁주로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다." 안휘명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모 습에서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임여령은 땅 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같이 죽을 수 있을진 몰라도 살 수는 없어요. 고작 반 시진에 불과 하니까!" 마침내 허락이 떨어지자 살짝 굳어졌던 안휘명의 입가에 미소가 지 어졌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야." "죽으면 죽는 것이지 아니긴요! 아무튼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배우긴 했어도 한번도 시도해 보지 않아서 어찌 될는지는 나도 모르니 까." 임여렁이 쌜쭉한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너는... 잘할 수 있을 게다." 안휘명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 * * "저런 쳐 죽일 놈이!" 뇌학동과의 싸움으로 큰 부상을 입은 단주 악영을 대신하여 회천단 을 지휘하는 악산(岳珊)은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던 전열을 황급히 정비 시키며 눈을 치켜떴다. 처음엔 약간의 자만심도 가지고 있었다. 앞서 달려오던, 기세는 흉흉했지만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던 사내들 과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리는 후미 쪽의 무인들도 일별하기엔 그다지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파천단을 상대하면서 그 수도 많이 줄 고 지칠 대로 지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겉모습에서 드러난 것이 다가 아니었다. 패천수호대! 명성은 익히 듣고 또 직접 눈으로도 보았으나 막상 부 딪치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영(禹寧), 좌우 측면을 강화해라!" "넷!" 거친 숨을 내뱉은 우영이 힘주어 대답했다. "내가 중앙을 맡는 사이 수하들을 이끌고 우회하여 놈들의 후미를 쳐라!"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우영은 회천단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만 추려서 슬그 머니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곤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움직이 기 시작했다. 그사이 악산은 패천수호대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으악!" "커헉!" 곳곳에서 비명성이 터졌다. 그 비명의 대다수는 회천단의 것이었다. 처음, 파천단이면 충분히 패천수호대를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긴 중천 수뇌부의 예상은 그들이 전멸하면서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물론 거 기엔 흑기당과 적기당을 지원하다가 패천궁의 최고 주력이라 할 수 있 는 패천수호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을지룡과 혈궁단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공격! 공격하랏!" 기세를 탔다고 여긴 것일까? 수하들을 독려하는 화천명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힘에 넘쳤다. 죽고 죽이는, 주인을 잃은 많은 병장기가 바닥에 나뒹굴고 흘러내린 피가 모여 내를 만들 정도로 처참한 전장. 지옥도와도 같은 광경이 펼쳐지는 패천궁에서 유일하게 평온을 유 지하는 곳이 있었다. 오 장여의 거리를 두고 두 명의 절대자는 서로를 응시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시작해 보지요." 상대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터, 말이 필요치 않았다. 다만 서 로를 경회하는 마음에서 잠시 뜸을 들인 것일뿐. "그러지." 살짝 고개를 까딱인 환야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검을 비스듬히 옆으로 누였다. 별거 아닌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별다른 기수식이 필요 없이 그 어떤 공격에도 곧바로 반응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자세였 다. 우우우웅! 비스듬히 누운 검이 살짝 떨리며 대기를 진동시키는 소리가 퍼져 나 왔다. 선공은 양보를 하겠다는 듯 자세를 잡은 환야는 그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명불허전! 지독할 정도로 강하군.' 입 안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악위군이 검을 앞으로 뻗었다.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상대방의 기세 를 염탐하고자 함이었다. 그럼에도 환야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시한다는 건가? 과연 명성대로 그만한 실력이 있나 보고 싶군.' 악위군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검끝에 힘을 실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것일까?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던 환야의 검이 용틀임을 하며 방향을 틀었다. 시작은 소소했으나 단숨에 기세를 잡으려는 적의 기세에 환야는 파검삼식(破劍三式)의 첫 번째 초 식인 천검만파(天劍萬波)로 맞섰다. 파파팟! 예리한 기운이 사위를 휩쓸며 악위군을 노리며 날아가자 우위를 잡 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재빨리 몸을 틀며 검세에서 벗어나려고 하 였다. 휘이잉! 환야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사위를 휩쓸고 가며 일으키는 회 오리는 사막의 용권풍을 비웃을 정도였다. "타핫! 단순히 몸을 트는 것으로 공세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악위군이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 역시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백 년 동안 실전되었다가 근래 들어서야 겨우 되찾고 완성시킨 가문의 절기 가 있었다. 꽈꽈꽝! 환야의 공격을 단숨에 박살 낸 악위군은 이 정도면 충분히 우위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쉬지 않고 연속 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악위군의 검에서 실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뻗어 나옴을 감지한 환야 가 재빨리 검을 회수하더니 천검무영(天劍無影)을 펼쳤다. 애검 풍혼 에 신형을 완전히 감추고 바람 한줄기 통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막 을 치는 환야. 초식이 일궈내는 가공할 기운이 일신에 지닌 내공과 합 쳐져 눈으로도 믿기 힘든 완벽한 방어막이 펼쳐졌다. 꽝! 꽈꽝! 연속적인 충돌음이 들렸다. "역시 대단하구려."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나 얻은 성과는 거의 없었다.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을 판단한 악위군은 감탄성과 함께 지존신공(至尊神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평범한 공격으론 도저히 상대를 어찌하지 못한다고 느낀 것이다. 지존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하자 그의 몸에서 묵빛 기운이 생성되기 시작하더니 주변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거 대한 해일이 되어 환야를 덮쳤다. 상대의 공세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환야가 천검무영을 거푸 펼치며 주변에 완벽한 검막을 펼쳤다. 단순히 방어만을 위한 검막이 아니라 공수를 겸할 수 있는 기세였지만 묵빛 기운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큰 힘을 싣고 있었다. 자신이 펼친 검막이 암흑이 힘에 점점 침탈받는다고 여긴 환야는 입 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천검삼식의 마지막 초식인 천검파천(天劍破天) 을 시전했다. 우우우! 청명한 검명과 함께 그녀를 보호하던 검막이 걷히며 참으로 느릿느 릿한 검 하나가 솟아올랐다. 아래에서부터 솟구친 검은 그녀를 휘감던 묵빛 기운을 단숨에 흩어버리면서 주변을 다시 환하게 물들였고 우아 한 궤적을 흘리며 악위군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파파파팡! 자신의 공세를 단번에 무력화시킨 검 속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운 이 담겨 있는지 알고 있었던 악위군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연거푸 검기를 쏟아 부으며 환야의 공세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짧은 시간의 충돌이었지만 상대의 강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 로 긴박한 순간이었다. 과거 무성이라 불리며 한참 명성을 떨치던 제 갈능과도 싸워봤고 천하제일고수라 일컬어지는 수호신승과도 싸워봤 지만 검을 늘어뜨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환야게 비할 바가 아니었 다. '소림을, 아니, 무림을 굴복시켰다던 패천궁의 궁주답군.' 악위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전신에서 희열이 솟구치는 그 역시 한 사람 의 무인이었다. 상대의 강함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짓는 미소는 더욱더 강한 힘이 되 어 환야를 덮쳐 갔다. 파파팍! 한층 더 빨라진 악위군의 신형이 유령처럼 움직이며 막강한 검기를 뿌리자 환야 역시 더욱 힘있고 간결한 수단으로 공격을 차단하고 폭풍 과도 같은 기세로 그의 공세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꽈앙! 환야의 검에서 뇌전과도 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오자 악위군의 몸을 감싸고 있는 묵빛은 더욱 진해져 접근하는 환야의 공력을 흡수하듯 빨 아들였다. 지존신공을 운용하며 펼치는 암흑마검(暗黑魔劍)이었다. 꽈앙! 꽈꽈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정도의 대결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천하제일이라는 환야의 무위는 가히 경천동지할 만한 수준이었으나 악위군 또한 만만치 않았다. 폭풍처럼 밀려드는 공격을 맞아 암흑의 신이 강림이라도 한 듯 마주치며 몰아치는 무위는 결코 그녀의 아래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용호상박! 둘의 싸움은 인간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엄청났다. 전대 패천궁주와 중천의 천주라는 지위를 벗어나 한 사람의 무인으 로서 목숨이 아닌 자존심을 걸고 하는 피 말리는 싸움 때문에 주변에 머물던 이들은 모두 수십 장씩 물러나 숨소리조차 죽여야 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둘의 싸움이야말로 이번 회전을 결정짓는 가장 큰 승부라는 것을. "컥!"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한 목숨이 끊어졌다. 그가 몸을 누인 곳 엔 이미 같은 복장의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후우!" 그의 가슴에 장검을 쑤셔 박았던 노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돌렸다. "지독한 놈들 같으니!" 왼쪽 어깨로부터 옆구리까지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팔을 움직여 보고자 애써봤으나 붉은 피로 범벅이 된 팔은 축 늘어져 의지대로 되 지 않았다. 송백검 백준은 죽는 순간까지도 악착같이 덤비던 상대를 상기하며 진저리를 쳤다. 비록 합공이었으나 자신과 백여 초를 다툰 실력에 목 숨을 도외시하고 덤비는 집요함에 기가 질린 것이다. 그러나 쉴 틈이 없었다. 쓰러뜨려야 할 중천의 장로들이 여전히 남 아 있었고 위협적인 공격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죽어랏!" 싸늘한 일갈과 함께 좌측으로부터 맹렬한 기세가 밀려들었다. 상대 가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옆으로 몸을 튼 백준. 그의 발 밑으로 날카롭기 그지없는 검기가 훑고 지나갔다. 땅을 가르고 지나간 검기의 위력이 생각 외로 강력했다. 백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는 누구냐?" 간신히 적의 공격을 피한 백준이 물었다. "악우(岳羽)!" 늘 그렇듯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악우?" "네놈의 검에 죽은 악명(岳明)과 악성(岳晟)의 형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준의 뒤에서 또 다른 음성이 터져 나왔 다. "나는 악설(岳雪)이라고 한다." 음성보다 한 걸음 앞서 예리한 파공성이 터져 나오고 백준은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거대한 압력에 기겁을 하며 몸을 틀었다. 피리리링! 회오리가 치듯 맹렬하게 회전하며 접근하는 창날은 보기만 해도 오 금이 저릴 정도였다. 날이 접근하기도 전에 주변의 공기가 모조리 빨 려 들어가는 듯한 어마어마한 기세. 그뿐만이 아니었다. 악설의 공격 에 발맞추어 악우의 검도 춤을 췄다. 살짝 몸을 낮추고 빠르게 접근하 며 휘두르는 그의 검에서 청광이 뻗어 나오며 배후를 위협했다. 백준의 몸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파팍! 악설의 창이 발밑을 스치며 지나갔다. 일차적인 위협은 피한 듯했다. 그러나 어느새 접근한 악우의 검에 그의 몸은 완전히 무방비였다. 제아무리 출중한 무공을 지녔어도 양 발이 지며에서 떨어진 상태에서 부릴 수 있는 재주란 한정된 것. 그것 을 증명이라도 하듯 옆구리를 쓸어가는 악우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흘렀다. 위기라는 것은 누구보다 백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체없 이 검을 휘둘렀다. 약간은 어정쩡한 자세인지라 검에 그다지 많은 힘 을 실을 수가 없었다. 챙! 검과 검,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며 일으키는 불꽃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러나 득실은 확연하게 엇갈렸다. 두어 걸음 물러나며 자 세를 가다듬는 악우와는 달리 착지와 동시에 연신 뒤로 물러나는 백준 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선홍빛 핏물 이 그가 결코 심상치 않은 내상을 입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 다. 피리릿! 가쁜 호흡을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악설의 창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후∼' 맹렬한 회전과 함께 다가드는 창영(槍影)을 보며 백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존심이 상하기는 해도 가능만 하다면 도움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상황 더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중천의 장로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원 로들은 저마다 두세 명씩의 강적을 맞아 치열하게 싸움을 하고 있었 다. 한가롭게 도움을 줄 처지가 아닌 것이다. 도움을 받기 힘들다는 생각에 잠시 한숨을 내쉰 백준의 신형이 표홀 하게 움직였다.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든다는 포풍착영(捕風捉影)의 수법.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십여 개의 잔상(殘像)을 만들어냈다. "잔수 따위를!" 악설의 외침과 함께 그의 창이 좌측으로 벗어나는 그림자를 꿰뚫었 다. 동시에 달려든 악우의 검이 바로 옆의 그림자를 쓸어갔다. "응?" 악설의 입에서 당황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분명 창끝에서 느낌이 왔건만 자신이 공격한 것은 상대가 만들어낸 잔상에 불과할 뿐 본신 (本身)이 아니었다. 본신을 놓친 그의 눈이 영활하게 움직였다. 그의 눈에 악우의 배후 로 돌아가는 잔상 하나가 포착되었다. "위험하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주저없이 창을 던지는 악설. 손을 떠난 창이 빛 살과도 같은 빠름으로 접근했다. 한데 그의 경고가 없어도 악우 역시 백준의 본신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본신으로 보이는 잔상 하나가 접 근한다는 것 또한 느끼고 있었다. 약간은 방심한 모습을 보이면서 허 점을 드러낸 것이 적중한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다!" 악우는 승리의 외침과 함께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석 자가 넘는 검광이 배후에서 접근하는 백준의 목을 쓸어갔다. 워 낙 빠르고 민첩한 공격인지라 백준이 할 수 있었던 반응이라곤 고작 당황한 얼굴로 멈칫거리는 것뿐이었다. "끝났다!" 마침내 강적을 처치했다는 생각에 악우는 환희의 외침을 뱉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분명히 상대의 목 을 베었건만 그 흔적이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손에 전해오는 느낌이 영 이상했다. '이, 이건!'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도 전, 그의 발밑으로 한껏 독을 품은 검 하나가 접근했다. 악우의 몸이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힘없이 주저앉았다. 바닥을 구르는 그의 눈이 하체로 향했다. 멀쩡히 있어야 할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무릎 아래로 깨끗하게 잘려 나간 다리에선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고 널브러진 다리는 아직도 생명력이 남아 있는 듯 움찔거 렸다. 고통 따위는 없었다. 다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자신의 눈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되지." 그를 이해시키는 한마디가 나지막이 들여오고 악우는 자신의 목에 박히는 차가운 검을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나는 잡았고...." 악우의 목에서 검을 뽑는 백준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기존의 부 상에 더해 허벅지에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악우는 눈치채지 못한 그 의 본신을 정확히 꿰뚫어 본 악설의 창을 미처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단지 스치며 지나갔을 뿐임에도 꽤나 많은 살 뭉치가 잘려 나갔다. 사 실 피하려고만 하였다면 별다른 부상 없이 피할 수 있었겠으나 그렇다 면 악우 또한 잡을 수 없었을 터, 백준은 살을 주고 뼈를 깍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악우라는 대어를 잡을 수 있었 으니까. "이놈!" 되돌아온 창을 잡고 달려오는 악설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꽝! 꽝! 꽝! 연속적인 충돌음. 아예 도망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맹렬히 공격하는 악설에 맞서 백준도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른 창이 그의 전신을 노리며 넘나들었고 전후좌우로 쫓기가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악설의 신형은 가히 바람과도 같았다. "큭!" 내력에서 밀린 백준의 입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자세도 흐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창이 그의 허벅지를 찔러왔 다. 피가 튀었다. 회수되어 가는 창에서 시뻘건 살점도 떨어져 나갔다. 그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 회수되었던 창은 한층 더 맹렬한 회 전을 하며 그의 가슴팍으로 짓쳐들었다. 칼에 의지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던 백준은 정상적인 방법으론 도 저히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즉시 몸을 굴렸다. 삼류무인들도 하지 않는다는, 그런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죽는 것 이 낫다고 여기는 나려타곤(懶驢陀滾)이었다. 하나, 그것이 지금 시점 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또 보기에 어떻든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아니던가. 팍! 팍! 팍! 땅을 구르는 백준의 몸을 향해 창이 내리 꽂혔다. 창이 머물다 간 곳 의 땅이 한 자가 넘게 움푹움푹 파였다. 한참 동안이나 땅바닥을 구른 후에 간신히 몸을 일으킨 백준의 모습 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고는 해도 창의 회전력 에 의해 전신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피와 흙이 뒤엉켜서 어디에 상처 를 입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의복은 이미 걸레쪽 이 되어버렸고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은 참수형을 앞둔 죄수의 것과 같 았다. "하아! 하아!"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뱉는 백준의 몸에서 힘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손만 대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 습은 당장 숨이 끊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다만 악설을 노려보는 눈에서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아직 승부를 포기하 지 않았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천천히 접근하는 악 설도 긴장을 풀지 않는 것이다. '패천궁의 원로... 과연 대단하군. 솔직히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아 마도 상황은 반대가 되었으리라.'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 개개인의 실력이 능히 한 지역의 패주를 능가 하는 장로들을 무려 세 명이나 쓰러뜨린 백준의 실력에 마음속으로 경 의를 표한 악설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차핫!" 잠깐 동안 숨을 고르는가 싶던 악설의 입에서 힘찬 기합성이 터져 나오고 허실생백(虛室生白)이란 초식이 펼쳐졌다. 허실생백! 미세한 틈을 뚫고 들어와 주변을 밝히는 햇빛처럼 상대의 방어막을 완벽하게 파훼하는 악가창법의 수많은 절초 중 하나. 악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기게 버틴 백준을 쓰러뜨리는 데 그것만큼 좋은 공격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우우웅ㅡ 주변의 공기를 끌어들이며 내는 파공음이 귓가를 간질이고 창을 중 심으로 거대한 기파가 형성되었다. 백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창날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끝인가?"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자조 섞인 웃음이 지어졌다. '이것이 악가창! 과연 무섭군.' 오랜 격전으로 내공은 이미 바닥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 았으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검을 들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을 힘도 없 었다. "그렇다고 혼자 갈 수는 없지." 뭔가 결정을 내렸는가? 백준의 눈에서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악설의 공격은 이미 코앞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는 한 줌도 남지 않은 기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곤 창 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헛!" 백준의 전혀 뜻밖의 행동에 놀란 악설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 미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백준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런 식 으로 최후의 발악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놀람도 잠시, 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불어넣은 그는 상대의 가슴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꿰뚫었다. 퍽! 가죽을 때리는 듯한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백준의 가슴에 적중한 창 날이 피분수를 내며 등을 꿰뚫고 삐죽이 솟아났다. 창을 타고 손끝으로, 팔을 통해 전신으로 울리는 느낌. 악설은 마침 내 적을 쓰러뜨렸다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감은 가 슴을 뚫렸음에도 꺼지지 않는 차가운 눈과 점점 더 접근해 오는 백준 의 몸을 보며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악설은 싸움을 끝냈을지 몰라도 백준은 아직 끝내지 않았다. 등을 꿰뚫은 창이 점점 길어지는 것과 반비례하여 상대와 급속도로 가까워 지는 몸이 그것을 증명했다. 악설이 그것을 눈치채고 창을 잡아당겨 그를 밀어내려는 순간, 백준 의 검이 그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 꽂혔다. 죽음까지 불사하며 그의 모 든 것이 담긴 검은 악설의 머리를 반으로 가르고서야 멈춰졌다. "끄... 으으...."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 의식이 혼미해져 가는 순간에도 악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양손을 허우적거렸다. "크크, 창이... 너무 길...어서 말이지...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은 이...것뿐이더군...." 눈앞에서 무너지는 악설을 보며 고개를 돌린 백준이 힘겨운 싸움을 거듭하고 있는 원로들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먼저 가야겠네. 다들 천천히 오게나.' 평생의 지기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따뜻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것은 신형이 악설 위로 포개져 무너져 내리고 천천히 눈이 감길 때까 지 계속 이어졌다. "왜?" 질문을 던지는 풍간의 눈엔 의혹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활을 내려놓고 검을 잡는 을지룡의 눈은 막 목숨을 잃은 백준과 치 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잇는 원로들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자네가 움직이면..." "이곳은 단주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 몇 번의 싸움이었지만 그가 혈궁단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 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풍간은 을지룡의 부재가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백 명의 장졸보다 적의 장수 하나를 치는 것이 더 큰 효과가 있는 법. 을지룡의 시선을 따라 원로들의 싸움을 지켜보 던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네. 몸조심하게나." 걱정스런 눈빛을 하는 풍간을 뒤로하고 전각 위에서 뛰어내린 을지 룡은 원로들과 중천의 장로들이 생사결을 펼치고 있는 장소로 뛰어갔 다. 몇몇 무인들이 그의 발길을 막고자 무기를 빼 들고 덤볐으나 그의 손짓 몇 번에 모조리 쓰러져 나갈 뿐 그는 찰나의 멈칫거림도 없었다.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을지룡은 경의비마 한가풍을 지원하기 위해 몸 을 날렸다. 원로들 중 순수 무공만을 따지자면 가장 약했던 그는 비록 한 명의 장로를 쓰러뜨리기는 하였으나 다른 두 명의 합공에 쩔쩔매고 있었다. "타핫!" 낭랑한 외침과 함께 을지룡의 공격이 시작되고 그렇잖아도 그의 등 장에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고 있던 장로들이 한가풍을 핍박하던 공세 를 늦추고 물러섰다. "여기는 뭣 하러 왔느냐?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한숨 돌린 한가풍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도움이 필요없다 는 퉁명스런 말투였으나 얼굴은 안도감으로 물들었다. "어르신의 실력은 믿었지만 시간이 촉박해서요. 이곳 싸움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전황도 뒤집을 수 있고요. 그리고....." 말끝을 흐린 을지룡이 등에 창을 박은 채 쓰러져 있는 백준에게 시 선을 돌렸다. 그의 눈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는 한가풍. 그제야 백준의 죽음을 목도한 그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저, 저, 저것이....." "송백검 어르신이....." 을지룡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멍청한... 멍청한 위인 같으니!" 한가풍은 비분에 찬 탄식성을 내뱉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었다. 아마도 붉게 물드는 눈을 감추기 위함이리라! 그사이 둘을 지켜보던 중천의 장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식 으로 공격을 하고 대응을 할 것인지 상의가 끝난 듯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어르신!" 을지룡이 상대의 공격에도 넋을 잃고 있는 한가풍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친우의 죽음에 잠시 슬픔에 잠긴, 끓어오 르는 분노를 애써 참고 있던 그에게 장로들의 공격은 오히려 투기를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나 다름없었다. "꺼져랏!" 배후로 돌아오는 적을 향해 휘두르는 한가풍의 장력은 무시무시했 다. 상대방의 기운도 장난은 아니었다. 꽈꽝! 폭발음이 터지고 한가풍의 몸이 휘청거렸다. 물론 공격을 했던 장로 역시 십여 걸음이나 물러나며 위태로운 모습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 분했다. 한가풍이 중심을 잃은 사이 다른 장로가 치명적이 공격을 감 행했기 때문이다. "돕겠습니다." 한가풍의 위기를 본 을지룡이 재빨리 그의 측면으로 돌아 움직이며 회심의 일초를 날리는 장로의 검기를 맞받아쳤다. "허!" 이번 공격으로 결정적인 승기를 취할 수 있으리라 여긴 장로는 자신 의 공격이 약관도 되어 보이지 않는 을지룡 때문에 무위로 돌아가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바람을 뱉어냈다. 하지만 공격을 막는 것은 물론 이고 도리어 역공을 펼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장로는 그다지 대수 롭지 않게 생각했다. 영활하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는 을지룡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 하고 있었다. 그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처럼 어린 나 이에 객기를 부린다고 여길 뿐이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 제72장 패배(敗北) "후∼ 정말 대단하외다. 수호신승과의 싸움 이후 꽤나 노력했는데 이 모양이라니." 옆구리에 난 상처를 지그시 어루만지던 악위군이 감탄 어린 눈으로 환야를 바라봤다. "내가 할 소리를 하는군." 오 장 밖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환야가 무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내심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상처를 입힌 공격은 삼 초식인 파검삼식을 각고의 노력 끝에 하나로 융합한 것이었다. 그 위력은 삼 초식 중 위력이 가장 강한 천검 파천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 다. 비록 밖으로 드러난 모양이야 악위군의 옆구리에 얕지 않은 상처 를 입힌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감추어두었던 최후의 한 수까지 사용한 자신에 비해 악위군은 분명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뭔가가 남아 있었다. 밑천을 드러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컸다. "아직 보여줄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눈치채셨구려." 악위군이 살짝 미소를 보였다. "물론." "과거의 나였다면 분명히 이길 수 없는 싸움. 특히 조금 전 보여줬 던 공격은 천하를 뒤집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했소." "인간의 몸뚱이도 어쩌지 못한 공격이다." "단언컨대 천하에 그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오. 과거 한번 손속을 나누었던 수호신승의 공격도 그 정도는 아니었 으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듣기보다는 네가 감추어둔 실력을 보고 싶다." 말과 함께 환야는 당장에라도 공격을 할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악 위군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원하신다면." 순간, 유연하기만 하던 악위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살짝 마주하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강한 눈빛이 환야를 향해 섬전같이 뿌려지 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묵빛이 맹렬히 소용돌이치며 사방을 집어 삼킬 듯한 기세로 그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해졌다. "대...단하군." 환야는 악위군이 만든 묵빛 소용돌이와 강기를 보며 진정으로 감탄 했다. 소용돌이는 천천히, 그러나 천하를 뒤흔들 거력을 담은 채 그녀를 향해 접근했다. 환야는 조금도 주저없이 검을 휘둘렀다. 파검삼식을 하나로 만들어 낸, 아직 이름도 붙이지 못한 초식이었다. 파스슷! 요란한 파공성과 함께 그녀의 검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어떤 검기, 검강도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밝고 날카로운 빛줄기. 그러나 천하를 뒤덮고도 남을 가공할 기세도 악위군에겐 아무런 효과 가 없었다. 그녀의 공격은 악위군의 주변에 울렁이는 묵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조금 전엔 어느 정도 이득을 취했던 공격이었으나 이번엔 너무도 쉽 게 막히고 말았다. '더 강해진 것인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환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간단하게 공격을 막은 악위군이 공중에 몸을 띄우고 환야를 향해 들 이닥쳤다. 번쩍! 가히 벽력과도 같은 빠른 공격이었다. 악위군의 공격은 환야가 펼친 방어막을 순식간에 뚫고 접근했다. "헛!" 환야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재빨리 몸을 틀며 연거푸 검을 휘두르는 그녀. 그런데 상대의 모습 이 보이지 않았다. 사라졌던 신형이 그녀의 좌측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환술(幻術)?' 환야는 극도로 긴장했다. 악위군의 신형은 이번엔 정면에서 나타났다. 천천히 다가오는 것처 럼 보여도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면전까지 다가왔다. '공격은 불가능하다. 방어를... 한데 막을 수 있을까?' 환야는 모든 내력을 동원하여 주변에 호신강기를 펼쳤다. 묵빛과 정반대의 밝은 빛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펼치는, 그녀의 몸을 애무하듯 보호하는 강기막은 무려 일 장이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악위군의 묵빛은 그녀가 애써 만든 호신강기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통과해 버렸다. 딱히 부딪치거나 파괴한 것도 아 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마치 물이 스며들 듯 그렇게 스며든 것이었 다. 가슴을 향해 짓쳐드는 묵빛을 보며 그녀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거의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호신강기가 너무도 허무히 무너지자 그 녀는 일순 멍한 눈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냥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기혈이 역류하는 것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기운을 응집했 다. 목구멍으로부터 비릿한 것이 올라왔으나 참았다. 전신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요동치고 힘에 부쳐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렇게 짜낸 최후의 힘으로 검을 휘둘렀다. 팍! 목덜미를 움켜쥐듯 접근하던 묵빛과 환야가 만들어낸 빛줄기가 정 면으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두 절대자의 충돌 이 만들어낸 소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지켜보는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한 사람 의 신형이 끊어진 연처럼 힘없이 날아가 처박혔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믿을 수가 없군. 이런 상황에서도 내력을 모으고 공격 을 하다니." 악위군은 꼼짝 않고 쓰러져 있는 환야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엔 승 리자의 만족스런 웃음 대신 놀람과 탄성으로 물들어 있었다. 물리치기 는 하였으나 상대의 저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옛날 천하를 재패했 던 힘이 절로 느껴졌다. "후∼ 그래도 이기긴 이겼군." 비로소 그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싸움의 향배를 결정짓는 원로들과 장로들의 전장 으로 고개를 돌렸다. 십팔장로의 수는 어느새 삼분지 일로 줄어 있었 다. "역시... 버거워 보이는군." 처음에 그는 십팔장로들이면 패천궁 최후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원로 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웃기는 생각이었어.' 악위군은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새삼 느끼며 걸음을 옮겼 다. 한 사람의 피해라도 줄여야 한다고 여긴 것이었다. "헛!" 을지룡의 도움으로 자신에게 협공을 가하던 장로를 쓰러뜨릴 수 있 었던 한가풍은 숨도 돌리기 전 전신으로 쏟아지는 엄청난 살기에 기겁 을 하며 몸을 틀었다. 그의 면전으로 다가오는 묵빛. 한가풍은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대항하지 않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패천궁의 원로로서 결코 무 시 못 할 힘을 지닌 그라 해도 환야가 감당하지 못한 힘을 이겨낼 수 는 없는 것이었으니. 꽝! 엄청난 폭음과 함께 한가풍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웅덩이가 파였다. 간발의 차이로 자리를 벗어나긴 했어도 깊게 파인 땅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는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묵빛의 기운을 일렁이며 천천히 걸어오는 악위군을 보며 한가풍과 을지룡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입가에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이는 분명 중천의 천주였다.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을지룡의 눈에 무참히 쓰러 져 있는 환야가 들어왔다. '서, 설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누구던가? 이미 천하를 무릎 꿇렸던 패천궁의 궁주로 그 강 함은 가히 추측키 어려울 정도였다. "마, 말도 안 돼!!"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을지룡은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면 할수록 쓰러져 있는 환 야의 몸은 더욱더 크게 투영되었다. 을지룡은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 리고 가슴 어귀에 검을 박은 채 쓰러져 있는 환야를 안아 들었다. "하, 할머니!" 대답은 없었다. "할머니!" 그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을지룡은 그녀를 부여잡 고 오열했다. 그의 음성을 들은 것일까? 죽은 듯이 감겨 있던 그녀의 눈이 살짝 떠 졌다. "룡...이구나." "하, 할머니!" "사내... 녀석이 눈물은....." "괘, 괜찮으세요?"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의식도 못한 채 을지룡 은 그저 환야가 죽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할 뿐이었다. "그다지... 좋지는 않... 구나." 환야의 시선이 가슴 쪽에 박힌 검을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을 지룡이 재빨리 검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환야의 제지로 검을 뽑지 못 했다. "어, 어째서?" 을지룡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환야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보다 급한 것이 있구나. 조...금 도와주련?" "마, 말씀만 하세요." "중...독이 되었다. 그것도 지...독한 독인 것 같은데....."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할머니!" 기겁을 한 을지룡이 연거푸 불러도 그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 았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우선 치료가 시급 하다고 여긴 을지룡은 즉시 몸에 지니고 있던 환약을 잘게 부숴 복용 시키고 장문혈을 통해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만약 주변에 적이 있다면 환야는 물론이고 그마저도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그야말로 위 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조모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지금, 을지룡은 이것 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일을 할 뿐이 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피아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뒤엉킨 전황으 로 인해 그 누구도 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사이 전황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력한 전력을 지닌 패천수호대와 그들을 호위하는 혈궁단 에게 회천단이 전멸을 당하고 다소간 여유가 생긴 패천수호대가 이곳 저곳을 지원하면서 마냥 밀리는 듯 보였던 싸움은 조금씩이나마 균형 을 이루고 있었다. 비록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패천수호대가 어째 서 패천궁의 최강 전력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 였다. 여기에 중천의 노고수들의 손발을 꽁꽁 묶으며 수하들을 지휘하는 장로전과 호법전 고수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특히 원로들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 암왕을 대신하여 가장 앞장서 싸움을 지휘하는 도왕 동방 성의 무위는 필설로 다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그의 도법 앞에서 쓰러진 상대만 십여 명. 그들 대다수가 중천의 핵심 고수라 할 수 있 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만으로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엔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싸움의 향배를 결정짓는 싸움이었던 환야와 악위군의 싸움에서 환야가 패한 것이 뼈아팠다. 그것이 불러온 여파는 컸다. 패천궁의 원로들을 맞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십팔장로들은 악 위군의 가세로 여유를 찾았다. 비록 원로들에 비해 세 배의 전력을 가 지고도 송백검 백준, 고작 한 명의 목숨을 빼앗고 그 대가로 삼분지 이 에 해당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었으나 그만큼 시간을 끌어준 것만으로 도 충분했다. 그들을 상대하느라 원로들 역시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환야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나타난 악위군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한가풍이 삼 합 만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고 암습을 가했던 유불살 송찬마저도 결코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고 물러나고 말았다. 십팔장로 들을 이끌던 악호를 물리치고 나타난 냉악이 삼십여 초를 버텼으나 그 역시 악위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여력이 있었던 암왕 낙운기가 온갖 암기를 뿌려대며 앞을 막아섰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지독한 놈!" 아무리 계속되는 공격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기세가 거세져만 가자 낙운기의 안색은 참담함으로 물들었다. 주변을 살펴봐 도 도와줄 여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찬 상대야. 그래도 혼자 죽지는 않 는다." 낙운기는 마지막 공격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암왕이라는 이름을 얻 게 해준 무공. '감당할 수 있을는지.....' 부딪치기 전까진 충분한 자신감을 가졌었지만 악위군과 손속을 나 눠본 지금은 그다지 자신이 서질 않았다. 그는 최후까지 생각하고 있 었다. "일월무조(日月無照)!" 필사적인 상황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낭랑하기 그 지 없었다. 그를 몰아붙이던 악위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만큼 낙운기의 기세는 매서웠다. 슈슈슉! 언제, 어디서 꺼냈는지, 또 어떤 식으로 던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낙운기의 몸에서 발출된 비수들은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며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목표는 악위군. 비수의 움직임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과연 암왕!' 악위군은 어째서 그가 당가의 가주를 대신해 암왕이란 이름을 얻었 는지 이번 한 수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악위군이 일으킨 묵빛 기운의 틈새로 눈부신 빛살이 뚫고 들어갔다. 낙운기는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그의 얼굴이 환히 펴지 려는 찰나 묵운이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낙운기의 염원을 품고 침입 한 비수들이 도리어 튕겨져 나오기 시작했다. 더러는 낙운기이 몸을 노리고 날아들기도 했다. 낙운기는 허탈한 웃음을 흘릴 뿐 피할 생각 을 하지 못했다. 몇몇 비수들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도 그는 움직이 지 않았다. 단 한 수에 생명을 건 그에겐 움직일 기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못했다. 어느 순간, 비수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그의 몸에 적중했다. 그리고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무릎이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다. 차디찬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낙운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주변을 휘감고 있던 묵빛 기운이 살짝 걷히며 드러난 악휘군의 발등이었다. "정말 괴물 같은 놈이다." 악위군과 낙운기의 싸움을 지켜보던 응사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 들었다. 용형십삼권으로 네 명의 장로를 고혼으로 만든 그가 보기에도 낙운기의 공격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원로들의 우두머리인 냉악이라 해도 결코 쉽게 감 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 한데 낙운기가 목숨을 바쳐가며 펼친 무공 도 악위군에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곧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악위군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애당 초 그것은 환야가 패한 순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후∼ 그래도 할 수 없지!" 응사웅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악위군의 발걸음을 막지 못하면 패천수호대의 활약으로 약간이나마 변하기 시작한 전세가 다시 뒤집힐 터. 그리되면 필패(必敗)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금 그와 잠깐이나마 손속을 교환할 수 있는 사 람은 자신뿐이라는 것. "장로님들은 이만 물러나시지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며 다가오는 응사웅을 일별한 악위군이 악 전고투로 지친 장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야 고작 다섯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아직도 투기를 잃지 않은 눈을 하고 있 었다. "끝까지 싸우겠네." 악호의 죽음으로 자연스레 대장로 자리를 이어받은 악청우(岳靑羽) 가 말했다. 악위군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부터 이곳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아직은 충분히 싸울 수 있네." 형제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장로들의 눈빛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장로님들께선 저쪽을 살펴주시지요." 악위군은 어느새 박빙으로 변한 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로들의 시선이 악위군을 따라 움직였다. "기세를 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음." 다소 긴장된 어조로 장로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전세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알았네. 그리하도록 하지." 권유라고 해도 천주의 말은 곧 명령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악청우의 동의가 있는 터라 다른 장로들도 토를 달지 않았다. 결정을 내린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혼전을 거듭하고 있는 전장으로 즉시 몸을 날린 장로들은 저마다의 상대를 찾아 손을 쓰기 시작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외다." "신경 쓸 것 없다!" 응사웅이 차갑게 소리쳤다. "자, 그럼 우리도 시작해 봅시다."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응사웅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를 지그시 쳐다보는 악위군의 입가 에 냉소가 피어올랐다. * * *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정도맹의 인물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인원이 참여하는 극비의 계획 에 엄밀히 말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이 어째서 끼어 있는지를 며칠째 고심하던 비무영의 입은 댓발이나 나와 있었다. "시끄러. 가기 싫으면 혼자 돌아가면 되는 것인지, 말이 많아." 위지황은 간단하게 그의 말을 묵살했다. "젠장, 가고야 싶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못하니 환장하는 것 아닙 니까?" "누가 말리냐? 가라니까!" "제길, 내가 말을 말아야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비무영은 가슴을 퍽퍽 치며 고개를 돌렸다. "참 재밌는 녀석들이야." 위지황과 비무영이 옥신각신하는 것을 지켜보는 남궁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벌써 며칠째 똑같은 대화를 나누며 투닥거리는 그들이 마냥 귀엽게 보였기 때문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기에 주종 간이면서 도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형제처럼 지내는 것이겠지요." 조용히 대꾸하는 남궁민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은은히 떨리는 눈썹, 눈가에 희미하게 잡히는 주름은 그녀 역 시 미소 짓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보기가 좋구나." 남궁민도 동의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저 녀석을 어찌 생각하느냐?" 난데없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남궁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남궁혜는 더할 나위 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다시 물었다. "저 녀석을 어찌 생각하는지 네 마음을 물었다." "그, 그냥...." "그냥?" "나, 남궁세가를 도와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한다고 여겼으나 그녀의 음성은 누가 들어도 어색하게 들릴 만큼 떨렸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남궁혜가 짓궂게 물 었다. "그저 단순한 친구더냐?" "그러니까..." 남궁혜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남궁민은 금방 대꾸를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저렇게 웃고 떠들고는 있어도 심적 부담은 꽤나 클 것이다." "그렇... 겠지요." 당연했다. 위지황은 중원무림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북천의 차자(次子), 어찌 보면 자신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 다. 며칠 전, 남궁세가가 이번 작전에 참여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밝 히게 된 위지황의 정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몸을 떨었던 가? 특히 북천과의 대결에서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문파들의 무인들은 노골적인 살의를 드러내며 도발을 서슴지 않았다. 인격적인 모독과 욕 설은 예사였고 당장에라도 손을 쓸 듯 칼을 들이대기도 했다. 또한 절대적으로 비밀을 요하는 행사에 적과 다름없는 그를 동행시 킬 수 없다며 오상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모욕 을 참을 수 없다면 방방 뛰는 비무영과는 달리 위지황은 그들에게 단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고 믿을 수 없는 인내력으로 그에게 쏟아 지는 수많은 모욕을 감내했다. 보다 못한 을지소문의 일갈에 의해 표 면으로 드러나 있던 불만들이 다소간 수그러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환 대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오직 그와 인연이 있던 남궁세가의 몇몇 인 물만이 그를 따뜻하게 대해줄 뿐이었다. "많이 힘들겠지요." 그가 어째서 그런 치욕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는지 남궁민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따뜻한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 지 못하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수심에 잠겨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궁혜가 다 소간 준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네가 어찌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남궁세가의 가주라 는 자리에 있는 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없는 것도 이해는 하지. 하지만 언제까지 외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터. 조만간 네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 "예." 남궁민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남궁혜가 자신을 질책한다고 여 긴 것이다.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남궁혜가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 았다. "할미의 말을 곡해하지 말거라. 난 어디까지나 네 편이고 네가 어떠 한 결정을 내려도 지지할 터이니." 예상 밖의 말에 남궁민의 고개가 발딱 치켜 올려졌다. "그래, 여인에게 있어 사랑이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일 때가 있음 을 이 할미가 어찌 모르겠느냐." 남궁혜의 따뜻한 시선이 어느덧 을지소문의 등에 닿아 있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아니란 생각이 드는구나.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네가 할 일이 아직은 너무 많아." "알고 있습니다." 남궁민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음성은 조금 전처 럼 어둡지 않았다. "그나저나 참으로 정성이로구나." "예?" "성아 말이다. 틈만 나면 저리 열심히 하니 말이다." 남궁혜가 한쪽에 떨어져 몇 번인가 손발을 내젓다가 묵상에 잠기고 다시 움직이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는 남궁성을 가리켰다. "예." 그런데 만면에 웃음을 짓는 남궁혜와는 달리 남궁민은 시무룩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걱정입니다." "뭐가 말이냐?" "열심히 하는 것은 같은데 생각만큼 진전이 빠르지 않습니다." "쉽지는 않겠지. 지금껏 황보세가의 무공만을 익혀왔으니 힘들 것이 야.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막막하기 도 할 것이고. 그래도 저리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느리긴 해도 저 정도면 제법 많은 진전이 있는 것이 아니더 냐. 너무 조급해하지 말거라."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걱정되는 것이...." "그래, 그것이 바로 누이의 마음일 터이니." 남궁혜는 부드러운 눈으로 남궁성과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남궁민 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리곤 뭔가를 생각했는지 다소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꾸나." "예." 착 가라앉은 어투 속에서 뭔가를 느낀 것일까? 남궁민이 약간은 긴 장된 자세로 대답했다. "네 어미가 살아 있다고 들었다." 순간, 남궁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가 그 아이를 부정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 네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 "어머니는 죽었습니다." 남궁민이 차갑게 대답했다. "부정만이 능사는 아니다. 핏줄은 천륜(天倫)이야." "천륜을 부정한 어미는 어미가 아닙니다." "그러하고 네가 받은 피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네 몸속에 흐 르는 피의 반은 네 어미의 것이야." "가능만 하다면 당장에라도 뽑아내고 싶습니다!"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남궁민의 언성이 높아졌다. 북풍한 설이 울고 갈 만큼 차갑기만 한 태도에 남궁혜는 절로 한숨을 내쉬었 다. 그녀의 말 속에서 어미에 대한 미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음을 느 꼈기 때문이다. "좋다, 너는 그렇다고 치자. 하면 성아는 어찌할 테냐? 그 아이에게 도 어미를 부정하도록 만들 셈이냐?" "....." "너 때문에 내색은 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어미 걱정에 요즘 밤잠을 설치는 것 같더구나. 왜 그렇지 않겠느냐? 사천의 준동으로 가장 먼저 피해를 본 가문이 황보세가였거늘. 다행히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되기 는 하였다만 걱정이 많이 될 게야." "저 아이의 마음까지 가로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소 힘이 빠진 음성이었다. "네가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 자체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네가 어미를 부정하고 있는데 어찌 성아가 어미를 찾을 수 있겠느냐? 그렇 잖아도 혼자 어미의 사랑을 받고 편안히 지내온 것을 늘 미안해하는 아이거늘." "......" "네가 어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네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저 아이도 어미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그럴 것이야." "제가 강요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 강요하고 있다." 남궁혜의 음성이 한층 준엄해졌다. "....." 남궁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어느샌가 벌떡 일어나 손발을 놀리는 남궁성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후∼ 쉽지는 않겠구나.' 좀처럼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남궁혜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괜히 말을 꺼낸 것은 아닌가 하 고 후회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풀어야 할 응어리기에 마냥 미루고만 있을 수는 없는 터. 다만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설득하는 것 이 좋으리라 여겼다. * * * "크헉!" 둔탁한 격타음과 함께 응사웅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성이 터져 나왔 다. 코와 입으로 피분수를 뿜어내며 뒷걸음질치는 그는 일견하기에도 상당한 부상을 당한 것으로 보였다. "우라질!" 간신히 신형을 다잡은 응사웅이 처음의 자세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는 악위군을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용형십삼권. 평생을 바쳐 익혀온 권장지술을 필사적으로 펼쳤음에도 이십여 초 를 견디지 못했다. 자신은 운신하기가 힘들 정도로 내상을 입었으나 상대에게는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했다. 더구나 절망스러운 것은 이제 는 몸을 움직일 여력조차 없는데 상대가 천천히 명줄을 끊기 위해 다 가오는 것을 그저 멍하니 지켜봐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재밌는 승부였소." "재미는 개뿔이! 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더 이상 피할 힘도 없었고 또 구차하게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응사 웅은 피가 섞인 가래침을 내뱉으며 눈을 감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 려고 하였다. 그리고 악위군의 손이 그의 가슴 어귀로 접근할 때까지 그렇게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난데없는 고함 소리와 함께 상황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멈춰랏!" 시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호통 소리와 함께 강맹한 기운이 악위 군의 배후를 노렸다. 느긋하게 응사웅의 목숨을 취하려 했던 악위군이 다소 귀찮다는 표정으로 팔을 휘둘렀다. 환야가 쓰러지고 패천궁의 원로들이 쓰러진 지금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고 여기는 듯 다소간 방심을 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힘을 단숨에 박살을 내며 짓쳐드는 기운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헛!" 황급히 바닥을 구르며 공격을 피한 악위군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 들었다. "누구냐?" 두어 번 땅바닥을 기면서 위기를 벗어난 악위군이 벌떡 일어나며 소 리쳤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꽤나 화가 났는지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악위군이 노한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상대는 그제야 담담한 음성으 로 대답을 했다. "이곳의 주인." "주인?" 악위군은 일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궁주!" 안휘명의 등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응사웅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한쪽 구석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원로들의 눈도 경악으로 물들 었다. "구, 궁주!" "어, 어떻게?" 그들이 알기에 안휘명은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적의 암습으로 무공을 잃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근래엔 삶에 대한 목적도 없이 제대로 된 치료도 거부하고 죽기를 원 한다고 들었떤 안휘명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난데없이 전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전에 없이 강한 무위를 뿜어내면서. 원로들의 외침을 듣고서야 상대가 패천궁의 궁주라는 것을 알게 된 악위군 역시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소이다." "그렇게 되었소. 누구 때문에 꽤나 고생을 해서 말이오." "하하, 이거야 원. 무안해서." "아무튼 미안하게 됐소. 주인 된 입장으로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한 <54-55페이지가 없네요>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었다. 그 자신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안휘 명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야를 쓰러뜨리고 여러 원로들까지 제압한 그가 아니던가. 충분히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자신감이었 다. [이제는 반 시진도 남지 않았습니다.] 공격에 앞선 마지막 전음을 보낸 안휘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생 을 곁에서 분신처럼 지켜주던 애검이 그의 의지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 다. 하지만 악위군은 태연자약했다. 안휘명의 검로를 보자마자 그는 환야의 검을 떠올렸다. 분명 같은 검법. 그러나 위력이나 완성도 면에서 천양지차였다. 게 다가 그는 환야의 검을 깨뜨렸다. 부상도 입었고 내력도 많이 고갈되 었으나 안휘명의 공격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악위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빛 기운이 다시 짙어지기 시작했 다. "퇴... 각입니까?" 화천명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원로들의 표정이 침통해졌다. "어쩔 수 없다. 궁주의 명이다." "차라리 이곳에서 뼈를 묻겠습니다." 화천명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다들 같은 심정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너는 살아야 한 다. 너도 그 이유를 잘 알지 않느냐?" "모르겠습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 치고 나가려는 그의 팔을 붙잡은 안당이 말했다. "시끄럽다. 장차 패천궁을 재건하고 놈들과 맞서 싸울 놈은 오직 너 뿐이다. 우리같이 늙은이들이 아니란 말이다. 수치스러울 것이다. 억 울하기도 하겠지. 하나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힘이 놈들보다 못하 기에 겪어야 되는 치욕이란 말이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결과가 그리 나왔다. 단, 오늘의 치욕을 절대로 잊지 마라. 먼 훗 날 열 배 백배로 고스란히 되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네가 할 일이다." "하지만...." "토를 달지 마라! 궁주께서 결정하신 일이다! 또한 우리가 동의한 일 이고. 너는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어서 퇴각 명령을 내리게." 더 이상의 반발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호통을 친 안당이 냉악에게 명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침통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한 냉악과 원로들이 전장으로 달려갔다. "퇴각하라!" "퇴각라하!" 원로들의 외침은 입과 입을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고 해도 금방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다. 명을 받은 패 천궁의 무인들이 손을 거두고 물러나려고 해도 상대방이 기를 쓰고 덤 볐기 때문이다. 이참에 후환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중천의 수뇌부들은 수하들을 더 욱더 독려했다. 싸움을 멈추고 물러나려는 자와 끝까지 쫓아 끝장을 내려는 자. 비교적 팽팽하게 유지되던 싸움은 중천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훗, 마침내 끝났군." 악위군을 대신해 전황을 관장하던 군사 신도가 퇴각을 위해 서서히 물러나는 패천궁의 무인들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림을 제패 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패천궁. 최고, 최강의 적을 마침내 쓰러 뜨리는 순간이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수뇌들은. 포위망을 확실 히 구축하라 전하라." "옛." 명을 받은 전령이 쏜살같이 달려나가고 중천이 무인들의 기세는 더 욱더 거세졌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확실히 밟을 것이다. 차근차근 아주 철 저하게.' 전령의 뒷모습과 그 앞에서 펼쳐지는 전장을 살피는 신도의 눈은 차 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73장 생사기로(生死岐路) 패천궁의 패퇴로 대회전이 끝난 지도 벌써 일각여. 마지막까지 계속 되던 싸움이 마침내 끝을 맺었다. 툭. 검이 떨어졌다. 아울러 검의 주인 역시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끝났군." 한쪽 팔을 축 늘어뜨리고 연신 가쁜 숨을 내뱉던 악위군도 지칠 대 로 지친 모습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곁으로 다가온 신도가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의 눈엔 괜찮아 보이는가?" "나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담담한 대꾸에 악위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나쁘지는 않네. 비록 검을 쥘 힘도 하나 없고 숨 쉬기도 귀 찮을 정도지만 괜찮아. 참,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가?" "전력의 육 할 이상입니다." 생각보다 큰 피해에 악위군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후∼ 역시.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피해 가 너무 크군."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패천궁을 무너뜨린 이상 더 이 상의 장애물은 없습니다." "정도맹도 있지 않은가?' "북천과 서천에 당해 이미 유명무실해진 놈들입니다. 인물도 없고 요. 이빨 빠진 호랑이, 아니, 고양이도 되지 않습니다." "하하하, 이빨 빠진 고양이라... 그럴듯하군. 하긴 정도 쪽에서야 수호신승을 제외하곤 저만한 인물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꽤나 강해 보였습니다." 신도가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산화한 안휘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 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숨이 끊어진 안휘명. 머리카락에 덮여 얼굴 전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지막 자존심은 지켰다는 생각 에서인지 살짝 드러난 모습이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대단한 자였다. 하마터면 팔을 잃을 뻔했어." 악위군은 뼈가 부러지고 심줄이 끊겨 덜렁거리는 팔을 잡으며 말했 다. 제법 큰 고통이 느껴지는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가 말인가?" "저자는 분명 암습을 당해 폐인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적의 기만일 수도 있었겠지만 확인 결과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니까 이상하다 그거겠지? 그것도 소문보다 훨씬 강한 모습으로." "그렇습니다." "나도 그게 이상했네. 처음엔 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저자의 무공이 상상외로 강했거든. 내가 일으킨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와 팔을 이 정 도로 만들 걸 보면 말이야. 전대 패천궁의 궁주에는 미치지 못할지 몰 라도 최소한 과거에 싸웠던 수호신승만큼이나 강한 것은 틀림없네." "그러니까 더 이상한 겁니다. 저렇듯 멀쩡한 모습을 가지고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싸움 막바지에 나타난 것일까요?" "강하긴 했지만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예?" "군사 말대로 패천궁주가 폐인이 된 것은 틀림없을 걸세. 다만 뭔 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옛날의 무공을 회복한 듯 보이네." "그럴 수도 있는 겁니까?" 신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못하라는 법은 없겠지. 수없이 많은 무공 중에 잠재 능력을 끌어내는 무공이 있을 수도 있고 약물의 힘에 의존하여 힘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네. 다만 그런 방법들 치고 제대 로 된 것은 보지 못했네. 그만큼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세. 패천궁 주도 아마 그런 식으로 힘을 회복한 모양이네. 처음엔 그토록 강맹하 더니 점점 기운을 잃었거든. 마지막엔 내가 손쓸 틈도 없이 스스로 자 멸했으니까."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로군요." 신도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안휘명의 주검을 쳐다봤다. "나라도 그리했을 것이네. 한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그 정도 자존심 은 있어야겠지. 게다가 수하들의 활로를 뚫어줘야 할 필요도 있었겠 고." 그는 안위명이 수하들의 퇴각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그래, 패천궁의 잔당들은 어찌 되었나?" "도주 중입니다.' "얼마나?" "일단 이백여 명 정도입니다." 악위군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졌다. "너무 많군." "일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추격이 시작되었으니 곧 끝장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너무 방심하지는 말게. 애당초 성을 버리기로 결심했다면 꽤나 잡 기 힘들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나 놈들의 도주로는 이미 파악이 끝났습니다. 남 은 것은 느긋이 사냥을 하는 것뿐입니다." "사냥?" "예. 최후의 잔당까지 쓸어버릴 생각입니다." "삭초제근(朔草制根)이라.. 좋은 생각이긴 한데..." 악위군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신도가 재빨리 물었다.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계십니까?" "아니, 그저... 비수를 품고 있는 적이 없으며 나중에 심심할 것 같 아서 말일세." "예... 예?" "하하하, 놀라기는. 그냥 그렇다는 말일세. 아무튼 자네가 알아서 잘 처리하게. 뿌리를 자르든 몸통을 자르든 말일세." "알겠습니다." * * *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입술을 부르르 떨며 묻는 냉혈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패천궁이 무너졌다고?" "그, 그렇습니다." 벌떡 일어난 냉혈이 녹영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하, 하지만 연락이..." "똑바로! 자세하게 말해 봐! 정확히 어찌 된 것이냐?" 꽤나 충격이 컸던 것일까? 녹영을 채근하는 냉혈의 모습은 평소의 차분하고 말이 없던 혈영대 대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만큼 당황하 고 있다는 말. "어지 된 상황인지 말해 보게." 냉혈의 팔을 잡은 을지휘소가 차분히 물었다. 그러나 얼굴이 굳어 질 대로 굳어진 것이 그 역시 몹시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 자세한 것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냉혈이 도끼눈을 뜨며 되물었다. 순간, 자라목으로 움츠러든 녹영 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천의 힘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고 퇴각하고 있다고..." "마, 말도 안 되는!" 믿기지 않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졌으면 무 너졌지 패천궁이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중천의 힘이 아무리 강 맹하다 하더라도 그가 아는 한 패천궁은 그 이상의 저력을 가지고 있 는 곳. 고전할 것이란 생각을 하긴 했어도 설마 하니 무너질 줄은 꿈에 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내 아들의 소식은 있는가?' 을지휘소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주, 중천의 천주를 맡기 위해 몸소 나서시긴 했지만..." 녹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질 말을 어찌 모 를 것인가? 환야가 싸움에서 승리했다면 애당초 패천궁이 무너지지도 않았을 터. 을지휘소는 참담함을 참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 가셨는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을지휘소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상당히 위중한 부상을 당하셨다고..." 말을 하던 녹영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환야의 목숨이 위험 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을지휘소의 전신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 온 탓이었다.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날카로움을 감당하지 못한 녹영 은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그제야 살기를 거둔 을지휘소 가 다시 물었다. "아들은... 내 아들의 소식은 없었는가?" "무, 무사하시다고 합니다." 녹영은 조금도 지체없이 대꾸를 했다. "지금 상황이 어떻다고 하더냐?" 냉혈이 물었다. "성에서 빠져나와 도주 중이라고 합니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도주? 지금 도주라고 했느냐?" "예. 일단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이고 있는데 적의 포위망이 만 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미치겠구나! 천하의 패천궁이 어째서 이런 꼴을...." 울분이 치미는지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 냉혈의 얼굴은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싸움이 끝났음에도 패퇴하 는 이들을 추격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끝장을 보겠다는 의미가 아닙니 까?" 강유의 말에 냉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뿌리를 뽑겠다는 말일 것이오." "도우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냉혈은 대답 대신 을지휘소를 쳐다봤다. 분통이 터지고 미치도록 답답한 심정이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위 기에 빠진 동료들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패천궁에 속한 사람도 아 니고 또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물론이고 혈영 대 역시 을지휘소의 명령을 받고 있는 터라 쉽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 을지휘소는 별다른 대답 없이 먼 산만을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합니까?" 잠시 기다렸던 냉혈이 다시 물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을지휘소가 그와 녹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떠날 준비를 해두게. 녹영 자네는 그들이 어떤 상황인지 어느 쪽으 로 움직이고 있는지 계속해서 연락을 취해야 할 것일세." "알겠습니다." 을지휘소의 시선이 강유에게 향했다. "너는 이 길로 네 형에게 달려가 지금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리고 피 신을 시켜라." "알겠습니다." "행여나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는 것도 잊지 말고. 패천 궁을 무너뜨릴 정도라면 해남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예." 을지휘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러둔 대로 준비하게. 곧바로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말이네.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네." "예. 한데 어디를 가시는지....." "....." 을지휘소는 아무런 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궁금하기 그지없었지만 냉혈은 차마 묻지 못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패천궁의 몰락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전 무림에 퍼졌다. 충격과 경악이 무림에 휘몰아쳤다. 패천궁도 패천궁이었지만 과거 패천궁의 궁주로 천하를 굴복시켰던 환야가 중천의 천주에게 패해 생사가 불분 명하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을지휘소와 혈영대에 발목을 잡혀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남천의 진영에도 중천의 소식은 금방 전해졌다. "확실한 것이냐?" "예. 확인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군." 패천궁이 중천에 패했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것의 진위가 확인된 순 간, 남천의 천주 기요후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거야 원. 참으로 아까운 기회를 놓쳤군. 아까운 기회를 놓 쳤어." 기요후의 주변에 시립하고 있던 이들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 고 말이 없었다. "하루만 더 빨리 도착했어도, 아니, 지금 이 순간이라도 패천궁에 도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렸군. 몇 안 되는 적 때문에. 허허허." 자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럴수록 다른 이들의 얼굴은 흙빛 으로 변해갔다. 그 웃음 속에 폭발할 듯 잠재되어 있는 분노를 읽은 까닭이었다. "희염." "예, 옛! 천주!" "아직이겠지?" "그, 그렇습니다. 그, 그러나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금 방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납작 엎드린 채 대답하는 희염은 전신을 사시나 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정확히 두 시진만 더 기다려 주겠다. 그때까지 놈들의 흔적을 찾지 못하면 다시는 아침 해를 보지 못하게 해주마." "조, 존명!" "네놈들도 마찬가지다. 찾아라! 빨리 찾아! 마독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반드시 놈의 목을 잘라 위로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마침내 성질을 이기지 못한 기요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독의 혼은 이미 승천을 했을 것이라고, 또한 그는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유언으로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강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길길이 날뛰는 기요후의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 모든 말들이 입 안에서만 맴 돌뿐 나오는 대답이라곤 그저 명을 따르겠다는 말뿐이었다. "오늘 내로 놈들을 끝장내고 지금 도주하고 있는 패천궁의 뒤를 쫓 는다. 최소한의 체면치레라도 하기 위해선 놈들의 잔당을 우리 손으로 끝장을 내야 해. 희염!" "예! 천주님!" "놈들이 어느 쪽으로 도주하고 있는지 파악되었느냐?" "예. 삼목산(三目山)을 지나...." 바로 그때였다. 히히히힝! 미친 듯이 울부짖는 말 울음소리와 함께 일대 소란이 일었다. 심기 가 불편할 대로 불편했던 기요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그렇잖아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명을 받던 후 왕 곤언이 율평에게 소리쳤다. "예." 대답가 무섭게 자리를 벗어나는 율평. 그의 서열 정도면 구태여 직 접 나서서 알아볼 필요가 없었지만 숨도 쉬기 어려운 자리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었다. 기요후의 거처에서 벗어나자마자 그가 본 것은 미쳐 날뛰는 말들과 그 말들을 진정시키고자 애쓰는 수하들의 모습이었다. "한심한 것들 같으니. 그깟 말 몇 마리 다루지 못해서!" 험상궂기 그지없는 율평의 인상이 더욱 사나워졌다. "좋아. 한번 정도 다잡을 필요가 있겠어." 근래 들어 수하들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졌다고 여기던 터였다. 거기 에 지난 며칠 동안 기요후의 비위를 맞추느라 쌓일 대로 쌓인 울분을 폭발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때마침 좋은 꼬투리를 잡았다고 여 긴 율평은 건들건들한 걸음걸이로 걸으며 호통을 쳤다. "무슨 일이기에 이런 요란을 떠는 것이냐?"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음성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진정시키던 이 들이 황급히 허리를 꺾었다. "네놈들은 하던 일을 계속해라. 빨리 진정시켜." 손을 내저으며 간단히 인사를 받은 그가 주변의 소란에 놀라 달려온 각 당의 당주와 조장들을 노려봤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칼날 같은 기세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래 도망치는 놈들이 있지를 않나, 경계를 하라고 세워논 놈은 잠 이나 처자고. 이제는 말들까지 미쳐 날뛰어?" "죄, 죄송합니다." "그렇잖아도 어수선한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밑에 놈들이 동요를 하면 네놈들이 기강을 바로잡아야 될 것 아냐. 네놈들이 그 모양으로 정신을 놓고 있으니까 밑에 놈들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아냐!" 히히히힝!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말들의 울부짖음은 계속됐다. 그러 자 고개를 홱 돌린 율평이 짜증이 극에 이른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것들이 정말 죽고 싶은 것이냐! 빨리 진정시키라니까 뭣들 하고 있어!" 하지만 그의 호통 소리는 근 백여 두에 이르는 말과 멀리서,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급격히 가까워진 장소성에 의해 간단히 묻히고 말았다. 우우우우우우!! 호통을 치던 율평이 황급히 입을 다물고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들의 몸이 장소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하나의 점으로 보였던 것이 곧 사람의 형상을 갖추는 것은 금방이 었다. "뭐, 뭐가 저리 빨라!"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적이 침공한 것이냐?" 장소성을 듣고 뛰쳐나온 후왕이 물었다. 이어 기요후의 거처에 집결 했던 수뇌들이 분분히 모습을 보였다. "모, 모르겠습니다." 율평이 어떨결에 대답을 하고 손을 들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괴 한을 가리켰다. "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수백의 인원이 칼날을 갈고 있는 사지 와도 같은 곳에 혼자 뛰어든 사내를 딱히 적이라 부르기가 뭣한 것이 었다. "적이 아니면? 저마한 기세로 달려드는 놈이 아군이란 말이냐?"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동안 코앞까지 이른 괴한을 보는 후왕의 안색 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끊임없이 장소성을 터뜨리며 다가오는 괴한의 기세는 가히 하늘에 서 하강하는 천신과도 같았다. 거대한 태풍이 밀려오듯 그를 중심으로 대기가 소용돌이치며 거친 광풍이 밀어닥쳤다. 그 광풍 속에서 감당하 기 힘든 살기를 느끼며 후왕은 여전히 미쳐 날뛰는 말들을 응시했다. '저 인간 때문이었나 보군.' 아무리 수련을 통해 발달시킨다 해도 인간은 동물의 감각에 미치지 못하는 터. 말들이 저리 미쳐 날뛴 것도 괴한의 기세를 미리 느꼈기에 그런 것이리라. "대단한 기세군." 수하들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기요후의 반응도 후왕과 다르지 않 았다. "누굴까? 저런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며 달려오는 것을 보면 적 인 것은 분명한데... 응?" 뭔가를 본 것일가? 멀리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보던 기요후의 눈 이 반짝거렸다. 달려오던 괴한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약간은 사선으로 뉘여 좌우를 가르는 동작. 순간, 사내의 몸 주변에 서 살짝 밝은 빛이 이는가 싶더니 곧 거대한 해일이 되어 밀어닥쳤다. 그것이 검기임을 알아본 기요후가 다급히 소리쳤다. "피, 피해랏!" 파파파팍! 대기를 가르고 땅을 스치며 밀려드는 검기의 파공성이 기요후의 외 침과 기묘한 화음을 이루며 쏟아지고 그 검기에 노출된 무인들은 필사 적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애당초 괴한의 검기가 노린 것은 사 람이 아니었다. 히히히힝! 미리 위험을 감지했기에 미친 듯이 날뛰던, 그러나 결국 피하지 못 하고 고스란히 당해야 했던 말들의 울부짖음. 수십 마리의 말들이 다리를 잃고 일제히 쓰러지는 것은 무척이나 끔 찍한 상황이었으나 어찌 보면 장관이기도 했다. 파스스슷!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십 마리의 말들을 쓰러뜨린 괴한이 연거푸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놀란 남천의 고수들이 어찌 반응을 해보기도 전에 거의 모든 말들이 바닥에 쓰러져 허우적거렸다.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던 말이라야 고작 십여 두. "이, 이게 무슨...." "마, 말도 안 되는...." 눈앞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다들 넋 을 잃고 있던 찰나 괴한의 신형이 그들 앞에 도착했다. "너는 누구냐?" 기요후가 물었다. 그러나 괴한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봉후와 희염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너, 너는!" "괴, 괴물!!" 봉후와 희염이 괴한을 알아보는 듯하자 기요후의 시선이 그들을 향 했다. 침을 꿀꺽 삼킨 희염이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바, 바로 그자입니다. 나, 낭왕 어르신과 독혈인을 부순...."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기요후의 눈이 스산하게 변했다. "바로 네놈이로군. 우리의 발걸음을 막은 자가." "을지휘소라고 하오." "마독이 진 빚은 뼛속까지 새기고 있었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소. 그 노인이 워낙 강해서 어쩔 수 없었지 만." "한데 무슨 일이냐, 쥐새끼처럼 숨어 지내던 놈이?" 마독의 죽음을 상기한 기요후의 말투는 냉랭함을 넘어 살기로 번들 거렸다. "경고를 하러 왔소." "경고?" 되묻는 기요후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수백이 넘는 인원, 그것도 힘없는 아녀자들이 아니라 잘 벼린 칼과 같은 무인들이 득실대는 곳에 와서 하는 말치고는 너무도 태연하지 않 은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만 자신감도 자신감 나름이었다. "실력은 인정한다만 너무 광오하군. 네놈은 우리를 한낱 도적 놈 따 위로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을지휘소는 말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더 배알이 뒤틀렸다. "우리는 남천이다, 남천!!" "도적이든 남천이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 난 그저 앞서 말한 대로 한 가지 경고를 하러 온 것이오." "네놈이 미쳤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후왕이 당장에라도 손을 쓸 듯 콧김을 뿜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잠깐 기다려라. 유언이라 생각하고 일단 들어는 봐야지. 어디 말 해 봐라." 후왕의 행동을 막은 기요후가 싸늘히 웃으며 손짓을 했다. 퇴로를 차단하라는 신호에 몇몇의 수뇌부와 당주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자신 을 겹겹이 에워싸는 포위망 속에서도 을지휘소는 한 치의 동요도 없 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요." "뭐냐?" "당신들이 무림의 패권을 노리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소. 다만 패천 궁의 행사에 관여하지 마시오." "패천궁? 오라∼ 패천궁." 그제야 을지휘소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기요후가 콧방귀를 뀌었 다. "중천에게 패해 물에 빠진 쥐새끼마냥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다 들었 다. 살아남은 놈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던데... 아, 그러고 보니 중천 의 천주에게 패한 패천궁의 전대 궁주가 네 어미라지? 꽤나 강하다고 들었는데 역시 헛소문에 불과했더군." "....." 을지휘소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살기가 주변을 강타했다. "무, 무슨 놈의 살기가...." 숨이 막힐 듯한 살기에 흠칫 놀란 기요후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뒷 걸음질치고 그의 주변에 있던 수뇌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들에 비해 변변한 실력을 지니지 못한 희염은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함부로 입에 담을 분이 아니오. 말조심하시오." 인간의 것이라곤 할 수 없는 끔찍한 살기에 놀란 것도 한순간, 수하 들의 앞에서 적의 기세에 뒷걸음질쳤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 기요후 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심하지 않으면 어쩔 테냐? 우리가 중천을 도와 패천궁의 잔당을 쫓는 것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러 온 모양인데 어림없는 짓이다! 그렇 잖아도 놈들을 어찌 끝장낼지 연구 중이었다! 오냐, 중천에 앞서 반드 시 내 손으로 끝장을 내고 말 것이다! 희염!" "예, 천주님." "놈들이 어디로 도주하고 있다고?" "삼목산을 넘어 대비산(大悲山)쪽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대비산이라... 북쪽이 차단되었으니 서쪽으로 도주를 하려 하는 군. 우리와는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전력으로 쫓으면 하루 반나절 만에 대비산에서 따라잡을 수 있습 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기요후가 입술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자, 어떠냐? 하루 반나절이라고 하는구나. 네놈의 목을 따고 그놈들 을 끝장내는 시간이 말이다. 생각해 보면 꽤나 긴 시간이 아니더냐." "난 분명히 경고를 했소." "네놈의 경고 따위에 흔들릴 내가 아니다." "후회할 것이오." "후회는 네놈이 하겠지. 이곳에 나타난 것부터가 후회할 일이다." 기요후의 싸늘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공기가 확 변했다. 을지휘소를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며 포위망을 구축한 이들이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 분명히 경고를 했소. 애꿎은 수하들만 다치게 하지 말고 저들을 물리시오." "닥쳐라! 두고 보자니 네놈 하는 짓이 실로 가관이로구나! 당장 나 오너라! 너와 천 초를 겨뤄보자!"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후왕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공격을 감행했 다. 그런데 을지휘소를 공격하는 이는 그만이 아니었다. 후왕이라는 별호답게 그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눈보다 더욱 새하 얀 백원(白猿) 두 마리가 좌우에서 협공을 감행했다. 새빨간 눈과 누 런 이, 어름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커다란 덩치의 백원은 보기만 해 도 섬뜩할 만한 손톱을 세우고 괴성을 질러대며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을지휘소는 여유만만이었다. "천 초까지 갈 필요가 뭐 있겠소." 나지막이 을포린 그가 검을 들었다. 그리곤 어깨가 들썩인다 싶은 찰나 그의 좌우에서 귀를 틀어막을 정도로 처절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 왔다. 그것이 그의 좌우를 공격했던 백원이 내뱉는 고통의 비명이라는 것은 불문가지. 대노한 후왕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뒈져라! 이놈!" 후왕이 주먹을 뻗었다. 그가 일으킨 권세가 맹렬한 회전을 하며 을 지휘소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삽시간에 밀려든 기운에 놀랄 만도 하 건만 을지휘소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침착해진 표정으로 한 쪽 발을 빼며 어깨를 들썩였다.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한줄기 빛이 후 왕이 일으킨 권세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파팍! 묘한 소성과 함께 그토록 강맹했던 후왕의 권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 다. 기세를 보아선 절대로 그냥 끝나지 않을 공격이었다. 또한 을지휘소 가 그것을 막고자 한다 해도 꽤나 큰 충돌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거 의 모든 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둘의 충돌은 밋밋하기만 했다. '어, 어찌 된 것이지?' 밖으로 드러내어 묻지는 못해도 희염 또한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수뇌들의 얼굴을 살폈다. 한데 기요후를 비롯한 그들의 얼굴이 실로 가관이었다. 특히 을지휘소의 정면에서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부릅 뜬 눈으로 서 있는 후왕의 태도가 영 이상했다. "빠...르다." 한참 만에 흘러나온 기요후의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을지휘소의 손에 죽거나 쓰디쓴 패배를 맛본 마 독과 낭왕, 그리고 봉후와 함께 남천의 사천왕이라 불리는 후왕의 무 공은 남천에서도 최소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게다가 좌우에서 그를 돕는 백원은 금강불괴와 다름없는 영물이었다. 한데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비록 후왕이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참담했다. 좌우측을 공격했던 백원이 검에 담긴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꽤나 심 각한 부상을 입으며 나가떨어졌고 후왕의 공격은 막혔다. 무엇보다 확 실한 한 수로 보였던 후왕의 권세가 을지휘소가 휘두른 검에 맞부딪쳐 막힌 것도 아니고 아예 중간에서 끊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나라면 할 수 있을까?' 백번을 양보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막을 수는 있어도, 맞부딪쳐 막아낸 다음에 오히려 더 큰 힘으로 반격을 할 수도 있어도 저처럼 깔 끔하게 중간을 잘라 버릴 수는 없었다. '마독이 어째서 당했는지 알겠군.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빠른 검이 었어.' 백원에게 부상을 입히고 후왕의 권세를 잘라 버린 것이 을지휘소의 가공할 쾌검이라는 것을 똑똑히 본 지금 기요후는 어째서 자신과 버금 갈 정도의 무위를 지니고 있던 마독이 차가운 시신이 되어서 돌아왔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쳐라!" 기요후의 명령이 떨어지고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공 격을 시작했다. 가장 앞서 덤빈 사람은 후왕이었다. 방금 전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 해서,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듯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레 내뻗는 그의 권세는 조금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울러 기요후의 곁을 지키던 수뇌들이 사방에서 합공을 했다. 개개인의 능력과 무인으로서의 자존 심을 생각하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동안 을지휘소에게 지독 한 괴롭힘을 당하며 발목을 잡혀 큰일을 망친 데다가, 방금 전 그가 어떤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확실하게 확인한 그들은 염치나 체면따위 를 챙기지 않았다. 파파팍! 꽈꽝! 검기와 권세가 대지를 가르며 미친 듯이 춤을 추고 허공에서 얽힌 기운들이 충격파를 흘리며 사방을 휩쓸었다. 싸움의 양상을 살피는 기요후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십여 명의 고수들로부터 합공을 당하는 을지휘소. 마독의 복수도 복 수려니와 살려 보내선 절대로 안 되는 인물이었다. 후환을 생각하면 단순히 두려운 게 아니라 상상만 해도 끔찍할 정도였다. 남천에서도 최고의 고수들로 포진된 합공을 받으면서도 을지휘소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때때로 다급한 표정을 짓기도 했으나 여유롭게 방어를 해냈고 공격을 했다. 그의 검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합공하 는 진형이 크게 동요하는 것을 보아 날카로워도 이만저만 날카로운 반 격이 아닌 것 같았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내뱉은 기요후가 천천히 검을 들었다. 수하들 에게만 맡겨놓아선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혼전 중에도 기요후의 행동을 살피던 을지휘소는 그와 싸울 생각이 없 었다. 생사결을 펼친다면 펼칠 수도 있겠지만 상대는 그들만이 아니었 다. 기요후와 수뇌들 뒤에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 리고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천과의 싸움이 아니라 패 천궁,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사가 불분명한 환야와 을지룡의 안전 여부였다. 행여 부상이라도 당하면 차후에 그들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 있었다.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꽝! 기요후가 싸움에 합류하기 바로 직전, 후왕의 일권이 을지휘소의 기습에 적중했다. '드디어!' 결국 해냈다는 생각에 후왕의 얼굴이 회심의 미소로 물들고 그와 합 공을 하던 수뇌들의 얼굴도 환해졌다. 하지만 힘없이 날아가던 몸이 빙글 회전을 하며 중심을 잡고 때마침 끝장을 내려고 공격을 하는 이 의 검끝을 밟음과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는 을지휘소의 모습에 다들 허 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격이 성공한 듯 보였으나 사실은 성공한 것 이라 여기게끔 만든 것이었고 도리어 그 힘을 이용해 포위망을 탈출한 것이었다. "마, 막아랏!" 후왕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물을 잡으려는 격이었다. 애당초 남천의 수뇌부들이 나서서 잡지 못한 그를 수하들이 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 특히 그의 발걸음, 출행랑을 시전하는 그를 따라잡을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이들에게 몸을 빙글 돌린 을지휘소가 담담히 입을 열었 다. "분명 경고했소. 패천궁의 행사를 방해하지 말라고. 그럴 리는 없겠 지만 만약 경고를 무시한다면...' 말끝을 흐린 그가 냅다 검을 던졌다. 그의 손을 떠나 수십여 장의 공간을 가른 검은 가히 빛살과도 같은 빠름으로 누군가에게 날아들었 다. "막아랏!" 만독문의 문주 기하학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을 보며 차갑게 소리 쳤다. 그러자 그의 곁에 섰던 장한이 재빨리 나서며 그의 앞을 보호했 다. 하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애당초 을지휘소가 노린 것은 기하학이 아니라 그의 곁에 있던 장한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장한이야말로 만독문이 자랑 하는 독혈인이었다. 조금 전,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과거 자신이 쓰러뜨린 독혈인과 같음을 눈치챈 을지휘소가 작심하고 공격을 한 것이었다. 우우우웅ㅡ 기묘한 파동과 함께 검이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전 보여줬던 맹렬한 속도가 아니라 그 속도가 너무나도 느려졌기 에 멈춘 것처럼 느껴진 것이었다. 기하학의 앞을 막아선 독혈인이 양손을 펼쳤다. 그리곤 합장하듯 검 을 잡았다. 그렇잖아도 느리게 움직이던 검이 독혈인의 손에 의해 완 전히 멈춰진 듯했다. 다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데 검 을 잡은 독혈인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도 이 상했거니와 자꾸만 뒷걸음질치는 것이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긴 모 양이었다. "크으으으." 독혈인의 입에서 괴이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물러나는 걸음도 더 욱 빨라졌다. 뒷걸음질칠 때마다 땅바닥이 움푹움푹 패였다. "뿌리치고 피해랏!" 보다 못한 기하학이 소리쳤다. 그러나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었다. 독혈인은 잡고 있는 검을 놓 는 순간 자신의 심장이 꿰뚫리게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마!"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한 기하학이 독 혈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곤 격체전공을 통해 자신의 내력을 독 혈인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자꾸만 뒤로 밀리던 독혈인의 몸이 비 로소 중심을 잡는 듯했다. "됐군." 내력의 운용이 전혀 다르기에 알면서도 도와주지 못했던 후왕이 불 끈 쥐었던 주먹을 살며시 펴며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바로 그 순간이 었다. "빌어먹을!" 난데없이 욕설이 터지고 독혈인을 받치고 있던 기하학의 신형이 옆 으로 튕겨져 나갔다. 잠깐 동안은 어찌 버텨보았으나 검에 담긴 힘은 독혈인과 그의 내력을 합쳐도 감당하기에 버거울 만큼 엄청난 것이었 다. 여차하다간 자신까지 크게 다칠 것을 염려한 기하학은 결국 손을 빼고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기하학의 도움으로 겨우 중심을 잡고 있던 독혈인의 신형이 급격히 무너졌다. 검은 이미 그의 가슴을 파고 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 마침내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힘없이 날아가는 독혈인. 독혈인의 가슴을 꿰뚫고 그를 매단 상태에서 무려 오 장이나 허공 을 유영해 날아간 검은 아름드리 나무에 박히고서야 비로소 움직임을 멈췄다. 모든 이들이 마치 곤충처럼 칼에 박혀 나무에 고정되어 있는 독혈인 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숨 쉬는 것마 저 잊은 듯 멍한 모습들이었다. 질식할 듯한 적막감이 시위를 휩쓸었 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손쓸 틈도 없이 도주에 성공한 것도, 남천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의 합공을 견뎌낸 것도 이해하자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수에 독혈인을 끝장낸 것은 직접 봤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 다. 게다가 독혈인을 구하기 위해 기하학까지 필사적으로 나서지 않았 던가. "분명히 경고했소." 수십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는 음성으로 인해 주변을 휘감던 침묵은 깨졌다. 물론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치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기요후는 애써 눈을 감고 수하 들은 그저 멍한 눈으로 사라져 가는 을지휘소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남천의 천주를 만나고 왔네." "예?!!"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는 있었으나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 고개를 흔들었던 냉혈은 너무나도 태연한 그의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준비는 끝났는가?" "예." "말과 식량은?" "수하들을 보냈습니다. 식량은 둘째 치고 말은 넉넉히 구하라 하였 습니다. 이 길로 바로 떠나면 이미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잘했네. 꽤나 다급히 달려야 할 테니까." "한데 괜찮으십니까?" "뭐가 말인가?" "방금 전 남천의 천주를 만나고...."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보이는 냉혈의 표정을 보며 을지휘소는 엷은 웃음을 흘렸다. "별일은 없었네. 그저 패천궁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를 한 것 뿐이야." 냉혈의 표정이 더욱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받아들일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조금은 꺼림칙한 마음을 가지고 있겠지. 나름대 로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고." "소기의 목적이라면...." "그자들의 발을 묶었네. 언제까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잠깐 동안 은 우리보다 더디게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걸세." 냉혈은 이해를 할 수 없었기에 재차 질문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을지 휘소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것은 차차 이야기하고... 자, 바로 출발하세."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날린 을지휘소의 신형은 어느새 십여 장 을 치고 나가고 있었다. 제74장 산동악가(山東岳家) 복우산을 떠나고 정확하게 육 일. 패천궁의 패퇴 소식을 전해 들은 지 딱 하루 만에 을지소문과 그 일행은 마침내 산동악가가 한눈에 들 어오는 일월산(日月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전에 앞서 간단 한 휴식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후∼ 오기는 왔는데 어찌 상대해야 할지 난감하군." 짧은 한숨과 함께 곽검명이 말했다. 환야의 패퇴 소식에 충격을 받 은 을지소문과 비사걸, 수호신승 등이 입을 다물자 사실상 무리를 이 끄는 사람은 곽검명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놈들의 정황을 살피는 것이 우선일세. 아직 오지 않았는가?" 이성진이 단견에게 물었다. "예. 올 때가 되긴 했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을 가르고 한 사내가 달려왔다. "다녀왔습니다." 단견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정소를 향해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쯧쯧, 네놈이 왜 거지가 됐는지 알겠다." 지금 막 도착한 정소가 영문을 알 리 없었다. "예?" "아니다. 그래, 알아봤느냐?" "예.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자세하게 조사했습니다." "어떻더냐?" 정소가 도착함과 동시에 주변에 몰려든 이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의 말을 기다렸다. 분위기상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전력의 차이 가 크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 다들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꽤나 엄중합니다. 주력이 없는 것은 확실하나 남아 있는 놈들도 만만치는 않아 보였습니다." "인원은 얼마나 되는가?" 오상이 물었다. "이백 전후입니다." "음." "이, 이백씩이나!" "마, 많군."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적의 전력이 막강했다. 이어지는 정소의 설 명은 그들의 한숨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패천궁을 치고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차출했음에도 악가에 남아 있 는 전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악가의 이름을 드높였던 전대 가 주를 비롯하여 -물론 표면적이었지만- 그와 함께 악가를 지탱했던 노 기인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기인은 무슨! 흥! 늙다리들이 있어봤자 그게 그거지." 단견이 콧방귀를 뀌며 소리쳤다. 하지만 안색이 그다지 밝지 않은 것이 분명 그들의 존재에 큰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세가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는 인원은 근 이백, 그에 반해 악가를 치기 위해 참여한 인원은 고작 삼십여 명이었다. 물론 남궁세가의 몇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노라하는 고수들이었으나 수적으로 열세임은 분명했다. "짐작은 했지만 힘든 싸움이 될 것 같군." 이성진이 말했다. "예. 하지만 머리를 맞대다 보면 방법이 나올 것 같습니다." "물론이지요.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한밤중에 기습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놈들의 주위를 흩어 놓으며 각개격파를 하는 것입니다." "정면 싸움은 무리라 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놈들을 흔들어 혼란 을 주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의견이 무수히 터져 나왔다. 하지만 딱히 어느 것으로 결 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로 그 순간,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고 혼 란만 가중될 때,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림이란 곳은 참으로 비정한 곳이다. 그렇지 않느냐?" 악가를 공략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들려온 엉뚱한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음성의 주인에게 향했다. "그렇습니다." 잠시 움찔했던 을지호가 조용히 대답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참으로 더러운 말이 야." 을지소문의 얼굴이 회한으로 물들었다. "호야." "예, 할아버님." "그 옛날 무림에 나와 난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싸웠다. 그리고 기 억하지도 못할 만큼 죽였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었는지 모르겠구나." "의로운 사람을 죽인 적은 없지 않은가? 자네 손에 목숨을 잃은 이 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자들이었어." 곽검명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렇지요. 하나같이 제 잇속만 차리던, 무림에 해악을 끼치던 놈들 이었습니다." 단견이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쓴웃음을 지은 을지소문은 고 개를 흔들었다. "악당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나 말일세...." 을지소문이 정색한 얼굴로 단견의 얼굴을 응시했다. "무림에 해악을 끼치고 악당이라 불리는 자들의 기준은 모두 형님이 나 나, 자네의 기준이고 그들의 기준일 수는 없네. 어쩌면 그들에겐 우리가 악당일 수도 있겠지." "그, 그럴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도 부양해야 할 부모가 있을 것이고 먹여 살 릴 처자식이 있었을 걸세. 음, 만독문의 독혈인은 아닌가?" 독혈인을 언급하는 그의 입가에 고소가 피어올랐다. "결국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는 말일세. 있다면 그저 자신의 입장에 서 잘 먹고 잘살려고 했다는 것이지. 물론 치를 떨 만한 악행을 저지 른 놈들도 있었겠지만." 을지소문의 시선이 다시 을지호에게 향했다. "결국 이 할아비 또한 나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다." 을지소문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을 지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착각에 불과했지만 처음엔 내 처가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엔 나와 저 녀석의 조상이 당한 일에 대한 앙갚음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 다." 을지소문이 을지호의 어깨에 앉아 있는 철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와 함께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그 즉시 당가에서 죽은 철면피를 떠 올렸다. "그 다음엔 네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원한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곽검명과 단견은 입에 담기도 끔찍할 정도로 처절한 삶을 살았던 청 하를 기억하며 침통해했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인연과 오해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다. 패천수호 대도 그중 하나였지. 참 부질없는 짓이었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오상은 그 옛날 을지소문과 패천수호대의 경 천동지할 대결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 중엔 악인도 있었고 나름대로 협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참 웃긴 것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나니 허 울 좋은 명성도 얻게 되더구나." "......" "그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무림이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다르기 에 필연적으로 목숨을 빼앗고 양손을 피로 물들일 수밖에 없는 곳." 잠시 말을 끊은 을지소문이 고개를 도려 멀리 보이는 산동악가를 응 시했다. 그리곤 살며시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네 할미가 당했다." "예." "외가라 할 수 있는 해남파와 패천궁도 당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들을 딱히 악인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그저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 참으로 이기 적이고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 참기 힘든 살기가 내 가슴을 짓누르 는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어찌해야겠느냐?" "받은 대로 돌려주어야겠지요." 을지호를 바라보는 을지소문의 시선이 점점 강해졌다. "지금까지는 중원무림과 사천의 싸움이었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부 터는 아니다." 을지소문의 음성이 커질수록 좌중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긴장감을 참지 못해 연신 침을 삼키는 자들도 있었다. 을지소문의 손이 을지호의 어깨를 살며시 짚어갔다. "지금 이 시각부터, 아니, 네 할미가 당하는 순간부터 너와 나, 우 리 을지세가와 사천의 싸움이다." "예." "준비는 되었느냐?" "물론입니다." 을지호를 바라보는 을지소문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 고 그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 "가자." 짤막한 말 한마디와 함께 을지소문의 신형이 악가를 향해 움직였다. 을지호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 "자, 자네!" 둘의 대화를 예의 주시하며 듣던 이들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곤 악가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태산도 무너 뜨릴 듯 묵직한 기세를 풍기며 걷는 그들의 등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 았다. "허허, 을지세가와 사천의 싸움이라... 여전히 광오한 놈이야." 피식 웃음을 터뜨린 비사걸이 남궁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둘의 뒤 를 쫓았다. "아미타불!" 진하디진한 혈향(血香)을 맡은 것인지 합장을 하는 수호신승의 안색 은 밝지 않았다. "젠장, 한참 무게를 잡길래 난 또 무슨 얘긴가 했네. 어차피 싸우자 는 얘기면서." 단견이 툴툴거리며 발걸음을 놀렸다. "후∼" 곽검명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을지소문이 내뱉은, 을지 세가와 사천의 싸움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가족을 대동하여 중원으로 건너온 이후, 지금까지의 싸움은 을지소 문과 을지세가에 있어 단지 자신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도움을 주는 정 도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가의 안주인인 환야의 생사가 불투명한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아마도 필사적일 것 이다. 과거 철며피와 청하의 복수 과정을 보며 을지소문이 얼마나 냉 정하고 잔인하며 무서워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던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견하며 몸서리쳤다. 결과적으로 중원무림엔 그만한 복이 없겠 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 같이 갑시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오상과 중인들이 을지소문의 뒤를 따라 움직였 다. 어찌하면 보다 적은 피해로 완벽하게 적을 공격할지 치열하게 논의 하던 일들은 이미 그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겨진 사람들이 따라오든 마든 을지소문과 을지호는 서로 반 족장 의 차이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산동악가의 정문을 향해 직선으로 시원스레 뻗은 대로의 중앙을 느 긋하게 걷는 조손. 그리고 다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따라오는 일단 의 무리들. 그들의 모습은 정문을 경계하는 이들의 시야에 금방 잡혔 다. "조, 조장님!" 번을 서고 있던 한 사내가 때마침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조장 황 우(黃牛)를 불렀다. 자줏빛 장삼에 커다란 대감도를 허리에 차고 구레 나룻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는 그는 다소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고개 를 돌렸다. "왜?" "저, 저기...." 사내가 제대로 대답을 못하자 그의 눈썹이 역팔자로 그려졌다. "사내자식이! 똑바로 말해. 뭐?" "저, 저기에 사, 사람들이...." 평소 말을 더듬기로 유명한 그는 황우의 다그침에 더욱 말을 더듬었 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황우가 사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오는 노인과 청년. 순간, 황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들 뒤로 일단의 무리들이 접근 하는 것을 본 것이다. "문을 닫아라! 너는 빨리 적의 침입을 알리고!" 황우가 말더듬이 사내와 그의 곁에 있는 또 다른 사내에게 소리쳤다. "저, 적입니까?' 말더듬이 사내가 물었다. "그럼 너는 저게 친구로 보이냐? 저렇게 무기를 들고 살기를 풀풀 풍기는 인간들이 적밖에 더 있어? 넌 뭐 하는 거냐? 빨리 적의 침입을 알리라니까!!" 황우가 말더듬이 사내 곁에서 여전히 멍청히 있는 사내에게 역정 어 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고 안쪽 으로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끼이익! 높이가 오 장, 폭이 이 장에 이르는 거대한 정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 며 굳게 닫혔다. 정문 위의 전각으로 뛰어올라 간 황우가 긴장한 눈빛 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든 십여 명의 사내들 역시 같 은 모습이었다. '벌써?' 무리의 앞에선 노인과 청년이 어느새 정문의 코앞까지 다다르고 있었 다. "어느 고인께서 본 가를 방문하셨소이까?" 황우가 경계심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악가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 왔다." 을지소문이 조용히 대꾸했다. "누구시냐고 물었소." "누군지는 네가 알 필요 없다. 문이나 열거라."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수는 없소!" 황우는 나름대로 무게를 잡고 소리쳤다.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을지소문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러자 황우는 적의(敵意)를 감추지 않았다. "손님 대접을 받고 싶다면 정체를 밝히시오!" "싫다면?"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오!" 단호한 어조로 소리친 황우는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스스로에게 자 문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적절한 표현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열리지 않는다면 여는 수밖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을지소문이 을지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미 출 수(出手) 준비를 마치고 있던 을지호는 조금도 지체없이 손을 썼다. 어 깨 위에 걸터앉은 철왕이 날아오름과 동시에 시위가 걸리지 않고 곧게 펴진 철궁에서 한줄기 청광이 피어올랐다. 꽝! 철궁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정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뇌성벽력을 능가할 만큼 우렁찼다. 청광에 가격당한 부분에서 파편이 떨어져 나가 고 쩍쩍 금이 갔다. 그러나 두께가 반 자나 되는 정문은 한 번에 부서 지지 않았다. 꽝꽝! 제아무리 단단한 원목에 철을 덧대어 만든 정문이었으나 연속적인 충격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초의 충격이 있고 서너 번의 충격이 더해지자 철옹성처럼 단단해 보이는 정문에 심각한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정확히 네 번째의 충격 에 서너 사람은 넉넉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생겨났다. 간단히 정문을 부순 을지호는 웃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철궁 을 구부려 시위를 걸었다. 그리곤 정문 뒤에 포진해 있는 적을 응시하 며 말했다. "잠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을지소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쳐라!" "와아아!!" 을지호의 신형이 정문 뒤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미리 내려와 있던 황우의 명령이 떨어지고 침입자를 막으려는 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 다. 그 함성이 통곡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크악!" "으아아악!" 커다란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기를 얼마간, 끼이익! 비명 소리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닫힐 때와 마찬가지로 육중한 소 리를 내며 정문이 열렸다. 최소한 네댓 명은 덤벼야 움직일 수 있는 정 문을 홀로 열어젖힌 을지호가 손을 털며 을지소문을 맞이했다. 그의 뒤에 십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내들이 쓰러져 있었다. 저마다 신 음성을 흘리고 꿈틀대는 것이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제대로 움직 이지 못하는 것으로 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부상들을 당한 듯했다. "드시지요." "오냐." 을지호의 안내를 받으며 을지소문이 앞장사고 어느새 다가온 일행 이 그 뒤를 따랐다. "꽤나 넓군." 정문을 지나 잠시 걸음을 멈춘 을지소문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외부에서 볼 때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안에서 직접 바라보는 악가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언뜻 눈에 들어오는 전각만도 수십이 고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전각과 전각 사이를 연결하는 소로 또한 거미 줄을 연상시켰다. 서쪽 성벽을 타고 쭉 늘어선 건물은 물류를 보관하 는 창고 같은데 출입이 가능해 보이는 문만 서른이 넘었다. "나라님이 울고 가겠소." 을지소문의 곁으로 다가온 단견이 혀를 내두르며 소리쳤다. "나라님이 울지 저들이 울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을지소문은 전각과 전각 사이를 누비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우의 전갈을 받고 황급히 나서는 악가의 무인들이 었다. 이미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일행의 눈에 긴장의 빛이 흘렀다. 일별하기에도 거의 삼백은 되어 보이는 인원. "후∼ 많기도 많다." 곽검명이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백 정도라며?" 단견의 매서운 눈이 정소에게 향했다. "그, 그랬습니다." "저게 이백으로 보이냐?" "조, 조금 넘어 보이기는 하지만...." "에라이! 명색이 개방의 방주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디서 허튼 정보 를 듣고 와서는." "죄, 죄송합니다." 큰 싸움을 앞둔 상황에서 잘못된 정보야말로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 겠는가? 얼굴이 붉어진 정소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무 나무라지 말게나. 이 넓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인원이 있는지 파악하기는 힘든 일이야. 그나마 방주 정도는 되니까 이만큼이나 파악 한 것이지." 곽검명이 펄펄 뛰는 단견을 말리며 정소를 두둔했다. "아무리 그래도....." 비록 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개방은 그의 생명과도 같은 곳 이 아니던가. 단견은 천하제일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개방이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 영 못마땅한 듯했다. "되었네. 이백이나 삼백이나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다고." 담담히 내뱉는 을지소문의 말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하게 적을 응시하던 그가 을지호에게 명 했다. "인사를 하여라. 단, 기선을 꺾어야 한다.' 을지호는 기선을 꺾으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천천히 시위를 당 겼다. 그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일행의 시선을 받으며 적당한 목표 를 골랐다. 핑! 목표를 찾기 위해 좌우로 움직이던 철궁이 멈추고 한껏 당겨졌던 시 위가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제자리를 찾았다. 형체도 없었다. 별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수라면 느낄 수 있는 기운을 한껏 지닌 무영시가 한 중년인에게 접근했다. "우왕좌왕하지 말고 정렬를 해라. 적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자 만하지 마라.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 감히 세가를 넘보는 적을 용납할 수는 없는 일. 철저하게 응징을 해야... 헛!" 한참 수하들을 독려하던 중년인은 목덜미에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 에 깜짝 놀라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 믿을 정도로 그는 어 리석지도 무공이 약하지도 않았다. 전신의 감각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그는 자신을 향해 접근하는 기운을 감지해 냈다. 문제는 무영시의 접 근을 알아채기는 했어도 그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과 알아도 그의 무공으로 뾰족한 대응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뭐, 뭐냐?" 그는 코앞까지 접근한 무영시의 기운에 기겁을 하며 몸을 틀였다. 그리곤 뭔지 알 수 없는 기운에 대항하고자 재빨리 검을 움직였다. 나 름대로 빠른 대응이었다. 하나 지면을 스치듯 다가와 발밑에서 갑자기 부상한 무영시를 막을 수는 없었다. "크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중년인의 신형이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펄떡 뛰 었다. 그리곤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이.. 이게..." 두 눈을 부릅뜨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덜덜 떨던 그는 곧 사 지를 축 늘어뜨렸다. 그의 아랫배는 뭔가에 관통을 당한 듯 퀭하니 뚫 려 있었고 핏물과 함께 장기(臟器)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정문을 향해 기세 좋게 달려오던 악가의 무인들은 그 한 번의 공격 으로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에서 호통이 떨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고작 서너 번의 숨을 내뱉을 정도로 짧은 시간의 머뭇거림에 불과했 은 을지호의 무영시에 받은 그들의 충격은 상당한 듯했다. 을지호는 단 한 발의 무영시로 조부의 말대로 적의 기선을 보기 좋 게 꺾어버렸다. "과연 멋진 실력!" 개방의 실수를 단번에 만회하고도 남을 을지호의 한 수에 단견이 찬 사를 보냈다. "크크, 뒷간 급한 강아지 새끼들 같군요." 한숨 돌린 정소도 맞장구를 쳤다. "그럴까? 어째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곽검명이 앞으로 나서는 노인 둘을 가리키며 말했다. "흥, 늙은이들이 행차하셨군요. 원래 그런 거요. 집 주인을 만나고 싶으면 기르고 있는 개새끼를 족치라고, 윗대가리들이 나오니까 두려움 이 조금 줄어든 모양이지. 하지만 내심까지 그럴지는 아무도 모르지. 카악 퉤!" 단견은 누런 가래침을 뱉어내며 코웃음을 쳤다. 그사이 혼란스런 진영을 수습한 노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소 리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생긴 대로 입이 걸군. 그러는 너는 누구냐?" 비웃음을 흘리며 되묻는 단견의 말에 외성 호법 악상(岳桑)의 얼굴 에 노기가 피어올랐다. "누구냐고 물었다." "누구긴? 네놈들을 쓸어버릴 저승사자지." 싸늘한 표정의 악상과는 달리 능글거리며 대꾸하는 단견은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단견의 허리춤에 개방의 방도임을 표시하는 매듭이 있 는 것을 눈치챈 악상은 자신을 격동시키려는 단견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껏 비웃음을 흘리며 반격을 가했다. "빌어먹는 거지 따위가 저승사자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악상의 곁으로 다가온 악공(岳恭)이 맞장구를 치며 소리쳤다. "어림도 없는 소리지. 그나저나 정도맹의 떨거지들이 무슨 일로 이 곳까지 온 것일까? 늙은 거지를 앞세우고 말이야." "뒈지고 싶으냐?" 단견이 도끼눈을 뜨며 되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알면서 물을 것 없다." "사실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죽어나갈 놈들이니까." 악공은 을지소문 일행을 완벽하게 포위하는 수하들을 바라보며 살 소를 흘렸다. "누가 죽는지는 두고 보면...." 기세에 밀리고 싶지 않았던 단견이 재차 대꾸를 하려는 순간 을지소 문이 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싸움 따위를 할 필요는 없네." 가볍게 한마디 내뱉은 을지소문의 우수가 번개같이 움직였다. 일순 강맹한 장력이 악공을 향해 쏟아지고 상대가 그런 식으로 기습 공격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방심을 하고 있던 악공은 기겁을 하며 마주 손을 뻗었다. 꽈꽝!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악공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서너 걸음 물러났 다. 그에 반해 을지소문은 처음의 자세에세 미동도 없었다. "그냥 치면 되는 것이야." 담담한 음성과 함께 을지호를 바라보는 시선. 그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펄쩍 몸을 띄워 뒤로 물러난 을지호가 연속적으로 철궁을 당기고 예 의 무영시가 상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동시에 처절한 비명 성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알면서도 막기 힘든 것이 바로 무영시였다. 최소한 한 문파의 호법 정도 되는 고수라면 모를까 어중간한 실력을 지니고는 감히 대항할 엄 두를 내지 못했다. "무, 무슨 놈의 화살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려 일곱 명이 당했다. 어찌 손써볼 틈도 없이 쓰 러지는 수하들을 보며 악공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그도 평범 한 인물은 아니었다. 놀라는 것도 잠시, 재빨리 정신을 수습한 그가 황 급히 공격 명령을 내렸다. "쳐라!" 분기탱천한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포위망을 구축한 채 공격의 기회 만을 노리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놈들을 쓸어버려라!" "죽여라!" 펑! 펑! "크악!" "컥!" 작심을 하고 시위를 당기는 을지호로 인해 또다시 대여섯 명의 인원 이 땅바닥을 굴렀다. "이놈!" 을지호를 그냥 놔둬선 아예 싸움이 되지 않겠다고 판단한 악공이 괴 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으나 미처 몇 걸음도 떼기 전에 그는 곽검명의 예리한 검기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구냐?" 잠시 스친 것에 불과했으나 결코 범상치 않은 검기에 놀란 악공이 한껏 긴장하며 물었다. "곽검명." "무광?" 되묻는 말에 곽검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악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 었다. 무광 곽검명이란 이름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이름이기 때 문이었다. '좋지 않다.' 악공의 안색이 어두어졌다. 세가를 침범한 적이라 봐야 고작 삼십여 명. 그에 반해 자신들은 거 의 열 배가 넘는 인원이었다. 또한 패천궁을 치기 위해 많은 고수들이 세가를 떠났다지만 남아 있는 인원들도 결코 만만한 실력자들은 아니 었다. 그럼에도 엄습하는 불안감은 뭐란 말인가? 그러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곽검명은 상대에게 딴생각을 하게 만 들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죽을힘을 다해 덤벼도 상대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실력자가 바로 그였다. 파스스스! 희뿌연 검기들이 뿌려지며 사위를 휩쓸었다. 곽검명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진중했다. 아무렇 게나 휘두르는 것처럼 보여도 그 나름대로 묘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 다. 화산파의 무공에 기초를 두었으되 철저한 실전 비무를 통해 발전 을 시키고 종래엔 일가를 이룬 그의 검은 신묘하기 그지없었다. 악공이 그를 호법의 지위까지 이르게 만든, 악가가 자랑하는 창법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힘에 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 다. 처음 십여 초를 교환할 때까지는 나름대로 박빙을 이루었지만 시간 이 가면 갈수록 움직임이 둔해지고 보로(步路)가 어지러워지면서 완벽 하게 기세를 빼앗겼다. 결국 이십여 초를 교환했을 때 그는 왼쪽 팔에 큰 자상을 입고 발목 의 심줄이 잘리는 부상을 당했다. 팔에 당한 부상이라야 그렇다 쳐도 발목에 당한 부상은 치명타였다. 그렇잖아도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검 을 피하느라 죽을힘을 다했던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대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크...으..." 목에 박힌 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악공은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그러나 죽음의 사자는 그의 노력을 간단히 비웃으며 다가왔다. 곽검명이 검을 회수하자 그의 의식은 완전하게 사라졌다. 곽검명이 악공의 목숨을 잠재우는 순간 단견은 악상을 맞아 여유로 운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의족임을 무색케 할 저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 이는 그의 신형은 가히 번개와 같았다. 예측할 수 없는 방위로 이동할 때면 분신술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환상적이 었다. 단견이 각고의 노력 끝에 취팔선보(醉八仙步)를 자신의 몸에 맞추어 만들어낸, 스스로 주광선보(酒狂仙步)라 이름 붙인 보법은 새로운 개방 의 절기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실전적이고 창의적인 것이었다. 거 기에 웅룡칠장(雄龍七掌)과 쇄심지(碎心指)를 적절히 교차하여 사용하 자 위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악상은 유령처럼 흔들리는 단견의 신형을 쫓아만 다니다가 결국 치 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가슴 어귀에 연속적으로 적중한 장력에 코와 입으로 피분수를 뿜어내며 쓰러진 것이다. "후∼ 끝났군." 상대가 완전히 쓰러진 것을 확인한 단견이 신형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비록 겉으로는 일방적인 싸움으로 보였으나 안도의 한숨 을 내쉬는 단견의 모습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명색이 천하를 노리는 악가의 호법이었다. 그런 지위를 투전판에서 운 좋게 딴 것이 아닌 이상 악상의 실력도 얕잡아볼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견 은 부상을 당해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허점을 노리며 파고들려 했던 그 의 날카로운 눈을 잊지 못했다. 아무튼 외성을 담당하고 있던 두 호법 악공과 악상이 곽검명과 단견 에 의해 일방적이라면 일방적일 수 있는 실력 차를 보이며 패하자 포 위망을 구축했던 이들의 기세는 급속도로 꺾였다. 특히 정중앙에 우뚝 버텨서 화살을 날리는 을지호는 그들에게 있어 염라대왕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시위를 당길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동료들이 쓰러졌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몰라 다 들 전전긍긍했다. 심지어 몇몇은 뒷걸음질치며 도주하기도 하였다. 물 론 싸움을 독려하고 있는 상급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지만. 을지소문의 선공으로 싸움이 시작된 지 고작 반 각. 포위 공격을 했던 악가의 무인들은 오분지 일 이상의 병력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악가를 공격했던 일행이 입은 피해라곤 몇몇이 부상을 당한 것이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상대를 잘못 만난 뇌전이 옆구리에 꽤 나 깊은 자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다들 경미한 부상에 지나지 않 았다. 병력의 차이가 워낙 커서 나름대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 여겼던 이들조차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싸움은 아 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들 조심해라. 싸움은 이제부터야." 을지소문이 남궁민과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넌지시 일렀다. 그는 그들이 초반에 거둔 승리는 매우 단편적인 것이고 목숨을 잃고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잇는 대다수의 인원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이들 중 가장 실력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 본격적인 싸움 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심중을 알기라도 하는 듯 포위망의 한쪽이 갈라지며 일단의 무 리들이 등장했다. "왔군." 악공에게 일장을 날리는 것으로 싸움의 시작을 알렸지만 내내 움직 이지 않았던 을지소문과 남궁혜, 수호신승과 더불어 뒷짐을 진 자세 그 대로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던 비사걸이 무리를 선도하며 나타나는 노 인의 모습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던 구화산 십왕봉의 싸움을 회상하며 지그시 뜬 눈으로 태상문주를 응시하는 비사걸의 미 간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오랜만이군." 찌푸린 눈으로 수하들의 주검을 살피던 태상문주가 다소간 굳은 얼 굴로 대꾸를 했다. "오랜만이외다. 살아계시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었소." "고생 꽤나 했지." "한데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줄은 몰랐소이다. 고작 이만한 인원으로 본 가를 치려 하다니." 태상문주의 눈이 비사걸과 주변의 인물들을 훑듯이 지나갔다. "부족하다 여기느냐? 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만." "노선배의 능력은 충분히 알고 있으나 솔직히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외다." "무시를 한다고 생각하느냐?" 비사걸이 주변에 흩어진 주검에 슬쩍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수십의 주검.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안 되어 쓰러뜨린 인원치고는 너 무 많지 않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말 속에 담긴 뜻을 눈치챘는지 태상문주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변변치 못한 아이들일 뿐." 자신감과 분노가 뒤섞인 음성이었다. "싸움은 지금부터요. 허락도 없이 본 가를 넘은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소." 여전히 정중했으나 좌중을 살피는 태상문주의 눈에선 스산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비록 초반의 기세를 상대방에게 빼앗겼으나 그는 자신이 있었다. 좌 우에 포진하고 있는 두 명의 장로,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호법들이 면 충분히 싸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여전히 이백을 훌쩍 넘기 는 수하들이 있었다. 약간 꺼림칙한 생각이 들기는 했어도 패배란 떠 올릴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바로 그때 비사걸과 태상문주의 대화를 지켜보던 을지소문이 조용 히 입을 열었다. "기대하겠소." 살기도,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엔 뭔가 모를 묘한 느낌이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을지소문." "을.. 지.. 소.. 문!" 옛날부터 인구에 회자되던 이름. 근래 들어선 또 얼마나 많이 들었 던 이름인가! "우리 아이들이 꽤나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소." "피차일반." 무심히 되받아치는 을지소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것도 잠시, 그의 시선이 비사걸에게 향했다. 의중을 묻는 시선에 비사걸이 고개를 흔들었다. "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난 빚을 지고는 못 참는 성격이다."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직접 상대하여 치미는 분노를 풀고 싶었으나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비사걸이 나선 이상 직접 손을 쓰지 않더라 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을지소문은 조금의 미련도 주지 않고 몸을 돌렸 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무안해진 것은 태상문주였다. "무슨 짓이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는가 싶던 을지소문이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비사걸이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적인 네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소리긴 하다만 골 라도 정말 잘못 골랐다." "무슨 말씀이오?" "최악의 상대를 골랐단 말이다. 너희들은 결코 을지세가를 건드려선 안 됐다." "천하를 도모하는 이상 충돌은 불가피하오.' "과연 그럴까?" "물론이오! 저들의 명성이 아무리 높고 강하다 한들 우리가 두려워 하고 피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소. 우리가 지닌 힘은 노선배가 생각하 는 것보다 훨씬 강하오." 자신의 주장에 확신을 심어주려는 듯 태상문주의 몸에서 일대종사 는 되어야 일으킬 수 있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비사걸이 어 떤 인물이던가? 태상문주가 일으킨 기운은 그의 앞에 이르자 먼지처럼 소멸했다. "누구라도 그런 말은 할 수 있지. 하나 겪어보면 알 것이다. 내 말 의 의미를 말이다. 물론 그전에..." 비사걸의 손바닥이 지면으로 향했다. 순간, 주인을 잃고 바닥에 떨 어져 있던 철검이 둥실 떠오르며 빨려왔다. "내 손에서 살아남으면 말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오." 태상문주가 진중히 자세를 고쳐 잡으며 대꾸했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태상문주의 좌우에 있던 유천과 서대경이 나서며 말했다. 태상문주 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일 대 삼의 싸움.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날, 지칠 대로 지친 비사걸과의 싸움에서도 결코 우위를 잡지 못했던, 그의 실 력이 어떤지 뼈저리게 느꼈던 태상문주는 그들의 도움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무인으로서의 명예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한낱 명예보다는 비 사걸을 쓰러뜨리고 세가를 침범해 온 적을 물리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 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말의 자존심 때문에 그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진 못했다. "난 상관없다. 마음대로 해라." 더 이상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아니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태상문주의 입장을 생각해서인지 한마디 거든 비사걸이 오른발을 살짝 내밀었다. 별것 아닌 간단한 동작임에도 마주한 셋의 반응은 격렬했다. 좌우로 움직이며 잔뜩 경계를 하는 두 장로의 눈에선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지존신공을 운용하는지 태상문주의 주위에 묵빛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셋의 기운이 비사걸을 향해 쏟아졌다. 숨도 쉬기 어려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기운을 홀로 감당하는 비사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감돌았다. "재밌겠군." 그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으으." 한쪽 무릎을 꺾고 있는 호법 악탁(岳卓)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강하다. 강해도 너무 강해.' 그는 자신의 정면에 우뚝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가히 처닌(天神)과도 같은 기도를 주저리주저리 뿌리며 다음 상대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사내. 어느새 활시위를 풀어 곧게 펴진 철 궁을 들고 있는 을지호의 모습에서 그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삼시파천이라는 명성을 듣기는 했어도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 건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 간단히 무력화되고 고작 칠 합 만에 더 이 상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소유할 수 없게 되자 악탁은 어째서 합공 을 하자는 다른 이들의 말을 물리치고 쓸데없는 호기를 부렸는지 뼈저 린 후회를 해야만 했다.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합공을 한다 해도 이길 수 있었을까?' 다른 상대를 찾아 움직이는 을지호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흘리던 악탁은 검붉은 핏물을 토해내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잘게 부서진 내장 조각이 핏물과 함께 바닥을 적셨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살기 가득한 함성들, 고통에 찬 비명성이 점 점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의식 속에 투영되었다. "크아악!" "커흑!" 다른 곳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비명성에 을지호의 시선이 좌측으로 향해졌다. 그리고 그는 싸늘히 식어가는 시신들을 향해 무거운 표정으 로 합장을 하는 수호신승을 볼 수 있었다. '정말 강하시군.' 을지호의 얼굴에 잠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수호신승이 세 명의 호법들로부터 합공을 받는 것을 본 것이 정확히 반 각 전이었다. 한데 그 짧은 시간에 일성의 패주로 군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그들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과연 말로만 듣던 수 호신승의 강함은 사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지만 할아버님과 비교한다면...' 을지호의 눈이 을지소문을 쫓았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가 다시 시작된 싸움은 조금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치열했다. 압도적인 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악가 의 무인들이 호법들의 명령을 받으며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아까와 같 은 일방적인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개개인의 실력은 분명히 차이 가 있었으나 그 차이를 수적인 우세로 메운 것이다. 그런 싸움의 분위기를 바꿔논 것이 을지소문이었다. 수호신승과 을지호가 상대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호법들을 상대하 는 사이 그는 소용돌이치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사 실상 일인대전(一人對戰)이 시작되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버티고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秋風落葉)이었다. 그 무엇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힘에는 힘으로, 변화에는 변화로, 빠름에는 빠름으로 일일이 상대해 주며 적을 쓰러뜨리는 그의 무위는 가히 경천동지(驚天動地), 어째서 그가 천하제일인으로 불리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상황이 이러고 보니 수하들의 사기도 사기려니와 그냥 두어서는 도 저히 싸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염려한 수석호법 악휘휘(岳暉暉)가 직 접 세 명의 호법과 그들 못지않은 실력을 지닌 수하 일곱과 함께 을지 소문을 막아섰다. 그것이 정확히 이각 전이었다. "후∼ 정말 대단하시다니까." 을지소문이 열 명이 넘는 고수들로부터 합공을 받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던 을지호가 짧으 한숨을 뱉어냈다. 열한 명의 인원 중 지금까지 버티고 선 상대라야 고작 두 명. 그나마도 압도적으로 밀리는 것이 얼 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끝났군."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명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거의 동시에 최후까지 항전을 거두지 않았던 악휘휘가 가슴을 움켜쥐 고 힘없이 무너졌다. 악휘휘의 죽음을 끝으로 을지소문의 싸움은 끝이 났다. 그것은 곧 악가와의 싸움이 사실상 끝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을지호가 여전히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백이 넘던 인원은 어느새 삼분지 일로 줄어 있었다. 그들이 지니 고 있던 병장기는 적이 아닌 주인의 피로 적셔진 채 아무렇게나 방치 되었고 흘러내린 피가 흙과 뒤엉켜 진흙탕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군."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을지호가 배는 많아 보이는 적을 맞아 선전을 펼치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살폈 다. 가녀린 몸매와는 달리 몇 안 되는 식솔들을 격려하며 싸우는 남궁민 의 모습은 어느 여걸에 못지않았다. 나름대로 열심인 남궁성과 사마유 선이 때때로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남궁혜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남궁세가 식솔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남궁혜의 무공은 전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이성진이나 곽검명, 단견보다 분명 한 수 위였다. 한데 누구를 본 것일까? 남궁세가를 살피던 을지호의 입가에 어느 순간 웃음이 떠올랐다. 위지황과 비무영. 오직 남궁민을 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싸움 에 참여한 위지황은 싸움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남궁민의 곁을 단 한순 간도 떠나지 않았다. 남궁민의 체면 때문에 직접적으로 나서서 도와주 지는 못했으나 예기치 못한 기습이나 배후로 돌아가는 적으로 인해 남 궁민이 부상이라도 당할까 전전긍긍하며 그녀의 주변을 철저하게 살폈 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차단을 했다. 그로 인 해 포위 공격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남궁민은 비교적 편한 상태로 적을 맞이할 수 있었다. 위지황이 남궁민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면 비무영 역시 같은 이 유로 미칠 지경이었다. 공격을 받거나 말거나 자신의 안전은 도외시하 면서 남궁민을 지키려는 위지황 때문에 그를 지켜야 하는 무영은 이중 삼중으로 고생을 해야 했다. 적을 쓰러뜨리면서도 연신 투덜대는 것으 로 보아 꽤나 피곤한 모양이었다. "쯧쯧, 애들 쓴다, 애들 써."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을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그래도 꽤 괜찮은 녀석 같단 말이야." 사랑 때문이라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고 주변의 따가운 눈 초리에도 아랑곳없이 밀고 나가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롭게 자란, 가문의 재건이라는 무거운 짐에 짓눌린 남궁민이 그로 인 해 조금씩 변하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자, 어쨌든 빨리 끝내야지." 남궁세가로부터 시선을 거둔 을지호는 막바지로 치닫는 전장으로 다시 몸을 날렸다. "크윽!"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과 함께 한 사발도 넘는 핏덩이를 토해낸 서대경은 두 눈을 감고 진탕된 내부를 진정시키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 었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된 충격에 전신의 혈맥을 미친 듯 이 질주하는 기운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무슨 놈의 무공이...' 태산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태상문주와 유천을 몰아붙이는 비사걸의 절대적인 무위를 보며 서대경은 치를 떨었다. 명성은 지겨울 정도로 들었고 과거 태상문주와의 싸움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는 있었지만 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분명 큰 차이가 있었다. 비사걸은 태상문주와 두 장로의 합공 속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노도와 같이 넘나드는 공격 속에서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따. 흘려 버릴 것은 적당히 흘려버리고 맞부딪쳐서 제압을 할 것은 확실하게 제 압을 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달려가도 결코 닿지 못하는 신기루처럼 그들에게 있어 비사걸이란 벽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싸움이 시작된 지도 벌써 이각여, 수백 초를 교환했지만 비사걸이 입은 피해라곤 무복이 조금 찢어진 것과 어깨 쪽에 약간의 상처를 입 은 것이 전부였다. 그에 반해 서대경과 유천은 온몸에 크고 작은 부상 을 입었다. 특히 태상문주나 유천에 비해 내공 면에서 다소 손색이 있 던 서대경은 결코 가볍지 않은 내상을 당했다. 그나마 지존신공을 운 용하며 싸우는 태상문주가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었는데 그 역시 두 장 로에 비해 상황이 좋다는 것이었지 승세를 잡는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력이 늘었구나!" 좌측 옆구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묵빛의 기운을 해소마혀 물러난 비사걸이 소리쳤다. "무공은 같되 그때의 성취가 아니로구나. 그 당시엔 생기라고는 찾 아 볼 수 없는 차갑고 소름 끼치는 살기뿐이었거늘." "고맙소." 초식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내심 기대를 했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태상문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 다. "하지만 나 역시 그 당시의 내가 아니다." "알고 있소." 애당초 십왕봉에서의 싸움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싸움으 로 지치고 부상당한 상대와 싸운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상태에서 도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아무튼 이제는 끝낼 때가 된 것 같구나." 주변의 싸움도 거의 정리가 되고 있었다. 이쯤에서 싸움을 끝내야겠 다고 여긴 비사걸이 명옥신공(明玉神功)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내력을 다 끌어올리는 것인가? 그렇잖아도 날카롭던 눈동자에 선 감히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강맹한 눈빛이 쏟아져 나왔고 전신에 힘이 충만한 듯했다. 거무튀튀한 철검 위로 또 하나의 검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냈다. "검...강?" 유천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비슷한 것 같은데 뭔가 다른 느낌이....." 그것의 실체를 알지 못하기는 서대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난 날 십왕봉에서 직접 그와 손속을 겨룬 태상문주만이 그것이 비사걸이 마지막에 보여준 최후의 한 수와 비슷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그렇잖아 도 그의 강함에 두려움을 느끼던 서대경과 유천은 끝을 알 수 없는 비 사걸의 실력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우우웅. 검명이 일었다. 드드드드드드.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지축이 울렸다. 주변의 대기가 미친 듯이 요동을 치고 허공으로 비산한 흙모 래가 시야를 차단했다. "조심들 하게나!" 정면에서 그 힘을 감당하고 있는 태상문주가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 다. 입가를 살짝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분명 선혈. 아직 본격적인 충 돌이 없었음에도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가라!" 나직한 외침과 함께 비사걸이 일으킨 기운이 사방으로 폭사했다. 눈으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일으키며 접근하는 기운. 그것들 하나하나에 숨이 막힐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두 눈을 감고 짧게 심호흡을 하며 전신의 기운을 끌어 모으던 태상 문주가 번쩍 눈을 뜨고 짧은 기합성이 주변에 울렸다. 동시에 두 장로 이 기합성이 터져 나오며 그들이 지닌 최고의 힘이 비사걸에게 향했다. 쿠쿠쿠쿠쿵!! 온 세상을 덮어버리기라도 할 듯 무시무시한 힘을 내포한 채 퍼져 나가는 비사걸의 힘과 지존신공을 운용하여 일으킨 암흑의 기운, 거기 에 두 장로가 목숨을 걸고 끌어올린 최후의 내력이 한데 엉켜 뿜어내 는 충돌음과 기운은 상상을 초월했다. 충격파가 쓸고 간 곳에 멀쩡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좌우로 늘어선 전각이 힘없이 무너지고 그 사이에서 자라고 있던 나 무들, 바닥에 깔린 거대한 대리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다 행이라면 처음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들 주변 십 장 안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만약 있었다면 사위를 쓸 고 지나가는 충격파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거이다. "크으으으." 검에 의지한 채 힘겹게 버티고 있던 태상문주의 입에서 탁한 신음성 이 터져 나왔다. 팔꿈치부터 잘려 나간 팔, 입고 있던 옷은 처음의 형 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우웩!!" 태상문주는 연거푸 피를 토해내며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결과를 살필 것도 없었다. 그는 전신의 경맥이 모조리 끊어져 나갔 음을 느끼면 담담히 패배를 받아들였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지존신 공을 극성으로 익힌 다음에 싸우지 못했다는 것. 만약 그랬다면 결과 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힘겹게 고개를 든 태상문주가 주변을 살폈다. 함께 싸웠던 두 장로 를 찾기 위함이었다. 힘을 잃은 그의 눈에 사지가 절단당한 채 널브러져 있는 유천이 들 어왔다. '유 장로.....' 장로라는 직함을 떠나 평생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친우의 죽음 을 보는 태상문주의 눈가에 잔 떨림이 일었다. 유천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대경의 시신도 있었다. 유천 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지만 그 역시 절명당한 채 숨이 끊겨 있었다. '서 장로.....'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는 태상문주의 노안에 뿌연 습막이 차 올랐 다. "좋은 승부였다." 비사걸이 손에 쥔 철검을 툭 던지며 말했다. 마지막 충돌은 그에게 도 꽤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허허,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리될 줄은 상상도 못했소. 나 름대로 자신이 있었건만." 태상문주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쪽도 대충 마무리가 된 것 같군." 비사걸이 모든 싸움을 끝내고 천천히 걸어오는 을지소문과 수호신 승을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패... 한 것이오?" "아마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대답에 태상문주의 눈이 절로 감겼다. 그사이 다가온 을지소문이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애쓰셨습니다." "애는 무슨." "저쪽도 대충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 같구나." 천천히 눈을 뜬 태상문주가 물었다. "모두.. 죽은 것이오?" 물끄러미 쳐다보던 을지소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저항하지 않은 사람에게 손을 쓰지는 않았 으니까. 물론 손을 썼다고 다 죽은 것도 아니지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이오?"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받을 이유도 없고 칭찬받자고 한 일도 아니 니까." "오늘의 신세는 내 아들이 갚아줄 것이오." 을지소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가능할 것 같소?" "물론이오. 내가 비록 노선배에게 패하기는 했어도 본 가의 무공이 패한 것은 아니니까." 바로 그때, 수호신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시주가 말씀하시는 무공이 지존신공이 맞습니까?" "훗, 신승께선 경험을 해보셨으니 알겠구려. 지존신공과 암흑마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습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소승을 비롯하여 과거 그 무공에 피를 흘린 선조들이 부지기수거늘. 하나, 소승은 몰라도 완벽하지 않 은 무공으로 여기 계신 노선배나 을지 시주를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태상문주의 자신감에 찬 어조에 불안감을 느낀 수호신승이 황급히 되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본 가의 무공이 완벽하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느냔 말이오." 그제서야 말뜻을 파악한 수호신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주께선 부정하고 싶겠지만 사천혈사 이후 그 무공은 완전하지 않 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승 또한 한차례 싸움에서도 그 무공이 완 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겪었지요."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말씀하시지요." "수호신승께선 환야, 전대 패천궁의 궁주보다 강하시오?" 순간, 듣고 있던 을지소문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중 천의 천주로부터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고 현재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터, 구태여 그 사실을 언급한다는 것은 자신과 환야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을지소문의 안색이 싸늘해지자 비사걸이 슬그머니 그의 손을 잡았 다. 얘기를 더 들어보라는 눈빛에 그는 억지로 분노를 참았다. "과거 이미 패한 적이 있지요.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기기 힘들 것입니다." "솔직하시구려. 하면 다시 묻겠소. 신승과 양패구상한 내 아들이 어 떻게 그녀를 물리칠 수 있겠소? 그것도 완전치도 않은 무공을 가지고. 신승의 말대로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거늘." "아미타불!" 수호신승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불호를 되뇌었다. 그 역시 어째서 환야가 중천의 천주에게 패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 한번 손속을 나눠본 결과 분명 강하기는 했어도 환야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고 여 겼기 때문이다. "소승의 우둔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혹, 그사이 에 무슨 기연이라도....." "기연이라... 기연이라면 기연일 것이오." 점점 말하기가 힘든지 얼굴을 찌푸린 태상문주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남궁민을 응시했다. "신승의 말대로 지존신공을 완전하지 못했소. 이유는 신승도 아실 것이오." "아미타불!" "지존신공의 사라진 마지막 구결. 우리가 그것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남궁민을,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는 태상 문주의 눈빛이 점점 강해졌다. "저 아이가 들고 있는 검이 무엇인지 아시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남궁민에게 향했다. 남궁민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영문을 몰라 낯빛을 붉혔다. "지금은 남궁세가의 가주를 상징하는 검일지 몰라도 정확히 육백이 십칠 년 전엔 우리 가문의 상징이었소." "서, 설마......"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남궁민의 검을 살피는 수호신승. 소스라치게 놀란 그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남궁치세... 멋도 모르는 위인들은 과거 우리의 선조님들께서 일으 킨 대업의 실패가 구팔일방이니 오대세가 때문이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궁치세라는 인물 때문이었소. 또한 우리가 지금껏 음지 속으로 숨어야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 오." 강렬했던 태상문주의 눈빛은 어느덧 사라지고 얼굴엔 허탈함이 깔 렸다. "바로 저 검. 지존신공의 최후의 구결이 숨겨져 있는 검이 남궁세가 에 있을 줄이야. 그것을 알지 못해 수백 년간을 허송세월했으니...." 조용히 읊조리는 말이었으나 침과가 함께 일제히 귀를 기울이고 있 던 사람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놀란 눈이 자신 에게 향하기도 전에 남궁민은 이미 손에 들린 검을 뚫어져라 살피고 있었다. 별다른 장식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 습. 다만 검신에서 은은히 비치는 혈광이 다른 검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어디서 얻은 것이냐? 원래부터 있던 것이냐?" 남궁혜가 물었다. "아닙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금지에서 얻은 것입니다. 당연 히 시조님께서 사용하신 검인 줄 알았건만....." "이리 줘보거라." 검을 건네받은 남궁혜는 남궁민보다 한층 더 차분한 눈빛으로 검을 살폈다. 하지만 잠시 후 검을 내려놓는 그녀의 표정은 남궁민과 조금 도 다르지 않았다. 검신에 비치는 혈광 외에는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태상문주가 나직이 비웃음을 흘렸다.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지존신공을 익힌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다. 그 또한 이미 사라졌겠지만, 아무튼 네게 고맙다고 해야겠구나. 네 덕에 잃어버렸던 무공을 찾을 수 있게 되어서." 사랑스런 손녀를 보는 듯 남궁민을 바라보는 태상문주의 눈빛은 참 으로 부드러웠다. 적의라고는 찾을래야 찾아볼 수가 없는 태도에서 참 으로 당황스럽게도 그녀는 태상문주가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있음을 느 낄 수 있었다. "하, 하지만 언제...." 무인에게 있어 검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 출도 이래 지금껏 단 한시 도 손에서 놓지 않은 검이 아니던가. 그런데 언제 어떤 식으로 자신의 검에서 최후의 구결을 찾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언제인지는 알지. 바로 오룡지회가 열렸던 황보세가. 천주는 바로 그곳에서 잃어버렸던 지 존신공과 암흑마검의 최후 요결을 찾아왔다." 그제야 중천의 천주가 악가의 가주라는 이름으로 오룡지회에 참석 했다는 것을 의식한 중인들은 다들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마지막 요 결을 얻지 못했음에도 수호신승에 버금가는 무공을 지니고 있던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남궁민의 이목을 숨기고 검을 빼앗는 것은 문제도 아 닐 것이다. 아니,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그녀 몰래 요결을 취한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못내 분했는지 입술을 질근 깨문 남궁민의 눈 썹이 파르르 떨렸다. "참, 천주가... 말하더구나." 힘이 빠지는지 태상문주의 음성이 점점 미약해져 갔다. "다른 모든 문파를 멸하여도... 남.. 궁세가만큼은 명목을 잇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다.. 당시 네 목숨을 빼앗고 검을 찾아오려 했지 만.. 그러지 않은 이유도 과...거의 원한은 차치하고 그..것이 지존 신공을 찾게 해준 남궁세가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더구나. 결국 내 가 전..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거의 죽어가는 음성이었다. 사실 온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지 금껏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태상문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을지소문이 대꾸했다. "보답은 당신들이 받게 될 것이오. 저 아이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대가로 명목만은 잇게 해주겠소. 지존신공? 암흑마검이라 하였소? 기 대해 보겠소. 당신네 가문이 자랑하는 그 무공들이 얼마나 강한지." "아..암. 기..대해도 좋을..것이오. 지..지존..신공과 암흑..마검은 꺾..을 수 없는 최..강의...."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하고픈 말을 하지 못해서인지 아니 면 가문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가게 돼서 그런지 숨이 끊어진 태 상문주는 두 눈을 감지 못했다. "쯧쯧, 안타깝군. 그래도 꽤나 인물이었는데 말이야." 곽검명이 혀를 차며 다가갔다. 그리곤 태상문주의 눈을 쓸어 감겨주 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놈의 욕심이 뭔지." "욕심이라기보다는 숙명이겠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그도 꽤나 힘들어했어." 한쪽 팔을 피로 물들인 이성진이 말했다. 깜짝 놀란 곽검명이 되물 었다.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아주 어렸을 적에 잠깐. 그저 젊은 나이에 무슨 고민이 그리 많은 가 했었지. 솔직히 그때는 악가의 인물인 줄도 몰랐네. 나중에 알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 옛날, 잠깐의 인연을 맺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일까? 먼 곳으로 시 선을 던지는 이성진의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태상문주의 죽음을 끝으로 동정(東征)이라 명명되었던 싸움은 끝이 나고 있었다. 제75장 혈로(血路) 초목으로 둘러싸인 대비산 중턱. 중천의 집요한 추격을 뚫고 도주에 성공한 패천궁의 무인들이 모습 을 보인 것은 아침 해가 뜰 무렵이었다. "이곳에서 잠시 쉬는 것이 좋겠군." 도왕 동방성이 패천수호대의 대주 화천명에게 말했다. 환야가 의식 불명이 되고 대다수의 원로, 장로, 호법 등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지금 그는 사실상 무리의 수장이라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간단히 대답한 화천명이 후미에 처져서 따라오는 패천수호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부대주 황산에게 명을 내렸다.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사방으로 척후를 보내라." "그건 비혈대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경계를 하는 것은 비혈대의 임무였다. 하지만 지금 살아 있는 비혈대원이라 봐야 고작 다섯 명에 불과했다. 대주인 사중명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비혈대원은 그간 중천의 거센 추격을 뿌 리치느라 목숨을 잃고 말았다.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일은 그들과 함께 안당이 스스로 미끼가 되어 적을 교란하고 유인한 것. 결국 수하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나선 안당과 비 혈대의 헌신적인 희생이 없었다면 다른 이들이 지금껏 도주에 성공하 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황산이 지친 수하 몇을 이끌고 수풀 속으로 사라지자 화천명은 고개 를 돌려 지친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누이며 휴식을 취하는 일행을 바라 보았다. 실로 처참했다. 싸움에 패하고 패천궁을 떠나올 때만 해도 백여 명 은 되었던 인원이 오십이 채 안 되었다. 그나마 온전한 사람은 그 자신 과 몇몇 수뇌들뿐 대다수가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특히 환야를 비롯하여 적의 수뇌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원로와 장로들의 부상은 심각하다 못해 당장 목숨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위중했다.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마냥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잠깐의 여유라도 있을 때 충분히 힘을 비축해야 했다. 언제 어느 순간 에 적이 밀려들지 모르는 일이었고 힘이 있어야만 적으로부터 부상자 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화천명만 하는 것은 아니었 다. 생존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수 뇌들은 무리의 안전을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있었고 부상자들은 최선 을 다해 치료를 하고 또 동료들의 치료를 돕기도 했다. 누구보다 애를 쓰고 있는 사람은 임여령이었다. 그녀는 잠시도 쉬지 않고 부상자들을 돌봤는데 그녀의 의술로 목숨 을 건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환야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어떠셔?" 안타까움이 물씬 담긴 을지룡의 질문에 임여령은 근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모르다니? 네가 모르면 어떡해?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리신 것이 지 난밤이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을지룡은 지난밤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듯 힘없는 미소를 짓던 환야 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독이야? 독이 문제인 거야?" "아니, 독은 아니야. 독은 거의 해독이 되었어." "그럼 뭐가 문제인데." "뭐가 문제겠어? 고수들끼리 싸움을 했고 그 싸움에서 패했다면?" 자꾸만 채근하는 을지룡에게 화가 났는지 임여령의 음성이 신경질 적으로 변했다. 그것을 눈치챈 을지룡이 재빨리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 애쓰는 거 뻔히 알면서." "됐어. 나도 답답하니까 오죽하겠어. 아무튼 퇴선을 다하고 있으니 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강한 분이잖아." "그래. 강한분이지. 반드시 일어나실 거야. 그건 그렇고 다른 분들 은 어때?" "다들 마찬가지야. 노력은 하고 있는데 부상이 워낙 심하셔서 걱정 이야. 한자리에서 치료만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더 힘들어." "후∼" 사실이 그랬다. 임여령이 제아무리 신묘한 의술을 지녔다고는 하나 분명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적의 공격을 피해 이틀 동안 도주한 거리 가 장난이 아니었다. 성한 사람이라도 골병이 들 정도로 힘든 강행군 의 연속이었다. 당장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부 상을 입은 환자들이 얼마나 힘들어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 목숨 이 붙어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그러나 적의 추격이 거센 상황에서 한가로이 치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때였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을지룡이 발딱 고개를 들었 다. "왜?" "있어봐." 임여령의 말을 무시한 을지룡이 화천명을 향해 달려갔다. 화천명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 "적이 오는 모양입니다." 편히 대하라는 당부에도 불구하고 화천명은 을지룡에게 늘 예를 차 렸다. "벌써 말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많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일곱 명입니다." 황산이 대신 대답을 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적이 근처에 있는지는 모르지요. 근처를 샅샅 이 훑고 있을 테니까." "정확히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하더냐?" 어느새 달려온 동방성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시간은?" "반 각 안에 도착합니다." "음." 동방성이 짧은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반 각이라면 시간 이 너무 촉박했다. 흔적을 없애는 것은 고사하고 몸을 피하기조차 만 만치 않은 시간이었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제거하는 수밖에."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피할 수 없다면 놈들이 다른 놈들을 부르기 전에 없애는 방법뿐이야. 일곱이라... 대주와 나라면 충분하겠지. 자네도 도와주겠는가?" 동방성이 을지룡에게 물었다. 대답은 들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 * * "어서 오게나." 태사의에 몸을 깊게 파묻고 한잔 술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악위군 이 신도를 보며 반겼다. "한잔하려는가?" "괜찮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신도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쯧쯧, 군사는 다 좋은데 술을 너무 못 마셔. 장부가 그래서야 쓰 나?" "못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지 않는 것이지요. 아직 할 일이 많은 지라...." "하하하, 그런가? 일도 좋지만 쉬엄쉬엄하게나. 그러다 몸 상하겠 네. 이제 어려운 일도 다 끝나지 않았는가?" "패천궁을 쓰러뜨림으로써 팔부능선을 넘기는 하였습니다. 하나 아 직은 방심할 때가 아닙니다. 한데 몸은 좀 어떠신지요?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의원에게 듣기는 하였으나...." "의원 말대로네. 대단치는 않아. 당분간 심하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고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팔 하나 부러지고 패천궁을 얻었으니 손해 본 것은 아니지." 흰 천으로 어깨부터 손목까지 칭칭 감은 팔을 쓰다듬는 그의 얼굴 엔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참, 추격은 잘되고 있다던가? 제법 성과가 있다고 듣기는 하였네 만." "태상궁주인 안당을 비롯하여 도주한 무리 중 절반은 잡은 것 같습 니다만 그래도 부족합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데다가 도마뱀이 꼬리를 끊고 도망치듯 도주를 하여 완전히 소탕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이쯤 해서 추격을 멈추는 것이..." "안 됩니다!" 의외로 강경한 신도의 태도에 악위군이 다소간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주변으로 흩어진 놈들이야 별것 아니나 지금 쫓고 있는 무리는 그 야말로 패천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뿌리도 보통 뿌리 가 아니지요. 무림의 판도를 단숨에 바꿔 버릴 수 있는 거목으로 다 시 자랄 뿌리입니다. 싹을 틔우기 전 반드시 뽑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말일세, 적당한 적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네. 자칫 무료 할 수 있는 생활에 활력소가 될 수도 있거든. 긴장감도 생기고." 술잔을 비우는 악위군의 눈빛이 맑게 빛났다. "뭐, 그래도 자네 의견에 반대할 생각은 없네. 그건 단지 나의 바람 일 뿐이고 군사인 자네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난 그저 몇몇 이라도 빠져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지." "불가능할 것입니다." "어째서?" "놈들이 도주하고 있는 곳엔 이미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습니다." "흠, 그만한 인원이 되지 않을 텐데. 우리도 꽤 피해를 입지 않았는 가?" "남천이 앞을 막고 있습니다." 의외였는지 악위군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허! 그들이 움직였단 말인가? 그 굼벵이 같은 인간들이?" "그렇습니다. 현재 놈들이 숨어 있을 곳으로 예상되는 지점은 대비 산입니다. 아마도 산을 넘어 북서진하거나 바로 북진을 하려 할 것입 니다. 남천이 바로 그 앞을 막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흥,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을 버는 것은 사람이라더니.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며 패천궁을 무너뜨리니까 이제 와서... 거절하게. 도망치 는 잔당들을 잡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천 놈들이 끼어들어 생색내 는 꼴은 못 보겠어." "단순히 생색을 내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게 아니면?"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악위군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조건을 달 처지가 아닙니다. 애당초 시간을 지키지 못한 데 다가 조건을 단다고 들어줄 우리도 아니지요." "한데 어째서?" "모르긴 몰라도 구겨진 체면을 회복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구겨진 체면이라... 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악위군이 무릎을 탁 쳤다. "그랬군, 그랬어. 하하하하!" 지난밤, 남천에 심어놓은 첩자로부터 남천과 남천의 천주 기요후가 을지휘소로부터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전해 들은 터, 바로소 의문이 풀린 것이다. "크크, 그만한 모욕을 당했으면 화가 날 만도 하지. 그런 이유라면 야 이해 못할 것도 없겠네. 남천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쯧쯧, 이 거야 원. 그렇게 되면 자네 말대로 뿌리가 뽑히지 않을래야 않을 장 사가 없겠군." 거푸 두 잔의 술을 마시는 악위군의 표정에선 약간의 아쉬움도 묻 어 나왔다. "아, 그건 그렇고... 위쪽 싸움은 어찌 되고 있다던가?" 악위군이 턱짓을 하며 물었다. 새로이 정도맹이 위치한 복우산에서 이틀 전부터 치열하게 펼쳐지 고 있는 싸움을 물은 것이다.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다만 철혈마단에서 꽤나 고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흠, 이번엔 제법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가 보군." "그들도 더 이상은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배수의 진을 치고 대항하 고 있을 겁니다." "하긴, 패천궁도 무너진 마당에 필사적으로 싸우겠지. 이왕이면 열 심히 싸워줬으면 좋겠군. 양패구상, 아니 최소한 치명적인 타격을 주 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말이야." "......" 신도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악위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산을 차지하기 위해 힘을 합치기는 하였으되 정상에 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면 족하지 않겠나?" 말뜻의 의미를 차악한 신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의 전력이라면 모를까 패천궁과의 싸움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큽니다. 어쩌면 일 대 일의 싸움에서도 밀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네." 악위군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지만 피해를 입은 것은 나머지 삼천 도 마찬가지일세." "철혈마단이야 무당산에 이어 복우산에서도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겠지만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북천은 전력의 누수가 그다지 많지 않 습니다. 또한 남천 역시 많은 피해는....." "외관상으로야 그렇겠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 을지...." "휘솝니다.' "그래, 을지휘소라는 친구와 혈영대에게 남천이 입은 피해는 서천 에 못지않아. 병졸이 아무리 많으면 뭐 하나. 그들을 이끌 장수가 없 는 것을." "그도 그렇군요." 신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며칠, 을지휘소와 혈영대에 목숨을 잃은 남천의 무인들은 거 의 백여 명이 육박했다. 적지 않은 피해이기는 해도 수백에 달하는 남 천의 전력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큰 피해라고는 할 수 없 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같이 수하들을 이끌어야 하는 조장이며, 단 주, 당주들이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최고 수뇌부들을 제 외한 거의 모든 중간 간부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지금 당장 적으로 돌리기엔 그들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행 여 낌새를 채고 연수를 한다면..." "누가 뭐라나? 당장에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네. 그저 적의 손에 피 해를 많이 입기만을 소박하게 바랄 뿐이지. 하하하하." 뭐가 그리 기쁜지 악위군의 입가엔 웃음이 끊일 줄을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웃음을 뚝 그친 악위군의 눈빛에서 노기가 흘러나오고 그것이 밖으 로 발출되기도 전 몸을 돌린 신도가 호통을 쳤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이곳이 감히 어딘 줄 알고!" 하지만 신도는 자신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고 말았다. 허둥지둥 방으 로 들어선 사람이 이번 싸움에서 몇 남지 않은 장로 악청우였기 때문 이다. "아니, 장로님이 아니십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구, 군사, 큰일났네!" "무슨 일이십니까, 당숙?" 악위군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그가 아는 한 악청우는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 도로 대담한 사람. 저토록 허둥대는 일이라면 분명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본 가가.. 본 가가!" 악청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악위군 이 벌떡 일어났다. "본 가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본 가가...." "당숙!" 참다못한 악위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호통이 어느 정도 효 과를 본 것일까? 거의 넋이 빠져 있던 악청우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 을 열었다. "본 가가... 당했다고 하네." "다, 당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도맹 놈들이...." "정도맹이 본 가를 공격해단 말입니까?" 입을 열 정신도 없는지 악청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 답을 했다. "그, 그놈들이 어찌!"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도맹이라면 무당산을 버리고 복우산으로 도주를 하지 않았습니 까? 그들이 무슨 여력이 있어 본 가를 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전신을 떨며 되묻는 신도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놈들로 인해 본 가가... 무너진 것 은 분명 확실하다네. 조금 전 연락이 왔네." "얼마나, 얼마나 쳐들어왔다고 합니까?" "글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네. 서찰에는 대략 삼사십 명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이하인지 이상인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쨍그랑! 벌떡 일어난 악위군의 힘에 밀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이 바닥 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본 가에 남겨둔 인원만 삼백이 넘습니다! 게다가 아버님을 호위하 는 호법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모두 당...했네." "마, 말도 안 되는!!" 이만하면 충격도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켰던 악위군 이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기를 잠시, 입술을 깨문 그가 다 시 물었다. "설마 아버님께서....." 말끝이 흐려졌다. 그의 얼굴엔 어떤 대답이 흘러나올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대답을 듣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 슬픔 에 잠기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악청우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 가셨습니까?" 악청우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졌다. "아!" 악위군의 입에서 한줄기 탄식이 흘러나왔다. 두 눈은 절망으로 물 들었다. "검왕에게 당하신 모양입니다." "검왕이라면... 비... 사걸 말입니까?" "곽화월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니 아마도 그겠지. 그리고 수호신승 도 왔었다고 하더군." "수호신승까지!"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검왕이나 수호신승이 감당하기 힘 든 고수이기는 해도 본 가에 남아 있는 전력이라면 막지 못할 상대가 아닙니다. 게다가 삼십이라니... 전력 또한 몇 배나 차이가 나지 않 습니까?" 다소간 침착성을 되찾은 신도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악 청우의 입에서 긴 탄식성이 터져나왔다. "후∼ 본 가를 친 자들 모두 엄청난 고수였다고 하네. 삼광문의 문 주나 전대 개방의 방주까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고수란 고수는 모조리 동원한 모양일세. 무엇보다 그자가 왔었다고 하더군." "누구... 말씀입니까?" 조심히 반문하는 신도. 한데 은은히 떨리는 눈동자가 악청우가 말 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 같았다. "을지소문. 그리고 그의 손자라는 삼시파천 을지호." "음!" 악위군과 신도의 입에서 동시에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만나도 하필 이면 최악의 상대를 만난 것이다. 검왕 비사걸에 수호신승이라면 악위 군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자가 아니던가. 그들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사람이 바로 을지소문이었다. 게다가 철혈마단을 농락하며 근래에 엄 청난 명성을 얻은 삼시파천 을지호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한번 만나기도 힘든 그런 고수들이 일제히 쳐들어왔다면 병 력의 차이가 몇 배가 나든 상대가 될 수 없을 터. 악위군은 비로소 상 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나 당했습니까?" "절망적이네." "전... 멸입니까?" "전멸과 다름없네. 생존자가 고작 이십도 되지 않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른 식솔들은 모두 무사하다는 것이지." "고맙... 다고 해야겠군요." 차갑다 못해 몸이 얼어버릴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악위군의 전신에 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도." "예." "본 가로 돌아간다. 운신이 힘든 이들을 빼고 모두 움직인다. 또한 각 분타에 흩어져 있는 모든 병력을 본 가로 집중시켜라." "존명." "패천궁의 잔당을 쫓는 추격도 멈추라고 하여라." "하오나...." "우선의 본 가의 일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다. 놈들의 목숨은 훗날 내 손으로 직접 끊어 식솔들의 넋을 위로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분명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그리할 수 있다면야 무엇을 바라겠느 냐마는 패퇴하는 패천궁의 잔당은 결코 가벼이 취급해선 안 될 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신도는 목구멍까지 흘러나온 말을 간신히 억누르고 대답을 했다. 지금은 그 어떤 말을 해도 악위군의 귀엔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반 시진 후에 출발하겠다." "알겠습니다." 즉시 대답을 한 신도가 몸을 돌렸다. '후∼ 호사다마(好事多魔)련가? 아니면 예정된 수순인가? 알 수가 없구나.' 방문을 빠져나오는 신도의 얼굴엔 슬며시 암운이 깃들었다. * * * "크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추격에 나섰던 중천의 일곱 무인이 모조리 쓰러 졌다. 워낙 불시에 당한 기습인 데다가 그들을 공격했던 이들이 하나 같이 고수인지라 변변한 반항은커녕 그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차가운 땅 위에 몸을 뉘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쓰러져 갔다. 하 지만 단 한 명, 그 조의 책임자였던 사내는 의식이 혼미해져 가는 상 황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삐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로 치솟는 물체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점에 이르자 화려한 불꽃을 하늘에 수놓았다. 불꽃의 정체가 근처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신호라는 것 은 자명한 사실. 동방성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이 터져 나왔 다. "어르신." 화천명이 동방성을 불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의 전개에 몹시도 당황 하는 모습이었다. "큰일이네. 신호탄이 터졌으니 인근에 퍼져 있는 무리들이 모조리 몰려들 것이네. 이와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하여 체면 불구하고 기습을 하였건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허탈감에 사로잡힌 동방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역시 당황한 모습 이 역력했다. "지금의 신호를 봤을 것이니 금방 몰려올 것입니다." "그렇겠지. 일단 돌아가세. 빨리 피해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재빨리 대답한 화천명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주변을 살피던 을지룡 이 그의 팔을 잡았다. 화천명은 의혹에 찬 눈으로 을지룡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동쪽에서 맹렬히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들, 그 수가 얼마인지 파악 을 할 수 없었으나 추격자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벌써!" "급하게 되었군. 가세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방성이 몸을 날리고 화천명과 을지룡의 신 형이 조금도 지체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발각된 것입니까?" 갑작스런 폭음과 주변을 밝히는 불꽃을 통해 이미 사태가 심상치 않 게 돌아간다고 여긴 온설화가 동방성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물었다. "그렇게 되었네." 동방성이 무거운 표정으로 끄덕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피해야 합니다. 놈들이 벌써 코앞까지 밀려 들고 있습니다. 패천수호대는 빨리 움직일 준비를 하여라." 화천명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긴박하고 심각했다. 동방성과 온설화, 화천명의 주도로 이동 준비는 최대한 신속하게 이 뤄졌다. 하지만 대다수가 부상자인 데다가 다들 많이 지친 상태라 생 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사이 추격자들은 사방에서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동쪽 숲에 적입니다!" 정찰을 나갔던 패천수호대 대원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 거 의 동시에 도착한 나머지 대원들의 보고도 절망적인 것이었다. "서쪽 능선 쪽에서도 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위가 된 것 같습니다!" "제기랄!" 보고를 받는 부대주 황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북쪽은? 북쪽 능선은 어떤데? 그쪽도 이미 막힌 것이냐?" "아직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곳도 언제 막힐지 모릅니다." "그나마 한쪽이라도 뚫려 있으니 다행이지. 막히기 전에 움직여야겠 습니다, 대주." 마치 구명줄이라도 얻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쉰 화천명이 고개를 끄 덕였다. "대원들을 이끌고 우선 길을 만들어라. 혹여 매복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황산이 대원 다섯을 데리고 앞서 움직였다. 그사이 출발 준비도 끝나고 그들의 모습이 숲으로 사라질 즈음하여 이동이 시작되 었다.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화천명이 후방으로 빠지며 말했다. "형님 혼자선 역부족입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그리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화천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때 동방성이 끼어들었다. "자네들은 앞으로 가게. 후방은 내가 맡도록 하지." "하지만...." "적이 어느 쪽으로 공격해 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쪽에 전 력을 집중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닐세. 자네는 정면을 맡고 을지 소 협은 부상자들을 보호해 주시게나." "알겠습니다." 뭔가 꺼림칙한 것이 있었지만 딱히 틀린 말이 아닌지라 화천명과 을지룡은 그의 말에 따라 각자의 자리로 움직였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몸을 돌리는 동방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훗날을 부탁하네.' * * * "앞을 막고 있는 자가 누구냐?" 추격대를 이끌고 있는 악선하(岳善荷)가 수목으로 우거져 그다지 넓 지도 않은 길을 홀로 막으며 수하들과 치열하게 싸움을 하는 노인을 보며 물었다. 딱히 누구에게라고도 할 것 없는 질문이었으나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저자가 바로 도왕 동방성입니다." "도왕 동방성? 역시 보통의 무위가 아니라 했다. 대단하군, 정말 대 단해!" 악선하는 동방성의 무위를 바라보며 저절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사 람들이 어째서 강호오왕이라 하며 칭송해 마지않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고작 반 각이 지났을 뿐인데도 그의 주변에 일곱 구가 넘는 시신이 널려 있었다. 패천궁과의 싸움에서 중천은 상당히 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 만큼 치열했던 싸움이었고 실력이 없고서는 살아날 수 없는 싸움이었 다. 그러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어떤 실력을 지니고 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 한데 동방성은 추격에 쫓겨 피 곤한 몸으로 그런 고수들을 일곱이나 쓰러뜨렸다. 그것도 일 대 일이 아닌 합공을 당하는 상황에서. "감탄하실 일만은 아닙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간 놈들이 포 위망을 뚫고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일부를 우회시키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악선하는 다소 초조해하는 수하를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쯧쯧, 무엇이 그리 급하더냐? 이미 끝난 싸움이다. 놈들이 빠져나 갈 길은 없다. 우리가 우회를 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벌써 길을 막 고 있을 게야. 또한 사냥이란 천천히 즐길수록 그 기쁨이 큰 법이니 라." "하지만 피해가 너무 큽니다. 벌써 아홉이나 당했습니다." 그사이 두 명이나 더 당한 모양이었다. "흠, 하긴 피해가 크기도 크군. 그럼 너희들이 상대를 해보겠느냐?" 악선하는 자신의 뒤에서 한편으로 감탄과 다른 한편으론 호승심에 휩싸여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조바심을 내던 그들은 반색을 하며 대 답을 했다. "그리하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명령을 거둘까 부리나케 달려가는 수하들을 보는 악 선하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쯧쯧, 저리들 급해서야, 조금만 더 늦게 명을 내렸으면 병이 날 뻔 했군. 아무튼 어찌 싸우는지 지켜나 볼까?" 악선하의 허락을 받은 무인들은 서로에게 뒤질세라 달려나가 동방 성을 포위했다. 하나같이 각 단의 조장 급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내뿜는 기 세는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후∼ 힘들구나.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어.' 계속해서 몰려드는 적을 보며 동방성의 눈가에 어둠이 깃들었다. 정 상적인 몸이었다면 상대가 수십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나 오 랜 싸움 끝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데 다가 내력마저 고갈되고 있었다. 자연 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군.' 한 사람이라도 더 쓰러뜨려 적의 발을 묶고 시간을 끌어야 했다. 물 론 그런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 었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터였다. 그 정도면 목숨을 걸 가치는 충 분했다. "오라!" 검을 고쳐 잡는 동방성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 * * 복우산에 자리를 튼 정도맹의 정전. 새롭게 구성된 정도맹의 수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틀째 이 어지는 철혈마단의 공세를 감당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는지 그들의 얼 굴엔 피곤함이 역력했다. "다시 시작되었다고?" 태사의에 앉아 있던 맹주 강언이 묻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 부 제갈경을 대신하여 군사 직에 오른 제갈선이 조용히 대꾸했다. "예. 일각 전부터 공세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상황은 어떤가?"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금문진과 구궁진, 그리고 팔로연환진이 뚫리면서 일차저지선은 완벽하게 무너졌습니다." "음." 강언의 입에서 짧은 침음성이 터져 나오고 수뇌들의 얼굴도 침통함 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제갈선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이차 저지선이 남아 있습니 다." "그러나 그마저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어둡기만 한 강언의 안색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제갈선의 곁 에 조용히 앉아 있던 제갈경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차저지선을 뚫는 데만 걸린 시간이 이틀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피해는 전무한 데 비해 적은 거의 백을 훌쩍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 습니다. 그만하면 잘 버틴 셈이지요. 비록 이차저지선에 설치된 진식 이 다소 미흡하기는 해도 충분히 시간을 끌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쯤이나 도착한다고 합니까?" 정도맹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천중 진인이 물었다. 제갈경의 시선이 제갈선에게 향했다. "짧으면 이틀, 길면 사흘 정도가 예상됩니다. 물론 중간에 별다른 일이 없을 경우를 가정한 것이지요." "별다른 일이라면?" "가령 적의 추격을 받을 수도 있고....." "중천의 본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오는 상황인데 추격을 받을 일 이 있겠는가?" 말석에 앉아 있던 노가장의 장주 노안검이 물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북쪽에 어떤 적이 있는지를 잊으셨습니까?" "북쪽이라면... 북... 천!" 그제야 북천의 존재를 의식한 노안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 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제갈선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까지는 없을 듯합니다. 무당을 공격 할 때만 해도 함께였던 북천이 한발 뒤로 물러나고 철혈마단이 단독으 로 공격하는 것을 보면 쉽게 움직일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전 그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염려를 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다행이지." "짧으면 이틀, 길면 사흘이라 하였는가?" 천중 진인이 재차 확인을 하듯 물었다. "그렇습니다." 순간, 좌중을 살피며 입을 여는 천중 진인의 눈빛이 도인의 것이라 고는 볼 수 없는 살기로 번득이기 시작했다. "이 기회에 놈들을 끝장내야 할 것입니다. 무당산에선 놈들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치욕을 겪었지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이 곳마저 내주고 나면 희망이 없습니다. 게다가 군사의 말대로 북천이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인 영문인지 알 길은 없으나 객관적인 전 력을 살펴봐도 철혈마단보다 우위에 있는 북천이 움직이지 않는 지금 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천엽 진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늦어도 사흘입니다. 그 시간만 버텨내면 악가를 친 인 원이 돌아옵니다. 비록 인원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들이야말로 정도맹 의 핵심 전력. 그들이 돌아오는 순간, 안과 밖에서 놈들을 끝장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겠지요." 무진검문의 문주 곡운이 다소 힘없는 소리로 대꾸했다. "견딜 수 있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견뎌내야 합니다. 목 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천엽 진인의 태도가 얼마나 강성했는지 입을 열었던 곡운이 무안해 하며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허허허, 목숨을 버려선 안 되지요. 영웅들이 개선하여 돌아왔을 때 반겨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너털웃음으로 주위를 환기시킨 강온이 제갈선을 바라보았다. "어느 때보다 군사의 힘이 필요하네. 싸울 줄만 알았자. 우리는 진 식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거든. 모든 진식이 무너진다면야 우리가 나서겠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고 승리를 한다 해도 피해도 클 터. 악가를 쳤던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최대한 전력을 보전해야 하 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도록 하게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도맹의 안위를 양 어깨에 짊어지라는 부담되는 부탁을 받으면서 도 제갈선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긴 나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모습이 그토록 믿음직할 수가 없었다. "믿겠네." 힘주어 말하는 강언,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눈빛은 신뢰로 가득했 다. * * * "도왕 어르신은 어디 계신가요?" 온설화가 주변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을지룡에게 다가와 물었다. "후미에 계실 겁니다." "그쪽에 안 계시던데....." "그럴 리가요. 조금 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조금 거리를 두고 오시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기는 하겠지만...." 온설화는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을지룡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 역시 석연 찮은 뭔가를 느낀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온설화는 상기된 표정으 로 달려오는 그의 표정에서 불안감의 실체를 읽을 수 있었다. "안 계십니다." "역시....." 온설화의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무슨 일입니까?" 그사이 연락을 취했는지 황급히 달려온 화천명이 물었다. "도왕 어르신이 보이질 않습니다." "도왕 어르신이?" "예. 후미에 처져 계시지는 않나 가보았으나....." "서, 설마!" 화천명의 고개가 그들이 지나온 숲으로 홱 돌아갔다. "설마 하니 그곳에 남으셨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놈들의 수가 얼마인데 혼자 상대하려 하신단 말인 가!" "하아∼ 태상궁주님처럼 우리가 무사하게 도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끌려고 하신 것 같군요." 온설화가 나직이 탄식을 하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후미를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봐야겠습니다. 셋만 따라와라." 주변에 있던 패천수호대원들에게 소리친 화천명이 황급히 몸을 움 직이고 그 뒤를 을지룡이 따라붙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위험합니다. 이곳에 계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혹여 일이 잘못되면 이곳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이들 을 지켜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을지룡이 뭐라 하기도 전에 빠르게 몰아붙이는 화천명. 그러나 그 역시도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온설화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 이다. "갈 수 없습니다." "무, 무슨 뜻입니까?" "군사의 자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께선 절대로 가셔선 안 됩니다.' "어르신이 위험에 빠지신 것을 보고도 모른 체하란 말씀입니까?" 인상을 찌푸리는 화천명의 음성이 절로 커졌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르신 혼자 남겨두고 절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화천명이 앞을 가로막은 그녀를 피해 움직이려 하였다. 하지만 온설 화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부디 도왕 어르신의 뜻을 헤아리세요." "......" "어째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홀로 적과 맞서고 계신지 알아달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적의 추격이 너무 빨랐어요. 누군가가 막아서서 놈들의 발걸음을 지체하지 않는다면 곧 덜미를 잡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도왕 어르신이란 말입니까? 내가 합니다. 내가 놈 들의 시선을 돌리면 되지 않습니까?" 순간, 온설화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군사!" "잊었습니까? 대주님은 차기 패천궁의 궁주로서 내정된 사람입니 다. 어째서 사사로이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 돌아가신 궁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실까요? 스스로 미끼가 되어 적을 유인하셨던 태상궁주님 은요? 패천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이런 대주를 이해하 리라 보나요?" "그, 그건....." "도왕 어르신께서 어째서 대주님께 아무런 언급도 없이 뒤에 남으 셨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실 겁니다." "그래도 도왕 어르신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누가 버린다고 했습니까?" "군사의 말뜻이 그렇지 않습니까?" "버리는 게 아니지요.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의 희생으로 목숨 을 구하자는 것입니다. 어르신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마음으로 목숨 을 버리셨는지 그 뜻을 품에 지니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그것 아닙니까?" "같은 것이라 생각하나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대주께서도 이 미 아실 텐데요. 부디 그 차이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가신다 면 막지 않겠습니다." 온설화는 한 걸음 비켜서더니 모든 판단을 화천명에게 맡기겠다는 듯 아예 몸을 돌려 버렸다. 일행의 모든 시선이 화천명에게 향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마음은 당장에라도 달려가 동방성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이성적으 로 생각해 볼 때 온설화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냉정하기 는 해도 지금 상황에선 가장 적절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화천명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아아!!"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주먹을 내지르자 아름드리 나 무가 두 동강이가 나며 부러졌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저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볼 뿐. "뒤를 맡아!" 숨을 고른 화천명이 황산에게 소리쳤다. 그리곤 빙글 몸을 돌려 처 음의 자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 가 이성의 판단을 믿은 것이다. "을지 공자께서도 돌아가세요." 화천명이 울분을 머금고 돌아간 이상 을지룡이라고 다를 수는 없었 다. 그는 힘없는 음성으로 부탁하는 온설화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 며 다시 임여령의 곁으로 돌아갔다. 나직이 터져 나오는 한숨. 축 처진 화천명의 어깨를 살피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는 온설화의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잊지 않겠습니다, 어르신. 결코 오늘의 일을......'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동방성의 몸이 휘청거렸다. 동시에 입술을 비집 고 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크으으." 동방성은 흩어지는 중심을 잡기 위해 연신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적 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쉬이익!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그의 몸으로 쇄도하는 것은 무섭도록 빠른 화 살이었다. 퍽! 또다시 몸이 흔들렸다. 동방성은 들고 있던 도를 땅에 박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어깨가 절로 들썩이며 탁하디탁한 숨소리가 듣기 거북할 만큼 거칠 었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어깨며 허벅지, 복부에는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고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자상을 수도 없 이 입었다. 특히 오른쪽 가슴에 난 상처는 더할 나위 없이 치명적으 로 더 이상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음에도 동방성의 투기는 꺾이지 않았다. 눈빛만큼은 오히려 활활 불타올랐다. "괴물... 실로 괴물 같은 인물이로다." 악산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있었던 얼굴에서 웃음은 이미 씻은 듯 이 사라져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동방성에게 덤빈 수하들의 숫자 가 자그마치 열일곱. 패천궁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은 그야말로 최정예 였다. 게다가 그의 명을 받고 포위 공격을 했던 인물들은 각 단과 당 의 조장들로 중천의 핵심 고수들이 아니던가. 한데도 동방성 한 사람 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아니, 못한 정도가 아니라 열넷이 목숨을 잃었 고 셋은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는 처참한 결과를 보였다. 보다 못한 몇몇 수하들이 궁수를 동원하고서야 겨우 제압을 했으니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멀쩡한 상태로 붙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그만한 무위를 발 휘한 상대였다. 만약 정상적인 상태로 붙었다면 결과는 더욱 참혹했 을 것이다. "후우∼" 절로 두려움이 일었다. 출발하기 전 어째서 군사가 하나도 남김없 이 반드시 척살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서둘러라! 바로 뒤쫓는다!" 그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동방성의 무위에 기가 질린 추격대는 그들 의 뇌리 속에서 동방성이란 존재를 최대한 빨리 지워 버리고 싶어했 다. '진정 끝.....' 거듭 날아오는 화살, 그리고 적들. 간신히 눈을 뜬 동방성의 시야 에 들어온 것들이었다. 그는 문득 화천명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를 믿겠다.' 동방성은 참으로 힘겹게 도를 들어 올렸다. 퍽퍽! 그사이에도 몇 개의 화살이 그의 몸에 박혔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 다. 육신은 이미 죽은 상태였으나 정신만은 그렇지 않았다. '한 놈이라도 더.....' 그의 눈은 괴성과 함께 가장 앞서 달려오는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 다. 그리고 그의 검이 목덜미에 도달하는 순간, 최후의 힘을 짜낸 도 가 사내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컥!" 비명은 하나였다. 동방성의 목을 날려 버린 사내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며 힘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그 의 몸 옆으로 몸과 분리된 동방성의 머리가 떨어졌다. 자신의 할 일 은 다 했다는 듯 참으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 * * "무슨 일이야?" 환자들을 돌보는 임여령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을지룡이 황 급히 물었다. 임여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환자들의 상태를 살 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불안감에 을지룡의 음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대답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순간, 임여령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안 되겠어." "안 돼? 뭐가?" "더 이상 움직이면 위험해." "위험하다니?"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이 이상 계속 움직이다간 큰일난단 말이 야! 빨리 머물 곳을 찾으라고 해!" 동방성의 희생으로 인해 잠시 늦춰지기는 했어도 언제 또다시 추격 이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멈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 다. "아무리 급해도 지금 상황이....." 하지만 을지룡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임여령의 태도가 워낙 단호했 기 때문이다. "그렇게 심각하냐?" "심각? 심각한 정도가 아니야! 당장 안정을 시키고 손을 쓰지 않으 면 위험해." "......" 을지룡의 시선이 환야와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곡지통 등에게 향 했다. "알았다.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몸을 돌린 을지룡이 온설화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사정 설명을 하 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온설화. 전체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임여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길을 강행할 수도 없었다.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패천수호대와 함께 정면에서 무리를 이끌 고 있던 화천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퇴로가 끊겼다고 합니다." "퇴로가 끊겼다면..." "포위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요." 온설화의 표정이 절망감으로 어두워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함정에도 허점은 있는 법입니다. 또한 하늘이 우리 패천궁을 버리지 않는 한 빠져나갈 방법은 분명 있 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버림을 받았을지도....' 잘로 한숨이 나왔다. 물론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우선 환자들의 상황이 급박하다 하니 그들을 치료할 적 당한 곳을 찾아보세요. 적을 맞이하여 싸우기 쉬운 곳이면 더 좋겠지 요."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는 온설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많은 부상자들을 이끌고, 게다가 시간도 없는 촉박 한 상황에서 사방에서 압도적으로 조여오는 적을 맞아 정면으로 싸울 수있는 곳이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온설화를 중심으로 모였던 인원이 흩어지고 반 각 후, 그들이 멈춘 곳은 한쪽 숲이 가시덤불로 뒤덮인 곳이었다. 최소한 한쪽에서의 공격 만큼은 피할 수 있다고 여긴 화천명의 선택이고 온설화도 용인을 했 다. 자리를 잡은 그들은 환자들을 가시덤불 숲에 최대한 밀착시켜 눕히 고 그들의 앞을 에워싸듯 진을 쳤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사지를 조 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일어나 결전의 준비를 했다. 그래봤자 인원은 고작 서른 남짓. 누워 있는 환자는 십여 명에 이르렀 다. 적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은 참으로 고요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숨소리조차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 릴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다만 낯선 이들의 출현으로 놀란 새들이 비상하는 소리를 통해 적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느낄 뿐이 었다. 물론 단 한 사람은 예외였다. 애당초 싸움보다는 오직 환자에만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던 임여령 은 환자들 사이를 누비며 치료를 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진맥을 하고 침을 놓으며 급한 대로 급조한 약을 먹였다. 환부를 소독한 후 감쌀 천이 없어 치마를 찢어 감기도 하였다. 을지룡이 묵묵히 일손을 보탰 다. 푸드드득! 바로 앞의 숲이 흔들리며 새들이 날아올랐다. 막 침을 놓던 임여령 의 손이 멈칫했다. 비로소 적이 다가왔음을 느낀 것이다.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치료에 힘써. 너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을지룡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짚으며 말했다. 임여령의 맑은 눈동자가 을지룡을 응시했다. 비사걸을 따라 강호에 나왔고 원로들과 함께 패천궁에 들어온 그 녀. 구김살없는 성격으로 낯선 환경에서도 잘 적응했으나 아직은 어 린 소녀였다. 함께 말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할 친구가 그녀에겐 필요 했다. 그러나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원로들뿐. 게다가 배분 마저 까마득히 높아 누구 하나 쉽게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런 임여령에게 을지룡의 등장은 청량제나 마찬가지였다. 을지룡 은 그녀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고 신분이나 배분 따위에 신경을 쓰는 성격도 아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둘은 다른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다. "알았어.' 임여령의 고개가 살며시 끄덕여지고 잠깐 동안 멈칫했던 그녀의 손 길이 다시 바빠졌다. "와아아!" 사방에서 몰려든 적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 다. 거친 함성과 함께 달려드는 추격대. 얼핏 보아도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비혈대원들은 부상자들을 보호하라! 황산!" "예. 대주!" "왼쪽을 책임져라." "알겠습니다." 화천명의 명을 받은 황산은 몇 남지 않은 패천수호대원들 중 일부 를 데리고 을지룡이 서 있는 왼쪽으로 이동했다. "우측은 우리가 맡지." 냉악이 말했다. 화천명의 고개가 힘겨운 표정이 역력한 냉악과 노고 수들에게 향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전히 부상과 씨름을 하는 냉악 등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 지 못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리를 꺾어 정중하게 인사를 한 화천명이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 리곤 가장 많은 적들이, 그리고 기세 좋게 달려오는 중앙을 향해 움직 이기 시작했다. 가시덤불 숲과 부상자들을 배후에 두고 부채꼴 모양으로 수비 형태 를 펼친 패천궁의 무인들. 그들을 반드시 격살하겠다는 의지를 지니 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추격대. 공격은 허공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화살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슈슈슈슉! 퍼퍼퍽! 수십, 수백의 화살이 쏟아져 날아왔다. 화살은 멀쩡한 사람뿐만 아 니라 부상자들을 노리는 것들도 있었다. 패천궁의 무인들은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화살을 쳐냈다. 행여라 도 놓친 화살이 부상자들에게 날아갈까 두려워 가히 필사적으로 무기 를 놀렸다. 그럼에도 막는 사람에 비해 날아오는 화살이 너무 많았 다. 이곳서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컥!" "크악!" "두려워하지 마라! 정신들 차려!" 화천명이 목이 터져라 외쳐 대며 수하들을 독려했다. 날아들던 화살이 뚝 끊겼다. 그러나 화살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한 것. 본격적인 공격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쳐라!" 누군가의 입에서 웅후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추격대의 공격이 일제 히 시작되었다. 파파팍! 화천명의 검이 춤을 추었다. 정면을 노리고 덤빈 두 명의 사내가 어 찌 반응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들을 쓰러뜨림과 동시에 그는 혈우검법(血雨劍法)의 절초를 이용하여 좌우에서 달려드는 적의 공격 을 막고 역습을 가했다. "으악!" "크아아악!" 기세 좋게 화천명을 공격했던 사내 둘이 또다시 쓰러졌다. 단 세 번의 격돌로 네 명의 동료를 잃자 중앙을 공격하던 무인들이 멈칫거리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러자 조금 뒤에 처져 있던 노인, 악창 (岳滄)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멍청한 놈들! 뭣들 하는 것이냐!" 중앙 공격을 책임지고 있는 상관으로부터 호통이 떨어지자 뒷걸음질 치던 무인들이 다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를 탄 화천명의 검은 무섭도록 예리했다. 그의 검이 춤을 출 때마다 찢어 질 듯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추격대들의 목숨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게다가 화천명을 보호하듯 한데 뭉쳐서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패천수호 대의 활약도 대단한 것이었다. "쓸모없는 놈들!" 싸움이 시작되고 촌각도 지나지 않아 공격에 나선 선봉이 모두 쓰러 지자 악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공격해라! 모조리 쓸어버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단의 무리들이 화천명과 패천수호 대를 에워쌌다. 그들의 기세가 남다르자 화천명의 얼굴에 긴장의 빛 이 흘렀다. 조금 전 쓰러뜨린 이들과는 확실히 다른 뭔가를 느낀 것이 다. "이제야 제대로 된 놈들이 나섰군!" 호기롭게 외친 화천명이 발을 움직였다. 한 발짝 내밀어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파팍! 화천명의 검에서 검기가 쏟아졌다. 모든 적을 단숨에 베어버릴 듯 한 날카로움을 자랑하는 화려한 검기. 그러나 그의 공격에 적중을 당 한 사람은 고작 한 명에 불과했고 공격이 끝나기가 무섭게 예리한 반 격이 이어졌다. 챙! 옆구리를 파고드는 검을 막아낸 화천명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 있 었다. 그사이 등 쪽에서 세 개의 검이 접근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화천명은 왼발을 축으로 한 바퀴 회전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파스스스. 눈부신 검광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를 공격했던 세 개의 검이 힘없 이 튕겨져 나갔다. 그 틈을 노려 재빨리 몸을 빼 위기를 벗어났다. "컥!" 바로 옆에서 낯설지 않은 비명성이 들려왔다. 공격을 감당하지 못 한 패천수호대 대원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화천명의 얼굴이 순간적 으로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그곳으로 달려가 보거나 할 여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망할!' 수하의 죽음에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는 화천명의 눈에서 핏발이 속 았다. 한편, 황산과 함께 좌측을 책임지고 있는 을지룡도 한층 거세진 공 세 속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번쩍! 뭔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눈으로 쫓아가기 힘든 빠름. 결과는 참혹했다. 막 황산의 배후를 공격하던 이들이 힘없이 쓰러졌 다. 무심지검의 가공함에 비명성을 내뱉을 시간도 없이 쓰러진 그들의 얼굴엔 자신들이 누구에게 또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목숨이 끝장날 뻔했다는 것을 인식한 황산이 꿀꺽 침 을 삼키며 말했다. 바로 그때, 황산의 목을 향해 뭔가가 날아왔다. 손 바닥만 한 단검이었다. "꺼져랏!" 소맷자락을 휘둘러 날아오는 단검을 걷어낸 황산이 검을 휘둘렀다. 희뿌연 검기가 단검의 주인의 몸을 훑고 지나가고 잘린 목이 허공으 로 치솟았다. "타핫!" 몸을 도약한 황산이 허공으로 치솟은 머리를 그대로 걷어차차 몸을 잃은 머리가 그의 동료들에게 날아갔다. "음." 황산의 잔인함을 코앞에서 지켜본 을지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 나 곧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인정이란 사 치스러운 것. 황산의 그런 잔인한 행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몰려오던 적의 기세가 한층 수그러들지 않았는가. 게다가 생사가 교차하는 지 금 이 순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을지룡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검을 쥔 손에 한층 더 힘이 갔 다. 그런 그를 향해 앞뒤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제76장 약속(約束) 싸움이 시작된 지 이각이 흘렀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성들이 천지를 들썩 였다. "으아악!" "죽여랏!" "물러서지 마라! 공격해!"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패천궁의 무인들은 눈물겨운 투혼 을 보여줬다. 어느 한쪽의 우위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 도 뒤쪽에 물러서서 초조하게 주변을 살피던 온설화의 굳은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부채꼴 모양으로 펼친 방어진의 맨 우측. 냉 악을 비롯하여 노고수들이 싸우는 곳이었다. 목숨을 잃은 송백검 백준을 제외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원로들 은 냉악과 유불살 송찬뿐이었다. 치명적인 합공을 받아 양패구상한 곡 지통 구양숭과 경의비마 한가풍은 의식 불명이었고 목숨을 잃기 전 안 휘명에게 구원을 받은 응사웅은 그나마 상태가 호전되었으나 움직이기 엔 여전히 무리가 있었다. 문제는 냉악과 유불살의 부상 또한 크다는 것이었는데 그를 도와줄 사람은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 는 서너 명의 호법이 전부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냉악은 언제 부상을 당했냐는 듯 매서운 솜씨를 발 휘했다. 보보마다 힘이 있었고 휘두르는 도에도 힘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 게 혈류도(血流刀)라는 칭호를 얻게 해준 독문도법(獨門刀法) 호접무 도(胡蝶舞刀)를 펼쳤는데 평생 동안 하나의 도법만을 참오한 경지는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초식 하나하나에 생명력이 살아 꿈틀거 렸다. 한번 시전되면 반드시 적의 피를 보고 만다는 호법무도. 숨 쉴 틈 도 없이 몰아대는 연환 공격에 그를 공격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극심 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초반 기세 좋게 적을 쓰러뜨리던 냉악의 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 은 반 각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사성가량 회복되었던 내력은 금 방 바닥이 났고 잠시 아물었던 상처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자연 발걸 음이 늦어지고 휘두르는 도에서 강맹함과 예리함이 사라졌다. 이후엔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상황은 송찬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의 상대는 하필이면 살아남은 장로 중 한 명인 악소호(岳少虎)였 다. '망할 늙은이. 끈질기기도 하네.' 역을 검을 잡고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던 송찬의 이마에 땀이 송골 송골 맺혀 있었다. 전신을 나도질하듯 노골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살기에 숨 쉬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반드시 베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악소호의 자세 를 보며 송찬도 결연하게 검을 움켜쥐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목이 날아가겠군.' 송찬은 악소호를 상대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 다. 피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또 피한다 해도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마주 보기를 얼마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을 떼었다. 한 발, 한 발.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 악소호의 신형이 움 직였다. "타핫!" 혼신의 힘을 다해 도약하는 악소호의 몸은 먹잇감을 노리는 대호의 움직임을 연상케 했다. 금방이라도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은 압박감 을 느끼며 송찬은 검을 뻗었다. "크으으으!" "커흑!"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비명성을 내뱉었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안쓰러웠다. 송찬의 검은 악소호의 가슴에 정확하게 박혀 있었다. 검은 악소호 의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하며 그에게 죽음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자 신의 목숨을 내주는 대가로 송찬의 목숨을 원했다. 송찬의 검이 가슴을 파고들자 피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한 악소호는 목숨을 지키는 대신 오히려 공세를 취했고 그 결과 송찬의 몸에 치명 적인 부상을 안길 수 있었다. 비록 먼저 숨이 끊어진 것은 심장을 관 통당한 그였으나 옆구리와 복부에 걸쳐 큰 부상을 당한 송찬 역시 다 시는 회복하기 힘든 지겨이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적 을 죽이는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이거야 원." 서 있을 힘도 없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송찬은 부릅뜬 눈을 감지 도 못하고 숨이 끊어진 악소호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몸만 멀쩡했 다면 감히 덤비지도 못했을, 눈에 차지도 않는 상대와 양패구상을 했 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그를 더욱더 미치게 만든 것은 그에게 살심을 품으며 달려드는 사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너무 도 허점이 많아 어떻게 손을 쓰든 한주먹 거리도 되지 않을 놈이었건 만 문제는 검을 쥘 최소한의 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허허, 환장하겠군." 밤의 황제 유불살 송찬이 남긴 최후의 말이었다. 냉악의 움직임이 무뎌지고 송찬이 목숨을 잃으면서 방어막은 한순 간에 무너졌다. 화천명의 명을 받은 패천수호대 몇 명이 지원을 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한번 기세를 탄 추격대의 공격을 감당하기엔 역부족 이었다. 오히려 인원을 줄이는 과정에서 간신히 균형을 이루고 있던 중앙 쪽마저도 급격하게 기울었다. "막아랏! 반드시 막아야 한다!" 화천명이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소리쳤다. 전신에 크고 작은 부상 을 당한 그는 이미 예전의 모습을 잃고 혈인(血人)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우측 수비벽을 무너뜨리고 밀려드는 적의 공세는 거침이 없었 다. "으아악!" "크악!"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투혼을 보여준 패천수호대원들이 처절한 비명 성과 함께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중 삼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하며 가하는 협공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이리되는 것인가.' 한번 무너지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형세를 보며 온설화는 절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 초라 하게 느껴졌다. '하늘이... 하늘이 우리를 버렸단 말인가? 정녕....'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죽어랏!" 그녀를 향해 한 사내가 칼을 휘둘렀다. 피할 능력도 없었고 애써 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온설화는 두 눈을 지그시 감는 것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한데 외마 디 비명과 함께 그녀를 노리던 사내의 신형이 급격하게 무너졌다. 온 설화의 위기를 보고 달려온 을지룡이 손을 쓴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것... 같군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온설화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음에도 그녀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이미 가능성이 없는 싸움이 아니던가. 그녀는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려 했 다. 죽음의 공포를 계속 맛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 이었다. 온설화가 처연한 시선으로 을지룡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흩어져 산발을 하고 옷은 땀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심한 상처들이 몸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음이 보였다. 그런 몸을 이끌고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차마 내색할 수 없었던 온설화가 고개를 돌렸다. 순 간, 한눈에 들어오는 전장. '아!' 아무도 포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몇 배가 넘는 적에게 포위당한 절 망적인 상황에서, 생이란 도저히 보이지 않는 암울함 속에서도 살아남 으려고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부상당한 동료를 위 해, 그리고 패천궁을 위해 그들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순간,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가!' 명색이 패천궁의 군사였다. 비록 무공을 지닌 것은 아니나 누구보다 도 수하들을 독려하고 이끌어야 했다. 한데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 빨 리 체념하고 포기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조금 전의 눈물이 체념의 눈물이었다면 지금의 눈물은 아무런 노력 도 없이 순순히 죽음을 맞이하려 했던 한심스런 행동에 대한 후회의 눈물이었다. 온설화는 자신의 발 아래에 떨어져 있는, 조금 전 자신을 죽이기 위 해 달려들었던 사내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비록 한 줌의 무공도 지니 지 못한 몸이었지만 패천궁의 군사로서 수하들은 물론이고 적에게도 절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의지가 투영된 듯 기세만큼은 여느 무인 못지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 다. 언뜻 보기에도 삼사십은 되어 보이는 인원. 동방성을 쓰러뜨리고 달려온 악선하와 그의 수하들이었다. 순간, 양측 진영에서 희비가 엇 갈렸다. 중천의 무인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 던 패천궁의 무인들은 망연자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것도 잠시. 명령이 떨어졌는지 그들은 곧바로 싸움 에 끼어들었다. 그렇잖아도 압도적으로 진행되던 싸움에 그들마저 가 세하자 이제는 압도적이라는 말 자체가 우스운 것이 되어버렸다. 일방 적인 사냥, 혹은 유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중천의 무인들은 여유 를 가지고 매섭게 몰아쳤다. "흩어지지 마라! 따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피를 토하듯 토해내는 화천명의 목소리는 이미 쇳소리로 변한 지 오래였다. "이쪽, 이쪽으로 모여라!" 화천명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자 수하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서로의 등을 맞대며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을 상대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인 원이 급격하게 늘어만 갔다. "힘들겠습니다!" 온설화를 공격하는 사내를 쓰러뜨리고 또다시 그녀의 목숨을 구한 을지룡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소리쳤다. "령아를 데리고 피하십시오!" "그럴 수는 없어요." 온설화는 당치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 볼 테니 그 틈을 이용하여...." "어차피 힘들어요. 무공도 변변하지 못한 우리가 도망쳐 봐야 얼마 나 가겠어요." "하지만......" "차라리 싸우다 죽겠어요. 임 동생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 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임여령을 살피는 온설화. 을지룡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아!" "세상에.....!" 뭔가를 본 것일까? 임여령을 바라보던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도 없이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임여령은 여전히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창칼이 번뜩이고 비명성 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환자들의 상처를 돌보고 침착하게 침을 놓았 다. 언제 사신이 들이닥칠지 모름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녀의 모습은 대단함과 비범함을 넘어 경건하기까지 했다. "대단하군요." 온설화는 그녀에게 진정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아무리 의원이라지만." "동생의 노력이 헛되지 말아야 할 텐데...." "잘되겠... 위험해!" 놀란 눈으로 임여령을 바라보던 을지룡이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 다. 몇몇 무인들이 무방비 상태인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본 것 이다. 그들의 공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여령은 환자를 향해 몸을 숙 인 처음의 자세 그대로 미동이 없었다. 챙! 을지룡은 다급한 마음에 검을 뻗어 임여령에게 향하는 공격을 막았 다. 엉겁결에 뻗은 상황이라 그런지 손아귀가 찌릿찌릿했다. 게다가 그녀를 구하는 데 정신을 쏟는 바람에 몸은 완벽하게 무방비였다. 임여령을 향해 가던 공격이 곧바로 그에게 쏟아졌다. 재빠릴 검을 회수하여 방어를 하였으나 늦은 감이 있었다. 더구나 공격을 감행하 는 사람은 악선하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한선도(漢鮮蹈)였다. 그 는 결코 아무렇게나 상대해도 될 수준의 인무리 아니었다. 그의 공격 은 참으로 신랄했다. 결국 검날 하나가 을지룡의 허벅지를 훑고 지나 갔다. "크으." 을지룡의 몸이 휘청거렸다. '젠장!'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아무래도 심줄을 다친 것 같았 다. 그러나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여전히 위기는 계속되었고 임여령 의 목숨 또한 위험했기 때문이다. "타핫!" 을지룡은 한쪽 발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적을 향해 검을 휘둘 렀다. 내력이 고갈되고 몸에 부상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하여 현저히 위력이 떨어지기는 했어도 무심지검의 위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 다. 임여령을 공격했던 사내들 중 셋이 변변히 대항도 하지 못하고 모 조리 고혼이 되어 쓰러져 갔다. "안 돼!" 온설화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을지룡의 눈을 피해 임여령에 게 접근하는 사내를 본 것이다. 그녀의 외침을 듣자마자 몸을 튼 을지 룡이 사내를 향해 검을 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검은 섬전과 같이 날 아가 사내의 가슴을 관통하더니 크게 회전을 하며 다시 돌아왔다. 바로 그 순간, 을지룡과 쓰러지는 수하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한선 도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린 나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무공 을 보여주던 을지룡을 어찌 공격해야 할지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선도는 곧 수하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것의 의미를 파악한 수하 들은 이후 임여령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필사적인 공격과 방어. 임여령과 부상자들을 지키기 위한 을지룡의 투혼은 눈물겨운 것이 었다. 벌써 그의 손에 쓰러진 인원만 어림잡아 스물에 가까웠다. 하지 만 을지룡도 이젠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거친 숨이 턱까지 차 올랐 고 무수히 많은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특히 조금 전 한선도에게 당 한 허벅지의 부상이 치명적이었다. 심줄을 다치는 바람에 움직임이 느 려졌고 그만큼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지독한 놈... 멈추지 마라! 공격, 공격해!" 수하들과 함께 을지룡을 몰아붙이던 한선도가 괴성에 가까운 소리 를 질러대며 검을 휘둘렀다. 여유있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고 애꿎은 수하들만 그의 호통에 죽어나가고 있었다. "아아∼" 언제부터인가 멍청히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임여령의 입에서 안 타까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며칠 동안 무리를 한 것인지 아니면 눈 앞까지 들이닥친 위협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 다. 을지룡이 적의 공격에 휘청거릴 때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꼭 쥔 주먹엔 절로 힘이 들어갔다. "크윽!" 을지룡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예리한 검 하나가 그의 몸 을 할퀴고 지나간 것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선도의 신랄한 공격이 이어졌다. 을지룡에게 많은 부상을 당했는지 전신이 피투성이 가 된 그는 아게 받칠 대로 받쳐 있었다. 한선도의 검을 비롯하여 동시에 다섯 개의 검이 각기 다른 방향에 서 을지룡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검에 의해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던 을지룡은 적의 공격에 그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꽈꽈꽝!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차마 볼 수 없었기에 고개를 돌리며 두 눈을 감고 말았던 임여령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아!" 그녀의 눈에 한선도를 비롯하여 을지룡을 공격했던 이들이 핏덩이 가 되어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나 그보다 더욱 명확하게 보인 것은 을지룡을 피해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한다는 것. 얼굴은 보 이지 않았지만 잘 벼린 검날은 너무도 뚜렷하게 눈 속에 각인되어 들 어왔다. 애당초 할 줄 아는 것이라고 진맥을 하고 침을 놓는 것이 전 부였던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위기였다. 피할 능력도, 방법도 그녀 에게 없었다. 임여령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온설 화가 담담히 죽음을 기다렸던 조금 전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퍽! "커억!" 괴이한 격타음과 이어지는 비명성. 죽음을 눈앞에 두었건만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비명성도 자신 의 것이 아니었다.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임여령이 조심스럽게 눈 을 떴다. 그녀의 바로 앞에 을지룡이 있었다. "괜찮아?" 영문을 모르기에 임여령은 그저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놀란 그녀를 살며시 안으며 을지룡이 말했다. "내가 그랬지.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너는 내가 지켜준다고." 을지룡이 했던 말을 잠시 떠올렸던 임여령. 한데 뭔가를 본 것일 까?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오... 오빠....." "걱정하지 마......" "가, 가만있어 봐!" 을지룡의 품에서 황급히 벗어난 임여령은 멍한 눈으로 그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과 처절한 싸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그의 의 복은 찢어질 대로 찢어졌고 피로 물들어 원래의 색을 찾을 수가 없었 다. 그런 을지룡의 가슴에 삐죽이 솟은 것은 분명히 검이었다. 툭툭. 검날을 타고 점점이 떨어져 내린 핏방울의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 릴 수가 없었다.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아." 절대로 괜찮을 리가 없었다.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다. 임여령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그리고 심장을 관통하 고 삐져 나온 검을 만졌다. 차갑다 못해 한기가 느껴졌다. "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뗀 임여령은 전신을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이 정... 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크 으." 피식 웃으며 임여령을 달래는 을지룡. 한데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 신의 몸이 어느새 천천히 기울어져 무릎을 꿇고 몸을 임여령에게 맡기 고 있다는 것을. "젠장.. 그런데 꽤.. 나 아프다. 아직은 버텨야 하는데......" 애써 웃음 짓는 것이 더 가슴 아팠다. "바보! 입.. 좀 다물고 있어!" 임여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슬쩍 쳐다만 보는 것으로도 그 사람이 어디가 아프고 어떤 병을 앓 고 있는지 또 어찌 고쳐야 하는지 한눈에 알아보는 임여령이 아니던 가.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을지룡의 상세는 이미 가능성이 없었다. 한 줌의 숨만 붙어 있다면 못 살릴 사람이 없다는 생사괴의의 능력을 한 몸에 이어받았어도, 초혼잠능대법(招魂潛能大法)이라는 최고의 비 술을 지니고 있어도 신이 아닌 이상 심장이 완벽하게 파괴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까지는 지니지 못했다. "을지세가의.. 사람은 반드시 약속.. 은 지킨다. 꼭.. 지킨다." "바보!" "난.. 괜찮다니까." "멍청이!" "약속.. 은 반드시......" 을지룡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임여령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리고 어찌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겠는 가? "미안.. 하다." 임여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을지룡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싸 웠는지 임여령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엔 자신 때문에 목숨까 지도 잃는 상황까지 오지 않았는가. 임여령이 을지룡의 얼굴을 품에 안았다. "그런 말 하지 마. 오빤 최선을 다했어." "......" 이미 말할 기운도 없는 것인지 을지룡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 다. "오빤 정말 최선을 다했어. 정말로....." 그녀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볼을 타고 을지룡의 얼굴로 떨어져 내 렸다. 잠시 감겼던 을지룡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대비산을 울리는 장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우! 겹치고 겹쳐 가히 폭풍 같은 기세로 퍼져 나가는 장소성에 초목(草 木)이 떨었다. 산이 떨었다. 하늘마저 두려워하는 듯했다. 치열하게 벌어지던, 아니, 이제는 단순한 유희로 점철되던 싸움이 일시에 멎었다. 그리곤 다들 두려운 눈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하나의 점으 로 시작해서 금방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가는 그를. '누군가? 도대체 누가 이런 기운을!' 이제 그만 싸움을 끝내라는 신호를 보내려 했던 악선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엄청난 고수다!' 아직 제대로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건만 전신을 울리는 이 압도적 인 기운은 뭐란 말인가! '아군인가? 아니면... 설마 적?'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껏 이만한 기운을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 었다. 적을 맞아 싸우는 천주에게도 비슷한 기운을 느끼기는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것이 더욱 두려웠다. 천주에게서도 느끼 지 못했던 기운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으 니까. 그런데 그의 수하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라지망이 펼쳐진 지금, 패천궁의 잔당을 구하러 오는 적은 있을 수가 없을 터. 그들은 장소성을 내뱉음 달려오는 고수가 분명 자신들 의 상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장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 버지...." 을지룡이 조용히 말했다. 한데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인지 임여 령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힘겹게 손을 뻗은 을지룡이 그녀의 손 을 잡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는 임여령. "이.. 제 됐다. 아버.. 지가 오셨으니까 됐.. 어." "뭐라고요?" 그녀가 들은 것은 '됐다'라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을지룡은 더 이 상 망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임여령의 얼굴을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 을 뿐이었다. "오, 오빠!" 당황한 임여령이 을지룡을 흔들었다. "을지 공자!" 공격이 멈춘 틈을 타 곁으로 달려온 온설화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을지룡은 장소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이제 완벽한 사람의 형상을 하 고 달려오는 을지휘소를 향해 마지막으로 시선을 두었다. 이제 다시 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느샌가 그의 눈에 뿌연 습막이 차 올랐 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부디 할머니를, 령아를, 그리고 이분들을 구 해 주세요.' 을지룡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순간, 그의 눈에 가족들의 모습이 스 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웃고 있는 모습들. 오직 한 사람만은 예외였 다. '죄송.. 합니다.. 어머.. 니...' 집을 떠나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 의 얼굴을 생각하며 을지룡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 * * "워워." 일행을 선도하고 있던 곽검명이 말을 세웠다. 오랫동안 달려왔는지 말은 연신 투레질을 하며 탁한 숨을 내뱉었 다. 몇몇 말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더 이상은 무리야. 말을 바꿔야 할 것 같네." 곽검명이 말했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재빨리 대답한 정소는 남궁세가의 몇몇 젊은이들을 대동하고 사라 졌다. "후∼ 이래서야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세 번째인데요." 단견이 말안장에 매달아놓은 술병을 집어 단숨에 들이킨 후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나마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니던가. 이렇게라도 하 지 않으면 하세월이야." "그래도 너무 늦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놈들에게 당하기라도 하 면." 생각하기도 싫은지 고개를 흔든 단견이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믿어야지. 아직은 잘 버티고 있다지 않은가? 철혈마단의 기세가 대 단하기는 해도 제갈세가의 인재들이 펼쳐 놓은 진세를 완벽하게 무력 화시키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걸세. 그전까지만 도착하면 되겠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소?" 봉학경이 건네준 물로 목을 축인 오상이 물었다. "글쎄요, 한번 해봐야지요." "이러다가 말들이 지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치겠소." 뭔가가 못마땅한지 오상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중천의 본거지인 산동악가를 떠나 은밀히 이동하 다가 복우산의 위기를 전해 듣고 길을 재촉하기를 이틀, 휴식이라 봐 야 그저 잠깐에 불과했다. 강행군을 견디다 못한 말들이 쓰러지기를 여러 번. 그들은 그때마다 말을 갈아타며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 만 말을 타고 간다고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다들 체력적 으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서 도와야지요. 지 금은 그저 수수방관만 하고 있지만 자칫 북천이라도 끼어들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벌써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자리를 잡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앉은 이성진이 말했다. "누가요? 북천이 말입니까?" 곽검명의 질문을 받은 이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가를 치러 갈 때는 은밀했을지 몰라도 이제 우리의 행적은 적에 게 노출되었네. 비록 철혈마단과 힘을 합쳐 공격을 하지는 않지만 우 리의 앞길을 막지 말라는 법은 없지." "흠." 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북천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 바로 자신들을 노리기 때문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뭐, 그래도 할 수 없지. 막는다면 부수고 가는 수밖에." 자신이 던진 말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엔 관심이 없다는 듯 팔베 개를 하고 눕는 이성진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쯧쯧, 아무튼 대단한 분이라니까." 이성진의 대범함에 혀를 찬 단견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발걸음 을 움직였다. 단견은 일행과 다소 동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남 궁세가, 그리고 그곳에서도 다시 떨어져 앉은 을지소문에게 다가갔다. "한잔하시렵니까?" 을지소문은 말 대신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까?" 단견이 술병을 입에 대는 을지소문을 보며 물었다. "뭐가 말인가?" "뭐긴요. 정말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느냔 말입니다." "그 얘기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아는데." 술병을 건네는 을지소문의 음성은 다소 퉁명스러웠다. "답답해서 말입니다." "잘... 되겠지." "지금이라도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아니면 녀석이라도 보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하던 단견은 싸늘해지는 시선을 의식 하며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곳까지는 칠팔 일은 걸 리네. 그 시간이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시간이야. 도주에 성공했든 아니면...." 뒷말은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만약 그때까지 무사하다면 가보지 않 은 것이 천추의 한이 될 수도 있을 터." 그러자 답답해진 마음에도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을지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할아버님. 앞일은 어찌 될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소손 이 지금이라도 달려가겠습니다." "그만두어라. 마음은 알고 있으나 쓸데없는 짓이야." "후회를 남기느니 차라리 쓸데없는 짓을 하겠습니다." 기왕 말이 나온 것, 을지호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어 조로 말했다. 그런 을지호를 보며 더 이상 윽박지르는 것으론 그의 결 심을 깨뜨릴 수가 없다고 판단한 을지소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이 지 금 이렇게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마저도 힘들구나. 네 할미는 물론이고 룡아의 생사도 불분명하고." "그래서 더욱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패천궁이 무너지면 다음은 어디더냐? 놈들은 기세를 몰아 정도맹을 치려고 할 것이다. 패천궁을 무너뜨린 놈들에게 정도맹이 버 틸 수 있으리라 보느냐? 아니, 정도맹은 상관없다. 그러나 문제는 패 천궁이 무너진 상황에서 놈들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네 할미 와 동생의 복수를 해줄 수 있는 곳은 오직 정도맹뿐이란 말이다. 우리 가 지닌 힘만으론 불가능하니까." "....." 을지호는 비로소 조부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복수 할 힘을 갖기 위해 정도맹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수 긍할 수 없었다. 조부의 말 속엔 환야와 을지룡의 죽음을 기정사실처 럼 여기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라. 너와 내가 아니어도 그들을 구 하러 갈 사람은 따로 있지 않더냐?" "예?" "네 아비를 잊은 것이냐? 모르긴 몰라도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게 야." "하지만 형님, 휘소 혼자서 되겠습니까?" 단견이 물었다. "힘들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아이가 실패한다면 나나 이 녀석이 가도 어차피 실패할 것일세. 호야." "예, 할아버님." "네 아비는 강한 사람이다. 믿어보자꾸나." * * * 엄청난 장소성을 터뜨리며 가히 섬전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장내에 도착한 을지휘소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 속 에서도 단박에 찾아낼 수 있는 것이 핏줄이라 했던가? 그는 임여령의 품에 안겨 있는 을지룡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룡아....." 자신이 도착한 것을 알았을 터인데도 죽은 듯이 누워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서, 설마!'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너무도 끔찍하여 감히 상상 하기도 힘든 일.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을지 룡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 정확할 것 이다. 을지휘소는 길을 막고 누구냐고 정체를 묻는 사내를 단 한 번의 손 짓으로 황천길로 보내 버렸고 그의 무지막지한 실력에 악선하조차 그 를 막으라고 명령하지 못했다. 무수히 많은 시신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을지룡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제발!!' 고작 십여 장에 불과했건만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힘겹게 발걸음을 떼어 을지룡에게 다가가는 을지휘소의 눈은 벌써 부터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룡아....." 마침내 을지룡에게 도착한 을지휘소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 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와락 눈물이 솟구쳤다. "이 녀석아.. 아비다, 아비가 왔느니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답을 해보거라. 왜, 왜 아무런 대꾸도 없는 것이냐?"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웃을 듯한 을지룡의 얼굴을 보자 미칠 것만 같았다. "아비가.. 왔다지 않느냐? 어서 말을 해보거라. 어서 말을...." 그러나 부친이 왔음을 알고 편안히 눈을 감은 을지룡은 아무런 말 도 없었다. 그저 안도의 미소만이 입가에 맴돌 뿐이었다. "인석.. 아! 이 녀석.. 룡아! 룡아!" 을지룡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는 을지휘소의 외침은 어느덧 울부 짖음으로 변해 있었다. "자식이.. 아비보다 먼저 가는 법은 없느니라. 일어나거라. 어서 일 어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 은 손가락 없다지만 을지휘소에겐 어릴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 런 구석이 있었던, 게다가 두 분 증조부님이 끼고 돌았던 을지호와는 달리 천성적으로 어리광을 잘 피우는 막내 을지룡에 대한 사랑이 남달 랐다. 그런 을지룡이 죽은 것이었다. 그것도 머나먼 이국 땅에서. "룡.. 아...." 어찌나 격려하게 떠는지 이가 딱딱 부딪쳤다. "어째서.. 어째서 어린 네가 죽어야 한단 말이더냐? 어째서...." 가지 말라는 어미의 말에도 불구하고 세상 구경을 해보겠다면 따라 나선 아들을 어째서 말리지 않았는지 밀려오는 후회감에 가슴이 찢어 질 듯 아팠다. 격정을 참지 못한 을지휘소가 을지룡의 얼굴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눈물을 흘렸다. 한데 바로 그때, 을지룡의 등을 뚫고 심장을 관통하 여 앞가슴까지 삐져 나온 검날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 이더냐?" 다섯 치나 튀어나온 검을 응시하는 을지휘소의 눈에선 한광이 뿜어 져 나왔다. 검날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팅! 을지룡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검은 너무도 힘없이 밀려 나가 땅바닥 에 떨어졌다. 순간, 검날이 막고 있던 거센 핏줄기가 뿜어져 나와 그 의 얼굴을 덮쳤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엄청난 양의 피가 얼 굴을 뒤덮고 옷을 붉게 물들였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피가.. 이렇게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건만 너는 어찌하여...." 피가 따뜻하다는 것은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 미했다. 그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 조금만,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늦 지 않았을지도 몰랐을 터였다. "내가, 내가 너를 죽였구나. 이 못난 애비가....." 을지휘소가 또다시 을지룡을 가슴에 품고 오열을 했다. 어찌나 슬프 게 우는지 그의 주변에 몰려든 패천궁의 무인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 다. 보다 못한 온설화가 을지휘소를 말렸다. "진정.. 하세요." 그러나 을지휘소의 울부짖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열려던 온설화는 조용히 손을 잡고 고개를 흔드는 냉악으로 인해 입을 다물 고 말았다. 또다시 얼마가 흘렀을까? 천천히 고개를 든 을지휘소가 온설화를 바 라보았다. "네가.. 생사괴의 어르신의 후예더냐?" "아닙니다. 생사괴의 어르신의 후예는 제가 아니라..." 온설화의 시신이 바로 옆에 있는 임여령에게 향했다. 을지룡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임여령의 슬픈 눈에선 뜨거운 눈물 이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령아로구나." 한데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 그녀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 때문이에요." "동생!" 깜짝 놀란 온설화가 임여령의 팔목을 잡았다. 하지만 임여령의 입 을 막을 수는 없었다. "룡 오빠는 나 때문에 죽은 거예요. 나와 한 쓸데없는 약속 때문 에....." "그게 아니잖아." "나 때문에 죽은 거예요. 나 때문에...." "약.. 속? 룡이가 네게 무슨 약속을 했지?" 묻는 을지휘소의 음성이 그렇게 처연할 수가 없었다. 임여령은 여전 히 몽롱한 정신으로 말을 이었다. "나를 지켜분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준다고.. 을지세가 의 사람들은 꼭 약속을 지킨다고...." 목이 메는지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그 약속을 지키려다 그만.. 나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는 데..." 을지휘소의 입에서 긴 탄식성이 흘러나왔다. "아니다. 그런 소리 말거라.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그저 신념 대로 최선을 다한 행동이었으니.. 또한 동료들을 두고 도망칠 녀석이 아니니까..." 나름대로 임여령을 위로하던 을지휘소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 다. 부상에 신음하는 환자들과 추격대를 막다가 지칠 대로 지친 화천 명의 등 뒤로 정신을 잃고 있는 환야를 알아본 것이었다. "어머니..." "동생의 의술이 뛰어나 아직까지는 괜찮으십니다. 다만 치료가 급한 데 저들 때문에...." 온설화가 재빨리 환야의 상태를 설명했다. 을지휘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임여령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룡아의 말대로 을지세가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킨 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을지휘소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을지룡의 몸 을 관통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검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녀석이 지키지 못한 약속.. 대신 내가 지켜주마." 결정을 내렸는가? 휘류류류류! 그의 몸을 중심으로 매서운 회오리가 일었다. 눈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천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선으로 늘 어뜨린 검에서 일렁이는 기운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을지휘소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크아악!"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내 둘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화살이라 도 맞은 듯 그들 가슴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따. 한데 심장이 뚫 렸음에도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피가 흐를 틈도 주지 않는 실로 가공할 쾌검이었다. 냉막하게 그들을 응시한 을지휘소의 신형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 리곤 먹이를 노리는 수리처럼 팔을 펼치더니 검을 휘둘렀다. "마, 막아랏!"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부질없는 외침 일 뿐이었다. 파파팍! 무수한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항도 하 지 못한 채 그대로 목숨을 잃는 이도 있었고 나름대로 무기를 들어 막 고자 노력을 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기에는 을지휘소가 뿌린 검기엔 너무나도 막강한 내력이 실려 있었다. "으아악!" "커흑!" 이곳저곳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검기에 부딪친 무기는 단 하나도 남김없이 부러져 나가며 주인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세, 세상에!" "엄청나다!" 화천명을 비롯하여 패천궁의 무인들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 다. 지금껏 많은 무인들을 보아왔고 또 천하를 쟁패할 만한 고수들을 보아왔지만 지금처럼 무지막지한 실력을 지닌 사람은 본 적이 없었 다. 을지세가의 무공을 익히 알고 있던 냉악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 들 정도로 을지휘소가 보여준 무위는 압권이었다. 아군이 이럴진대 적은 어떻겠는가?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을지휘소와 그의 손에 추풍낙엽(秋風落葉) 처럼 쓰러지는 수하들을 살피는 악선하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눈앞 에 닥친 위기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사이 에도 을지휘소의 검은 멈추지 않았따. 파스스슷! 꽈꽈꽈꽝!!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절대삼검의 최후 초식 무극지검(無極之劍)은 추격대를 쓸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검기 의 영향력에 노출된 것은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날아가고 땅거죽이 쩍쩍 갈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멀쩡 한 이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정면에서 공격을 받은 이들은 시신 조차 남기지 못했다. 세 번 연속 무극지검을 펼쳐 사십 명도 넘는 인원을 격살한 을지휘 소가 검을 멈추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이미 아들의 죽음으로 이 성을 잃다시피 한 그는 더 많은 이들의 피를, 목숨을 원했다. "우오오오오!"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을지휘소의 괴성이 대비산에 울려 퍼 지고 한껏 진기가 실린 그의 노호성은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충격 을 주었다. 노호성에 실린 진기를 감당하지 못한 임여령과 온설화가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고통의 빛이 역력했 다. 포효성을 멈춘 을지휘소가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제77장 격전(激戰) 을지룡의 피를 전신에 뒤집어쓴 을지휘소의 모습은 가히 야차(夜叉) 와도 같았다. 그의 목표가 된 이들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도, 도망가라!" "사, 살려줘!" 겁에 질린 추격대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어찌 나 급했는지 들고 있는 무기마저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도주하는 상황 이었다. 그토록 기세를 높였던 추격대가 한순간에 오합지졸로 변한 것 이었다. 이를 보는 악선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놈!" 악선하가 가장 먼저 도주를 시작한 사내의 목을 베며 소리쳤다. "뭣들 하는 짓이냐! 싸워라! 싸우란 말이다!" 적이 강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 역시 일순간에 압도당할 만큼 엄청난 무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들이 누구던가? 최강의 세력 을 자랑하던 패천궁을 쓰러뜨린 중천의 용자(勇者)들이 아니던가! 적 이 아무리 강해도 등을 보여선 안 된다. 힘이 부족해서 밀린다면 어 쩔 수 없지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주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도망가지 마라! 내가 앞장서겠다!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악선하의 명령은 아무 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명예니, 충성심이니, 전의니 하는 것은 이미 그들 뇌리에 없었다. 그들 머리 속엔 오직 싸움면 죽는다는 두려 움과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으아악!" "살려줘!" 아귀다툼이 따로 없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동료를 잡아 쓰러뜨리고 쓰러진 동료를 밟고 지나가게 만 들었다. 몇몇 이들은 방향을 잃고 어디로 도주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 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 어디에도 무림을 질타하고 패천궁을 무너뜨 린 기개가 보이지 않았다. "허허, 허허허!" 우왕좌왕,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들개마냥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수 하들을 보며 악선하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또다시 을지휘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파팍! 희뿌연 검기가 사방에 뿌려지고 처참한 비명이 대비산에 울려 퍼졌 다. "으아아악!" "사, 사람 살려!" 저항이란 있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싸움이 되지 않는 상황, 오직 일방적인 도살만이 있을 뿐 이었다. 미처 달아나지 못했던 이들이 사지가 찢겨 죽어가고 도주에 성공하 는가 싶었던 이들 역시 재앙을 피하지는 못했다. 출행랑이라는 천고 의 신법을 이용하며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하는 을지휘소의 손 속을 벗어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으악!" "케엑!"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명 소리. 을지휘소는 손속에 조금의 인정도 두지 않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 그가 스쳐 지나간 곳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괴물 같은 놈!" 보다 못한 악선하가 검을 빼 들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를 수행하 는 수하들이 뒤따랐는데 그 수만 해도 삼십에 가까웠다. 바로 그때, 뒤늦게 도착한 혈영대원들이 싸움에 끼어들기 시작했 다. 악선하를 따르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바꿔 그들을 상대해 야만 했다. "죽어랏!" 혼신의 힘을 다한 악선하의 공격이 을지휘소에게 향했다. 칠십 평생 갈고닦은 무공을 단 한 번에 쏟아 붓겠다는 강렬한 의지 를 담은 일격이었다. 그 힘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미친 듯 이 움직이던 을지휘소마저 머칫거릴 정도로 강맹한 힘이 담긴 공격. 검강이었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공격을 바라보는 을지휘소의 안색이 살짝 굳 어졌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숨을 고르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파스스슷! 대기를 가르며 밀려오는 검강. 한데 악선하의 공격이 코앞에 이르렀는데도 을지휘소는 움직이지 않 았다. 공격을 했던 악선하가 오히려 의구심을 느낄 정도로 무덤덤한 눈빛 을 하고 있던 을지휘소가 움직인 것은 악선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 질 때였다. 을지휘소의 어깨가 잠시 들썩였다. 그게 다였다. 축 늘어졌던 검이 잠시 잠깐 앞으로 쏘아져 나간 듯 보였으나 언제 움직였냐는 듯 원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악선하 의 표정이 묘했다. 뭔가에 놀란 듯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 한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토록 강맹하게 밀려들던 검강이 씻은 듯 사라져 있다는 것이고 악선하의 몸이 점점 앞으로 기울어진다는 것 이었다. "이걸.. 믿어야 한단.. 말인가?" 담장이 무너지듯 반 토막이 난 검을 떨어뜨리며 쓰러지는 악선하는 조금 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필생이 공력으로 만든 검강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러 울 만큼 위력적이었다. 적도 어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검을 뺐 을 정도로 훌륭한 공격이 아니던가. 한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인 정할 수도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그저 거무튀튀한 철 검이, 검강을, 다른 것도 아닌 검강을 베어버리고 자신의 심장마저 가 른 것이다. 실력이 있다면 막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발출한 검강을 부수고 더 욱 강한 공격으로 반격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수긍할 수 있었 다. 분하지만 약자가 강자에게 쓰러지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니까. 하지만 금성철벽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검강이 무 잘리듯 잘리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놀라기는 을지휘소의 활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패천궁의 무인 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어지하여 검강을 벨.. 수 있단 말인가?" 화천명은 자신이 본 것이 틀린 것은 아닌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 었다.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을지휘소의 움직임 자체를 알아챈 사람도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을지소문과 대결을 해봤던, 을지세가의 무공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냉악만큼은 달랐다.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정확 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쾌검이다." 화천명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쾌검.. 말입니까?" "그렇다. 무심.. 지검이던가?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그 옛날 가히 섬전과도 같은 빠름으로 우리들을 무던히도 괴롭혔었지." "아무리 빨라도 그렇지 어찌 검강이 베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 단순하게 생각해라. 유능제강(柔能制剛) 이라.. 강(强)을 제압하는 것이 유(柔)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쾌(快) 가 강과 유 모두를 제압할 수도 있음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으로 보았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지만 심정적으로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사이 싸움은 거의 끝나고 있었다. 악선하가 일초식도 감당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자 그렇잖아도 전의 를 상실하고 있던 추격대들은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하고 일제히 도주 를 시작했다. 을지휘소는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다. '룡아...' 복수를 하였지만 조금도 개운치가 않았다. 오히려 가슴만 더 아려왔 다. 툭. 을지휘소가 검을 던졌다. 그리곤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싸움은 끝 났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패천궁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피눈물 을 흘렸던 혈영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도주를 감행했던 추격대 원들을 쫓아가 모조리 목숨을 거둔 후에야 일방적인 학살극을 멈추었 다. 애당초 궁에서 포로로 잡힌 이들을 제외하고 패천궁에서 살아남은 인원은 부상자들을 포함하여 고작 열입곱 명. 반대로 그들을 쫓아 대 비산까지 달려왔던 중천의 추격대는 모조리 몰살을 하였다. 근 이틀간 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됐던 추격전은 많은 이들에게 잔인한 생채기를 남긴 채 그렇게 끝을 고했다. * * * "뚫었느냐?" "뚫었습니다." 요증의 대꾸에 마시던 술잔을 천천히 내린 철포산이 몸을 일으켰다. "애썼다." 요증은 황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능하여...." "아니다. 명색이 머리로 먹고산다는 제갈세가 놈들이 아니더냐? 그 런 놈들이 죽어라 애쓴 것이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당해낼 수 없듯이 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을 게다. 지금이라도 뚫어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네 공이 크다." "다, 단주님...." 불호령을 예상했던 요증은 감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제갈세가가 복우산 주변에 펼쳐 놓은 진법을 파괴하는 데 걸린 시간 이 무려 나흘, 게다가 근 백오십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말이 백오 십이지 지금까지의 원정길에 살아남은 철혈마단의 총 인원이 사백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물 론 탑리목에 남아 있던 원로들이 추가로 이백에 달하는 인원을 이끌 고 합류를 했지만 뼈아픈 손실임은 분명했다.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는 내게 맡겨라." 은륜을 챙겨 전의를 다지는 철포산의 기세는 가히 태산 같았다. 철포산은 요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임시 거처였던 천막에 서 걸어나갔다. 그의 모습이 보이자 주변에 모여 있던 수하들이 일제 히 함성을 질러댔다. "와아!" "단주님 만세!" 엄청난 함성이었다. 그것은 곧 그동안 적이 펼쳐 놓은 진법을 뚫지 못해 억눌렸던 울화가 얼마나 컸는지 반증하는 것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함성 소리를 듣고 있던 철포산이 슬쩍 손을 들었 다. 순간, 복우산을 쩌렁쩌렁 울리던 함성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함성이 완전히 잦아들 즈음하여 철포산이 입을 열었다. 조용조용 말하는 것 같았지만 멀리 떨어진 이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 릴 만큼 우렁찬 목소리였다. "소식은 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던 진이 마침내 파괴됐 다." "와아!" 또다시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동안 우리를 기만했던 놈들에게 그 결과가 무엇 인지, 지옥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아울러 먼저 간 동료들의 복수까지도." "와아!" "죽여라!" 철포산의 한마디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철혈마단의 무인들은 저마 다 무기를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이곳저곳에서 도망만 다니던 놈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그 숫자가 우 리보다 많다고 한다. 하지만 싸움이란 단순히 숫자놀음이 아니다. 수 백의 오합지졸보다는 난 단 한 명일도 제대로 된 정병(精兵)을 이끌 고 싸우겠다. 바로 너희들이 그 정병이다. 오늘 이후로 정도맹이란 말 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가라! 가서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철혈마단 만세!" "단주님만세!" 둥둥둥둥둥! 마침내 공격의 북이 울렸다. 공격의 선봉은 후설담이 이끄는 금기령이었다. 지난 나흘 동안 진 을 뚫느라 그 피해가 막심했던 은기령과 동기령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나같이 끈적한 살기를 내뿜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피에 굶 주린 이리 떼들 같았다. 둥둥둥둥! 아련하게 들려오던 북소리도 어느덧 지척에 이르렀다. 북소리를 듣 는 정도맹 수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시작된 모양입니다." 제갈경이 말했다. "결국.. 올 것이 왔습니다. 아무튼 제갈세가에서 너무 애를 썼습니 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틴 것도 모두 제갈세가의 덕분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놈들을 물리칠 수 있다면 제갈세가의 공이 으뜸 일 것입니다." "암요, 그렇고말구요." 사의(謝意)를 표하는 강언이 말에 이곳저곳에서 맞장구를 쳤다. 사실 노도처럼 밀려드는 철혈마단의 공격을 지금까지 별 탈 없이 버 틴 것은 전적으로 제갈세가의 공이었다. 복우산 주변을 온갖 변화무쌍 하고 괴이한 진법으로 도배를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제갈세가에선 많은 제자들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진법의 오묘함을 알지 못하기는 적이나 아군이나 마찬가지. 진법 안 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들뿐이었 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나흘간의 싸움으로 제갈세가는 본 가를 덮 쳤던 혈겁에서 살아남은 와룡, 봉추대의 대원 중 대부분을 잃고 말았 다. 그것을 알기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이 었다. "아닙니다. 의당 해야 할 일이지요." 제갈경은 겸허한 자세로 손사래를 쳤다. 그라고 어찌 식솔들의 희생 이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내색 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자, 이제는 정면으로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보게, 왕 각 주." "예. 맹주님." 있는 듯 없는 듯 늘 그렇듯 말석에 앉아 있던 왕호연이 조용히 일어 나며 대답했다. "언제쯤 도착한다던가?" 강언의 질문에 모두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곤 일제히 왕호연을 주 시했다. "두어 시진 전에 노하(怒河)를 지난다고 했으니 지금쯤 복우산 어귀 로 접어들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늦어도 반 시진이면 도착합니다." 왕호연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그 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무슨 소리를! 버티다니! 오히려 놈들을 끝장낼 것이네!" 천엽 진인이 당치도 않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반드시 그리될 것일세.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바로 오늘이 놈들의 제삿날이 될 것입니다!" 천엽 진인을 따라 몇몇 이들이 저마다 기개있게 소리를 쳤다. 다만 자리에 앉는 왕호연의 안색은 그리 밝지 못했다. '후´ 쯧쯧, 뭐가 중요한지를 모르는군. 단순히 이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 얼마만큼 피해를 줄이느냐가 관 건인 것을.'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옆에 앉은 제갈선의 안색도 가히 좋지는 않았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은 푸르고 산은 녹음(綠陰)으로 우거졌지만 수백의 무리들이 한 데 뒤엉켜 아귀다툼을 벌이는 지상의 광경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 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며 내는 날카로운 소리, 필살의 의지를 한껏 토해내 는 살기 띤 외침. 생과 사의 기로에서 내지르는 처참한 비명성이 한 데 어우러져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냈다. 그들이 흘린 피가 땅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때로는 찐득하게 늘어붙은 핏물이 고여 작은 혈담(血 潭)을 만들기도 했다. 휙휙!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금기령을 지휘하는 후설담의 움직임은 기민했 다. 그의 좌우에 호휘하듯 따라붙은 두 명의 대원들은 그에게 향하는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물러서지 마라!" 후설담의 날카로운 검이 좌에서 우로 궤적을 그리고 그를 공격했던 사내의 수급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의 검이 연이어 춤을 추고 그의 앞길을 막던 이들은 변변한 대응을 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 었다. 수비벽의 중앙을 뚫고 단숨에 앞으로 치고 나간 후설담이 뒤를 보 며 소리쳤다. "저곳이다! 저곳이 바로 내성이다! 다들 나를 따르라!" 우두머리가 용맹한데 수하 장졸들이라고 용맹하지 않을 턱이 없었 다.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후설담의 모습에 사기충천한 금기령의 무인 들이 저마다 함성을 내지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정도맹의 반 격도 만만치 않았다. 중앙이 뚫려선 안 된다고 판단한 수뇌부들이 재빨리 소림사의 제자 들을 급파하고 후설담과 금기령은 명단과 명경이 이끄는 소림사의 제 자들과 격돌하게 되었다. 파파팡! 연속적으로 날아오는 장력을 검기로 무력화시키며 뒷걸음질치는 후 설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을 통해 전해오는 공력이 결코 만 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제법이구나, 땡중!" 새롭게 자세를 가다듬은 후설담이 살소를 내뱉으며 검을 치켜세웠 다. 그리곤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바탕이 된 무공을 사용하기 시작 했다. 명단 역시 사내가 지닌 매서운 실력을 모르지 않는 터, 최대한 신중한 모습으로 대응을 했다. 파파팍! 예리하다 못해 서늘한 검기가 땅바닥을 스치듯 가르며 다가왔다. 그 즉시 짧게 숨을 들이쉰 명단이 손을 뻗었다. 순간, 두 주먹에서 강 맹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그를 향해 매섭게 들이치던 검기를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훌쩍 피하는 후설담의 얼굴이 놀람 으로 물들었다. 말로만 듣던 백보신권을 눈앞에서 보게 되자 전신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끓었다. "오냐, 누가 이기나 해보자!" 검을 고쳐 잡는 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제법 하는군." 쇠사슬을 연결한 낫을 빙글빙글 돌리는 독두옹 태세적이 음침한 미 소를 흘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여유로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심 은 그렇지 못했다. 귀곡도 낙청, 뇌격과 함께 금기령을 지원하기 위 해 나섰지만 소림의 고수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후설담이 명단을 상대하는 사이 그는 공각 대사와 치열한 박투를 벌 였다. 불제자와는 어울리지 않게 섬뜩하게 날이 선 계도(戒刀)를 휘두 르는 공각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마귀를 물리치는 금강야차(金剛夜 叉)를 닮아 있었다. 휘이익! 이 장여의 길이를 자랑하는 사슬, 그리고 그 위에 연결된 낫이 꿈틀 대며 날아들었다. 공각은 왼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돌며 공격을 피해 냈다. 기묘하게 뒤틀린 쇠사슬이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회전을 하더 니 그의 목을 재차 노렸다. 공각이 황급히 계도를 치켜 올렸다. 채챙! 스치기만 해도 남아나지 않는다는 태세적의 공격은 한 자 남짓한 계 도에 막혀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그는 쇠 사슬을 잡고 있는 손목을 흔들었다. 그러자 힘없이 처지던 쇠사슬이 아래로 솟구쳐 오르더니 독니를 드러낸 독사처럼 공각의 허벅지를 노 리며 접근했다. 공각의 아미가 꿈틀댔다. 생각보다 적의 반응이 너무 빠르다는 데에 놀란 것이다. "타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공각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즉시 방향 을 바꾼 쇠사슬이 뒤따랐다.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다고 여긴 공각이 손가락을 뻗었다. 일지선공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다는 금강지(金剛 指)의 지력(指力)은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기에 충분했다. 땅! 금강지의 지력에 부딪친 낫이 방향을 잃고 떨어지고 그 틈을 놓치 지 않은 공각의 신형이 태세적에게 쇄도했다. "이런!" 그런 식으로 공격이 막힐 줄은 몰랐다는 듯 경악성을 감추지 못한 태세적이 황급히 쇠사슬을 당겼다. 휘류류륭!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회수된 쇠사슬은 마치 검의 고수가 검막을 치 듯 태세적의 몸을 휘감으며 공각의 공격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했다. 하 지만 공각은 힘겹게 얻은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 린 계도와 쇠사슬에 휘말려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연 대구품(蓮臺九品)이라는 극상승의 보법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필생의 공력을 담은 반선수(般禪手)를 가슴에 작렬 시켰다. "커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끈 떨어진 연처럼 삼 장이나 날아가 처박히는 태세적. 단 한 수에 즉사한 그의 가슴은 흉측할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아미타불!" 공각의 입에서 불호성이 터져 나왔다. 목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어 깨에 깊은 상처를 입힌 태세적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처음, 후설담의 활약과 그 뒤를 이은 금기령 무인들의 선전으로 기 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싸움은 소림의 개입으로 누가 우위를 점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후설담은 명단과 박빙의 승부를 계속 벌이고 있었고 금기령을 돕기 위해 나섰던 봉공들 역시 속속 모습을 드러낸 소림의 고수들에 의해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독두옹 태세적이 공각 대사에게 목숨을 잃었고 뇌격은 공은 대사에 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패퇴를 했다. 물론 공은 대사 역시 적지 않 은 부상을 당했으나 여전히 손속을 놀리는 것으로 보아 그의 명백한 승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곡도 낙청을 상대하기 위해 나섰던 공 능 대사는 불의의 일격을 당했는데 봉공 중 가장 강력한 무위를 자랑하 는 귀곡도 낙청과 오십여 초를 겨루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이에 대노한 공선 대사사 낙청을 공격했다. 낙청이 비록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지만 전대 소림사의 장문인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공능과의 싸움에 꽤나 많은 힘을 소비 한 터. 십여 초를 힘겹게 버티던 그는 공선 대사가 발출한 일지선공에 어깨와 옆구리, 허벅지에 연속적인 공격을 허용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의 위기를 보고 흑풍대의 낭곡이 달려와 구해갔기에 망정이지 하마 터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이었다. 한편, 전면을 금기령과 봉공들에게 맡기고 우회를 한 은기령과 동기 령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에 가로막혀 고전을 하고 있었다. 좌측으로 우회(迂廻)를 한 은기령은 당가를 주축으로 한 오대세가의 무인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고 우측으로 우회를 한 동기령은 구파일 방의 무인들에게 가로막혔다. 비록 수적으로 열세이기는 하지만 그들 을 막고 있는 무인들은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정예가 아니었다. 그간 벌인 많은 싸움에서 문파의 주요 제자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 에 개개인의 실력은 철혈마단의 무인들이 한 수 위였다. 그럼에도 단숨에 밀어붙이지 못하고 고전을 하는 것은 그들이 지니 지 못한 무기를 정도맹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남궁세가가 남겨두고 간 천뢰대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을지호에게 치가 떨릴 정도로 강한 훈련을 받은 천뢰대였다. 게다가 단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실력을 가꾸었 기에 대주 율천의 지휘를 받으며 아군을 지원하는 그들의 솜씨는 가히 혀를 내두를 만했다. 그렇다고 철혈마단이 밀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 다. 단지 조금 고전을 하며 손쉽게 승세를 굳히지 못한다는 것일 뿐. "흠." 다소 떨어진 곳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가늠하던 철포산의 입에서 묵 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압도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래도 능히 우위를 점하리라 여겼던 싸움이 생각보다 팽팽하게 전개되 자 조금은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오합지졸만 모여 있는 줄 알았는데 제법 저항이 거세군." "물러설 곳이 없는 자들의 발악이니 당연한 것이겠지요." 탑리목에서 여섯 장로와 이백의 수하들을 이끌고 온 대장로 담요문 (淡僚雯)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기마대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요증이 한탄을 하며 말했다. 철혈마단의 최대 강점은 바로 기마대에 있었다. 특히 흑풍과 백풍은 은 그런 철혈마단의 기마대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비록 을지호에 의 해 그 전력이 많이 약회되기는 했어도 막강한 전력임엔 틀림없었다. 하 지만 산세가 험한 복우산에서 기마대가 움직이기란 요원한 것. 결국 철 혈마단은 그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을 버리고 싸움에 임하고 있는 중 이었다. 철포산이 은륜을 꺼내들었다. "나서시렵니까?" 담요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철포산이 입을 열었다. "자넨 정면을 뚫어주게." "문제없지요. 한데 단주께선...." "나? 내 상대는 따로 있네. 빚을 갚을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철포산의 눈에 심각한 표정 으로 전황을 살피는 무당파의 장문인 천중 진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데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가? 불현듯 고개를 돌린 천중 진인도 안 광을 번뜩이며 노려보았다. "저쪽도 준비가 된 모양이군." 자신의 뜻을 보였고 상대가 그 뜻을 알아들은 이상 망설일 것은 없 었다. 나직한 외침과 함께 지면을 박찬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몸을 날린 천중 진 인도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용기가 가상하군." 다짜고짜 던지는 철포산의 말이 무례하기 그지없었으나 천중 진인 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의 공격은 제법 날카로웠다." 철포산은 은륜을 날려 버리고 천장 진인의 시신을 수습해 간 천중 진인의 공격을 잊지 않은 듯했다. 순간, 무당파의 치욕과 천장 진인 의 죽음을 떠올린 것일까? 하늘로 뻗어 올라간 천중 진인의 검미(劍 眉)가 파르르 떨렸다. "뭐, 피차 말은 필요없겠지. 그냥 죽어만 주면 된다." 양손에 든 은륜을 교차하며 전의를 다진 철포산이 왼팔을 크게 휘둘 렀다. 파스스스. 은륜에서 뿜어져 나온 예기가 천중 진인을 노리며 밀려들었다. 이미 자세를 가다듬고 있던 천중 진인의 검이 힘차게 움직이고 희뿌연 검기 는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 것만 같았던 기운을 단 번에 파괴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은 아니었으나 팔성의 힘을 실은 공격이었다. 한데 상대가 너무도 쉽게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안색을 굳힌 철포산 이 입술을 깨물며 또다시 팔을 크게 휘둘렀다. 파파파팍! 조금 전보다 더욱 예리한 파공성이 사방에 울려 퍼지고 그물로 짠 것과 같은 촘촘한 기운이 천중 진인을 압박했다. 천중 진인도 지지 않 고 검을 움직였다. 유운경룡(遊雲驚龍)을 시작으로 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운검법 (流雲劍法)의 유려하고 화려하면서도 부드러운 초식들. 상대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천중 진인은 떼는 발걸음, 움직이는 몸놀림 하나하나 에 신중을 기하며 휘두르는 초식마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런 천중 진인의 기백이 전해진 것인지 상대의 강맹한 공격을 교묘하게 흐트러 뜨리며 팔방을 차단하며 파고드는 유운검법의 위력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다름 아닌 철혈마단의 단주 철포산이었다. 담담한 눈으로 상대의 공격을 살피던 그의 몸이 사라진 것은 한순간 이었다. 천중 진인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기묘한 보법으 로 검세에서 벗어난 그는 은륜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휘류류류륭! 각기 여덟 개의 작은 날이 내는 날카로운 파공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요란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최고조에 이를 즈음 힘찬 기합성과 함께 은륜이 철포산의 손을 떠났다. 피리리리링! 엄청난 회전을 하며 힘을 받은 은륜은 어느새 네 개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각기 다른 곳, 다른 움직임과 속도를 보이며 천중 진인 을 노렸다. 천장 진인이 어떻게 당했는지 똑똑히 보았던 천중 진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땅! 묵직한 금속성과 함께 좌우로 쇄도했던 은륜이 힘없이 날아갔다. 아 래쪽을 파고들던 은륜도 천중 진인이 펼친 방어막을 뚫지는 못했다. "제법이군. 그렇다면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비릿한 미소를 지은 철포산이 은륜을 뿌렸다. 그의 손을 떠난 은륜이 천중 진인의 몸을 휘감고 돌기 시작했다. 피리리리릿! 거슬리는 소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땅에서 이는 먼지가 은륜의 궤적 에 빨려 들어가며 황토빛 띠를 만들고 먼지가 모이고 부딪치면서 소리 는 더욱 요란하게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륜의 모습은 먼지의 띠 에 완전히 가려졌다. 모습을 감췄다고 생각한 은륜이 갑자기 뛰쳐나와 천중 진인을 노렸 다. 그러나 단 한순간이라도 륜의 움직임을 놓쳤다가는 끝장이라는 것 을 알고 전신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던 천중 진인의 시선을 피 할 수는 없었다. "하앗!" 천중 진인이 빙글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순간, 그의 검에서 눈부신 광채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오직 문주만이 익힌다는 태극혜검(太極慧劍)이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광채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단단한 그물막을 치며 천중 진인을 보호했다. 따땅! 연속적인 금속성과 함께 천중 진인을 노리며 달려들었던 은륜이 태 극혜검의 위력에 막혀 별다른 이득도 얻지 못하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 갔다. 기세를 잡은 천중 진인은 태극혜검의 절초들을 사용하며 철포산을 압박했다. 천천히, 그러나 유려하게 움직이는 검. 무당의 장중한 힘을 증명이 라도 하듯 눈부시게 빛나는 검기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마치 천지 사 방이 검기에 의해 갇혀 버린 듯했다. 철포산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분위기가 다시 일변했다. 철포산이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전신이 희뿌 연 안개에 갇힌 듯 흐려지고 동시에 양손에서 가공할 힘이 분출되기 시 작했다. 마침내 그가 지닌 최고의 무공, 회륜십팔수(廻輪十八手)가 펼 쳐진 것이었다. 천중 진인과 그 사이에 수십, 수백의 수영(手影)이 흩날리기 시작했 다. 거기에 더해 천중 진인을 휘감고 도는 은륜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 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수영과 은륜의 힘이 합쳐지더니 주변의 공기마 저 싸늘하게 얼려 버렸다. 유형(有形)인 은륜과 무형(無形)인 수영이 합쳐진 힘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고 신랄 무비했다. 내포한 힘도 상상을 할 수 없 을 정도로 가공했다. 하나로 합쳐져 점차 확대되는 기운이 천중 진인과 태극혜검을 핍박 하기 시작했다. 천중 진인이 끊임없이 초식을 운용하며 상대의 압박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밀리는 느낌이 었다. 기세에서 밀리자 천중 진인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적 으로 그가 발출하는 검세도 엷어졌다. '음!' 천중 진인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검을 통해 전해진 기운이 내 부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비릿한 피가 목구멍으로 역류했다. 억지로 삼키며 애써 대항을 해보지만 한번 시작된 철포산의 공격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천지 사방을 일시에 점하며 밀려드는 수영과 은륜이 기운차게 움직 이며 그를 압박했다. 그런 공격과 방어가 이어지기를 수차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 천중 진인이 마침내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우욱!" 간신히 중심을 잡기는 했지만 내상은 심각했다. 그러나 내상보다 더 욱 아프게 다가온 것은 패배의 모욕이었다. "끝이다!" 승리를 직감한 철포산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도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끝.. 이군.' 점차로 좁혀오는 철포산의 공격. 죽음의 사자와도 같이 접근하는 수 영과 은륜에 천중 진인은 극도의 허탈감을 느끼며 두 팔을 축 늘어뜨 렸다. "컥!" 천중 진인의 입에서 고통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네 개의 륜은 각기 사지를 절단하며 허공을 유영했고 회륜십팔수의 기운이 몸통을 강타했다. 천중 진인의 몸은 마치 폭죽이 터지듯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져 나갔다.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의 신형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지경. 무당파 장문인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처참한 모습 이었다. "후∼" 철포산은 승리의 기운을 만끽하며 주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와아!!" 그의 등장에 철혈마단 무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천중 진 인의 죽음을 목도한 정도맹의 무인들은 망연자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바로 그때,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던 전세가 어느 한쪽으로 확 기울 어질 수도 있는 참으로 긴박한 순간에 철혈마단의 후방이 술렁이기 시 작했다. 마침내 산동악가를 친, 사실상 정도맹의 모든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고수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대비산에 도착한 후, 운기조식을 통해 그동안 허비한 진력을 회복한 그들은 전장에 뛰어들자마자 엄청난 실력으로 철혈마단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선두로 나선 투귀 이성진과 곽검명의 검이 춤을 출 때마다 공포에 질린 사내들의 수급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단견, 정소 사제지간의 손 속 또한 매섭기 그지없었는데 그들이 지나가는 곳의 적들은 저마다 부 러진 팔다리를 부여잡고 땅을 구르며 비명성을 질러댔다. 단연 뛰어난 활약을 보인 사람은 비사걸이었다. 적정을 살핀 그는 무리를 이끄는 수뇌가 누구인지 파악을 했다. 그 리곤 누가 말릴세라 곧바로 몸을 날려 탑리목에서 수하들을 이끌고 지 원을 온 장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채 반 각이 되지 않아 둘이 그 의 검을 막지 못하고 쓰러졌고 대장로와 그를 따라나선 두 명의 장로 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명의 장로들 역시 각각 을지소문과 수호신승에 의해 가볍게 제거되었다.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처럼 보이던 장로들이 너무나도 손쉽게 목숨 을 잃자 그들을 따르던 철혈마단의 무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포라는 것은 쉽게 전염되기 마련인 법이다. 배후에 있던 동료들이 공포심에 사로잡혀 도주를 해오자 앞서 싸우던 이들도 심각하게 동요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지금껏 방어에만 힘을 쓰던 정도맹의 무인들 까지도 굳게 닫혔던 성문을 열어젖히고 일제히 달려나오기 시작하자 혼란은 극에 달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물러서지 마라!" 도주하는 사내의 목을 치며 담요문이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이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무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당황하지 말고 정신들 차려랏!" 보다 못한 철포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철혈마단의 무인들은 한 껏 내공이 실린 철포산의 호통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하 지만 정도맹은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칠 바보가 아니었다. 훌쩍 몸을 날린 수호신승이 철포산에게 손을 쓰며 그가 더 이상 수 하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게 만들고 비사걸 또한 담요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인원들도 저마다 철혈마단을 이끄는 주요한 인원들 과 손속을 나누기 시작했다. 주요 수뇌들이 정도맹 고수들에 의해 발 이 묶이자 철혈마단의 무인들은 또다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철포산이 천중 진인을 쓰러뜨림으로써 곧 끝날 것처럼 보이던 싸움 은 혼전에 혼전을 거듭했다. 아니, 어느덧 정도맹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되고 있었다. 철혈마단의 수뇌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 뒤쪽 에 있던 을지소문과 을지호가 철혈마단 진영을 아예 초토화시키며 휩 쓸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 요증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성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군의 희생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별다른 방책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을지소문과 을지호를 막을 만한 고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쩔 수 없는 것.. 인가?"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전장을 살피던 그의 시선이 철포산에게 향했 다. 언뜻 보기엔 치열해 보이나 이미 천중 진인과 격전을 펼친 철포산 이 어딘지 모르게 힘이 부치는 것 같았다. 철포산은 철혈마단이 승리할 수 있는 최후이자 유일한 변수였다. 하 나 그에겐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그것은 곧 철혈마단에겐 전세를 뒤 집을 그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후∼" 결정을 내린 것일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요증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퇴각을 알 리는 북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둥둥둥둥둥! 웅장하고 힘이 있던 공격 신호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지면 서도 급박한 소리였다. 퇴각 신호를 받은 철혈마단의 무인들은 싸움을 중지하고 곧바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쫓아라!" 그동안 진절머리가 나도록 시달림을 당했던 정도맹은 그들을 그냥 보낼 만큼 아량이 넓지 못했다. 지금까지 당했던 모욕을 철저하게 돌 려주겠다는 각오로 도주하는 적을 뒤쫓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사냥감 을 뒤쫓는 사냥개의 눈빛과 다르지 않았다. 도주하는 자와 쫓는 자의 사이에서 생사를 가르는 전투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승패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 로 이어지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수호신승과 승부를 가리고 싶었 던, 그리고 철혈마단의 패배를 도저히 인정하기 싫었던 철포산이 수하 들의 만류를 뿌리치지 못하고 억지로 몸을 빼면서였다. "허허, 허허허!" 적의 추격에서 벗어난 철포산은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퇴각 명 령을 내렸던 요증의 목을 베려 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허탈한 웃 음만을 흘렸다. 그리곤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비사걸에게 한쪽 팔 을 잃고 간신히 목숨을 구해 도망친 담요문과 정도맹의 추격을 뚫고 도주에 성공한 수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수는 정확하게 육십칠 명. 정도맹을 공격했던 인원이 수백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너무나 초라 한 숫자였다. 제78장 복우산(伏牛山) 중천의 추격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을지휘소 일행이 복우산에 도착 한 것은 패천궁이 몰락하고 철혈마단을 상대로 정도맹이 큰 승리를 거 둔 날에서 정확히 한 달 만이었다. 끼이익. 처량 맞은 소리와 함께 굳건히 닫혀 있던 정도맹의 성문이 열렸다.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던 을지휘소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 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을지소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숨에 다가와 선 을지소문이 물었다. "어디.. 있느냐?' "죄송.. 합니다, 아버님."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 을지휘소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을지룡의 시신이 누 워 있는 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을지소문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거무튀튀한 관을 향해 다가가는 그의 걸음걸이는 천하제일인이라 추앙받는 절대자의 것이 아니었다. 오직 사랑하는 손자의 죽음을 믿기 싫은, 아니, 믿을 수 없어하는 여느 촌부와 다르지 않았다. 뚜뚜뚜뚝.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관의 뚜껑이 열렸다. 순간, 역한 냄새가 코 를 찔렀다. 최대한 밀봉을 하기는 하였으나 환야를 비롯하여 많은 환 자를 치료하느라 오랫동안 지체한 덕에 시신이 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을지소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핏기 하나 없는, 서서히 변질되어 상하기 시작한 을지룡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 을지룡의 얼굴을 향해 뻗는 손이 덜덜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환히 웃어줄 것 같았건만 딱딱하게 굳은 몸은 움직일 줄 몰랐다.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은 감촉에 가슴이 저려왔 다. "이놈아..." 을지룡의 뺨을 어루만지는 을지소문의 노안에 눈물이 고였다. 툭툭. 고인 눈물이 얼굴에 떨어졌다. 을지룡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마치 그가 살아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룡아야...." 을지룡의 죽음에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가 그의 시신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버선발로 뛰쳐나온 남궁혜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을지 룡의 시신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을지휘소를 안고 우는 그녀의 처량한 울음이 주변을 숙연케 만들었다. 을지호도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삭이는 피눈물이 었다. '바보 같은..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꽉 깨문 입술에서 한줄기 피가 흘렀다.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 렸다. '아!' 그의 팔뚝을 꼬옥 잡고 있는 사마유선은 그의 슬픔과 분노에 함께 눈물을 흘렸다. 아울러 전신을 타고 흐르는 살기에 몸서리를 쳤다. "그만.. 하시지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는지 을지소문을 만류한 을지휘소가 천천 히 관을 덮었다. 관을 덮는 그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픔을 잊기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은 듯했다. "네 어미는 무사하더냐?" 간신히 격동을 억누른 을지소문이 물었다. 을지휘소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좋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냐?" "워낙에 큰 부상을 당하신 데다가 룡이마저 저리되고 보니...." "위험한 것이더냐?"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다만 기력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그리 고... 무공을 잃으셨습니다." 순간, 을지소문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기력이 약해질 나이기도 하였지만 무인의 기질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환야가 누구던가? 과거 패천궁의 궁 주로 천하를 질주했던 절대고수가 어니던가. 그런 그녀가 무공을 잃었 다면 다른 누구보다 상심이 클 터, 폐인이 되기가 십상이었다. 더구나 자신으로 인해 을지룡이 목숨을 잃었다는 자책까지 더한다면 자칫 목 숨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강한 분이시잖습니까? 처음에는 힘들 어하셨지만 이제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염려하지 말라는 말에도 환야가 누워 있는 마차로 발걸음을 옮기는 을지소문의 안색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을지소문에 앞서 환야를 찾은 남궁혜와 을지호가 그녀를 부축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괜찮은... 거요?" 환야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괜찮을 리가 없었다. 처음 그녀의 부상을 걱정한 을지휘소는 을지룡의 죽음을 숨기려 하 였다. 이런 저런 말로 둘러대기를 몇 차례. 하지만 거짓말도 한계가 있 는 법이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환야는 집요할 정도로 질 문을 던졌고 결국 을지룡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녀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치료도 거부 한 채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심 각했던 부상이 더욱 악화됐고 하루에도 수차례나 혼절을 하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눈물로 호소를 하는 을지휘소 때문에 치료도 다시 받고 조금씩 식사도 하게 되었지만 그녀의 몸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 이리도 아플진대 어찌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까? 을지소문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됐소." "하지만 룡이가...." "쳔명(天命)인 것을... 우리가 어찌하겠소." "......." "몸이나 빨리 회복하시구려. 많이 힘들어 보이오." "차라리... 이 늙은이의 목숨이나 거둬갈 것이지......" 슬픔이 가득 담긴 환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냥......" 을지소문의 고개가 관으로 향했다. "그냥... 가슴에 묻어둡시다." 환야를 품에 안으며 조용히 말하는 을지소문의 음성에 잔잔한 떨림 이 있었다. "그냥 가슴에 말이오." 품에 안긴 환야가 오열을 했다. 그녀를 안고 있는 을지소문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편, 을지룡의 시신을 담은 관이 정도맹에 도착하던 그 시각, 부친 과 식솔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복수의 칼을 품고 있는 사내가 있었 다. "연락은 왔는가?" "예. 오늘밤이면 모든 준비가 끝날 것 같습니다." 악위군의 곁에서 시립하고 있던 신도가 공손히 대답했다. "오늘밤이라... 하면 공격은 내일 아침에 하면 되겠군." 공격이란 말을 언급하는 악위군의 눈동자에 혈광(血光)이 비쳤다. "놈들의 방어막이 만만치 않습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입니 다." "쉽지 않다?" "성 주변에 수많은 절진이 펼쳐져 있습니다." "흠, 철혈마단이 그것 때문에 그리 고생했다지? 그래, 그게 문제인 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상당수 파악하고 있는 진입니다. 별다른 피해없이 파괴할 수 있습니다." "자네라면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 하면 뭐가 문제인가?" 잠시 뜸을 들이는 신도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혈맹지약(血盟之約)을 꼭 발동하셔야 했습니까?" "그 얘기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아는데?"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큽니다. 혈맹지약이랴말로 삼천을 견제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입니다." "최후의 무기라... 말이 좋아 무기지. 난 그다지 쓸모있다고 생각하 지는 않네." "옛날부터 내려오던 맹세입니다." "이럴 때 보면 군사도 꽤나 순진하군.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면 반드 시 하나는 들어준다고 되어 있지만 그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 용도 없는 것일세. 가령 그들이 피를 흘려 점령한 땅을 달라고 하면 주 겠는가? 그저 옛날 약속 때문에? 나라도 그리는 못하지. 무슨 핑계를 대든 피하고 볼 것이야. 하지만 어차피 제거해야 하는 적과 함께 싸우 자는 데 망설일 이유는 없겠지. 그참에 약간의 거리낌이 있는 약속을 지워 버린다면 더 좋을 테니까. 문제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느냐인 데... 그래, 놈들 수가 얼마나 된다고 했지?" "현대 정도맹에 모인 인원은 삼천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제법... 많군." "제법이 아니라 꽤나 심각할 정도로 많은 수입니다. 우리 사천이 모 두 합쳐봐야 이천이 채 안 됩니다." "그렇게 열세였던가?" "예. 현재 각지에 숨어 있던 무인들이 정도맹을 향해 몰려들고 그 수 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데려온 인원은 사백에 불과하고......" "본가는 그렇다고 쳐도 추격대가 몰살을 당한 것이 뼈아프군." 악위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회군하라는 명령이 간발의 차이로 늦게 도착하면서 벌어진 일이라 가슴이 더 쓰렸다. "지난 싸움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 철혈마단의 상황은 더 좋지 않습니다. 아무리 끌어 모아야 백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두머리가 살아 있으니 도움은 되겠지." "그나마 상황이 나은 곳이 남천과 북천입니다. 남천의 병력은 약 오 백, 이미 산 아래에 집결해 있다고 합니다." "크크, 그들 역시 독이 오를 대로 올랐어. 좋아, 북천은?" "예. 상대적으로 가장 피해를 적게 당한 곳이 북천입니다. 천주인 위지요 이하 쳔여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습니다. 한두 시진 후면 복 우산에 도착할 것이란 전언입니다." "그들을 만나야 되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각자가 책임질 공격 장소가 정해졌습 니다. 철혈마단이 다소 힘에 부치기는 하겠지만 우리 쪽에서 지원을 나가면 될 것이고.. 주군께선 그저 시간만 통보하면 될 것입니다." "흠, 혈맹지약이라.. 편하군 그래. 얼굴도 보지 않고 마음껏 부려먹 을 수 있으니 말이야."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만 말이지요."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약속이 그렇지 않습니까?" "과연 그럴까? 약속이야 정하기 나름이지....." 지그시 눈을 감는 악위군의 입가에 맴도는 것은 알 수 없는 자신감 이었다. * * *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수하들의 호위도 뿌리치고 율평과 단둘이 산책을 나온 기요후의 안 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혈맹지약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정도맹은 어차피 넘어야 할 산입니 다. 철혈마단처럼 혼자 날뛰다 당하느니 함께 공격을 하는 것도 괜찮 지 않겠습니까?" 율평은 뭐가 걱정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막 서산마루에 걸려 있는 해를 바라보는 기요후의 안색은 그다지 좋 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쓰러지는 독혈인의 모습 이 떠올랐다. 아울러 당당하기 그지없는 을지휘소의 모습까지도. * * * "모두 잠자리에 들었느냐?" "그렇습니다." 요증이 대답했다. "마지막 싸움이다. 경계병 따윈 필요없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 해 라." 정성스레 은륜을 손질하는 철포산의 기도는 칼날 같았다. "그리 일러두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남은 것이라곤 무너진 자존심과 목숨뿐. 동료들의 보수를 할 기회도, 무너진 자존심을 찾을 기회도 오직 내일뿐 이다."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 * * 해가 진 복우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움직이는 두 사내가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야조(夜鳥)를 연상케 할 만큼 빠르고 은밀했다. 하 지만 천하를 노리는 북천의 경계망은 그다지 허술하지 않았다. "누구냐?" 나무 위에 매복을 하고 있던 경계병이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그런 데 사내들의 반응이 괴이했다. 의당 놀래거나 최소한 당황하는 빛이라 도 띠어야 하건만 너무나 태연했다. 아니, 태연하다 못해 여유롭기까 지 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경계병의 입에서 살기 띤 음성이 터져 나왔다. "시끄러!"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다. "시끄... 이것들이!"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경계병들이 참지 못하고 공격을 했다. 그러자 두 사내 중 한 명이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아픙로 나섰다. 동시에 터 져 나오는 비명성. "어이쿠!" "큭!" 사내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공격을 했던 경계병들 이 정강이를 붙잡고 쓰러졌다. "쯧쯧, 그러게 시끄럽다고 하지 않더냐." 단숨에 경계병을 쓰러뜨린 사내, 비무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껄껄 댔다. "그나저나 설풍단도 한물간 것 같구나. 이런 간단한 공격도 막지 못 하고." "누, 누구십니까?" 공격을 하지 않고 잠시 지켜보다 동료들이 당하는 모습에 기겁을 한 경계병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었다. "누구긴? 알 만한 사람이지." 비무영은 대답 대신 싱글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 다소 떨 어진 숲에서 걸걸한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알긴 개뿔이 아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설풍단의 부단주 장방형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와서는 한다는 짓이 이런 장난질이냐?"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난 듯 거칠었지만 지그시 쏘아보는 눈동자엔 반 가움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장난질은 무슨. 다짜고짜 공격을 한 녀석들이 잘못이지. 난 그냥 방어만 한 것뿐이다." "시끄러.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어떻게 알아?" "척보면 알아야지."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말문이 막힌 장방형이 평생이 지나도 비무영의 변죽은 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드는 사이 위지황이 손을 들어 아는 체 를 했다. "오랜만이야, 장 부단주." "예. 오랜만입니다, 둘째 공자님." 장방형이 황급히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했다. "잘 지냈지?" "예. 공자님은 어떠십니까?" "보는 대로야. 그럭저럭 지냈지. 그래, 아버님은 어디 계시지? 주무 시나?" "하하, 아직 초저녁입니다."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은 장방형은 비무영의 입꼬리가 사 악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천주님은 각 문파의 어른들과 회의 중이십니다." "오래 기다려야 할라나?" "둘째 공자님께서 오셨다면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오실 겁니다. 제 가 안내하겠습니다. 따르시지요." "아니, 그러지 말고 할아버님께 가지." "알겠습니다." 장방형이 몸을 돌리고 위지황은 너털거리는 걸음걸이로 장방형을 따라나섰다. "비무영." 위지황이 심각한 목소리로 비무영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무사할 수 있을까?" 비무영의 얼굴도 절로 심각해졌다. "우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둘째 공자님이야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 겠지만...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썩은 미소를 짓는 비무영의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했 다. "네 이놈!" 위지황이 왔다는 소식에 모든 회의를 중단하고 달려온 위지요는 태 연하게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위지황의 모습에 노호성을 터뜨렸다.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공손히 인사를 하는 위지황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벼, 별래무양? 지금 그게 네놈이 할 말이더냐?" "하하, 딱히 드릴 말씀이... 죄송합니다." 웃음으로 때우려 했던 위지황은 위지요의 이마에 내 천(川)자가 그 려지자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허허, 그만 하여라." 오랜만에 돌아온 손자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연거푸 술을 마시는 위 지건이 발끈하여 호통을 치려는 위지요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아버님...." "안다, 알아. 그래도 어쨌든 오랜만에 보는 얼굴 아니더냐? 그리 성 내지 말고 이리 앉아 술이나 한잔하여라." 그렇지 않아도 속이 타는지 위지요는 부친이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 이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잡은 위지황이 술병을 들 어 빈 잔을 채웠다. "영악한 놈 같으니!" 그는 위지황이 어째서 다른 곳도 아닌 위지건이 있는 막사(幕舍)로 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방패막이로써 그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한데 웬일이더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던 놈이!" "제가 언제..." "시끄럽다! 네놈이 어떤 일을 벌이고 다녔는지 내 모를 줄 아느냐? 혼신을 다해 남궁세가를 돕고 있다지? 근래에는 악가를 치는 데 혁혁 한 공을 세우기까지 하고." "하하, 혁혁한 공까지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던 위지황은 매섭게 치켜뜨는 부친의 눈빛에 황 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가 남궁세가를 돕는 이유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해도 한다. 그 만한 나이엔 사랑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리할 생각이냐?" 순간, 위지황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가 남궁세가를 돕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오직 비무영뿐이었다. 비 무영은 이미 시선을 딴 데 두고 있었다. '망할 놈!' 곧바로 호통이 터졌다. "뭘 잘했다고 도끼눈을 뜨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 물었다." "그, 그게...." "왜 대답을 못하느냐? 그럼 우리와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아니면? 돌아오겠느냐?" 위지요의 음성이 처음으로 부드러워졌다. 대답이 궁색해진 위지황의 시선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위지 건에게 향했다.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담아서. "험험." 애써 손자의 눈빛을 외면하려던 위지건은 손자의 눈빛이 간절하다 못해 애처롭게 변하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보채지 말거라. 사람의 마음이 어디 인력으로 되더냐? 순리적 으로 풀어가야지." "당장 내일이면 칼을 겨누고 싸울 상대가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만..." 바로 그때, 위지황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꼭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무슨 뜻이냐?" 태도에 변화를 느낀 것일까? 위지요의 대꾸 또한 진지했다. "꼭 싸워야 되는지 여쭙는 것입니다." "이미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또, 피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피했으면 합니다." "한심한 소리 하지 말아라. 정도맹과의 싸움이 네 사사로운 마음 따 위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그렇게 쓸데없는 일로 보이느냐? 선대의 약속 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그리고 우리의 염원을 이루기 위한 싸움이 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릴지 모르는 싸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 다지만 할 말이 있고 하지 않을 말이 있다. 지금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제가 고작 사랑 타령을 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무엇이더냐!" 두 눈을 치켜뜨며 호통을 치는 위지요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뭐냐?"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뭐, 뭐? 지금 뭐라고 했느냐?" "이길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불같이 쏟아지는 매서운 눈초리에도 위지황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위지청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말리고 나 섰지만 위지황은 도리어 팔을 뿌리치며 다시 물었다. "정도맹과의 싸움에서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잠시 뜸을 들였던 위지요가 담담히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천이 모였다. 과거와 같은 전력은 아니나 질 수가 없는 싸움이 다. 물론 저들 또한 배수의 진을 칠 터, 어느 정도의 피해는 발생할 것이다. 하나,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이기는 데 변수는 없다." "허허, 그러나 이 녀석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구나. 그래, 네가 보기 엔 어떠냐?" 부자간의 대화를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지켜보던 위지건이 위지황 에게 물었다. "이길 수 없다고 봅니다." 위지황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위지요가 발끈하려는 것을 제지한 위 지건이 계속 말을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단순 전력으로는 정도맹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사천의 승리는 필연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런데?" "왠지 질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러냐?" "을지세가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 느꼈습니다." "을지세가의 사람들?" "예." "그들의 실력은 인정하나 고작 서너 명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정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할아버님께선 을지 어르신과 손속을 겨 뤄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흠...." 위지건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었다. 그의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 가 맴돌았다. "악가를 치면서 그들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 었습니다. 을지 어른신뿐만 아닙니다. 삼시파천 을지호, 그의 실력 역 시 대단합니다." "명성이야 있지만...." 위지청이 반발하듯 중얼거리자 위지황이 고개를 흔들었다. "명성? 단순히 명성뿐이라 생각하는 거야? 그래, 형과 내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호각 정도?" 엄밀히 말해 실력은 위지청이 약간 앞서는 정도였다. 다만 동생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리 말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형은 그의 일 초식도 감당하지 못해." "뭐라고! 말도 안 되는...!" 버럭 소리를 지르던 위지청은 퍼뜩 느끼는 것이 있는지 진지하게 되 물었다. "싸워본 거냐?" "아니, 싸운 것이라고도 할 수 없어.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 었으니까. 악가에서 보여줬던 그의 쾌검은... 가히 상상도 하지 못해. 솔직하..." 위지황의 시선이 위지요에게 말했다. "왜? 나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냐?"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대답은 결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예." "....." 위지요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을지세가의 쾌검은 이미 그도 보아온 것. 지난번 부친을 패배시킨 것도 그 쾌검이 아니었던가. 다만 놀라운 것은 을지소문뿐만 아니라 을지호마저 그런 경지에 올라 있다 는 것이었다. 그때의 승부를 생각했는지 지그시 눈을 감았던 위지건이 입을 열었 다. "빠르긴 빨랐지.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 분명 이 초식 의 무공만을 사용했다. 분명 더 강한 무공이 있을 게야." "절대삼검, 삼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법이라 합니다." "후∼ 어렵군, 어려워. 그 쾌검도 막을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드는 데 더 강한 무공이라니..." 한데 고개를 흔드는 위지건의 모습은 걱정을 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 히려 신나 하는 모습이었다. "좋다, 인정하마. 그는 과거의 천하제일인. 그가 어떤 실력을 지니 고 있는지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손자 또한 대단하다고 하니 그 또 한 믿겠다. 하지만 그런다고 결과가 바뀔 것이라 보느냐? 사천에도 그 들과 어깨를 견줄 수많은 고수가 있다. 특히 패천궁의 전대 궁주를 쓰 러뜨린 중천의 천주는 어떠하냐? 들려오는 소문으론 실전됐던 무공을 찾았다고 하더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결코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는 그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 생각한다. 암흑마검! 단언컨대 그 무 공을 막을 사람은 없다." "있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뭐라고!" 패배감 때문에 씁쓸하게 변했던 위지요의 얼굴에 냉기가 흘렀다. 위 지황이 그를 놀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위지건 역시 다소간 놀라는 표 정이었다. "그게 누구냐?" "추격대를 물리치고 도주하는 패천궁의 사람들을 구해낸 사람입니 다." "을지휘소!" 홀로 남천의 준동을 막고 중천의 추격대를 패퇴시킨 그의 이름은 이 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나도 그의 얘기는 들었다. 남천의 고수들이 꽤나 당했다지? 중천의 고수들도.. 네 말대로 꽤나 강할 것 같지만..." "꽤나가 아닙니다." 위지황의 태도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을지 어르신 스스로 말씀하시길 어르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그와 싸워 백 초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서, 설마!" "마, 말도 안 되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위지건이나 위지요나 다르지 않았다. "설마가 아닙니다. 그 위압감이란...." 아들을 잃고 그 분노를 마음속으로 삭이고 있는 을지휘소는 분명 예 전과 달랐다. 전신에서 은연중 피어오르는 기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할 정도로 전율스러웠다. 그 기세를 감당하지 못한 위지 황이 뒷걸음질치고 비무영은 엉덩방아까지 찧을 정도였으니까. "그 누구도 그 사람을 꺾을 수 없습니다. 백 초, 아니, 십 초도 감당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그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을지세가가 분노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 "절대로 싸워선 안 됩니다."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 한두 사람의 절대고수가 얼마나 큰 힘을 발위하는지는 위지요도 알 고 잇었다. 하나 수백, 수천이 맞부딪치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전력상 질 수가 없는 싸움이 아니던가. 더구나 물러서기엔 너무 늦고 말았으 니... 굳어질 대로 굳어진 위지요의 입에서 한참 만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 * * 운명의 날,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미풍이 부드럽게 불고 햇살은 적당히 따뜻했다. "공격하기엔 참으로 좋은 날씨군." 오직 자신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악위군 의 입가에 자신감이 어렸다. "시작해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폭풍 같은 함성이 복우산에 울려 퍼졌 다. "와아!!" 둥둥둥둥! 출진의 북소리.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북쪽과 남쪽, 서쪽에서도 엄청난 함성과 함께 북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무림의 운명을 건 사천과 정도맹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 * 일 장 높이로 쌓아 올려진 장작더미. 을지룡의 시신을 담은 관이 그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주변엔 수호신승을 비롯하여 소림의 승려들이 좌정을 하고 염불을 외고 있었고 을지세가의 식솔들은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두커 니 서 있었다. 반 시진가량 계속되던 염불 소리가 고조되고 어느 순간, 수호신승의 고개가 살며시 끄덕여지자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승려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삽시간에 타올라 장작더미를 뒤덮고 오 장 높이 까지 치솟았다. "아, 안 돼!!" 남궁혜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환야가 손을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움푹 파인 눈, 삐쩍 마른 몸,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이 육체적으로 나 심적으로 그녀가 얼마나 큰 상심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안 된다, 안 된다! 이놈아! 이 할미를 두고.. 안 된다! 룡아...!" 환야는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불길을 향해 다가갔다. 남궁혜가 그녀 를 꽉 붙잡았으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상 태가 좋지 않았던 환야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남궁혜가 감당 하지 못할 만큼 강한 힘으로 뿌리치며 나아갔다. 순간적으로 환야를 놓친 남궁혜는 불길 속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망연자실 했다. "그만.. 하시구려, 부인." 어느새 환야의 앞을 막은 을지소문이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 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그녀는 오로지 점점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려 하는 관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 움직였다. "룡아, 룡아!" 그녀를 품에 안고 피눈물을 흘리는 을지소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길을 향해 토해내는 환야의 울부짖음은 어느덧 광기로 변해가고 있 었다. 그녀의 음성이 어찌나 처량하고 가슴 아픈지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는 비사걸과 원 로들의 입에선 연신 탄식성이 터져 나오고 곽검명과 단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한쪽 구석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궁세가의 식솔들 역시 다들 침울한 표정이었다. 을지호의 팔뚝을 가만히 잡고 있던 사마유선은 팔을 통해 전해오는 떨림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은 파리해지 고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꽉 움켜쥔 주먹에선 얼핏 선혈도 비쳤다. '오라버니...' 을지호의 고통이 커질수록 그를 바라보는 사마유선의 마음도 찢어질 듯 아팠다. "룡아! 룡....." 양손을 내저으며 을지룡을 찾던 환야의 신형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 렸다. 더 이상 놔두었다간 그녀의 상세마저 위급해질 것이란 판단을 한 을지소문이 수혈을 짚은 것이었다. "편히.. 편히 보내줍시다." 정신을 잃은 상태임에도 환야의 눈에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을지 소문의 노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바로 그때였다. 둥둥둥둥.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미약하기는 했지만 누구라도 들을 수 있 을 정도로 또렷한 소리. 을지소문의 눈에서 한광(寒光)이 흘러나왔다. "시작된 모양이군요." 침묵을 지키던 을지휘소가 곽검명 등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구나." "이곳은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숙부님들은 그만 내려가 보시 지요. 어르신들께서도 내려가십시오." 조금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숨도 쉬 기 힘든 압박감이 느껴졌다. 뭐라 대꾸를 하려던 단견을 가만히 말린 곽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 말대로 하마. 다들 내려가시지요. 먼저 내려가겠네, 소 문 아우."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형님." 을지소문이 고개를 숙였다. 곽검명은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 깨를 슬쩍 어루만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희들도 내려가라." 을지호가 남궁민과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내려가." 망설이는 남궁민을 향해 고개를 흔드는 그의 태도는 다소 냉랭하기 까지 했다. "후∼"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몸을 돌리자 남궁세가의 무인 들이 그 뒤를 따랐다. 곽검명과 단견을 필두로 을지세가를 위로하기 위해 다비식에 참여 했던 이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오직 을지세가와 을지휘소 일행보다 하루 일찍 합류한 해남파의 친척들, 그리고 비사걸 과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임여령, 의식을 진행하는 소림사의 승려들 뿐이었다. * * * 동서남북에서 마침내 사천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처음 세를 일으켰 을 때보다 비록 인원은 많이 줄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림을 유린 하던 날카로운 기세는 여전했다. 지형의 이점과 제갈세가가 힘겹게 펼 쳐 놓은 진법에 기대 위태롭게 버티던 정도맹의 무인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진이 파훼됐다!" 누군가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철혈마단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제갈세 가의 진법. 하지만 이번엔 반 시진을 견디지 못했다. 진의 약점을 속 속들이 파악하여 나머지 삼천에 알려준 신도의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무엇보다 진을 유지하고 적을 견제해야 하는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남 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 뼈아팠다. 정도맹을 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진세가 무너지자 사천의 무 인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맹렬하게 공격을 했다. "쳐라! 놈들만 끝장내면 바로 내성이다!" 지난 싸움에서 유난히 고생을 했던,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던 철혈마 단의 무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다. 철포산을 비롯하여 수뇌 들이 가장 앞장서서 그들을 지휘했는데 비록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 지만 기세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 강성했다. "경거고망동하지 말고 정신들 차려라! 놈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 다!" 무진검문의 장주 곡운이 소리쳤다. 철혈마단의 기세가 실로 무시무시했지만 그 역시 한 문파를 이끄는 문주이며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수하들을 독려 했다. 쉬익! 찬바람이 휙하고 밀려들었다. 새하얀 은륜이 곡운에게 날아들며 일 으키는 바람이었다. 곡운의 검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따땅! 날아오던 기세를 잃고 되돌아가는 은륜. 순간 곡운의 눈빛이 미미하 게 흔들렸다. 은륜이야 어찌어찌 피해냈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철포산 은 그로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철포산의 모습에 곡운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 가는 식은땀을 느꼈다. "네가 우두머리냐?" 철포산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다 곧 나지막한 살소 를 흘렸다. "우두머리든 아니든 상관없다. 내 눈에 띄었으니 죽어주기만 하면 된다." 쉬익! 철포산의 은륜이 허공을 가르며 곡운에게 쇄도했다. 예상은 하고 있 었지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렇게 다짜고짜 공격을 할 줄 몰랐다는 듯 재빨리 몸을 트는 곡운의 자세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제법!" 코웃음을 친 철포산이 재차 팔을 휘두르고 나머지 손에 들렸던 은륜 이 곡운의 발을 묶기 위해 쇄도했다. 곡운도 침착하게 중심을 잡으며 피할 것은 피하고 막을 것은 막으면서 철포산의 공격을 상쇄시켰다. "그래, 그렇게 꿈틀대야 밟는 재미가 있는 법이지." 공격이 연거푸 실패하자 음침한 괴소를 터뜨린 철포산이 은륜을 한 층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네 개로 분리된 은륜은 사방 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곡운을 압박했다. 곡운도 필사적으로 발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며 맞서 싸웠다. 하지 만 애당초 그는 철포산의 상대가 아니었다. 몇 차례인가 훌륭한 방어 를 해내더니 결국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세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흐흐흐! 좋아, 좋아. 이제야 흥이 조금 나는군." 최종적으로 곡운의 머리를 잘라 버린 은륜을 회수하며 철포산이 짓 는 미소는 야차와 다르지 않았다. "도, 독이다!" "크아아악!" 독의 조종이라 불리는 만독문의 독은 가히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해독제를 복용한 아군조차도 만독문이 움직이는 곳으론 접근을 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만독문의 문주 기하학이 움직이는 곳은 별다른 충돌이 일어나 지 않았다. 애써 공격을 하거나 병장기를 부딪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의 손짓에 따라 코와 입을 틀어막고, 때로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 지는 것이 전부였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된지 않았음에도 그의 손 에 쓰러진 이들이 수십이 넘을 지경이었다. 기하학과 만독문의 일방적 인 공세는 당가의 무인들과 당욱이 도착하면서 겨우 멈춰졌다. 만독문이 자랑하는 것이 독이라면 사천당가 역시 이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독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당대 가주에게 독왕이라 는 칭호를 내렸을까? 하지만 철혈마단에 의해 많은 피해를 본 당가는 만독문에 비해 그 수가 적었다. 게다가 해독제를 복용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광범위한 독의 해독제일 뿐 서러고 주로 쓰는 독의 해독제 일 수는 없었다. 결국 시간이 가면 갈수록 중독이 되었고 하나둘씩 쓰 러져 목숨을 잃었다. 물론 만독문이라고 다르지 않아 그들의 피해도 당가에 비해 크면 컸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독문이 남천의 전부는 아니었다. 비록 큰 비중을 차지하기 는 해도 만독문 역시 남천의 일부, 그들을 제외한 남천의 공세는 철혈 마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숫자도 숫자려니와 고수들의 숫자 역시 훨씬 많았다. 그나마 수하들을 이끌어야 할 주요 간부들이 을지휘소와 혈영대에게 전멸을 당하다시피 하여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덜해서 그렇 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끝장이 나도 한참 전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 "시간 끌지 마라! 단숨에 끝내 버려!" 다소 뒤에 처진 곳에서 싸움을 독려하는 기요후의 얼굴에 짜증이 밀 려들었다. 만독문을 선두로 밀고 올라가던 초반의 기세가 다소 주춤하 자 화를 내는 것이었다. "당가가 움직였습니다. 게다가 지원군이 속속들이 도착하는 바람 에...."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율평이 꽁지를 빼며 말했다. "당가야 그렇다 쳐도 그깟 지원군이 얼마다 된다고 헤매? 더욱 거세 게 몰아붙여! 후왕!" "예." 곤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모조리 쓸어버려!" "알겠습니다." "특히 저놈들!" 기요후가 가리키는 이들은 정도맹의 무인들과 다소 특색이 있어 보 이는, 바로 해남파의 무인들이었다. "이번엔 제대로 끝내라!" 지난날 해남파에 제대로 발목이 잡혀 고생을 한 것이 떠오르는지 기 요후는 이를 갈았다. "맡겨주십시오!" 힘찬 대답과 함께 후왕의 몸이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좌우로 두 마 리의 백원(白猿)이 뒤따랐다. "차핫!" 화천명의 입에서 힘찬 기합성이 터져 나오고 어려서부터 지금껏 불 철주야 익혀온 혈우검법(血雨劍法)의 첫 번째 초식인 혈광천하(血光天 下)가 앞서 달려드는 사내에게 뿌려졌다. 섬뜩한 혈광을 뿌리며 짓쳐오는 검기에 기겁한 사내가 급히 신형을 틀며 검을 휘둘렀지만 화천명의 검은 이미 그의 목을 허공으로 날려버 리고 다음 사내를 향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망할!" 동료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을 본 사내가 미친 듯이 몸을 틀며 검을 움직였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파파팍! 사내의 몸을 스치며 빗나간 검기가 땅바닥을 가르며 흙먼지를 일으 켰다. 하지만 그것으로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내의 몸이 휘청 이는 것을 본 화천명이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화천명의 어깨가 사내의 가슴팍을 강타하고 사내는 입에서 피를 토하 며 그대로 나뒹굴었다. 쉬익!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검 하나가 화천명의 허리를 향해 접근했다. 움 직여 피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한 화천명이 그대로 몸을 누이고 검은 아 슬아슬하게 그의 배를 스치며 지나갔다. 사내가 재빨리 검의 방향을 바 꾸려고 하는 찰나 튕기듯 몸을 뒤집으며 일어난 화천명이 검을 휘둘렀 다. "이, 이런 엿 같은..." 사내는 자신의 목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만지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 다. 그리고 힘없이 꼬꾸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의 적을 베어버린 화천명은 호흡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적을 찾아 몸을 날렸다. "막아! 막아랏!" 화천명이 다가오는 것을 본 중천의 무인들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 의 기세는 좀처럼 꺾일 줄을 몰랐다. 파파파팍! 눈부신 혈광이 하늘을 수놓았다. 순간, 사방으로 퍼지는 검기의 물 결. 왼쪽에 있던 사내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오른쪽에 있던 사내는 양다리가 잘려 처절한 비명과 함께 땅바닥을 굴렀다. 화천명의 검이 또 한 번 작렬하고 이번엔 정면에 있던 사내 둘이 변 변한 대항도 하지 못하고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선봉에서 정도맹을 공격하던 중천의 무인들은 홀로 미쳐 날뛰는 화 천명의 모습을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 보던 악청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과연 패천수호대의 대주. 대단하군. 그렇다고 언제까지 날뛰도록 놔둘 수는 없겠지. 영아." "예." 부상에서 히복한 광뢰 악영이 대답을 했다. "상대해 주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그렇잖아도 호승심을 느끼고 있던 악영은 창을 움켜쥐며 전장으로 나섰다. 스스슥! 시퍼런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는 무시무시했다. 검기가 미치는 곳에 위치한 이들은 변변한 항거도 하지 못하고 비명 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휘이이잉! 뭔가가 다가온다고 느낀 곽검명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휘둘 렀다. 꽈꽈꽝! 엄청난 굉음과 함께 몸이 흔들렸다. 적의 공세를 너무 쉽게 생각한 자신의 자만심을 책망한 곽검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껏 만난 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흉포한 기운을 뿜어내며 노려보는 사내. 흑룡문의 문주 반포였다. 고작 서너 호흡을 할 정도에 불과했건만 곽검명에게 십수 명의 수하 를 잃은 반포는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였다. "오랜만이군. 그래, 몸은 괜찮소?" 곽검명이 조소를 흘리며 물었다. 소림에서 을지소문이 날린 화살에 허벅지를 맞고 쓰러진 처참한 기억 이 떠오른 것일까? 그렇잖아도 살벌한 반포의 안색이 더욱 일그러졌다. "네놈이 죽은 다음에 말해주지." "훗!" 피식 웃음을 터뜨린 곽검명이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그럴 자신이 있으면 해보라는 모습이었다. "이놈의 늙은이가!" 반포가 이를 갈며 도약을 했다. 순간, 거대한 몸짓과는 어울리지 않 는 빠른 몸놀림으로 접근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숨이 막힐 듯한 압력과 함께 항거하기 힘든 권풍이 밀려들었다. 그가 자랑하는 천왕팔권의 칠권 저양촉번이었다. 곽검명은 추호의 방심도 없이 검을 움직였다. 파스스슷.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빠른 기운 하나가 일어났다. 그리 고 그것은 반포가 일으킨 권풍을 교묘히 파고들어 가 그의 목을 노렸 다. 그대로 공격을 이어간 후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던 반포는 그 즉시 공격을 거두고 몸을 틀며 신형을 뒤로 물렸다. 한데 그가 몸을 틀자마자 섬전처럼 짓쳐들던 검기의 기운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제법 이름.. 값을 하는구나!" 반포가 찐득한 살기를 뿜어내며 소리쳤다. "칭찬이라면 고맙군." '망할!' 알 수 없는 굴욕감에 천불이 났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덤빈다고 이 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호흡을 고르며 자세를 가다듬는 반포의 태도는 꽤나 신중했다. '결코 허명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오른 자는 아니다. 잘못하면 당한 다.' 자신의 공격을 간단히 무위로 돌리고 오히려 역습을 가하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전, 신기루처럼 사라져 그 실체를 제대 로 파악하지는 못했어도 곽검명이 일으킨 검세는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잠시라도 방심을 하는 순간엔 그대로 목숨을 빼앗길 수 있 는 예리함을 품고 있었다. 반포는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곽검명도 마찬가 지였다. 겉으로는 여유를 부렸지만 반포가 누구던가? 흑룡문의 문주이 자 북천을 대포하는 고수 중 하나였다. 비록 남궁혜의 검과 을지소문 의 궁에 꺾이긴 했지만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힘만 믿는 아둔한 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 신중을 기하는 반포를 보는 곽검명의 얼굴이 한층 심각해졌다. 하지 만 언제까지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선공!' 마으음을 굳힌 곽검영이 검을 곧추세웠다. 순간, 검끝에서 아련한 청 광이 피어오르더니 반포를 향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의 전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반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할! 역시 조금 전 보여줬던 공격은 거짓이 아니로군.' 끊임없이 이어지며 점점 자신을 위협해 들어오는 기운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전신이 어떻게 찢겨져 나갈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 호흡 마저 멈춘 반포의 눈이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았다. 막을 수 있는 것 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역공도 가능할지 몰랐다. "타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반포가 주먹을 내질렀다. 한 번, 두 번. 숨 쉴 틈도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공격. 초식과 초식이 교차하고 앞선 공격이 끊어지기도 전에 이어지는 뒤 의 공격이 하나둘 모여서 감당하기 힘든 거력을 만들어냈다. 천왕팔권 의 마지막 초식인 비폭광류(飛瀑狂流)였다. 꽈꽈꽝!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반포가 만들어낸 거력은 그를 옭아매던 검 세를 단숨에 분쇄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곽검명을 향해 밀려들었다. 곽검명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역시 예상대로 쉽사리 끝날 싸 움이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눈 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그려진 것은 분 명 미소였다. * * * 승천하는 용의 기세처럼 타올랐던 불길도 어느새 사라지고 일 장 높 이까지 쌓였던 장작은 모두 무너져 내려 검고 붉은 숯으로 변해 버렸 다. 숯으로 화한 장작이 완전히 재가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터, 하지만 주변 상황이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여의치가 않 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호신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유골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직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었지만 수호신승의 손 길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침묵을 지키며 이를 지켜보던 을지세가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 다. 혼절한 환야를 품에 안고 있는 남궁혜의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고 이미 눈물마저 말랐는지 고개를 돌린 을지소문은 잔인하리 만 큼 청명함을 뽐내는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을지휘소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사마유선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을지호만이 이글거리 는 눈빛으로 수호신승의 손길에 의해 수습되는 을지룡의 마지막을 지켜 보았다. 을지룡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마침내 하얀 재가 되어 조그만 함에 담겨졌다. 수호신승은 을지룡의 유골이 담긴 함을 을지소문에게 전했 다. 을지소문이 차마 손을 뻗지 못하자 곁에 있던 을지휘소가 공손히 함 을 받으며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신승께서 애를 쓰셨습니다." "아밑불!" 수호신승은 불호를 되뇌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버님...." 을지휘소가 을지소문을 불렀다. 을지소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았다. 그저 을지룡의 유골이 담긴 함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꽤나 힘들었는지 을지소문은 한참 만에야 입 을 열었다. "신승과 여러 스님들께서 이리 애를 써주셨으니 아마도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다." "아미타불!" 수호신승을 비롯하여 소림사의 승려들이 일제히 합장을 했다. "하지만..." 감정이 드러나지 않던 그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 "마지막 가는 길마저 편하지는 않았을 듯싶구나." 싸움이 시작된 지도 벌써 한 시진.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고, 아 니, 오히려 점점 치열해지는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성, 살기 띤 함성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공격을 알리는 북소리는 어느 때보다 고 조되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손자의 죽음으로 가슴이 아프던 차에 마지 막 보내는 길마저 그토록 어수선하자 을지소문은 참고 참았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가는 길 외롭지 않게 해주마!" 유골함을 보며 차갑게 내뱉는 한마디가 그렇게 싸늘할 수가 없었다. 충분히 이해는 갔지만 불제자 된 입장으로 을지룡의 극락왕생(極樂往 生)을 빌었던 수호신승이 듣고 있기 민망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 다. "부인은 움직일 필요 없소." 을지소문이 환야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녀를 돌보라는 말에 남궁혜는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을지휘소가 건네는 유골함을 정성스럽게 보듬어 안았다. "할머님을 부탁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마유선을 보며 을지호가 말했다. "이 녀석도 부탁하마." 사마유선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다가온 비사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임여령을 부탁했다. "가자꾸나." 마지막으로 유골함에 시선을 둔 을지소문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을지휘소와 을지호가 나란히 따랐다. 마침내 을지세가가 움직였다. 제79장 일장춘몽(一場春夢)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쬘 때 시작된 싸움은 정오가 지나고 한낮 으로 접어들었음에도 그칠 줄 몰랐다.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피아의 구별도 없었고 딱히 전장이라 규정지 을 곳도 없었다. 보이는 모두가 적이었고 천지 사방이 싸움터였다. 다 만 처음과 다른 것은 무기를 맏재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살기를 내뿜 는 무인들의 숫자였다. 근 한 시진이 넘는 싸움은 쌍방 합이 오천에 육 박하던 인원을 절반 이하로 줄여 버렸다. 그렇다고 부상자가 많은 것 도 아니었다. 부상자라 해서 관용이 베풀어지지 않았고 또 목숨이 붙 어 있는 한 싸웠기 때문이다. 난마(亂魔)처럼 얽힌 전장에서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당가, 해남파의 무인들을 비롯하여 몇몇 문파들과 연합하여 사천 중 남천과 치열한 교 전을 펼쳤다. 늘 그렇듯 천뢰대의 지원을 업고 남궁민의 지휘를 받으며 싸우는 천 양, 천음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해웅의 강인한 몸, 초번의 빠른 몸놀 림, 뇌전의 파괴력이 그들과 어우러져 한층 위력을 더했다. 특히 부친 의 거센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 몸을 뺀 위지황의 남궁민 지키기와 그 런 위지황을 지키기 위한 비무영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하 지만 수적으로 불리했던 당가의 무인들이 만독문의 무인들에게 밀리기 시작하고 기하학과 일생일대의 박투를 벌이던 당욱이 예기치 못한 기 습 공격에 중상을 입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게다가 남천의 주력을 맞아 선전을 해주었던 해남파마저 급격히 밀리면서 전세는 더욱 악화 됐다. 백원을 대동한 후왕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강운교와 강명이 그 들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뼈아팠다. 한번 기세를 잡은 남천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끝장을 보겠다는 기세로 더욱더 강력 한 힘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을지세가의 사람들이 전장에 도착한 시점이 바로 그때였다. 전장에 도착한 그들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손을 쓰 기 전에 전체적인 전황을 살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시선을 둔 곳은 당연히 남궁세가와 해남파가 싸우고 있는 곳이어 다. 때마침 을지호의 눈에 칼을 맞고 쓰러지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복장으로 보아 남궁세가의 무인이 틀림없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한번 걸음을 내 디딜 때마다 삼사 장을 쭉쭉 뻗어가는 을지호의 신형은 비호(飛虎)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그냥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스쳐 가는 곳 마다 사천의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어깨에 부딪치고 발길 에 채여 나뒹굴었다. 휘두른 철궁에 맞아 뼈가 부러지며 비명을 지르 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마, 막아랏!"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미처 말을 끝 내기도 전, 그는 어느새 빼앗아 들었는지 을지호의 손에 들린 장창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서너 호흡 만에 삼십여 장 을 가로질러 남궁세가가 싸우고 있는 전장에 도착한 을지호는 들고 있 던 창을 달려오는 탄력에 실어 힘껏 던졌다. 쐐애액! 을지호의 손을 떠난 장창은 엄청난 파공음을 내며 실로 가공스런 속 도로 날아가 당욱을 쓰러뜨리고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기하학을 덮쳤 다. "뭐, 뭐야!" 뭔가가 날아온다고 느낀 기하학이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향해 일직 선으로 날아오는 장창을 보며 기겁을 하며 몸을 틀었다. 그러나 당욱 과 오랜 싸움으로 지친 몸의 반응은 생각만큼 빠르지 않았다. 물론 웬 만한 인물보다야 탁월한 움직임이었으되 을지호가 작심하고 던진 창 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컥!" 외마디 비명성과 함께 허공으로 붕 뜬 그의 몸은 창과 함께 힘없이 날아가 성벽에 처박혔다. 순간, 만독문의 무인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하늘같이 믿었던 문주가 단 일 초도 받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황천으로 가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데 그들의 공포는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한 을지소문, 을지휘소와 맞 닥뜨린 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이 처음 모습을 보였을 때,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 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공격을 하는 적이 사방에 널린 상황에서 한가로이 걸음을 놀리는 이들에게 시선을 둘 리가 만무한 것 이다. 하나 그들이 뽑아 든 검에서 청광이 번뜩이는 순간이 되자 자신 들이 사신(死神)을 만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흑풍대를 이끌고 적진을 유린하고 있었던 낭곡은 평생 처음 들이닥 친 공포심에 몸을 떨었다. 과거 을지호와 싸움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에게 패했다는 분함이 더욱 강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 다. 단지 사선으로 긋는 듯한 간단한 동작에 흑풍대의 삼분지 일이 날 아가고 연이어 들이닥친 힘에 의해 나머지 삼분지 일의 목숨도 끝장이 나버렸다. 수하들에게 피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 다. 중년인의 검이 또다시 움직였다.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검에서 눈부신 검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며 생존자들을 노렸다. 그제야 자 신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미친 듯이 움직이며 검광에 대항해 보려 했다.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혀 오직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 들의 힘은 낭곡으로도 처음 보는 대단한 기세였으나 중년인이 일으킨 기운과는 반딧불과 뇌전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찢어지는 비명성과 함께 중년인에 대항했던 이들이 피를 토하며 허 무하게 나가떨어졌다. 그들이 지녔던 무기는 산산조각이 나서 편편히 흩어졌다. "공격! 공격하랏!" 흑풍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당연히 백풍일 터,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탕평이 다급히 소리쳤다. 사방에서 십여 명이 넘는 인원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그들을 보면서도 너무도 간단히 흑풍대를 전멸시킨 중년인, 을지휘 소의 얼굴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십 줄기의 도기가 자 신을 노리며 날아들어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두어 차례 검을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절대삼검의 두 번째 초 식인 무애지검이었으니... "마, 말도 안돼!" 탕평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하들이 일제히 일으킨 기세는 가히 태산이라도 가를 정도로 엄청 난 것이었다. 폭풍과도 같은 강맹함과 섬전을 방불케 하는 날카로움. 한데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래 속으로 사라지는 바닷물처럼 그렇 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 채 막히고 만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공 격이 막혔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하들의 공격을 막아낸 중 년인이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몸놀림으로 수하들을 도 륙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거의 이십에 육박하 는 인원을 쓰러뜨리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 막아야....' 코앞으로 들이닥치는 을지휘소를 보며 탕평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박이라도 당한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곁에 있던 낭곡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잠깐의 머뭇거림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돌 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게 만들었다. 힘없이 무릎을 꺾은 그들의 목 에서 가느다란 혈선이 보였다.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쾌검. 무심지 검이었다. 을지휘소가 흑풍과 백풍을 전멸시키는 사이 을지소문은 중천의 무인 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우선 광뢰 악영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대가 로 왼팔과 양쪽 옆구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채 악전고투를 하고 있 는 화천명을 구하고 중천의 선봉이라 할 수 있는 등천단을 공격했다. "쏴, 쏴라!" 슈슈슉! 악영 대신 힘겹게 등천단을 이끌고 있던 악산이 공포에 질려 소리치 고 수십 발의 화살과 무수한 암기들이 을지소문을 향해 날아갔다. 을지소문은 환상적인 발놀림과 몸의 움직임으로 대다수의 암기를 피 해내고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큭!" "크아악!" 처절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병장기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비명성 과 어울려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십여 명에 이르는 등천단의 무인들 이 팔다리, 몸통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대다수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의 중상이었다. 을지소문의 검이 재차 움직였다. 또다시 숨이 끊어지기 전 내뱉는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무수히 많은 인원이 땅바닥을 굴렀다. 끊 임없이 피가 튀고 비명성이 뒤따랐다. 악에 받친 생존자들이 욕설과 함 께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으나 손속에 인정이라는 것을 배제한 을지소문 을 감당하기엔 그저 터무니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으으으." 한순간에 삼십에 가까운 대원을 잃은 악산의 몸이 덜덜 떨렸다. 수호신승과 비사걸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늦게 도착한 그들은 사천 중 가장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 는 북천과 치열한 교전을 펼쳤다. 수뇌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 에 들이닥쳐 쓸어버린 을지세가의 활약에 비해 재빨리 움직인 북천의 수뇌들과 싸우느라 나름대로 힘겨운 싸움을 펼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활약 역시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잔인 한 살수를 쓰는 대신 적을 제압하는 것에 중점을 둔 수호신승에 비해 추호의 인정도 두지 않는 비사걸의 검은 가히 산천초목을 떨게 할 만 큼 위력적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가세로 사기가 오른 정도맹의 무인들 까지도 맹렬한 기세로 북천을 몰아붙이니 전체적으로 열세여던 전세는 어느덧 대등한 위치까지 이르게 되었다. "저게 인간입니까?" 취밀단의 단주가 두 마리의 백원을 단숨에 때려눕히고 후왕을 거칠 게 압박하는 을지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놈이 바로 삼시파천 을지호. 아비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자식 놈 까지...." 기요후는 어이없음을 넘어 이제는 허탈한 웃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잘못된 것이었어." "예?" 희염이 물었으나 기요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을지호를 지나 철혈마단을 거의 괴멸지경까지 몰아가는 을지휘소에게 향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싸움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야. 그와 어찌 싸웠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 구나." 을지소문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위지건이 혀를 내둘렀다. 그리곤 전체적인 전황을 살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 위지요는 침묵을 지켰다. "어차피 쉽게 끝날 싸움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도 없 고... 내가 해야 하느냐?" "...." "내가 해야 하느냐?" 위지건이 다시 물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자신있느냐?" "솔직히... 없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제가 합니다." 한참 만에 흘러나온 대답에 위지건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받으며 고개를 돌린 위지요가 복우산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 로 큰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물러서라!" "흠, 북천에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군." 퇴각 명령을 받은 북천의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지금껏 뒷 짐을 진 채 싸움을 지켜보던 악위군이 말했다. "정확한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놈들의 전력이 강했습니다." 신도가 침울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아니, 놈들의 전력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을지세가... 저들이 강한 게 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약해진 것이 문제지." 악위군은 어느새 반수로 줄어버린 수하들을 둘러보며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퇴각 명령을 내리게." "퇴각... 입니까?" "완전히 끝내자는 것은 아니야. 이 상태론 이긴다 해도 그다지 얻을 것이 없기에 그런 것이네. 일단 청산해야 할 빚부터 확실히 끝내야겠 어." "알겠습니다." "신도." "예." "전력을 다시 가다듬고 역습을 준비하게." 악위군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신도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존명!" 을지세가와 수호신승, 비사걸의 등장으로 싸움은 묘한 양상으로 변 하기 시작했다. 북천에 이어 중천이 퇴각을 하고 이어 남천에서도 퇴각 명령이 내렸 다. 이미 괴멸당하다시피 한 철혈마단은 물러서고 싶지 않아도 물러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전으로 통하는 대로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정도맹의 무인들이, 오른 쪽엔 사천의 무인들이 진을 쳤다. 다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 충 눈치를 챘는지 모두의 눈에서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가장 앞서 나온 인물은 악위군이었다. "내가 중천의 천주다. 나서라!" 을지소문의 눈에서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곤 움켜쥔 검에 힘을 실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을지휘소가 그의 소매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아버님." "왜 그러느냐?"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내가 질 것 같으냐?" 을지소문이 조용히 물었다. "그런건 아닙니다만...." 을지휘소가 말끝을 흐렸다. "아니면?" "강한 자입니다." "알고 있다. 하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바로 그때였다. 한 걸음 처져 있던 을지호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호야!" 을지휘소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제가 합니다." "네가 나설 자리가..." "제가 하도록 해주십시오." 을지소문을 쳐다보는 을지호의 눈빛은 실로 단호했다. "진정이냐?" "예." "......" 을지호를 가마히 쳐다보던 을지소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정 그렇다면 네게 맡기마." 생각보다 너무나도 간단히 떨어진 허락에 을지호마저 놀라고 있을 때 기겁을 한 을지휘소가 소리쳤다. "아버님!" "놔두어라. 녀석이 룡이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너도 알지 않더냐? 동생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야." "하지만 상대가..." 그러자 을지소문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너는 호의 실력이 어떻다고 보느냐?" "예?" "품 안의 자식이라고... 너도 자식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을지휘소가 영문을 몰라 을지호와 을지소문을 번갈이 바라보며 눈 을 끔뻑이자 을지소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은 이미 나를 넘어섰다. 따지고 보면 무리도 아니지. 두 분 할 아버님의 내력이 모두 이 녀석에게 전해졌고 그간 엄청난 싸움을 해왔 으니...." "그래도..." "룡이의 죽음이 전해졌을 때 이 녀석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 았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칩거를 하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 한 달이 란 시간...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짧은 시간일지 모르나 무의식 중에 억 눌러 놓았던 무공을 만개시키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 "믿어도 될 것이다." 을지휘소의 시선이 을지호에게 향했다. 찬찬히 뜯어보니 그제야 예 전과는 뭔가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있느냐?" "물론입니다." 을지휘소의 손이 을지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자식을 가슴에 묻는 아픔...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자만하지 말 고 몸을 아끼거라."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빙글 몸을 돌리는 을지호의 몸에선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니, 오직 한 사람, 을지소문만은 뭔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을지호의 모 습은 그 옛날, 나이 열다섯에 삼백여 명을 몰살시킬 때 보여줬던 바로 그때와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은 그때는 마성(魔性)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다는 것이고 지금은 너무나도 냉정하다는 것이었다. "호오! 궁귀 선배나 자네의 부친이 나설 줄 알았건만." "부족해 보이오?" "아니, 전신을 강타하는 이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는데 부족하다니! 강해 보이는군. 충분히 재밌을 정도로."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오." "아아, 너무 서두르지 말게나. 아직 상대가 다 정해진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악위군의 시선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위지요에게 향했다. 전장으로 나선 위지요는 을지소문에게 정중히 예를 차렸다 "궁귀 선배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소." 을지소문의 시선이 그가 아닌 위지건에게 향했다. 위지건이 살짝 고 개를 숙여 아는 체를 했다. "원한다면." 그러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위지황이었다. "어, 어르신....." 더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지금의 싸움은 단순한 비무가 아니라 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손속에 인정을 바란다는 말이 목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그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극도로 긴장했던 위지황이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정도로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위지요가 상대를 찾자 이번엔 남천이 천주 기요후가 나섰다. 그가 원한 상대는 당연히 을지휘소였다. "다시 만난다면 어찌할 것인지 난 분명히 경고를 했소만." "기억하고 있다. 또한 내가 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 고 있다." 싸움을 하기도 전에 패배를 자인하는 말에 양측 진영이 모두 술렁거 렸다. "그럼에도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대로는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나설 수밖에 없는 위치. 우두머리란 그런 자리였다. "이해하오." 마지막으로 나선 사람은 철혈마단의 단주 철포산이었다. 그가 원한 상대는 수호신승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데다가 지난 싸움에 서 승부를 가리지 못한 것에 대한 결과를 보려는지 은륜을 번쩍이는 모습에 수호신승은 합장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목에 걸린 염 주를 풀었다. 불제자가 아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반드시 승리를 하 겠다는 의지가 담긴 행동이었다. 사천의 천주가 나섰다. 그리고 그를 상대하기 위해 네 명의 무인이 마주하고 섰다. 단순한 승부가 아니었다. 그들의 대결이야말로 사실상 이번 싸움을 결정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철포산이었다. 철포산과 수호신승이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나머 지 삼천의 주인과 을지세가의 싸움도 시작이 되었다. 화류류류륭! 예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은륜이 수호신승을 노리며 날아 들었다. 여덟 개의 작은 날이 공기와 마찰을 하며 내는 날카로운 파공 음은 너무나도 섬뜩했다. 하지만 승포를 펄럭이며 은륜을 피해내는 수 호신승의 움직임은 표홀하기 그지없었다. 은륜은 수호신승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피리리릿! 어느새 네 개로 분리가 된 은륜이 또다시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수호신승이 들고 있던 검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땅!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수호신승을 노리며 달려들던 네 개의 은륜 이 힘없이 날아갔다. 그저 단순히 움직인 것처럼 보였음에도 그토록 빠르고 강맹하게 움직이던 은륜은 수호신승의 검을 뚫지 못했다. 그러 나 지난 싸움에서 이미 수호신승의 실력을 파악하고 있던 철포산은 당 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잔인한 살소를 내비치며 다음 공격을 준 비했다. "받아라! 땡중!" 철포산의 몸이 힘차게 도약했다. 을지휘소를 상대하는 기요후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어찌나 조심 을 하는지 그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겁을 먹고 움츠린 것이 아닌지 의심을 할 정도였다.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끝장이다.' 자신과 거의 대등한 실력을 보였던 마독이 목숨을 잃었고 바로 눈앞 에서 독혈인이 허무하게 쓰러지는 것도 보았다. 상대의 실력이 어떠하 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 기요후는 자신에게 일말의 승산 이라도 있으려면 최대한 약점을 보이지 않으면서 역습을 노리는 것뿐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쉽지는 않겠군.' 을지휘소는 극도로 조심을 하면서도 전의에 불타는 기요후의 눈을 응시하며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우우우웅. 기묘한 떨림과 함께 검에서 청명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절대 고수들만이 일으킨다는 검명(劍鳴)임을 알기에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타핫!" 나직한 외침과 함께 지면을 차고 날아오르는 을지휘소. 비스듬히 누 였던 검이 어느새 기요후를 향해 쇄도했다. 우우우웅! 사위를 울리는 청명한 검명. 그리고 그에 앞서 대기를 가르며 날아 든 것은 금강석이라도 단숨에 갈라 버릴 날카로운 검기였다. 기요후는 침착하게 검을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신중히 검을 뻗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고 이어서 검과 검이 맞부 딪쳤다. "크윽!" 기요후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막기는 했어도 검에 실린 힘 이 장난이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거력이 검을 통해 전신을 압박했다. 그대로 대적하다간 심각한 내상을 입을 것 이라 판단한 기요후가 황급히 몸을 빼며 검을 움직이려 하였다. 하지 만 마치 그물에라도 걸린 듯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빼는 것이 불 가능하다고 판단한 기요후는 검을 버리고 튕기듯 물러섰다. 무인에게 있어 검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 적에게 검을 빼앗겼다는 것 은 단순한 패배를 넘어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수하를 통해 다시 검을 건네받은 기요후의 굳은 얼굴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기요후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 자 격한 파도와도 같은 검기가 해일을 이루며 넘실대기 시작했다. 빠 르고 날카롭고 기묘한 검기의 움직임은 가히 환상적. 을지휘소도 함부 로 반격을 하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그것도 잠시, 천천히 숨을 들이킨 을지휘소의 검이 크게 원을 그리며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아!" 을지휘소가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한 정도맹의 무인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을지휘소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던 몇 몇 이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조용히 싸움을 지켜보았다. 을 지휘소가 절대로 패할 리가 없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눈빛과 함께. '허점이... 없다.' 한참 동안이나 허점을 찾아보았건만 도무지 틈이 없었다. 을지소문은 그저 들고 있는 검을 살짝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참기 힘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질식할 것만 같은 기운에 전신이 점점 무력해지자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위지요가 이를 악물었다. '고, 공격, 공격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을지소문은 위지요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과거 위지건과 싸 웠을 때 느꼈던 음한지기의 기운임을 한눈에 파악했다. 당시 위지건의 몸에서 일어난 기운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로서도 처음 겪어보는, 인 간의 힘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극한의 음기. 하지만 위지요의 음한지 기는 부친의 것에 비해 한참이나 위력이 떨어졌다. 스윽. 을지소문이 살짝 움직였다.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던 위지요의 몸이 움직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느리면서도 눈으로 따라잡기가 힘들 정도로 빠른, 극쾌는 물론이고 극강과 극변, 극환의 묘용까지 담고 있다는 한류천경(寒流天驚)이었 다. 문제는 역시 위지건이 펼쳤을 때와 위력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 '인물은 인물이로되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되기엔 부족하군.' 위지요의 공격을 바라보는 을지소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힘들겠습니다." 심각한 눈으로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좌경이 말했다. "그렇겠지. 누가 뭐라 해도 천하제일인이야." 걱정스런 그의 음성과는 달리 대꾸하는 위지건의 음성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냥 지켜만 보실 생각입니까?" "아니면? 그때처럼 뛰어들 생각인가?" 곧바로 되돌아온 물음에 좌경은 물론이고 위지건의 곁을 지키고 있 던 태상과 우상 막문위의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그냥 지켜보세. 어찌 되겠지." 가벼운 모습으로 그들의 무안함을 해소시켜 준 위지건이 고개를 돌 렸다. 기세 좋았던 공격은 어느새 끝나고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는 위 지요의 모습이 들어왔다.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하여라.' 그라고 어찌 염려가 되지 않을까? 하나 마음속으로나마 응원을 보내 는 것이 전부였다. 핑!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경쾌한 시위 소리와 함게 무영시가 악위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영시라는 것인가?" 을지호가 자신을 공격하는 수법이 철혈마단을 공포에 떨게 했던, 눈 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그 기운만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무영시임을 알아본 악위군이 짐짓 감탄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어디 한번 볼까?' 악위군은 그저 한번 살펴보겠다는 생각으로 가슴 어귀를 노리며 다 가오는 무영시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순간, 방향을 튼 무영시가 그 의 미간을 노렸다. "헛!" 깜짝 놀란 악위군이 황급히 허리를 꺾으며 검을 틀어 무영시를 쳐냈 다. 세발의 무영시가 연이어 날아오고 있었다. '쯧쯧, 너무 우습게보았군.' 제법 심각한 상황이었다. 각기 다른 곳을 노리며 날아드는 무영시는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위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위기라 고 판단한 악위군은 검을 곧추세우고 전신을 보호하며 지존신공을 운 용했다. 묵빛의 기운이 일어 그의 몸을 감싸는 순간, 무영시가 그의 몸에 적 중했다. "와아!"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정도맹의 무인들이 환호성을 질 렀다. 하지만 정작 공격을 한 을지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비록 최선을 다한 공격이기는 해도 악위군 정도의 인물이 무영시에 당할 리 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애당초 그 정도 실력이라면 환야가 당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묵빛의 기운이 걷히며 악위군 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상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에 환호성을 질렀던 정도맹의 무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주 효과가 없었던 것 은 아니었다. 악위군으로 하여금 다소간 을지호를 얕보던 마음을 싹 사라지게 해주었으니까. "과연 대단하군. 그렇지만 뭔가 부족해.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물론." 대답과 함께 을지호는 시위를 풀었다. 그러자 잔뜩 휘어졌던 철궁이 곧게 펴졌다. 그 또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는 악위군을 향해 을지호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오." "컥!" 싸움이 시작된 지 일각 만에 첫 번째 싸움을 끝내는 비명성이 들려 왔다. 비명성의 주인은 남천의 천주 기요후였고 승자는 당연히 을지휘 소였다. "크으윽!" 삼 장이나 나가떨어진 기요후가 간신히 신형을 일으켜 세우며 고통 의 신음성을 흘렸다. 입에선 연신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몸은 중심 을 잃고 흔들거렸다. 한데 검을 움켜쥐고 있어야 할 오른쪽 팔이 보이 지 않았다. 을지휘소의 날카로운 검에 어깨에서부터 깨끗하게 잘린 것 이었다. "천주님!" 황급히 달려간 율평이 그의 몸을 부축했다. "비켜랏!"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친 기요후가 땅에 떨어진 검, 잘려 나 가 오른쪽 손에 단단히 잡혀 있는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소리쳤다. "어째서냐?" "......" "어째서 팔이냐?" "무슨 뜻이오?" "네 검은 내 목을 자를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내 말이 틀렸느냐?" "아니오." 을지휘소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동정이냐?" "그렇지는 않소." "하면 무엇이냐? 치욕을 주려 함이냐? 경고를 어겼다고?" "동정도 치욕을 주려 함도 아니오. 그저 목숨을 빼앗기 싫었을 뿐." "그것이 동정이 아니고 무엇이냐! 내 비록 실력이 없어 이런 치욕을 당하지만 적의 동정 따위를 바라지는 않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 기요후가 참담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동정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치욕을 주려 함도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미 싸움을 하기도 전부터 예견되어졌던, 그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 을 뿐이었다. "곤언." 한참 만에 눈을 뜬 기요후가 후왕을 불렀다. 오랜 격전으로 이곳저 곳에 많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후왕은 쏜살같이 달려왔다.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기요후는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즉시 철군한다. 나머지 싸움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 내 말이 끝나는 즉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후왕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지만 율평이 즉시 되물었다. "하지만 사천지약이...." "지금... 까지로 충분해. 그들과의 인연도 지금 이 순간으로 끝... 이다." 힘에 부치는지 기요후의 신형이 혼자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위태로 웠다. "우리의 싸움은... 여기까지다. 이제는 철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기요후. 후왕이 재빨리 안아 들었 으나 기요후의 의식은 점점 꺼지고 있었다. "빚.. 은 마.. 음속에 간직하고..." 을지휘소를 향해 뭐라 말을 하려던 기요후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 고 결국 혼절하고 말았다. "철.. 군이다" 후왕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남천의 모든 무인들은 듣지 않 아도 알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의 고개가 땅으로 떨구어졌다. 정도맹이 얻는 첫 번째 승리였다. 그런데 함성이 터져 나오기 전에 또 다른 승전보가 전해졌다. "졌소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검을 늘어뜨린 위지요가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좋은 승부였네." 을지소문이 그의 목덜미에 댔던 검을 떼며 담담히 말했다. "......" 위지요는 차마 대꾸를 못했다. 말이 좋아 좋은 승부지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위지요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북천의 천주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 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동원했고 목숨까지 걸며 을지소문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상대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모든 공격은 제 대로 펼쳐지지도 못한 채 막혀 버렸다. 허무한 공격과는 달리 아무렇 게나 휘두르는 듯한 공격을 막기 위해선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결국 을지휘소와 싸운 기요후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예정되어진 패배를 맛 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을지소문이 위지건의 체면과 위지황을 생각해 서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는 것. 그래서 한쪽 팔을 잃고 물러선 기요후 와는 다리 위지요는 아무런 부상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 다. [고맙습니다.] 위지건이 을지소문에게 은밀히 전음을 보냈다. 을지소문은 살짝 고 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패배를 자인한 위지요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부친과 수하들이 기다 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애썼다." 위지건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나도 감당하지 못한 인물이다. 네가 약한 것이 아 니라 그가 워낙 강한 것이야. 그나저나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위지건이 곧바로 철군을 한 남천을 상기하며 물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위지요가 힘없이 대꾸했다. "그래야겠지. 하나 조금만 미루자꾸나. 저들의 대결을 조금 더 지켜 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 그제야 고개를 든 위지요가 여전히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곳으 로 고개를 돌렸다. 싸움의 비중으로 보면 을지호와 악위군에게 무게가 실리겠지만 아직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그들과는 달리 수호신승와 철 포산의 싸움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은륜으로의 공격으론 승부를 낼 수 없다고 판단한 철포산은 언제부터인가 그가 지닌 최고의 무공, 회륜십팔수(廻輪十八手)를 펼치 고 있었다. 한데 재밌는 것은 수호신승의 반응이었다. 그 역시 달마삼 검이라는, 오직 수호신승에게만 내려오는 무공을 버리고 빈손으로 철 포산과 맞서고 있었다. "타!" 철포산이 수호신승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동 작이었으나 강력한 힘을 담은 장력은 검강 못지않게 살벌했다. 수호신 승이 내뿜는 기운을 단숨에 파괴하고 밀고 올라간 장력이 수호신승의 몸에 작렬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다른 이들이야 경악을 했지만 철포산은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느 꼈다. 하나 그 역시 수호신승이 발휘한 신법이 연대구품이라는 극상승 의 보법이라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어도 철포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곧바로 따라 붙으며 재차 손을 뻗었다. 무시무시한 장력이 수호신승을 향해 쇄도했 다. 수호신승도 마냥 피하지는 않았다. 장력과 장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꽝! 폭음과도 같은 굉음이 사위에 울려 퍼지고 선공을 취했던 철포산은 십여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그에 반해 수호신승이 밀려 나간 걸음 은 딱 절반인 다섯 걸음이었다. 누가 보아도 철포산의 열세였다. "망할!" 비록 앞선 싸움으로 인해 다소간 지치긴 했어도 빈손의 싸움에서 밀 렸다는 것이 못내 자존심이 상했는지 철포산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 나 분노를 토해내기에 앞서 수호신승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수호신승이 사용하는 무공은 소림이 자랑하는 연화불수(蓮花佛手)와 천불장(千佛掌)이었은데 연화불수가 유(柔)에 바탕을 둔 무공이라면 천 불장은 강(强)에 중심을 둔 무공이었다. 휘우우우웅! 철포산과 수호신승 사이에 수십, 수백의 수영과 장영이 흩날리기 시 작했다. 부드러움과 강맹함이 하나로 어우러진 위력은 대단했다. 연화불수의 부드러움이 회륜십팔수의 강맹함을 제압했고 천불장의 장중함은 철포산을 곤경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철포산은 필사적으로 회륜십팔수를 펼치며 어떻게든 수호신승의 압 박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휘말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번 휘말리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젠장.' 철포산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수호신승이 발출한 장력이 내부 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피가 역류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억지로 참아보려 했지만 계속되는 압박에 몸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졌다. 그리 고 마침내 하나의 장력이 그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크억!" 피분수를 토해내며 날아가는 철포산. 하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 번에 천 개의 손이 움직인다는 명성 그대로 허공에 뜬 그의 몸으로 천 불장의 장력이 연이어 쏟아졌다. 퍽퍽퍽! 네다섯 줄기의 장력이 그의 몸을 뒤흔들고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공 격을 허용한 철포산은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리고 다시는 일어설 줄을 몰랐다. "아미타불!" 연속적인 공격에 너무도 많은 힘을 쏟았는지 탁한 숨을 내뱉으며 힘 들어하던 수호신승이 철포산의 죽음을 확인하며 합장을 했다. 안타까 움으로 물든 그의 얼굴은 승리자의 것이 아니었다. 이기긴 했어도 상 대가 워낙 강했기에 죽음으로까지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아 쉬워하는 것이었다. 철포산의 죽음으로 세 번째 싸움도 끝이 났다. 이제 모든 이들의 시선은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 게 전개되고 있는 을지호와 악위군의 싸움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아! 하아!" 숨이 탁탁 막혔다.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허벅지 에 입은 상처가 쿡쿡 쑤셨다. 그러나 을지호의 철궁은 멈출 줄 몰랐다. "하앗!" 힘찬 기합성과 함께 을지호의 신형이 급격히 앞으로 쏘아지며 묵빛 기운에 휩싸여 있는 악위군에게 철궁을 휘둘렀다. 한순간에 거리를 좁 히는 을지호의 철궁에서 눈부신 광채가 피어올랐다. 검을 쥔 이들이라 면 누구라도 꿈꾼다는 검강이었다. 묵빛이 일렁거렸다. 잠시 일렁이는가 싶던 을지호가 일으킨 빛과는 대조적인 흑광이 검의 형상을 하며 검강에 맞섰다. 꽈꽈꽈꽈꽝!! 연속적인 폭발음이 들리며 잠시 물러나는가 싶던 두 사람의 몸이 다 시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또다시 충돌이 이어졌다. 바로 그때, 한줄기 묵빛 기운이 은밀히 우회를 하더니 을지호의 배 후를 노렸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챈 을지호가 이를 악물며 철궁을 휘 둘렀다. 그 틈을 탄 악위군의 공세가 한층 강해졌다. 막기엔 늦었다고 판단한 을지호가 황급히 몸을 뺐다. 한줄기 기운이 그의 옆구리를 강 타했다. "크윽!"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이 들이닥쳤다. 모르긴 몰라도 두어 개 의 늑골이 절단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을지호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 다. 악위군의 공격이 그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순간, 실로 눈부신 쾌검 이 묵빛 기운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분명 느낌이 왔다. 끝장을 낼 생각으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려던 악위군은 전혀 예상 치 못한 반격으로 가슴 어귀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자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놈!" 만약 몸을 트는 동작이 조금만 늦었다면 그대로 심장이 꿰둟릴 뻔한 위기였다.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생각을 하며 악위군 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을지호도 상처 부위를 통해 밀려드는 독기를 몰아내느라 애 를 써야만 했다. 파스스스슷! 을지호의 철궁에서 또다시 검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놈의 내력은 도대체가...' 악위군의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지존신공을 극성으로 익힌 자신 조차도 힘이 부침을 느끼거늘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공격을 해오는 을지호의 저력에 기가 막힌 것이었다. 한편으론 두려움도 생기기 시작 했다. 을지세가에서 가장 나이 어린 을지호가 이 정도라면 을지소문이 나 을지휘소는 더욱 강할 터. 끝을 알 수 없는 그들의 저력에 존경심까 지 생겼다. '반드시 이긴다!' 나이 어린 상대에게 잠시나마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 던 악위군은 몸에 남은 최후의 불꽃을 태운다는 심정으로 모든 내력을 끌어 모았다. 그의 몸을 감싸는 묵빛 기운이 그 범위를 더욱 확장시키 고 색 또한 진해졌다. 부러진 늑골로 인해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한 을지호가 자세를 가다 듬었다. 범위를 넓히다 못해 자신의 공간마저 어둠으로 물들이겠다는 듯 다 가오는 묵빛 기운. 그 기운이 접근하는 순간, 지금껏 보지 못한 공격 이 이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을지호가 철궁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철궁에서 희뿌연 기운이 솟구치더니 그의 몸을 에워쌌다. 어떤 상황, 어떤 공격에서도 시전자를 지켜주는 최강의 수비 초식, 무애지검이었다. 파스스스스. 묵빛 기운이 무애지검에 가로막히며 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일순간이나마 그 힘에 균열이 생겼다. 을지호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저곳이다.' 그는 무애지검을 뚫지 못한 묵빛 기운에서 미세한 틈을 발견했고 그 즉시 철궁을 날렸다. 무애지검에 막혔던 기운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그 는 상관하지 않았다. 을지호가 휘두른 철궁은 섬전과도 같은 빠름으로 묵빛 기운을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정확하게 악위군의 명치 윗부분을 꿰뚫었다. "크악!" 묵빛 기운 속에서 외마디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비명 소리와 함께 사위를 잠식하던 묵빛이 사라졌다. "마, 말도 안 되는...." 비틀거리는 악위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가슴에 박힌 철궁을 뽑을 생각도 못하고 가슴에 박힌 철궁과 을지호 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놀람과 경악을 넘어 불신 그 자체였 다. "내, 내가... 네놈 따위에게......" 악위군이 철궁을 뽑아 집어 던졌다.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요, 용서.. 못한다. 네.. 놈! 가, 감히 나를.. 죽인다! 크아악!" 짐승의 울부짖음과 비슷한 괴서이 악위군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사 라졌던 묵빛 기운이 또다시 형성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을지호를 놀 라게 한 것은 그의 전신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기(魔氣)였다.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간다고 여긴 을지호는 천근만근과도 같은 몸 을 이끌고 땅에 떨어진 철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아직 정신을 차리 지 못하고 있는 악위군을 향해 최후의 공격을 펼쳤다. 악위군이 팔을 들어 철궁을 막았다. 마기로 인해 이성은 잃었을지 몰라도 본능적인 감각은 오히려 더 발달한 것 같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보여주듯 철궁을 막았던 왼팔이 허리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러나 곧바로 반격을 가하는 악위군은 고 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퍽퍽! 연속적인 공격이 악위군의 몸에 작렬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요이 없 었다. 강도를 더해가는 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예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인지 을지호를 노리며 달려드는 악위군의 공세는 더욱 거칠고 강력했다. 을지호는 점점 수세에 몰렸다. 땅! 금속성과 함께 철궁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악위군의 검에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한 을지호가 철궁을 놓친 것이다. "저, 저것!" 을지호가 악위군의 가슴을 꿰뚫을 때만 해도 끝난 싸움이라 자축하 던 이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기요후와의 싸움을 끝낸 후 초조하게 지켜보던 을지휘소가 기겁을 하며 몸을 움직이려 하였다. 바로 그때, 을지소문이 그의 팔을 잡았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버님!" "합공을 할 셈이냐?" "호마저 잃을 수는 없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녀석에게 감추어둔 한 수가 있다." 다급한 을지휘소와는 달리 심각한 표정이기는 해도 을지소문은 아 직도 여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을지휘소는 불안한 마음 을 억지로 부여잡고 을지호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언제라도 달려갈 만 반의 준비를 갖춘 채. 철궁을 놓친 을지호는 그 즉시 몸을 날려 악위군의 공세에서 벗어났 다. 악위군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작심하고 출행랑을 펼치는 을지호의 신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추격이 느슨해졌다고 여겨질 즈음 걸음을 멈춘 을지호가 마기에 사로잡힌 악위군을 차분히 노려보 았다. 그리곤 지그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을지호의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올려 내뻗는 왼손은 마치 궁을 쥔 듯하고 부드럽게 뒤로 당 기는 오른손은 시위를 당기는 듯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을지호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의아해하 던 사람들은 또다시 접근하는 악위군의 모습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 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비벼야 했다. 을지호의 전신에서 청명한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몸을 휘감고 돌던 기운이 서서히 이동을 하더니 왼손에 모였다. 그 리곤 하나의 물체를 형상화했다. 기운은 오른손에도 모여들었다. "세, 세상에!" 다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괴사도 이런 괴사가 없었다. 웬만 한 일에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비사걸마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녀석이 언제...!" 을지휘소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을지소문을 바라보았다. 한데 놀라 기는 을지소문도 마찬가지였다. "근래 들어 뭔가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런 것일 줄은..." "내 일찍이 무형검(無形劍)이란 소리는 들어봤어도 설마 하니 무형 궁(無形弓)이라니!!" 반포를 격퇴시키느라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곽검명이 격동을 주체 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을지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하나의 궁과 하나의 화살을 완 벽하게 만들어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이루지 못했던 경 지였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활과 화살. 너무나도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을 가 지게 만드는 활과 화살은 마성에 사로잡힌 악위군을 겨누고 있었다. 을지호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코에서도 선혈이 비쳤다. 그만큼 무 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네게 주는 선물이다, 룡아!' 지그시 감았던 을지호의 눈이 번쩍 떠지고 을지호의 모든 힘이 응축 된 화살이 손을 떠났다. 칠 장여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 화살은 되살아난 묵빛 기운을 단숨에 뚫고 들어갔다. 퍽! 모두의 귓가에 둔탁한 쇨가 들려왔다. 그러나 악위군을 감싸고 있는 묵빛 기운 때문에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모두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찰나, 묵빛이 걷히며 악위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악위군의 신형. 그의 심장은 어른의 주먹만큼 큰 구멍이 뻥 뚫렸고 그 사이로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마기가 걷혔는지 뻥 뚫린 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악위군 의 안색은 평온했다. "주, 주군!" 신도가 달려와 그를 부둥켜안았다. "퇴각.. 시켜..." "주군!" 신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일.. 장.. 춘.. 몽(一場春夢)이라는 것인가..." 악위군의 고개가 꺾였다. 뜨거운 야망을 가졌던 절대자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초라한 것이었다. 악위군의 죽음으로 제이차사천혈사, 무림을 휩쓸던 피바람은 사실 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복수라는 것은 맹렬히 원하다가도 끝이 되어서는 허무하기 짝이 없 는 것. 승리를 축하하는 환호성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을지호는 고개를 들어 다비식이 열렸던 곳의 하늘을 쳐다봤다. 을지룡이 환하게 웃는 듯했다.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볼을 타고 흐르던 눈 물이 턱밑으로 떨어질 때쯤 그의 무릎이 천천히 꺾였다. 누군가의 품 에 안긴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 다. 제80장 종(終) 복우산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윈래의 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 졌다. 제이차사천혈사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산동악가는 패배를 인정함과 더불어 백 년간의 봉문을 선언하며 은거에 들어갔고 나머지 삼천도 그 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화천명을 새로운 궁주로 추대한 패천궁의 무 인들도 서둘러 길을 떠났고 해남파 역시 쓰러진 동료들을 가슴에 묻고 해남도로 돌아갔다. 피바람이 몰고 온 생채기를 치유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만 무 림은 그렇게 차츰 안정을 찾고 있었다. 제이차사천혈사가 끝나고 한 달 여가 흐른 어느 날 가주의 집무실에 서 남궁혜는 남궁민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집안의 어른이랍시고 네게 아무런 도움은 주지 못한 채 오히려 큰 짐만 안기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할머님께서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하답니다." "그리 생각해 준다니 고맙구나. 그래도 이곳에 홀로 너를 남긴다고 생각하니 이 할미의 마음이 아프구나." "당연히 제가 지켜야 하는 곳인걸요. 게다가 혼자가 아닙니다. 비록 얼마 남지 않았지만 세가를 든든히 받쳐 주는 식솔들이 있어요." "그래, 너라면 충분히 잘해낼 것이야. 암, 그렇고말고." 남궁민의 당찬 대답에 남궁혜는 안타까움과 뿌듯함이 교차하는 심 정으로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듯 황보세가로 모친을 만나러 간 남궁성의 안부를 물었다. "참, 성아에게서 연락은 왔느냐?" "예. 잘 지내고 있다더군요." "그래, 언제 돌아온다더냐?" "금방 온다는 것을 그리하지 말라고 했어요. 한 두어 달은 더 쉬게 할 생각입니다." "잘했다. 그럼 가는 길에 잠시 들러보면 되겠구나. 한데..." 잠시 뜸을 들인 남궁혜가 넌지시 물었다.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 남궁혜의 물음에 남궁민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 그래. 언젠가는 네 마음도 바뀔 때가 있겠지. 자, 일어나자꾸 나.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를 해야지." "예." 남궁혜와 남궁민은 두 손을 꼭 잡고 식솔들이 기다리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선 을지호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한창 작별 인사를 나누 고 있었다. "정말 가시는 겁니까?" 생긴 것답지 않게 유난히 정이 많은 뇌전이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안 가면? 고향을 놔두고 언제까지 여기서 살라고? 그리고 이제는 네 녀석들 얼굴 보는 것도 지겹다." 을지호도 서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 헤 어짐이 있는 법. 그들에게도 각자의 길이 있었다. "진정입니까?" "정색하기는. 농담이다. 그나저나 너희들도 집에 가봐야 되는 것 아 냐?" "일간 다녀올 생각입니다." 해웅이 대답했다. "흐흐, 개천에서 용이 난 격이지요. 해적질을 하던 우리가 남궁세가 의 명패를 달고 떡하니 돌아가면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 아니겠 습니까?" 언제 침울했냐는 듯 뇌전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피식 웃음을 터 뜨린 을지호가 해웅을 따로 불렀다. "어쩔 생각이냐?" "예?" "남궁세가에 뼈를 묻을 생각이냐? 아니면 가업(家業)을...." 을지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가업이라는 것이 해적질이 아니던 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이제는 해적질을 하라 해도 못할 것 같습 니다. 뭐, 하고 싶지도 않지만 할 수도 없으니까요." "하긴, 남궁세가의 금강나한 해웅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 름이라서 말이지." 을지호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금강은 무슨.. 놀리지 마십시오." "놀리기는... 사실 아니냐? 어쨌든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다만, 언 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늘 당당해라. 부끄러워할 짓은 하지도 말 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당하게 말하는 해웅의 모습을 보며 지나날 그와 처음 만나던 날을 떠올린 을지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을지호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아닙니다. 인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진정.. 고맙습니다, 형.. 님." 늘 주군이니 공자니, 호법이니 하던 칭호로 부르던 해웅의 입에서 처음으로 형님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자기 입으로 하고도 쑥스러 운지 해웅의 얼굴이 뻘게졌다. "에라 이놈아! 그 말이 뭐가 어렵다고 사내놈이 계집처럼..." 해웅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을지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해웅의 입에도 덩달아 웃음이 걸렸다. 바로 그때, 남궁혜와 함께 걸어 오던 남궁민이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을지호가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할머님과 얘기는 다 끝난 거냐?" "예." 을지호와 남궁민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 했다. 딱히 말이 필요없었다. 남궁민의 마음을 을지호가 알고 있었고 그녀 역시 을지호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고마웠어요." 남궁민이 울먹이는 음성으로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을지호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는 남궁민의 눈에 서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알고는 살포시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나저나 이놈은 어디 있나?" 살며시 그녀를 떼어놓은 을지호가 다소간 호들갑을 떨려 두리번거렸 다. 순간, 남궁민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하하하, 저를 찾으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형님." 호탕한 웃음소리와 연무장 한 켠에서 뛰어오는 사람은 고향으로 돌 아간 지 얼마되지 않아서 부리나케 달려온 위지황이었다. "웃기는.. 뭐 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였어?" "하하, 형님과 어르신들께서 먼 길 떠나시는데 그냥 보내 드릴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술 몇 병 준비했습니다." "술?" 술이라는 말에 반색을 하는 을지호였다. "예. 인근에서 제일 좋다는 술만 찾아서 가지고 온 것이니 드실 만 할 겁니다." 솔솔 풍기는 주향이 꽤나 감미로웠다. "제법 괜찮은 생각을 했구나. 그래, 그런 식으로 이 녀석도 부탁한 다." 을지호가 남궁민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사랑 때문에 편한 집 놔두 고 달려온 놈 아닙니까? 하하하.. 큭!" 웃음소리의 마지막은 남궁민의 팔꿈치로 인하여 비명 소리로 변했 다. "허, 자랑이다!" 을지호는 위지황의 넉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을지소문과 함께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비사걸 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제법 재밌는 녀석이다. 게다가 믿음직해 보이고. 남궁 가주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게야." "그러게요. 그만하면 꽤나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고... 무엇보다 저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마음에 듭니다. 그나저나 정말 따라오실 생 각입니까?' "왜? 싫으냐?" 을지소문의 물음에 비사걸이 실눈을 뜨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저야 좋지요." 을지소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싫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미 결정한 사항이야. 환야가 걱정도 되고 또 저 아이 혼자 보낸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 비사걸의 시선이 환야를 위해 준비된 마차로 향했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정상적인 몸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환야는 이미 마차 안에 들어가 누웠고 임여령과 사마유선이 그녀의 양 옆에 앉아 정성스레 보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저 아이 때문에 잃어버렸던 웃음도 찾는 것 같 고...." "따지고 보면 저 아이도 불쌍한 아이다. 가족이라곤 먼저 간 늙은이 밖에 없었으니까. 저 아이를 양녀(養女)로 삼기로 한 것은 참으로 괜 찮은 생각이었어." 비사걸이 꼼꼼히 마차를 살피는 을지휘소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 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손자 하나를 잃었지만 그래도 손녀 하나 를 얻게 되었으니 한결 위로가 됩니다." 을지소문이 환히 웃으며 대꾸했다. "손자며느리는 왜 빼느냐?" "제가 그랬습니까? 저 아이야 한참 전부터 우리 식구로 생각하고 있 어서...." 임여령과 재잘거리며 떠드는 사마유선에게 향하는 을지소문의 눈길 은 참으로 부드러웠다. 그 모양새에 심통이 났는지 비사걸이 툴툴거렸 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을 테냐? 해가 벌써 중천 이다." "그렇잖아도 움직일 생각이었습니다. 호야!" "예. 할아버님." "그만 가도록 하자." "예." 비사걸과 을지소문, 을지휘소는 어느새 검은색 갈기를 휘날리는 준 마(駿馬)에 오른 상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오른 을지호가 마차 안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그리곤 배웅을 하기 위해 나선 남궁세가 식솔들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난 이만 간다. 언제고 또 볼 날이 있겠지. 그때까지 잘들 있어라." 을지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힘찬 함성과 함께 고삐를 낚아채며 말 에게 채찍질을 했다. "끼럇!" 히히히힝! 여섯 마리의 말이 일제히 움직이고 육중한 마차가 부드럽게 전진했 다. 마차에 오르지 않은 세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양쪽으로 죽 늘어선 천양대와 천음대의 대원들이 허리를 꺾었다. 을 지호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율천 이하 천뢰대 대원들도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마지막 예를 차렸다. 두두두두.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한 마차는 단숨에 남궁세가를 빠져나갔다. "젠장, 뭐가 그리 급하다고..." 뇌전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가는 을지호를 보며 돌부리를 걷어찼 다.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해웅과 초번의 심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남궁민은 점점 멀어지는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괜찮아요?" 조용히 다가간 위지황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속삭였다. 남궁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눈물을 감추었다. 을지세가의 식솔들과 을지호는 슬픔과 안타까움, 아쉬움이 교차하 는, 그러나 한없이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고향으로 떠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오후의 일이었다. <끝>